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신료에 대한 열망은 근대 시작무렵 뿐만 아니라 수세기, 심지어 수천년 동안 견줄데 없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도록 자극했음. 향신료로 인해 부를 축적하거나 잃었고, 제국들이 조성되었다가 파괴되었으며, 심지어 새로운 세계가 발견됨. 향신료에 대한 욕구는 수천년 동안 세계를 사로잡았고, 이로 인해 세상은 변화되었음.
- 나르드는 히말라야에서 나는 방향식물로 고대에 향수와 향연고로 널리 사용. 칼라무스는 향이나는 반수중 다년생 허브로, 흑해에서 일본까지 널리 분포되어 자라며 나르드와 유사한 용도로 쓰임. 유향과 미르는 아라비아 남부와 아프리카의 뿔이 원산지로 강력한 향이 나는 고무수지임. 유향은 주로 고대의 향으로 사용됨. 몰약으로 잘 알려진 미르는 향, 양념, 시신보존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됨
- 스파이스를 열렬이 원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불신의 시서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음. 얼마 전까지 해도 메인주 연안의 엄격한 주민들은 "검은 후추를 먹기에는 너무 경건하다"고 치부되었음. 아마도 이것은 잠재의식에 남아 있는, 향신료가 금지된 시절에 대한 기억때문일 것임. 향신료를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는, 향신료 숭배자들이 향신료를 좋아하는 이유와 거의 일치했음. 즉 맛과 과시욕, 건강, 성욕 강화 같은 매력들이 그들에게는 허영, 사치, 탐식, 성욕 같은 죄악으로 여겨짐. 향신료는 결코 순수한 미각이 아니었고, 바로 여기에 향신료의 매력이 숨겨져 있음. 욕망과 혐오가 이토록 복잡하게 공존했다는 관점에서 향신료를 바라볼 때 향신료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이해될 것임.
- 향신료가 영양측면에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향신료를 실어나른 무역은 세계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중 두가지 면에서 중요하게 여겨졌음. 하나는 유럽과 더 넓은 세계가 접촉하는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이 마침내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 스파이스의 화학적 성질은 진화적 관점에서 고슴도치의 가시이자 거북의 등껍질임. 자연상태에서 신나몬은 우아한 갑옷을 두르고 있고, 넛메그의 매혹적 향기는 어떤 곤충에게는 독소 덩어리임. 스파이스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아이러니는 스파이스의 매력이 (곤충을 통해 번식하는 식물의 관점에서) 진화론과 배치된다는 점. 인간에게는 스파이스를 그토록 매혹적이게 하는 것이 동물 세계의 다른 구성원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 대단한 탐험속 주역들에게 그 동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면 일부는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는 현실적 대답을 마지못해 내놓았을 것임. 향신료를 따라다니는 부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이 때문에 향신료의 위상에 금이 갔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음. (콜럼버스는 자신의 탐험에 저열하고 세속적 동기 같은 오명이 따라다닐 수 있다는 것에 대단히 당황스러워 했음. 그리하여 그는 영적으로 가치 있는 동기를 따로 내세워 탐험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고자 고심했는데, 그 결과가 그리스도의 성묘를 되찾고 십자가 원정의 자금을 마련하여 이교도를 개종한다는 명목으로 나타남) 하지만 중세의 향신료 상인들에게 향신료가 왜 그렇게 가치가 높았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향신료를 찾아 떠났는지 묻는다면, 경제적 수익이라는 확실한 답이 아니라 현대 역사학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답을 내놓았을 것. 따라서 향신료의 매력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선조들 역시 쉽게 그 답을 찾지는 못했을 것. 실제로 향신료가 갖는 매력의 일부는 간단히 말해 그것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데 있음. 콜럼버스와 동시대 탐험가들이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이전의 향신료에는 인공위성과 위성항법장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었음. 신비롭고 매혹적인 동방에서 온 향신료는 다른 세상에서 당도한 것이었음. 이때분에 유럽인은 향신료가 파라다이스, 즉 지상낙원에서 자란다고 믿었음.
- 현대의 시각으로 허구와 사실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중세시대만 해도 그 경계는 불분명했음. 대략 13세기부터 나타난 허구에 가까운 여행기 장르가 번성했던 것도 사실과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세상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음. 수많은 이야기들이 모작이었음. 예를 들어 데카메론의 치폴라 수도사는 허위의 나라와 인도의 파스티나카에 다녀오면서 천사의 깃털을 가져왔다고 말함
- 로마제국이 무너지자 아랍이 바통을 이어받아 인도양은 이슬람 교도의 주무대로서 신밧드가 향신료, 거대한 새, 괴물, 지니와 황금이 등장하는 마술적 세계로 모험을 떠하는 이야기를 탄생시킨 해상 문명의 모태가 됨.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향신료의 몽환적이고 매력적인 분위기는 이슬람 교도의 작품이었음
- 고도로 발달한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옷이나 언어같은 유행을 그토록 협소한 실용적 용어로만 설명할 수 없듯 요리방식 또한 실용적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는 없음. 역사적으로 보아 향신료를 먹은 이유는 단지 맛 때문만은 아니었음. 더 중요했던 이유는 멋있어 보였기 때문. 당신이 먹은 음식을 말해보라,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 라고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사바랭은 썼음. 로마제국에서 향신료는 역사적으로 개인의 취향과 명성과 부를 드러내는 확실한 수단이었음. 부유한 로마인에게 식탁은 자신의 세련됨과 후덕함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 공간중 하나였음. 공공연회 같은 행사야말로 이를 과시하기에 좋은 기회였음.
- 스파르타의 음식 역시 정형화되어 있었지만 로마와는 반대였음. 이는 한마디로 의식고양을 위한 만남이었음. 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시바리스 사람이 모든 쾌락을 포기한 것으로 유명한 금욕주의자를 만난 것임. 소화도 잘 안되는 걸쭉한 검은 수프를 대접받은 디오니시우스가 이 음식이 자신의 입에 잘 안맞는다고 불평하자 스파르타인 요리사는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듬. "양념이 부족하다니, 좀 놀랍군요." 그러자 디오니시우스는 자발적으로 덫에 걸려들며, "양념이 무엇이냐?"라고 물음. 요리사는 "스파르타인이 만찬에 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사냥할 때의 정직한 노력, 땀, 에우로타스 강까지 달리기 그리고 허기와 갈증"이라는 가시돋친 대답을 얻음
- 현대의 역사가들은 사치와 몰락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이지만 인도와의 무역수지에 대한 의문은 수없이 제기되어 옴. 현전하는 경제적 자료는 향신료 교역이 실제로 로마경제에 해로웠는지, 해로웠다면 어느정도 였는지 밝히기에 단편적이거나 편파적이기는 함. 어떤 경우이든 불분명한 현실보다는 명료한 통찰력이 더 도움이 될 수 있음. 자극적인 동방의 사치품과 로마의 쇠퇴가 때를 같이 한 것도 함축하는 바가 크기 때문. 로마의 인도무역 권위자인 워밍턴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여 큰 논란에 휘말림. "보석, 향수, 향신료 등 다양한 물품의 공급처인 인도는 로마의 사치스러운 성향을 만족시킴으로써 고대로마가 도덕성을 상실하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고, 또한 서로마 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몇몇 요인들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 왕과 귀족만을 위한 사치품으로 향신료의 위상은 기원후 첫 1000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야 빙하가 움직이는 속도로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 샤를마뉴 시대에 갑작스러운 활기를 띠다가 뒤이어 약 1세기 가량 조용해진 향신료 무역은 9세기가 끝날 무렵, 서부 유럽에서 보다 탄탄하게 재개됨. 향신료 소비가 증가하게 된 것은 유럽의 경제가 서서히 활발해지고 인구가 꾸준히 성장한 덕분. 중부와 서부 유럽의 야금 및 직물산업이 회복되고 독일의 하르츠 산맥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동방에서 수입하는 고가 물품의 값을 지불하는 데 필요했던 귀금속의 만성적 부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됨. 토지를 소유한 신흥 계층, 즉 왕과 지역세력가들, 주교와 수도원이 흑자를 보기 시작하면서 사치품과 부를 과시할 장식품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음
- 오늘날에는 겨울내내 가축을 먹이는 데 사용하는 다수확 목초나 씨앗이나 뿌리를 먹는 근채류가 있어 1년내내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중세에는 그렇지 않음. 예를 들어 순무조차 여전히 잎을 먹는 엽채류로 여겨졌음. (돼지의 장점, 말하자면 중세식단에서 돼지고기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닭은 양이나 소와는 달리 혼자 내버려두어도 도시던 시골이던 쓰레기를 찾아 돌아다니며 알아서 먹을 것을 찾았기 때문. 하지만 돼지조차 헐벗은 계절에는 충분한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함) 크고 부유한 집에서만 가축을 먹일 목초와 겨우내 먹이로 줄 충분한 양의 건초를 저장할 공간을 보유하고 있었음. 이러한 사치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은 서리가 내리고 목초가 죽자마자 상당량의 가축을 도살함. 전통적으로, 이 겨울철 도살은 성 마르틴 축일, 즉 11월 11일에 행해짐. 11월을 뜻하는 앵글로색슨 족의 단어가 피의 달인 이유도 이때문. 도살한 후 며칠내로 먹을 수 없는 고기는 소금에 절여 보관했기 때문에 11월부터 봄까지 내내 먹는 고기는 대부분 팍팍하고 질기고 짰음. 그 맛을 중화하기 위해서 물을 많이 붓고 오랜시간 조리해야 했음
- 건강한 식단을 위해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현대 의사들의 조언을 들었다면 고대나 중세 의사들은 무척 놀랐을 것임. 중세시대 내내 배, 사과, 복숭아, 그 외에 수분이 많은 과일들은 16세기 권위있는 출전에 따르면 나쁜 피를 만드는 음식이라는 의혹을 샀음. 같은 이유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수분이 많은 토마토는 광기의 씨앗이 가득한 위험한 과일로 간주. 이탈리아어로 가지를 뜻하는 멜란지나에는 불량사과라는 뜻이 담겨 있어 건강에 해롭다는 과거의 평판을 떠오르게 함
- 향신료는 사실상 식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종류의 고기, 생선, 채소 요리에 사용되었음. 재로의 일부로 필요했던 것 외에도 향신료 자체를 즐겼던 것도 (종종 소금으로 간하지 않은 고기와 함께) 분명했음. 향신료의 역할은 상반되는 맛을 상쇄시키면서도 강화해서 (마치 쓴 초콜릿을 먹기전의 에스프레소처럼) 각각의 맛이 더 좋아지도록 하는 것임. 이는 아마도 단맛과 신맛, 맵싸한 맛과 담백한 맛이 어우러지는 효과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
- 향신료와 허브의 장점은 와인을 변화시키고 개선해서 매력을 부여하는 것인데, 몸에 좋으면서도 맛도 좋게 만든다. 향신료가 없었더라면 곧 변질되었을 와인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이 향신료의 좋은 점이다. 16세기에 포도주통과 코르크 제조법이 발달함에 따라 와인에 넣는 향신료의 필요성은 갑작스레 줄어듬. 와인제조기술과 와인의 품질 자체도 향상되었음
- 10세기가 끝날무렴, 사회적 욕구와 그를 충족시킬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신생계급인 유럽의 귀족이 등장하던 시기에 향신료 무역이 성행한 것은 우연이 아님.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향신료가 지닌 매력의 상당부분은 향신료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멋있어 보였기 때문. 늘 같이 등장하는 진주, 보석, 모피, 태피스트리, 거울 같은 사치품과 함께 향신료는 과시, 즉 과시적 소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킴. 향신료의 매력은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하지 않았다는 데 있음. 접시위의 돈이었던 셈
- 빈민이 향신료를 먹었을 때는 아주 소량을 먹었거나 다른 누군가의 돈으로 먹은 것이었음. 예를 들면 공공연회 때, 귀족가문에서 일하는 자들이 식탁에 남은 것을 먹는 정도. 중세 빈민에게 향신료는 주로 소작료와 약으로 생각되었고 양념으로 사용되는 일은 거의 드뭄. 중세의 빈민층은 훨씬 평범한 맛으로 길들여 있었음. 대다수 빈민층의 유일한 양념은 마늘, 허브, 소금이었고 때론 소금조차 구하기 어려웠음
- 중세 사람들은 향신료와 약을 사실상 하나로 봄. 모든 약이 다 향신료는 아니었지만 모든 종류의 향신료가 약으로 쓰임. 향신료를 뜻하는 후기 라틴어 단어 피그멘타는 실제 약과 동의어로 쓰였고, 이는 중세시대까지 이어짐. 약제사와 향신료 상인은 사실상 동일인물이었음
- 향신료가 각광받게 된 것은 바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불균형을 회복하는 향신료의 효능때문이었음. 대다수의 향신료가 매우 뜨겁고 건조하다고 분류되었기 때문에 차갑거나 습하거나 혹은 이 두기운 모두로 인해 병에 걸렸을 때 선택하는 약이었음. 병과 마찬가지로 약에 대해서도 온, 냉, 습, 건의 정도에 따라 0에서 4까지 등급을 매겼고, 대다수 향신료는 가장 뜨겁고 건조한 등급으로 분류됨. 이런 이유로 이븐 시나는 흑담즙질의 병을 치유하는 뜨거운 성질의 약으로 향신료를 포함시킴
- 향신료를 가장 많이 처방했던 신체부위는 차갑고 습한 기운에 특히 취약하다고 믿었던 위장임. 이런 믿음은 향신료 소스에 대한 중세시대 입맛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됨. 위는 간에 의해 달궈지는 가마솥과 같다고 생각했으며, 소화는 요리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이해함. 따라서 솥이 뜨거운 상태에서 기능을 다하려면, 차가운 성질은 해롭고 뜨거운 성질은 도움이 된다는 단순한 논리를 펼침.
- 고대와 중세의 의식 속에서 향신료와 에로티시즘은 불가분의 관계. 효험에 대한 믿음으로 수천년 동안 식탁위 음식들에는 향신료가 뿌려짐. 최음효과를 믿은 중세과학자들에게 향신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특효약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제스, 갈레노스, 이븐 시나 같은 과학과 의학분야에서 이성주의의 전통을 세운 창시자들도 향신료의 효능을 믿음. 이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확신해 마지 않던 사실이 미친 영향보다 우주적이진 않지만, 일상적 생활방식과 더 관련 있는 사실로 여겨졌을 것임
- 향신료가 중세시대의 양념이었는데도 그 향기에 대해서는 상반된 반응이 존재. 향신료에서 관능적 냄새가 난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대립. 향신료에서는 파라다이스의 향기가 났지만 동시에 육욕을 자극했고 그 욕망에는 혐오감이 따라왔음. 향신료는 얻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도 이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는 게 특히 놀라움. 베네치아에서 향신료 무역은 경제의 주요 부문이었음에도, 나라가 쇠락할 때 나타나는 쾌락과 사치에 중독된 도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음. 로마시대 이후 처음 향신료의 땅에 유럽인이 다시 발을 디딘 대항해 시대가 절정이 이르렀을 때에도 스파이스의 향에서 타락의 조짐을 감지하던 이들이 있었음
- 현대의 향수산업은 도회적 세련미와 숨 막힐 듯한 유혹적 이미지를 내세우며 스파이스 최대의 소비자로 남아 있음. 켈빈 클라인의 향수 옵세션에는 넛케그와 클로브가 들어이쏙, 이브 생 로랑의 오피움에는 후추가 들어 있으며, 그 외에도 스파이스가 들어간 향수가 많음. 생강, 메이스, 카르다몸 모두 일반적 향수 첨가제임. 향수광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비록 우리가 그런 사실에 대해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스파이스는 여전히 매혹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최근 몇 세기 들어 사치에 대한 생각은 크게 달라졌음. 휴가든, 집이든, 호텔이든, 사치를 의미하는 럭셔리는 광고주들의 선전대로 좋은 것임. 심지어 필자가 아침식사를 위해 구입하는 뮤즐리(시리얼의 일종)도 라벨에 따르면 럭셔리임. 반면 중세시대에 광고 같은 것이 있었다면 사치라는 라벨은 훨씬 애매모호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임.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치는 권장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었음. 사치는 치명적 7대 죄악에 속했음
- 절대적 의미에서 향신료 무역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며 규모가 커졌지만, 상대적 의미에서 향신료는 관심 밖으로 밀려남. 새로운 교역이 등장하며 다른 기호식품들이 돈을 긁어모으던 과거 향신료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듬. 도덕주의자들은 과거 향신료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듬. 도덕주의자들은 더욱 비난 받아 마땅하고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다른 수입품, 즉 설탕, 차, 커피, 초콜릿에 눈을 돌림. 이 물품들은 모두가 오래전부터 훨씬 강력한 자극제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음. 계몽즈의 시대의 경제는 향신료에 대한 비난에 오랫동안 맞서운 상인들의 논리를 약화시키다가 결국에는 무너뜨림. 혹은 역으로 상인들의 주장으로 인해 향신료는 오랫동안 세속적인 재력의 막강한 상징이 됨. 그러나 오늘날 향신료와 향신료 교역ㅇㄴ 소수의 향신료 수출국을 제외하곤 더 이상 국가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국가의 경제나 도덕적 논쟁과도 관련이 없음
- 사원에서 침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던 스파이스가 매력을 상실하면서 가장 크게 명성이 위축된 영역은 부엌이었음. 미각의 변화에 관한 논의가 모두 그렇듯이 이유를 꼽기는 상당히 어려움. 근대 초기의 음식에는 중세의 음식 못지 않게 향신료가 많이 사용되었지만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음. 향신료는 더 이상 최신 유행의 미각이나 세련됨의 표현, 건강에 좋은 식재료가 아니었음.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들이 점차 많은 양의 향신료를 유럽에 들여왔지만, 지나치게 향신료를 많이 넣은 중세시대의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변화가 생김. 혐오감을 느끼거나 경멸하거나 우스워하기 시작한 것. 향신료의 사용이 더 많이에서 더 적게로 바뀜
- 향신료의 위상이 떨어진 시기와 시장에 다양한 기호품이 등장하던 때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님. 세상은 점점 좁아졌고, 그 혜택은 식탁에도 나타남. 감자, 호박, 토마토, 피망이 보급되면서 요리사들에게 새로운 요리가 가능해졌고, 동시에 향신료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듬. 아메리카의 고추는 값이 싸면서 후추보다 더 강한 맛이 났고 게다가 어디서나 경작이 가능했음. 콜럼버스가 처음 표본을 들고 온 이래 고추는 전세계에 빠르게 퍼져 많은 유럽인이 고추의 원산지를 아시아로 착각할 정도였음. 파프리카는 에스파냐에 뿌리를 내렸다가 헝가리로 옮겨감. 오랫동안 대신할 것이 없어 보였던 후추는 새로운 작물들에게 길을 내주어야 했음. 고추는 관심을 끄는 새로운 여러 기호작물 중 하나일 뿐이었음. 16세기와 17세기 담배에 대한 열망은 세계를 휩쓸었고, 그 못지 않게 커피와 차도 기호품으로 떠오름. 설탕은 이미 중세 때 알려졌지만 소비는 16세기부터 극적으로 증가. 16세기 후반 사탕수수는 브라질에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했고 얼마 후 서인도 제도에서 경작됨. 당연한 결과지만 서구의 미각은 단맛에 길들여졌고, 이런 경향이 계속되며 치아에 악영향을 미치고 치과의사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듬. 흥청망청 노는 것을 좋아하는 일부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들은 치통으로 고생해야 했음. 설탕느 이전에 향신료가 갖고 있던 귀족스러움과 금지된 매력을 물려받았고, 위험이 깃든 새로운 이미지는 설탕의 매력을 배가시킨 듯함
- 르네상스의 도래와 함께 신학과 알레고리의 비중이 줄어든 체계가 재정립되면서 그 결과 향신료는 상징과 고대부터 내려온 약재로서의 의미, 심성함을 상실. 한편 과시적 소비의 대상은 식탁에서 보석, 음악, 의복, 저택, 미술, 마차로 옮겨감. 근대의 식사는 중세시대보다 사적인 행위가 됨. 땅과 돈에 함축된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부유함과 세련됨은 다른 수단을 통해 표현됨. 귀족요리의 상징 중 일부(특히 사냥한 고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귀족조차 담백하고 산뜻한 맛으로 전향. 사회 전계층에 걸쳐 소박하고 지방색이 들어간 맛을 선호하기 시작. 중세 요리사들이 추구하던 변형된 맛 대신, 새롭게 부상한 이상적 맛은 음식 본연의 맛이었음.
- 문화를 넘나드는 다양한 재료들이 섞인 퓨전요리를 음미하는 오늘날 식도락가들의 취향은 중세 귀족의 자의식 강한 이국풍 취향과 크게 다르지 않음. 실제로 런던과 뉴욕의 최신유행하는 레스토랑에서 선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요소가 가미된 음식의 뒤로는 중세시대의 그림자가 훨씬 뚜렷하게 아른거린다. 스파이스는 현대 자본주의 안체서 극비에 부쳐진 것이닞도 모른다. 마크 펜더그래스트는 코카콜라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표적 탄산음료의 비밀스러운 제조기법을 공개. 코카콜라 맛의 비밀이 신나몬과 넛메그라는 것. 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전에 누설된 기법들 역시 신나몬과 넛메그를 언급함. 펜더그래스트의 정보를 믿어도 좋다면 스파이스는 비록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애틀랜타의 코카콜라 본사 지하실에 감춰진 채 이 시대를 사로잡은 맛으로 남아 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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