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탄생

역사 2014. 11. 6. 21:31

 


제국의 탄생

저자
피터 터친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11-07-1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가장 위대한 집단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그리고 또 어떻게 죽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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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과 부에서 큰 차이가 나면 분열이 일어나기 쉬움. 그러나 평등하면 목표를 통일하고 공통의 행동방침을 만들어내기가 쉬움. 평등주의는 협력을 가능하게 함.

- 게르만족이 기원전 1세기 처름 로마인과 접했을 때는 로마인과 게르만족의 종교가 인도유럽어족의 종교를 바탕으로 조금 변주한 것이라서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음. 하지만 서기 400년에는 문화적 차이가 커져서, 두 문명 사이에 골이 깊어짐. 두 종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첨예하게 대립. 두 종교 모두 우리와 저들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실을 함. 나아가 오딘 숭배는 게르만족의 신성한 왕들이 지닌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정당화해주어, 이전의 느슨했던 부족연합을 아주 결속력 강한 전사들의 나라로 만듬. 그리하여 로마제국과 게르만족을 가른 변경이 중요한 단층선이 되었고, 그 강도가 러시아인과 타타르족, 아메리카 이주민과 인디언을 가른 단층선 못지 않았음.

- 집단의 결속력 또는 아랍어로 아사비야라고 하는 개념으로 이븐 할둔은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함. 집단의 아사비야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하나로 뭉치는 능력, 협력하는 능력이며, 이것은 집단이 적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집단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게 해줌. 국가는 아사비야가 높은 핵심집단을 중심으로 해서만 조직될 수 있음. 핵심집단에 있는 구성원들은 결속력을 다지고 행동함으로써 그들의 집단적 의지를 국가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강요해 국가가 무너지는 것을 막음.

- 아랍인들이 모두 이슬람 공동체로 들어온 뒤에는 서로 공격할 수 없어 그들의 군사적 에너지를 다른 데로 돌려야 했음. 게다가 다른 유목민을 강탈하는 것보다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부유한 도시들을 공격하는 편이 훨씬 수확이 좋았음. 그래서 이슬람교의 아라비아 통일은 어떤 인간의 의도적 개입 없이도 거의 필연적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낳을 수 밖에 없었음. 상황논리상, 아랍인들이 거대한 제국을 정복하지 않으면 도로 갈가리 찢어져 서로 싸우는 부족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음. 비선형 동역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아라비아의 통일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불안정한 정점이었음.

- 사회적 채널용량이란 큰 사회집단에서 살 때 부딪히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 결국 협력을 얻으려면 집단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할 필요도 있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할 필요가 있음.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 기억할 관계의 수가 폭증하므로 사회적 채널용량은 어떤 수준 이상으로 올릴 수 없음.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더버는 150이 우리가 진정으로 사회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수로 최대라고 했음. 150이라는 마법의 수는 사냥과 채집을 하는 사회에 있는 마을의 평균 크기에 가까움. 군대의 단위에서부터 16세기 중앙 유럽에서 생겼고 20세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후터교도들이 허용하는 농촌 거주지의 최대 크기에 이르기까지 자주 등장함. 우리의 사회적 채널용량은 우리가 일대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제약하지만, 집단선택은 계속 경쟁자보다 큰 군대를 내보낼 수 있는 또는 더 크고 따라서 더 효율적인 경제를 발전시키는 사회집단에 유리하게 작동했음. 진화는 사람들이 함께 협력할 사람들과 즉각 죽여야할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았음.

- 상징적 사고능력은 인간의 초사회성을 가능하게 한 마지막 진화상의 대혁신. 사람들은 이제 협력할지 적으로 대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 필요가 없어짐. 이것을 특히 잘 보여주는 것은 종교의식과 의례임. 상징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어떤 규모의 집단도 우리로 정의할 수 있게 됨.

- 스파르타 사람과 헬로트들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은 스파르타의 국력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것이 무너지는 원인이 됨. 끊임없는 전쟁상태는 스파르타 사람들 사이에 강력한 아사비야가 생기도록 했고, 그것이 계속 유지되도록 함. 그러나 지배계급과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사이에 유대가 없었기에, 아니 그들이 첨예하게 대립한 탓에, 스파르타는 팽창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음. 그 결과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군사적 패권을 잡고서도 주변세력의 위협에 어느정도 안정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그래서 약해지자 무너져 버리고 말았음.

- 세계에 중국말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제국이 지배한 역사를 가진 지역이 없음. 뜻밖에도 그 이유는 지리적인 것이고 더 자세히 말하면 생태적인 것임. 동아시아의 강우량 분포는 건조한 스텝지대와 비가 많은 농경지대를 생태적으로 분명하게 갈라놓음. 인간이 약탈적 유목을 할 줄 알게 된 뒤로, 이런 생태적 경계선은 돌아다니며 목축을 하는 유목민과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정주민을 가르는 초민족 공동체의 변경과 일치했음. 스텝지대의 압력으로 중국 농경민은 계속 제국을 건설했음. 스텝지대에서도 유목민들이 계속 제국으로 뭉쳤음. 중국인들은 유목민의 영토를 침략해도 기를 수 없었기 때문. 유목민들도 반복해서 중국을 정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에 동화되거나 흡수되었음. 중국 문명과 유목문명을 가르는 단층선은 동아시아의 지리가 만들었음. 그것이 하나의 보편적 제국이 중국에서 계속 나타난 이유임. 보편적 제국이란 하나의 문명을 모두, 또는 사실상 모두 통일한 국가임

- 일반적으로 전염병은 거의 언제나 세기적 순환이 일어나 인구가 감소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함. 세기적 순환에서 이 단계에 전염병이 퍼지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부랑자들이 늘고 반란이 일어나며 군대가 출동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늘어나는 것임. 게다가 인구의 많은 부분이 영양이 부족하거나 굶어 죽기 일보직전이면 병에 걸리기도 쉬움. 따라서 인구 과잉이 되면 전염병이 퍼질수 있는 기름진 토양이 만들어지고,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음.

- 강한 제국은 안정과 내부평화를 가져오지면 그 안에 혼란을 낳을 씨앗을 가지고 있음. 안정과 내부평화는 번영을 가져오고, 번영은 인구증가를 낳음. 인구증가는 인구 과잉을 낳고, 인구과잉은 임금하락과 지대상승, 평민들의 1인당 소득의 감소를 가져옴. 처음에는 낮은 임금과 높은 지대가 상류층에 유례없는 부를 가져다 주지만,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탐욕이 늘면 그들도 소득감소를 겪기 시작.

- 불평등이 판을 치면 현존 사회질서를 부당하고 불법적인 것으로 보게 되어,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 됨. 근대 초에는 이런 이데올로기들이 종교적 형태를 띠었음. 나중에는 지배적인 혁명적 이데올로기들이 민족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형태를 띠었음. 오늘날에는 와하비즘처럼 종교에 기반을 둔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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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

저자
J. M. 애도배시오, 올가 소퍼, 제이크 페이지 지음
출판사
알마 | 2010-10-2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문명 발달 과정에서 여성은 왜 사라졌을까? 과학은 진실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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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원들이 처음으로 직립보행을 선택한데에는 에너지 소모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음. 중신세에 숲이 줄어들면서 열매도 줄어들었을 것이고, 숲에 살던 유인원들의 먹이가 되던 다른 식물들도 줄어들었을 것임. 따라서 그들은 더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더 다양한 음식을 섭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임. 당시 직립보행을 선택한 유인원들은 먹이를 찾아 숲속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때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절약할 생각이었을 것임.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더라도 관절로 걷거나 네발로 걷는 생물에 비해 에너지가 덜 필요해지면, 필요한 먹이의 양도 줄어듬. 또한 숲을 돌아다닌 뒤에도 에너지가 남아서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번식과 같은 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었을 것임.
- 인간의 각 부분이 대개 그렇듯이, 인간의 골반도 여러가지 목적에 사용됨. 이처럼 다양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해부학적으로 여러가지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음. 골반은 다리위에 자리를 잡고서 대퇴골의 뭉툭한 끝부분이 딱 맞게 끼워질 수 있는 구멍을 제공해줌. 그 덕분에 우리는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음. 골반은 또한 내장이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제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받침대를 제공. 둥글게 휘어진 척추도 물론 불안하게 나마 골반에 의지하고 있음. 여자의 경우 골반은 자궁에 있던 아기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공간, 즉 산도를 제공해주는 역할도 함. 하지만 진화과정에서 우리는 아기가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산도를 넓게 유지하는 것과 여자가 똑바로 서서 걷고 달릴 수 있게 해주는 것 사이에서 타협을 해야 했음. 우리의 머리가 몸에 비해 엄청나게 크고, 어깨도 비교적 넓은 편이기 때문.
- 여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싸움과 도망을 놓고 고민하는 반응을 일으키기는 물질뿐만 아니라 옥시토신도 풍부하게 분비됨. 옥시토신은 싸움과 도망을 놓고 고민하는 반응을 완화시키며, 여자들이 아이를 돌보고 다른 여자들과 한데 모이도록 유도. 아이를 돌보고 우정을 다지는 반응에 깊숙이 관여할수록 더 많은 옥시토신이 혈액속으로 방출되어 마음을 훨씬 더 차분하게 가라앉힌다는 사실이 밝혀짐.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음. 남자들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옥시토신이 분비되지만, 대량의 테스토스테론도 함께 분비되기 때문에 옥시토신의 영향이 차단됨.
- 모든 포유류의 단거리 발성과 새의 외침이 기본적으로 똑같은 패턴을 따르며,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임. 우리는 아기에게 말할 때에는 목소리 톤을 높이지만, 상대를 위협할 때는 목소리를 낮춰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냄. 따라서 새와 포유류가 소리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때는 형태가 기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음. 즉, 소리의 음향적 본질(형태)이 감정상태를 기능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 형태와 기능의 일치는 생물학의 기본원칙중 하나임.
- 자음은 소리를 통한 의사소통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가능하게 해줌. 자음은 중립적인 소리를 냄. 대부분의 경우 자음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음. 자음이 생겨난 초기에 인간사회는 점점 복잡하게 발전하는 중이었고, 때로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을 것임. 그런 상황에서 자음은 적나라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름. 하지만 호미니드의 진화과정에서 원시언어의 싹이 언제 고개를 내밀었는지는 그저 추측만 가능.
- 아무리 기초적인 형태로라도 일단 언어가 생겨나면 그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회체제가 생겨나기 시작함. 언어는 협동을 강화함.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도력과 지위를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음.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타인들에게 이름을 부여해줄 수도 있음. 효과적 분업, 집단 정체성 강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미지와 다층적 상징체계의 발전을 위한 전술과 전략을 짜는 것도 가능해짐.
- 농경을 선택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여러 불행을 경험. 경작하기 좋은 땅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전염병과 촌충 등의 기생충이 돌아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짐. 비위생적 환경에서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기 때문에 생긴일임. 유라시아에서 점점 성장하고 있던 여러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가축들과 거의 코를 맞대고 살고 있었음. 위생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이런 환경 때문에 동물들에게 기생하던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인간에게 옮겨와 천연두나 홍역같은 새로운 전염병들이 생겨남. 하지만 오래지 않아 구세계의 사람들은 이런 질병에 어느정도 면역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치명적 타격을 입지는 않았음. 하지만 유럽인들이 16세기부터 신세계를 드나들게 되자, 각종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게 처녀지가 펼쳐짐.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부분 구세계에서 가축화가 시작되기 전에 옮겨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가져온 질병을로 거의 하룻밤 사이에 수백만, 수천만명이 목숨을 잃음. 특히 마을과 도시에 모여 농사를 짓던 사람들에게 타격이 컸음.
-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의 연구하는 사람들이 극복해야 하는 인식중 하나는 전세계적으로 천편일률적인 가부장제가 작심하고 여성들을 억압했다는 것임. 수천년전 또는 수백만년전의 세상을 돌아보면, 남자도 여자도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음. 우리가 오랫동안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에 실상을 보지 못한것. 이제야 우리가 알게 된 또 하나의 확고한 사실은 여성과 여자가 인류의 등장과 성공을 이끈 동력으로서 남자보다 훨씬 중요했다고 할 수 없을 망정 남자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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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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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뇽

저자
브라이언 M. 페이건 지음
출판사
더숲 | 2012-05-24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왜 지금 크로마뇽인인가? 고고학계의 세계적 석학 브라이언 페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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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이주자들에게 실질적 우위를 점하게 해준 것은 인지능력과 지적상상력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는 능력, 미리 계획하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살아숨뒤는 활기찬 세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었음.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능력을 예술과 주술의식, 의례, 노래, 그리고 춤으로 나타냈음. 그드른 그렇게 함으로써 급격한 기후변화와 매섭게 추운 날씨, 때때로 찾아오는 배고픔, 그리고 사냥을 하다가 발생하는 비극적 사건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음. 그들의 상상력과 주술의식은 잔인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어떠한 기술장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안전망이었음.
- 상징주의, 종교적 믿음들은 그들에게 후기빙하기 시대의 변화무쌍한 기후속에서 이웃보다 더 잘 견딜수 있는 결정적 이점을 안겨다 줌. 크로마뇽인들은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큰 무리를 이루며 생활했기 때문에 사회적 교류가 더 활발했고 어려서부터 큰 규모의 수렵/채집활동에 참여했음. 또 언어가 점점 더 정교해지고, 기술이 발전하고, 수명이 길어지면서 문화적 혁신이 일어났음. 모든 지식이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구전되는 세계에서 이런 강화된 문화적 완충제는 약 2만 1500년에서 1만 8천년 전 사이에 추위가 최고점에 다다랐던 최후 최성기 동안 현생 인류가 냉혹한 기후에서 생존할 수 있는 보호막을 추가로 제공해주었음.
- 20만년 넘게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구부러질줄 알고 극단적 추위나 장기간 지속된 따뜻함에 순조롭게 적응하는 유연하면서 단순한 생활방식을 따랐음. 엄청난 기후변화가 찾아와 좀더 온화한 남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을때 조차 항상 익숙한 환경에서 살았음. 돌도끼 모양이 서서히 변한 것으로 보아 기술적 혁신은 아주 드문현상이었고 그 변화는 거의 감지할수조차 없었음. 일상생활은 예측가능하고 친숙한 길을 따라 이주하고 확산되는, 삶과 죽음의 길을 따르는 동물들의 삶처럼 한 세대애서 다음 세대로 거의 변화가 없었음. 인간은 포식자 중에서도 서로 협력할줄 아는 포식자였고 사냥꾼인 동시에 먹잇감이었음. 또 나무창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와 사냥감을 몰래 추격하는 능력, 그리고 동식물에 대해 어렵게 스득한 지식 덕분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였음. 그리고 20만년이 넘는 동안 훗날 크로마뇽인과 마주치게 되는 원시 유럽인인 네안데르탈인의 모습으로 서서히 진화해갔음.
- 7만년전 유럽에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들은 기온이 급격하게 변하는 매섭게 추운 환경과 신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혹독한 세계에 적응했음. 그들의 묵직한 체형은 추위에 노출되는 피부의 표면을 최소화하면서 열을 보존. 현저하게 큰 코의 비강은 공기를 들이마실 때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따뜻하고 촉촉하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임. 네안데르탈인은 묵직하고 단단한 체구에 상당히 강하고 날렵했음. 힘들었던 삶과 부러졌다 치유된 흔적, 그리고 상당히 심각했던 부상을 포함한 다른 부상 흔적들이 그들의 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
- 사냥의 성공은 사냥감의 습성과 반응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활용해 바람을 안고 몰래 사냥감에 접근하는 기술에 달려 있었음. 무엇보다도 사냥꾼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관심을 끌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아야 했음. 그들은 무리를 이루어 사냥했는데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몸짓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음. 성공은 항상 있을 수 있는 실패를 받아들이고 인내와 영원할 것 같은 기다림 끝에 찾아왔음.
- 네안데르탈인의 사냥무기는 잘 다듬어 만든 돌살촉을 창끝에 단 것을 제외하면 30만년도 더 된 쇠닝겐에서 발견된 무기보다 그다지 정교할 것도 없었음.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돌살촉을 단 창이나 불에 달궈 단단하게 만든 나무창으로 이 무기들이 날아갈 수 있는 범위는 인간의 팔 힘에 제약을 받았음. 8미터 정도가 최고로 멀리 던질 수 있는 범위였을 것임. 오록스나 들소 같은 큰 몸집의 동물을 잡기 위해서는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해야 했음. 이를 위해서는 몰래 접근하는 기술과 네안데르탈인 무리 전원이나 혹은 더 많은 인원의 협력이 필요했던 작업인 늪이나 협곡으로 먹잇감을 모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음.
- 생체고고학자들은 두부류로 나뉨. 한쪽은 다지역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로 호모사피엔스가 고대 세계의 몇몇 지역에 거주했던 고대인류에서 진화했다고 주장. 반대편은 아프리카 탈출이라 이름붙은 가설을 지지. 이 가설에 의하면 호모사피엔스의 기원이 열대 아프리카에 있으며 훗날 후기 빙하시대에 퍼져나갔음. 한세대가 지난 뒤 미토콘드리아 DNA와 Y염색체가 관련된 새롭고 더 정교해진 연구가 발표되면서 학계의 논란은 수그러듬. 유전적 증거는 무엇보다도 압도적이었음.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약 17만년 전에 생존했던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진화. 현재까지 확실한 것은 현생 인류가 약 5만 9천년 전 이후에 아프리카에서 이주했다는 사실.
- 7만년 준 이후로 추위가 물러가면서 아프리카 인구는 다시한번 증가하기 시작했음. 현생 인류가 가진 인지능력을 모두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7만년에서 5만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와 그 너머로 이주. 이주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Y염색체 연구를 통해 약 5만 9천년 전까지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외의 지역에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남성가계도를 만들 수 있었음. 이 때가 토바 화산 대재앙 이후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호모사피엔스가 마침내 아프리카에서 다른 대륙으로 퍼져나간 시점이었을 수도 있음.
- 크로마뇽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터전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유창한 언어뿐만 아니라 우월한 지능과 뛰어난 이동성, 수평선 너머까지 확장된 개인적 관계로 인해 거래를 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 네안데르탈인과는 다르게 오리냐크기 사람들은 석기 제작을 위해 종종 80킬로 이상 떨어진 먼 곳에서 석재를 가져왔음. 그들의 기술수준에 맞는 돌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었음. 세립질 바위는 작은 돌날격지를 만드는 데 거의 필수적이고 수많은 격지를 얻을 수 있는 몸돌을 더 쉽게 얻을 수 있었음.
- 오리냐크 문화 이전부터 구멍이 뚫린 이빨과 조개껍질, 그리고 다른 장신구들을 장거리 거래를 통해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대일 관계가 선물교환과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장기적 관계를 맺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음. 수천년 넘게 눈에 보이지 않는 교환 네트워크가 무리에서 무리, 영역에서 영역, 광대한 크로마뇽인들의 세계 너머까지 연결됬음.
- 호모 사피엔스가 창조한 수렵/채집사회는 모두 초자연적 믿음의 복잡성을 띠거나 자신들을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생명체라고 봄. 이런 믿음과 가정은 종종 주요 기후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에 소규모 사회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도록 도움을 주었음.
- 군살없는 근육질 식단에는 칼로리가 많지 않음. 건조무게의 1킬로그램당 약 1천칼로리가 들어있는 수준. 살을 에는 추운 환경에서 밖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냥꾼들은 하루에 4~5천 칼로리를 소모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이것은 말린 고기를 4~5킬로 섭취해야 얻을 수 있는 양임. 이 정도가 체중을 늘리는 것은 고사하고 간신히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임. 지방은 매년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 즉 순록과 다른 동물들이 엄청난 양의 지방을 축적한 시기인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얻을 수 있었음. 이것이 늦여름과 가을 사냥이 크로마뇽인들의 삶에 중요한 이유이며 동굴벽화에 묘사된 많은 동물들이 겨울을 날 수 있게 엄청난 양의 지방을 축적한 살찐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설명해주는 이유임. 겨울사냥 시즌에는 사람과 동물이 모두 지방을 찾아다님.
- 변변치 않아 보이는 바늘은 초기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 중 하나인 불의 사용과 지위를 나란히 함. 수만년 동안 네안데르탈인과 그들의 선조들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망토처럼 동물의 가죽을 몸에 걸쳤었음. 네안데르탈인들은 수석으로 만든 송곳으로 가죽에 구멍을 뚫은 다음 긴 섬유나 끈을 이용한 시을 구멍에 넣어 잡아당기면서 가죽들을 이었음. 이렇게 펑퍼짐안 바지나 조끼같은 조잡한 형태의 옷을 만들 수 있었음. 그후 바늘이 제작되자 여자들은 바늘을 이용해 몸에 꼭 맞는 여러겹을 덧댄 옷을 만들 수 있었음.
- 그들은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항상 자신있게 행동해야 했고 강인안 정신적/육체적 인내를 타고나야 했음. 모두가 어려운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몇 시간에 걸쳐 해낼 수 있을만큼 완벽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 지구력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정신적 강인함 또한 필수였음. 그들은 추위나 축축함,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안락함만을 추구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며 신체적 불편함을 견뎌냄. 크로마뇽인들은 현대인들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식량이나 옷 같은 거추장스러운 짐 없이 다목적 도구만을 가지고 가볍게 여행했음. 이것이 그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냥감을 짊어질 수 있게 해줌. 사냥꾼들은 항상 추위라는 위험요소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능력과 경험이 생존을 좌우하는 겨울동안, 꼭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최소한의 장비만을 지니고 다녔음.
- 모든 북극사회에서 그렇듯이 크로마뇽인들은 사냥할 때나 식량을 채집할 때, 그리고 이주할 때 서로 협동하는 것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혼자 활동하지 않았음. 모두가 함께 일했고 아주 사소한 과제조차 서로 도우며 해결.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삶 자체가 호혜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 이것이 바로 상호의무임. 모두가 사냥감을 나눠먹었고 비상시에 서로 협력했음. 갑작스러운 기온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도 있는 위험한 환경에서 협동능력은 필수적이었음.
- 크로마뇽인들이 공유한 자질과 그들이 속한 세계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생존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을 것임. 효율적인 기술과 정확한 자기인식, 환경과의 긴밀한 관계는 크로마뇽인드을 실질적으로 천하무적으로 만들었음.
- 이국적인 물건들은 단순히 진기한 물건이 아니었음. 조개껍질고 반투명한 호박조각, 크리스털 등은 두사람 사이의 거래나 어쩌면 먼 거리에소 수년간 혹은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우정이나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징표였을 것임. 선물교환은 거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서로 고립되어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소규모 무리들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는 매우 중요한 고리였음.
- 비너스 조각상들이 지모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과장된 해석임. 조각상의 독특한 해부학적 형태는 탄생과 생식력 숭배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공통된 예술적 관습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음. 대부분의 현생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아이들이 있으면 무리생활에 심각한 제한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 아이들이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는 데 시간과 공이 많이 들기 때문. 예를 들어 인류학자 리처드 리는 칼라하리 사막의 샌족의 아이가 태어난 첫해 동안에는 엄하게 성행위를 금지한다는 것을 발견. 예측불가능한 동물들에 의존해 생활하는 힘든 환경에서 크로마뇽인들은 지나친 생식력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 이런 이유로 비너스가 생식력과 출산, 부활의 상징을 나타내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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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역사

역사 2014. 10. 24. 20:39

 


공장의 역사

저자
이영석 지음
출판사
푸른역사 | 2012-02-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공장제도의 발전과 지식인의 담론 그리고 공장노동에 대한 국가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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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공업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16세기 이후 시장수요의 확대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짐. 특히 섬유 및 의복분야의 수요가 급증. 이런 섬유류 수요증가는 한편으로는 해외요인에서 비롯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화와 관련되어 있었음. 영국의 경우 17~18세기에 도시 인구가 이전보다 가파르게 증가. 18세기에 걸쳐 8만 이상 도시의 수와 그 도시 인구수는 적어도 2배 이상 증가. 18세기 초에 이미 전 인구의 11%를 차지할만큼 급성장. 이 도시인구가 의류수요증가의 배경을 이룸
- 원래 목면으로 실을 뽑고 면포를 짜는 기술이 유럽에 전해진 것은 14세기 경이었고 그 중 영국은 가장 늦은 편이어서 16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신교도들에 의해 전래되었으리라고 추정함. 초기에 면업분야는 양초심지용을 굵은 면사를 잣거나 또는 리넨과 면사를 섞은 혼방, 이른바 퍼스티언 면포를 짜는 수준이었음.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이후 랭카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면제품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짐. 이 시기 면업분야의 농촌공업이 활바라게 전개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18세기 삼각무역과 더불어 면제품 수요가 급증했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면직물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 우선 퍼스티언 면포는 리넨보다 더 싸고 부드러우며 염색도 어렵지 않았음. 면직물은 값쌈녀서도 보기좋은 옷감을 원하는 대중의 소비욕구에 걸맞았음. 더욱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구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시장확대에 따른 상품수요가 늘어남. 1580~1775년 사이에 영국력 아메리카 식민지로 35만명 이상의 백인노동자가 유입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75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아메리카 노예로 팔려감. 이 새로운 시장에서 면제품을 비롯해 리넨, 모직 등 의류수요가 크게 증가. 아메리카 시장의 수요증가를 보여주는 것이 영국수출시장의 변화임. 1700년 영국의 총수출액 중에서 아시아는 3%,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는 12%였음. 그러던 것이 1770년대 초에는 각기 18%, 43%로 급증. 이러한 변화는 특히 아메리카 시장의 확대에 뒤따른 것.
- 맨체스터 선대상인은 리버풀의 무역상에게서 원면과 마사를 구입해 면직공에게 일감을 맡김. 농촌 중매상인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직접 직포작업장을 운영하면서도 선대상인의 업무를 대신 맡음. 선대제 조직 내부의 갈등은 주로 이들과 면직공 사이에서 나타났음. 면직공 가운데서도 독립적인 사람들은 그 자신의 경영을 꾸려나가면서도 동시에 공정의 일부를 다른 예속상인-예속 면직공, 선대상인-중매상인-예속 면직공, 선대상인-독립면직공, 독립면직공-예속면직공 등 다양한 연결통로가 병존했음.
- 영국의 전통산업인 모직업이 아니라 면업 분야에서 기술혁신을 비롯한 산업화가 먼저 시작된 것은 국제무역 및 의류시장의 변화라는 18세기 세계사적 맥락과 깊이 관련된. 그렇지만 이는 산업화의 하나의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음. 당시 랭커셔 농촌공업지역에서 그 필요성에 부응하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었기 때문에 산업화로 연결된 것. 요크셔와 랭커셔 두 원산업화 지역을 비교할 경우 어떤 차이점을 찾을 수 있을까. 면업분야는 모직업에 비해 전통의 지배가 약했음. 길드적 관행이 특히 그러했음. 이와함께 가내수공업자들이 선대제 방식으로 좀더 정교하게 조직화되어 있었음. 전통의 영향이 두드러지지 않은 영역에서 혁신의 필요성과 열망이 축적된다면 실제로 혁신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을 것임.
- 공장이 대부분의 산업분야에서 생산의 지배적 형태가 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음. 공장제의 대명사로 알려진 면공업 분야에서조차 대규모 공장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중소규모 공장이 주류였음. 공장과 대규모 작업장 안에서도 기계화의 진척은 느렸음. 공장은 생산고정의 분업에 의해 작업을 단순화하고 그에 따라 다수의 미숙련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었음. 이런 점에서 보면 공장은 기계집중의 필요보다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통제할 필요성에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음.
- 18세기 후반 면공업의 산업화는 국제무역의 새로운 네트워크 창출과 더불어 수요증대의 한계에 직면한 영국 모직물 공업의 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됨. 여기에 산업혁명은 18세기 국제무역의 변화라는 세계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됨. 면방적업 분야에서 기술개량이 먼저 시작된 것은, 해외 면제품 시장에서 영국의 퍼스티언 면포가 인도산 면직물-머슬린, 캘리코, 진츠- 등에 비해 경쟁이 되지 않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음.
- 엥겔스 이래 랜즈같은 기술중심학파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연구자들은 산업혁명기 증기기관의 역할을 가장 중시.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는 증기기관과 면방적기 및 역직기의 발명가 더불어 시작한다"라는 엥겔스의 말은 물론, 산업혁명의 세가지 주요 특징 중의 하나로 "생물적 동력을 무생물적 동력으로 대체한 것"을 지적한 랜즈의 표현 등은 이를 여실히 보여줌.
- 개량된 기계가 매단계마다 더 크고 더 복잡하며, 그 결과 더욱 값비싼 것이 됨에 따라 방적공과 직포공 사이에 분업이 나타나기 시작. 후자는 이윤 높은 실잣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기계를 점차로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방차를 제쳐놓고 베틀에 매달렸으며 그가 필요한 면사는 외부의 재료에 의존했음. 그리고 전자는 베틀을 버리고 가장 좋은 최신의 방적기를 구입하는데 그의 자금을 사용. (방적과 직포의 분업이 전개되기 시작)
- 수직포공 몰락의 역사는 산업혁명기에 기계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소생산자들의 좌절과 고통을 전형적으로 보여줌. 직포공들은 그들의 번영과 몰락을 차례로 가져다준 기계제 대공업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절망적으로 수직기에 매달릴 뿐이었음. 물론 공장에 취업해 뮬방적공이나 감독으로 변신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임. 그러나 대부분은 수직포를 고집했는데, 공장에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들 또한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 그들은 어디서나 공장을 싫어했으며 존경받는 숙련장인이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이상에 집착. 경제적 궁핍 때문에 노동능력이 있는 수직포공을 대신해 아내와 자식들이 공장문을 두드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음. 당시 랭커셔 농촌지역의 수직포공들이 신흥 면공업 도시로 이주하는 경향이 높았고 그들의 가족이 면공장에 취업하는 일은 매우 흔했음.
- 시간의 산업화 개념은 역사적으로 시간 분할의 가속화로 표현됨. 전산업사외의 시간은 대체로 분할 또는 세분화의 필요성이 적었음. 그것은 밤과 낮, 여름과 겨울, 더위와 추위 등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져 있는, 일종의 농촌적 시간이었음. 그에 따라 전산업사회의 사람들은 짧은 단위로 구분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음. 시간분할은 단위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의 양이 급속하게 증가하거나 또는 일정한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질 때 필요함. 이렇게 보면 산업화 자체도 단위시간당 이룰 수 있는 일의 상대적 증대로 표현할 수 있음. 시간분할의 중요성은 이미 벤저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돈이다라는 경구에 집약됨. 역사적으로 보면 시간분할의 추세는 르네상스 시대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음. 시계의 보급은 이런 추세를 상징. 그렇더라도 시간분할이 좀 더 가속된 것은 산업혁명기에 이르러서였음. 공정을 나누는 분업자체도 시간의 세분화로 표현할 수 있음.
- 대자본은 타협 또는 양보를 넘어서서 공장규제를 통해 군소자본을 구축하려고 했음. 1833년의 공장입법을 둘러싼 대소자본간의 이해대립이야말로 자본일반의 발전과 자기증식을 의미. 무한정한 그리고 거침없는 노동일의 연장을 지향하는 개별 자본의 충돌의 그대로 관철된 초기의 면공장은 과도노동과 저임금, 어린아이와 연소자의 광범한 고용, 그들에 대한 강권적 지배가 남아 있는 곳이었음. 이런 조건아래서 특히 어린이와 연소자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황폐화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것이 마침내는 사회문제로 등장. 대자본은 공장규제를 둘러싼 회피할 수 없는 타협과정에서 인도적 책무를 내세우면서도 오히려 중소자본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추구하려고 했음.
- 19세기 후반 영국경제 쇠퇴문제가 논란이 되는 배경에는 독일과 미국 등 후발 산업국가가 등장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2차 산업혁명기에 전개된 새로운 기술혁신과 개량을 영국 제조업이 적극 도입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음. 19세기 말에는 오랫동안 경공업, 특히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기술혁신과 개량은 더 이상 자본축적의 토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기술이 되었음. 이에 비해, 중공업 분야의 새로운 기술혁인이 활력을 가져옴. 전기력의 사용, 내연기관의 보급, 유기화학산업, 공작기계의 발전, 제강분야의 기술개량 등이 함께 진행되면서 두번째 산업화의 물결이 있었음. 이전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고무, 석유 등이 새로운 공업원료로 주목 받음. 이와 함께 전기산업에 필수적인 구리,금 등 새로운 금속들도 중요한 공업원료로 등장.
- 무거운 근대성은 자본과 노동을 하나로 결합해 그들의 상호의존성을 강화시킴.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자본에 의존하는 임노동자의 지위에 길들여졌고, 기업가 또한 자본의 재생산과 성장을 임노동에 기댐. 그들의 모임은 고정된 장소가 있었음. 양측의 어느쪽도 쉽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없었음. 대공장의 벽은 두 당사자들을 공동의 감옥처럼 둘러쌈.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약하거나,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결합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음. 공장은 그들 공동의 거주지였음. 여기에는 어떤 형태든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동거의 양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 노동법, 담합구조, 국가의 복지제도 등은 모두 이 동거양식과 관련됨.
-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산업지도는 이전과 비교할 때 상당한 변화를 보여줌. 지금까지 수출산업의 중심지였던, 랭커셔, 요크셔, 웨일즈 남부, 스코틀랜드 지역은 극심한 불황으로 쇠퇴한 반면, 미들랜드와 런던 그리고 동남주 지역은 상대적으로 번영을 누림. 그 결과 전통적인 북부 공업지역에서 동남부로 노동력의 이동이 있었음. 불황이 심한 북부의 텅빈 암울한 공장과 런던 근교의 푸른잔디와 튤립으로 둘러싸인, 콘크리트와 유리와 철골빔으로 세워진 흰 건물의 대조야말로 양차대전 사이에 영국 경제의 빛과 어둠을 나타내는 것이었음.
- 1차 대전 이전 시기 미국의 자동차 기업과 비교할 경우 영국 기업의 특이성은 한 기업이 자동차 제작에 필요한 전 부품을 자체조달하려 했다는 점. 미국 자동차 회사는 조립생산자로 출발. 상당수 부품을 외부에서 공급받는 것이 관행이었음.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당시 영국 자동차 공장 숙련공들은 오랫동안 금속분야에 종사한 람들로서 금속가공에 관련된 다양한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었음. 따라서 그들은 한 작업장 안에서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에 더 적합했고 한사람이 여러 공정에 참여할 능력이 있었음. 다른 한편, 영국회사는 상대적으로 자본동원에 더 유리했음. 포드사는 초기에 자신의 기계를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 부품회사에 의존했지만, 영국 자동차 공장은 다양한 공작기계와 반자동기계를 한 공장 건물에 설치. 이 때문에 영국 기업은 조립생산 위주의 미국 기업의 생산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했음.
- 2차대전 이전에 비해 50년대 영국 산업구조는 소수의 거대기업이 특정 산업분야의 생산과 시장을 지배하는 과점적 성격이 좀더 뚜렷해졌으며, 산업별 전문화대신 그 경계를 넘나드는 다종생산기업이 증가. 거대기업간 합병과 상호투자도 잇달았음. 제국화학은 영국 나일론 방적회사를 흡수합병했고, 영국 석유의 새로운 생산설비는 디스트릴러즈 사의 자본투자로 이루어짐.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기업가나 노동자, 정책결정을 담당하는 관료와 정치인에게 이르기까지 불과 10여년 후에 영국제조업이 파국적 결말을 맞으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음. 번영의 시대에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영국 경제사에서 해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임.
-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한편으로는 영국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생산체제의 황금시대가 종국을 맞은 70년대초부터 나타난 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음. 영국뿐만 아니라 그 이후 프랑스, 미국 등 산업국가에서 제조업의 쇠퇴, 또는 대량생산체제의 동요징후가 분명히 드러남. 대량생산체제의 무게중심은 산업화의 역사가 오래된 국가에서 새로운 산업국가로 이동하고 있었음.
-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영국 경제를 넘어 대량생산 담론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줌. 현재 산업화의 역사가 오랜 나라들 가운데 제조업 경쟁을 유지하고 있는 독일과 일본은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함. 이들 나라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공생관계가 강한 것은 아마도 장인생산의 이상과 담론이 20세기에 다른 형태로 지속되었음을 보여줌.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대량생산의 원리가 장인생산을 모두 구축하지는 않았음 독이로가 일본에서 광범하게 뿌리를 내린 소기업주의는 장인생산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 고도로 집중화된 영국제조업이 쇠퇴한 반면, 일본이나 독일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의 대안으로서 장인생산의 원리를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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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의 역사

역사 2014. 10. 24. 20:38

 


측정의 역사

저자
로버트 P. 크리스 지음
출판사
에이도스 | 2012-06-0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2011년 [가디언] 올해의 책 일상의 삶과 현실에 터한 임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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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을 얻어내려고 혈안이 된 유럽인은 족장이 왼손 엄지손가락에 줄을 감고 접시에 저울추를 얹어 금의 무게를 달면서 부족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음. 부족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왜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리고 침묵했는지 백인들은 영문을 몰랐음. 둘의 서로 다른 행동에서 보듯 유럽상인과 아프리카 부족민들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파여 있었음. 이 장면은 유럽상인과 아프리카 부족민이 다른 인종이고 다른 문명에 속하며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을 보여줌. 두 집단은 서로 교역해야 했으나 서로 이해하지는 못했음. 여기에서 두가지 서로 다른 표현방법, 즉 백인의 문자언어와 아프리카인의 사물언어가 대립함
- 도량형은 뭐니뭐니 해도 수단임. 사람들이 도량형을 쓰는데는 다 나름의 목적이 있음. 여건이 바뀌거나 새로운 목적이 생기면 도량형은 변경되거나 대체됨. 하지만 도량형은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어야 하며 믿을 수 있어야 함. 이런 탓에 도량형은 독자적으로 존속하며, 천천히 퍼지고 웨만하면 바뀌지 않으려 함.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필요가 타협함. 중국은 중앙집권제 국가였고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가 일정하고 도량형이 안정되었음. 서아프리카에서는 자국의 도량형과 외국의 도량형이 평화롭게 공존했음. 하지만 프랑스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전혀 달랐으며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음. 농장에서 직인조합에 이르기까지 작업환경이 다양하고 노르웨이에서 스페인 남부에 이르기까지 유럽 여러나라와 교역한 탓에 상황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도량형이 변경되고 대체되었음. 그 결과 프랑스에서, 아니 유럽에서 도량형의 단위와 표준, 입법, 시행은 역사의 전 분야에 얽혀 있었으며 상업적, 산업적, 과학적 세력판도가 도량형에 영향을 미쳤음.
- 정치적 변화는 도량형의 시행에도 변화를 가져옴. 중세에는 영주가 중앙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 나름의 도량형을 쓸수 있었음. 중앙정부는 힘이 약했으며 체계적인 관료조직을 갖추지 못했음.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17세기에 들어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 봉건영주의 힘이 약해지면서 도량형 통일에 저항하던 주요 세력이 무너짐. 국내외 시장이 확대되자 중앙정부가 공통의 척도를 시행하고 이를 감독해야 할 필요성이 커짐. 경제학자 스타니슬라스 호쇼프스키는 "도량형이 균일해지고 표준화되는 정도는 지역간에 교환관계(상거래)가 어떤 규모로 이루어지는가와 직접적 관계가 있다"고 말함.
- 최근에 옛 단위가 사라진 것은 미터법 때문이 아님. 프랑스에서 걸어서 한시간 걸리는 거리를 일컫는 리외가 사라진 것은 자전거가 보편화되었기 때문. 땔나무 양을 일컫는 코르드는 장작난로를 쓰는 지역에서는 살아남았으나 중앙난방을 하는 지역에서는 소멸하고 있음. 한마디로 미터법이 자리잡은 데는 공식 조치뿐만 아니라 유럽의 상황변화도 한몫했음. 하지만 (미터법을 의무화한 법령을 제외하면) 옛 척도가 쇠퇴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역간의 교류가 활바래졌기 때문.
- 단위는 필요해서 만든 것이며, 인간의 삶은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화함. 우스꽝스러운 단위는 측정행위가 얼마나 자위적인가를 풍자하고 조롱하고 드러내는 나름의 역할을 함. 우리는 측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좀처럼 인식하지 못함. 측정체계가 주목받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뿐임. 가장 악명높은 사례는 99년에 1억 2500만 달러를 들여 만든 화성기후 탐사선이 화성궤도에 진입하다가 폭발한 사건. 사고가 난 이유는 공학자들이 로켓 프로그램을 짤때 한 집단은 야드파운드법을 쓰고 한 집단은 미터법을 썼기 때문.
- 현대 측정체계는 사회적 의미, 즉 측정철학이 결여되지 않음. 측정에서 지역과 상품과 시간의 흔적을 지우고 척도를 다른 척도로부터 또한 모든 국지적 조건으로부터 추상화함으로써 세계를 측정가능하고 계산가능하고 인류에게 보편적 장소로 바꾸어 인류의 손에 쥐어주고자 하는 철저한 기획에는 깊은 사회적 의미가 내포됨.
- 컴퍼스, 저울, 자는 생명없는 물건에나 갖다대는 것이다. (미츠키에비치, 폴란드 시인)
- 인간성의 어떤 쪼가리라도 무게를 달고 치수를 재고 그 결과를 알려주지만 결국 삶이 파탄에 이르고만다. (어려운 시절)
- 과학혁명의 시기에 갈릴레오, 하비, 케플러 같은 과학자들은 관찰결과를 측정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견을 했음. 인간경험의 각 분야는 측정하는 방법을 우리가 알아낼 때마다 숨겨진 속살을 드러냈음. 성공에 도취한 사람들은 실재 자체를 측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음. 우리가 측정하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임. 이 가정은 서구사상에 깊이 뿌리박았음.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정신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측정과 계산을 신뢰하는 부분이라고 주장.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측정이 매우 성공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측정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경고. 현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상이 자신을 측정하려고 어르고 측정이외에는 의미를 찾을 방법이 없다고 구슬린다는 것.
- 과거에는 측정체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측정의 사회적 맥락을 뚜렷이 인식. 아칸족은 금가루 무게를 달 때 자신의 행동이 어떤 뉘앙스로 읽히는지 알았고, 중국 황실관리들은 정확성의 정쟁을 벌였으며, 근대 이전 유럽 농민들은 척도가 착취에 악용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절감했음. 하지만 현대 측정경관에서는 측정의 사회적 맥락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 그중에서도 지능을 측정하는 행위, 즉 교육제도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더 알아차리기 힘들다. 학교는 측정되는 것을 중시하고 측정되지 않는 것을 홀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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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

저자
니나 자블론스키 지음
출판사
양문 | 2012-05-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피부, 인종주의에 가려진 진화와 생존의 비밀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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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에 노출되어 화상을 입은 피부는 보통 선홍색을 띠며 통증을 일으킴. 이는 피부속 모세혈관의 수가 늘어나고 직경이 커지면서 각각의 혈관에 흐르는 혈류량이 증가히기 때문. 화상이 발생한 피부에 혈액이 스며들고 자외선 때문에 생긴 손상을 복구하기 위해 뜨겁고 격렬한 반응이 일어나므로 해당 부위에 무엇이 닿으면 따갑게 느껴짐.
- 포유류와 조류의 선조들은 온혈동물로 진화했는데, 이러한 발전을 가져온 중요한 변화들 중의 하나는 바로 신체표면에 훌륭한 외단열재가 형성되었다는 것. 말하자면 난방비를 많이 지출하지 않고 집을 따뜻하게 유지하려면 벽을 좋은 단열재로 만들어야 함. 몸이 따뜻하면 하루종일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지만, 에너지 소비의 엄청난 증가라는 대가를 치러야 함. 원시조류 및 원시 포유류의 고대 생리학적 경제에서는 에너지 비용을 억제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음. 따라서 동물들은 먹이를 찾고 섭취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여하지 않아야 했음. 그리고 털이나 깃털 같은 단열재의 장착이라는 복잡한 발전과정을 통해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음.
- 포유류의 모낭은 조류의 그것과 다르며, 포유류 사이에서도 여러 다른 유형의 모낭이 있음. 특이한 것은 가장 특화된 모낭 중 하나가 젖샘이라는 사실. 포유류에서 젖샘은 흉벽에 있는 매우 특수한 모낭내에서 분기해 나와 환상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했음. 코일처럼 배열된 젖샘은 적절한 호르몬 신호를 받아서 젖을 만들어냄. 젖샘은 기존의 구조를 활용하여 새로운 것으로 진화한 대표적인 사례. 개조된 모낭이 새끼들을 양육하는 수단으로 발전한 경우임.
- 강한 햇빛을 받아 열이 발생할 때 모피나 깃털층은 동물이 주변환경으로부터 얻는 열의 양을 줄여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두꺼운 외투를 입은 동물들은 대부분 실제로 햇빛 아래에서 몸을 더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음. 외투가 열을 붙잡아 주변환경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때문에 피부자체의 열은 크게 높아지지 않음. 이러한 기능은 외투가 말라 있을 때는 잘 작동하지만 외투가 땀에 젖어 축축해졌을 때는 문제가 됨. 동물이 활동을 하거나 외부기온이 올라가서 열이 발생하면 신체 내부의 열 부담 증가에 대처해야 함. 이를 위해 많은 포유류들은 땀을 흘림. 땀이 증발하면서 몸을 식히는데, 수분이 표면에서 증발할 때 그 물체로부터 열을 빼앗기 때문. 이때 증발에 따른 냉각효과는 피부표면에서 곧바로 땀을 흘릴 때 가장 효율적임. 하지만 만약 동물이 땀을 흘려 털이 젖게 되면, 이때 증발은 피부표면이 아니라 털의 표면에서 일어나게 되고, 이는 체내의 열을 증가시킴. 왜냐하면 피부속 혈관으로부터 생긴 열이 피부표면에서 재빠르게 발산되기 보다는 젖은 털의 표면으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 그 결과 동물은 적절한 냉각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땀을 더 많이 흘리게 되고, 털은 더 축축하게 젖음. 생리학적으로 볼 때는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며 오랫동안 이런 상태를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 이 경우 동물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물을 계속 마시지 않으면 열로 인해 탈진함.
- 열대지방의 극단적 환경조건에서 체온조절과 관련된 실험연구 및 시뮬레이션에서는 군살이 없는 사람, 즉 체중에 비해 피부표면이 넓은 사람이 가장 효율적으로 열을 발산하는 것으로 나타남. 다시말해 피부 표면적이 넓으면서 다소 마른 체구를 지녔을 경우 열 손실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매우 더운 환경에서는 키가 크고 야윈사람이 키가 작고 뚱뚱한 사람보다 체온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유리. 나일강 유역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인도 원주민들처럼 구대륙 열대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사람들 중 가늘고 긴 팔다리에 키가 크고 마른 체구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음. 팔다리가 길어서 몸의 열을 주위 환경으로 전달하는 표면적이 넓고 마른체구이기 때문에 몸의 중심부에서 표면까지 열을 더 빠르게 전달함.
- 비타민 D는 먹이에서 칼슘을 흡수하도록 하여 골격을 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모든 척추동물에게 중요함. 물고기는 비타민 D를 함유한 다른 물고기나 플랑크톤을 먹어서 충분한 양의 비타민 D를 쉽게 얻음. 그러나 최초로 육지로 올라와 살게 된 척추동물은 골격을 단단하게 유지하기 위해 비타민 D가 더 많이 필요함에도 바닷속에서 비타민 D를 얻던 공급원들을 더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음. 이와 같은 진화단계에서는 자연선택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척추동물 스스로 비타민 D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발전시킴. 비타민 D는 광화학 작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진화초기의 네발동물들은 몸에서 필요로 하는 양만큼의 비타민 D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햇빛에 노출시키게 됨. 이들은 먹이에서 비타민 D를 섭취했을 뿐만 아니라 피부에 있는 비타민 공장으로부터도 필요한 양을 보충. 자외선 중 UVB는 피부에서 비타민 D3의 생산을 자극. 고에너지 UVB광자들은 먼저 피부를 뚫고 들어간 다음, 표피와 진피세포들에 들어 있는 일종의 콜레스테롤 분자에 흡수됨. 그리고 이것은 비타민 D3전구체 분자의 형성을 촉매함. 이러한 전구체 분자는 피부 안에서 비타민 D3로 변화되고 간장과 신장에서 다시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생물학적으로 활성형 비타민이 됨. 이 반응은 스스로 제어됨. 즉 체내순환 혈액 속에서 이미 활성형 비타민 D가 충분히 있다면 추가 생산이 중단되고, 화학적 전구체들은 여러 비활성 부산물들로 분해되어버림. 이런 방식으로 신체는 활성형 비타민 D가 과이앵산되는 상태인 비타민 D 중독을 피함.
- 사실 멜라닌은 자외선 노출 때문에 발생하는 유해한 작용을 화학적으로 중화시키는 적극적 기능을 수행. 멜라닌이 태양복사로부터 광자를 흡수하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킴. 최근의 연구에서는 자유 라디칼을 없앨 수 있는 멜라닌의 능력이 바로 이러한 화학적 변화의 결과인 것으로 나타났음. 그러므로 생리학적으로 멜라닌은 자외선과 그 산물인 자유라디칼 때문에 DNA가 손상되는 것을 막아 우리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함. 그리고 멜라닌은 자외선을 비롯한 여러 고에너지 복사에 의해 엽산과 같은 필수 비타민이 파괴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도 함.
- 자외선은 신체내에서 성공적 생식을 위해 필수적인 여러 화학물질에 영향을 주는데 , 그것에는 DNA, 엽산, 비타민 D 등이 포함됨. 그러므로 피부색은 자외선 때문에 피부내의 중요한 생화학 물질이 파괴되지 않게 하거나 최소한 파괴를 늦출 수 있도록 충분히 짙게 착색되어야 함. 반면 자외선은 몇가지 중요한 생화학물질의 생산에 촉매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를 수행할 수 있을만큼의 빛은 피부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함. 말하자면 멜라닌이 이를 조절하는 역할을 함. 이 이론은 장기간에 걸친 관찰과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실에 근거. 첫째, 장파장자외선은 비타민 B군의 하나인 엽산을 파괴. 엽산이 부족하면 세포분열에 필요한 DNA의 생산을 방해하여 생식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 둘째, 단파장자외선은 피부에서 비타민 D를 합성. 비타민 D가 부족하면 신체칼슘대사에 장애가 생기고 이는 생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침. 그러므로 이처럼 모순된 요구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피부착색정도가 다르게 진화했음.
- 가임연령의 여성은 자신의 신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칼슘뿐 아니라 아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칼슘도 함께 체내에 저장. 임신기간에서 길게는 수유기간까지 여성의 칼슘 필요량은 같은 연령의 남성에 비해 거의 두배에 달함. 이때 태아와 신생아의 골격을 만들기 위해 뼈에 저장된 칼슘과 인산이 대규모로 동원됨. 이는 여성이 빠른 시간내에 다시 칼슘을 뼈에 저장해야함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칼슘이 포함된 음식을 많이 먹고 체내로 흡수해야 함. 그러나 비타민 D 공급이 부족하면 칼슘을 흡수할 수 없고 여성 자신과 아기의 뼈에 문제가 생기게 됨. 비타민 D부족이 심각한 경우에는 신생아의 뼈가 적정선까지 단단해지지 못하여 구루병이 생길 수 있음. 아기 엄마의 경우에는 문제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미네랄 소실로 골연화증이 생겨서 골격이 약해지고 골절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짐. 이와 같은 문제를 피하기 위해 진화는 여성의 피부를 남성보다 옅게 만듦으로써 아기 엄마가 더 많은 비타민 D를 생산할 수 있도록 했음. 피부색이 옅어짐으로써 여성은 동일한 자외선 조건에 있는 남성보다 비타민 D를 조금 더 많이 만들 수 있음. 그리고 이느니 칼슘 흡수를 최적화해 여성자신과 아기 모두 건강한 생존과 생식가능성을 높여줌. 여성은 자연선택에 대비해 정밀하게 균형을 유지함. 즉 엽산과 DNA를 보호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짙은 피부색을 유지함과 동시에, 비타민 D 생산을 최대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옅은 피부색을 유지. 이처럼 진화는 매우 정교하며, 종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생물학적 타협을 만들어냄.
- 그동안은 분노에 따른 안면상기의 이유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음. 신체의 교감신경들이 심장의 혈액 박출량을 늘리고, 피부속의 혈관 대부분을 수축시켜서 혈액을 골격근 쪽으로 돌리고 싸울 태세를 갖추는 상황인데, 왜 유독 얼굴은 붉어져야 할까? 한 부위의 피부혈관이 동시에 확장되는 것은 모순처럼 생각됨. 이와 같이 모순돼 보이는 현상은 왜 일어날까? 이에대해 극단적으로 화가 나서 혈압이 매우 높이 치솟을 때 안전밸브 역할로 안면 피부속의 혈류가 증가한다는 설명이 있음. 목 부위의 동맥에 있는 압력 수용체가 위험수준으로 치솟은 혈압을 감지. 이때 동맥의 벽이 이완되어 아면으로 혈액이 몰리고, 이에 따라 심장박동과 혈압의 증가를 둔화시키는 데 도움이 됨.
- 보톡스의 사용은 영장류를 진화시킨 추진력들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 한쪽에는 젊은 외형, 그리고 그와 관련해 높은 생식력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음. 다른 한쪽에는 섬세한 얼굴표정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강화가 자리함. 보톡스는 한쪽 극단을 취해 얼굴 표정을 없애버림. 말할 때도 수동적이며 생기없는 표정이 됨. 이렇게 되면 정보를 해석하기가 매우 어려워지는데, 특히 얼굴에 나타난 감정이 언어로 전달되는 감정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더욱 그러함. 예를 들어 대중 스타나 유명인들이 보톡스 시술후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열정적 연설을 해야하는 경우임. 정상적 얼굴 표정을 지을 수 없다면 연설하면서 청중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음. 또한 보톡스는 법의학적으로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표정을 변화시켜 신뢰관계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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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스

역사 2014. 10. 23. 21:29

 


스파이스

저자
잭 터너 지음
출판사
따비 | 2012-07-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최초의 향신료 전쟁이었던 트로이 전쟁 스파이스에 대한 열망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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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신료에 대한 열망은 근대 시작무렵 뿐만 아니라 수세기, 심지어 수천년 동안 견줄데 없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도록 자극했음. 향신료로 인해 부를 축적하거나 잃었고, 제국들이 조성되었다가 파괴되었으며, 심지어 새로운 세계가 발견됨. 향신료에 대한 욕구는 수천년 동안 세계를 사로잡았고, 이로 인해 세상은 변화되었음.
- 나르드는 히말라야에서 나는 방향식물로 고대에 향수와 향연고로 널리 사용. 칼라무스는 향이나는 반수중 다년생 허브로, 흑해에서 일본까지 널리 분포되어 자라며 나르드와 유사한 용도로 쓰임. 유향과 미르는 아라비아 남부와 아프리카의 뿔이 원산지로 강력한 향이 나는 고무수지임. 유향은 주로 고대의 향으로 사용됨. 몰약으로 잘 알려진 미르는 향, 양념, 시신보존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됨
- 스파이스를 열렬이 원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불신의 시서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음. 얼마 전까지 해도 메인주 연안의 엄격한 주민들은 "검은 후추를 먹기에는 너무 경건하다"고 치부되었음. 아마도 이것은 잠재의식에 남아 있는, 향신료가 금지된 시절에 대한 기억때문일 것임. 향신료를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는, 향신료 숭배자들이 향신료를 좋아하는 이유와 거의 일치했음. 즉 맛과 과시욕, 건강, 성욕 강화 같은 매력들이 그들에게는 허영, 사치, 탐식, 성욕 같은 죄악으로 여겨짐. 향신료는 결코 순수한 미각이 아니었고, 바로 여기에 향신료의 매력이 숨겨져 있음. 욕망과 혐오가 이토록 복잡하게 공존했다는 관점에서 향신료를 바라볼 때 향신료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이해될 것임.
- 향신료가 영양측면에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향신료를 실어나른 무역은 세계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중 두가지 면에서 중요하게 여겨졌음. 하나는 유럽과 더 넓은 세계가 접촉하는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이 마침내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 스파이스의 화학적 성질은 진화적 관점에서 고슴도치의 가시이자 거북의 등껍질임. 자연상태에서 신나몬은 우아한 갑옷을 두르고 있고, 넛메그의 매혹적 향기는 어떤 곤충에게는 독소 덩어리임. 스파이스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아이러니는 스파이스의 매력이 (곤충을 통해 번식하는 식물의 관점에서) 진화론과 배치된다는 점. 인간에게는 스파이스를 그토록 매혹적이게 하는 것이 동물 세계의 다른 구성원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 대단한 탐험속 주역들에게 그 동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면 일부는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는 현실적 대답을 마지못해 내놓았을 것임. 향신료를 따라다니는 부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이 때문에 향신료의 위상에 금이 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음. (콜럼버스는 자신의 탐험에 저열하고 세속적 동기 같은 오명이 따라다닐 수 있다는 것에 대단히 당황스러워 했음. 그리하여 그는 영적으로 가치 있는 동기를 따로 내세워 탐험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고자 고심했는데, 그 결과가 그리스도의 성묘를 되찾고 십자가 원정의 자금을 마련하여 이교도를 개종한다는 명목으로 나타남) 하지만 중세의 향신료 상인들에게 향신료가 왜 그렇게 가치가 높았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향신료를 찾아 떠났는지 묻는다면, 경제적 수익이라는 확실한 답이 아니라 현대 역사학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답을 내놓았을 것. 따라서 향신료의 매력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선조들 역시 쉽게 그 답을 찾지는 못했을 것. 실제로 향신료가 갖는 매력의 일부는 간단히 말해 그것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데 있음. 콜럼버스와 동시대 탐험가들이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이전의 향신료에는 인공위성과 위성항법장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었음. 신비롭고 매혹적인 동방에서 온 향신료는 다른 세상에서 당도한 것이었음. 이때분에 유럽인은 향신료가 파라다이스, 즉 지상낙원에서 자란다고 믿었음.
- 현대의 시각으로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중세시대만 해도 그 경계는 불분명했음. 대략 13세기부터 나타난 허구에 가까운 여행기 장르가 번성했던 것도 사실과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세상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음. 수많은 이야기들이 모작이었음. 예를 들어 데카메론의 치폴라 수도사는 허위의 나라와 인도의 파스티나카에 다녀오면서 천사의 깃털을 가져왔다고 말함
- 로마제국이 무너지자 아랍이 바통을 이어받아 인도양은 이슬람 교도의 주무대로서 신밧드가 향신료, 거대한 새, 괴물, 지니와 황금이 등장하는 마술적 세계로 모험을 떠하는 이야기를 탄생시킨 해상 문명의 모태가 됨.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향신료의 몽환적이고 매력적인 분위기는 이슬람 교도의 작품이었음
- 고도로 발달한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옷이나 언어같은 유행을 그토록 협소한 실용적 용어로만 설명할 수 없듯 요리방식 또한 실용적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는 없음. 역사적으로 보아 향신료를 먹은 이유는 단지 맛 때문만은 아니었음. 더 중요했던 이유는 멋있어 보였기 때문. 당신이 먹은 음식을 말해보라,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 라고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은 썼음. 로마제국에서 향신료는 역사적으로 개인의 취향과 명성과 부를 드러내는 확실한 수단이었음. 부유한 로마인에게 식탁은 자신의 세련됨과 후덕함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 공간중 하나였음. 공공연회 같은 행사야말로 이를 과시하기에 좋은 기회였음.
- 스파르타의 음식 역시 정형화되어 있었지만 로마와는 반대였음. 이는 한마디로 의식고양을 위한 만남이었음. 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시바리스 사람이 모든 쾌락을 포기한 것으로 유명한 금욕주의자를 만난 것임. 소화도 잘 안되는 걸쭉한 검은 수프를 대접받은 디오니시우스가 이 음식이 자신의 입에 잘 안맞는다고 불평하자 스파르타인 요리사는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듬. "양념이 부족하다니, 좀 놀랍군요." 그러자 디오니시우스는 자발적으로 덫에 걸려들며, "양념이 무엇이냐?"라고 물음. 요리사는 "스파르타인이 만찬에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사냥할 때의 정직한 노력, 땀, 에우로타스 강까지 달리기 그리고 허기와 갈증"이라는 가시돋친 대답을 얻음
- 현대의 역사가들은 사치와 몰락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이지만 인도와의 무역수지에 대한 의문은 수없이 제기되어 옴. 현전하는 경제적 자료는 향신료 교역이 실제로 로마경제에 해로웠는지, 해로웠다면 어느정도 였는지 밝히기에 단편적이거나 편파적이기는 함. 어떤 경우이든 불분명한 현실보다는 명료한 통찰력이 더 도움이 될 수 있음. 자극적인 동방의 사치품과 로마의 쇠퇴가 때를 같이 한 것도 함축하는 바가 크기 때문. 로마의 인도무역 권위자인 워밍턴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여 큰 논란에 휘말림. "보석, 향수, 향신료 등 다양한 물품의 공급처인 인도는 로마의 사치스러운 성향을 만족시킴으로써 고대로마가 도덕성을 상실하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고, 또한 서로마 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몇몇 요인들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 왕과 귀족만을 위한 사치품으로 향신료의 위상은 기원후 첫 1000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야 빙하가 움직이는 속도로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 샤를마뉴 시대에 갑작스러운 활기를 띠다가 뒤이어 약 1세기 가량 조용해진 향신료 무역은 9세기가 끝날 무렵, 서부 유럽에서 보다 탄탄하게 재개됨. 향신료 소비가 증가하게 된 것은 유럽의 경제가 서서히 활발해지고 인구가 꾸준히 성장한 덕분. 중부와 서부 유럽의 야금 및 직물산업이 회복되고 독일의 하르츠 산맥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동방에서 수입하는 고가 물품의 값을 지불하는 데 필요했던 귀금속의 만성적 부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됨. 토지를 소유한 신흥 계층, 즉 왕과 지역세력가들, 주교와 수도원이 흑자를 보기 시작하면서 사치품과 부를 과시할 장식품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음
- 오늘날에는 겨울내내 가축을 먹이는 데 사용하는 다수확 목초나 씨앗이나 뿌리를 먹는 근채류가 있어 1년내내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중세에는 그렇지 않음. 예를 들어 순무조차 여전히 잎을 먹는 엽채류로 여겨졌음. (돼지의 장점, 말하자면 중세식단에서 돼지고기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닭은 양이나 소와는 달리 혼자 내버려두어도 도시던 시골이던 쓰레기를 찾아 돌아다니며 알아서 먹을 것을 찾았기 때문. 하지만 돼지조차 헐벗은 계절에는 충분한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함) 크고 부유한 집에서만 가축을 먹일 목초와 겨우내 먹이로 줄 충분한 양의 건초를 저장할 공간을 보유하고 있었음. 이러한 사치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은 서리가 내리고 목초가 죽자마자 상당량의 가축을 도살함. 전통적으로, 이 겨울철 도살은 성 마르틴 축일, 즉 11월 11일에 행해짐. 11월을 뜻하는 앵글로색슨 족의 단어가 피의 달인 이유도 이때문. 도살한 후 며칠내로 먹을 수 없는 고기는 소금에 절여 보관했기 때문에 11월부터 봄까지 내내 먹는 고기는 대부분 팍팍하고 질기고 짰음. 그 맛을 중화하기 위해서 물을 많이 붓고 오랜시간 조리해야 했음
- 건강한 식단을 위해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현대 의사들의 조언을 들었다면 고대나 중세 의사들은 무척 놀랐을 것임. 중세시대 내내 배, 사과, 복숭아, 그 외에 수분이 많은 과일들은 16세기 권위있는 출전에 따르면 나쁜 피를 만드는 음식이라는 의혹을 샀음. 같은 이유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수분이 많은 토마토는 광기의 씨앗이 가득한 위험한 과일로 간주. 이탈리아어로 가지를 뜻하는 멜란지나에는 불량사과라는 뜻이 담겨 있어 건강에 해롭다는 과거의 평판을 떠오르게 함
- 향신료는 사실상 식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종류의 고기, 생선, 채소 요리에 사용되었음. 재로의 일부로 필요했던 것 외에도 향신료 자체를 즐겼던 것도 (종종 소금으로 간하지 않은 고기와 함께) 분명했음. 향신료의 역할은 상반되는 맛을 상쇄시키면서도 강화해서 (마치 쓴 초콜릿을 먹기전의 에스프레소처럼) 각각의 맛이 더 좋아지도록 하는 것임. 이는 아마도 단맛과 신맛, 맵싸한 맛과 담백한 맛이 어우러지는 효과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
- 향신료와 허브의 장점은 와인을 변화시키고 개선해서 매력을 부여하는 것인데, 몸에 좋으면서도 맛도 좋게 만든다. 향신료가 없었더라면 곧 변질되었을 와인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이 향신료의 좋은 점이다. 16세기에 포도주통과 코르크 제조법이 발달함에 따라 와인에 넣는 향신료의 필요성은 갑작스레 줄어듬. 와인제조기술과 와인의 품질 자체도 향상되었음
- 10세기가 끝날무렴, 사회적 욕구와 그를 충족시킬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신생계급인 유럽의 귀족이 등장하던 시기에 향신료 무역이 성행한 것은 우연이 아님.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향신료가 지닌 매력의 상당부분은 향신료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멋있어 보였기 때문. 늘 같이 등장하는 진주, 보석, 모피, 태피스트리, 거울 같은 사치품과 함께 향신료는 과시, 즉 과시적 소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킴. 향신료의 매력은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하지 않았다는 데 있음. 접시위의 돈이었던 셈
- 빈민이 향신료를 먹었을 때는 아주 소량을 먹었거나 다른 누군가의 돈으로 먹은 것이었음. 예를 들면 공공연회 때, 귀족가문에서 일하는 자들이 식탁에 남은 것을 먹는 정도. 중세 빈민에게 향신료는 주로 소작료와 약으로 생각되었고 양념으로 사용되는 일은 거의 드뭄. 중세의 빈민층은 훨씬 평범한 맛으로 길들여 있었음. 대다수 빈민층의 유일한 양념은 마늘, 허브, 소금이었고 때론 소금조차 구하기 어려웠음
- 중세 사람들은 향신료와 약을 사실상 하나로 봄. 모든 약이 다 향신료는 아니었지만 모든 종류의 향신료가 약으로 쓰임. 향신료를 뜻하는 후기 라틴어 단어 피그멘타는 실제 약과 동의어로 쓰였고, 이는 중세시대까지 이어짐. 약제사와 향신료 상인은 사실상 동일인물이었음
- 향신료가 각광받게 된 것은 바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불균형을 회복하는 향신료의 효능때문이었음. 대다수의 향신료가 매우 뜨겁고 건조하다고 분류되었기 때문에 차갑거나 습하거나 혹은 이 두기운 모두로 인해 병에 걸렸을 때 선택하는 약이었음. 병과 마찬가지로 약에 대해서도 온, 냉, 습, 건의 정도에 따라 0에서 4까지 등급을 매겼고, 대다수 향신료는 가장 뜨겁고 건조한 등급으로 분류됨. 이런 이유로 이븐 시나는 흑담즙질의 병을 치유하는 뜨거운 성질의 약으로 향신료를 포함시킴
- 향신료를 가장 많이 처방했던 신체부위는 차갑고 습한 기운에 특히 취약하다고 믿었던 위장임. 이런 믿음은 향신료 소스에 대한 중세시대 입맛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됨. 위는 간에 의해 달궈지는 가마솥과 같다고 생각했으며, 소화는 요리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이해함. 따라서 솥이 뜨거운 상태에서 기능을 다하려면, 차가운 성질은 해롭고 뜨거운 성질은 도움이 된다는 단순한 논리를 펼침.
- 고대와 중세의 의식 속에서 향신료와 에로티시즘은 불가분의 관계. 효험에 대한 믿음으로 수천년 동안 식탁위 음식들에는 향신료가 뿌려짐. 최음효과를 믿은 중세과학자들에게 향신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특효약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제스, 갈레노스, 이븐 시나 같은 과학과 의학분야에서 이성주의의 전통을 세운 창시자들도 향신료의 효능을 믿음. 이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확신해 마지 않던 사실이 미친 영향보다 우주적이진 않지만, 일상적 생활방식과 더 관련 있는 사실로 여겨졌을 것임
- 향신료가 중세시대의 양념이었는데도 그 향기에 대해서는 상반된 반응이 존재. 향신료에서 관능적 냄새가 난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대립. 향신료에서는 파라다이스의 향기가 났지만 동시에 육욕을 자극했고 그 욕망에는 혐오감이 따라왔음. 향신료는 얻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도 이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는 게 특히 놀라움. 베네치아에서 향신료 무역은 경제의 주요 부문이었음에도, 나라가 쇠락할 때 나타나는 쾌락과 사치에 중독된 도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음. 로마시대 이후 처음 향신료의 땅에 유럽인이 다시 발을 디딘 대항해 시대가 절정이 이르렀을 때에도 스파이스의 향에서 타락의 조짐을 감지하던 이들이 있었음
- 현대의 향수산업은 도회적 세련미와 숨 막힐 듯한 유혹적 이미지를 내세우며 스파이스 최대의 소비자로 남아 있음. 켈빈 클라인의 향수 옵세션에는 넛케그와 클로브가 들어이쏙, 이브 생 로랑의 오피움에는 후추가 들어 있으며, 그 외에도 스파이스가 들어간 향수가 많음. 생강, 메이스, 카르다몸 모두 일반적 향수 첨가제임. 향수광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비록 우리가 그런 사실에 대해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스파이스는 여전히 매혹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최근 몇 세기 들어 사치에 대한 생각은 크게 달라졌음. 휴가든, 집이든, 호텔이든, 사치를 의미하는 럭셔리는 광고주들의 선전대로 좋은 것임. 심지어 필자가 아침식사를 위해 구입하는 뮤즐리(시리얼의 일종)도 라벨에 따르면 럭셔리임. 반면 중세시대에 광고 같은 것이 있었다면 사치라는 라벨은 훨씬 애매모호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임.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치는 권장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었음. 사치는 치명적 7대 죄악에 속했음
- 절대적 의미에서 향신료 무역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며 규모가 커졌지만, 상대적 의미에서 향신료는 관심 밖으로 밀려남. 새로운 교역이 등장하며 다른 기호식품들이 돈을 긁어모으던 과거 향신료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듬. 도덕주의자들은 과거 향신료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듬. 도덕주의자들은 더욱 비난 받아 마땅하고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다른 수입품, 즉 설탕, 차, 커피, 초콜릿에 눈을 돌림. 이 물품들은 모두가 오래전부터 훨씬 강력한 자극제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음. 계몽즈의 시대의 경제는 향신료에 대한 비난에 오랫동안 맞서운 상인들의 논리를 약화시키다가 결국에는 무너뜨림. 혹은 역으로 상인들의 주장으로 인해 향신료는 오랫동안 세속적인 재력의 막강한 상징이 됨. 그러나 오늘날 향신료와 향신료 교역ㅇㄴ 소수의 향신료 수출국을 제외하곤 더 이상 국가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국가의 경제나 도덕적 논쟁과도 관련이 없음
- 사원에서 침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던 스파이스가 매력을 상실하면서 가장 크게 명성이 위축된 영역은 부엌이었음. 미각의 변화에 관한 논의가 모두 그렇듯이 이유를 꼽기는 상당히 어려움. 근대 초기의 음식에는 중세의 음식 못지 않게 향신료가 많이 사용되었지만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음. 향신료는 더 이상 최신 유행의 미각이나 세련됨의 표현, 건강에 좋은 식재료가 아니었음.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들이 점차 많은 양의 향신료를 유럽에 들여왔지만, 지나치게 향신료를 많이 넣은 중세시대의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변화가 생김. 혐오감을 느끼거나 경멸하거나 우스워하기 시작한 것. 향신료의 사용이 더 많이에서 더 적게로 바뀜
- 향신료의 위상이 떨어진 시기와 시장에 다양한 기호품이 등장하던 때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님. 세상은 점점 좁아졌고, 그 혜택은 식탁에도 나타남. 감자, 호박, 토마토, 피망이 보급되면서 요리사들에게 새로운 요리가 가능해졌고, 동시에 향신료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듬. 아메리카의 고추는 값이 싸면서 후추보다 더 강한 맛이 났고 게다가 어디서나 경작이 가능했음. 콜럼버스가 처음 표본을 들고 온 이래 고추는 전세계에 빠르게 퍼져 많은 유럽인이 고추의 원산지를 아시아로 착각할 정도였음. 파프리카는 에스파냐에 뿌리를 내렸다가 헝가리로 옮겨감. 오랫동안 대신할 것이 없어 보였던 후추는 새로운 작물들에게 길을 내주어야 했음. 고추는 관심을 끄는 새로운 여러 기호작물 중 하나일 뿐이었음. 16세기와 17세기 담배에 대한 열망은 세계를 휩쓸었고, 그 못지 않게 커피와 차도 기호품으로 떠오름. 설탕은 이미 중세 때 알려졌지만 소비는 16세기부터 극적으로 증가. 16세기 후반 사탕수수는 브라질에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했고 얼마 후 서인도 제도에서 경작됨. 당연한 결과지만 서구의 미각은 단맛에 길들여졌고, 이런 경향이 계속되며 치아에 악영향을 미치고 치과의사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듬. 흥청망청 노는 것을 좋아하는 일부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들은 치통으로 고생해야 했음. 설탕느 이전에 향신료가 갖고 있던 귀족스러움과 금지된 매력을 물려받았고, 위험이 깃든 새로운 이미지는 설탕의 매력을 배가시킨 듯함
- 르네상스의 도래와 함께 신학과 알레고리의 비중이 줄어든 체계가 재정립되면서 그 결과 향신료는 상징과 고대부터 내려온 약재로서의 의미, 심성함을 상실. 한편 과시적 소비의 대상은 식탁에서 보석, 음악, 의복, 저택, 미술, 마차로 옮겨감. 근대의 식사는 중세시대보다 사적인 행위가 됨. 땅과 돈에 함축된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부유함과 세련됨은 다른 수단을 통해 표현됨. 귀족요리의 상징 중 일부(특히 사냥한 고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귀족조차 담백하고 산뜻한 맛으로 전향. 사회 전계층에 걸쳐 소박하고 지방색이 들어간 맛을 선호하기 시작. 중세 요리사들이 추구하던 변형된 맛 대신, 새롭게 부상한 이상적 맛은 음식 본연의 맛이었음.
- 문화를 넘나드는 다양한 재료들이 섞인 퓨전요리를 음미하는 오늘날 식도락가들의 취향은 중세 귀족의 자의식 강한 이국풍 취향과 크게 다르지 않음. 실제로 런던과 뉴욕의 최신유행하는 레스토랑에서 선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요소가 가미된 음식의 뒤로는 중세시대의 그림자가 훨씬 뚜렷하게 아른거린다. 스파이스는 현대 자본주의 안체서 극비에 부쳐진 것이닞도 모른다. 마크 펜더그래스트는 코카콜라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표적 탄산음료의 비밀스러운 제조기법을 공개. 코카콜라 맛의 비밀이 신나몬과 넛메그라는 것. 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전에 누설된 기법들 역시 신나몬과 넛메그를 언급함. 펜더그래스트의 정보를 믿어도 좋다면 스파이스는 비록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애틀랜타의 코카콜라 본사 지하실에 감춰진 채 이 시대를 사로잡은 맛으로 남아 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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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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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보같은 역사는 반복되는가

저자
빌 포셋 지음
출판사
매일경제신문사 | 2014-06-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역사를 바꾼 100가지 실수 1, 2]의 작가 빌 포셋의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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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악에 의해 나눠지고, 좁은 통로와 협곡들에 의해서 결합된 이 땅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 스스로를 자기네들의 지역과 인종집단의 모임으로 규정. 자신들을 결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음. 땅의 경계도 없고 인구가 계곡마다 분산되어 있는 형세는, 외세가 침략하기에 용이한 상태여씀.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은 계속해서 정복자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땅은 결코 점령할 수 없는 땅으로 판명됨. 기원전 6세기에, 키로스 대제는 그의 페르시아 제국에 많은 영토를 더했음. 부족들은 그를 인정했으나, 현실적으로 사업도시 외부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함. 단지 다리우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할 때까지 25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분으로 존재했을 뿐임.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제는 가우가멜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 결과 페르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 다리우스는 그 전쟁에서 패한후에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쳤는데, 이는 그땅이 그를 환영해서가 아니라 그를 따라오건 추적하기에 매우 힘든 지리적 환경 때문. 알렉산더도 5백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함께 추적. 그 과정에서 새로운 황제는 처음으로 힌두쿠쉬 지역의 허산준령을 보게 되었고, 결국 추적은 실패로 끝남. 훗날 다리우스는 자신의 부하장군에 의해 배신당하고 살해됨. 반면 알렉산더와 그의 군대는 바빌론으로 돌아가서 승리의 달콤한 열매를 맛봄.
- 모스크바의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아프간을 공산당 정부집권의 기회로 보았을 뿐 아니라 중요한 국경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시키는 길이라 여김. 아프간은 중동 한복핱에 있으며, 소련의 세지역에만 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란과 파키스탄 하고도 인접. 심지어 중국과도 다소의 관계를 갖고 있음. 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가 러시아 정부의 주된 목표였음. 처음에는 짜르, 다음에는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200년 이상 바라온 것. 소련 지도자들 역시 아프간을 지배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미국 외교정책의 균열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생각. 이는 트루면이 미국 대통령이던 시점에 시작된 공산주의 확장정책이었음. 모스크바의 통치자들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은 아프간의 다양한 민족들을 잘 다룬다면 그들을 성공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었음. 아프간은 가난한 문맹국가였지만, 러시아의 부자와 교사들에게는 그것을 바꿀 힘이 있었음. 그들이 가져다주는 혜택과 안정 때문에 붉은 군대가 환영받으리라 믿음. 이런 예측은 러시아 군대가 탱크 부대를 이끌고 아프간으로 쳐들어갔을 때,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다 사실이라 인정됨. 1837년 영국처럼, 러시아는 시골지역에 군대를 배치하고 도시를 장악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음. 그러나 러시아 또한 영국처럼 그 땅의 군대와 부족의 지도자들이 반기를 들기로 결정을 내린 이상, 반란을 완전히 진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깨닫게 됨. 영국은 4년 후에 아프간에서 쫓겨났고, 2만명의 군사를 잃음. 붉은 군대는 아프간에서 10년을 보냈는데, 7만 5천여명의 군사를 잃고 그 수의 갑절이나 되는 병사들이 부상을 입거나 불구가 됨. 러시아의 정치적이었던 태도와 임무는 점차적으로 아프간에 대한 점령과 탄압의 성격으로 바뀜. 그 과정에서 1백만명 이상의 아프간인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는 1300만명 인구의 10%임. 러시아는 모든 부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했으며, 마약상도 줄이지 못했고, 몇몇 도시외에는 효과적으로 점령하지도 못했음.
- 초강대국조차도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아프간의 다양한 인종들을 진압하고 지배하지 못함. 붉은 군대가 이뤄낸 유일한 성공을, 과거에 그 산악지역을 침공한 자들과 공유한 셈. 많은 인종집단들이 폭력성을 갖고 결집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함이었음. 이번에는 미국이 베트남때와는 정반대의 역할로 반란을 지지. 그러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음. 미국 고문들과 군사훈련, 의료장비를 지원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기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파키스탄과 협력작업을 펼쳤음. 미국 CIA는 아프간에게 스팅어 미사일과 같은 고도의 무기까지 지원. 이 무기들은 강력한 헬리콥터로 무장한 소련군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러시아가 산악지역에서 지니는 기동성의 우위를 빼앗음. 가난할 뿐 아니라 날로 침체되어가는 나라를 침공한지 10년 후, 현대식의 가공할 화력을 지닌 붉은 군대는 실로 무한정의 지원과 자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을 떠나야 했음. 89년 2월경, 붉은군대의 마지막 병사가 떠나자, 아프간에는 가장 과격한 저항단체인 탈레반이 권력을 잡음.
- 01년 10월 7일, 미국과 동맹국들에 의해 일명 영구적 자유작전이 시작됨. 탈레반으로부터 아프간의 통치권을 뺏기 위해 힘쓰는, 군사무장과 조직편성을 주로 하는 우호적인 군사지도자들로 구성된 동맹체였음. 이 전략은 먹혀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부족들과 각 지역의 힘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했음. 각각의 계곡은 자립적이고 자주적이었기에, 중앙정부가 제공하는 그 어떤 것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음. 이 국가적 정체성 결여가 각 지역 군사지도자들의 힘을 강화시킴. 바로 이것이 아프간을 통합된 하나의 민주국가로 바꿔가는 과정의 속도를 저하시키는 가장 큰 이유. 키로스, 알렉산더, 동인도회사, 붉은 군대, 현재 미국군대까지 모두 아프간에 별 저항없이 입성했으나, 그중 누구도 쉽게 그 나라를 점령할 수는 없었음. 3천년에 걸쳐 이 네강대국들이 펼쳤던 행동과 문제점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음. 처음의 세 침입자들은 그들이 정복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지 못했음. 마지막 침입자는 여전히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음.
-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테러분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국가의 승인을 받은 자들이 많음. 국가의 승인을 받은 테러는 약소국이 보다 강한 국가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무기로 간주됨. 이란의 정보를 갖고 공개적으로 미국에게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며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직접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도 없음. 그래서 국가들이 직접 테러분자들을 공급하고, 그들을 격려하여 강대국을 공격하도록 하는 것임. 자체적인 힘을 갖고 있는 국가의 시민들은 연약하다. 테러분자들이 군부대보다는 제트여객기를 목표물로 정하고, 팔레스타인이 국경초소가 아닌 이스라엘 마을로 로켓을 보내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민간인 목표물들은 공격에 비교적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아예 파괴하기 쉬움. 이는 곧 강대국들에게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임.
- 수천년간, 테러를 막기 위해 많은 수단이 동원됨.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변화할 때 가장 효과가 큼. 그 결과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건립처럼 비교적 유순할 수도 있고, 아르마니아 학살과 서기 70년의 3차 유대인 폭동처럼 비극적일수도 있음. 군집기반을 없애거나, 사회를 파괴하거나, 혹은 테러분자들이 실제로 사라지게 하는 방법임.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해결책이기에,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격이 될 때가 많음. 집단학살은 테러분자들을 일시적으로 억제하기는 하겠지만 멀리 바라보자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는 것임. 기계를 부수고 산업화를 반대하던 러다이트 족들은 기본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보호하겠다고 나섰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오히려 러다이트 족에게 달려들었기 때문. 그후 노동자들의 상황이 개선되고, 러다이트 족들은 일이 잘 진행되도록 도와 줘 서로가 이해관계를 가졌음. 결국 역사가 말해주는 더 바람직한 해결책은 대부분의 불만을 개선시킴으로써 급진적인 소수가 폭력에 대해 입지를 잃게 하는 것임.
- 19세기 초, 풍요롭고 충분한 곡식을 생산하며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이집트는 유럽의 제국 경쟁자들에게 큰 매력으로 남아 있었음. 이집트의 전략적 중요도는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면서 두드러지게 커짐. 여전히 해양강대국이던 영국은 그 운하로 인해 크게 덕을 봄. 혹자는 그 운하를 인도로 가는 고속도로라고 불렀는데, 운하가 건설된 이후 선박이 아프리카 남쪽끝까지 돌아가는 길고 힘든 여정을 거치지 않고도 인도로 갈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그 운하를 운영하기 위해서 국가가 분수에 넘치는 지출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이집트의 자존심은 무너짐. 운하의 완성은 이집트에게 크나큰 빚을 짊어지게 했고, 통행료 또한 이자를 감당하게엔 부족했음.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이집트는 결국 영국에게 지분을 팔아야 했음.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내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발휘했고, 본질적으로는 또 다른 정부를 수립한 것과 다름없었음. 1875년경, 이집트는 실제적으로 파리와 런던의 지배를 받게 됨.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1882년부터 섭정을 하고 폭동을 진압. 정부는 꼭두각시로 남아있었고, 이집트 국민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 수십년 후에는 영국의 탄압이 다소 잦아들었지만, 그들이 원할 때면 여전히 이집트 곳곳에 대하여 간섭을 했음. 1차대전이 치러지는 동안,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영국은 이집트에 더욱 더 간섭하기 시작. 당연히 쌍방의 이익이란 있을 수 없음. 오스칸 투르크의 왕은 동맹국들과 공조하여 이집트의 야욕을 불태웠음. 22년 전쟁이 끝난 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이집트의 독립을 선엄.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수비대를 유지하고, 특권을 챙김. 영국의 마지막 군대는 1954년까지 이집트를 떠나지 않음. 이런 상황속에서 이집트는 진정한 의미의 자치권을 점점 더 갖게 됨. 이후 1952년 한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집트는 무하메드 나기브 장군을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 이집트 공화국이 수립됨. 그는 정부를 통제하는 장교들과의 권력싸움에서 패배해쏙, 54년 강제 퇴임. 가말 압델 나세르가 그를 대신함. 나세르는 민주주의 실행을 너무 급히 서두르지 않겠다는 점에 힘입어 권력을 잡았는데, 그래야만 무슬림 동포단이 모든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계산때문이었음. 56년경, 이집트 군대는 서로를 적으로 대하며 냉전으로 인해 두 패로 갈림. 일년이 못되어 영국과 미국은 이집트가 소련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스완 댐 건축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중단.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함으로써 대응. 이집트의 대응에 이스라엘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가 연합하여 이집트를 공격. 목표는 나세를 정권을 넘어뜨리고 운하에 대한 서양의 지배권을 되찾는 것이었음. 이 세나라는 결국 군사적 목적을 달성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비난을 받음. 두개의 초 강대국이 맺은 거의 유일무이한 협정이 나세르를 대통령으로 남기고,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의 지배권을 얻는 데 실패하도록 한 것. 특히 러시아가 이집트에서의 공적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임. 그 결과 서양 국가들이 당황했고, 이집트에 대한 소련의 원조가 강화됨. 적어도 안와르 사타트가 나세르를 대신할 때까지는 말이다. 11년 이집트 무혈혁명은 또 다시 표제거리가 돔. 수십년의 통치 끝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 당함. 이 반란은 미국에게는 딜레마가 됨. 그 운동은 친민주주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오바마는 중동지역의 민주주의를 비난할 수 없었음. 반대로 무바라크는 친서방파 정치인이었음. 그는 소련을 멀리하고 미국회사들에게 투자를 권장해 막대한 양의 원조를 받음. 심지어 미국 군자장비를 사용하기 시작. 이집트를 지배한 20년 이상동안, 무바라크는 근본주의적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자들을 반대하고 이스라엘과의 화평을 꾀했지만 일반 이집트인들이 그의 통치방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음. 미국과 이스라엘의 많은 관측자들은 무바라크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교체되는 것을 걱정했음. 그들은 그 증거로 이집트에서의 무슬림 동포단 조직을 가리켰음. 그것은 민주주의적 항거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복잡 미묘한 반응을 야기. 미국의 정부는 무슬림 동포단에 대한 50년 묵은 걱정과 대의 민주주의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지 사이에서 어쩔줄 몰라했음. 갈등이 깊어지자 오바마는 불안해 하며 공식적 발표를 미루었지만 결국은 그 운동을 지지함. 전략적 이익과 이념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됨. 그가 이집트의 민족자결권을 옹호하는 것은 이전의 서양과 이집트 사이의 상호작용과는 엄연히 대조되었기 때문. 과거에는 전략적인 이익이 최우선이었고,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를 서슴없이 짓밟았었음.
- '드비어' 다이아몬드사는 영국 태생 사업가 세실 로즈에 의해 설립됨. 오늘날 재능있는 대학생에게 주어지는 로즈 장학금과도 연관됨. 국가의 영웅으로 오랫동안 추앙받던 그가 이제는 몹시 곤혹스런 상황임. 로즈의 상업적 감각은 의심할 나위도 없지만, 그가 지닌 도덕성의 범위는 자주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 그는 전 세계의 다이아몬드 중 90%를 장악. 인종에 대한 경멸심이 그로 하여금 원주민을 냉혹하게 다루도록 부추겼음. 88년에 로드는 은데벨레 족 왕인 로벤굴라를 속여서 마타벨렐란드 지역 광산 영업권을 부여받음. 로벤굴라와 그의 백성들은 영국의 침략에 저항했지만, 영국의 강력한 맥심 기관총에 의해 학살당함. 이것은 유럽사람들과 그 지역의 지도자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공인된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언론과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방법이기도 했음. 로드의 기만과 학살을 기념하며, 그들은 영토에 로데지아라는 이름을 붙임. 로데지아 북부와 남부는 각각 지금의 잠비아와 짐바브웨임. 오늘날 원주민들에 의해 지배를 받는 나라들에게 로즈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음. 우리 주민들은 여전히 그들의 조상들에게 로즈가 행한 잔악무도한 군사작전을 잊지 않고 있음. 그것은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발생했던 양상이었고 당시 상황을 이해하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변화와 분노만을 남겨놓음. 로즈는 폭력을 휘두른 제국의 유일한 대리인이 아니었음. 웨일스의 한 기자이자 탐험가인 헨리 모튼 스탠리는 스스로 자신을 리빙스턴의 후게자라고 생각. 그리고 벨기에의 왕인 레오폴드 2세로부터 콩고를 탐험해 벨기에의 영토를 확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음. 그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활약. 그 당시 탐험에 부의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애국심보다 돈에만 관심. 스탠리와 같은 사람들 역시 수입과 명예에만 관심이 있을 뿐, 국가를 위한 마음은 없었음. 이 자기중심적 태도는 아프리카가 유럽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다분히 반영되어 있음. 리차드 버튼 경 같은 당대 인물들은 "스탠리는 흑인들을 마치 원숭이처럼 여기고 총을 쏘아댔다."라고 말했음. 예를 들어 그의 부하 중 하나는 열한살배기 여자아이를 구입한 뒤에 그녀를 요리해 먹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인육을 제공. 이런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열등감을 내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일이 수세기동안 지속되며 아프리카의 바전을 더디게 했음.
- 일반적으로 역병이라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림프절 페스트를 생각함. 림프절 페스트는 벼룩이 옮기는 치명적 박테리아가 림프절을 파괴시키는 병. 감염자는 림프절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데 피와 고름이 나오고 구토와 각혈을 계속하고, 괴저와 괴사도 겪음. 이런 림프절 페스트는 북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아시아를 초토화시킨 적이 있음. 6세기의 유스티니아우스 1세의 감염, 14세기 흑사병, 그리고 런던 대역병까지 모두 상인들의 배에 실려 들어온 쥐들이 옮긴 병임. 곡물을 실은 배와 마차에 올라탄 쥐들이 대륙을 횡단해서 수개월만에 들어왔고, 심지어는 그대로 배와 말을 탄 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음. 사망자수는 급격히 증가. 인도, 파키스탄, 심지어 발칸지역과 중동 많은 나라에서 역병의 비명이 솟구치기 시작. 이 역병에 대한 두려움은 그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음. 흑사병은 마을전체의 인명을 앗아갔고, 국가인구의 절반까지도 줄였기 때문. 이 고전적인 질병의 위험은 아직도 가시지 않음. 림프절 페스트는 아직도 후진국 주변을 맴돌고 있음. 마지막으로 위세를 떨치던 국제 유행병은 아시아에서 일어났고, 59년에야 종식됨. 미국과 유럽에 역시 림프절 페스트와 그 밖의 다른 치명적 질병이 다시 일어나는 것도 있을 수 있음. 현대 의하은 인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극동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에서 일어난 전염병, 나병, 폐결핵의 발병을 막지 못했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국제여행이 보편화되면서 누군가가 확산되는 질병에 감염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음.
- 매년 닥히는 독감의 계절마다 사람들이 가장 노출되기 쉬운 유형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백신이 개발되고 있음. 그러나 이 백신들은 독감의 계절 직전 혹은 계절중에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는 없음. 모든 유형의 독감은 자체의 면역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한가지 유형에 대해서 면역이 생겨도 또 다른 종류에 노출되면 그 면역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됨. 유행성 감기 바이러스의 종류는 수없이 다양하므로 우선은 하나의 백신을 개발한 다음 관련되어 있는 모든 종류의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는 백신을 개발해내는 것이 필요.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는 데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 그러나 새로운 유행성 감기는 급속하게 생겨나므로, 그 전년도에 받은 예방접종이 그 다음해의 다양한 바이러스들로부터 사람들을 반드시 보호해주지는 않음. 이 점이 모든 사람들을 매년 취약하게 만듬. 그러나 매년 개발되는 백신은 그 6개월전부터 준비하기 때문에, 어느 유형의 유행성 감기가 가장 위험하고 널리 확산될 것인가에 대한 추측에 기초를 두게 됨. 이 점에 질병통제 예방센터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유행성 감기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새로운 바이러스에 끊임없이 촉각을 세우는 이유
- 수세기 동안 전염성 질병의 역사를 추적해 본 뒤,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동물들과 접촉한 후에 사람에게서 나타났다는 결론에 이름. 또한 여러 시대에 걸쳐 국제 유행병을 야기해온 대부분의 미생물들이 전세계에 분포되어있는 특정 지역의 동물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됨. 이곳들은 바이러스 과열지역으로 알려지게 됨.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긴 하지만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미국 서부 많은 지역이 여기에 포함됨. 에볼라는 콩코에서, 조류독감은 베트남에서, 그리고 인간에게 옮겨질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독감들 역시 대부분 전 세계의 바이러스 과열지역에서 발생. 전염성 질병의 역사적 연구와 카메룬에서의 자신들의 기초조사를 토대로 해서 네이선 울프와 그의 동료는 유행병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심각하게 역설하면서 미래에 국제 유행병 예언은 물론 심지어 예방까지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 그들의 이론은 치명적 미생물들이 종의 장벽을 넘기 직전에 과학자들이 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동물에게서 잠정적으로 돌연변이를 시도하는 바이러스를 검사함으로써 의학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전이되는 일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름. 울프와 그의 동료들은 접촉성 전염병에 대한 조기경고체제를 전세계적으로 만들 것을 제안. 이 조기경고체제는 바이러스 과열지역에서 사냥꾼이나 동물원 사육사 등과 같이 야생동물과 규칙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기적 검사를 포함. 예를 들면, 이 연구가들은 사냥꾼과 그들의 사냥감으로부터 표본을 수집한, 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바이러스가 종의 장벽을 넘어서 동물에서 인간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을 발견. 실제로 그들의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피실험체 중 하나가 고릴라 레트로 바이러스에 걸림. 레트로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유전인자가 DNA대신에 RNA에 입력되는 것임. 이것들은 자기복제를 하고 감염을 확산시키기 전에 정상세포와의 결합을 필요로 하는 바이러스 군임. 과정은 다르지만 그 결과는 보통 동일함. 이런 인간과 동물의 상호작용 또한 역사의 한 단면을 형성함. 미국 원주민들은 왜 유럽 질병에 훨씬 취약했는가? 정착민들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이미 그들이 기르던 감염된 가축에 노출이 되어 있었고, 덕분에 훨씬 이전부터 면역성을 길렀던 것. 미국 원주민들은 그런 유형이 동물들과 마주친 적이 없었음. 바이러스 과열지역에서 동물들과 잦은 접촉을 하는 사람들을 감시함으로써 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정확한 순간을 발견할 수 있음. 이를 통해 중요한 정보를 미리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며, 다가올 국제 유행병을 예방할수 있음. 역사는 이런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또 다른 세계적 역병이 번졌을 때 그것을 수습하는 일보다는 비용이 적게 든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당장 실행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비싸다
- 우리가 알게된 사실은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생각도 다르게 하고, 문법조차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레라 보로디스키, 스탠퍼드 심릭학과 교수)
- 역사를 통틀어서 언어는 특권층이 노동대중에게 군림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을 현재의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어져 옴. 12세기 영국에서는 귀족들은 노르만어를 소작농들은 색슨언어를 사용.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라틴어로 쓰고 말했음. 문제는 바로 '역사는 그러한 노력들이 성공했다고 말하고 있는가?'이다. 만약 그렇자면 영어를 요구하는 일련의 노력이 어린 비영어권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도록 도와주었는가? 로마가 다른 나라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지방의 언어나 관습을 침탈하지 않았음. 이 원칙이 한 제국을 수백년 동안 지속시켜 줌. 하지만 그들은 사실상 모든 공식적인 사업과 공고문을 라틴어로 표기하도록 함. 이렇게 함으로써 누가 무엇을 하든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유리하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인식시킴. 결과적으로 라틴어는 서구세계의 국제어가 됨. 그리고 기원전 2세기경에는 지중해 지역의 공통어가 됨.
- 영어는 세계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영어는 과학, 항공교통 통제, 외교의 기본언어. 일본 아이들로부터 이집트 아이들까지 조기영어 교육을 받음. 언어가 쓸모 있기에 지배력을 가짐. 가끔은 라틴어의 경우처럼 정치적 이유 때문이기도 함. 혹은 그것이 사람들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켜서일지도 모름. 영어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중 하나는 융통성임. 당신은 매우 폭 넓은 환경과 개념들을 영어로 묘사할 수 있음. 영어는 이제 다른 유럽의 언어보다 두배나 더 많은 단어를 갖고 있음. 이 언어는 또한 과학과 기술적 토론에 적합하며 모든 과학논문을 출판하기 위한 언어로 채택됨. 만약 당신이 양자입자의 퇴행속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 양자입자라는 단어를 가진 언어로 생각해야 함. 만약 당신이 해류와 물고기에 관심이 있다면, 미크로네시아 언어가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임. 그러나 만약 당신이 배에 위성위치 확인장치를 설치하고자 한다면 사용법이 모국어가 아니라면 다른 언어보다 차라리 영어로 나오기를 희망할 것임. 미국영어는 앵글로 색슨 언어에 기초를 둔 복합어지만, 많은 다른 언어에서 비롯된 용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음. 따라서 영어는 지구상에서 가장 적용성이 뛰어나고 융통성이 있는 언어임에 틀림없음. 영어의 대중성은 미국과 영국의 합쳐진 영향력 뿐만 아니라 언어의 효율성 때문에 얻어진 것임. 미국 영어에 관해서 언어학자들이 하는 농담 중에 "영어는 어둠속에서 기다리다가 다른 언어에서 가장 좋은 단어를 가로채간다."는 말이 있음. 오늘날 영어는 보다 전통적인 언어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용어를 가로채는 데 여념이 없음. 이런 양상이 펼쳐진 것은 현대의 경우가 처음이 아님. 로마 공화국의 상업과 행정은 라틴어로 행해졌음. 마치 대부분의 글자를 아는 유럽인도 그리스어를 말해야 한다고 느꼈음. 18세기와 19세기 동안, 과학과 외교를 위한 언어는 프랑스어였음. 유럽과 미국의 상류층과 지식층은 필수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움. 오늘날 프랑스는 때때로 그 사실을 분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들 또한 영어를 배움.
- 매년 자산이 줄어들기만 하는 그루폰사는 수익을 남긴 적이 없고, 물리적 자산도 없는 회사였음. 그런데 2010년 4월 회사의 가치가 12억 달러로 평가됨. 단 한번도 배당금을 주지 않았고, 수익을 낸 적도 없는 스톡인 페이스북은 이 회사가 2012년 공개상장을 했을 때 2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산평가를 받음. 이런 평가가 합리화되는 것을 들으면, 마치 튤립, 플로리다 부지, 그리고 90년대 인터넷 주, 더 나아가서는 남해회사의 가격 합리화처럼 참으로 어이없게 들림. 단순히 말하면 주식은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여지에 따라서 평가되고, 이윤을 남기고 되팔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구제됨. 이런 일은 신용평가회사가, 회사가 실제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분배하는지 여부와 등과 같이, 회사를 평가하는 정상적 기준을 무시할 때도 발생함. 역사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의문이다. 투기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워싱턴, 런던, 그리고 베를린으로 하여금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영양을 끼쳤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악순환을 거듭 반복할 수밖에 없음. 선거에 당선된 관료들이 머나먼 과거가 아닌 지난 20년 동안의 투기거품을 통해 깨달아서 같은 실수를 방지할 수 있는가? 돈을 다루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역사로부터 배우고, 미래에 경기침체를 가져다 줄 근시안적 탐욕에 저항할 수 있는가? 여기에 맞는 사례에 관한 기록은 아직 없다.
- 오판하는 나라의 첫번째 만병통치약은 통화팽창이고,
두번째는 전쟁이다.
둘다 일시적 번영을 가져다주고,
둘다 영원한 파괴를 안겨다주지만,
둘다 정치적, 경제적 기회주의자들의 피난처이다. (헤밍웨이)
- 정부는 종이 같은 가치 있는 물품을 가져다가 그 위헤 잉크를 몇방울 뿌려서,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
- 역사적으로 강한 의지를 지닌 통일정부는 통화팽창과 싸울 필요가 있었다. 정치판에서 후보들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공약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당선되면, 그 공약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기를 원하지 않음. 쉽게 탈출하는 방법은, 정부가 정치적 현상유지를 위해서 마법의 돈을 더 많이 찍어내는 것. 이것은 짐바브웨에서 거대한 규모로 발생했던 일이며,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고 그 크기만 다른, 같은 일을 지금 미국이 하고 있음. 고대 로마인들이 최초의 희석주화를 사용했던 네로의 시대에는, 그것들이 진짜 주화만큼 좋은 것이라 믿었음. 그러나 말이 새나갔을 때에 그것들은 가치가 없어졌음. 그와 똑같은 일이 지금 미국의 달러에도 일어나고 있음.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은 물론이고 빚을 떠안은 투자자들과 시민들까지 그들이 1달러로 물건을 사기 위해 수레 한가득 채워서 들고 가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될 것임. 그러면 아무도 그 빚을 어떤 이자율에도 부담하지 않을 것이며, 확실치는 않지만 미국경제는 폭발하고 말 것임. 미국의 경제는 경제 대공황 이래로 최악의 경제위기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고 있고, 또한 통화팽창은 그 열기를 더하고 있음. 70년에 겪은 것과 같은 또 다른 스태그플레이션의 시기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음. 연준의 정책에 대해 우려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30년대의 끔찍한 불황을 피하려다가 70년대의 경제와 같은 치명적 상황을 안겨줄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음. 미국이 친숙하지 않은 국면에 처해 있는데, 세계에서 이렇게 크고 중요한 경제가 그런 빚을 진 적은 없었음. 유럽연합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과거 정부들이 한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함. 역사가 우리에게 수차례 보여준 것처럼, 과도한 통화팽창은 대부분의 경제위기가 비교적 가볍게 보이도록 만들고, 또 다른 불황이나 경기침체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음. 높은 통화팽창의 시기는 경제의 부진과 함께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 같음. 우리가 또 다른 통화팽창의 시기를 맞게될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님. 어느 국가나 세계가 회복을 꾀할 때에 통화팽창률의 상승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주었음. 연준은 이 통화팽창은 억제될 수 있으며 25번째 계산을 재정립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 하지만 아무도 통화팽창이 제거될 수 있다고 느끼지 않음. 미국을 비롯해 많은 유럽국가들은 대량의 부채와 적자지출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있음. 그 나라들은 항상 심각한 통화팽창의 전령들이었음. 남아 있는 유일한 의문은, 현재의 통화팽창 비율이 너무나 높고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로마제국의 몰락과 맞먹는 미국경제의 붕괴를 초래할 것인지 여부임. 우리가 봐 온 역사의 교훈은, 그런 일이 일너날 수도 있고 그 결과는 비극적일수 있다는 것
- 받아들일만한 수준의 실업이란, 받아들일 만하다고 말하는 정부의 경제학자들이 아직 직업을 갖고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 아마도 사회적 문제로서의 실업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16세기 영국으로 추정됨. 당시에는 거지와 실업자의 구별은 없었을 것임. 하지만 여러 요소가 합쳐져서 일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법을 어기는 것과 굶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함 했음. 부랑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허락하는 법도 있었고, 실제 그들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음. 일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죽일수도 있었음. 이것은 오늘날의 실업수당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개념임. 헨리8세의 집권시기에만 약 7만 2천명의 부랑자들이 거지로 몰려서 처형을 당했음. 1601년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복지 프로그램 중 하나가 영국 정부에 의해서 제정되었음. 이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일감을 원하는 사람과 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구분하였음. 그 법은 실업자들이 살면서 일할 구빈원을 만들어냄. 이 구빈원은 비참했으며 거의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음. 하지만 그들에게는 죽느냐, 감옥에 갈것이냐라는 외갈래 선택뿐.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관대하고 미래지향적 프로그램이었음. 산업화가 도시지역을 확고학 장악할 때까지는, 실직한 사람들 외에 그 누구도 실업을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음. 1800년대에는 전원의 농장에서 도시로 인구가 옮겨갔음. 도시에는 농장에서 필요한 인력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 산업혁명 후인 19세기 말경에는 실업이 증가하기 시작. 많은 노동자들이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겼고, 다른 유형의 많은 직업들이 쓸모없어졌음. 이 과정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바로 추수꾼들이었음. 탈곡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대규모의 농장에서 적어도 열두명의 일꾼들이 일주일동안 옥수수를 따거나 밀을 수확. 그런데 기계장비가 생기자, 같은 양의 농작물이 소수의 사람과 말들에 의해서 손쉽게 수확될 수 있었음. 인부 당 생산성과 농업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동시에 상품의 가격은 떨어졌음. 동일한 과정에 공장에서도 계속됨. 현 시대에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노동력을 로봇이 대신하는 극단적 예를 찾아볼 수 있음. 하지만 사람이 고용인이 아닐 때에는, 그들 또한 소비자도 아님. 그리고 그들이 공장의 물건을 살 수 없다면 물건을 만들 필욕 없게 되고, 따라서 아무도 직장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임. 이런 실업과 시장축소의 순환이, 비록 숫자상으로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기업들이 쓰러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임.
- 역사적으로 볼 때, 돈이 사용된 방법은 매우 다름. 30년대와는 달리, 정부의 돈이 복지후생계획이 아닌 고용창출에 직접적으로 투입되기도 했음. 하지만 경기부양기금 중 많은 부분이 실업수당 확장이나 식료품 구매권, 의료보장제도, 주택 등과 같은 정부지출로 배정되고 있음. 그리고 미국 근로자들에게 소비를 독려학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수많은 세금공제들이 있음.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소득증대의 형태로 경제에 되돌려주기 보다는, 개인의 부채상환이나 다음 불황의 대비책으로 절세나 환급을 이용함. 이와 같이 많은 주들과 지방정부들이 고용창출보다는 경기부양기금으로 그들의 부채를 낮추었다는 증거가 있음. 경기부양기금은 또한 많은 주들과 지방정부들이 교육자들이나 그밖의 다른 정부 직원들의 해고를 일시적으로 방지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줌. 이제 그 지원금은 없어졌고, 그 주들은 파산했으며, 직원들의 광범위한 해고를 단행해야 할 것임. 이것이 악순환임. 대량실업의 부담이 세수를 감소시킨 가운데, 재정적으로 바닥인 난 정부들은 점점 늘어가는 실업수당을 지불해야 할 것.
- 프리드먼은 "우리는 겪고 있는 현재의 금융위기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구제하지 못한 것이며, 거기서 벗어나도록 경기를 부양시킬수도 없다. 믿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발명하고 교육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미국이 역사적 전환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국민들이 거대한 사회적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표준이상의 교육을 한다. 그것이 조면기이거나 전신기계이거나 초고속컴퓨텅든 간에, 우리는 출현하는 과학기술 위에 국민들이 머물 수 있도록 기술교육을 한다." 라고 말했음. 그래서 프리드면의 경제회복 5단계 중 첫번째는 국민을 교육하는 것임. 두번째는 이민 규정을 개편하는 것. "우리는 이민의 국가이므로 그들 중 가장 재능있고 혁신적인 사람들이 이 나라에 머물 수 있게 해야한다. 아직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학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외국태생의 인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닐 수 있는 교육비자를 얻는다. 이 재능있는 이민자들에게 이 나라에 머물 수 있는 보다 더 쉬운 방법을 제공하고, 교육을 마치면 미국에서 새로운 회사와 과학기술을 창조할 수 있도록 해주어라." 라는 이야기임. 세번째는 기반시설을 늘리는 것. 그는 "우리는 세계최고의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지금은 무너지고 있다. 운송관리국이 추정하기로는 2035년 경에는 국가 고속도로중 40%가 어떤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최대도시에서 영업을 하는 회사들의 능력에 영향을 끼칠만큼 심각하게 체증을 일으킬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과 의회에서 권한을 부여받은 위원회에 따르면, 미국이 다음 10년 동안 인구성장에 발맞추려면 기반시설 비용을 두배 혹은 네배까지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함. 그리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루즈벨트가 일으킨 기반시설에의 대규모 지출이 30년대의 장기침체로부터 경제를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음. 어떤 사람들은 그 시도가 08년 장기침체를 막는데는 충분했지만, 지속가능한 회복을 이룩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고 반박. 그들은 기반시설과 같은 유형의 사업을 통해 고용창출에 투입될 2차적인 경기부양기금을 원함. 경제적으로 가장 강한 독일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은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기반시설을 갖고 있어서, 상업과 고용을 용이하게 만듬. 미국의 기반시설을 수리하고 대체하는 것은 두가지의 주된 금융 이익을 낳을 것. 먼저 상업, 여행, 직장통근, 학교, 쇼핑 등과 같은 것들을 쉽게 만들어서 경제가 더욱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임. 이는 단지 건설직 종사자 뿐 아니라 미국인들 대다수를 다시 일하게 만들 것임. 또한 건자재와 장비를 공급하는 사람들, 자재를 운송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반시설의 공사가 많은 지역으로 이동하는 근로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도 직업을 공급할 것임. 종목을 들자면 수도 없이 많음. 이것이 친성장 투자이고, 정확하게는 민간부문이 좋아하는 유형임. 이 장기사업들이 민간 투자자들로 하여금 주, 지역, 연방정부와 손을 잡고 공공사업에 자금을 대도록 권장할 것임. 프리드먼의 네번째 단계는 무모함은 지양하면서 자본과 투자를 권장하는 적절한 규율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은행이 주택담보 대출 위기때 사용한 것들과 같이 불건전하고 복잡한 파생상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한편, 그들이 투자와 대출을 해주면서 수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함. 비유량 주택담보대출의 위기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에는 마련된 규제조항이 거의 없었고, 신용을 무리하게 높이기 위한 금융정책과 위험도가 높은 대출이 무모함을 부추겼음. 이 위기는 너무나 커져서 세계경제의 전체 질서를 위협했음. 이것은 또한 기업의 성공을 막거나 혁신과 투자를 좌절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환경이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함. 기업들이 시민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어떤 예기치 못한 세금이나 법률조항도 그들의 계획을 무효화 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또한 의미함. 마지막 다섯번째 방법으로 프리드먼은 정부가 후원하는 종합적인 연구과 개발계획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을 주장. 이는 전세계의 과학기술 전체를 대상으로, 이론적인것과 실제적인 것 모두를 아우름. 예를 들어, 소립자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것이 고용창출에 당장은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할지 모르지만, 응용된 지식이 지금까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산업의 근간이 될 수 있음. 연구로부터 얻어진 지식이 효용으로 바뀌기 때문. 또한 DNA의 비밀을 푸는 것이 다양한 질병의 치료법과 새로운 직업을 동시에 만들어낼 수 있음. 매년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생리학 감지기, LED칩에서 인공위성 기상보도와 조사까지, 60년대와 70년대에 우주계획을 위해 개발됬던 파생상품들이 기업의 전 분야에서 고용을 창출. 많은 정치가와 경제학자들이 연구와 개발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정부가 민간부문을 참여시켜 합작투자를 해야한다고도 믿음. 어떤 전문가들은 심지어 민간부문에게 세금특혜를 주어서 연구와 개발부분을 키우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미국과 같은 비교적 젊은 국가조차도 수많은 방식으로 여러번의 경기침체를 겪었음. 어떤 방식이 효력을 발휘했고, 우리는 그 해결책들을 어떻게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가? 1797년 국가는 부동산 투기문제를 갖고 있었고,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았음. 그래서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기침체는 그다지 독특한 일이 아님. 그렇다면 해결책은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사람들을 최악의 문제점으로부터 보호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임. 그 당시에는 파산을 허용하는 새로운 법이 미국이라는 신생국의 중산층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해주었음. 1837년에 경기침체의 자극제는 운하투기였는데, 운하형 선박과 해상운송이 새로운 시작을 형성. 또 다른 걱정은 너무나도 성가신 무역불균형이었음. 미국은 아직도 유럽 국가들에게 파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사들이고 있었음. 시도한 해결책은 수입관세를 도입하여 더 많은 미국인들이 더 많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조장하는 것이었음. 그 실제적 결과는 무역전쟁이었고, 유럽의 국가들이 자체적인 관세법을 제정했음. 그로 인해 최종적으로 미국은 대량의 실업과 필요이상으로 더 길고 깊은 경기침체를 겪어야 했음. 오늘날 우리가 중서부라 부르는 서부로의 확장은 기본적으로 큰 안전밸브를 제공했고, 결국 번영을 가져옴. 1857년 또 다른 기술거품이 붕괴했음. 그것은 철도. 늘 그렇듯이 집값도 하늘을 찌름. 사람들이 대출금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은행들은 줄줄이 도산. 1863년 은행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국립은행법이 통과되었는데, 당시 은행들은 예금주의 돈을 갖고 마음대로 놀고 있었음. 이 장기침체를 종식시킨 것은 질병보다 더 나쁜 치료법이었는데, 바로 남북전쟁이었음. 1873년부터 1895년까지, 남북전쟁 후의 호황은 껍데기만 남았음. 철도 대부분이 다시 연루되었음. 적어도 그때까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22년 동안의 경기침체였음. 그때 벌어진 일은 오늘날 2000년의 인터넷주 거품과 08년 주택거품과 다시 한 번 비교해 볼 수 있음. 이번에 택한 해결책은 부자들을 개입시키는 것. 그들의 개인 재산을 빌려 앞서 빌린돈을 갚았는데, 이로 인해 초대형 은행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그들의 금 보유량은 바닥까지 내려감. 시티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 모건 스탠리,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이 사운을 걸고 현대의 불황과 싸우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행동한 사람은 다른 아닌 현재 모건스탠리의 창립자 JP모건이었음. 그로부터 12년후 1907년에, 또 다시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조하고자 나선 이 또한 모건이었기 때문. 이번에도 그는 월가 지도자들이 자신감과 신용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사용하게 했음. 빌 게이츠, 버핏, 래리 엘리슨, 조지 소로스, 도날드 트럼프에게 그들 개인 재산과 위신을 현재의 기나긴 불황을 타개하는 데 기꺼이 걸어달라고 요구한 것. 솔직히 말해서, 이 해결책이 또 다시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긴한다. 1929년 경제대공황은 오늘날 연방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해결책을 적용한 사례처럼 보임. 그 계획은 지출을 늘리고 기반시설을 구축하기 위해서, 공공사업 촉진국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었음. 많은 교각, 댐, 도로가 지어졌음. 심각하게 많은 적자 지출이 있었고, 새로운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우대 조치가 있었음. 그것은 효과를 보았다. 또한 은행이나 월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한 법이 통과됨. 1990년대에 스무트 할리 관세법과 같은 많은 법들이 중개업자와 은행들에게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폐지됨. 억제할 수 없는 그들의 탐욕이 경제를 다시 무너뜨리는 데는 고작 10년밖에 걸리지 않았음.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은행들이 최근이 다시 부활한, 유사한 법들에 대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고 있음. 이번만큼은 의회가 좀더 잘 배울수 있개를 바란다. 그리고 2차대전은 1937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림.
- 역사를 보면, 회복과 재성장을 위해서는 우리가 소비중심의 경제활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우리는 발명, 투자, 생산, 혁신에 기초를 둔 경제를 도모해야 함. 그리고 그것에는 정부, 민간부문, 그리고 국민들의 희생과 타협이 요구됨. 직업, 집, 사업, 모아둔 돈을 모두 잃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아픈 현실임. 그런 상처는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데, 다행히 가끔은 더 나아지게도 함. 그들은 진짜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됨. 더 많은 정부의 개입을 원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것의 한계와 부정적 영향을 깨닫게 됨. 정부의 개입을 덜 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역시 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삭감하는 순간,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를 직접 부딪치게 됨.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그들이 1907년 모건이 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가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한다면, 결국에는 기업가로부터 은퇴자들까지 모두가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회사들이 깨닫게 된다는 것. 그래서 역사가 주는 진정한 교훈은 미국과 유럽이 직면한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희생하고 일체감을 가지며, 개인의 이익을 제쳐두고 국가의 이익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 과거에는 이런 희생이 몇번이고 되풀이 되었고, 이후 상황이 호전되면 근로자나 고용주가 모두 이익을 얻었음. 이제는 우리가 다시금 이 희생에 대해 생각해볼 차례임
- 한 제국의 중산층이 사회적, 경제적 힘에 의해서 거의 완벽하게 제거된 예가 있음. 이 일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나라를 유지했던 고대 로마제국에서 일어났음.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일어난 일과 그로 인한 영향을 살펴본다면 정신이 번쩍 들 것임. 제국시대인 기원전 30년부터 서기 15세기까지, 로마의 원로원과 최고위 귀족들의 가족은 지나치게 부유했음. 그들은 자신들의 토지로부터 매년 2천만 세스테리스우스를 벌어들임. 오늘날의 미국달러로 환산하면 매년 2천만 달러 이상임. 그러나 오늘날 초대형 회사들처럼, 그들 또한 사실상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음. 거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은 크라수스만큼 돈이 많다는 소리를 들음. 불행히도 로마의 체제하에서 이처럼 부자로 대표되던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는 5년마다 한번씩 세금을 냈는데, 그 액수는 고작 오늘날의 달러화로 7만 5천달러였고, 그의 수입에 비하면 안낸 것과 같음. 로마에서는 부유한 귀족들이 세금을 낼 사람을 결정했기 때문에, 자신은 세금을 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은 당연한 일. 오늘날의 귀족은 회사들이고 로비스트들을 통하여 그들은 로마시대와 같은 이익을 챙김. 월급과 수당으로 수천만 달러를 버는 회사 사장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소비풍토 또한 2천년전의 남용과 동일함. 로마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물건은 없었음. 그들은 자신의 부를 뽐내기 위해 경쟁. 금은 지천에 깔려 있었고,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물건을 통해서 맵시를 자랑. 비둘기의 혀를 먹는 등의 극단적 요리도 등장했는데, 그런 음식들은 금화를 몇개씩이나 주어야 먹을 수 있었음. 그와는 정반대로 2세기에 일반적인 로마의 근로자들은 놋쇠로 만든 동전을 임금으로 받았고, 그 액수는 매우 적었음. 그들은 은화를 보기조차 쉽지 않았다. 최후의 2세기 동안에 로마제국은 파산하는 과정에 있었고 군비감축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가진 자들은 실질적으로 한푼의 세금을 내지 않음. 로마의 정부는 도로를 보수하고, 항구를 청소하고, 심지어 노상강도나 해적으로부터 상인들과 여행객들을 지켜줄 선원과 함대를 갖출 돈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 그들에게는 군대를 유지시킬 자원도 충분하지 않았음. 한때는 난공불락의 로마군대가 드러내 보인 새로운 약점은 고트족에서부터 훈족까지 온갖 침략자들을 불러들였고, 결국은 제국을 멸망하게 했음. 어떤 세법도 피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부가 하나의 강력한 작은 집단에 집중되어 있었던 로마는 더 이상 정부의 살림을 꾸릴 여유가 없었음. 결국 몇몇 침략자들에 의해 로마제국은 멸망. 사실상 비용을 아끼기 위해 선거권을 박탈당한 이탈리아 가난한 사람들은 로마를 위해 싸울 어떤 명분도 없었기에, 국경근방의 비로마인들이 징병됨. 역사의 수세기 동안 로마는 군대를 아웃소싱했다. 고대 로마에서 한때는 중산층의 농부였던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세금 및 채권회수 대행업자들에게 땅을 빼앗김. 순식간에 이탈리아의 모든 지역은 체불상태가 됨. 마치 오늘날 주택위기 때와 흡사하게, 로마의 은행들은 중산층의 농장과 주택에 대한 이자를 받기가 힘들어짐. 그래서 그들은 압류를 시행했는데, 그로 인해 한해에 한 지역에서만 수천개의 농장과 주택의 소유권이 바뀜. 오늘날 투기군들이 주택들을 사들여서 임대를 하는 것처럼, 그 농장들은 부자들에게 되팔렸고, 부자들은 땅들을 합쳐서 하나의 거대한 사유지로 만듬. 마치 거대한 회사가 지닌것과 같은 개념의 기업식 농장이었음. 부유한 로마인들이 거대한 토지를 사들이고, 전리품인 노예를 사용해서 남아있는 중산층 농부들보다 훨씬 싼 가격에 토지를 경작. 도매식품의 가격이 떨어지자 남아 있는 중산층의 영세농부들은 경쟁력을 상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남.
- 통념적 격언에 따르면 고등교육을 받아야 고소득을 보장받음. 하지만 폴 크루그먼은 단지 대학에서 더 많은 학생들을 배출한다고 해서 중산층이 확보되지는 않을 것이라 주장. 지난 수십년 동안, 대학 학위가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됨. 우리는 적어도 교육에 관해서라면, 하나의 옷이 모든 사람에게 다 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 그래서 중산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육제도를 자녀들이 합리적인 보수를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알맞게 준비시켜주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음. 또한 추방된 모든 육체 노동자들을 위한 폭넓은 재훈련 프로그램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 또한 미래 세대들을 위해서는 과거 미국 근로자들의 특징이었던 혁신과 창의력에 초점을 맞춘 직업교육이 필요. 그것은 대학 학위를 필요로 할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
- 로마와 미국사이의 가장 명백한 유사점이 있다. 두나라 모두 식민지 국가들이었고, 또 다른 강대국의 파생물이었다. 로마의 전통은 트로이가 무너졌을 때에 그곳에서 도망친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고, 미국은 영국의 속국이었음. 로마가 민중이 아닌 원로원에 의해 건설되었던 것처럼, 두나라 모두 과두정부에 의해서 세워지고 통치되었음. 로마는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었음. 사실상 선거나 대학과 같은 요소들은 미국의 건립자들이 로마를 본보기로 삼기 위한 과정에서 생긴 직접적 잔유물임. 두 나라 모두에는 우민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 사실상 대부분의 최초 미국 상원의원들은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고 왕국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었음. 미국과 로마가 모두 작은 주들로부터 시작해서 매우 공격적으로 확장됨. 이 확장은 때때로 그들의 이웃이나 이전의 거주자들을 희생시키며 이루어짐. 미국 원주민들, 스페인 사람들, 하와이 사람들, 멕시코 사람들에게 미국이 어떻게 영토를 확장했는지 물어보라. 물론 로마는 지중해 유역 전체와 그 너머까지의 지역을 정복하거나 위협했다. 로마는 전세계를 점령하고 지배함으로써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필수불가결의 의무라고 여겼다. 또한 미국인들에겐 북미와 그 너머의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일컫는 용어가 있었다. 명백한 사명설. 물론 둘다 성공을 거두었다. 두 제국 모두가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의 경찰관이 되었음. 라틴어와 오늘날 영어는 전 세계의 많은 나라로 현재 확산되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 로마와 미국의 문화 모두는 다른 나라로 많이 수출되었고 지금도 수출되고 있음. 로마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초반의 미국은 말할 나위 없이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군대를 갖고 있고 최신식의 과학기술과 여러 기법들을 사용하고 있음. 또한 두 나라 모두가 그들이 내보내는 군대들이 한계지역까지 뻗어가는 것을 보았음. 매커비족으로부터 영국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군대와 맞붙는 것은 자살행위였음. 로마에 저항하는 것은 테러, 비밀유지, 반란이 포함되었음. 미국 역시 자신이 선택한 어떤 전장도 지배할 수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적들은 오늘날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고 있음.
- 미국이 현대판 로마제국인지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사실상 실질적이기 보다는 의미론적임. 그 유사성이 미국의 미래에 있어 불길한 전조가 됨을 아는 것이 중요. 미국은 로마제국과 많은 유사성을 공유하는데, 심지어 대영제국의 후반기와 많은 공통점을 갖기도 함. 사람들이 비교를 못해서 안달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제국과 마찬가지로 로마제국도 결국 붕괴했다는 사실 때문. 아무리 크고 부유하더라도, 제국들은 결국 쇠퇴를 맞음. 똑같은 일이 몽골제국에도 일어났는데, 거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2세기가 지나서 몰락. 대영제국 역시 1600년부터 1979년에 영국의 마지막 식민지들이 독립할 때까지 진정한 제국으로서 지속됨. 소련을 두려워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빨리 흘렀고, 불과 1905년 볼셰비키 혁명부터 1991년 8월 공산당 붕괴까지 지속되었을 뿐임
- 로마는 거주민이 백만명 이상이 될 때까지 성장. 유능한 로마의 기술자들은 물과 하수관을 공급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이무리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서 6,7층짜리 건물을 지을수도 있었음.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위한 직장을 마련할 방법을 찾지는 못함. 그 결과 1세기말 로마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25%가 일터를 찾지 못함. 이것이 문제가 됨. 로마에서는 폭동이 자주 일어났고, 그중 어떤 것은 황제의 몰락과 대규모 파괴를 야기. 어떤 로마 황제도 굶주리고 화가난 수만명의 군중들이 그의 성에 들이닥치는 걸 원하지 않았음. 그래서 그 도시는 열악한 동네에 무료로 빵을 지급했음. 그러고 나서 실업자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정치가들은 오락거리를 제공.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군중을 한꺼번에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은 대형경기장 뿐이었고 대안은 서커스였음. 대중들은 먹고 즐기며 만족스러워 했음. 한 세대가 지나기 전까지, 수만명의 로마인들은 어떤 다른 삶을 살거나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빵과 오락조차도 그들의 권리로 주장하지 못함. 이것은 그 대가로 발전이나 새로운 기업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내부 평화를 유지했을 뿐임. 황제들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생겨난 불만은 폭동과 정치적 격변을 초래.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유사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정부들이 복지에 의존하는 하위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 희소식이 있다면 레이건 정부 이후로 미국 정부가 이 염려를 인식하게 되었고, 의존성을 제한하고 다세대에 걸친 악순환을 깨뜨리기 위한 최초의 조치를 취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고, 다른 측면에서는 오히려 급격하게 커지고 있음. 2010년도에 미국 국민중 절반이 그들이 받은 도움에 대해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고, 675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보조금을 받았음. 그것은 다섯명중 한명꼴인데 11년과 12년 상반기에만 8%가 더 늘어난 것. 이것은 무료급식권, 저소득층 의료보험, 노인 의료보험, 임대료 보조금, 아동양육 보조비, 그리고 많은 개인적 복지 프로그램을 포함. 그러나 그것은 고대 로마의 도시에서 오늘날 우리가 빵과 오락이라 여기는 것들에 의지했던 사람들의 비율과, 현대 미국에서 생존을 위해 정부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같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
- 서부 로마 제국이 약화되고 시민들이 입대에 흥미를 잃을 때에, 군대의 질과 양이 떨어짐. 이윽고 여전히 부유한 제국은 충성심이 떨어지는 야만인 부대원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음. 그것은 연이은 침략자들의 너무나 유혹적이고 풍요로운 목표물이 됨. 만약 로마의 군대역사가 명백한 교훈을 하나 남겼다면, 미국과 유럽이 전쟁을 치르기 위한 방편으로 적극 활용하지 않더라도, 군대를 강한 상태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 모든 역사를 통틀어, 군대가 약하면 돈이 많이 소됴됨. 로마와 5세기의 경우 영국의 군대가 떠난 후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중국이 몽골에게 무너졌을 때에도 그러했음. 적자 예산을 운영할 때에는 이 사실을 알기 어려움. 하지만 누군가를 정복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방어만 하는 모습은 국가를 취약하게 만들고 외교를 제한함. 그리하여 결국 쇠퇴의 순간을 앞당김. 로마는 내부 테러분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 본보기가 되었음. 그들은 테러분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돕는 사람들마저 탄압. 이것은 이 전술이 항상 먹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님. 히브리인 자객을 저지했던 동일한 형태의 탄압은 거리에서 병사들이 했던 탄압과 마찬가지로, 결국 로마가 한 군단 전체를 잃고 수년 동안 포위를 당한 채 불안에 떨게 한 반란을 야기. 당연하게 반란에 무너진 유대인들이 치른 대가는 훨씬 더 컸고, 예루사렘의 재건된 성전 또한 파괴되었음. 로마는 효율적 정보부가 있어서 테러분자들을 색출하고 좌절시키는 데 사용. 기꺼이 필요한 대책을 세우는 것,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적절한 조치를 하는 것, 세계의 가장 효율적 군대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는 것 등이 로마의 전략이 효력을 발생하도록 만든 것. 9월 11일 끔찍한 아침을 맞았지만, 미국인들은 이 교훈을 통해 배운 것 같다. 미국은 동일한 방법의 집중적 정보수집, 테러집단에 대한 강경한 저지, 그리고 테러행위와 맞서 싸우기 위한 군대의 활용 등을 총 동원. 이것은 이라크와 아프간과의 전쟁에서도 사용된 전략이었음. 사실상 알카에다의 해체와 9월 11일 이후에 주요 테러분자의 낮은 성공률은 이런 대응이 효과적임을 보여줌
- 군대의 성공과 제국의 성장이 오히려 이 진정한 로마사회의 중산층을 비운에 처하게 함. 제국이 성장함에 따라서 부대원의 수요가 더욱 커짐. 남자들은 농장에서 불려나가서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쟁을 치르러 떠암. 율리우스 시저의 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 끌려가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의 농장은 실패하고 남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했음. 그들이 전쟁터에서 갑자기 돌아왔을 때, 건설을 도왔던 제국이 그들의 생계수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됨. 참전용사와 그의 가족들은 하류계층의 일부이자 대부분이 실직한 무리들이 처소인 로마의 빈민굴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됨. 누가 그 농장들을 빼앗았는가? 다름 아닌 부유한 귀족들과 로마의 원로원을 통제하는 상류층이었음. 이 사람들 중 한명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음. 그는 아마도 왕이나 황제를 제외하고 로마의 역사상 가장 큰 부자였음. 너무나 부유하고 영향력이 커서 율리우스 시저가 폼페이 대제와 로마의 지배권에 대해 협상을 할 때 그를 삼두정치에 포함시킴.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용하는 속어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크라수스만큼 부유한'이다. 그는 그만큼 부유했고, 그의 재산 대부분은 영세농부들로부터 땅을 인수해서 광대한 토지를 확보한 데서 왔음. 전쟁에서 군대의 성공은 로마 중산층의 파괴라는 또 다른 결과도 가져옴. 패배한 적의 병사들과 저항하는 도시의 주민들은 때로는 노예가 됨. 이것은 결국 로마와 이탈리아가 노예들로 득실거리도록 만듬. 크라수스를 포함한 부유한 귀족들의 땅의 높은 수익을 올리게 만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이 노예들이었음. 그것은 또한 도시에 모여든 이전에 중산층이었던 농부들에게는 직장이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 그러나 도시에서는 많은 직업들이 결코 노예들에 의해서 채워지지만은 않았음. 만약에 당신이 특별한 기술이 없다면, 노예들이 당신과 같은 일을 하고 훨씬 더 낮은 임금을 받을 것임. 도시에서 중산층은 일반적으로 장인신분으로 제한이 되었고, 가장 힘든 육체노동자의 계층상승은 거의 불가능했음. 수세기동안의 성공은 로마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고, 그 나라를 세계의 강대국으로 만든 중산층은 역사의 무대에서 멀어져 갔음. 부자들은 더욱더 큰 부자가 되었고, 그 밖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음. 이것의 결과는 바로 제국의 쇠퇴. 이 일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것이 아니지만, 한치의 주저도 없이 끊임없이 미끄러진 것임. 우리가 초강대국과 제국에 관해서 말할 때, 이 점차적인 쇠퇴가 4세기에 걸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 중산층을 제외하고 나면 제국의 성공과 보존에 있어 배당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구가 거의 없을 것임. 부자들은 원로원을 통제했고, 일반적으로 부자의 가족들은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해 싸웠음. 빵과 오락에 의존적인 계층과 결합한 결과, 후반기 공화주의 로마의 정치는 사나웠고 난폭하기까지 했음. 중산층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 만약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이 있다면, 심지어 매우 낮은 계층이라도 노력하고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음. 하지만 진정한 사회적 유동성이 막혀 버린다면, 그 사회의 모습은 암울하기만 할 것임. 로마에서는 중산층의 결핍은 특별히 로마인의 삶에 비관적이었고 부정적 영향을 끼쳤음. 로마의 쇠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 중 하나는 경제적 몰락이었음. 그 중 결정적인 것이 바로 중산층의 파괴. 중산층 농부와 상인들은 세금을 냈고, 군인들도 임금을 받지 않고 복무. 하지만 중산층의 상실로 인해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숫자는 감소되었고, 소비자인 중산층의 상실은 대부분의 제품에 대한 수요와 수입푼에 대한 관세의 감소로 이어짐. 만약 사회복지 사업과 그와 유사한 필수사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더한다면, 황제들은 결코 충분한 돈을 갖지 못했을 것임. 그 결과는 줄어든 군비와 사회적 불만, 그리고 경제적 술책 등이었음. 이것은 충고를 담은 이야기다. 로마인들은 결코 중산층을 부활시키지 않았다. 부자들은 부유한 상태로 머물렀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상태로 머물렀다. 군대는 점점 약해졌고 돈을 덜 받고 일하는 외국인으로 붐볐다. 그리고 야만인들이 몰려왔고, 마침내 암흑시대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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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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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저자
패멀라 D. 톨러 지음
출판사
다른 | 2014-07-03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았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인류의 ...
가격비교

- 현생 네안데르탈인 : 많은 학자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교류는 인정하지만 그 교류가 혼인과 출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 그러나 최근 DNA염기서열 분석법은 그 이론을 반박함. 10여년전 몬트리올 대학 연구진들은 인간 X염색체의 DNA변이를 밝혀냄. 이 변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대립형질의 일배체로 구성되어 있었음. 그러나 몬트리올 대학 연구진은 이 일배체의 기원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10년 하버드 대학과 MIT 공대가 네안데르탈인의 화석뼈에서 추출한 DNA파편 10억개의 게놈염기서열을 분석하여 그 비밀을 밝혀냄. 네안데르탈이 게놈을 흔지 않은 일배체와도 비교하고 다른 지역 인간 DNA와도 비교. 그 결과 그 일배체는 네안데르타인 게놈의 연기서열 분석과 일치했고, 사하라 사막이남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라 출신이 아닌 현생인류 DNA중 1~4%를 차지했음. 이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했다는 설은 설득력을 잃음. 그들은 우리안에 살아있다.
- 왜 밀이었을까? 밀, 보리, 옥수수 등 야생곡물은 줄기끝에서 자람. 그래서 바람이 불면 낟알이 바람을 타고 흩어짐. 그러면 떨어진 자리에서 발아하여 더 많은 줄기를 생산. 그런데 밀과 보리의 유전자 돌연변이는 씨가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음. 씨가 떨어지지 않는 줄기는 진화상으로는 마지막 단계라서 스스로 재생산을 못함. 이런 씨앗이 농업의 시작이 됨
- 고대 아메리카인이 옥수수를 재배하게 된 경로에 대해서 식물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둘로 갈림. 하나는 현재는 멸종한 어떤 야생풀에서 진화했다는 의견. 다른 하나는 테오신트와 옥수수가 다르긴 하지만 옥수수가 테오신트에서 진화했다는 주장. 어쨌든 기원전 6000년 무렵 중앙아메리카 고대인은 특별한 농경방법을 개발. 곧, 콩과 호박과 옥수수를 한밭에 심는 것. 그러면 콩과 호박은 옥수수 대를 울타리 삼아 넝쿨을 치고, 옥수수는 콩의 질소소정뿌리혹에서 영양소를 흡수. 후대 아메리카 원주민이 세자매 농법이라 부른 이런 공생관계는 요리로로 디어져 콩과 옥수수를 함께 요리하면 영양이 풍부한 완전식품이 됨
- 기원전 9000년 무렵, 텔 문화라고 알려진 최초의 도시가 서아시아에서 나타남. 텔은 아랍어로 언덕이란 의미. 당시 잉여곡물을 노린 유목민의 침략이 빈번했고, 이를 방어하고자 언덕에 마을을 세웠던 것으로 보임. 마을 둘레에 돌로 벽을 쌓기도 했음. 이 시기 마을로는 나투피안족의 예리코가 가장 유명. 예리코는 현재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있음. 신석기 시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마을은 예리코만이 아님. 기원전 7000년 무렵 터키 차탈 휘유크, 기원전 6200년 무렵 불가리아 카라노보, 기원전 3000년 무렵 파키스탄의 코트 디지, 기원전 2500년 무렵 중국의 청쯔야 등 농경이 시작되었던 무렵의 도시임. 이 도시들은 문화는 달랐지만 공통 특징이 있음. 홍수를 다스리려고 관개에 힘썼고 신전과 곡물창고를 세웠음.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 있었고 신에게 제물을 바쳤음. 예리코에서 터키의 흑요석과 시나이의 터키석, 지중해의 바닷조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교역과 전쟁도 있었을 것으로 보임
- 농업혁명이 중동의 발생지에서 널리 퍼지기까지는 수천년이 걸렸지만, 새로운 청동제조기술은 순식간에 보급되었음. 기원전 2000년 무렴 중국의 상왕조 장인들은 독특한 청동그릇을 생산. 번화한 광산, 금속세공, 교역소가 기원전 1800년 무렵 중앙유럽과 기원전 1500년대 스칸디나비아에서 발달. 청동을 만들려면 구리와 주석이 모두 필요한데, 이 두 광석이 한지역에서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음. 그래서 이것들, 특히 주석을 얻기 위해 발트해 연안에서 지중해를 거쳐 북인도에 이르는 지역 무역망이 맞물리면서 발달할 수밖에 없었음. 주석은 희귀금속이기 때문에 호박, 모피, 견, 금, 파이앙스 구슬, 흑연, 세공한 청동, 소금과 함께 국제시장의 주요 상품이었음. 새로운 도시와 문화가 그 무역로를 따라 일어난 것은 당연할 것임. 구리와 주석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현재의 프라하지방은 도구와 무기를 생산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새로운 우네티체 문화가 발달. 청동기 시대는 자원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생존의 불안도 커짐. 청동무기는 돌이나 구리무기보다 훨씬 치명적이었음. 돌낫으로 무장한 농부가 구리창으로 무장한 병사와 싸워볼 수는 있지만, 청동 갑옷을 입고 청동칼을 든 병사와는 싸워볼 기회조차 없었음. 그리하여 새로운 군사 엘리트 계급이 생겨났음. 역사상 최초의 무기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음. 기원전 1500년대는 청동기 시대의 절정기였음. 지방 족장의 돌무덤에서도 정교한 청동도끼와 투구가 나왔음. 이제 청동은 중국 상왕조에서 영국 야만족에게까지 퍼져나감. 중동에서 처음 마을이 출현하고 몇천년마에 문명이 탄생한 것.
- 문명의 시작, 철 : 인간은 처음부터 이런저런 형태로 철을 이용했음. 선사시대 우리 조상은 황철석을 갈아서 동굴벽화에 색을 입혔고, 그 후에는 토기의 유약으로 사용. 부적 속에 운철 덩어리를 넣고 다니기도 했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쇠를 녹여 합금을 만들기에 이름. 인류의 숱한 발견처럼 값비싼 청동에서 철로의 이행은 절박함이 낳은 발명의 결과. 청동제조에 꼭 필요한 주석을 더는 구할 수 없게 되자 키프로스의 한 청동 대장장이는 지중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검붉은 철에 주목. 철이 청동보다 더 잘 잘린다는 것을 알게 되자 도끼와 칼에 사용. 배를 만드는 데도 쇠못이 더 나았음. 100년도 지나지 않아 철은 농업과 전쟁을 힘센 부자들에서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확대. 철은 지구를 이루는 원소 중 가장 풍부하며 지구핵의 90%를 차지.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출이 수천킬로에 달하는 보호막을 형성함. 이 보호막이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태양풍과 태양흑점에 그대로 노출됨. 따라서 지구핵의 철이 계속 회전하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생명이 더는 존재할 수 없음. 철은 이렇게 우리 행성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에 땅위에서나 땅속에서나 광범위하게 발견됨. 아프리카 중앙에 있는 니제르는 지중해와 별도로 독자적인 제철공정을 개발. 니제르 사람들은 아주 높은 고온 용광로에서 작업했고 천연풀무를 이용. 그들이 사용한 용광로 유적이 오늘날 사하라 사막의 남부 초원지대에서 발견되었음. 이중에서 시기가 가장 이른 용광로는 제철기술이 이집트와 키프로스에 들어오기 훨씬 전인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임. 아프리카의 대장장이들은 지중해보다 더 일찍 철을 녹이는 비법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탄소원자를 철에 결합시킬만큼 뜨거운 고온 용광로를 제작. 이 기술이 바로 현대 강철 제작의 토대임. 기원전 1000년 이후 철은 청동을 제치고 세계의 주요 금속이 됨. 칼과 쟁기뿐 아니라 마차와 바퀴와 철로, 자동차 부품에도 사용됨. 작고 값싼 못에서 고층건물 골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철기시대를 살아간다 말할 수 있음. 주철 프라이팬에서 핵 반응로에 이르기까지 철과 강철은 세계에서 사용되는 금속의 90%를 차지.
- 페르시아 전쟁은 단지 제국과 민주주의의 싸움만은 아니었음. 그것은 서로 다른 전쟁방식의 대결이었음. 페르시아 군대는 시작부터 기병과 궁수라는 정예군으로 무장. 반면 그리스순은 긴 창과 양날의 칼로 무장한 보병위주. 각 도시국가는 자체 민병대가 있었고 민병대는 그들이 들고 다니는 호플론이라는 커다란 둥근 방패에서 이름을 딴 호플리테라는 시민군으로 구성. 이 방패는 팔랑크스라는 그리스 전투전술에서 중요한 요소였음. 팔랑크스 전술이란 중무장한 보병이 길게 밀집하는 전투대형이었음. 밀집한 보병은 서로 방패를 겹쳐들고 방어하면서 나팔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전진. 이 대형은 바꾸기 어렵고 적도 이 대형을 뚫기 어려웠음. 그런데 일단 대형이 뚫리면 오합지졸에 불과했음.
- 팍스 로마나는 오래가지 않았음. 3세기 중엽 로마제국은 무너지기 시작. 235년에서 284년 사이 26명의 합법적 통치자와 40명의 왕위 찬탈자가 로마황제의 자리에 오름. 그들 대부분은 무능력했음. 두사람을 제외한 모든 황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음. 재위기간이 3개월도 되지 않는 황제도 있었음. 여러 황제가 동시에 난립하는 일이 잦았음. 그런 상황에서 로마군만이 유일하게 안정된 권력으로 남아 있었음. 그들은 장군의 명령에 따라 황제를 옹립하기도 하고 폐위하기도 했음. 지구 건너편 중국에서는 아직 한나라가 계속되었지만 초기 한나라 황제들이 누렸던 절대권력은 얻지 못했음. 2세기 중엽에는 어린 황제가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짐. 당파싸움이 극에 달하고 환관에 의한 궁중음모가 판치고 외척이 황제를 좌우함. 220년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고 중국은 세개의 독립국가가 공존하는 삼국시대로 접어듬. 중국의 권력구조가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도 실크로드는 열려 있었음.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를 대신해 처음에는 비잔티움이 나중에는 서유럽 왕국이 중국의 사치품 시장이 됨
- 455년, 쇠퇴일로를 걷던 문명의 중심 로마가 서고트족과 훈족의 공격으로 최후의 일격을 받음. 반달족이 로마를 침략. 황후를 납치하고 도시를 불태움. 로마의 철학과 역사, 과학, 수로관, 문자해득 능력이 폐허속에 묻히고 초기 로마 교회의 약속과 시가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 이제 하나의 제정 대신 대토지 소유자와 부족장을 중심으로 한 수십개의 소왕국이 치안을 맡음. 로마의 자랑인 도로는 그대로 있었지만 여행하기에는 위험했음. 우리가 암흑기라고 기억하는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됨. 인간의 문명은 유럽에서는 암흑기로 접어들었지만 동방에서는 전성기를 맞이함. 동로마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여전히 건재했음.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신도군을 이끌고 개종과 정복을 탁월하게 결합함으로써 아라비아 사막 너머로 교세를 확산시킴. 그 비용은 대부분 아라비아 금광에서 충당. 한편 13세기 중세시대가 끝나기 전 기사가 주축이 된 서구의 군대는 가슴에 십자가를 새기고 무슬림과의 전쟁을 선포.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피바다로 만들 것임. 이들의 대립과 갈등은 상업적 교역과 문화적 교류의 씨앗이 되기도 하지만, 수세기종안 지속될 문명충돌의 첫단계이기도 했음.
- 235년부터 284년까지 재위에 올랐던 통치자들과 권력찬탈자들은 정치적으로 무능한데다가 북쪽과 서쪽으로부터는 게르만족의 위협을, 동쪽으로부터는 페르시아에서 새롭게 일어난 사산제국의 위협까지 직면하게되어 도저히 제국을 통합할 수 없었음.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를 네 지역으로 분할해서 공동황제가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음. 황제는 일시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이는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영원히 분리되는 결과를 낳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 제국은 모든 부를 가졌지만 페르시아에서 새로 발흥한 사산제국의 방어에 집중해야 했음. 서로마제국은 부패하고 무능한 행정관들과 야만족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됨.
- 노르웨이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나 장인, 상인이었으나 봄이 되면 일부가 해적이 되어 수도원을 약탈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잡아감. 물론 교화를 모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엇음. 영국제도의 부유한 수도원은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음. 영국제도의 기독교 전례서에는 특별 기도문이 있었음. "하느님, 저희를 북쪽 사람들의 분노로부터 구해주소서"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음. 그들의 약탈은 기습공격이 특징. 배의 속도와 기동력이 단연 앞섰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는 어려웠음. 아일랜드의 연대기인 얼스터 연대기의 저자는 그들의 침략대상을 대서양의 태풍에 비유. "바다가 아일랜드 위로 이방인 홍수를 내뿜으면 안식처도, 부두도, 근거지도, 요새도, 성도 파도같은 바이킹 해적에 휩쓸려 가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830년대로 접어들면서 바이킹 약탈 양태가 변화. 고립된 수도원을 공격하기보다 대규모 탐험대를 조직하여 기지를 구축하고 방어공사를 했음. 다음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할 의도. 진지는 촌락까지 확대됨. 침입자는 지역의 왕과 혼인동맹을 맺으며 정치적 갈등에 깊숙이 개입하고 점점 노르만족과 러시아인으로 변모해감. 노르웨이 바이킹족은 아일랜드의 조용한 동쪽 해안에 더블린을 시작으로 안나가산, 웨스퍼드, 워터퍼드, 코크 같은 항구마을을 세움. 이 마을은 처음엔 다음 탐험을 대비해 배를 수리하기 위한 한적한 겨울 야영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 중심지로 발전. 그들은 아일랜드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의 항구마을 낭트를 약탈하고 843년에서 862년 사이에는 루아르 계곡까지 올라갔고, 850년대에는 에스파냐를 거쳐 북아프리카까지 진출. 북아프리카에서는 황실의 두여자를 납치하여 거액의 몸값을 받고 돌려보내기도 함
- 데인족은 잉글랜드를 집중적으로 약탈. 835년부터 템스강을 따라 방어기지를 세우고 이곳을 기점으로 30년간 공격을 가함. 9세기말까지 요크셔 북쪽에서 템즈강까지는 데인족의 지배하에 놓임. 노르웨잉인처럼 데인족도 영국해협 반대편까지 침략해 들어감. 911년 데인족의 지도자 롤로는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단순왕과 조약을 맺고 그의 가신이 되는 조건으로 네우스트리아 지역(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받음. 롤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베르트라는 세례명도 받음. 그의 바이킹 전사들도 노르만인이 되었고, 1066년에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데인족 통치자를 무찌름. 스웨덴인도 동쪽으로 이동. 처음 발트해에서는 교역과 거래를 구실로 접근했지만, 후에 러시아에서는 정복자로 군림. 858년 지도자 류리크는 새로운 나라 러시아를 세우고 키예프를 수도로 정함. 현재 러시아인의 선조인 류리크의 바이킹은 비잔티움과의 교역로로 드네프르 강을 이용. 볼가강은 카스피해로 갈 수 있는 통로였음. 볼가는 이들이 모피와 노예를 팔고 중국비단을 사들이면서 동서 무역망의 일부가 됨
- 637년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고나서도 무슬림과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평화롭게 잘 지냈음. 아무도 기독교 왕국이 조치를 취해주기를 원하지 않아음. 그런데 11세기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독교가 전파되는 속도는 유럽이 로마제국보다 더뎠음. 유럽인들을 선교하는 것은 로마가 몰락하고 나서는 어렵고도 보람없는 일이었음. 785년 말 게르만 왕국사이에서 기독교가 거의 퍼져 나가지 못하자 샤를마뉴는 세례를 거부하는 색슨족에게 사형을 내렸음. 1095년에도 여전히 이교도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12세기까지도 개종하지 않았음. 동쪽의 슬라브 족은 훨씬 나중에야 개종.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끝까지 이교를 고수하다가 1386년에 마지막으로 개종. 변방의 이교도에게 1095년의 기독교 왕국은 로마 카톨릭을 의미할 뿐이었음.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왕국의 수장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자들보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더 많은 권력을 원했음. 로마가 멸망하고 난 후 유럽은 점점 번창했음. 기원전 9세기 근동의 발전에서 보았듯이, 유럽 농업기술의 작은 발전들이 여타 분야의 발전까지 촉진. 잉여 농산물이 생기자 상설시장이 생겨났고 이것은 마을로 성장. 어떤 사람들은 농노에서 해방되어 수공업자들이 됨. 도시에서 소수의 중간계급이 형성됨. 물물교환과 호혜주의에 의해 밀려났던 화폐가 11세기에 다시 경제에 나타남. 몇세기 만에 처음으로 부유하고 신앙심 깊은 유럽인들이 돈을 손에 들고 순례를 시작. 캔터베리, 로마,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지들을 순례. 순례자들은 종교적 경험과 모험, 그리고 이슬람 보물들을 갖고 돌아옴.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규모 순례여행이 확산될 즈음 근동의 권력판도가 변화. 1071년 셀주쿠 투르크족이 팔레스타인을 정복.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인은 이전의 이슬람 통치자들보다 다른 종교에 덜 관대했음. 기독교 순례자들은 소소하게 이런저런 모욕을 당했고 많은 돈을 치러야 했음. 이교도의 푸대접에 대한 불만이 점점 고조됨. 유럽의 지도자와 정복자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게임의 승자가 될수는 없었음. 장자상속제로 왕위계승 전쟁은 줄어들었지만 귀족중에 토지가 없는 젊은이들이 생겨남. 이들이 합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곳은 교회와 전쟁터뿐이었음. 11세기가 되자 쳐들어오는 야만인과 싸울 필요도 없었음. 바이킹 조차도 정착해서 노르만족이 되었기 때문. 동쪽에서의 전운은 미래가 불안한 젊은이에게 영광과 약탈품과 토지를 획득할 절호의 기회로 보였음. 이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던 교황 우르바누스는 군인들이 자신의 부름에 응하리라는 것을 알았음. 사실, 모든 사회계급 남녀가 십자군에 참가. 1096년 봄 동쪽으로 향한 십자군은 군인이 아니라 민중 십자군으로 알려진, 거지, 부랑배 등의 빈민집답이었음. 프랑스 수도사인 은자 피에르가 인솔한, 붉은 십자가를 새긴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있었지만 무기도 없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음. 누더기를 걸친 십자군을 처음 본 무슬림 통치자는 그들이 침략자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음. 무슬림은 산적을 소탕하듯 싹 쓸어버림. 두번째 십자군을 달랐다. 잘 훈련받은 지휘관이 이끄는 기사와 궁수가 1097년 여름 팔레스타인에 도착. 십자군은 니케아, 에데사, 안티오크를 차례로 점령하며 무자비하게 팔레스타인을 도륙함. 그러나 무슬림 지도자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유럽의 침입자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음. 십자군이 마라(현재 시리아의 마라트 알-누만)에 이르렀을 즈음, 포위하는 십자군도 포위당하는 무슬림만큼이나 식량이 절박했음. 십자군은 전령을 보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 그러나 막상 항복하자 십자군의 포악함은 극에 달함. 역사가인 엑스라샤펠의 알베르에 따르면 기독교 군대는 죽은 개뿐 아니라 살해한 투르크인과 사라센인을 먹는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십자군은 거침없이 진격해서 1099년 6월초 예루살렘에 도착. 40일간의 공방전 끝에 십자군은 마라에서 했던 제안을 똑같이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했음. 항복하라. 그러면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 놀랍게도 예수살렘 시민들은 항복했으나 또다시 십자군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림. 이틀동안 닥치는 대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고 거리에는 무슬림의 머리와 손, 발이 산더미처럼 쌓임. 예루살렘의 무슬림은 사실상 생존자가 전무할 정도였음. 유대인은 신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으며 유대교 회당에 숨었음. 십자군은 회당의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지름. 예루살렘의 기독교인조차 용서받지 못함. 예루살렘의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다양한 동방정교회 일원이었기 때문에 십자구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유배했음
- 대략 800년부터 1200년 사이 수백년 간 유럽인은 온화한 겨울과 기나긴 여룸, 그리고 풍작을 누림. 곡물생산량이 안정되는 호시절이 이어지면서 유럽인들은 암흑기를 벗어나는 첫 발판을 마련. 먼저 유럽내의 교역로를 정비하고 나서 아시아와의 교역로도 재건. 유럽의 최북단 지역에 살던 노르웨이인들은 빙하가 녹는 틈을 타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정착했고 북대서양도 건너감. 유럽이 온화하던 수백년간 다른 지역에서는 문제가 나타남. 온도의 상승과 불규칙한 강우 유형 등 이상기후 현상이 심각했음.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면서 뉴멕시코의 차코 협곡을 따라 거주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왕국은 종말을 맞았고, 중미 마야왕국은 세력이 약해짐. 몽골에서 중세 온난기는 덥고 건조한 기후로 찾아옴. 말을 먹일 초원이 점점 줄어들자 칭기즈칸은 군대를 일으켜 더 비옥한 땅을 찾아 동쪽으로 향함. 이처럼 지구 온난화는 제국 팽창에 지대한 역할을 함. 오늘날 중세 온난기는 지구 온한화에 대한 토론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임. 인간을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중세시대 상황을 자연적인 기후변화 현상에서 기온상승기에 해당한다고 지적. 그 근거로 소빙하기라는 비교적 선선한 기온 하강기가 뒤따랐다는 사실을 제시함. 사실 중세 온난기의 온도는 71년 이후 기록된 지구 평균온도보다 몇도 더 낮았음.
- 최초의 페스트는 1331년 중국 허베이에서 발생. 허베이 인구 90%를 죽음으로 몰고감. 질병인자를 지닌 벼룩에 감염된 쥐들이 곡물 마차와 교역물품에 들어가 대상 무리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그병은 중국에서부터 무역로를 따라 확산됨. 중국에서 서쪽으로 퍼져나가던 전염병이 멈춘 곳이 단 한곳 있었음. 현대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경계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인 이식쿨이었음. 이식쿨을 기점으로 대상들은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카파, 바그다드, 타브리즈로 여행. 기록을 보면, 1338년 이식쿨의 한 남자가 의문의 병으로 쓰러짐. 그의 아내가 온갖 민간요법을 치료했으나 끝내 사망하고 아내도 잇달아 사망. 이듬해 평균 사망주 수보다 102명이 더 많은 106명이 갑자기 병에 걸려 사망. 그리고 마을묘지 비석을 보면 106명 사망원인은 같았음. 1348년에서 1350년까지 흑사병이 절정에 달함. 얼마나 극심했는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서양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이름. 그 병은 1347년 제노바 무역선 열두척이 이탈리아의 메시나 항구에 정박하면서 유럽으로 유입됨. 선원 대부분이 전염병으로 죽거나 죽어가고 있었음. 그 병은 전염성이 너무 강해 말만 섞어도 감염되었음. 메시나에 도착한 전염병은 몇달 내에 제노바와 피사로 퍼졌음. 그해말 질병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극성이었고 상선을 타고 파리로, 저지대로, 영국으로 퍼짐. 1349년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로 퍼짐. 1350년에는 북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로 가서 바이킹 정착지를 휩쓸었음. 그리고 2년뒤에는 러시아에 도착.
- 14세기 슈트라스부르크의 유대인 학살은 인산사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성 말살을 상기시킴. 인간에게는 어려움이 닥칠때마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경향이 고개를 듬. 극심한 흉년이 들거나 전국적인 유행병이 번지거나 경제가 실패하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원인을 전가할 소수집단을 찾아 군중으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도록 부추김. 군중은 집단 히스테리에 사로잡힘. 이런 군중심리는 역사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남. 고대 로마에서 박해받은 기독교인, 16세기 마녀사냥, 19세기 러시아와 폴란드의 반유대주의, 20세기 초 터키에서의 미국인 학살, 2차대전 유대인 학살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 인종적 증오, 미신, 편견, 무지는 공동체와 국가를 분열시키고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는 강력한 힘이다.
- 5세기 로마멸망 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수세기동안 비잔틴 제국으로 명맥을 유지. 제노황제 치하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자신이 로마의 유산을 이어받은 세계의 중심임을 주창. 황제들은 로마의 행정체계를 존속했지만, 행정과 군대 공식어로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채택.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근동아시아의 교차로라는 지리적 입지 덕분에 수세기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유럽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무역거점으로서 서양에 동양의 지원을 연결. 비단과 향신료가 수천킬로미터를 이동해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곤 했음.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향신료는 후추였음.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할 즈음 후추는 금값이 됨. 8세기 이슬람 팽창의 첫번째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비잔틴 제국은 끊임없이 공격을 받음. 비잔틴 제국은 아랍인과 불가리아인, 마자르족을 차례로 물리치고 영토를 지킴. 1204년에는 서구 기독교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 침략때마다 제국의 영토가 야금야금 떨어져나감. 수세기 동안 끊이지 않은 전쟁으로 비잔틴 제국이 재물과 방어막은 축났고, 병사들은 14세기에 부상한 신흥 강국 오스만 투르크를 더는 막을 수 없었음. 1361년 무렵 오스만 제국이 예전 비잔틴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고,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협도 장악. 이에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은 도시국가로 쪼그라들음.
- 비잔틴 제국의 초대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수도를 건설하면서 굳건한 성벽을 최우선으로 구려. 여기에 망루와 배수로를 갖투고 60미터 너비와 30미터 높이의 3중 방어막을 세운다면 후대의 황제들에게 영원한 제국을 물려줄 수 있으리라 확신. 오스만 제국 이전에도 숱하게 공격을 받았지만 어떤 침략군도 10층 건물 높이의 요새를 공략할 방법을 찾지 못함.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수만의 병력과 대포를 주둔시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이 두가지를 병행하는 전면 공격법을 실행함으로써 그는 전쟁의 기술을 완전히 바꿈. 투르크인이 소유한 대포는 수많은 인명을 죽일 수 있는 살상무기였음. 대포는 원래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유럽인들이 교회종을 만들던 금속주조기술로 발전시킴. 15세기에 아직 비잔틴 제국에 속하던 근방의 사람들이나 나라로서는 자신들의 수도가 오스만 제국의 대포 화염에 몰락했다는 사실은 9/11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한 것만큼의 충격이었음. 난공불락의 요새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은 전쟁의 기술과 도시설계를 변모시켰음. 1453년 이전에 사람들은 공격을 피해서 도시로 몰렸는데, 성벽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었기 때문. 먹을 거리와 물, 무기가 충분하다면 방어군이 언제나 유리했다. 메흐메트는 도시성벽이 군대르르 더는 물리칠수 없음을 증명했음. 대포가 성벽을 공격하면서 공격군이 한층 유리해진 셈
- 초기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가장 많이 죽인 전염병은 천연두였음. 1520년 천연두가 제일먼저 발생했고, 뒤를 이어 1531년 홍역, 1559년 인플루엔자, 1545년 가래톳 페스트, 1586년 티푸스, 1601년에 디프테리아가 휩쓸었다. 이 전염볃들은 한 세대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되풀이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인구의 대량감소로 그치지 않았다. 군주들이 죽고 승계과정이 흐트러지면서 권력기반 자체가 무너졌다.
- 1511년 무렵 포르투갈은 베네치아 상인과 대상무역을 대신해 향신료와 실크의 주요 구매자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 발견한 해로는 위험이 컸음. 1500년과 1634년 사이 포르투갈에서 인도양으로 항해한 배의 25%이상이 길을 잃었지만, 위험을 감수할만큼 잠재적 이윤이 막대했음. 에스파냐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하는 것처럼 대규모 영토를 점령하고 유지하는 대신, 포르투갈인은 아조레스에서 마카오까지 무장요새를 잇다라 구축해 바다항로를 장악하는 교역소 제국을 창안. 인도양으로 가는 모든 외국배를 포획하고 그 선원들에게 갤리선에서의 강제노역형을 선고. 첩자로 의심되면 체포하여 리스본에서 재판을 받게 했음. 포르투갈의 향신료 독점은 두부분으로 나뉨. 하나는 인도 후추계약으로 상인들은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살수 있지만 그것을 포루투갈 왕에게 고정가격으로 팔아야 했음. 유럽계약에 따라 상인들은 포르투갈 왕에게서 후추를 사서 다시 팔 수 있다. 여러해 동안 포르투갈 상인들은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사들였지만, 유럽에서는 더 커다란 상선함대를 보유한 네덜란드인들이 유통을 장악했다.
- 서유럽인들은 시베리아의 지구반대편, 북아메리카 숲속에서 모피를 사냥하고 거래했다. 러시아의 모피무역이 최상급 모피에 대한 열망에 따라 형성되었따면, 북미의 모피무역은 펠트, 모자제작산업, 그리고 비버모자로 만든 모자패션에서 기원. 18세기 중엽 모피무역은 북미에서 가장 큰 산업이었다.
- 모피무역은 동물 개체군만 멸종시킨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서쪽으로 확장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보호구역을 몰아넣었음. 러시아인들이 광업과 벌목, 감옥을 시베리아로 들여오면서 유목민들의 땅을 빼앗을 때와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음. 30년대에 소비에트는 살아남은 유목민 부족과 사슴을 집단농장의 정착촌으로 이주시켰음. 수천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수렵채집형 유목민의 생활은 끝이 났다.
- 17세기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다 했다. 1600년대는 지적, 종교적 동요가 들끓던 시기였다. 마녀재판, 과학혁명을 비롯하여 성체와 의식, 기적, 성인의 권위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 사이의 격론까지 줄을 이었다. 교육받은 이들이나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나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마녀와 악령, 천사, 요정, 영혼이 일상에 영혼을 미치는 실재하는 존재라고 믿음.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성경에서 비롯한 구세계의 사상들이 새로운 식물과 동물과 사람들에 대한 정보의 포화공격에, 그리고 신세계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되돌아 흘러온 신념체계의 공세에 비틀리고 금이 갔다. 1570년과 1680년 사이에 어림잡아 11만명이 유럽에서 마녀 등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고, 4만~6만 명이 처형됨. 피고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흑마술은 사형에 처할만한 중죄로 법에 의해 규정되었따.
- 자주 잊히곤 하지만 소나무 폭동은 북미 식민지에 대한 대영제국의 지배를 거부한 최초의 반란으로 숲에서 벌어진 보스턴 차사건임. 바로 20개월 후 보스턴에서 새로운 법률에 저항해 100만불 어치의 영국차를 버리면서 전세계 민주주의 확대에 영향을 끼친 혁명이 한걸음 더 가까이 온다. 역사 내내 인간은 모피와 소금, 금, 어장, 목초지, 유전을 비롯한 세계의 한정된 자원을 소비하고 장악할 권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웠다. 오늘날에는 이제 다가올 거대한 갈등이 마실물과 경작할 토지처럼 인간의 생필품을 두고 일어날 수 있음. 그동안 인류는 야생에서 더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을 합성하는 경쟁을 벌였음. 과학자들은 바람, 태양, 지열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작어뿐 아니라 수직농장 같은 거대 프로젝트, 아프리카 마을이 깨끗한 물에 지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소규모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음. 사냥하고 낚시하고 캐내고 기를 수 없다면 인간은 죽거나 아니면 남은 것을 두고 죽을때까지 싸우게 될 것.
- 민주주의, 민족자결권이라는 개념과 미국반란의 승리가 또 다른 혁명들을 촉발. 제일먼저 프랑스인이 1789년 미국의 뒤를 따름. 1791년 아이티에서는 노예와 자유민 흑인이 프랑스 지배에 저항해 봉기. 1820년대에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멕시코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독립을 가져옴. 유럽에서는 그리스인과 벨기에인, 폴란드인이 1820년대와 1830년대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움
- 고아들은 항상 인간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중 하나였음. 성인 보호자 없이 남은 이들은 사회전체의 보살핌에 의지해야 했음. 문화권에 따라 이런 시련을 대처하는 인간애의 정도는 다름. 고대 중동 문화권에서 고아는 보호를 받음. 로마제국이나 마야같은 문명권에서는 노예가 되거나 인신공양으로 희생됨. 19세기 중반 미국도시에서는 남북전쟁과 이민으로 불어난 고아가 엄청난 사회문제로 대두. 보육원과 구호협회는 어찌할바를 모름. 한 단체게 근대의 기술을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 1854년과 1929년 사이 고아열차가 10만이 넘는 어린아이들을 뉴욕 빈민가에서 농촌의 새로운 집으로 실어 나름. 고아열차는 1850년대 뉴욕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수천명의 집없는 아이들을 돕기위한 뉴욕 아동구호협회의 기획. 이 협회의 설립자인 찰스 로링 브레이스 목사는 노동력이 부족한 농부들이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자기 아이처럼 돌볼 것으로 기대. 많은 농부가 그 기대에 부응했으나, 아이들을 값싼 노동력으로만 여긴 이들도 가끔 있었음. 고아열차를 타고 서부로 간 거리의 소년 둘, 앤드루 버크와 존 브래디는 누구보다 잘해냈다. 이들은 자라서 각기 노스다코타와 알래스카 주지사가 됨
- 깨끗한 물이 더러운 물보다 건강에 좋다는 건 누구나 안다. 기원전 2000년 초에 고대 산스크리트 문헌은 물을 끓이고 거르면 불순물이 제거된다고 설명. 기원전 500년 무렵 그리스 외과의사 히포크라테스는 같은 목적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소매라고 알려진 최초의 가정용 정수필터를 만들었음. 하지만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이 1676년 현미경을 발명하기 전까지 깨끗한 물인지 알아낼 방법은 냄새를 맡아보고너 맛을 보는 것이 전주. 오늘날 정수 처리장은 현대 도시요건의 하나이지만, 여전히 폐수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곳이 많음.
* 세계인구의 6분의 1이 안전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함
* 지난 10년 동안 설사로 죽은 아이들이 2차대전 이래 무력갈등으로 죽은 사람보다 많음
* 매일 6000명의 아이들이 안전한 식수부족과 불결한 위생에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
* 세계인구의 절반은 2000년전 고대 로마인이 누리던 물과 위생환경을 누리지 못함
- 1860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노예제도 폐지안이 발효될까 봐 두려웠음. 링컨이 당선되고 한달후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미국에서 분리해 나갈 것을 선언했고, 미국은 4년간의 참혹한 전쟁에 돌입. 남북전쟁은 이전시대에 속하는 전술과 최신기술이 결합한 전쟁이었음.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무기들이 전쟁터에서 대량살상을 가져옴. 기관총의 전신인 캐틀링 총은 놀랍게도 분당 200발을 쏘았음. 공기역학적으로 설계된 납 탄알을 장전한 머스킷 장총 때문에 일반군인이 저격병으로 변신. 중국 명나라에서 총이 발명된 이래 처음으로 일반 군인도 먼 거리의 표적을 조준해서 맞힐 기회를 얻었음. 보병이 앞장서 돌격하던 시대는 끝이 났음. 물론 미 육사에서 훈련받은 장교들은 여전히 무장 보병에 대항해 영웅적 자살공격을 주도. 사선에서 멀리 떨어진 병력도 참호와 요새로 방어하는 법을 배우면서 1차대전에 쓰였던 참호전투의 조짐이 보임. 남부의 패배에 공헌한 것은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된 새로운 무기만이 아니었음. 미국의 철로, 전신체계와 제조생산 시설 대부부이 북부에 있었음. 광대한 철도망 덕분에 북부군은 군인과 자재를 남부보다 훨씬 수월하게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음. 새로 창설된 미 육군 전신부대가 전쟁 첫해에만 전신선 6430킬로를 가설했고, 100만여통의 전보를 전쟁터와 주고 받았으며, 링컨은 전쟁 보고서를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장군들과 전략회의를 이끌 수 있었음. 무기와 군수품, 군복이 북부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옴. 새뮤얼 콭트의 공장에서만 전쟁기간에 장총 7000정, 머스킷 11만 3000정, 6연발 권총 38만 7000정을 생산.
- 남북전쟁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전환점을 상징. 남북전쟁을 지지하던 산업기반시설뿐만 아니라 무기와 전술, 상황의 기록 방법 등에서 이전의 전쟁보다 오늘날 우리와 더 친숙한 듯하다. 물론 이전의 전쟁들에도 근대적 요소가 등장했음. 크림전쟁(1854~56)에서는 처음으로 전신이 사용되었고, 전쟁사진과 종군기자가 등장했고, 근대적 간호법이 탄생. 1857년 세포이 항쟁때는 철도가 중추적 역할을 함. 이 각각의 전쟁에서 근대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맡음. 미국 독립전쟁 때에는 이런 혁신이 전쟁 자체의 성격을 규정했고, 종전 무렵에는 인류는 용감한 신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음.
- 사무라이는 일본에서 공개적으로 검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었음. 벨트 양쪽으로 찔러 넣은 검 두자루는 사무라이의 가장 중요한 소유물. 그중 하나가 가타나라는 장도이고, 다른 하나는 와키자시라는 단도. 사무라이의 혼으로 알려진 이 검은 공직 신분증이자 명예의 상징. 예술가로 존경받는 검장이 강철로 주조한 카타나는 지구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휘거나 부러지지 않고 갑옷도 뚫을 수 있었음. 검의 제작은 엄격한 의식을 따라야 했음. 주조하기 전 검장과 조수는 기도와 함께 육식, 성행위 금지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함. 신토의 승려가 대장간을 정화하는 의식을 행함. 실제 검을 만드는 동안에 검장은 신토식으로 찬물로 목욕재계하여 자신을 또 정화. 사무라이 검은 6,7세기에 개발된 금속을 사용해 만들어짐. 각 검은 두 등급의 강철을 결합. 단단한 외피가 다소 유연한 내핵을 둘러싸고 있음. 두 겹모두 내핵이 외피안으로 삽입되기 전에 접고 두드리기를 수없이 반복. 그러고 나서 복합금속에 열을 가하고 두드려 두 강철층 사이의 공기나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 이 칼은 진흙을 바르고 더 빨리 냉각함으로써 단단한 강철을 면도날처럼 얇게 만듬. 더 두껍게 덮인 뒤쪽은 상대적으로 유연함을 유지. 그 결과 단단한 절단면과 함께, 유연하고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칼등과 내핵을 지닌 검이 만들어짐. 최종단계는 광택을 내는 것으로 3주가 소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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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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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유전자

역사 2014. 10. 21. 20:59

 


비즈니스 유전자

저자
페터 푹스 지음
출판사
들녘 | 2005-11-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영원한 인류의 딜레마-비즈니스인가, 유전자인가 아프리카에서 행한...
가격비교

- 사랑은 순수하게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과정과는 다름. 물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암페타민과 같은 신경흥분제를 맞았을 때 비슷한 행복감에 젖는 것이 실제로 페닐에틸아민의 작용 때문일 가능성은 있음. 이와 관련하여 이레노이스 아이블 아이베스펠트는 호르몬 반응의 가설을 발전시킴. 그에 따르면 여자가 오르가즘을 느낄 때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강한 개인적 결합을 준비시킨다고 함. 옥시토신은 출산 때도 분비되어 산모가 낳은 자신의 아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끼도록 만들며, 똑같은 방식으로 여자는 오르가즘을 느낄 때 옥시토신을 분비하게 만드는 애인에게 그와 같은 애정을 느낀다고 함. 하지만 이는 비약이 심한 가설이며 게다가 이 가설의 근거라는 것이 고작 양과 염소를 대상으로 한 옥시토신 실험뿐임. 우리는 당장 그렇다면 남자는 어째서 옥시토신이 분비되지 않는데도 자기 품안에 안겨 있는 여자에게 그와 똑같은 사랑을 느끼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음. 체험의 독특한 법칙성은 근본적으로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법칙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경생리학적 조직의 복잡성을 통해서 설명되는 것이라고 생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는 말한 바 있음.
- 광활한 초원을 이동하며 살아가던 유목민의 시대에는 뒷간을 따로 마련할 수 없었음. 그래서 사람들은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에서 넓은 옷으로 엉덩이를 가린채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봄. 사방이 트여 있으므로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기는 해도 보여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은 넓은 옷으로 가려서 해결. 이슬람 교도들이 입는 넓은 겉옷은 바로 이런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교인을 이교도와 구분해주는 역할을 했음. 이들에게 기독교도들은 서서 오줌을 누고 동물처럼 드래내놓고 볼일을 보는 야만인이었음. 교인이라면 쪼그리고 앉아서 겉옷으로 엉덩이를 가린채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당연했음. 이교도는 문화가 없는 동물적 존재이며, 오직 교인만을 문화적이고 인간적으로 보는 이와 같은 차별은 아프리카의 모든 이슬람 사회에서 행해졌고, 이와 결합된 가치평가는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자행된 수많은 사건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제시되었음.
- 전사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살인하지 말라)와 목적(되도록 오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라)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 이 모순은 전사를 사회에서 분리할 때만이 해결됨. 그래서 사람들은 전사의 존재에 다른 본질을 부여함.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전사에게는 평소의 모든 가치들을 무시하는 것이 허락됨. 전사의 복장과 장식은 그가 사회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외적 징표임. 생물학적인 위압적 행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 생물학자들의 오해는 대부분 제복의 형태가 실제로 동물을 모범으로 삼아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기인함.
- 일부다처제의 근본적 요소는 안정과 지위의 확립임. 일부다처제의 기능은 남녀를 맺어주고, 아이를 낳고, 가정의 틀안에서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찾는다는 점에서 다른 결혼형식들과 차이가 없음. 여기서 사회적 경제적 안정의 측면은 자라나는 아이들은 물론 노인이나 과부, 고아, 병자, 신체부자유자들에게도 적용됨. 대부분의 인간사회에는 결혼 적령기의 여자들이 같은 또래의 남자들보다 많음. 또 일반적으로 남자들의 기대수명이 여자들보다 짧음. 이런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해서 일부일처제의 사회에는 항상 일정한 수이 여자들이 처녀로서 또는 과부나 이혼녀로서 배우자 없이 살아가야 함. 이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난 직후에 특히 심각해짐.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임. 승자가 누구건 간에 패자는 항상 여자들이었다.
- 일부일처제 사회에는 여자 구하기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되어 사회의 내적 평화가 위협받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문화적 조절장치들이 있음. 예를 들어 신부값도 그런 조절장치의 하나임.
- 모든 사회는 구성원의 규모를 가능한 한 크게 유지하고자 노력함. 이때 집단 내 여자들의 출산능력을 완전히 가동하는 것은 오직 일부다처제에서만 가능. 또한 일부다처제는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여러차례 임신을 감당할 수 없는 여자들에게도 안식처를 제공함. 사랑을 나누기에는 늙어버린 여자의 문제를 인도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 역시 일부다처제에서만 가능함. 남자가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를 떠나서 일단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일상적 현실임. 이렇게 볼 때 이혼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수십년 동안 함께 산 아내를 개인적 파산상태로 몰아넣는 것과 둘째 부인을 맞아들임으로써 결혼으 틀을 계속 유지하는 것 중 어느것이 더 인간적인 방법일까?
- 위험의 최소화가 이익의 최대화에 선행한다는 경제원칙은 안전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잘 보여줌. 인간은 취약하고 불완전한 육체를 문화적 발명을 통해 보완할 수 있게 해준 지능 덕분에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정도로 위태로운 존재임.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준비는 경제행위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 미래에 대한 준비는 흉작이나 기근 또는 전쟁과 같은 특수한 재앙이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한 경제적 형태의 사전준비를 뜻하는 것은 아님. 그런 것들은 예외적 상황이며, 각 사회는 일정한 문화적 수단을 통해서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음. 반면 노후나 죽음 또는 그 이후를 경제적으로 대비하는 것은 매우 원초적 행위에 속함. 기본적으로 주어진 노후 대책은 자식임. 하지만 이럴 경우 합법적 자식이어야 함. 오직 합법적 자식만이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는 의무를 다하기 때문. 합법적 자식을 두려면 결혼이 사회적 제도로 존재해야 하며, 혈통이나 친족 관계 따위를 관리하는 체계도 갖추어져 있어야 함. 사회형태의 생성과 발전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경제행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물적 번식에서 비롯된 발생사적 유산의 결과가 아님.
- 남편이 이주노동자, 군인, 떠돌이 장사꾼 등으로 몇년 씩 아내와 떨어져 있게 될 경우 부계 사회역사 친권 불확실성의 문제가 발생. 그럴 때 사람들은 임신기간이 2년이상 길어질수도 있다거나 남편의 혼이 항상 아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가 없는 동안 아내가 누구의 아이를 가졌든 상관없이 남편의 아이로 여길 수 있다는 등의 믿음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만들어냄으로써 문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 이런 종류의 예방적 조치들은 가정비극이나 굴욕감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를 발휘함. 이렇든 인간은 진화발생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발전시킨 문화적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동함.
- 돈의 발명은 경제행위뿐만 아니라 돈을 제작하고 통치하는 정치제도와 사람들과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바꿈. 금화나 은화로 된 돈이 화폐가치 이외에 귀금속의 가치도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상당한 양의 돈이 정치적 지배자의 영향에서 벗어나 개인의 수중에 들어 있었음. 이 시기에 상인과 자본가들은 황제와 제후들에게 정치(전쟁) 자금을 제공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했음. 예를 들어 도시가 점령되면 자본가들은 제후들에게 돈을 건넴으로써 약탈과 파괴를 모면함. 하지만 지폐가 도입되면서 모든것이 바뀜. 통치자들은 이제 자본가들의 돈에 종속되지 않았고, 따라서 피지배자층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 단 지폐의 도입은 시민들이 국가의 제도와 그것을 통제하는 정치가들을 신뢰할 경우에만 가능했음. 이런 신뢰가 자발저긴 것이었는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이었는지의 여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님. 중요한 사실은 현대적 화폐경제가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 생물학자들 중에도 다윈의 자연선택 법칙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음. 볼프강 비클러와 우타 자이프트는 자연선택의 적용을 직립원인까지로 제한하고 있음. 적어도 그 이전까지 인간은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았다고 보았음. 콘라드 로렌츠는 83년에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 "인간의 정신을 만들어낸 것은 진화의 창조적 요소들,특히 활발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인간의 정신은 맹수, 기후, 전염병 등 외부세계의 모든 적대적 침입에 철저히 대처함으로써 자연선택의 영향력을 무력화시켰다." 다위니즘의 신봉자로 꼽히는 에드워드 윌슨도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을 창조한 자연선택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음을 인정했음
- 세계은행의 빈곤보고서를 비교해보면 그것이 빈곤의 본질적 의미에서 비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세계 은행이 내놓은 것은 세계 각지의 비서구적 문화에 대한 편견으로 만든 왜곡된 이미지에 불과함. 그리고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대중매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음. 그 배후에 감추어진 이데올로기는 분명함. 아프리카 사람들이 빈곤을 극복하는 길은 서구산업 문화의 생산품을 사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빈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세계은행이 제출한 빈곤보고서의 결정적 약점은 빈곤과 무욕을 혼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혼동은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짐. 빈곤은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포기이자 의식적으로 감지된 부족이지만, 무욕은 삶의 한 형식이며 문화와 종교(윤리)에 근거한 원칙임
- 인도네시아 마카사르족 사람들은 도시의 엘리트들이 여러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에어컨이 돌아가는 집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여기게 되었음. 도시사람들의 부는, 그때까지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마카사르족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가난뱅이로 만들고 그들의 농경문화에 열등감을 안겨줌.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극장과 텔레비전의 보급임. 영화와 드라마는 이곳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서구 산업문화의 생활상들을 보여주었음.
- 극장과 텔레비전의 보급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서양제품에 대한 욕구를 불어일으키려는 자본주의 전략의 일환. 이런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킬 수단이 없을 때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느끼게 됨. 이렇게 해서 새로운 빈곤층이 출현하면 불만족, 사회적 불안, 정치적 불안정, 범죄의 증가 등이 그 뒤를 따름. 아니면 거기서 얻은 좌절감이 정치적, 종교적 극단주의로 바뀌어 서양적인 것을 모두 악마의 작품이라고 비난하고, 급기야 서구 산업문화 전체에 대한 투쟁을 선포하기에 이름
- 도덕적이고 경제적 행위에 대한 모든 윤리적, 정치적 담론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문화학적 시각에서만 볼때, 인간의 경제행위는 석기시대 이래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음. 그때부터 인간은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천연자원을 근시안적 이익에 따라 착취해왔고, 이런 착취를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기술적 도구를 발명해왔음. 이때 인간들이 보인 행동은 코끼리 떼가 그들의 생명줄인 식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 석기시대의 사냥꾼들은 더욱 효과적인 무기와 사냥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유일한 고기 공급원인 짐승들을 별 생각없이 멸종시켜 버림. 현대의 인간들도 기존의 화석연료나 물, 공기와 가은 천연자원들을 미래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성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 비산업문화가 자연을 더 책임감있게 다룬다는 생각은 신화에 지나지 않음. 이는 수많은 민족학적 조사들을 통해 입증된 사실임. 인류의 도덕적 진화는 석기시대 이래로 기술적, 경제적 진화의 의붓자식으로 취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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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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