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계속해서 웃으라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즐겁게 지내라는, 휴일에는 환호성을 지르라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라는 요구를 받음. 그런 요구가 없어도 이미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현대는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권리인 울적할 권리를, 비생산적일 권리를, 퉁명스러울 권리를, 혼란스러워할 권리를 박탈했다. 행복이 표준상태여야 한다는 주자잉야말로 현대가 우리에게 저지른 핵심적 부당행위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현대 미국이 압도적인 악당을 만들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언급한 치어리더의 우두머리 격인 악당은 바로 월트 디즈니다.
- 우리는 소비의 주된 문제점을 가격의 측면이라는 틀에 넣어 바라보지만, 더 근본적인 데 있을지 모른다. 성공적인 지출은 우리가 획득한 것과 느끼는 방식 사이의 내밀한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데 달려 있다. 우리가 쓸모 없는 제품을 고르는까닭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 우리가 불완전한 소비자로 나아가는 이유는 삶의 다른 많은 영역에서 실수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즉 우리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적 측면에서 훈련받지 못한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
- 삶이라는 상태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임. 커다란 슬픔이나 상실을 겪지 않고 보내는 날이 거의 없다. 세상 모든 게 근본적으로 슬픔에 괴로워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가려면 많은 특권을 누리거나 시야가 좁디좁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광고는 마치 활기, 평온, 낙관주의가 일반적인 상태인 듯, 우리는 항상 오해받지도 않고 좌절하지도 않으며 죽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광고 작업은 물건 구입으로 해결되지 않는 행복감 외에 다른 마음 상태를 인지하는 게 상업 사회 전체를 한순간에 붕괴시키리라도 하는 듯 군다. 하지만 이런 성마른 감정과 태도는 우리가 슬플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우리의 기분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즐겁게 해주거나 빠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를 느끼지 않고 품위 있는 삶속에서도 슬픔, 고독, 혼란이 자리잡을 적법한 자리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크게 감사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 우리는 미래를 위한 더 품위 있는 형태의 광고를 상상할 수 있다. 떼를 쓰거나 소리지르거나, 성가시게 하거나 추어올리지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 무언가를 제공하는 듯 굴면서 실은 전혀 다른 걸 팔기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자극할 필요가 없는 그런 광고 말이다. 이런 유형의 광도는 다른 형태의 고객층을 갖게 될 것이다. 일부는 여전히 셔츠나 머리 손질용 상품을 만들겠지만, 다른 일부는 우리의 고차원적 욕구에 대한 해결책을 개척할지 모른다. 미래의 쇼핑구역에는 고독에 대한 효과적 지원, 상심에 대한 치료법과 안정을 누리는 전략을 홍보하는 빛나는 대형광고판이 있을지 모름. 우리는 아직 자본주의의 새벽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서로의 번영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올바르게 사고파는 방법도 이제 막 알아가는 단계에 있는 셈이다.
- 안정은 특정 목적지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노천탕에 몸을 담근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음. 오랫동안 묻혀 있던 물안의 희미한 근원을 시간을 들여 끈기있게 탐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음. 마찬가지로 우정이란 특정 상표의 청량음료에서 마술처럼 출현하지 않음. 우정은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그 누군가의 주변에 머물며 담대하게 약점을 드러내고 그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요구함. 화복한 가족은 새 시계를 획득한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춘기의 수많은 시련 앞에서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긴장과 비난을 수반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적절한 선을 그을 줄 아는 용기가 필요.
- 신문은 사건을 보다 명확히 살펴볼 계몽의 도구인 척 했지만, 결국 실제 삶의 모습을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신문은 대부분 사람이 친절하다는 사실을, 기차는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정부에서도 감동적이고 훌륭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날들은 조용히 별일 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대서양 횡단 케이블, 기자회견, 해외지국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는 커명 오히려 우리를 사람, 기술, 그리고 정부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리하여 매일 뉴스를 접할 방법은 없었지만 자신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현실을 그려낼 줄 알았던 중세시대의 문맹 농부보다 더 아는 게 적은 상태가 되었다.
- 이와 관련하여 신문이 초래한 위험 중 하나는 사람들이 신문에 익숙해지면 감정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점. 신문은 분노, 공포, 슬픔, 동정, 공감 등의 많은 감정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듯 보였다. 신문 역시도 자신들의 고상한 목적을 설명할 때 자기들이 무지와 편견을 내쫓고 여러 민족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일에 종사한다고 힘주어 주장했다. 하지만 신문이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는가 하는 면에서는 뚜렷한 약점이 드러남. 놀랍게도 고통스러운 사연을 접했을 때, 우리 마음이 실제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신문은 지진으로 5만명이 사망했고, 고아원이 불타서 200명이 죽었고, 다른 대륙에 흉년이 들었으며, 그린란드에서 선박이 좌초했고, 누군가 도끼로 일가족을 살해했다고 알려주는데, 우리의 반응이란 그저 잠시 한숨을 쉬고는 시선을 들어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데 그친다. 보도되고 있는 극적인 사건들과,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십여건의 기사를 읽는 동안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무심함과 태평함 사이에 으스스한 간극이 생가는 것이다.
- 신문은 자신들의 의미지에 국가차원의 의식을 담아낸다. 아침에 잠에서 깰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꿈이 남긴 메아리, 반쯤 기억나는 계획, 산발적 흥분, 미약한 충동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당신이 지금 무엇이 되려고 애쓰고 있건, 예전에 어떤 사람이 되려고 했건,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 보이는 무자비하고 단호한 뉴스의 벽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그것들 대신에 대통령이 하는 말고 주식시장이 가리키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 우리 마음 어딘가에는 우리에게 시시비비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말슴을 귀 기울여 듣던 아이가 아직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신문이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아침 조회 앞에서도 여전히 경건히 앉아 있다.
- 19세기의 신문이 거둔 미심쩍은 업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표준화한 것이다. 신문은 헨리포드와 같은 사업가가 제조업에서 거둔 성과와 유사한 짓을 우리의 상상력과 지성이 맺은 다양한 열매에 가했다. 즉 신문은 생각을 대량생산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면서 다양성을 줄이고 광고기사를 늘이며 지역적 특색을 씻어냈다.
- 뉴스산업의 근본전제는 새로운 것과 중요한 것이 하나라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우며 새로운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이 전제는 대부분 거짓일 공산이 크다. 방금 일어난 일이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우리의 번영에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20년 또는 1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며, 실제로 1500년대부터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던 책에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우리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전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정말로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촉구일 것이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뉴스는 용서하고, 반성하고, 음미하고, 감사하고, 고요하고, 친절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뉴스다. 이런 뉴스야말로 화재, 살인, 추락, 위기같은 소식들을 제쳐두고 우선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마음에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해야하는 진정한 뉴스다. 뉴스란 가끔 사실 대부분은 그저 우리가 알아야할 것 중 가장 덜 중요하고 가장 덜 긴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 밀과 토크빌은 민주주의에서도 부자유스러운 상태로 살기 십상이라는 점을 깨달았음. 발목을 묶는 쇠고랑도 없고, 4-5년에 한번씩 지도자를 투표하라는 정중한 초대를 받긴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완강하게 붙박여 있는지도 모름. 결혼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업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휴일은 어떻게 보내야 하며, 우정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그렇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외되어 있다. 우리 영혼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줘서는 안되는 낯선 자들이 부당하게 형성한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붙들려 있다. 사회적으로 강요된 새장의 창살을 흔들기 시작할 때 비로소 흥미로워지겠지만 그런 일을 시도해보라고 자신에게 허가를 내주는 경우는 좀체 없다.
- 어쩌면 누군가는 슈퍼 체인의 회계부서에서 일하면서 빈의 그로서 무지크페라인잘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여는 것을 병행하지 못했다고(두 가지 일의 수준을 거의 공평하게 놓고는) 자신을 호되게 질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패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일과 가정생활이 상충하는 것은 우리의 무능이나 의욕부족 때문이 아니다. 단지 두가지 거대한 상반되는 주제가 충돌하는 역사의 한 시기에 살고 있을 뿐이다. 가족을 돌보고 양육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일, 효율, 이익 및 경쟁을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한 통찰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서로를 배척한다. 우리는 크나큰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
- 우리는 고독을 다룬 위대한 예술작품 속 인물들의 후손이자 영혼의 쌍둥이라는 자부심을 품어야 한다. 우리가 고독한 이유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으며 사교성에 대한 이상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재 공동체가 제공하는 허울분인 증표를 받기보다는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을 선호할 뿐이다.
사람들이 외로움을 덜 느끼게 하는 방법은 숲이나 식당, 도서관, 혹은 사막에서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내 볼링을 치러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혼자 있는 것이 실패의 표시가 아니라고 안심시키는 것이다. 현대에 벌어진 외로움의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고독을 원위치로 되돌리고 독신생활의 품격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혼자 식사한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스완슨사의 TV디너는 개선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가짜 미소와 억압적인 선입견으로 둘러싼 연회장에 있는 것보다는 평화롭게 소박한 식사를 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런 식사를 할때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현대는 우리에게 그 점을 상기시켜주지 못했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것 존재했던 이들 중 가장 고상하고 세련된 영혼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혼자일 뿐, 실은 최고의 사람과 어울리고 있다.
- 교육제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기술에 대한 교육을 받았지만, 삶이 실제로 어디에 이를지, 일이란 궁극적으로무엇인지 등 전체적 관점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특히 무엇에 관심이 잇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세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유용한 일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아직 훈련받지 않은 채 희미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열정의 신호를 결합할 적절한 진로상담 서비스가 부족하다. 세상의 요구와 우리의 적성이 연결되는 비옥한 지대를 탐색하고 우리 내면에 담든 재능의 불꽃을 비춤으로써, 언젠가 가치 있는 도구를 만드는 데 공헌하고 후회없이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공공의 서비스가 절실히 필요하다.
일이라는 영역에서 현대가 처한 괴로움은 여타의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대를 어떻게 충족시킬지는 배우지 못한 채 기대감만 높다는 것. 우리는 기대와 현실 사이에 놓인 고통스러운 중간지대에 자신을 목표 없이 방치했다. 더 이상 조상들처럼 고된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괴로움을 줄이고 기쁨을 높이면서도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도구를 발견할 권리가 있다.
- 네덜란드 화가들의 정신적 친척이라 할 수 있는 영국 학자 로버트 버턴은 1621년 발표한 우울의 해부에서 세상이 소란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찬양하며 이렇게 썼다. "그는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입신양명을 좇지 않으며, 아첨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재산에 만족하며 조용히 산다. ... 나랏일에 고민하지 않는다. 왕국이 계승으로 번성하건 선거로 번성하건, 군주제가 뒤죽박죽이건 온건하건 전제적이건 관심이 없다. 오스만 제국 왕조나 오스트리아 제국 왕조나 그에게는 다 똑같다. ... 그는 식민지나 새로운 지리적 발견에 대해 궁금한 게 없다. ... 침략, 파벌, 경쟁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흔들지 못한다." 어쩌면 이는 베르베르나 호흐, 엥게르트나 하퍼를 대변해주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 조용한 삶의 옹호자들도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들은 눈에 확 띄는 멋진 표지판이 자기 인생을 이끌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들 생각에 정말 읽어야 할 소설은 최근 문학상 수상작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는 작품이 아니다. 아마도 200년 전에 쓰였으며 대부분 중고판본으로 구할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소중한 것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것과 뒤섞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뛰어난 지성에 반드시 학위가 따라붙어야 하는 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스누커 게임을 보기를 좋아하고 머리염색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친척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수도 있다. 조용한 삶의 옹호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놓칠까 두려워하는 것들이 있다. 그들은 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 약속 없이 텅 빈 날들, 부모님을 진정으로 알아가기, 저녁놀이 지는 하늘, 느긋한 목용, 고양이와 함께 하는 주방에서의 이른 아침 등을 즐기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비극이라 일컫는 예술 장르를 창조했다. 비극을 통해 인간의 최고 경지에 오른 위대한 전사나 정칙, 시인, 웅변가도 결국 지극한 결점을 갖고 있으며, 특히 그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결점이 더욱 크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에서 공연된 비극 작품들을 속 피에 물든 이야기들은 유능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린 판단착오, 심리적 맹점, 과도한 분노, 완고한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훈은 분명하다. 그 누구도 인류의 일반적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대한 실책이나 잘못없이 인생을 헤쳐나갈 수는 없으며, 우리는 본질적으로 미숙하고 상처받은 존재임을 의미. 참된 지혜는 자신과 타인이 이러하다는 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시작된다. 그러한 자세에서 자기용서와 연민, 동정이 자라날 수 있다.
- 부모의 임무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삶에서 일어나는 불완전한 상황을 대비할 수 있도록, 자상하게, 하지만 가능한 철저하게 준비시키는 것. 즉 이상주의로 가등한 이 작은 인간들에게 좌절이란 고질적인 문제이고, 그릇은 식탁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게 마련이며, 테디 베어인형의 눈은 사라지기 십상이고, 자동차 여행은 너무 오래걸리며, 부모는 놀랄 만큼 짜증나는 사라들이고, 엄마는 어리석고 아빠는 바보같으며, 숙제는 지나치게 많고, 앞으로 겪을 수많은 경험이 쓰라릴 것이며, 사람은 결국 늙어서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그 이상은 필요 없다고, 위니콧은 53년 출간한 저서 놀이와 현실에서 주장. 그의 유명한 공식에 따르면 부모는 그냥 적당히 괜찮은 정도면 된다. 우리는 적당히 괜찮은 부모, 노동자, 배우자, 친구, 인간은 될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 우리는 삶이 병원이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이라는 것을, 인간은 죽을 운명이고 병든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매순간 불안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는 한없이 나약하며, 항상 새로이 실망스러운 현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 남들에게 절대 잘 산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재정적으로나, 연애로나, 평판으로나, 실존적으로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 우리가 더 밝고 활기찬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광고판의 암시를 근절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는 휴가중에도 비참해질 것이며, 삶의 여러 측면에서 잘해낸 순간에도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밉고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그때 다르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감적적으로 우리를 웃게 하려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가 정한 조건에 맞춰 우리를 받아드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내면의 깊이, 특히 새벽 네시 돌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잠에서 깨었을 때 삶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인생이란 절망스럽고, 불안하며, 끊임없이 흔들리고 조마조마하며, 늘 의문으로 가득하다. 우리 진화의 다음 단계는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사회는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심리적 복잡성을 수용할 용기를 가진 사회여야 한다.
- 상대방이 공감을 표하는 것은 감성적 질문 때문이 아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 때문. 상황의 핵심, 알고싶어하는 알맹이를 이야기하니까, 저절로 맞아, 맞아라는 말이 나오는 것임.
그러니까 공감을 얻으려면 따뜻한 감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확한 분석이 필요. 정확한 분석을 통해 파악한 핵심을 따스한 말로 건네니 감동적인 것이지, 따뜻하지만 내용이 없는 질문은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 아니라 소셜 스킬에서의 대화라면우리는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오은영박사의 질문방법을 벤치마킹해야 함. 우리가 오박사의 질문법에서 따와야 하는 것은 정보를 최대한 분석하는 습관과 의지, 그리고 그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핵심을 파악하려는 노력임. 이게 이루어진 후에 그 핵심을 상대방을 배려하는 감성적 대화에 담는 것이다.
- 꼰대의 어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번데기의 경상도 사투리인 꼰데기에서 유래했다는 설로 번데기처럼 주름이 많은 노인을 의미하는 뜻. 또 하나는 프랑스어로 백작을 의미하는 콩테에서 유래했다는 것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에 친일파들이 일본 작위를 받은 후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꽁데라 불렀다는 설로, 이때 친일파들이 하는 짓을 꼰대짓이라 불렀다고 함. 이런 불확실한 어원말고 공식적인 기록은 61년 동아일보에 '하층민이 나이많은 남자를 지칭하는 말'로 처음 등장. 이후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지금은 꼰대라는 말에 행위를 뜻하는 질을 붙여 꼰대질을 '자기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낡은 사고방식을 강요하거나 시대착오적 설교를 늘어놓는 것'으로 지칭.
그러니 지금의 꼰대는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 경험만을 절대시해서 그것에 맞춘 행동과 판단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왕년에 자신의 업적과 행동, 생각을 자랑하는 순간 꼰대가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임.
- 남은 평생을 설탕물이나 팔며 보내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고 싶으신가요?
존 스컬리는 이 질문에 강한 인상을 받아 애플로 이직하기로 결심.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 질문에서, '나는 설탕물이나 팔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라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질문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에요. 한쪽 선택은 너무 좋아보이고, 다른쪽 선택은 너무 나빠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은 다음 질문과 같은 질문이에요.
'원래는 탄탄하고 안정적이며 성공이 보장된,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펩시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전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펩시 CEO를 계속 하실래요? 아니면 이제 막 시작해서 장래가 어찌 될지도 모르고, IT문외한이라는 입장에서 어려움이 예상죌 수밖에 없는 IT기업의 CEO를 하실래요?'
이렇게 물어보면 쉽사리 애플로 이직하는 결정을 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러니 스티브 잡스의 질문은 마치 양자택일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쪽 선택이 강요되는 함정 질문입니다. 반대로 스티브 잡스의 입장에서 보면 대화설계를 엄청 잘한 것이죠. 상대방이 다른 선택을 생각하기 힘들어지도록 한 번의 질문으로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였으니까요.
- 어조나 말투 분위기의 문제는 사실 매우 감정적인 문제. 질문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관점의 문제라는 것. 그러니 말하는 사람의 성격적인 특성도 반영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부정적 어조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신중한 성격,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성격의 사람이 이런 어조를 많이 사용한다. 이런 사람의 매니지먼트하에 있으면 활력은 줄어들지만, 실패 가능성 역시 줄어드는 편이다.
- 대화의 메타인지하기
대화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한 발은 대화 안에 걸치지만, 다른 발은 대화 밖으로 빼고 있어야 함. 흐름 안에 있으면 보통은 수영하기에 바빠서 강의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살필 겨를도 여유도 없다. 대화의 메타인지는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강의 어디쯤에 있는지 인식하는 일이다. 정확하게는 대화를 하는 동안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대화의 흐름과 과정을 인식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대화의 메타인지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메타인지가 된 상태에서야 반전도 가능하다.
이러한 메타인지를 위해서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의 구성원과 목적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
- 공석인 프로그래머 자리에 들어올 사람을 뽑는데 마침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나 연봉협상을 했더니 그 팀의 다른 프로그래머에 비해 2배 가까운 연봉을 요구하더라는 겁니다.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는 그 팀의 매니저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그 팀에 새로 채용하려는 그 사람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나요?"
대답은 NO입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지금 있는 팀의 팀원 3명이 힘을 합하면 새로 채용하려는 사람만큼 기여할 수 있을까요?"
이 대답도 NO입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나타나 조용히 눈치 못채게 현재 프로그래머 몇 명을 그 사람과 바꿔 놓는다면 그게 회사에 더 도움이 될까요?"
매니저의 대답은 YES입니다. 그래서 리드 헤이스팅스는 그 요정이 되기로 하죠.
그렇다고 다른 프로그래머를 내보내지는 않고, 그 사람을 채용하기로 한 겁니다. 직급에 따른 연봉 상한선이라는 채용전략이 있었는데, 이 결정 때문에 넷플릭스는 채용전략을 바꾸어야 했어요. 이후에도 다른 회사에서 그 사람을 빼가지 못하도록 그에게 업계 최고대우를 해주었죠. 이 사람은 이후 넷플릭스에 근무하며 지금의 넷플릭스 서비스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특징을 만들었음.
리드 헤이스팅스는 질문과 답을 통해, 지금 지키고 있는 채용과 연봉전략을 바꿔서라도 필요한 사람을 잡아야겠다고 유연한 결론에 도달. 한번 정한 규칙이니 무조건 지켜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규칙이 과연 유용한지, 더 좋은 선택을 방해하지는 않는지 의심해보고 유연하게 선택한 것.
- 스마트폰이 몸 밖으로 나온 장기와 같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마트폰이 아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나 일정 같은 우리의 기억력을 대신해서 두뇌 역할을 한다는 것. 그렇게 치면 스마트폰이 하는 것은 두뇌 전체가 아니라 측두엽 안쪽에 있는 대뇌변연계를 구성하는 영역 중하나인 해마 정도에 불과하다. 기억을 담당하기 때문
진짜 뇌에 해당하는 장기는 챗GPT다. 기억뿐 아니라 지식, 추론, 상상, 감정까지 나타낼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두뇌가 하는 일을 거의 다 할 수 있음. 그래서 챗GPT에서 AGI의 가능성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음. AGI는 일반인공지능, 강인공지능 혹은 범용인공지능이라고도 부름. 인간 수준의 사고가 가능하여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말함. 그 반대 개념이 약인공지능으로 한 분야에서 전문가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설계되는데, 그 분야에서만 강력한 것임. 예를 들어 바둑만 잘두는 알파고라든가, 그림만 잘그리는 달리같은 것임. 따지고 보면 챗GPT도 언어쪽으로 발달된 특화된 인공지능이지 만능해결사는 아님.
그런데 챗GPT가 언어를 조합해서 마치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작동하니까, 이 챗GPT에 다른 프로그램을 연결한다든가 하드웨어 등을 연결해서 다양한 아웃풋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음. 그러니까 하드웨어 등을 연결해서 다양한 아웃풋을 만들어냄. 예를 들어 챗GPT는 원래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데, 사람이 어떤 그림이 필요하다고 말을 하면 그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알아듣긴 함. 그리고 말로 챗GPT에게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고 설명할 수 있음. 그런데 이것을 그림을 그려주는 달리에 연결하지 챗GPT가 알아서 달리에게 필요한 그림을 전달해 달리가 그림을 생성해 주는 것임. 사람입장에서는 마치 챗GPT가 다 하는 것처럼 느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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