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의 재료로 주목되는 것이 원산지를 과학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흑요석이다. 용암이 지표면에서 급속히 굳어지며 형성되는 흑요석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칼, 화살촉, 도끼 같은 무기도구로 이용됨. 이미 10만~13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탄자니아 북부 뭄바 바위그늘 유적에서 나온 7개의 유물은 3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온 것. 에티오피아의 가뎁 유적과 킬롬베 유적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아슐리안 석기 전통의 주먹도끼가 나왔는데 이는 원산지에서 100킬로미터 가량 운반된 것.
- 치아로 판독한 나이에 비해 다른 뼈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거나 두께가 얇을 경우 인골의 주인공은 살아서 단백질 성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음. 또 두개골의 두개관부분의 밀도를 측정하거나 눈을 감싸던 부분의 다공성 여부를 통해 빈혈 여부를 알 수 있음. 비타민 D결핍은 구루병의 흔적으로 남게 되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골막하 출혈 흔적이나 손실된 이빨 개수를 통해 괴혈병 여부도 추론가능. 치아나 뼈에 남은 흔적을 통해 생애주기 중 언제 잘 먹고 언제 고생했는지를 유추할수도 있음.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공급 상태를 남기는 해리스 라인을 분석하면 배고픔과 기아의 고통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음. 이 같은 흔적을 근거로 젠슨스라는 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원시시대 크로마뇽인 인골의 88.2%는 사망시 연령이 40세 이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61.7%는 30세 이하에 죽었다. 네안데르탈 인골의 경우에는 40세 이하 사망률이 95%, 30세 이하 사망률은 80%에 달했다.
-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노예노동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지다보니 일각에선 노예제도가 기술발전을 지체시키는 요인이 됐다고도 분석. 하지만 실제로는 노예제가 그다지 경제적이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임. 앤터니 앤드루스에 따르면 노예에 투자하는 것은 수익이 상당히 적고, 토지만큼 안전한 것도 아니었음. 상인의 항해에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안전하긴 했지만 수익도 그만큼 적은 편인 경제행위였다. 노예공급이 풍부하고 노예가격이 저렴한 한도내에서만 노예투자는 합리적인 경제행위였다는 설명. 더글러스 노스도 고대 노예제가 중세 봉건제 장원경제로 넘어간 이유로 노예 시스템을 강요하는 비용이 많이 들고, 상대적으로 노예감시 및 감독비용도 다른 체제에 비해 부담이 컸기 때문이라고 분석. 노예제는 오직 노예가 수지맞는 장사일 때만 작동했던 셈이다.
- 관중은 '시장이 서야 생활이 풍요로워진다'면서 백성에게 잉여생산물의 판로를 제공해 수입을 늘림. 그리고 그는 소비를 장력. 근검절약만이 능사가 아니며 '안 쓰는 것보다 차라리 사치가 필요하다'는 입장. 상인들이란 이익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기 때문에 소비가 있으면 상인이 움직일 것이란 논리. 부유한 사람이 돈을 써야 가난한 사람에게 일자리가 생긴다는 낙수효과를 주장한 것도 관중이었다. 사람은 창고가 가득 차 물자가 풍복해져야 예절을 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복해야 영욕을 안다는 인간관을 가졌던 것. 실제 그는 흉년이 들어 빈민이 늘어나자 대규모로 궁전 확장공사를 실시해 일자리를 늘리기도 했음. 2700년 전에 이미 케인스식 불황 타개책을 내놓은 것. 하지만 이 같은 관중의 처방은 중국 사상사에선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상업발전이 농업의 경제구조를 뒤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에다가, 상인들이 사회지배층의 대항마로 크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집권층의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
- 로마제국 멸망후 이슬람 세력이 흥기하면서 동방과의 교역선이 끊긴 유럽은 자급자족 경제로 쇠퇴. 이전까지 갈리아에선 마르세유 등의 무역항을 통해서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피루스와 향류, 고급직물, 포도주, 올리브유 등 동방의 생산품이 수입됐다. 하지만 이들 시리아나 동방에서 갈리아 지역으로 수입되던 상품들은 8세기경에 이르면 수입로가 거의 완전히 막힘. 남아 있던 극소수의 무역선을 통해 동방에 내놓을 만한 것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수지타산도 맞지 않는 노예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연스레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상품들이 사라져갔다. 가장 먼저 파피루스가 없어졌다. 서유럽 지역에서 파피루스에 쓴 작품들은 대부분 6~7세기 이전의 것. 메로빙거 시대에는 왕실 사무국에서 파피루스만을 사용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파피루스에 비해 불편하고 질이 많이 떨어지는 양피지로 대체됨. 8세기 말까지도 약간의 개인문서에선 여전히 파피루스가 쓰였지만 이는 예전에 수입해 보관했던 파피루스를 이용한 것. 재고가 떨어진 뒤에는 예전에 수입해 보관했던 파피루스를 이용한 것이었다. 벨기에 출신 중세사가 앙리 피렌은 '갈리아에서 파피루스가 사라진 것은 상업이 쇠퇴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파피루스가 아니라 향신료에 대한 언급도 이 시대 사료에서 사라지기 시작. 이 시대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강제로 입맛도 단순해짐. 지중해에서 상업이 재개된 12세기가 돼서야 향신료는 서유럽 지역에 다시 등장. 가자 지방 특산이었던 와인수입도 끊겼고, 오일도 더 이상 아프리카에서 수출되지 않았따. 아프리카산 오일을 구하지 못하면서 프로방스 지방에서 생산된 대체품으로 오일수요을 메웠지만 역부족이었음. 결국 이 시대 이후부터 교회에선 기름을 사용하는 등잔불이 아니라 양초를 이용해 불을 밝히게 됐다. 실크도 더 이상 구경할 수 없게 되면서 샤를마뉴 대제같은 유럽의 최고위층까지도 소박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짐. 샤를마뉴의 검소한 의상은 이전시대 메로빙거 국왕들의 화려한 의복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따. 아마도 샤를마뉴가 검소하게 입고 싶어서 그렇게 입었던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 시대에는 심지어 부의 상징인 금의 공급마자 감소. 8세기 주조된 금화는 금과 은의 합금으로 주조됐는데 시간이 갈수록 은의 분량이 증가. 금이 동방에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 갈리아에선 금화가 아주 귀한 것이 되면서 더는 통화로 사용되지 않았음. 금은 교환의 매개물로서보다는 그 가치가 교회를 장식하기 위한 보석으로 혹은 장식용 마구로 더 인정받았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피핀과 샤를마뉴 시대부터는 데나리우스 은화만 주조됐다. 동방과의 해상교역이 쇠퇴하면서 직업상인은 사라졌다. 포도주와 소금 등 약간의 필수품 운송이나 소규모의 불법적 노예무역 정도만 명맥을 유지. 상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소규모의 국지상업으로 위축됐고, 상인도 비정규적인 존재로 전락. 상품과 사치품은 상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쟁이나 약탈에 의해 유통되거나 선물형태로 교환됐다. 중세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서유럽 주요 지역은 촌락중심 경제로 재편됐고 경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삶은 촌락에 묶였다. 당시 농업이 수준은 풍년이 들어도 잉여 농산물이 거의 없고 흉년이 들면 심각한 기근이 불가피한 수준이었다. 대장장이나 목수 등 일부 직업분화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농민들은 장인역할까지 같이 했다. 살라카법전에는 대장장이, 목수, 기타 노동자를 통칭하는 두루뭉술한 용어인 faber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소수의 장인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역농민으로 잡았다. 로마제국 시대의 교환경제는 폐쇄적인 소비경제로 대체됐다. 9세기에 이르면 서유럽 지역은 폐쇄적 가내경제, 혹은 시장없는 경제의 황금기로 평가되기도 함.
- 중세시애 기사 한사람을 부양하는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았음. 11세기 말에는 기사가 타는 말 한마리 가격이 황소 5~10마리 가격과 맞먹었음. 기사들이 입는 갑옷은 그런 말보다도 훨씬 비산 럭셔리 제품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한마디로 값비싼 이동요새 같은 존재였다. 비유적 표현일수도 있지만, 구식 가죽갑옷을 대신해 등장한 사슬(미늘)갑옷은 말보다 네배에서 10배나 비싼 것으로 전해짐. 즉 갑옷 한벌 가격이 황소 20~100마리에 해당했던 것. 문제는 기사가 된 뒤, 기사생활을 유지하려면 말이 한 마리만으로는 부족했다는 데 있다. 긴 행군을 하고 나면 말이 지쳐 막상 전장에 투입될 수 없었기 때문. 이에 따라 1100년 플랑드르 백장이 500명의 기사를 소집할 때 기사 한명당 말 세마리를 보유하도록 주문. 말이 세마리 필요했던 것은 행군마와 전투마, 짐말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만 기사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 이처럼 기사 한명을 부양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오늘날 수준으로 단순비교해보면 소 한마리를 500만원이라고 가정할 경우 싸게는 1억 7500만원에서부터 6억 5000만원에 이름. 1000년 전 중세시대 소의 가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사로 출사하기 위해서는 5억에서 10억 가량의 여유자금을 굴릴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했따. 여기에 당시엔 희귀품목이던 창이나 칼같은 무기류에서 종자를 부리고 먹일 돈도 별도로 포함돼야 함. 기사로 성장하는 데 교육기간도 오래 걸린만큼 십수년의 교육비용도 고려되지 않았다.
- 전대미문의 대공포가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에겐 흑사병이 일종의 축복이었다. 사람이 귀해지면서 몸값이 높아졌고, 일자리와 재산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풍족해졌기 때문. 부동산 소유권의 이전도 활발해짐. 폴란드에서 잉글랜드까지,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전 유럽에서 대규모로 부동산의 주인이 바뀜 19세기 영국 중세학자 서롤드 로저스는 '페스트의 의미는 토지에 완전한 혁명을 도입한 데 있다'고 평했을 정도. 11세기 이후로는 임금지급이 없던 과거의 농노제는 효율성을 급격히 상실해감. 지주에 대한 농민의 반감은 오늘날 거대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것처럼 흔한 일이기도 했다. 지주들은 토지를 소작 주고자 했으며 과거 현물로 지불되던 지대는 점차 금나븡로 대체됨. 농노보다 신분적 예속이 적은 노동자가 일을 더 잘한다는 사실을 지주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지주들은 상대적으로는 중노동이라고 하더라도 미리 분량이 정해져 있는 일을 하는게 절대량은 적다해도 분량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을 하는 것보다 환영받는 점도 터득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자연스레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높은 임금을 요구. 예전에 찍소리 못햇을 사회 하급계층과 농민들은 어느덧 영주와 지주, 귀족들에게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귀족층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지고 중산층의 영향은 커지고, 사회하층도 덩달아 여유가 커짐. 14세기말부터 15세기까지를 후대 역사가들은 잉글랜드 농민의 황금시대로 부르게 됨. 실제 당시 농민들의 실질소득 수준은 19세기가 될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평가받음
- 루이 14세 이래 프랑스는 사치풍조가 급속히 확산되던 사회였다. 각종 사치풍조는 궁정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지방으로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에게로 전해짐. 이런 시기에 하이힐도 큰 위력을 보이며 퍼짐. 당대 지식인들이 "사람의 품위가 식탁과 그 밖의 사치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가에 의해 평가되는 시대"라고 개탄하던 시기에 걸맞게 각종 사치풍조가 경쟁적으로 퍼졌고, 패션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됨. 하지만 이런 현상은 유럽 주요 국가에서 고급 창녀들이 사회적으로 돌출 되면서 조금씩 예상밖의 진로로 나가게 됨. 바로 신분이 높은 품위 있는 여성들의 취향이 창녀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 이전에는 엄격하게 구분되던 힐의 모양도 한편에선 매춘부의 것이라고 딱히 구분되기 힘든 형태로 변해가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한방향으로 나가게 됐다. 유명한 창녀들은 어느새 패션의 모범이 되어갔고, 궁정에 대항하는 경쟁상대로 등장. 상류사회 여인들도 남성중심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으려면 애첩, 창녀들과 일종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 창녀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그들의 장점을 수용. 경제사가 베르너 좀바르트에 따르면 여성들이 고급 창녀로부터 자극을 받아 수용한 가장 대표적인 장점이 비로소 몸을 씻게 됐다는 게 아이러니긴 하지만 말이다.
- 논쟁의 여지가 많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는 않지만 세계체제론을 주장했던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6세기이래 자본주의 성립이후 대차대조표를 보면 물질적 측면에서 세계가 그다자 덕을 본게 없다는 박한 평을 내리기도 함.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역사적 자본주의라 구분지어 무를 정도로 특이한 현상이다. 봉건제 생산양식은 축적된 자기모순 때문에 붕괴가 필연적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자본주의의 출현은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시각. 역사적 자본주의는 15세기 말엽 유럽에서 탄생해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공간적으로 연이은 통합과정을 거쳤고, 팽창을 거듭해 19세기 말까지 전 지구를 뒤덮게 된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등장이 가능했던 이유로 봉건제의 생존력이 다했다는 점을 든다. 1450~1750년 사이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부상했던 반면 1150~1450년에도 이와 비슷한 무너질 수준이 아니었기에 기존체제가 존속될 수 있었다는 설명. 세계체제론에서 봉건제는 내부 위기를 맞이해 위기에 몰린 귀족계급이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대응을 한 덕"에 자본주의로 대체됐다. 봉건적 토지제도가 흐트러지면서 농민들의 봉기가 늘었고 평등한 분배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진척됨. 소규모 차지농들의 생산효율성이 증대됐고, 인구감소 현상도 발생. 정치구조의 취약성은 여전했고, 귀족들의 내부상쟁이 밎어지면서 대중을 억누를 힘이 약해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카톨릭 이데올로기마저 힘을 잃어가면서 봉건귀족들의 위기의식은 커져감. 결국 위기에 몰린 귀족계급은 기존의 시장기제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잉여를 착취하는 체제를 일구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유럽은 영주수입의 감소를 보상하고 격렬한 계급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귀금속, 식량, 향로, 원료와 유순한 노동력을 제공해줄 새로운 지역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당시 항해 사업에 뛰어들 충분한 동기와 역량을 겸비한 나라가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훗날 스페인)이었다.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시작된 점도 16세기 당시 유럽의 애매한 위상과 관련이 크다. 유럽이 생산력과 체제 결속력에서 전 세계의 중간수준 지대였다는 지적이다. 당시 유럽은 후진적 원시경제도 아니면서 아시아처럼 생산력과 체제 결속력이 강하고 지식면에서 높은 수준을 갖춘 지역이 아니었기에 쇠퇴해가는 지주귀족 계급이 부르주아지로 변신해 하급계층과 다른 지역 대중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것.
- 흔히 교육은 소득격차와 사회적 격차를 줄일 것으로 포장되고 사회적 부를 재분배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육시설이 확장되면서 일정한 직업에 요구되는 교육수준도 줄곧 높아졌다. 1990년 중등교육을 이수한 사람이 1890년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과 똑같은 직업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 문명의 산물인 능력주의도 신화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 등장 이전에는 신분에 의해 사람의 지위가 정해졌지만 프랑스 혁명에서 주장된 재능에 따른 출세가 보편화된 것을 지칭. 하지만 이전 시대에도 개인의 사회적 상승은 언제나 있었고, 다만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능력주의가 하나의 공식적 덕목으로 천명된 점이 차이점이라는 설명. 사회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비율이 과거보다 늘기는 했지만 이는 여전히 소수의 몫으로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이룬 인류역사상의 진보를 믿는 것은 역사적 자본주의가 퍼뜨린 자기정당화의 이념에 물든 것이라는 진단이다. 월러스틴에게 역사적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불평등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일부 수혜자는 있지만 세계인구의 50~85%에겐 더욱 상황이 나빠진 퇴보의 역사에 불과했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결코 진보적인 것이 아니며 대안적 역사적 가능성을 제거한 암흑희 사도였다. "자본가들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달리기만 했고 그런 과정에서 일부는 더 잘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게 됐다"는 게 월러스틴의 요약이다. 세계 인구 중 대다수가 자본조의 등장 이후 이전의 역사적 체제보다 물질적으로 못살게 됐다고 믿는 것이 세계체제론의 결론인 셈이다. 일반적 통념과는 다르지만 누구나 당연히 여기던 자본주의의 성과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 논쟁은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 관료들에게 있어서 상인은 언제나 개인적 이익 혹은 국가적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하거나 쥐어짜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상업활동은 언제나 관료의 감독과 징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금과 철, 차, 비단, 담배, 소금, 성냥 등은 국가가 전매제도로 운영. 관료들은 어떤 상인층도 이런 특권을 침식할만큼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료들은 상호간 보호관계와 혈연관계를 맺으면서 사실상 세습적 관료귀족제를 구축. 관료들은 상인의 사유재산권을 무시했고, 아무리 큰 상업세력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관료의 후원과 지지를 얻어야만 했다. 오늘날로 치면 상인과 은행가, 중개인, 그리고 모든 종류의 거래인은 관료제에 종속된 부속계층에 불과했다. 학자 관료집단은 세금이라는 수단을 통해 상인들이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방지하는 국가독점체제를 창조. 관료들은 농민과 상인이 힘을 합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를 방지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임. 그리고 유교적 효의 덕목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순종적 대중을 생산해내는 거대한 공장으로 만들었다.
- 서구학자들은 상인들이 지주신사와 관료에 종속돼 독자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지 못한 데서 자본주의가 중국에서 번창하지 못했다고 진단. 그나마 관료로 대표되는 중국의 엘리트들은 중화문명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변화의 필요성을 못느꼈고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 이 같은 체제에서 경제적 인간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생산된 것 가운데 자신의 몫을 최대한 늘리는 자였다. 혁신적 기업가정신보다 관리에게 돈을 지불해 기존 시장을 통제하는 독점이라는 지름길을 택하는 게 합리적이면서도 선택가능한 대안이었다. 이를 두고 페어뱅크는 "중국의 전통은 보다 나은 쥐덫을 만드는 게 아니라 쥐에 대한 공인된 독점권을 얻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 오랫동안 화폐의 기준이 되는 무게 역할을 하던 금속으로는 금와 은이 경쟁. 사실 전근대 사회에선 은을 기준으로 삼는 문명권이 일반적. 19세기까지 동양과 서아시아, 남미,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은본위제를 시행. 이 같은 금과 은의 경쟁에서 금이 승자가 된 때는 19세기다. 결정적 계기는 1859년 미국 네바다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것. 1871년 은본위제를 고수하던 독일이 금본위제로 이행하면서 금대세론은 굳어짐. 때마침 독일은 보불전쟁의 승리로 프랑스로부터 50억프랑의 배상금을 받아 금본위제 전환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음. 독일이 금본위제를 실시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다량의 은이 국제시장에 나오게 되면서 금가격이 상승하고 은의 가격이 떨어짐. 이보다 약간 앞서 대규모 금광도 발견됐지만 금은 은과는 다른 효과를 내게 된다. 1850년을 전후해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금광이 발견돼 금 가격이 하락. 새로운 금광발견으로 25년간 생산된 금의 양이 이전 250년간 생산된 금의 양과 맞먹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대규모 은의 발견이 은본위제의 퇴출을 가져온 것과 달리 금광 발견으로 금본위제는 위축되는 게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통용되던 금은양본위제가 쫓겨났다. 금은양본위제는 금과 은의 가격비율을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뒤 그와 연결해 화폐를 발행하는 것으로 국제 금은 시세와 자국에서의 가격비가 같거나 비슷해야 유지된다. 그러나 대규모 금광 발견으로 국제시장에서 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되면서 은은 해외로 유출되고 국내엔 금만 유통돼 사실상 자연스레 금본위제로 전환된 것. 이에 따라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소위 프랑권 국가들이 1870년대 금본위제로 이행했고 미국도 1900년에 금본위제를 채택. 1900년이 되면 유럽과 북미, 일본, 아르헨티나까지 주요국이 금에 기반을 둔 화폐체제를 구축. 고전적 금본위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 19세기 후반 금과 은 모두 생산이 늘었지만 두 금속의 위상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 금본위제로의 이행배경에는 영국의 힘이 있었다. 바로 금의 가치가 지고지선해서가 아니라 영국이 금본위제를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 원래 중세부터 나폴레옹 전쟁때까지 영국은 은본위제 국가였음. 영국 화폐단위 파운드 스털링은 법적으로 스털링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에서 기원.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중앙은행이 전비조달에 전력하는 과정에서은본위제가 폐지되고 1816년 금본위제가 선택됨. 영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하자 1870년대 영국의 재정지원을 받고자 하는 많은 나라는 금본위제로의 이행을 서둘렀다. 또 이들과 교역하던 많은 나라도 불이익을 줄이려고 금본위제를 택했다. 당시 최대 교역국으로 주요 운송국이며 해외자본 수출국이었던 영국의 화폐가 사실상 국제 지불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점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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