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을 기억하면 진짜 소중한 것에 집중하고 물질적인 욕심은 차츰 줄어들 것이다. 어차피 죽을 텐데 비싼 전자제품이나 고급 승용차에 매달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늘 내 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계속해서 물건을 사고 비싼 돈을 내면서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기업은 죽음과 가까운 것은 숨긴 채 젊음을 강조하고 늙지 않는(혹은 그래 보이는) 모든 것을 팔아댔다. 안티에이 징, 주름 개선, 거상 수술, 보톡스 등 '늙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많은 방법과 제품을 소비자에게 제안한다. 돈만 있으면 늙 지 않는 묘약을 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30년 전 50대와 지금의 50대를 비교해보면 같은 나이가 맞는지 믿기 어려울 만 큼 외모가 다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서 죽음을 지워버렸고, 그 대신 삭제 비용을 꾸준히 청구하고 있다
- 이런저런 얘기들을 떠나 여러분께 묻고 싶다. 당신에게 법적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 왔다. 당신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AI 판사에게 맡길 것인가, 아니면 인간 판사에게 맡길 것인 가. 인간이라고 말한 사람은 현 시스템에서 믿을 만한 구석 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기득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아는 변호사나 판검사가 없다면 AI 판사가 더 공정하 다고 여기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다수가 된다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나도 그런 세상이 낫겠다 싶다.
- 인간의 삶은 불안과 지루함을 반복하는 진자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극한의 공포와 불안 상황에서도 잡깐 의 짬이 나면 어떻게든 안정을 취할 이유를 찾고, 극락과 같 은 행복함 속에서도 금세 지루함을 느낀다. 그래서 많은 심 리학자나 현자가 행복을 조건이 아닌 태도라 하는 것이다. 굳이 따지면 행복한 사람이란 작은 일에도 행복의 요소를 잘 찾는 사람이다
어쩌면 발전을 위해서도 그다지 행복해야 할 이유는 없다. 행복감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라면 현재 삶의 조건에 만족한 다는 뜻이니 더 성장하기가 어렵다. 예민하고 불편한 게 많 은 사람일수록 자꾸 무언가를 바꾸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더 큰 보상을 하기 마련이다.
- 스스로를 괴롭혀 성공을 이뤄내든, 현재의 삶에 만족하든 그 것은 선택이며 어쩌면 천성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이지리아 인과 우리나라 사람은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아난다마 이드 수치가 크게 차이난다. 아난다마이드는 엔도르핀보다 효과가 열다섯 배나 강해 :몸속 마리화나'라고 불리는데, 많 이 분비될수록 현재 상황에 쉽게 만족한다고 한다
인류의 시발점인 아프리카에는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남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유럽과 인도 등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인 한반도까지 이동했다고 한다 불만족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추려진 끝에 남은 사람들만 이 나라에 눌러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별로 행복할 이유가 없 는 인류 중에서도 가장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 람들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한국이 전 세계에 서 가장 빨리 발전한 나라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 인간에게는 행복이 당연하지 않고, 힘들고 위험하고 고통스러 운 순간이 디폴트다. 가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때 행복한 순간이 잠깐 찾아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당장 힘들고 고 통스럽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일상을 보낸다는 사실 을 기억하자는 거다. 그리고 이 고통 앞에 무릎 끓지만 않는 다면 결국 내 삶은 이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또 이 과정에 서 고통이 잠시 사라질 때 느낄 행복감을 놓치지 말고 충분 히 즐겼으면 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행복 감을 느끼기 더 어렵다는 걸 알았다면, 내 불행이 꽤나 많은 사람과 '함께'라는 생각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 불안을 상태에 대한 형용사가 아니라 뭔가를 바꿀 수 있는 동사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불안해 죽겠어." 대신 "불안하 니 이걸 좀 해볼까." 하는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는 불안을 동사로 삼는 유전자도 갖고 있을 것이다. 불안을 상태로만 받아들인 조상들은 자연스레 도태되었을 테니 말 이다. 불안을 동사로 받아들인 조상들은 기후가 불안하면 더 좋은 땅으로 이동했고, 적들의 침입이 불안하면 더 좋은 무기를 만들어냈다. 그런 조상들의 후손이 우리다. 우리 앞에 는 불안을 이용할 수 있는 더 좋은 선택지가 얼마든지 놓여 있다. '불안해서 어떻다'가 아니라 '불안하니 이렇게 해보자', 이것이 우리의 본모습일 것이다.
-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도 사생활을 공개하면서 무리의 일원 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들은 약점 이상의 비루함 까지 공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 무리에서 가장 아 래에 놓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연예인은 유명세를 통 해 이미 위계의 최상단을 점한 까닭에 약점을 드러내도 괜찮 지만, 새로 무리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무리를 맞이하는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는 약점을 가장하되 진짜 약점은 쉽게 드러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의 사진과 메시지는 대체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먹고 경험하면서 '힘들었다', '겨우 이용 했다' 정도로만 요약된다. 돈과 시간을 여유롭게 쓴다는 직 접적 메시지보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돈 많은 너희 들의 문화에 나를 끼워줘도 괜찮다'로 넌지시 표현하는 것이 다. 강한 무리 사이에 끼고 싶다는 무언의 메시지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생활을 포기하면서 조금 더 높은 곳에 서고 싶어한다. 아니,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 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니 소셜미디어로 별 소득이 없는 진짜 높은 곳에 있는 강자들은 자신을 꽁꽁 숨긴다. 재벌이나 권력 자 혹은 부자 들이 사생활을 공개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가 끔 졸부가 된 사람만이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리지만 그들 역 시 이를 밥벌이 수단처럼 제한적으로만 활용할 뿐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키고 싶어할 사생활을 공개하는 이유 는 '더 높은 삶을 동경하고 그 무리에 끼고 싶은 내면의 욕망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자. 우리 성격이 공개하는 걸 좋아해서도 아니고 새로운 미디어 시대에 맞추려는 움직임 도 아니다. 이왕 소셜미디어를 하려면 내가 왜 사진을 올리 고 누가 좋아요를 누르는지 안달복달하는 이유 정도는 기억했으면 한다.
- 세상 어디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격차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다. 옆사람 그리고 앞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노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격차를 조금이 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 건지(물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 차이를 불평하며 앞서간 이들을 저주하며 살 건지 아니면 달콤한 사탕발림에 취해 현실을 부정하면서 살 건지는 온전히 각자의 선택이다.
- 젊었을 때는 워라밸 같은 철없는 얘기는 꺼내지도 말자. 지 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그렇게 한가롭게 살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쉬는 시간마저도 경쟁에서 살아남 기 위한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으로 쓴다. 굳이 따지면 라타밸(라이프타임밸런스) 정도는 고려해볼 수 있겠다. 인생의 전반기는 열정적으로 살고, 경제적 안정을 이룬 후에는 조금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겠다는 계획 말이다.
워라밸은 애초에 성립하기 어렵다. 일단 일은 삶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이 일에 포함되기 때 문이다. 출근하기 위해 양치질하고 머리 감는 것, 좋은 직장 에 들어가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것, 영업직 사원이 깔끔한 정장을 사거나 해외 바이어와 소통하기 위해 영어 회화를 배 우는 것 모두가 업무 시간 이외의 일임에도 일과 연결된다 분리가 안 되는데 어떻게 밸런스를 잡겠다는 건지. 워라밸 같은 달콤한 단어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조심, 또 조심할 일이다.
- 결국 많은 사람이 기념일에 매달리는 데는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는 바람,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욕망, 억지로 숫자 를 끼워 맞취서라도 자존심을 세우려는 보상심리가 숩어 있 다. 어떤 이유로든 애처롭다. 농경사회처럼 밥줄이 걸린 일 도 아니고, 근대화 과정에서처럼 집단의 강요나 억압적 분위 기 때문도 아니고, 그저 존재를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의미 없는 숫자에 스스로를 묶는 모습이라니. 길 가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쇠말뚝에 온몸을 묶고, 풀리 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낑낑대는 모습 같지 않은가. 누 가 협박한 것도 아닌데 혼자 그 숫자에 매여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별것 아닌 그 하루에 기뻐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 슬픈 날로 만들어 스스로를 패대기치는 이 어리석은 사 람들을 어찌해야 할까.
- 우리의 인생이 평등하지 않듯 기회의 평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어 유치원부터 시작해 대학은 해외에서 유학한 뒤 취미가 해외여행과 골프인 채로 사회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골프장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청춘을 보낸 사람도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우린 한 순간도 평등할 수 없다. 단지 평등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정치인들의 사탕발림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수십 억짜리 아파트를 사들이는 힘은 사람들에게 그 환상을 파는 것에서 생긴다.
- 힘들 수 있다. 그렇다고 굳이 힘듦을 부추겨 더 힘든 것처럼 살지는 말자. 그리고 고통을 과장하고 위로를 강조하는 사람 들을 조심하자. 나의 아픔에 진정한 위로를 건내는 사람은 가족 외에 거의 없다. 대중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과 정치하는 사람이 위로할 때는 반드시 이면에 다른 이유가 숨 어 있기 마련이다
- 거의 모든 과학자가 우려하는 것처럼 폐그물과 폐어구가 유 발하는 해양오염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이건 회수 비용을 않게 해야 한다. 해양 오염 플라스틱의 98퍼센트는 이런 어구들이다. 바다 생물들이 죽어나가는 주요 원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환경단체 들이 마치 플라스틱 빨대가 주범인 것처럼 주장하는 바람에 어느 날부터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 래서 우선순위와 실현 가능성을 가는하자는 이야기다. 심각 하고 중요한 환경문제는 뒤로하고, 지엽적인 문제에만 매달 려 있다가 핵심을 놓치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빨대 사태'는 시작부터 결말까지 코미디 그 자체였다. 해양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돼 규제가 시작된 것, 그 대안으 로 종이 빨대가 급속히 퍼진 것, 알고 보니 종이 빨대도 플라 스틱 성분으로 코팅되었다는 것, 건강에도 좋지 않고 종이와 코팅이 분리되지 않아 재활용도 안 되는 것, 매립이나 소각을 하면서 환경에도 건강에도 더 유해한 것, 심지어 제작 과 정에서 플라스틱 빨대보다 탄소 배출이 더 심하다는 것, 플라스틱 빨대에 비해 가격이 세 배 이상 비싸 카페도 소비자 도 손해만 봤다는 것, 결국 플라스틱 빨대 사용 규제 정책을 철회하면서 혼란만 가중됐고 카페는 잔뜩 남은 종이 빨대 때 문에, 생산 설비를 늘린 공장은 과하게 생산한 종이 빨대 때 문에 손해를 봤다는 것 등이다. 한마디로 환경단체의 선동에 나라 전체가 일대 혼란만 겪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으나 제 자리가 어딘지 도무지 찾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환경단체는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선의에 따라 이 일 을 시작했지만, 세상은 감성에 젖은 구호만으로는 바뀌지 않 는다. 이런 비슷한 예로는 굶주린 북극곰 사진도 있다. 북극 곰의 개체수가 역대급으로 많아졌는데도 마치 멸종 위기에 놓인 것처럼 연출해 사실을 오도하고 있는 것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라도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으면서 거짓으로 호도하면 이처럼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고, 결국 처음의 선한 의도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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