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51건

  1. 2024.11.14 역사의 쓸모 1
  2. 2024.09.28 노마드
  3. 2024.09.28 이주하는 인류
  4. 2024.09.01 증류주의 자연사
  5. 2024.07.14 새우에서 고래로 6
  6. 2024.05.17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7. 2024.05.17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1
  8. 2024.05.12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 1
  9. 2024.04.26 세상 모든 것의 기원 3
  10. 2024.04.17 대담한 작전

역사의 쓸모

역사 2024. 11. 14. 07:21

- 역사는 아득한 식나 동안 쌓인 무수한 사건과 인물의 기록.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컨텐츠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과 그 과정에서 혀성된 문화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다. 여러분이 어느 새로운 대상을 접하든, 어떤 일을 벌이든 역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없어요. 음시고, 옷도, 우리 삶을 구성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함께 발전해온 것이니까요.
역사를 골치 아픈 암기과목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역사의 품으로 첫발을 디딘 것이나 다름 없다. 이제 보물이 가득 쌓여 있는 그 지도를 신나게 펼쳐보기만 하면 된다.

-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 희망이라는 말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말하자면 역사는 실체가 있는 희망. 아무런 근거 없이 조금 더 살아보자고, 버텨보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조금만 더 멀리 보면 좋겟다. 지금 당장은 두렵겠지만 나의 삶의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세상도 변하는데 나의 인생이라고 늘 지금과 같을까? 힘든 세상에서 희망마저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
스피노자는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따르면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는 모두 어떤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 경주 사람들이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농사를 지으러 나가면 무엇이 가장 먼저 보였을까요? 황룡사 9층 목탑이었겠죠. 이것이 선덕여왕의 바람이었어요. 신라인들의 마음을 모으는 것. 우리도 강해질 수 있다는 비전을 신라인과 공유하는 것이죠.
혼자만의 비전은 몽상이나 망상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조직이 움직이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상을 보여주고 그곳을 향해 같이 가자고 설득해야 해요. 선덕여왕은 그 비전과 꿈의 상징으로 황룡사 9층목탑을 지은 것입니다. 실제로 선덕여왕은 이 탑을 완공한 뒤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 꿈은 결국 이뤄지지요.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제압하고, 668년에 고구려까지 물리칩니다. 가장 작고 힘없던 나라가 삼국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신라의 삼국통일, 그 발칙한 상상이 황룡사 9층목탑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선덕여왕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가슴에 품고, 황룡사 9층목탑을 지었어요. 그렇게 꿈을 향해 한 발 내디딘 것이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분명한 비전이 있었기에 혁신도 가능했습니다. 그저 지금 당장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더라면, 또는 강국이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면 혁신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들이 김일성의 죽음을 슬퍼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경험의 공유라고 생각합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북한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김일성이라는 지도자와 함께 북한 주민들도 일어선 것이지요. 풍족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먹고살 만한 나라로 만들었어요. 그 세대의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에 대해 갖고 있는 향수는 사실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역경을 극복한 자신들의 젊은 시절과 그 성공과 연대감에 관한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살아온 시대의 지도자 김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와 함께 그 시대를 견뎌온 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어르신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할 때, 혹은 미국 국기를 들고 흔들며 친미구호를 외칠 때, 일부 젊은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박정희라는 지도자와 미국이라는 우방은 소위 빨갱이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주는 절대적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계에 자신도 속해 있던 거에요. 그런데 젊은 세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하고 우방국 미국도 부정해요. 그들은 마치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젊음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역사라는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저는 늘 사람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뒤이어 이 땅에서 살아갈 사라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훗날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일생으로 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역사를 공부하면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맥락이 잡힙니다.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는 늘 이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역사의 수레바퀴에요.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사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문제란 별로 없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의 움직임도 알고보면 역사에서 그 문제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더 폭넓게 사회문제를 이해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순간,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원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또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인류 역사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존재. 제각기 다른 사람이 공존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인 경우도 있음. 그러니 나의이익, 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세요. 문제를 제기하세요. 다만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과연 옳은지, 역사나 인류의 발전가 맥을 같이 하는지는 반드시 짚어봐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도 해야 하고요.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내가 속한 집단의 편에 서는 대신에 말입니다.
도처에 갈등요인이 널려 있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면한 문제에 나의 온도를 몇 도로 맞출 것이지 조절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서인과 남인의 이념싸움처럼 허무한 싸움에 나의 열정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마드  (0) 2024.09.28
이주하는 인류  (0) 2024.09.28
증류주의 자연사  (0) 2024.09.01
새우에서 고래로  (6) 2024.07.14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0) 2024.05.17
Posted by dalai
,

노마드

역사 2024. 9. 28. 08:02

-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역사는 단순한 읽을 거리가 아니다. 하물며 주로 과거에 관련된 것만도 아니다. 역사는 우리 안에 역사가 있고,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따라서 문자 그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지닌다. (제임스 볼드윈, 백인의 죄의식 중에서)

- 유목민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의 그늘진 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짐나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보다 덜 훌륭하거나 덜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로마 공화국이 카르타고를 무찔러 지중해의 맹주가 되고, 중국이 한 무제의 치세하에 번영을 구가하면서 황허와 유럽을 잇는 초기 실크로드를 오가며 교역을 조금씩 발전시키던 기원전 2세기만 하더라도 흉노의 세력은 만주에서 카자흐스탄까지 뻗어 있었고, 이 세력권 안에는 시베리아의 일부지역, 몽골, 지금의 중국 산시성 신장이 포함되었다. 같은 시기에 스키타이 유목민과 그들의 동맹 유목민들도 흑해에서 카자흐스탄의 알타이 산맥에 이르는 땅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을 한데 모으면 유목민들의 영토는 로마제국이나 중국의 한 제국보다도 넓고 강력했다. 게다가 우리는 매장지를 발굴함으로써 그들의 지배자들이 치타 털로 단이 장식된 중국 비단 의대를 착용하고, 페르시아 양탄자에 앉으며, 로마의 유리를 사용하고, 그리스의 금은 장신구를 애호했음을 알고 있다. 이는 이동성 종족이 원시적이고 고립되어 있다는 통념과 상반되며, 그 유목민들이 동중국해부터 대서양까지 이어진 교역세계의 달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이븐 할둔은 이렇게 말한다. "사막생활이 용맹의 원천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야성적 집단은 다른 집단들보다 용감하다. 따라서 이들은 우월함도 더 잘 확보할 수 있고, 다른 종족들의 수중에 있는 것돌드 더 잘 빼앗을 수 있다." 여기에서 이븐 할둔이 말하는 다른 종족들의 수중에 있는 것들이란 힘, 왕권, 땅과 부를 의미. 또한 그는 유목민 지도자는 아무리 힘을 가지고 싶어도 연대의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그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할 수 없고,... 그렇게해서 왕권은 연대의식이 도달하는 목표가 된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발언 같지만, 이븐 할둔 이전에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고, 이론으로 체계화하여 국가와 제국들의 흥망을 설명한 사람도 없었다.

- 이븐 할둔도 그런 괴리가, 아바스 왕조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 중 하나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왕조에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수명이 있다"라는 단원에서 자신이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본 것이 단계를 이렇게 제시.
(1) 왕조를 수립한 세대는 왕조에 대해 강경하고 거칠게 굴며, 아사비야로 결합되어 있다.
(2) 그러다 일단 권력과 권이가 확립되면 "사막인의 태도는 정주민 문화에 물들고, 결핍이 사치와 풍부함으로 대체되는 2세대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부패가 만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지배자는 집단의 나머지 사라들과 분리되고, 나아가 그것은 애초에 정복을 가능하게 했던 연대의식의 와해로 이어진다.
(3) 3세대가 되면, 사막인의 삶과 강인했던 시절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런 때를 깡그리 잊는다. 그들은 명예의 맛과 연대의식이 주는 달콤함을 느끼지 못한다.... 유복하고 편안한 삶에 젖어 사치가 극에 달한다.

- 왕조의 흥망에 대해서 이븐 할둔이 개략한 부분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에도 잘 들어맞는다.
(1) 알 사파(초대 칼리프)와 알 만수르(2대 칼리프)는 왕조를 수립하고 수도를 건설
(2) 알 만수르에 이어 칼리프가 된 그의 아들 알 마흐디는 말에 열중하면서, 사치스럽고 풍족한 삶에 만족
(3) 알 마흐디의 아들 하룬 알 라시드는 극도의 번영과 안락함을 즐김

-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가 지적했듯이, 몽골의 부상으로 유럽은 본의 아니게 "세계는 그들의 조상이 보았을 법한 것보다 무한정으로 더 크고 더 다양하며 덜 순종적이었다. 세계는 하느님의 말슴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쉽게 정복당하지 않을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깨달음은 유럽에 특별히 중요한 세가지 진전을 가져옸다.
첫째, 유럽의 상상력이 구속에서 해방된 것이고, 이 자유는 샤르트르 대성당과 캔터베리 대성당, 스페인의 부르고스 대성당과 부다페스트의 마차시 성당에 이르기까지 몽골의 침략이 끝났음을 기념하여 발주한 그 시대 유럽 대성당들의 형태와 야망으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질서는 그 성당들의 구조, 하늘을 향한 첨탑, 빛으로 가득한 실내, 무역에서 나오는 자금, 그런 건축을 가능하게 해준 아랍 학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수학으로부터 나타났다. 
두번째 진전은 유럽이 유목민 국가인 몽골의 부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뒤비도 설명했듯이, "협상하여 천하무적 왕국들의 환심을 사려고 시도하는 편이 한층 유리한데도 그 모든 이교도, 전투의 달인들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몽골의 힘과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걸친 그들의 지배력의 광대함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시야를 넓히도록 자극해 그들이 동쪽의 인도와 서쪽의 대서양 너머를 바라보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종국에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변화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와 콜럼버스와 같은 탐험가들의 항해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에게 화물이 지배당하는 상황에 대한 반응에서 나온 행위였다.

- 몽골에 의한 평화로 가능해진 그 문화 교류는 유라시아 반대편의 끝 지역도 변화시킴. 오랫동안 고립된 왕조를 유지했다고 알려진 중국만 해도 이제는 육지에 둘러싸이고 말 위주로 살아가던 스텝 지대 출신 유목민 칸의 지배를 받으면서 해양강국으로 떠오름. 애초에 쿠빌하이 칸은 마스트가 넷인 정크선들로 새 함대를 만들면서, 그것이 바다를 면한 두 이웃나라 일본과 고려를 상대로 한 원정에서 큰 힘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그들은 배들의 용도를 바꿔서 2차대전 전까지는 세계 최대였을 무적의 선단으로 만들었다. 그 새로운 화물선단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중국은 동중국해와 홍해사이의 해상무역까지 지배했다.

- 더 크고 더 완벽한 그림에서는 유목민대 정착민, 부족민 대 국민과 같은 극명한 차이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여태껏 그랬던 적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중심에는 이분법이 있는 듯 하다. (팀 매킨토시, 스미스의 아랍인 중에서)


 

대표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쓸모  (1) 2024.11.14
이주하는 인류  (0) 2024.09.28
증류주의 자연사  (0) 2024.09.01
새우에서 고래로  (6) 2024.07.14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0) 2024.05.17
Posted by dalai
,

이주하는 인류

역사 2024. 9. 28. 07:59

- 유구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 고셍 머물며 생활하는 것은 비교적 현대적인 현상이며 400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인구의 3분의 1은 유목생활을 했다. 현재도 3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전통적 유목생활을 하고 있으며, 고용 유목민 혹은 단기 이주근로자라 부르는 사람들도 수백만명이 넘는다. 자기가 태어난 곳, 혹은그 부근에 머무르는 것이 당연히 정상이거나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접으면 인류에 대해 색다른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 마밀라피나타파이(야간족 언어, 세계에서 가장 간결한 단어) : 두 사람이 다 바라는 일이지만 둘 중 누구도 본인이 먼저 나서서 하고 싶지는 않아 서로 상대방이 해주었으면 하며 나누는 눈길

- 고대 아테네에서 원주민들은 이주민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그에 따라 이주민과 그들의 후손은 결코 진정한 아테네인이 될 수 없다는 불편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테네 예외주의는 그곳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되어 도시 국가의 사회구조에 영구적 분열을 일으켰다. 아테네에는 메틱이라고 알려진 대규모 이주민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들은그곳에 정착했지만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아테네에서 태어난 그들의 후손 역시 아테네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 최초의 인도-유럽어족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대초원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실 중 하나는 그들 역시 정착민이 아니라 이동 중인 유목민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특정 장소에 속해 있는 고대세계를 지어내려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우리는 결국 유목민의 후손이다. 정말로 우리의 근원을 찾고 싶다면, 인류의 역사가 고대부터 지속되었다는 인간의 깊은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다면 우리의 조상들이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왔고, 아프리카야말로 우리 모두의 단 하나뿐인 진정한 본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 로마에서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군사와 돈, 행운과 무자비함이 필요했고, 노예를 거느린 지독한 군국주의적 압제 체제를 관장해야 했다. 그리고는 전쟁터에서 죽거나 아니면 자기 침대에서 살해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피부색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로마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생김새가 다르고, 억양이 이상하고, 어릴 대 로마에서 자라지 않은 데서 오는 불리함은 (특히 강한 군단을 자기 편으로 갖고 있으면)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 이주민들은 이제 정주주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원치 않거나 들어갈 자격이 없거나 그 두 가지 다인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모든 일에 대해 쉽게 비난받을 수 있어, 적 아니면 희생양이 된다. 
이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지 못하는 공감능력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감능력의 부족은 때로는 배를 타고 망명하다가 죽은 아이가 해변에서 발견되거나 아니면 냉동 트럭에서 서로 얽힌 채 얼아 죽은 난민 집단이 발견되거나 하면 그때서야 조금 채워진다. 그 짧은 순간에는 온 세계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지만, 그때뿐이다. 이주민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주주의의 압제라 할 수 있다.
현재 있는 곳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이 정상인 세상에서 이동은 일탈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생명이 위험에 처하거나 자신이 보유한 기술이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 필요해지는 것처럼 특별한 상황에서만 이주가 허락된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집에 머물러 있거나 적어도 태어난 국가에서 계속살아야 하며, 이주 충동이나 다른 곳에 대한 갈망은 해외 휴가와 순례처럼 무해한 행위로 대체하면 된다. 이주가 비정상적이고 인류 역사에서 이주의 역할을 잊도록 권장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향은 신성시되고 낭만화되는 반면 낯선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마치 고대 아테네 사람들처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땅의 흙에서 태어났다고 믿기라도 하듯 이주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날 정주주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역사를 너무 자주 잊고 있다.우리는 인간이 지루하거나 호기심 혹은 모험심 때문에, 아니면 도전을 즐기거나 꿈을 이루고 싶어서 이주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수천 년 동은인류는 지구의 거의 모든 곳으로 이주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이주의 역사야말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촌인 유인원과 인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대표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쓸모  (1) 2024.11.14
노마드  (0) 2024.09.28
증류주의 자연사  (0) 2024.09.01
새우에서 고래로  (6) 2024.07.14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0) 2024.05.17
Posted by dalai
,

증류주의 자연사

역사 2024. 9. 1. 12:05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마드  (0) 2024.09.28
이주하는 인류  (0) 2024.09.28
새우에서 고래로  (6) 2024.07.14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0) 2024.05.17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1) 2024.05.17
Posted by dalai
,

새우에서 고래로

역사 2024. 7. 14. 11:17

- 한국인들에게 변화의 속도는 눈부셨다. 1920년에 한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농촌에서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았다. 그들이 살았던 집은 말 그대로 네 개의 벽과 지붕으로 이뤄진 건물이 었다. 그 안에는 수도 시설도 화장실도 없었다. 그들은 <양반> 이 소유한 땅에서 일하면서 간신히 살아갈 정도의 음식을 얻 었다. 혹은 더 나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노비가 되거나 일 본에 있는 공장이나 만주에 있는 위안소로 보내졌다. 그러나 50세가 되기 전인 1979년에 그들은 중산층 근로자가 되었다. TV와 라디오, 냉장고, 그리고 깨끗한 화장실을 갖춘 현대적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파트 창문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혹은 대전에서 공장이 거의 날마다 들어서는 장면을 지켜봤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꽤 좋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영화를 보 거나 최신 발라드를 들으며 여가를 보냈다. 열심히 일했다면, 제주도 여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박정희와 <재벌>은 천생연분이었다. 박정희는 성장을 이 끄는 국내 기업과 함께 한국 경제를 통제하고자 했다. <재벌> 들은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고, 기업이 한국 경제를 지배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들 스스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박정희 정권은 선택적인 <재벌> 허가권과 값싼 이자로 대출을 주고 잠재적인 해외 경쟁자에게는 적대적 인 경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재벌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했 다. 36 현대의 정주영, LG의 구인회와 그의 아들 구자경, 삼성 의 이병철, SK의 최종현 등 <재벌 회장들은 국민 모두가 아는 인물이 되었다. 재벌들은 경제기획원에 자문을 제공했다. 그 러나 박정희는 <재벌>이 달성해야 할 경제 목표까지 제시하는 등 세부적인 경제 관리에 나섰기 때문에 마찰이 있었다. 3"그 리고 때로 단순한 마찰을 넘어서는 사건도 있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재벌> 지도자를 부패 혐의로 투 옥하겠다고 협박했다. 재벌 지도자들은 박정희 정부와 협력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만든 모든 것을 잃고 수감되었다.38 박정 희와 재벌은 결국 공생 관계를 이뤘다. 한쪽에 좋은 것은 다른 쪽에게도 좋았다. 그리고 한국 경제에도 좋았다. 국가의 최고 대학을 졸업한 젊고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한 가지 꿈을 꿨다. 그것은 재벌 기업에 들어가서 그들이 약속하는 부와 지 위를 누리는 것이었다.
경제 정책과 이를 따르는 재벌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갖 춘 박정희는 자신의 선진국 계획을 밀고 나갔다. 재선이 있었 던 1967년에 박정희 정권은 2차 5개년 계획을 내놨다. 그 계획 은 분명하게도 수출에 집중했다. 3" 한국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 력을 활용해서 미국과 나머지 서구 국가에 제품을 공급하는 <공장>이 되어야 했다.
- 성차별주의는 유교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으로 인해, 그리 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한국 경제라고 하는 새로운 현실과 혼합되면서 심화되었다.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1953년에 도입 원) 호주제 아래에서 남성은 법적으로 가정을 이끄는 사람이 었다. 그러한 제도 안에서 남성이 사망하면 아내가 아니라 장 남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여성은 결혼하고 나면 남편의 가정 에 속하게 되었고, 유산과 은행 계좌에 대한 접근, 그리고 모든 형태의 경제적 활동에서 차별을 받았다." 호주제는 동일한 노 동에 대해 여성에게 낮은 임금을 지불하는 하나의 구실로서 악용되었다. 결국 여성은 자신을 돌봐 줄 남편을 만날 때까지 일할 뿐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아버지나 손위 형제가 그 역할 을 맡았다. 많은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 짐으로 여겼다. 1953년 낙태가 불법화되고 이후 1973년부터 특정한 조건에서만 허용 되었음에도, 여성 태아에 대한 낙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1970년대에는 한국 역사에서 또 다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 다. 그것은 중산층의 등장과 확대였다. 많은 한국인이 처음으 로 생존 경제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었다. 그들은 언 제나 원했던 취미에 돈을 쓰고, 불과 한 해 전만 해도 여유가 없어 보였던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혹은 당연히 누릴 만한 짧은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소득을 올렸다. 그렇게 대규모 소 비문화가 1970년대에 한국에서 <탄생했다. 조용필이 자신 의 형제에게 <부산항에 돌아오라고 노래할 때 한국인들을 춤 을 췄다. 84 TV 드라마에서 장희빈 역할을 인상적으로 소화했 던 윤여정은 한국 시청자에게 조선 왕조의 영광스러운 나날을 선사했다. 그리고 장미희는 영화 「겨울여자」에서 성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여성의 역할로 한국 관객들을 꿈꾸게 했다.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했다. 일하지 않을 때는 미국인들처럼 즐기기를 원했다. 70년대가 저물 무렵에 TV는 한국에서 일반 적인 가전제품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클럽으로 몰려들었고 거 기서 다음의 록 스타와팝스타가 탄생했다.
중산층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한국 경제의 근대화 덕분 에 계속해서 증가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나라가 외국인을 위 해 싸구려 티셔츠나 바지를 생산하는 공장으로만 남기를 원치 않았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선진국 비전과 맞지 않았다. 그의 인기는 개발주의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있었 다. 나아가 박정희는 강력한 군대를 원했다. 자국 방어를 위해 미군에 의존하는 모습은 강력한 나라의 건설에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는 1972년과 1977년 5개년 계획을 통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한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1972년 경제 계획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그것은 의 류와 장난감으로부터 전자 제품과 기계, 석유화학, 조선업으 로의 이동이었다. 그리고 1977년 경제 계획은 그러한 산업에 더욱 집중했다.
- 박정희의 비전은 한국 경제가 아직 기술적으로 발전된 산업에서 경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던 세계은행을 비롯한 여러 다른 해외 전문가들의 생각과 충돌했다. 박정희 의 일부 자문위원들조차 그의 비전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 나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한국의 역량을 의심했던 많은 이 들에게 현대의 포니는 상징적인 존재로 모습을 드러냈다. 포 니는 한국이 처음으로 국내에서 개발한 자동차였다. 생산은 1975년 12월에 시작되었다. 몇 달 만에 포니는 남미로 수출되 었고, 이후에는 유럽과 북미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초기 모델 에서는 화재 사고가 있었다. 문짝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도장은 값싸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88 전문가들 은 조롱 섞인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현대의 정주영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포니의 품질을 재빨리 개선했다. 소비 자들도 이를 인식했다. 매출은 급증했다. 포니는 미국이나 유 럽의 값비싼 자동차만큼 내구성이 강한 경제적인 자동차가 되 었다. 정주영은 그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다. 박정희 역시 그랬 다. 그리고 한국 전체가 그랬다.
- 전두환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가난한 대가족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의 가구들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 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군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은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 박정희가 죽기 한 해 전, 전두환은 준장으로 승진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무렵에 그는 한 단계 더 올라섰다. 당시 그는 보안 사령부 사령관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그는 적절한 자리에 있 었다.
보안사령관이라는 지위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죽음 을 수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수사가 아 니었다. 이는 전두환이 권력의 차지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 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출발점이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당 시 정승화는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를 체포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분 명한 장애물이었다. 
- 그리고 자신의 초창기 독 재에 반대할 세력을 끌어모을 위험이 있는 3김을 잡아들였 다. 김대중에게는 사형까지 내렸다. 사형은 20년 형으로 낮아 졌다가, 결국 미국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입으로 추방으 로 바뀌었다.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나서 안전함을 느낀 전 두환은 육군 예비역으로 예편했다. 8월에는 최규하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8월이 가기 전에 전두환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선거인단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 었다.

- 변화의 흐름은 도시 중산층의 등장과 성장으로 뚜렷해졌 다. 1987년 기준으로 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은 전체 노동 인구의 50퍼센트에 달했고, 이는 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해 제조업 분야는 전체 노동력의 40퍼센 트를 차지했다.  급여 수준은 아직 높지 않았지만, 점점 더 많 은 사람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 파트를 장만했다. 그리고 자동차와 TV, 냉장고를 살 여유를 누렸다. 또한 고급 레스토랑에 가거나 미장원에서 머리를 했 다. 게다가 정부가 해외여행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하면서 휴가를 이용해 해외로 떠났다.
- 중산층의 증가가 박정희 시절의 엄격한 검열이 완화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한국 문화의 특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매 출 기준으로 전두환 시절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영 화 「깊고 푸른 밤」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위장결혼을 한 캘리 포니아의 불법 이민자의 힘든 삶을 그렸다. 그는 결국 위장결 혼을 깨고 임신한 아내를 한국에서 데려온다.  다음으로 인기 높았던 「고래사냥」은 사랑에 실패하고 환멸을 느낀 젊은 남자 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는 윤락가에서 춘자를 만나 그녀가 잃 어버린 말과 고향을 찾도록 도움을 준다.  이들 영화는 일상 적인 삶이 가져다주었던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는 증가하는 중산층의 관심을 자극했던 주제였다.
변화는 음악 분야에서도 찾아왔다. 한국의 발라드는 1960년대에 블루스와 미국의 발라드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 다. 그리고 1980년대에 한국 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발라드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85년 이광조의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은 30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80년대 말에는 변진섭이 등장해서 <발 라드의 왕자>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발라드는 가족 간 약 속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연애와 결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 중산층 한국인들의 정서를 잘 표현해 주었다. 그 가사 에서 아픔은 짝사랑에 관한 내용이었고 기쁨은 평생을 함께할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였다.
- 한국 사회의 변화는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한국인들은 자유롭게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 었다. 자동차나 TV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즐길 것인지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선택할 수 없 단 말인가? 한국인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사무실과 공장이 점차 증가하는 중산층으로 가 득 차게 되면서 다양한 자유를 누리는 삶과 독재 치하의 삶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 1987년 4월에 전두환은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간접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분노했다. 둘은 신한민주당을 떠나 각자 자신의 정당을 세웠다. "
- 한국인들 또한 전두환의 발표에 분노했다. 당시 시위와 파업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1월에는 경찰이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을 고문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처 음에 당국은 박종철의 사인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의사와 검사, 기자, 목사 등으로 이뤄진 단체가 진실을 규명해 냈다." 전두환 정권은 단지 살인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상을 덮으려 했다.
서울로부터 2,600킬로미터 떨어진 필리핀에서 독재자 페 르디난드 마르코스 Ferdinand Marcos는 수십 년에 걸쳐 그 똑같은 일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86년 2월 에드사 혁명으 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필리핀은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땅에서도 그러한 일을 이룩하고자 했다. 전 두환의 4월 발표는 민주주의를 향한 한국인들이 열망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파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1986년 276건이었던 시위는 1987년 3,749건 으로 크게 증가했다. "한국은 통제 불능한 사회가 되었다. 군 사적 방법만으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광주 민중항쟁의 유 혈 사태가 다시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한국 상황을 우려한 레 이건과 그의 행정부는 전두환이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공적, 사적인 차원에서 로비를 벌였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 위원장은 전두환을 상대로 사적인 로비를 벌였다.  어쨌든 서울은 올림픽을 유치해야 할 국가였다. 당시 노태우가 올림픽 준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6월 9일, 이한열이 머리에 치명상은 입었다. 다음 날 노태 우는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수십만 명의 한 국인이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렇게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한국인이 거리로 나섰다. 파업 건수는 늘 어났다. 전두환, 그리고 이제 노태우가 더 이상 폭력에 의존하 지 말라는 국제 사회의 압박을 받았다. 게다가 경찰이 시위대 를 해산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최루탄의 재고가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이제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말고는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투쟁이 시작되었다. 국민은 승리를 염원했다.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을 선언했다. 폭력은 멈췄 다. 한국인들은 원하던 바를 얻었다. 노태우는 장관들을 비롯 하여 정치인과 기자들로 가득한 방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국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연설을 할 참이었다. 이는 나 중에 「6.29 선언」으로 알려진 대국민 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발전을 위한 특별 선언이었다. 

- 1987년 10월, 한국의 헌법은 2023년을 기준으로 마지막이자 아홉 번째로 수정되었다. 국회가 새 헌법을 통과시키고 난 뒤, 유권자의 94퍼센트 이상이 국민 투표를 통해 이를 승인했다. " 그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은 오직 한 번, 그리고 갱신이 불가능 한 5년 임기 동안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유권자인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그 렇게 한국은 강력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대통령은 5년 후새 로운 이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지 속적인 쇄신을 보장했다.
- 노태우는 1987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전두환의 쿠데 타에 동참했고, 전두환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전두환 방식의 독재 정권을 이어 나가기가 불가능해지고 나서야 민주주의로 의 이양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노태우 정권의 많은 고 위 인사는 전두환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정 부 조직은 전두환 정권은 물론 많은 경우에 박정희 정권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에 비판자들은 노태우 정권을 <5.5>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이는 전두환의 제5공화국과 그들이 보 기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제6공화국 사이에 있는 정권을 일컫 는 말이었다.
- 그리고 비판자들은 한국의 보수적인 민주화>에 대해 말했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독재자들은 사라졌 다. 한국인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되었으며, 정당은 권력을 차지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체제 의 전면적인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 서 권력을 잡고 독재만큼이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편안해 보이는 기존 엘리트 집단을 대체하지 못했다. 제도와 정당은 스스로 쇄신하지 못했고 젊은이들은 민주화된 정치적 권력이 라는 전리품을 나눠 갖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 그 중요성은 비교적 낮지만 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상징하는 롯데월드가 1989년에 서 울에서 문을 열었다. 롯데월드는 당시 세계 최대의 실내 놀이 공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21세기까지도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많은 한국인은 사회 동요와 저항, 시위의 분위기에서 벗 어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힘들게 얻은 소득과 민주주의를 누 리고 싶어 했지만 그 새로운 테마파크가 과거와의 단절을 상 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사는 실제로 전두환 시절인 1984년에 시작되었다. 

- 워싱턴 컨센서스consensus. 이는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미 재무부가 추진했던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말한다. 세 기관은 모 두 걸어서 15분 거리 내에 자리 잡고 있고 백악관에서도 멀지 않다. 1980년대에 세 기관은 이 개혁 프로그램을 밀어붙였으 며, 특히 남미 지역에 집중했다. 전두환 역시 그 프로그램에 관 심을 가졌지만 궁극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냉전 시대가 지나간 후, 세 기관은 중동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사 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이 정책을 실행했다. 동 아시아 지역도 포함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에는 세 가지 신자유주의 원칙이 있다. 1980년대 이후로 변하지 않고 그대 로 남은 그 원칙이란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자유화를 말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금융 위기와 대규모 실업 사태를 유발 하면서 전 세계 국가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 도 1990년대에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개발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단 하나의 분명한 길처럼 보였다.
이전에 한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관련된 정책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한국 경제의 개발 모형은 민간 기업들과 협력하는 국가의 <잘 보이는 손>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특히 재벌을 비롯한 많은 기업이 국가가 관리하기에 그 덩치가 지나치게 커졌다. 그리고 1990년대 초 한국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면 을 맞이했다. 정치가 완전한 자유를 맞게 된 상황에서 한국은 정책적인 차원에서 경제 간섭주의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경 제는 완전히 자유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미국을 비롯하 여 서유럽과 일본과 같은 부유한 나라들은 어쨌든 자유 경제 를 도입하지 않았던가? 이는 노태우, 그리고 특히 김영삼이 직 면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자유화를 향해 나아가기로 선택했 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한국이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다.

-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과학 기술 자문 위원회는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특수 효과는 특히 놀라웠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더 충격적인 사실이 숨어 있었다. 1년 후 「쥬라기 공원은 현대가 150만 대의 자동차를 판매 하는 것과 맞먹는 수입을 벌어들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룡 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사실이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가장 무시무시한 측면이었다. 한국 정부도 전 세계에 수출할 수 있 는, 이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상품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정부로서는 고맙게도 한국의 기업가들은 인기 있는 문화 상품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러한 분위기에서 SM 엔터테인먼트와 YG 엔터테인먼트, 그 리고 JYP 엔터테인먼트가 각각 1995년과 1996년, 1997년에 설립되었다(SM 엔터테인먼트의 기원은 1989년으로까지 거 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케이팝의 놀라운 성공 신화를 주도한 <3대>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영화 제작사들 또한 크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영화사들이 인 기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왜 우리는 할 수 없단 말인가? 이에 강제규는 한국 특수 요원들과 북한 공작원의 이야기를 그린 「쉬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삼성을 비롯한 여러 기업은 그 작품을 한국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자금을 투자했다. 1999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수 익을 올린 작품이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흥행 몰이에 성공했다. 이처럼 문화는 한국의 또 다른 성장 동 력으로서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김영삼의 경제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경제 성장률은 1994년과 1995년에 9퍼센트를 넘어섰다. 1993년 3퍼센트에 가깝던 실업률은 1996년에 2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불평등 수준은 낮게 유지되었다. 한국은 첨단 선박에서 고유한 케이팝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각화된 상품과 수출에 힘 입어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해 있었다.

- 그런데 한국은 어쩌다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까? 그것은 IMF가 지지했던 워싱턴 컨센서스 정책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97년 한국을 강타한 금융 위기는 본질 적으로 1990년대에 걸쳐 한국이 선택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이 국내 부패 척결의 정책 실패와 맞물리면서 벌어진 결과물 이었다. 국내와 해외 요인이 결합하면서 한국 경제는 불행한 운명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OECD 가입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을 강력하게 압박함으로써 금융 위기를 재촉했다. 한국 정부는 자본 이동 의 자유화 규정을 지켜야 했다. 금융 시스템의 자유화 규정은 국내 기업과 은행이 정부 승인 없이도 외화표시채권을 발행 하도록 하고, 해외 투자자가 원화 표시 채권을 매입하도록 허 용하며,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주식을 사들일 수 있는 한계를 없애는 방안을 담았다. OECD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럼에도 노태우와 김영삼 정부에서 일했던 많은 관료는 이러한 압박을 오히려 환영했다. 그 이유 는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쨌 든 한국의 은행과 기업들은 장기적인 국내 프로젝트를 뒷받침 하기 위해 달러로 표시된 단기 채권을 대규모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좋은 조합이 절대 아니었다. 동시에 부패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정부와 재벌 간의 연결 고리는 그대로 남았다. 실제로 김영삼의 아들은 1997년 5월에 한보 스캔들과 관련된 뇌물수수 및 탈세 혐의로 체포되 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그 철강기업의 여러 임원 이 김영삼의 아들을 비롯하여 장관과 대통령 측근을 포함한 여러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김영삼은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한보 스캔들은 정부와 재벌의 긴밀한 연결 고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줬다. 한 국정부에게는 부패를 뿌리 뽑을 능력, 혹은 어쩌면 의지가 없 어 보였다.
- 나아가 많은 재벌 기업은 은행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혹은 정부의 압력 행사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것은 노 태우 정부도, 그리고 김영삼 정부도 쉬운 대출과 재벌 투자, 그 리고 경제 성장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보 스캔들은 결국 정부 관료들이 그 철강 거물에게 값싼 대 출을 제공하도록 은행을 압박한 사건이었다. 은행들이 자발적 으로, 혹은 정부 압력으로 재벌에게 대출을 제공하고 OECD 가입에 따른 개혁으로 해외 자본이 유입되는 가운데 한국 경 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문제의 조짐은 1997년 1월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당시 한보는 60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파산을 신청했다. 삼미철강과 음료 기업인 진로, 자동차 기업인 기아, 쌍방울 등 여러 다른 재벌 기업이 뒤를 이어 파산을 신청하거 나정부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35개 은 행이 힘을 모아 파산을 막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82 한국 경제 전반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점점 더 많 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부채 문제를 드러내면서 한국은 구조 적 위기에 봉착했다.
마지막 타격은 태국에서 왔다. 1997년 7월 태국은 갑작스러운 자본 인출사태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단기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 하고 있었다. 또한 태국의 바트는 투기 공격을 받았다. 7월 2일 태국 정부는 환율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달러에 대한 바트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돈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후 투 자자들은 태국에 투자한 돈을 회수했다. 단기 달러 표시 채권 을 상환할 수 없게 된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하나씩 쓰러졌다. 겁을 먹은 해외 투자자들은 똑같은 운명에 처할 위험이 있는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필리핀과 특히 인도 네시아가 물망에 올랐다. 그리고 한국의 차례가 왔다.
투자자들이 한국으로부터 돈을 빼내 가기 시작할 때, 한국정부와 은행, 기업들은 서울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무실에서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기업의 파산 은 은행에 엄청난 부실 채권을 남겼다. 은행들은 단기 달러 표 시 채권을 상환해야 했다. 한국은행은 미국 달러 대 원화의 가 치를 유지하기 위한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위기에 직면했다. 중앙은행이 두 통화 간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면 은 행과 기업들은 부채를 상환할 수 없었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 면 한국 기업들은 외국 채권자에게 달러를 상환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11월 21일에 김영삼 정부는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역사로 남았다. 이 일은 한국인들이 1960년대 이후, 첫 진보 대통령 선출과 더불어 깨어나고 싶은 악몽으로 기록되었다.

- 2002년 12월은 386 세대를 위한 진실의 순간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2000년 총선에서, 그리고 2002년 6월 지방선거 에서 이름을 바꾼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을 이겼다. 그리고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한 이회창은 대선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했다.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은 혜성처럼 나타난 후보자였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처음으로 국민경선제를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다. 제5공화국 청문회 스타이기도 한 노무현은 경선에서 이길 것으로 보이지 않았 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그리고 그는 대선 운동 기간 내내 여 론조사에서 이회창을 추격했다. 선거가 임박했을 무렵에 노 무현과 이회창은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나이 많은 유권자들은 전통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 고자 하는 의지가 더 높았다.
- 선거 당일에 386 세대는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투표장에 나섰다. 동시에 노무현은 한국의 X 세대는 물론, 밀레 니얼 세대로부터 <예상치 못한> 지지를 얻었다. 1970년대에 태어난 X 세대는 386 세대를 비롯한 이전 세대에 비해 더 자 유로웠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특별한 애착을 느끼지도 않았다. 어쨌든 한국의 독재에 맞선 김대중의 투쟁은 그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 싸움은 기껏해야 그들이 어린아이였거나 10대 시절에 겪었던 지나간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대 중의 진보적 개혁의 계속되기를 원했고, 이는 또한 노무현의 약속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이후로 태어난 밀레니얼은 대학생 단체가 그들에게 불어넣었던 더 자유로운 가치관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냉담한 것으로 알려 진 밀레니얼 세대는 온라인 뉴스를 통해, 그리고 문자 메시지 와 막 시작되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집결했다. 당시 한국에 막 들어왔던, 그리고 인터넷의 위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 던 외국인들은 어떻게 이 새로운 매체가 당시 그들의 나라에 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쳤는지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는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 노무현은 아마도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일 것이다. 2000년에 창간되어 한국 최초로 독자들의 기고를 기사로 실 었던 온라인 신문인 오마이뉴스는 386 세대와 X 세대, 특히 젊은 밀레니얼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 이러한 젊은 매체 가 당시 선거의 판도를 뒤집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 는사람은 거의 없다."

- 사회적 변화와 호주제 폐지
진보주의 10년은 한국의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와 함께 이뤄 졌다. 그 변화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노력에 의해, 그 리고 동시에 스스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었다. 무엇보다 사회 속 여성의 역할이 크게 바뀌었다. 1990년 대 중반 상속권과 이혼에 따른 권리와 관련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막기 위해 도입된 법률의 변화는 즉각적인 효과를 드 러냈다. 1990년대 초에서 노무현의 임기가 막바지에 이른 2007년 사이에 이혼율은 두 배 이상 높아졌다. 다른 한편으로 출생률은 지속적인 하향세를 그렸다." 동시에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1997년에서 2007년 사이에 26세 이하에서 31세이상으로 높아졌다.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용인 가능한 모습이 되었다. 물론 보편적인 현상은 아 니었지만 미혼모도 더 이상 사회적 금기가 아니었다. 결론적 으로, 2000년 중반 한국 여성들은 과거의 유교 가치관의 명령 에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선진국 여성들과 같은 방식으 로 행동했다. 그리고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이나 여학생의 목 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이러한 흐름은 계속 해서 이어졌다.

- 2013년 2월 박근혜는 한국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한국 역사상 왕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 대 통령이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보수 진영에서도 일부 반 대세력은 이러한 점에서 박근혜를 비판했다. 그들은 새 대통 령이 좀처럼 소통하지 않으며 은밀한 방식으로 아무런 논의 없이 의사 결정을 내린다고 지적했다. 10 실제로 대중과의 단절 과 은밀한 의사 결정 방식은 이후 박근혜가 몰락하게 되는 원 인이 되었다.
그래도 박근혜는 취임 후 몇 달 동안 허니문 기간을 누렸다. 그녀는 내부적인 분열로부터 거리를 유지했고, 불평등 해소를 위해 노무현의 정책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박근혜는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36곳에 달하는 정 부 및 공공기관을 이전했다." 박근혜는 이명박과는 달리 성 장 그 자체보다 행복과 자기 충족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후 5월에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는 미 의회의 상하원 합동회의에 서 이례적인 연설을 했고 호평을 받았다. 이는 고국에서 새 대 통령의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름 동안에 그녀의 지지율은 60퍼센트를 넘어섰다. 12 박근혜는 보수주의자였지 만 이명박과 비교할 때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자였다. 그 리고 상대 진영과의 분열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 다. 이는 일부 진보주의자조차 인정하는 바였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주하는 인류  (0) 2024.09.28
증류주의 자연사  (0) 2024.09.01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0) 2024.05.17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1) 2024.05.17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  (1) 2024.05.12
Posted by dalai
,

- 이집트인은 나일강을 통해 다른 지역과 물자나 문화를 교류하며 더욱 번성하게 됩니다. 게다가 서쪽으로는 광활한 사 막이 펼쳐지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바다가 둘러싸니 외세의 침략 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환경까지 갖췄던 셈입니다.
이집트인들의 삶은 평화롭고 여유로웠기 때문에, 이 행복을 죽음 이후에도 누리고자 했어요. 사후 세계를 믿으며 영혼불멸 사상을 가진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을 '내세적 세계관'이라고 합 니다. 반면 외적이 사방에서 침입하기 좋은 개방적 지형에서 살 던 메소포타미아문명인은 사후 세계까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당장 먹고살기가 바쁘고 힘들었기 때문에 현생의 행복에 집중하는 '현세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지요.
시간이 흘러 이집트에는 도시와 계급, 국가가 형성됐는데요. 기원전 4천 년경에 이르자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 라는 두 개의 왕국이 탄생했고, 기원전 3000년경에는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하며 본격적인 초기 왕조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뒤의 이집트 통일 왕조는 크게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로 나 뉘는데요. 고왕국 시대는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시작한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라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불립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뗐지만, 이제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서로 가지려고 싸 우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 논,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이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공격을 개 시한 이른바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보잘것없는 전력의 이스라엘군과 영국식 군사 교육을 받은 아랍 연합의 싸움. 언뜻 봐도 게임이 안 될 것 같지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군은 절박감이라는 최종 병기로 결국 도시를 지켜냈 고, 이집트가 속한 아랍 연합군은 분열되며 결국 전쟁에서 패배 합니다. 당시 이집트의 국왕 파루크 1세는 사치에 빠져 있고 나 랏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 와중에 전쟁에서 패전까지 하니 나 라가 시끄러웠죠. 이 틈을 타 이집트 군인 출신 가말 압델 나세 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1956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이로써 이집트의 군주제는 사라지고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집트 초대 대통령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 습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선박 통과를 금지당 해서 뿔이 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1956년 에 일어난 제2차 중동전쟁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자신들과 상 의도 없이 과격한 전쟁을 벌인 세 국가에 분노했고, 유엔의 중재 로 1년 뒤 전쟁이 종결됩니다. 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나세르를 중심으로 아 랍민족주의가 단결하게 됩니다.
1958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한 나라로 합쳐 아랍연합공 화국이 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국가를 무리하게 합치려니 통 합 운영에 문제가 발생했고, 3년 뒤 시리아의 독립선언으로 다시 분리됩니다. 이후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뒤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둔 6일 전쟁'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지요.
1971년에는 나세르에 이어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됩니 다. 사다트는 잃어버린 수에즈운하 동쪽, 시나이반도를 되찾기 위해 이를 갈고 복수를 계획했어요. 2년 뒤 제4차 중동전쟁이 발 생합니다. 이 전쟁으로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이 석 유 수출을 줄이고 원유 가격을 인상하면서 오일쇼크가 일어나죠. 1981년 사다트는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암살당하고, 부통령 인 호스니 무바라크 Hosni Mubarak가 대통령이 되어 철권을 휘두릅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민주주의 정부가 세워지는데요. 하지만 이슬람주의를 강조하며 종교와 정치를 결합하려는 세력과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려는 세 속주의 세력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집권 1년 만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면서 이슬람주의인 무르시 정권이 축출되고, 2014년 세속주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압델 파타 엘시시Abdel Fatah al-Sisi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 19세기 유럽을 세 단어로 정리하자면 '산업혁명', '제국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입니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다 닐 때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특히 독일의 민족주의는 정말 강력했어요. 중부 유럽을 느슨하게 묶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결국 해체된 19세기, 제각각 쪼개진 나라들이 다시 민족주의 정신하에 독일연방으로 묶이게 됩니다.
당시 독일연방 중에 오스트리아가 힘이 제일 셌고, 그 뒤를 프로이센이 바짝 따라오고 있었죠. 느슨한 연방을 강력히 통일하자는 여론 속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 자리에 앉힙니다. 과격파 비스마르크는 연설을 통해 그 유명한 철혈정책을 발표했어요.
- "독일의 통일 문제는 철과 피, 즉 군대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프로이센 주도하에 독일 통일을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비스마 르크는 의회와 대립하며 군비를 확장해갔고, 이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던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게 바로 1866년 6월 14일 발생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은 독일연방 내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었어요.
모두가 잘나가던 오스트리아를 눌렀다는 승리감에 취해 있었 지만 비스마르크는 냉정히 지금 상황을 계산합니다. 지금 오스트 리아에 굴욕을 주는 것보다는 독립국으로 놔두고 자존심 좀 챙겨 줘야 나중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로이센을 돕거나 최소한 중립 이라도 취할 것이라는 똑똑한 생각을 했던 거죠. 세계 정세 파악 이며,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머리 돌아가는 것이 장난이 아니죠? 이미 눈치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외교 천재였습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이미 능수능란하게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켜둔 상태였죠. 비스마르크의 물밑 작전 덕분에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에서 퇴출됐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1867년 북독일연 방을 수립해요.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통일을 견제했습니다. 특 히 이웃 나라 프랑스가 통일에 부정적이라고 파악한 프로이센은 먼저 프랑스부터 치기로 결정합니다. 3년 뒤에 일어난 '프로이 센-프랑스 전쟁'에서도 프로이센은 승리를 일궈냈죠.
이때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기도 합니다. 고작 여러 개로 쪼개진 독일연방 중 하나에 불과한 프로이센이 당시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를 꺾어버리다니, 프랑스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납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로 가는 마 지막 장벽,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마침내 독일 통일을 완성해요.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침략한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독일제국을 선포합니다.

- 1964년, 미국 군함이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의 습격을 받 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미 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으며 전쟁에 뛰어드는데요. 나중에 <뉴욕타임스>는 통킹만 사건에 대한 주요 정보가 왜곡된 상태로 전달됐음을 폭로해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허위 보고 를 근거로 베트남전쟁 개입을 결정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 는데, 개입의 궁극적인 원인은 도미노 이론이었습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쟁은 남북의 전면전으로 확 대됐습니다. 미국이 뛰어든 이 전쟁을 통상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는데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프 랑스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베트남의 독립 전쟁이었다면 제 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북베트남 사이의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1965년에 약 18만 명을 투입했던 미군은 4년 뒤에는 두 배 이상인 약 48만 명, 최대 54만 명까지 병력을 증강해 투입했습 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에도 파병을 요 청했는데요.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한국은 1964년에 의료진들을 파견한 후 백마부대,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지요. 베트남 옆에 있는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군대가 개입되면 서 전장은 베트남을 넘어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됐습니다.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하 지만 외세에 대해 끝없이 투쟁해 온 베트남 역시 만만치는 않았 습니다. 미국 역시 베트콩들의 게릴라 공격에 당하고만 있어 답 답한 상황이었어요. 꾸찌Cu Chi 지역의 정글 아래로 만들어진 약 250킬로미터의 '꾸찌 땅굴'은 베트콩들의 근거지였습니다. 밤이 되면 땅굴에서 튀어나와 미군을 습격하고 다시 땅굴로 들어가는 데, 바로 뒤쫓아도 미군의 커다란 덩치로는 그 작은 땅굴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엄청나게 어둡고 비좁은 땅굴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방향으로 뚫린 통로가 있는데, 땅굴은 지하 4층까지 뚫려 있고, 중간중간에는 식당이나 작전 회의실 같은 공간도 있었습니다.
공중전에 자신 있었던 미군, 하지만 공중에서는 울창한 숲밖 에 보이질 않고, 숲속에 숨어 있던 지대공미사일이 여기저기서 항공기를 격추했어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 이 치솟았죠. 베트남전쟁에서 그토록 민간인 학살이 많았던 이 유도 이 때문입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 게다가 지역 주민들은 베트콩을 도와주거나 숨겨주며 게릴라에 합세했기에 저 사람이 민간인인지 게릴라군인지 구별하기가 어 려웠다고 하죠.

- 19세기에 들어서자 중세 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고, 서양 열 강에 의해 이스라엘 땅은 새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이 됩 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점차 늘어 났고, 20세기 초에는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히브리어도 부활했어 요.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될 발판이 마련된 것이죠. '시온주의'란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 동으로, 예부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과 동의어로 사용된 '시 온'에서 딴 이름입니다.
그동안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서 늘 공동체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었고, 너무도 쉽게 집단증오의 희생양이 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유럽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땐,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었다는 소문으로 학살당하는가 하면, 십자군 전쟁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수도 없 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종교·문화·경제적인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중세 유럽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기 때문입니 다. 유럽인은 유대인을 경멸했으며, 유대 민족은 사회적 차별에 환멸을 느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땅을 향한 유대 인의 애착은 유대 민족이 조상의 땅을 되찾는다는 시온주의 사 상까지 이어진 거죠.
-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었고, 1917년 에 승전국 중 하나인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게 되었어 요. 영국은 불과 2년 전,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에게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선, "유대인, 너 희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 라고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가 유대인에 게는 이와 정반대의 약속을 한 겁니다. 이러한 '푸어 선언'으로 아랍인은 뒤통수를 맞았고, 유대인의 시온주의에 기름을 들이붓 게 됩니다. 결국 벨푸어 선언이 이스라엘 건국에 촉매 역할을 하 면서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된 셈이죠.
-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한다는 영국의 표명으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는 이주민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고, 유대인은 이를 민족적으로 부응해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이어갑니다. 하지 만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죠. 유대인의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으며, 거의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민족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1939년에 발발합니다. 전쟁 중 나치 정권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 체를 말살하려는 계획인 '홀로코스트'를 치밀하게 수행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히틀러는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고, 이로 인해 또다시 유대인의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즘은 급 격히 발전합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중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 가, 결국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겨버립니다.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로 쪼개서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하자고 제안하는데요. 유대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 였으나, 아랍인은 거부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이 가진 땅은 전체의 6퍼센트였는데, 유엔의 권고대로 땅을 분할 하게 되면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나 차지하게 되는 거 라, 아랍인 입장에서는 불평등한 제안이었죠.
- 유엔의 투표 후,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랍인은 이스라엘 땅으로 규정된 지역에서도 떠나지 않고 싸웠고, 이스 라엘은 아랍권의 반대에 맞서 텔아비브에서 건국을 선포하면서 아예 쐐기를 박아버립니다. 1948년,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에 이 스라엘이 건국된 것이었죠. 이스라엘이 건국되며 팔레스타인 땅 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내쫓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2,000년의 유랑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우리의 고향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였지만,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난민 이 된 대재앙이었어요.
이때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요.
이슬람교를 믿는 주변 국가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유대교와 기독 교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다음 날, 아랍 국가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고,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와 총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먼저 1948년에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을 두고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고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전쟁이라고 부 르는데요. 당시 이스라엘의 전력은 아랍 국가들에 비해 모든 면 에서 열세했어요. 당연히 전쟁은 아랍 국가들의 승리로 끝날 것 만 같았지만 이스라엘은 독립된 나라를 지키겠다며 죽기 살기로 싸웠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신무기로 전투력을 보강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과소평가한 데다 각자의 이익을 챙기려다 보니 서로 불신이 가득한 상태였고요.
결국 유엔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결됐는 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대략 80퍼센트를 차 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주민 약 80만 명이 인근 아랍 국가로 이동하면서 대규모 피난민이 발생하게 되었어요.
이후에도 유대인과 아랍인의 싸움은 계속 이어지다가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두 번째 전쟁은 '수에즈전쟁'이 라고도 불리는데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운하를 봉 쇄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선박 통행을 금지한 이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시 이스라엘은 물론 수에즈운하의 대주주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대응해 공격하면서 제2차 중 동전쟁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미국이 즉시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고 소련도 이를 지지하면서 결국 정전이 이뤄지게 됩니 다. 결국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인정 받으며 아랍권에서 입지를 높이게 됩니다. 또한 제2차 중동전쟁 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난 중동 지역에 미국과 소련이 앞다 투어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1967년에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전쟁'이라고도 부릅 니다. 인근 아랍 국가로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 중에서 유대인을 향한 테러 활동이 이어지며 중동 세계의 긴장 이 계속된 가운데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이 이스라엘과 한판 붙게 됐는데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 며 예루살렘 성지 획득과 함께 독립 초기의 여덟 배가 넘는 영토 를 지배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더 많아지고 아랍 국가 의 반미 감정도 더욱 심해집니다.
뿌리 깊은 갈등이 계속 심화되는 가운데 1973년 10월 6일에 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시기는 이슬 람의 신성한 라마단 기간이자 유대교의 최대 명절이자 속죄일인 욤키푸르Yom Kippur였기 때문에 '라마단 전쟁' 혹은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 16세기 중반까지 화려했던 영광의 시대는 쉴레이만 1세가 사망하면서 점차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중심을 통제하자 유럽 열강들은 아시아와 직접 무역하기 위해 새로운 무역로를 모색했어요.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일찍이 세계지도를 그리며 모험을 시 작했고, 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유럽 열강들은 아메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키웠고, 오스만제국은 16세기 후반부터 쇠약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로마군이 철수한 후 브리튼섬은 혼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로마의 빈자리로 사회 시스템이 와르르 무너진 거지요. 계속해 서 주변의 침략을 받자, 브리튼 사람들은 땅을 지키기 위해 용병 을 불러들였어요. 그들은 바로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 슨족 전사들이었지요.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섬 원주민들에게 땅을 제공받는 대신 섬을 방어해주기로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한 틈에 앵글로 색슨족은 오히려 브리튼섬을 장악해버립니다. 침략에 맞서 싸워달라고 부른 용병들이 오히려 정복자가 되어버린 거죠. 이렇게 앵글로 색슨족은 이 땅 의 새로운 주인이 됩니다. 원래 브리타니아로 불리던 브리튼섬은 이후 '앵글로인의 땅'이라는 뜻에서 잉글랜드라고 불리게 됩니다. 앵글로 색슨족은 서로 지역을 나눠 일곱 개의 작은 왕국을 세웠고, 이 왕국은 약 200년 동안 끊임없이 지배권 전쟁을 벌였습니다.
8세기 이후, 바이킹이라 불리는 북유럽 해적의 등장은 앵글 로 · 색슨족이 세운 칠왕국에도 피바람을 불러왔습니다. 파괴왕 바이킹의 무자비한 약탈로 인해 왕국에는 식량이 남아나질 않았 지요. 칠왕국 중 하나인 웨식스의 앨프레드대왕은 바이킹의 식 량 줄을 끊는 전략을 써서, 결국 바이킹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 땅따먹기 싸움을 계속하는 진짜 이유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새로운 전쟁 의 서막을 열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지요. 러시아가 전쟁 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2014년, 러시아는 우 크라이나에 있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어요. 세계에서 가 장 광대한 육지 면적을 가진 러시아가 여전히 땅따먹기를 멈추 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우크라이나 침공의 핵심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NATO가 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나토는 냉전 초기에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이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군사동 맹이죠.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가입해서 친러가 아닌 친서방 진 영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절대 두고 볼 수 없었습 니다. 가뜩이나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됐을 때 소련 편이었던 옛 소련권 국가들이 줄줄이 나토에 가입했는데, 이제 코앞에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한다고 하니 푸틴은 심각한 안보 위기를 느낀 거지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원정 할 때도, 2차 대전 때 나치가 러시아를 침공할 때도 우크라이나 를 지나갔듯,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우크라이나는 러 시아의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완충지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크라이나 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원래 옛 소련에 소 속되어 있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국가이기도 하고, 두 나라의 공통적 뿌리는 키이우 공국에서 출발합니다. 현재 우크 라이나 수도가 키우고요. 푸틴과 많은 러시아인은 막강했던 옛 소련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하며 언젠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조지아를 잇는 과거 제국을 다시 세우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식량 창고'로 유명할 만 큼 기름진 흑토를 가지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탐나는 땅이죠.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라, 땅 부자 러시아가 예로부터 더 넓 은 영토를 갈구해온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1년 내내 얼지 않아 배가 출입할 수 있는 항구인 '부동항'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영 토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대부분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북쪽 에 있으니, 수많은 항구가 겨울마다 얼어버려서 배가 다니지 못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그토록 전력을 쏟 아왔던 거지요. 부동항은 러시아가 연중무휴로 해상 무역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글로벌 패권을 쥘 수 있는 해군력의 전략적 이동에도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현재 러시아가 유럽 쪽에 보유한 유일한 부동항은 폴란드 위 쪽에 있는 발트해의 칼리닌그라드인데요. 칼리닌그라드는 원래 독일 땅이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편입되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가 독립하자 러시아 본토와 뚝 떨어진 채 러시아의 중요한 부동항으로 자리 하고 있어요.
칼리닌그라드는 독일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요.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왕이 즉위 할 때마다 대관식을 치렀던 역사가 있고,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 엘 칸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일은 다시 칼리닌그라드를 되찾고 싶었지만, 1990년에 러시아가 동서 독일의 통일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러 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발트해를 공유하고 있던 핀란 드가 나토에 가입하면서, 발트해도 사실상 나토의 영향을 받게 되었지요.
러시아의 또 다른 부동항은 2014년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차지한 세바스토폴입니다.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으 로 나갈 수 있는 중요한 부동항이죠.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크림반도의 부동항 역시 안전을 보장하기 힘든 상황 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러시아는 어디로 눈을 돌리게 될까요? 지구온난화가 뜻밖에도 러시아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고 있습니다. 꽝꽝 얼었던 북극해의 얼음이 빠르게 녹고 있고, 소멸 시기는 10년 이 빨라진 2030년으로 예측되고 있어요. 이미 푸틴은 북극해에 서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실행해왔습니다.
앞으로 해빙이 녹아 북극해가 활짝 열릴 경우, 러시아는 18세 기 이후 그토록 온 탐해왔던 부동항을 손쉽게 얻게 되며 더 이상 서방 세력의 간섭 없이 강력한 해양 패권을 가질 수 있게 됩니 다. 지구본을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상상했을 때, 지구본 윗부분 의 북극해를 곧장 지나가면 아시아 대륙과 유럽을 최단기간으로 연결해주는 새로운 항로가 만들어지죠. 그래서 북극 항로는 강 대국들의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 무대로 떠오르게 되었고, 미국 과 중국도 이곳에서 열심히 기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류주의 자연사  (0) 2024.09.01
새우에서 고래로  (6) 2024.07.14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1) 2024.05.17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  (1) 2024.05.12
세상 모든 것의 기원  (3) 2024.04.26
Posted by dalai
,

- 동굴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장소였다. 그것은 방법에 대한 지식 노하우 know-how가 아니라 이유에 대한 지식 노와이know-why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굴 속 그림과 상징, 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다른 관습으로 발전했다. 노하우가 늘어나면서 인간은 거주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중 일부는 피난처로 사용했지만 일부는 의식 을 행하고(사원과 교회), 공연을 하고(극장과 공연장), 이야기를 하는 특 별한 경우에만 방문했다. 노하우를 발전시킬수록 우주에서 우리 위 치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 우리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새로운 방법도 더욱 발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노하우의 이야기는 도구, 과학, 기술 그리고 자연계를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노와이의 이 야기는 의미를 만드는 활동인 문화의 역사와 관련된다. 그것은 인문 학의 영역이다.
- 디지털 기술로 인해 문화 콘텐츠가 풍성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된 파일 형식, 웹사이트,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없게 되는 속 도 또한 가공할 정도로 빨라졌기에 과연 우리가 조상들보다 과거를 정말로 잘 보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문화의 저장과 배포 기술은 바뀌었지만 문화가 작용하는 방식, 즉 저장되고 전파되고 교 환되고 복원되는 방식을 지배하는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의 거 의 모든 문화가 끊임없이 서로 접촉하는 세상에서도 보존과 파괴, 상 실과 복구, 오류와 적응의 상호작용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된다. 우리 는 과거와 그 과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누가 문화를 소유하 고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두고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싸 운다.
- 현재까지 전해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대부분 교 육을 중요시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들이다. 이들의 유산은 이집트 사제들처럼 문자와 사원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도서관과 사원은 파괴될 수 있고 문자 체계 는 이집트 상형 문자가 그랬듯 잊힐 가능성이 있으니 문화의 저장에 만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마저 화재로 불타 서 수많은 그리스 문헌이 파괴되었고, 기독교 수도사들이 기독교 이 전 시대의 문헌은 필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또다시 수많은 작품이 사 라졌다. 플라톤의 사상이 살아남은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한 세 대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철학 이 널리 알려지고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파 방식 덕분에 플라톤은 철학계 안팎에서 후대 사상가와 작가에게 다양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토피 아 사회 건설에 몰두한 몽상가들은 아틀란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 았고 과학 소설 작가들은 대안적 미래라는 면에서 플라톤에게 끌렸 다. 플라톤은 연극에 직접 몸담은 뒤에 모의 현실을 비판했는데, 이 비판은 새로운 매체에 맞게 업데이트되었다. 1998년 영화 <트루먼 쇼>에는 미국의 전형적인 교외 지역에서 자랐으나 스스로 현실이라 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정교한 리얼리티 TV 쇼였음을 깨닫는 인물 이 등장한다. 1년 뒤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을 주제로 삼아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인물들에게 빨간 약을 내밀었다. 최근 페이스북이 발표한 메타버스가 실현되면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동시에 거짓 역사와 대안미래의 창시자인 플라톤은 분명 할 말이 많을 것이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라시아 교류망이 강화되고 곧 그의 왕 국 너머까지 확대되면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긴밀한 네트워크 가 만들어졌다. 30 이로 인해 농작물과 가축을 비롯해 기술과 문화적 표현 형식을 포함하는 모든 것의 교역이 가능해졌고 질병까지 전파 되었다." 인도 북부,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근동은 모두 비슷한 기 후대였기에 농작물과 가축이 쉽게 적응했다(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여행자들의 경우 불교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코끼리 때 문에 인도의 왕들을 우러러보았다). 이로 인해 인더스 계곡에서 시작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이르기까지 초기 문명의 접촉이 확산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피루즈 술탄에 이르는 정복과 점령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접촉은 폭력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문명의 접촉은 또한 석주와 문자에서 새로운 왕권 개념과 종교 개념에 이르기 까지 기술과 문화의 교환과 발전을 촉진했다.
어떤 면에서 유라시아 문화권은 이 교류망에 속했기 때문에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처럼 동서가 아닌 남북으로 뻗어 기후대가 다양한 대륙의 문화권보다 유리해졌다. 또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는 대체로 횡단과 항해가 훨씬 더 힘들었다. 물론 비교적 고립된 상태로 사는 사람들도 작물을 키우고, 동물을 가축화하고, 새로운 기술과 문 화 관습을 발전시킨다. 게다가 장거리에 걸친 문화 접촉에는 폭력뿐 아니라 질병의 확산 같은 상당한 단점도 뒤따랐기 때문에 고립이 축복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문화 접촉은 역동적인 과정을 촉발하여 인간이 상호작용하고 서로에게 이익을 얻는 방식을 증대시켰다.
-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가 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는 문화 접목의 영광을, 그 가능성과 미묘한 방법을 보여준다. 문화 접목은 패배나 열등함으로 인한 행동일 필요가 없다. 로마 문화의 다 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는 영향력 면에 서 (19세기 초 그리스 비극이 부흥하여 다시 상연될 때까지) 몇백 년, 아니 몇천 년 동안 그리스 극작가들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난 희곡을 썼다. 로마 건축가들은 그리스 모델을 바탕으로 새로운 건물과 사 원 양식을 만들어냈고, 로마 조각가와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플루 타르코스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한 쌍으로 묶어 그들이 얼마나 비 슷한지 보여주는 위인전을 씀으로써 두 문화를 하나로 결합했다. 복잡한 프레스코화, 아트리움 건물, 극장을 갖춘 폼페이는 로마의 문화적 접목의 결과를 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폼페이 광장옆 커다란 건물에 새겨진 베르길리우스의 명문은 로마의 신화적 기원이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라고 설명한다. 프레스코화부터 극장 에 이르기까지 폼페이 전체가 이러한 문화 실험의 증거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 통치 기술과 (도로에서 목욕탕에 이르는) 기반 시설, 군사 조직, 정치적 통찰력 때문에 로마를 우러러본다. 그러나 로마의 가장 놀라운 유산은 접목 기술이다. 사실 미국처럼 역사적· 지리적으로 거리가 먼 문화들이 로마에서 영감을 찾으려 한 것은 로 마가 그리스 문화를 접목시켰듯이 그들도 광대한 거리를 뛰어넘어 로마 문화를 접목시키고 문화 접목이라는 로마의 유산에 간접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한편, 남아시아 조각상은 폼페이와 그리 멀지 않고 조만간 다시 폭 발할 화산이 보이는 대도시 나폴리의 국립고고미술관에 자리를 잡 았다. 만약 화산이 폭발한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조각상을 약탈하거 나 어떤 방식으로든 가져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러면 조각상 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화산이 분출할 때 그녀가 지금 있는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고고학자에게 다시 발굴되기를 기다리 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리라.

-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거의 신화 같은 인물, 중국어 불교 정전을 바로잡고 개선하고 확장해 낸 여행자이자 순례자가 되었다. 이탈리 아어에는 번역가 트라두토레traduttore와 반역자 트라디토레traditore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이용한 농담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번 역가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향이 있으며 번역 작업이 얼마 나 선구적 일인지 종종 잊는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를 기억하는 사람 은 거의 없지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는 누구나 안다.) 오늘날에도 표 지에서 번역가 이름이 빠지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마치 우리는 항상 원본에 접근할 수 있으며, 책은 개개인의 천재가 만드는 것이고, 문 화매개자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믿고 싶어 하는 듯하다. 우리는 번 역가 덕분에 다양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때때로 인정받지 못하는 번역가의 노고에 모든 문화가 의지하고 있으므로 이런 태도 는 더욱 놀랍다. 고대에는 대규모 번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스 문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거나 불교 경전을 중국으로 들여온 것은 예외에 속했다." 당나라가 현장 같은 여행자와 번역가에게 의 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문화적 영웅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당나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현장이 대표하는 것은 그가 번역가로서 한 일보다 중요하다. 그는 (나중에 성지를 찾아 떠나는 기독교도들처럼) 수입된 문화를 쫓아서 그 근원을 찾아간 사람을 대표한다. 문화 수입은 복잡한 역장을 만 들어내기 때문에 수입된 문화가 새로운 현지 문화 host culture에 이미 오래전부터 동화된 후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수입 문화의 기원을 찾 아가면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중국 불자들은 인도에 끌렸으나 감히 서역으로 위험하고 금지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 의 없었다. 현장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다녀왔다. 더욱 중요한 사 실은 그가 성지를 방문하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소식을 가지 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현장이 가지고 돌아온 경전과 물건, 관찰과 경험 덕분에 중국 불교는 부처의 고향인 인도의 불교에 열등감을 느 낄 필요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집에 머물 러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준 순례자였다.
- 일본에 중국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은 두 나라가 몇백 년 동안 계획 적으로 문화 외교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두 나라의 교역은 1세기에 시작되었고 수나라와 당나라 때 가속화되어 외교 회담이 제도화되 었다. 이러한 문화 사절단은 보기 드문 문화 전이 전략이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로마와 그리스의 관계처럼 정복당하지 않았음에도 대규모로 문화를 수입한 또 다른 예에 해당한다. 세이 쇼나곤의 이 야기에서 중국은 고압적이고 어쩌면 위협적인 모습이지만 사실 중 국은 일본을 침략하려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일본이 문화재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견당사라는 외교 사절단을 기꺼이 보냈다. 로마는 그리스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은 중국을 군사 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음에도 문화를 수입했다. 또 로마에서는 그리 스 문화의 수입이 영향력은 컸다 해도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었던 반 면 일본에서는 황제로 대표되는 국가가 문화 전이를 계획했다. 일본 에서는 문화 수입이 정부 정책이었던 것이다.
- 우리는 문화를 평가할 때 독창성을, 언제 어디서 처음 발명되었는 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원조라는 주장은 종종 우월성 과 소유라는 미심쩍은 주장을 뒷받침할 때 사용된다. 그런 주장은 편 리하게도 모든 것이 어딘가에서 왔음을, 발굴되고 차용되고 옮겨지 고 구매되고 도난당하고 기록되고 복사되고 종종 오해받는다는 사 실을 잊는다. 무언가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문화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이며, 우리는 다음에 사용될 때를 기다리며 그 유적을 보존 하는 매개자에 불과하다. 문화에 소유자는 없다. 우리는 다만 다음 세대에 문화를 물려줄 뿐이다.
- 도시 혁명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집약 농업이었다. 도시 를 부양하려면 한곳에 매여 가축을 따라다니거나 새로운 사냥지로 옮겨 다니지 못하는 수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충분한 식량을 주변 지 역에서 운송해 와야 했다. 군사 정복이 아닌 식량 재배 능력이 도시 화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식량을 재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또 다른 기 술, 즉 저장 기술이 필요했다. (복합 주택에 곡식 저장실을 두었던 조각 가 투트모세가 잘 알았듯이) 저장이 가장 용이한 것은 곡물이었다. 곡식 은 일단 수확하면 장기간 보존이 가능했다. 저장한 곡물은 가뭄과 해충으로부터 안전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이 곧 밝혀졌다. 곡물 저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손에 넣었고, 이에 따 라 계층적 사회 구조가 탄생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부를 소유하게 되 었다. 부를 제한하는 것은 저장설비의 규모와 그것을 무력으로 통제 하는 능력밖에 없었다. 이집트 중앙집권 국가의 출현은 이러한 저장 혁명 초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알마문의 선조들은 바그다드를 건설하면서 곡식을 관리하는 고 대의 저장 혁명뿐 아니라 정보와 관련된 저장 혁명도 이용했다. 메 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완전한 문자 체계, 말을 그대로 표기하는 기 호 체계가 탄생하여 이야기를 비롯해 지식을 구술로 전달하는 여러 형태들의 저장이 가능해졌다. 세계 최초의 도서관 중 하나는 아시리 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역시 통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에 서 건설한 도시였다)에 세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 건설한 바그다 드에 과거의 문서 기록을 보존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야심 찬 궁전 도 서관 지혜의 창고가 포함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혜의 창고는 지식을 축적하는 동시에 다양한 정보 유형을 분류하는 새로운 체계 를 이용해 그 지식을 정리하는 곳이었다.
- 중세 바그다드는 제지 산업, 지혜의 창고, 번역가와 주해자, 학자 가 모여들어 아랍 학문 황금기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이번에도 건축 자재로 쓴 진흙벽돌이 문제였다. 진흙벽돌 은 풍족했고 최초의 도시 공간을 탄생시켰지만 몇 세대를 넘기지 못 했다. 보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바그다드의 불운은 버려진 네페르 티티의 아케타톤과 반대로 알 마문의 선조들이 도시를 세운 이후 끊 임없이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도시가 끊임없이 재건되었 다는 뜻이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건축물은 자취가 사라졌기 때문 에 우리는 지혜의 창고가 어떻게 생겼는지, 독특한 단독 건물로 존재 했었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는 남은 흔적을 통해서 지혜의 창고를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어마어마했고 바그다드뿐 아니라 아랍 제국 전체를 배움의 중심지로, 새로운 형태의 지식 보존과 생산이 개발된 곳으로 만들 었다. 어쩌면 지혜의 창고는 단독 건물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 번역, 종합한다는 아이디어, 즉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다른 문화의 산물을 대하는 태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이븐 시나는 한곳에서 꾸 준히 작업하거나 자기 책을 계속 소유하는 사치조차 누리지 못했지 만 그의 저작은 매우 중요했다.
바그다드에서 시작되어 이븐 시나가 완성한 번역 프로젝트는 아 랍 제국 덕분에 바깥으로, 점점 더 거대해지는 영토의 가장 먼 가장 자리까지 뻗어나갔다. 곧 이슬람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될 델리에서는 어느 술탄이 '치유The Healing'라는 이름이 붙은 이븐 시나의 가장 영향 력 있는 숨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아한 사본 제작을 의뢰했다. 
- 그가 바로 무함마드 이븐 투글루크이고, 그의 아들은 장차 아소카 석주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어쩌면 피루즈 술탄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이븐 시나의 사본을 보고 먼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 른다.
동시에 지혜의 창고는 서쪽으로 이베리아반도까지 영향을 미쳤고 아랍 세력은 그곳에 유럽 최대의 이슬람 지역을 만들었다. 이 경로를 통해서 이븐 시나의 저작과 바그다드 번역 프로젝트가 서유럽에 전 해졌다. 그 결과 재탄생, 즉 르네상스라는 잘못된 이름의 문화 차용 이 발생한다.

- 문화사에서 종종 그렇듯 파괴 세력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십자군은 아랍에서 학자들이 쓴 지식의 요약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발전했고 그리스 철학의 아랍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 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 카이로, 알 안달루스에 서 유입되는 문헌이 증가했고,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이 들어왔다. 기독교 작가들은 잃어버렸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을 발견했고(아랍 학자들이 아닌 유럽인들에게만 잃어버린 저작이었다), 이븐 시나와 같은 양식으로 숨마를 쓰기 시작했다. 유럽의 지식 생산 을 바꾸어놓은 이러한 유입을 두 번째 부흥으로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재탄생은 아니지만 경쟁하는 두 제국의 문화 접촉이 늘어났 을 뿐만 아니라 키케로 같은 고전 작가에 대한 흥미가 새롭게 살아나 면서 부흥과 차용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부흥인 동시에 수입이지만 그래도 부흥이라 부를 수 있다 면)의 영향이 수녀원과 수도원, 궁정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고, 무엇 보다도 이탈리아(볼로냐), 스페인(살라망카), 프랑스(파리), 영국(옥스퍼드)에서 서서히 등장하던 대학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은 그때 이후 지식 생산을 형성해 온 새로운 배움의 중심 기관이고 아랍 지혜의 창고에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일부 공청회와 저술(숨마) 형식, 심지 어는 특별한 졸업 가운이나 논문 심사처럼 대학과 관련된 일부 명칭 과 의식은 아랍에서 차용한 것이다.30 (이베리아반도와 유럽 전역 대학에 서 발달한 독특한 독서 관행과 주석은 유대교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 대륙이 스스로를 전적으로 기독교라고 간주할지, 어쨌든 이 슬람교는 아니라고 간주할지를 둘러싼 논쟁에 비추어볼 때 아랍의 사상과 제도가 12세기 유럽에 끼친 영향은 특히 중요하다. 둘 중 어 느 쪽을 택하든 말이 되지 않는다. 12세기의 부흥은 기독교 유럽을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그 덕분에 유럽은 이슬람 사상가들이 그리스 및 로마의 영향과 페르시아를 비롯해 멀리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의 영향을 결합해서 쓴 철학적 저술을 물려받았다.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와 사상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 이제 와서 그 둘 을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된다.

- 마침내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끄는 네 척의 배는 이슬람교도 항해사 들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기 쁨에 넘쳤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들에 감탄했다. 시장에는 향신료와 보석이 넘쳐났고 항구는 북적거렸으며 교역이 활발했다. 그렇다, 마 침내 아랍 세력이 지배하는 중동을 우회하는 항로를 찾아낸 것이다. 더 좋은 점은 인도 어디를 가든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 성인들이 인간의 코 대신 코끼리 코를 달고 있거나, 팔이 너무 많거 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가마 와 동료들은 이런 사소한 부분을 선뜻 무시했다.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땅에서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사이에 섞여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불만은 딱 하나였다. 여기서도 이슬람교도들이 해상 무역을 지배하면서 기독교 원주민들에게 온갖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했다. 그러 나다가마는 성가신 이슬람교도 경쟁자를 밀어내고 기독교도로 추 정되는 대군주들과 거래를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다가마와 동행했던 승무원과 승객들이 설명한 인도에 대 한 첫인상이었고 처음에는 이들의 의견이 포르투갈의 태도를 좌우했다. 그러나 반세기 후 카몽이스가 인도로 떠났을 때에는 포르투갈 도 초기 기록에 오류가 얼마나 많은지 이미 깨달았다. 아프리카 동부 에 전설 속의 강력한 기독교 왕은 없었다(포르투갈인들이 전쟁 중이던 에티오피아인들과 접촉해 이슬람교도에 맞서 싸우던 그들을 돕기는 했다). 기독교 성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도 조각상은 사실 힌두교 신이었다. 그리고 인도아대륙은 부분적으로 무슬림 통치자 무갈의 지배를 받 았는데 그는 현지의 힌두교 통치자를 내버려두거나 그들과 동맹을 맺을 때가 많았다. 카몽이스는 새로 알게 된 지식을 서사시에 넣음으 로써 다가마의 첫 항해가 만들어낸 심각한 오해를 일부 바로잡았다. 다가마가 인도의 이슬람교도 및 힌두교도와 접촉한 후 또 다른 충 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그가 가져온 물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사려 하지 않았다. 다가마가 준비한 선물과 견본은 우스꽝스러 울 정도로 조야했고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다가마와 동행한 군 인과 선원은 비싸게 팔 생각으로 직물 등의 상품에 돈을 투자했지만 포르투갈에서 구입한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음 을 알아차렸다. 이곳에서는 향신료뿐 아니라 거의 모든 물건이 더 값 비싸고 좋았으며 고국에서 보기 힘든 보석이 시장에 가득했다. 포르 투갈에 비해 장인은 솜씨가 더 좋고 상인은 더 부유했으며 궁전은 더 웅장했다. 이러한 부는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사람 들은 또한 유럽에서 본 것보다 훨씬 정교한 고대 유적에 감탄했다. 그들은 인도양의 부유한 교역망에서 가난하고 낙후된 이는 다름 아 닌 자신들임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24
포르투갈인과 만나 선물을 교환한 힌두교도 왕들은 이 허술한 여행자들이 향신료 무역을 위해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왔지만 팔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자 몹시 실망했다. 카몽이스의 서사시에서 다가마는 이처럼 미적지근한 환영을 이슬람교도들 탓으 로 돌리며 '나는 그저 탐험가로서 왔을 뿐"이라고 변명했고, 두고 보 라고, 다음번 돌아올 때는 "얼마나 대단한 상품을 살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다지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니었다.

- 루베르튀르의 성공은 전 세계 식민주의자들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옛 아프리카 노예들이 통치하는 국가가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고 제재와 위협으로 반격했다. 아이티는 제국 열강 의 공격에 포위당한 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아이티 혁명은 오랫동안 세계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미국과 프랑스에 초점을 맞춘 혁명 시대의 역사에서 제외되 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었다. 19세기에 아프리카계 미국 인 작가 윌리엄 웰스 브라운은 전기 시리즈를 쓰면서 투생 루베르튀 르를 포함시켰고, 사회 개혁가이자 노예 제도 폐지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역시 루베르튀르에게 존경을 표했다. 에티오피아 서사시 《케브라 나가스트》에 시선을 돌려 아프리카 고대 문명의 유산을 주 장하고 1915~1934년 미국의 아이티 점령에 저항했던 마커스 가비 역시 그를 존경했다.
- 1938년 카리브해 지역 역사학자 C. L. R. 제임스는 《흑인 자코뱅 당원》에서 투생 루베르튀르를 독립과 혁명의 역사 중심에 놓았다. 그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였다. 제임스는 유럽에서 파시즘이 부 상하던 시기에, 유럽 식민제국 대부분이 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가 곧 식민 지배자들을 몰아낼 것이 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때 투생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아프리 카도 깨어날 것이다."4
생도맹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계몽주의의 변방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다. 생도맹그야말로 계몽주의 사상의 힘과 모호함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도맹그는 무엇보다도 사상 자체 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인이 사상을 포착하 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야만 한 다. 철학자 G. W. F. 헤겔은 나폴레옹이 시대정신의 구현이며 말 등 에 탄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 렸으니 딱 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루베르튀르가 더 좋은 예였을 것이 다. 그는 말 등에 걸터앉아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전 세계 지도를 다 시 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진보하는 역사라는 개념은 해방과 민주화를 통한 정치적 발전이 든, 강력해진 기계를 통한 기술적 발전이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 은 물건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물질적 발전이든, 스스로 계속 발전하 고 있으며 이를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발전이 어디서나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각 분야의 발전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결합했고 영국에 사는 사람들, 적어도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정치적 해방,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기술 혁신, 식민지 영토에서 짜낸 부의 축적이 만들어낸 궤도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진보가 여러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는 생각은 예상치 못한 결 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한 해가 지나 면 다음 해가 온다는 사소한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갈수록 과거를 낯 설게 만드는 변화로 인해서 질적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모든 것은 변 화하며 새로운 환경이 사람들과 그들의 삶과 경험, 생각과 감정까지 바꾸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무작위적 변화가 아니었다. 온갖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변화를 겪었다. 중요한 것은 변 화를 한 방향, 즉 앞을 향해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었 다. 그 결과 과거는 축소되고 쇠퇴했다. 건물이 파괴되고 필사본이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한다는 것은 곧 현재와 과거 가점점 더 멀어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 들을 복원하거나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물 관은 과거로의 회귀이자 방문객들이 잠시나마 시간의 흐름을 거스 르게 해주는 타임캡슐이었다.

- 과거의 편린을 보존하려면 물건을 복원하여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재와 무척 달랐던 과거에 대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믿었는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과 거는 현재와 무척 다르기 때문에 고대 언어로 쓰인 문헌처럼 주의 깊 게 해독하고 재구성해야 했다. 문헌의 연대 측정 방법을 갖춘 문헌학이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고 과학이 또 다른 모델을 제공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을 면밀히 조사하는 모델, 가설을 시험하고 증거에 기초한 엄밀한 연구와 회의론을 통해 생각을 검증하는 모델이었다. 과거를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의 이름은 사료편찬학이었다.
19세기 역사가들에게는 검토하고 배울 수 있는 오래된 모델이 많 았다. 이 책에 실린 정보는 대부분 과거의 연대기 기록, 여행기, 서지 학자와 수집가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집트 사제들부터 투키디 데스 같은 그리스 작가들,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에서 일했던 학자들, 이야기를 구전으로 보존하고 전달한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들 출처와 모든 형태의 증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서야 과거에 대한 글을 쓸 때 가설을 검증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역사적 변화라 는 개념에 따라 반증을 검토하는 구체적 프로토콜을 따르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가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역사의 핵심이 "과거 경험의 본 질을 밝히는 것"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 우리는 여전히 역사주의 시대, 즉 꼼꼼하게 조사해서 쓴 역사 소 설들(보통 역사적 자료의 목록을 제공한다)과 박물관, 원본, 과거의 단편, 도서관과 문서고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세기 이후 세상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 왔고, 따라서 과거는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인간은 어디서나 낯설고 이해우리는 여전히 역사주의 시대, 즉 꼼꼼하게 조사해서 쓴 역사 소 설들(보통 역사적 자료의 목록을 제공한다)과 박물관, 원본, 과거의 단편, 도서관과 문서고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세기 이후 세상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 왔고, 따라서 과거는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인간은 어디서나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잔재와 마주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되살리고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상실감을 피할 수 없 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고학 유적지부터 박물관 과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보존 장치를 만들었고 역사가, 숙련 된 큐레이터, 소설가 같은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 영원히 잃어버릴 뻔 한 과거를 되살려냈다.
우리는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과학 덕분에 과거에 대한 많은 지식 과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분야의 많은 이론가 와 실천가들이 고급문화, 걸작, 문명의 표식을 나누는 기준이 무척 편협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과거를 다루는 과학을 추동하는 진보라는 개념 때문이며, 누가 앞서고 누가 뒤처졌는가에 대한 편향된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과거를 다루는 과학은 사람들 이 무엇을 발굴했는지 알려줄 수 있지만 그 물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그것은 후대인 우리 가 알아내야 한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우에서 고래로  (6) 2024.07.14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0) 2024.05.17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  (1) 2024.05.12
세상 모든 것의 기원  (3) 2024.04.26
대담한 작전  (0) 2024.04.17
Posted by dalai
,

- 유사역사학과 환국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 『삼국유사』를 오독해서 '환국' 이 등장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因의 이체자 문제를 넘어서서 당 대의 많은 사료가 '확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학자의 오독 때문에 '환국'이 등장하고 민족 자존감을 앙양시켜야 했던 역사가들이 '한국'을 주창하면서 잘못 읽은 단어가 널리 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이 과정이 바로잡혀가던 중에 유사역사가들이 '위대한 환국'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다. 애초에 잘못된, 있지도 않은, 사상누각이라는 말도 아까운 해프닝이 바로 '환국이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했는데, 환국의 난이야 말로 우리 역사상 사료 오독 제1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1966년에 문정창이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研究를 내놓 으면서 일제가 '환국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을 폈다. 식민사학자 이마 니시 류가 사서를 변조해가면서 환국을 말살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반일 감정에 편승해 시민들에게 먹혀들었고, 이후 유사역사가들의 단골 메뉴 가 되었다. 문정창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일제의 공무원으로 근무 하기 시작해서 1932년에는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942년에는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1943년에는 황해도 은율군수, 1945년에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 과장을 지낸 친일파다.
- 흑백논리를 벗어나야
유사역사가들의 큰 문제점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들은 신 채호가 한 말을 금과옥조로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식민사학이 된다는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다. 신채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 연 구를 병행했다. 그가 볼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고, 시대도 그를 학 문에만 매진하게 도와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 날 잘못된 것이 있으며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유사역사가들은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이 이병도의 학설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처럼 자꾸 거짓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병도의 학설 역시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사역사가들은 신채호의 주장 중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면 식민사학이라고 하고, 이병도의 주장 중 받 아들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흑백논리 라면 학문은 전혀 발전할 수 없는 고정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은 1960년대부터 발현해서 1970년대를 거치 며 증폭되었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이 태동도 하기 전에 살았던 신채 호가 유사역사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신채호를 역사학계에 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는 등의 거짓 선전선동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신 채호는 그렇게 유사역사학의 방패막이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 사학의 소중한 사람이다.

- 서로 다른 해석이 모여 발전을 이룬다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교과서에 실리면서 학계의 주류 통설처럼 여겨 진 면이 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한국사』(1995)에서는 백 제의 요서경략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학의 통설은 사실이 아닌 쪽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1974년 요서경략설이 실린 이후 2007년 한국사 교과서 개정안에 와서 야 요서경략설과 관련해 논란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라고 했고, 2015년 개정안 집필 기준에서 요서경략설이 빠졌다. 역사학에서 하나의 설이 교 과서에서 조정되기가 이렇게 오래 걸리고 어려운 것이다.
백제가 요서 지방을 차지하고 군을 설치하였다는 기사는 중국 정사에서 확인된다. 기사 작성 시점과 그 일이 있었던 시점이 멀지 않고, 백제와 중국 사 이에 사절의 왕래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해 석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의 논란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 도록 한다. (07개정 역사과 집필기준)
백제가 요서경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논문이 나오자 그에 반대하여 요서와 백제 간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논 문이 또 나오고, 그에 대해 다시 연구하는 논문이 나오면서 역사학계는 요서 지방의 변천을 두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가령 385년 요서 지방에 서는 후연 장군 여암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암은 후연에 잡혀온 부여인 후예로 여겨진다. 그런데 백제 왕실은 부여 씨로 보통 여 씨로 쓴다. 이런 사실이 백제가 요서를 경략한 것처럼 혼동하게 되는 요소였을 가능성도 높다. 반론 속에서 연구가 깊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립대 안정준 교수는 백제가 남조 국가들을 속여넘긴 것이 아니 라, 내막을 뻔히 알면서도 중화 중심의 국제적 권위를 내세움과 동시에 정권의 안정을 기하고자 백제가요서를 차지했다고 허풍을 친 것을 받아 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제 요서경략설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 것이다. 앞으로 이 주장을 두고 더욱 치밀한 검증이 있을 것이다.
역사학은 이와 같이 같은 사료를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서 발전해 나간다.
- 백제인의 선택
그럼 임나일본부라는 건 대체 뭘까? 왜 「일본서기』 안에 들어 있을까? 『일본서기』 안에는 백제 관련 사료가 많이 있다. 어떤 기록은 『삼국사 기보다 양도 많고 정확하여 백제 역사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백제 기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상당히 많은 백제인이 왜로 도망쳤기 때문에 벌어 진 일이다. 백제 망명객은 당시 왜에 비하면 학식이 훨씬 뛰어난 사람들 이었다. 이들은 신라를 향한 커다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고, 왜가 자신 들과 같은 이해관계에 놓이길 바랐다. 그런 결과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 벌했다는 이야기에 이리저리 살을 붙였고, 더 나아가 백제는 왜에 충성 하던 나라고 가야 연맹은 모두 왜가 지배한 곳이라는 역사 왜곡을 감행 한 것이다.
- 유사역사학과 임나
유사역사가들은 임나와 임나일본부를 구별하지 않는 전략을 쓰고 있 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임나일본부를 인정 하는 학자는 한 명도 없는데, 유사역사가들은 역사가들이 임나일본부를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임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 들이민다.
임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광개토왕비를 비롯해서 여러 사료에 등장 하는 나라 이름이다. 임나와 임나일본부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이것을 섞어버리고는 아예 임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 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가야 문화인 옥전고분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다라국 같은 경우도 『일본서기에 그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부정 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 말은 <양직공도>라는 중국 사료에도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말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일본서기를 이용해서 천황의 가계가 백제에서 온 것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인다. 그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엄정한 사료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 에 맞으면 집어오고 다르면 버리는 것뿐이다.
세계적으로도 임나일본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는 역사의 전반적인 추세에서 말이 안 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케임브리지 중국사의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의 허상을 잘 지적하 고 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여 되풀이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일본이 학계에 돈을 뿌려서 그렇다는 말도 한다. 그런 돈이 어디에 있는지 진짜 궁금하다.

- 다이나믹한 고대
고대에 문화가 전파되는 가장 빠른 길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승려들이 이동해서 중국으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했듯이, 사람 들이 직접 이동했다. 왜와 가까운 곳의 신라는 왜와 늘 충돌하면서 불편 한 관계였는데, 좀 더 멀리 있던 백제는 왜와 가깝게 지냈다. 신라라는 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두 나라가 가까웠던 만큼 많은 인적 교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왕 인. 담징화 등을 생각하며 한반도에서 일방적으로 일본에 문화 전 파가 있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몽골과 고려 사이에도 문화를 주고받은 것처럼 백제와 왜, 가야와 왜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신라 초기에 대신이던 호공은 왜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탈해 이사금尼師今(재위 57~80)도 왜국의 동북쪽에서 건너왔다고 나온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뿐만 아니라 남해안가에 있는 일본식 고분, 부여·공주 인근에서도 발견되는 일본식 고분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지만 교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자. 어떤 세 력이라고 하기에는 고분의 수가 너무 적다. 이들 고분은 6세기에 들어가 면 모두 사라진다. 이들 왜인은 한반도에 흡수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크 다. 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있던 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를 뒤흔들 수 있 는 강대한 세력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해서 일본식 고분 이 한반도에 존재하는지를 치열한 논쟁을 통해 규명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논쟁을 보면 역사가 완성된 형태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논쟁을 거쳐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 무영탑 전설은 1740년에 나온 화엄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에 처음 실렸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이 전설의 내용을 채록하면서 누이를 아내로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누이가 흔히 아내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무영탑』전설은 맺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로 끝났기 때문에 현진건 이후로도 그 결말이 수시로 변했다. 함세덕이 만든 연극 『무영탑에서 는 아사녀가 자살에 실패해서 아사달과 재회하는 해피엔딩이 되었고, 해 방 후 만들어진 여성국극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시신을 안고 영지로 걸어 들어가 자살한다. 아사달이 불상을 만드는 이야기는 사라져버렸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무영탑>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환상 을 보면서 영지로 뛰어들고 아사달을 사모했던 귀족 딸도 불 속에 뛰어 들어 죽는 것으로 표현했다.
옛날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다시금 재창작되어 마치 그 이야기가 있었 던 사실처럼 변하기도 한다. 아사달, 아사녀와 무영탑도 그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조선시대에도 피가 돌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긴다든가, 그 피에서 대나무가 자란다든가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 문인 홍세태洪世泰는 『유하집에서 피가 돌 속에 스며들 리 에서 없다는 점을, 정동유鄭東愈는『주영편에서 송도에 전해오는 글 가 운데 선죽교 전설을 전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선죽교 변善竹橋(1938)이라는 글에서 남 효온의 글에 정몽주가 죽은 장소가 적혀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광운대 김인호 교수가 「정몽주 숭배의 변화와 위인상」(2010)에서도 잘 논증한 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상징물의 큰 힘에 매료되면 재미도 없는 '사실'은 굳이 따르려 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 이후 형성된 믿음,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깨어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일반 대중 에게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우리는 왜 진짜 사실보다 허황한 이야기에 더 마음 이 끌리는 것일까?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민족 비하로 망가진 한국인의 자존 심을 채워줄 위인들이 필요했다. 이때 소환된 위인 중 하나가 충절의 상 징 정몽주였다. 이때부터 개성 관광의 필수적인 역사 코스로 선죽교가 등장했다. 선죽교의 핏자국, 대나무 전설은 눈으로 보면서 더욱 확실하 게 각인되었다.
전설은 전설로서 가치가 있다. 관광지를 만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야 기 창작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온 이야기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필요 는 없다. 하지만 역사를 논할 때는 전설과 사실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해 야 한다. 그것이 역사학의 의무이기도 하다.

- '주초위왕'이 처음 등장한 때는?
정말 벌레가 나뭇잎에 발라놓은 꿀을 따라서 파먹을 수 있을까? 나뭇 잎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꿀을 좋아할까?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꿀 을 좋아할 리가. 마치 사슴을 잡으려고 날고기를 놓아두었다거나, 늑대 를 잡으려고 당근을 놓아두었다는 것과 같다.
인하대 생명과학과 연구진에서는 실제 나뭇잎에 글자를 꿀물로 써서 벌레가 이것을 먹는지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이 실험 결과는 2018년 한 국곤충학회 학회지 『Entomological Research』 48호에 'Validation of 走肖 爲王: Can insects write letters on leaves?"라는 제목으로 실리기까지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벌레는 이 꿀물 글자에 입도 안 댔다. 이 실험에서 총40종의 나뭇잎이 동원되었다.
벌레가 꿀물 글자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럼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어떻게든지 있긴 있었을까? 나뭇잎에 '주초위 왕'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제11대 왕 중종 때가 아니 라 그보다 한참 후인 제14대 왕 선조 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에 사관이 따로 적어놓은 이야기다.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였다. (중략)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 워 대궐 안의 어구(개천)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기묘사화는 1519년에 일어났고, 「중종실록」은 1550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선조실록은 1616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다. 사관은 '주초위왕' 전설을 진짜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실록」에 빠졌기 때문에 굳이 적어놓겠다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 '주초'라는 전설이 있었다
「중종실록」에는 심정이 조광조를 모함한 내용이 적혀 있다. 심정 이 '주초대부走肖'이라는 말을 적어서 궁궐 안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앞서 본 「선조실록에서는 남곤이 한 일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선 심 정이 한 일로 달라져 있다. 남곤과 심정은 한 세트처럼 같이 묶어 이야기 하는 때가 많으니까 그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럼 '주초대부필'이란 무슨 뜻일까? '주초'는 조씨를 가리키는 것이라 고 이미 말했다. '대부'는 벼슬 이름이다. '필'은 붓이라는 뜻이다. 즉, '주 초대부필'은 '조 대부의 붓'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이 대체 무슨 모함에 이 용된다는 것인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 사실 이 글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있던 수보록이라는 예언서에 적혀 있던 글이다.
수보록에는 '목자장군검 주초대부필 비의군자지
부정삼한격'이라는 말이 있었다. '목자'는 이 씨를, '비의'는 배 씨를 가리키는데, 각각 태조 이성계, 조준趙浚, 배극렴克廉 을 뜻했다. 조준과 배극렴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말하자면, '주초대부필'은 조선 개국과 관련된 예언 문장이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태종은 수보록」은 말이 안 된다며 이런 예언서를 모두 수거해버렸다. 「수보록」에 있는 내용도 '주초위왕' 이야기처럼 시시각각 달라졌다. 다시 말해 이 책 역시 조작되었음이 분명하다. 태종은 수보록」 같은 예언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빨리 불살라버리게 함이 이씨 사직에 있어서 반드시 손실됨이 없을 것이다."
조선 개국을 위해서는 예언이 필요했지만 개국 이후에는 이런 말이 반란에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도고의 찬양과 이순신 자살설에 대하여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 鄕가 러일전쟁 축하연에서 이순신을 존경하고 자신을 넬슨Horatio Nelson에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이 역시 출전을 알 수 없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 야기로 보인다. 어떤 책에서는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한 말이라고 나오 기도 한다. 처음 이 일화가 언급된 책은 1964년에 나왔고 그 책에도 출처 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전에는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며 넬슨에 비교하곤 했는데, 러일전쟁 이후에는 도고를 동양의 넬슨이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 았던 도고의 말을 넣어서 이순신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 이순신이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일부러 자살하고자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이순신 은 이전에도 일본군의 조총에 어깨를 맞은 적이 있다.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일부러 총탄에 노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한참 뒤인 숙종 때 처음 나온 이야기다. 갑옷을 벗었다고 반드시 죽으리란 보장도 없다. 노량해전은 야간에 접근전으로 펼쳐진 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전함은 200척이 침몰되었고 50척만 빠져 나갔다. 일본으로 돌아가 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순신은 악착같이 싸웠고 그러다가 유탄에 맞아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자살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하는 것 은 목숨을 걸고 싸운 이순신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関 中을 보면 정조가 세손 시절 지워버린 듣지도 보지도 못할 끔찍한 일 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연쇄 살인마 였다.
사도세자는 스물세 살인 1757년 6월부터 살인을 시작했다. 내시를 죽 인 뒤 그 머리를 잘라 사람들에게 내보이기까지 했다. 사도세자가 죽인 내시, 궁녀가 백여 명이라는 말까지 있다. 광증이 깊어진 것이다.
사도세자에 동정적이던 남인 쪽 사람이 쓴 『대천록待錄』이라는 책에 도 사도세자가 백여 명을 죽였다고 나온다. 심지어 인두로 지지는 고문 도 가했다는 사실까지 적혀 있다.
사도세자는 대체 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일까?
- 1757년 2월에 사도세자를 아끼고 영조와의 관계를 잘 풀어보려고 노 력했던 정성왕후가 숨졌다. 잇달아 숙종의 계비였던 인원왕후 숨지자 사도세자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고 결국 그런 불안감이 살인으로 나타난 것 같다.
혜경궁 홍씨는 이 참혹한 일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알렸다. 영빈 이씨가 놀라며 영조에게 고하자고 했으나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연달아 죽어 나가니 영조도 결 국 눈치를 채고 말았다. 1758년 2월에 사도세자를 불러 물었는데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엇나간 원인에 자기의 엄한 훈육이 있는 것을 알고 자책했는데, 이미 때가 늦은 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기록이 보인다.
"정축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 는 궁녀와 내시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 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옷을 갈아입다 성질이 나 시중을 들던 후궁 경빈 박씨를 때려죽였다. 그뿐 아니라 경빈 박씨 소생의 두 살짜리 아들에게도 칼을 휘두른 뒤 연못에 던져버렸는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연잎에 걸린 아이를 건져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 정조는 아버지의 광증을 부인하지도, 그것을 드러내어 이야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위해서 현륭원隆閱라는 묘지명(석판에 새겨 무덤 에 함께 넣는 글)을 썼다. 이 묘지명에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조가 지은 묘지명이 이미 있었다. 정조는 이 묘지명을 없애 버리고 자신이 지은, 아버지를 찬양한 묘지명을 넣었는데, 1968년에 영 조의 묘지명이 발굴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조가 지은 묘지명에 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었겠느냐마는 세자 때로부터 이와 같은 것은 내가 들은 바 없다. 본래 풍요롭고 편안한 곳에 태어났으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미쳐버리기에 이르렀다.
- 변화하는 역사적 사건의 해석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잘못된 말 두가지를 비판했다.
하나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는 주장이다. 사 도세자가 죽을죄를 저질러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정조는 반역자의 아 들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 다른 하나는 사도세자가 병이 없었는데 영조가 모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죽였다는 말이다. 이 점 역시 사도세자의 광증을 자세히 기술해서 잘 못이라는 점을 밝혔다.
어떤 사건은 일어난 뒤에 정치적 사건으로 변하게 된다. 사도세자 사 건도 그러했다.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었을 때 정권은 노론에게 있었 으므로, 이 비극의 책임이 노론에게 있다는 정치적 공세가 생겨났다. 정조는 이런 정치적 갈등을 조정의 질서를 잡는 데 이용했다. 물론 아 버지의 잘못을 가려주고 추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세자가 소론을 위해서 뭔가를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조 즉위 후에 소론이 이 사건을 이용해서 노론을 공격했다. 후대에 벌어진 일로 과거 사건에 대한 추론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증거(사료)가 있어야 한다.
영조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쳐버린 세자는 폐해야 했고, 총명한 세손이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 로 만들어서 죽게 한 후 다시 세자의 지위를 복원해서 세손이 왕위를 이 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1960년대부터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는데, 최근에 와서 이 해석은 심각한 도전에 부딪혔다. 새로운 증거와 역사적 사건의 해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 기존의 당쟁설 주장은 광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중록』을 거짓 말 책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세자의 광 증 관련 증거는 매우 많다. 따라서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제 더는 주장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당쟁설은 사도세자가 총명하고 개혁 의지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전제가 무너진 셈 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용한 당파간 싸움은 임오화변의 결과이지 그 원 인이 아니다.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결론을 내려 놓고 증거를 수집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진실을 찾아 내기가 어려워진다. 역사 연구는 새로운 증거와 해석에 따라 기존의 관 념이 변화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 정조의 어찰 정치
정조는 신하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는 공작 정치를 운용했다. 왕 이 보내는 편지를 '어찰'이라고 부른다. 특히 비밀리에 보내는 어찰은 '밀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조만 이렇게 보낸 것은 아니고 다른 임금도 비밀리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선조, 효종孝宗(재위 1649~1659)도 신하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 다. 그러나 정조는 다른 임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지를 보냈다. 신 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 혜경궁 홍씨나 외조부 홍봉한 에게도 편지를 자주 쓴 걸 보면 편지 쓰는 걸 무척 즐긴 모양이다.
-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어찰 중 채제공, 조심태, 홍취영에게 보낸 것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정조의 어찰 중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 제일 많아 지금까지 297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부터 정 조가 죽기 직전이던 1800년 6월까지 4년 동안의 어찰이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어찰을 모두 없애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이것을 없애지 않고 보관했다. 이렇게 해서 정조의 비밀 정치가 오늘날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심환지는 영조 후반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비명에 죽은 임오화변 이후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세력을 노론 벽파라고 부르는데,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영수였다.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세력이니 정조 즉위 이후 세력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 자신을 호위한 홍국영洪國榮을 중용했는데, 홍국영이 과도하게 권력을 부리기 시작하자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 김종수였다.
얼핏 보기에는 정조와 대립한 노론 벽파가 정조에게 도전한 것 같지 만, 이 상소는 사실은 정조가 김종수를 시켜서 올리게 한 것이었다. 즉 정 조는 홍국영을 내치려 마음먹고 그를 위해 노론 벽파의 신하를 부리는 공작 정치를 한 것이다. 김종수가 올린 상소문을 지은 사람이 정조였으 니, 자기가 지은 상소문을 시치미 뚝 떼고 받아보았다는 이야기다.
정조는 이처럼 신하들을 어찰을 통해 비밀리에 부리는 무서운 정치가였다.

- 김정호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동여지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 잘못 알고 있는 것의 사실을 정리 해보자.
첫째,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하나만 만들지 않았다. 김정호는 <대동 여지도>뿐 아니라 지리인문서 동여도지東輿志」, 『여도비지輿圖備誌」, 대동지지를 편찬하였고, 지도는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등을 제작하였다.
둘째, <대동여지도> 판목은 대원군에 의해 불살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판목이 남아 있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판목을 통한 연 구로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더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셋째, 김정호는 옥에 갇혀 죽지 않았다. 김정호에 대해서 남겨진 기록 을 보면 지도가 압수당한 바도 없고 옥에 갇힌 죄인이 되었다고 볼 근거 도 없다.
넷째, 지도 유통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지도를 민간 이 제작하거나 유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조선 전기의 상 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물품 유통이 활발해지자 지도가 꼭 필요하게 되었다. 관리와 사대부는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수진본 지도를 애용했고 목장지도, 궁궐도, 역사부도 등 다양한 지도 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다섯째, <대동여지도>는 조선 지도의 계승자다. 최한기崔漢綺는『청구 도제에서 김정호가 어려서부터 지도에 깊은 뜻을 두고 지도 제 작의 장단점을 검토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지도인 <청구도>는 정조 때 만들어진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를 참고한 것이고 <해동여지도>는 신경준이 만든 <조선지도朝鮮地圖>를 변형한 것이다. 여섯째, 김정호가 직접 팔도를 답사하고 백두산을 올랐다는 말은 근거 가 없다. 김정호 당대의 현실을 보아도 타당성이 없다. 이 이야기는 일본 지도제작자 이노 다다타카의 일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내용은 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다. 김정호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우형, 이상태 등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1997년에 제대로 된 내용으로 김정호 이야기가 개정되었다.
김정호는 고위 관료인 신헌과 최한기, 최성환煥 등 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 지도를 제작하였고 판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기존의 지도를 섭렵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각종 지리서를 편찬한 위대한 지도 편집자였다.

- 간도 문제가 일어나다
청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일정 구간을 공터로 비워두고 사람들 이 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봉금령封禁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조 선과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한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지켜 지지는 않았고, 조선 사람들이 종종 땔감을 구하러 넘어가곤 하다 그곳 에 정착한 청나라 사람과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데 두만강 쪽은 청나라 에서도 아주 변경이어서 그랬는지 청나라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 다. 조선 말의 어지러운 상황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가는 유민이 있었다. 이들은 청과 조선의 국경 사이 빈 공간, 즉 간도에 정착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간도란 이렇게 두만강 북쪽 일부 지역이다. 지금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의 투먼시와 룽징시 일부다.
일본이 근대에 들어와 만든 조선 지도를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약간을 조선의 영토로 그린 지도가 있다. 바로 그 지역이 봉금령으로 사 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 곳이다. 일본은 그 땅을 청나라가 영토로 간 주하지 않은 땅으로 생각해서 조선의 영토로 잡았다. 이런 사고 방식은 후일 간도 문제에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1880년(고종 17년)에 봉금령을 해제했는데, 그제 야 두만강 너머에 수많은 조선인이 넘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이를 항의했다. 이런 문제는 쉽 게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은 울릉도를 비워두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는데, 그렇다고 울릉도를 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정기 적으로 순시하며 일본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비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인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면 안 되었다. 그것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두만강 너머에 조선인이 다수 넘어가 땅을 개간하고 있다는 (그래서 이 지역을 개간한 땅이라는 뜻으로 '간도'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을 청나라가 알았기 때문에 국경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회담을 열게 되었다. 이 회담은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고종 24년)에 두 번 열렸다. 1차 회담 때 조선 측 대표 이중하는 청나라가 깜짝 놀랄 주장을 했다.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 이름이라고 한 것이다. 이중하는 어떻게든지 이미 조선인이 개척한 간도를 유지하고, 싶어서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청나라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발하여 1차 회담은 종결되었다. 2차 회담 때 이중하는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 는 주장은 포기했다. 이중하는 1차 회담 후 직접 백두산에 올라가 답사를 해보았고, 그 결과 이런 주장이 통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이때 청 나라 측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지류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지류 를 국경선으로 잡고자 했고, 이중하는 가장 북쪽에 있는 지류를 잡고자 했다. 이 회담에서 이중하는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내 머리는 잘라갈지언정 우리 강역은 축소할 수 없다."
이 말은 간도를 내놓지 못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북쪽 경계를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유사역사가 중에는 이 주장을 교묘하게 1차 회담과 연결해서 간도 전체를 내놓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용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다.
청나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2차 회담도 결렬되고 간도 문제는 어정쩡하게 그냥 남아버렸다.
대한제국은 1903년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의 영 을 토화를 적극적으로 꾀했다. 이때부터는 다시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주장을 펼쳤다. 청나라는 강하게 반발했다. 청나라 압력이 거세지자 정 부는 이범윤에게 돌아오라고 했는데, 이범윤은 말을 따르지 않고 간도를 지키다가 러시아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 일제와 간도 문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일본제국에 빼앗기고 말았 다. 일제도 간도를 대한제국 땅으로 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에 적극적으 로 간도 영토화를 꾀했다. 일제의 논리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있던 국 경지대는 주인이 없던 땅인데 압록강 너머는 이미 청나라가 차지했으니 두만강 너머는 조선이 차지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앞서 일본인이 만든 지도가 이미 강 북안을 모두 조선 땅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는데, 바 로 그런 인식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점령했다. 조선의 영토가 크면 클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유사역사가들은 흔히 일제가 커다란 조선 영토를 줄이려고 애 썼다고 주장하는데, 일제 입장에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고대 영토는 축소할 수도 있다고? 강력한 상대를 발 아래 꿇렸다면 더욱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다. 상대가 허약해서 볼 것도 없이 제압 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에 불과하다.
일제는 1907년 8월에 간도 룽징촌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까지 갔다. 그런데 1909년 9월 4일 돌연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고 대신 만주 에 철도를 부설하는 권리를 챙겼다. 일본 안에서도 이 점을 안타깝게 생 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에 만주국을 건설해버려서 자연스럽게 간도는 만주국 영토가 되었기 때문 에 이런 불만도 사라져버렸다.
만일 토문강이 정말 송화강 지류였다면, 일제도 그걸 가지고 청나라와 물고 늘어졌을 것이며, 이중하도 그랬을 것이다. 또한 숙종 때 경계표지 물을 세울 때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목극등이 두만강을 따라 바다 에 이를 때까지 살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증거를 따라가 논지를 펼쳐야 한다. 그 증거가 오늘날의 현실에 불리한 점이 있다고 해 도, 현실에 맞춰 왜곡해서는 안 된다.
두만강 북쪽 간도 지방은 조선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너가 개척한 땅이다. 그러나 과거부터 조선 영토는 아니었다. 만일 대한제국이 외교 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중하 같은 뛰어난 협상가, 이범윤 같은 뚝심 있는 행정가를 내세워 청나라와 협상을 거듭했다면 간도를 수중에 넣을 수 있 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란 원래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 않는 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과거에서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교 훈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 현재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식 민사관이란 식민지 치하에 있어야 성립한다. 유사역사학의 선전선동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해방된 지 80년 가까이 되어간다.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모는 프레임은 1960년대 등장해서 50여 년이나 써먹고 있 는 중이다. 아무리 역사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동네라 해도 이젠 좀새 로운 걸 보여주면 좋겠다.
유사역사학의 기본적인 논리 중 하나는 위대한 한민족의 고대사를 일 제 식민사가들이 감춰왔다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나라 역사학자도 답습 한다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가들은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해줄 수 도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뭐하러 그러겠는가? 그리고 일제 식민 사가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일본 고문서학의 체계를 세웠다는 구로이타 가쓰미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사 편찬과 조선의 고적과 유적을 조사, 보존하는 일에 전념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16년간 지속된 『조선사』 편찬 사업에서 구 로이타는 봄, 여름의 휴가와 연말연시에 조선으로 건너와 편수 기획을 지도하고 사업을 독려했다. 그는 1916년 발족한 고적조사위원회의 중심 인물이었고 1931년 총독부에서 예산을 삭감하자 조선고적연구회를 설 립하여 외부자금을 조달하여 고적조사 사업을 계속했다.
대체 구로이타는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조선의 고적을 조사하고 보존 하려고 했던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를 만 든 것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로이타는 바 로 그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조선의 고적은 또 왜 보존하고자 노력했을까? 심지어 고적 보존 유지에 대한 법안은 일본보다도 3년이나 앞서서 시행되었는데 이런 법안 제정에 앞장선 것도 구로이타였다.
구로이타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2년 동안 유럽과 이집트 등지를 방문하여 발굴 조사 보존 사업 등을 살펴보았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구 열강이 식민지의 유적을 어떻게 다루는지 학습했다. 그는 배워온 것 을 조선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럼 구로이타는 대체 뭘 배웠을까?
열강은, 식민지에 있는 유적 건설자는 위대했지만 그 후손은 몰락하여 과거 영광을 구현할 수 없는 처지로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서 유적을 보존했다. 너희는 이제 이런 위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모두 잃 어버린 패배자라는 것을 뼈에 새겨주고 싶어 한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과거 유적은 바로 식민지인이 있는 그 자리에 보존되어야 했다.
- 만일 일제가 위대한 환국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논리다. 유사역사가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현대에 만든 책이면서 그 지은이들을 고대 인물로 위장해 놓았다. 고대 인물이 고대 관념을 가지고 쓴 것처럼 날조한 책이기 때문에 그 책을 보면서 고대인의 관념을 연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위서라고 한다.
이유립은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빈 몸으로 남하했다. 그러니 집안에 비전의 책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70년대 가 되어서 갑자기 자신이 해방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면서 『환단고기』를 꺼내들었으니 이것이 위서가 아닐 도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위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 을 수 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신뢰할 수 있는 사서가 되는 것도 아니 다. 『환단고기』는 70년대까지 알려진 여러 가지 사료가 담겨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은 『환단고기』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역사기록이 들어 있으므로 믿을 수 있는 사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안에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을 양념처럼 뿌려놓는다. 우리 민족이 드넓 은 영토를 소유하고 중국, 일본, 여진 등을 모두 지배했다는 망상을 집어 넣은 것이다.
우리 역사는 왜 이렇게 못났는가라고, 중국과 일본한테 침략이나 당하 고 결국은 식민지가 되어버린 못난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웅장한 가짜 역사에 혹하게 된다. 그리하여 환단고기에 푹 빠진 추종자 즉 '환빠'가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1979년에 한문본이 출판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6년에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한글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였다. 이 책을 번 역한 사람은 임승국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승국은 『환단고기』를 위조한 이유림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에 속했던 사람이고 역시 월간 『자유』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국사찾기협의회'는 당시 국정교과서였던 『국사 교과서가 식민사관 및 좌경화되어 있다고 공격하면서 국수주의적 역사관으로 『국사 교과 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한 단체다. 이들에 의해서 1981년에는 국회 에서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들 멤버는 국회 정치인을 동원할 수 있 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들을 이끈 수장은 초대 문교 부장관이었던 안호상浩相이었다.
- 안호상은 이승만 독재철학인 일민주의를 만든 사람이고 학원 의 병영화를 꾀해 학도호국단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임승국도 안호상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국수주의자였다. 이들은 극우적 성 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점을 별로 숨기지도 않았다. 임승국은 국회에 서 히틀러의 발언으로 훈계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에게 아첨을 떨며 국사 교과서 개정을 꾀하기도 했다.
『환단고기』가 등장하기 전에도 국사찾기협의회 회원들은 위대한 한민 족의 역사를 떠벌리고 있었다. 사실 『환단고기』는 이런 이야기를 집대성 한 책일 뿐이다.
역사는 고증과 비판의 학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가치와 신념에 의해 주장을 펼친다. 자신들의 가치와 신념에 맞는 증거만을 채택하고 그렇지 않은 증거는 기각한다. 그것은 잘 못된 것이거나 음모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민족을 위 해서 유리한 증거를 거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다른 나라도 다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가 있으니 다 른 아이도 건너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주장은 언뜻 역사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신념을 떠드는 사람을 가리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의 활동을 '유사역사학'이라고 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사이비역사학'이 라는 말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같은 뜻이다.
- pseudoscience라는 말이 있다. '유사과학' 또는 '사이비과학'이라고 번 역한다. 흔히 쓰이는 단어인데, 이를 두고 유사과학이 있으면 진짜 과학 이 따로 있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유사과학에 '학'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 니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눈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꼭두각시가 각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역사학처럼 보이게 치장 되어 있으나 역사학과는 다른 것이다. 유사역사학이 역사학의 일종이라 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인형에도 눈코입이 있고 팔다리가 있으니 사람이라 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이고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말이 나 마찬가지다.
- 유사역사가들은 위대한 조상을 창조해서 민족의 구심점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일부는 고대 사서의 모호한 구절을 과대해석하는 방법을 사용 했으나 더 대담한 이들은 날조된 역사책을 만들어냈다. 『환단고기』가 가 장유명하지만 이 책 하나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 이전에 이 같은 책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에 여러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필적할 괴서를 만들었다. 다만 환단 고기가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유명해졌을 뿐이다.
유사역사가들은 스스로를 '재야사학자', 또는 '민족사학자', 또는 '애국 사학자라고 부르면서 역사학자들을 '식민사학자', '이적사가', '용공사가', '매국사가', '친일파'라고 불러왔다. 이런 인식은 1960년대에 등장해서 1970년대에 확산되었다. 이들은 50년 동안 역사학계를 매도해왔다. 이 들이 사용한 이분법 프레임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상대를 악마화함 으로써 자신들 편을 만들어내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학자 를 악마화하는 방법은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독특한 방법이다.
- 과거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를 '강단사학자'라 부르고(이 용어는 원 래 유사역사학이 자신들을 대학 밖에 있는 '재야'라 칭하면서 이분법으로 사용한 것 이다)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학 박사학위 를 가지고, 심지어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유사역사학의 논리를 가지고 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유사역사학 쪽에서도 강단사학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추세로 변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역사학계의 우려가 있다. 유사역사학이라는 낙인찍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역사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정의되는가' 라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유사역사학'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금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돌이 있는데, 그것을 '시금석'이라 한다. 유사 역사학에도 시금석이 있다. 로널드 프리츠는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학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사료를 비판하고 증거를 통한 합리적인 추론을 해나가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에 서는 사료 비판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기록을 보면 사료 비판이라는 과정 없이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시 대와 공간을 뛰어넘으며 사료를 골라 먹으면서 자기만의 논리를 구성한 다. 그리고 기존 학설은 식민사학이라고 비난한다.
-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이라는 두 대립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의 반대말이 유사역사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학 안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고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 존재한다. 역사는 지 나가버린 과거의 흔적이며 그것을 누구도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진실로 모든 사람의 사고를 획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국정교과서였다.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위대한 고대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에게는 이미 정해진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서 위배되는 것은 배척해야 한다. 진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표에 위배된다면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이들은 한다. 역사학이 민족과 국가에 유용한 도구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심지어 유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인간이 살아온 과거를 살피면서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오는 학문이지 다른 국가와 민족의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다.

-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유래
5.16 쿠데타 후 한일수교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자 반대 시위가 거세 었다. 이때 반일 열기에 힘입어 일제강점기의 수난사를 쓴 책이 등장했 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일제강점기 동안 군수직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을 지낸 문정창이었다. '빼박'친일파인 그는 마치 고급 자료라도 가지고 있 는 척하며 책을 펴냈는데, 이 책 안에서 역사학계가 친일이라 일제강점 기 연구도 안 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때 역사학계를 친일파로 모는 프 레임이 처음 등장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역사학 전공자 를 친일파 집단으로 몰아서 유사역사가가 도덕적 우위를 장악하는 해괴 한 일이 벌어졌다.
- 한편, 1960년대에 이유립은 대전에서 대종교(단군을 신봉하는 종교)인으로 있다가 독립하여 자기 교를 이끌기 시작했다. 단단학회 교주로 올라 선 이유립은 대종교를 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가진 비전의 역사서인 『환단고기』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유립은 자신의 망상을 담은 여러 책을 만들어 각계에 보내며 호응을 해줄 사람들을 찾아 나갔다. 그때 이유립과 손을 잡게 된 사람이 초대 문 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었다. 이승만에게 일민주의(혈통에 기반한 극단 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이승만이 국시로 내세운 이데올로기)라는 파시즘 철학을 전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극우민족주의자였고 이유립과는 궁합 이 찰떡처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문정창, 안호상, 이유립 등이 모이면서 이들은 점점 더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여기에 5.16 쿠데 타에 참여했다가 물러나와 군에 납품하는 잡지 『자유를 발행하던 박창암이 합류했다. 박창암은 자유를 유사역사학의 기관지로 변모시켰다. 1975년 10월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자유는 1976년 1월호부터 유사역사학 주장을 전파했다. 전군에 이런 잡지가 납 품되었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컸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들은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공격했고, 집중 공격 타깃이 된 사람이 서울대 이병도 교수였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사편수 회의 수산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식 민지의 공공기관에 근무한 것으로 친일파 낙인을 찍기는 충분했다.
이유립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시를 투고하기도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사람이었는데 이병도를 식민사학자로 몰면서 각광을 받았다. 1976년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 연구』라는 책을 냈기 때문에 더더욱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 마침 1974년부터 한국사가 국정교과서로 바뀌었기 때문에 국사찾기 협의회는 국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국사 교과서에 자신들의 주장을 실을 수 있다면 전 국민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먼저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라는 재판을 걸었다. 당연히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그다음으로는 정치권을 동원해서 역사학계에 압력을 행사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1년에 국회에서 국사 교과서 공청회가 열리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쌍방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때 유사역사학 쪽에서는 이 유립을 토론자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이유립은 안호상을 매도 하는 글을 썼고, 그 길로 『자유에서도 퇴출되고 말았다.
이유립을 토론자에 넣어주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그는 이미 1979년에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내놓았고, 토론에서 이걸 들고 떠드는 순간 개망신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안호상 등이 이유립을 배제하는 길을 택한 것 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참 공교롭게도 『환단고기』는 일본의 극우 유사역사 가인 가지마 노보루島에게 전달되어 일역본이 나오게 되면서 역전의 길을 가게 된다. 1982년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출간되었고, 이 일역본을 다시 번역한 한단고기』가 1986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는 국수주의 서적이 범람하고 있었다. 백두산 민족의 대운이 열린다는 식의 이야기가 내놓기만 하면 대박이 나는 상황이었고 「한단고기』는 여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세계사  (0) 2024.05.17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1) 2024.05.17
세상 모든 것의 기원  (3) 2024.04.26
대담한 작전  (0) 2024.04.17
부의 세계사  (14) 2024.03.05
Posted by dalai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역사 2024. 4. 26. 07:02

- 막걸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탁주다. 탁주는 증류주를 만들 기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만들어 마신 주종이다. 막걸리의 기 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술 자체가 고고학 유적 에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정보를 조합 해 처음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했던 시기를 짐작할 수는 있다. 막 걸리의 기원을 따져보자면, 주재료인 쌀이 재배되기 시작한 이후 에야 만들어 마셨을 테니 우리나라에서 쌀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 점, 즉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이후부터 주조했다고 보는 게 적 절할 것이다. 하지만 막걸리 재료가 꼭 쌀뿐인 것은 아니므로 그전부터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빙하기가 끝나가면서 곡물이나 구근류(칡이나 감자같이 뿌리를 먹는 식물), 과일 이 풍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술을 만들게 되었다고 본다. 근동 지 역에서는 1만 5,000년 전부터 야생에서 풍부하게 자라는 밀을 이 용해 맥주를 만들었고, 이후 이집트 문명에서도 맥주를 널리 만들 어 마셨다. 그런데 이때의 맥주는 지금처럼 청량하고 맑은 음료가 아니었다. 오히려 탁하고 걸쭉한 막걸리 같은 것이었다. 즉, 초기 에는 맥주와 막걸리가 같은 종류의 술이었다.

-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발견된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에 서는 흐르는 물에 도토리가 담긴 망을 넣어서 타닌을 빼고 도토리 를 가공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살림터가 발견되었다. 도토리를 묵 형태로 가공해서 먹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도 도토리묵이라는 요리가 없다.
세계의 수많은 고고학자들은 신석기인들이 도토리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가공한 식품을 실제로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해외에서 한국을 찾은 고고학자들과 막걸리를 마시게 되 면 나는 꼭 도토리묵을 소개한다. 맛을 본 동료들은 젤리처럼 독 특한 식감을 지닌 안주가 1만 년의 역사를 지닌 그 전설의 음식이 냐며 경탄한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우리는 1만 년 동안 이어진 고고학적 안주를 보유한 나라의 후손들이니 말이다.

- 소주가 '세계의 술'이 된 것은 몽골제국 건국 시기부터다. 거대 한 제국이었던 몽골의 정복 활동과 역참으로 세계는 하나가 되었 다. 동서양 할 것 없이 몽골제국의 영향력이 미친 곳에서는 저마 다의 방법으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황실에서 증류주 제조를 관리 했던 거란과 달리 몽골제국은 증류 기술을 숨기지 않고 널리 확 산시켰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정복지에 소주 제조법을 전해주면 현지인들이 그 소주를 즐기는 가운데에 자연히 몽골제국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릴 것이라는 전략이었 다. 일종의 동화 정책이다.
피지배인들을 알코올로 다스렸던 것은 몽골뿐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술 식민주의 (alchoolosialisme)'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지배 국가가 피지배인들에게 술을 공급하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시키는 식민주의 전략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원주민을 정 복할 때,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벌할 때, 현지인의 반발을 누르 고자 사용한 방법이 바로 술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소주를 뜻하는 단어 '아라기'를 통해 짐 작할 수 있다. 몽골,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등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이고, 동남아 일대에도 증류주를 가리키는 말에 '아라 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에서 소주를 '아랄길(阿剌吉)'이라고 표현한 기록이 존재한다. 경상도 일대 방언에서는 '아라기'가 술 또는 술지게미를 가리킨다. 아라기는 아랍 지역의 증류 시설인 '알렘빅'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아랍어로 '땀'이라는 뜻이다. 증류 과정에서 술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땀과 같았기 때문 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는 소주를 '이슬'에 비유하곤 한다. 고려 시인 목은이색이 자신의 시에서 소주를 이슬로 표현 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역시 불순물을 걸러내고 정 화된 술을 만드는 증류 과정을 담고 있는 비유다.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으로 소통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세계는 소주(증류주)로 대동 단결하고 있던 셈이다.

- 젓갈은 한국 김치만의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이 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는 생선 발효 문화가 발달 했다. 한반도의 서남해안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인들의 음식 문화 에서도 가자미식해(식해는 생선에 약간의 소금과 밥을 섞어 숙성시킨 식 품을 가리킨다)가 발달했다. 중국 기록에도 한 무제가 동이족의 땅에 서 젓갈류의 맛에 반해 '축이 오랑캐를 몰아냄)'라고 이름을 붙일 정 도였다고 한다. '오랑캐를 몰아낸다'라는 말의 뜻은 '오랑캐의 맛 을 따라간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돼지 한 마리 잡으러 갈까?" 라는 말이 "돼지고기 먹으러 갑시다"라는 말로도 통하는 것과 같 은 이치인 셈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채소 절임 요리 중에서도 한 국의 김치만큼 다양한 젓갈류로 그 풍미를 끌어올린 것은 거의 없다.

- 우리나라에서 삼겹살 구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하지만 비계가 낀 돼지고기에 대한 사랑은 그 역사가 무척 오래되어서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요리책에도 '세겹 살(삼겹살)은 돼지 중에 최고'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삼겹살 구이가 비교적 최근에야 유행하게 된 데는 비 계가 가진 특유의 잡내가 한몫했다. 지방이 가득한 비계는 고기의 여러 부위 중에서 인기가 없는 부위다. 자연스레 값도 싸다. 하지 만 돼지 종자 개량을 통해 특유의 잡내를 없애고 비계 사이에 살 이 들어차도록 한 결과, 삼겹살 구이라는 맛있는 음식으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돼지비계 요리를 사랑하는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여러모로 공 통점이 많다.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유목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는 점, 주변 강대국들의 침탈로 인한 질곡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또한,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으나) 두 나라 모두 오래전부터 농업이 주요한 산업이었지만 다양한 육가공 문화가 발달했다. 육류 단백질은 농경민들에게 결핍되 기 쉬운 영양소다. 그렇기 때문에 돼지비계처럼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부위를 가공해서 영양분을 섭취할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살 로나 삼겹살 구이 같은 요리를 개발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살로와 삼겹살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최고의 술안주라는 점 이다. 삼겹살에 소주이듯이 살로에는 보드카가 제격이다. 여기 에 상큼하고 아삭한 양배추 절임까지 곁들이면 우크라이나에서는 가히 최고의 안주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살로와 삼겹살 구이가 각각 우크라이나와 대한민 국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는 이 음식들 속에는 척박한 역사와 가난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내고자 했던 두 나라 민초들의 강인한 생존력이 담 겨 있기에 서민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조선 후기에 인기가 많았던 소불고기 요리로는 설하멱(下) 을 꼽을 수 있다. '눈 오는 날 찾는다'라는 뜻의 설하멱은 일종의 꼬치구이로, 소고기를 불에 구웠다가 찬물이나 눈에 넣어 식힌 후 기름을 발라서 다시 한번 구워 먹는 요리다. 지금도 유라시아 일 대에서 널리 유행하는 꼬치구이인 샤슬릭도 분무기 같은 것으로 물을 뿌리면서 고기를 구우니, 요리법이 비슷하다.
보다 대중적인 소고기 요리의 대표로 설렁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소의 머리, 내장, 뼈다귀, 발, 도가니 따위를 푹 삶아서 만든 국 또는 그 국에 밥을 만 음식인 설렁탕은 말뼈나 양뼈를 고아서 만든 몽골과 카자흐스탄 요리인 슈르파(또는 소르포)와 그 맛이 거 의 똑같다. 가축의 뼈를 푹 고아서 만든 이 음식들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부위까지 살뜰하게 조리해 영양 섭취를 해야만 했던 민중 들의 지혜가 담긴 레시피라고 할 수 있다.

-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선천적으로 많은 서양인들은 이처럼 주로 도수가 낮은 술을 마시며 해장한다. 위스키의 본고장이자 술꾼 많 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에서는 해장술을 '개털(hair of the dog)'이 라고 한다. 늑대 같은 맹수에게 물린 상처는 그 짐승의 털을 문지 르면 낫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말로, 쉽게 말해 '술병은 술로 고 친다'라는 뜻이다.
반면,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서양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적은 아 시아인들의 경우에는 술로 해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중국 사람 들은 해장 음식으로 연두부와 쌀죽, 일본 사람들은 된장국(미소시 루)에 낫토를 먹는다. 몽골 사람들은 원래 우유를 발효시켜 약하게 알코올 성분이 함유된 쿠미스를 마시며 해장을 했지만, 요즘에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맥주를 많이 먹는다.
각 나라마다 저마다의 해장 문화가 있지만, 우리나라만큼 '해 장'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한국에는 아예 '해장국'이라는 음식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한국에서 해장국을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 깊숙이 자리를 잡 았다.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회식을 한 다음 날이면 으레 함께 술자리를 한 이들 중 한 명이 "오늘은 해장국이나 할 까?" 하며 전날 멤버들을 다시 불러내어 합동으로 숙취 해소를 하 기도 했다.
다 같이 모여 해장을 하면서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상했을 서로 의 건강을 생각해주고, 간밤의 여흥을 맑은 정신으로 거듭 이어가 는 해장 문화는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라고 여겨 진다. 우리나라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러시아나 폴란드에도 이런 지혜로운 해장 문화가 없다. 지금 당신이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 욱 행복한 이유는 아마도 내일의 따뜻한 해장국이 있기 때문은 아 닐까?

- 그렇다면 농사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지중해 동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북부 메소 포타미아, 이란 고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처음 발생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설이 우세했다. 하지만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다지역 기원설을 더 지지한다. 중국에서도 약 1만 년 전부터 농사가 시 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나왔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약 1만 2,000년 전부터 호박, 박, 구근류 같은 것을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 었다. 즉, 농사는 동시다발적으로, 지역마다 독자적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사실 농사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농경의 도입은 직립보행과도 견줄 수 있다. 직립보행은 동물적인 능력을 희생함으로써 당장의 생존 가능성은 줄어들게 만들었지만, 그 대신 두뇌의 폭발적인 발 전을 가져왔다. 이로써 장기적 관점에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은 훨 씬 더 늘어났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사냥과 채집은 자연의 변화 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환경 적응성이 강한 활동이다. 눈앞의 먹잇감을 쫓거나 열매를 따면 그만이다. 만일 사냥감이 보 이지 않거나 더 이상 채집할 거리가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 면 된다.
반면, 농사는 한번 시작하면 그 지역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을 농사에 걸어야 했다. 또한, 의외로 영양 상태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사냥과 채집을 하다 보면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농사를 지을 경우 자연에서 나는 다양한 음식 자 원을 포기하고 오로지 선택해서 키운 작물만 먹어야 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비자발적 '원 푸드 다이어트'인 셈이다. 아이 러니하게도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의 신장은 더 작아졌고 각종 질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농사로 인해 전쟁이나 갈등의 빈도 도 더욱 심해졌다. 사냥과 채집 대신 농사를 선택한 상황에서 곡 물 생산량이 떨어질 경우,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약탈이다. 비축해둔 식량은 인간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로부터도 지켜야 했 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층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농사만의 장점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주요한 장점은 인간 삶의 예측할 수 없는 요인 들을 최대한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령, 농사를 잘 지으려 면 치수(水)가 관건인데, 수리와 관개 시설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인류는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 울 수 있었다. 또한, 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공동체 내에서의 감 시와 통제를 강화하게 됨에 따라 법과 규칙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도 빠르게 발전해갔다. 이처럼 농경이 도입되면서 인류는 급 격한 도약을 하는데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 른다.

- 맨몸 격투기에 숨은 인류의 지혜
맨몸으로 하는 격투기가 인명 사상을 줄인다는 사실은 최근의 역사적 사례로도 확인된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 양국은 국경 지역 영유권을 두고 우수리 강의다만스키 섬에서 큰 분쟁을 겪 었다. 이때 양측은 화력 동원은 자제하면서 주먹만 사용한 싸움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덩치 좋은 군인들을 내세웠다가 나중에 육박 전이 격해지자 다른 부대에서 권투나 무술 경력이 있는 선수를 데 려와 투입했을 정도다. 하지만 끝내 육박전으로 해결이 되지 않자 양측은 화력을 사용하긴 한다. 그 결과, 양측 도합 수백 명의 사상 자가 발생하는 수준에서 분쟁이 마무리된다. 어떠한 전쟁도 일어 나지 않는 것이 백번 옳지만, 애초부터 화력을 사용했더라면 피해 수준은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선사시대 사회의 90퍼센트에서 폭력 분쟁이 있었으며 적 어도 2년에 한 번꼴로 실제 분쟁을 겪었다고 한다. 폭력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 내면에 내재된 본능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성을 아무 때나 드러냈다면 인간은 이미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맨몸으로 하는 격투기는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 내면의 폭력성 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하면서 재미있는 의식으로 승화시킨 결 과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용의 <각저도>에 그려진 고구려인과 서역에서 온 호인의 결투 장면은 새롭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 과 다른 타인에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 커지 면 적개심이 되기도 한다.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씨름은 이방인에 대한 적개심을 격투 경기를 통해 해소하는 방편이었으리라. 또한, 경기가 열리는 장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축제의 장으로 만듦으 로써 모두가 하나로 화합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 사슴뿔 금관, 하늘과 땅을 잇다
1921년 발굴된 신라 금관총 금관은 사슴뿔과 나뭇가지를 모티 브로 하고, 곡옥(曲玉,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옥구슬)을 단 화려하고 독특한 형태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사실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금관은 흑해 연안,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도 발견된 바 있 다. 나아가서는 서쪽으로는 북유럽,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유적에서도 비슷한 모티브의 관들이 발견되었다.
북반구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슴뿔 모양의 관은 하늘의 대리인인 샤먼의 의식에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 슴뿔은 매년 자라므로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또한, 하늘로 뻗 어나가는 아름드리나무는 마치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를 연상하게 한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상징이었던 사슴뿔과 나무가 (금관 장식에 쓰인 이유다. 오늘날에도 유라시아 곳곳의 샤먼들은 신성 한 나무 아래에서 하늘과 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만주족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라 금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을 쓰고 그들이 신성하 게 모시는 자작나무 앞에서 샤먼이 부족을 대표하여 하늘에 제사 를 올렸다. 사슴뿔과 나무 모양으로 장식된 샤먼의 관은 신과 인 간이 소통하는 다리의 역할을 했다.
- 신라 금관은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반도 동 남쪽에 위치한 신라의 왕과 귀족이 쓰던 관이 북방 유라시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에 주목하면 이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금은 무르고 변형이 쉬운 물질이다. 따라서 금관을 착용하려면 가죽이 나 천으로 만든 관모(모자)를 쓰고 그 위에 금관을 덧써야 한다. 흥 미로운 점은 신라 귀족의 무덤에서 거의 빠짐없이 발견되는 관모 의 재료다. 이 관모의 재료는 섬세하게 가공한 자작나무 껍질이 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 남쪽 신라에서는 자라지 않는 나무로 주로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만 자라는 대표적인 북방계 수종이다.
-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자작나무의 껍질로 그릇, 모자, 가방 등의 생필품을 만들어 사용한다. 천마총의 말다래도 자작나 무 껍질을 복잡하게 가공해서 만들었는데, 그 위에 복잡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신라에서는 자작나무 공예술이 발달했다. 이는 당시 신라가 북방 지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작나무를 공급받는 무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또한, 그것을 가공하여 예 술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기술이 출중했음도 의미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인 신라 금관에는 이처럼 우리 역사의 다양한 장면들이 숨어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고자 했던 고대 신라 왕족들의 열망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문화재 약탈의 아 픔, 그리고 이에 대항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문화에 대한 자부 심과 항일 의식까지 화려한 외양속에 반만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 겨 있는 것이다.
-  중국인들은 인삼을 직접 캐지 않고 굉장히 먼 데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삼의 대표적인 산지 는 백두산 일대다. 인삼은 일교차, 계절에 따른 기온차가 뚜렷하 고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약용작물이다. 중국과 인삼 교역을 시작한 시기는 고조선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두산 일 대에서 얻은 모피를 중국과 교역한 흔적이 있는데, 이때 한반도 인삼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졌던 것 같다.
우리 인삼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 어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진상품으로 중국에 인삼을 선물했 다. 고구려와 백제의 인삼이 유명하다는 기록은 6세기경부터 등 장한다. 통일신라도 당나라에 인삼을 보낸 기록이 있지만, 인삼의 품질이 고구려나 백제 인삼에 미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 당나라가 통일신라에서 보낸 인삼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통일신라가 인삼의 주요 산지인 백두산 일대와 멀어서 생산 량이 적었던 데다 채취한 인삼을 저장하는 기술도 발달하지 못했 던 탓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인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발 해다. 신라 인삼에 대한 기록은 8세기 말 이후에 사라진다. 이 시 기는 발해가 한반도에서 인삼의 주요 거래 국가로 등장하는 시점 과 맞물린다. 발해의 영토는 시베리아 호랑이로 유명한 연해주 시 호테알린산맥과 백두산 일대로까지 확장되었는데, 이 지역이 바 로 인삼의 주요 산지였다. 일본도 8세기 초에 발해를 통해서 인삼을 처음 접한다. 발해는 기후가 냉랭하고 산세가 험한 지형에 위치했지만 그러한 토양에서 잘 자랐던 특산품 인삼 덕분에 이를 수 출해 국고를 쌓을 수 있었다.
최근 러시아의 발해 유적에서 발해가 인삼 산지로 유명했음을 밝혀주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바로 인삼을 채취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동물의 뼈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도 삼과 쇠는 상극이기 때문에 인삼을 채취할 때 나무나 골제로 된 도구를 사용한다. 흥 미롭게도 인삼 캐는 도구가 발견된 곳들은 발해 유적들 중에서도 최북단 산악 지역들이었다.

- 적절한 모방은 그 물건이 널리 사용되고 보급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 남쪽의 국가들은 중국과 직 접 교역하게 되는데 삼한의 우두머리들은 중국에서 사온 관리의 옷과 도장을 비롯해 중국제 명품을 무척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인 기가 있던 제품은 청동거울이었다. 한나라의 청동거울은 중국 내 에서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청동거울의 뒷면은 화려하게 장 식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둥그런 모양이 태양 같아서 행복과 부 를 상징했다. 청동거울은 실용성과 상징성을 겸비한 도구였다. 청 동거울은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야요이시대 무덤에서는 청동거울이 같은 장소에도 몇 개씩 발견되기도 한다.
- 그런데 이 중국 명품의 수요가 많아지자 그 대안으로 청동거울 을 모방한 제품이 널리 제작,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명 '본뜬거울' 이라고도 불리는 방제경(製鏡)이다. 방제경은 특히 약 2,000년 전 무렵 삼한이 있던 경상남도 일대에서 널리 유행했다. 얼핏 보 면 한나라 청동거울과 유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무늬가 조잡해 서 차이가 난다. 거울 뒷면의 무늬는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다 보니 문양이 다소 거칠더라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만들어 널리 사용한 것이다. 방제경 덕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거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방제경은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초기 백제시대의 집터 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이제 거울이 살아생전 귀하게 사용되다 가 무덤에 함께 묻히는 물건이 아니라 집에서 쓰다가 그냥 버릴 정도로 흔한 물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쯤 되면 방제경은 청동거 울의 어설픈 가품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보다는 더 많은 사람 들이 실용적인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발전된 형태 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심지어 방제경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흑해 연안이나 우크라이나에서도 발견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해서 교역이 왕성해지면서 중국제 물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이를 본뜬 방제경이 유통되었던 것이다.

- 전쟁 영화 포스터나 스틸 이미지를 보면 전장에 총을 꽂고 그 위에 철모를 걸어두어 시신이 있는 곳을 표시하는 장면이 종종 묘 사된다. 이는 약 3,000여 년 전 고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 전사 들이 땅에 낡은 칼을 꽂아 전사자를 위로하던 풍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 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초원 사람들이 낡은 칼을 전사의 상징으 로 숭배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 풍습을 《역사》에서 는 '아키나케스', 《사기》에서는 '경로'라고 불렀는데, 동일한 말을 다르게 음차한 것이다.
이 풍습은 고대 그리스로 건너가서 전쟁의 신 아레스(Ares)의 상징이 된다. 한반도에서도 고인돌 앞에 비파형동검을 꽂아두고 숭배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화려한 황 금 보검이 아니라 날이 빠진 낡은 칼을 꽂아두는 것이 선뜻 이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저승과 이승을 반대로 생각했던 고대 유 목 민족들의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유물은 일부러 부러뜨리거나 깨서 기존의 형태를 훼손하여 넣는 경우가 흔하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왕이나 장군의 경우에는 시신을 거둔 뒤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안치했다. 2,500여 년 전 러시 아 알타이 초원의 파지리크 고분군 유적에서 왕족을 묻은 대형 무 덤을 발굴하던 중 흥미로운 인골이 발견되었다. 미라 형태로 발견된 무덤의 주인공은 머리 가죽이 벗겨진 상태였는데 벗겨진 부분 을 소가죽으로 덧대어둔 것이다. 오래전 동아시아에서는 적장을 죽이고 나면 목을 베어 그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풍습으로 유목 민족들의 경우에는 목 을 베는 대신 머리 가죽을 벗겨서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말의 꼬리 에 달고 다녔다. 아마도 미라로 발견된 왕족은 전쟁터에서 선봉에 나섰다가 희생을 당한 인물이지 싶다. 그의 부하들은 전장에서 목 숨을 잃고 머리 가죽이 벗겨진 수장의 유해를 고이 모셔와 적군에 게 훼손된 신체를 정성스레 복구시킨 후 무덤에 안장했을 것이다. 이런 풍습이 있다 보니 전사의 유골은 전쟁터에서 획득해야 하는 주요한 전리품이었다. 북방 유목 전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승기를 잡 았다고 해도 적의 무덤을 찾아 그 인골을 훼손해야 비로소 전쟁이 끝 났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무덤 에서 발견한 귀금속들을 전리품으 로 챙기기도 했다. 실제로 흉노의 고분을 발굴하다 보면 이미 도굴이 되어서 인골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문신 과정은 침술과도 비슷해 치료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 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굴된 미라의 허리 아래 부분에는 마치 침을 놓은 듯 일렬로 점을 찍은 문신이 양쪽으로 남아 있다. 이 부 위는 공교롭게도 오래 말을 탈 경우 가장 통증이 심한 요추 부분 이다. 기마민족에게 요통은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이었을 터, 바늘 로 아픈 부위를 찔러 허리 통증도 줄이고 신령한 힘을 몸에 불어 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신을 완성하려면 바늘로 수백 번, 수천 번 몸이 찔리는 고통 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고통을 동반한 채 우리 몸을 도화지 삼아 새겨 넣은 문신은 고대의 정신문화가 담긴 메모리와 같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 문신은 특유의 주술적, 제의적 의미는 사라지 고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사람들이 몸의 털을 밀고 문신으로 표 식을 새겨 넣는 대신 신분과 계급에 맞는 옷과 화장으로 자신의 몸을 가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중에 문신은 근대화하지 못한 야만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또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문신은 고통을 감내하면 서도 자신의 지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가 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화장술이었다.

- 사실 옛사람들이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점을 쳤는지 등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나마 점복의 흔적으로 가장 많이 발굴되는 것은 복골이다. 복골은 짐승의 뼈로 만들 어진 점을 치는 데 쓰던 도구인데 짐승의 어깨뼈를 불로 지진 다 음 거기에 새겨진 금을 보고 점괘를 보는 방법, 거북의 껍데기나 짐승의 어깨뼈에 글자를 새겨 놓고 그것으로 점괘를 보는 방법 등 이 있었다. 뼈 부위 중에서도 어깨뼈(견갑골)가 선호된 이유는 가 장 얇은 뼈라서 잘 갈라졌기 때문이다.
- 복골의 풍습은 한반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다만, 상나라와 달리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 외에 점을 치는 방식이나 도구 등은 상나라의 그것과 모두 똑같다. 소나 돼지의 어깨뼈에 구멍을 일정하게 뚫어서 불 위에서 그을린 뒤 잘 갈라지게 한 복 골이 약 2,000년 전의 마한과 가야 사람들이 살던 서해안과 남해 안의 조개무지에서 다수 발견되기도 했다. 요즘에도 유독 어촌에 점집이 많은 편인데, 바다만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자연환경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복골 이 발견되기도 했다. 강릉 바닷가에 위치한 강문동의 늪지대에서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이 발굴된 것이다.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강문동에서 발견된 복골이 유일하다. 중국 상나라에서는 남방 바닷가에서 잡아온 귀한 거북의 등딱지를 짐승의 어깨뼈 대신 쓰기도 했지만, 말뼈는 사용한 적이 없다. 말의 사육 과 이용이 가장 활발했던 초원 지역에서도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 은 거의 없다. 이들에게 말은 귀하게 돌보며 타는 동물이지 잡아 먹고 남은 뼈로 점을 쳐도 되는 동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들 을 종합해볼 때, 강문동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복골용 뼈로 말 뼈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말을 탈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소 나 돼지 같은 가축으로 인식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1) 2024.05.17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  (1) 2024.05.12
대담한 작전  (0) 2024.04.17
부의 세계사  (14) 2024.03.05
종교의 흑역사  (2) 2024.02.16
Posted by dalai
,

대담한 작전

역사 2024. 4. 17. 08:10

- 농업과 산업 기반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한 소규모 기습은 중세와 근대 초기의 전쟁에서 거의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습이 개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빚어낸 적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 역시 특수작전의 정의와는 맞지 않는다. 알레포 시장이나 오리올의 방앗 간 같은 시설들이 특수작전의 대상이 될 만큼 가치를 지니는 것은 오로지 독특한 정황이 갖춰졌을 때뿐이다.
군대에 필요한 장비가 갑옷, 칼, 투구 등 몇 가지밖에 없고, 보급품 을 위해 본국의 산업생산에 기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여기 서 반드시 강조해야겠다." 일반 화살과 석궁 화살은 대량으로 필요했다. 때로는 군주들이 수십만 개의 석궁 화살을 사들이거나 요구하 기도 했다. 잉글랜드 국왕 존은 1212년에 석궁 화살 21만 개를 구매 했고,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1272년에 석궁 화살 10만 개를 내놓 으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백년전쟁 때 프랑스에서 작전을 치던 잉글랜드 군대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장궁 화살이 필요했 다. 예를 들어 영국 왕이 1421년에 구매한 화살은 42만 5,000개나 된다"
그러나 현대에 비하면 이만한 수량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 다. 또한 중세 통치자들은 보통 필요한 만큼의 화살을 현장에서 제 작하거나 외국상인에게서 사들이는 방법을 썼다. 많은 도시와 마을 에 할당량을 정해주기도 했다." 하이메 1세가 1272년에 요구한 10만 개의 석궁 화살은 여러 마을이 나눠서 공급했다. 바르셀로나는 1만 5,000개를 공급하고, 우에스카는 4,000개를 공급하는 식이었다." 도 시와 지방에서 산업생산은 소규모 공방들이 담당했다. 대규모 조립라인에서 똑같은 물건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장인들이 손으로 일일이 물건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군대가 수십만 개의 화살을 본국에서 공급받는다 하더라 도, 전국에 흩어진 소규모 공방에서 많은 장인들이 만들어냈다. 이러 니 어느 한 도시의 공방 몇 군데를 파괴하기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하 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예컨대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작전을 시행 했다 해도, 발렌시아나 이탈리아 남부에서 작전 중인 아라곤 군대에 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화약이 혁명을 일으킨 뒤에도 이런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16세기까지는 그랬다. 군대가 요구하는 화약, 포탄, 화 승총탄의 양이 중세 군대가 요구하던 화살의 양보다 확실히 많기는 했다. 1513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화약 510톤을 실어 보냈고, 투르네 공성전에서는 대포 180문이 매일 최대 32톤까지 화 약을 소비했다." 1565년 몰타 공성전 때 튀르크 군대가 쏜 포탄은 13만 개로 추정된다. 화승총탄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다."
- 그러나 생산방법은 여전히 중세와 다를 바 없었으며, 외국 상인들에게서 사들이는 화약과 무기의 비중이 컸다. 특수작전의 유혹을 불러 일으킬 만큼 규모가 큰 무기 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약고는 매력적인 표적이었다. 기술적으로 파괴하기가 몹시 쉬웠 기 때문이다." 육군의 화약 운송열차, 함대에 보급되는 화약, 도시의 화약고 등을 날려버린다면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될 수 있었다. 예 를 들어 1453년 하버러 전투에서 헨트 시민군은 포병의 부주의로 화 약고 일부가 폭발하자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다(헨트 시민들은 부르고뉴의 지나친 과세에 항의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제압되었다-옮긴이) 15세 기 말에는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이던 군대가 화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푸는 일이 잦았다. 한편 포위된 도시 또 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면 적에게 함락되곤 했다."
그러나 화약고가 종종 사고로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화약고 를 목표로 특수작전이 시행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당혹스 러운 결과다. 어쩌면 특수작전에 대한 중세식의 인식이 여전히 지배 적이어서, 화약혁명 이후 나타난 새로운 전쟁 양상과 사건들 중 일부 가가려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들은 특수작전의 주요 표적이 었다. 그들이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전쟁 의지 전체를 지탱해주는 유 일한 존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도 시대에 상비군이나 상 시적인 군대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미군에 대 해 말하듯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군이나 아라곤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오로지 다양한 규모의 '프랑스계' 부대나 '아라곤' 부대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들은 영지 주둔 병력, 용병대, 민병대, 동맹국 지원대, 떠돌아다니는 개인 등이 임시로 한데 모여 형성된 부대였다. 원정이 끝나면 부대는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또 부대가 만들어질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충성심의 지속기간도 군대의 지속기간보다 아주 조금 더 길 뿐이 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 개개인과 지휘관들 사이의 유대가 아주 오랫동안 강력하게 지속되기도 했지만, 군대 전체는 다른 문제였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군대에는 기강 해이, 탈영, 반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반역이 만연했다. 군대의 동맹관계는 수시로 변할 때가 많았으므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얼마든지 적이 될 수 있었다. 영지 들의 충성심은 특히 내전이나 계승전쟁의 경우 변덕을 부리기 일쑤 였다. 용병들의 충성심은 이보다 훨씬 더 미약했고, 병사들과 장교들 은 물론 분대 전체가 전쟁을 하다 말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예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도 이런 짓은 밉살스럽게 여겨졌지만, 병사나 장교나 분대 가한 계절에는 이쪽 군주를 위해 싸우다가 다음 계절에는 반대편 군 주를 위해 싸우는 일은 그들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에는 여러 군대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자 뺏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부대들이 끊임없이 동맹을 바꿨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으로 싸우던 분대가 다음 전투에서는 '합스부르크'군으로 나타나곤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이런 군대에 합류하거나 군대를 떠나는 데에는 다양한 개인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들을 꼽아 보면 자신의 영주나 특정한 친구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 고정된 보수 와 전리품을 받아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사회적 지위를 높 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명예를 얻어 남성성을 확립하고 싶다는 욕 망, 모험에 대한 열망 등이 있다. 애국심이나 신앙심은 대개 이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군대를 하나로 묶어 지탱해주는 것은 순전히 사령관의 능력인 경우가 많았다. 군대를 구성하는 여러 부대의 충성 심은 추상적인 이상이나 정치체제보다 사령관을 향하고 있었다. 사 령관은 경우에 따라 영주이기도 하고, 친구나 동맹이기도 하고, 단순 히 돈을 지불하는 고용주이기도 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은 처음에 스위스의 소지주로 출발했으나, 16세기 말에는 가문 소유의 영 토가 북해에서부터 지브롤터까지 유럽을 뒤덮고, 필리핀부터 멕시코 까지 세계로 펼쳐져 있었다.
군대와 제국이 가문의 일인 것처럼, 전쟁의 목적 또한 사령관 본인 이나 가문의 이득을 위한 것일 때가 많았다. 전쟁은 왕가의 이익과 상 속권을 위해 군주들이 벌이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송사의 연장" 8 이 었다."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고, 이 시기의 모든 주요 분쟁 (아라곤-앙 주 전쟁, 백년전쟁, 장미전쟁, 이탈리아 전쟁 등)은 대체로 왕가의 상속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유럽의 모든 왕국, 공작령, 백작령이 계승전쟁으 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전쟁에서 지휘관의 비중이 이처럼 컸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적 사령관을 공격해서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전투나 포위 공격이나 원정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 암살과 납치의 가장 큰 약점은 불명예스러운 싸움방법이라는 점이 었다. 암살과 납치는 당시를 지배하던 정치문화의 약점을 온전히 이 용하는 한편, 바로 그 문화 전체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전적인 '죄수의 딜레마'(협력적인 선택이 둘 모두에게 최선인데도,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으로 인해 둘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는 현상옮긴이) 사례라 고 할 수 있다. 암살과 납치를 가장 먼저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엄청난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 정치질서도 변할 것이고, 이것이 모든 통치자들에 게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군사적 수단으로 다른 곳보다 훨 씬 더 암살에 의존했던 중세의 중동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안정적인 왕조와 영지를 찾아보기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더 힘들다는 점 이 좋은 예다. 
서유럽에서도 이단과 이교도에게는 암살과 납치가 널리 사용되었 다. 같은 기독교인에게도 가끔 사용되기는 했으나, 금기의식이 여전 히 남아 있었다. 이것이 봉건 정치체제가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하 는 데 기여한 요소였다. 이탈리아의 일부 군주와 폭군을 제외하면, 중 세나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니자리파와 유토피아인의 본을 따라 암살을 정치와 군사의 일반적인 도구로 이용하거나 특수한 암살부대 를 훈련시키려고 시도한 주요 정치세력이나 군대는 없었다. 암살을 군사적인 도구로 이용할 때도, 이것이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더럽고 부끄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암살과 납치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식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 런 작전이 성공을 거뒀을 때조차 명예에 흠집이 났다는 것을 뜻했 다.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언제나 대외적인 이미지 면에서 재앙을 만난 격이었다. 전투의 패배가 흔히 명예롭게 여겨지는 것과는 달랐다.!!"
- 18세기 이후 전쟁을 정당화한 논리들에도 불구하고, 납치와 암살 이 여전히 군사적 금기로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명예 와 계급 이익의 제단에 승리를 제물로 바치는 기사도 시대의 군인정 신이 아직도 남아 세계 지도자들을 적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토머스는 1983년에 특수작전을 다룬 글에서 명 예에 대한 기사도적 인식이 20세기가 밝은 지 한참 지났을 때까지도 특수작전의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직업 장교들이 특수작전을 "군인의 명예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머스 본인도 비록 특수작전의 최근 역사와 미래의 잠재력을 포괄적으로 개관하려고 시도하면서도, 암살의 시행방법과 유 용성에 대한 논의는 회피했다.
기사도의 '공정한 경기 규칙을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해버리고, 전 장에서는 승리를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라면 표적 사실과 정치적 암살에 부과된 제한과 그런 행위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인류의 완벽한 파멸을 위해 계산된 계획 을 수립하던 대통령, 의장, 원수 등도 다른 지도자들의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1976년에 미국의 제럴드 포드 대 통령은 미국 정부의 공무원들이 정치적 암살을 모의하는 것을 불법 으로 규정한 행정명령 제11905호를 발표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행정 명령 제12333호를 통해 이 명령을 지지했고, 그 뒤를 이은 모든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  (1) 2024.05.12
세상 모든 것의 기원  (3) 2024.04.26
부의 세계사  (14) 2024.03.05
종교의 흑역사  (2) 2024.02.16
이천년전 중국의 일상을 거닐다  (3) 2024.01.04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