- 흑사병은 1347년 흑해의 무역항 카파에서 창궐하기 시작. 당시 카파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던 이탈리아 상업도시 제노바의 무역기지였으며, 제노바는 동양에서 수입하는 향신료와 직물 등을 유럽 전역에 판매하여 큰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당시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더불어 이탈리아 전성시대를 이끄는 양대 축이었다. 1347년 킵차크 한국(몽골제국 4한국의 하나. 1243년 칭기즈칸의 아들 주치와 손자 바투가 서시베리아와 키르기스 초원과 남러시아에 세운 나라. 14세기 전반 최전성기를 누리다가. 1502년 모스크바 대공국에 멸망)의 자니베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제노바인이 방어하던 카파를 포위하고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몽골군 진영에서 역병이 발생.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자니베크 칸은 시신을 투석기에 얹어 성내로 던져 놓고는 철군. 투석기로 날아온 시신을 통해 감염된 제노바인들이 감염사실을 모른 채 배를 타고 시칠리아 및 지중해 연안으로 상륙하면서 흑사병이 유럽에 대유행. 불과 5녀만에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병마가 맹위를 떨쳐다. 흑사병의 정체는 19세기말에서야 밝혀짐.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박테리아가 검은 쥐와 같은 설치류에 서식하는 벼룩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됨으로써 발생. 벼룩이 문 상처를 통해 림프절에 병변을 만드는 선페스트와 달리 사람의 호흡을 통해 감염되는 변종인 폐 페스트도 있다는 주장도 있음. 흑사병의 전파속도가 무척 빨랐다는 점. 그리고 쥐가 거의 서식하지 않는 아이슬란드와 같은 지역에서도 발병했다는 점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 오늘날 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원래 흑사병이 중아아시아 토착 질병이었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중세에 유라시아 동서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사람, 가축,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짐에 따라 설치류의 서식범위도 통상로를 따라 확대됨. 이것이 흑사병이 범유행성 질병으로 재탄생한 배경이었다. 달리 말하면, 흑사병은 세계화가 낳은 예기치 못한 부산물이었다. 당시 세계화가 진전된 데는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기여가 컸다. 한반도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제국은 개방적 대외정책을 실시했고, 역참제도 등 무역진흥에 유리한 인프라를 구축. 베네치아 출신 마르코폴로와 모로코 출신 무슬림 여행자 이븐 바투타가 공통적으로 증언했듯이, 몽골제국은 사람과 상품이 이동하기에 최적의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몽골제국이 정한 제도와 질서와 관습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팍스 몽골리카 시대의 진면목은 바로 이런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에 있었다. 동서 교역의 확대가 토착질병을 세계적 질병으로 변모시켰다면, 흑사병이 유럽에서만 창궐했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최근의 연구는 흑사병이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1330~50년대 사이에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대규모로 창궐했으며, 인도와 서아시아의 무역항들과 이슬람 성지 메카에서도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목숨을 잃음. 흑사병 이후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경험. 서유럽에서는 봉건영주와 교회의 지배력에 큰 균열이 발생. 농노들이 저항끝에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 대영주들의 지배력이 컸던 동유럽에서는 이와 반대로 강력한 억압정책의 결과로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됨. 서유럽이 선진지역으로, 그리고 동유럽이 후진지역으로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한편 동아시에서는 세계화의 중심축이던 원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유라시아 동서교역도 위축됨. 세계화의 부산물이 흑사병이 결국 세계화를 축소시키는 결과는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
- 이탈리아 도시들이 동방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상황을 수세기동안 지켜본 유럽 군주들은 아시아로 통하는 새 교역로를 개척하려는 야망을 마음속으로 키워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이 야망을 실천으로 옮기는 계기로 작용.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군주들에게 후원을 약속받은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새 항로의 개척이라는 벤처사업에 몸을 던짐. 이들의 성공소식은 곧 다른 나라의 군주와 탐험가들을 자극했고, 머지 않아 유럽의 상인들이 장거리 무역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우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영향은 메흐메트 2세가 생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흘렀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고 결국 이것이 세계의 경제적, 기술적, 군사적 무게추를 아시아에서 유럽쪽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로 이어짐. 역사는 실로 승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승자로 바뀌는 반전의 연속이다.
- 남미에서 생산된 은은 어디로 갔을까? 스페인인들은 채굴한 은의 대부분을 자국으로 보냈다. 이 은은 스페인이 왕위계승전쟁을 치르고, 종교개혁의 와중에 신교도를 압박하고, 외국에서 많은 물품을 수입하는 데 사용됨. 이 과정에서 은이 서유럽 전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는 다시 서유럽이 발트해 연안에서 곡물과 목재를 수입하고, 레반트에서 동방의 생산품을 구매하고, 무엇보다도 남아프리카를 도는 인도 항로를 통해 인도와 중국의 인기상품을 수입하는 데 사용됨. 한편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의 일부는 태평양을 횡단하는 세계 최장항로를 통해 마닐라에 있는 상관에 보내져 아시아 물품을 구입하는 데 쓰임. 이렇듯 세계 무역망을 통해 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은 지구를 돌고 돌아 중국과 인도로 모아짐. 당시 아미레카를 제외하고 은을 가장 많이 생산한 국가는 일본이었는데, 일본의 은도 수출항 나가사키, 그리고 쓰시마와 류큐를 거쳐 중국으로 향했다. 은이 풍부해진 중국은 조세를 은화로 납부하도록 제도를 개편. 명대 후기와 청대에 실시된 일조편법과 지정은제가 바로 이런 제도였다. 새 조세제도는 은에 대한 수요를 늘려 세계적으로 은을 중국으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마치 전 세계를 연결한 순환펌프가 작동하듯이 은이 지구를 돌고 돌아 중국으로 빨려들었다. 대항해 시대에 지구전체는 은을 매개로 하여 단일경제권으로 통합되었다. 통합된 국제 무역망 속에서 조선의 정세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되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오자 명은 군대를 파병하는데, 이에 따라 막대한 양의 은이 필요해짐. 임진왜란과 전후에 명은 부족한 은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에 많은 양의 은을 요구. 세계적으로는 은이 순환펌프에 압력을 높였을 것이고 그에 따라 아메리카에서는 은채굴의 필요성이 더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광산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수입을 더 늘렸을 것이다. 은을 매개로 지구 전체가 연결된 상황에서, 임진란이 세계적 노예무역의 증가로 이어졌으리라는 추정은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이렇게 대항해 시댕 은은 식민지 체제와 국제 무역망을 통해 세계를 일주했다. 당시에 은의 종착지가 중국과 인도였다는 사실은 아시아의 경제가 높은 국제경쟁력을 지녔음을 시사. 하지만 이런 세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 자체가 대항해 시대를 연 유럽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은 향후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점차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가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 종교개혁이후 신교를 받아들인 지역은 구교지역에 비해 빠른 경제성장을 보였다. 그 이유를 막스베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신교의 교리가 개인의 영리추구에 더 잘 부합했기 때무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종교적 가르침의 차이보다 신교지역에서 사람들의 문해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종이와 새 인쇄술이 결합하여 종교적, 비종교적 인쇄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자, 글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열망이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힘쓰게 되고, 소수의 점유물이었던 지식이 널리 대중화되었다는 것. 백지에서 시작된 이 지식혁명이 경제적 진보를 낳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매우 높다.
- 튤립공황은 지난 300여년 동안 인간의 우매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인용되어 왔따. 1720년에 발생한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 및 영국의 남해회사 버블과 더불어 금융공황의 초기사례로 지목됨.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국제적 금융위기의 발생빈도가 높아지는 환경에서 이 사례들은 학계와 언론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에 대한 학문적 재평가 움직임도 활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투자행위를 전적으로 비이성적 충동으로 매도할 수 없다고 함. 거품의 존재를 알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적절한 시점에 올라타고 다시 적절한 시점에 뛰어내려 이익을 얻은 합리적 투자자도 많았음. 주요 투자자가 소수의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거품붕괴의 영향도 자산의 재분배에 머물렀을 뿐, 국가경제 차원의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음. 그렇다면 이 거품들은 어떻게 최악의 거품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을까? 19세기 철도와 주식시장의 과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일부 저술가들이 이 거품을 과장되게 서술하여 널리 전파했던 탓이 큼. 영국 찰스 매케이가 1841년 펴년 대중의 미망과 광기라는 책은 이런 과장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예를 들어 이 책에는 튤립의 알뿌리를 양파로 착각하여 먹었다가 투옥됬다거나 굴뚝청소부와 같은 저소득층까지도 투기열풍에 빠졌다는 일화가 많이 실려 있는데, 이들은 1630년대 당시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내용임. 하지만 학술적 성과는 재미가 없고 대중에게 알려지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튤립거품은 과대포장되어 재생산되고 또 재생산된다
- 18세기까지 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인들이 소비하는 물건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였음. 서양의 아시아진출이 시작된 이후에도 무굴제국 시대까지 인도는 세계적으로 유력한 제국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샤자한은 명품 건축물 타지마할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이를 건축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를 프랑스, 이탈리아, 페르시아에서 데려왔고 장식용 재료를 미얀마, 티벳, 중국, 이집트 등지에서 들여왔다. 인도는 세계적 제국으로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인도의 최대 수출품은 면직물이었다. 유럽 귀족들이 즐겨 찾은 최고급 직물부터 카리브해에서 노역하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거친 작업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면직물들이 인도인의 손에 생산되고 수출되어 국고를 살찌웠다. 노인에서 어린이에 이르는 수많은 인력들이 전통적 방식으로 생산한 면직물이 세계시장을 사실상 석권하고 있었음. 영국을 포함한 유럽 중상주의 국가들은 국내 면공업을 발전시켜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대체하려 노력했지만, 경쟁력에 큰 차이가 났음. 그러나 무굴제국이 영국의 침탈을 받아 몰락하면서, 그리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인도의 면공업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됨. 영국은 17세기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경쟁국 프랑스를 물리치고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인도 식민지화의 교두보를 확보. 영국은 본국의 면공업 육성을 위해 인도의 면공업을 압박하여 쇠락의 길로 내몰았다. 18세기말부터 영국 북부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공업이 급성장하면서 영국은 결국 세계시장에서 인도를 몰아냄. 19세기에 영국은 인도 각지의 토후세력들을 분열시켰고, 1857년 세포이의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인도를 직접 통치. 인도는 더이상 면직물 수출대국이 아니라,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영국을 위해 원료인 면화를 공급하는 식민지로 전락
- 영국은 19세기 인도를 다시한번 이용했다. 이번에는 아편을 통해서였다.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아편수출을 늘리기로 기획했는데, 중국에 팔 아편을 생산하는데 인도를 최적의 생산지로 여김. 수확된 아편은 무게 900그램의 둥근 덩어리로 만들어졌는데, 파트나시의 아편창고에만 30만개의 아편덩이가 저장되었다. 얼마나 많은 아편이 생산되어 중국으로 판매되었을지 실감이 난다. 실제로 19세기 초반의 30년 동안 중국의 아편수입량은 10배나 증가. 이후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두차례의 아편전쟁을 통한 영국의 중국침탈과 강압적 개방으로 이어졌다. 서구열강에 의한 강제적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 사례였다. 영국의 입장에서 인도는 얼마나 큰 경제적 가치가 있던 것일까? 19세기말~20세기초, 영국은 유럽대륙과 북미에서 심각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음. 1901년 대미적자는 5000만 파운드, 대유럽 적자는 4500파운드나 되었다. 이를 해결해 준것이 아시아에서 유입된 자금이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1300만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무려 6000만 파운드의 흑자를 보임. 그런데 인도가 영국산 제품을 계속 소비할 수 있었던 데는 중국에서 얻은 아편판매 대금이 중요하게 작용. 영국은 아편을 통해 중국과 인도에서 동시에 막대한 이익을 취했던 것이다. 보통 서구의 역사책에서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무역과 자본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호시절로 묘사됨. 그리고 여기에 영국의 역할이 컸다고 설명함. 최대 경제국이었던 영국이 일부 국가들에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다른 국가들에서는 유사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세계 경제가 글로벌 불균형의 문제를 피해 원활하게 작용했다는 것. 그러나 이 균형은 영국이 정당화하기 힘든 인도의 식민통치와 아편수출,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두가지 부도덕한 정책이 없었더라면 성립할 수 없었다. 인도의 사례는 강제적인 세계화는 손해를 가져오기 십상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국 사상가 코마스 칼라일은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식민지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문을 보면 그가 의도했던 말은 미래에 식민지로서 인도는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만 셰익스피어를 통해 풍부해진 영어는 계속 사용되리라는 것. 애초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위의 표현은 셰익스피어의 가치를 강조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비교대상으로 인도를 삼은 것은 식민지 인도의 가치가 영국에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0) | 2017.02.11 |
---|---|
에너지 노예, 그 반란의 시작 (0) | 2016.12.21 |
세계사속 경제사 (0) | 2016.04.17 |
사피엔스 (0) | 2016.04.03 |
음식의 역사 (0) | 2016.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