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세기에 막 들어섰을 무렵 교황은 상인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12세기 말에 교황은 호모보노라는 상 인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면 가난해야 한 다는 생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과 돈 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지만, 아퀴나스가 살았던 시대의 상 인들은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었다. 1253년 이 탈리아의 어느 회사에서는 손으로 쓰는 장부를 마련했는데, 거기 에는 '신과 이익의 이름으로'라고 적혀 있었다. 하느님의 경제가 상업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어우러지고 있었다.
- 지폐와 동전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저 화폐에 가치가 있다고 모든 사람이 합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상주의 시대에는 물건을 사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금뿐이었고, 상업이 확장하면서 음식, 토지 혹은 노동력 등 생활에 필요한 유용한 대 상은 금을 써서 사야 했다. 오늘날에는 정부가 화폐를 인쇄해 돈 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당시의 왕과 왕비는 국경을 수비하는 데 필요한 군대와 성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실 제로 금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므로 때로 중상주의자들의 금 사랑은 알려진 것만큼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경제사상은 사회 가 처한 환경과 관련되어 있으며, 아주 오래전 그 시절의 환경은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과 상당히 달랐다. 과거를 되돌아볼 때 사 람들은이 점을 쉽게 간과한다.
- 중상주의자는 수입품을 나쁜 것이라 여겼지만, 현대 경제학 자는 이를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중상주의 시대의 시각으로는 영국이 네덜란드에 못을 팔면 영국은 이득(못윤 판매한 대금)을 얻고 네덜란드는 손해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이 원하는 게 영국 못(아니면 러시아산 천갑상어 알이나 프랑스 치즈)이 라면 수입품도 나쁜 게 아니다. 수입품은 보통 경제 진보에 필수 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도시로 식품을 운송하기 위한 마차를 만 드는 데 튼튼한 외국산 못을 사용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영국이 네덜란드에 못을 팔아 양국이 모두 이득을 얻는 셈이다. 영국은 돈을 벌고 네덜란드는 품질 좋은 못을 싸게 얻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가 중상주의를 비판한 건 18세기 말의 일이었다. 동시에 영국으로부터 아메리카 식민지가 분리해나가면서 영국 은 또 한 번 타격을 입었다. 영국은 식민지를 통제해 자국 상인들 이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확보했지만, 식민지에서 영국의 통 치에 저항하며 독립을 선언하자 영국 정부는 더 이상 자국 상인 들에게 시장을 보장할 수 없었다 토머스 먼과 같은 사상가는 두 시대를 아울렸다. 하나는 중세시대로, 중세의 경제생활은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돈보다 종교와 개인적인 친분을 바탕으로 하는 유대 관계가 중심이 되었다. 다 .른 하나는 이제 막 시작된 산업 시대로, 이때는 돈이 경제를 지배 했고 사람들의 경제생활은 지역과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중상주 의자는 이러한 두 시대를 연결했다. 중상주의자는 도덕보다 자원 과 돈을 강조하며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며, 뒤이어 나타난 여러 경제사상에 영향을 준 특징을 나타냈다. 중상주의자 는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니는지 아닌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돈이 새로운 신이었다. 상업에 종 사하는 사람이 더 큰 힘을 얻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은 교역이나 돈벌이가 아니라 기사나 왕의 명예와 용기를 중시하는 기사도에 가치를 둔 엣 삶의 방식이 끝나가는 걸 에석하게 여겼다. 1790년 아일랜드의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에드먼드 버크는 '기사도의 시 대는 저물었다'라고 했다. '경제학자와 계산기의 시대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유럽의 영광은 영원히 사라졌다.
- 케네는 경제행위를 묘사하는 법칙을 찾으려 했고, 경제모형 통해 이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현대적인 사상가였다 오늘날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방법론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케네 이전의 시대에는 종교와 전통이라는 렌즈를 통해 경제를 바라보 거나, 혹은 (중상주의자가) 종교를 배제했을 때도 생각이 대립하 며 피어난 희뿌연 안개 속에서 경제를 바라보았을 뿐 명확한 원칙을 통해 경제를 파악하지 않았다. 케네는 경제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가장 좋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가 지닌 신념을 당시에 이미 예상했다.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게 대개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으로, 예를 들어 무거운 세금을 지 나치게 많이 부과하는 것 등의 일이다. 케네는 경제적 가치의 원 천을 돈만이 아니라 밀, 돼지, 생선과 같은 확고한 실물에서 찾았 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상가였다. 하지만 경제적 가치의 원천을 농업으로 한정한 탓에 중농주의자들은 과거에 갇혀 있는 셈이었 다. 중농주의자들이 글을 쓴 시기는 유럽을 뒤바꿔놓은 경제 혁 명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경제 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조업자들 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들거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함으로써 경제적 가치를 새로 만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이 주는 풍족한 선물은 강과 들판에서만이 아니라 공장에서도 열매를 맺게 되었다.
- 결국 케네는 프랑스 경제체제의 비판자인 동시에 옹호자였 다. 그는 프랑스의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대담한 주 장을 펼쳤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건 귀족들이 소중히 여 긴 특권이자 사회 내에서 귀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케네는 마찬가지로 대담하게도 프랑스의 왕이 경 제 발전을 억누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케네는 왕의 노 여움을 사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라보는 책 때문에 투옥되었지만 이후 퐁파두르 부인이 풀려나 도록 도와주었고, 케네는 장수해 왕보다 몇 개월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케네는 부유하고 힘 있는 귀족의 커에 거슬리는 주장 을 펼치는 위험을 감수했지만, 귀족에게 충성을 다했다. 왕과 풍 파두르 부인과 함께 케네는 궁정 회랑을 걸어 다니며 모여든 사 람들을 만나는 나날을 보냈다. 케네는 왕과 왕비가 이끄는 유럽 의 '구체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고, 귀족과 소작농으로 계층을 나누어 구분하는 사회에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케네는 왕이 경 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매사를 다스리는 전능한 군주가 있기를 바랐다. 케네처럼 대담한 경제학 자라도 대개 사회 내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계층이 정한 방식 안 에서 생각해야 한다. 케네가 사망한 후 1789년 강력한 혁명이 일어나 왕, 귀족,농 민으로 이루진 구체제가 산산이 조각나자 프랑스의 귀족은 피바 람 속으로 힙쓸려갔다. 이후 경제학자들은 절대군주의 권위에 바 탕을 둔 케네의 사상을 저버리게 되었지만, 케네는 현대 경제학의 형태를 갖추는 길을 열어주었다.
- 리카도는 지주가 지닌 힘이 경제를 끌어내린다고 말했다. 자 본가가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을 만들고 키우면 경제 내 생산이 늘어난다. 하지만 수익이 줄어 자본가가 투자할 돈이 적어지면 부를 만들어내는 속도도 느려진다. 지주는 그저 지대를 거둬들이는 행위만으로 부자가 된다. 지주는 자본가처럼 수입을 투자하는 대신 하녀나 집사를 부리고, 저택에 서재를 만들거나 정원에 심을 식물을 구해오라며 열대지방에 탐험대를 파견하는 데 돈을 들인다. 그 어느 것도 나라의 장기적인 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카도가 살았던 시대의 영국에는 해외에서 값싼 곡물을 들여오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의 불균형은 지주 에게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 '곡물법conLaw'이라불린 이법 때 문에 영국은 늘어나는 인구가 먹고사는 데 필요한 곡물을 추가로 수입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곡물 가격은 한층 더 비싸졌다. 리 카도의 추론에 따르면 곡물법은 지주가 거뒤들이는 지대를 부풀 리고, 자본가가 얻는 이익을 줄였으며, 노동자를 가난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1819년 맨체스터의 세인트 피터스 필 드에서는 보통선거 시행과 곡물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 다. 그런데 군부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해 여러 명이 죽고 수백 명 이 다치면서 시위 장소는 피바다로 변했다. 이날의 사건은 워털루 전투에 비유해 '피털루 학살 Peterloo Massacre'로 알려지게 되었다.
- 오늘날 '인구 폭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개 맬서스의 이론을 빌려온다. 그리고 그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세상이 불편할 정도로 좁아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맬서스 가 쓴 글 중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가 인구 증가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한 부분이다. 맬서스는 사회가 인구를 먹여 살릴 방법만 있다면 인구가 많은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밀서스는 아마 스크루지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맬서스의 친구들은 그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비열한 구두 쇠는 전혀 아니었다. 오늘날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연구하는 경 제학자들은 거대한 인구는 건강한 경제와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원을 써버리지만, 또한 새로운 자원을 만들어낸다. 더 많은 사람은 더 많은 두뇌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사회의 부를 만드는 방법에 관해 새로운 아이디어도더 많이 나올 것이다.
- 제번스와 마셜 이전 시대에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다소 다채 로운 성격을 지녔다고 보았다. 애덤 스미스가 그린 경쟁 속에서 상인은 최상의 조건으로 거래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며 흥정하 는 모습이었고, 맬서스가 설명한 가난한 이들은 토끼처럼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이제 경제학자는 무대 중심에 새로운 인물, '합리 적 경제인ralional economic man'을 등장시켰다. '합리적 경제인'은 한 계비용과 한계이익을 가능해 무엇을 해야 할지 의사 결정을 내린 다. 예를 들어 숟가락의 가격과 효용을 비교하는 식이다. 경제 내 에는 이러한 계산을 완벽하게 해내는 냉철한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런 경제는 차분하고 조화로워 보이며, 이전의 경제학자들 이 경제를 바라보는 방식과 상당히 다르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온통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기만 하는 체제였다. 경제적 가치를 만드는 건 노동자이지만, 그 대부분은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가져가버린다. '합리적 경제인'의 세상에는 그저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착취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얼 마나 일해야 할지까지 한계효용의 법칙을 이용해 정한다. 한 시 간의 여가(축구를 하거나 영화관에 간다)에서 얻는 한계효용을 확인하고 그 시간에 일하면 받는 임금과 비교하는 것이다. 만일 한 시간 동 안 축구를 했을 때 얻는 효용이 크다면, 그 시간에 일해서 받는 임 금이 정말 많지 않은 이상 일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무자비한 자본가가 더 이상 우리의 시간을 지배하는 일은 없다 마셜이 주창한 경제학은 '신고전주의 neoclassical' 경제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전개한 '고전주의cassica' 경제학의 내용을 발전시킨 이 론이다. 고전주의 경제학은 시장이 경제를 어떻게 작동시키고 번 성하게 하는지를 연구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합리적인 개인 이 시장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그 방식을 연구했다. 경제학은 노동이나 금처럼 근본적인 가치 수단을 찾는. 일을 그만두었다. 가치는 수요와 공급에서 비롯되는 상품의 가격일 뿐이다. 진귀한 . 와인의 가격이 비싼 건 제한적인 공급량에 비해 수요가 넘치기 때문인 것이다. 19세기의 사회적 압박이 완화되면서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 장했다. 산업혁명으로 평범한 사람도 레이스 장식 모자와 중국 산 찻잔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경제의 표면 아래에서 느껴지던 긴장감(마르크스가 뮤시 우려했던 부분이다)은 밀려났다. 그리고 이런저런 한계효용의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는 '합리적 경제인'이 인간의 행동 방식을 바라보는 경제학자의 주요 이론이 되었다. 일각에서 는 '합리적 경제인'이란 완전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경제학자가 진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모든 이론은 현실을 단순화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문제는 어디까지 단순화해야 하는가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일부 경제학자조차 '합리적 경제인'은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했다.
- 리스트에게 자유무역의 원칙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유효한 게 아니었다. 자유무역은 경제 발전의 단계가 같은 국가나 지역 사이에서만 유익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독일의 여러 지방 처럼 말이다. 하지만 경제 발전의 단계에 큰 차이가 있는 나라 사 이에서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선진국의 산업이 상대국의 산업 을 간단히 쓸어버린 수 있기 때문이다. 리스트는 영국 경제학계 의 '세계주의cosmoplianism'를 비판했다. 영국 경제에 적용되는 이 론이 프랑스, 독일, 혹은 러시아에도 적용되므로 영국에 자유무 역이 도움이 된다면 다른 나라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식의 생각 을 비판한 것이었다. 자유무역이 진짜 의미하는 바는 영국이 다 른 나라의 경제를 지배할자유였다. 19세기는 보봉 자유무역의 세기로 불리는데, 고전주의 경제 학자의 이론이 움았음을 입중한 시대였다. 1840년대에 영국은 곡물법을 페지했다. 곡물법은 해외에서 영국으로 들어오는 곡물 의 수입을 막아 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영국 농업을 보호한 법 이었다. 곡물법 폐지는 자유무역을 항해 한발 나아가는 일이었 다. 19세기에 걸쳐 나라 간 교류가 중대되었고, 세계 경제가 만들 어졌다. 그속에서 사람들은 밀, 면화, 차 등을 비롯해 온갓 상품을 국경 너머로 사고파는 게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때로 자유무역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자유무역을 강제로 시행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과 전쟁 을 벌였다. 영국의 무역업자가 중국에서 아편을 판매하는 걸 중국 정부가 막으려 한 것도 어느 정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중국이 전쟁에서 패했고, 영국은 중국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켜 영 국상품을 판매했다. 이는 리카도가 자유무역을 바라본 방식과 전 혀 달랐다. 리카도가 그린 자유무역은 나라 간에 완전히 자발적 인 의사로 상품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19세기 동안자유 무역을 향해 니아갔지만, 여전히 보호무역 장치가 많이 남아 있었 다. 리스트는 유럽에서 선진 경제가 발전하는 데는 보호무역 조치 가 필수였으며,이는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대다수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 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편에 서 있고 유치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는 리스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보호무역은 산업에 무능과 낭비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기업 간 경쟁은 경제에 도움이 된다. 질 나쁜 상품을 만드는 기업은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사가 썼던 노동력과 건물은 더 나은 상품을 만드는 기업에 서 사용할 수 있다. 경제학자는 보호무역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 나지 않게 될까 우려한다. 보호무역은 비효율적인 기업이 시장에 남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했다. 그 결과 여러 나라에 비효율적이고 수익성이 없는 회사가 많아졌다.
- 겉보기에 자본주의는 고대 부족사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다. 고대 부족사회에서는 비가 오기를 기원하며 춤을 추고, 신께 제물로 동물을 바치고, 이웃 마을에 조개껍데기를 선물했 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적인 사람은 상품을 사고팔며 이윤을 창출하는 일을 한다. 베블런은 자세히 살펴보면 원시 부 족의 관습이 현대 경제에도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완전히 합 리적인 사람처럼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물건을 산다. 가장 최근에 산 티 셔츠를 떠울려보자. 티셔츠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고 하지만, 친 구들이 보면 좋아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친구가 보고 비웃을 것 같다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그 티셔츠를 샀을까? 초기 사회에서는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권력을 지님으로 써 타인의 인정을 받았다.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사람들이 식량 재배와 상품 생산을 더 잘하게 되면서 잉여분이 생겨났다. 그 덕 분에 성직자와 왕, 전사는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다. 은으로 만든 잔과 정교한 머리 장식, 보석이 박힌 칼 등 이들이 지닌 귀중 품이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평범한 일을 하는 건 품위 없는 짓으 로 여겨지게 되었다. 베블런에 따르면 어느 폴리네시아 추장은 하 인이 모든 일을 해주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직접 접시에서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이느니 굶는 편을 택했다고 한다. 베블런은 현대 미국 경제에도 같은 본능이 존재한다는 걸 확 인했다. 신흥 부자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주식과 물려받은 재 산에서 얻는 이자로 생활했다. 폴리네시아 추장과 마찬가지로 미 국의 신흥 부자도 일할 필요가 없다는 점(여가 활동을 즐기거나 명품을 사 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 베블런은 미국의 신 홍 부자가 저택과 모피 코트를 사고 프랑스 리비에라 지방으로 여행하는 모습을 '과시적 소비 conspicuous consumption'라 불렀다. 과시적 소비는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구매하는 행위다. 베블런 은 과시적 소비를 할 수 있는 소수의 특권 계층을 '유한계급 leisure class'이라 불렀다.
-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명석한 지성과 예리한 재치를 뽐내길 좋아했다. 한번은 슘페터가 자신에 게 세 가지 야망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건 바로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 오스트리아 최고의 기수, 그리고 빈 최고의 연인이 되 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중 두 가지밖에 이루지 못했다고 애석해 하며 안타깝게도 최근에 승마가 잘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 농담은 습페터가 얼마나 모순적인 사람인지를 잘 말해준 다. 습페터는 최고의 명문 학교에 다녔고, 상류 사교계를 드나들 었다. 때문에 그는 옛날식 예의범절이 몸에 배었는데, 그 모습은 대담한 남성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여성에게 구애하는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습페터는 가장 현대적인 학문 분야인 경제학에서 위대한 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경제학은 철학이나 수학 같은 기존 학문과 비교하면 매우 새로운 학문이었다. 학생들은 습페터의 고풍스러운 화려함에 놀라고, 최신 경제 학 이론에 쏟는 애정에 또 한 번 놀랐다. 슘페터는 오스트리아-헝 가리 제국 끝에 있는 작은 마을의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최 신 경제학 서적을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하려고 도서관 사서와 결 투를 벌였다. (그 결과는 검으로 사서의 어깨에 상처를 남긴 슘페 터의 승리였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슘페터는 강의실에 들 어올 때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빠르고 힘찬 발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와 코트를 벗고, 모자를 벗고, 마침내 장갑까지 벗으면(손가락을 하나하나색 잡아당기며 벗었다) 빙 그르르 뒤로 돌아 귀족적인 빈 억양으로 경제사상의 내용을 세세하게 가르쳐 학생들을 감탄케 했다.
-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습페터의 관점은 앞서 살펴본 마설과 제번스가 지녔던 전통적인 관점과 달랐다. 전몽 경제학에서는 경 제를 마치 스냅사진 보듯 정적인 상태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슘 페터는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계속 변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일 반적인 스냅사진과 같은 경제에서는 어떤 상품을 매매할 수 있 는지 모두가 알고 있으며, 대체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문다. 시장에서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공급하는 수많은 기업이 경쟁하 기 때문에 기업이 큰 이익을 얻지는 못한다. 이때 경제는 '균형 equilboium' 상태에 있다고 한다. 전통 경제학에서는 경제 내 자원 을 주어진 것으로 보며, 모든 자원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 살 펴본다. 새로운 상품을 발명하는 기업가는 없고, 사람들은 그저 아는 상품만 사고팔며 효용을 극대화한다. 슘페터는 균형을 이 문 경제는 사실 정지화면에 갇혀 있는 셈이라는 걸 보여준다. 슘 페터는 '정말 불쌍한 인물은 늘 불안하게 균형을 찾아 헤매는 경 제행위자다'라고 말한다. '그런 경제행위자에게는 야망도, 기업 가 정신도 없다. 간단히 말해 그는 힘도, 생명도 없다.' 슘페터가 보기에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연못에 끊임없이 돌을 던지는 기업가였다. 창조적 파괴가 일으키는 파문은 결코 사그라 들지 않는다. 마셜이 이야기한 경제에서 기업은 석유램프를 두고 가격 경쟁을 벌인다. 습페터가 보는 경제에서는 성공한 기업가가 전구를 발명해 경쟁자를 날려버린다.
- 1940년대까지 경제학자는 대부분 시장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익이 생긴다는 시장의 약속이 있으면 기업가는 공장 을 짓고 전화선을 부설할 터였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개발경제 학자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시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 . 했다. 루이스는 개발도상 경제에서 농촌의 풍부한 노동력을 공장 으로 보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로젠스타인 로단 은 그러한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이익은 남기려면 한 공장이 다른 공장에 의지해야 한 다는 점이었다. 새로 지은 정어리 통조림 공장이 돈을 벌려면 봉 조립을 팔아야 한다. 누가 그 통조림을 살까? 전통적인 경제 부문 에서 일하는 사람은 버는 돈이 매우 적으므로 정어리 통조립을 사 먹을 만한 여유가 없다. 정어리 통조림 공장의 직원은 임금 중 일부로 통조림을 구매한다. 임금 전부를 쓰지 않는 건 신발도 사 고 싶기 메문이다. 만일 동조립 공장과 동시에 신발 공장이 문을 연다면 신발 공장의 노동자는 정어리 통조림을 사고, 정어리 통 조림 노동자는 신발을 살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공장이 다른 공 장의 상품을 거래하는 시장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산업화가 이루 어지기 위해서는 농사짓는 땅에서 벗어난 노동자가 여러 산업으 로 동시에 투입되어야 한다. 여러 공장을 함께 가동하면 수익이 생기겠지만, 각자 하나씩 운영하면 수익을 내지 못할 것이다. 그 러므로 나라 안에 다른 산업이 부족한 경우 정어리 통조림 공장 을 세우려는 사업가는 공장 건설을 미문다. 항구와 금속 공장, 조 선소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함께 건설해야 한다. 개발도 상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전부 갖춘 상태로 나아가야 하 고, 그래서 로젠스타인 로단은 오직 정부만이 경제가 도약할 시 간을 정확히 맞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경제 내 수많은 부문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했고, 로젠스타인 로단은 이 를 '빅 푸시big push'라고 불렀다.
- 가난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 부유한 나라로부터 수입하 는 자동차 수요가 늘어난다. 하지만 부유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 가난한 나라로부터 수입하는 설탕 수요는 그보다 휠씬 적게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자동차 가격은 설탕 가격보다 빠르게 높아진다. 가난한 나라의 '교역 조건ierms of rade'이 더 나빠지는 것이 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국민이 자동차를 더 많이 원하면 자동차를 사기 위해 설탕을 더 많이 수출해야 한다. 여기서 악순 환에 빠진다. 가난한 나라는 자동차를 사기 위해 설탕 생산에 더 욱 집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설탕 1톤으로 살 수 있는 자동차 대수는 점점 적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가난한 나라의 경제는 부 유한 나라만큼 빨리 성장할 수 없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 자 동차 수요가 늘어나지만, 설탕 수출에서 얻는 수입으로는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 19세기의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했던 밝은 전망과는 크게 다르다! 자, 이제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교역하면 가난한 나라는 값싼 설탕과 커피만 수출하는 함정에 빠져 부유한 나라에 언제나 뒤처지고 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가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프레비시는 가난한 나라가 생산을 특화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생산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했다. 즉 여러 가지 다른 상품 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설탕과 커피도 생산하고, 자동차와 텔 레비전도 생산해야 한다. 설탕을 수출해서 번 돈으로 외제차를 사는 대신 외제차의 수입을 금지하고 국산 자동차 공장을 지어야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여러 나라가 프레비시의 조언을 따랐다.
- 화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케인스의 이론은 '통화 공급 증가->금리 인하->투자 증가->국민소득과 고용 증대'로 이어진다. 이는 이전의 이론과 다른 관점이었다. 케인스가 비판 한 당시의 전통 경제학은 '고전주의' 경제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 다. 고전주의 경제학은 18세기와 19세기 경제학자들의 사상이었 다. 고전주의 경제학에서는 화폐가 '실물' 경제에 전혀 영향을 미 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자동차나 벽돌의 생산량 또는 노동인구 의 수와 통화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돈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 때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정부가 통화량을 두 배로 늘리면 사람들이 쓰는 돈도 두 배로 늘어난다. 통화량 증가로 인한 유일 한 결과는 모든 상품의 가격이 두 배가 되는 것뿐이다. 이를 '고전 학파의 이분법cassicaldichalomy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부문 간의 차이를 나타내는데, 경제의 '실물' 부문과 '통화' 부문 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케인스 경제학에서는 둘 사이의 구분을 허물었다. 이제 경제의 실물 부문과 통화 부문은 서로 이어져 있다. 통화량이 실물 경제, 즉 생산량과 고용률에 영향을 끼친다.
- 민스키의 이론에서는 금융위기와 뒤이은 경기 침체가 대출 자나 은행이 탐욕을 부려서 발생한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보다 깊숙한 원인은 금융에 바탕을 두는 자본주의가 미치는 영향 과 관련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간 경제성장이 이 어지면서 위기의 씨앗을 심었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나 런던 같은 금융 중심지에서 번드르르한 금융상품을 내놓아(특허 1980년대 이후 정부가 은행 업무에 관한 규제를 폐지한 이후부터 본격화했다) 성장을 부추기면서 자본주의는 더욱 무모해졌다. 그렇다면 '민스키 모멘트'가 아니라 '민스키 시대'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신 중함을 버리고 무모해지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