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가 시작된 이래로 당대의 기술적 진보가 독특하고 혁명적이라는 자만심은 항상 있었다. 물론 우리의 시대도 예외가 아 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다. 과학의 진보가 인간사에 미친 완전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그 120년 동안에 일어나서 사회구조의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기 술의 폭발로 눈을 돌려야 한다. 순식간에 이동 속도가 열 배로 증가했고 거의 즉각적인 통신이 이루어졌다. 19세기 초만 해 도 토머스 제퍼슨이 몬티첼로Montichello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여 행하는 데 열흘이 걸렸고 상당한 비용, 육체적 고통, 위험이 수 반되었다. 1850년에는 증기기관차의 등장으로 같은 여행을 이전보다 훨씬 적은 비용, 불편함, 위험으로 하루 만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스티븐 앰브로즈stephen Ambrose의 『불굴의 용기undaunted Courage』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생각해보라.
1801년의 세계에서 중요한 사실은 말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 직이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제조된 물건, 밀, 쇠고기, 편지, 정보 또는 그 어떤 명령이나 지시도 말보다 빠르지 않았 다. 제퍼슨과 동시대 사람들이 알기로 말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었다.
- 1837년에 영국에서 윌리엄 포더길 쿠크William Fothergill Cooke 와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 이 전신을 발명하면서 즉각적 인 통신이, 금세기에 비행기와 컴퓨터에 의해 일어난 변화가 왜 소하게 보일 정도로, 경제·군사·정치적 문제의 면모를 갑작스 럽게 바꾸어 놓았다. 전신이 나오기 전에는 원시적 통신기술이 일상적으로 크고 작은 비극을 낳았다.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이 1815년에 뉴올리언스에서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은 헨 트Ghent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된 지 2주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1850년 이후에는 기술이 진보하는 속도가 가속되지 않고 느려 졌다. 1950년에 생존했던 서구 세계의 평균적 거주자는 2000 년의 기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 에, 1800년에 살았던 사람은 50년 후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혼 란을 겪었을 것이다.
- 통화에 관한 간략한 설명
모든 금융의 역사가 그래야 하듯이, 이 책은 당시의 통화-몇 가 지 예를 들자면 영국의 파운드pounds, 스페인의 페소pesos, 베네 치아의 두카트ducats, 피렌체의 플로린florins, 프랑스의 리브르 livres를 다룬다. 나는 모든 금액을 현대의 통화로 바꾸는 항상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작업으로 글을 어지럽히지 않기로 했다. 이에 관한 정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음의 대략적인 근사 치가 도움이 될 것이다. 유럽의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 국가에서 통화의 표준 단위는 1/8온스ounce (무게의 단위, 1온스는 28.35그램-옮긴이)짜리 작은 금화- (1파운드보다 약간 더 나가는) 영국의 기니 guinea, 리브르, 플로린, 두카트 같은였고, 이는 오늘날의 기준 으로 약 40달러의 가치에 해당한다. 1500년과 1800년 사이에 영국 신사의 연간 생활비는 총액 300파운드 정도였고, 농부와 노동자는 15~20파운드로 꾸려나갔다. 그러나 통화 가치의 하 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근사치조차도 아주 빈번하게 매우 부정 확하게 측정된다.
주된 예외는 기니와 리브르의 약 절반 정도 가치를 지닌 네 덜란드의 길더guilder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드라크마drachma는 대략 노동자나 농부의 하루 임금과 대략 비슷했다.
- 번영은 단순히 수력 댐, 도로, 전화선, 공장, 비옥한 농지, 심지어 거액의 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제 인프라의 핵심 요소를 이전하 는 방법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번영을 이식할 수도 없다. 가장 예외적 인 경우를 제외하고 국가의 번영은 물리적 대상이나 천연자연의 문제가 아니 다. 상호작용하고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하는 제도와 관행 institutions의 문제다. 1부에서는 이러한 제도와 관행이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 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제도와 관행이 부각된다.
*안전한 재산권. 여기에는 물리적 재산뿐만 아니라 지적 재산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가 포함된다-시민권
*세계를 탐구하고 해석하기 위한 체계적인 절차-과학적 방법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한 광범위하고 개방적인 자금원-현대적 자본시장
*중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사람과 재화를 운송하는 능력
- 네 가지 요소-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효율적인 자본시장, 그리고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가 모두 갖추어지기 전에는 국 가가 번영할 수 없다. 네 요소는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잠시 합 쳐졌으나 영어권 세계에서는 1820년경까지 안정적으로 자리 를 잡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머지 세계로 확산 하기 시작했다.
이들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경제 발전과 인간의 복지가 위태로워진다. 네 개의 다리 중 하나만 걷어차더라도 국가적 부 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이 전복되는 것이다.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를 당한 18세기의 네덜란드, 재산권이 상실된 공산주의 국 가들, 자본시장과 서구적 합리주의가 없는 여러 중동 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가장 비극적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서는 여전히 네 가지 요소 모두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 여러 세기에 걸친 경제 발전을 측정하고 싶다면 먼저 최저 생활 수준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를 물어야 한다. 매디슨은 1990년의 저개발 국가에서 연간 약 400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했다. 다음으로, 경제사학자들은 가 용한 모든 데이터를 사용하여 이 수준에서 살아가는 인구의 비 율을 결정한다. 인구의 거의 10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농 산물의 상당 부분을 수출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에 따라 연간 400달러의 생계 수준에 매우 근접하는 삶을 살아간다. 매디슨 처럼 1인당 400달러의 GDP 를 1세기 초의 유럽, 1950년의 중 국, 또는 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에 일률적으로 할당하는 것은 대단히 임의적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최소한 경제성장을 비교하고 측정하는 기준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은 '도시화 비율urbanization ratio', 즉 인구 1만 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율을 살펴 봄으로써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리 스와 로마의 전성기에도 인구가 1만 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사 람의 비율이 극히 미미했다. 1500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도 시가 15만 명의 주민이 있는 나폴리였다. 86만 5000명의 유럽인, 다시 말해서 대륙 인구의 약 1퍼센트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고 6퍼센트는 인구 1만 명 이상의 소도시에서 살 았다. 따라서 중세 시대에는 유럽인의 90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했다. 중세기에 유럽보다 훨씬 발전한 아시아의 위대한 문 명권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100퍼센트에 더 가까웠 고, 극소수 지배 엘리트의 막대한 부가 이 지역의 전반적 번영 의 수준을 높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1500년 이전에는 전 세계의 1인당 GDP가 매디슨이 정의한 400달러 의 생계 수준에 근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 미국에서는 1820년까지도 70퍼센트에 달하는 노동 인구가 농장에서 일했다. (미국은 농산물의 상당 부분을 수출했기 때문에 낮은 도시화 비율이 시사하는 것보다 생활 수준이 훨씬 더 높았다.) 1998년에 이 수치가 2퍼센트로 떨어졌다. 농장 생활을 낭만적으로 바라 보는 사람들은 현대 세계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빈곤의 강력한 지표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문명의 여명기에 는 상황이 반대였다. 인류는 훨씬 덜 생산적인 수렵과 채집에 종사하는 유목 민의 삶에서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정착된 농부의 삶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아 마도 당시의 수렵채집가들은 농부의 부드럽고 새롭고 영혼이 없는 삶의 방 식을 한탄했을 것이다.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농업은 여자들의 일로 업신 여겨졌다.)
- 아주 긴 역사적 발자취를 조사하는 일의 유리한 점은 성장 에 관한 커다란 불확실성까지도 '씻겨나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0년이라는 기간에 대하여 1인당 GDP의 시작이나 끝 을 두 배로 과대평가하더라도 연간 성장률에는 0.07퍼센트의 오차밖에 발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세계 1인당 GDP 성장률이 예컨대 0.5퍼센트 정도까지 높을 수 없었다. 성장률이 0.5퍼센트였다면 1인당 GDP가 오늘의 달러 가치로 400달러에서 2000년에 860만 달러로 늘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간의 대부분 동안 성장이 실제로 0에 매우 가까웠다고 확신할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극단적인 낙관적 추정치조차도 서기 1년부터 1000년까지의 기간 동안 세계 1인당 GDP의 두 배 또는 세 배 성장을 시사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1820년 이후 172년 동안에는 세계 1인당 GDP가 여덟 배로 성장했다. 같은 172년 기간에 영국의 1인당 GDP가 10배, 미국은 20배로 늘어났다.
- 5000년 전에 돈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전에도 인간은 빌려주 고 빌렸다. 수천 년 동안, 빌려준 곡물과 가축에 이자가 붙었다. 겨울에 빌린 곡식 자루나 송아지를 수확기에 두 배로 갚아야 했 다. 이러한 관행은 저개발 사회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고대 신용시장의 역사는 광범위하고 깊다. 비옥한 초승달- 수메르, 바빌론, 아시리아-지대의 초기 역사기록에서 많은 부 분이 돈을 빌려주는 일에 관한 기록이다. 함무라비의 유명한 바 빌로니아 법전-최초로 알려진 포괄적 법전도 상업적 거래를 다뤘다. 몇 가지 작은 예를 들면 충분할 것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1900년까지 수메르에서 보리를 빌려주는 통상적 금리는 33퍼센트, 은을 빌려주는 금리는 20퍼센트였다. 두 금리의 차 이는 보리를 빌려주는 것이 은을 빌려주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반영했는데, 후자는 소비되거나 부패할 수 없고 은 수확 silver crop이 흉작일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35
그런 금리는 장기적 프로젝트의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이자율이다. 연 20퍼센트의 이자율이면 4년도 안 되어 빚 진 돈이 두 배가 된다. 분별 있는 사업가나 기업이라면 그렇게 엄청난 미래의 부담을 지면서, 대규모의 상업적 시도가 대부분 그렇듯이, 5년 또는 10년 동안 수익을 내지 못할 프로젝트에 자 금을 대려고 돈을 빌리지 않을 것이다.
- 경제사학자 리처드 실라Richard Sylla에 따르면 이자율이 사회 의 건전성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이자율 도표는 사실상 사회의 열 곡선fever curve 이다. 불확실한 시기에 는 공공의 안전성과 신뢰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자율이 상승 한다. 광범위한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의 모든 주요 문명에서 U 자형 금리 패턴이 나타났다. 역사의 초기에는 이자율이 높았고 문명이 성숙하고 안정되면서 서서히 낮아졌다. 이는 발전의 정 점에서의 낮은 성장률로 이어졌고 마침내 문명이 쇠퇴함에 따 라 이자율이 다시 상승했다. 예를 들어 서기 1세기와 2세기 로 마 제국의 절정기에는 이자율이 4퍼센트 정도로 낮았다. 이러 한 과정은 장기적 ·평균적으로만 유지되고 단기적 변동이 심하다. 1세기와 2세기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단기적으로 이자율이 12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로마의 몰락(전통적으로 서기 476년으로 보는) 이후에 제국의 이 자율이 급상승했다. 약 2세기 후에 서구의 상업 활동은 무함마 드의 헤지라 Hejira(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하여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옮긴이)와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아랍제국의 부상 으로 또 한 차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지브롤터 해협의 통제 권을 확보한 아랍인들이 지중해 무역을 실질적으로 차단했다. 이자율의 역사적 흔적은 로마시대 후기에 홀연히 사라졌다 가 거의 1000년이 지난 뒤에야 영국에서 다시 나타난다. 12세 기 영국에는 40퍼센트를 훨씬 넘는 이자율의 기록이 있고, 이 탈리아에서도 같은 세기 후반의 평균적 이자율이 약 20퍼센트 였다. 보다 합리적인 미래를 예고하는 최초의 희미한 빛은 일찍 이 1200년경에 이자율이 8퍼센트까지 떨어진 네덜란드에서 나 타난다.
- 그렇게 높은 이자율은 자본시장의 실질적 부재를 의미했고, 수 세기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상업적·경제적 구속복이 되었다. 종교적 교리가 지적 진보의 목을 조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시 장의 부재가 일상적 상업 활동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금전 대 출에 대한 기독교의 금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금지의 기원은 출애굽기 22장 25절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이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고리대금업자 행세를 하지 말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상업 활동 자체가 사악하다"고 생각했고, 성 히에로 니무스는 "상인이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견해 를 밝혔다.
- 1500년 이전에는 평균적인 인간의 웰빙이 정체되어 있었다. 지금쯤은 그 침체의 근원이 명백해져야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부의 창출에 따르는 인센티브가 없었다. 봉건 귀족, 국가, 교회, 또 는 일반 범죄자의 약탈로부터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로 어떤 유럽인도 감히 창의적이나 과학적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창조자가 종종 이 세상과 다음 세 상에서 비난을 받고 잊혀졌기 때문이다. 셋째로 부를 창출하는 발명과 서비스를 구상하더라도 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구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발명품이 대량 생산되더라도 발명가 가 자신의 제품을 광고하고 멀리 떨어진 도시의 소비자에게 저 렴하게 운송할 수 없었다.
- 농업으로의 전환을 '1차 경제혁명 (2차는 산업혁명)'이라 부른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더글러스 노스Douglas North는 말한다.
1차 경제혁명은 인간의 주요 활동이 수렵과 채집에서 정착 농 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었다. 그러한 변화가 상 당수 인간에게 인센티브의 변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혁명이 었다. 인센티브의 변화는 두 시스템의 서로 다른 재산권에서 나왔다. 자원에 대한 공동재산권이 존재할 때는 우월한 기술과 지식을 확보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 근대적 번영의 네 가지 기반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자본에 대한 손쉬운 접근,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중에 재산권이 가장 먼저 생겨났고, 재산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고대 세계에서 처 음으로 빛을 보았다. 현대 세계에서도 재산권이 네 가지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하다. 위대한 경제학자 P. J. 오루크가 말하듯이, "99퍼센트의 문자 해독률과 훈련되고 근면한 사회를 갖춘 북한 의 1인당 GDP는 900달러다. 문자 해독률이 43.7퍼센트이고 온 종일 커피를 마시면서 양탄자를 사라고 관광객을 성가시게 하 는 모로코의 1인당 GDP는 3260달러다."
그와 동시에 재산권만으로는, 다른 세 가지 요소를 갖추지 못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정체 및 쇠퇴가 보여주듯이, 경제성장 을 촉진하기에 충분치 않다.
- 왜 우리는 고대 세계의 작은 지역-문화적 영향력이 있었더라도에서 잠시 재산권이 꽃을 피운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세 가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재산권에는 독립적인 사법 체계가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참정권이 부여된 시민권이 사회의 생산성에 매우 중요하다.
*재산권만으로는 활기차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기에 충분치 않다.
- 고대 그리스인은 진보한 사람들이었지만, 경제성장에 필요한 다른 세 가지 조건, 즉 적절한 과학적 프레임워크, 정교한 자본시장,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을 갖추지 못했다. 네 가지 조 건이 모두 융합하여 인류가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2000년 후의 일이었다.
- 고대 세계에서는,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채무불이행이 가혹 하게 다루어졌다. 로마에서는 아무리 작은 빚이라도 갚지 못하 면 채무자의 전 재산을 압류하여 경매에서 매각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채무자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혔는 데 이러한 관행이 서구 세계에서 채무자의 감옥debter's prison 으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채무불이행은 단지 법적 구제 책만이 아니고, 단순한 정의 구현의 요구를 훨씬 능가하는 처벌 방식이기도 했다. 가혹하기는 하지만, 노예제도로 채무불이행을 처벌한 그리스의 관행보다는 크게 개선된 방식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형태의 개인적 보증을 요구하는 것은 혁신 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모든 새로운 벤처사업은 상 당한 실패 가능성을 수반하고, 유능한 기업가는 그런 사업에 내 포된 위험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실패한 사업에서 재산을 잃는 것만 해도 충분히 나쁜 일인데 그 과정에서 자유까지 잃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1500년 이후에 영국에서 채무자의 감옥이 폐 지되고 유한책임회사가 탄생한 것은 자본시장의 상황을 크게 개선하고 세계의 경제성장을 촉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17세기는 코크가 관습법으로 왕실의 특권을 무력화한 것으 로 시작하여 영국 의회의 우위를 불러온 처참한 내전의 여파 속 에서 끝났다. 코크의 사법적 우위가 1688년 의회의 내전 승리 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이는 왕실의 몰락으로 인한 이익에 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았다.
다음 세기는 존 로크와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사법권 과 의회 권력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나머지 서구 세계로 전파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국가 권력을 세 개의 가지 행정 부, 입법부, 사법부로 분할하고 제한하는 거의 연속적인 과정에 따라 자유와 재산에 대한 개인의 권리가 강화되었다.
17세기 중반의 영국 내전 당시에 영국인의 재산은 인류 역사 상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했다. 그렇지만 다른 세 가지 요소가 충 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번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 진 200년 동안에 영국은 나머지 세 요소를 확보했고, 19세기의 증기기관과 전신의 발명으로 절정기에 이르렀다. 그 시점에서 영국과 영국의 딸 국가daughter nations들의 이점은 그들을 이전의 세대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의 번영으로 이끌게 된다.
- 1800년경 이전에는 재산이 토지와 동의어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가용한 토지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나 로마제국이 불안정하게 된 것은 그때문이었다. 토 지가 부족하고 비싸짐에 따라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인구가 점 점 더 적어졌다. 이는 사회의 복지에 이해관계가 있는 지주 시 민의 기반을 축소했다. 국가가 번영하려면 상당수의 시민이 재 산을 소유함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프로세스에 개인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로 이해당사자 효과stakeholder effect다. 근대 이전 세계에서 토지가 고갈되어 이해당사자의 기반이 약해진 국가는 종말이 멀지 않은 국가였다.
반면에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는 농업의 집중화로 인하여 불안정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공황 이후의 미국에서 개별 농장의 수가 크게 줄었다는 것-크기는 늘어나고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구조사국이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한 1870 년부터 1935년까지 농장의 평균적 규모가 155에이커였지만, 1987년에는 세 배인 462 에이커로 늘어났다. 1900년에 미국인 의 9퍼센트가 농장을 소유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비율이 1퍼센 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한 세기 전보다 덜 안정적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 다. 이유는 간단하다. 후기산업사회의 경제는 시민을 이해당사 자로 만들기 위하여 토지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무제한적인 비 실물 자산과 자본의 소유권이 토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현대의 자본 소유는 20만 에이커에 불과한 경작지가 25만 인구에게 가용했던 아티카에서 달성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큰 비율의 인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토지의 소유에는 한계가 있지만 자본의 소유에는 한계가 없다.
서구의 근대적 시스템은 주로 영국의 관습법에서 유래하여 1000년 동안 서서히 고통스럽게 조립되었고, 영국의 식민지 개 척의 칼끝에서 그리고 미국의 혁명적 이상주의의 날개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오늘날, 현대 세계 번영의 원천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의 으뜸가는 중요성 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1700년 이전의 중요한 기계적 발명의 목록은 길지 않다.
풍차, 수차, 인쇄기 정도가 거의 전부다. 1700년 이후에는 끊임 없이 증가하는 발명의 급류가 흘러서 인류의 부를 쏟아냈다.
이러한 혁신의 폭발에 박차를 가한 것은 서구인이 자연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방식 자체의 혁명이었다. 서구 인과 서구문화 자체가 이러한 과학적 합리주의의 탄생으로 정 의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 혁명은 과학이, 또는 당시에 알려진대로 자연철학이 교회의 뿌리에서 단절될 것을 요구했 다. “인류는 영성과 세속성을 분리하고, 성령의 의도는 우리에 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하늘이 어떻게 움 직이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갈릴레오의 신조를 받 아들이기까지 번영하지 못했다.'
- 서기 1500년까지 수많은 지적인 관찰자들이 프톨레마이 오스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에 서 그중 한 사람, 프톨레마이오스 시스템의 여러 심각한 결함 을 밝혀낸 도메니코 노바라Domenico Novara를 만났다. 폴란드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여러 해 동안 의사로 일하다가 마침내 폴란드의 프라우엔부르크Frauenburg에 정착하여 당시의 원시적 인 도구로 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태양 중심 모델의 장점 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 그는, 1530년에 완성했지만 사망하기 직전인 1547년까지 출간되지 않았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volutionibus Orbinum Coelestium』에서 태양 중심 우주론을 지지하는 주장을 제시했다.
현대의 믿음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심각한 결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큰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우선 그 모델은 저자가 사망한 해가 되어서야, 당연히 라틴어로, 출간되었다.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성직자와 상인 엘리트뿐이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교회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게다 가 필멸의 운명이 곧 코페르니쿠스를 종교재판의 손이 닿지 않 는 곳으로 보냈다. 코페르니쿠스의 조수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Andreas Osiander는 자신의 안전을 우려하여 책의 내용이 순전한 가 설임을 선언하는 익명의 서문을 썼다. 그는 지구가 실제로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정함으로써 더 정확한 천문 학 계산이 가능하다고 했다.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행성의 운동, 특히 수성과 금성이 지 구 궤도 안쪽에 있기 때문에 태양에서 각각 28도와 48도 이상 은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프톨레마이오스 모델보 다 더 잘 설명했다.
-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만큼이 나 우아하지 못했다. 문제는 두 모델 모두, 나중에 케플러가 발견 했듯이, 실제로는 타원인 궤도를 완벽한 원형으로 가정했기 때 문에 주전원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 시스 템에는 세 세트의 궤도와 주전원이 필요했다. 설상가상으로, 코페르니쿠스는 각각의 구체가 내·외부의 이웃과 밀접하게 접 촉하고 전체 우주가 그들의 집합적 두께로 구성된다는 프톨레 마이오스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우주에 광대한 공허가 존 재할 수 있다는, 한 세기도 더 지난 뒤에야 토머스 디거스Thomas Digges라는 영국인에 의하여 제안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서 벗어난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은 프톨 레마이오스 시스템보다도 더 복잡하고 어설픈 시스템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은 실제로 대부분의 천문학 역사에서 자 세하게 설명하지 않을 정도로 복잡했다. 결국 두 모델 모두 동 일한 결함이 있었다. 두 모델의 유연성은 거의 모든 데이터를 수용할 수 있었고 반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했다.
과학적 모델에 가치가 있으려면 반증가능 falsifiable 해야 한다. 즉 모델과 모순되는 증거를 쉽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 든지 새로운 데이터에 맞춰서 원과 주전원이 조정될 수 있는 두 모델 모두 그렇지 않았다.
- 16세기의 평범한 유럽인은 1000년 동안 진정한 사회적, 지 적, 또는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고, 인간의 상황이 보편적으로 정적이라고static 생각했다. 베이컨의 놀라운 천재성은 세 가지를 깨달은 데 있었다. (1) 실 제로 문제가 있었고, 중세인의 상황이 전혀 자연적이 아니라는 것, (2) 연역적 체계가 잘못되었다는 것, (3) 자연계에 대한 지식 과 그에 따른 인류의 복지가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것. 인류의 운명을 개선하려면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선 입관 없이 사실을 모은 뒤에 분석하는 귀납적 체계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은 인간의 상황을 개선하는 다른 방법 - 유용한 지식의 획득을 통한-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아는 것이 힘 이었다. 1603년과 1620년 사이에 그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지 적 동원령intellectual call to arms이 되는 『신기관The New Organon』의 초 고를 완성했다.
『신기관』 1권은 과학에 큰 해를 끼친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다소 장황한 비난이다. "그들은 믿음을 유도하는 데 성공함으 로써 효과적으로 탐구심을 억누르고 멈춰세웠다." 베이컨에 따 르면 문제가 간단했다. 자연의 미묘함이 논증의 미묘함보다 몇 배 더 크기 때문에 실험 데이터와 분리된 빈약한 이론이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일을 해낼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의 관찰 도구 는 심각한 결함이 있고 다양한 유형의 우상idols에 지배된다.
*부족의 우상 idols of the Tribe. 베이컨은 부족을 인류 자체로 정의했다. 이 우상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는 불량거울 false mirror 이다.
*동굴의 우상 idols of the Cave. 이 우상은 개별적인 남성과 여성이 물질 세계를 인식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여기서 그 는 좀 떨어진 곳에 모닥불이 있는 플라톤의 동굴을 떠올린다. 동굴과 모닥불 사이로 사물이 지나가고, 사람은 동굴 벽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의해서만 그들의 본성을 안 다. 큰 그림자를 본 아메리카 인디언은 들소를 생각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캥거루를 생각한다. 이는 “한 사람의 신성한 암소가 다른 사람의 빅맥Big Mac이다"의 17 세기 버전이다.
*시장의 우상idols of the Market. 이 우상은 서로 간의 교류와 연 합으로 형성되는 아이디어다." 여기서 베이컨은 시간에 따른 단어의 의미 변화를 말하고 있다. 17세기 매사추세 츠에서 마녀라는 단어의 영향력은 오늘날과 달랐다. 간단 히 말해서 유행fashion.
*극장의 우상 Idols of the Theater. 이가장 흥미로운 우상은 비현 idols실적이고 보기 좋은 나름의 방식으로 창조된 수많은 무대연극으로 받아들인 시스템received system의 결과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 시스템이 주된 표적이었겠지만, 베이컨 이 세계의 종교도 겨냥했다는 추측 또한 유혹적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본성의 결함을 우상의 지위로 올려놓지 는 않았지만, 베이컨은 인간에게 세계에 자신이 발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질서와 규칙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현대 행동심리학의 개념을 3세기 앞서서 홀륭하게 예견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연관성 을 찾아내고 음모를 의심하는 특출난 능력을 갖춘, 패턴 을 찾는 영장류에 지나지 않는다.
『신기관 2권에서 베이컨은 귀납적 추론이라는 자신의 새로 운 방법을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수단 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측정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잘못된 해석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되는, 인간의 감각을 사용하는 일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자에게는 서로 다른 관찰자의 손에서 도 동일한 데이터를 낳는 방법과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일식의 경로에 대한 핼리의 정확한 예측이 대중을 전율시켰다. 그것은 관찰하고 가설을 세운 뒤에 검증하는 베이컨의 귀납 적인 과학적 방법의 승리를 알리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새로운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추론 체계 를 완파했고, 그에 따라 과학 분야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 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이 완전히 분리되기까지는 적어도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당시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핼리와 뉴턴은 전능하신 분이 천체 운동의 법칙을 예정해 놓았다고 믿었던 독 실한 신자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진 실을 믿었다. 예를 들어 핼리는 지구와 혜성의 근접 상봉이 대 홍수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종류의 행성 충 돌이 대홍수의 원인이라 믿었던 뉴턴은 핼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1700년대에 뉴턴의 루커스Lucasian 수학교수직을 계 승한 윌리엄 휘스턴william Whiston은 런던의 대규모 청중에게 천 문학적 사건과 성서적 사건의 연관성에 관하여 강연했다. 뉴턴 조차도 중세기 미신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직 업적 삶과 글의 대부분이 연금술과 관련되었던 뉴턴은 결별하 기 전의 후크와 존 로크를 포함한 과학적 계몽주의의 저명인사 들과 연금술의 비밀에 대하여 활발하게 서신을 교환했다."
- 초창기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의 중요성을 잘 이해했다. 영국 에서 가장 오래된 경제 옵서버 중 한 사람인 조시아 차일드Josiah Child 경은 1668년에 "오늘날의 모든 국가는 돈의 비용으로 얼마 를 지불하는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얼마를 지불해왔는지에 정 확하게 비례하여 더 부유하거나 가난하다"고 지적했다. 차일드 에게 그러한 관계는 수학적이었다. 기업가가 정해진 금액의 이 자를 감당할 수 있다면, 이자율이 3퍼센트일때 6퍼센트일 때보 다 두 배의 자본이 가용하게 된다. 역사학자 T. S. 애슈턴Ashton은 말했다.
18세기 중반경에 경제 발전의 속도가 빨라진 단일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낮은 이자율에 주 목해야 한다. 깊은 광산, 튼튼하게 지어진 공장, 잘 건설된 운 하, 산업혁명의 집이 비교적 저렴한 자본의 산물이었다.
-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된 내전이 끝나고, 초청된 영국인 총독stadholder 빌럼 3세willem III가 오렌지 공 윌리엄 william of Orange으로 영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총 독은 지명되고 때로는 세습되는 네덜란드의 통치자라는 네덜란드의 특이한 직위였다.) 빌럼(윌리엄)은 영국에 혼자 오지 않았다. 세계 금융의 수도로서 암스테르담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감지한 베어링 Barings 가문과 호프 Hope 가문을 비롯한 금융 엘리트들이 그를 따 라 북해를 건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에 쫓겨서 포르투갈을 거 쳐 네덜란드로 갔던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인도 집단 으로 런던에 도착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리카도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포르투갈 계 유대인 이민자였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네덜란드인의 아이디어도 왔다. 영국인들은 열광적으로 네덜란드 금융을 복사했고, 17세기의 파괴적인 내전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영국의 자본시장이 네덜란드를 능가하게 되었다. 당연히 기존의 금융업자와 신참자 사이의 마찰도 생 겼다.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는 불평하는 시를 썼다.
우리는 왕이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난하네
낯선 사람들, 독일인, 위그노 교도, 네덜란드인
자신의 공정한 국사에 대하여
영국의 의원들과는 거의 소통하지 않고
- 명예혁명 이후에 영국의 재정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었다. 첫째로 왕실이 의존하던 단기 부채가 이자지급과 원금상환이 소비세로 뒷받침되는 네덜란드식 장기 정부부채로 대체되었 다. 다음으로 영국 재무성이 투자 대중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지 는 (즉, 이자율을 가장 낮출 수 있는) 부채를 결정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류의 부채를 실험하면서 은행업계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의 회의 우위는 신뢰를 회복했다. 성공적인 사업가들이 하원을 가 득 채웠다. 정부의 채무불이행으로 피해를 입을 의원들로 구성 된 의회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마 지막으로 1749년에 헨리 펠럼 Henry Pelham 재무장관이 잡다하고 혼란스러운 정부대출을, 베네치아의 강제대출과 네덜란드의 영구연금처럼 만기가 없고 영구적으로 이자가 지급되는, 콘솔consols이라는 유명한 채권으로 통합했다. 콘솔은 오늘날에도 런 던에서 거래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국가대출이 상업대출과 무관하게 보이지만, 정부부채의 건전한 시장은 실제로 기업의 자금 조달에 필수적 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정부의 신용도가 널리 알려져 있고 부채의 거래량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정부부채는 가격을 책정하고 판매하기가 가 장 간단하다. 상업자본의 가격 책정과 판매의 메커니즘이 정부채권 및 어음과 동일하므로, 상업적 부채시장이 원활 하게 기능하기 전에 성공적인 정부부채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근대 이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정부부채가 기업가 에게 자본을 공급하기 위한 보조 바퀴training wheel 역할을 했다.
*정부 부채는 위험이 없는risk-free 투자에 대한 필수적 벤치 마크를 제공한다. 활발하게 거래되는 정부채권과 어음이 상인과 기업가에게 완벽하게 안전한 사업에서 요구되는 수익률의 지속적인 척도를 제시한다. 이것이 위험 할증 risk premium, 즉 대출의 위험성 때문에 이자를 추가로 요구 할 수 있는 기준선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펠럼이 정부 부 채를 통합했을 때 콘솔의 이자율은 3퍼센트였다. 이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차용인, 즉 1688년 이후의 영국 왕실에 제공할 수 있는 최저 금리에 해당했다. 따라서 다소 위험 한 상업적 벤처사업에는 6퍼센트, 투기적 사업에는 10퍼 센트 이상의 이자율이 요구될 수 있었다. 위험이 없는 대 출에 대한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이자율(정부 채권의 금리) 의 존재는 기업가에 대한 대출의 가격 책정을 더 쉽게 만 든다.
- 그렇다면 왜 네덜란드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은 이자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저축을 은행으로 가져갔는데 프랑스인, 독 일인, 인도인, 그리고 터키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배젓은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한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국가적 거버넌 스governance의 근대 이전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터키의 자본시장과 재산권의 결핍 때문에 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자신의 재산을 손 닿는 곳에 둘 수밖에 없었음을 상기하 라. 오스만제국의 부패,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보편적 상황, 오 늘날 다수의 비서구권 국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개인 재산의 보호가 없었거나 없는 곳에서는 혁신에 대한 인센티브가 없다. 설령 그런 미개한 땅 어딘가에 가슴이 뛰는 발명가가 있더라도 자신의 창조물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데 필요한 자본이 존 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모든 자본이 매트리스 밑에서 얼 어붙거나 금은 보석 장신구로 착용되고, 가장 중요하게는, 개인 금고 특히 황제의 금고에 보관된다.
이슬람의 이자 금지는 투르크인의 추가적인 약점이 되었다. 이자가 없으면 대출도 없고, 대출이 없으면 투자도 없다. 알리 파샤가 최후를 맞은 레판토 해전 당시에 서구에서는 이러한 제 한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무슬림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서 구에 비해 저조한 경제 상황이 주로 재산권과 자본시장의 초보 적 상태에 따른 결과였다. 터키 최초의 은행이-유럽인에 의하 여-설립된 1856년 이전의 오스만제국에는 우리가 아는 사유재투르크인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아마도 레판토 해전에 참전 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을 세르반테스의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투르크인이 천하무적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전 세계가 알게 되었다." 투르크인은 그런 운명을 겪은 국가의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꺽이지 않을 것 처럼 보였던 다른 국가-17세기의 스페인과 소비에트 연방이 빠르게 떠오른다들이 자유 시민권과 기능을 발휘하는 시장의 부재로 인하여 결국 쇠락함에 따라 세르반테스의 말이 시대를 관통하는 메아리가 되었다.
- 증기기관에 의한 운송량의 증가는 기본적인 세 가지 경제적 투 입물-토지, 자본, 노동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시장을 평준화 equilibrate 하기 (균형을 맞추기)에 충분했다. 상품과 노동력이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국가 간에, 심지어 이웃한 도시 간 에도 상품 가격과 임금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이는 불균등한 토지 가격을 낳고, 효율적인 통신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 에는, 투자의 수익까지도 장소에 따라 크게 달라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가격 불균형이 적절한 해상 운송 수단이 부족했던 1870년 이전 세계의 경제 상황이었다. 영국에는 토지가 부족하 고 미국에는 풍부했기 때문에, 토지 가격과 그에 따른 식량의 가격이 영국에서 훨씬 더 비쌌다. 반면에 영국에는 노동력이 풍부 하고 미국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이 미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적었다. 따라서 임금이 낮고 물 가가 높은 영국에서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구매력이 미 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낮았다. (자본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자본이 미 국보다 훨씬 더 풍부했기 때문에 영국 자본의 수익률이 미국보다 낮았다.)
증기선의 출현이 미국과 영국 사이의 가격과 임금 차이를 평준화했다. 1870년에 런던의 쇠고기 가격이 신시내티보다 93 퍼센트 더 높았지만, 1913년에는 차이가 18퍼센트에 불과했다. 두 시점 사이에 토지의 임대가 미국에서 171퍼센트 증가했고, 영국에서는 똑같이 극적인 토지 가격의 하락과 함께 50퍼센트 감소했다.
두 나라의 상품 가격, 토지 가격, 임대료가 평형상태에 도달 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 임금도 균형을 이루었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값싼 식품 가격의 결과가 아니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더 쉽게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영국 현지의 노동시장이 위축 된 결과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더 나은 정보와 운송 수단이 더 수익성 높은 해외 투자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영국 자본의 수익률이 개선되었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 는 임금과 상품 가격이 국가 간에 균일하게 수렴하는 경향이 있 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런 방향으로의 첫 번째 거대한 발걸음은 증기 동력이 세계의 대양을 가로질러 상품과 인력을 대량으로 이동시킨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 1825년부터 1875년까지 반세기 동안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 식에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더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시대가 유례없이 급속한 기술적 변화 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진실에서 멀리 떨어진 생각은 없 을 것이다. 두 세대 전의 평균적인 시민이라면 컴퓨터, 제트 여 객기, 심지어 인터넷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서 1820년대부터 1875년까지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 은 반 세기만에 이루어진 철도 여행의 빠른 속도와 즉각적인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을 목격하고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인류 는 1825년 이후의 수십 년 동안과 같은 힘과 속도로 미래로 들 어선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 무엇이 19세기 초의 혁명적 변화와 이후 200년 동안 휴식의 신호도 없이 꾸준하게 지속된 부의 성장을 촉발했을까? 비유를 확장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나는 1800년까지의 서구 경제가 점점 불어나는 잠재력이 축적되는 저수지의 댐dam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 저수지reservoir에는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하여, 에드워드 코크와 후계자들의 탁월함에 힘입어 확대되고, 독점 권과 특허를 관장하는 법령과 판례법으로 보강된 영국의 관습 법이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과학적 계몽시대의 눈부신 지적 진 보와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영국인이 이루어낸 자본 시장의 순차적인 개선도 있었다.
이러한 성취가 실제로 개인의 웰빙을 개선했지만, 그 속도는 빙하의 움직임처럼 느렸다. 1500년과 1820년 사이에 평균 적인 서유럽 국가의 1인당 GDP가 연평균 약 0.15퍼센트의 비 율로 성장했다. 재산권의 강력한 보호가 장인들을 혁신으로 이끌었고, 과학적 합리주의가 그들이 작업할 도구를 제공했으 며, 자본시장이 그들의 경이로운 발명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자 금을 공급한 것은 사실이다. 부족했던 것은 공장을 가동하고 상 품을 운송하기 위하여 필요한 물리적 동력과 전체 프로세스를 조정하는데 필요한 통신의 속도였다.
증기기관과 전신의 발명은 말하자면 댐에 구멍을 뚫어서 유 례가 없는 경제성장의 급류를 풀어놓았다. 그 댐은 결코 재건될 수 없고, 서구의 성장도 가까운 미래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이제 1500년 이후 네덜란드의 놀라운 번영의 원천이 분명해진다.
*영국인에만 비견될 수 있는 강력한 재산권을 누린 국민.
*종교개혁에 힘입어 네덜란드인이 교회의 도그마에서 벗 어난 것.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성이 초기의 여러 개신 교 국가, 특히 독일에 상처를 준 과도한 분열주의에서 네 덜란드를 구해냈다.
*낮은 이자율과 강력한 투자자 보호로 활성화된 네덜란드 자본시장의 풍부한 투자 자금.
*쉽고 저렴한 수상 운송의 이점이 있는 평탄한 지형.
- 네덜란드가 쇠퇴한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복잡하다.
첫째, 이미 살펴본 것처럼, 네덜란드인은 1인당 기준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했지만, 경쟁국의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인구 증가율이 덩치 큰 경쟁자보다 훨씬 낮았다. 1700년에 네덜란드 인구가 190만에 불과했던 반면에 프랑스는 2150만, 영국은 860만이었다. 적은 인구 때문에 네덜란드의 총 GDP는 영국의 40퍼센트나 프랑스의 20퍼센트를 한 번도 넘지 못했다. 10
둘째, 네덜란드의 국내외 상업 활동에 관한 모든 논의에 반 드시 독점이라는 단어가 포함된다. 네덜란드인은 동인도의 향 신료 무역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당시의 가장 악명높은 외교적 분쟁의 하나가 암본Amboina 섬(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의 영국인 정착 지 파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네덜란드인이 영국인 정착민을 고문한 사건이 수십 년 동안 영국과 네덜란드의 관계를 악화 시켰다. 네덜란드 자체에서도 독점이 상업 활동을 방해했다. 예 를 들어 네덜란드 정부는 단일한 회사에만 항해 지도를 제작할 권한을 부여했는데, 그러한 조치가 1880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셋째, 네덜란드의 번영은 근대 서구의 거대한 부를 창조한 엔진인 기술 발전에 의존하지 않았다. 주마다 특허 시스템이 있 었지만 현저하게 활성화되지 못한 시스템이었다. 그 기간에 조 선 업체들이 플루트 선박fluit ship 같은 실질적 기술 발전을 이루 기도 했지만, 네덜란드의 기술 혁신은 대체로 산발적이었다. 17 세기 중반 황금시대의 절정기에 정부가 1년에 10여 건의 특허 를 부여했고, 1700년 이후에는 해마다 몇 건의 특허밖에 인가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무역, 특히 환적을 위한 곡물과 새로운 풍력 제재소에서 가공할 목재를 공급한 발트해 지역 의 무역에서 비롯되었고 수익성 높은 동인도 무역이 현금의 흐 름을 보충했다.
넷째, 네덜란드의 금융은 약간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다. 정부 가 아주 쉽게 자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었던 네덜란드는 18세 기에 빚더미에 파묻히게 되었다. 정부가 소비세로 차입을 뒷받 침했기 때문에 세율도 상승했다. 인상된 소비세율이 물가와 금의 상승으로 이어졌고 네덜란드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정치 체제는 위험한 대륙의 가장자리에 있는 느슨한 정치연합에 속한 7개국의 반자치 국가로 분 열된 체제였다. 강력한 중앙은행과 활기찬 국가 특허 시스템의 부재가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분명했다. 미국 건국의 아 버지들은 이러한 교훈을 잊지 않았다. 18세기 네덜란드의 분권 화된 기구와 그에 따른 애석한 정치적 운명이 미국의 헌법 논쟁 에 참여한 연방주의자들에게 객관적인 교훈을 제공했다. 그들 은 네덜란드가 정부의 무능, 주 사이의 불화, 외국의 영향력에 따른 수모, 위태롭게 유지된 평화,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특별 한 재난에 시달린 것을 보았다."
18세기 네덜란드 경제는 일방적(opsided인 경제였다. 활기차 고 수익성 높은 무역 부문에서 국내 경제가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창출된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술 발 전과 독점에 따른 제한으로 인하여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 결과 남아도는 막대한 투자 자금이 꾸준하게 국내의 이자율을 끌어 내리고, 네덜란드 제조업이 국제적 경쟁력을 잃을 정도로 국내 의 물가와 임금을 끌어올렸다.
네덜란드는 가발 periwig 사회가 되었다. 주로 투자소득으로 연 명하고 생산을 거의 하지 않는 인구의 비율이 점점 늘어났다. 잉 여 자본의 상당 부분이 해외, 특히 미국에 투자되어 미국 독립전 쟁 부채의 10~20퍼센트를 네덜란드인이 보유하게 되었다." 국가로서의 세계적 중요성이 끝나가는 작은 나라가 나머지 세계에 그렇게 많은 자본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8세기 말에 네덜란드가 외채 수입에 의존하게 된 것은 저 주와도 같았다. 미국의 부채 상환이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겨우 보장되었지만 다른 채무국 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포함한 여러 국 가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서 네덜란드의 손실이 눈덩이처 럼 불어났다.
- 모든 국가에는 수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입을 확보하는 방식이 종종 국가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오늘날에도 아프리 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직과 독점권의 판매가, 그에 따르는 경쟁과 성장의 저해와 함께, 너무도 손쉬운 정부의 수입 원을 제공한다. 근대 이전 시대의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러한 함 정에 곤두박질쳤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영국과 네덜란드도 조달하는 자 금과 독점권을 교환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시간이 가면서 모두에게 부과되는 소비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1700년 이후의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부로 향하는 길이 더 이상 정부 부서를 거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제조업, 상업, 또 는 무역에 종사함으로써 점점 더 부유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무역회사는 독점적 지위의 혜택을 누리 는 특권의 대가로 상당한 위험을 부담했다. 제한적 독점권을 부 여하는 오늘날의 특허법도 발명가가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수반한다. 어쨌든 1624년의 독점법이 영국에서 왕실이 자의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행을 거의 종식시켰다. 반면에 프랑스 는 혁명 이후까지도 독점권을 축소하지 않았다. 이 두 사건 사 이에 있는 174년의 간격이 프랑스의 경제적 번영이 뒤처진 이 유를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엄밀한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지주와 소작인으로 이루어진 소유권 시스템은 매우 효율적이다. 농업 생산을 개선하려는 지 주의 인센티브가 자작농의 인센티브와 동일하다. 게다가 지주 에게는 토지를 개선하기 위한 자본이라는 월등한 자원이 있다. 지주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일본의 농업 생산성이 유신 이후에 급속하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일본의 소작인과 지주의 갈등이 재앙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이 더 부 유해졌다. 지주 계급이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기반을 형성한다고 믿었던 맥아더의 점령군은 지주 계급의 파괴에 착수했다. 대 지주의 토지가 전쟁 이전 가격으로 보상되었다. 전후에 만연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진 엔화로 지급된 토지 보상은 몰 수나 다름없었다. 평균적 농장의 규모가 2.5에이커인 국가에서 10에이커 이상을 소유한 사람은 모두 대지주로 간주되었다.) 7475 소작인과 소작농 이 부유한 지주보다 우리의 동정을 더 많이 이끌어낼 수는 있지 만, 맥아더의 토지개혁이 부동산 시스템에 실질적인 폭력을 가 한 것도 사실이다. 라이샤워가 신랄하게 말했듯이, 혁명적인 개혁은 남의 나라에서 하기가 더 쉽고 재미있다." 일본의 토지개혁은, 사회적·정치적 결과가 무엇이었든 간에, 결국 경제적으 로 중요하지 않았다. 점점 더 산업화하는 국가에서는 토지의 소 유구조가 중요성을 잃는다.
맥아더가 일본인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은 자유민주주의 체 제에서 법치주의가 발휘하는 놀라운 힘을 자신도 모르게 보여 주게 된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그를 해임 했다. 일본인들은 보잘것없는 민간 지도자의 신랄한 편지가 그 토록 강력하고 존경받는 전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군사적 우산 덕분에 일본이 GDP의 1퍼센트만을 국방비로 지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의 첫 40년 동안의 자본과 인력에 대한 압도적인 군사적 요구 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가 성장한 것은 진정한 일본의 기적 이었다. 군국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난 일본의 경제는 2차 세계 대전의 잿더미 속에서도 힘차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전후의 급성장은 여러 가지 평범한 요인의 필 연적인 결과였다.
*일본인은 나머지 세계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30년간의 전 쟁과 경제적 재앙을 겪은 궁핍한 상태였다. 용량을 훨씬 밑도는 수준으로 산업이 돌아가고, 자본이 소비로부터 공장과 장비를 복구하고 현대화하기 위하여 전용되어야 할 때, 그 결과는 활발한 경제성장이 된다.
*미군의 주둔이 강대국을 가장 확실하게 탈선시키는 악마 의 손아귀 -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서 일본을 해방시켰다.
*맥아더가 도착하기 70년 전에 일본인들은 원시적이지만 적절한 재산 제도를 확립하고 서구식의 과학, 자본시장, 운송과 통신을 채택했다.
근면, 절약, 문해 능력을 강조하는 일본의 문화와 맥아더가 수입하기 전에 50년이 넘는 의회민주주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 도 도움이 되었다.
- 떠오르는 태양
1980년대에는 일본이 세계를 지배할 때까지 일본의 경제성장 이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1960년대에 나머지 선진세계가 전후 일본의 기적의 독일판인 라인강의 기 적을 초조하게 지켜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진지한 가능성이 결 코 아니었다. 첫째, 일단 재산권과 법의 지배가 확립되면 침체된 경제가 저절로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경 제의 성장이 지속되기는 훨씬 더 어렵다. 둘째, 제도의 축복은 일회성이다. 재산권과 법의 지배가 확립되고 나면 다른 영역에 서 성장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부유한 일본의 방위 를 보조하는데 빠르게 지쳐가고 있다. 머지않아 일본은 자국의 군사적 필요를 적절하게 충족하려는 열망을 되찾을 것이다. 일본이 다시 한번 지나치게 잘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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