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역사 2016. 4. 3. 22:21

- 수렵채집인의 확산화 함께 벌어졌던 제1의 물결 다음에는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벌여졌던 멸종의 제2의 물결이 왔고, 이 사실은 오늘날 산업활동이 일으키고 있는 멸종의 제3의 물결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음.
-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음. 중미 사람들은 중동에서 밀과 완두콩을 재배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옥수수와 콩을 작물화했다. 남미 사람들은 멕시코나 지중해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감자를 재배하고 라마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중국의 초기 혁명가들은 쌀과 수수를 작물화하고 돼지를 가축화했다. 북미의 첫 정원사는 먹을 수 있는 호리병막을 찾아 땅속을 샅샅이 뒤지는 데 진력이 나서 호박을 재배하기로 결심했다. 뉴기니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바나나를 길렀고, 그동안 서부 아프리카 최초 농부들은 아프리카 수수, 아프리카 쌀, 수수와 밀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작물화. 이들 지역에서 농업은 널리 퍼져나감. 기원후 1세기 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우리가 밀이나 옥수수 같은 식물의 이야기를 조사할 때는 순수한 진화적 관점이 타당할 지 모른다. 하지만 소나 양, 사피엔스처럼 각자 복잡한 기분과 감정을 지닌 동물의 경우, 진화적 성공이란 것이 개체의 경험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역사상의 전쟁과 혁명 대부분은 식량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의 선봉에 선 것은 굶주린 농부가 아니라 부유한 법률가들이었다. 고대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1세기에 국려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는 귀중품을 가득 실은 지중해 전역의 선단들이 그 전 선조들은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로마인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던 시기였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질서가 붕괴해서 일련의 치명적 내란이 일어난 것 또한 부가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이 시점이었다. 91년 유고는 국민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국가는 해체되고 끔찍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런 재난들의 근원에 깔린 문제점은 인류가 지난 수백만년 동안 불과 수십명으로 구성된 작은 무리에서 진화해 왔다는 사실. 농업혁명이 일어난 뒤 도시와 왕국과 제국이 출현하는 데는 불과 몇천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규모로 협력하는 본능이 진화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가짐. 군대, 경찰, 감옥은 사람들의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음. 어떤 바빌론 사람이 이웃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에게 '눈에는 눈' 법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모종의 폭력이 필요.
-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함.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함. 사람이 평등하지 않은 것은 함무라비가 그렇다고 해서가 아니라 엔릴과 마르두크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 자유시장이 최선의 경제체제인 것은 애덤 스미스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변의 자연법칙이기 때문.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세상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상상의 질서원리들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함.
- 문자체계가 인간의 역사에 가한 가장 중요한 충격은 정확히 이것, 즉 인간이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과 세계를 보는 방식이 점차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자유연상과 전체론적 사고는 칸막이와 관료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 농업혁명 이후 수천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됨.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 냈기 때문. 우리는 이 두가지 발명품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것에 의해 생겨난 틈을 메웠따.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많은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었다. 그물을 지탱하는 상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그 망은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된 가상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상류층이 특권과 권력을 향유하는 동안, 하류층은 차별과 압제로 고통을 받았다. 가령 함무라비 법전은 귀족, 평민, 노예 사이의 서열을 확립. 귀족은 좋은 것을 모두 가졌고, 평민은 그러고 남은 것을 가졌으며, 노예들은 불평을 하면 채찍질을 당했다.
- 힌두교 카스트 제도가 형성된 것은 약 3천년전 인도아리아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을 침략해 현지인들을 복속시켰을 때. 침략자들은 계층화된 사회를 건설하여, 자신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현지인들은 하인과 노예로 삼음. 수가 적었던 침략자들은 특권적 지위와 고유의 정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사람들을 카스트로 구분했고, 각 카스트는 특정한 직업을 갖거나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중 하나가 이것이다. 만일 흑인과 백인의 구분, 브라만과 수드라의 구분이 생물학적 실체에 근거를 두었다면 어떨까? 만일 브라만이 정말로 수드라보다 더 나은 뇌를 갖고 있다면? 그렇다면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생물학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각기 다른 집단이 지니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무시할만한 수준이므로 생물학으로도 인도사회의 곡저이나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음. 우리는 상상의 산물을 잔인하고 매우 현실적 구조로 바꿔놓은 사건들, 조건들, 권력관계들을 연구해야만 그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음.
- 인지부조화는 흔히 인간정신의 실패로 여겨짐.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의 핵심자산. 만일 사람들에게 모순되는 신념과 가치를 춤을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문화 자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불가능했을 것임. 예컨대 기독교인인 당신이 근처 모스크에 참배하러 가는 무슬림을 정말로 이해하고 싶다면, 모든 무슬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순수한 가치들이 무엇인지 찾아볼 필요가 없음. 그보다는 무슬림 문화에서 가장 극심한 딜레마의 현장을 찾아봐야 함. 규칙이 서로 충돌하고 규범이 서로 난투를 벌이는 지점 말이다. 무슬림들이 두가지 지상명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점이야말로 당신이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 우리는 여전히 고유문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만일 그 고유성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발달한 무엇,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대의 지역전통으로 구성된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 지구상에는 고유문화가 하나도 없다. 지난 몇세기 동안 모든 문화는 홍수처럼 범람한 지구적 영향들에 의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이런 지구화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이른바 민속요리다. 우리는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토마토 소스를 넣은 스파게티를 예상하고, 폴란드와 아일랜드 식당에서는 많은 감자를, 아르헨티나 식당에서는 수십종의 스테이크 중 하나를 고를 것을, 인도 식당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에 매운 고추가 들어갈 것을, 모든 스위스 카페의 하이라이트는 크림을 잔뜩 넣은 뜨겁고 진한 코코아일 것을 예상한다. 하지만 이중 어떤 음식도 이들 국가가 원산지는 아니다. 토마토, 고추, 코코아의 원산지는 멕시코다. 이것들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한 다음에야 유럽과 아시아에 들어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단테 알리기에는 토마토 소스가 듬뿍 묻은 스파게티를 포크로 감아본 일이 없다. 윌리엄 텔은 초콜릿을 맛본 일이 없으며 부처는 음식에 고추를 넣어 먹은 일이 없다. 감자가 폴란드와 아일랜드에 들어온지는 4백년도 채 되지 않았다. 1492년 아르헨티나에서 얻을 수 있는 스테이크는 라마고기로 만든 것뿐이었다.
-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 있는 후보 세가지가 출현.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테와 인류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음.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번째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짐.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 모든 사회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므로 모두 취약하게 마련.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러함.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종교는 우리의 법은 인간의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적 최고 권위자가 정해놓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처렴 최소한 몇몇 근본적인 법만큼은 도전받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신교의 통찰은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기 쉬움. 다신교도들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최고권력, 완벽하게 무심한 권력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 편견을 지닌 수많은 권력을 믿으므로 하나의 신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신들의 존재와 효험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신교는 본질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며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다. 다신교도는 심지어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을 때도 피정복민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집트인, 로마인, 아즈텍인은 오시리스, 유피테르, 우이칠로포치틀리(아즈텍 최고 신)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려 선교사를 외국에 파견하지 않았고, 이를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지도 않았다. 제국내의 모든 피정복 민족들은 제국의 신과 의례를 존중할 것으로 기대되었따. 이들 신과 의례가 제국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때문. 하지만 자산의 지역 신과 의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지는 않았다. 아즈텍 제국에서 피정복민들은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전을 지어야 했지만, 기존의 지역 신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세웠다. 많은 경우 제국의 엘리트 자체가 피정복민의 종교와 의례를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아시아의 키벨레 여신을, 이집트인들은 이시스를 그들의 만신전에 기꺼이 추가했다. (키벨레는 소아시아 고대국가 프리기아의 대지의 여신, 이시스는 풍요의 여신)
- 다신교는  여기저기서 다양한 일신교를 잉태했으나, 이런 종교들은 주변부에 남아 있었다. 스스로의 보편적 메시지를 소화하지 못한 탓이 적지 않았다. 가령 유대교는 우주의 최고 권력은 사심과 편견을 지니는데, 그분의 주된 관심은 조그만 유대국가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모를 땅에 있다고 주장. 유대교는 다른 나라에게는 이 믿음을 권하지 않았고, 그 존속기간 대부분 동안 선교를 하지도 않았다. 이 단계를 우리는 지역적 일신론 단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약적 돌파구는 기독교와 함께 왔다. 기독교 신앙은 나자렛 예수가 그들이 오래 기다리던 구세주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확신시키려 했던 비전의 유대교 분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분파의 첫 리더 중 하나였던 타르수스의 바울은 만일 우주의 최고 권력이 관심과 편견을 지니고 있으며 수고롭게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화신하셔서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면 이것은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이야기이므로, 예수에 대한 좋은 말씀(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 필요가 있다고 추론했다. 바울의 주장은 비옥한 땅에 씨를 뿌렸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류를 겨냥해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조직하기 시작. 이 비의적 유대교 분파가 강력한 로마제국을 접수한 것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사태전개로 꼽힘. 기독교의 성공은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또 다른 일신교의 모델이 되었다. 이슬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구석진 곳의 작은 분파로 시작했지만, 기독교보다 더 이상하고도 놀라운 업적을 이룩. 아라비아 사막을 벗어나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제국을 정복하기에 이른 거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신교 사상은 세계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됨.
- 일신론자가 어덯게 그런 이신론적 신념을 품을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거나 둘다 전능하지 않은 서로 대립되는 힘을 믿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순을 믿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수백만명의 경건한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전능한 신과 독립적 악마를 둘다 동시에 믿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은 심지어 선한 신과 악이 싸울 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상상은 여러가지를 고취시켰는데, 이 중에는 지하드와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요구도 포함됨.
- 일신론은 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일신론과 이신론, 다신론, 애니미즘 유산이 하나의 신성한 우산밑에 뒤섞여 있는 만화경이다.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악마, 다신론적인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음.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계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 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 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종교일지도 모른다.
- 우리는 세상의 신념들을 신 중심의 종교와 자연법칙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신 없는 이데올로기의 두종류로 나눌 수 있음. 하지만 이때 일관성이 있으려면, 적어도 불교, 도교, 스토아철학의 일부 분파는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목록에 올려야 함. 그리고 거꾸로 많은 근대 이데올로기 속에 신에 대한 믿음이 계속 존재하며 그중 일부, 대표적으로 자유주의는 그런 믿음이 없다면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함.
- '어떻게'를 서술하는 것과 '왜'를 설명하는 것은 뭐가 다를까? '왜'를 설명한다는 것은 왜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하필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찾는다는 것을 의미.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기독교의 발흥같은 사건에 결정론적 설명을 제시함. 이들은 인간사를 생물학적, 생태학적 혹은 경제적 힘의 작용으로 설명하려 함. 이들은 로마가 지배했던 지중해 연안의 지리적, 유전적, 경제적인 뭔가가 필연적으로 일신론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주장.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결정론적 이론에 회의적임. 학문 분과로서의 역사학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특정한 역사 시대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왜 하필 일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다른 식으로는 전개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점. 특정 시대에 대해 피상적 지식만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실현된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음. 이들은 사후 깨달음을 근거로, 어째서 그런 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이론으로 설명함. 반면 해당 시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진행되지 않은 경과를 훨씬 많이 인식하고 있다.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따.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 현대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지식과 다음 세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상이함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 현대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둠.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 무지를 인정한 현대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사음.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새 힘의 획득 : 현대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음.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함
- 일반적으로 근대 이전 대부분의 지배자와 사업가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우주의 속성에 대한 연구에 자금을 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기술적 장치로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지배자들은 교육기관에 자금을 댔지만, 그런 기관의 의무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하에 전통적 지식을 확산시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지만, 그 기술들은 보통 교육을 받지 못한 장인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었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추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었음. 마차 제조업자는 늘 같은 재료를 갖고 늘 같은 마차를 만들었다. 새로운 마차를 연구개발하기 위해 연간 순익의 1%를 따로 떼어놓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차의 설계는 가끔 개선되었지만, 이는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일도 없고, 글도 읽지 못하는 어느 천재에 의해 이루어짐.
- 19세기까지만 해도 군사분야의 혁명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조직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물론 서로 모르던 문명들이 서로 접할 때 기술적 격차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음.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격차를 일부러 만들고 확대할 생각을 한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제국이 부상한 것은 기술 분야의 마법적 재능 덕분이 아니었으며, 그 지배자들도 기술개선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랍인들이 사산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우월한 활이나 칼 덕분이 아니었고, 셀주크 사람들이 비잔틴 사람들에게 기술적 우위를 지니진 않았으며,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것도 뭔가 독창적인 신무기의 도움을 받은 덕분은 아니었음. 사실 이 모든 경우에서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이 우월한 것은 오히려 패배자 쪽이었다. 로마군이 좋은 사례임. 로마군은 당시 최강의 군대였지만 기술적으로는 카르타고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나을 게 없었다. 로마군의 강점은 효율적 조직, 강철같은 규율, 막대한 예비인력에 있었다. 로마군은 연구개발 부서를 만든 일이 없었으며, 이들의 무기는 몇세기 동안 거의 같았다. 만일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를 초토화시키고 누만시아인들을 패퇴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장군의 군대가 5백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갑자기 출현했다면 스키피오는 대제를 상대로도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으로부터 몇세기 전의 장군, 가령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현대의 무장한 여단과 맞선다고 상상해보자. 나폴레옹은 탁월한 전략가였고 그의 부하들은 정예의 전문가들이었지만, 현대의 무기 앞에서 그들의 기술은 쓸모 없었을 것이다.
- 중국에 철로가 놓인 것은 1876년. 길이 24킬로미터로 유럽인이 건설했는데, 중국정부는 이듬해 이것을 파괴. 1880년 중국 제국에선 단 하나의 철도도 운영되지 않았다. 페르시아에 철도가 처음 놓인 것은 1888년에 들어와서였다. 테헤란과 남쪽으로 10킬로 떨어진 무슬림 성지를 연결하는 공사였는데, 건설과 운영은 벨기에 회사가 맡았다. 1950년 페르시아에 놓인 철로는 총연장 250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국토면넉이 영국의 일곱배인 나라로선 형편없이 적은 수치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과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따.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함. 이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적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이 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 유럽제국주의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모든 제국주의 프로젝트들과 완전히 달랐다. 과거의 제국 추구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었음. 정복은 단지 그들의 세계관을 활용하고 퍼드리는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아랍인들은 이집트나 스페인 혹은 인도를 정복했지만,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 몽골인, 아즈텍인들이 탐욕스럽게 새 땅을 정복한 것은 권력과 부를 찾아서였지, 새 지식을 찾아서는 아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새 영토뿐 아니라 새 지식을 획득한다는 희망을 안고 먼 곳의 해변을 향해 떠났다. 이런 생각을 한 최초의 탐험가 제임스 쿡은 아니었다. 15~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항해자들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항애자 엔히크 왕자와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고 그 과정에서 섬과 항구의 지배권을 강탈.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자 즉각 스페인왕의 통치권을 선포함. 마젤란은 세계일주 항로를 찾아냈고, 이와 동시에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할 기초를 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의 정복과 영토의 정복은 점점 더 긴밀하게 합쳐졌다. 18~19세기 유럽을 출발해 먼 나라로 향한 주요 군사탐험대는 거의 모두 과학자들을 배에 태우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과학지식의 발견이었다.
- 이런 저런 종류의 신용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감.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
- 스미스는 부와 도덕간의 전통적 대립을 부정했고, 부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줌. 부자가 되는 것은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파이의 크기를 늘림으로써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다. 따라서 부자는 사회에서 가장 쓸모 있고 인정많은 사람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성장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사람이기 때문.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 "수익이 늘면 스크루지는 돈을 상자에 숨겨둘 것이고 세어볼 때나 꺼낼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부분으 새로운 윤리의 등장이었는데, 이 윤리에 따르면 이윤은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함. 재투자는 더 많은 수익을 가져오고, 이것은 다시 생산을 위해 투자되어 더 많은 이윤을 낳으며, 이과정은 무한반복됨. 투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짐. 공장확대, 과학연구, 신제품 개발... 하지만 모든 투자는 어떻게 해서든 생산을 늘려야 하고 더 많은 이윤으로 전환되어야 함. 새로운 자본주의 교리에서 가장 신성한 제1계율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는 것.
- 자본과 정치의 힘찬 포옹은 신용시장에스 큰 의미가 있음. 어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로운 유전의 발견이아 새 기계의 발명 같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 뿐만 아니라 체제 변화나 좀더 대담한 해외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들에 따라서도 달라짐. 나바리노 전투 이후 영국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위험한 거래에 돈을 투자할 용의를 더 많이 나타냈다. 외국의 채무자가 변제를 거부한다면 여왕의 군대가 돈을 받아내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이유가 여기 있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가리킴. 순수한 경제적 데이터 외에도 정치, 사회, 심지어 문화적 요인을 고려해서 매겨짐. 석유가 풍부한 나라라도 독재 정부에 전쟁이 만연하고 사법제도가 부패해 있다면 등급이 낮음. 그 결과 이 나라는 상대적 빈곤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큼. 석유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없기 때문. 거꾸로 천연자원이 없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사법제도가 공정하고, 자유정부를 지닌 나라는 신용등급을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큼. 그래서 이 나라는 싼 대가로 많은 자본을 모아 좋은 교육제도를 지원하고 하이텍 산업을 육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음.
-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함. 그렇기는 커녕, 이윤과 생산량을 늘리려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때문에 수백만명을 살해.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데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도 마찬가지.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 소비지상주의 윤리와 사업가의 자본주의 윤리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후자에 따르면 이윤은 낭비되어서는 안되고 생산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는 데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는 노동의 분업이 존재한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값비싼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썼지만, 농부들은 한푼 한푼 아끼며 검소하게 살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레 관리하는데 반해 그만큼 잘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을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이다.
- 진화는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런 느낌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 조만간 이 느낌은 가라앉고, 불쾌한 느낌에게 자리를 내준다. 예를 들어 진화는 남자로 하여금 임신 가능한 여자와 성관계를 해서 유전자를 퍼뜨리면 쾌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도록 만들었다. 만일 성관계에 따르는 쾌감이 크지 않다면, 힘들게 그런 수고를 하려 드는 남자는 드물 것. 그런데 또한 우리는 그 쾌감이 빨리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 이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만일 오르가즘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행복한 남자는 음식에 흥미를 잃은 탓에 굶어 죽고 말 것이고, 다른 임신가능한 여자를 찾는 수고를 하려 들지도 않을 것.
-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음.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님.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임.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임.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서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법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 측면에서 일치. 즉, 행복은 외부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 하지만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함.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함.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 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음.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음. 5분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함. 설령 한번 그러는 데 성공했더라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함.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님.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음. 이 대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런 상태에 놓임.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 사람드링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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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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