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가스는 이름부터 특이한 요리다. 돼지 돈에 커틀릿을 뜻하는 일본식 표현 가스가 붙어 만들어진 조어임. 70년대 한국의 어떤 신문에서는 이 요리이름을 두고 괴상한 조어라 힐난하기도 했다. 표기도 좀 애매한데, 일본식 발음으로 하면 돈카츠나 돈까스라고 해야 맞을텐데 어쨌든 우리 표기법으론 돈가스라 쓴다. 부언하자면 가스란 일본어에서 쓰레기라는 뜻이나 돈가스라는 표기는 일본인에게는 어불성설이다.
돈가스는 일본에서 각별한 위치에 있다. 고기요리로서 최선두에서 일본인에게 어필했다는 점, 기름을 물쓰듯 해야 하는 현대적 요리라는 점, 카츠라는 말이 이길 승과 발음이 같아서 시험 전에 먹는 주술적 음식이라는 점 등이다.
게다가 원래 서양요리였던 것이 일본화되면서 밥 위에 얹거나 반찬으로 먹는 형태로 변화했다는 것도 의미깊다.
- 돈가스는 현재의 자본주의화된 일본 역사를 상징하는 음식. 서양에서 들어왔지만 일본에서 개량되어 일본인 스스로 이 음식은 일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 아니겠는가. 고기를 썰어서 젓가락으로 먹고, 간장소스를 뿌린 양배추를 곁들이며, 심지어 아시아의 상징인 밥과 된장국까지 나오니 말이다.
돈가스는 원래 오스트리아 빈의 슈니첼이나 이탈리아 밀라노의 코톨레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음. 유럽에서 넓게 편 돼지갈비나 송아지갈비 등을 구워 만드는 요리다. 이걸 요리하자면, 우선 고기를 망치로 두들겨 얇게 펴는 일부터 시작됨. 밀가루, 달걀, 빵가루 순으로 묻혀 튀기는 것이 서양식튀김의 보편적 순서인데, 이것은 좀 다르다. 슈니첼은 무엇보다 한국이나 일본의 돈가스와 결정적 차이가 있다. 튀김오싱다. 영국식 피시앤칩스의 배터(반죽)과 비슷. 밀가루를 쓰지 않는다. 뼈 붙은 송아지갈비를 달걀물에 적힌 후 고운 빵가루를 입혀 버터 녹인 팬에 천천히 지져낸다. 팬에 버터나 기름을 흥건히 붓고 조리하는데 튀기는 것이 아니라 버터에 지지는 것에 가깝다.
일본에 전해진 커틀릿도 이런 식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식사법을 받아들여 일본인도 건장한 체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됨. 그러나 일본대중은 이 요리를 그렇게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밥과 생선구이, 채소절임과 국을 먹는 식단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여곡절끝에 현재의 일본식 돈가스와 비슷한 요리가 동경에서 탄생. 원래 소와 돼지 같은 큰 가축의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던 일본 식생활에 대격변을 불러온 셈이다. 이제 돈가스는 일본인이 가장 흔허게 먹는 반찬이 되었다.
- 이론이 이 요리를 많이 먹게 된 사연에는 한국도 관련이 있다. 60년대 일본은 본격적 경제발전을 이룸. 이미 50년대에 한국전쟁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면서 큰 이득을 본 일본은 동경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폭발적 경제성장을 함. 당연히 외식과 고기소비도 증가. 7세기 불교도인 덴무 천황의 명으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기록처럼, 본디 일본은 근대에 메이지유신으로 고기를 전면 허용할때까지 고기 소비가 억제된 나라였다. 오죽하면 멧돼지를 잡아먹으면서도 돼지고기라 말하지 못하고 산고래라고 에둘러 표현했겠는다. 그런데 오랫동안 고기소비가 억제되었던 만큼 60년대 고기 소요량의 큰 증가에 공급이 빠르게 대응하기란 어려웠다. 공급은 늘 부족했다. 이때 한국은 좋은 대안이었다. 가까웠고, 돼지를 기르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 부산에서 배로일본까지 나르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김해에 대단위 축산단지가 조성된 것이 바로 이때문. 미국으로부터 사료가 싼값에 들어왔고, 한국도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으로 돼지사육을 하게 되었다.
이 거래는 한국의 식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돈가스에 적합한 등심과 안심을 부분육으로 수입해가자 남는 부위가 많았다. 이때부터 족발, 순대, 머리와 사골을 이용한 순대국밥, 돼지국밥, 삼겹살, 갈비가 우리 외식의 핵심이 되었다.
보통 외식시장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미각을 유지시킨다는 말이 있다. 치킨도 마찬가지다. 제공되므로 먹는다. 그ㄹ고 먹으므로 취향이 된다는 순서를 지키고 있다. 등심이 공급되니 돈가스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런 이치다.
- 강원도의 막국수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제각기 특징과 내력이 있다. 개별 가게들의 스타일이 다 달라 일괄로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춘천식은 메일 속살을 잘 빻아서 색이 희고 새콤달콤하며 참기름 향이 강한 비빔면 스타일로 보면 거의 틀림없다. 대관령을 기준으로 강원도내륙인 영서지방도 역시 희고 고운 속메밀을 사용. 동치미를 쓰는 남북면옥도 여기에 해당. 반면 영동지방은 겉메일을 섞어 써서 거친면이 대세. 그렇지만 워낙 영동지방은 겉메일을 섞어써서 거친면이 대세. 그렇지만 워낙 나들이 인파가 많고 너나없이 막국숫집이 많이 생긴 강원도에서 이런 지역별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한다고 볼 수는 없다.
- 메밀은 보통 겨울에 많이 먹을 수밖에 없는 작물. 우선 수확시기를 보면 대개 여름에 씨를 뿌려 늦가을에 거둔다. 그래서 자연스레 겨울이 제철이 됨. 대부분의 곡물이 그렇지만 메밀은 열에 아주 약하다. 겨울에 보관된 상태여야 제대로 맛을 낸다.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늦가을에 수확한 메밀을 1년 내내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언감생심이었다.
메밀국수가 겨울음식이 된 데는 다름 이유도 있다. 냉면의 국물이 되는 동치미가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김치였던 것. 냉면이 여름 음식으로 팔리게 된 것은 제빙공업의 발달과 함께 동치미맛을 대체할 수 있는 아지노모토의 보급이 결정적. 일제강점기에 아니노모토사는 냉면의 맛을 내는 데 아지노모토가 최적의 맛내기 재료라는 점을 강조하는 광고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동치미가 불가능한 시기, 냉면가게는 아지노모토와 소고기 육수의 힘을 빌려 새롱누 메밀국수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 해장국은 본디 해정국이었다. 술 깬다는 뜻. 발음이 어려워 해장이라고 불러도 속을 푼다는 뜻이 되니, 바뀌어서 불린 듯하다. 우리말로는 장을 창이라고 했으니, 해창국이라고 하면 더 어울렸겠지만.
해장국은 역사가 깊은 음식이다. 본디 소는 서울과 평양에서 많이 먹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인천이 성장하고 돈이 몰리면서 해장국 문화가 성행. 그래도 여전히 소를 많이 먹고 잡는 곳으로는 서울을 제일로 쳤다.
조선시대에도 심야 술꾼들이 많았고, 그들도 해장을 했으리라. 해장국이 서울의 상징이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부터일 것이다. 무엇보다 노동하는 이들의 아침밥으로 팔렸다. 지금의 종로세무서 앞, 광화문 네거리, 남대문시장쪽, 동대문, 북촌입구 등이 유명한 시전(나뭇전) 이었다고 한다. 새벽부터 가평, 양평쪽에서 나무를 해서 달구지에 싣고 온 이들이 짐을 부리고 해장국을 한술 뜨는 곳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 우리나라 두부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맛이 좋기로는 중국에서도 유명했다고 함. 그것은 콩과 물이 좋기 때문인데, 초당두부의 맛은 여기에 하나 더 걸친다.
"여기 두부는 간수를 안쓰고 바닷물을 씁니다. 강릉 앞바다 심해에서 퍼서 동네 생산자들이 나눠 가져요. 이 물을 주니까 두부가 부드럽고 쓰지 않아요. 간수를 안 쓰니, 딱 떨어지는 제조법을 정하기 어려워서 만들기가 까다롭습니다."
- 우리처럼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맞은 민족이 또 얼마나 있을까. 그 격동은 먹는 문제에서도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중국인의 도래는 만두와 짜장면을 전했고, 미군의 구호품이었던 밀가루야말로 우리에게는 축복이자 식탁의 대격변을 일으킨 기폭제였다. 남북분단은 이북음식인 냉면에 한을 입혀내는 결과를 빚었고 서울의 경제성장은 연회와 가족 외식문화를 만들어 관련 식당을 장수하게 했다. 무엇보다 음식은 칼로리가 아니라 인류사로 해석된다.
- 대전에는 지금도 2만개가 넘는 식당 중에 칼국수 전문점만 5백개가 넘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른다. 대전 인근에 넓은 밀 들판이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의 밀 저장고가 있었다, 대전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서 빨리 먹을 수 있는 국수를 좋아했다 등등이다. 아마도 외지인이 많은 대전 특성이영향을 미친 듯하다. 대전은 원래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일제가 철도를 적극 활용하고 부설하면서 대전역은 영호남으로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칼국수 메카설의 근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대전역의 가락국수도 명물이 되었고, 칼국수 명가도 많다.
- 육절기. 영어를 써서 햄슬라이서라 불리기도 하는 이 장비는 불고기의 혁명을 불러옴. 그전에 너비아니는 좋은 부위를 썼다. 등심, 안심을 주로 사용. 칼로는 고기를 아주 얇게 썰 수 없으니 부위가 어느정도 부드러워야 먹기 좋았다. 부드러운 부위는 당연히 값이 제일 비싸다. 그런데 육절기는 기존에 구워 먹을 수 없는 부위(앞다리, 엉덩이살 등)도 구이용으로 가공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불고기가 대중화되고 가격이 떨어진 이유.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식 육절기가 많이 보급됨. 고기를 살짝 얼려서 얇게 저밀 수 있는 육절기 덕분에 야들야들한 불고기를 만들 수 있었다. 저민 고기를 양념을 발라 숙성하면 충분히 부드러워졌다. 이는 가게나 손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혁명이었다. 가게로서는 고기가 빨리 익고, 양념을 오래 해두지 않아도 맛이 깊게 배어 유리. 손님 입장에서는 등심보다 싼 앞다리살 같은 부위로도 만들 수 있으므로 값이 싸져서 좋았다. 얇으니까 육질이 좀 떨어져도 맛있는 불고기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한일관은 지금도 오직 등심만을 불고기용으로 쓴다.
- 돼지갈비의 인기는 사실 우리 자력으로 만들어간 것이 아니다. 미국과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이후 공법 480항을 만들어 외국에 무상 또는 유상으로 자국의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세웠다. 자국에 남아도는 잉여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한 법률이었다. 그 혜택은 공산주의와 맞서고 있는 전선인 한국과 일본이 받았다. 다량의 밀가루와 콩 관련 농산물이 들어왔다. 밀가루가 흔해졌고 콩으로 만든 식용유나 원곡인 대두도 들어왔다. 이 대두로 짠 기름은 기존의 귀한 참기름, 들기름, 땅콩기름 등을 아껴쓰던 한국에 충격적 물건이었다. 튀김이 생겨난 것오 이 덕이다.
- 그런데 대두유를 짜고 나면 깻묵이 남는다. 이건 돼지사료로 딱이다. 미국에서 사료로 쓸 수 있는 옥수수도 다량 들어옴. 돼지는 원래 허드렛물을 먹이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먹여 길렀다. 갑자기 사료가 풍부해지고 정부에서도 정책적으로 돼지사육을 권장. 일제강점기에도 움직임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유럽산 버크셔, 요크셔, 랜드레이스 등의품종이 활발히 보급됨. 이 와중에 제주도는 똥돼지와 비슷한 검은색 버크셔로 인해 혈통의 혼혈이 일어나기도 함.
돼지가 많이 길러지니 부산물과 그것으로 만든 메뉴도 증가. 족발, 순대, 머릿고기, 순댓국, 돼지곱창 등이다. 돼지가죽 가공업도 늘고, 구두와 신발수출도 증가. 당연히 갈비도 흔해져서 갈비구이집이 서울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 용마갈비도 그즈음의 선택이었다. 미국의 농산물수입-식품산업의 구조변화-갈빗집 성행의 연쇄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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