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의 장사법

etc 2025. 4. 5. 06:09

- 돈가스는 이름부터 특이한 요리다. 돼지 돈에 커틀릿을 뜻하는 일본식 표현 가스가 붙어 만들어진 조어임. 70년대 한국의 어떤 신문에서는 이 요리이름을 두고 괴상한 조어라 힐난하기도 했다. 표기도 좀 애매한데, 일본식 발음으로 하면 돈카츠나 돈까스라고 해야 맞을텐데 어쨌든 우리 표기법으론 돈가스라 쓴다. 부언하자면 가스란 일본어에서 쓰레기라는 뜻이나 돈가스라는 표기는 일본인에게는 어불성설이다.
돈가스는 일본에서 각별한 위치에 있다. 고기요리로서 최선두에서 일본인에게 어필했다는 점, 기름을 물쓰듯 해야 하는 현대적 요리라는 점, 카츠라는 말이 이길 승과 발음이 같아서 시험 전에 먹는 주술적 음식이라는 점 등이다.
게다가 원래 서양요리였던 것이 일본화되면서 밥 위에 얹거나 반찬으로 먹는 형태로 변화했다는 것도 의미깊다.
- 돈가스는 현재의 자본주의화된 일본 역사를 상징하는 음식. 서양에서 들어왔지만 일본에서 개량되어 일본인 스스로 이 음식은 일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 아니겠는가. 고기를 썰어서 젓가락으로 먹고, 간장소스를 뿌린 양배추를 곁들이며, 심지어 아시아의 상징인 밥과 된장국까지 나오니 말이다.
돈가스는 원래 오스트리아 빈의 슈니첼이나 이탈리아 밀라노의 코톨레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음. 유럽에서 넓게 편 돼지갈비나 송아지갈비 등을 구워 만드는 요리다. 이걸 요리하자면, 우선 고기를 망치로 두들겨 얇게 펴는 일부터 시작됨. 밀가루, 달걀, 빵가루 순으로 묻혀 튀기는 것이 서양식튀김의 보편적 순서인데, 이것은 좀 다르다. 슈니첼은 무엇보다 한국이나 일본의 돈가스와 결정적 차이가 있다. 튀김오싱다. 영국식 피시앤칩스의 배터(반죽)과 비슷. 밀가루를 쓰지 않는다. 뼈 붙은 송아지갈비를 달걀물에 적힌 후 고운 빵가루를 입혀 버터 녹인 팬에 천천히 지져낸다. 팬에 버터나 기름을 흥건히 붓고 조리하는데 튀기는 것이 아니라 버터에 지지는 것에 가깝다.
일본에 전해진 커틀릿도 이런 식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식사법을 받아들여 일본인도 건장한 체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됨. 그러나 일본대중은 이 요리를 그렇게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밥과 생선구이, 채소절임과 국을 먹는 식단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여곡절끝에 현재의 일본식 돈가스와 비슷한 요리가 동경에서 탄생. 원래 소와 돼지 같은 큰 가축의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던 일본 식생활에 대격변을 불러온 셈이다. 이제 돈가스는 일본인이 가장 흔허게 먹는 반찬이 되었다.
- 이론이 이 요리를 많이 먹게 된 사연에는 한국도 관련이 있다. 60년대 일본은 본격적 경제발전을 이룸. 이미 50년대에 한국전쟁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면서 큰 이득을 본 일본은 동경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폭발적 경제성장을 함. 당연히 외식과 고기소비도 증가. 7세기 불교도인 덴무 천황의 명으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기록처럼, 본디 일본은 근대에 메이지유신으로 고기를 전면 허용할때까지 고기 소비가 억제된 나라였다. 오죽하면 멧돼지를 잡아먹으면서도 돼지고기라 말하지 못하고 산고래라고 에둘러 표현했겠는다. 그런데 오랫동안 고기소비가 억제되었던 만큼 60년대 고기 소요량의 큰 증가에 공급이 빠르게 대응하기란 어려웠다. 공급은 늘 부족했다. 이때 한국은 좋은 대안이었다. 가까웠고, 돼지를 기르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 부산에서 배로일본까지 나르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김해에 대단위 축산단지가 조성된 것이 바로 이때문. 미국으로부터 사료가 싼값에 들어왔고, 한국도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으로 돼지사육을 하게 되었다.
이 거래는 한국의 식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돈가스에 적합한 등심과 안심을 부분육으로 수입해가자 남는 부위가 많았다. 이때부터 족발, 순대, 머리와 사골을 이용한 순대국밥, 돼지국밥, 삼겹살, 갈비가 우리 외식의 핵심이 되었다. 
보통 외식시장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미각을 유지시킨다는 말이 있다. 치킨도 마찬가지다. 제공되므로 먹는다. 그ㄹ고 먹으므로 취향이 된다는 순서를 지키고 있다. 등심이 공급되니 돈가스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런 이치다.

- 강원도의 막국수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제각기 특징과 내력이 있다. 개별 가게들의 스타일이 다 달라 일괄로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춘천식은 메일 속살을 잘 빻아서 색이 희고 새콤달콤하며 참기름 향이 강한 비빔면 스타일로 보면 거의 틀림없다. 대관령을 기준으로 강원도내륙인 영서지방도 역시 희고 고운 속메밀을 사용. 동치미를 쓰는 남북면옥도 여기에 해당. 반면 영동지방은 겉메일을 섞어 써서 거친면이 대세. 그렇지만 워낙 영동지방은 겉메일을 섞어써서 거친면이 대세. 그렇지만 워낙 나들이 인파가 많고 너나없이 막국숫집이 많이 생긴 강원도에서 이런 지역별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한다고 볼 수는 없다.
- 메밀은 보통 겨울에 많이 먹을 수밖에 없는 작물. 우선 수확시기를 보면 대개 여름에 씨를 뿌려 늦가을에 거둔다. 그래서 자연스레 겨울이 제철이 됨. 대부분의 곡물이 그렇지만 메밀은 열에 아주 약하다. 겨울에 보관된 상태여야 제대로 맛을 낸다.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늦가을에 수확한 메밀을 1년 내내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언감생심이었다.
메밀국수가 겨울음식이 된 데는 다름 이유도 있다. 냉면의 국물이 되는 동치미가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김치였던 것. 냉면이 여름 음식으로 팔리게 된 것은 제빙공업의 발달과 함께 동치미맛을 대체할 수 있는 아지노모토의 보급이 결정적. 일제강점기에 아니노모토사는 냉면의 맛을 내는 데 아지노모토가 최적의 맛내기 재료라는 점을 강조하는 광고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동치미가 불가능한 시기, 냉면가게는 아지노모토와 소고기 육수의 힘을 빌려 새롱누 메밀국수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 해장국은 본디 해정국이었다. 술 깬다는 뜻. 발음이 어려워 해장이라고 불러도 속을 푼다는 뜻이 되니, 바뀌어서 불린 듯하다. 우리말로는 장을 창이라고 했으니, 해창국이라고 하면 더 어울렸겠지만.
해장국은 역사가 깊은 음식이다. 본디 소는 서울과 평양에서 많이 먹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인천이 성장하고 돈이 몰리면서 해장국 문화가 성행. 그래도 여전히 소를 많이 먹고 잡는 곳으로는 서울을 제일로 쳤다.
조선시대에도 심야 술꾼들이 많았고, 그들도 해장을 했으리라. 해장국이 서울의 상징이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부터일 것이다. 무엇보다 노동하는 이들의 아침밥으로 팔렸다. 지금의 종로세무서 앞, 광화문 네거리, 남대문시장쪽, 동대문, 북촌입구 등이 유명한 시전(나뭇전) 이었다고 한다. 새벽부터 가평, 양평쪽에서 나무를 해서 달구지에 싣고 온 이들이 짐을 부리고 해장국을 한술 뜨는 곳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 우리나라 두부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맛이 좋기로는 중국에서도 유명했다고 함. 그것은 콩과 물이 좋기 때문인데, 초당두부의 맛은 여기에 하나 더 걸친다.
"여기 두부는 간수를 안쓰고 바닷물을 씁니다. 강릉 앞바다 심해에서 퍼서 동네 생산자들이 나눠 가져요. 이 물을 주니까 두부가 부드럽고 쓰지 않아요. 간수를 안 쓰니, 딱 떨어지는 제조법을 정하기 어려워서 만들기가 까다롭습니다."

- 우리처럼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맞은 민족이 또 얼마나 있을까. 그 격동은 먹는 문제에서도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중국인의 도래는 만두와 짜장면을 전했고, 미군의 구호품이었던 밀가루야말로 우리에게는 축복이자 식탁의 대격변을 일으킨 기폭제였다. 남북분단은 이북음식인 냉면에 한을 입혀내는 결과를 빚었고 서울의 경제성장은 연회와 가족 외식문화를 만들어 관련 식당을 장수하게 했다. 무엇보다 음식은 칼로리가 아니라 인류사로 해석된다. 

- 대전에는 지금도 2만개가 넘는 식당 중에 칼국수 전문점만 5백개가 넘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른다. 대전 인근에 넓은 밀 들판이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의 밀 저장고가 있었다, 대전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서 빨리 먹을 수 있는 국수를 좋아했다 등등이다. 아마도 외지인이 많은 대전 특성이영향을 미친 듯하다. 대전은 원래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일제가 철도를 적극 활용하고 부설하면서 대전역은 영호남으로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칼국수 메카설의 근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대전역의 가락국수도 명물이 되었고, 칼국수 명가도 많다.

- 육절기. 영어를 써서 햄슬라이서라 불리기도 하는 이 장비는 불고기의 혁명을 불러옴. 그전에 너비아니는 좋은 부위를 썼다. 등심, 안심을 주로 사용. 칼로는 고기를 아주 얇게 썰 수 없으니 부위가 어느정도 부드러워야 먹기 좋았다. 부드러운 부위는 당연히 값이 제일 비싸다. 그런데 육절기는 기존에 구워 먹을 수 없는 부위(앞다리, 엉덩이살 등)도 구이용으로 가공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불고기가 대중화되고 가격이 떨어진 이유.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식 육절기가 많이 보급됨. 고기를 살짝 얼려서 얇게 저밀 수 있는 육절기 덕분에 야들야들한 불고기를 만들 수 있었다. 저민 고기를 양념을 발라 숙성하면 충분히 부드러워졌다. 이는 가게나 손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혁명이었다. 가게로서는 고기가 빨리 익고, 양념을 오래 해두지 않아도 맛이 깊게 배어 유리. 손님 입장에서는 등심보다 싼 앞다리살 같은 부위로도 만들 수 있으므로 값이 싸져서 좋았다. 얇으니까 육질이 좀 떨어져도 맛있는 불고기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한일관은 지금도 오직 등심만을 불고기용으로 쓴다.

- 돼지갈비의 인기는 사실 우리 자력으로 만들어간 것이 아니다. 미국과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이후 공법 480항을 만들어 외국에 무상 또는 유상으로 자국의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세웠다. 자국에 남아도는 잉여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한 법률이었다. 그 혜택은 공산주의와 맞서고 있는 전선인 한국과 일본이 받았다. 다량의 밀가루와 콩 관련 농산물이 들어왔다. 밀가루가 흔해졌고 콩으로 만든 식용유나 원곡인 대두도 들어왔다. 이 대두로 짠 기름은 기존의 귀한 참기름, 들기름, 땅콩기름 등을 아껴쓰던 한국에 충격적 물건이었다. 튀김이 생겨난 것오 이 덕이다.
- 그런데 대두유를 짜고 나면 깻묵이 남는다. 이건 돼지사료로 딱이다. 미국에서 사료로 쓸 수 있는 옥수수도 다량 들어옴. 돼지는 원래 허드렛물을 먹이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먹여 길렀다. 갑자기 사료가 풍부해지고 정부에서도 정책적으로 돼지사육을 권장. 일제강점기에도 움직임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유럽산 버크셔, 요크셔, 랜드레이스 등의품종이 활발히 보급됨. 이 와중에 제주도는 똥돼지와 비슷한 검은색 버크셔로 인해 혈통의 혼혈이 일어나기도 함. 
돼지가 많이 길러지니 부산물과 그것으로 만든 메뉴도 증가. 족발, 순대, 머릿고기, 순댓국, 돼지곱창 등이다. 돼지가죽 가공업도 늘고, 구두와 신발수출도 증가. 당연히 갈비도 흔해져서 갈비구이집이 서울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 용마갈비도 그즈음의 선택이었다. 미국의 농산물수입-식품산업의 구조변화-갈빗집 성행의 연쇄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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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의미

심리 2025. 4. 4. 07:05

- 갈증은 세상이 물이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세상에 물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갈증을 느낄 수 있겠는가? (프란츠 베르펠)

- 무의미는 세상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세상에 의미가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무의미하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빅터 프랭클)

- 의미에의 의지가 좌절되면 그 자리를 쾌락에 대한 의지, 즉 쾌락의 원칙과 권력에 대한 의지가 차지함. 쾌락의 원칙은 정신분석 심리치료에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핵심동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는 신경증의 원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우월성을 얻고자 하는 투쟁, 권력(힘)에 대한 의지라 보았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의 좌절된 의미에의 의지의 자리가 쾌락에의 동기와 권력에의 동기로 채워졌다는 것을 알지못했고, 신경증을 일으킨 원인이 단지 채워지지 않은 쾌락이나 권력에의 동기라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의미가 아니라 쾌락이나 권력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결과 의미에의 의지가 좌절된 자리를 쾌락에의 의지가 대체한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짐. 임상심리학자 루카으의 연구에 따르면, 빈의 시립 놀이동산 공원 프라터를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이 빈에 사는 일반 시민들보다 실존적으로 더 좌절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도 동일한 정도의 실존적 좌절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쾌락에의 의지는 인간의 자기초월성을 부정하고 반대할 뿐 아니라 자기초월성 자체를 좌절시킨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얻지 못한다. 행복추구 자체가 행복을 방해한다. 행복은 추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오는 것이다. 즉 행복이란 오직 자기초월적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다. 삶의 의미를 실현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행복은 자동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행복을 목표로 하면 할수록 그 목표는 더욱더 빗나가게 된다. 이는 특히 불감증이나 발기부전 같은 성적 신경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적 행위와 경험은 그 자체가 주의(관심)의 대상이 되거나(과도한 숙고) 의도하는 목적(과도한 의도)이 되는 경우 방해를 받게 된다.

- 의미는 발견하는 것. 주어질 수 없다. 그리고 의미는 스스로에 의해, 즉 자신의 양심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의미를 준다는 것은 결국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잘못인지 윤리적,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만약 이미 존재하는 윤리적 기준을 갖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외부에서 판단해 말해준다면 인간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반하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더 이상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것이란 본질적으로 존재의 의미 실현을 돕는 것이며, 악한 것이란 존재의 의미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따. 윤리적, 도덕적 가치는 존재론적이어야 할뿐 아니라 실존적이어야 한다. (존재론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말하며, 실존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넘어서 삶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을 말함. 따라서 도덕적 가치또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넘어서 삶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실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의미를 줄 수 없으며, 교수가 학생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 교수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진리탐구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교수는 진리탐구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실존적 삶의 모범으로 학생에게 보여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온전한 자신의 존재로부터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이 바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인 것이다.

- 초월성이 인간실존의 핵심이라는 것은 로고테라피 원칙중 하나. 이 원칙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향할 때 인간이 진정으로 실존한다는 것. 인간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할까? 이 말은 인간은 자기자신을 인식하고 실현하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일까? 나는 인간은 가치를 의식하고 실현하는 존재라 말하고 싶다. 인간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혹은 누군가를 위해, 즉 어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동료를 위해 혹은 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때만 오직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만약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한 의미에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존재 자체의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 의미에의 의지
로고스란 그리스어로 의미라는 뜻.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어 빈의 3대 심리치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의미추구에 초점을 맞춘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미추구의 노력을 인간의 1차적 동기로 설명. 이것이 바로 내가 의미에의 의지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중심으로 하는 쾌락의 원칙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 강조하는 권력에의 의지아 대조되는 것으로 말하는 이유다.

- 의미에의 이지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이다. 만약 의미에의 의지가 인간을 움직이는 1차적 동기라는 나의주장에 증거가 필요하다면 몇년전 프랑스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통계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89%가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61%는 자신의 삶에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것이나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응답했다.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도 환자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여론조사를 해보았다. 조사결과는 프랑스에서 수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결과와 거의 똑같이 나왔다. 차이는 2%에 불과했다.

- 적당한 정도의 긴장이란 이미 성취한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이며, 이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사이의 차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정신건강과 심리적 안녕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실현해야 할 잠재적 의미에 대한 도전에 주저해서는 안되며, 그럼으로써 잠재된 의미에의 이지를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인간에게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균형의 유지 혹은 생리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가정이 정신건강 예방차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치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이다. 즉 어떻게든 긴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완수되기를 기다리는 자신의 잠재적 의미에의 소명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내가 영적 역동성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즉 한쪽 끝에는 완수되어야 할 의미가 자리하고 다른 한쪽 끝에는 그것을 완수할 인간이 자리하는, 의미와 인간 사이의 긴장이라는 축에 놓인 영적 역동성이 필요.
그리고 영적 역동성이 정상적인 사람에게만 필요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경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필요함. 만약 건축가가 약해진 아치형 문을 튼튼하게 하고 싶다면, 문 위에 더 무거운 것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문의 부속품들이 더욱 단단하게 조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치료자가 환자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삶의 의미를 향한 재교육을 통해 환자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 지난 반세기 너무나 오랫동안 정신의학은 인간의 마음을 단지 기계적 측면에서 해석하려 해왔고, 결국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는 주로 기법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황이 끝이 났다고 믿는다. 이제 동이 트며 나타나는 것은 심리학화된 의학에의 그림이 아니라 인간화된 정신의학이라는 그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주된 역할이 기술자라고 해석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질병 뒤에 숨겨진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단지 기계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셈이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물건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다.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는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살아 있는 생지옥의 실험실 같았던 나치 수용소에서 나는 인간의 그러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존재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 누군가는 돼지처럼 행동했는가 하면 누군가는 성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은 돼지 혹은 성자라는 두가지 잠재성을 자신 안에 모두 가지고 있다. 돼지나 성자 중 어떤 것이 될지는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2차대전을 겪은 세대인 우리는 인간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험적 방식으로 깨달아가고 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발명한 존재다. 그러나 또한 허리를 꼿꼿치 세우고 주님의 기도를 드리며 가스실로 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 인간은 자시 자신을 무시하고 잊을 수 있을 때만 세상 속에 있는 것과 세상의 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근원적 진리를 상기할 대 이러한 주관주의적 사고가 진정한 인간의 인지해우이의 핵심을 간과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관심을 자기 이외의 주변으로 옮겨갔을 때만 자신을 넘어서 온전하게 대상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겠다. 만약 눈이 눈 자체를 바라본다면 눈은 병에 걸리게 된다. 눈이 눈 자체를 보면 볼수록 세상과 세상 속의 대상을 더욱 볼 수 없게 된다. 눈의 볼 수 있는 능력은 눈이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달려 있다. 인간의 유한한 인지능력은 인지작용의 내재된 주관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인지작용이 단지 자기표현이 되고 주체 자신의 구조를 투자하면 할수록 인지작업은 점점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댜. 즉 인지란 자기표현과 반대될 때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초월성을 포함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인지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을 개별적 존재로 한정한 이러한 이론들은 항상성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긴장의 감소에 기반을 두든 혹은 자아실현에서와 같이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들을 최대한 많이 실현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든 뭔가 결여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인간에 대한 관점은 오직 항상성을 넘어서서, 그리고 자아실현을 넘어서서, 심지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의미와 가치라는 객관적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존재 초월성의 영역으로 넘어갔을 때 비로소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역설적 의도에는 건강한 유머감각이 내재되어 있다. 유머는 어떤 것과 자기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하는 탁월한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유머가 왜 역설적 의도에 내재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머는 인간이 자기와 거리를 두고 자신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어려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유머는 영적 차원에 속한다. 

- 호주 원주민이 사용하는 부메랑은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온다. 그러나 실제 호주에서 내가 들은 이야기는 부메랑은 던진 사람이 목표물을 놓쳤을 때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목표를 놓치게 되어 결국 부메랑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삶은 세가지 방식으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세상에 주는 것(창조적인 일)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둘째,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가치난 자연 그리고 문화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셋째,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운명적 상홍(불치병, 암)에 용기있게 직면하는 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도고통, 죄책감, 죽음이라는 삶의 3대 비극을 피할 수 없다. 고통이란 말 그대로 삶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하며, 죽음과 죄책감은 인간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과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성을 의미한다.

- 오늘날 의사들이 만약 자신들의 책임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 자체에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삶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용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이나 삶의 의미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절망감은 사실 질병이 아니기 때문. 오히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과거에는 회의적 사람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성직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도움을 받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이러한 사실은 의사에게 신체적, 심리적 질병을 넘어 환자를 단지 병자로서만이 아니라한 인간으로서 이들의 요구에 반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준다. 환자의 신체적, 심리적 측면보다 삶의 의미와 같은 영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환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고 이들의 삶의 의미의 문제에 반응하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의 한계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 환원주의는 미국에서 인간을 사물화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단순히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인간을 그렇게 다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을 사물화하는 데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미국의 젊은 사회학자인 톰슨의 말을 인용하자면, 최근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간은 의자나 책상처럼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인간은 살아 있다. 만약 자신의 삶이 의자나 책상과 같은 단순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은 자살하게 될 것이다."

- 젊은이들이 실존적 공허라는 상황이 신경증의 증상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존적 공허를 느끼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실존적 공허를 느낀다는 것은 바로 어딘가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존적 공허의 느낌을 통해 우리는 의미를 찾아나설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이는 젊은이들에게는 특권입니다. 따라서 의미가 인간존재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존재의 의미라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도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실존적 공허란 부끄러운 신경증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인간성취입니다. 굳이 이를 신경증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이는 집단적 신경증일 것입니다. 집단적 신경증이란 인류 전체의 신경증입니다.

- 심리치료는 프로이트 시대 이후 두단계로 발전해왔다. 첫번째 단계는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자동반사적 존재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로의 단계이고, 두번째 단계는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의 단계다.
이 두단계들은 필연적인 것이었는데, 첫번째 단계는 인간이란 절대 순수본능과 자동반사만으로 그려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며, 두번째 단계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그림은 인간이 그저 자율적으로 어떤 것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라는 틀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초월성이라는 개념을 인간본성을 설명하는 데 포함시키거나 심지어 인간의 질병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적용할 때조차도 이를 이제는 그리 귀에 거슬리게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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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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