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호 아저씨 호치민

저자
김이은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3-03-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조국의 독립을 이끈 베트남 초대 주석 호치민의 삶을 생생하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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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베트남으로 불리는 나라는 북부의 통킹, 중부연안 지대인 안남, 동남부의 코친차이나로 구성됨. 세 지역이 실질적으로 통일된 것으 18세기 말, 지아롱 황제의 통치원 아래 들어가면서부터임. 지아롱 황제는 이 지역 전체에 베트남, 즉 고대 명칭으로는 먼 남쪽 나라(월남)를 뜻하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바로 중국의 남쪽을 가리킴
-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세력이 몰려오기 시작했지만, 베트남은 여전히 문화적 고립주의, 군사적 저항, 그리고 중국의 원조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도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베트남은 외국의 간섭에 저항력을 잃기 시작. 1858년 프랑스 군대가 다낭항에 상륙했을 때, 지아롱의 후계자인 투 둑 황제는 군대를 집결시켜 프랑스군에 저항. 사실 프랑스의 최종목표는 중국이었음. 그러나 양쯔강 유역을 선점하고 있던 영국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 바로 중국 한가운데서 갈라져 나오는 메콩강과 홍하를 지배해 바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낭에 대한 공격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군내에 콜레라와 이질까지 번지기 시작. 때문에 프랑스는 1861년 다낭을 버리고 베트남 남부 최대도시인 사이공을 공격하기 시작. 사이공 지역의 베트남 군대는 반격을 시도했지만, 낡은 군대 체제와 무기로는 잘 훈련받은 프랑스 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베트남은 힘을 다해 반격했지만 1861년 2월 프랑스의 사이공 침고 2주만에 베트남의 저항은 끝이 났다. 이어 1862년 6월의 조약으로 베트남 남부 지방은 코친차이나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1880년대 초까지 아슬아슬한 독립을 유지해 오던 베트남은 1882년 하노이가 함락되면서 빠르게 무너져 갔다. 베트남은 국가의 최대 위기라는 생각으로 중국에 원조를 호소했다. 중국은 베트남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반격을 벌였지만, 중국 군대는 프랑스 군대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중국은 1885년 군대를 철수하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인도차이나가 프랑스령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 1919년 타인은 또 한번 이름을 바꾼다. 응엔 아이 꾸옥, 애국자란 뜻이다. 그해 여름, 응엔 아이 꾸옥은 프랑스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위한 안남 애국자 연합을 결성하고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는데 이 문건의 서명자 이름이 바로 응엔 아이 꾸옥이었다. 이후 호치민은 꾸옥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정치 생활을 하게 됨. 안남 민족의 요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베트남인들의 결사, 종교,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강제노동 폐지와 소금, 아편, 주류의 세금철폐를 요구하는 등 사실상 탈식민지화의 기초를 닦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당국은 상당히 당황했고, 이 글은 프랑스 당국이 호치민, 즉 응엔 아이 꾸옥을 주시하는 계기가 됨. 프랑스 비밀경찰이 그의 사진을 몰래 찍고 그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 그의 사진을 찍었던 전 인도차이나 식민지 지배 총독 알베르 사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진 속의 꾸옥은 채플린의 가장 가련한 모습처럼, 작은 모자를 머리에 가볍게 쓰고 가냘프로 자신 없는 모습이 약간은 불안정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프랑스 비밀경찰 루이 아르누는 이렇게 덧붙였다. "마르고 이마가 아주 넓은 젊은이가 가장 폭력적인 제국주의 규탄 전다을 나눠주면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부터 꾸옥의 정치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됨. 그는 국제 식민지 동맹의 혁명적 기관지인 '르 파리야'의 발행인으로서도 명성을 날리게 되는데, 천민을 뜻하는 '르 파리야'는 훗날 좌익 선전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됨. 꾸옥은 이 신문의 편집인으로, 또 제일 중요한 기고자로 일했으며, 때로는 삽화를 그리기도, 초장고 하고, 구독자에게 배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음. 하지만 이 신문을 만든 사람은 물론 읽는 사람도 즉시 체포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신문의 알려진 구독자들은 모두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 밖에도 꾸옥은 각종 신문과 발행물들에 글을 실으면서 전문적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거의 10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함. 이런 활동으로 꾸옥은 프랑스 내에서 어느정도 명성을 얻음. 그러고 나서 꾸옥은 프랑스 좌익세력인 사회당에 입당.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혐오한 꾸옥이 사회주의에 끌린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가 겪은 자본주의란 자신의 조국을 식민지로 착취하는 모습이었고, 자본주의 체제는 동포 대부분의 삶을 잔인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 내리 찧는 절구대 밑에서 볍씨는 빻아지지만,
고통이 지나면 그 흰빛이 감탄스럽다!
사람의 세상살이도 이와 마찬가지.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불행이라는 절구가 있어야 한다.
(벼찧는 노래, 옥중일기 중에서)
- 40년에 들어서자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 인도차이나는 중국의 장제스 정부가 연안의 철도를 통해 중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이며, 동남아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고, 쌀을 비롯한 많은 농산물의 산지이기 때문에 일본이 가장 중요한 전략목표로 정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40년 9월 22일 최초로 베트남의 랑손을 공격했다. 그런데 일본의 사령관들은 인도차이나를 다스릴 명분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프랑스의 비시정부(2차대전 중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수립한 프랑스 괴뢰정부)와 타협을 시도. 결국 몇 차례에 걸친 프랑스-일본 협약, 특히 41년 협약 이후 일본 군대의 베트남 주둔이 허가되고 외국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공동으로 방어한다는 계획이 수립되기에 이름. 또한 일본은 인도차이나 내에서의 프랑스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인도차이나를 일본의 전시 경제권 안으로 통합시킨다는 거래가 이루어짐. 바야흐로 인도차이나 내에서 권력이 분리되고 이중의 식민지 착취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꾸옥은 이런 여러가지 상황에 맞는 새로운 통일 전선 수립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식민지 권력을 추방하는 공동투쟁에서 모든 세력을 통일할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베트남 독립 동맹이다. 줄여서 베트민이라고 부르기로 한 이 조직은 이후 베트남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됨
- 41년 5월 10일, 팍 보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 전체 회의가 열림. 많은 대표들이 참석했지만, 팜 반 동과 보 응우옌 지압은 아직 중국에서 국외본부를 유지하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전체 회의에서 호치민은 당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일본과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점을 분명히 함. 즉, 공산주의의 지상과제인 계급혁명이나 토지혁명 등의 일보다 민족혁명이 우위에 있다고 못 박음. 호치민이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는 판단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를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으로 활용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호치민은 또 이 민족해방 혁명을 위해서는 통일된 혁명세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 그래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호치민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베트민 전선을 수립하기로 합의. 새로운 베트민 전선의 강령은 베트남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제 전면에 나선서 프랑스 식민지 체제와 일본 점령군으로부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을 감행할 때가 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생트니는 비록 프랑스 측 대표였지만 호치민을 만다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생트니는 호치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호치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의 적수보다 적게 요구하고, 상대적인 독립에 만족할 줄 알며, 어느정도 기간을 둔 다음에 자기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허용하리라는 프랑스의 명예가 달린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호치민은 확실히 성실했다. 그는 자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35년간 투쟁해왔다. 그러니 확실히 몇년 쯤은 더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폭넓은 교양, 지성,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활약상, 고난으로 점철된 삶, 사심이라고는 없는 행동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한 명망과 인기를 누리게 만들었다. 프랑스가 이런 인물을 과소평가하고, 그의 장악력과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점은 확실히 유감스럽다. 그의 제안, 행동, 태도(특히 공식적이거나 사적으로 보여준 처신)를 보면, 그가 무력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 시대를 겪어 오는 내내 인도차이나의 간디가 되기를 열망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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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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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이 만든 역사

역사 2015. 5. 15. 14:03

 


왼손이 만든 역사

저자
에드 라이트 지음
출판사
말글빛냄 | 2008-07-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왼손잡이에 대한 역사적 인식, 왼손잡이가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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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의 양 반구의 기능은 단지 좌뇌지배형이냐 우뇌지배형이냐의 구분보다 복잡함. 이는 특히 왼손잡이의 경우에 해당. 크리스 맥마너스는 그의 저서 '오른손과 왼손'에서 대부분의 오른손잡이들은 좌뇌지배형이지만 왼손잡이들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하다고 주장. 그 예로 오른손잡이의 95%는 좌뇌에 의해 언어능력이 지배당하지만 왼손잡이의 경우 70%만이 언어능력이 좌뇌에 지배당함. 맥마너스는 왼손잡이들이 평균적으로 오른손잡이들보다 뇌 사용의 가변성이 더 뛰어나다는 점을 지적. 즉 왼손잡이들은 신경학적 관점에서도 모험가인 셈. 왼손잡이들의 두뇌는 애초에 남들과 다르게 설계됨. 이는 그들이 변화의 선구자이거나 아니면 현상유지의 방해꾼이 될 가능성이 더 높은 이유로 해석됨. 왼손잡이들의 이런 선천적 차별성은 그들에게 들어맞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때문에 더욱 강화됨. 사회의 강요에 의해 좌절한 몇몇은 사회를 향한 저항자가 되기도 하지만 나머지 왼손잡이들은 그들의 특별함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주로 고독한 분야를 피난처로 삼아 천재성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평범한 왼손잡이들은 종종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반대방향인 세상에 적응해야 함. 그것이 병따개든 가위든 톱이든 왼손잡이들은 사용자체에 장애를 느껴야 함. 이런 현실 때문에 오른손잡이에 비해 왼손잡이의 의식은 환경에 적응하는 데 더 잘 훈련되어 있음.
- 우리는 주위 세계를 모방하면서 학습하며, 대부분은 오른손잡이들을 모방하게 되는데 이런 학습은 왼손잡이에게는 일련의 전환과정과 적응을 요구함. 그것은 순전히 별도의 인지단계를 거치는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왼손잡이들은 요구되는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집중해서 풀어내야 함. 아마 이 때문에 배우들중에 왼손잡이가 많은지도 모른다. 이러한 별개의 인지단계 학습은 왼손잡이들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수평사고를 발생시키는 데 기여함
- 왼손잡이 천재들의 특징으로 두드러지는 두가지 종류의 수평사고는 적응적 수평사고와 변형적 수평사고임. 적응적 수평사고는 오른손잡이 세계에 적응하고 그 세계를 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필요에서 발생. 이 때문에 왼손잡이들은 상황의 요구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됨. 변형적 수평사고는 이 능력의 강화된 변형이라고 할 수 있음. 이 종류의 수평사고는 배우 중에 왼손잡이가 많은 이유이기도 함.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모방 뒤에 다르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요하기 때문. 다른 시각에서 논하자면, 이런 변환에 대한 욕구는 왼손잡이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고 할 수 있음. 극단적인 경우 이런 욕구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복자들의 건설적인 원동력이 되기도 함. 그 예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경우 일단 권력을 손에 넣자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고자 하는 불가능한 목표에 착수했음.
- 왼손잡이의 지각(혹은 의식)과 그를 둘러싼 환경이 빚어내는 부조화는 왼손잡이로 하여금 사회와 불화를 일으키게 함. 이 때문에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보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 이것은 마치 이민자가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으로 여러가지 지식을 쌓아가는 것과 같음. 이민자는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배워야 함. 이런 부조화에서 길러진 감정이입 능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선황의 마부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했음. 또한 이집트나 바빌론에 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페르시아인들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이점을 가져다줌. 그는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에 대해 이해가 깊었고 인내력이 있었기에 그들을 결국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문화의 편견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왼손잡이들과는 달리 그가 최상의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했음. 그의 개인교사는 아리스토텔레스였는데 그는 전략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르쳐 알렉산드로스의 신체적 용맹함을 보완
- 왼손잡이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성향 중 하나는 그들의 소수로서 억압당해왔기에 패배자 혹은 낙오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행동임. 카이사르 시절 로마 주요 정치세력은 귀족계급의 특권을 지지하는 보수파와 평민의 지지를 얻는 인민파로 나뉘어 있었음. 귀족출생임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정치적 영향력의 기반을 군대와 평민계층에서 얻은 인기에 의지하고 있었음. 군중의 환심을 사는 것은 늘 음식과 오락이 중대한 문제였다. 카이살는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 남성이 여성보다 왼손잡이가 되기 쉽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음. 어떤 과학자들은 태아가 자궁내에서 과도한 남성호르몬에 노출되면 뇌의 우반구를 더 발달시키며 그 영향으로 왼손잡이가 된다고 주장. 이것이 잔다르크의 인생에 대한 남성적 접근법을 설명할 수 있음. 또한 위대한 왼손잡이들이 보여준 남성호르몬에 자극된 맹렬함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음. 이런 인물의 예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카이사르, 나폴레옹, 존 메켄로, 미켈란젤로가 있다.
- 흥미로운 사실은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보다 정신분열증에 걸리기 더 쉽다는 것. 이는 아마 왼손잡이들이 종종 보여주는 뛰어난 감수성과 감정이입 능력의 단점일 것. 몇몇 연구결과는 왼손잡이들이 오른손잡이들보다 정신분열적 성향을 더 강하게 나타냄을 입증. 게다가 그런 성향이 있으나 완전한 정신분열증으로 악화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런 성향이 없는 사람보다 더 수평사고에 뛰어난 것으로 밝혀짐. 정신분열 증세를 두드러지게 보인 인물은 로이스 캐럴, 니체, 지미 헨드릭스가 있다.
- 레오나르도는 14세의 나이로 피렌체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데 됨. 그 당시 이탈리아 회화는 기법변화의 첨단에 이써서 템페라 물감을 유화물감으로 대체하고 있었음. 템페라 물감은 안료를 달걀 노른자와 섞어 만들었는데 이 물감은 너무 빨리 말라서 깊이나 세부를 묘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음. 기름을 섞어 물감을 만드는 기술은 얀 반 아이크와 같은 플랑드르 미술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미술가들에게 전해졌음. 그러나 이등른 유화물감을 표면광택을 내는 데에만 주로 사용. 레오나르도는 유화물감을 주재료로 사용한 첫번째 화가였음. 마르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특성은 그림의 정밀도를 얻는데 특히 도움이 되었으며 여러겹의 물감을 바름으로써 더 강렬한 깊이를 창조할 수 있었음. 레오나르도는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방식에 열려 있는 태도를 유지했으며 이미 알려진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왼손잡이로서의 의지는 뛰어난 결과를 도출해내는 원동력이 되었음. 그의 창조성은 유화물감에 의해 더 큰 자유를 얻었음. 인물과 자연에 대한 묘사는 해부학 연구로 더욱 단련되어 풍요롭고 사실적이 됨. 레오나르도의 회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경으로 그려진 자연환경이 얼마나 정확히 세세하게 묘사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음. 레오나르도는 완벽주의자였다. 그 예로 회화에 있어서 그는 스푸마토(안개처럼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깔 사이의 윤곽을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도록 자연스레 옮아가도록 하는 명암법)라는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그림의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기법이었다. 이는 투스카니 특유의 햇볕 속에서 보이는 원경을 모방한 것으로 다른 화가들은 아직 도달하지 못했던 깊이를 레오나르도는 작품에 부여했다.
- 레오날도는 노트에 disscepolo para sperientia라고 사인을 했다. 이는 경험 혹은 실험 모두의 신봉자라는 의미. 이는 레오나르도가 삶을 통제하는 원칙으로서 기독교적 신앙을 저버렸음을 의미. 전통을 그저 전통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레오나르도는 기독교적 신앙의 추상적 가치 대신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얻는 진실을 택했음. 이 사실로 미루어볼 때 자연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과학과 인간정신의 능력에 대해 믿음을 가졌던 레오나르도는 이성시대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다.
- 레오나르도가 가장 집착한 것 중 하나가 인간의 비행에 대한 착상. codex atalnticus라고 알려진 노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날개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기계이다. 이 기계의 모든 동장을 훨씬 힘을 덜 들이고 재현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 인간이 만든 그 기계에 부족한 것은 다만 새의 정신이다. 인간의 정신은 새의 정신을 닮아야 한다."
- 미켈란젤로와 다른 예술가들의 관계는 매끄럽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가장 고통받았던 것은 왼손잡이 동료인 레오나르도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을 뛰어넘어야 할 장벽으로 여겼다. 많은 부분에서 그는 자신을 레오나르도와 반대입장에 놓았다. 이는 비평가인 래롤드 블룸이 말하는 영향력 불안의 고전적 사례로서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볼 수 있음. 미켈란젤로는 직접적으로 레오나르도에 맞서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적이 있음. 레오나르도가 회화를 더 선호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더 우월한 예술형태라고 주장.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숭상했던 반면 미켈란젤로는 자연을 예술과 문명이 극복해야 할 적대적 대상으로 봄. 미켈란젤로는 도제생활 동안 피렌체의 위대한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인정을 받아 인문학이 꽃피던 그의 가문으로 들어가 생활하면서 신플라톤주의의 신비로운 합리주의를 배우게 됨. 그 결과 미켈란젤로의 예술세계는 고전주의로의 회귀를 보였으나 독학을 한 레오나르도는 작품내용으로 고전주의영역을 표현하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차이는 개인적 성향이기도 했다.
-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대성당 천정화에서는 고전주의적 이미지와 성서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그가 그린 나체화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비춰졌다. 아마도 미켈란젤로 자신은 이를 의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세계는 신성대신 인간의 중요성이 점차 대두되던 르네상스에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그는 인습타파적이었다.
- 종종 불균형이 천재를 낳곤 하는데 뉴턴의 경우 왼손잡이의 몽상은 감정적 표현이 제거된 수학적 언어에 집중되어 사회적 교류와 현실성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음. 뉴턴은 전생애에 걸쳐 과학만큼이나 연금술에 매료되어 있었음.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속의 변성에 실패했으나 정상의 인간적 감정을 지적에너지로 변성시키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음. 이런 지적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뉴턴은 자연구조에 대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통찰을 일구어냈음.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기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이를 포기하고 과학에 있어 중대한 문제 몇몇을 해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
- 많은 왼손잡이 천재들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스스로가 정규교육을 무시하는 태도를 지녔음. 그랜덤에서의 뉴턴도 예외가 아니었다. 첫해에 그는 80명중 78등이었따. 쓰기는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왼손잡이에게 학교생활을 더욱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한다. 왼손잡이 천재들의 경우 자신만의 사고방식, 다른 이들과 자신의 차이점에 대한 본능적 인식이 너무 강함. 또한 그들의 독창성과 직관력은 정규교육이 제공하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일반적인 분별로는 가둘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정규교육은 각 개인들이 일정한 문화 테두리 안에서 협력을 통해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관습을 깨뜨리는 자들은 진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으며 이 대가로 뉴턴은 계속되는 고립을 겪어야 했음. 대체로 친구도 없이 뉴턴은 학창시절 동안 혼자서 물시계나 나무로 만든 제분기계 따위의 설계와 제작으로 시간을 보냄. 그랜덤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숙했던 약제사 집의 다락에서 뉴턴은 목재 벽면에 기하학적 도형을 새기는 것을 좋아했다. 이는 고독한 사색이 그를 어디로 이끌지를 보여주는 전조였다.
- 그의 사고의 실마리는 지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 그의 독특한 재능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문제라도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하는 능력이었다. 그의 직관력은 그 어떤 인간이 가졌던 직관보다 더 강하고 더 영속적인 걸출함에서 비롯된 것. 한번이라도 순수하게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사상에 도전해보았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어떻게 그 문제를 잠시나마 자신의 사고에 잡아둘 수 있는지, 어떻게 그 문제에 파고들기 위해 모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사고과정이 부지불식간에 흩어져버리는지를, 결국 발견하는 것은 멍해져 있는 자신임을 말이다. 뉴턴은 그 비밀을 파헤칠 때까지 몇시간이든 몇주든 한 문제에 골몰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최고의 수학자였던 그는 해석의 목적에 따라 그것을 도식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 뛰어난 부분은 그의 직관이었다. ... 앞서 말했듯이 그 증거들은 용도에 따라 후에 떠올랐을 것이다. 논증은 발견의 도구가 아니었다. (케인즈)
- 교향곡 3번은 이전부터 전해온 전통적인 음악적 가르침을 무시하는 왼손잡이적 특징을 뚜렷이 보여줌. 당시 어떤 비평가는 교향곡 3번을 '악상들의 거대한 무더기'라고 혹평. 그러나 웅장한 긴장감은 베토벤이 다양하고 강렬한 주제들을 어떻게 종합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그 자신의 위기, 나폴레옹의 등장,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등이 교향곡 3번을 관통하는 주제들이다. 그러한 통합의 시도는 낭만주의 세계관과 연관이 깊음. 낭만주의는 종합적이고 유기적인 면에 중점을 두며 과학적 사고를 조각조각 연결하는 선형성이 반대. 이런 낭만주의적 접근이 왼손잡이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종합적 사고는 뇌의 우반구 활동과 관련이 있으며, 단계적 논리는 우뇌의 영역. 게다가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에 비해 뇌 양반구의 상호협력에 더 뛰어남. 우뇌는 음조와 멜로디를 지각하며, 좌뇌는 복합적 선율을 지각하기 때문에 음악에 있어 양반구의 상호협력은 더욱 유용함
- 10년동안 바젤대학에 재직한 후, 나빠진 건강과 정상적 생활의 속박에 적응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니체는 교수직을 그만둠. 그는 방랑하는 철학자가 되어 유럽대륙을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는데, 한 곳에 2~3개월 이상은 머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는 식량으로 겨우 생존. 니체가 유명저서 대부분을 집필한 것도 바로 이시기. 니체는 독일국적을 포기함으로써 무국적자가 되었고 어떤 기관에 소속됨으로써 생기는 속박에서도 벗어남. 그의 고독한 존재는 사회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왼손잡이들의 궁극적 표현. 그러한 요소들은 미켈란젤로, 베토벤, 잔다르크 등 여러 왼손잡이 천재들에게서 눈에 띄지만, 니체처럼 강력하게 개인의 주체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없었음. 이런 이유로 그는 장 폴 샤르트르, 짐 모리슨, 헨리밀러, 비트족 작가 잭 케루악을 포함하는 사회적 반항자 집단에게 영감이 되었음.
- 니체의 초인에 대한 설정은 특별한 왼손잡이식 위대함의 개념이다. 사회의 질서는 전통적으로 왼손잡이게게 불리하게 겹겹이 쌓여 있으므로 그들은 흔히 자기자신과의 싸움을 선호하며 지체식 자기극복의 도전을 즐김. 베토벤의 귀머거리 작곡은 자기극복의 가장 강력한 예이지만, 존 매켄로가 코트에서 벌이는 망나니같은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극복에 항상 성공하는 표현은 아니다. 그의 행동은 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부의 악마를 정복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완벽주의는 초인식 투쟁의 또다른 예이다. 위대함이 특정 수준에 이르면 왼손잡이 천재들은 자기 자신만이 경쟁자가 된다. 절정에 올라 있던 베토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라이벌이 없었듯이 자기와 견줄만한 예술가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니체가 궁극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발견한 것처럼, 초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성공으로 끝나기보다 긴장상태를 유발할 가능성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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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지구사

역사 2015. 5. 3. 16:42

 


빵의 지구사

저자
#{for:author::2}, 빵의 지구사#{/for:author}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15-01-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서양인의 주식, 빵 부유한 자와 가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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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가루를 만드는 것과 흰가루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흰가루는 순수하게 정제된 가루를 의미. 곡물에서 흰가루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단계를 거쳐야 함. 새하안 가루를 얻으려면 먼제 제분할 때 곡물의 껍질가 배아가 가루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최소화해야 함. 그런 다음 가루를 체와 고운 천에 여러번 내려 가루에서 순수한 녹말을 분리하면 그것이 바로 흰가루다. 밀의 초기 품종인 일립계밀은 베타카로틴 함량이 높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든 흰가루는 매우 노랬을 것이다. 또한 고대곡물은 현대곡물보다 겁질이 잘 부스러져 제분할 때 고운 가루로 갈려 한데 섞였을 가능성이 높음. 어찌 되었든 곡물에서 흰가루를 분리해내는 기술을 터득한 사회라면 상류층의 경우 일반대중보다 훨씬 더 순수한 가루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
- 곡물을 거칠게 가는 것에 비해 고운 가루나 흰가루로 만드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든다. 특히 흰가루를 만들려면 껍질과 배아를 체에 쳐서 골라내야 하기 때문에 흰가루의 생산은 비경제적임. 그러므로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흰가루는 부를 과시하는 대표적 소비품목이었다. 지금처럼 저렴한 흰가루는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 곡물수확량이 늘어나고 금속제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음. 흰가루를 만들 때 현대의 제분기술로는 곡물중량의 25% 정도가 손실되지만 산업화 이전에는 중량의 50% 이상이었을 것이다.
- 빵을 부풀리는 대표적 방법
(1) 얇은 반죽에 강한 열을 가해 반죽에서 나오는 증기로 부풀리는 방법
(2) 공기중의 유산균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사워도 발효법
(3) 이스트를 첨가해 발효시키는 방법. 이때 이스트는 술 양조장에서 빵을 굽는 사람들에게로 전해져 수천년 동안 사용되고 있는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를 가리킴. 플랫브레드를 만들 때에는 세가지 방법을 모두 쓸 수 있지만 로프브레드를 만들때는 사워도 발효법이나 이스트 발효법을 써야 함
- 빵의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모두 그것을 먹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는 사회적 표지로서의 빵과 관련이 있음. 가장 강력한 원동력인 첫번째는 가능하면 가난한 자의 빵을 먹지 않으려고 하는 보편적 경향. 두번째는 곡물가루를 더욱더 곱게 갈고자 하는 경향. 여기서는 두가지 가운데 더 중요한 원동력인 상위계층이 하위계층의 빵을 거부하는 현상에 중점을 두는데, 결론적으로 이 책의 핵심주제는, 이런 거부현상은 고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부드럽고 폭신한 호밀빵과 갈색 빵을 포함한 현대 빵문화지형을 형성한 주동력이라는 점이다.
- 로프브레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빵 안쪽, 즉 빵의 속살이다. 빵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빵 속살에 갖는 사람들의 기대감. 실제로 곡물을 선택하고, 정제하고, 발효하고, 반죽하는 모든 제빵 과정은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 속살을 만드는 데 맞추어짐. 보리 같은 다른 곡물로도 빵을 만들 수 있지만 재배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곡물이 밀인 이유는 사람들이 밀로 만든 빵의 속살을 좋아하기 때문. 문화적 표지가 되는 빵 속살의 주요 요인으로는 빵이 얼마나 가벼운지와 식감,색상이 있음. 토머스 코건이 펴낸 1500년대 중반의 영향력 있는 건강안내서 '건강 안전지대'에는 빵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실림. 코건은 가장 좋은 빵은 "가벼워야 하고 차고 습한 기운이 없어야"한다고 설명. 여기서 말하는 차고 습한 기운이란 끈적이는 것을 말함. 코건이 책을 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먹던 단단한 통곡물빵, 특히 호밀빵 종류는 실제로 속살이 끈적거렸음. 그는 체액설에 근거하여 그런 빵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주장했음.
- 이스트를 넣어 발효시킨 흰 밀빵은 만드는 과정에서 두배이상 부풀어 오름. 반면 밀을 제외한 곡물과 껍질은 원래 잘 부풀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재료를 많이 넣을수록 반죽은 덜 부풀어 오름. 이를테면 100% 통호밀가루로 만든 반죽은 발효를 거쳐도 사실상 거의 부풀지 않음. 즉 가벼운 속살이 만들어지지 않음.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단단한 빵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이와 반대되는 부풀어오른 가벼운 속살의 빵을 더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근본적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사람들은 가벼운 속살을 좋아했고 그런 빵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제된 밀가루를 원했다. 이는 제분기술의 발달로 이어져 오늘날에는 통밀가루조차도 아주 곱게 생산되어 과거보다 훨씬 더 가벼운 통밀빵과 잡곡빵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제빵업계도 최신 발효과학을 적용해 원래 단단한 것이 정상인 통밀빵과 잡곡빵까지도 부드럽게 만듬. 반면 전통방식으로 빵을 만드는 전통 수제빵집에서는 100% 통호밀빵이나 통밀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음. 전통 방식으로는 도저히 끈적이지 않는 부드러운 통밀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 입자가 굵은 밀가루를 쓰면 고운 밀가루를 사용할 때보다 빵이 단단해 지는데, 요즘 제빵업계에서는 굵은 밀가루를 거의 찾지 않음. 코건의 책에서처럼 단단한 갈색 빵보다 부드럽고 가벼운 흰빵이 좋다는 내용이 글로 쓰이기 훨씬 이전에도 사람들은 빵의 가벼운 속살을 좋아했음. 아마도 그 기원은 상류층의 빵에 밀을 썼던 고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임.
- 19세기 미국 요리책에는 빵 껍질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갓 구운 빵에 물을 바르라는 조언이 나옴. 수세기 동안,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까지 상당수의 유럽 상류층은 빵껍질을 벗기고 먹었다. 빵껍질은 빵이 뜨거울때문 벗길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껍질을 벗긴 롤빵 요리법을 살펴보면 빵이 뜨거울 때 빵 껍질을 벗겨낸 뒤 다시 오븐에 넣으라고 되어 있음. 그 당시 상류층들이 번번이 이런 식으로 빵을 구워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해보면 깜짝 놀랄만한 빵이 만들어짐. 빵 속살이 겉으로 드러난 연한 색의 빵이 되는데 입으로 베어물 때의 느낌이 매우 훌륭하다. 이렇게 벗겨낸 빵 껍질은 빵가루의 재료가 되었고 실제로 17세기에는 많은 요리에 빵가루가 쓰였음. 상류층이 빵껍질을 벗긴 이유는 평소에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 빵껍질을 소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 반면 노동자들은 빵껍질을 잘 소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음.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당시 유명했던 '시골농장(1616)'에는 상류층 사람들이 빵껍질을 먹으면 우울해진다는 내용이 나옴. 한편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색에 대한 심미적 기준에서 빵껍질을 벗길지 여부를 결정했을 것임.
- 빵의 신선도도 평가 기준이 됨. 과거에는 절대 빵이 따뜻할 때 먹지 않았음. 실제로 근대까지의 모든 건강 안내서에는 빵을 구운 뒤 하루가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쓰여 있음. '음식과 요리(2004)'의 저자 해럴드 맥기가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빵이 식는 동안에도 급격한 화학적 변화가 계속 일어나며 만 하루가 지나야 안정화되고 자르기 좋은 상태가 된다. 특히 호밀빵은 빵을 구운 다음 자르지 않은 채 하루에서 며칠 동도 두면 풍미가 더욱 좋아짐. 마찬가지로 흰 빵도 빵을 굽고 난 다음날 맛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많음. 프랑스 파리에 있는 푸알란 베이커리의 제빵명장 리오넬 푸알란은 그의 빵 가운데 가장 유명한 미시(밀가루, 물, 소금만으로 만드는 커다랗고 둥그런 빵)를 구운지 3일이 지난 뒤에 먹기를 권했음. 이처럼 빵의 신선도와 맛은 반비례함. 빵의 노화란 빵 녹말 입자에서 물이 증발해 빵이 말라버리는 복잡한 화학반응. 빵은 노화되면 냄새가 달라짐. 신선한 냄새가 사라지는 대신 그 냄새를 대체해 다른 좋은 맛과 냄새가 생기는 경우가 많음. 다만 프렌치 바케트처럼 껍질이 바삭한 종류는 구운 뒤 식자마자 바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 설탕을 넣지 않고도 단맛이 약간 느껴지는 빵 반죽을 만들 수 있지만 영국과 미국에서는 100년이 넘게 이스트 발효빵 반죽에 종종 설탕을 넣어 왔음. 보통은 미국에서 설탕을 더 많이 넣는다. 19세기 상업적 제빵 업자들이 처음으로 빵에 설탕을 넣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맛을 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반죽개량제 용도로 사용. (빵껍질이 부드러워짐) 이때부터 단맛이 살짝 나는 빵맛에 사람들의 입맛이 길들여지면서 지금까지도 계속 설탕을 넣게 된 것으로 보임. '타사하라 브레드 북(1970)'은 오늘날가지도 미국의 히피스타일의 제빵사들에게 통밀방의 교과서로 통하는 영향력 있는 반체제적인 요리책임. 기존과는 전혀 다른 요리법을 선보인 이 책에서조차 설탕을 쓰지 않는 대신 반죽에 꿀을 넣은 것을 보면 지난 100년 동안 아주 살짝 단맛이 나는 빵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이 거의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음. 한편, 서로 다른 문화적 취향을 반영하듯 프랑스에서는 절대 빵에 설탕을 넣지 않음. 요즘에는 프랑스식 빵이 유행하면서 영국, 미국인의 취향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
- 소금은 대부분의 현대 빵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 소금의 맛을 따로 떼어내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소금은 빵맛에 많은 영향을 끼침. 오늘날 대부분의 밀빵에는 소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감. 일반적으로 밀가루 중량의 1.5~2%정도 소금이 반죽에 들어가며 빵집에 따라 3%까지 쓰이기도 함.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소금은 오늘날 빵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맛 가운데 하나임.
- 1550년에서 180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빵 반죽에 소금을 전혀 넣지 않거나 소금을 넣더라도 오늘날 사람들의 입맛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적은 양을 썼다. 짭짤한 빵은 랭들 코트그레이브가 1611년에 쓴 프랑스어-영어사전의 팽 몰레에 대한 정의에서 처음 언급된다. 팽 몰레는 오늘날 흔하게 볼 수 있는 흰 프랑스빵과 비슷한 종류로 수분 함량이 높은 묽은 반죽으로 만듬. 반죽에 수분이 많으면 발효할 때 눈이라고 불리는 큰 구멍이 잘 생기는데, 이때 소금은 반죽의 조직을 탄탄하게 하여 구멍이 잘 유지되록 하는 역할을 함. 팽 몰레류의 빵에서 짠맛이 나는 이유가 여기 있음. 또한 소금은 빵껍질의 색을 짙게 만드는 역할도 함. 그러나 오늘날 빵에 들어가는 소금의 양은 역할상 필요한 양을 넘는 경우가 많은. 짠 가공식품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입맛도 하나의 원인이 될 것임.
- 유럽에는 지금까지도 빵에 소금을 넣지 않은 유일한 지역. 바로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토스카나다. 토스카나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한목소리로 토스카나 빵에 대해 불평한다. 빵에서 소금을 빼면 맛이 심심해진다. 하지만 그래야 빵의 섬세한 풍미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소금을 넣지 않은 빵맛에 익숙해지면 밀가루의 맛과 발효과정에서 생긴 미묘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빵에 소금을 넣지 않았거나 아주 약간만 넣었던 과거에는 실제로 밀을 제분하자마자 바로 빵을 제조. 반면 요즘에는 밀을 제분한 뒤 최소 6주 이상 일부러 숙성시키고 수개월 이상 쓰지 않는 경우도 많음. 오늘날 빵에 소금을 많이 넣는 이유는 산화되고 노화된 밀가루에서 손실된 풍미를 감추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 이스트는 당분을 분해해 탄산가스를 발생시키는 단세포 미생물. 빵 반죽에서 이스트가 대사하여 탄산가스가 생성되면 빵에 공기구멍이 생김. 17세기에는 이 공기구멍을 눈이라고 불렀음. 또한 이스트 대사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알콜과 에스테르는 빵에 풍미를 더함. 맥주나 와인 이스트로도 빵을 만들 수 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공장에서 이스트를 대량생산하면서 빵 이스트와 맥주 이스트가 차별화되기 시작. 사람들이 이스트 발효빵에 원했던 것은 섬세한 풍미보다는 폭신한 식감이었다. 현재 빵 이스트로 판매되는 공장제 이스트는 다른 종보다 풍미는 덜할지 몰라도 가스가 잘 생긴다는 이점이 있음.
- 사워도는 말 그대로 신 반죽. 밀가루와 물을 섞은 반죽을 실온에 그대로 놓아두면 자연스레 발효가 시작됨. 수분함량이 높은 반죽도 실온에 놓아두면 며칠안에 반죽이 시어지면서 거품이 생기기 시작. 그대로 내버려둔 반죽에는 박테리아와 이스트가 100대 1 정도의 비율로 생김. 이때 박테리아와 이스트는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당분을 대사하고 탄산가스를 배출함. 이스트 발효때와 마찬가지로 이 탄산가스가 반죽을 부풀리는 역할을 함. 사워도 발효과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빵을 담백하게 만들수도, 달거나(특히 호밀가루를 썼을 때) 시게 만들수도 있음. 역사적으로 영국인은 형편만 된다면 누구나 맥주 양조장에서 이스트를 사거나 에일 맥주를 직접 만들어 이스트를 넣은 폭신하고 달콤한 빵을 만들 수 있었음. 그렇기 때문에 사워도 발효빵은 항상 가난을 상징했다. 반면 프랑스의 경우 맥주 양조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워도 발효를 통해 빵을 만드는 일은 대개 불가피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맛이 나는 사워도 발효빵은 가난과 촌스러움을 상징. 과거 프랑스 상류층 가정의 빵 요리법을 보면 현대 프랑스 빵집에서 르뱅 발효방에서 신맛이 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르뱅 발표빵과 비슷하게 만든 이스트 발효빵과 신맛이 나지 않게 만든 르뱅 발효빵은 사실상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스트를 언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어떤 발효빵을 더 좋아하느냐는 대체로 유행의 문제다
- 현재 대부분의 빵과 와인, 맥주를 만들 때 쓰이는 이스트는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 종이다. 사카로미세스 세리비시아가 빵 이스트로 분류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 19세기까지는 빵을 만들  때 누구나 맥주 양조장에서 이스트를 구해서 사용. 즉 빵 이스트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 이스트 제조업자가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를 제빵용 이스트로 대량생산하면서 사카로미세스 세리비시아가 빵 이스트로 불리게 됨. 이것이 선택된 이유는 발효과정에서 많은 양의 가스를 빠르게 내뿜어 사람들이 원하는 가벼운 빵을 잘 만들 수 있는 이스트였기 때문. 이스트 제조업자들은 제빵업계의 요구에 따라 어떤 환경에서든 가스를 빠르게 많이 생성하는 이스트를 개발하는 데 초점을 맞춤. 예를 들어 설탕을 넣은 반죽에서도 발효가 잘 되고, 설탕을 넣지 않은 반죽에서도 발효가 잘 되며, 이스트를 미리 물에 개지 않고 밀가루에 바로 섞어도 발효가 잘 되는 그런 이스트를 개발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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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교환

역사 2015. 4. 24. 15:33

 


콜럼버스의 교환

저자
황상익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2014-03-0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의학, 문명, 역사라는 코드로 20여 권의 책을 낸, 이 분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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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쳐서 피가 나거나 아프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예컨대 상처가 난 손등을 무심코 반대쪽 손으로 꼭 누르거나 입으로 가져감. 이것은 배워서 하는 행동이 아님. 어른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읻들도 마찬가지로 반응. 아마도 본능적인 반응일 것이다. 실제로 침에는 진통, 지혈효과를 보이는 성분이 있음. 물론 이러한 반사적 행동은 침에 진통, 지혈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런 것이 아마도 자연주의적인, 합리적인 의술의 시초가 되었을 것
- 질병과 의술의 신으로는 우선 아폴론 신을 들 수 있음. 아폴론은 의술의 신이면서 동시에 질병의 신이었다. 말하자면 병주고 약주는 신이었다. 아폴론 이외에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신이 여럿 있었지만 질병과 의술에 관여했던 신은 아폴론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400년대,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무렵이 되면 아폴론 대신에 새로운 신이 등장.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신으로, 아폴론의 아들. 우리 인간세상에서도 의사 일을 가업으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신의 세상도 비슷한지, 아스클레비오스는 아폴론의 영향을 받는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과 인간 여성 사이에 태어난 반신반인간이었음. 아스클레피오스는 그전부터 신화에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숭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아스클레피오스는 아버지의 역할을 물려받았지만 두가지 점에서 아폴론과 달랐음. 하나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전문적으로 의술만을 행하는 신이었다는 점. 아폴론이 주로 태양을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 부업삼아 병을 내리든지 병을 치료하든지 의술과 관련된 일을 했던 것과 달리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만을 주업으로 하는 신이다. 인간 세상에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의사가 탄생한 것에 발맞추어 신의 세상에서도 전문 의술의 신, 의신이 나타난 것.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일까?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일까? 어쨌든 아스클레피오스는 전문적 의신이었음. 아버지 아폴론은 병도 주고 약도 주는 신이었는데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는 병을 내리는 신은 아니었음. 오로지 치료만 하는, 의술의 신이었음. 아폴론은 고마운 동시에 무서운 신이었지만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의 여러가지 변화, 그리고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신화에도 반영된 것일 터이다.
-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시체에 칼을 대는 것은 법으로 금지할 필요조차 없는 절대적 금기였음. 서양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고대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잠시 인체해부가 허용된 적이 있었음. 이것을 놓고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한데 정말 그럴듯한 해석은 아직 나와 있지 않음. 어쨌든 기원전 280년부터 20~30년 동안 잠시 인체 해부가 허용된 적이 있었지만 이후 다시 문이 닫혀 약 천오백년 가량 중단된다. 그러다가 중세 후기 이탈리아에서 다시 인체해부를 허용하는 모습이 나타남. 중세 후기 몇몇 도시에서 인체 해부를 허용하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했지만 그것이 당장 해부학으로 즉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했던 것은 아님. 그렇게 되기 까지는 2백년 정도의 회임기간이 더 필요했음. 본격적으로 인체 해부학이 탄생한 것은 1500년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같은 학자의 노력에 의해서다. 이때에 이르러 인체 해부학은 본격적인 학문으로 탄생하게 되고 또 빠른 속도로 발전.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해부학이 현대의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 해부학을 빼놓고는 현대의학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해부학은 중요한 학문임
- 서양에서 이발사가 지금과 같은 독립된 직업으로 분화된 것은 300년쯤 전인 1700년대. 그전까지 이발사는 이발사이면서 동시에 외과의사였음.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한 직업이었던 것. 보통 이발사-외과의사(barber-surgeon)으로 불렸음. 그랬던 것이 1700년대에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분리됨. 이발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잇는 것과 같은 일만 하고 외과의사는 이발사가 하던 일로부터 의료적인 것만을 분리해 나와 독립적인 전문성을 쌓게 됨. 내과의사니 외과의사니 차이를 두지 않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 역시 한 200년쯤 밖에 되지 않음. 오늘날에는 의대에서 다 같이 공부하고 졸업한 이후에는 누구는 내과의사가 되고, 외과 의사가 되기도 하며 정신과 의사가 되기도 함. 의사가 되기까지 교육과정이나 훈련과정이 전혀 다르지 않음. 그러나 200년 전까지는 내과의사와 외과의사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음. 대학내에서는 내과의사만을 양성했음.
-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가 출간된 1543년 같은 해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에 대한 생각, 세계관을 바꾸어 놓는 책이 또 한 권 나옴. 이 책은 당대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게 되는데,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담겨 있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 요즘도 큰 변화를 일컬을 때 코페르니쿠스적 변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같은 표현을 종종 한다. 천동설을 뒤엎은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신부이자 의사였음. 그전부터 내려오던 천문학에 대한 생각, 더 넓게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생각을 바꾼 책이 코페르니쿳의 '천구의 회전운동에 관하여'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543년으로 이미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한 후였는데 그는 생전에는 너무 큰 파문을 두려워하여 책을 내지 못했음. 자기한테 혹시 큰 위해가 닥칠지 몰라서였음. 실제로 나중에 가면 지동설을 주장하던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도 받고 처형도 당하게 됨. 조르다노 브루노같은 사람들은 화형을 당하기도 함. 그런데 정작 코페르니쿠스 책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나온 초기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살아서 이 책을 냈어도 괜찮았을 뻔했다.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와 '천구의 회전운동에 관하여'가 모두 1543년에 출간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겠지만, 르네상싀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책들이 나오는 것도 가능했을 것임. 그 전 시대였다면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이고,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쉬이 펼칠 수가 없었을 것. 그만큼 세상이 변화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 근대 의학이 탄생한다.
- 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흔히 시든햄을 근대의 히포크라테스 또는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라 부르기도 함. 히포크라테스가 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 이런 점에서는 히포크라테스와 비슷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점도 있었음. 히포크라테스는 환자라는 전체 인간을 중시하고 그것만이 거의 전부인 것처럼 여겼는데, 시든햄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환자가 갖고 있는 질병 역시 중요하다고 주장. 환자만큼이나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병도 중요하다는 것. 근대 이전의 서양의학은 우리 몸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핵심적인 것으로 여겼음.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네가지 체액이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면 건강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건강치 못한 상태라고, 개개 질병보다는 우리 몸 전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음. 다시 말해 질병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주목했다는 것. 그런데 시든햄부터는 환자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서 질병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뚜렷해짐. 현대 의학이 갖고 있는 질병관과 같은 이런 생각이 시든햄무렵부터 싹트게 된 것. 시든햄은 질병을 분류했다. 질병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했을 것이다. 우리 몸 전체의 균형여부가 중요하지 질병은 부차적인 것이라 생각했다면 굳이 질병을 분류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질병을 분류하기 시작한 것은 질병의 실체를 인정하게 된 것이자 그 중요성을 자각한 것이란 의미가 됨. 여기서부터 시든햄의 근대적 면모를 찾아볼 수 있음. 이런 질병분류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칼 린네다. 우리가 식물학자 혹은 식물분류학자로 잘 알고 있는 린네는 사실 의사였음. 그는 환자를 진료하다가 시간이 나면 들이나 산에 나가서 식물채집을 해 와서는 자기 스스로 세운 분류기준에 따라 열심히 분류했음. 그렇게 그는 근대적 식물분류학의 창시자가 됨. 그런데 린네는 식물만 분류한 것이 아니라 동물도 분류했고 광물도 분류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갖고 있는 질병도 자신의 기준에 따라 분류했음.
- 18세기 의학분야에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일어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병리학의 변화임. 당시 사람들은 물론, 지금 우리가 그 시대를 돌이켜 보더라도 가장 중요한 병리학의 변화 혹은 해부병리학이라 일컫는 새로운 병리학의 탄생을 꼽을 수 있음. 해부 병리학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병리학임. 그 이전의 병리학은 체액 병리학이라 부르는데, 체액설을 기반으로 한 병리학이었음. 우리 몸을 이루고 잇는 네가지 체액 사이의 균형,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체액설을 기반으로 한 병리학이 이제 해부병리학으로 변화하게 된 것. 오늘날의 의학은 바로 이 해부병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음. 의학의 여러 분야들이 각기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병리학. 무엇을 질병으로 보는가, 질병이 무엇인가, 질병을 어떻게 여기는가에 따라서 진단하는 방법도 달라지고 예방 및 치료하는 방법도 달라지기 때문
- 마취제 개발에는 치과의사들이 역할이 컸음. 치과치료에도 효과적인 마취제가 꼭 필요했다. 치통 자체가 굉장히 아프거니와 발치할 때도 마취를 하면 참 좋을 것이었다. 이렇게 치과의사와 외과의사들이 아산화질소를 마취하는 데 써보게 된다. 그런데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 후대에 다시 조사해보니 가스의 양이나 농도를 좀더 높였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도였음. 그러나 당시에는 실패했고 웃음가스를 사용한 사람들은 그냥 웃음거리로 남고 말았음. 두번째 후보로 떠오른 것이 에테르였다. 지금은 에테르를 사람에게 사용하지 않음.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한국전 무렵까지도 사용. 서양의 경우 19세기까지는 가장 많이 사용된 마취제이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좋은 마취제가 개발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됨. 지금도 에테르는 사람에게는 쓰지 않지만 동물실험에, 특히 작은 동물 실험에는 많이 사용함.
- 파스퇴르와 코흐가 초석을 다진 후 1870년대부터 20~30년 사이에 인류를 괴롭혀 왔던 세균성 전염병들의 정체와 원인이 밝혀짐. 특히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가 그런 사실들을 많이 밝혀냄. 파스퇴르는 프랑스 사람이고 코흐는 독일사람인데 프랑스와 독일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라이벌인 관계인 것과 비슷하게 여러가지로 라이벌 관계였음. 19세기 말에는 학문을 둘러싸고 새로운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런 라이벌 관계가 서로를 자극해서 특히 세균학의 발전에 기여. 전염병과 병원균에 관련해서 파스퇴르의 공도 크지만 구체적 업적은 코흐가 더 많이 쌓았음. 코흐가 발견한 병원균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핵균. 결핵은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전염병이었음. 결핵이 등장해 인간을 괴롭힌 역사는 수천년, 혹은 그 이상 될 정도로 길지만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본격적으로 도시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부터다. 특히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그전까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던 결핵이 본격적으로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오름. 이처럼 19세기 내내 유럽 사람들을 가장 괴롭혔던 질병이 결핵임. 산업화가 뒤쳐진 나라들은 20세기 들어와서 결핵으로 고생을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결핵으로 많은 고통을 겪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거의 예외없이 근대화과정 또는 산업화 과정에서 결핵이 가장 큰 보건의료 문제로 등장하곤 했음. 코흐는 산업화 이후 19세기 유럽의 가장 큰 보건문제였던 결핵의 원인균이 결핵균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냄.
- 19세기 유럽에 가장 큰 피래를 끼친 질병은 결핵이지만 유럽 사람들이 더 무서워하던 병은 따로 있었음. 19세기 유럽 사람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병은 바로 콜레라. 콜레라는 그 특성 때문에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결핵보다도 더 큰 공포를 불러 일으켰음. 결핵은 항상 주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섭기는 해도 익숙한 질병이었음. 이에 반해, 콜레라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하룻밤 사이에 한 도시와 마을을 휩쓸어 폐허로 만들어버리고는 했기 때문. 19세기 동안 콜레라는 크게 4차례 유행. 유럽만이 아니라 거의 전세계가 피해를 입었는데, 심지어 당시 조선시대 말이었던 우리나라도 기록을 보면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피해를 봄. 잠잠하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큰 피해를 주고 사라지는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결핵보다 콜레라를 더 두려워함. 그런 콜레라균의 정체와 원인을 밝힌 사람도 코흐다.
- 키니네는 키나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약으로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라리아뿐만 아니라 열이 날 때 키나나무의 껍질을 갈아서 환자에게 마시게 하거나 흡입하게 해서 치료했는데, 이것을 본 서양인들이 1700년 무렵에 유럽으로 가져와서 효과를 많이 봄. 그러다가 19세기에 접어들어 화학이 발전하면서 치료효과가 있는 성분, 즉 키니네를 추출해서 약으로 만들게 됨. 그런 키니네를 중국인들이 음을 따서 금계랍이라고 불렀음. 우리나라는 1880년대 초 금계랍을 수입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임. 일제강점기에도 금계랍은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평판이 좋았지만 당시 조선인들의 소득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비싼 약이었기 때문에 쉽게 복용할 수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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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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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저자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2-09-2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국가의 성패를 결정적인 요인, '제도'의 힘! 번영과 빈곤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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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파냐가 미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내내 비슷한 제도와 사회구조가 생겨남. 약탈과 금은보화에 눈이 먼 식민지 개척초기가 지나자 에스파냐는 원주민을 수탈하기 위한 제도를 거미줄처럼 뽑아냈다. 엔코미엔다, 미타, 레타르티미엔토, 트라진에 이르는 온갖 제도가 죄다 원주민을 삶을 연명가능한 최저생계수준까지 끌어내리고 그 잉여분은 모조리 에스파냐가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음. 그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노력을 시키면서도 최저임금만을 지급하며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자발적으로 사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도 고가의 가격을 매기는 방법으로 수탈을 자행한 것. 이런 제도 덕분에 에스파냐 왕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정복자들과 그 후손들 역시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 때문에 남미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경제적 잠재력을 송두리째 빼앗긴 대륙으로 전락
- 1490년대 에스파냐가 미 대륙 정복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잉글랜드는 내전인 장미전쟁에 따른 심각한 후유증에서 갓 회복하던 변방세력에 지나지 않았음. 그들은 전리품으로 금은보화를 챙기고 미 대륙의 원주민을 착취할 기회를 모색할 겨를이 없었음.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1588년, 잉글랜드는 운 좋게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침략을 작심하고 파견한 무적함대를 패퇴시켜 유럽 전체에 엄청난 정치적 파문을 일으켰음. 행운이 따랐다고는 해도 무적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바다에서 잉글랜드의 위세가 그만큼 커질 것이라는 신호였고 마침내 식민제국 건설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함. 따라서 잉글랜드가 정확히 같은 시기에 북미의 식민지화에 나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음. 하지만 후발주자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게 사실임. 이들이 북미를 선택한 것은 이 땅이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남은 게 그곳밖에 없어서였음. 아메리카 대륙에서 착취할 원주민이 많고 은광이 있는 노른자 땅은 이미 남의 차지가 되어 있었음. 잉글랜드는 찌꺼기에 만족해야 했음.
- 멕시코의 불평등한 제도는 원주민을 착취하고 독점을 정당화하는 기반위에 사회를 건립함으로써 대다수 민중의 경제적 인센티브와 일할 의욕을 꺾어버렸음. 19세기 전반, 미국이 산업혁명을 겪기 시작했을 때도 멕시코는 나날이 가난해졌을 뿐이다.
- 1820년에서 1845년 사이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사람 중 부모가 전문직 종사자거나 유력한 지주가문 출신인 경우는 19%에 불과. 같은 시기 특허를 받은 사람 중 40%는 에디슨처럼 기본 정규교육밖에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게다가 역시 에디슨처럼 사업을 시작할 때 걸핏하면 부모에게 손을 벌린 사람들이다. 19세기 미국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정치적으로만 민주적 양상을 띤 것이 아니라 혁신에서도 민주적이었음. 이런 면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경제혁신을 이루는 나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19세기에 걸쳐 급속도로 팽창한 금융중개업과 은행업은 경제의 가파른 성장과 산업화를 이끄는 중대한 견인차 역할을 했음. 1818년에만 해도 미국에서 영업하던 은행은 겨우 338개로 총 자산도 1억 6000만불에 불과했지만, 1914년 무렵에는 무려 2만 7864개의 은행이 성업했으며 총 자산은 273억 불에 육박. 꿈을 가진 미국의 발명가라면 진작부터 창업에 필요한 자금조달이 수월했다는 의미.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은행과 금융기관의 경쟁이 치열해서 상당히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음. 이번에도 멕시코의 사정은 달랐음. 실제로 멕시코 혁명이 발발한 1910년까지도 멕시코에서 영업한 은행은 42개에 불과했고, 그중 두곳이 총 은행자산의 60%를 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미국과는 달리 멕시코 은행간에는 사실 경쟁이랄게 없었음. 경쟁할 필요가 없으니 은행은 고객에게 굉장히 높은 금리를 요구할 수 있었고, 대체로 엘리트층과 부유층은 그렇게 자금을 끌어다 경제전반을 강하게 장악할 수 있었음.
- 미국 헌법이 시행된 직후인 18세기 후반에는 멕시코와 별반 다름없는 은행체제가 슬슬 시동을 걸었음. 정치인들은 국가가 독점하는 은행체제를 시도. 측근 및 후원자에게 독점권을 부여하고 그 대가로 독점을 얻는 이윤을 나누어 갖길 바란 것이다. 곧 미국은행돌도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규제하는 정치인들에게 대출을 몰아주는 경향을 보였음.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오래가지 못했음. 독점적 은행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정치인이라도 멕시코와 달리 선출직이어서 재선에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 독점적 은행을 만들어 자신이 대출을 받는다면 정치인에게는 이보다 수지맞는 장사가 없었음. 그러고도 무사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시민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일일 수밖에 없음. 멕시코와 달리 미국에서는 시민이 정치인을 견제하고, 자신의 직위를 남용해 축재하거나 측근에게 독점권을 챙겨주는 이들을 제거해버릴 수 있었음. 결과적으로 독점적 은행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 지금의 카를로스 슬림을 있게 한 멕시코의 경제제도는 미국과 딴판이다. 멕시코 기업가는 창업단계부터 번번이 진입장벽에 부딪힌다. 값비싼 면허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은 물론 번잡한 행정절차에 시달려야 하고 정치인과 기존 사업자의 견제를 받아야 한느 데다 경쟁을 벌여야 할 기존 사업자와 결탁한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 이런 진입장벽은 어느 편에서느냐에 따라 수익성 높은 사업에 아예 진출조차 못하게 막는 난관이 될 수도 있고, 경쟁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철통같은 방책이 될 수도 있음. 물론 연줄과 영향력 행사 가능성에 따라 시나리오가 갈림. 또 누구를 뇌물로 구워삶을 수 있느냐도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함. 수완 좋고 야심이 대단한 카를로스 슬림은 레바논 이민자 출신이라는 비교적 평범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독점적 계약을 따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음. 노다지나 다름없는 멕시코 통신시장을 독점하더니 더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까지 손을 뻗친 것이다.
-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임. 궁극적으로 미국의 좋은 경제제도는 1619년 서서히 부상한 정치제도에서 비롯되었음. 정치 및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세계 불평등 이론의 골자임. 또 지구촌 각 나라가 어떤 연유로 지금과 같이 서로 다른 제도를 갖게 되었는지 역시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 간단히 살펴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만 보더라도 어떤 힘에 의해 정치, 경제제도가 만들어지느느지 가늠해볼 수 있음. 오늘날 제도가 서로 다른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과거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함. 일단 사회가 특정 방식으로 조직된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지속되는 관성을 보이기 때문. 이 도한 정치,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세계 불평등을 제거하고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도 그런 관성과 그 관성을 유발하는 힘 때문
- 다이아몬드의 이론은 그가 주력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접근방법이지만 이를 확대해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들면 무리가 따른다. 가령 다이아몬드는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대륙 문명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오랜 농경의 역사와 그에 따른 탁월한 기술 덕분이었다고 주장. 하지만 과거 아즈텍과 잉카제국의 땅에 사는 멕시코와 페루인들이 왜 가난하게 살아가는지는 설명하지는 못함.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말을 키울 수 있어 에스파냐가 잉카보다 잘살았을지는 모르지만, 그 소득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에스파냐 시민의 평균소득은 기껏해야 잉카제국 시민의 두배가 채 안 되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이론에 따르면 잉카제국 사람들이 모든 식물과 동물종을 기를 수 있고 스스로 개발하지 못한 기술을 습득했더라면 에스파냐의 생활수준을 빠르게 따라잡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음. 오히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 에스파냐와 페루의 소득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음. 오늘날 에스파냐는 페루에 비해 평균 6배는 더 윤택한 삶을 영위. 이 소득격차 역시 불공정한 현대 산업기술의 분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 에스파냐와 페루의 동식물종 차이나 근본적인 농업 생산성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
- 대륙간 불평등을 거론하는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오늘날 세계 불평등의 요체라 할 만한 대륙 내부의 변이에 대해서도 설득력을 잃고 만다. 가령 유라시아 대륙의 방향이 동서방향이어서 잉글랜드가 수고를 들이지 않고 서아시아의 혁신으로부터 수혜를 입었다고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산업혁명이 왜 몰도바에서 일어나지 않고 굳이 잉글랜드에서 발생했는지는 설명하지 못함. 그뿐만 아니라 다아이몬드 자신도 지적하듯 중국과 인도는 대단히 다양한 동식물종이라는 천혜의 자원을 자랑하며 유라시아 대륙 방향성에서도 유리함. 하지만 오늘날 지구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대부분이 바로 이 두나라에 살고 있음.
- 무지가설이 지리적 요인이나 문화가설과 다른 점은 빈곤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는 것. 무지 때문에 가난해졌다면, 지도자와 정책입안자를 계몽해 교육하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적절한 조언을 제공하고 올바른 경제운용이 어떤 것인지 정치인을 설득하면 지구촌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장. 하지만 부시아의 경험만 놓고 보아도 시장실패를 줄이고 경제성장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인의 무지가 아니라 이들이 사회에서 직면하는 인센티브와 제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음
- 우리는 충분히 중앙집권적이고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포용적 정치제도라고 부를 것이다.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않으면 착취적 정치제도라 할만하다. 경제와 정치제도 간에는 강력한 시너지가 생긴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소수 엘리트층에 권력을 쥐어주며 권력행사를 특별히 제한하지도 않음. 이들은 으레 나머지 사회구성원의 자원을 착취할 수 있도록 경제제도의 틀을 짠다. 따라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자연스레 착취적 정치제도를 수반함. 사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라도 착취적 정치제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두루 분배하는 포용적 정치제도는 다수의 자원을 몰수하고, 진입장벽을 세우며, 소수가 혜택을 누리도록 시장의 기능을 억압하는 경제제도를 뿌리뽑으려 하기 때문이다.
- 1346년까지만 해도 정치, 경제제도에 관한 한 동서유럽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1600년 무렵에는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진다. 서유럽의 노동자는 봉건적 세금이나 벌금, 규제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호황을 맞은 시장경제의 핵심일원이 되었음. 동유럽 역시 그런 경제호황을 맞았지만, 식량과 농산품에 대한 서유럽의 수요를 맞추려고 농노를 강제로 부린 덕분. 동서유럽간 제도적 차이는 언뜻 아주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 동유럽의 영주는 비교적 조직적이었음. 그런대로 권리도 많았고 영지에 대한 지배력도 조금 더 강했다. 서유럽에 비해 도시는 미약했고 작았으며 소작농의 결집력은 약했음. 역사적 큰 그림에서 본다면 작은 차이일지 모른다. 하지만 동서유럽에서 흑사병으로 봉건질서가 흔들릴 때 일반대중의 삶과 제도발전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 놓은 것도 이런 작은 차이들이었다. 흑사병은 대형사건이나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기존 사회의 경제 또는 정치균형을 뒤흔들어놓는 결정적 분기점의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음. 결정적 분기점은 한 나라가 나아갈 길을 급변시킬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는 잉글랜드에서처럼 착취적 제도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좀더 포용적인 제도가 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함. 하지만 동유럽의 재판농노제에서 보듯이 착취적 제도가 다시 고개를 들어 공고하게 자리를 잡는 시발점이 되기도 함.
- 결정적 분기점과 제도적 부동의 상호작용에 따라 전 세계의 경제발전은 대단히 다른 패턴을 보이게 됨. 기존의 정치, 경제적 제도들은 미래의 변화가 전개될 반석 역할을 함. 흑사병과 1600년 이후 세계 무역의 확대는 유럽 열강에 대단히 결정적 분기점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상이한 제도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심각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시작. 1346년 서유럽 소작농은 동유럽보다 비교적 많은 권리와 자율성을 누렸음. 그 결과 흑사병은 서유럽에서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이어진 반면 동유럽에서는 재판농노제라는 상이한 결과를 낳았음. 동서유럽은 이미 14세기부터 갈림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17,18,19세기에 걸친 새로운 경제적 기회는 유럽의 양대 지역에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띄게 됨. 1600년 잉글랜드 왕실의 힘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통한 무역은 잉글랜드에 더 폭넓은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는 길을 열어주었지만,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왕실의 힘만 강화되었을 뿐
- 정착집단은 갈등 해소가 한층 어려워질 수 있음. 이동생활을 하면 불화가 생겨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떠나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하지만 영구 주거건물을 짓고,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자산을 쌓아두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그냥 떠나버릴 수 는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취락은 더 효과적인 갈등해소 방법과 더 정교한 재산개념이 필요했음. 취락과 가까운 땅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 누가 이런 나무에서 열매를 딸 수 있는지, 냇물 어디에서 누가 낚시를 할 수 있는지 온갖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음. 규칙도 마련하고, 그 규칙을 집행할 제도를 만들어 다듬어야 했음. 따라서 정착생활이 가능해지려면 먼저 수렵채집인을 강제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혁신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임. 그런 제도적 혁신으로 권력을 쥔 정치 엘리트가 사유재산권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나머지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자원을 착취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 실제로 규모는 작더라도 샤이암 왕이 주도했던 것과 흡사한 정치혁명이 돌파구가 되어 정착생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음
- 역사속에서 착취적 제도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면의 논리가 탄탄하기 때문. 제한적 번영을 이룩하면서도 소수 엘리트의 손에 그 결실을 쥐여줄 수 있다는 것. 이런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중앙집중하가 필요함. 중앙집권화가 마무리되면 정부 또는 정부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으레 투자를 통해 부를 창출하고, 정부가 자원을 착취할 수 있도록 다른 이들에게도 투자를 장려하며, 더 나아가 본디 포용적 경제제도와 시장을 통해 마련되는 일부 과정까지도 흉내낼 인센티브가 생김. 카리브해 대농장 경제의 착취적 제도는 엘리트층이 강압적으로 노예를 부려 설탕을 생산하는 양상을 띠었음. 소련에서는 공산당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자원을 재배분하고 경영진과 노동자에게 일부 인센티브를 허용하는 형태였음.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런 인센티브는 체제의 성격때문에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력을 중앙집중화하려는 욕구는 착취적 성장가능성에서 비롯됨. 샤이암이 쿠바왕국을 창건하려 했던 이유이며 나투프인이 서아시아에서 원시적 형태이나마 법과 질서, 계급질서, 착취적 제도를 확립해 궁극적으로 신석기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근본적 원인은 착취적 성장 가능성이었을 것임. 아메리카 대륙에서 정착사회가 태동하고 농경생활로 이양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도 비슷한 과정이 계기가 되었을 것임. 소수 엘리트층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강압적으로 다스렸던 대단히 착취적 제도를 기반으로 한 마야인의 발달한 문명에서도 그런 면을 볼 수 있음. 하지만 착취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은 포용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과는 성격이 다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지속불가능하다는 사실. 그 성격상 착취적 제도는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기술적 진보 역시 기껏해야 제한적 수준에 그침. 따라서 착취적 제도를 통한 성장은 단명하고 만다.
-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이 극심한 제한을 받는 것은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님. 마야 도시국가의 역사는 착취적 제도의 태생적 논리에서 비롯되는 한층 더 불길하고, 안타깝게도 한층 보편적으로 귀결되는 운명을 여실히 보여줌. 이런 제도를 통해 엘리트층은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으므로 다른 이들이 현재 엘리트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기를 들 강력한 인센티브가 생기기 마련. 따라서 내부분쟁과 불안정은 착취적 제도에 반드시 수반되는 태생적 특징이며, 비효율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을 와해시키기 일쑤이며, 심하면 법과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려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함. 고전기를 거치는 동안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던 마야 도시국가도 종국에는 이런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음.
- 그린란드 빙핵 프로젝트는 인류역사 25만년에 해당하는 3030미터의 빙하를 시추한 바 있음. 이 프로젝트와 이전 프로젝트들에서 발견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대기오염물질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것. 납, 은, 구리 등 금속 오염물질의 양은 이후 꾸준히 늘어 기원후 1세기에 정점을 찍음. 대기중 납의 양이 전고점에 근접한 것은 놀랍게도 13세기에 들어서였음. 그 이전은 물론 이후와 비교해서도 로마의 채굴활동이 그만큼 대단히 활발했다는 의미. 채굴활동의 급증이 경제확장을 시사해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소련 등 다른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사례와 마찬가지로 로마역시 공화정 당시에는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경험했음. 하지만 일부 포용적 제도하에서 달성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성장은 한계가 있었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았음. 로마의 경제성장은 비교적 높은 농업 생산성, 속주에서 거두어 들이는 막대한 공물과 장거리 무역에 의지했을 뿐 기술적 진보나 창조적 파괴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었음. 로마인도 철제도구와 무기, 문자해득력, 쟁기농업, 건축기법 등 일부 기본적 기술을 물려받았고 공화정 초기에는 시멘트 벽돌, 펌프, 수차 등 다른 기술을 만들어내기도 했음. 하지만 이후에는 로마제국 시대를 통틀어 기술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함. 가령 조선 부문만 보다라도 배의 설계나 삭구에 거의 변화가 없었고, 로마인은 방향타를 개발한 적이 없어 늘 노를 저어 방향을 잡았음. 수차 역시 아주 더디게 확산된 탓에 수력 에너지가 로마경제에 혁신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음. 송수로와 도시하수도처럼 로마의 위대한 업적 역시 로마인이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기존 기술을 사용했을 뿐이다. 혁신이 없어도 기존 기술에 의존해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은 가능했지만, 창조적 파괴가 수반되지 않는 성장에 불과했으며 또 오래가지도 못했음. 사유재산권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시민의 경제적 권리가 정치적 권리와 더불어 움츠러들면서 경제성장 역시 퇴보하고 말았음.
- 베네치아의 경제번영은 중요한 포용적 요소를 지닌 제도 덕분에 가능했지만, 기존 엘리트층이 신규 참가자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체제의 문을 닫아걸고 심지어 베네치아공화국에 번영을 가져다준 경제제도를 금지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로마의 역사가 아무리 도드라져 보인다 하더라도 로마의 유산이 잉글랜드의 포용적 제도나 잉글랜드 산업혁명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음. 역사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제도가 발달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미리 정해진 축적과정을 거치지는 않음. 로마와 베네치아만 보더라도 포용성을 향한 초기행보가 이내 후퇴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로마가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일대에 가져다준 경제 및 제도적 기반이 훗날 한층 더 뿌리 깊은 포용적 제도로 고스란이 이어지지도 않았음. 오히려 그런 제도들이 최초로 가장 힘차게 기지개를 편 곳은 로마의 장악력이 가장 미약했고, 기원후 5세기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시피 한 잉글랜드였다. 역사는 제도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제도적 부동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 차이일지라도 결정적 분기점과 상호작용을 통해 그 차이가 증폭되면서 역사의 큰 물줄기가 만들어지기도 함. 하지만 이런 차이는 흔히 워낙 작아 되돌려질 때가 많으므로 단순한 축적과정의 산물이라 할 수도 없다.
- 리의 양말짜는 틀 편물기계처럼 중대한 혁신은 정치권력의 판도마저 바꾸어 놓을 수 있음.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리에게 특허를 거부한 것은 사실 그의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 백성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패자로 전락할 것이 두려웠던 것. 리의 발명품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이 정치불안을 초래하고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것. 러다이트 운동과 마찬가지로 손뜨개질 인력과 같은 노동자의 저항은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는 때가 많음. 하지만 특히 정치권력을 위협받는 엘리트층은 그런 혁신을 도입하는 데 한층 가공할만한 걸림돌이 됨.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서 잃을 게 많은 세력은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혁신에 저항하고 막아보려 애쓰기 일수임. 그것이 사회에 가장 급진적인 혁신을 도입해줄 주역이 필요한 이유이고, 그런 새로운 주역과 이들이 초래하는 창조적 파괴는 막강한 지도자와 엘리트층을 비롯해 이런저런 저항세력을 반드시 극복해야 함
- 잉글랜드는 사유재산권을 새로 만들거나 개선했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으며, 재정정책을 바꾸었고, 금융시장을 확대했으며, 무역상과 수공업자를 보호했음. 1760년에 이르자 이 모든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내기 시작했음. 특허 발명품의 수가 급증했고 훗날 산업혁명의 핵심이 될 기술혁신이 확연히 더 왕성한 양상을 띠기 시작. 개선된 제도적 환경을 반영하듯 다방면에서 혁신이 이어짐. 가장 중요한 분야는 동력이었다. 그리고 단연 눈에 띄는 것은 1760년 제임스 와트의 아이디어 덕에 크게 활용도가 높아진 증기기관이었음.
- 명예혁명을 기념비적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이처럼 권한이 커진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주도했기 때문. 또 이 연합세력은 명예혁명으로 한층 더 힘을 키워 행정부의 권한은 물론 세력 내 일원들의 권한에도 제약을 가할 수 있는 헌정질서를 마련할 수 있었음. 가령 바로 이런 제약들 덕분에 모직물 수공업자들이 면직물 및 퍼스티언 수공업자의 잠재적 경쟁을 막지 못한 것. 1688년 의회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도 바로 이 광범위한 연합세력 덕분이었지만, 또 그 덕분에 의회 내에서 단일 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권력을 남용하는 일도 견제할 수 있었음. 다원주의 정치제도의 태동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된 것이다. 포용적 정치, 경제제도가 꾸준히 강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런 광범위한 연합세력의 권한강화 덕분이었음.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벌어진다 해서 진정한 다원주의 정권이 반드시 들어서리란 보장은 없었음. 그런 정권의 태동은 부분적으로 역사의 우발적 경로를 따른 결과였다 할 수 있음. 스튜어트왕조에 맞서 싸운 잉글랜드 내전에서도 연합세력이 승리했지만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로 이어진 바 있음. 연합세력의 힘이 강하다 해서 반드시 절대왕권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님. 제임스 2세는 오렌지공 윌리엄을 물리쳤을 수도 있다. 다른 정치적 갈등의 결과나 마찬가지로 주요 제도적 변화가 걷는 길 역시 역사의 우발성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제도적 부동과정으로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만들어지고 대서양 무역기회라는 결정적 분기점으로 스튜어트 왕조가 불리한 입장에 처했었다 하더라도 역사의 우발성을 무시할 수 는 없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사례에서 다원주의 및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역사성 우발성과 광범위한 연합세력이라 할 수 있다.
- 고도로 절대주의적이고 착취적인 오스만 제국의 제도를 고려하면 인쇄술에 대한 술탄의 적대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음. 책은 사고를 전파시키고 그만큼 백성을 통제하기 어렵게 함. 어떤 사고는 경제성장을 증진할 수 있는 소중한 새로운 방법에 관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고는 체제를 부정하며 기존의 정치 및 사회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것일수도 있음. 책은 또한 구두로 전해지는 지식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시킴. 글을 아는 누구라도 지식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 따라서 인쇄술은 엘리트층이 지식을 장악하던 기존질서를 파괴할 위협으로 여겨졌음.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종교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인쇄술이 초래할 창조적 파괴였음. 이들의 해법은 인쇄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 잉글랜드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이 급속도로 팽창한 덕분. 에스파냐와 포르갈에 비해 잉글랜드는 대서양 무역에서 후발주자였지만 무역과 식민지 관련 사업에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이 차명할 수 있도록 허용했음. 에스파냐에서는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왕실의 배만 불려주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신흥상인계급도 수혜를 입었다. 잉글랜드에서 초기 경제환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상인계층이었으며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정치연합의 보루역할을 한 것도 이들이었음. 에스파냐에서는 잉글랜드의 경제성장과 제도적 변화를 이끌었던 과정이 현실화되지 못했음.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츠는 세비야의 상인길드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와 에스파냐간 무역을 주관. 이 상인들이 모든 무역을 통제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는 부의 일정부분이 왕실이 차지할 수 있도록 했음. 식민지오 자유무역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매년 대규모 선단을 꾸려 아메리카 대륙에서 귀금속과 귀중품을 세비야를 실어 날랐다. 무역을 워낙 편협하게 독점한터라 식민지와 무역기회를 통해 광범위한 상인계층이 부상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
- 잉글랜드는 절대왕정을 뿌리 뽑았는데 에스파냐에서는 오히려 그 입지가 강화되어 꾸준히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결정적 분기점에서 작지만 중요한 차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라 할수 있음. 작은 차이는 대의기구의 힘과 성격이었고, 결정적 분기점은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이었다. 이런 작은 차이와 분기점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에스파냐는 제도적으로 잉글랜드와 사뭇 다른 길을 걷게 됨. 잉글랜드에서는 비교적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만들어져 전례없는 경제성장을 구가하며 산업혁명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산업화 가능성이 희박했음. 산업기술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을 무렵에도 에스파냐 경제는 왕실과 지주 엘리트층이 산업화를 막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추락.
- 절대주의 체제는 유럽 대부분 지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군림했으며 혁명으로 결정적 분기점의 기회가 주어진 시기에도 산업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 중국의 명, 청왕조, 오스만 제국의 절대주의 체제가 이런 패턴을 잘 드러내줌. 960년에서 1279년까지 이어진 송왕조 시절만 해도 중국은 수많은 기술혁신으로 세계를 주도했음. 시계, 나침반, 화약, 종이, 지폐, 도자기, 화로, 주철을 만드는 용광로 등도 유럽에 앞서 중국이 먼저 발명했음. 물레와 수력 역시 유라시아 건너편에서 발명될 즈음 중국도 독자적으로 개발했음. 그 결과 1500년만 해도 중국의 생활수준은 유럽에 견줄만했을 것이다. 또 중국에는 수세기 동안 능력본위의 관료체제를 갖춘 중앙집권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중국 역시 절대주의 체제가 군림했고 송왕조하의 성장도 착취적 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음. 지배층 이외의 다른 사회집단을 대변하는 의회 또는 코르테스와 같은 정치적 대의기구가 존재하지 않았음. 중국에서는 상인의 지위 역시 늘 불안했고, 송왕조의 위대한 발명품들이 탄생한 것도 시장의 인센티브가 아닌 정부의 장려 또는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이었음. 상용화된 발명품도 거의 없었다. 송에 이은 명, 청왕조는 정부의 권한을 한층 더 강화. 그 근간에는 늘 착취적 제도의 논리가 깔려 있었다. 착취적 제도로 군림하는 지도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중국의 절대주의 황실 역시 변화를 거부하고 안정을 추구했다. 기본적으로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것이다.
- 명,청왕조가 해외무역을 반대한 이유도 쉽사리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다. 지도층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적 안정. 대서양 무역 팽창기에 잉글랜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외무역은 상인들이 배를 불려 딴생각을 품게 하므로 정치불안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여겼음. 명, 청왕조 지배자만 그렇게 믿은 것이 아니다. 송왕조 지배층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왕조는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한층 더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장려했지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명, 청왕조가 들어서자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한층 강화되었고 해외무역은 아예 금지되면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음. 명, 청왕조 시절에도 분명 시장과 무역이 존재했고 국내 경제활동에 대한 세금도 꽤 낮은 수준이었음. 하지만 혁신을 장려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정치안정을 위해 상업 및 산업적 번영의 기회를 희생한 꼴이었다. 경제를 절대주의적 정부가 틀어쥐고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자명하다.
- 학술적 기반이 마련되고 아서 루이스의 이론이 확산되던 50년대와 60년대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경제개발학자의 눈에는 원주민 자치지구와 번성하는 근대유럽 경제지구사이의 대조가 이중경제이론과 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유럽인의 경제지구는 도시적이고 교육수준이 높았으며 근대기술을 사용했다. 원주민 자치지구는 가난한 시골인데다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노동생산성도 굉장히 부진했고 주민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간을 초월한 아프리카 낙후성의 진수로 비쳤을 것이다. 이중경제는 자연발생적인 것도, 불가피한 필연도 아닌 유럽 식민지배 정책의 산물이었다. 원주민 자치지구가 가난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되었으며, 주민의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프리카 경제성장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유럽인이 장악한 광산이나 토지에 값싸고 무지한 아프리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정책의 소산이다.
- 프랑스군이 유럽 대륙에 큰 고통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이들이 유럽의 형세를 획기적으로 뒤바뀌어놓은 것도 엄연한 사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봉건질서가 자취를 감추었고 길드가 무너졌으며 군주와 제후의 절대권력 역시 송두리째 흔들렸고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면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교회마저 맥을 못추게 되었음. 태생적 지위에 따라 인민을 불평등하게 대우했던 앙시앵레짐의 기반이 무너진 것. 이런 변화 덕분에 해당 지역에서 훗날 산업화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준 포용적 경제제도가 수립되었음.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프랑스가 장악했던 지역은 거의 예외없이 산업화가 한창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등 프랑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이나, 폴란드와 에스파냐 등 프랑스의 점령기간이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이었던 지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 19세기 중반만 해도 중국과 일본은 절대주의 정권 아래 허덕이는 가난한 나라였음. 중국의 절대주의 정권은 수세기 동안 변화를 두려워했음. 중국과 일본은 유사점이 많았다. 이전 중국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쿠가와 막부 역시 17세기에 해외무역을 금지했고, 정치, 경제적인 변화를 달가와하지 않았음. 하지만 양국간에는 주목할만한 정치적 차이도 존재. 중국은 절대권력을 틀어쥔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국이었음. 물론 황제 역시 권력이 도전을 받았던 게 사실이고, 그중 가장 신경쓰이는 위협이 반란이었다.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 남부 전체가 태평천국의 난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와중에 수백만명이 전쟁에 휘말리거나 굶어죽음. 하지만 중국 황제에 대한 견제가 제도화되지는 않음. 일본 정치제도의 구조는 이와 달랐다. 막부가 청황을 밀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도쿠가와 가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도 않았고 사쓰마 등의 번은 독립을 유지했으며 심지어 나름대로 해외무역을 할 수도 있었음.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것. 중국은 이미 1839년에서 1842년까지 계속된 아편전쟁 당시 영국 해군력에 무릎을 꿇었고, 일본 역시 1853년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 전함이 도쿄만에 등장하자 중국과 다름없는 위협을 느낌.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쇼군을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개혁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운것도 경제적 낙후성이 군사적 낙후성을 초래한다는 현실인식 때문이었음. 사쓰마번의 지도자들은 경제성장이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기존 제도에 권력을 의존하는 쇼군은 개혁을 반대. 개혁을 추진하려면 쇼군을 무너뜨려야 했고, 실제로 결국 막부체제는 막을 내리게 됨. 중국에서도 상황이 비슷했지만 애초에 정치제도가 달랐기 때문에 황실을 전복하기가 한층 어려웠고, 1911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음. 중국은 제도개혁대신 근대무기를 수입해 영국의 군사력에 맞서려 했음. 반면 일본은 독자적인 군수산업을 구축했음. 이처럼 초반의 제도적 차이때문에 양국은 19세기에 직면한 도전에서도 다르게 대응.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결정적 분기점을 맞아 일본과 중국은 서로 크게 엇갈린 길을 갖게 된 것. 제도를 개혁한 일본의 경제는 고속성장의 길로 들어섰지만, 중국은 제도적 변화를 꾀하는 세력이 그만큼 강하지 못해 착취적 제도가 대체로 고스란히 존속하다 1949년 공산혁명을 계기로 개악의 길을 걷게 됨
-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 무너지자 포용적제도를 향한 새로운 길이 열렸고, 그 덕분에 궁극적으로 산업화에 착수해 고속 경제성장을 누릴 수 있었음. 아닌 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은 이보다 훨씬 컸다. 여러 주변국을 침략해 강제로 착취적 제도를 개혁하면서 프랑스의 제도를 수출한 것.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과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도 산업화에 불을 지폈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흑사병 이후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도 봉건질서가 무너지기는커녕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만 제국은 경제적으로 한참 더 낙후되었지만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도 절대왕정이 존속했음.
- 1670년대 신흥 상인계층과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휘그당이 명예혁명의 구심점이었으며, 1714년부터 1760년까지 의회를 지배한 것도 휘그당원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잡고나자 새로 얻은 지위를 이용해 자기배를 채우는 것은 물론 남의 권리까지 침탈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음. 스튜어트왕조와 다를 게 없었지만 분명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권력은 그만큼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의회내 경쟁세력, 특히 휘그에 반기를 들고 세워진 토리당, 그리고 의회를 강화하고 새로운 절대주의 체제 등장과 스튜어트 왕조의 복귀를 막기 위해 투쟁하며 제 손으로 도입한 제도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명예혁명을 통해 다원주의적 성격의 사회가 등장했다는 것은 또한,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해줄 의원조차 선출하지 못한 이들을 비롯해 거의 온 국민이 힘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블랙행위는 바로 휘그당이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평민의 반발이었던 것이다.
- 1701~04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하고 제커바이트 반란까지 성공리에 진압한 윌리엄 캐도건 장군의 사례는 휘그가 어떤 식으로 평민의 권리를 침해해 블랙행위를 부추겼는지 똑똑히 보여줌. 조지 1세는 1716년 캐도건에게 남작의 지위를 부여한 데 이어 1718년에는 백작으로 임명했음. 캐도건은 주요 국사를 논하는 법관귀족 섭정회의에서도 입김이 셌고 최고사령관 대행을 맡기도 했음. 그는 윈저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캐버셤에 약 1000에이커에 달하는 대규모 토지를 사들인 뒤 사슴사냥터를 조성. 하지만 이는 인근 주민의 권리를 침해해가며 마련한 부동산이었음. 주민은 터전을 잃었고, 가축에 풀을 뜯게 하고 토탄과 땔감을 모으는 전통적 권리마저 빼앗겼음. 캐도건을 향한 블랙의 분노가 활활 타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음. 1722년 1월 1일에 이어 그해 7월에도 무기를 들고 말을 탄 블랙들이 사슴 사냥터를 습격했다.
- 명예혁명은 한 엘리트 집단이 다른 엘리트 집단을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젠트리와 상인, 수공업자는 물론 휘그파와 토리당 파벌까지 가세한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고 일으킨 혁명이었음. 이 혁명의 결과로 태동한 것이 바로 다원주의 정치제도였다. 법치주의 역시 이 과정의 부산물로 등장. 여럿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법과 견제를 모두에게 적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어느 일방이 과도한 권력을 거머쥐기 시작하고 이내 다원주의의 토대마저 뒤흔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통치자에게도 한계와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개념이다. 스튜어트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었던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도출해낸 다원주의 논리에서도 이 개념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군주가 신성한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이념과 더불어 법치주의 원칙은 스튜어트 절대왕정에 항거하는 반대논리의 요체였다는 사실은 놀랄일이 아니다. 역사학자 톰슨은 스튜어트 왕조에 맞선 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배층은 자신들도 법의 지배에 따라야 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은 법제의 형평성과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무진 애를 썼다. 또 지배층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의든 타의든 자신들이 뱉은 말에 발이 묶이는 형국이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규칙대로 권력올이를 하되 그 규칙을 깰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권력놀음의 판 자체를 뒤집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 19세기말과 20세기초 강도귀족과 독점 트러스트의 발호는 시장이 있다고 해서 포용적 제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줌. 시장이 소수기업에 지배당하면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고 더 효율적인 경쟁자와 신기술의 진입을 막아버릴 수 있음. 시장을 그냥 내버려두면 포용적 색채를 잃고 갈수록 정치,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개인과 기업의 손에 휘둘릴 수 있음. 포용적 경제제도가 뿌리내리려면 단순히 시장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라 공평한 경쟁환경과 대다수 참여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조성해주는 포용적 시장이 필요함.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횡행하는 독점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됨. 하지만 독점 트러스트에 대한 대응은 또한, 정치제도가 포용적이라면 포용적 시장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대항해 이를 상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선순환이란 이런 것이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 정치제도가 꽃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며,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억제한다. 이런 선순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미국의 트러스트 단속노력은 앞서 멕시코의 사례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멕시코에는 카를로스 슬림의 독점을 제한할 정치기구가 없는 반면, 미국에서는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트러스트, 독점, 카르텔을 제한하고 시장의 포용성을 지키기 위해 셔먼법과 클레이턴법이 수시로 동원되어 왔음.
-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로 이어져 다수를 희생시키면서 소수의 배만 불려줌. 따라서 착취적 제도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사병과 용병을 키우고, 판사를 매수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를 충분한 자원을 갖게 됨. 또한 체제를 수호해야 할 이유가 분명ㅎ짐. 따라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한 정권이 권력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경제적 부를 챙길 수 있기 때문. 또한 착취적 정치제도는 권력남용을 견제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음. 권력이 꼭 부패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액턴 경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에스파냐 정복자는 거리낌 없이 착취적 정치, 경제제도를 수립했다.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신세계를 찾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수립한 제도 대부분은 일시적 목적이었음. 가령 엔코미엔다는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임시권리였다. 이후 400년 넘게 지속될 제도를 어떻게 확립해야 할지 본격적인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이 수립한 제도는 상당부분 바뀌었지만 악순환의 결과인 제도의 착취적 성향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착취의 형태는 바뀌었을지언정 제도의 착취적 성향이나 엘리트층의 본질은 그대로였다. 과테말라에서 엔코미엔다, 레파르티미엔토, 교역 독점은 리브레타와 토지강탈로 이어졌음. 그 와중에 대다수의 마야 후손은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하고,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했으며 공공서비스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피땀을 흘려야 했음. 중미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과테말라에서도 전형적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어 착취적 정치제도가 착취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했고, 이는 결국 착취적 정치제도를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동일한 엘리트층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 지주 엘리트층 권력과 농장위주 경영, 저임금, 낮은 교육 수준의 노동력에 기반을 둔 미국 남부의 착취적 제도는 20세기가 한참 지나서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런 제도는 2차대전이후 흔들리기 시작했고, 시민권 운동이 구체제의 정치기반을 와해시키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할 수 있음. 50년대와 60년대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나서야 남부가 북부에 빠르게 융합될 수 있었음. 미국 남부 역사는 더 질긴 악순환의 면모를 보여줌 콰테말라에서처럼 남부 농장 지주층은 권력을 내놓지 않았고, 권력유지에 유리하게 정치, 경제제도를 뜯어고쳤다. 하지만 과테말라와 다른 점은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는 사실. 노예제도가 철폐되고 흑인의 정치참여를 완전히 배제했던 구체제가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농장주 엘리트층이 광대한 토지를 틀어쥐고 서로 힘을 합치는 이상 새로운 제도를 구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노예제도 대신 흑인차별법을 도입해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음. 그런 악순환의 고리는 링컨 등 많은 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악순환은 착취적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낳고, 이어 경제적 부와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살 수 있으므로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착취적 정치제도를 뒷받침한다. 40에이커의 땅과 노새 한마리의 약속이 물건너가자 남부 농장주 엘리트층의 경제권력은 확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또 당연하고도 안타깝게도 남부 흑인의 시련은 남부 경제발전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다.
- 보츠와나, 중국, 미국 남부는 잉글랜드의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 일본 명치유신과 마찬가지로 역사가 숙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히 증명해준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면 착취적 제도는 포용적 제도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저절로 되는 것도, 쉬운일도 아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한 나라가 한층 더 포용적인 제도를 향해 한발짝 성큼 다가설 수 있으려면 특히 결정적 분기점이 마련되어야 하고, 개혁이나 다른 유리한 제도를 추구하는 광범위한 연합세력이 존재해야 하는때가 많다. 게다가 얼마간 행운도 뒤따라야 한다. 역사는 늘 우발적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 최소한의 중앙집권화를 달성한 착취적 제도하에서는 그런대로 성장이 가능.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두가지 이유에서 지속되지 못함
(1) 지속적 성장은 혁신이 있어야 하는데, 혁신은 반드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 창조적 파괴는 경제적인 면에서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울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기성권력 기반을 뒤흔들기 마련.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어쩔 수 없이 단기에 그치고 만다
(2)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이들이 사회전체를 희생시켜가며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으므로 착취적 제도하의 정치권력을 탐내는 이들이 많아져 수많은 집단과 개인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됨. 그 결과 착취적 제도하의 사회에는 정치불안을 초래할 만한 강력한 요인이 많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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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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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역사

역사 2015. 3. 3. 21:28

 


도시의 역사

저자
조엘 코트킨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2007-04-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창조물이라는 도시의 5천년 역사를 함축적...
가격비교

- 헤로도토스 시대에 제기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채로 남아 있다.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도시들을 쇠락으로 이끄는가? 이 질문에 대해 이 책은 세가지 중요한 요소를 주장. 이는 장소의 신성, 안전을 제공하고 권력을 발산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시에 활력을 주는 통상의 역할이다. 이 요소들이 도시의 총체적 건강을 결정해 왔다. 이 요소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도시문화는 번성함. 이 요소들이 약해질 때 도시는 흩어지고 결국은 역사에서 퇴장함
-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충적분지는 도시로 급격히 변모하는 데 이상적 환경을 지녔음. 그리스인들에게 메소포타미아로 알려진 이 지역에서 불모의 사막은 끝나고 물고기가 넘쳐나는 강물과 야생생물이 북적대는 강기슭이 딸린 갈대 무성한 습지가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밀과 보리 같은 토착 곡물들이 싹을 틔웠으며,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 믿음직한 농작물인 이 곡물들은 신석기시대 농부들에게 중요한 잉여 식량을 제공해 줬다. 그 잉여식량에 의지해서 도시문명이 탄생했다. 그러나 초기의 도시 건설자들은 이 기름진 환경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 우선 광물과 건축용 석재, 목재가 부족했음. 비는 드문드문 내렸고 강물은 이집트에서와는 달리 주변에 있는 넓은 면적의 건조한 땅에 자연스레 물을 공급하지 않았다. 그 결고 이 지역 정착민들은 경작지에 물을 대기 위해 복잡한 시스템을 개발해야 했음. 이런 엄청난 노력은 복잡하게 얽힌 사회를 규제하면서 자연과 더욱 지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도덕적, 사회적 체제를 필요로 했다. 이는 촌락의 전통적 삶을 수천년 동안 좌우해 왔던 가족간, 씨족간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초창기 도시들은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지휘소로 생겨남. 현대 기준으로 볼 때 (심지어 고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그 기원이 기원전 5000년가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도시의 규모는 아주 작았음. 기원전 3000년 경에 강력한 메트로폴리스인 우르 역시 넓이가 겨우 150에이커에 인구는 대략 24000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됨. 당시 성직자 계급이 새로운 도시체제의 주요 창시자로 부상. 그들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위레 두는 원칙들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숭배 시스템을 대중에게 주입. 또한 구성원 상호간에 관련이 없는 대규모 인력이 한데 모여 벌이는 활동을 복잡한 공동체 과업위주로 규제하는 일을 하기 시작.
- 두 초기 문명 사이에는 차이점도 많다. 이집트에서 통치권은 자신이 바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파라오의 손아귀에 있었음. 관리들은 신이나 왕을 위해 용수로와 잉여경제를 관리했다기보다는 그 둘을 동시에 인격화한 존재인 한 개인을 위해 일을 했음. 메소포타미아의 발전에 너무나 중요했던 도시의 정체성과 성직작 계급사이의 깊은 관계는 이집트에서는 별로 뚜렷하지 않았음.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어버니즘의 기원에 초점을 맞출 때 초기 이집트는 그 정의에 그리 잘 부합하지 않음.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도시생활은 영구적인 종교적 구조물들을 중심으로 운영됐음. 그에 비해 이집트인의 생활은 왕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행정가, 성직자, 기술자, 노동자 그리고 노예들은 자신을 도시적 공간에 속한 개인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파라오에 속한 개인으로 간주. 왕조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성직자 계급과 정부도 자리를 옮겼다. 물론 이집트처럼 위대하며 오랫동안 지속된 문명은 아주 큰 도시들을 여러개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5세기에 만들어진 한 찬가는 테베를 이렇게 찬양. "테베는 도시라 불린다. 다른 모든 것은 테베를 통해 자신을 확대시켜 보여주려고 테베의 그림자 안에 자리를 잡는다." 바빌론 같은 도시들이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에서 이집트 도시들의 인구는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과 같은 정도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랬음에도 멤피스나 테베 같은 거대한 도시들조차 수메르의 다양한 도시들이 보여주었던 독립적인 정체성과 활발한 경제, 성스러운 지위를 결코 보여주지 못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제멋대로인 데다가 사분오열된 메소포타미아와 강하게 대비되는) 이집트의 장기간에 걸친 통치체제는 성벽을 두른 도시들의 발달을 장려하지 않았따. 교역에 따른 경쟁이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는 점도 시장경제의 발달을 늦추었다. 이집트는 가장 위대한 업적인 피라미드를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환경"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구조물을 건설한 문명"으로 남을 터였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것은 내구성 있는 형태를 찾아 낸 듯하다"고 도시 사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밝혔다. "그러나 도시만큼은 예외다."
-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중국은 도시건설에서 제국이 차지하는 역할을 보여주는 가장 영구적 사례. 중국 고유의 독특한 어버니즘은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됐지만 대부분의 경우 초기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제사의 중심지로 세워졌고 왕실에 봉사하는 장인들의 작업장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기원전 1110년경에 통일된 제국인 주가 탄생하면서 높다란 성벽으로 에워싸인 소읍들이 처음으로 발달. 사실 성이라는 한자에는 성벽이란 뜻과 도시라는 뜻이 모두 있다. 주나라와 그 계승자인 한나라, 당나라는 존속기간과 철저함 면에서 비교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중앙집권적 통치양식을 고안해내미 수도인 뤄양과 장안, 카이펑은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꾸준히 자리매김. 각각의 도시가 갖는 상대적 중요성의 변동은 대개는 통치하는 군주가 자리하는 곳이 어디냐에 달려 있었음. 유교의 고전인 주례는 "군주 혼자서 수도를 건설한다"고 단언한다. 커다란 행정의 중심지이건 현이라 불리는 지방행적구역이건 수도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의 중요성은 해당 도시가 제국의 일부를 통치하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좌우됐다. 뒤이은 몇 백년 동안 이웃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형 어버니즘 모델을 채택. 일본의 첫 주요 중심지들(나니와, 후지와라, 나라)은 중국의 장안을 의식적으로 모방. 794년 일본은 헤이안에 새롭고 영구적 수도를 건설했는데, 10만명 이상의 거주자를 수용하는 이 수도는 천황일가를 중심으로 한 의식의 중심지로 이후 1천년 넘게 공헌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 이와 유사하게 1394년 조선 수도로 건설된 한양은 이후 거의 500년동안, 한국 사학자 두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목가적인 중국식 수도"로 이바지. 한양은 전형적 중국식 모델을 따라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왕실의 관료들이 지배하는 행정 중심지로 설계됐다
- 카르타고도 고대의 순수한 상업도시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몰락. 페니키아의 문화와 정치적 가치관의 자랑스러운 운반자였던 카르타고인들(전성기에는 인구가 15만~40만)은 수페테스라고 불리는 집정관과 원로원, 일반의회를 선출하는 도시국가에 어울리는 규모의 정부 시스템을 운영. 보통은 상업귀족들이 이런 통치체제를 장악. 노예와 하인은 허드렛일과 더러운 일을 하고, 군인과 선원은 전투를 했으며 성직자는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부자들이 이들을 통치. 카르타고의 고집스럽게 상업적인 성격은 페니키아의 선조들에게 그랬더너 것처럼 카르타고의 몰락에 한몫을 했음. 카르타고에는 경제적 이익 이외에는 확장을 해야겠다는 다른 사명감이나 근본적인 동인이 없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다른 식민지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도 그곳들을 응집력있는 제국으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곳들은 무엇보다도 사업적 이해관계자들이 경영하는 나라였다. 그 옛날의 세계에서 사업을 위해 설계된 메트로폴리스는 결국에는 정복을 위해 건설된 도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 이익과 편협한 이기주의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동이 터오르기 전까지는 도시의 역사를 지배하게 될 제국의 비전에 대항할 수 없었다.
-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신도시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자그마한 어촌마을 라코티스가 있던 자리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와 근동, 지중해 세계 사이의 교역을 위한 화물 집산 항구로 설계됨. 알렉산드리아의 건설은 알렉산드로스가 오랜 포위 끝에 파괴해버린 페니키아의 티레를 대체할 지중해 동부의 교역 중심지를 만들겠다는 의식적인 계획을 반영. 이 야심찬 비전은 먼저 거대한 새 항구의 건설을 요구.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이집트를 넘겨 받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가문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선박들이 항구를 안전하게 오갈 수 있게끔 파로스 섬에 거대한 등대를 건설. 알렉산드리아는 우아한 공원들로 아름답게 꾸며졌고 이 도시를 지중해 세계의 지적 중심지로 만들어준 건물들 (특히 박물관과 도서관)도 갖추었다. 도시계획의 현실적 측면들 역시 무시되지 않는다. 대로는 넓었고, 거리의 청소부들과 공중위생 시스템들은 더 믿음직스러웠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도시의 대부분은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석재로 지어졌다.
- 로마의 위대한 힘은 지리적 위치나 자연자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로마를 가로질거 흐르는 티베르 강은 티그리스나 유프라테스, 나일 같은 거대한 강과는 같은 반열에 끼지 못함. 로마의 심장부는 도시를 둘러싼 일곱 언덕의 보호를 받았고, 내륙에 지리한 입지는 바다를 둘러싼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방패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야망을 지닌 정복자 앞에서는 별로 대단치 않은 장애물에 불과했을 게 틀림없다. 로마는 기본적인 경제적 자산을 향유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많은 도시들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온화한 기후와 약간 비옥한 토양은 양치기와 농부들로 구성된 조그만 공동체를 먹여 살렸다. 도시는 티베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지점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덕에 초기의 로마는 주위를 둘러싼 민족들에게는, 특히 당시 가장 선진화된 문화의 소유자인 에트루리아인들에게는 천연의 교역로가 됐다. 소금퇴적물은 로마인들이 교역에 내놓은 중요한 품목이었다. 그 대실 로마의 위대함은 그들의 별난 신화와 신성한 사명감에 있음. 로마는 티베르 강에 버려져서 암컷 늑대 밑에서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기원전 753년 창건. 그들은 처음부터 잔인해서 서로를 사납게 공격. 전쟁과 농경의 신인 마르스는 초기에 이 거친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강한 추종세력을 만들어냈음. 그러나 강인함과 억센 심성만으로는 에트루리아인들에게 저항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 자그마한 정착지였던 로마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그곳에 왕정을 확립. 여러면에서 로마인들은 이 패배에서 수혜를 입었다. 이 패배 덕에 그들은 더 세련된 문화를 접하게 됐고 그리스 세계와 페니키아 세계에 모두 연줄을 갖게 됐다. 외래 세력의 지배에서 일단 자유로워진 로마인들은 기원전 5세기에 인구가 겨우 4천명 밖에 되지 않는 이제 막 갓난 티를 벗은 도시국가를 신속하게 개혁. 기원전 450년 무렵 그들은 12표법으로 정치제제를 성문화함. 이 법전은 장날에서부터 고객과 의뢰인 사이의 관계, 귀족의 권리, 평민의 보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다루었다.
- 기원전 31년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아우구스투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의 동맹세력인 안토니우스 군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헬레니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거의 전부와 옛 셀레우코스 제국의 상당부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많은 땅을 이미 정복한 상태였다. 이후로 4세기 동안 서구 어버니즘의 역사는 많은 부분이 로마인들과 그들의 의지를 따르는 이들에 의해 씌여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 철학잗와 도시 건설자 또는 건축가로 보여줬던 천부적 독창성이 로마인들에게는 없었다고 주장. 하지만 이는 부당한 주장이다. 물론 로마인들은 그리스화한 세상에서 발견한 것들을 취해 그 위에다 자신의 문화를 건설했다. 그러나 그들도 카르타고 같은 도시들을 탈바꿈시키거나 재건했고, 고색창연한 아테네를 포함한 다른 도시들의 복구를 도왔다.
- 요크와 런던, 트리어, 파리, 빈, 부다페스터, 그리고 훗날의 유럽에 있는 주요 도시들은 티베르 강기슭에서 내어난 도시의 천재성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로마화는 많은 점에서 선진적인 도시화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발달은 사상 유례가 없는 치안과 안전 때문에 가능했다. "로마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하는 방법을 통해 평화를 수호했다."고 에드워드 기번은 말했다. 국경지역과 성벽, 도로 가까운 곳에 배치된 군단들은 사하라의 황무지에서부터 몹시도 추운 스코틀랜드 변방에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도시들을 보호. 성벽과 다른 방어시설들은 그런 오지에 있는 도시들의 생존에 중요했다. 그러나 독일의 트리어와 베룰라미움과 같은 고장들은 단순히 군사적 전초기지에만 머물지 않았다. 1~2세기 경, 심지어는 영국의 소읍들조차도 바둑판 모양의 거리와 정교한 배수 시스템, 욕탕과 수도관을 자랑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도시 문명의 번창이 단순히 제국이 내린 칙령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초들의 에너지도 한 몫을 했다. 여러 도시들 사이의 격렬한 경쟁은 무절제한 신축 건설 프로젝트들과 극장들, 스타디움을 만들어냈다. 로마는 개별 도시들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허용. 제국 그 자체가 도시 세포들의 연합으로 기능했다고 사학자 로버트 로페즈는 밝혔음.
- 예전의 그리스 비잔티움인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고대 어버니즘의 마지막 남은 거대한 보루였음. 326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선포된 이 도시는 유럽을 아시아로부터 갈라놓는 보스포러스 해렵에 걸쳐 있었음. 성벽 뒤에서 안전을 영위하는 웅장한 항구를 낀 콘스탄티노플은 야만인들의 맹공에도 살아남았다. 1세기 내내 도시의 인구는 대략 5만에서 30만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쇠락해가는 로마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를 쉽게 추월
- 예전의 그리스 비잔티움인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고대 어버니즘의 마지막 남은 거대한 보루였다. 326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선포된 이 도시는 유럽을 아시아로부터 갈라놓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걸쳐 있었다. 성벽 뒤에서 안전을 영위하는 웅장한 항구를 낀 콘스탄티노플은 야만인들의 맹공에도 살아남았다. 1세기 내에 도시의 인구는 대략 5만에서 30만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쇠락해가는 로마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를 쉽게 추월했다. 6세기의 절정기에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의 지배적 도시의 지위에 오르면서 인구가 50만에 육박했고 아드리아해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흑해에서 아프리카의 뿔에까지 걸치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다. 오랜된 도시들을 개발하고 새로운 도시들을 창건했던 로마와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근동의 다른 도시들이 쇠락하고 있던 시절에 번성했다.
- 압바스 칼리프가 8세기 말에 창건한 새 수도 바그다드는 초기 이슬람 도시 중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로 부상.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자리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옛 수도인 크테시폰과 바릴론 양쪽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바그다드를 당대의 관찰자 아부 유세프 이븐 이스하크는 세계의 교차로라고 기술했다. 위대한 수도로 설계된 바그다드는 환상 계획에 따라 건설됨. 성벽, 해자, 그리고 궁전을 에워싼 내벽. 최소한 25만에 달하는 바그다드의 인구는 동시대 유럽이 주도적인 도시인 베니스와 파리, 밀라노를 압도했고 그리스-로마 문명 최후의 위대한 보루인 콘스탄티노플과 맞먹었음. 900년경 바그다드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것이다. 물론 몇 백년 후에 칼리프의 영토는 조각나고 바그다드는 정치적 권력의 지배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바그다드는 여전히 두드러진 지적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번성한 도서관과 아카데미들은 종이의 도입과 서양과 페르시아 고전들의 번역본을 포함한 서적의 발행과 유통에서 도움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랍학자들은 더 얇은 종이를 개발해서 서적을 들고 다니기 쉽게 그리고 필기도 더 쉽게 만들었다.
- 도시 중심의 이슬람 문화와 심하게 대조적으로 중국의 도시들은 현저하게 농업에 기초한 문명의 틀 안에서 생겨났다. 16세기에 이르러서도 명나라의 황제들은 황궁 마당에서 빈틈없이 짜여진 의례에 따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계속 올렸다. 이러한 영속적인 농업적 현실은 심지어 도시 내부에도 반영됐다. 항저우, 광저우, 장저우, 베이징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세계 최대의 그리고 가장 훌륭한 계획도시들이다. 그렇지만 이 도시들은 북적거리는 시골지역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도시들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도시들은 그렇게 큰 규모를 이루어냈음에도 그저 거대한 농업지역일 따름이었다. 고대 유럽이나 이슬람 세계에서는 공통된 현상인, 배후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을 중국의 도시들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규모가 큰 도시일지라도 대부분의 상품은 주로 지역 내 소비를 위해 생산됐다. 대부분의 농촌 필수품은 마을 수준에서 충족됐다. 당시까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음에도 중국은 대도시에서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로 측정하는 도시화를 다른 나라와 비슷한 정도로 달성할 수 없었음. 중국의 도시화 정도는 서유럽이나 지중해 또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1천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 전까지의 일본에 비해 절반 미만을 계속 유지했다
- 1000년 말엽과 이후의 몇세기 동안 중국에서 또 다른 종류의 메트로폴리스가 생겨났음. 정치적 권력에 주된 기반을 두지 않고 상업적 가치에 기반을 둔 메트로폴리스였다. 상업적 도시들이 처음으로 꽃을 피운 것은 618년부터 907년까지 중국을 통치한 당 치하에서였다. 교역에 대한 전통적 규제를 해제한 당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도시경영자라는 새로운 계급의 창출을 이끌었다. 960년 패권을 잡고 교역을 장려한 송 치하에서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대륙간 교역세력이 등장. 영해에서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을 소탕한 후 중국의 상인들은 인도로 이어지는 모든 교역루트에서 지배적 역할을 확립. 나침반 사용법을 배우면서 세계에서 가장 항해솜씨가 뛰어난 뱃사람이 된 중국의 항해자들은 저 멀리 희망봉에까지 이르는 해도를 작성. 12세기 무렵 중국 해군력은 20개 소함대와 5만2천명이 넘는 병력으로 성장. 이제 중국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 상당 부분을 포함한 드넓은 영역으로 퍼져나감. 중국 선박 중 일부는 500명 가량을 태우고 1년치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다. 배에서 돼지들이 사육됐고 술이 빚어졌다. 여행가 초우 추-페이는 이렇게 적었다. "남쪽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말과 비슷하다. 또 돛르 펼치면 배들은 하늘에 뜬 거대한 구름과 비슷하다."
- 몽골인들은 적들을 철저하게 위협했지만 아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사상유례가 없는 치안력을 제공함으로써 교역을 활성화. 그들의 치하에서 "사람들은 머리에다 황금접시를 이고서도 어느 누구로부터 공격당하는 일 없이 해가 뜨는 나라로부터 해가 지는 나라로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고 어느 이슬람 논평자는 기록. 몽골인들의 종교적 관용정신도 상업적, 지적 접촉의 확대를 장려.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다른 신앙들이 상대적 화합속에서 번성. 이슬람 카디(재판관)가 관리하는 모스크와 병원, 바자들이 광저우와 이슬람 상법과 민법의 적용을 받으며 운영됐음. 많은 이슬람교도들 심지어 마르코 폴로 일가 같은 유럽인들도 몽골제국의 통치 속에서 출세했음. 서로 다른 문화간의 교역과 접촉의 성장은 위대한 칸의 황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거대한 수도와 내륙의 다른 주요 도시들은 해안의 교역도시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인도와 근동 심지어는 아프리카에서 온 엄청난 양의 사치품을 소비했다.
- 16세기 베이징이나 델리, 이스탄불, 카이로의 통치자들이 보기에 유럽의 도시들은 규모도 변변찮은데다 후진적이었음. 중국과 이슬람의 기술과 약품, 온갖 도구들은 대부분의 경우 유럽에서 생산된 해당 물품들보다 훨씬 정교했음. 고도로 발달된 관개시설과 수로체계를 갖춘 동양의 농경시스템, 특히 중국의 시스템은 서양의 농경 시스템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중국과 다르 알-이슬람의 주도적 도시들은 인구와 건물의 웅장함 면에서 모두 유럽의 주도적 도시들을 능가하는 듯 보였다. 1526년 인도의 통치권을 장악한 몽골족의 후예인 무굴제국은 이슬람 사학자가 인간이 거주하는 에덴동산이라고 묘사했던 수도 델리에서 인도를 통치. 정복당한 콘스탄티노플의 유적에 자리잡고 있던 이슬람 도시 이스탄불은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많은 부를 소유했고 인구도 더 많았다. 동양의 주요 도시들의 웅장함은 오랫동안 지속돼온 우월적 입장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 중국 황실의 태도는 전형적이었다. 어떤 사람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동안 그 사람은 황실의 영토를 지나 제후들의 영토로, 그 다음에는 강화지대로 그리고 그 뒤러 이어지는 절반정도 문명화된 미개인들의 땅으로 들어갔다가 마지막으로는 문화라고는 모르는 미개인들의 땅에 닿게 된다고 믿음. 변두리의 저끝에 있는 유럽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듯 보였다. 다르 알-이슬람에 사는 엘리트들도 외국인들, 특히 유럽인들에 대해 비슷한 정도의 경멸적 태도를 갖는 경우가 잦았다. 9세기 바그다드에서 기록된 교역 통람은 비잔티움과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을 매매할만한 가치가 잇는 상품들을 가진 곳으로 언급함. 그와 대조적으로 북유럽과 서유럽에 있는 도시들은 일부 선택된 광물들의 산지나 노예의 산지로만 유용할 뿐이었다. 두드러진 것은, 이런 태도가 유럽의 군사적, 기술적 우월성이 이미 뚜렷해지고 있던 18세기가 될 때까지도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 교회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고 또 안전을 보장해 주는 강한 제국이 없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던 유럽의 도시 공동체들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가진 것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약탈을 일삼는 기사들과 산적들이 시골을 배회하는 상황에서 방어선의 구축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다. 이탈리아 베로나에 대한 8세기의 묘사는 이 도시가 "두툼한 성벽의 보호를 받으며 횃불이 빛을 발하는 누대 48개에 둘러싸여 있다"고 전한다. 대포가 도입되기 이전 시대에 도시의 강력한 방어시설은 가장 포악한 침략자들이라 해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럽의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의 새로운 황금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탈리아 북부 상인들과 장인들은 방어를 위한 무장군대를 보유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제국의 경계가 모호하고 종종은 그런 경계의 의미가 없기까지 한 세계에서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는 도시의 상인들과 장인들은 동양의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독립성을 향유. 사유재산권이나 상업 계급의 특권을 억누르려는 황제도, 칼리프도, 술탄도 없었다. 서양에서 자치권이 있는 도시와 태동기에 있던 자본주의는 동반성장했다. 앙리 피렌느는 이렇게 썼다. "돈벌이에 대한 사랑은 애향심과 결연을 맺었다."
- 베니스인들은 사업과 정치 양 분야 모두에서 이기적 존재라는 명성을 쌓아감. 그들은 기독교 세계 대부분이 이슬람 교도들과 냉혹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시기에도 이슬람교도들과 교역. 1204년, 그들은 십자군이 비잔티움을 장악한 사건을 지중해 동부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굳건하게 다지는 계기로 한껏 활용. 결국 베니스의 선박들은 유럽과 아랍인들 사이의 교역뿐 아니라 그들이 이슬람 교도와 유대인 중개인들을 통해 빈번하게 벌인 인도와 남아시아, 중국과의 교역도 지배했다. 중개인이나 금융업자 신분에 만족하지 못한 베니스인들은 제조업도 공들여서 발전시켰으며, 그에 힘입어 도시의 경제는 훨씬 강해졌다. 전문화된 산업지구라는 개념이 서양의 다른 곳으로 확산되기 훨씬 전에 베니스인들은 주변지역을 특유의 기능적 계열에 따라 구획으로 나눴다. 선박건조와 군수품 제조, 유리제조에 종사하는 특별한 거주 공동체와 산업 공동체들을 갖춘 것이다. 14세기 무렵, 16000명 이상의 인력이 이들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면서 베니스를 서양의 상인이자 은행가뿐 아니라 서양의 작업장으로도 만들었다. 16세기 초입에 상업과 제조업의 이런 조합은 베니스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한편으로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이 도시가 보여준 확연한 코스모콜리탄 성격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이 이방인을 향한 불관용과 폭력때문에 암흑기를 겪던 시기에 베니스는 외국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독일에서 온 상인들, 레반트에서 온 유대인과 그리스 기독교인들 그리고 다른 외지인들이 베니스의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들은 상품과 사상, 기술들을 베니스로 가져왔다.
- 곧이어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이 자금과 인재, 산업적 패권을 놓고 베니스와 경합. 플로렌스는 은행업세어 직물교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서 베니스의 패권에 도전했다. 제노바는 지중해 교역의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음. 프라토같은 소규모 도시들은 특정한 틈새산업을 장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도시국가들의 통치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이었으며 대개는 전제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도시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는 길드들, 상인들, 귀족들, 성직자들 사이에서 라이벌 파벌이 상대 파벌을 타도하는 일이 뻔질나게 벌어졌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 제국적인 전통 그리고 교회조직의 전통과 단절돼서 전개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다시 한번 도시는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의 토대로 남았다. 규제, 특히 통상과 관련한 규제는 그 규제들이 전통적인 교회법의 신념을 침해한다 할지라도 도시의 경제적 이득이 가장 권세좋은 시민들을 위해 기획되고 도입됐다. 말썽의 여지가 있는 이런 환경에서 이제 의심할 나위 없는 근대적인 도시정치가 피어났다. 플로렌스의 메디치 가문은 근대적 도시 정치 보스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이끄는 파벌에게 그리고 나아가서는 전체 주민에게 아낌없이 금품을 베풀 수 있는 능력에 크게 의지했다. 그들은 대단히 기회주의적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주된 목표는 믿음의 전파나 거대한 제국의 건설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그들의 도시를 위해 물질적인 부의 최고수준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제 북부 이탈리아 전역의 도시 거주자들은, 일부 현대 추정치에 의하면, 고대 로마의 풍요를 넘어서는 풍요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 도시국가들이 처한 상황은 세계 교역의 패턴이 극적으로 변화하면서 더욱 손상됐다. 기독교적 열정이 불하는 신흥 국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무어인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후 15세기를 기점으로 거의 구세주적인 광란의 분위기에 젖어 대양으로 진출. 그들은 이탈리아인들과 그들의 파트너들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교역 루트들을 결국에는 훼손시킬 매혹적인 신흥시장들을 개척했음. 인구가 백만명 밖에 되지 않는 후진적이고 가난한 소국 포르투갈이 최초의 결정타를 날렸다. 1440년대 아조레스 제도의 서부에 다다르기 시작한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얼마 되지 않아 서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 식민지들을 건설하기 시작.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하면서 이 조그만 나라는 아프리카를 둘러 아시아로 가는 루트를 열었고 이 사건은 수익이 짭짤한 향신료 교역에서 이탈리아인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독점체제를 위협.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테노치티틀란 정복보다 10년 앞선 1509년에 일어남. 소규모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구지라트 외곽에 있는 디우에서 대규모 이슬람 함대를 격파한 것. 그 이후로 세계 무역의 통제권 그리고 도시의 미래는 아랍인과 중국인 그리고 다른 민족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의 손아귀로 떨어짐.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자행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잔혹한 신세계 정복은 이탈리아의 상업적 탁월함을 더욱 손상시킴.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가 되겠다는 야심에 찬 이탈리아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군주를 위해 일하기 시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존 캐벗,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 같은 이탈리아인들은 광대한 새 영토를 탐험한 초기 탐험가들이었다. 결국 신대륙의 이름은 한때 플로렌스에서 메디치 가문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던 에이전트였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7세기 무렵 2백년 전만 해도 보잘것 없던 리스본은 중요한 도시로, 포르투갈의 드넓은 제국을 위한 주도적 항구이자 행정의 중심지로 부상.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리스본은 이제 세계적 규모의 사건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대한 제국의 수도 분위기를 풍겼다.
- 북부에 있는 도시들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런던)은 세계무역의 급격한 팽창에서 대단히 큰 수례를 입었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도시들이 17세기와 18세기를 통과하며 쇠락한 반면,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4배, 런던에 있는 도시들은 6배 이상이나 성장. 이런 발전을 가능케 한 결정적 무기는 용감무쌍한 탐험가들이나 전사들이 들고 있던 무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은행가, 상인, 숙련공들이 수행한 세속적 기능들이 이 도시들의 주무기였다. 제국이 뿌리고 가꾼 상업적 열매를 획득한 것은 용감한 병사들과 겁없는 선교사들을 거느린 스페인이 아니었따. 네덜란드의 통상을 지향하는 앤트워프와 다른 도시들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5세가 관용의 법칙을 받아들였더라면 스페인은 이 도시들의 통치를 통해 발흥하는 유럽의 도시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카톨릭 신항을 강요하겠다는 왕조의 욕심은 생산성 높고 프로테스탄트의 비중이 높은 북부도시들을 어느 스페인 장성이 밝혔듯이 유럽의 묘지로 탈바꿈시켰다. 네덜란드의 많은 마을들이 스페인에 항거하며 봉기한 1572년 대반란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스페인 사령관 알바 공작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작전을 벌임. 네널란드의 북부는 성공적으로 저항했지만 남부는 카톨릭 통제권 아래 남음. 알바의 전쟁은 스페인의 상업적 전망에 재앙같은 결과를 가져옴. 지배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상인 계급은 스페인 치하에 있는 지역에서 피신했듬. 1567년에 스페인 군대가 약탈한 앤트워프는 쇠락한 반면 앤트워프의 인재와 자금, 통찰력 중 상당 부분은 북쪽에 있는 신흥독립도시들로 옮겨감.
- 고대 알렉산드리아와 절정기의 카이로, 15세기 베니스처럼 암스테르담의 상업적 성공은 인구의 다양성에 많은 힘을 입음. 이 도시에서는 지배적 네덜란드 개혁 교회와 더불어 카톨릭과 위그노, 유대교, 루터교, 메노파의 종교기관들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은 종교가 아닌 종교를 믿는 인구는 대략 시민 4명중 1명 꼴. 페르낭 브로델은 이렇게 적었다. "신앙의 자유라는 기적은 교역에 집중하는 공동체 어디에서건 볼 수 있다." 상업적 활력과 다양한 인구의 결합은 예술과 기술, 철학 분야에서 과감한 혁신을 일으키기에 이상적 분위기를 창출. 스페인은 이와는 대조적이었다. 종교재판소장의 아들인 로드리고 만리케는 "문화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교도나 죄인, 유대교도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고 투덜거렸다.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개방적 연구와 혁신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대학과 과학협회, 출판사를 통해 그런 것들을 키워내기까지 했다. 이런 진취적 정신은 도시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명됐다. 처음에 네덜란드의 교역은 와인과 목재, 설탕, 화학제품 같은 상품들에 의존. 그러나 17세기 무렵 네덜란드인들은 값진 교역 (염료, 유약, 도자기, 린젠, 고급가구, 태피스트리)에 더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혁신적 기법들을 사용. 네덜란드 기업가들은 엔지니어링 서비스와 산업적 전문지식, 기술을 유럽 곳곳의 나라들로 그리고 심지어 멕시코까지 수출. 네덜란드의 팽창하는 중산층은 주요한 문화적 중심세력이 되면서 도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함. 16세기와 17세기의 네덜란드 미술가들은 숙련된 장인 (태피스트리 디자이너, 모피 재단사, 금 세공인)의 아들인 경우가 많았음. 이 미술가들은 지역의 상류층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후원을 받았음. 미술은 명성을 얻는 방법일 뿐 아니라 돈을 버는 방법이기도 했다. 일급 초상화 화가인 렘브란트는 대학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다.
- 런던의 번영은 정도 면에서도 엄청났을 뿐 아니라 성격 면에서도 파리나 마드리드,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라이벌 제국의 수도들과도 확연히 달랐다. 이 거대한 수도들은 런던과 비슷하게 그들 나라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웅장한 성당과 궁전, 공원들을 자랑했다. 그러나 성장일로에 있는 세계경제를 통제하고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활력 넘치는 경제기관들을 만들어낸 것은 런던 뿐이었듬. 런던은 역사의 초창기 이래로 거대 도시들을 지탱해주던 도덕적 결단력에 대한 중요한 감각도 터득. 로마제국이 절정기에 달했을 때처럼 런던은 세계를 주도할 준비와 세계를 발전시킬 준비가 모두 돼 있었다.
- 런던의 상업적이고 제국적인 패권은 도시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닦았음. 이 단계의 발전은 제조업 기술의 혁명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산업은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시대 때부터 도시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지만 18세기 말 영국은 새로운 종류의 도시, 주로 상품의 대량생산과 연계한 도시의 창출에 있어 선구자가 되었다. 대서양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동력원 겸 운송로 역할을 해준 편리한 강물들 그리고 훗날의 풍부한 석탄 매장량 같은 많은 자연요인들이 연국의 초기 산업의 출현을 이끌었음.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국이 제조업의 성장에 이상적인 사회적, 정치적 풍조를 누렸다는 것이다.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동안 통일된 상태였던 영국은 이탈리아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권력의 분열에도, 프랑스가 겪은 사나운 격변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영국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옮겨간 것은 카톨릭 권력집단과 그들이 보유한 광대한 토지를 모두 없애버린 것에서도 혜택을 입었다. 그 조치를 통해 영국은 중세의 "층층이 쌓인 상류계급의 협동조합"을 분쇄했다. 그러면서 1768년에 다축 방적기를 발명한 아크라이트 같은 예전의 장인 계급 출신이 초기 혁신자로 부상하는 데 이상적 풍토가 조성됨. 귀족제는 영국에서 계속 기업을 유지했지만 부자들은 자신의 조상이 무슨 일을 했던 상관없이 기업을 세울 수 있는 자유를 누림. 이는 제약이 훨씬 많은 동양에서보다 그리고 자유로이 활동할 여지가 적었던 다른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에서보다 더 폭넓은 자유를 향유. 결국 영국은 세계의 지배적 제국으로 등장하면서 유럽 외부에 있는 광대한 자원의 원산지와 새로운 시장을 모두 개척할 수 있었음. 마르크스가 쓴 문장인 "자본주의 생산기의 여명"은 제국의 통합과 동시에 찾아옴. 제국주의적 벤처사업 (면화, 담배, 노예)에서 파생된 자본은 섬나라 영국이 산업의 최전방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도약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을 조달해 주었다.
- 로스엔젤레스에서 교외 모델이 시작된 것은 도시의 발전에 있어 급격한 분기점이었다. 역사를 통틀어 도시는 우뚝 솟은 풍경과 공공장소의 활기를 자랑으로 여겨왔다. 가장 성스럽고 멋진 공공구조물은 필수적으로 도심에, 아니면 도심 주위에 솟아 올랐다. 티레, 카르타고, 로마 등의 가장 역동적인 고대 도시들은 중심부 공간에 건물들을 높이 세우고 더 많은 주민들을 거기에 채워 넣는 것으로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에 대처. 산업혁명의 징후는 도시의 지형에 유례없는 압력을 가하며 도시의 성장률을 가속시킴. 1800년 경, 유럽 도시들은 중세 시대의 선배도시들보다 최소한 두배는 더 조밀했다. 일부 미국의 도시들, 그중에서도 뉴욕은 그보다 더 붐볐다. 한때는 안전한 피신처였던 도심에는 점점 더 범죄가 창궐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 초기에만 해도 도시의 미래가 주변부에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 도시의 주변부로 이주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었다. 요컨대 저렴한 임대료와 길어진 통근거리를 맞바꾼 것이다.
- 50년대와 60년대에 식민지배가 끝나면서 새로 권력을 위임받은 식민지 도시의 통치자들에게는 딜레마가 하나 생김. 그들은 어느정도 현대화된 인프라와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엄청난 불평등을 겸비한, 유럽의 영향력이 구현된 소우주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소규모 엘리트들이 전통적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대규모 인구와 공존했다. 이 도시들이 현대와의 활력 넘치는 중심지로 떠오르는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적 르네상스의 자랑스런 심벌로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가 처음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재닛 아부-루고드의 표현에 따르면, 1960년대는 아랍과 이슬람권 도시들에게는 평온한 시대였다. 다른 개도국의 도시들을 통치하는 이들도 상당히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많은 경우 유럽에서 교육받은 식민지 엘리트들은 한때 유럽인들이 차지했던 고상한 주거지역으로 이주했다. 자신들의 도시가 유럽과 북미의 도시들만큼이나 경쟁력 있는 도시가 되기를 희망한 그들은 주요 기업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통제하는 관료제를 확장시켰다. 새로운 가능성이 엄청나게 클 것이라는 기대에 힘입어 이 도시들은 기업 엘리트와 전문직 엘리트들에게뿐 아니라 토지에서 쫓겨난 농부들과 소읍의 기능공들로 구성된 팽창하는 이주민들에게도 매력적인 도시가 됐다. 봄베이와 캘커타, 델리, 라호르, 라고스, 카이로, 마닐라 같은 도시들은 식민 통치 아래에서 규모가 몇 배나 늘어났다. 예를 들어, 봄베이의 인구는 41년 150만 이하에서 20세기 말에는 1500만 이상으로 증가.
- 많은 경우 도시의 거대한 팽창은 부와 권력의 동반 증가를 수반하지 않았다. 그런 개발은 도시역사의 비극적이고 파멸적인 분기점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로마건, 중국이나 이슬람 제국이건,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들이건 아니면 산업화 시대의 북유럽이건 거대 도시들은 보통 경제적, 정치적 성공이 가속화된 결과로 발전해 왔다. 팽창하는 도시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성장하는 산업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제국의 정복에 따라 흘러들어온 대규모의 부를 내놓으라며 정권을 졸라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의 거대 도시 중 상당수는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고 사회적, 정치적 역기능이 만연한 가운데 더 엄청난 규모로 성장. 어느 분석가가 기록한 것처럼 많은 경우 이런 도시지역은 현대화와 발전의 생산자로서 그들이 수행할 것이라 기대됐던 기능들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음. 겉으로만 보면 이들 도시 중 상당수는 식민지 시절에 지닌 서구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얼굴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경우가 잦았다. 이 도시들에는 세계적 기업들의 인상적 사무실, 1급호텔, 품위 있는 거주지역 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도시들의 상당수는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수렁에 빠져 있었고, 도시들의 운명은 대체로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점차 성장하는 동아시아의 기업들이 내린 의사결정에 달려 있었다. 성장의 원동력을 제공할 믿음직한 경제적 엔진이 없는 도시지역들은 가장 기초적 인프라를, 확장은 고사하고, 그대로 유지할 자금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음. 개발도상권을 통틀어 쓰레기의 30~50%가량이 수거되지 않고, 깨끗한 물공급이 부족한 경우가 빈번함. 대기오엽은 유럽이나 북미의 가장 혼잡한 도시들보다 더 치명적인 상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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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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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7대 불가사의

역사 2015. 2. 24. 22:17

 


한국 7대 불가사의

저자
이종호 지음
출판사
역사의아침 | 2007-03-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천문학, 누금세공 기술, 청동기 문명, 철기 문명, 인쇄술, 함...
가격비교

- 고인돌이 한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 동북지역의 고인돌 분포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령지역의 고인돌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그것이 비파형 동검 분포권과 유사함. 요동반도의 심금형 쌍방, 한반도 대전 비례동과 신대동, 여천 적량동의 고인돌에서도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었음. 이는 비파형 동검문화가 고인돌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 더구나 요동반도의 고인돌은 전형적 북방식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은 한반도 북방식 고인돌과 상통함. 이런 사실을 통해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주민집단이 동일한 문화단계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한국에서 고인돌이 중요시 되는 것은, 역사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로 들어선 경우에만 비로소 그 민족이 국가라는 틀을 갖출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 고인돌은 비록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청동기 시대에 축조되었다고 받아들인다. 곧 고인돌의 축조연대가 올라갈수록 국가성립 시기 또한 상향조정되는 것이다.
- 트라키아 지역은 375년부터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의 근거지인 동시에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아틸라(395~453)의 근거지이기도 함. 또 황금보검은 아틸라가 유럽을 제패한 4~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장식검으로도 유명. 요시미즈 츠네오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 이들간의 교류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바로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가 했다는 것.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황금보검이 트라키아 지방에서 극동의 신라에 이르는 흉노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많은 것을 시사함. 기원전부터 중국은 부단히 북방의 흉노와 혈투를 벌였으며, 그 유명한 만리장성도 실제로는 흉노의 남진을 막기 위해 건설된 것. 흉노는 유럽에서 훈족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프랑스까지 점령했고, 유럽의 세계사를 바꾼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장본인. 그런데 근래 연구를 통해 흉노가 극동지역에 자리한 신라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음. 아틸라는 야만 유목민으로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을 초토화한 훈족의 왕으로서 당대 유럽세계의 패자였음.
- 서양 학자들이 훈족의 원류가 한국인일 가능성을 제기하는데도 정작 우리 한국인들은 훈족과 훈족의 유럽제패를 이끈 아틸라왕에 대해 잘 모름. 이는 우리 한국인이 세계사를 배울 때 사용하는 교재가 모두 서양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 서양인은 아틸라 왕과 훈족데 대해 편견으로 가득 찬 매우 적대적 관점을 취함. 자신들이 유색인종에게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음. 그러므로 실제적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의도적으로 그 비중을 축소하여 서술하며, 훈족을 야만인으로 폄훼함. 서양사에는 훈족이 375년 게르만족을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했다고 기록됨. 훈족의 침입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근거지에서 쫓겨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영내로 밀려들어가게 되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함으로써 유럽의 중세가 시작됨. 이처럼 훈족이 게르만족을 공격한 역사적 사실을 단 몇줄로 서술함으로써 마치 일회성 해프닝에 그친 것처럼 다루고 있음. 이후 100여년 동안 훈족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하고 유럽의 패자로 군림한 사실은 역사 서술에는 나오지 않음. 4세기에 유럽에 모습을 드러낸 훈족은 유럽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음. 서양사 서술에서 매우 강한 인상을 주는 게르만족조차 훈족이 나타나면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 바빴으며, 전투력 면에서 훈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활의 사거리가 떨어지는 데다 파르티안 기사법을 알지 못하는 유럽 기병이 기마민족의 탁월한 기동력을 발휘하며 전후좌우에서 자유자재로 화살을 날리는 훈족 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은 뻔함. 결국 훈족과 싸워 연전연패한 유럽인은 훈족을 신이 내린 징벌이라 일컬으며 두려워했다고 함. 이렇듯 압도적 전력을 바탕으로 유럽에 등장한 훈족은 곧 동로마를 압박하여 동로마에서 조공을 받는 위치가 됨. 435년 훈족은 동로마가 공물의 납기실을 번번이 어기는 것을 빌미로 동로마로 진격. 로마가 동서로 분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내정이 정비되지 않았던 동로마는 실수를 인정하고 재빨리 훈족과 마르구스에서 다음과 같은 평화협정을 맺음
* 동로마는 훈족의 적인 로마 밖에 있는 게르만족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
* 국경 근처에 양측이 보장하는 시장을 세운다
* 동로마가 매년 금 700파운드(약 229킬로그램)를 훈족에게 바친다 (협정전에 비해 2배)
이 협정은 훈족 입장에서 획기적 의미를 지님. 훈족이 동로마의 인정아래 로마 밖에 있는 중동부 유럽 전역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확보했기 때문. 또 서로마의 아에티우스에게서는 서고트인을 통제할 수 있는 경찰권을 확보했으니, 사실상 당시 세계패자는 이미 훈족이었다고 볼 수 있음.
- 독일의 베렌트와 슈미트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계되는 근거로 다음 몇가지 유물을 제시
*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되는 동복(청동 솥)이 가야지방에서 출토됨
*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도 말에 동복을 싣고 있는 기마인물상이 발견됨
*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장식에도 흔히 볼 수 있음
- 신라는 한반도 동쪽 끝에 자리한 고립된 나라가 아니었음. 당대의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임. 그동안 학자들은 이런 신라의 모습을 낙후성으로 해석하기도 했음. 하지만 신라는 중국과의 교류에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낙후된 것이 아니라 초원길을 통해 중앙아시아, 그리스 로마 문화와 교류하면서 동북아에서 특별한 문화를 독자적으로 소화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었음. 신라인은 여러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된 민족이다. 선사시대부터 살아온 토착 농경민들, 기원전 3세기경에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한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온 고조선 유민들, 고구려에 멸망당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된 민족의 토대 위에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계까지 합류하여 문화의 다양성을 키웠음. 이렇게 축적된 문화의 다양성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 이처럼 경주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은 당대의 신라가 한반도 동쪽 끝에 자리한 궁벽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성을 지닌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며, 우리 민족 구성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음.
- 청동기가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는가는 고고학계에서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 학계의 입장은 기원전 5000년대에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자연동이 발견되어 기원전 4000년대에 실용화되고, 기원전 3000년대에는 코카서스-이란 고원에서 청동기가 주조되기 시작했다고 봄. 이후 메소포타미아로 전해졌고 그곳에서 사방으로 전파됨. 청동이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주석의 함량이 많을수록 합금의 경도가 높아짐. 순동에 주석을 섞으면 순동에 비해 용해 온도가 낮아짐. 순동의 녹는점은 섭씨 1083도이지만 주석을 일정량 넣으면 녹는점이 700~800도로 낮아지기 때문. 그러나 주석을 무한대로 넣는 것은 아님. 주석이 16~20% 들어갈 때 굳기 정도가 높아지는데 만약 이보다 주석의 양이 많아지면 부서지는 단점이 있음. 한편 납도 주석과 마찬가지로 녹는점을 낮추어 주조의 효율성을 높임. 그러나 주석보다는 제련하는 방법이 다소 어려우므로 그보다 자중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짐.
- 기원전 3000년경의 청동기 유물로 추정되는 고인돌과 청동제품은 청동기 시대에 비로소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해온 한국의 실증사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 실증사학자들은 한국의 청동기가 100여년전에 시작되었다고 간주했고 이를 근거로 단군조선 등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역사학계에서는 이병도와 그를 잇는 학파를 실증주의학파라고 함. 학계 통설에 따르면 실증주의를 특징짓는 명제는 과학만이 타당한 지식이며, 사실만이 지식의 대상이라는 것. 따라서 실증주의는 사실과 과학을 통해 확인된 법칙을 넘어서는 어떠한 힘이나 실체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며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연구방법은 어떠한 것이든 배격함. 이는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려는 학문적 연구태도와 관점, 다시 말해 역사의 과정과 자연의 과정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자연과학의 방법을 역사해석에 적용하려는 입장을 지칭하는 것. 이들은 최종자료를 문헌자료에 의지. 아무리 많은 고고학 자료가 있다 해도 자의적 해석이 되기 쉬우므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최종적으로 문헌자료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 물론 문헌자료를 근거로 한다는 것에도 문제점이 있음을 자인함. 문헌자료란 글자가 생긴 후에 만들어진 것인데다 당시 사회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줄 정도로 자세하지 않기 때문. 결국 실증사학에서도 양측을 병용하여 접근하지만 실증사학 자체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임. 문제는 이병도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의 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사를 편찬한, 이완용이 고문으로 있던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이며 이후 일제 강점기를 한국 사학계를 주도한 진단학회를 이끌었고, 해방이후에도 1950~60년에 한국사 전 6권을 발간하는 등 한국사학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 더구나 실증사학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라는 데 문제점이 있음. 원래 실증사학은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역사는 주관적 판단없이 역사적 사실을 실증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함. 유적과 유물도 과학으로 실증된 사실만 인정하며 사료의 경우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배제한다. 당연히 민족사학 등은 비판대상인데 일반적으로 실증사학은 역사가 짧은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이어온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임.
- 신라시대 종이 탁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종을 만든 청동재료의 배합비가 다르기 때문. 보통 청동제품은 구리, 주석, 납을 섞어 만들지만 그 용도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는데 한국의 청동은 유난히 아연함량이 많음. 아연이 포함된 청동은 중국의 경우 한나라 이전에는 없고 송나라 때에 드물게 나타남. 아연은 섭씨 900도에서 끓기 시작하므로 아연이 많이 들어있는 청동합금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움. 한국의 청동이 기술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 앞선 것은 자유자재로 우수한 합금을 만들 수 있었다는 의미
- 지금까지 알려진 것에 따르면 청동으로 식기를 만들어 쓴 민족은 한민족 밖에 없음. 같은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주로 자기를 사용했고, 일본은 나무를 사용. 신라 유물 중에는 놋그릇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놋그릇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청동기다. 우리 한민족이 자기를 만들 줄 몰랐던 것이 아니므로, 식기의 재료로 놋쇠를 사용했다는 것은 놋그릇을 만드는 기술 수준이 높아서 자기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것. 일본 쇼소인에 소장된 신라 놋그릇을 보면 당시 신라에서 만든 놋그른이 미학적,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음.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우리 청동기 기술의 결정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금속활자가 고려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임. 다만 금속활자가 어떻게 고려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 고구려 주력부대는 개마무사로 구성됨. 개마란 기병이 타는 갑옷을 입힌 말을 이르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했다. 개마고원도 개마무사가 말달리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유래. 고구려 개마무사는 말과 기사 모두 강철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하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말을 달린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돌진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기 마련. 따라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된 임무는 적진 돌파와 대형격파였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 말조차 강철장비로 무방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함.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해도 말이 부상당하면 전투력이 떨어지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 않게 중요. 따라서 고구려는 기병은 물론 말가지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당시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철기 문명 수준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 따라서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고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유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님.
- 전쟁의 역학 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으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더욱 개선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란 것을 알고도 이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음.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님. 그러나 그들이 운용한 기병은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나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을 끌어들였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음.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운용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좀더 근원적으로 중국의 제철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인식.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능력이 있었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능력이 없었다는 것.
- 중국이 타국에 비해 우월성을 보이는 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병력. 물론 장병수가 많다고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대규모 인해전술과 물량작전을 펴서 실패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를 상대해서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배.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우수한 장비를 부단히 공급할 수 있었고 산성전투와 청야전투 등을 활용하면서 공격군에게 치명상을 입혔기 때문. 결국 고구려가 중국의 물량작전에 맞서 당당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전술을 복합적으로 구사한 결과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요인은 고구려인의 평소 삶과 정신세계임. 먼저 고구려인은 기본적으로 상무적이었음. 그것은 고구려인이 결혼과 더불어 수의를 지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가능. 고구려인의 이런 풍습을 대하고 중국인들은 매우 놀랐다고 하는데 그것은 고구려인이 국가적 대의를 위해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
- 중국과의 문화 교섭사 측면에서도 중국보다 한국에서 인쇄술이 더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기록이 있음. 1091년 한 해에 중국 송나라가 120여종에 이르는 희귀한 책 5000여권을 고려에 주문했다는 기록. 1092년은 목활자도 발명되기 전이므로 그 당시 고려가 송나라에 수출한 책들은 신라에서 비롯된 목판 인쇄술로 찍은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인쇄된지 300년, 우리나라는 중국에 서적을 수출할 정도로 인쇄술이 발달한 문화 선진국이었다. 당시 고려는 국제적으로 고금의 귀중한 서적이 많은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책을 수출했음.
- 우리나라 종이는 예부터 명성이 자자했음. 송나라 손목은 계림지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아름다워 백추지라고 부른다"고 했음. 고반여사에는 "고려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 종이 색깔은 희고 질기기가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라고 기록 됨. 중국에서 진귀하게 여긴 신라의 백추지 또는 경면지는 긴 섬유의 종이를 몇겹으로 붙여서 이를 두드려 광택을 낸 것. 백추지는 두드려 만든 하얀 종이란 뜻이며, 경면지는 두드러 거울처럼 빛나게 한 종이란 뜻. 중국에서 질긴 성질이 요구되는 우산, 부채, 책 표지 등의 용도로 우리나라 종이가 인기가 있었고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데는 두드려서 광택을 낸 것을 즐겨 사용했음.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음. 고려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 필수품으로 등장.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를 비단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했음. 그래서 한지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됨
- 최무선은 고려말에 화약을 만든 것으로 유명. 하지만 그가 이후 계속해서 화포를 만들고 이를 고려수군의 전함에 장착하여 왜구를 상대로 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음. 진포해전은 세계 최초의 함포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 서양역사에서 함포해전을 근대 해전의 분기점으로 본다. 진포해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은 1517년 베네치아, 제노바, 스페인의 연합함대가 튀르크 함대와 레판토에서 격돌한 레판토 해전을 근대 함포해전의 효시로 본다. 레판토 해전이후 함포가 장착된 배로 해상권을 장악한 국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되며, 역사의 주도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간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이 세계사를 주도) 서양이 동양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는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침탈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함포외교임. 그런데 레판토 해전보다 무려 190년이나 앞서, 최무선은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여 적선을 격파하는 함포해전을 세계 최초로 선보임. 이후 최무선은 1389년에 전선 100처을 동원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섰음. 결과는 대성공으로 고려는 대마도 해안에 정박중이던 300여척의 왜선을 격침하고, 왜구 소굴을 파괴했으며, 인질로 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명을 구출해 귀국. 그리고 200년 후 최무선의 화약무기와 함포전술을 그대로 계승한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에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것을 보면 당대 최무선이 창안한 함포전술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
- 임진난에서 조선수군의 함포전술에 연전연패한 왜군은 서둘러 배에 화포를 장착. 하지만 크기가 작은 일본의 전선은 대형 화포의 발사충격으로 뒤집히기 일쑤였고, 흔들림이 심해 조선수군에 비해 화포의 명중률도 현저하게 낮았음.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내내 왜군은 전선에 대형화포를 탑재할 수 없었음. 이것이 왜군이 조선수군에 연전연패한 주요 원인. 최무선이 고려수군의 전선에 장착한 함포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탁월한 조선기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상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과 항해기술이 크게 발달했음. 고려시대의 배는 전투용 군함, 무역과 대외활동을 위한 무역선, 조세나 공물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 나뉨. 조운선은 각지에서 공물로 거둬들인 조세미와 진상품을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한 관용선으로 관청에서 수납한 세곡과 중앙정부에서 쓰이는 일용품이 거의 조운선으로 운송됐음. 조운선은 조선전기에는 병조선이라 불렀음. 상장(구조물)을 설치하면 병선이 되고, 상장을 철거하면 조운선이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 평시에는 조운선으로 활용하다 전시에는 상장을 설치해 병선으로 운용한 것으로, 유사시 재빠른 전시체제로 돌입하기 위한 지혜의 소산이었음. 조운선은 쌀 800석, 600석, 300석을 적재하는 세 종류가 있는데, 이를 운행하는 인원은 겨우 22명, 20명, 18명 정도였으니 당시 항해술과 화물선적술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음. 그 결과 조운선이 정박하는 나루와 포구에는 관련업무를 보는 관리와 인부, 그리고 상인들이 모이게 되고 이들의 침식을 위해 또 다른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작은 마을로 시작된 나루와 포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번창. 조선시대 조운서이 도시로 번창한 대표적 예를 서울의 용산, 마포, 노량진, 동작나루, 양화진 등이며 충청도 충주, 전라도 법성, 덕성, 영산포, 강원도의 원주, 춘천, 황해도의 금곡, 조음, 평안도의 안주, 삭주, 의주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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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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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저자
이언 모리스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3-05-27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오늘날 서양의 패권은 과연 필연인가, 우연인가? 2103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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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서양이 지배하는지를 두고 대략 1750년부터 1950년사이에 제시된 거의 모든 설명은 장기고착 테마의 변형이었음. 가장 인기있는 버전은 한마디로 유럽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문화적으로 더 우월해서라는 설명. 로마제국이 저물어가던 시절 이래로 대부분의 유럽인은 그들의 뿌리를 신약성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신들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기독교도라 여겼지만, 왜 서양이 이제서야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몇몇 18세기 유럽 지성은 기독교를 대체하는 계보를 그리기 시작. 그들은 2500년전 고대 그리스인이 이성과 창의성, 자유로 구성된 독특한 문화를 창조했다고 주장. 이것이 유럽을 여느지역과는 다른 더 훌륭한 궤도에 올려놓았다. 동양도 자기만의 사상적 전통이 있다는 것은 그들도 인정했지만 동양의 전통은 너무 뒤죽박죽이고 보수적이며 위계적이라 서양의 사고와 경쟁할 수 없었다. 많은 유럽인은 문화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정복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 최근 몇몇 사람은 정화의 원정을 비롯한 다른 무수한 사실이 장기 모델에 끼워맞추기에는 너무 불편하다는 인상을 받기 시작. 이미 1905년 일본은 러시아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동양의 나라들이 유럽과 전쟁터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 1942년 일본은 서양 세력을 태평양에서 거의 다 몰아낸 적이 있었고, 1945년 처참한 패배에서 되살아나 이번에는 방향을 틀어 경제대국이 되었따. 다들 알다시피 78년 이래로 중국도 유사한 경로를 따르고 있음. 06년 중국은 미국을 꺾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탄소배출국이 되었고 심지어 08년 금융위기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중국경제는 서양의 정부들이 최고의 호황기에도 부러워할 만한 경제성장을 기록. 어쩌면 옛 질문을 내던지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름.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가 아니라 서양이 지배하기는 하는가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답변이 아니오라면 실제도 존재하지도 않는 서양의 지배에 대해 고래의 설명들을 추구하는 장기고착이론은 다소 무의미해 보임
- 1987년 유전학자 레베카 칸이 이끄는 연구팀은 세계 곳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연구한 책을 발표. 그들은 연구 데이터 안에서 약 150가지 유형을 구분했고 통계수치를 어떻게 배열하더라도 세가지 핵심결과가 지속적으로 산출됨을 확인.
(1) 다른 어느 곳보다 아프리카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크다
(2) 나머지 세계의 유전적 다양성은 아프리카 내 다양성의 일부에 불과하다
(3) 가장 멀리 거슬러올라가는 미토콘드리아 DNA계보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다.
결론은 불가피하다. 현재 우리 인류가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여자조상은 틀림없이 아프리카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금세 아프리카 이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칸과 동료들이 살펴보았듯이 그녀는 한 운좋은 어머니였다. 미토콘드리아 DNA에서 표준변이율에 따라 계산한 결과 연구팀은 이브가 20만년 전에 살았다고 결론 내렸다. 90년대 내내 고인류학자들은 칸의 연구팀이 내린 결론을 놓고 논쟁을 했음. 어떤 이는 그들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했고, 또 다른 이는 그들의 증거를 의심했지만, 표본이나 수치를 아무리 재배열하더라도 결과는 매번 똑같았음. 후속 연구들르 결론에서 기껏 달라진 것은 이브가 살았던 시기가 15만년 전으로 약간 가까워졌다는 것. 기술이 발전해 유전학자들이 Y염색체에서 세포핵 DNA를 검사할 수 있게 된 90년대 말이 되자 논쟁에 쐐기를 박는 차원에서 아프리카 이브는 동반자를 얻게 됨. 미토콘드리아 DNA처럼 Y염색체 DNA도 아프리카에서 다양성이 가장 크고 계보도 가장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아프리카 아담이 6만년전과 9만년전 사이에 살았으며 비아프리카계 변형의 기원은 5만년 전이라고 지적. 2010년에 유전학자들은 한가지 세부사항을 추가.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떠나자마자 네안데르탈인과 많이 성교했고, 그다음 이 유전자 조합을 나머지 지역으로 전파했다는 것.
-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구세계 대략 북위 20도~35도까지, 신세계 남위 15도~북위 20도까지에 걸쳐 있는 행운의 위도대에서 살았음. 빙하기에 이 기후대에 밀집해있던 동식물은 기원전 1만 27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했고 채집인들이 죽으로 끓여 먹거나 빻아서 빵을 만들 수 있게 종자가 크게 진화한 야생 곡물(서남아시아의 보리와 밀, 호밀, 그리고 동아시아의 쌀과 기장)이 아시아 양단에서 특히 증가했던 것 같다. 그들은 곡식이 여물때까지 기다려서 밀짚이나 보릿단을 흔든 다음 떨어지는 이삭을 줍기만 하면 되었다. 오늘날 서남아시아산 야생 곡물을 이용한 실험은 단 1만 제곡비터 면적의 땅에서 식용가능한 낟알을 1톤이나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 수확에 소비되는 에너지 1칼로리당 50칼로리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음. 채집활동의 황금시대였다.
- 영구적인 마을은 설치류의 생존규칙을 바꾸었다. 이제 향기롭고 맛 좋은 쓰레기 더미를 언제든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바로 눈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작고 교활한 생쥐들은 사람의 주의를 끄는 크고 공격적인 놈들보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더 잘 생존. 몇 십세대 만에 설치류는 인간과 동거할 수 있도록 사실상 유전적으로 진화. 인간과 같이 살아가는 쥐새끼들은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듯이 커다란 야생 조상들을 완전히 대체. 집 안의 설치류는 인간이 저장해 놓은 식량과 물에 배설물을 남겨 질병의 전파를 가속화함으로써 끝없는 쓰레기 선물에 보답했음. 인간은 바로 그 때문에 쥐를 혐오. 우리 가운데 일부는 심지어 생쥐를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청소동물은 늑대였고, 늑대 역시 쓰레기의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무시무시한 야성의 부름 타입 괴물들이 주변에 얼쩡거릴 때의 문제점을 잘 알기 때문에 설치류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더 작고 덜 위협적인 동물들이 인간과 더불어 가장 잘 지냈다. 오랫동안 고고학자들은 순한 늑대새끼들 애완용으로 키우고 그것들을 다시 교배해 인간에게 사랑받는 만큼 인간을 따르는 순한 강아지를 번식시키는 식으로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를 길들여 왔다고 여겨왔으나, 근래의 연구는 인간의 의식적인 개입보다는 다시금 자연선택이 작용했다는 가설을 지지함.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늑대와 쓰레기,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인간이 남긴 부스러기를 두고 자신들과 경쟁할 뿐 아니라 질병도 퍼트리는 설치류를 처치할 능력이 있고 심지어 진짜 늑대들과도 싸울 수 있는 개라는 동물을 탄생시켰고, 개는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됨.
- 농경은 분명히 지엽적 장애(과도한 방목 탓에 요르단 강은 기원전 6500년과 기원전 6000년 사이에 사막으로 변한 듯하다)에 봉착했지만 새로운 영거 드라이아스기 같은 기후적 재난만 제외한다면 세상의 모든 자유의지도 농경생활양식이 확산되어 농경에 적합한 마지막 남은 구석자리까지 모두 차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음. 영리한 호모사피엔스와 안정적 온난습윤한 기후, 거기에 개량종으로 진화할 수 있는 동식물의 결합으로 인해 이런 과정은 세상에서 가장 불가피한 일이 됨. 기원전 7000년이 되자 유라시아 대륙 서단의 역동적이고 팽창하는 농경사회들은 지구상의 그 무엇과도 같지 않았고, 따라서 이 시점에서 서양과 나머지 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양이 나머지 세계와 다르긴 했지만 그 차이는 영구적이지 않았고 다음 몇천년에 걸쳐 사람들은 행운의 위도대에 위치한 예닐곱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농경을 발명하기 시작.
- 서양의 정의를 둘러싸고 학자들이 옥신각신한다고 해서 분석적 범주로서 서양을 거부할 필요는 없음. 서양은 단순히 지리학적 표현으로서, 유라시아 서단에 위치한 개량화 과정의 핵심부인 측면 구릉지대에서 유래한 사회들을 가리킴. 농경이 측면구릉지대를 예외적인 곳으로 만드는 기원전 11000년경 이전에, 다른 곳과 구별되는 지역으로서 서양을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 그 개념은 다른 농경 핵심부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기원전 8000년 이후에야 중요한 분석적 도구가 되기 시작함. 기원전 4000년이 되자 서양은 측면구릉지대에서 팽창하여 유럽 대부분을 포함했고 최근 500년간 서양의 식민주의자들은 그 범위를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시베리아로까지 확장. 당연히 동양은 기원전 7500년경에 중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개량화의 동단 핵심부에서 유래한 사회들을 의미함. 우리는 두 지역과 비길만한 신세계와 남아시아, 뉴기지, 아프리카 전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지 묻는 것은 실제로는 중국이나 멕시코, 인더스강 유역이나 사하라 동부, 페루나 뉴기니에서 유래한 사회가 아니라 왜 측면구릉지대에서 유래한 사회들이 이 행성을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 우리는 측면구릉지대 주민들이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월해서 농경을 발명했다고 가정해서는 안됨. 그들이 사는 곳에는 개량화가 가능한 (그리고 더 용이한) 동식물이 더 많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들이 제일먼저 그것들을 길들였음. 중국에서 동식물의 군집여건은 그보다는 덜 유리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유리한 편이었음. 중국에서 개량화는 측면구릉지대보다 아마 2000년 뒤에 시작된 듯함. 길들일 만한 것이라고는 소와 양밖에 없었던 사하라의 유목민은 500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사막에서는 작물을 재배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결코 농부가 되지 않았음. 뉴기니의 고지대인은 사하라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문제에 직면. 식물종이 협소하고 가축으로 길들일 만한 큰 동물은 전혀 없었던 것. 그들은 사하라 사람들보다 2000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결코 유목민이 되지 않았다. 사하라와 뉴기니에서 농경 핵심부는 측면구릉지대와 중국, 인더스강 유역, 오악사카와 페루에서와는 달리 도시와 문자 문명권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천연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서양에서 농경이 확산될 때처럼 동양에서도 약간의 장애물이 나타났음. 식물석은 기원전 4400년이 되면 벼가, 기원전 3600년이 되면 기장이 한국에 알려졌으며 일본에는 기원전 2600년에 기장이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음 2000년간 한국인과 일본인은 이 신기한 먹을거리를 대체로 무시. 북유럽인처럼 해안에 거주한 한국인과 일본인에게는 거대한 패총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넓고 영구적인 마을을 지탱해줄 수산자원이 풍부했음. 이 풍요로운 채집인은 정교한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농경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다. 기원전 5200년과 기원전 4200년 사이 1000년 동안 발트해의 수렵채집인들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 식민지 이주자들을 쫓아낼 만큼 수가 많았지만 (그만큼 결연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수가 아주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굶주림에 떠밀려 먹고 살기 위해 농경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음.
- 동양에서 정교한 무덤이 일찍이 눈에 띄는 것과 그보다 더 일찍이 서양에서 정교한 성소가 두드러지게 출현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러한 발전은 사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상인 것 같다. 무덤과 성소는 모두 농경이 발전하면서 사자로부터의 상속이 경제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던 시기에 조상에 대한 집착이 커진 현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 우리는 그 이유를 아마도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서양인과 동양인은 조상에게 감사하고 그들과 접촉하는 다른 방식을 들고 나왔음. 일부 서양인은 분명히 친지의 해골을 여기저기로 돌리고 건물을 소머리와 기둥으로 채우고 그 안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음. 동양인은 일반적으로 친지의 무덤에 옥을 깎은 동물 조각상을 같이 묻고 무덤을 숭배하며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베고 그들을 무덤속에 같이 던져넣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음. 사람들마다 처방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 마오쩌둥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모든 공산주의자는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840년대 이전에 어느 사회도 군사력을 전 지구상에 행사할 수는 없었고,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했음. 그러나 1840년대 이후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된 것같다.
- 서양의 핵심부는 기원전 11000년부터 약 서기 1400년까지 지리적으로 매우 안정적이었는데, 이탈리아를 포함한 로마제국이 핵심부를 서쪽으로 끌어당긴 기원전 250년부터 서기 250년까지 500년간을 제외하고 지중해 동쪽 끝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음. 그때를 제외하면 서양의 핵심부는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집트, 그리스에 의해 형성되는 삼각형 안에서 항상 자리잡고 있었음. 1400년 이후로 서양의 핵심부는 끊임없이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해서 처음에는 북부 이탈리아로, 그 다음에는 에스파냐와 프랑스로, 그리고 범위를 넓혀 영국과 벨기에, 네덜란드와 독일을 포괄하게 되었음. 1900년이 되면 대서양 양안에 걸쳐 있게 되고 2000년이 되면 북아메리카에 확고히 자리잡음. 동양에서는 핵심부는 1850년까지 최초의 황허강과 양쯔강 지대에 줄곧 머물렀음. 물론 핵심부의 무게중심은 기원전 4000년 이후 북쪽에 있는 황허강의 중앙평원을 향해 이동하다가 서기 500년부터 남쪽 양쯔강 유역으로 돌아오고, 다시 1400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북쪽으로 이동하게 됨. 그후 동양의 핵심부는 팽창해서 1900년이 되면 일본을, 2000년이 되면 중국 동남부를 포함하게 됨
- 4000년전 신전과 궁전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각자 필요한 것을 모두 재배하려고 했음. 관리들은 토지를 꽉 틀어쥐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재배할 작물을 지시. 좋은 경작지를 보유한 마을은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다른 마을은 야금업만을 전문적으로 할 수도 있었음. 관료들은 필요한 만큼 우선 단물을 빼먹고 일부는 위급상황을 대비해 비축한 뒤 나머지는 주민들에게 배급해주면서 생산물을 재분배할 수 있었음. 이런 과정이 기원전 3500년 우르크에서 시작되었고 1000년이 지나자 당연한 일이 됨. 국왕들은 이익이 되는 선물을 주고 받음. 금과 곡물이 풍부한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런 물품을 레바논 도시의 하급 통치자에게 주고 답례로 향기로운 삼나무를 선물받음. 이집트에서는 좋은 목재가 귀했기 때문. 적절한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은 어마어마한 실례였음. 선물교환은 경제만이 아니라 지위불안과 심리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재화와 사람, 사상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동시켰음. 이러한 교환 사슬의 양끝에 위치한 국왕과 중개상인은 부유해졌음. 오늘날 우리는 왕이나 독재자, 정치관료들이 사람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는 명령경제는 비효율적이라고 간주하지만 대부분의 초기문명은 명령경제에 의존했음. 어쩌면 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방법과 신뢰가 부족한 세계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임. 그러나 명령경제가 유일한 선택은 결코 아니며 국왕과 사제들의 사업과 더불어 신분이 미천한 상인들의 독자적 교역도 항시 번창했음. 이웃끼리는 빵과 치즈를 교환하거나 아이를 봐주는 대가로 변소를 파주는 식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음. 도시와 시골주민들은 장에서 거래했음. 땜장이들은 솥과 냄비를 당나귀에 싣고 장을 돌았음. 사막이나 산과 만나면서 들판이 점차 사라지는 왕국의 가장자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빵과 청동무기를 양치기나 몰이군의 우유와 치즈, 양털, 가축과 교환했음.
- 기원전 8세기 말 서양 핵심부 전역에서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곤경에 대한 해법으로 중앙집권화를 생각해냄. 오늘날의 수단땅에서 온 누비아인은 티블라트 필레세르가 아시리아의 왕좌를 차지하기도 전에 이집트를 다시 통일했고, 다음 30년에 걸쳐 티글라트 필레세르라면 알아봤을 개혁을 실행. 기원전 710년이 되자 자그마한 유대왕국의 히스기야 왕도 같은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 한명의 천재가 역사를 바꾼다기 보다는 절박한 사람들이 떠오른 발상은 모조리 시도해보는 가운데 결국 최상의 해법이 성공하는 식이었다. 중앙집권화로 가든지 목숨을 잃든지 둘 중 하나였다.
- 제2차 대전 말 자기 시대의 도적적 위기를 해명하려고 애쓰던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원전 500년 무렵의 시대를 축의 시대라 불렀는데 역사가 전환하는 축을 형성한 시기라는 의미.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출현했다고 거창하게 선언. 축의 시대에 쓰인 저작들(동양의 유교와 도교경전, 남아시아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 서양의 그리스철학 문헌과 구약성서)은 고전, 즉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규정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 되었음. 이것은 글을 전혀 남기지 않은 부처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위업이었음. 때로는 훨씬 후대 사람인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들의 말을 기록하거나 윤색하거나 완전히 지어내기도 했음. 창시자들이 진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흔히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격렬하게 반목한 그들의 후계자들은 협의회를 열고 파문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을 더 먼저 암흑의 세계로 내동댕이쳤음. 지금까지 현대 문헌학의 위대한 승리는, 이 후게자들이 갈라서고 싸우고 저주하고 서로 박해하는 틈틈이 성전을 그렇게나 여러차례 쓰고 또 고쳐썼기 때문에 교리의 원래 의미를 찾아 문헌을 낱낱이 걸러내는 작업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축의 문헌은 또한 매우 각양각색이다. 어떤 것은 모호한 경구를 모은 책이다. 어떤 것은 재치 넘치는 대화편이다. 또 어떤 것은 시가이거나 역사서, 격렬한 논쟁서다. 어떤 문헌은 이 모든 장르를 모조리 뒤섞었다. 여기에다가 마지막 시험대로, 이 고전들은 그들의 궁극적 주제인 초월적 영역을 규정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니르바나(문자 그대로는 꺼짐을 의미. 이승의 모든 정념이 촛불을 불어 끄듯 완전히 사라진 마음 상태를 가리킴)는 설명될 수 없다고 부처는 말한다. 설명하려는 시도조차도 당치 않다. 공자에게 인이란 (영어로 흔히 humaneness로 번역됨) 마찬가지로 언어를 초월한다. 우러러볼수록 높아지고 헤아리려할수록 그 뜻을 헤아리기 힘들다. 내 앞에 인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내 뒤에 있으며 ... 인에 대해서 말할 때 누가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칼론, 즉 선을 설명해달라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명을 단념해버렸다. 나는 선을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설명하려고 하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화를 들려주는 것뿐이다. 선이란 우리가 실제로 착각한느 그림자를 던지는 불꽃과 같다고, 예수도 똑같이 천국에 대해 빗대어 말했고 똑같이 우화를 즐겼다.
-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스승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에 대한 두가지 버전을 내놓았는데 '국가'는 어느 유학자한테도 좋을만큼 이상적이고 '법률'은 상앙을 흐뭇하게 할 만큼 권위주의적임.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적인 '윤리학'부터 냉정하고 분석적인 '정치학'까지 유사한 영역을 다룸.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 같은 공상가들이 신비주의 측면에서 도가 사상가들에 필적한 것처럼 소피스트로 알려진 기원전 5세기 철학자 가운데 일부는 상대주의 측면에서 도가 사상가들과 견줄만 했음.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는 묵자처럼 평민의 열렬한 옹호자였음. 오늘날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가 민주정을 발명한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가 합리적이고 역동적인 독특한 문화를 창조한 반면 고대 중국은 반계몽적이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장기고착이론을 언급했다. 이 이론 역시 틀렸다. 이런 생각은 동양과 서양, 남아시아 사상의 특정 요소를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내부적 다양성을 무시함. 동양의 사상도 얼마든지 서양의 사상만큼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현실적이고 냉소적일 수 있음. 서양의 사상도 동양의 사상만큼 신비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반계몽주의적일 수 있음. 축의 사상의 진정한 통일성은 다양성의 통일성에 있음 동양과 서양, 남아시아 사상의 그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관념과 논의, 대립의 폭은 각 지역마다 놀랄만큼 유사함. 축의 시대에 사상가들은 그들이 황허강 유역에 있든 갠지즈 평원에 있든 동지중해의 도시에 있든, 동일한 지형을 논쟁터전으로 삼았다.
- 축의 사상이 국가 재구조화의 원인이라기 보다 결과라는 사실에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동양 핵심부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호전적 국가 진나라를 보면 된다. 일종의 외교책략 실용서인 전국책의 익명 저자는 "진나라는 야만인들인 서융, 북적과 같은 풍습을 가졌다."고 말함.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의 심장을 가졌다. 탐욕스럽고 이익을 좇고 믿을 수 없으며 예나 의무, 덕행을 모른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숭상하는 모든 것의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나라는 동양 핵심부의 변두리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기원전 3세기에 핵심부 전역을 정복. 그와 다소 유사한 일이 유라시아 반대편 끝에서도 일어났는데, 서양 핵심부의 가장자리 출신인 로마인이(이들도 역시 수시로 늑대에 비유됨) 서양 핵심부를 전복하고 그들을 야만인이라 부른 철학자들을 노예로 삼음. 기원전 167년 로마에 인질로 끌려간 그리스의 교양인 폴리비오스는 이 모든 일을 동향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42권짜리 '역사'를 썼다. 그는 "어떻게 고작 53년만(기원전 220~167)에 로마인이 사람이 사는 세계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 일을 알기를 원치 않을만큼 편협하거나 게으른 사람이 있을까"라고 썼다.
- 기원전 480년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페르시아는 아마도 2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던 것 같지만 그 군사를 잃은 다음 국고를 다시 채우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음. 로마는 그러한 제약에 직면하지 않았음. 한 세기 동안의 전쟁은 로마에 이탈리아의 모든 인력을 제공했고 기원전 264년 원로원은 서부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 카르타고와의 거대한 투쟁에 돌입. 카르타고는 로마의 첫 함대를 폭풍우가 부는 곳으로 유인해 (수만명의 선원과 함께) 바다속에 수장시킴. 그러자 로마는 더 큰 함대를 건조. 이것도 2년 뒤 또다른 폭풍우에 바다 속에 가라앉아서 로마는 세번째 대함대를 파견했지만 그것도 역시 잃었다. 네번째 함대가 마침내 기원전 241년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카르타고가 막대한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카르타고는 회복하는 데 23년이 걸렸고, 그 결과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배후에서 쳤듬. 기원전 218년부터 216년까지 한니발은 10만의 로마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지만 로마는 그저 더 많은 군사를 일으켜 소모전으로 그를 서서히 약화시켰음. 그리고 진나라처럼 로마는 잔인성의 의미를 재정의.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관습은 그들이 마주친 모든 생명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전멸시켰고, .... 따라서 로마인에게 함락된 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지만 로마는 그저 더 많은 군사를 일으켜 소모전으로 그를 서서히 약화시킴. 그리고 진나라처럼 로마는 잔인성의 의미를 재정의.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관습은 그들이 마주친 모든 생명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전멸시켰고, .... 따라서 로마인에게 함락된 도시에서는 흔히 사람의 시체만이 아니라 토막난 개와 사지가 잘린 다른 동물의 사체도 볼 수 있다"고 적음. 결국 카르타고는 기원전 201년 항복했다. 원로원에는 전쟁이 협상보다 더 나아보였다. 딱 여름 한철을 쉰 뒤로 로마는 동부 지중해의 알렉산드로스 후계왕국들에 눈길을 돌렸고, 기원전 167년까지 이들을 모두 격파. 이후 한 세대에 걸친 게릴라들과의 험난한 전쟁은 로마군단을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 북부 이탈리아로 이끌었음. 로마는 서양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 기원전 200년이 되자 동양과 서양은 빙하기 이후 그 어느때보다 공통점이 많아짐. 둘다 수백만의 신민을 거느린 단일한 대제국의 지배를 받음. 두 지역 모두에서 축의 사상으로 교육받은 교양있고 세련된 지배층이 고도로 생산적인 농민들과 정교한 교역망을 이용한 물자공급에 의존해 대도시에서 생활했음. 그리고 양 핵심부에서 사회발전지수는 기원전 1000년보다 50%나 높았다. 광활한 중앙아시아와 인도양으로 분리된 동양과 서양은 사실상 서로 고립된 채 개별적이지만, 유사한 역사를 경험했고 빙하기말에 길들일 수 있는 동식물이 많이 분포했다는 지리적 이점에서 기인한 사회발전에서의 우위를 서양이 근소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만 주로 차이가 났음. 그러나 바로 지리가 사회발전 경로를 결정하는 한편, 사회발전 또한 지리의 의미를 변화시킴. 핵심부의 팽창은 동양과 서양을 섞어서 하나의 지구적인 이야기로 엮어내면서 양자의 거리를 점차 좁혀가고 있었다.
- 제국이 해체되는 방식은 무수히 많지만 (패전, 불만이 쌓인 총독, 통제할 수 없는 대귀족, 절망적인 농민, 무능력한 관료) 제국이 결속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 타협뿐이다. 한나라와 로마의 통치자들은 여기에 확실한 재능을 보여주었음. 고조가 기원전 202년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의 3분의 2를 반독립적인 왕국으로 지배하도록 다른 군웅 열명과 거래했기 때문. 하지만 너무 급히 움직여 그들을 위협하면,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왕을 너무 강하게 놔둘 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이 피해야만 하는 바로 그 내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음. 그러나 한나라의 황제들은 딱 들어맞는 속도로 움직였고, 기원전 100년까지 의외로 반란을 거의 겪지 않으면서 이 왕국들을 해체했다. 한나라의 황제들은 진시황만킄 과대망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물론 그들도 그런 쪽으로 능력을 뽐낼 기회가 있었음. 한 예로, 한 경제는 기원전 141년 자신만의 병마용과 함께 묻혔음. 비록 크기는 진시황릉의 3분의 1이었지만, 숫자는 6배 많았음. 그러나 위대한 정복자 한 무제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나라 황제들은 비록 속세와 초자연적 세계 사이의 중개자로서 상나라와 주나라의 왕이 맡았던 역할은 여전히 고수했지만 불멸이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은 꺼렸음. 그들은 이러한 노선을 매우 신중하게 조정했음. 권문세가와 잘 지내려면 (비록 귀족들의 부와 왕실의 성공을 결부하는 실용적 조치도 도움이 되었지만) 왕실의 신성에서 후퇴할 필요가 있었음. 유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이상화된 유교모델에 따라 위계질서가 확립된 우주안에 황제의 지위를 끼워맞출 줄 알아야 했음.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실용적 조치로 귀족가문 사이의 연줄이 아니라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을 관직 등용요건으로 삼음. 방대한 시골지역에서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와는 또 다른 것이 요구되었는데, 조상과 신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축의 시대 이전 군주의 지위 일부와 군역 축소, 잔인한 법률완화, 시의적절한 세금감면과 같은 좀더 현실 생활에 밀착된 조치를 결합하는 것이었음. 타협은 평화와 통합을 낳았고 평화와 통합은 동양 핵심부를 점차 단일한 실체로 엮어냈음. 동양 핵심부의 통치자들은 그곳을 중국이나 천하라고 불렀고, 이 시점에서 동양 핵심부를 연대 서양인이 진나라에 대한 잘못된 발음으로 차이나라 부르는 단일한 실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 거대한 문화적 차이들은 천하에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동양핵심부는 중국이 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도 유사한 타협안을 추구. 기원전 30년에 내전이 종결되었을 때 승리한 아우구스투스는 징병된 이들을 제대시키고 변경에 직업군인을 배치했음. 한나라의 황제들처럼 그도 군대가 그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중국의 통치자들이 군대를 죄수와 이방인으로 채우면서 어떤 의미에서 주류 사회 밖으로 밀어낸 데 반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친구보다 적을 더 가까이 두기로 했음. 군대를 사회의 중심제도로 만들었지만, 그들의 직접벅 통제 아래 있는 제도였음. 전쟁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평화의 기술로 주의를 돌림. 중국처럼 로마도 속국의 왕들을 흡수했고 귀족들의 번영과 왕국의 번영을 결부시킴. 황제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면서 귀족을 상대할 때는 동류가은데 으뜸일 뿐인 것처럼, 군대를 상대할때는 총사령관처럼, 그들의 통치자가 신령스럽기를 기대하는 제국의 각 지역을 상대할 때는 신처럼 행세. 그들은 '하루 동안 신'이라는 타협을 '죽으면 신'이라는 전략으로 대체. 이 이론에 따르면 황제는 살아있을 때는 그저 뛰어난 인물에 불과했다가 죽으면 신성의 품에 안기게 되어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같은 사람들은 그 논리가 우스꽝스럽다고 여겼음. 쓰러진 그는 죽어가면서 궁정인들에게 "내가 신이 되려나 보군"이라는 농담을 던졌다.
- 두가지 다소 유사한 힘이 동양과 서양의 경제성장 뒤에 버티고 있었는데, 하나는 경제를 위에서 견인하는 힘이고, 또 하나는 밑에서 경제를 추진하는 힘이다. 견인요인은 국가의 성장이었음. 로마와 한라아의 정복자들은 방대한 지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였고 세수 대부분을 변경을 따라 배치한 군대(로마 35만명, 중국은 적어도 20만명의 군인이 있었음)와 거대한 수도(로마 100만명, 장안 50만명)에 사용. 양쪽 모두 식량과 상품, 돈을 부유하고 세금을 내는 지방에서 굶주리고 세수를 집어삼키는 인구가 집중된 지역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음. 로마 교외의 유적지 몬테테스타초는 서양에서 이러한 견인요인의 규모를 예시함. 깨진 질그릇 조각이 46미터 높이로 쌓인 이 잡초 무성한 둔덕은 진시황의 봉분보다 덜 극적이지만 골수 고고학자들에게는 이집트 선망에 대한 이탈리아의 답변이다. 2500만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저장단지들이 3세기에 걸쳐 이곳에 버려짐. 대부분은 에스파냐 남부에서 로마로 올리브기름(750만리터 분량)을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로마의 도시민은 올리브기름을 음식에 넣거나 몸을 씻고 등잔을 밝힐 때 사용했음. 몬테테스타초위에 올라서면 각종 욕구에 굶주린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됨. 이것은 로마의 쓰레기로 만들어진 인공둔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두번째 힘, 경제를 위로 추진하는 힘은 기후변화라는 익숙한 힘이었다. 기원전 800년 이후 지구냉각화는 저가 국가를 대혼돈 속에 내던졌고 수세기에 걸친 팽창을 촉발. 기원전 200년이 되자 계속되는 궤도변화는 기후학자들이 로마온난기라고 부르는 시대를 알렸음. 이것은 겨울바람을 약화시켰지만 (지중해의 농부와 중국의 대하 유역의 농부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음) 부분적으로는 앞선 지구냉각화에 대한 대응으로 생성된 고가제국은 이제 동양과 서양사회에 기후변화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끈질긴 생명력도 안겨주었음. 힘든 시절은 다양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유인을 증가시켰음. 사람들은 물레방아와 석탄을 갖고 실험을 했고 상품을 이동시킴으로써 지역적 이점을 활용. 고가국가들은 주민들이 부유해질수록 세금도 더 많이 낼 수 있다는 매우 합리적인 가정아래 이런 활동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도로와 항구를 제공했고 군대와 법전은 수익의 안전성을 보장했음.
- 로마와 중국의 문헌은 2세기에 역병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인도의 문헌과 극명하게 대조된. 역병에 대한 언급 부재는 그저 수백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처럼 일상적 사건에 대한 교양계급의 관심부재를 반영할지도 모르지만, 역병이 실제로 인도를 비켜갔을 가능서잉 더 크며, 이는 구세계 교환이 인도양 교역로보다는 주로 비단길과 초원길을 따라 퍼졌다는 것을 뜻함. 그것은 확실히 전염병이 중국과 로마에서 시작된 정황, 즉 변경지대 병영에서 발생한 정황과도 일치. 미생물 교환의 메커니즘이 어떤 식이었든 끔찍한 전염병은 1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세대마다 재발했음. 서양에서 최악의 시기는 한동안 로마시에서 매일 5000명이 죽어나간 251~266년이다. 동양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는 310년과 322년 사이인데 이번에도 서북부에서 시작되었고 서북부 주민 거의 모두가 사망. 살아남은 의사의 묘사를 보면 이 역병은 홍역이나 천연두처럼 보임
- 중국과 달리 로마는 2세기 변경전쟁에서 승리. 만약 졌다면 로마도 한나라처름 180년대에 위기에 빠졌을 것. 그렇기는 해도 아우렐리우스의 승리는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며, 결국 군대만으로는 붕괴를 저지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 전염병의 무지막지한 사망률은 경제를 대혼란에 빠뜨림. 식량가격과 농업임금이 급등했고 덕분에 전염병은 살아남은 농부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지를 버리고 옥토에 집중할 수 있는 농부들에게는 이득을 가져옴. 그러나 농경이 축소되고 세금과 임대수입이 감소하자 더 큰 차원에서 경제지표는 폭락하기 시작. 지중해의 난파선수는 200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으며 얼음코어와 호수 퇴적물, 늪지의 오염도도 250년을 기점으로 같은 추세를 따랐음. 그때가 되자 모두가 쪼들리고 있었음. 200년 이후 거주지에서 소와 돼지, 양의 뼈는 점점 크기가 작아지고 드물어지며 생활 수준의 하락을 암시했고, 220년대가 되면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도 웅장한 건물과 비석을 갈수록 세우지 않게 되었다.
- 질병과 이주, 전쟁은 이전 제국을 통일된 전체로 묶었던 관리자와 상인, 돈의 연결망을 무너뜨림. 4세기 중국 북부와 5세기 서유럽의 새로운 왕은 그들이 차지한 웅장한 연회장에서 장발의 전사부족장들과 잔치를 즐기며 확고하게 저가 국가를 유지했다. 이들은 정복한 농민에게서 기꺼이 세금을 받았지만 봉급을 주어야 할 군대가 없으므로 이러한 세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부유했다. 그들은 확실이 힘이 셌다. 관료제를 운영하고 다루기 힘든 부하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세금을 뜯어내는 것은 가치가 있기보다도 수고스러워 보였다. 중국 북부와 서로마 제국의 오래되고 부유한 귀족 가문 다수가 귀중품을 챙겨 건강이나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지만 더 많은 수가 어쩌면 시도니우스처럼 코를 감싸쥔 채 구제국의 잔재 가운데 머무르며 그들의 새로운 주인과 할 수 있는 한 거래를 계속했음. 그들은 비단옷을 양모바지로, 고전시가를 사냥으로 맞바꾸며 새로운 현실에 순응했다. 그러한 현실 가운데 일부는 썩 좋은 것으로 드러남. 이전 시기 한나라와 로마제국 전역에 영지가 흩어져 있던 초대형 갑부귀족은 사라졌지만 비록 그들의 자산이 이제 한 왕국 안으로 한정되었다 할지라도 일부 4~5세기 지주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부자였음. 옛 로마와 중국 지배층은 정복자와 통혼했고 무너져가는 도시에서 시골의 거대한 장원으로 옮겨갔다. 저가 국가로의 완만한 이행이 4세기 화북과 5세기 서유럽에서 가속화함에 따라 왕은 이전에 농민이 징세인에게 넘겨주었던 잉여생산물을 귀족이 지대로 가져가는 것을 허용. 이러한 잉여생산물은 인구가 감소하고 농장주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최상의 토지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름. 시골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배워온 기술을 거의 잊어버리지 않았고 실제로 몇가지 새로운 기술을 추가하기도 했음. 양쯔강 유역의 배수기술과 나일강 유역의 관개기술은 300년 이후 향상되었음. 화북지방에는 소가 끄는 쟁기가 많아졌고 파종기와 발토판(보습 위에 비스듬히 댄 넓적한 쇠)을 댄 쟁기, 물레방아가 서유럽에 퍼짐. 그러나 귀족의 과시와 농미의 재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와 로마제국 아래서 강력하게 번영했던 관료, 상인, 관리자 계층의 지속적 감소는 유라시아 양단에서 거대했던 경제가 계속 안에서 붕괴하고 있음을 의미했음. 이 사람들은 흔히 부패하고 무능력했지만 실제로 편익을 제공했음. 상품을 운송함으로써 그들은 다양한 지역들의 이점을 포착했는데, 이러한 중개자들이 없어지자 경제는 갈수록 한 지방에 국한되고 자급자족의 방향으로 기울었음.
- 단일한 거대제국을 다시 수립함으로써 수나라는 한꺼번에 두가지 일을 함. 첫째로 북부에 기반한 강한 국가가 남부의 새로운 경제적 개척지대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둘째로 남부의 경제성장이 중국 전역에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 이것이 완벽히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음. 길이가 2400킬로에 달하고 폭이 40미터에 달하는 대운하라는 당대의 가장 기념비적 역사를 완성했을 때 수나라의 황제는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잇는 초고속도로를 염두에 두었음. 그러나 한 세대 안에 대운하는 남부의 쌀을 북부의 도시로 실어나르는 중국경제의 대동맥이 되었음. 7세기 학자들은 "타이항 산맥을 관통하는 운하를 파면서 수나라는 백성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초를 안겼다"고 불평하기를 좋아함. 그러나 그들도 "운하가 백성들에게 끝없는 혜택을 가져왔다. ... 그러한 혜택은 실로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음. 대운하는 고대 로마가 누린 것과 같은 수로를 중국에 마침내 제공함으로써 동양의 지리를 변화시켜 인간이 만들어낸 지중해와 같은 역할을 했음. 저렴한 남부의 쌀이 북부 도시의 인구폭발을 감당했음. 시인 백거이는 다시금 중국의 수도가 된 장안을 두고 "거대한 바둑판 같은 수백, 수천채의 집"이 들어섰다고 썼음. 장안은 "이랑을 따라 양배추가 줄줄이 심어진 광대한 밭처럼" 80제곱킬로에 걸쳐 뻗어있었음. 100만명의 주민이 뉴욕 5번가보다 다섯배나 넓고 양옆으로 가로수가 늘어선 대로에 북적거렸음. 장안만 독보적인 것이 아니었음. 뤄양의 규모는 장안의 절반이었고 다른 십수개의 도시도 수십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 그러나 중국의 회복은 양날의 검과 같았음. 북부의 국가권력과 남부 개척지대에서 온 쌀의 결합은 상반된 결과를 낳음. 한편으로는 급성장하는 관료제가 농민과 상인을 부유하게 살찌우는 도시의 시장을 조직하고 치안을 유지해 사회발전지수를 끌어올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행정이 상업활동을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규제하면서 농민과 상인을 제약해 발전에 제동을 걸었음. 관리들은 가격을 고정시켰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기를 지정했으며 심지어 상인들의 생활방식까지 규제.
- 우리 세기의 정치 전문가 다수는 18세기 기번의 비판가들처럼 이슬람을 서양 문명에 반하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쉽게 상정함.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 700년이 되자 이슬람 세계는 이럭저럭 서양 핵심부였고 기독교권은 그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주변부일 뿐이었음. 아랍인은 이전 로마제국만큼 서양 핵심부의 상당부분을 느슨하게 한 국가로 통합. 아랍인의 정복은 수 문제의 동양정복보다 오래 걸렸지만 아랍군대는 매우 작았고 사람들의 저항도 매우 저항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복한 땅을 거의 초토화하지 않았음. 그래서 8세기에 서양의 사회발전지수는 마침내 하락을 멈추었다.
- 7세기 아랍의 정복은 로마세계와 페르시아를 가르던 옛 경계선을 지웠고, 무슬름 핵심부에 일종의 급성장을 촉발. 칼리프는 이라크와 이집트에서 관개농업을 확대했고 여행자들은 인더스강에서 대서양으로 작물과 기술을 이전. 쌀, 설탕, 면화가 무슬림 수중의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갔고 작물을 돌려심어서 농부들은 밭에서 두세 차례 수확을 할 수 있었음. 시칠리아를 식민화한 무슬림은 파스타와 아이스크림 같은 고전적 서양음식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와 페르시아 간옛 장벽을 극복함으로써 얻은 이득은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을 나누는 새로운 장벽에서 발생하는 손실로 갈수록 상쇄되었음. 남부와 동부 지중해가 갈수록 탄탄하게 이슬람 사회가 되어가고(750년까지도 아랍의 지배권에서 무슬림은 10명중 1명이 될까말까 했지만 950년이 되자 이제 10명중 9명에 가까웠다) 아랍어가 공용어가 되어갈수록 기독교권과의 교류는 쇠퇴
- 실제 배만큼 중요한 것은 화물을 사서 창고에 보관하고 돈을 대부해주며 배를 재빨리 회전시키는 운송 중개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에는 현금이 필요했고 경제가 성장하자 정부는 충분한 동전을 찍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새로운 구리 공급원을 찾으려는 영웅적인 노력 덕분에 통화공급량은 983년 3억개에서 1007년 18.3억개까지 증가했으나 여전히 수요에 미치지 못함
- 9세기 차 무역이 성행하고 사업에 대한 국가의 감독이 느슨해졌을 때 쓰촨의 거래상들은 장안에 사무소를 차리기 시작. 그곳에서 상인들은 차를 팔아 받은 동전을 날아다니는 돈, 즉 비전이라는 지불증서와 교환했고, 쓰촨으로 오면 회사의 본사에서 이 어음을 다시 현금으로 바꿨다. 비전 한뭉치가 구리동전 40자루에 해당한다고 보면 이점은 명백했고 상인들은 곧 이 신용증사를 그 자체로 화폐로 사용하게 됨. 그 가치가 금속 내용물보다는 발행자의 신용에 의존하는 명목화폐, 즉 신용화폐를 발명한 셈이었다. 1024년 국가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다음 단계를 밟아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고 곧 동전보다 지폐를 더 많이 발행하게 됨. 지폐와 어음이 시골에 침투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더 쉬워지자 더 많은 농민이 땅에서 잘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 재배해 판 뒤 그 돈으로 쉽게 재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구입했다.
- 호모사피엔스는 의식주와 연료를 얻고자 언제나 동식물을 착취해 살아왔음.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은 훨씬 더 효율적인 기생동물이 되었음. 한 예로 1세기에 한나라와 로마 제국 사람들은 그보다 1만 4000년 전 빙하기 선조들이 힘들게 모은 것보다 7~8배 더 많은 1인당 에너지를 소비. 한나라와 로마제국 사람들은 또한 동식물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배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바람과 파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제분기에 수력을 응용했음. 그러나 1013년 추위에 떨다 폭동을 일으킨 사이펑 주민들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다른 유기체에 의지해 살았고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보다 에너지의 대사슬에서 약간 더 높은 단계에 서 있을 뿐이었음. 몇십년 안에 그런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카이펑의 제철업자들은 저도 모르게 혁명가로 변신. 1000년 전 한나라 때 일부 중국인이 석탄과 가스에 손을 댔지만 이 에너지원은 분명한 용도가 거의 없었음. 게걸스러운 대장간이 따뜻한 가정집과 연료를 놓고 경쟁하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산업가들은 고대 유기체 경제와 화석연료의 신세계 사이의 문을 열심히 밀기 시작. 카이펑은 중국 최대 석탄 매장지 두 곳과 가까이 있었고, 황허에 접근하기도 쉬었으므로 원광을 녹이기 위해 숯대신 석탄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는 천재가 따로 필요 없었다. 그저 탐욕과 필사적 노력, 시행착오만 있으면 되었다. 석탄을 찾아내 채굴하고 운반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력도 필요했는데, 가정집이 아니라 기업가가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어느 이집트 군대가 마침내 1260년 갈릴리 해안에서 몽골족의 발길을 멈춰 세웠지만, 그 무렵이면 그들의 미친듯한 파괴와 약탈은 이미 2세기에 걸친 이란, 이라크, 시리아 옛 무슬림 심장부의 경제적 쇠퇴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서양에 미친 몽골족의 가장 큰 영향은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이 카이로를 약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이로는 서양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로 남았고, 그들이 서유럽을 침공하지 않았기에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서양 최대의 상업중심지로 남을 수 있었다. 옛 무슬림 핵심부에서 사회발전지수는 추락했지만 이집트와 이탈리아에서는 꾸준히 상승해서 1270년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향해 출발할 때가 되자 서양 핵심부는 확고하게, 몽골족이 건드리지 않고 살려준 지중해 지역으로 이동했음.
- 아랍인은 비단길가 인도양 교역로의 서쪽 구간을 지배하기에 편리한 곳에 위치했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동맥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유럽인은 여러세기 동안 대부분 집에 머무르면서 베네치아인이 아랍인의 식탁에서 집어다주는 부스러기에 만족해야 했음. 그러나 십자군 운동과 몽골의 정복은 동방을 향한 유럽인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면서 정치적 지형을 바꾸기 시작. 게으름과 두려움을 누르기 시작하면서 탐욕은 무역상들(특히 베네치아인)을 홍해를 따라 인도양으로 이끌거나 마르코폴로 같은 이들을 초원길로 이끌었음. 서유럽 국가들이 흑사병 이후 고가전략으로 옮겨가면서 전쟁이 심화되고 있을 때 정치적 지리는 경제적 유인에 힘을 보탰다. 대서양 변방에 위치한 통치자들은 더 많은 대포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반면 돈을 벌 수 있는 일반적 수단들(주민에게 과세하는 관료제를 확대하고 유대인을 갈취하고 이웃나라를 약탈하는 등)은 바닥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조세수입원을 제공할 수 있따면 누구든, 심지어 항구에서 어슬렁거리는 수상쩍고 탐욕스런 인물이 하는 이야기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16세기는 동양 문화와 서양문화의 황금기였다. 1590년대에 런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헨리5세, 줄리어스 시저, 햄릿 같은 새로운 연극을 보거나 존 폭스의 유혈이 낭자한 순교자처럼 신실한 사람들이 말뚝에 묶인 모습을 그린 목판화가 새로운 인쇄기로 수천 권씩 찍혀 나온 저렴한 종교 책자를 읽을 수 있었음. 유라시아 반대편 끝에는 베이징 사람들이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이가 관람한 전통 가극인 20시간짜리 모란정을 감상하거나 서유기를 읽을 수 있었음. 그러나 번쩍거리는 겉모습 이면의 모든 것이 그리 좋지많은 않았다. 흑사병으로 서양과 동양 핵심부에서는 3분의 1이나 그 이상의 인구가 사망했으며, 1350년 이후로도 흑사병은 한 세기 동안 주기적으로 재발하면서 인구 수준을 계속 낮은 상태로 유지했다. 그러나 1450년과 1600년 사이 배고픈 입의 숫자는 두 지역에서 대략 두배가 되었다. "인구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크게 불어났다."고 한 중국인 학자는 1608년 기록. 멀리 프랑스 사정도 마찬가지였음. 사람들은 속담에서 말하는 대로 헛간의 쥐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두려움은 언제나 사회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자식을 많이 낳자 땅은 잘게 분할되었고 상속에서 배제된 이들이 생겨 이전보다 갈등이 증폭됨. 농부들은 잡초를 더 자주뽑고 거름을 더 자주 주었으며 물길을 막고 우물을 파거나 더 많은 옷을 지어 팔려고 애썼다. 일부는 한계지에 정착해 그들의 부모라면 결코 관심을 두지 않았을 산비탈과 돌과 모래투성이 땅에서 근근이 연명. 다른 이들은 핵심부를 버리고 인구밀도가 낮은 야생의 변경지대에 정착. 그러나 그들이 신세계에서 온 기적의 작물들 심었을 때조차도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양은 충분치 않았음. 노동력은 부족하고 토지는 풍부했던 15세기의 기억은 갈수록 흐릿해져 갔다. 소고기와 맥주, 돼지고기아 포도주가 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더 좋았따고 1609년 난징 근처 어느 현감은 말했다. "모든 가구마다 살 집과 경작할 땅, 땔감을 구할 야산, 채소를 기를 텃밭이 있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궁핍하다. ... 탐욕은 끝이 없으니 살이 뼈를 해한다." 1550년경 어느 독일 여행자는 그보다 더 직설적이다. "옛날에는 농가에서 먹는 게 달랐다. 그때는 고기와 음식이 풍성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진정으로 변했다. 가장 잘사는 농민의 음식도 옛날의 날품팔이와 하인이 먹던 것보다 질이 떨어진다."
- 어떤 측면에서 16세기 서양 핵심부와 동양 핵심부는 다소 비슷해 보였다. 각각 거대한 제국이 전통적 중심을 지배했고(동양은 황허강, 양쯔강 유역을 명나라가, 서양은 동부 지중해를 오스만 제국이 지배) 경제적으로 활동적인 작은 국가들은 제국의 가장자리에서 번영 (동양에서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서양에서는 서유럽). 그러나 유사성은 거기서 끝이었다. 명나라에서 황제와 관료 사이 기싸움과 대조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나 관료들은 팽창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약탈 이후 주민수가 5만명으로 감소했으나 다시금 대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되살아났다. 1600년이 되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40만명의 도시민이 살았으며 그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지중해 전역의 산물이 필요했음.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원처럼 튀르크의 술탄은 정복만이 이 모든 저녁식사를 확보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판단. 술탄들은 한쪽 발은 서양 핵심부에, 다른 한쪽 발은 스텝지대에 걸쳐 둔 채 복잡한 춤사위를 펼침. 이것이 그들의 성공비결이었다. 1527년 술탄 술레이만은 자신의 군대 규모를 대부분 전통적인 유목민 유형의 귀족출신 궁수인 기병 7.5만명과 머스킷 보병으로 훈련받고 대포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도 노예로 구성된 에니체리 부대 2.8만명으로 추정. 기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술탄들은 정복한 땅을 봉토로 나눠서 하사. 예니체리를 위해서는(급료지불) 도요토미도 감명시킬 만한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 현금이 원활하게 흐르게 했음. 이 모든 일에는 뛰어난 경영수완이 필요했고 꾸준하게 확대되는 관료제는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를 끌어들이는 한편 술탄은 이해관계 집단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도록 노련하게 처신했음. 15세기에 술탄은 흔히 예니체리의 편을 들었으며 정부를 중앙집권화하고 국제적 문화를 후원. 16세기에는 귀족편으로 기울어서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약탈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필요했고 보통은 이겼다.
- 도요토미와 펠리페가 죽은 1598년 이후 수십년 안에 발전의 역설이 다시금 작동할 조짐이 확연했다. 과거에도 흔히 그랬듯이 날씨가 커져가는 위기에 일조. 1300년 이래로 서늘한 기후는 이제 더 추워졌다. 어떤 기후학자들은 기후변화가 1600년 페루의 화산폭발 탓이라고 여기지만 다른 학자들은 태양 흑점 활동의 축소 탓으로 추측하기도 함. 여하튼 대부분은 1645~1715년 시기가 구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혹독하게 추웠다는 데 동의. 런던부터 광저우까지, 일기나 공식 문헌에는 눈과 얼음, 서늘한 여름에 대한 불평이 남아 있다. 추운 도시민과 땅에 굶주린 경작자들은 삼림이든 습지든 야생동물이든 식민지 원주민이든 간에 무방비 상태로 남겨진 이들의 17세기를 재앙으로 만드는 데 함께 했음. 때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정부는 이러한 희생자들을 보호하는 입법을 하기도 했지만 핵심부의 변경을 바깥으로 밀어젖히고 있는 식민주의자들은 그런 조치들에 좀처럼 주의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이른바 판잣집 사람들이 산과 숲을 침범하여 고구마와 옥수수 농사로 취약한 생태게를 초토화했음. 그들은 묘족같은 토착민 집단을 아사직전으로 몰아갔지만 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은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평정. 일본 북부의 아이누인과 잉글랜드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인 아일랜드인, 북미 동부 원주민들도 똑같은 암울한 이야기를 전함
- 기후변화는 고삐 풀린 묵시록의 기수 가운데 첫번째일 뿐이었다. 자원에 대한 증가하는 압력은 체제들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면서 국가실패를 야기. 군주들은 비용을 삭감하면 관리와 병사들의 동조를 잃었고 납세자들을 더 많이 쥐어짜면 상인과 농부들의 지지를 잃었다. 빈곤층의 폭력적 항의는 국가가 발명된 이후로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삶의 현실이었지만 재산을 박탈당한 젠트리, 파산한 상인들,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 그리고 실패한 관리들이 빈곤층에 합세하면서 더 격렬해졌다. 시대가 험난해질수록 서양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대표자라고 더 확고하게 주장함으로써 반란의 비용을 증가시키려고 애썼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종교학자들의 환심을 구했고 서유럽의 지식인들은 절대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국왕의 권위는 오로지 신이 내린 것이며 교회, 인민의지에 구속받을 수 없다고 주장. 프랑스 구호에 따르자면 '하나의 국왕,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이었다. 이 일괄거래에서 어느 일부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선하고 순수한 모든 것에 도전하는 것이었따. 그러나 불만을 품은 다수의 신민은 바로 그렇게 할 태세였다. 1622년 튀르크의 술탄이자 칼리프로서 무함마드의 계승자이자 지상에서 신의 대표인 오스만 2세는 갈수록 돈을 많이 먹는 에니체리 부대를 감축하려고 했음. 그들은 술탄을 궁전에서 끌어내 목을 졸라 죽이고 그의 성스러운 신체를 절단하는 것으로 대응. 오스만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은 강경파 성직자들과 손을 잡고 심지어 커피를 금하고 도락을 목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사형을 도입함으로써 상황을 회복하려 했지만 1640년대 술탄의 정통성은 완전히 땅에 떨어진 뒤였다. 이제 성직자들과 한편이 된 예니체리 부대는 광인 술탄 이브라힘을 처형했고 50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됨
- 1640년대는 거의 모든 곳의 국왕들에게 악몽의 시절이었음. 반절대주의 반란이 프랑스를 마비시켰고 잉글랜드에서는 의회가 강압적인 국왕과 전쟁에 들어가 그의 목을 쳤다. 그 사건은 램프의 요정을 밖으로 나오게 한 꼴이었따. 신성한 국왕이 재판을 받고 처형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할 게 있을까? 고대 아테네 이후로 어쩌면 최초로 민주주의적 사고가 비등했다. 의회군의 한 대령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도 가장 힘 있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갈 삶이 있으며, 정부 아래서 살아가려는 사람은 누구든 먼저 그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 그 정부 아래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00년 동안 스텝지대는 거대한 농경제국들의 통제를 대체로 벗어난 동서양간의 고속도로였음. 이주민과 미생물, 사상과 발명품이 이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동양과 서양을 발전과 붕괴의 연결된 리듬속에 하나로 묶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나 한 무제, 당 태종 같은 정복왕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서 드물게 스텝지대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했지만,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보통은 농경제국이 유목민이 요구하는 대로 뭐든 내어준 뒤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대포는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유목민은 수시로 화기를 사용했고 대포를 중국에서 서양으로 전한 이들도 몽골족일 것이다. 그러나 대포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제국은 점차 조직을 갖추어 갔고 수만명의 병사를 모집해 머스킷 총과 대포로 무장시키고 연속 일제사격을 훈련시킬 능력이 있는 장군들은 유목민 기병들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스텝지대 기마궁수들은 1500년 경에 여전히 농경제국의 보병들을 수시로 격퇴했다. 1600년이 되자 이따금 격퇴했다. 그러나 1700년이 되자 그런 경우는 거의 들어볼 수 없었다. 러시아인이 주도권을 잡았다. 1550년대 이반 뇌제의 대포는 볼가 부지에서 허약한 몽골의 한국들을 싹 몰아냈고 다음 100년에 걸쳐 러시아인과 튀르크인, 폴란드인은 건조한 우크라이나 스텝지대를 수비대와 해자, 말뚝 울타리로 꾸준히 에워쌌다.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마을 주민들은 처음에는 유목민의 이동을 일정한 경로로 돌렸고, 마침내는 그들의 길목을 완전히 차단했다. 네르친스크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그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스텝지대를 따라 이동할 수 없다는 데 합의. 이제 모두가 농경제국의 신민이 되리라.
- A지역에서 B지역으로 단순히 상품을 운송하는 대신 무역상들은 서유럽인이 제조한 상품(직물, 대포 등)을 서아프리카로 가져가서 이윤을 남기고 노예로 교환할 수 있었음. 그다음 그들은 카리브해로 노예로 싣고 가서 이번에도 이윤을 남기고 설탕으로 교환할 수 있었음. 최종적으로 그들은 설탕을 유럽으로 가져와 거기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판 다음 새로운 탁송 완제품을 구입해 다시 아프리카로 출발. 반대로 북미에 정착한 유럽인은 럼을 아프리카로 가져와서 노예와 교환. 그 다음 노예를 카리브해로 실어와서 당밀로 교환하고, 당밀을 북미로 가져와 다시 럼을 더 많이 생산함. 어떤 이들은 북미에서 카리브해로 식량을 실어온 다음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그곳의 땅은 노예를 먹일 식량을 재배하는 데 쓰기에는 너무 소중했다) 설탕을 구입해 서유럽으로 가져가고, 최종적으로 북미에 완제품을 싣고 돌아왔다.
- 16세기 유럽에서 막강한 제국인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가장 발달해 있었고, 일반적으로 상인들은 적당히 위협하면 요구한 대로 돈을 토해내는 현금인출기처럼, 식민지는 약탈의 대상으로 취급했음.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른 유럽 라이벌들을 강압해 단일한 유럽 대륙제국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면, 대서양 경제는 분명히 17세기 넘어서까지 이런 식으로 지속되었을 것임. 그러나 그 대신에 국왕의 권력이 더 약한,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서북부 변두리에서 온 상인들은 상황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갔음. 그들 가운데 가장 앞서나간 이들은 네덜란드인이었다. 14세기 네덜란드는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자주 침수되는 주변부에 불과. 이론적으로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할 의무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자기일에 바쁜 먼 곳의 지배자들은 멀리 떨어진 서북부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곳의 통치를 현지 도시의 유력자들에게 맡겼음.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네덜란드 도시들은 혁신을 할 수 밖에 없었음. 나무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토탄을 에너지원으로 발전시켰고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북해에서 조업을 했다. 그렇게 잡은 것을 발트해 인근에서 곡물과 교환. 간섭하는 왕과 귀족이 없었기에 부유한 도시민들은 시정을 사업에 친화적으로 운영. 건전한 자금과 더 건전한 정책들은 더 많은 돈을 끌어당겼고 16세기 후반이 되자 이전에 후진적이었던 네덜란드는 유럽의 금융 허브가 됨. 저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는 네덜란드는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뼈 빠지는 소모전에 계속 돈을 댈 수 있었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에스파냐의 국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 두려움은 흔히 게으름을 이기기에 1450년 이후 인구가 성장하자 유라시아 전역에서 사람들은 지위를 잃거나 굶주리거나 심지어 아사하지 않기 위해 행동에 뛰어들어다. 그러나 1600년 이후 대서양 경제의 생태학적 다양성, 저렴한 운송, 열린시장이 서북부 유럽의 보통 사람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범위안에 소소한 사치품의 세계를 열어주면서 탐욕 역시 게으름을 이기기 시작. 18세기가 되면 호주머니에 얼마간 여분의 돈이 있는 사람은 그저 빵 한덩이를 더 사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었음. 차, 커피, 담배, 설탕 같은 수입품이나 우산, 사기 파이프, 신문 같이 국내에서 생산된 놀라운 품목을 살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풍성한 선물을 만들어낸 바로 그 대서양 경제는 그런 구매자에게 필요한 돈을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만들어냈음. 무역상들은 모자나 대표, 담요 등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로 실어갈 수 있는 것은 기꺼이 구입하려고 했고, 그에 따라 제조업자들은 그러한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고 했기 때문. 일부 농부는 가족에게 방적과 방직을 시켰음. 다른 농부들은 작업장에 들어갔다. 일부는 농사를 아예 그만두었다. 더 집약적으로 거름을 주고 가축을 사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 타당성이 있을 만큼 안정적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세부적 차이는 있지만 서북부 유럽인은 점점 더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고 더 오랜 시간 일하게 되었음. 그리고 그들이 더 많이 일할수록 더 많은 설탕과 차, 신문을 살 수 있었음. 더 많은 노예가 대서양 너머로 끌려왔고, 플랜테이션 농장이 들어서기 위해 더 넓은 땅이 개간되었으며, 더 많은 공장과 상점이 열렸다는 소리다. 판매량이 증가했고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었으며, 가격이 하락하면서 이 상품의 세계가 더 많은 유럽인 앞에 열림. 좋든 나쁘든 1750년이 되자 세계 최초의 소비자 문화가 북대서양 연안에 생겨났고 수백만 명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가죽신발과 회중시계로 단장하지 않으면 감히 커피숍에 얼굴을 내밀지 않을 남자들은 수십일의 종교상 휴일로 세지 않거나 일요일의 숙취를 잠으로 해소하기 위해 쉬는 성 월요일 같은 오랜 전통을 지키지 않게 되었다.
- 각 시대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고를 얻는다. 대양 너머에 새로운 변경을 창출한 서유럽인은 공간과 시간, 돈에 대한 표준화된 정밀한 측정방법이 필요했고, 바늘 두개짜리 시계가 당연해진 시점에 자연 자체가 기계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았다면 유럽인은 굉장히 둔한 사람들일 거이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지배계급이 별스럽고 예측불가능한 사상가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만큼 과학적 사고에서 충분한 이점을 보지 못하려면 그보다 더 둔해야 했으리라. 앞선 축의 사상이 일으킨 1~2차 물결 그리고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원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상승하는 서양의 사회발전지수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결과였다.
- 서유럽인은 로마인과 송나라 사람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했는데, 세가지 변했기 때문. 첫째, 기술이 계속 축적되었다. 일부 기술은 사회발전이 붕괴할 때마다 유실되었지만 대부분은 보존되었고 다음 세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기술이 추가되었음. 그러므로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원칙은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1세기와 18세기 사이에 단단한 천장을 압박했던 사회들은 각각 그 이전의 사회와는 달랐다. 각자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둘째, 대체로 기술이 누적되었기 때문에 농경제국은 이제 효과적인 대포를 갖게 되었고 러시아와 청나라는 스텝지대 초원길을 닫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7세기에 사회발전이 단단한 천장을 압박했을 때 묵시록의 다섯번째 기수(이주)는 나타나지 않았음. 힘든 싸움이었지만 핵심부들은 다른 네 기수에 대처할 수 있었고 붕괴를 피했다. 이런 변화가 없었다면 18세기는 3세기나 13세기만큼 재앙으로 넘쳐났을지도 모른다. 셋째, 다시금 대체로 기술이 축적되었기 때문에 배는 이제 원하는 대로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서유럽인은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대서양 경제를 창출. 로마인이나 송나라 사람들은 그러한 방대한 상업적 성장의 엔진을 건설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따라서 어느 쪽도 17세기와 18세기 서유럽인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문제들에 직면할 필요가 없었다. 뉴턴과 와트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이 아마도 키케로와 심괄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보다 더 영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다른 것들을 사고했을 뿐이다. 18세기 서유럽은 단단한 천장을 일소하기에 이전의 다른 어느 사회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었음. 서유럽 안에서도 (왕권이 미약하고 상인들이 더 자유로운) 서북부가 남서부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었음. 그리고 그 서북부 안에서도 영국이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음. 1770년이 되자 영국은 어느 곳보다도 더 높은 임금과 더 많은 석탄, 더 탄탄한 재정, 그리고 분명히 더 개방적인 제도를 보유했음.
- 영화와 소설들은 흔히 빅토리아 시대를 촛불과 따뜻한 난롯가, 제 분수를 아는 사람들의 아늑한 세상으로 그리지만 당대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를 매우 다르게 경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서양을 자신이 주문으로 불러들인 지하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마법사 같다고 생각.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거기에 환호했음. 보수주의자들은 반발했다. 교회는 사회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과학에 반대했다. 지주 귀족층은 그들 계층의 특권을 옹호했다. 반유대주의와 노예제가 때로 새로운 가면을 쓰고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대립은 폭력적일 수도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에야 가까스로 자신들의 사상을 공산당 선언에 종합할 수 있었는데, 그때 혁명이 유럽의 거의 모든 수도를 뒤흔들고 있었고 종말의 시간이 가까워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인류 역사상 핵심부의 팽창은 흔히 변두리의 어느 부분이 강대국에 대한 저항을 주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격렬한 주변부 전쟁을 촉발. 예를 들어 기원전 1000년대 아테네와 스파르타, 마케도이나는 한세기 반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변두리에서 전쟁을 벌임. 그리고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황허강 유역의 핵심부가 팽창하면서 중국 남부에서 똑같은 일을 했다. 19세기에 그 과정은 동양이 서양의 주변부가 되면서 되풀이되었다.
- 우리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실험과 시도를 거듭하고 그들의 삶을 더 편하거나 풍족하게 하거나 상황이 변했을 때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았고, 그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사회발전은 증가한다. 그러나 사회발전에서 커다란 변혁들 (농경의 기원, 도시와 국가의 부상, 다종다양한 제국의 생성, 산업혁명) 은 단순한 실험과 시도에 불과하지 않았다. 각각은 절박한 수단을 요구하는 절박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빙하기말 수렵채집인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그들을 지탱하는 자원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켰다. 식량을 구하려는 추가적인 노력에 따라 채집인은 자신들이 의존하는 동식물 일부를 변형, 가축과 작물로 품종을 개량시켰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농부로 변신했다. 일부 농부는 무척 성공적으로 변신해서 다시금 자원에 새로운 압력을 가했고 생존을 위해(특히 기후가 그들에게 불리해졌을 때) 마을을 도시와 국가로 변신시켰다. 일부 도시와 국가는 상당히 성공했고 그들 역시 자원 문제에 부닥쳐 이번에는 제국으로 (처음에는 육지에 바탕을 둔, 나중에는 스텝지대와 해양에 바탕을 둔) 변신했다. 이 제국들 가운데 일부는 자원에 새로운 압력을 가하고 산업경제로 변신하여 동일한 순환을 반복했다. 역사는 산넘어 산의 연속이 아니다. 사실, 역사는 늘 똑같은 이야기의 끝없는 반복이다. 언제나 한층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는 세계에 적응해가는 거대하고 간단없는 단일한 과정이다. 이책에서 이 과정을 발전의 역설이라 부른다. 증가하는 사회발전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바로 그 힘들을 생성한다. 사람들은 매일 그러한 역설에 직면하고 해소하지만 한번씩 역설은 진정으로 변혁적인 전환에만 굴복하는 단단한 천장을 생성한다. 그러한 전환을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는 커녕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좀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사회가 이러한 천장에 접근하면 발전과 붕괴 사이에 일종의 경주가 시작된다. 사회들이 천장에 부닥쳤을 때 사회발전이 몇 세기간 변화하지 않은 채 그냥 제자리에 머무는 경우란 좀처럼 (어쩌면 결코) 없다. 그보다는 사회가 이 단단한 천장을 어떻게 부숴야 할지 방법을 짜내지 못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묵시록의 다섯 기수라고 부른 것들 일부느 전부가 풀려나오고 기아와 질명, 이주, 국가붕괴 (특히 기후변화 시기와 일치하면)가 사회발전을 때로는 수세기동안 뜰어내려 암흑기에 접어든다.
- 2차대전이 끝나고 5억명의 여성은 그들의 어머니보다 더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애를 더 많이 낳기로 결정. 인구는 급증했다. 30년이 지나 그들의 달 10억명은 그 반대로 하기로 결정하고 인구 성장 속도는 느려졌다. 이런 선택들은 집단적으로 현대사의 경로를 바꿨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개인의 일시적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한 세기 반 전에 핵심을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역사를 만들어가지는 못한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상황 아래 역사를 만들지는 못한다."고 주장. 아이를 더 많이 낳는 쪽으로 그리고 나중엔 덜 낳는 쪽으로 결정할 만한 이유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20세기 여성은 흔히 그 문제에서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느꼈음. 1만년 전 농경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나 5000년 전 도시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나 200년 전 공장에서 직업을 얻기로 결정한 사람들처럼 진짜 대안은 없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 문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머릿속 목소리보다는 오히려 여러 선택지를 두고 논쟁하는 주민회의에 가깝다. 각 시대는 지리와 사회발전이 강요하는 종류의 문제들에 좌우되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 이것은 왜 동양과 서양의 역사들이 지난 5000년 동안 전반적으로 유사했는지를 설명해줌. 서양에서는 기원전 3500년경, 동양에서는 기원전 2000년 이후, 최초로 등장한 양 핵심부 국가들은 신성한 왕권의 성격과 한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음. 국가들이 관료제를 더 갖춰가자 서양에서는 기원전 750년 이후에, 동양에서는 기원전 500년 이후에, 이러한 논의들은 개인적 초월의 성격과 개인적 초월이 세속권력과 맺는 관계를 다루는 제1차 축의 사상으로 대체됨. 서기 200년 무렵이 되자 거대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해체되었고 이런 질문들은 다시, 제도화된 조직을 갖춘 교회가 혼란스럽고 위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신도들을 구원할 수 있을지를 논의하는 제2차 축의 사상에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사회발전이 회복되었을 때 중국에서는 1000년이 되자, 이탈리아에서는 1400년이 되자 르네상스라는 문제 (어떻게 하면 실망스러운 가까운 과거를 건너뛰고 제1차 축의 사상 시대의 잃어버린 지혜들을 되찾을 수 있을지를 논의하는)가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유사하게 발전해왔는데, 사회발전이 계속 증가하는 경로는 결국 하나뿐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4점의 천장을 돌파하기 위해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둘다 국가를 중앙집권화했고,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지식인들을 제1차 축의 사상으로 이끌었다. 이 국가들의 쇠퇴는 제2차 축의 사상을 가져왔다. 축의 사상의 부흥은 거의 필연적으로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각각의 커다란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 모든 시대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개별사항들로부터 추상화하는 사람과 복잡성을 한껏 즐기는 사람, 심지어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하는 소수의 사람을 찾을 수 있다. 달라지는 것은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이다. 1600년 무렵, 대서양 경제를 창출했을 때 유럽인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부과했고 기계적, 과학적 현실 모델이 이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 400년에 걸쳐 이러한 사고방식은 서양의 교육과정에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갈수록 서양인의 기본적 사고양식이 되었다. 대서양 경제가 창출한 종류의 도전이 19세기 넘어서까지 긴급하지 않은 동양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그렇게 깊숙이 진행되지 않았다. 최근인 1960년대까지도 서양 사회학자들은 동양문화 특히 유교문화가 경제적 성공에 필수적인 경쟁과 혁신의 기업가적 정신발달을 저해해왔다고 주장. 1980년대 일본의 경제적 성공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여 새로운 세대의 사회학자들은 권위를 존중하고 집단에 대한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유교적 가치가 자본주의 발전을 억제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오히려 유교적 가치는 일본의 성공을 설명하는 요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하를 사회발전의 요구에 맞게 조정하고, 따라서 20세기 후반에 자유주의 자본주의 외에 유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도 탄생했다는 것이 더 합당한 결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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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시스템의 세계사

저자
구로다 아키노부 지음
출판사
논형 | 2005-11-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 책의 중요한 개념은 ‘화폐의 비대칭성’이다. 예를 들면 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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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래해야 할 재화가 쌓이면 제도적 통화공급이 갑자기 마비되어 버려도 사람들은 민첩하게 반응하여 화폐를 창출함 : 독일의 궐련담배 및 텐니네오의 나무조각 사례는 화폐창조가 제도적 조치가 동반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생된다는 점과 동시에 공간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줌
- 현지통화의 자율성을 가진채 무역은과 같은 지역간 결재통화가 이들을 연결하여 여러 통화가 합산되지 못한 구조가 19세기 중에는 상당한 지위를 차지. 그러나 19세기말부터 세계적 규모로 국제금본위체제가 형성되어 남아있던 지역유동성의 자율을 빼앗음. 서아프리카에서는 조개화폐가 파운드에 연결된 니켈화로 점차 대체되었고, 베트남에서의 동전유통은 인도차이나 은행권의 보급과 발행으로 쇠퇴해감. 그렇게 이제 세계적으로 한 정부체계에서 하나의 화폐만이 유통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갔음.
- 화폐라는 것이 확실히 교환과정에서 본능적으로 형성된 것인지, 반성과 합의(약정)에 의한 삼물이 아니라고 볼 수 있지만 화폐란 무한적으로 공간을 넓혀가며 생겨나는 것은 아님. 화폐는 본원적으로 공간을 함께 하는 것임. 화폐의 역사는 좁은 공간의 내측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동기와 불안저을 함께 하면서도 광역의 태환성을 새롭게 건설하고자 하는 동기가 서로 싸우면 만들어온 과정으로 그 충돌은 각 사회시스템의 흥망으로 이어짐.
- 전통 중국의 화폐사는 은행제도와 관계없이 대량으로 종이통화를 만들어 유통시켰던 매우 우수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 특히 북송, 금, 남송을 거쳐 원, 명초에 이르는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400년 간 대량으로 종이통화가 왕조에 의해 발행되어 민간 토지매매계약에 이르기까지 사용될 정도로 실제 경제행위 속속 침투해 갔음. 시기도 빠르고 발행의 규모가 상당하였으므로 세계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음. 정부가 발행한 통화중에는 회자, 교자, 교초 등 여러 명칭이 있음.
- 기본적으로 공간적 획일성과 시간적 획일성을 창조하고 유지하려는 왕조와, 지역적 다양성과의 상황에 의존한 기능성을 지향하는 사회적 동기가 서로를 잡아당기는 역학적 구도를 형성하는 것. 전통 중국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하면, 얼핏 볼때 모순되는 듯한 자율적 개별성과 타율적 획일성이라는 두 힘이 교묘하게 통합된 것임. 전통 중국의 화폐는 그야말로 이러한 역학의 체현자 역할을 계속하였다고 할 수 있음. 시대에 따라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선 적은 있지만 이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다른 한쪽을 구축하지는 못했음. 두 힘 사이에 균형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위 진동 자체가 구조화되었던 진자가 2000년이라는 세월동안 움직이고 있었음.
- 전통시장이 어떻게 지역유동성을 유지시키고 있었는가?
(1) 현지 통화를 만들어 유동성을 계속 유지 : 전통 중국 시장마을에서는 현지상인이 발행한 지제통화가 어떤 공적 허가도 없이 유통
(2) 잦은 신용거래를 통한 유동성 유지 : 중세 서구마들의 법공동체
(3) 태환성이 있는 화폐와 현물거래가 복합된 사례
(4) 앞의 세가지의 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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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포 바이러스

역사 2015. 1. 25. 16:59

 


템포 바이러스

저자
페터 보르샤이트 지음
출판사
들녘 | 2008-02-22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우리는 모두 템포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속도가 느린 인터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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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시작의 단계 : 1450~1800년
1. 촌락의 시대_느림의 원칙
- 삶이란 것은 마치 발로 밟아서 돌리는 물레방아와 같아서 그것을 더욱 힘주어 밟은 사람은 오직 자기 힘만 빠질뿐 목표에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 농사일은 공장의 단조로운 작업대 위에서 제품을 만들어내는 일과는 전혀 달랐다. 농부들은 일을 하다보면 하나의 작업을 마친후 다른 장소로 옮겨 다니면서 일해야 하는 과정이 많았다. 따라서 중간에 한가로이 쉬거나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2. 도시의 시대_가속도 초기의 원리
- 우리 마음속 시간의 범주가 하는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기계적으로 시간을 재고, ..., 시간 단위를 사건과 현상들, 과정들을 분류하는 표시체계로 사용하고, 우리의 생활전체를 시간의 통제아래 놓는 것이다. 14세기에 마음속에 시간에 대한 의식이 나타났을 때 톱니시계가 발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소로킨)
- 시간이 가져온 혁명의 특성은 "혁명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있었으나 시계는 없었다. 혁명 이후에 사람들은 시계를 가졌지만, 시간은 없다" (알베르티, 15세기 이탈리아 시계공)
- 모든 업종 가운데 상인의 직종이 맨 먼저 시간을 새로운 형태로 구분하고, 시간을 절약하고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간은 상인들을 위해 가장 먼저 똑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 시간이라는 개념은 노동의 분개가 늘어나면서 중요성이 더 커졌다. 생산영역이 나위면서 그 사이에 연관성이 구축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생산기술의 협력과 시간의 협력으로 나타났고, 또 사용된 노동시간에 따라 만들어진 상품의 가치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 육지에서는 토착세력과 땅의 저항 때문에 발생하는 손실이 너무 컸다. 그래서 자본주의적인 경제관념을 가진 상인들은 차라리 강으로 가는 길을 택했으며 해운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과 돈을 순환시킬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해서 운송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 속도를 내면 과연 많은 위험을 줄일 수 있을 지 판단을 내렸다.
- 그들은 금전거래와 상품거래를 할 때 철저하게 속도를 이용했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가속도 원리를 계속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사용법을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그들에 의해서 경제적인 시간관념 이외에 또 다른 것이 추가되었으니, 그것은 속도를 곧바로 이용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처음으로 속도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급함의 포로, 서두름의 포로가 되었다. 속도는 도시와 더불어 생겨나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사이, 즉 공간사이를 더 빨리 뛰어넘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생겨났다.
3. 힘의 시대_더 빠른 무기의 등장
- 농업은 계속 자연의 순환에 따르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손으로 자연을 성장시키고 진화시킨다는 상상은 아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업세계에서는 법이나 규범, 조직들을 통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거기에서 기술과 노동을 분화시켜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에 맞서곤 했다. 경쟁체테를 맨 먼저 이용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통치자와 원거리 무역상들이었다. 이 두계층은 서로 다른 수단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이나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경쟁했다.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국가들도 서로 동맹을 맺어 가차 없는 경쟁체제에 들어갔다. 이 두부류가 지닌 사고방식의 특징은 양쪽 다 경쟁과 성과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쪽은 연합해서 함께 공공재정분야와 해외의 개방된 시장을 통해서 자본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후원했고, 새로운 가속화 도구를 이용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4. 생산업자의 시대_더 빠른 기계의 등장
- 가속도가 붙은 새로운 세계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 시대를 더욱 대표하는 것이 등장했으니 그것은 바로 계산기였다. 세계를 수로 파악하려고 했던 17세기의 시대적 흐름에 맞춰서 계산하는 방식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 운송의 가속화로 인한 장점은 무엇보다도, 최신 기계에 투자한 다음 자신들의 판매영역을 확대하고자 했던 기업가들에게 수익성 있는 대량판매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 산업화는 생산, 운송, 재화의 분배와 소비를 바로 시간이라는 하나의 추상적 원칙아래 통합시켰다. 그것은 시간을 단축하는 기계와 기술을 이용해서 생산을 가속화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운송의 가속화를 거쳐 소비의 가속화에까지 이르게 했다. 산업화는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새로 교류하도록, 그리고 경제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변한 시간을 경제적으로, 즉 경제의 재화로 이용하도록 촉구했다.
- 생산과 운송의 가속화가 이루어지는 많은 원인이 있었지만,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은 더 많았다. 가속화의 사상은 유럽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처음 나타났다. 당시 유럽대륙은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했다. 그러면서 지구 전체를 자기들의 복종하에 놓고 싶어했고, 방해가 된다고 느낀 자연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2부. 가속화의 단계 : 1800~1950년
5. 증기의 시대_속도의 생산
- 교통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는 방직기와 인쇄기, 기차와 증기선의속도를 뒤쫓기 시작했고, 그 리듬에 따라 움직이고, 그처럼 빠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 맥동에 따라 빙빙도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사회는 매번 새로 발명되어 쏟아져 나오는 것들에 대한 뉴스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역동성을 펼친 사람들은 기업가들이었다. 그들은 자의식을 갖고 회사의 입구에 거대한 시계를 내걸며 이 시대의 새로운 주인이 누구인지 과시하려고 했다.
- 진보는 더이상 계몽주의 시대처럼 조심스럽게 앞을 더듬어 나아가지 않았고, 적극적인 사람들에 의해 성급하고 용감하게 추진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시간을 마치 늘 부족한 물자처럼 간주했으므로 제품을 생산할 때나 먼 거리를 갈 때, 화학변화 과정을 인공적으로 가소시킬 때, 시간을 줄이는 것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이런 가속도 원리에는 어떤 한계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상승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었다. 한계를 모르는 가속도 원리처럼 기업가들와 상인들 역시 자신들의 재산축적에 있어 끝을 몰랐다. 시장경제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분투했다. 가속화로 성공한 모든 것에는 시간을 더 합리적으로 사용하라는 요구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운송와 생산을 가속화하고, 이와 병행해서 사람들의 심리 속에 시간의식의 혁명을 일으키도록 요구했다. 이제 진보란 시간을 성공적으로 경영관리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6. 전류의 시대_무선을 이용한 소식전달
- 속도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전기였다. 전세계의 물리학자들은 전기의 흐름인 전류가 정보전달을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것은 역마차의 시대에서 전류의 시대로 넘어가는 비약적 발전을 약속했다.
- 경제위주의 시대로 바뀌어가던 수십년 동안에 전신기의 계속적인 발전을 추진한 주역은 각국 정부가 아니라 새로 등장한 철도회사들이었다. 기차를 이용함으로써 사람과 물자의 수송이 가속화되자, 정보의 운송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초기의 철도회사 입장에서는 기차보다 더 빠르고 안전하며, 믿을 만한 정보전달 시스템이 없었다. 특히 개별 정보통신망이 연결된 후로, 신속한 통신망이 없다는 것은 안전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럴수록 철도회사들은 전자식 통신기의 개발에 희망을 걸었다.
- 상인과 운송업자들은 전신라인을 이용해 세계 여러지역에서 매겨지는 상품가격들과 선박들의 입출항 시기에 관한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 기차와 증기선들이 가세하여 전 세계적 상품순환이 이루어졌으며, 무역에 관여하는 국가의 국경은 대폭 확장되어 상품 판매를 가속화시켰다. 또한 상인들은 곡물이 운송중이거나 심지어 수확이 안 끝난 상태에서도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다. 상품과 소식을 전하는 새롭고 빠른 운송수단은 위험부담을 덜어주었고 비용도 낮추어 주었다. 전 세계의 시장은 처음으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했다. 불과 수십년 안에 전신기의 사용목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처음에 샤프가 그것을 개발했을 때만 해도 아직 전쟁중이었고, 쿠크가 그것을 설치했을 때는 철도행정이 주도하던 시대였다. 그러던 것이 1850년 이후에는 지역시장과 국제시장이 중심을 이루는 시대가 되었다.
- 정보를 가속화하려는 기술혁신에서 드러나는 매혹적인 점은, 그것이 바로 집단적인 행복감, 즉 진보에 대한 집단적인 희열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람들은 개혁속도가 급속히 빨라진 덕분에 다시금 새로운 진보를 접할 수 있게 있었다. 새로 등장한 전화통신수단은 사람들이 전류의 지배를 받게 하고,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하고 박동회수를 높여갔다.
- 새로운 통신기술은 시장의 투명성을 높여주었지만, 참여자들에게도 더 빨리 거기에 반응할 능력을 갖추도록 요구했다. 이익을 볼지 손해를 볼지가 시간과 분을 다투면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 1880년 이후부터 일상생활에서도 조급하게 서두르는 현상이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사회 여기저기에서는 신경과민의 진단이 확산되었다. 의사들은 집단증세를 보이고 있는 신경쇠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 이미 계몽주의 시대부터 사람들에게는 진보를 위해 싸울 사명이 주어졌고, 그 요구는 점점 더 강조되어 표출되었다. 19세기 말의 주요개념 가운데는 효율성도 들어 있었다. 효율성을 위한 노력은 개인과 집단 전체의 도덕적 의무가 되었다. 그 배후에는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더 빨리 일하고, 더 빠르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숨어 있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엣도 두세배 쯤 속도를 올려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가속화가 진행될수록 인간의 생활이 더 충만하고 윤택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도 제조기들은 명령을 넘겨받아 도시 안에서 사람들의 걸음을 빠르게 했고, 역동성과 속도에 대한 생각도 바꿔 놓았다. 이후 속도의 일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7. 스포츠의 시대_질주하는 인간들
-단지 노동시간을 늘리던 경제의 시대에서 벗어나 시간으 집중적인 이용을 미래지향적으로 보는 시대로 넘어온 만큼, 시간을 다투는 스포츠 종목은 확실히 우선시 되었다. 스포츠의 신기록 측정이 가능해지자, 이미 달성한 기록돌, 즉 시간이나 거리, 높이는 점점 더 상승해 갔다. 경제생활에서처럼 여기서도 특별한 기록을 성취했을 때는 보상이 주어졌다.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한 스포츠, 노동세계에서 벗어나 활기 있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수단의 하나였던 스포츠는 원래 노동과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기술적-관료주의적인 실질위주의 세계를 닮아갔다.
- 공장에서든 경기장에서든 속도기술자들은 기록개선과 향상, 그리고 기록의 최적화라는 원리에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 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조화와 기록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달성된 기록보다 더 빠른 기록, 최고의 속도를 만들어 내려고 했고, 집단적 개선을 목표로 분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서로 동화되고, 신체도 규범화되어 몸이 뚱뚱한 사람들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치부되었다. 약 1세기가 지난 후에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그런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몸에서 지방제거수술을 하고, 가슴에 실리콘을 삽입하는 수술을 해주고 있다. 속도는 세계를 바꾸고, 인간의 정신과 신체도 바꾸었다.
8. 엔진의 시대_질주하는 자동차들
- 기차의 가속화가 그랬듯이, 새로 등장한 자동차의 가속화 역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을 한데 묶었다. 귀족혈통을 가진 사람과 떼돈을 벌어 귀족이 된 사람들 모두 자신들만 누리던 속도의 특권을 방어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산업화 이전의 시대만 해도 속도는 귀족과 군대, 자산가만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최고의 가속도에 참여하는 일은 대중화되었다. 대중들은 휘발유로 움직이는 차량을 직접사서 타고 도로를 질주하지는 못했지만, 얼마 안가서 오토바이를 사서 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관중의 자격으로, 그것도 점차 사회의 최고계층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 엔진과 기계, 스포츠와 기록에 대한, 때로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숭배는 속도 자체가 목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것은 속도와 기동성이라는 새로운 종교마저 제시하고 있다.
9. 안전의 시대_규정화된 가속도
10. 전쟁기계들의 시대_돌진하는 포탄들
- 산업에서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건설이라면 전쟁이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것은 파괴였다. 양쪽 모두의 공통점은 효과를 상승시키려는 목적으로, 즉 더 좋게, 더 싸게, 더 정확하게, 더 빨리 생산해내기위해 점차 인간대신 기계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11. 합리화의 시대_서두르는 인간들
- 19세기 후반까지 시간을 외연적으로 사용하던 방식은 자연적인 한계에 부딪쳤다. 종교개혁과 중상주의 이후의 근로시간을 밤중까지 연장하는 방식은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운 시간의 패러다임이 필요했고 이는 곧 관철되었다. 19세기 말부터는 시간을 집중적으로 이용하고, 점차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더 삘리 일하는 것이 선호되었다. 성과에 대한 보상은 불가피하게 속도를 상승시키도록 압력을 가했다.
- 현대 자본주의는 경제학자 슘페터가 본 것처럼 역동적인 기계들이 시간에 맞서 부단히 경주하는 것같은 현상만은 아니었다. 기업은 혁신적인 것들을 개발해 선구자로서의 이익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쟁자들간의 지속적인 몰이사냥 속에서 단지 얼마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토끼와 고슴도치의 경주와 비슷했다. 노동생산성을 어떤 식으로 개선하든 그것은 경쟁의 압박 속에서 다시 향상되어야만 하는 압박으로 작용했다. 빠른 것은 느린 것을 잡아 먹었다. 그래서 기업체들은 자본집약적이 될 수록 잠시라도 지체할 경우에 겪는 손실이 더욱 커졌다.
- 생활의 가속화는 사람들의 심리도 변화시켜, 신경쇠약이 대도시인들의 전형적 질병으로 발전했다. 속도는 기술과 조직에 의해 변하는 새로운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에 즉각 적응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만들었다.
12. 예술가의 시대_질주하는 영상
- 단축기법의 회화는 인상주의 시대에 와서 프랑스 화가인 에드가 드가와 클로드 모네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불완전하게 그려진 형태는 빠른 움직임을 연상시켰고, 고정시킬 수 없는 역동성은 순간의 지나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속도회화는 관찰자로 하여금 세부적인 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전체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즉, 생물과 기계, 자연과 빛, 그것들이 서로 겹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대한 인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것들을 빠르게 바뀌는 빛과 색채의 분위기로 포착해서 재생하려고 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을 독자적인 대상으로 표현하려면 색채를 우선시해야 했기에, 대상과 형태는 뒤로 밀려났다. 새로운 양식의 회화는 이처럼 순간적인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 그림들은 흐르는 듯한 색채의 질감으로 이미지을 드러내면서 움직임을 표현했다.
- 미래파 예술가들은 운동의 가속화, 빠름과 역동성, 소식체계와 운송체계의 혁명에 대해, 그리고 현대에 와서 열병처럼 서두르는 것, 또 늘 새로워지는 생활영역에서 소용돌이 치는 가속화에 대해 어떤 예술가보다 더 급진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대단한 소란을 피우면서 이 역동성을 문학적, 회화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과격하게 주장했다.
3부. 1950년대 이후의 속도
13. 전자의 시대_10억분의1초에 대한 사냥
-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빠른 경제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은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난 뒤부터이다. 그 동안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인간들이 서구의 고속경제 시스템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자, 그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거나 조화시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독일에서는 두 독일의 정치적 통합이 현기증 날 정도로 급속히 이루어진 반면, 경제적, 심리적 통합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진행되었다.
- 1920년대 노동조합과 여성단체는 처음에 합리화 조치와 가속화 조치를 환영했다. 그 조치들이 사람들에게 복지를 조장하고, 그에 맞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즉 교양을 배우고, 생활을 즐기고, 더 많은 여가를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산업의 발전은 노동시간의 절약과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 결과 노동시간의 생산성이 늘어나고, 소비 가능성이 다양해지고, 물질적으로 부유해졌지만 거꾸로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시간부족을 겪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가졌던 희망, 즉 생산과 운송의 가속화를 추진해서 시간부족에서 벗어나겠다는 희망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시간절약은 비록 사람들에게 스스로 선택한 활동을 하는 데 사용할 여가시간을 많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조급하게 서두르는 결과를 낳았다.
- 여가시간이 계속해서 더 길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속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가고 있다. 시간을 소비할 가능성이 엄청 다양해지자 사람들은 오히려 각자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조급해지는 이유는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사용할 가능성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 과거에 엄청난 비용을 들여 구축한 가속화 시스템은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고, 그 때문에 불합리한 것이 되었다는 경고와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대상과 활동을 시간의 통제속에 굴복시키고, 시간을 제로로 줄이고 없애려는 것이 가속화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데는 시계가 필요없다.
- 시간을 삶이다. 그리고 삶이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 조금 갖게 된다.(미하엘 엔데의 소설중에서 주인공 모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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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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