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맥주가 언제 양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 전 1만년 전에 맥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기원전 4000년경에는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그림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림에는 커다란 항아리에 갈대로 된 빨대를 꽂아 맥주를 마시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고대 맥주는 표면에 곡물의 입자나 다른 찌꺼기들이 떠 있었기 때문에 부유물을 피해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는 빨대가 필요했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기록물은 기원전 3400년경의 것인데 이들 문 서에도 맥주의 기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맥주의 등장은 농경의 도입과 맥주의 원료인 곡물의 재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류의 생활 방식이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전환되었고, 이어 최초의 도시들이 등장하고 사회의 복잡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인류 역사의 격변기에 맥주가 등장한 것이다. 맥주는 선사 시대의 유산이며 그 기원은 문명의 기원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 곡물은 처음에는 그렇게 중요한 식재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2가지 놀라운 특성이 발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하나는 곡물을 물에 담그면 발아가 시작되고 단맛을 낸다는 성질이다. 완벽하게 물을 차단하여 방수가 되는 저장 구덩이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인간이 곡물 저장을 처음으로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특성을 바로 발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달콤한 맛이 생기는 원인은 지금은 분명하다. 습기에 찬 곡물은 디아스타제diastase라는 효소를 만들어내고, 그 효소가 전 분을 맥아당麥芽糖, maltose sugar 또는 맥아麥芽, malt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느 곡물에서도 발생하지만 특히 보리의 경우 훨씬 많은 디아스타제를 배출하고, 따라서 가장 많은 맥아당을 만들어낸다.) 당분糖分을 섭취할 수 있는 다른 식재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 “맥아화 麥芽化, malted"한 곡물이 내는 단맛은 매우 중요했고, 자연스럽게 곡물을 물에 담갔다가 건조시키는 맥아 공법의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발견은 더욱 중요했다. 수일간 방치되어 있던 곡물의 옅은 죽에서, 특히 맥아화한 곡물이 들어있었던 경우에는 불가사의한 변화가 발생했다. 죽에서 가벼운 거품이 발생했고 그것을 마시면 기분 좋게 취했다. 즉 공기 중에 있는 천연 효모의 활동에 의해 죽에 함유되 어 있던 당분이 발효되어 죽이 알코올로 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곡 물의 죽이 맥주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맥주가 인간의 입술을 적신 최초의 알코올이라는 말은 아니다. 맥주가 발견된 당시에도 사람들이 과일이나 꿀을 저장하 려고 했을 때, 과즙 또는 꿀이 물과 섞인 상태에서 우연히 발효가 이루어져 (이는 와인이나 벌꿀 술을 만들기 위한 과정) 소량이지만 알코올이 자연적 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일은 제철이 지나면 쉽게 부 패하고 야생 꿀은 매우 제한적인 양만 채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5000년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도기 없이는 와인이나 벌꿀 술은 오랜 기간 저장할 수 없었다. 반면, 맥주의 원료가 되는 곡물은 풍부했으며 쉽게 저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맥주는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의 양을 확실하게 양조할 수 있었다. 도기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맥주는 역청을 칠한 바구니, 가죽으로 만든 가방, 짐승의 위장, 속이 텅 빈 나무, 커다란 조개 또는 돌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여 양조되었다. 아마존 유역에서는 19세기까지도 요리의 도구로 조개를 사용했고, 핀란드의 전통 맥주인 사티sahti는 지금도 속이 텅 빈 나무를 사용하여 양조되고 있다.
맥주라는 중요한 발견이 있은 후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맥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면, 옅은 죽 형태의 곡물에 맥아가 많고 발효 기간이 길수록 알코올 강한 맥주가 되었다
- 맥아가 많다는 것은 당질이 많다는 것이며, 발효 기간이 길다는 것은 더욱 많은 당질이 알코올로 변환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죽이 끊을 정도로 열을 높이면 맥주의 도수가 강해진다. 맥아 과정에서 보리 안 에 있는 전분의 약 15퍼센트만이 당질로 변환되지만, 맥아화된 보리를 물을 넣고 끓이면 고온에서 활성화되는 다른 전분 당화 효소들이 더욱 많은 전분을 당질로 변환시키고, 이처럼 많은 당질은 발효 과정을 통해 알코올로 변환된다.
- 메소포타미아의 양조자들은 바피르bappir라고 하는 맥주를 만드는 빵beer-bread의 첨가량을 조절함으로써 맥주의 맛과 색깔을 조절했다. 바피르는 발아한 보리를 작은 덩어리로 만들어 2번 구워 만드는데, 어두운 갈색에 이스트를 넣지 않은 단단한 빵으로 몇 년간 보전할 수 있었다. 양조자는 맥주를 만들 때 바피르를 꺼내어 잘게 부수어서 사용 했다. 기록에 따르면 바피르는 마을의 저장 창고에 보관되었고 식량이 부족했을 때에만 바피르를 먹었다고 한다. 따라서 바피르는 식재료라 기보다는 맥주의 원재료를 저장하기 위한 편리한 방법으로 중요한 의 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맥주를 양조하는 데 빵을 사용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방법은 고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일부 학자는 빵은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한 파생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학자들은 빵 이 먼저 등장했고, 따라서 그 후에 맥주 양조의 한 요소로서 빵이 사용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빵과 맥주가 모두 곡물의 죽에서 파생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걸쭉한 죽은 햇볕 아래에서나 뜨 거운 돌 위에서 구워지면 편편하고 둥근 모양의 빵이 되었고, 맑은 죽은 발효가 되도록 내버려두면 맥주가 되었다. 둘 다 같은 동전의 양면 이었다. 빵은 딱딱한 맥주였고, 맥주는 액체화된 빵이었다.
- 처음부터 맥주는 사회적인 음료로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000~2000년 사이에 수메르인이 그린 그림은 두 사람이 빨대를 통해 하나의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맥주를 마시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측된 다. 그러나 수메르 시대에는 곡물이나 찌꺼기 또는 맥주의 다른 불순물을 거르는 것이 가능했고, 또한 도기가 출현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컵을 사용해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빨대를 사용하여 맥주를 마시는 그림이 매우 넓게 퍼져 있었던 것은 빨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 그 이유는 어쩌면 음료야말로 음식과는 다르게 진정으로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러 사람이 같은 항아리에서 맥주를 마 실 때 그들은 같은 액체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기의 경우는 잘랐을 때 특정 부위가 다른 부분과 차이가 생기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음료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신다는 것은 호의와 우정을 표현하는 세계 공통의 상징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 음료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독이 들어 있지 않고 마셔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제공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 개인적인 컵을 사용하기 이전의 시대에 원시적인 용기에서 양조되었던 초창기의 맥주는 같은 용기에서 함 께 마셔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날 맥주를 마실 때 손님에게 빨대를 제공하고 커다란 맥주 통에서 빨대를 이용하여 같이 맥주를 마시는 관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차나 커피의 경우에는 같은 포트pot를 이 용하여 와인이나 증류주는 같은 병에 담긴 것을 각자의 글라스에 따라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모임에서 술을 마실 때 잔을 부딪치 며 건배하는 것은 동일한 용기에 들어 있던 동일한 음료를 같이 마심 으로써 서로의 단합과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 이런 것들은 고대에서부터 비롯된 전통들이다.
- 고대에는 음료, 특히 알코올음료에는 초자연적인 성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맥주를 마시면 취하게 되고 의식 상태에 변화가 생기는 현상은 불가사의하게 보였다. 동시에 보통의 죽이 맥주로 변화되는 신비로운 발효 과정 역시 불가사의하게 보였다. 그들이 내린 명백한 결론은 맥주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것 이다. 따라서 많은 문명이 어떻게 신이 맥주를 창조했으며, 어떻게 인 간에게 맥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지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 는 것은 당연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인은 맥주는 농업의 신이며 사후 세계의 왕인 오시리스Osiris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그는 발아한 곡물에 물을 섞어놓고는 잊어버린 채 햇볕에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곡물이 발효되었고, 그것을 마시고 기분이 너무 즐거워진 오시리스는 그 지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 맥주는 또한 건강과 더욱 직결되어 있었고,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 트인 모두 맥주를 의약용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2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니퍼라는 수메르 도시에서 출토된 설형문자 점토판 에는 맥주를 사용한 약제법 또는 의약 처방 리스트가 기록되어 있었 다. 그것은 알코올을 의약용으로 사용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다. 이집트에서 맥주는 부드러운 진정제로 인정되었고, 그리고 허브와 향신료 등 여러 의학용 혼합물을 섞는 기본 재료였다. 맥주는 끓는 물 로 만들기 때문에 보통 물보다는 오염이 덜 되며, 다른 혼합 요소들이 맥주 안에서 쉽게 용해된다는 장점이 있다. 기원전 1550년경의 이집트 의 의학 사료인 “에버스 파피루스The Ebers Papyrus" - 보다 오래된 문헌 에 근거를 두고 있긴 하지만 - 는 약초를 이용한 수백 개의 처방전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것이 맥주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 면, 양파 반쪽과 거품이 있는 맥주를 혼합하면 변비에 효과가 있다고 했고, 올리브를 분말화해서 맥주와 혼합하면 소화불량을 치료한다고했다. 샤프란 (saffron, 크로커스 꽃으로 만드는 샛노란 가루로 음식에 색을 낼 때 쓴다. 역주)과 맥주를 섞은 것으로 여성의 배를 마사지하면 출산의 진통을 완화한다고 했다.
- 맥주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트인의 모든 삶 속에 침투해 있었다. 그들이 맥주를 사랑했다는 것은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복잡한 사회의 등장, 문자로 기록해야 할 필요성, 그리고 맥주의 대중화는 잉여 농산물이 없었다면 가능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곡물 재배를 위한 최상의 기후 조건을 가졌기에 그곳에서 농경이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최초의 문명이 탄생했고, 그곳 에서 문자에 의한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맥주가 아주 풍부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맥주는 홉hops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지만 - 홉은 중세가 되어서야 맥주의 표준적인 요소가 되었다 - 맥주와 관련된 일부 관습들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맥주가 더 이상 노동의 대가로 사용되지 않고, 사람들이 더 이상 “빵과 맥주”라는 말로 인사하지는 않지만, 맥주는 지금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 서 여전히 노동자를 위한 중요한 음료로 여겨지고 있다. 맥주를 마시기 전에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하는 것은 맥주에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는 고대인의 믿음의 유산이다. 그리고 친밀하고 편안한 사회적 교류를 위한 맥주의 역할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그것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음료라는 의미다. 맥주는 문명화의 새벽 이후 석기 시대의 촌락 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연회장에서, 현대의 선술집이나 바에서 사람들 을 함께 어울리게 만들었다.

- 매주처럼 와인의 기원도 선사 시대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알수가 없다. 와인의 발명 또는 발견은 너무 고대의 일이어서 단지 신화나 전설을 통한 간접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와인이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9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현대의 아르메니아와 이란 북부에 해당하는 자그로스 산악지대에서 처음으 로 생산된 것으로 제시된다. 세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 지역에서 와인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첫째로 야생의 유라시안 포도 품종인 비티스 비니페라 실베스트리스 Vitis vinifera sylvestris가 자생 하고 있었고, 둘째로 곡물 생산이 풍부해서 와인을 만드는 지역사회에 1년 내내 곡물을 식량으로 제공할 수 있었고, 셋째로 기원전 6000년경에 와인을 양조하고, 저장하고, 제공serving할 수 있는 도구인 도기가 발명되었다는 점이다.
-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문명' 또는 '세련’과 동의어였다. 어떤 종류의, 그리고 언제 생산된 와인을 마시느냐가 그 사람의 문화적 세련미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맥주보다는 와인을, 보통 와인보다는 좋은 와인을, 연식이 짧은 와인보다는 오래된 와인을 선호했다. 그러나 어떤 와인을 선택하느냐보다도 중요시되었던 것은 와인을 마실 때의 태도였다. 와인을 마실 때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때 그리스의 시인이었던 아실루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청동은 외모를 비추는 거울이지만, 와인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 물은 와인을 안전하게 만들지만, 와인 역시 물을 안전한 상태로 바꾸었다. 와인에는 병원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천연 항균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지만 오염된 물을 마시는 위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샘물이나 깊은 우물 또는 수조에 저장된 빗물을 선호했다. 와인으로 상처를 처리하는 것이 물로 씻어내는 것보다 감염의 위험이 적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와인에는 병원균이 없고 항균물질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와인에는 소독이나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본질적으로 심포지엄은 지적 · 사회적 · 성적인 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될 수 있지만 그 핵심은 쾌락의 추구였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었던 모든 종류의 열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분출구였기도 했다. 심포지엄에는 심포지엄을 탄생시켰던 그리스 문화의 최고와 최악 의 요소들이 공존했다. 심포지엄에서 마셨던 물과 와인의 혼합물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비옥한 은유적 토양을 제공했다. 그들은 그러한 조합을 개개의 인간에게나 크게는 사회 안에 혼재하는 선과 악의 공존에 비유했다. 심포지엄에는 참석자들이 절제를 벗어나 위험한 상태로 나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규칙이 존재했고, 따라서 심포지엄은 플라톤을 비롯한 다른 철학자들이 그리스 사회를 바라보는 렌즈 역할을 했다.
- 요약하면, 심포지엄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면서 좋은 면과 나쁜 면 모두를 내포하고 있지만, 플라톤은 적절한 규칙들이 준수된다면 심포지엄의 좋은 면이 나쁜 면을 넘어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그가 아테네 교외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40년 이상 철학을 가 르치고 자신의 작품의 대부분을 저술했을 때 심포지엄은 그에게 교육 방법의 모델을 제공했다. 어느 연대기에 따르면 플라톤은 매일 강의와 토론이 끝나고 나면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는데, 이는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무엇보다도 배우고 토론한 내용을 반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모임의 주목적은 지적인 측면에서의 재충전이었고, 플라 톤의 지시에 따라 적당한 양의 와인이 제공되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 르면 플라톤과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은 다음 날 몸 상태가 아주 상쾌 했다고 했다. 그 모임에는 악대나 댄서들은 없었다. 플라톤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질서 있는 방법에 따라 순서대로 말하고, 그리고 듣는 것”을 통해 서로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이 시작했던 이러한 모임은 오늘날까지 학문의 세계에 남아 있는데, 참가자들이 순서대로 발표하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토론하고 논쟁하는 학문적 세미나 또는 심포지엄의 기본적인 형식이 되었다.
- 이전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 역시 와인을 만민이 즐기는 음료로 생각했다. 카이사르나 노예 모두 똑같이 와인을 마셨다. 그렇 지만 로마인은 와인 감평에 있어서 그리스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마 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집주인은 자신이 마시는 낮은 수준의 와인을 안 토니우스에게 대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와인은 부를 상징하고 음용자의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면서 사회적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과 가장 가난한 자들의 차이는 와인 잔에 담기는 내용물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로마의 부유층에게 있어서 최고급 와인의 이름을 알고,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과시적 소비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최고의 와인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자이며, 그리고 와인의 종류에 대해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 저급하고 값싼 와인들에는 보존제로서 쓰이거나 또는 부패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첨가제들이 가미되었다. 예를 들면, 암포라를 봉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역청pitch 을 가끔 보존제로서 와인에 첨가했 고, 그리스인이 그랬던 것처럼 소량의 소금이나 바닷물을 첨가하기도 했다. 서기 1세기의 로마의 농업에 대해서 썼던 콜룸멜라Columella는 그러한 보존제는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 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남긴 레시피에 따르면 첨가물을 가미해서 더욱 좋은 맛을 낼 수 있다고 했는데, 화이트 와인에 바닷물과 호로파(fenugreek, 장미목 콩과의 한해살이 풀로 높이 약 50cm까지 자란다. 잎은 복엽(겹잎)으로 3장의 작은 잎으로 이루어져 있다-역주, 두산백과 참조)를 넣어 발효시 키면 오늘날의 드라이 셰리(dry sherry, 스페인 남부에서 주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으로 식사하기 전에 마시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주)와 매우 유사한, 강하면서 견과 맛이 나는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와인에 꿀을 섞은 물섬Mulsum은 1세기 초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식전에 마시는 와인으로 인기가 있었고, 장미향이 나는 로자툼rosatum 도 같이 식전주로 즐겨 마셨다. 그러나 허브, 꿀 그리고 다른 첨가물들이 저급하고 질이 낮은 와인의 부족한 부분을 은폐하기 위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부 로마 인은 여행을 할 때 질이 낮은 와인의 맛을 높이기 위해 허브나 다른 향료를 휴대하기도 했다. 현대의 와인 애주가들은 첨가물을 사용했던 그 리스인이나 로마인의 방법에 대해서 코웃음을 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러한 방법은 평범한 와인을 더욱 풍미 있게 만들기 위해 오크를 사용하는 현대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 모하메드가 알코올을 금지한 것은 주연 자리에서 두 명의 제자가 충 돌했던 사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예언자가 그러한 사고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알라신에게 거룩한 가르침을 구했을 때 알라신의 답변은 단호했다. “와인과 도박은 (중략) 사탄이 만들어낸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을 피하면 번성할 것이다. 사탄은 와인과 도박을 수단으로 해서 너희들 사이에 반목과 증오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너희들은 알라의 존재를 기억하고,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라. 그것 들을 삼갈 수 있겠는가?” 이 명령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40대의 태형이라는 처벌이 가해졌다. 그러나 무슬림에게 있어 알코올에 대한 금지는 여러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슬람의 부상과 함께 권력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로부터 아라비아사막의 부족에게로 이동했다. 이들 부족은 바퀴 달린 이동 수단 대신 낙타를, 의자와 테이블 대신 쿠션을 사용했고, 최고의 세련미를 상징했던 와인을 금지 함으로써 이전의 엘리트들, 즉 그리스인과 로마인보다도 자신들이 우 월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슬림은 기존 문명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을 드러냈다. 라이벌 신앙인 기독교에서 와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무슬림이 와인을 적대시한 이유 중 하나다. 심지어 와인을 의약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 대부분의 사람은 아쿠아 비태의 매력은 잠재적인 의학적 효과가 아니라 단시간 내에 쉽게 취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고 생각했다. 증류주는 와인이 귀하고 비싼 북부 유럽의 추운 지역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맥주를 증류함으로써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가지고 강한 알코올음료를 만드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해졌다. 아쿠아 비태를 의미 하는 게일어 (gaelic, 스코틀랜드 켈트어-역주) uisge beatha(발음은 이슈커 바허로 하고, 이슈커는 '물'을, 바허는 '생명'을 뜻한다-역주)는 현대어인 whisky 위스키의 어원이다. 이 새로운 음료는 빠르게 아일랜드인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어느 연대기 작가는 아일랜드 족장의 아들인 리처드 맥라 네일의 1405년의 죽음에 대해 “생명의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후에 죽었는데 그것이 리처드에게는 죽음의 물이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쿠아 비태가 “번트 와인burnt wine, 불타는 와인”으로 불렸고, 독일어로는 Branntwein 브란트바인으로, 영어로는 brandywine 브랜디와인 또는 줄여서 brandy 브랜디라고 번역되었다. 사람 들은 집에서 와인을 증류하기 시작했고 축제일에 그것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한 관행은 널리 퍼졌고, 또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에 독일의 뉴렘베르그에서는 1496년에 그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 영국 해군이 맥주 대신에 그로그를 마셨다는 것은 18세기에 영국이 해상의 지배권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다. 당시 수병들의 사망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괴혈병이었다. 지금은 비타민 C의 부족이 원인으로 알려진 소모성 질환이다.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18세기에 여러 번 발견되고 또 잊힌 것인데, 레몬 과 라임주스를 정기적으로 섭취하는 것이다. 1795년에는 그로그에 레 몬이나 라임주스를 넣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괴혈병의 발병률이 극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맥주에는 비타민 C가 함유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맥주에서 그로그로 대체한 것은 영국 수병들을 전 반적으로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반대는 프랑스 해군이었다. 프랑스는 맥주 대신 와인 4분의 3리터(오늘날의 와인 한 병)를 정기적으로 배급했다. 긴 항해를 하는 경우에는 16분의 3리터의 브랜디로 대체되었다. 와인은 소량의 비타민 C를 포함했지만 브랜디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해군의 저항력이 강화된 것에 비해 프랑스 해군의 괴혈병에 대한 저항력을 감퇴시키는 효과가 초래되었다. 어느 해군 군의관에 따르면, 괴혈병에 대한 영국 왕실 해군의 저항력은 전투력을 2배로 상승시켰고, 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에 승리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럼이 최초로 발명되었을 때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 모든 일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다. 럼이 가졌던 최초의 중요성은 증류주, 노예 그리고 설탕이라는 삼각 구도를 형성하면서 통화 수단으로 사용되 었다는 점이다. 럼은 노예를 사는 데 사용되었고, 그 노예를 이용하여 설탕을 생산하고, 설탕 생산의 찌꺼기로 럼을 만들고, 그 럼으로 다시 노예를 매수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해서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무역 업자인 장 바보트는 1679년에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나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항상 많은 양의 프랑스산 브랜디를 가지고 갔는데, 최근에는 그 수요가 점점 줄었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 서안에서 상당한 양의 증류주와 럼이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21년, 어느 영국 무역 업자의 보고에 의하면 노예를 무역하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럼은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다고 했다. 심지어 럼으로 금도 살 수 있었다. 또 한 럼은 해안의 수용소에서 배까지 노예들을 싣고 운반하는 카누 조정자들과 경비원들에게 배급되던 브랜디의 역할을 넘겨받았다. 브랜디는 설탕과 노예를 대상으로 한 대서양 무역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지만, 럼은 그 무역을 더욱 활성화하고 더욱 커다란 이익을 남겨주었다.
- 일반적으로 각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맥주와는 다르게, 그리고 특별한 지역에서 생산되고 무역의 대상이 되었던 와인과도 다르게, 럼은 전 세계로부터 재료, 사람 그리고 기술이 총합된 결과물이었고, 또한 여러 역사적인 힘이 상호 교차하면서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폴리네시아가 기원이었던 설탕은 아랍인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고, 콜럼부스에 의해 아메리카에 전해졌고, 그리고 아프리카의 노예들에 의해 재배되었 다. 설탕의 찌꺼기를 증류해 만든 럼은 신세계에서 유럽의 식민주의자 들과 그들의 노예에 의해 소비되었다. 럼은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의 모험과 비즈니스의 산물이었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시선을 회피했던 노예무역의 잔혹성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음료였다. 럼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글로벌 시대의 승리와 억압이 체현된 음료였다.
- 럼주와 당밀에 대한 관세는 아메리카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와 함께 럼주에 강렬한 혁명의 향을 가미했다. 1781년에 영국이 항복하고, 그리고 아메리카 합중국이 건국되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존 애덤스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당밀이 미국 독립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였다는 것을 고백할 때 왜 낯을 붉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네. 많은 위대한 사건들이 그보다도 더 작은 요인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 총기 또는 전염병과 함께 증류주는 구세계의 거주자들이 신세계의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근대 세 계의 형성에 기여했다. 증류주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노예화하고, 강제로 이동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토착 문화를 정복하는 과 정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오늘날 증류주를 볼 때 더 이상 노예제나 착취를 연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증류주를 사용했던 방법이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항공기의 승객은 면 세품인 증류주 병을 손가방 안에 집어넣는 것은 증류주가 휴대하기 편하고 오랜 여행에도 상하지 않는 알코올음료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금을 싫어하고 면세품인 증류주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럼의 밀수업자 또는 위스키 보이즈가 지녔던 반체제적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 17세기에 유럽에 커피가 소개된 충격은 아주 주목할 만한데, 그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음료는 아침 식사의 경우에도 약한 맥주나 와인이 었기 때문이다. 물은 오염되기 쉬웠기 때문에, 특히 지저분하고 사람 이 붐비는 도시에서 맥주나 와인 모두 물보다 훨씬 안전한 음료였다. (증류주는 마시면 취했기 때문에 와인이나 맥주처럼 매일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는 아니었다.) 맥주처럼 커피는 끓인 물로 만들었고, 따라서 알코올음료에 대신 하는 새롭고 안전한 음료가 되었다. 알코올 대신 커피를 마시면 약간 취해 느슨한 상태가 아니라 각성되고 활달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 고, 업무의 양이나 질 모두 향상되었다. 커피는 주정 상태가 아니라 깨어 있게 하고, 감각을 둔하게 하여 현실을 잊게 하기보다는 인지 능력을 높여주어 알코올과 아주 반대되는 음료로 여겨졌다. 
- 17세기 말까지 아라비아는 전 세계에 커피의 공급자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있었다. 1696년에 어느 페르시아 작가는 “커피는 메카 인근에서 재배되었다. 거기에서 지다 항구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수에즈까지는 배로 이동했고, 이후 낙타를 이용해 알렉산드리아까지 운송 했다. 그곳에 있는 이집트의 창고에서 프랑스와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들의 고국에서 필요한 만큼의 커피콩을 구입했다” 라고 설명했다. 때 때로 커피는 모카에서 네덜란드까지 직접 운송되기도 했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커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외국의 생산품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랍인이 자신들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 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커피콩은 선적되기 전에 살균 처리 되었는데, 이는 커피콩이 새로운 커피나무의 씨앗으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커피 생산 지역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같은 아랍의 독점 체제를 처음으로 깨뜨린 것은 네덜란드인이었 다. 그들은 17세기에 걸쳐 동인도제도(East Indies,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제도를 가리켜 부르는 역사적 명칭-역주)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을 몰아냈고,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단숨에 세계 최강의 상업 국가로 부상했 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아랍의 커피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훔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갔고 온실에서 재배에 성공했다. 1690년대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자바에 위치한 바타비아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설치했는데, 그곳은 현재 인도네시아에 속한 섬으로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바에서 생산된 커피는 로테르담으 로 직접 운송되었고,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커피 시장을 장악했다. 전 문가들은 아라비아의 커피가 향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지만 가격에서는 자바의 커피에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 예멘에서 종교적인 음료로 탄생한 커피는 모호한 기원에서 출발해서 먼 길을 지나왔다. 커피는 아랍 세계에 침투했고,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갔고, 유럽의 강대국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커피는 알코올에 대한 대안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고, 특히 지 식인들과 사업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음료 자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커피 하우스는 커피뿐만 아니라 대화를 제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커피하 우스는 사회적·지적 · 상업적 · 정치적 대화를 위한 전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다.
-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에서 금융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시기, 수 많은 주식회사의 설립, 주식의 거래, 보험 산업의 발전, 그리고 국채의 공공 매각 등이 모든 것은 런던이 암스테르담을 대신하여 마침내 세 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이를 가리켜 영국의 금융 혁명으로 부르고 있다. 이 혁명은 비용이 많이 드는 식민지 전쟁의 자금 조달을 위해 필요했고, 또한 커피하우스의 비옥한 지적 환경과 모험 정신 때문에 가능했다.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금융 분야에서 《원리》에 필적할 만한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고 지지했다. 즉 무역과 경제적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사람들의 자유재량에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영국의 커피하우스에서 집필했는데, 그곳은 런던에서 스미스의 근거지였고 우편물을 수령하는 주소지였다. 또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모이는 인기 있는 장소였는데, 스미스는 그들에게 국부론의 각 장을 보여주고 비판과 의견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런던의 커 피하우스는 근대 세계를 형성한 과학 혁명과 금융 혁명을 탄생시킨 용광로였다.
- 오늘날 커피와 카페인이 있는 다른 음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커피가 도입될 당시의 충격과 초창기 커피하우스에 대한 인기를 상상하기 어렵다. 현대의 카페는 역사적으 로 빛났던 그들의 조상에 가까이 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커피는 여전히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논하고 발전시키고 교환할 때에 만나서 마시는 음료라는 점이다. 이웃들 의 커피 잡담에서부터 학문적인 콘퍼런스나 비즈니스 미팅까지 커피는 여전히 알코올처럼 자기 통제력을 잃은 염려 없이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는 음료인 것이다.
커피하우스의 원래 문화가 오늘날 가장 잘 알기 쉬운 형태로 남아 있는 곳은 카페인이 연료가 되어 정보의 교류를 촉진하는 인터넷 카 페나 무선 인터넷이 제공되는 장소, 그리고 모바일 세대들이 사무실과 미팅 장소 대신으로 사용하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라 할 수 있다. 현 대 커피 문화의 중심이며 스타벅스 커피 프랜차이즈의 고향인 시애틀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회사들의 본거지라는 사실 이 경이롭지 않은가? 커피와 혁신, 이성, 그리고 네트워킹의 관계는 - 여기에 혁명적 열정의 질주까지 더해져서 -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영국 사회의 정상에서부터 하층민까지 모든 사람이 차를 마셨다. 유해 사업 그리고 사회적 변화는 서로 얽히면서 영국인이 차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이 되기 전에 이미 외국인들이 주목했던 현상이었다. 1784년에 프랑스에서 온 어느 여행자는 “영국 전역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일반적이었고, (중략) 가 장 가난한 농부조차 부자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두 번 차를 마셨고, 차 의 전체 소비량은 어마어마했다” 라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온 어느 방 문자는 “차는 영국인에게 물 다음으로 불가결한 것이었다. 모든 계층이 차를 소비했고, 아침 일찍 런던의 거리에 나가면 많은 장소에서 옥외에 작은 테이블들이 설치되어 있고, 석탄 카트를 끄는 인부나 노동자들이 둘러앉아 컵에 들어있는 맛있는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국으로부터 세계 각 지로 전파되었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제국의 중심에 뿌리를 내렸다. 영국인은 집에서 차를 마실 때마다 대영제국의 강력한 힘과 광대했던 영토를 생각한다. 차의 부상은 세계 강대국으로서 영국의 성 장과 얽혀 있으며, 영국이 상업적 · 제국주의적 힘을 더욱 팽창시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 17세기에 많은 사무직 직원들, 비즈니스맨, 그리고 지식인들이 커 피에 탐닉했던 것처럼 18세기에 새롭게 탄생한 공장 노동자들은 차를 즐겨 마셨다. 차는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노동 환경에 최적으로 어울 리는 음료였고 여러 가지 형태로 공업화에 도움을 주었다. 공장의 주 인들은 종업원의 휴식을 위하여 “차 마시는 시간tea breaks"을 허용하 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농업 노동자들에게 제공되었던 맥주는 알코올 때문에 정신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차는 카페인 때문에 오히려 정신을 예민하게 해주었다. 차는 길고 지루한 작업 시간 동안에 노동자의 예민함을 유지시켜주고,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를 다룰 때 집중력을 높여주었다. 수작업으로 하는 직공이나 방적공은 필요할 때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름칠이 잘 된 기계의 부품처럼 일을 해야만 했고, 차는 공장이 잘 돌아갈 수 있 도록 유지시켜주는 윤활유였다. 
또한 차에는 천연 항균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수인성 전염병의 발병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었고, 차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물이 충분히 끊지 않은 경우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영국에서 이질의 발병률은 1730년대부터 떨어졌다. 1796년의 어느 관찰자는 이질과 다른 수인성 질병들의 “발병률이 크게 낮아져 서 런던에서는 그러한 질병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19세기 초경에 의사와 통계학자는 영국인의 건강 상태가 향상된 가장 큰 원인이 차의 보급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미들랜드(Midlands, 영국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으로 18세기와 19세기의 산업혁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이다. 가장 큰 도시로는 버밍햄 이 있다)에 위치한 공업도시들 근처에서 밀집된 형태로 생활하더라도 질병의 발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차에 들어 있는 항균성분인 페놀이 모유 중에 엄마의 젖으로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유아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유아의 사망률이 감소했고, 마침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었을 때 필요했던 거대한 노동 인력의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 불법적인 약품이었던 아편을 차와 직접적으로 교환하는 형태의 무역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동인도회사는 아편 무역이 드러나지 않도록 정교한 거래 구조를 고안했다. 아편은 벵골에서 생산되었고 1년에 한 번 캘커타에서 경매가 이루어졌는데, 회사는 그 이후에 아 편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모른 척했다. 실제로 아편은 인도에 근거를 둔 “지역 무역회사들country firms”이 구입했는데, 이들은 명목적으로는 독립적인 회사로서 동인도회사로부터 중국과 교역을 승인받은 회사 들이었다. 이 회사들은 경매를 통해 구입한 아편을 배에 싣고 광동의 하구까지 가서 은과 교환했고, 이후 린틴이라는 섬에 아편을 하역했다. 이곳에서 아편은 중국 상인에 의해 노를 갖춘 갤리선에 실린 후 해안으로 밀반입되었다. 지역 무역회사들이 아편을 직접 중국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불법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무역에 관여하지 않 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동인도회사는 회사의 배를 이용한 아편의 수송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세관 관리들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중국의 아편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으면서 동인도회사의 교묘한 사 기극을 눈감아 주고 있었다. W. C. 헌터라는 미국 상인은 당시의 사정 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주 완벽했던 (외국인은 일절 관여하지 않은) 뇌물 시스템이 존재했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쉽게 그리고 정기적으로 진행되 었다. 새로 임명된 관리가 부임하는 등 때때로 장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보상 문제가 제기된다. (중략) 그러나 곧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중개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시 나타나고 그 지역에 평화와 면책이 다시 허용된다.” 때때로 지방의 관리들은 린틴 주변을 배회하는 외국 배들을 향해 본토의 항구에 기착하 거나 그곳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포고령을 발동했고, 중국 세관의 배가 외국 배를 최소한 지평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추격하는 모 양을 양측이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관리들은 외국 밀수업자를 몰아냈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 19세기에 아메리카는 경제력을 자국 내에 집중했고, 반면 20세기에는 해외로 경제력을 돌리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 후 미합중국은 세 번째 국면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소련 과의 냉전 체제였다. 양측은 군사력에서 팽팽했고, 전쟁은 경제전쟁으 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소련은 미국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세기라고 불릴 수 있던 시대인 20세기가 끝나 면서, 세계 경제가 무역과 통신으로 이전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글로벌 경제 체제가 되면서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미합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대두, 20세기의 전쟁, 정치, 무역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글 로벌화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고 유명한 브랜드로 미국과 그 가치관 이 체화된 것으로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음료인 코카-콜라가 전 세계에 보급되는 과정과 잘 부합된다. 미합중국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콜라가 아메리칸 드림인 선택과 소비자 중심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경 제적·정치적 자유를 상징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콜라가 무자비한 글로벌 자본주의, 글로벌 기업과 브랜드에 의한 지배, 그리 고 지역문화와 가치를 훼손하면서 미국화 또는 미국식으로 균질화의 시도를 상징했다. 대영제국의 이야기를 한 잔의 차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최강국이 되기까지 미국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는 갈색의 달콤한 그리고 거품이 나는 코카-콜라의 이야기 속에 펼쳐져 있다.
- 미국의 젊은이들이 군인으로 징집되자 코카-콜라 회사의 사장인 로 버트 우드러프는 “군복을 입은 모든 이들에게 어디에 있는 5센트 코카-콜라 한 병을 제공하고 모든 비용을 회사가 부담하라”고 지시했다. 코카-콜라는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무알코올의 청량 음료는 군사 훈련 중에 지급되었다. 회사가 코카-콜라를 군에 적극적 으로 공급한다는 홍보 전략은 코카-콜라와 애국심, 그리고 전쟁에 대 한 지원 태도와 연결하면서 훌륭한 효과가 있었다. 코카-콜라는 미국 에서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 있는 병사들로부터 진심 어린 환영을 받았 다. 코카-콜라는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병사들의 도덕심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당신의 회사가 이 비상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에게 계속해서 코카-콜라를 제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라고 어느 장교는 코카-콜라 회사에 편지를 보냈다. “나는 코카-콜라가 군 에 복무 중인 젊은이들에게 도덕심을 세워주는 매우 중요한 상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는 이러한 수십 통의 편지를 증거 삼아, 그리고 군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워싱턴에 많은 로비를 했다. 그 결과 회사는 코카-콜라는 전쟁 수행에 중요한 상품이라는 이유 로 1942년에 설탕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배급제의 실시로 경쟁 사들은 청량음료의 생산량을 반으로 줄여야 했지만, 코카-콜라는 이 전과 마찬가지로 생산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 코카-콜라 병을 선적하고 지구의 반을 돌아 군대가 주둔하 는 곳으로 가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군수품을 실어 야 할 귀중한 선적 공간을 코카-콜라 병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 서 군부대 안에 특별한 병 작업 시설과 소다 디스펜서를 설치했고 코카-콜라 원액만 그곳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러한 기계를 설치하고 운 영하는 코카-콜라 직원은 많은 군인들에게 비행기를 수리하고 탱크 를 움직이는 기술자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들은 “기술 감독관technical observer" 이란 특별대우를 받았고 군대의 계급도 부여되었기 때문에 “코카-콜라 대령”으로 불렸다. 그들은 전쟁 기간에 전 세계에 64곳 이상의 군 기지에 병 작업 시설을 설치했고 약 100억 병의 코카-콜라를 공급했다. 기술 감독관들은 정글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휴대용 코카-콜라 기계를 고안했고, 잠수함의 좁은 해치hatch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슬림형 기계도 개발했다. 또한 코카-콜라는 해외의 미국 군사기지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에게도 제공되었는데 대부분이 그 맛에 매료되었다. 폴리네시아인 (Polynesia, 폴리네시아는 중앙 및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1000개 이상 섬들의 집단을 가리킨다-역주)들부터 줄루족(Zulus, 아프리카 원주민 의 하나로 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살고 있는 민족-역주)까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코카-콜라의 맛을 보게 되었다.
- 1945년에 연합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후에도 재건기의 3년간 군 기지에 설치된 코카-콜라의 생산 기계들은 계속 가동되었다. 그 후 생산 시설은 민간에 넘겨졌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미군 덕분에 전 세계로 퍼진 코카-콜라는 남극을 제외하고 지구상의 모든 대륙 위에 확고 한 기반을 구축했다. 회사의 어느 간부가 말한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덕분에 "코카-콜라의 매력이 거의 전 세계에서 인정되었다."
- 1997년에 발간된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각국에 있어서서 코카-콜라 소비량은 해당 국가의 글로벌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라고 밝힌 바 있다. 즉 (국제연합이 정한 기준에 따라 측정된) 풍요로움과 삶의 질,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자유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는 것이다. 매거진은 “발포성의 거대 시장을 가진 상품, 즉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코카-콜라가 사람 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만든 것은 아니다. 이는 소비자 중 심주의와 민주주의가 확산될 때 발포성의 갈색 음료는 항상 함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어느날 탄산 소다수는 미합중국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음료로서 모든 액상 형태의 소비량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코카-콜라 회사는 단일 회사로서 가장 커다란 공급자이다. 세계적으로는 회사는 인류가 소비하는 총 액상의 3퍼센트를 공급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의 심할 바 없이 20세기의 음료이며, 그리고 20세기에 발생했던 미합중국의 부상,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 그리고 글로벌화의 진전 을 상징하는 음료였다. 코카-콜라를 인정하는 안 하든 그 음료가 가진 매력의 너비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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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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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아나운서가 들려주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위한 신실재론이란 무엇인가?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YouTube

 

이 책의 저자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을 알게 된 것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책과 유발 하라리 등과 같이 저술한 '초예측'이란 책을 통해서다. 철학과 교수가 지은 책이라 좀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다소 존재한다. 

책의 제목이 우선 좀 자극적이긴 하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른바 19세기의 국민국가의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데, 19세기기는 유럽 최고 전성기였고, 그들이 지구의 패권을 거머쥔 패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영국의 브렉시트나 독일이 그 옛날 프로이센주의의 통합모델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 책은 현대세계의 다섯 가지 위기와 그 안에 숨겨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 가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테크놀로지의 위기, 표상의 위기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터넷은,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플랫폼이 아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 검색 엔진만 봐도 지금은 구글의 독무대이며, 아무리 웹서핑을 해봐도 인터넷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침에 트럼프가 우산을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 누구를 해고했는지 같은 인터넷 기사를 몇 분 훑어보고 나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실은 가려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소설을, 드라마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쉬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백일하에 밝혀내는 것인데 지금은 비판적이지 않은 저널리즘이 횡행하고 있고, 이것이 인터넷 사회가 낳은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저널리즘의 힘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자세가 실종된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테크놀로지나 과학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데, 과학적 세계관은 과학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과학을 우상화하고 마찬가지로 잘못 이해된 종교와 가깝게 두는 의심스러운 비과학적 사고 탓에 좌초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를테면 분자나 일식을 설명할 뿐이다. 결국 과학은 인간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인공지능이나 소셜미디어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환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지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기계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종이폴더에 나에 대한 출생증명서나 졸업장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지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생증명서나 졸업장이 웹상에 존재하고, 원하는 정보를 불러올 수 있다하더라도 종이폴더와 온라인이나 웹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따라서 웹, 프로그램, 알고리즘, 딥러닝 같은 것을 지능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종이폴더 역시 지능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대해서는 자신이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보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표상의 위기로 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마주치는 현실을 보여지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실에 가까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을 통해 작성된 개인적 리뷰임을 밝힙니다.

 

-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이 책의 계약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는 국세청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매우 완만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간신히 출간이라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법 적인 구조 안에서 명확히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바람직한 결과가 나온다. 결과까지 가는 과정에서 이 민주적인 제도가 '뭔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느라 속도가 늦어지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절차를 인정해야 한다. 모든 일이 항상 바로바로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데 만족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적 사고다. 
비민주적 사고란 이것이 없어졌으면 좋겠어'라는 사고 방식이다. 어떤 일이나 상황이 언제나 완전하게 기능하고, 게다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형태로 기능하기를 원하는 사고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틀림없는 독재주의다. 중국과 같은 독재주의 국가에서는 자신의 적을 무너뜨리기가 훨씬 쉽다. 말 그대로 적을 살해하는 방법도 쓸 수 있다.
- 자본주의에는 악의 잠재성이 있다.
우리에게 공통된 문제 중 하나는, 소위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이론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이 믿는 자본주의 이론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마르크스 의 이론은 너무나 불충분하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에 대한 응답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을 이용해 '한 사람의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모른다'는 사실을 가치로 변환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비즈니스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이점이 된다. 상대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당신은 얼마의 금액을 청구할 수 있을지 를 계산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져 있는 경우라면, 그 금액을 청구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의 제품이 실제보다 훨씬 뛰어난 척을 해야 한다. 사실은 상대를 믿지 못하지만 믿는 척해야 한다. 당신의 제 품을 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자본주의의 '거짓' 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불투 명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에는 투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자제가 반드시 '악'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는 악 의 잠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사실을 이유로 대부분의 민주주의 이론가가 '자본주 의는 우리를 민주주의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민주주의에서는 투명성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생산 상태를 좌 우하는 자본가에게 민주적인 사고 훈련을 받게 하는 일이 다. 유명한 자선가인 빌 게이츠나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투 자가 조지 소로스와 같은 수준이 아니라, 중간 수준의 자본가들에게 말이다.
- 일본과 독일은 중국이나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경제 성장이 훨씬 늦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변화 속도가 빨라서 10년마다 새 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것도 상당히 기발한 착상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마 다 새로운 기술 아이디어를 창안해내고 있다. 기술 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아이디어다.
일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분야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 를 다양하게 선보였지만, 최근 한동안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국가들, 특히 독일과 일본은 무언가 해야만 한다. 두 나라 모두 산업의 대부분을 자동차 산업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의 전자제어장치ECU. electronic control unit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기술이 다음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확실히, 다음에 나올 아이디어는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쪽이 될 것이다. 내가 도덕적 기업을 강조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기업은 22세기의 정치 구조를 결정할 수도 있다. 과학자들이 친환경 핵에너지를 찾아내면 어떻게 될까. 독일은 최근 수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흡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원자력발전의 대체물질을 발 견한다 해도 문제없이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벽히 제 기능을 해낼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쩌면 물리적으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핵융합이 아니라 다른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발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 아이디어를 내는 국가는, 어디가 되든지 간 에 22세기를 대표하는 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 그 다음 단계는 도덕의 진보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윤 리자본주의'의 확립이다. 매우 단순한 방법이지만 지금까 지 착상한 것은 어떤 한 단체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과연 누구일까? 바로 가톨릭교회다. 내가 아는 한, 인류사상 가 장 성공한 '회사'다. 이집트 신관神官들도 꽤 상당한 단계까 지 추진했지만 근 5000년 동안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 기업은 가톨릭교회다. 그들은 무엇을 팔고 있는가? 아무것 도 팔지 않는다. 그들이 파는 것은 달성될지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약속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프로테스탄트를 모두 합치면 약 25억 명에 이른다. 상당한 인원이다. 페이스북 이용자보다 많다. 가톨릭교회가 팔고 있는 것은 도덕성이며,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가톨릭이나 프 로테스탄트로 있으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 급여에서 세금 이 공제된다. 약 6%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상당한 액수다. 어쨌든 다음에 일어날 큰 이슈가 윤리자본주의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 선진국에서는 물건이 넘쳐나 소비 의욕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 대처리즘Thatcherism,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현재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굴복한 것으로 생각된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의도치 않게 신자유주의를 도왔다. 신자유 주의를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정당화하기는 쉽다.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거봐, 뭐든지 가능하잖아. 그러니 이것도 문제없어.”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 던 사상에는 비평의 힘이 없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유일하게 비판하는 것은 매우 독선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나 매우 강한 신조를 가진 사람뿐이다. 반대로 포스트모던 사상이 비판하지 못하는 대상은 통계밖에 믿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거기에는 명확한 관계성이 있다.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이 론가는 직접적, 그리고 간접적으로 포스트모던 사상을 갖 고 있다. 통계적인 세계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포스트모던 성향을 띈다. 모더니티는 원래 비통계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용했고, 계몽은 통계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확률 계산 자체가 계몽시대에 발명되었다. 즉, 통계적인 세계관은 19세기에 탄생해서 20세기에 본격화되 었다.
신자유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나려면 경영윤리를 바꾸고 경제에 윤리관을 되찾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멸에 관 한 좋은 예가, 오늘날의 영국이다. 이는 가장 무능한 정치가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선출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매우 유능한 비즈니스맨이며 놀랄 만큼 성공한 사람이다. 이에 비하면 보리스 존슨은 단지 소인배일 뿐이다.
- 물리적인 종이 폴더가 있다. 출생증명서나 고교 졸업장이 들어있다. 실수로라도 그것을 '지능'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출생증명서 뒤에 고교 졸업증서가 있고 그 뒤에 이를테면 임대차계약서가 나란히 순서대로 포개져 들어있 다. 종이 폴더도 컴퓨터 데이터 처리와 똑같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공서에 있는 종이 파일과 온 라인 또는 웹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온라인이 약 간 더 복잡하다거나, 다른 의미에서 복잡하다고 할 뿐 양쪽 모두 똑같다. 그러므로 웹이나 프로그램, 알고리즘, 딥러닝-이러한 것을 지능이라고 생각한다면 종이 폴더도 지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인공지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변명이다. 혹은 약삭빠른 사람의 트릭이다. 메커니즘mechanism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머신machine 이라는 단어에서 왔으며 머신의 어원은 그리스어 '메카네mechane' 이다. 메카네는 '트릭'이라는 의미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트로이의 목마를 메카네, 즉 '트릭' 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것이 머신, 즉 기계라는 의미다. 따라서 기계가 지능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자명한 이치다.
- 미국에서는 이미지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몹시 크다. 2장에서도 언급한 파사드다. 미국에서는 모든 일이 파사드와 같다. 미국의 건축물을 보면 그 파사드(건물의 정면 부분)는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뭐든지 망가져서 사용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가령 대부호의 집에 초대받아 가도 에어컨 소리가 너무 크고 문은 꼭 닫히지 않아 엉망이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 그것이 파사드, 이미지다. 미국인은 단독 주택에 살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근사한 집이라고 생각할 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뉴욕이 그런 식이다. 나는 뉴욕의 뉴스쿨대학교에서 교편을 잡 았었는데 대학에서 처음으로 사회조사 분야의 테뉴어Tenure 자격(북미 대학에서의 종신고용 자격)을 타진받았을 때 거절했 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도시인데 그곳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은 조금도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도시에서 사는 건 도저히 무리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의 생활은 비참했다.
어디를 가도 “대단해요. 뉴욕에서 오셨어요? 근사한 도 시죠?” 하는 말을 듣는다. 뉴요커들은 “그럼요, 멋진 도시예요.”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밤에는 시끄러워서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으며 더럽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여름엔 지독히 덥고 뭐든지 고장 나 사용하기 힘들다. 지하철은 무질서한 혼돈 상태이고 거리에는 쥐와 오물 천지다. 지하철 안을 쥐가 뛰어다닌다. 도시의 어느 곳을 가도 형편없고 낭패를 본다. 한 달만 있어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 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뉴요커들은 이 도시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는 타인들이 뉴욕에 산다는 건 멋진 일'이라고 동경한다. 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가 간접적인 동기를 만들 어준다. 자신은 전혀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도 남들이 멋있다고 부러워하니 그 사실이 좋을 뿐이다. 미국인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하면 독일인은 무척 현실 지향적이다. 남들이 '저 사람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든 말 든 아무 상관없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누리고 있느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보다, 타 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은 또 다른 표상 의 위기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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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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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역사

역사 2021. 3. 28. 15:00

- 크리스트교가 《신약성서》에서 청빈을 주창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유대교에서는 부와 재화를 쌓는 것이 가치 있는 일로 칭찬받습니다. 유대인 격언에 “돈은 무자비한 주인이지만 유익한 종이 되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유대인은 돈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유 재산을 적극 보호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재물 을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에게는 극형을 포함한 엄격한 형벌을 주고 벌금이나 배상을 꼼꼼하게 규정합니다. 유대교가 재산권과 소유권 불가침을 율법으로 정한 것에는 그들 나름대로 합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런 율법을 지킴으로 써 유대인 이외의 민족에게 신용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 전에 금고를 설치해 각지 부유층들의 금은보화를 맡을 수 있었고 맡기는 쪽도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재산을 맡길 때에 보관료를 걷었습니다. 그리고 재산 소유자에게 양해를 얻은 뒤 제3자에게 금과 은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는 금리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를 인정합니다. 유대인은 맡긴 재산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고 거액의 투자금을 모으고 그것을 건설업 등의 개발 사업으로 돌려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으로 세계를 석권하는 유대인의 금융 비즈니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는 경제적 부와 재화를 둘러싼 문제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야기한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조정하는 시스템을 율법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신이 감독해서 인간의 소유권을 확정하고 관리했 지요. 쓸데없는 소유권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규칙을 법제화했습니다. 소유권의 불가침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금융업 같은 신용 경제를 낳았습니다. 유대교는 모든 면에서 경제 사회의 조화를 우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했습니다. 법치국가가 없었던 시대에 유대교는 율법과 율령으로 시장에서의 신용과 여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신이라는 절대 이념을 신용의 원천으로 삼았기에 고대에도 고도로 발전된 결제 시스템이 가능할 수 있었지요.
- 정신적인 종교가 물질적인 경제를 만들어냈다니,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신성한 것을 정치와 경제 등의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한다는 생각은 근대 이후에 생긴 사고방 식입니다. 전근대시대에 성聖과 속俗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후를 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융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은 종교와 경제를 하나로 보아야만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약자가 필연적으로 가진 심리와 그 충동을 알고 절묘하게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 큰 세력으로 발전했습니다. 약자를 구제하는 구조는 이슬람교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에 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인 것이지요. 약자가 강자에게 분노, 원한, 증오의 감정을 갖는 것을 르상티 망ressentiment 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저서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크리스트교가 르상티망에 의해서 발상한 종교 라고 밝힙니다.  부유층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 보수파에게 예수를 따르는 개혁 파들의 선교는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보수파의 음모에 휘말려 십자가형으로 처형되고 맙니다.
- 이슬람은 세력을 확대하면서도 빈곤층을 배려했습니다. 《코란》에는 부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과 물건이나 화폐를 쓰지 않고 묵혀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계율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토지는 알라가 부여해준 것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제한됩니다. 그렇게 일부 사람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것을 막고 있지요. 또 부유층은 자카트라는 기부금을 내야 합니다. 그에 더해서 코란은 부유층에게 종교세를 걷어서 부가 빈곤층에게 재분배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카트의 일환으로서 와크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크프는 단순하게 재산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 학교, 모스크 등 공익과 복지를 위해 재산의 소유권 행사를 멈추는 것입니다. 와크프 역시 일정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부과됩니다. 《코란》에서 설명한 자카트와 와크프 규정은 시대와 함께 유명무 실해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이슬람 사회의 빈부 격차는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초창기에는 자카트와 와크프를 철저하게 지켰고 부가 잘 분배돼서 이슬람 사회가 강하게 결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이슬람에서는 공공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모든 생산 기관에 국가가 개입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일부 사업자가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이슬람에서는 화폐가 자가 증식하는 형태인 이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경제 격차가 벌어질 때 빈곤층에게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슬람교가 부의 편중을 막고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 설계를 교의 안에 포함시킨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크리스트교가 가져온 자본주의의 맹아 : 중세시대 교황이 유럽을 다스린 것은 유럽 경제 성장에 영향을 줬습 니다. 교황이라는 종교 권위자를 정점으로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성직자와 지방 호족이 지배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그 피라미드는 유럽 전역으로 넓어졌습니다. 따라서 중세 유럽에서는 크리스트교를 바탕으로 한 연대와 이에 따라 종교 조직에 귀속하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 의식은 약했습니다. 종교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연대의 중심핵이 되었습니다. 중세에서 프랑스 왕국, 영국 왕국, 독일 황제 등의 국가 군주는 이름만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교황은 지방 정치를 지방 성직자와 호족들에게 통째로 맡겼습니다. 결국 지방분권적이고 평온한 교황 연합체가 형성됐습니다. 중앙집권적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고 지방이 저마다 의 방법으로 통치를 맡았습니다.  이 온화한 지방분권 체제 속에서 중세 도시가 성장했습니다. 도시는 상공업으로 더 발전했고 시장도 생겼습니다. 시장에서 화폐와 물건을 교환했고 유통 경제가 확산되어 유럽 경제 전체가 살아났습니다. 12세기 유럽은 전에 없던 호경기를 만났고 유럽 각지에서 상공업도시가 형성됐습니다. 그중 북부 도시 뤼베크를 맹주로 하는 한자 동맹권(13~15세기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의 여러 도시가 맺은 연맹이 다. 해상 교통의 안전 보장, 공동 방호, 상권 확장 따위를 목적으로 했다)과 안트베르펜의 플랑드르(벨기에) 교역권인 북부시장은 북해와 발 트해를 무대로 번영했습니다. 한편 남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하는 롬바르디아 동맹권은 남부시장이었고 지중해를 무대로 번성했습니다. 이 북부 시장과 남부 시장은 뉘른베르크, 아우구스부르크 등의 독일 도시를 경유해서 만났습니다. 또 롬바르디아 동맹권은 지중해 를 넘어서 카이로 등의 오리엔트 경제권과 만났습니다.  이처럼 중세 도시를 중심으로 했던 경제 활동 전반을 자본주의의 맹아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방분권적 체제 속에서 도시 상인들은 자 신들의 재량과 책임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했고 번영을 이뤘습니다. 교황이 이 체제를 보증했고 도시 상인들과 크리스트교는 더 유연하게 연대했습니다. 종교가 12세기 유럽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요인을 만든 것입니다.
- 르네상스 Renaissance는 영어로 리뉴얼 Renewal, 즉 재생과 갱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시작해서 16세기까지 이어졌고 이 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르네상스는 중세 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인간성의 자유와 해방을 지향했습니다. 휴머니즘(인문주의,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를 모범으로 해서 인간 존재를 재생하려고 했습니다. 12~13세기에 십자군 원정이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동방 이슬람 권과 접촉하면서 지중해 무역이 생겨났습니다. 이탈리아는 서유럽에서 동방으로 가는 현관문이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자리한 이탈리아 도시에서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적 기반이 단단해졌고 이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됐습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전통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세의 가치 기준을 대체할 고대 문화유산에 근거를 두고 새로운 문화를 양 성할 수 있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는 북이탈리아의 도 시 공화국과 중부의 로마 교황령, 그리고 남부의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북이탈리아의 중심 도시는 피렌체였습니다. 피렌체는 동방 및 지중해와의 무역과 모직물 생산과 금융업으로 번 영했습니다. 15세기에 금융 재벌인 메디치가가 피렌체 정치를 장악 했는데 1453년 비잔틴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의 고전 학자들이 이 탈리아로 많이 망명하자 메디치가가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르네상스부터 대항해시대까지 새로운 가치들이 발견되면서 기존 크리스트교 사회의 공통 사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목적은 종교가 아니라 현세의 시점으로 해석됐고 교회 세력이 경제, 상업, 군사, 정치, 복지 등의 세속적인 제반 현상에 대해 서 갖고 있던 지배권의 정당성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교회 세력은 국가와 관료 제도에 길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종교적인 지배권과 세속적인 지배권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신이 현세 사회에 지침을 주지 않게 되면서 인간이 모든 일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현세를 통치하는 기관으로서 다양한 고찰, 해석, 합의를 이끌어냈고 주권 sovereign, 즉 소버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주권의 어원은 라틴어 superanus이고 super은 지상至上, 즉 가장 높은 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고대 프랑스어 soverain으로 바뀌 어서 영어의 sovereign이 됐습니다. 따라서 주권은 본래 지상이라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신을 뜻합니다. 중세 이후 신이 갖고 있던 지상권이 현세로 내려왔을 때 지상권은 인간의 통치권 으로서 새로운 세속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신이 인간에게 양도한 지상권은 주권입니다. 주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르네상스 말기의 왕권신수설입니다. 왕권신수설은 신이 지상권을 어떤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양도를 했 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결국 그 사람이 왕이라는 내용입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세계관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됐 습니다. 또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의 절대성이 붕괴됐고 그 대신에 왕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현실을 통치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았 습니다. 왕의 권력은 신이 주신 절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왕권신 수설로 나타난 것입니다.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처럼 군주들은 왕권신수 설에 기초한 절대 권력을 가졌습니다. 법과 제도를 만들 권리와 행정 기능을 일차원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세속의 통치 지침을 종교계시로부터 독립시키고 현세를 지배했습니다.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왕권과 국가가 하나라는 것이고 실 체가 있는 왕권이 신이라는 추상물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나타났다. 는 의지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이후의 근세에서 이른바 절대주의라고 불리는, 국왕 권력을 중심으로 한 왕권 국가가 탄생합니다.
- 소버린은 과거 지상권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가졌지만 이 시대에 와 서는 가장 세속적인 의미로 바뀝니다. 금융 세계에서 소버린은 국채를 뜻합니다. 주권이 있는 국가는 자국의 통화를 발행할 수 있고 동시에 정부 의 채무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채권을 발행할 수 있습니다. 주권 국가가 그 빚을 갚겠다는 의무를 보증하는 약속 수표가 바로 국채, 즉 소버린입니다. 국채는 국가의 주권이 직접 반영된 문서이고 국가의 주권이 사람들의 신용을 얻음에 따라서 화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국채를 발행하고 국가 재정을 조절하는 권한은 국가가 주권(소버린)을 가진 증거이기도 하고 그 주권에 의해서 보증된 채권이 또 국채(소버린) 입니다. 국채를 소버린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권 국가가 통화 창출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는 금리, 인플레율, 경상 수지 등의 경제 현상 전반을 지배 및 장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국채 상환이 지연되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디폴트, 즉 재정 파탄이 온 것입니다. 디폴트는 재정 파탄뿐만 아니라 국가 주권의 파탄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국채와 주권은 국가의 정체성으로서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소버린이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 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버린은 신이 인간에게 위양한 현세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결정권입니다. 소버린은 지금도 엄숙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재정의 규율을 지키고 국채(소버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주권(소버린)을 지키는 일이고 신이라는 가장 높은 곳에 어울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 루터의 성서중심주의 사상과 그 운동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늘어났습니다. 루터는 유럽 각지의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줬습니다. 개혁자 칼뱅 Jean calvin 이 있던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신앙이 강해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스위스에서는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 혁이 한창인 도시가 몇 개나 생겼고 그중에서도 제네바는 칼뱅을 초청해서 종교개혁을 이끌게 했습니다. 칼뱅은 루터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철저하게 교회를 개혁했고 기존의 정치권을 위협했습니다. 때문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됐지만 1541년 개혁파들이 다시 칼뱅을 제네바로 불렀고 결국 칼뱅은 봉건제 영주를 추방하고 정치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칼뱅은 제네바의 시정을 장악하고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된 신권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렇게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자리를 잡습니다. 시민의 일상생활에서 사치와 오락이 제외됐고 제네바 거 리에서 화려한 의복이나 고가의 기호품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향락적인 언동이나 오락도 엄격하게 규제됐습니다. 부정부패를 적발했고 거리의 치안도 개선시켰습니다. 재정은 규율로 다스렸고 복지 및 의료 예산을 늘려 실업과 빈곤도 박멸했습니다. 칼뱅의 개 혁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전에 제네바의 로마 가톨릭 세력은 봉건 영주와 결탁해서 금권정치를 하고 일반 시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두터웠던 시민들은 교회를 거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칼뱅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이방인이 나타나서 신앙을 지 키면서도 부패를 척결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려주고 정당성을 설명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신앙의 틀 속에서 신을 따 르면서도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칼뱅의 주장이 사람들 을 각성시켰습니다. 결국 칼뱅의 탄생은 일반 대중이 기득권 계층을 뒤집은 쿠데타였습니다. 당시 일부 시민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부를 얻고 힘을 키웠지만 기득권층의 시장 독점으로 더 큰 성장의 기회를 빼앗겼습니 다. 그런 독점을 파타할 정당성을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신앙이 보증해준 것입니다. 기존 크리스트교에서는 부를 쌓고 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보고 기피했습니다. 돈을 다루는 상인 등을 멸시하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와 칼뱅은 모든 직업이 존경받을 만하다는 직업 소명을 주창했습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뜻하는 '베루프 Beru'는 부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사명을 주는 것 이 바로 소명이고 그 소명으로 각자에게 합당한 직업이 주어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베루프라는 단어를 루터가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베버는 서 술합니다. 일상의 직업 노동에 전념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일을 해서 얻는 보수는 신의 은혜였습니 다. 근로와 절약으로 쌓은 돈이 자본이 되고 이를 기반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해나갔다고 베버는 주장합니다. 칼뱅 이후 기존에 기피했던, 이자를 취득하는 은행업이 공기업으 로 인정받았고 근대적인 금융 자본이 발전했습니다. 베버는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한 것이 자본주의 정신의 기반이 되었고 유럽의 근대화를 지탱했고 또 자본주의 사회 가 발전하는 원리가 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노동을 종교에서 분리시키고 경제 활동을 종교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버는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과 그 소명이 낳은 재물이 대규모 자본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종교에서 분리된 합리주의로 자 본주의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베버의 생각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베버를 비판하 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인정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칼뱅은 사람들이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일에 전념함으로써 부를 획득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부 자체를 사랑 해서는 안 되며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칼뱅 교의에서는 자본 주의의 자유경쟁 아래 경제적인 이익을 최대화하는 자세가 허용되 지 않습니다. 칼뱅은 엄격한 도덕규범 아래에서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의도를 넘어서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면죄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헨리 토니 Richard Henry Tawney는 1926년에 발표한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경제 활동을 종교 규범과 윤리 구속에서 해방시켰다고 했습니다. 종교가 물질적 인 이익 추구를 인정하는 결과가 됐고 그렇게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 됐다는 설명입니다.  처음에는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였던 중산 계급이 점차 자본을 축적하면서 기업가인 산업 자본가, 다시 말하면 부르주아로 변모합니다. 또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으로서 자본가에게 종속됩니다. 18세기가 되어 종교 색이 옅어지자 자본주의는 이익 추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칼뱅의 의도를 넘어서 자본주의는 홀로 길을 걷습니다. 토니는 결국 칼뱅이 인정한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이 자본주의를 종교에서 독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버와 토니의 논의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 이익 추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면죄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데에 반해 토니는 자본주의 정신은 이미 있었고 프로테스탄트 교의를 면죄로 이용해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토니의 설명이 역사 속에서 보는 실제 모습과 가깝습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고 자유 경쟁을 근본 원리로 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자와 탈락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암묵적인 규율에 반하는 현상이 일 어납니다. 따라서 거대한 자본을 가진 성공한 부르주아는 교리가 거래와 사업을 인정하면서도 자신과 타인도 따를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되길 원했습니다. 칼뱅 이전에도 이런 요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뱅 시대 이후 에는 자본가들이 교리를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철저하게 사용했습니다. 부르주아는 프로테스탄트 교리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란 베버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사명관이 우선하는 세계가 아니라 실리적으로 계산을 따지는 세계입니다.
- 경제가 발전하면서 도시 주민인 부르주아의 힘이 강력해졌고 그들은 경제의 자유와 의사 결정의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왕정을 타파하고 부르주아가 의회를 구성했고 의회를 최고 의사 결정 기관으로 만들면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증폭시켰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근대 시민 혁명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하면서 경제적인 자유를 얻은 부르주아들은 사회계약설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갖고 정치적인 자유를 획득하려고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이 신을 대신하는 만능의 능력으로 근대라는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 중국은 유럽과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부유했기 때문에 근대화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중국을 다스렸던 건륭제는 영국에서 온 사절단에게 “너희 들 나라에는 빈약한 것만 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 다”라고 말하고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당시 영국 사절단이 가져온 것은 태엽 감는 시계, 오르골, 소형총, 기계 인형, 기관차 모형이었습니다. 모두 기계화를 국책으로 하는 영국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건륭제는 이것들을 보고 “천박한 장인의 착상”라고 웃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건륭제를 비롯한 중국 지배층은 유교적인 세계관을 확고 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군신서열의 예를 국제 관계에도 적용해서 대국인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종속시키고 세계 질서의 중심이 되어 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중화사상이었습니다.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지배층들은 영국에서 발명한 총과 산 업 기계의 유용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잔재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 Joseph Needham은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에서 중국인이 발명한 화약을 총과 대 포로 실용화할 수 없었던 이유는 기술 혁신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잠재적인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유교적인 인습과 전통을 고집하는 중국인에게 새로운 것은 이상한 것,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기피해야 했습니다. 건륭 제가 영국에서 가져온 물건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해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유교적인 중화사상이 변혁의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건륭제는 1757년 외국 배가 최남단의 광저우만까지만 들어올 수 있게 제한하는 사실상의 쇄국정책을 취했고 중국의 근대화는 세계 열강보다 늦어졌습니다.
-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빈곤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서술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풍 요로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서 그들을 구제해도 그들의 자존심까지 구제할 수 없습니다. 스미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들에게 일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서술합니다. 일을 함으로써 사 회에 공헌할 수 있고 자신이 사회에서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면 인간 의 자존심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충만한 인간은 공정함과 정의를 표방하는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에 적합하고 타인을 믿고 타인에게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합니다.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고 서로 돕는 호혜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됩니다. 스미스는 자본주의에는 물질적인 조화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조화에 이르는 기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경제 활동을 통한 호혜 관계야말로 신이라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증거이고 인 간은 이성을 통해서만 건전하고 조화롭게 경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인간 이성은 혼란스러워지고 의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신용 불안이 사회를 뒤덮습니다. 미래를 신용할 수 없어 사람들은 소비를 억누르고 저축을 우선으로 하고 자신을 폐쇄적으로 만들어서 몸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경기가 냉각하고 후퇴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인간이 인간과 연대하고 협조하고 신뢰해 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정함과 정의의 이념인데 근대 사상가들은 이성이라고 불렀고 스미스는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념을 근원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종교적인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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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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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모르기에 우리 앎의 구축에 유일한 토대는 과거 경험이다. (이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 세계사의 몇몇 의붓자식을 본보기적으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초기 인류는 이미 고도로 완성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냥 무기로 쓰인 창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하이델베르크인) 시기에 이미 기술적으로 오늘날 투창 선수가 올림픽 경기에서 사용하는 투창용 창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정착 농 경민이 아니라, 그보다 수천 년 전 드넓은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서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 사회적 위계질서와 가부장적 사회 형태는 모든 초기 고도 문명 의 규범이 아니었다. 매우 이른 시기부터 수준 높은 문명에 토대를 둔 평 등한 사회 모델도 존재했다. 대략 6000년 전쯤 유럽 최초의 고도 문명을 이룬 도나우 문명에서다. 
* 그리스 문화어에서 나온 많은 표현은 그리스 이전 시대에서 유래했으며 고古유럽의 문화유산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세라믹, 메탈, 시어터, 앵커, 프시케 같은 개념이 그것이다.
* 로마 문명의 급속한 발전은 에트루리아인의 영향을 빼놓고는 상 상할 수 없다. 유럽 문화어에서 차용한 수많은 라틴어 어휘는 에트루리 아어에서 유래했고, 창작자를 후원하는 전통도 예술과 문화 발전에 열 성적이던 에트루리아 출신의 한 귀족에게서 비롯되었다.
* 여전사로만 구성된 아마존 부족(아마조네스)을 언급한 그리스 신화에는 역사적 실체가 담겨 있다. 고고학자들은 흑해 초원에서 여전사들의 무덤을 발견했다.
* 현대 투우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러나 현재 에스파냐와 라틴아메리카에서 행해지는 피비린내 나는 투우 경기는 평화로운 형태의 투우보다는 오래되지 않았다. 평화로운 형태는 미노아 시대 크레타에 서 제례 의식의 일환으로 행해지던 투우에서 발견된다.
* 실크로드의 시작은 기원전 제3천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이 무역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중국인이 개척한 것도 아니다. 
* 아프리카는 식민지 시대 이전에 이미 광대한 무역망을 갖춘 다양 한 고도 문명을 꽃피웠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원주민과 이방인의 요소로부터 공생적 전체를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아프리카적 발전 과정 이 드러난다.
*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침략하기 전의 아마존 분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원시림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최근의 위성사진에서 잘 나타난다.
- 고고학자와 인종학자는 뚱뚱한 조각상 유형이 다산의 상징과 연관성이 있다고 가정한다. 반면에 날씬한 유형은 자연의 모든 생명에 깃든 수호신을 표현한 애니미즘적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유라 시아 민족의 전래 신화에 따르면 이 수호신들은 하나같이 여성이다. “대 지와 중간계의 다양한 원소와 자연 현상(물, 불, 바람, 숲 등)을 여성적 신 성, 곧 '어머니 정령'의 화신으로 보는 것은 핀우고르족'의 전형적인 생각이다. 날씬한 조각상은 유라시아 빙하기의 사냥꾼 공동체에서 단결의 상징으로서 전문화되었다. 사냥꾼 공동체는 씨족이나 씨족 연합으로 조직 되었고, 여성은 이러한 사회 조직 내에서 조정자라는 특권적 역할을 맡았다. 1990년대에 말타 유적의 발굴을 주도한 연구 팀장은 “집에서 주도권을 가진 인물로서의 여성과 주거 공동체와 아궁이의 시조로서의 여 성”(Abramova 1995: 82) 사이의 관계가 긴밀하게 결합되었다고 가정했다. 여성의 이러한 이중적 역할은 유라시아 민족의 전래 신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모계 중심적이고 씨족 질서에 기초한 성스러운 원칙으로서”(Ovsyannikov /Terebikhin 1994-77) 어머니 - 씨족 시조의 관련성을 나타낸다.
- 바이칼 호숫가 사냥꾼들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수천 년 동안 유지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특징은 미세한 변형만 보였다. 말타 유물의 전체 목록과 장르를 통해 알려진 조형 예술의 모든 모티프는 이후의 문화 발전 시기인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도 그 의미를 잃지 않았고, (Haarmann / Marler 2008: 70ff)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연 수호신의 상징이자 씨족 시조로서의 여인상, 토템 동물이자 '숲 의 왕'으로 표현된 곰, 토템 동물이자 두 세계의 중개자인 물새, 삶의 순 환(탈피에 의한 부활)을 상징하는 뱀 등이 그것이다. “북반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오랜 생명력을 지닌 관습은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가족과 씨족의 관습이다. 수렵인과 채취인과 농민들 사회에서는 우리 시대에까지 통용되고 있으며, 산업화 시대에도 계속 살아 있다.” (Kare 2000:104) 바이칼 호숫가의 빙하기 사냥꾼이 남긴 예술 작품의 주요 형태와 모티프는 예로부터 시베리아인의 문화유산에 속하며, 유라시아의 구전 신화와 다양한 샤머니즘 의식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1930년대부터 원시적 사회 형태의 잔존물인 샤머니즘이 극복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자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Glavatskaya 2007) 토착 시베리아인은 서양에서 온 방문객을 자신들이 그사이 비밀리에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로 안내했다. 소비에트가 통치하 던 수십 년 동안 그곳에서 선조의 문화유산을 보존해온 것이다.  시베리아의 역사 시대 샤머니즘은 시기적으로 빙하기 사냥꾼의 관 념 세계와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관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오늘 나까지 시베리아인 사이에서 드러나는 투철한 자연 보호 의식은 우리 모두에게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 사냥꾼에게 육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식량은 바다에서 나왔고, 사냥을 하는 동안에는 바다 가장자리의 얼음덩어리 위에 천막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막에 필요한 기둥은 배로 실어왔고, 기둥에 씌울 재료인 물범 가죽은 계속해서 새로 만들 수 있었다. 사냥꾼은 먼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고 변덕스러운 파도에 내맡겨진 상태도 아니었다. 날이 좋을 때는 배를 타고 얼음덩어리 근처 바다에서 사냥을 했고, 날이 좋지 않을 때는 얼음덩어리 한쪽에 마련한 임시 거주지에 머물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서쪽으로 잡아당기는 태양의 움직임을 뒤따랐다. “이 사람들은 바다 환경을 이용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기술과 생활 방식을 적응해나갔고, 여러 세대에 걸쳐 탐색하는 동안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길을 찾았으며, 마침내 북아메리카 북동부 지역의 육지에 이르렀다.” (Stanford / Bradley 2012:247) 사냥꾼의 서쪽 이동은 결코 의도적인 대서양 횡단이 아니었 다. 그저 새로운 사냥 구역을 탐색하기 위해 얼음 가장자리를 따라서 이동한 결과였다.  이처럼 콜럼버스 이전 북아메리카 이주 연대기와 관련한 새로운 정황이 드러나면서 관련 학계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불거졌다. 그 결과 솔뤼트레 가설을 중점적으로 다룬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Balter 2013, Raff / Bolnick 2015, Straus 2017, 1. a.) 이러한 대서양 이주설에 특히 반대한 이들은 인간유전학자였다. 그러나 이 논쟁의 찬반 입장을 뒤쫓다보면, 인류의 빙하기 이주 문제는 논쟁에 참가한 인간유전학, 고고학, 인류학, 언어유형학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지 않고는 논리적인 대답을 찾을 수 없다는 인상이 강해진다. 고아메리카인 유전자풀의 세분화에서는 특히 하플로그룹 X2의 분포 관점에서 두 갈래 혈통dual ancestry(Raghavan 2013) 으로 분류된다. 즉 연대 의 차이로 논리적으로 설명되듯이 X2를 가진 집단은 유럽에서, X를 가 진 집단은 아시아에서 이동한 것이다. 바스크어와의 비교에서 알곤킨어의 구조에 나타나는 유사성을 단 순한 우연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언어구조의 유사성은 고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유전자 특징과 도구 제작)에서의 일치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특히 솔뤼트레 문화의 도구 제작은 클로비스 기술의 발전을 분명히 알게 해준다. 그 기술은 유럽에서 전해진 노하우 없이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 이러한 대서양 가설의 조명 속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 역사는 빙하기의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이주 초기(2만 3000년~1만9000년 전)에는 솔뤼트레 문화를 이룬 집단 중 일부가 유럽에서 옮겨갔다. 둘째, 이주 후기에는 아시아에 거주하던 집단이 베링 육교를 통해 알 래스카 (약 2만 4000년 전부터)로 건너갔다가 거기서부터 북아메리카 내륙(약 1만 1500년 전)으로 진출했다. 베링 해협을 통해 알래스카로 들어가는 일은 빙하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빙하기 이후의 이주는 계속해서 캐나다와 북아메리카 내륙으
- 괴베클리테페 신전은 조금은 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신전은 파괴되지 않았고, 기원전 제8천년기 초 언젠가 그냥 버려진 채 묻혀버렸다. 그렇게 묻히게 된 것도 오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퇴적 작용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간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못 쓰게 된 석기와 석회석 도구, 깨진 돌 용기, 그 밖에 동물의 뼈로 계획적으로 신전이 덮여버렸다. 그런 재료 중에서는 인간의 뼈도 일부 발견되었다. 신전은 그렇게 덮여버 림으로써 날씨의 변화와 사람의 손에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다. 땅 밖으 로 솟아 있던 유일한 부분인 몇몇 기둥머리는 나중에 인근 농부들에 의 해 파괴되었다. 그중 일부는 집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경작 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 치워졌다. 신전 건물 전체를 메워버린 이 이례적인 행위는 단 하나의 설명으로 만 이해될 수 있다. 즉 이전에 이동 생활을 하던 사냥꾼 집단이 사냥과 채집에서 식물 재배의 경제 형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에 적응했고 이후 정착 생활을 하는 농민이 된 것이다. 새로운 경제 형태에 적응하다. 보니 동시에 세계관도 바뀌었다. 자연의 정령 자리에는 농경의 신이 등장 했다. 이로써 괴베클리테페 신전은 사냥꾼에게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기능을 잃었고 결국 버려지고 묻혀버렸다.
- 괴베클리테페 신전에 묘사된 다양한 그림 모티프에서는 유라시아 석기 시대 사냥꾼의 그림과 역사 시대 유라시아 민족의 전래 신화 사이 의 유사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정한 동물 형상의 모티프와 상징적 구상은 바이칼 호숫가에서 야영하던 집단과 동부 아나톨리아에 신전을 세운 집단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예를 들어 뱀, 물새, 신화적 조상에 대 한 구상이 그런 것이다. 근동 지역의 초기 신전 건축물은 선사 시대 사냥꾼 문화의 주변 지역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사냥꾼 문화는 북쪽에서는 계속 이어진 반면, 아나톨리아에서는 정착 생활과 식물 재배, 도시적 거주 방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으로 들어서면서 묻혀버렸다. 괴 베클리테페 이후 약 2000년 뒤 차탈회위크를 세운 사람들이 남긴 고고학 유물에서 그러한 과도기를 읽을 수 있다. 괴베클리테페 발굴은 인류의 문화 발전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라고 요구한다. 도시는 문명의 출발점이 아니었고 도시적 환경이 거대 건축술 탄생의 전제 조건도 아니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 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세계 질서의 결정체이자 사회 집단의 연대감 강화 의식이 거행되는 중심지인 신전이 문화적 발전의 이정표가 된다. 중 심지의 역할은 도시적 취락지로까지 확대되며, 여기서 신전 건축은 초기 문명의 중요한 형식으로 대두된다.
- 차탈회위크의 도시 역사는 매우 이례적인 종말을 맞이하는데, 그 이유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들볶은 모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기는 분명 도시가 형성되었을 때부터 줄곧 있었을 것이다. 습기가 많은 저지대와 강변 초지는 모기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차탈회 위크 주민은 수백 년 동안 모기에 잘 대처하며 살았다. 고고학자들이 확인한 바로는 도시의 건물 안 주거 공간은 눈에 띌 정도로 깨끗하게 유지된 상태였다. 내부 공간에 모기 서식처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모기를 체계적으로 제거했을지도 모른다. 집 안 화덕에는 연기 배출구가 따로 없었고, 지붕에 난 구멍을 통해서만 연기가 빠져나 갈 수 있었다. 화덕의 연기가 오랫동안 집안 전체에 퍼지게 만든 구조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야 동시에 모기도 막을 수 있었을 테니말이다. 그러나 기원전 제6천년기 언제부터인가 어쩌면 기원전 5800년 무렵 발생한 기온 상승의 결과로 축축한 저지대에 말라리아모기가 서식하게 되었다. Bater 20:28)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렸다. 전문가들 은 무덤 속 유골에서 말라리아로 야기된 일련의 기형적 뼈를 확인했다. 만연한 말라리아는 도시 주민의 삶을 몹시 힘겹게 만들었고, 그들은 고향을 영원히 떠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기원전 5600년 무 렵 차탈회위크는 버려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차탈회위크 서쪽, 오늘날의 터키어로는 하질라르로 불리는 곳에 새 도시가 탄생했다. 신석기 문화는 여기서 계속 이어졌다. 하질라르를 세운 사람들이 차탈회 위크 주민의 후손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비밀로 남을 것이다.
- 차탈회위크의 특이한 역사는 초기 문명 발전에 대안적 모델이 존재 했다는 인상을 준다. 차탈회위크에서 본보기적으로 증명된 바와 같이 초기 신석기 시대의 도시 취락지는 사적 건물과 공적 건물의 구분 없이 생겨날 수 있었다. 또한 도시적 환경에 수천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조직도 사회적 위계질서 없이 얼마든지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차탈회위크만 그런 공동체를 이룬 것은 아니다. 그보다 늦게 등장한 도나우 문명의 대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조건을 가진 도시 공동체가 형성 되었다. 사회적 위계질서로 특징되는 일직선적인 도시 역사는 그 이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 남동유럽의 신석기 시대와 동기 시대 유적지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들은 고유럽 농경 사회를 고도 문명의 의미에서 초기 문명으로 보아야 할지를 놓고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초기 농경민의 정착지에서 국가적인 조직 형태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 문명은 상세하고 다양한 연구로 속속들이 잘 알려졌고, 거기서부터 모든 초기 문명의 태동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본보기적 유형이 파생했다. (Albertz et al. 2003: 8 ff., 13 f) 그에 따르면 국가 조직의 구축은 모든 고도 문명이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이 논리에 따라 고도 문명은 유럽이 아닌 고대 오리엔트에서 처음으 로 증명되었으며('빛은 동방으로부터'ex oriente lux), 따라서 남동유럽의 신석 기 시대 문화 단계는 문명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구세계와 신세계의 초기 문명을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고대 이집트와 고대 수메르 문명" 모델이 규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외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오늘날의 고고학자, 인류학자, 문화학자는 초기 단계에서 국가적 질서가 전혀 증명되지 않았거나 초보적으로만 발 전한 초기 문명이 있다고 말한다. 고유럽이나 인더스 문명도 그런 경우다. 따라서 초기 문명에 대한 논의는 인더스 문명과 도나우 문명과 같은 다른 초기 고도 문명으로도 확대되어야 한다.
- 현재까지 확보된 지식을 토대로 하면 도나우 문명은 평등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평등을 보여주는 특별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으며, 그 증거는 이른바 부정적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시 말해서 고유럽인의 취락지에는 특권 지도층과 사회적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특징이 없다. 첫째, 묘지 문화에서는 빈부 차이와 남녀 차이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둘째, 지배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이 없다. 예를 들어 신분을 상징하는 왕홀이나 지배 계급에 속하는 종족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장 등의 상징적 인공물이 없다. 셋째, 취락지의 배치에서 족장이나 사회 지배층 구성원의 집으로 확인할 만한 더 큰 건물의 윤곽이 없다. 넷째, 궁전과 같은 세속적인 권력을 드러내는 웅장한 건축물이 없다. 이와 같은 부정적 요소들이 말하는 바는 자명하다. 고유럽의 초기 농경민 공동체는 노동 분업이 발달해 있었다. 아이 돌보기, 직조, 원예처럼 여성이 선호하는 활동 분야와 건축, 금속 가공, 원료 조달처럼 남성이 선호하는 분야가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거나 반대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 도나우 문명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즉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되지 않은 공동체에서도 사회와 경제, 기술적 수준이 고도로 발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배층의 형성은 고도 문명의 생성에 필 요한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아니다. 초기 연방의 형태를 보인 고유럽의 사 회 모델은 남녀 양성의 협력이 특징적으로 나타난 공동체였다. 도나우강 과 그 지류 그리고 에게해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지역 및 지 역 상호 간의 무역 관계는 각 지역에 고루 분포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서양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면서 그리스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에 깊 은 인상을 받을 때는 그 이전의 문화 시기에도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대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은 고유럽을 출발점으로 한 특유의 발전 과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딜문은 단순히 구리가 거래되던 땅만은 아니었다. 딜문의 항구는 교 류하는 여러 나라의 물건을 옮겨 신는 환적장 역할도 했다. 수메르의 거래 물품은 딜문을 거쳐 인도에 도달했고, 인도에서 가져온 물건은 딜문 의 상인이 수메르로 운반했다. 딜문에서 멜루하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에 서는 마간(오만 반도)이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다. 그 루트를 통해 딜문으 로, 계속해서 메소포타미아로 운반된 물품에는 원료나 완성품 형태의 금속(구리와 아연, 은)과 상아, 고급 목재, 직물, 장신구가 포함되었다. 금속은 다른 금속과 교환되었다. 아카드 문헌에는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 는 수많은 대목이 나온다. “딜문에서 수입된 구리는 물물교환 거래에서 양모, 은, 기름, 다양한 유제품과 곡물로 지불되었다. 그 밖에도 무역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는 이른바 딜문 배의 청동 모형을 난셰' 여신에게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 (Ray 2003: 85) 딜문을 거치는 무역과 물품 환적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 지는 딜문의 무게와 길이, 부피 단위가 수메르의 도시와 인더스의 무역중심지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문화재도 서쪽과 동쪽에서 딜문으로 보내졌다. 바레인섬 북쪽의 취락지에서는 인더스 문자가 새겨진 도장과 쐐기문자로 쓰인 문장의 단편도 발견됨. 딜문 상인은 업무활동을 할 때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사용했다.
- 펠라스고이인의 문화를 열심히 배운 그리스인은 나중에 남동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는 로마인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 그리스는 점차 펠라스고이인을 지배했지만 그들의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다양한 차용어 로 자신들의 언어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그리스를 지배한 로마도 그리스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수많은 차용어를 자신들의 라틴어 어 휘로 받아들였다. 펠라스고이인 문화의 전성기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제3천년기~기원전 제2 천년기)였다. 이들은 에게해의 다른 문명, 그러니까 키클라데스 제도 사람들과 크레타섬의 미노아인과 교역 활동을 했다. 그리스 남쪽(펠로폰네소스)의 펠라스고이인 취락지들은 고전기 이전(기원전 8세기~기원전 6세 기)까지도 언급되었다. 그 후 펠라스고이인은 전체적으로 그리스 문화에 동화하고 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 유전학자들은 1990년대에 '지중해형 특이 유전자' 특징을 확인했다. 그리스에서 그리스 선주민의 유전자 풀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유전자지도로부터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Cavalli-Sforza 1996: 63) 그리스인의 문화적 기억에서 펠라스고이인과 그들의 성취는 점차 밀려났다. 나중에 로마인의 집단적 기억에서 에트루리아인이 전반적으로 지워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대의 문헌에서는 여전히 펠라스고이 인이 자주 언급되었다. 가령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와 역사학자들의 저술(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고 문학가와 철학자 의 작품에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I 840, X 429)에 따르면 펠라스 고이인은 트로이의 연맹이었고, 따라서 트로이 전쟁에서는 반反그리스 연맹에 속했다. 이것이 그들이 쫓겨나게 된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전래된 이야기에서는 민족적 반감도 표현된다. 그중 한 이야기에는 펠라스고이인이 아테네 처녀를 강간하고 여인을 납치했으며, 그 때문에 렘노스섬으로 추방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헤로도토스의 『역사』, VI 137~38). 그리스 문화에 끼친 펠라스고이 문화의 영향을 평가절하하려는 또 다른 동기는 점점 강해지는 그리스 지배층의 자기 찬양과 야만인' 및 그들의 외래 문화에 대한 거리 두기였을 것이다. 그리스 문화권 밖에 있는 민족(가령 켈트인, 스키타이인, 일리리아인')뿐만 아니라 헬라스 내에 있는 비그리스인도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 보통 서양의 고대라고 하면 현대 세계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떠올린다. 역사책에서는 이 두 고도문명 을 대표적으로 부각하고, 그들의 업적을 이상화된 중점에 따라서 조명한다. 과학과 철학, 예술은 그리스 문명의 성취로 찬양하고, 기술 분야나 제국 차원의 엄청난 건축 활동, 행정과 국가 업무에서의 탁월한 조직력은 로마 문명의 핵심으로 이상화한다. 고대에 관한 일반적인 기술에서 에트루리아인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거나 개별적으로만 언급되는데, 이 로써 고대 역사의 이해도 불완전하게 남는다. 그러나 고대 역사는 그리스-에트루리아 - 로마'라는 삼각관계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감춰져 있던 중요한 상호 의존성이 비로소 드러난다.
- 이주민들은 동물 중에서는 특히 폴리네시아 닭을 가져왔다. 그러나 화물 속에 몰래 숨어 있다가 아우트리거 카누에 실려 함께 들어온 불청객도 있었다. 바로 폴리네시아 쥐였다. 이스터섬에는 쥐의 천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곧 섬의 심각한 골칫거리가 되었 다. 쥐는 이주민이 심은 채소와 유용 식물의 열매를 갉아먹었을 뿐만 아 니라 야자수의 씨앗까지 먹어치웠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나무 부족 상태를 야기했다. 유용한 나무가 부족해진 이유는 섬 주민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아이를 산기슭의 채석장에서 평지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굴리는 방식이든 썰매를 이용하는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또 다른 요인은 이들 의 장례 풍습이었다. 보통은 화장이 행해졌으며, 거기에는 많은 땔감이 필요했다. “이스터섬의 화장터에는 불에 탄 시신 수천 구의 유골과 불에 탄 뼈의 재가 상당량 남아 있는데, 이는 화장 목적으로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는 점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Diamond zoos: 106) 그러나 모아이 문화가 몰락한 결정적 이유는 1650년 무렵 시작된, 소빙하기로 불린 급격한 기후 변화였을 것이다. 그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 이었지만, 이스터섬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상태와 대안 경제 형태의 부족 때문에 그 충격이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기후 변화는 라파누이 사회에 도 심각한 파장을 불러왔을 것이다. 유용 식물 재배는 현저하게 줄어들 었고 생필품 공급은 점점 빠듯해졌다. 각 씨족은 점점 더 날카롭게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고, 족장은 상속된 권위를 잃었으며, 섬 주민의 언어로 마타토아 matatoa 로 불리는 군부 지도자가 등장했다. “마타토아의 지위는 사회적 신분이 높은 남성에 의해 독점되었고, 이들의 무자비함은 여러 이야기 속에 묘사되었다.”(Luce 1992:14)
- 씨족들은 패권과 농경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명적인 전쟁으로 얽혀 들어갔고, 그 결과 전체 주민 집단 수가 감소했다. 언제부 터인가 섬 주민은 이런 전쟁의 자멸적인 결과를 깨달았고, 새로운 질서 를 도입했다. 매년 봄 평화로운 경쟁에 바탕을 둔 하나의 의식을 치렀다. 각 씨족은 대표 한 명씩을 시합에 내보냈다. 시합에서 승리한 씨족은 다 음 시합이 열릴 때까지 나머지 씨족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맡았다. 이 러한 선택 방법과 거기서 파생된 권력 수행의 제도화는 일종의 '대통령 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 가톨릭 신부들이 이스터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씨족들 사이에서는 이런 형태의 권력 분배가 일반적이었다. 의식에 따라 치러지는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그해의 조인鳥人 탕 가타 마누로 뽑혔고, 1년 동안 창조신 마케마케를 지상에서 대변하는 상징적 역할을 맡았다. 모든 후보자는 신체적으로 잘 단련된 상태여야했고, 시합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거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섬 남쪽에 있는 높은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강한 물살을 헤치고 상어와 싸 우며 헤엄쳐 나아가 이스터섬 앞에 돌출해 있는 암초 섬으로 가야 했다. 그런 다음 그곳에 둥지를 튼 새의 알을 하나 찾아 안전하게 이스터섬 해 변으로 가져와 거기서부터 다시 가파른 절벽을 기어 올라가야 했다. 온전한 새의 알을 들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승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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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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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역사 2021. 2. 6. 22:37

- 약 3000만 년 전에 북동아프리카 지하에서 뜨거운 맨틀 기둥이 솟아올랐다. 이 때문에 땅덩어리가 약 1km나 위로 거대한 여드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 부풀어 오른 돔 위를 지나가는 대륙지각 껍질이 길게 늘어나면서 얇아지다가 결국 일련의 열곡들 가운데에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대체로 남북 방향으로 생겨났는데, 동쪽 갈래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말리를 지나가고, 서쪽 갈래는 콩고를 지나 콩고 와 탄자니아 국경을 따라 뻗어 있다. 지구를 가르는 이 과정은 북쪽에서 더 강렬하게 일어났는데, 지각에 생긴 긴 상처를 따라 마그마가 솟아올라 새로운 현무암 지각이 생겨났다. 그러고 나서 이 깊은 열곡에 물이 채워져 홍해 가 생겨났다. 또 다른 열곡은 아덴만이 되었다. 해저 확장 열곡들은 아프리카의 뿔(아덴만 남쪽에서 아라비아해로 돌출된 동아프리카의 반도 지역) 일부를 떨어져나가게 해 새로운 판인 아라비아판을 만들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홍해와 걸프만이 만나는 Y자 모양 지역은 삼중 교차점이라 부르는데, 이 교차 지점 중심에 아파르 지역이라는 삼각형 모양의 저지대가 에티오피아 북동부와 지부 티와 에리트레아를 가로지르며 뻗어 있다. 이 중요한 지역은 나 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에티오피아에서 모잠비크까지 수천 킬로미터나 뻗어 있다. 그 아래에서 마그마 기둥이 계속 솟아오르기 때문에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아직도 양쪽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판들의 확장' 과정은 단층을 따라 전체 암석판에 균열을 일으켜 암석판을 절단시킨다. 그리고 양 측면이 밀려 올라가 가파른 경사면이 생기고, 그 사이의 블록은 아래로 가라앉아 골짜기 바닥이 된다. 550만~370만 년 전에 이 과정을 통해 현재 와 같은 동아프리카 지구대 지형이 만들어졌다. 해발 약 800m 지점에 넓고 깊은 골짜기가 지나가고, 양 옆에는 산맥이 우뚝 솟 아 있다.  이러한 지각 융기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높은 산맥이 가져온 한 가지 주요 효과는 대다수 동아프리카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인도양에서 습기를 많이 머금고 불어오는 공기 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지형 때문에 더 높은 고도로 상승하다 가 냉각되면서 응결해 해안 지역에 비를 뿌린다. 이 때문에 내륙 지역은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한 기후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비 그들(in shadow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와 동시에 동아프리카 지구 대의 고지대는 중앙아프리카 우림 지역의 습한 공기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한다.이러한 판들의 활동 -히말라야산맥 생성, 인도네시아 해로 봉 쇄, 특히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높은 산맥 융기 은 동아프리카 지역의 기후를 건조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동아프 리카 지구대의 생성은 기후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생태계를 변 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연 경관까지 변화시켰다. 무성한 열대 숲으로 뒤덮여 있고 균일하게 편평한 지역이던 동아프리카는 고 원과 깊은 골짜기가 곳곳에 널려 있는 울퉁불퉁한 산악 지역으 로 변모했고, 식생도 운무림에서 사바나와 사막 관목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분포하게 되었다. 거대한 열곡은 약 3000만 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했지만, 융기와 기후의 건조화는 대부분 지난 300만~400만 년 동안 일어났 다. 우리가 진화한 것과 같은 시기인 이 기간에 동아프리카의 풍경은 〈타잔)의 무대에서 〈라이언 킹>의 무대로 변모했다. 나무 에서 살아가던 유인원으로부터 호미닌의 분기를 촉진한 주요 요 인 중 하나는 바로 장기간 지속된 동아프리카의 건조 기후와 그 로 인해 숲 서식지가 감소하고 쪼개지거나 사바나로 변모해간 환경 변화였다. 또한 건조한 초원 지역의 확대는 대형 초식 포유류, 즉 사람이 사냥할 수 있는 영양과 얼룩말 같은 유제류의 번성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 한 가지 요인만으로 그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판의 활동으로 생겨난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숲과 초원, 산맥, 가파른 경사면, 언덕, 고원과 평원, 골짜기 그리고 동아프리카 지구대 바닥의 깊은 민물 호수 등 다양한 지형들이 인접해 나타나면서 아주 복잡한 환경이 되었다. 이 모자이크 환경은 호미닌에게 다양한 식량원과 자원과 기회를 제공했다.
- 최근에 극심한 기후 변동이 일어난 세 시기는 270만~250만 년 전, 190만~170만 년 전, 110만~90만 년 전이다. 화석 기록을 살 펴보던 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새로운 호미닌 종(대개 뇌 용량 증가와 연관이 있는)이 출현하거나 멸종한 시기는 바로 습한 기후와 건조한 기후가 요동한 이 시기들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190만~170만 년 전의 기후 변동 시기에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7개의 주요 호수 분지 중 5개가 물로 채워졌다 말라붙는 일이 반 복적으로 일어났다. 바로 이 시기에 호미닌 종수가 정점에 이르렀으며, 뇌 용량이 극적으로 증가한 호모 에렉투스도 이때 나타났다. 우리가 아는 호미닌 15종 중에서 처음에 출현한 12종이 이 세 가지 기후 변동 시기에 나타났다. 게다가 제각각 다른 도구 기 술 올도완 공작, 아슐리안 공작, 무스테리안 공작 단계의 발달 과 확산이 일어난 시기도 극단적인 기후 변동 시기와 일치한다. | 그리고 기후 변동 시기들은 우리의 진화를 결정하는 데 중요 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호미닌 종을 태어난 곳에서 떠 나 유라시아로 이주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장에서 우리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구 전체로 확산할 수 있었는지 자세히 살펴볼 테지만, 그 전에 호미닌을 아프리카 밖으로 내몬 조건들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에 일어난 기후 변동에서 생겨났다.  강수량이 많은 시기에는 큰 증폭기 호수들이 물로 채워지고 여분의 물과 먹이를 구할 수 있어 인구가 급증한 반면, 그와 동시에 나무가 늘어선 지구대 어깨 부분에 해당하는 서식지 공간이 줄어 들었다. 이 때문에 세차 운동의 주기에 따라 강수량이 많은 단계 로 접어들 때마다 호미닌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관을 따라 이동하다가 결국에는 동아프리카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습한 기후는 또한 호미닌을 나일강 지류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시나이반도와 레반트 지역의 푸르른 회랑을 지나 유라 시아로 건너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모 에 렉투스는 약 180만 년 전의 기후 변동 시기에 아프리카를 떠났고, 결국에는 멀리 중국까지 퍼져갔다. H. 에렉투스는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으로 진화해갔고, 동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H. 에렉투스 개체군은 결국 30만~20만 년 전에 현생 인류로 진화했다.
-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난 수백만 년 동안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모든 지구 과정들의 특별한 조합이 만들어낸 존재이다. 땅속에서 솟아오른 마그마 기둥 때문에 지각이 부풀어 올랐고, 그 결과로 우리 영장류 조상이 살던 비교적 편평하고 숲이 우거진 서식지가 메마른 사바나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단순히 건조한 지역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전체 자연 경관 은 가파른 단층 절벽과 용암이 굳어서 생긴 산등성이가 이리저리 뻗어 있는 기복이 심한 지형으로 변했다. 이곳은 갈기갈기 쪼개진 다양한 서식지들이 복잡한 모자이크를 이루어 존재하는 세계였고,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해갔다. 특히 동아프리카에서 지각을 확장시킨 판들의 활동으로 동아프리카 지구대가 갈라지면서 비를 붙들어 쏟아지게 하는 거대한 벽들과 뜨거운 골짜기 바닥으로 이루어진, 이곳만의 독특한 지형이 생겨났다. 지구의 궤도와 자전축의 기울기에 일어난 우주적 변화는 주 기적으로 지구대 바닥에 있는 분지들을 물로 채웠는데, 증폭기 호수들은 사소한 기후 변동에도 급격히 반응함으로써 이 지역에 서 살아간 모든 생물에게 강한 진화 압력을 가했다. 호미닌이 살았던 이 고향의 독특한 환경이 적응력과 재주가 뛰어난 종의 발달을 견인했다. 우리 조상은 갈수록 지능에 더 많이 의존하고 사회적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게 되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이 다양한 자연 환경이 호미닌을 진화시킨 요람이었고, 거기에서 털이 없고 수다스럽고 자 신의 기원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똑똑한 유인원이 나타났다.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농업을 발전시키고 도시에서 살고 문명을 건설하게 한 지능과 언어, 도구 사용, 사회 학습, 협력 행동)은 이러한 극단적인 기후 변동이 낳은 결과이자,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특별한 환경 이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환경의 산물이다. 우리는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기후 변화와 판들의 활동이 낳은 유인원 종이다.
- 현재 우리는 기온이 비교적 높고, 육지를 덮은 얼음이 줄어들어 그 결과로 해수면이 높아지는 간빙기에 있다. 하지만 지난 260만 년 동안의 평균 조건은 현재보다 훨씬 추웠다. 아마도 여러분은 박물관의 전시물과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마지막 빙기 때 세상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대륙 빙하가 북반구 대부분을 뒤덮고, 털매머드가 툰드라 비슷 한 곳을 걸어 다니고, 검치호가 그런 털매머드를 공격하고, 털가죽을 입은 구석기 시대 인류가 돌을 매단 창으로 사냥을 하던 시절이었다.하지만 이것은 최근의 지구 역사에서 일어난 많은 빙기들 중 마지막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260만 년 동안 빙기는 40~50번이나 있었는데, 갈수록 그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기온은 더 내려갔다. 사실, 제4기는 지구 기후가 예외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는데, 혹독한 빙기와 따뜻한 간빙기가 반복되면서 거대한 대륙 빙하가 주기적으로 팽창과 수축을 거듭했다. 빙기는 평균적으로 8만 년 동안 계속되고, 빙기들 사이의 간빙기는 그보다 훨씬 짧은 1만 5000년 정도만 지속된다. 1만 1700년 전 부터 시작된 홀로세(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 충적세沖積 世 또는 현세現世라고도 한다)처럼 각각의 간빙기는 기후가 다시 빙기 로 돌아가기 전의 짧은 휴식기에 지나지 않는다.
- 산맥 생성과 그에 잇따른 침식으로 일어난 대기 중 이산화탄소 감소, 남극 대륙을 남극점 위에 고립시키면서 파나마 지협을 만들어 해류의 패턴을 변화시킨 판들의 활동, 대부분의 육지를 한쪽 반구로 몰아넣은 대륙 이동, 이 모든 효과들이 합쳐져 지구 를 얼음 저장고로 변화시키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260만 년 전에 북반구에 거대한 대륙 빙하가 생기는 단계까지 지구가 냉각된 것이 결정적 문턱이었고, 그러자 지구 전체의 기후가 완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돌입했다. 이제 밀란코비치 주기의 작용으로 북극점 부근이 약간 냉각될 때마다 두꺼운 얼음층이 유럽과 아시 아와 북아메리카로 팽창해갔고, 대륙 빙하가 북반구의 이 거대 한 대륙들을 두껍게 뒤덮었다.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면적이 조금만 증가해도 더 많은 햇빛이 반사되어 냉각 효과가 더 커졌고, 그 결과로 폭주 과정이 시작되어 대륙 빙하가 더 넓게 팽창하면서 더 많은 바닷물을 얼음에 가두어 해수면이 낮아졌다. 신생대에 접어들어 지난 5500만 년 동안 이러한 지구의 지속 적인 냉각은 지구 자체와 우리의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앞 장에서 본 것처럼 기후가 더 차갑고 건조하게 변하자 동아프리카의 숲이 줄어들면서 초원으로 변했고, 이것은 호미닌의 발달을 촉진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를 다재다능하고 지능이 높은 종으로 발달하게 한 동아프리카 지구대 증폭기 호수들의 급격한 요동은 밀란코비치 주기 중 세차 운동의 리듬이 그 원인이었다. 약 10만 년 전부터 지구의 주기들이 서서히 일치하기 시작했 다. 북반구에 여름을 가져오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가 지구가 타원 궤도를 도는 중에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시점과 일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북반구의 여름이 더 서늘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겨울철에 생긴 얼음이 녹지 않고 쌓이기 시작했다. 지구가 또 한 번의 빙기로 접어들면서 북쪽의 대륙 빙하가 성장했고, 남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 인류의 확산이 세계 모든 곳으로 빠르게 그리고 심지어 방향성을 가지고 일어났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불굴의 의지가 이글거리는, 눈살 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아프리카의 고향에 결연히 등을 돌리고 지평선을 향해 과감하게 걸어가 대륙들 가장자리에 위치한 온 구석구석을 체계적으로 채워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수렵 채집인 집단들이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온 사방을 배회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 다. 그들은 국지적 기후 변화에 따라 추위와 가뭄을 피해 그리고 더 따뜻하고 강수량이 더 많고 식량을 구하기에 더 좋은 곳을 찾아, 계절에 따라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동해갔다. 세대가 지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예를 들면, 아라비아반도에서 남유라시아 해안을 따라 중국까지 인류가 확산해간 평균 속도는 1년에 0.5km도 안 되었다.
- 인류가 전 세계로 확산해간 사건이 마지막 빙기의 혹독하게 추운 기후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랍게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얼음 저장고 환경 덕분이었다. 북쪽 대륙 빙하가 성장하면서 바다에서 다량의 물을 흡수한 덕분에 해수면이 낮아져 광대한 대륙붕 지역이 마른 땅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마른 땅을 걸어 인도네시 아로 건너가고, 얕은 바다를 건너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고, 베링 육교를 지나 아메리카로 건너갈 수 있었던 건 바로 빙기가 가져다준 조건 덕분이었다. 또한 낮은 해수면은 살아갈 육지 면 적이 더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2500만 km2의 땅이 새로 생겼 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북아메리카와 거의 비슷한 크기이다.
- 분명하게 설정된 천연 국경과 비교적 작은 면적 덕분에 영국 은 봉건 영주들이 지배하던 영지들을 일찍 통일해 단일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부터 시작해 오늘날의 의회 제도 확립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전제 군주제로부터 더 균형 잡힌 민주주의 제도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데에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상대적 안전성이 큰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방어해야 할 육상 국경이 없는 영국은 유럽 대륙의 경쟁국에 비해 군사비 지출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에 해군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는데, 영국 해군은 단지 국가를 방어하는(1805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영국을 침공하려던 나폴레옹의 꿈을 수장시킨 트라팔가르 해전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데에만 몰두한 게 아니라, 에스파냐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대체해 해상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해외 식민지를 방어하고 상업적 이익과 교역로를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간빙기는 비교적 안정적인 기후 조건이 특징이다. 실제로 지난 1만 1000년 동안 지속된 홀로세 간빙기는 지난 50만 년 사이에 따뜻한 기후가 가장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된 시기였다. 그리고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주었을 마지막 빙기 이후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는 전 지구적으로 작용한 효과였다. 전 세계 각지의 문화들에서 거의 동시에 농업이 발달한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안정적이고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조건은 큰 낟알이 열리는 초본 식물을 믿을 수 있게 생산하는 지역들에서 사람들이 광범 위한 지역을 배회하며 살아가는 대신에 선별된 일부 종들을 직 접 재배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는 동기가 되었을 수 있다. 간빙기 는 농부에게 필수 조건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 우리가 영장류로 진화하고 수렵 채집인으로 발달한 과정은 속 씨식물의 열매와 덩이줄기와 잎에 의존해 일어났다. 우리가 채 택한 농업 또한 거의 전적으로 속씨식물에 의존했다. 곡류는 속씨식물이다. 사실, 우리가 수확하는 곡물은 식물학적으로 초 본 식물의 열매이다. 초본 식물이 존재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약 5500만 년 전에 생긴 화석에서 발견되지만, 신생대 내내 지구가 지속적으로 냉각되고 건조해짐에 따라 2000만~1000만 년 전에 초본 식물이 지배하는 생태계가 세계 곳곳의 많은 지역에 생겼 다. 따라서 우리의 진화를 이끈 요인은 단지 동아프리카가 건조 한 기후로 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길들임으로써 역사 를 통해 문명들을 먹여 살린 곡식들이 된 식물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조건은 바로 지구 전체적인 냉각화와 건조화 과정이 만들 어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식물은 대부분 여덟 가지 속씨식물과 중 하나에 속한다.
- 놀라운 사실은 우제류와 기제류가 영장류와 함께 모두 5550만년 전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진화적 분화를 통해 약 1만 년 이내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동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게 될 우리 조상들과 가축화와 문명의 발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동물 집단들이 모두 지구의 역사에서 눈 깜짝할 순간에 해당하는 같은 시기에 출현했다. 그리고 이 중요한 APP 포유류들의 급속한 출현을 촉발한 것은 세계 평균 기온 이 급격히 치솟은 발작적 사건이었다. 세계 기후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따뜻해진 사건은 팔레오세와 에오세를 구분하는 경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어났으며,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 Palaeocene-Focene Thermal Maximum, 줄여서 PETM이라 부른다. 지질학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인 1만 년 미만의 시간에 엄 청난 양의 탄소(이산화탄소와 메탄)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면서 온 실 효과가 크게 증가해 세계 평균 기온이 5~8°C나 급상승했다.  이러한 환경 급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생태계들이 크게 변하긴 했지만, 백악기 말이나 페름기 말에 일어난 것과 같은 규모의 대멸종은 일어나지 않았다. 열대 지역의 환경이 극지방까 지 확대되면서 활엽수와 악어와 개구리가 극지방에서도 번성했 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는 유공충이라는 일부 심해 아메 바를 사라지게 했는데, 이들은 따뜻해진 수온과 심해에서 줄어 든 산소에 견뎌낼 수 없었던 반면, 와편모충류 같은 플랑크톤은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따뜻한 대양 표면에서 크게 불어났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 같은 전 지구적 환경 교란은 많은 동물에게 급속한 진화를 촉진했는데, 특히 온도 급상승은 새로운 APP 포유류 목들의 출현에 중요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이 티베트 고원을 지배하려고 하는 데에는 중요한 전략적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군사적 이유 때문이다. 인도가 티베 트 고원을 차지해 문자 그대로 중국 심장부가 내려다보이는 요 지를 차지하고, 그와 동시에 그곳을 그 아래의 평원을 침공하는 전진 기지로 삼을 가능성을 중국은 좌시할 수 없었다. 설사 인도 가 티베트 고원을 점령하지 않더라도, 만약 티베트에 정치적 자 치를 허용한다면, 티베트 정부의 허락을 받아 인도가 그곳에 군 사 기지를 건설할 가능성이 있어 중국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는 티베트 고원이 공급하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자원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물이다.티베트는 세상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고원이며, 이곳에 있는 수 만 개의 빙하에는 북극 지방과 남극 대륙을 제외하고는 세상에 서 가장 많은 빙하 얼음과 영구 동토층이 있다. 그래서 이 높은 고원은 지구의 세 번째 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빙하와 눈에서 녹은 물은 황허강, 양쯔강, 메콩강, 인더스강, 브라마푸트라강, 살윈강을 포함해 동남아시아 전제로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는 큰 강 10개의 원류가 된다. 이 근 강들은 모두 산에서 침식된 엄청난 양의 퇴적물도 실어가 주변의 범람원과 논을 기름지게 만든다. 따라서 티베트 고원은 전체 대륙 지역의 급수탑 역할을 하는 데, 소중한 자원을 저장하고 이 강들을 따라 그것을 분배하면서 2억 명 이상의 사람에게 식수와 관개용수, 수력 발전 용수를 공 급한다. 중국이 성장하는 인구와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이곳을 확보하려는 이유는 풍부한 구리 광석과 철광석뿐만 아니라 방대 한 양의 민물 저장고 때문이다.
- 북해의 자연은 현대 세계를 만드는 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저지대 국가들인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북유럽 평원의 편평한 해안선에 자리잡고 있는데, 13세기부터 네덜란드인은 바다와 습지에 새로운 농경지를 만들기 위해 물을 빼 내는 데 풍차를 사용했다. 사실상 이들은 빙기의 도거랜드 일부를 복구한 셈인데, 이곳은 해수면 상승으로 다시 물속으로 잠겼 던 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을 개간하기 위해 제방과 풍차를 건설하는 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공동체의 자원을 공유 함으로써 그 비용을 댈 수 있었다. 필요한 자금은 지역 교회나 의 회가 주민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방식으로 모았고, 새로 개간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얻은 이익을 투자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곧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거대한 계획에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에 잉여 자금을 투자하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신용 대출 시 장을 크게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자연 환경의 요구와 바 다를 관리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네덜란드는 자본주의자들의 땅이 되었다. 이 시스템은 자연히 17세기에 국제 통상으로 옮아갔다. 지역의 풍차 건설에 필요한 주식을 사던 행위에서 향료 제도로 가는 교역선에 자금을 대는 행위로 옮겨가는 데에는 아주 작은 발걸음만 내디디면 되었다. 어떤 계획에 드는 전체 비용을 작은 지분 들로 쪼개는 관행은 투자자들의 위험을 분산시켜 주었다. 여러 항해 계획에 돈을 조금씩 나누어 투자하면, 설령 배 한 척을 잃더 라도 과도한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돈을 꽁꽁 숨겨두는 대신에 투자를 하도록 자극했고, 그러자 대출금에 대한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모험적 사업에 필요한 자본 비용이 낮아졌다. 네덜란드인은 또한 선물 시장 개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크게 개선했다. 
- 지중해는 아프리카판이 계속 북쪽으로 밀고 올라옴에 따라 지금도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지중해 북쪽과 남쪽 해안선에서 나타나는 지질학적 차이는 이러한 판의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중해 남쪽 해안선은 비교적 반 반하고 천연 항구가 별로 없는데, 아프리카판이 아래쪽으로 기 울어지면서 유라시아판 밑으로 들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러한 충돌의 결과로 지중해 북쪽 해안선에는 산맥이 많다. 여기에 판의 침강과 지금이 해수면이 높은 간빙기라는 조건이 결합해 해안선이 점점 물밑으로 잠기는 결과를 낳았다. 수많은 섬과 갑, 만과 함께 천연 항구가 풍부한 지중해 북해안의 매 우 복잡한 구조는 이렇게 자연 지형이 물에 잠기면서 나타난 결 과이다. 이 기본적인 판의 활동은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해상 활동 문화들에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고, 청동기 시대부터 현재까 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홍해는 아프리카 지각 아래에서 거대한 마그마 기둥이 솟아오를 때 지표면을 갈라지게 한 Y자 열곡계의 세 가지 중 하나이다. 남쪽 가지인 동아프리카 지 구대는 우리가 종으로 진화하는 무대를 마련한 반면, 북서쪽의 더 깊은 균열은 아라비아 반도를 아프리카에서 떼어냈고, 길이 약 2000km의 이 균열에 물이 흘러들면서 홍해가 생겨났다. 
아라비아반도는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데, 북쪽의 좁은 힘줄 시나이 사막을 통해서만 붙어 있고, 홍해 가 넓어짐에 따라 아라비아 블록은 동쪽으로 돌면서 유라시아판 남쪽 가장자리에 충돌했다. 그 결과로 이란에서 자그로스산맥이 솟아올랐고, 지각이 침강하면서 쐐기 모양의 전면 분지가 생긴 이 산맥 기슭을 따라 인도양의 물이 흘러들어와 페르시아만이 생겼다. 홍해와 페르시아만에서 인도로 가는 최초의 교역로는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00년경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상인들이 여름에 남서풍 계절풍을 이용해 불 과 몇 주일 만에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곧장 인도양을 가로질 러 인도 서해안으로 갔다가 계절풍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는 계 울에 되돌아오는 방법을 발견했다. 지구의 대기 패턴에 나타나는 이 특징을 활용하면서 유라시아 전역에서 해상 교역이 급증했다. 하지만 7세기 말에 이슬람 세력이 아라비아와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를 정복하자, 유럽인 항해자 들에게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관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상인의 다우(큰 삼각돛을 단 아랍인의 배)와 대상이 아시아를 지나는 세 갈래의 큰 동서 교역로를 지배했다. 세 교역 로는 홍해와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을 건너는 두 갈래의 해상로 와 중앙아시아를 지나가는 실크 로드였다. 이것은 《천일야화》에 나오는 신드바드의 세계였는데, 신드바드는 바그다드에서 상품 을 싣고 바스라로 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페르시아만을 내려가 는 모험 항해를 일곱 차례나 한 상인이다.
- 이슬람 세력이 이 교역로들을 지배하기 이전에 인도는 스트라본과 프톨레마이오스같은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지만, 홍해의 통행로가 막힌 이후에는 그 위치에 대한 지식이 점차 희미해져 전설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하고 말았다. 8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유럽인이 다시 인도양을 항해하기까지는 이후 거의 1000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렇게 했을 때, 유럽인은 동남아시아에서 지중해 못지않게 활기 찬 교역망을 발견했다.
- 미국의 지질도를 살펴보면, 파란색 카운티들의 패턴이 8600 만~6600만 년 전의 백악기 후기에 퇴적된 지표면 암석의 띠를 따 라 구부러지면서 뻗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표면에 노출된 백 악기 암석들로 이루어진 비교적 좁은 이 띠는 우뚝 솟은 애팔래치아산맥을 포함해 북쪽 내륙의 더 오래된 암석들을 빙 돌아 뻗어가다가 더 최근에 생긴 퇴적암 밑으로 들어가면서 남쪽의 땅속으로 사라진다. 
- 오늘날보다 기후가 더 따뜻하고 해수면도 훨씬 높았던 백악 기 동안에 오늘날의 미국 땅 중 상당 부분은 물밑에 잠겨 있었다. 서부 내륙 해로라는 바다가 미국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대륙 동부를 따라 애팔래치아산맥 기슭을 빙 두르고 있었다. 애팔래치아산맥에서 침식된 물질이 강물에 실려 이 얕은 바다로 흘러 가 해저에 점토층으로 퇴적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해저 점토 층이 셰일층으로 변했다. 해수면이 다시 낮아지자 오늘날 우리 가 아는 것과 같은 미국의 윤곽이 드러났고, 지표면이 침식되자 해저에 퇴적된 이 퇴적층 띠가 연안 평야 위에 다시 드러났다. 이 셰일 기반암 띠에서 유래한 토양은 어두운 색이고 영양 물질이 많았는데, 그 물질이 원래 산맥에서 침식된 것이기 때문이다. '블랙 벨트 Black Belt 라는 용어는 원래는 앨라배마주와 미시시피주를 지나가며 뻗어 있는, 농업 생산성이 높은 독특한 색의 이 띠를 가리켰다. 백악기의 셰일에서 유래한 어두운 색의 이 비옥한 토양은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이상적이었는데, 특히 목화를 재배하기에 좋 았다. 산업 혁명이 진행되고 목화를 옷으로 만드는 과정이 가속 화되면서(목화 섬유를 씨에서 분리하고 실로 자은 뒤에 천으로 만드는 과정이 기계화됨으로써) 목화 수요가 크게 치솟자 목화는 중요한 환 금 작물이 되었다. 하지만 목화 재배는 매우 노동 집약적인 일이 었다. 탈곡기를 사용해 식물 줄기에서 낟알을 쉽게 훑어낼 수 있는 곡물과 달리 초기에 목화를 재배할 때에는 목화솜이 붙은 고투리를 일일이 사람의 민첩한 손가락으로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부터 남부 주들에서는 그 노동력을 노예들이 제공했다. 1830년경에 노예 제도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미시시피 강 주변 지역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고, 1860년경에는 앨라배마 주의 멕시코만 해안 지역에서 위쪽으로 그리고 조지아주까지 퍼 져갔다.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한 목화 농장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블랙 벨트'라는 용어는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되었는데, 디 프사우스 Deep South(미국 남부의 여러 주를 통틀어 이르는 말. 주로 남부의 특징이 두드러진 루이지애나주, 미시시피주, 앨라배마주, 조지아주의 네 주를 가리킨다)에서 많이 발견되는 인구 집단이 분포하는 지역을 가리켰다. 즉, 미시시피강 양안을 따라 그리고 땅 밑에 백악 기 암석층의 띠가 늘어선 곡선을 따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을 가리켰다.
- 1865년에 남부 연합이 남북 전쟁에서 패하고 남부 주들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이 지역의 인구 분포나 경제적 초 점이 갑작스럽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전의 노예들은 여전히 동 일한 목화 농장에서 일했는데, 다만 이제는 자유민 신분이 되어 소작농으로 일했다. 하지만 목화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에 이어 1920년대에 목화바구미가 창궐하면서 디프사우스의 경제적 부 는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 인이 남부주들의 농촌 지역에서 북동부와 중서부의 산업 도시들로 이주했는데, 특히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에 농촌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다수는 처음에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았던 지역들에 그대로 남았다 비옥한 토양의 역사적인 '블랙 벨트'에.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블랙 벨트'는 민권 운동의 심 장부가 되었다. 1955년 12월에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버스 를 타고 가던 로자 파크스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길 거부했다. 몽고메리는 7500만 년 전에 퇴적된 백악기 암석층이 구부러지며 뻗어 있는 띠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하나의 점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미국 내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구 밀도가 높은 카운티들은 거의 다 남동부 지역의 이 때를 따라 분포한다.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북부와 서부로 이주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이 인구 집단은 경제적 조수에 수백만 명이 다른 곳으로 휩 쓸려간 뒤에도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침전 잔존물과 같다. 경제적 생산성이 높았던 이 지역은 이후 산업이나 관광을 통 한 큰 발전이 일어나지 않아, 높은 실업률과 빈곤, 낮은 교육 수준, 부실한 보건 관리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 을 겪어왔다. 따라서 이 지역의 유권자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의 정책과 공약에 표를 몰아주는 경향을 보이면서 대통령 선거 지도에서 선명한 파란색 띠를 드러냈다. 따라서 오늘날의 정치 와 사회경제적 조건을 역사적 농업 시스템에 내재하는 그 뿌리 와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우리 발밑의 땅속에 숨어 있는 지질 학적 구조와 연결하는 인과론적 사슬이 분명히 존재한다. 먼 옛 날 바다에 쌓인 진흙층의 띠는 지금도 우리의 정치적 지도에 새겨진 채 나타나고 있다.
- 우리가 사용하는 금속의 종류는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급팽창했다. 오늘날의 마이크로칩에 들어가는 금속의 종류는 60여 가지나 되지만, 1990년대만 해도 20여 가지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인듐을 살펴보자. 1863년에 발견된 이 금속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항공기 엔진의 베어링을 코팅해 부식을 막는 데 쓰였다. 하지만 인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인듐-주석 산화물의 얇은 막을 스크린에 첨가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인데, 그 희귀한 성질(이 금속 산화물은 투명한 동시에 전도성이 있다)이 소중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듐은 평면 TV에서부터 랩톱 그리고 특히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터치스크린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품에 사 용된다. 이와 비슷하게 인듐보다 10여 년 뒤에 발견된 갈륨 역시 전자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는 널리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날 갈륨은 집적 회로, 태양 전지판, 블루 LED, 블루레이 디스크의 레이저 다이오드 등에 쓰인다. 이 기묘한 이름을 가진 금속들은 대부분 희토류 금속이나 백 금족 금속 중 한 집단에 속한다. 같은 집단에 속한 금속들은 화학적으로 서로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같은 광물 속에 함께 들어 있어 분리 과정에서 동시에 추출될 때가 많다. 이 20여 종의 금속은 현대 기술 시대를 정의하는 원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중 80% 이상은 1980년 이후에야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 다. 이 금속들이 현재의 기술 시대에서 핵심 요소라면, 현재의 탄 소 경제에서 탈피하게 될 미래에는 더욱 중요하게 쓰일 것이다. 이 금속들은 풍력 터빈 발전기와 전기 자동차 모터, 고성능 충전 지에 필요한 작지만 강력한 자석을 제공할 것이다.  17종의 희토류 금속은 주기율표에서 여섯째 줄에 있는 '란타 넘족 원소들과 화학적 성질이 이와 비슷한 원소인 스칸듐과 이 트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희토류라는 이름은 잘못 지어 진 이름인데, 이 원소들은 실제로는 지각의 암석 속에 그렇게 희귀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단, 지각 전체에 겨우 5kg밖에 들어있지 않은 방사성 원소 프로메튬을 제외한다면), 예컨대 란타넘(란탄)은 거의 구리와 니켈만큼 풍부하며, 납보다 세 배나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희토류 금속은 금보다 적어도 200배나 더 많이 존재 한다. 문제는 희토류 금속들이 전체적으로 지각에 얼마나 많이 존재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들을 추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희 토류 금속들은 화학적으로 서로 비슷해 같은 종류의 광물에 함께 섞여 산출되기 때문에 각각을 순수한 금속으로 분리하기가 아주 어렵다. 더 성가신 문제는 암석 속에 들어 있는 각 금속의 최대 농도이다. 많은 금속들은 특정 지질학적 과정을 통해 풍부한 광석으로 농축되어 호상 철광층이나 세로리코(볼리비아에 있는 남아메리카의 최대 은광)의 두꺼운 은 매장층 같은 형태로 산출된다. 하지만 희토류 금속은 화학적 성질 때문에 고품질 광석으로 농축되지 못하고, 대신에 암석들 사이에 낮은 농도로 희박하게 흩어져 있다. 따라서 희토류 금속을 채굴하는 것은 대체로 경제 성이 낮은데, 금속의 가치에 비해 추출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에서 희토류 금속을 경제성 있게 채 굴할 수 있는 지역은 제한되어 있다. 오늘날 희토류 금속은 인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적은 양이 채굴되고 있지만, 1990년 대 이후부터는 전 세계 생산량 중 대부분이 중국에서 채굴되고 있다.
- 말은 처음에 운송 목적이 아니라 고기를 얻을 목적으로 가축화되었다. 소는 눈 틈에서 풀이 보이지 않으면 풀을 뜯어먹 지 않고, 양의 연약한 코는 부드러운 눈 속에 파묻힌 풀만 뜯어먹 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종은 겨울철 초원에서는 발밑에 먹이가 있는데도 그냥 서서 굶어죽기 쉽다. 반면에 말은 추운 초원 지역 에 잘 적응해 차갑고 단단하게 뭉친 눈도 발굽으로 헤치고 그 밑 에 숨어 있는 겨울의 풀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물을 마시기 위 해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본능적으로 깬다. 사실, 인간이 말을 가 축화하기 시작한 계기는 유라시아에 추운 겨울을 가져온 기후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말의 가축화는 이르면 기원전 4800년 무렵에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의 스텝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을 통제하고 타는 법을 터득했는데, 이것은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3장에서 보았듯이, 양과 소 같은 초식 포유류 종을 가축화하면서 우리는 풀을 영양분이 많은 고기와 젖으로 바꾸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정착 생활을 하 는 농민에게는 가축을 먹여 살릴 풀밭이 얼마 없었고, 그래서 풀 을 뜯어먹는 동물을 기르다 보면 풀밭이 금방 고갈되기 쉬웠다. 하지만 광대한 초원에서 말을 타고 가축을 몰면, 방목지를 훨씬 먼 곳까지 넓힐 수 있고 훨씬 많은 가축을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33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소가 끄는 일체형 바퀴 수레가 도입되면서 스텝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것- 식량과 물, 천막 등과 함께 가축을 이끌고 광대한 초원을 장기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초식성 유제류 가축과 말을 이용한 빠른 기동성 그리고 이동식 주택 역할을 하는 소가 끄는 수레의 결합으로 스텝 지역은 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
- 대서양 삼각 무역은 값싼 목화와 설탕, 커피, 담배를 원하는 유럽인의 끝없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연결했다. 직물과 무기처럼 선진국에서 생산한 상품을 싣고 유럽에서 출발한 배들은 서아프리카 해안으 로 내려가 현지 추장들이 붙잡아온 노예와 유럽의 상품을 교환 했다. 그러고 나서 노예들을 신고 대서양을 건너가 식민지인 브라질과 카리브해와 북아메리카의 농장 소유주들에게 팔았다.* 선장들은 이 인간 화물을 팔아서 얻은 수입으로 농장에서 노예 의 노동력으로 생산한 산물을 구입했다. 노예를 실었던 선창을 식초와 잿물로 박박 문질러 씻은 뒤, 이 원자재를 가득 싣고 유럽 으로 가져가 판매함으로써 삼각 무역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배들의 정확한 항로와 각각의 기항지에서 교환하는 상품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고, 특정 해안선에서 상품을 교환하기 위해 짧게 들르는 곳들도 있었지만, 이것이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 지 유럽 본국과 식민지들 사이를 연결한 대서양 삼각 무역의 핵심 항로였다.  대서양 건너편으로 실어나르기 전에 아프리카 노예들은 공장이라 부르던 해안 요새에 가둬두었는데, 이러한 공장은 내륙에 서 잡아온 노예들을 운송하기에 가장 편리한 하구에 많이 설치 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아프리카 중동부 지역(적도와 남위 159 사이)과 황금 해안(아프리카 서북부, 기니만에 접한 해안)을 따라 베냉 만과 기니만의 비아프라만에서 배에 실렸다. 여기에도 대기 순 환 패턴과 해류의 역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장소들에서는 남동 무역풍을 타고 남아메리카로 건너가기가 쉬웠고, 대서양을 건넌 뒤에는 브라질 해류를 타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브라질 의 커피 농장으로 가거나 북동 무역풍과 북적도 해류를 타고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농장과 앨라배마주와 캐롤라이나주의 목화 농장, 버지니아주의 담배 농장으로 갈 수 있었다. 대서양 노예 무 역은 1807년에 금지되었지만, 1865년에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나면서 노예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밀수업자들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그때까지 10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이 강제로 붙잡혀 아메리카로 실려 갔는데, 많은 노예가 여행 도중에 처참한 조건 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거나 농장에서 혹사당해 일이 년 만에 죽 었다. 전체 노예 중 40%는 브라질로, 40%는 카리브해로, 5%는 훗날의 미국 지역으로, 15%는 에스파냐가 지배하던 아메리카 지역으로 실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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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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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1330년대에서 1350년대까지 이 중대한 역병으로 인구가 대폭 감소했다. 이는 1340년대 최초의 페스트 창궐 이후 유럽의 인구 감소에 비견될 정도였는데, 장기간에 걸쳐 이와 비슷한 사망률을 초래한 질병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제는 페스트의 야생 발 생지가 중국 근처라는 견해를 지지해 주는 유력한 근거가 있다. 페스트 박테리아의 DNA 흔적이 26,000~2,600년 전에 중국 내 또는 중국 인근에서 진화한 박테리아라는 주장이다. 중국이 몽골제국의 원 왕 조(1260~1368) 지배 아래 통합된 후에, 페스트가 이들 먼 지역으로부터 인구 밀집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쉬웠을 것이 다. 사실, 페스트가 14세기 이전 중국에서 발생했다면, 페스트 직전 에 곳곳에서 기록으로 보고되고 있는 홍수와 지진을 통해 감염된 설 치류를 통해 퍼져 나갔을 것이다. 이런 재앙의 결과, 들쥐 떼가 인가에 사는 설치류와 가까이 접촉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쥐벼룩이 페스 트 박테리아를 인간에게 옮겼을지도 모른다
- 격리란 단지 질병에 대한 방어의 목적으로 계속하는 것이 아니었 다. 16세기 후반 페스트에 시달린 나라들의 내부 문제는 다른 나라들이 내린 금지 조치에 의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외국 항구에서 역병 기미만 나타나도 그런 금지 조치를 충분히 단행할 수 있었고 어떤 경 우에는 경쟁국의 상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그런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병의 전파를 막는 것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노력을 드러내는 것이 과연 중요했을지는 의문이다. 역병에 대처하는 초보적인 규정만을 갖춘 나라들은 무역의 단절에 특히 취약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1600년대 초 역병 공포로 15년간 불황에 시달렸고 그 후 경제 회복이 지체되었다. 그러므로 새 국왕 제임스 1세가 내린 역병에 관한 칙령은 인근 나라 및 무역 상대국들에게 필요한 보호 조치를 취했다고 안심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와 같은 칙령은 또한 심각해지는 빈곤과 부랑민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빈민 그리고 악당이나 범법자outlaw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격리했다. 이 암울한 사람들은 초기에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표면적으로는 역병 퇴치를 겨냥한 법규의 목표물이 된 것이었다. 환자와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병원들이 세워졌다. 역병이 잠잠 해지면 이들 병원은 병약한 사람과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용 시설로 전용되었다. 마찬가지로 격리 조치도 사회적 여과 장치 로 작용해, 원치 않는 인물을 배제하는 반면, 중요한 인물은 그들이 감염 지역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허용했다.
- 페스트 이후 3세기 동안 유라시아, 북아프리카 및 동아프리카의 상당 지역이 역학적으로 얽혀 있었다. 중세 후기의 역병은 비록 간헐적이 기는 하지만 그 이전 수천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과정에서 가장 늦게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질병들 사이에 서로 약간 뒤섞이기도 했지만, 세계의 여타 지역은 이 역병에 이제야 노출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 해로 인해 구세계 질병 대부분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고 신세계 의 전염병 매독syphilis이 귀환한 항해자들과 함께 동쪽 유럽으로 퍼져 나가는, '교환'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그리고 아마도 페스트와 같은 구세계 질병들이 어느 정도로 유럽인의 남북 아메리카 정복에 도움을 주었는지, 그뿐만 아니라, 매독이 아메리카 토착 질병인지 아니면 유럽에 이미 존재했던 병원균의 돌 연변이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어느 정도는 여전히 공인된 사항이지만, 콜럼버스적 교환이 불평등했던 것은 분명하다. 매독은 초기에는 치명적이고 끔찍한 질병이었지만, 그 병이 유럽에 끼친 영 향은 콜럼버스와 접촉을 한 뒤의 남북 아메리카의 인구 감소와 거의 비교가 되지 않는다. 
- 북미 지역은 17세기 중반부터 사탕수수 농장의 끊임없는 성장으로 발병하기 쉬웠다. 노예선은 더 빈번하게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종종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노예와 이집트 모기Aedes aegypti의 유충을 운반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은 설탕(사탕수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어난 환경 변화였다. 사탕수수 재배용 길을 만들기 위해 숲을 개간함으로써 새로 들어온 곤충과 모기를 먹이로 삼았을 조류와 동물들의 서식지가 줄어들었다. 그 반면에, 물 항아리와 저장 탱크는 모기가 번식할 수 있는 여러 장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설탕 그 자체였다. 농장 근처에 설탕 찌꺼기가 남아 있 었고, 그 후 해안 도시에 건설된 제당 작업장 주변에 박테리아의 성 장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 모기 유충에 영양을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 1840~50년대에 대서양 양안의 여러 나라들은 황열병을 막기 위한 격리 조치를 완화했다. 1828년 지브롤터에 잠시 나타난 이후 유럽에  발병 사례는 없었다. 병이 자취를 감추자 안정감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마치 짐승이 열대 지방의 은신처로 돌아간 것 같았다. 프랑스는  1847년 황열병에 대한 격리를 일방적으로 없애는 데까지 이르렀으 며, 영국과 그 대서양 제국에서는 그러한 방역 조치를 완화하거나 폐지했다. 북아메리카 일부 항구는 황열병의 영향을 계속 받았지만, 예 전처럼 정기적으로 엄습하거나 심각하지는 않았고 북미 지역 나라들도 방역 장벽을 낮추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186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규제가 느슨하거나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는 종국을 고했다. 각국이 위생 조치를 재검토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제도를 새로운 조치로 대체하거나 보완할 것을 고려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황열병의 유병률 및 발병률의 급상승에 따른 것이었다. 1850년대부터 이 질병은 대서양 서쪽을 통해 급속히 퍼졌고, 무역을 통해 남미 및 카리브해의 발병지와 연결된 세계의 다른 지역을 위협했다. 1830년대에 증기선의 등장으로 대서양 횡단의 여행 기간이 약 30일에서 15일로 단축되었고, 1880년대는 스크루 프로펠 러와 같은 동력의 향상으로 다시 더 짧아졌다. 황열병은 그 특징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대서양을 횡단해 전염될 수 있었고 그 지역 전체에 걸쳐 상업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고 있었다.
- 1865년 전세계는 메카Mecca에 모인 순례자들 사이에 콜레라가 발생 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전염병으로 약 3만 명 메 카 순례자의 거의 3분의 1 이 죽었으며, 이는 곧 세계를 뒤덮을 역 병의 핵심을 이루었다. 광대한 영토에 인구가 널리 흩어져 있는 러시 아에서는 약 9만 명이 병에 걸려 죽었고, 북아메리카에서는 그 전염 병이 대부분 항구를 엄습해 사망자는 거의 5만 명에 가까웠다. 프로 이센과 전쟁에 휘말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병사자는 16만 5천 명을 넘었다.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많은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결핵과 같은 일반적인 전염병과 비교하면 치사율이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콜레라에 대한 공포감은 그 병이 실제로 초래할 통상적인 위험을 훨씬 더 초과한 것 이었다. 그것은 병사자 대부분이 겪게 되는 그 끔찍하면서도 수치스 러운 죽음 때문에 특히 서구인의 상상력을 강렬하게 장악했다. 콜레라는 이 불행한 사람들을 어떤 사전 경고도 없이 엄습했으며, 그리고 전신에 나타나는 첫 번째 증상 후에 그들은 곧바로 복부 경련을 일으키고 설사가 멈추지 않아 뱃속의 모든 것을 쏟아내야 했다. 신경 쇠약과 죽음이 그 뒤를 따랐다.
- 중국 윈난성은 여러 해에 걸쳐 페스트에 시달려 왔으나 1850년대에 는 더 자주 발생했고 때때로 광시廣西와 광둥廣東 등 인근 성으로 퍼져 나갔다. 민란이 페스트 창궐의 주된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다 른 성으로 퍼진 것은 수익이 높은 아편 무역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무역이 고지대 감염 원천지와 남부 및 동부의 상업 중심지를 연결시켰던 것이다. 이후 제3차 대역병Third Plague Pandemic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창궐 시기가 언제인지 의논이 분분하지만, 1890년대에 이 질병이 윈난성 동남부 주요 무역 도시 중의 하나인 멍쯔蒙自로부터 주강珠江 강변의 일부 촌락까지 전염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 이전 에는 질병이 윈난성을 벗어난 후에 없어졌지만 1890년 이후에는 계 속 번져 1894년에는 광둥성 전역을 엄습했다. 그 후 광둥성 수도이자 주요 상업 중심지인 광저우廣州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뜻한 날씨에 힘입어 선腺페스트가 창궐했기 때문에, 1894년 초 광둥성의 심한 더위가 질병 확산에 유리했을 것이다. 5월경 페스트는 이미 해안을 따라 영국과의 조약으로 할양된 홍콩 항에 이르렀다. 광저우에서 80마일도 못 미쳐 주강 하구에 있는 홍 콩은 감염에 매우 취약했다. 정크선(범선)이나 증기선을 이용해 강 상 류의 항구들과 교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으 려고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쿨리coolie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하층의 중 국인 인도인 노동자를 서양인이 부르던 호칭. 옮긴이 주)라고 불리는 수 많은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고향에 머물러 있으라는 권고appeal는 무시되었으며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도 않고 도 시로 들어왔다. 광저우 주민들은 페스트 발병 보도를 듣고도 특별히 놀라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중국인들이 그 질병을 전염성 있는 병으 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거주지와 사업장 주변의 공기를 정화하려고만 했다. 그 지역의 어떤 도시도 어떤 형태로든 격 리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개혁안이 발의되었음에도 위 생 상태는 열악했다. 홍콩의 영국 당국은 수많은 중국인 지주들이 이 런 개혁에 저항하는 것을 묵인해 왔다. 인구 과밀을 규제하면 그들이 임대료로 거두는 수입이 줄어들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페스트는 인구가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거리를 통해 급속하게 퍼졌다. 6월 중순까지 거의 2천 명의 목숨을 앗아 갔는데, 이때 의 페스트는 이전의 것과 아주 다른 종種임이 분명해졌다. 안일했던 도시는 곧바로 공황 상태로 변했다. 8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그 결과, 상업은 '심각한 영향을 받았으며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 1910~11년 만주를 휩쓴 전염병은 약 6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는 데 인도 아대륙 서부와 북부에서 수백만 명이 사망한 인도 전염병 이래 가장 치명적인 발병 사례였다.135 1890년대 중국 남부에서 창궐 한 전염병과 달리 만주에서는 강이나 연안 항로보다는 철도를 타고 퍼졌다. 그런 시나리오는 그보다 몇 년 전에 인도에서 페스트 확산을 목격한 영국의 세균학자 한킨E. H. Hankin이 예견했던 터였다. 아시아·아프리카의 대규모 철도 공사를 언급하면서 그는 이렇게 경고한다. “질병이 근절될 것이라는 약속은커녕, 점증하는 불안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 예언은 적중했다. 1890년대 이후 만주는 점차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한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 다. 러시아는 만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자신의 입지를 확장하기 위해 북만주를 가로지르는 동청철도東靑鐵道를 건설했는데, 이 철도 는 모스크바와 태평양 연안을 연결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최종 구간이었다. 동청철도와 남쪽 뤼순旅順의 러시아인 정착지까지 남부지선으로 연결되었으나 1904~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배한 후에 러시아 세력은 북쪽으로 밀려났고 뤼순과 연결되는 남부 지선은 일본이 장악해 반관영 남만주철도회사만철滿鐵에 귀속되었다. 1910년 흑사병이 만주를 엄습했을 때, 그것은 내륙 멀리 떨어진 페스트 발생 지역과 하얼빈이나 선양陽 같은 주요 산업도시를 연결하는 이 노선을 타고 퍼졌던 것이다.  페스트에 대한 최초의 보고는 1910년 10월 내몽고의 한 작은 철도 읍 만졸리에서 비롯되었다. 다음 달에는 러시아 지배하의 하얼빈시에 서 이 질병이 나타났는데, 시베리아 마멋(타르바간tarbagan, 중앙아시아산 다람쥐과의 하나)을 사냥하던 두 남자가 페스트 진단을 받았다. 타르바간은 페스트의 야생 감염원인 셈이었고 과거에도 사냥꾼들은 병에 걸렸었다. 그러나 새로운 철도 연결을 통해 이 질병이 평소의 범위를 훨씬 넘어 퍼질 수 있게 되었다. 하얼빈 철도 거점은 곧 페스트의 확산 지점이 되었다. 페스트는 만주 중부 및 남부 지역, 그리고 인접해 있는 허베이성과 산둥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감염 경로는 중국 새해를 맞아 귀성하는 노동자들의 경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이 경우 페스트는 바이러스성 폐렴 형태를 띠게 되어 승객이 빽빽 하게 들어찬 철도 객차와 인구가 과밀한 빈곤층 주거지에 쉽게 퍼져 나가기 때문에, 한정된 구역으로부터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 다. 따라서 그 당시 만주 유행병에서 특히 페스트 통제 조치는 쥐보다 사람에게 더 집중했다는 점에서 가장 최근 발병에 취해진 것과 상당히 달랐다. 첫 번째 전염병이 창궐할 때, 철도 차량을 격리용 객실로 바꿨고, 그다음에 전염병이 유행하는 동안 하얼빈에서 러시아 측은 중국 측과 협력해 격리와 감염된 주택 소각을 비롯해 '엄격한 조치'를 시행했다. 러시아 당국은 말레이시아 출신의 케임브리지대 졸업생 우롄더吳連德 박사를 채용해 페스트를 직접 치료하도록 했다. 남만주에서도 일본인들이 페스트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처럼 강력한 대응을 했음에도, 만주에서는 경제 교 란이 심각했다. 타르바간 모피의 거래는 1911년 러시아와 중국 두 나 라에서 모두 금지되었다. 물론 그 후에 특정 철도역에서 모피 제품의 검사와 소독 조치를 포함해 우롄더 박사가 작성한 엄격한 규정하에 다시 재개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철도 운행의 중지 에 따라 무역이 심각한 영향을 받았으며, 전염병 창궐기에 총 손실이 1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 2002년 11월, 중국 남부의 한 정부 관리가 폐렴에 걸렸는데, 이 병은 일반적인 치료 형태에 반응하지 않는 나쁜 사례였다. 2월 중순까지 광둥성에서 3백 건 이상의 급성호흡기증후군의 발병이 보고되었고 5명이 사망했다. 베이징에서 파견된 의료진이 발병 사례를 조사하고 광둥성 호흡기질환연구소장 중난산嶺南山 박사를 만났는데,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새로운 감염병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시점 에서, 그 발병은 공식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우려감이 증폭되 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약이라면 어느 것이나 손에 넣으려고 했기 때문에 약종상들이 몰려들었다. 중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그 병을 치료하는 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병이 비말 감염으로 퍼진다는 것을 발견했고, 환자들을 격리시킴으로써 감염을 막으려고 했다. 정부의 보건 당국자들은 이러한 발견을 무시했지만 3월 중순에 이르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 었다. 홍콩의 상업 및 금융 중심지에서 전염병이 발생했으며, 이때 부터는 알려진 바대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SARS)'은 더 이상 국내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 었다. 3월 15일 세계보건기구는 사스가 이미 전 세계적인 보건 위협' 이 되었음을 천명하면서 이미 캐나다,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발병이 확인되었음을 밝혔다. 3월 19일까지 미국, 에스파냐, 독일, 슬로베니 아, 영국 등지에서도 의심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질병의 이동 속도는 무섭게 빨라져서 세계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실감하게 했다. 필연적으로 '사스'는 곧 세계화 현상과 연결될 터였다. 즉, 질병이 상업과 관광 네트워크를 따라 퍼지면서 물질적 의미 와, 그리고 좀더 미묘한 방식으로, 전자 매체로 가능해진 정보의 신속한 송신에 의해 가상의 대유행병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2월의 투기, 소문, 고의적인 허위 사실이 그대로 퍼지면서 기업 신뢰를 떨어 뜨리고 상품과 통화 시장에 내재된 불안정을 증폭시켰다. 심지어 세계화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던 사람들조차 새로운 경제는 대체되는 것 이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창조물이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1990년 대 후반, 최종 위기는 동남아시아의 '호랑이' 경제(신흥공업국 경제)의 급속한 상승을 갑작스럽게 종식시켰지만, 그때 금융 붕괴라는 전염 병'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미래는 훨씬 더 불확실해졌다. 세계 경제는 금융 전염뿐만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도 점점 더 취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 조류독감과 돼지독감은 사스와 큰 차이가 있었지만, 두 질병에 대 한 반응은 새로운 세기 이 최초의 대유행병이 남긴 유산에 따라 조성 되었다. 사스는 세간의 이목을 끈 테러 공격과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 에 대한 우려 속에서 소련 블록의 몰락과 함께 밀려 온 낙관론이 수그 러들고 있던 시기에 발생했다. 서구에서 방어적인 사고방식이 나타났 고 많은 공중보건 관계자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따라 움직였다. 아 마도 자기 분야의 미래가 국가 및 세계의 안전 문제에 어떻게 관여하 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량 사망자 수를 예측하 는 것은 대유행병에 따른 대재앙에 대해서 만약이 아니라 언제 의 태도를 조장했으며, 지금까지 위험에 빠져 있었던 의학의 한 분야(공중보건) 쪽으로 좀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하는 데 이용되었다. 대중은 종종 이런 과장된 주장에 회의적이지만, 그러면서도 국경을 넘나드는 무 역과 인간의 이동을 줄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손에 휘둘렸다. 검역과 무역 금지는 최근에 확립된 세균 행정germ governance 의 관례에 따라 책임성 있는 조치로 제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 가운데 일부는 그 정당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규정이 이 일련의 다양한 관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SPS 협약은 각국이 감 염 위험성에 대한 적절한 과학적 평가에 따라 국제 표준에 근거한 조 치로 이룩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높은 보호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12 이 조항은 해외 경쟁을 제한하려는 국가들이 가혹하게 자주 악용할 수 있는 허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제 반 조치에 실린 믿음은 때로는 잘못된 것이었다. 일부 비평가들의 견 해로는, 차단 방역bio-security' 이라는 지배적인 개념은 잘못된 표현이 다. 이 말이 그릇된 안전의식을 낳았고, 대중이 그렇게 할 수 없는데도 독감과 같은 질병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물과 육류 생산물의 밀집사육(및 원거리 무역)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위장막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인수 공통 감염병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물 의 대규모 밀집사육이다. 퓨위원회rew Commission(퓨Pew 자선재단의 기금으로 설립된 공장식 밀집사육에 관한 조사위원회)는 존스홉킨스대학 블룸버그 공중보건대학원과 협동으로 작성한 공장식 사육에 관한 최근 보고서에서 “동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병원균의 위험성 제고, 비치료적 목적(즉 성장 촉진)을 위해 사용한 항생제와 항균제에 내성이 있는 미생물의 출현, 식품에 의한 질병, 근로자의 건강에 대한 우려, 그리고 지역사회에 확산되어 미치는 충격” 등을 경고했다. 아마도 이들 문제의 핵심은 공장식 사육 농가가 일부 논평자들이 부르는 이른바 '진화 가속 경로evolutionary fast-track'를 제공해 병원균을 더 치명적인 형태로 변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독감 분야의 저명한 전문가 로버트 웹스터Robert Webster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전에는 뒷마당의 가금류를 먹었다....이제 우리는 수백만 마리의 닭을 공 장식 사육 시설에 집어넣는다. 그 바로 옆에는 돼지 사육 공장이 있다. 이제 이 돼지독감 바이러스가 옆의 닭 사육 시설에 침투해 수십억 마 리의 돌연변이를 동시에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 위생적 책임이 있는 곳에는 항상 논란이 빚어지는 문제가 있다. 이 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가 어렵다. 국경을 넘어선 감염에 초점을 맞추면 정부와 생산자들은 다른 곳에 책임을 넘길 수 있는 반면, 특정 생산물의 배제라고 하는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강제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보호주의 충동은 종종 질병과 무역 자체의 본 질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을 이용하는데, 이는 국내 산업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화적 영향력을 들여오려는 성향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 에 이러한 두려움은 불편과 불안 등의 일반 감정과 뒤섞여 작용한다. 부유한 나라들은 더 값싼 제품과의 경쟁을 두려워하고 개개인은 전염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치명적인 대유행병이든, 광우병과 같은 은밀한 감염의 형태든 다 그렇다. 세계무역기구와 세계보건기구 같은 단체들은 이 불안정한 상황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시도했지만 감염 위험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많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든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시도로 과학'에 호소하 지만, 무역의 위생 규제에 순수하게 기술적인 해결책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고 제안하는 것은 기껏해야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 면 위험한 허구다. 무역의 자유를 유지하고 위생 보호를 제공하는 우 리의 가장 큰 희망은 어떤 이익 집단도, 어떤 국가나 무역 블록도 지 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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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교육컨설턴트이자 강사였던 정학경씨가 지은 책이다. 처음엔 단순히 입시와 관련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교육의 허상을 비판하며 '인재'보다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33명의 10대들은 모두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실제로 실천한 이야기다.

 

이 책은 단순하게 33명의 청소년의 혁신 스토리를 풀어놓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발명, 희망, 환경, 인권, 평화, 공존의 6가지 테마에 따른 사례를 소개하고, 각 영역별로 우리 청소년들이 실제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또한 청소년의 사회혁신을 위한 5가지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청소년들도 작은 것부터 하나씩 단계를 밟아나갈 수 있도록 조언한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먼저 키우라고 조언한다. 어쩌면 방시혁 대표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이 먼저일 수 있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는 순수함이 있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동네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분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작은 점포를 갖고, 맘 편히 장사를 하도록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적도 있었다. 하지만, 입시와 대학생활 그리고 취업, 결혼을 하게 되며, 어린시절 갖고 있었던 그런 순수한 생각들을 잊고 지낸 시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의 33명의 청소년 주인공들은 그런 순수한 생각을 즉시 실행에 옮겼고,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주변의 것들, 심지어 쓰레기 더미에서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속담에서처럼 삶이 시어빠진 레몬즙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처음 책을 접할 때는 청소년들이 뭔가 화제가 되고, 신문에 날 만한 일을 해냈다면 어느 정도 부유한 나라에 살거나, 부유한 집안 출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어렵고 가난한 나라의 청소년이거나, 선진국 청소년이라고 해도 평범하거나 오히려 개인적인 삶은 불우한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이러한 결핍이 세상을 바꾸는 행동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풍요롭고 풍족하게 해주려는 경향이 팽배해 있다. 마치 주변 친구들의 부모보다 부족하게 해주면 부모로서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모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남겨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입시, 취업을 강조하는 것이 유리할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아이들과 청소년이 주인공이다. 어쩌면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며, 세상을 바꾸어 나갈 마음가짐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 본 리뷰는 출판사 지원을 통해 작성되었음

 

- 세상에는 자기 안의 음악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올리버 웬델 홈스)
-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방시혁 대표)
- "여러분 저는 꿈은 없지만 불만은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의 저와 빅히트가 있기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분명하게 떠 오르는 (저의) 이미지는 바로 '불만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고 제가 멈출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겁니다. 알지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쓸 바에야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 관찰은 우리 삶에서 그저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무수한 기회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열쇠'다. (티나 실리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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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코어 히스토리

역사 2020. 12. 29. 12:12

- 1929년 당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 밑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은 10년 이상 이어진 경제 공황의 시발점이 된 주식 시장 붕괴를 보며 다가올 시련이 사회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판단했다. 후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멜런은 “대공황이 체제 내 썩은 부분을 도려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멜런은 이렇게 덧붙 였다. “높은 생활비가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도덕적으로 살아가겠죠. 가치관이 조정될 것이며 진취적인 사람들은 덜 진취적인 사람들의 난파선에서 보물을 찾아낼 것입니다.” 어쩌면 멜런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높은 생활 수준, 주류 밀매점, 재즈, 플래퍼(전통적인 여성다움을 거부하는 1920년대 신여성 ― 옮긴이), 찰스턴(재즈에 맞춰 추는 사교적인 춤 - 옮긴이), 영화의 출현 등으로 대표되던 '광란의 1920년대(Roaring Twenties)가 대공황으로 끝나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멜런이 천박한 사치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은 일반인의 오락에 불과했다. 돈이 점점 귀해지자 삶의 즐거움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대공황이 닥쳤을 때 미국인이 모두 파멸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인구가 일순간에 빈곤선 아래 놓이게 됐으며 이런 혹독한 시기는 10여 년이나 지속됐다. 당시 증언을 들어 보면 죄다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들뿐이라 뭐라도 좋은 일이 있었겠지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단언하건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혹시 모를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대공황 같은 경제 재난을 경험하겠다고 할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 20세기 초 독일 군사사가 한스 델브뤼크(Hans Delbrick)'는 현대식 군대를 특징짓는 온갖 요소(조직, 전략, 훈련, 병참, 지도력 등)가 문명수준이 낮을 때 자연스레 얻게 되는 강인함이라는 강점을 상쇄하기 위해 고 안됐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고대 게르만 민족이 잘 교육받은 로 마 군대에 연전연패당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지적했다. “문명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야만인은 호전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뿜어낸다는 강점이 있다. 마치 고삐 풀린 짐승의 본능 같은 근원적인 강인함을 내 뿜는 것이다. 문명은 인간을 개화해 더욱 감성적으로 만들며 그 과정 에서 신체적인 능력이나 용맹함 같은 군사적 자질을 약화한다. 이처럼 문명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약점을 상쇄하려면 반드시 인위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 상비군을 조직하는 주된 목적에는 문명화한 사람들을 규율로 단련하여 덜 문명화한 사람들을 저지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 포함된다.” 델브뤼크에 따르면 애초에 도시 국가에서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에 비해 훨씬 온순한 농부들을 훈련과 규율을 통해 군대로 조직화한 것 은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사납고 호전적 으로 변한 이들에 대적하기 위해서였다. “시민이나 소작농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로마인을 한 무리 데려다가 인원수가 같은 야만인 무리와 싸움을 붙이면 틀림없이 로마인 무리가 패배할 것이다. 사실 제대로 싸우기 전에 도망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상쇄하기 위해 로마군은 전술적으로 긴밀하게 단 결된 보병대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 현재는 군사용 무기와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상황이다. 급기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미국 캔자스의 방구석에 앉아 아프가니스탄의 적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이때 그 무인 비행기 조종사는 마치 도장에서 오랫동안 검술을 연마하며 미래의 결투를 대비해 온 19세기 일본 소년처럼 비디오 게임으로 조종 기술을 연마했을 터다. 사살한 표적의 시체를 가까이서 본 경험도 거의 없을 요즘 킬러 들은 전투 무기를 다루는 법을 훈련하는 대신 드론을 날려 보내 험준 한 산악 지대에 적응한 강인한 부족 전사들을 쏴 죽인다. 델브뤼크의 로마 군대 이야기에서 나타나듯 오늘날의 군대도 부족한 강인함을 상쇄하는 여러 방법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강인함이라는 특성은 여전히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특히 계속 늘어나는 전사자 수와 전쟁 비용을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강인함이 핵심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가가 동료 심사를 거쳐야 하는 논문에서 그 사실을 무슨 수로 확증할 수 있을까?
- 어마어마한 사망자가 나온 결과 사회는 극심하게 침체되었으며 사 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두운 생각만이 가득 찼다.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본 생존자들은 삶이 오래 지속 되리라는 확신을 잃었다. 이런 태도는 예술에도 반영되었다. 당시 많 은 예술 작품들은 트라우마에 빠진 사람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창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일단 해골 같은 것들로 죽음을 물리적으로 표현하 려는 풍조가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지 자 사람들은 자신을 지켜 줄 것 같은 성유물이나 기도에 의지했다. 하 지만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자 자신의 믿음 체계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다. 흑사병이 서방 세계를 강타하고 나서 한 세대 후에는 끔찍한 회의주의가 사회에 스며들었다. 당시 서방 세계 인구 의 절반에 달하는 7500만 명이 시체로 실려 나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 중 일부는 무모하게도 엉터리 치료법이나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아니면 오늘만을 산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난교, 강간, 강도, 살인 등을 저질렀다. 15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전체 인구 중 4분의 1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굉장한 수치였다. 한편 이 끔찍한 상황을 책임질 누군가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나타 다. 중세 유럽에서 그 희생양은 유대인이었다. 이 시기 유대인에게 닥 친 일들은 가히 끔찍하기가 홀로코스트에 버금갔다. 당시 유럽인은 마을 우물에 독을 풀어 사람들을 병들게 함으로써 기독교 세계를 장악하려 했다는 혐의로 유대인을 고발했다. 흑사병 피해자들도 질병을 퍼뜨리는 주범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마법이나 주술을 행한다고 의심받는 사람들 역시 비난의 표적이 됐다. 14세기 흑사병이 시작될 무렵 잉글랜드 인구는 약 600만 명이었다. 이는 많은 전문가들이 당시 잉글랜드에서 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인구수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수치다. 흑사병이 창궐한 후 단 몇 년 만에 잉글랜드 인구는 2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다시 예전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는 300년 이상이 필요했다.
- 인류는 이미 흑사병 부류의 병원균을 무기화하려는 의도로 활용한 적 이 있다. 흑사병에 관한 오래된 이론 중 몽골인이 유럽에 흑사병을 들여와 중심 도시를 공격하며 퍼뜨렸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몽골인은 감염된 시체를 도시 외벽 너머로 던졌다고 한다. 이런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벼룩에 페스트를 주입해 중국의 도시에 투하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때 이후로 세균전은 많은 진전을 보였다. 사실 공기로 전파되는 병원균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전 세계 무기고에 있는 다른 어 떤 무기를 활용하는 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하고 더욱 파괴적일 수 있다. 물론 핵무기나 화학 무기 역시 끔찍하지만 둘 다 치명성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살상력이 있는 병균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되며 퍼져 나가고 여러 세대에 걸쳐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전염병은 지금까지 자연이 인류에게 가한 그 어떤 위협보다 끔찍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새로운 질병들도 나타난다. 거의 매년 새로운 종류의 독감이 대지, 가금류, 조류로부터 인간에게 옮는다. 스페인 독감은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었다. 에이즈 역시 마찬가 지였다. 또 우리가 박멸한 질병이라도 자체적으로 변이가 일어나 거나 질병 억제를 위한 백신, 치료제, 항생제, 해독제의 효과가 떨어지 면서 그 위험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아무래도 팬데믹에 따르는 직접적인 결과인 대규모 사망 사태에 집 중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외에 다른 많은 사회 분야에 미치는 파 급 효과 역시 상당하다. 정부나 보건 당국이 미래에 질병이 초래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뿐 아니라 대중의 공포나 불안, 불합리한 행동 등 으로 촉발될 위협도 똑같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 최근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역사를 고려하면 당연하다.
- 천연두는 사상자를 낼 만한 무기로 사용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질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쉽게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데다 백신이 이미 존재하거나 없더라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탄저균이 훨씬 더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를 공황 상태에 빠뜨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해하게 만들 의도라면 천연두는 우리의 집단 기억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병균 가운데 하나다. 세균학 전문가 휴 페닝턴(Hugh Pennington)은 “천연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 불합리할 정도로 크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또 “물론 천연두가 사람을 죽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 만 천연두에 딸려 오는 공포심이 그것을 더 효과적인 무기로 만들어 준다. 천연두는 대량 살상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대량 공포를 위한 무기다.” 실제로 오늘날 천연두를 두려워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 질병이 다시 창궐했 을 때 대중이 빠질 공황 상태다. 예컨대 1947년 뉴욕에서 천연두 사태가 벌어졌을 때 홀로코스트 사 망자 숫자에 맞먹는 600만 명에 달하는 뉴요커가 단시간 내에 백신 접종을 받았다. 예전에 매년 규칙적으로 600만 명씩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병균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 우리는 어떤 기록이나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 머릿속에는 황금기'나 '흥망성쇠'같은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너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인류학자 조지프 테인터(Joseph Tainter)에 따 르면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반 면 공공 서비스는 제대로 보장하지 않아 심지어 일부 시민은 쳐들어 오는 야만인'을 구세주라며 환영했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론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관료 주의적인 데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는 지중해 국가들의 궁정 문화는 대다수 백성에게 하등 쓸모없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결국 어떤 식 으로든 궁정 문화를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기로 결심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체계가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작동 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중앙 집권화한 사회가 하층민의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에 훨씬 단순한 체계나 지방 자치 체제로 회귀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누구에게 질문하는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우리가 그들이 살았던 '호시절'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 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제 국을 (어떤 식으로든) 다시 원래대로 합치기 위해 애썼으며, 청동기 시대 가 막을 내리고 나서 여러 세기 후에 호메로스라는 눈먼 시인은 영웅이 활개 치던 호시절을 이야기로 되풀이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 어떤 면에서 아시리아 제국은 그 성공들 때문에 몰락했다고 할 수 있 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아시리아인은 중동에서 가장 포악하고 강력하다는 민족들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역사가는 아시리아 에 정복당한 대부분의 민족이 아시리아가 무대를 떠난 뒤에도 고분고 분하게 굴었다고 주장한다. 아시리아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했 을 때 페르시아인은 아시리아인만큼 잔혹해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 른다. 아시리아가 이미 위협이 될 만한 부족, 민족, 국가를 제압해 놓았 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역사가는 그로부터 300년 후 알렉산더 대 왕의 페르시아 원정이 모두의 예상보다 쉬워 보였던 이유 역시 해당 지역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아시리아와 전쟁을 벌인 결과 제국 체제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거대한 제국이 쇠락하거나 멸망한 이유를 추적하기란 언제나 어렵다. 아시리아의 경우에는 주로 내전과 지나친 군사적 확장이 몰락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왕들 가운데 바빌론을 파멸시킨 센나케리브 왕은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센나케리브는 기도를 하다가 뒤에서 두개골을 강타당해 죽었으며 그를 내리친 무기는 바빌로니아의 신을 대표하는 종교적 성상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센나케리브가 바빌론에 저지른 짓에 복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후계자 에사르하돈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위대한 도시 바빌론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 로마군은 언제부터 로마군이라기보다는 게르만군 같아졌을까? 애초에 이 사실이 중요하기는 했을까? 로마인에게는 이것이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 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부분 게르만 부족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로마가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마주했을 때 결국 서로마 제국을 뒤흔들어 놓을 군대로부터 나라를 수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세기 만에 게르만 전사들이 군 지휘부로 올라갈 정도로 로마 군대는 지나치게 게르만화되었다. 심지어 서로마와 동로마의 주요야전군을 모두 게르만계 장교가 통솔하는 시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군은 과거와 외양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전투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르만 부대들은 (갈리아 부대가 그랬듯이) 군단에 통합되어 로마군처럼 바뀌는 대신 점점 더 자신들의 전통대로 야만적인 무기와 갑옷, 지도자, 전투 기술을 사용했다. 이런 변화가 로마의 운명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정량화하기는 어렵다. 물론 최근 고고학자들은 과거 야만족 철의 장막 뒤에 가려 있 던 발전 과정을 어느 정도 밝혀냈다. 베일에 가려 있던 유럽 중부 및 부부 지역 안쪽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가 증가 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정치 시스템이 발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이 등장했다. 또 이런 변화들은 모두 급격한 인구 성장에 기여했 다. 이 중에서 로마인과의 접촉으로 발생한 변화는 무엇이고 게르만 족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변화는 무엇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 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 제국 말기 게르만 부족의 변화는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그들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역사가 피터 히더(Peter Heath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나타난 인구 급증, 경제 발전, 정치 개혁 덕분에 4세기의 게르마니아는 1세기와 비교했을 때 로마의 유럽 지배 계획에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관행 가운데 유치(乳齒)가 날 때 고통을 덜어 주거나 잠에 잘 들 수 있도록 아이에게 술이나 아편을 먹이는 행위가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의사가 아이에게 수면제를 처방하거 나 부모가 아기 잇몸에 위스키를 문지르는 행위가 꽤나 흔했다. 물론 이제 우리는 그런 행동이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수백 년 전에도 이런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유 년기의 역사》에는 흄(Hume)이라는 영국인 의사의 말이 인용되어 있 다. 1799년에 흄은 간호사들이 꽤나 강력한 아편제이자 결국에는 비 소만큼 치명적일 수 있는 고드프리즈 코디얼(Godfrey's cordial, 달콤한 시럽에 아편 팅크를 섞은 영유아용 진정제 ? 옮긴이)을 아이들 목에 부어 넣은 탓에 수천 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과거에는 자녀를 공개 처형장에 데려가 처형 장면을 보여 주며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르치는 것을 바람직한 양육법으로 여겼다. 때로는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처형 장면을 지켜보는 동안 일부러 자녀를 때리기도 했다. 물리적 고통에 처형 장면을 영원히 결부 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때린 이유는 단순히 교육 목적 외에 여러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예컨대 옛 영국인들은 재판에서 증거를 제시하 듯이 합법적인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아이들을 때려서 그날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일종의 공증인 혹은 알림장으로 활용하기 위 해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 셈이다. 현대의 부모들은 자녀가 TV와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가상의 폭력 행위에 노출되는 것, 그리고 지속적인 노출의 결과 실제 잔혹 행위에 도 둔감해지는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과거 여러 시대에는 TV 프로그램을 위해 꾸며 낸 폭력이 아니라 실재하는 폭력 때문에 아이들이 또 다른 폭력에 둔감해졌다. 아이들이 유년기부터 진짜 살인이나 고문행위를 눈앞에서 보고 자란 사회를 떠올려 보라.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이 그런 잔혹 행위에 직접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그처럼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가 있 다면 우리는 그 아이가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담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대나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아이가 그런 경험에서 동일한 영향을 받았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전 시대 사람들은 동물이 도륙당하고 사람이 죽임당하는 모습을 당연한 일처럼 보고 자랐기 때문에 현대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에 비해 오히려 폭력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행위가 시대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나 동일한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을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현재든 과거든 잔혹한 공개 처형 장면을 실시간으로 여러 차례 목격한 아이라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폭력에 영향을 받는 정도나 방식이 다를 것이다. 반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가 그런 경험을 한다면 아마 오래도록 상담이나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 과거 많은 사회에서는 오늘날과 달리 부모와 자식이 그리 많이 접 촉하지 않았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유대감을 키우는 경험마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사회와 문 화에서 수천 년 동안 유모 제도가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유모(다.른 여성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성) 이야기는 성서 시대는 물론이고 고대바빌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존재한다. 고대 로마 시대 유모들은 콜룸나 락타리아(Columna Lactaria, 직역하면 '젖 먹는 기둥)라는 장소에 모여 일감을 찾았다. 특히 많은 사회에서 영아에게 동물의 젖을 먹이면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산모가 젖을 내놓지 못하거나 출산 도중에 사망한 경우에는 유모를 통해 필요를 채웠다. 하지만 유모에게 자녀를 맡길 경우 자녀는 대개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때로는 그 기간이 수년에 달했다. 이전 시대에서는 별 거리낌 없이 다른 이에게 자녀를 양도하는 충격적인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18~19세기의 여러 자료를 보다 보면 자녀를 인격체가 아니라 강아지 정도로 취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 맥락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폭탄 실험은 아무 맥락 없이 이루 어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가 어땠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때를 전쟁의 가혹한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난 최악의 해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1945년에는 사실상 지도상에서 도시가 증발해 버리는 일이 일주일에 여러 차례’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증 명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평화기에 아무리 많은 국가가 수많은 무기 조약에 서명하고 서로에게 수많은 제약을 부과했더라도 전쟁 중에는 하나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여러 사회가 각자의 생존을 걸고 총력전 을 벌이는 와중에 윤리적 신성불가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도시 폭격에 세계가 경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에 1939년에는 도덕적인 분노라는 것이 전쟁 전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별난 잔재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폭탄이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폭격기 수백 대를 보내 감행해야 했던 공습을 이제 단 한 대의 폭탄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행위의 도덕성을 놓고 토론할 때 이 사실은 자주 묵과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이 사실을 분명 중요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원래 연합국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재래식 폭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새로운 초강력 폭탄을 독일에 투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거의 모든 대도시와 중소 도시가 이미 찢겨 나간 상태였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기 두 달 전인 1945년 5월, 결국 나치 독일은 항복했다. 연합국은 아직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945년에 일본은 독일이 당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여러 도시가 폭격을 당해 불타고 있었다. 만약 원자 폭 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1945년 3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다섯 달 전에 미군은 300대가 넘는 중폭격기를 동원해 도쿄에 소이탄 폭격을 단행했다. 결 과적으로 1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 이상이 다쳤으며 27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이 불탔다. 8월에 원자 폭탄이 투하될 무렵 도쿄는 이미 여러 차례의 소이탄 폭격으로 80~95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이 잿더미가 될 정도로 심각하게 황폐한 상태였기 때문에 표적 우선 순위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다른 일본 도시 60여 군데 역시 상태가 비슷했다.
-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 폭탄 두개 를 투하했던 일을 이야기할 때 '도덕성'의 맥락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 당시 의사 결정권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혹은 바라는) 만큼 선택권이 폭넓 지 않았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아마도 당시 정치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일 터다. 역사가 게리 윌스(Garry Wills)는 저서 《폭탄의 힘》(Bomb Power)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전쟁을 끝낼 만한 무 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원 자 폭탄이 개발된 후에 사망한 모든 미군 가족은 분노했을 것이다. 대 중, 언론, 의회가 대통령과 고문들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트루먼 대 통령을 탄핵하고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을 군사 법원에 회부하라는 요 청이 빗발쳤을 것이다. 정부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과 막대한 지력과 인력을 다른 군사 프로젝트 대신 원자 폭탄 개발에 투입하고도 아무 런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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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탕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생된 제품이 지금까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간식으로 즐겨 먹는 캐러멜이다. 캐러멜은 아랍어로 '달콤한 소금으로 만든 공' 이라는 뜻의 '쿠라트 알 밀' 에서 유래했다. 아랍인 들은 설탕과 캐러멜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수출했는데,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었는지 “설탕은 아랍인들이 생산하는 금과 같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반면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인들은 설탕을 맛보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서기 1097년부터 시작한 십자군전쟁 때, 중동으로 쳐들어간 십 자군이 설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꿀벌을 이용해 힘들게 얻어낸 꿀이 아니면 단맛을 맛볼 수 없던 유럽인들은 설탕의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1099년 2월, 십자군은 동맹을 제안한 이슬람 세력 트리폴리공국에 사절단을 보냈다가, 그곳에서 설탕을 만드는 작물인 사탕수수 농장을 보았다. 이에 설탕을 얻을 수 있다는 욕심에 트리폴리공국의 동맹 제안을 무시한 채 2월 14일 트리폴리공국으로 쳐들어갔을 정도다. 당시 중동에서는 정치적 내분이 극심해 각 지역마다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서로 다투고 있었던 터라, 개중에는 트리폴리공국처럼 십자군과 손잡으려는 집단도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은 설탕을 얻는 재료를 보자마자 동맹 제안을 뿌리치고 다짜고짜 전쟁을 걸어왔을 만큼 설탕을 중요시했다. 십자군의 공격은 3월 13일에 격퇴되었으나 그로부터 9년 후인 1108년 십자군은 다시 트리폴리공국을 침공했다. 트리폴리공국의 수도인 현재 레바논의 도시 트리폴리는 1년 동안 십자군에 포위당했고, 통치자와 주민들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1109년 7월 12일 십자군에 함락 당하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트리폴리를 얻기 위해 전쟁을 벌일 만큼 십자군은 설탕에 집착했다.
- 1815년의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몰락했으나 그가 추진한 사탕무 재배 산업은 계속 확충되었다. 사탕무는 사탕수수보다 훨씬 빨리 자라 설탕을 더 많이 추출할 수 있었고, 설탕 가격도 사탕수수에 서 추출하는 것보다 훨씬 낮았다. 게다가 사탕수수처럼 덥고 습한 기 후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유럽처럼 비교적 서늘한 곳에서도 잘 자 랐기 때문에 설탕을 얻는 데 효율적이었다. 사탕무를 포함해 무 종류의 식물들은 빨리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중국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도 병사들에게 무를 길러 먹게 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유럽에서 사탕무를 이용한 설탕 정제산업이 자리잡자, 사탕 수수 재배에 경제의 대부분을 의지해온 카리브해 지역은 큰 타격을 받 았다. 특히 가뜩이나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배상금 요구를 받고 시달리던 아이티는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사탕무 재배가 확충되면서 더 이상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흑인 노예 를 부릴 필요가 없어지자 유럽 국가들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시작했다. 겉으로야 인권을 내세웠지만, 정작 인권을 외친 프랑스혁명 때도 흑인 노예를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을 떠올려본다면, 유럽 국가들이 노예 제도를 폐지한 진짜 이유는 사탕무 재배로 인해 노예사업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흑인 노예들은 사탕수수 때문에 고통 받다가 사탕무로 자유를 얻은 셈이었다.
- 후추의 판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이슬람 세계는 그 부를 질투한 유럽 사람들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 국이 무너지고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은 유럽 사람들은 예전보다 후추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로마처럼 강력한 지배와 통제력을 가진 국가체제가 무너지고 그보다 훨씬 약한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아옹다옹하는 상황이라서, 유럽인들 스스로가 후추의 원산 지인 인도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직접 후추를 사러 가지 못하고, 대신 아랍 상인들이 가져온 후추를 살 수밖에 없었다. 아랍 상인들이 바보나 자선사업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이 먼 나라에서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어렵게 가져온 후추를 유럽 사람들에게 싼값에 팔 리가 없었다. 비싼 값에 후추를 사들이던 유럽인들은 내심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후추를 보다 싼값에 더 많이 얻으려는 욕망을 품었는데, 그런 목적으로 벌어진 그들의 대외 팽창이 십자군전 쟁과 대항해시대였다.
- 오늘날 반중 정서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조공은 옛날 중국에 바친 굴욕적인 상납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중국은 우리나라에 가급적 조공을 하러 오 지 말라고 했던 데 반해 우리나라는 오히려 조공을 자주 하려고 애썼다. 이는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비굴하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조공이 그만큼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본다면, 1019년 고려가 귀주대첩에서 요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두 나라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고려는 1년에 여섯 번 이나 요나라에 조공하러 사신들을 보냈다. 요나라를 이기고 나서도 조공하러 사신들을 보낸 고려가 비굴한 겁쟁이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상 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정황을 기록한 《송사》나 《요사》 같은 중국의 역사서를 보면, 고 려 사신들이 자주 요나라에 오자 요나라에서는 그들을 접대하고 보답으로 선물을 장만하느라 요나라 백성들의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심지어 요나라에 간 고려 사신들이 요나라 관리들의 접대가 형편없다면서 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장면까지 기록되어 있다. 만약 고려가 요나라에 비굴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사정은 송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는 송나라에도 조공을 했는데, 고려 사신이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에 가서 황제를 만나면, 그 들이 가져온 조공품보다 황제로부터 10배나 더 많은 양의 선물을 받았 다. 이를 동양사에서는 회사(賜)라고 부르는데, 조공을 받는 나라가 조공을 보낸 나라에 그만큼 더 많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보통 회사는 조공 물품보다 3배 이상 많은 양을 주었는데, 송나라로서는 고려가 각별히 중요한 나라여서 정성 들여 대접했다. 이렇게 고려 사신이 올 때마다 송나라에서 막대한 선물을 계속 주자 그만큼 송 나라 경제에 부담이 되었고, 송나라의 학자 소동파는 “고려 사신들이 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이 안 되고, 그들을 접대하느라 나라 경제에 부담이 늘어나 송나라 백성들의 고생이 크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송나라 이후에 들어선 명나라와 고려 이후에 들어선 조선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역시 조선의 조공품이 오면 그보다 더 많은 양의 회사를 주었는데, 한 예로 1404년 조선이 명나라에 말 3천 마리를 조공하자 명나라는 1만5천 필의 비단으로 회사했다. 이렇게 조선에 명나라 비단이 많이 풀리자 조선의 하인이나 노비들도 비단 옷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조공을 하면 회사만 얻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조공 사절단에는 무역 상인들도 끼어들기 마련이다. 이들이 중국에 가면 한반도 의 특산품인 인삼이나 홍삼 등을 중국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중국의 비단이나 은 등을 샀고, 이를 조선에 돌아와 팔아 더 많은 차익을 거두었 다. 조공은 일종의 무역이기도 했다. 조공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착취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가 중국을 상대로 큰 이득을 보는 무역이었다고 봐야 적합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에 “왜 유럽처럼 해외 식민지를 개척 하러 군대를 보내지 않았느냐? 이는 중국인과 한국인이 유럽인보다 게 으르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난하는 의견은 현실을 살피지 못한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 우리나라에 밀이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대략 고려시대, 중국 북송 왕조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반도는 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여서,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밀가루의 양은 매우 적었다. 1950년에 벌어진 한국전쟁 무렵, 미국에서 무상으로 밀가루를 대규모로 원조해주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밀가루는 거 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오는 매우 비싼 식재료였고, 밀가루로 만드 는 음식들 역시 부유한 권세가 아니면 생일이나 잔칫날에 맛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상에서 즐겨 먹는 수제비도 조선 왕실에서나 먹은 고급 음식이었다.
- 고려 말의 속요 <쌍화점>에 “샹화점에 샹화를 사러 갔다” 라는 말이 언급되는데, 샹화는 만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를 보아 고려 말에 이미 한반도에서 만두가 팔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서 먹었음을 알 수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밀가루 음식으로 국수가 자주 등장했다. 단, 국수 역시 생일이나 잔칫날 같은 특별한 기념일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요리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국수를 만드는 밀가루 대부분이 중국에서 수입한 비싼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지방관 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에서 국수를 빼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국 수를 장만하기 위해 백성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종실록》 1539년 10월 8일)
- 18세기 프랑스에서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19세기 미국에서도 커피는 수많은 이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는 음료였다. 다만 미국에서 커피를 주로 마시는 사람들은 지식인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커피를 즐겨 마셨던 이유는 노동자를 부리는 기업주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커피가 미국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노동자들은 점심시간에 맥주나 와인을 식사에 곁들여 마셨다. 이런 술 문화는 미국뿐 아니라 미국의 뿌리인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맥주나 와인은 엄연히 술이기 때문에 아무리 도수가 낮아도 마시면 취하게 마련이다. 점심시간에 맥주와 와인을 마신 노동자들 중 많은 수가 취해 제대로 일하지 못한 탓에 작업 능률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커피가 들어오면서 노동자들은 술에 취하지 않고도 멀쩡한 정신으로 작업할 수 있었고, 덕분에 예전보다 일의 능률이 올라갔다. 기업주 입장에서는 고용한 노동자들이 술보다 커피를 더 마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에 퍼진 금주운동으로 인한 반사이익이었다. 미국은 영국에서 달아난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였고, 그 때문에 다른 유 럽 국가들보다 엄격한 종교적인 금욕주의가 사회에 더 강하게 퍼져 있 었다. 이런 까닭에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술을 마시지 말자는 금주운동 이 일어났는데, 금주운동을 벌이던 단체들은 “술에 찌들어 알코올중독 자가 되느니 차라리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셔라!” 라는 구호를 외치며 커피 마시기를 권유했다. 여담이지만, 미국의 금주운동으로 인해 탄생한 음료수가 코카콜라였다. 미국 남부 도시 애틀랜타의 약사 존 펨버턴이 발명한 코카콜라는 코카나무 열매를 빻은 가루와 코카인을 레드 와인에 때마침 애틀랜타에서 금주운동이 한창 진행됨에 따라 와인을 포함한 모든 술을 팔 수 없도록 법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존 펨버턴은 고민 끝에 레드 와인을 빼고 대신 탄산수를 넣은 무알코올 탄산음료로 개량해 1886년 5월 출시했다. 비록 알코올은 빠졌으나 마약의 일종인 코카인 이 들어간 코카콜라는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다가 20세기 초부터 코카인의 해로움이 알려지면서 코카인이 들어간 음료가 금지되었고, 1903년 코카인이 빠지고 대신 카페인이 들어 간 코카콜라가 나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커피나 코카콜라 모두 카페인이 들어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음료 수 모두 술을 대신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공통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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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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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고대 지중해에 식민지가 건설된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는 고대 경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사람들이 먼 곳에서 수입된 곡물에 의존했다는 점을 들었는데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카르타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와 로마는 곡물이 부족해 다른 지역을 침략했다. 그중에서도 고대 로마는 많은 노예를 부렸는데, 특히 속주의 대농장(라티푼디움)에서 노예의 노동력을 많이 활용했다. 요컨대 지중해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 등의 저렴한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노예가 없었다면 그들의 경제는 제대로 기능하 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중해 경제 성장의 큰 한계였다. 또 그리스가 정치적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지 않고 상인의 상업 네트워크를 이용했던 반면, 카르타고와 로마는 제국을 형성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로마에게 카르타고는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광대한 영토에서 생산된 물자를 자국 선박으로 수입하는 것이 로마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 원래 중국은 해상 무역을 중시한 나라였다. 마르코 폴로도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저장성의 항구 도시인 항저우가 매우 번성했다고 말했다. 항저우는 원래 견직물 생산으로 유명했던 도시지만 원나라 때 상업 도시로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무슬림 상인들은 당나라 초기부터 푸젠성의 취안저우에서 무역활동을 했다.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무슬림 상인이 들어와 있었으니, 당의 대표적 항구인 취안저우에 무슬림 상인이 있었던 것은 당 연한 일이다. 취안저우는 원나라 때 남방 해양 무역으로 한층 더 번 성했다. 일반적으로 원나라, 즉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 부에 위치한 육상 제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나라는 해상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대략 요약하자면 중국의 해상 무역은 당나라 때부터 왕성해져 송나라 때 크게 발전했다. 상업을 중시한 원나라도 무역을 장려했다. 이런 점에서 원나라 역시 이전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해상을 중심으로 한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인도의 면직물이 홍해로, 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로 보내져서 아프리카의 세네갈과 감비아까지 도달했다. 아마도 이 면직물은 도중에 카이로, 누비아(이집트 남부와 수단에 위치한 지역), 아비시니아(현 에티오피아)의 상품 집산지를 경유한 다음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는 대상에 합류해 육상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원나라 때 인도와 중국 사이의 해상 무역이 매우 활발했 고 해상, 육상을 망라한 네트워크가 아프리카까지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 무슬림 상인이 있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 온 상인들도 동시에 활약하고 있었다.
- 조공 무역은 당나라 때 시작되었다. 중국 주변 나라들은 금, 은, 노예, 축산 원료를 중국에 보냈고 중국은 도자기, 견직물, 철기, 동기, 칠기, 서적 등을 하사했다. 이후 송나라 때에는 조공 무역 대신 민간 무역이 발달하기도 했다. 요, 금, 원나라에서도 민간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명의 초대 황제 홍무제(재위 1368~1398년)는 대외적으로 해금 정책을 채택해 해외 무역을 중단시키고 대형선 건조를 금지했다. 3대 영락제 때 해외 무역을 다시 활발하게 전개하는가 싶더니 앞에서 말했다시피 영락제 사후 다시 해금 정책이 실시되었다. 한편 조공 무역은 계속되었다. 청나라 때도 이런 추세가 이어졌지만 스페인과도 활발히 교류하는 등 조공 무역의 비중은 명나라만큼 크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생사, 도자기, 차 등을 수출했고 스페인에서는 은을 수출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1757년부터는 광저우에서만 외국 무역을 할 수 있게되었다.
- 이탈리아와 그 주변국들은 정말로 선진적이었을까?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은행업이 발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 다. 1406년 제노바에 창설된 산조르조 은행이 세계 최초의 은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은행에서는 환전과 대출, 투자 기능이 크게 발달했을 뿐 오늘날 은행의 금융 중개 기능(개인에게서 받은 돈을 기업에 빌려주는 기능)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이 기능은 19세기가 되 어서야 유럽에서 발달했다. 18세기에 들어서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스템이 등장했다.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이 국채를 발행하고 의회가 그 변제를 보증하는, 소위 '펀딩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다. 또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에 앞서서 해상 보험업을 도입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험에 반드시 필요한 확률론이 도입되지 않았으므로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떤 사고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일어날지 모른다면 진짜 보험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보험을 들었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실적인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중세의 회사란 일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되었다가 사업이 종 료되면 해산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확률론이 당시 이탈리아에 존재했다 해도, 보험회사의 사업이 영속할 것을 전제했다면 매우 유 효했겠지만 영속화를 전제하지 않은 사업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에서 발달했던 보험업은 그 상태 그대로는 결코 근대적인 보험업이 될 수 없었다. 이탈리아 경제가 몰락한지 상당히 오래된 19세기에야 드디어 확률론을 이용할 만한 수학적 지식이 보험업계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의 은행업, 보험업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중근세 이탈리아의 경제 시스템은 근대적 시스템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탈리아에는 생태적 한계가 있었다. 조선업 때문에 삼림을 개간한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중해 연안에서는 한 번 벌채한 삼림이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그 결과 조선업과 해운업이 쇠퇴해 북유럽 같은 대규모 상선단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16세기 내내 이탈리아에서는 대규모 벌채가 이어졌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목재뿐만 아니라 선체까지 외국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 성된 배를 외국에서 구입하는 것을 정부가 법률로 금했지만 결국은 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공급에 있어서의 한계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영국은 북해 연안의 덴마크(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에 석탄을 수출했다. 영국이 북해 경제권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기능한 것이다. 또 삼림 자원이 풍부한 발트해 지방에서도 대량의 목탄이 생산되었다. 반면 삼림 자원이 고갈된 지중해 경제권에서는 목탄을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이탈리아는 지금도 석탄을 전혀 생산하지 못한다.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천연 자원의 고갈이라는 점에서 큰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에서는 오랫동안 노예가 노를 젓는 갤리선을 활용했다. 노잡이로는 죄수나 포로, 노예, 간혹 자유민까지도 동원 되었다. 지중해의 상인이 이처럼 노동 집약적인 선박을 활용한 것은 그들이 향신료 같은 고가의 상품을 거래했고 임금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해운업은 기본적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유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의 번영은 저렴한 노동력이 사라지면 끝날 운명에 처해 있었다.
-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는 다양한 종파의 상인 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했던 집단이 무슬림상인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 네덜란드 상인, 영국 상인이 차례차례 세력을 키우면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물류가 유럽 상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인이 동남아시아산 향신료를, 18세기에는 영국인이 인도산 면을 운송하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의 차도 유럽 선박으로 운송되었다. 동남아시아 내 무역에서도 유럽 선박의 비중이 높아졌다. 아시아의 물류 시스템이 완전히 유럽인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서로 적대한 끝에 유럽인이 이겼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가 아니었다.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경험했으므로 아시아보다 항해 기술이 뛰어났을 것이다. 아시아인은 희망봉을 돌아 유럽까지 항해한 적이 없었지만 유럽인은 나침반을 써서 원거리를 항해했다. 게다가 중국이 해금 정책을 취함으로써 경쟁 상대를 없앤 것도 중국의 항해 기술 발전을 늦추는 데 한몫했다. 어쨌든 유럽이 우월한 군사 기술로 전쟁에 이겨 물류 시스템을 변혁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 권력과 관계없는 상인들 스스로가 물류 시스템을 변혁한 것이다.
-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사상 두 번째로 패권 국가가 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세계에 팍스 브리태니카 (직역하면 영국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은 영국이 가져온 평화가 아니라 영국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재위 1837~1901년)에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진 대제국이 된 것을 뜻할 때가 많다. 이때 영국은 [지도 13]에서처럼 대단히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이 상징적 인 말이야말로 팍스 브리태니카의 실상을 드러낸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함대를 갖추어 팍스 브리태니카를 유지했다. 이 함대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세계 평화는 군사력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세력 범위 안에는 영국의 식민지 및 자치령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식민지가 아니면서 경제적으로 거의 식민지가 된 곳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가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중남미)였다. 그들은 영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는 식민지, 즉 '공식 제국이 아니라 식민지가 아니면서도 실질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비공식 제국으로 불린다. 다른 서양 제국들도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식민지를 많이 건설했다. 거기에는 일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비공식 제국은 영국에게만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국이 세계 물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에 영국은 전 세계에 함대뿐만 아니라 상선 단을 파견해 영국 '제국을 유지했다. 영국은 분명 세계 최대의 해군 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제국을 군사적으 로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러나 영국 제국이 군사력으로 만 유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계화가 진행된 19세기에 영국이 세 계 최대의 상선단으로 전 세계의 물품을 운송했다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력이 강해진 것은 세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영국의 증기선이 많은 상품과 사람을 운송하게 된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영국의 증기선이 없었다면 세계경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영국은 자국의 선박을 이용함으로써 외국인, 그중에서도 네덜란드인에게 지불하는 운송료를 줄여 국제 수지를 크게 개선했다. 다시말해 근세의 잉글랜드, 더 넓게 보아 영국은 보호 무역이 아닌 '보호 해운업 정책을 쓴 것이다. 영국이 이 정책을 채택한 것은 타국과의 물류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는 톤수로 환산했을 때 영국 선박이 세계 선박의 약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영국 선박들이 전 세계의 상품을 운반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 말에 영국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유럽 최대의 해운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한다. 요컨대 제국주의 시대였던 19세기에 영국이 세계의 상품을 운송하는 국가, 즉 세계 물류를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뜻이다.
- 프로토 공업화 이론의 핵심은 '인구 증가다. 앞서 말했다시피 근세 유럽에서는 인구 증가로 말미암은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 다. 그러나 농촌이 농업 지대와 공업 지대로 나뉨으로써 농업 생산 성이 높아져 식량 부족이 해결된다는 멘델스의 주장과는 달리, 발 트해 지방에서 수입된 곡물 덕분에 식량 부족이 해소되었다. 이것이 멘델스의 오류였다. 그렇다면 유럽의 아마, 마, 리넨의 생산량이 늘 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16세기 초 서유럽 국가들은 아마도 가까 운 지역에서 해운 자재를 조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먼 곳까지 가기 위해선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발트해 지방의 해운 자재를 점점 더 많이 수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발트해 지역의 무역 흑자는 곧 서유럽 측의 적자로 이어졌다. 폴란드도 곡물을 수출함으로써 무역 흑자를 냈고 발트해 연안의 다른 지역들도 해운 자재를 수출해 무역흑자를 냈다. 이렇게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났다. 앞서 말했다시피 프로토 공업화의 주 생산품은 아마, 마, 리넨 등 이었다. 이것들은 선박의 로프나 돛 등에 쓰이는 해운 자재였으며, 그중 리넨은 노예가 입는 옷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프로토 공업화와 유럽의 대외 진출이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농촌이 공업 지대와 농업 지대로 나뉜 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 공업 지대란 유럽의 대외 진출에 필요한 해운 자재를 공급하는 지역이었다고 봐야 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클라우스 웨버에 따르면, 현재의 폴란드와 체코에 해당하는 슐레지엔에서 생산된 섬유 제품인 리넨은 주로 의류의 재료로 쓰였다. 그것은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거쳐 서아프리카로 갔고, 아프리카 노예들의 옷이 되었다. 인도산 면직물은 내구성이 떨어 졌던 반면 리넨은 착용감은 비록 좋지 않았지만 내구성이 뛰어났다. 그래서 노예가 리넨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노예들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리넨이 아닌 면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발트해 지방의 아마, 마, 리넨이 없었다면 서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열 수도 없었고 18세기에 대서양 무역을 확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 프로토 공업화가 공업화의 첫 번째 국면이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두번째 국면이라는 멘델스의 견해는 이미 오류로 판명되었다고 앞서 말했다. 즉 프로토 공업화는 영국의 산업혁명(공업화)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했다시피 프로토 공업화와 이후의 공업화(산업혁명)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은 없지만 간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프로토 공업화가 없었다면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 지 않았을 것이고 대서양 경제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영국의 산업혁 명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직물 공업이 발달한 덕분에 일어났다. 신세계 식민지에서 재배된 면화를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다시 말해 대 서양 경제가 형성되었으므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대서양 경제의 형성에는 발트해 지방에서 생산된 해운 자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반대로 영양이 부족하기 쉬운 발트해 지방 사람들에게는 신세계에서 생산된 설탕이 중요한 열량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토 공업화가 공업화의 첫 국면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 다. 이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실제로 영국이 대량의 해운 자재를 발트해 지방에서 수입함으로써 그 지방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멘델스 이후 진 행된 연구에서는 프로토 공업화로 분류할 수 있는 경제 현상이 세 계 이곳저곳에서 발생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다 보니 왜 하필 유럽에서, 그중에서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공업화(산업혁명)가 일어 났느냐 하는 의문에 대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듯하다. n그러나 만약 내가 제시한 학설이 타당하다면 그 의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공업화가 일어난 것은 당시 영국이 발트해 지방에서 아마, 마, 리넨 등 해운 자재를 수입해 대서양 무역에 힘쓰는 동시에 미국에서 재배한 면화를 본국으로 가져와 면직물로 가공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 독립하자마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1789~1815년)이 발발한 것 역시 미국에게는 행운이었다. 미 대륙에 해운 자재가 풍부했으므로 미국은 조선업을 발전시키기 쉬웠다. 유럽 국가들이 발트해 쪽에서 해운 자재를 수입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미국은 외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해운업을 크게 성장시켰다. 당 시 미국의 주요 항구는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볼티모어였다. 또 미국은 프랑스의 도시 보르도와의 해상 무역에 힘썼다. 그 노력의 진가는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 지중해에는 영사관을 설치해 스웨덴, 덴마크와 함께 중립 정책을 펼치며 무역업에 힘썼다. 이 지도에 등 장한 지중해의 항구들은 서로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었으므로 한 항구가 폐쇄되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유럽은 전쟁 중에도 상 업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국은 그런 점을 영리하게 활용해 해운업을 발전시켰다. 미국의 선주들은 중립 정책을 최대한 활용해 선박을 계속 늘렸 다. 그들은 태평양을 횡단해 남미 대륙 남단의 혼 곳을 지난 뒤 아프리카 남부의 희망봉을 돌아 지중해와 발트해까지 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유럽은 미국의 중립 선박이 없었다면 필요한 물자와 자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대서양과 유럽의 결합에 미국 선박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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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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