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역사 2019. 7. 21. 19:37

1.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2500여 년 전 사람이지만 사유능력은 현대의 역사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과 해결해야 했던 과제,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과 해결해야 했던 과제, 역사를 서술한 목적도 비슷했다. 그들은 모든 시대의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기에 책의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 역사가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건을 선택해서 의미있다고 여기는 사실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함. 어떤 사건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경험의 영향을 받음. 직접 체험한 전쟁보다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사건이 달리 있겠는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서술 대상의 차이가 아니라 역사의 대사건을 서술하면서 취한 두 역사가의 태도다. 세계대전의 역사를 쓴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공정하게 대했고, 내전의 역사를 쓴 아테네 시민 투키디데스는 델로스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공정하게 다루었음. 그들이 어느 한쪽을 감정적으로 편들었다면 사실을 편향되게 기록하고 해석했을 것이고,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인류 문화자산이 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름
- 역사는 역사가의 목적과 사실, 사실에 대한 해석과 역사가의 상상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 피드백의 산물이라고 본 카는 매우 간결하고 우아한 문장으로 그 생각을 표현했음.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소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서구에서 역사의 창시자 대접을 받는 것은 책이 훌륭해서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고 지금도 읽기 때문이기도 함.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를 쓴 서구 역사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리스 고전에 통달했고,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책은 왜 그렇게 오래 그리고 널리 읽혔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은 서사의 힘이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을 품고, 명확하게 특정할 수 있는 대상에 관하여, 최대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으면서 지적 자극을 받고 정서적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를 꾸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지적자극을 받고 정서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 서사를 만드는 일이다.

2. 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 사기가 그저 가치 있는 역사기록일 뿐이라면 전문 역사연구자들이나 들여다보는 책으로 남았을 것임. 수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지금도 사기를 읽는 것은 그 안에 인간의 이야기가 있어사다. 사기에서 우리는 사람답고 훌륭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부질없는 욕망과 야수같은 충동에 휘둘리는 인간존재의 모순을 발견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남을 지배하는 데 요긴한 처세술을 배우려고 읽으며, 또 어떤 이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면서 읽는다
- 인물과 사건이 역사의 뼈와 살이라면, 제도와 문화는 혈관과 신경이다. 사회와 시대를 입체로 재현하려면 제도와 문화를 함께 보아야 한다. 사마천은 단순히 제도 변경사실만 기록한 게 아니라 제도에 적응하고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의 행동을 함께 살피면서 제도사와 문화사를 썼다. 이런 측면까지 인식하고 역사를 서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서를 한권만 뽑는다면 사기가 가장 강력한 후보다. 사마천은 역사를 역사답게 쓴 중국문명 최초의 역사가였다. 민간의 역사서와 다양한 국가기록을 참고해 사기를 집필했지만 사기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이전의 역사서가 저마다 별 하나를 그렸다면 사마천은 우주를 그렸다. 사기는 시대와 문명의 과거를 언어로 재구성한 전체사였다. 인류 역사에서 혼자 힘으로 그런 작업을 해낸 역사가는 오로지 그 한사람뿐이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쓰는 사람이 반드시 부딪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섰음. 자연인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업량이 많았음. 종이도 아닌 죽간에 먹으로 글을 쓰면서도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발생시점과 상관관계를 크게 어긋남 없이 기록하고 서술. 영웅과 군주와 왕조의 명멸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추적하면서 세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함께 이야기했다. 조수를 여럿 썼다면 그나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해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 사마천은 국가와 사회는 정치권력과 경제제도, 사회제도, 법률, 예술과 문화양식의 복합체이며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구조와 양상을 분석. 권세와 지위는 없었지만 독특하고 자주적인 인생을 살아나감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사유할 실마리를 던진 이들을 망각의 어둠에서 건져냈다. 사기는 또한 개인사의 치욕을 견뎌낸 사마천이 역사의 수많은 사실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감정도 전해준다.

3. 이븐 할둔,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 600년 전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븐할둔(1332-1406)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일곱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썼음. 그가 쓴 역사서설은 인류사의 원형으로 역사의 역사에서 합당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 역사서설에서 오늘날까지 역사서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보편적 역사법칙을 밝혀서가 아니라 귀중한 역사기록을 남겼기 때문. 그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었던 역사법칙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7세기에 탄생한 이슬람 문명과 아랍사회의 현황 및 특징을 기록했고, 당시 아랍지식인들이 인간과 문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밀하게 서술. 이런 정보 덕에 역사서설은 이슬람 문명의 발생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한 길잡이가 되었음. 이 책은 또한 시대를 한참 앞서간 과학적 사고방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재미를 맛볼 수 있다.
-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는 신을 섬기는 종교는 근보적으로 독선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마찬가지. 그런데 이슬람 세계의 불행은 교리 그 자치게 아니라 무함마드가 세속의 왕이 된데서 비롯했음.그는 영혼과 도덕을 다루는 종교를 합법적 강제력 행사를 본서응로 하는 국가권력과 하나로 묶었다. 독점적 진리에 대한 확신을 기본으로 삼은 종교라 할지라도 종교의 영역에만 있을 때는 해악이 적고, 세속권력이 할 수 없는 사회적 선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종교가 국가권력과 일체가 되면 사회의 내적 평화가 뿌리내리지못함.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차니한 다종교, 다문화, 다언어 국가였음. 만약 그 시점에서 인류문명을 대표하는 세계의 수도를 하나 정한다면 단연 이스탄불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축적한 단연 이스탄불이었다. 산업혁명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축적한 서유럽 열강이 영토를 잠식하고 그 지원을 받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민족이 독립함으로써 수백년에 걸쳐 영토를 조금씩 잃었지만,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따가 1차대전의 패전으로 무너진 20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이었다.

4.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
-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랑케의 야심,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쓴 역사를 과학적 역사라고 한 추종자들의 호언은 인간정신과 문자 텍스트의 한계에 대한 인식부족이 빚어낸 착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랑케의 역사이론은 역사가에게 명분있는 도피처를 마련해주었다. 과거를 평가하는 일에서 손을떼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도록 동시대인을 일깨우는 과업을 외면하면, 역사가는 역사 서술작업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문명의 파편을 탐사하고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이 남긴 문서를 뒤져 지나간 시대의 고유한 가치를 탐사하는 것으로 역사가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면, 굳이 그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사건에 개입하거나 끌려들어가지 않아도 됨.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사를 우리 스스로 연구한다는 취지 아래 1934년 진단학회를 결성하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만 기술한다는 랑케의 구호를 차용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음. 일제의 식민사관 구축에 협력한 학자들도 같은 이론을 내걸었기 때문에 나중에 도매금으로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긴 했지만, 이러한 실증주의 역사관을 표방함으로써 총독부의 감시와 박해를 피하는 데 잠시 효과를 보았다.
- 랑케는 배울 것이 많지만 반면교사로 삼기에도 좋은 역사가다. 역사가는 해부학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노련한 과학수사대 요원과 법의학자가 시신을 다루는 자세로 역사의 사실을 대면해야 함. 시신을 해부해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신의 상태를 코고 사망원인과 시간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망자의 직업과 생활환경, 생전의 건강상태와 습관까지 추론해 내야 하며, 유류품이 담고 있는 정보를 연결해 그 사람의 인생행로를 추측할 수 있어야 함. 니체가 아프게 지적한 것처럼, 랑케는 역사의 사실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귀중한 문헌을 보관하는 도서관 깊은 곳에 잠겨 있는 것이다.

5.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 마르크스는 다른 사람의 사상과 이론을 빠르게 흡수하면서도 그 결점과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자신만의 사상과 이론을 구축하는 데 활용. 유물사관의 방법론인 변증법으 헤겔에게서, 철학적 토대인 유물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논문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발표해 젊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마흐(1804-72)에게서 가져왔다. 마르크스의 대표적 자본론의 핵심인 잉여가치론은 고전파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개정 증보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글도 잘 썼다. 공산당 선언 같은 정치적 격문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을 비롯한 정치비평, 자본론처럼 방대한 학술서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쓴 지식인은 문명사에 흔치 않다.
- 역사의 종말은 철학, 경제학, 정치학을 뒤섞은 사변적 정치선언문으로,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질문에는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헌팅턴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지식인이 터뜨린 환상과 편견의 꽃망울일 뿐이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되살려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함. 인간은 일관된 방향을 가진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많은 역사가들이 대답을 제시했지만, 실제 역사는 그 모든 대답을 비겨갔다. 결국 후쿠야마이 대답 역시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되살려낸 질문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6.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여정,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할둔에게는 학문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의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얼까? 그들은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마르크스 주의자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환경과 오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같지 않은데도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7. 에드워드 H 카의 역사가 된 역사이론서
- 역사가의 선택을 받은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자.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지, 그 사실에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부여할지는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에 달려 있음. 역사적 사실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발언하는 게 아니라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고 무언가 말할 수 있다. 이 주장을 카는 다음과 같이 우아하게 표현했다. 베네데토 크로체가 얼마나 대단한 혁명가, 정치가, 역사가였는지 알면 더 좋겠지만 몰라도 이해하는 데 큰 상관은 없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운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실인지 역사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사실을 다루는 역사가의 태도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공자의 춘추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 필법이다. 춘추필법은 역사가에게 해석이라는 칼로 사실을 난도질할 권리를 주었다. 반면 랑케필법은 사실 앞에서 역사가를 무장 해제했다. 춘추필법은 2000년 동안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했고, 랑케필법은 100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유행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어느 것도 받아등리지 않는다. 그들이 쓴 역사는 모두 춘추필법과 랑케필법 사이 어딘가에 있다.

8. 문명의 역사, 슈펭글러, 토인비, 헌팅턴
- 토인비의 이론에 따르면,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전의 산물이며 탄생한 후에도 계속 새로운 도전에 직면. 문명은 응전에 성공하면 성장, 발전하고, 실패하면 쇠퇴하며, 실패한 응전이 계속될 경우 해체된다
- 토인비는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눔. 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공격),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압박), 그리고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새로운 도전이 전혀 없으면 폴리네시아,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이 성장을 멈춘다.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를 말살하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은 수준의 적당한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가장 큰 자극을 줌. 그렇다면 문명은 왜 응전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는가? 응전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가? 토인비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에 의거해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했다.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 여기서 개인은 모든 개인이 아니라 소수의 창조적 천재들이다. 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있으며, 그들은 비창조적 다수자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에만 사회적 창조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가능. 비창조적 다수자가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하고 따르는 현상을 미메시스라고 한다. 그리스어 미메시스는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의미. 창조적 소수자가 미메시스를 창출하면 사회는 응전에 성공하고, 문명은 성장. 반면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상실하면 비창조적 다수가가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런 과정을 네메시스라고 함. 네메시스는 화를 내며 비난한다는 의미.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면, 다수자는 미메시스를 철회하고 면종복배하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와 폭력으로 맞서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분화하며, 사회는 응전능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며 문명은 쇠퇴
- 토인비의 역사 패러다임은 21세기 들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됨. 미국은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를 가진 제국이며 현대 서구문명의 중심국가임. 그런데 백악관의 권력자들은 종종 지배적 소수자의 행태를 보였다. 9/11 테러를 저지른 무슬림 테러리스트 집단은 서구 문명에 포획당안 서구 밖 문명에 속한 사람들(외적 프롤레타리아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6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트럼프 후보의 인종주의적 정치선동에 환호를 보낸 미국의 쇠락한 공장 지대 백인 노동자들은 위에서 말한 "성공한 백인 동료들이 바다 건너에서 데려온 노예와 같은 사회적 지위로 떨어졌다."고 느끼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라 할 수 있음. 이것은 토인비가 문명 해체기의 징후로 지목한 현상과 유사함.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가 등장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미메시스를 복원하지 못하면 서구문명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이 직면한 멸망의 위험도 줄이기 어려울 것임. 서구문명이 노예제도를 스스로 폐지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쌍둥이 암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토인비의 믿음은 지나친 낙관이었는지도 모름
-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자신을 규정한다. 부족, 민족집단, 신앙공동체, 국민,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는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는 누구인지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문명의 충돌)

9.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역사와 과학을 통합하다.
- 토인비는 문명의 발생원인과 관련해 인종설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고 문명 내부로 눈길을 돌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기술과 제도와 문화의 변화를 추적.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전적으로 환경설에 손을 들어줌. 피부색과 신체특성이 어떻든 모든 사피엔스는 동등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능력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 발전 속도의 차이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은 환경 외에 다른 게 있을 수 없다. 기술과 제도아 문화의 차이도 그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 환경 차이에 귀착됨.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다이아몬드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연히" 또는 "운이 좋아서"
- 헤로도토스는 이오 공주 납치사건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로 '역사'를 열었다. 사마천은 사기본기 첫머리에 삼황오제의 전설을 실었다. 할둔의 역사서설은 사회조직의 등장과 함께 출발하며, 문명을 역사서술 단위로 설정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도 마찬가지. 김부식은 삼국사이의 신라본기를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에서 시작했고, 신채호는 단군왕검 신화로 조선상고사의 문을 열었다. 모두가 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사회조직의 출현을 역사의 시작으로 잡은 셈. 그런데 하라리는 7만년전 쯤 일어난 인지혁명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았음. 사피엔스가 이 혁명으로 사회조직 또는 문명을 만들어낼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 그렇다면 인지혁명은 어떤 혁명이었을까? 그것은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의 사건이었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년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 뇌이 내부배선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사피엔스의 유전자에 등장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 하라리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생물 종의 진화적 성공이 그 후의 인구폭발은 사피엔스의 진화적 성공을 증명함. 그러나 그들이 더 행복해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농부가 수렵채집인보다 행복하게 살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이 논리를 산업화 또는 과학혁명 이후의 인구폭발에 적용하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근대 이후 노동자의 삶은 중세 농부의 삶보다 행복한가? 아래 글을 보면 하라리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소, 돼지, 닭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사피엔스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건 아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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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세계사

역사 2019. 7. 8. 12:45

- 근대이전의 경우 기본적 화폐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었다. 약 4그램의 작은 금화가 주로 통용되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10센트 동전 크기. 프랑스의 리브르, 피렌체의 플로린, 스페인이나 베네치아의 두카트, 포르투갈의 크루사도, 이슬람권의 디나르, 비잔틴의 베잔트, 로마후기 솔리두스가 이러한 예이다. 오늘날 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80달러 정도의 가치를 지님. 이와 관련하여 세가지 예외가 있다. 네덜란드의 길더는 무게가 5분의 1정도였으며, 영국의 1파운드 금화와 로마초기 아우레우스는 무게가 2배정도였다. 이슬람권의 디르함, 그리스의 드라크마, 로마의 데나리온은 은화로, 크기와 무게가 거의 비슷했다. 가치는 반숙련 근로자의 하루임금 수준이었으며, 금화와 은화의 교환비는 1대 12정도였다.

1. 메소포타미아의 초기교역
- 기원전 2500년에는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이 소라껍데기 잔과 등에서 구리로 만든 단지, 도구, 장신구로 바뀜. 이 시대에도 구리의 운반비용은 여전히 비쌌고, 평민은 금속이 아닌 석재로 만든 도구를 사용. 설사 평민이 구리로 만든 훌륭한 기구를 손에 넣을 능력을 가졌더라도 구리로 된 고급제품은 지배계층과 군인차지였을 것이다. 이후 500년 동안 금속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구리로 만든 도구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 청동기 시대에는 구리가 귀했기에 소, 곡물과 더불어 교역품으로 활용됨. 하지만 기원전 2000년 경 구리공급이 증가하면서 가치도 하락. 그러자 구리대신 은이 교환수단, 즉 오늘날 화폐라 일컫는 대상으로 자리잡음. 은이 화폐로 통용되면서 다른 산물의 구입과 판매도 촉진되어 상업이 활성화됨.
- 과거 로마인에게 후추무역이란 오늘날 야심만만하고 물욕이 강한 사람들의 투자은행과도 같았음. 다시 말해 최고 부유층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방법이었음. 제국 초기에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가리켜 "낙타 등에서 방금 구매한 후추를 처음으로 가져가는 자"라고 표현했다.
-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세계무역이 그 요람지인 인도양 밖으로 뻗어나가는 속도를 둔화시켰다. 그러나 교역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었음. 강력한 신흥 유일신교인 이슬람이 발원하면서 인도양을 통한 교역이 새롭게 확대됨. 이에 따라 교역은 아시아의 드넓은 평원에서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변경에서도 일어남. 한나라-로마 축을 중심으로 한 교역은 막대한 거리를 아울렀지만 통합의 정도는 강하지 않았다. 화물은 생산지에서 목적지까지 수많은 인종, 종교, 문화, 법전통의 상인들을 거쳐야 했다.
- 성직자의 탄생을 계기로 파편적이고 다민족을 거치는 고대의 교역은 자취를 감춤.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몇 세기만에 하나의 문화, 하나의 종교, 하나의 법이 구세계 3개 대륙간 교역을 통합시켰다. 이러한 상태는 최초의 유럽 선박이 동양에 도착하기 전까지 1000년 가까이 유지됐다.

2. 그리스 교역 해협을 누가 장악하는가
- 그리스가 서양문명의 요람이라면, 그리스 특유의 전략적 지리요소는 해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서양의 해군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네덜란드, 잉글랜드는 각각 13, 17, 19세기판 아테네였음.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수준으로 몸집이 커지자 번영과 생존이 해로와 머너먼 카테가트(유틀란트아 스웨덴 사이의 해협), 영국 해협, 수에즈, 아덴, 지브롤터, 말라카,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 같은 전략적 요충지의 장악 여부에 달려 있었음. 오늘날 사우디, 이라크, 이란의 거대한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가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면서 미국, 영국, 인도, 중국의 국방장관은 좁은 물길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항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

3. 대상의 길_낙타와 선지자
- 기원전 1500년까지는 주로 당나귀가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쓰였다. 이후 유목민은 이동을 위해 낙타를 대거 사육. 당나귀가 부드럽고 가벼운 짐을 실을 수 있는 가정용 세단이라면, 낙타는 푹신한 발굽이 있어 길도 없는 장거리의 황무지를 두 배의 짐을 싣고 두 배로 빠르게 갈 수 있는 랜드로버였다. 이 같은 낙타의 능력은 중동 사막과 아시아 스텝 지대의 교역에 혁명을 일으킴. 몰이꾼 한 사람이 끌고 갈 수 있는 낙타는 3-6마리 정도였고, 하루에 1-2톤의 짐을 30-100킬로미터 나를 수 있었다.
- 유황과 몰약은 종교적 이유와 세속적 이유 모두에서 사치품으로 각광받음. 현대인은 고대문명을 상상할 때 주로 시각과 청각요소를 떠올리고 후각적 요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위생시설이 변변치 않은 비좁은 도시에서는 지도 없이 냄새로도 장소를 식별할 수 있었다. 주요 하수시설과 도축장에서 나오는 오수는 악취를 풍기고 관청, 신전, 극장 주변에서는 소변냄새가 진동했다. 특히 무두질 공장, 생선가게, 묘지에서 풍기는 악취는 후신경을 강하게 자극. 게다가 깨끗한 물로 자주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 특권은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시대였기에 몰약만큼 가치있는 물건도 드물었음. 몰약은 바디로션처럼 간편하게 바를 수 있었고 일상적 악취를 가려주었음. 의사들은 의약품에 듬뿍 첨가했으며, 고대의 방부제로도 활용됨. 또한 향은 성적 용도로도 사용되었음.
- 고대의 향료 교역은 오늘날 코카인이나 헤로인 거래와 다를 바가 없었음. 원료를 재배하는 농가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완제품 형태로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는 매우 위험한 물건이 되었다. 향료가 최종목적지 로마에 미친 영향은 그리 유익하지 못했음. 실크와 더불어 향료의 수입은 제국 내부에 유통되던 은을 고갈시킴. 나이젤 그룸은 제국의 수도로 모인 낙타 1만마리 분량의 향료를 구입하는 데 연간 1500만 데나리온 가량이 들었다고 추정. 해외에서 약탈한 물건이라도 부두에 도착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었다. 세네카가 축적한 부만 해도 1억 데나리온에 달했다고 전해짐. 하지만 2세기에 정복활동이 중단된 반면 로마인의 낭비는 절정에 달하면서 제국의 힘은 향을 태운 연기 속에 사라져갔다
- 지중해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에 속하던 키프로스가 649년 아랍의 첫 공격에 함락된 이후 827년에 크레타, 870년 몰타가 차례로 아랍인의 차지가 됨. 지중해 최대 거점인 시칠리아도 100년 이상의 갈등 끝에 965년 아랍인의 손에 넘어감. 새 천년이 밝을 때 기독교 세력은 한때 로마가 우리 바다라 부르던 지중해가 무슬림 선박으로 뒤덮인 모습을 보았을 것임. 유럽에서 무슬림은 정복활동을 이어나가 교역을 장악. 9-10세기에 주조된 이슬람 주화가 유럽중부,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아이슬란드에서까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750년을 기준으로 이전에는 초기 우마이야 왕조가, 이후에는 아바스 왕조가 지배. 이들은 로마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다스렸는데, 대대적 정복활동이 마무리되어 전리품 공급이 줄어들자 상업적 요소가 군사적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이들에게는 가난하고 후진적인 서유럽보다 실크 교역로가 지나가는 부유한 중앙아시아가 더 매력적이었음. 우마이야조는 732년 프랑스의 도시 푸아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718년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레콩키스타(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벌인 회복운동)가 일어났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레콩키스타는 1492년 마지막 무어인(과 유대인)을 축출하면서 마무리됨. 반면 무슬림 군대는 먼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듭 공략했으며, 751년 탈라스(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처음으로 당나라 군대에 승리를 거둠. 탈라스와 더불어 이익이 나는 대상 교역로가 무슬림의 손에 들어왔고,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극적인 정복은 종종 놀라운 행운을 안겨주기도 함. 탈라스에서 무슬림이 얻은 가장 중요한 소득은 영토도 실크도 아닌 평범하면서도 귀중한 자원이었다. 탈라스에 억류되어 있던 중국인 죄수 가운데 제지업자가 있었고, 이들은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 놀라운 기술을 전파했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 초기에 무슬림 정복자들은 기본적으로 팍스 로마나를 재현했는데 규모가 그보다 더 컸다. 우마이야와 아바스 제국은 사실상 옛 국경과 장벽을 없앤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로 기능했다. 특히 아득한 고대에서부터 동과 서를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하던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자유무역이 이루어짐. 더 이상 아시아로 향하는 세가지 경로, 즉 홍해와 페르시아만, 실크로드가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글로벌 물류체계가 통합되었고,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세력은 누구나 길을 이용할 수 있었음. 이후 1000년 가까이 무슬림의 항해는 정복과 개종활동을 능가했음. 놀랍게도 선지자의 죽음 이후 100년이 흐른 8세기 중반에 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무슬림 상인 수천 명이 중국의 항구뿐 아니라 내륙의 도시까지 진출. 반면 중국 최초의 대형 정크는 1000년 쯤에야 인도양을 항해했다. 이후로도 400년이 지난 후 전설적 환관 정화가 대형선박으로 스리랑카와 잔지바르를 항해했다.
- 팍스 이슬라미카에 온전히 축복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서양과 동양의 경계가 서쪽의 지중해로 이동하면서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모두 자유로운 통행이 불가능해짐. 역사학자 조지 후라니는 "고속도로 대신 지중해가 변경이 되자 곧 전쟁의 바다로 변했다. 이런 변화로 알렉산드리아가 쇠락했다"고 지적. 무슬림의 상업적 연결망은 환어음, 정교한 대출제도, 선물시장 등 여러 선진적 기능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슬람 국가도 현대 세계의 금융제도 기반인 국영은행 혹은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핵심에서 벗어난 지적이다. 로마가 멸망한 수백 년 동안 옛 제국은 세계 상업에서 변두리로 몰락했고 중동, 인도, 중국에서 진행되던 상업과 기술의 혁명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지중해 항해에 선박의 방향을 바꿔주는 아랍의 대형 삼각돛이 도입되면서 혜택을 받음. 고대 서양의 사각돛으로는 방향전환이 불가능했다.
- 팍스 이슬라미카는 어떤 도전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11세기에 기독교 세력이 부활하면서 스페인, 시칠리아, 몰타에서 상당부분의 영토를 상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영토 회복에 힘입어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고 1차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일시적으로나마 성지를 탈환. 12세기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 정복에 이어 예루살렘의 십자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으며(다만 살라딘은 적인 기독교도와 교역하는 데 더 만족했다), 중동에서 무슬림 세력을 통합. 살라딘의 승리로 이슬람은 절정을 맞았지만 이후 처참한 울분이 이어짐. 13세기에 몽골이 침입했고, 14세기에는 흑사병이 유행했으며, 15-16세기에는 바스코다가마가 인도양을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쇠락. 하지만 무슬림 상인들은 16세기까지 장거리 교역을 장악했고, 근대 초까지도 여러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상인들이 종교_범이슬람 상권의 등장
-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 따르면 중국인은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에게 구리, 상아, 향, 별갑을 샀고 광저우에 도착한 무슬림은 금, 진주, 실크와 양단을 배에 실었다. 물건을 교환하는 과정은 무척 까다로웠으며 정부가 독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은 바그다드에서 들여온 물건을 '다음번 선원들이 들어올 때까지' 6개월 동안 광저우의 창고에 보관했다. 물건의 30%를 수입관세로 지불했는데 "정부는 어떤 물건을 원하든 가장 높은 가격에 구입했고 대금도 즉시 결제했으며 거래를 불공정하게 진행하는 부분도 없었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는 중국 여행기에 대한 서양의 전통을 세우는 역할을 했고, 훗날 마르코폴로와 이븐 바투타 등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서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익명의 저자들은 천조의 규모와 세련된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에는 대도시가 200곳 이상 있었고, 생활양식이 이국적이었으며, 제도가 발전한 상태였다. "중국에 사는 사람들은 빈부노소를 막론하고 서예를 배웠고 글쓰기 기법을 익혔다. 오늘날 사회보장 제도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 여행기'에 설명된 중국의 세제, 노인 연금체계를 참고할 만하다.
세금은 개인이 보유한 부와 토지를 기반으로 징수되었다. 누구라도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관청에 등록했다. 18세가 되면 인두세를 부과했고 80세에 이르면 더 이상 장수하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국고에서 연금을 지급했다. 중국인은 젊을 때 세금을 거둬들였으니 늙었을 때 급여를 지급한다고 말한다.
- 중국이 해양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상인들이 말라카 서부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중국은 단지 1405-33년에만 인도양에서 위력을 과시했을 뿐이다. 상인들이 기를 펴지 못한 이유는 유교에서 상업을 천시하고, 가장 뛰어나고 야심찬 인재들을 교역보다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관료사회에 집중시킨 영향으로 보임. 당시에도 중국(과 훗날의 일본)의 중앙집권적 정치구조는 외세와의 접촉을 신속히 차단할 수 있었음. 반면 고도로 분권화된 중세 인도양 교역에서는 다윈식 경쟁이 벌어짐. 정치적 돌연변이가 교역과 상업에 적합한 나라는 번창했지만 제도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는 힘이 약해졌음. 이와 유사하게 유럽의 정치환경을 살펴보변 지형적으로 산과 강이 많아 수천개로 쪼개진 국가가 경쟁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에게 유리했다. 그중 하나인 잉글랜드는 역사상 최초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 얼마전부터 정화의 원정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제로 떠올랐다. 영국의 퇴역한 잠수함 사령관 개빈 멘지스는 '1421 :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정화의 6차 원정파견대가 아메리카 대륙(과 더불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브라질 대서양 해안, 카보베르데 제도)을 방문했을 가능성을 시사. 해양사학자들은 멘지스의 주장 대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정화의 원정이 중국 외교의 따뜻하고 비공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설명. 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정화의 원정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임. 당시 원정대는 황제의 권위에 어울리는 경의를 표현하지 않는 현지인을 납치하고 도륙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 예를 들어 1차 원정 당시 정화는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을 5000명 이상 살해. 해적의 우두머리는 황제에게 올리는 선물로 중국으로 끌려가 참수당함. 나중에 떠난 원정에서 정화는 스리랑카, 수마트라 동부의 팔렘방, 세무데라(오늘날 반다아체 인근)의 통치자들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으며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인 적도 많았다.
- 말라카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무엇인가? 말라카가 해양 세계에서 중요한 관문으로 번성한 이유는 단순히 계절충의 종착지이기 때문은 아님. 해협은 말레이와 수마트라 해안을 따라 수백킬로나 뻗어 있었고 좁은 싱가폴에서 통제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말레이와 수마트라에는 파라메스와라가 1400년 말라카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수 백년 동안 존재해온 교역도시가 있었다. 도시의 부와 명성은 파라메스와라와 후손이 남긴 천재적 제도 덕분으로 봐야 함. 해협에 있는 수많은 교역도시 가운데 말라카만 유일하게 교역할 것인가,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보호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디. 말라카인은 전통적 이슬람법에 따라 부과되는 정도보다 가볍게 책정. 서쪽, 즉 인도인과 아랍인이 들여오는 물건에 (통상적인 10%가 아니라) 최대 6%의 관세를 적용한 것이다. 만약 서쪽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아내와 더불에 항구에 정착하면 3%만 내면 됨. 동쪽에서 온 사람, 즉 말레이인, 인도네시아인(귀한 향신료를 가져오는 몰루카 제도 사람), 시암인, 중국인은 관세를 전혀 내지 않음. 동쪽 사람들의 물건을 포함한 모든 수입품에서 술탄과 신하들에게 바치는 선물을 공제했는데, 피레스는 이를 전체 물건가치의 1-2% 정도로 추산. 수출세는 상인, 동쪽사람, 서쪽사람, 현지인 어느 누구도 낼 필요가 없었다

5. 중세 향료교역과 노예교역
- 향신료를 대규모로 거래했다는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음. 서양에서는 막대한 향신료 수요를 무슨 돈을 해결했느냐 하는 것. 16세기에 페루와 멕시코의 광산에서 채굴된 은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전가지, 유럽에는 수입품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주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음. 게다가 서양에서 생산하는 물건 중 동양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만한 상품도 별로 없었음. 현대 이전에는 제조업과 섬유산업이라는 말이 사실상 동의어였음. 유럽에서 생산되는 양대 직물 가운데 리넨은 인도의 면직물보다 질이 떨어졌으며 양모 역시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대신 지중해에서는 붉은 산호가 대량으로 채취되고 이탈리아에서는 고급 유리를 생산했지만, 동양에 사치품을 판매해서 벌어들이는 이익은 중세 서양의 무역적자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음. 유럽인은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탐나는 향신료와 교환할 상품을 생산했는가? 그럴 만한 상품이 없지는 않았다. 당시 군사를 탐욕스레 모집하던 무슬림 군대에게 노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1200-1500년경 이탈리아 상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노예 상인들이었으며, 흑해의 동부해안에서 사람을 사서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팔아넘겼음. 노예를 실은 선박은 다르다넬스(고대 헬레스폰트)와 한대 강성해던 비잔틴 제국이 지키던 보스포루스라는 두 곳의 요충지를 거쳐갔음. 이제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 교역의 양대 세력인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사정거링 놓이는 신세로 전락
- 유럽인과 무슬림은 육두고, 메이스, 정향이 서양에 처음 전파된 이후 1000년 동안 재배지의 저오확한 위치를 몰랐다. 10세기에 활동한 아랍의 역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는 정향과 육두구를 인도에서 나는 품목에 포함시켰는데, 실제 생산지와의 오차가 6500킬로미터에 달함.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이 두 여행가가 향료 교역에 대한 지식의 상당부분을 의존했을) 중국인은 향료가 자바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향료 제도는 자바에서 동북동 방향으로 1600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6. 흑사병과 질병교역
- 과거 세계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질병 풀로 구성되어 있는 전염병 부싯깃통과 같았음. 각 풀안의 인구는 해당 질병이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지만 다른 풀에서 건너온 질명에는 취약했음. 한 지역에 1000년 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잠복해 있던 병원체가 수백 킬로 떨어진 지역에서는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임. 14-18세기에 세계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질병 풀이 서로 뒤섞였고 마침내 대재앙이 벌어짐. 현대인에게는 희소식이 있다면, 앞으로 질병의 혼합이 추가로 일어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 이제 세계적 유행병은 HIV 바이러스 같이 인간 이외의 숙주에서 머물던 병원체가 변이를 일으켜 인간을 감염시키는 경우에만 가능
- 최초의 전염병은 벼룩을 통해서 사람 사이에 전염됨. 벼룩을 통한 전염병은 14세기 유럽에 영향을 미친 폐렴형 전염에 비해 전염속도가 느렸음. 동로마 제국에서는 최초로 질병이 창궐한 후 5-10년간격으로 역병이 찾아왔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들이 특히 큰 피해를 입음 541-42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는데, 프로코피우스는 사망률이 정점에 달했을 때 하루 1만명이 죽었따고 기록. 700년에는 인구가 반으로 감소. 역병이 돌기 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페스트가 통일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전염병이 휩쓸고 간 유럽은 암흑시대에 들어갔다. 반면 사막기후가 펼쳐지고 대도시가 없어 질병에서 보호받은 초기 이슬람 신자들은 지정학적 진공상태를 기회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음. 또한 전염병은 무슬림이 더 동쪽으로 진출하도록 도와주었음. 프로코피우스는 페르시아가 황폐화되었다면서, 연이은 역병으로 무슬림이 636년 크테시폰(이라크)에서 역사적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 동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의 기세가 꺾였을 당시에는 이미 동방과의 교역이 쇠퇴하는 추세였다. 622년 콘스탄티노플에 마지막으로 역병이 돌았는데, 같은 해 쿠라이시는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메카에서 쫓아내 메디나로의 헤지라를 촉발시킴. 8년 사이에 무함마드의 군대는 아라비아 전역을 장악했고, 이후 1000년 동안 서양의 선박이 바브엘만데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함. 이후 여러 세대 동안 서양인은 실크로드에도 접근할 수 없었음. 유럽은 서력기원이 시작된 이래 줄곧 아시아로 자유롭게 접근했지만 이슬람 군대에게 길을 빼앗김. 이처럼 뼈아픈 패배에서 유럽에 비친 한줄기 희망을 찾자면, 길이 차단된 덕분에 이후 700년 동안 아시아의 전염원에서 보호받았다는 점이다.
- 6세기 페스트는 바다를 통해 유입된 반면, 14세기에는 육로로 전파됨. 몽골 칸들이 정치적 화합을 이루면서 실크로드가 열렸고, 중국의 진귀한 물건과 함께 카파의 포위자들을 감염시킨 쥐와 벼룩도 같이 이동. 몽골군과 동맹이 감염당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맥닐은 스텝지역의 전사들이 1252년 북쪽 방향에서 중국 남부와 버마의 히말라야 산기슭을 공격할 당시 감염된 설치류를 통해 질병에 걸린 것으로 추정. 중국에서는 1331년 페스트가 돌아왔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 거의 동시에 페스트는 몽골의 지배로 왕래가 손쉬워진 실크로드를 타고 빠르게 퍼짐. 감염된 벼룩은 서쪽으로 향하는 군마의 갈기, 낙타의 머리털, 짐칸과 안장주머니에 숨어 있던 곰쥐에 올라탔다. 장거리 상품교역은 간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실크와 향신료가 도중에 중개인에게 인도되는 방식이었음. 이 과정에서 간균은 여러 차례 여정에 합류했다.
- 흑사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유럽의 농민들은 숲으로 피하여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음. 하지만 이집트에선 그런 선택권이 없었음. 나일강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태양이 작열한느 사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당시 이집트 기록에는 사람이 자취를 감춘 마을에 대한 언급이 종종 등장. 이후 이집트는 과거의 부, 권력, 영향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음. 페스트 발생 직전의 이집트 인구는 800만으로 추산되는데, 1789년 나폴레옹이 침입했을 당시에는 300만에 불과했음. 최근 신뢰할 만한 추정에 따르면, 근대 초 이집트의 인구는 예수가 탄생할 때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렀다.
- 기원전에 교역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질병 풀이 뒤섞일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지 않았음. 역병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진원지로 추정되는 히말라야 산기슭에 고립되었고, 천연두와 홍역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로마-한나라 시대에 장거리 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슬람과 몽골세력이 영향을 미치면서 질병은 먼 거리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 구세계에 서로 분리되어 있던 질병 풀은 이후 1500년 동안 충돌하고 결합되어 대재앙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면역성이 향상됨. 신세계에 처음 발을 디딘 서양의 이주자들은 자신과 함께 이동한 미생물이 원주민 사회를 짓밟으리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윌리엄맥닐의 말을 빌리자면, 탐험 시대의 막이 오를 때 "유럽은 새로운 인간 감염 측면에서 줄 것은 많고 받을 것은 적은" 상태였음. 더 놀라운 사실은 아시아의 좁은 지역 일부에 머물던 전염병균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페스트가 근대까지 계속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이유는 무얼까? 1346년 이후 간균이 여러 종에 미치는 영향은 이전보다 약해졌음. 14세기에는 개, 고양이, 새가 인간과 함께 떼죽음을 당했지만 이제는 질병에 이전처럼 취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쥐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 역시 덜할 것이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영국에서 페스트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음. 더 이상 목재 틀을 쓰지 않고 벽돌집을 세우면서 쥐가 숨어들기 어려웠고, 벼룩도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에서 사라에게 뛰어들기 힘들었다. 서유럽에서 목재로 만든 가옥이 사라지고 벽돌집이 보편화되면서 쥐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고 질병 감염경로로 차단됨. 21세기 들어 위생개념이 철저해지고 항생제를 사용하면서 치명적 병원체를 지닌 지하 전염원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막이 한 겹 더 늘었다.

7. 대항해 시대_포르투갈 교역제국
- 위대한 모험이 으레 그렇듯 비전, 용기, 지식, 세밀한 관심, 끈질긴 노력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음. 콜럼버스는 1492년 항해에 나서기 전에 배 세척의 모든 목재를 꼼꼼히 살폈다. 운도 따라야만 했다. 만약 주앙 2세가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훤히 알고 있는 포르투갈 아조레스 탐험에 나섰다면 해당 위도에서 부는 사나운 바람 때문에 배가 침몰했을 것임. 공교롭게도 콜럼버스가 떠난 네 차례 탐험은 모두 아조레스 남쪽의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출발하여 카리브해 쪽으로 부는 북동 무역풍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결국 콜럼버스, 산탄젤, 이사벨의 판단은 옳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 근거는 빗나갔음. 반면 포르투갈,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왕에게 조언한 학자들은 콜럼버스보다 지리적 지식이 더 풍부했기 때문에 콜럼버스가 인도제도를 탐험한 기념비적 1차 항해에서 돌아왔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임. 신세계의 해안선은 일찍이 스칸디나비아 탐험가들도 어렵풋이 인지했고, 컬럼버스보다 수세기 전 활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탐험가들도 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거대한 신세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다. 훗날 유능한 정복자들은 탐험을 나서며 본능적으로 전문가들과 동행했따. 하지만 고집불통인 콜럼버스는 서쪽 항해에 전문가를 데려가지 않았다. 배에는 그가 스펭니으로 데러간 원시적 카리브 인도인이 사실은 인도의 원주민이 아님을 지적할 아랍 통역가들이 없었고, 선박을 짓누르는 거대한 무게의 노란색 금속이 황철석이라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보석상이 없었다. 콜럼버스가 항해에서 돌아와 페르난도와 이사벨에게 진상한 계피와 후추가 구세계에서는 본 적 없지만 그저 나무껍질과 고추일 뿐이라고 경고해 줄 피레스 같은 약재상도 없었다. 콜럼버스는 설사 전문가와 동행했더라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임. 그는 3차 항해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아시아와 전혀 다른 장소에 도착했음을 서서히 깨달을 정도로 둔했다.
- 다 가마는 1498년 동아프리카와 인도땅을 밟은 지 5년만에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교역기반을 다짐. 하지만 동시에 인도로 가는 길에 위치한 모든 항구에서 적을 만들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지역에서조차 포르투갈인 때문에 추방된 무슬림 상인들의 원한을 샀다. 새로 구축된 향료 교역로는 길고 취약했기 때문에 요새화된 포르투갈 기지로 보호하고 지켜야 했음. 오늘날에도 아조레스에서 마카오에 이르는 길목에 당시의 문화와 건축물이 남아 있다.
- 제국은 신속히 건설되었고, 1505년에는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인도의 초대 식민지 총독으로 취임했다. 먼저 그는 킬와 (오늘날 탄자니아 해변)를 들러 공격하고 진압했으며, 아랍 술탄을 꼭두각시로 세우고 거대한 요새를 구축. 다음에는 몸바사를 약탈했는데, 그가 인도로 이동하는 동안 수배대는 모잠비크의 섬을 장악했다. 포르투갈은 몇 개월만에 동아프리카의 주요 항구를 대부분 차지. 점령한 기지와 교역소는 아프리카의 금을 인도 향료와 거래하는 장소가 되었다. 여기에서 확보한 금으로는 구자라트의 옷감을 사들였다. 옷감, 금, 향신료의 삼각무역은 사실 새로운 발상이 아니었음. 이미 아랍과 아시아 상인들은 수백 년 동안 삼각 무역을 해왔음. 하지만 유럽인은 삼각무역을 통해 인도양에서 추가로 이익을 낼 수 있었고 희망봉을 돌아가는 위험천만한 항해도 피할 수 있었음.

8. 에워싸인 세계_기축통화가 된 스페인 달러
- 대체 17세기 중반에 중국인 이발사들은 어떻게 멕시코시티까지 갔을까? 유사한 시기에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은 브라질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뉴암스테르담에서는 왜 민간기업인 서인도 회사가 정부의 정책적 결정을 내렸는가? 어떻게 스페인의 은화를 가득 실은 네덜란드 선박은 제임스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기 한 세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서쪽 끝자락의 해저에 멈춰 섰는가? 이상의 네가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탐험시대로 시작된 세계경제의 확대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음.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화와 이에 대한 불만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음. 먼저 다음 다섯 가지를 이해해야 함
(1) 1493년 콜럼버스의 2차 항해 이후 수십 년 안에 옥수수, 밀, 커피, 차, 설탕 등의 대륙이 넘나들면서 세계 농업과 노동시장에 혁명이 일어남. 작물의 교환이 인간의 생활조건을 늘 개선한 것은 아니었다.
(2) 17세기 초 스페인과 네덜란드 선원들은 지구 풍향체계의 마지막 비밀을 풀어냈다. 덕분에 드넓은 대양을 비교적 손쉽게 건널 수 있었음. 1650년에는온갖 물건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세계 대다수 지역을 공략할 수 있었음.
(3) 페루와 멕시코에서 거대한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세계적 통화체계가 탄생. 이와 더불어 은화가 지나치게 주조되어 살인적인 인플레가 발생.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스페인의 8레알 동전은 오늘날 미국의 100불 지폐나 비자카드 처럼 통용되었음.
(4) 17세기에는 주식회사가 탄생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무역질서가 형성되었음. 주식회사는 이전의 개인 판매원, 가족기업, 왕족의 독점 등과 비교해 이점이 컸음. 이내 대규모 기업이 세계 교역을 장악했으며, 이후 세계 무대에서 대기업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음.
(5) 변화는 누군가를 불만에 빠뜨렸음. 16-17세기의 새로운 세계경제로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이 수입되자 섬유제조업자, 농민, 서비스 근로자는 타격을 입음. 오늘날로 따지면 자기권리를 주장하는 프랑스 농민들과 미국의 자동차 산업 근로자들이었음
- 인류가 힘겹게 세계의 풍향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새로운 통화체계가 대두됨. 여러 면에서 오늘날 글로벌 신용과 결제 메커니즘의 전신이라 할 만하며, 구세계와 신세계에서 모두 열망하던 수입사치품의 구입에 사용됨. 노호하는 40도대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선박에는 아시아에서 수요가 높던 유럽산 고급직물과 귀금속이 실려 있었음. 귀금속은 대부분 멕시코와 페루에서 주조된 8레알의 스페인 달러였으며 8등분한 형태도 있었음. 은화는 16세기 유럽의 통화시장에 대량 유입되었고, 달러가 유래한 보헤미아 탈러와 크기나 무게가 거의 비슷했음 (8레알은 1달러의 가치를 지녔는데, 동전을 일상에서 쓰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8등분하는 경우가 많았고 각 조각은 1레알의 가치였음. 여기에서 유래하여 스페인 은화는 여덟조각으로도 불렸으며, 25센트는 두조각이라는 별칭을 얻음)
- 스페인은 막대한 양의 은화를 주조. 총주조량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766-1776년 2억개 이상 발행됨. 각 은화의 무게는 1온스에 못미쳤으며 멕시코에서만 생산됨. 16-19세기에는 멕시코에서 주조한 은화가 시장의 신뢰를 얻으며 사실상 가축통화 역할을 했음. 은화는 강력한 무역회사가 보유하든 하층계급의 지역상인이 보유하든 지니고만 있으면 반다해에서 육두구를, 구자라트에서 캘리코를, 마닐라와 멕시코에서 실크를, 예멘에서 커피를, 스리랑카에서 계피를 살 수 있었다.

9. 기업의 등장_동인도회사
- 유럽에서 평화로운 무역이란 스페인과 네덜란드처럼 부강한 나라에서나 가능했음. 이들은 해적으로부터 바다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기득권 세력이었음. 반면 영국은 16세기의 빈곤하고 후진적인 여러 나라들처럼 해외 선단이 방해 없이 바다를 지나가도록 지켜보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음. 약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상당했기 때문. 위풍당당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대영제국은 200년 이상 흘러야 만나볼 수 있다.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는 부패한 군주가 다스렸고, 왕은 아첨하는 자들에게 독점사업을 분배했으며, 약탈자에게 나포 면허장을 발부하는 국가였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전쟁기구 못지 않게 인상적인 부분은 네덜란드 금융이었음. 1602년 투자자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초기자금 모집에 650만 길더를 투자했음.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억불로, 인력을 고용하고 선박을 구매하며 향료아 교환할 은과 교역품을 구매하는 데 사용됨. 특히 이 자본은 영구자본이었음. 성과가 좋아 이익이 발생하면 이익금의 상당부분을 기업확장에 투자할 수 있었던 것. 투자자들은 해마다 적당한 수준의 배당을 받더라도 초기에 투자한 650만 길더를 곧 회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근거가 없었음. 오늘날의 투자자에게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투자로 보이겠지만,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영구자본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 금융제도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음을 의미.
- 17세기 초에 모든 길은 네덜란드로 통했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포르투갈보다 작고 인구도 약간 더 많을 뿐이었으나(1600년에 150만 명 수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무역 체계를 세운 나라였다. 오늘날까지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패는 그 규모가 아니라 선진적인 정치, 법, 금융제도에 달려 있다. 1600년 네덜란드는 이런 면에서 단연 세계 최고수준이었으며, 포르투갈이 세운 교역제국에 도전장을 내밀만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뮌스터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1648년에야 막을 내렸다. 전쟁을 벌이는 중에도 네덜란드는 스페인, 영국, 다른 유럽 나라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음. 영국은 나포 면허장을 지닌 드레이크의 활약, 무적함대에 거둔 승리, 영국 동인도회사가 근소하게 앞서 있다는 이점이 있었음. 하지만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가 종교갈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었고, 금융시장은 원시적 단계로 불안정했으며, 결국 치명적인 내전을 겪음. 프랑스와 스페인은 왕실의 독점과 만성적 부패로 더 뒤처진 상태였음. 반면 네덜란드 연합주는 유럽에서 절대왕정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되는 나라였고, 법과 금융제도가 엄격했으며, 야심만만하고 재능있는 인재들에게 종교를 불문하고 관대했다. 두가지 간단한 통계에서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드러난다. 경제사학자들이 추정하는 1600년 잉글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오늘날 가치로 약 1440달러, 네덜란드는 2175달러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각각 1370달러, 1175달러다) 이는 식민지 패권을 차지하기위한 경쟁이 시작된 이래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기술과 상업적 격차가 벌어졌으며, 제도와 금융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영국에서의 평판 좋은 채무자(대부분의 경우 왕족은 포함되지 않음)의 이자율이 10%인데 비해 네덜란드에서는 4%에 그쳤으며, 네덜란드 정부의 이자율은 최저수준이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왕실이 채무를 거부하기 일쑤여서 채권자들은 왕실에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 네덜란드의 해양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희망봉을 돌아가는 경로는 신드바드의 길과 홍해 길을 이용하는 것보다 저렴한 수준에 이르렀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료제도도 완벽하게 장악했으며 해상운송도 효율적이었음. 금융시장이 원활히 돌아갔고 기업의 회계도 양호하게 관리되었음. 17세기 초에는 지브롤터를 통해 서쪽에서 도착하는 후추와 고급향료가 지중해에 과잉공급되었음. 이로 인해 이익은 줄었으나 가격이 저렴해서 육상향료 이동경로가 경제성을 잃었음. 이에 따라 지중해 동쪽 해안을 활용하는 베네치아의 오랜 교역도 막을 내림. 베테치아는 주요 수익원이 사라진 후 한 세기 반 만에 나폴레옹 군대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 포르투갈의 약재상이자 모험가요 저술가였던 토메피레스는 "말라카를 지배하는 자가 베네치아의 명운을 쥐고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결국 그의 말은 신빙성을 잃고 말았다. 베네치아의 명줄을 쥐려면 말라카뿐 아니라 순다, 희망봉, 향료제도까지 차지해야 했다. 포르투갈인은 이러한 과업을 이룰 수 없었으며,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향료시장을 독점하면서 베네치아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 상업에서 발생한 부만큼 다른 나라의 질시를 유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도 없다. 이러한 감정은 17-18세기 영국-네덜란드의 관계를 파고들었고 양국은 네 차례에 걸쳐 전면전을 벌였다. 우리 시대처럼 무익한 상업적, 외교적 무언극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역전쟁을 벌였다.

10. 플랜테이션과 삼각무역
- 1700년 이전에 세계의 무역은 이국적 장소에서 가져오는 전설상의 상품을 독점공급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는 교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 시장독점이라는 이상은 17세기 네덜란드가 몰루카 제도와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고급향료시장을 독차지했을 때 단 한 번 현실로 이뤄졌다. 1700년 이후에는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커피, 설탕, 차, 면직물같이 이전에 서양에는 덜 알려졌으나 대륙 곳곳에 손쉽게 옮겨 심을 수 있는 새로운 상품이 세계무역을 장악했음. 향료와 실크 또는 향을 안트베르펜, 런던, 리스본, 암스테르담, 베네치아 붇에 몇 톤 정도 하역해 놓고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일은 이제 불가능했다. 게다가 기업은 새로운 대중시장에 어울리는 제품수요도 촉진해야 했다.
- 네덜란드가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 없었다면 최소한 커피나무를 수리남, 스리랑카, 말라바르 해안에 심어 재배측면에서 앞서갈 수 있었다. 예멘에서 말라바르 해안으로 옮겨심은 커피나무는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쳐 바타비아 인근의 자바고원에서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다. 1732년 인도네시아는 연간 120만 파운드의 커피를 생산했고, 수리남과 브라질에서 재배된 원두가 인도제도에서 생산된 원두와 더불어 암스테르담의 부두에 도착했다. 공급량 증가로 예멘의 독점은 깨졌고 마침내 가격이 하락했다. 새로운 산지의 농장주들은 예멘보다 값싼 비용으로 커피를 생산할 수 있어 네덜란드에 양호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인도네시아와 신세계의 새로운 산지 덕분에 가격이 하락하면서 유럽의 커피문화도 바뀜. 갑자기 모두가 기이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됨.
- 자바 원두의 품질은 모카 항에서 거래되는 원조에 미치지 못했지만, 대체로 유럽인은 그 차이를 분별하지 못했다. (이식된 커피는 예멘산 커피보다 카페인 함량이 50% 이상 높았다) 하지만 예민한 무슬림 소비자들은 원조를 알아봤고 값싼 인도네시아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음.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7인 위원회가 무슬림이 자바커피를 멀리한다는 보고서에 보인 반응은 자기만족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는 자바와 모카 항의 원두 표본을 모두 수집했으나 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고 밝힘. "천박한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이 우리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보다 미각이 민감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직물이 주요 교역 상품으로 발전한 과정은 설탕과 무척 비슷. 영국 동인도회사가 1600년 탄생할 당시 면직물은 실크에 맞먹는 고급제품이었음. 그나마 사치품으로라도 구입할 수 있는지 여부는 값싼 인도 노동력이 좌우. 목화는 설탕과 마찬가지로 재배가 쉬웠으나 생산과정에 막대한 노동력이 들었다. 산업시대 초기에 목화 섬유와 씨앗이 조잡하게 뒤섞여 있는 목화다래 100파운드를 생산하려면 이틀치 작업이 필요했음. 다래에서 씨앗을 제거하고 섬유를 가지런히 정리하며(소면) 포장하는 데 70일치 작업이 필요했는데, 여기에서 고작 8파운드의 원면을 얻을 수 있었음. 여성 방적공이 다시 35일을 일해야 원면을 실로 만들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파운드의 면사를 얻으려면 약 13일의 노동이 필요했음. 반면 무게의 실을 얻는데 양모는 1-2일, 리넨은 2-5일, 실크는 6일의 노동이 들었다. 인도에서는 다수의 값싼 노동력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면직물과 관련하여 수백년 동안 전문기술이 축적되었음. 짧고 약한 목화 섬유를 내구성 있는 실로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음. 1750년 이전에 영국 방적공은 날실로 사용할 정도의 튼튼한 면사를 생산하지 못했음. 따라서 영국 국내에서 생산된 천은 리넨이나 울을 날실로, 면을 씨실로 하여 제조됨. 솜씨가 뛰어난 인도의 방적공이라야 순면직물에 적합한 실을 생산할 수 있었음. 따라서 18세기에 방적기가 개발되기 전에는 서양의 거의 모든 면에 인도에서 방적한 실을 사용.
- 1600년대 초 영국 동인도 회사는 당시 가장 중요했던 향료교역에서 존재감이 미미했음. 동인도회사가 주로 수행한 교역은 페르시아 실크를 낙타에 실어 시리아 사막을 거쳐 투르크의 항구로 운반해 오는 형태였음. 머지않아 영국 동인도회사는인도의 직물시장을 두드리기 시작. 섬유교역이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고 인도의 섬유제조업을 파괴하며, 오늘날 세계화된 경제가 논쟁거리이듯 영국에서 자유무역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며 대영제국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라리고는 초창기에 상상할 수 없었다.
- 17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영국에서는 아시아로부터 면직물 수입을 막기 위해 세 집단이 한데 힘을 합쳐 기이한 보호주의 동맹을 형성. 첫번째 집단은 도덕주의자들로 새롭고 화려한 옷가지로 야기된 사회불안에 분노했음. 두번째 집단은 실크와 양모 방직공들로, 값싸고 더 나은 외국제품으로 일자리를 잃음. 세번째 집단은 중상주의자들로, 그저 패션을 위해 은을 유출하는 데 분노를 표현했음. 이 세력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 맞서 회사에 치명적 결과를 입혔고 영국의 경제, 사회구조, 제국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인도 경제의 근간인 섬유산업을 파괴했다
- 보호주의 조치는 양모산업과 실크방직공들에게 불가피하게 역효과를 일으켰음. 18세기초 캘리코는 고전적인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따. 큰 부자들은 값싼 원면과 소비자들이 원하는 비싸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옷감 사이의 격차를 좁혀줄 존재를 기다렸다. 캘리고 수요가 아직 높았지만 비싼 가격을 치러도 인도산 옷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혁신자들은 방적과 방지과정의 개선을 시도.
- 바라던 혁신은 실제로 일어났음. 1721년 법안이 통과되고 10년 후, 존 케이는 플라잉 셔틀을 개선하여 방직공의 생산성을 높임. 이에 실 수요가 증가했는데, 방적과정은 기계화하기 더 어려웠다. 1738년 루이스 폴과 존 와이엇은 최초의 기계식 방적기를 개발해 특허를 출원. 그러나 1760년 중반에 제임스 하그리브스, 리처드 아크라이트, 새뮤얼 크럼프턴의 기계가 발명되고 나서야 상업적 활용이 가능해짐. 이들은 각각 제니방적기, 수력방적기, 뮬 방적기를 발명. 뮬 방적이는 제니방적기와 수력방적기를 혼합한 형태임
- 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본은 "산업혁명을 노하는 자는 모두 면직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지적.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새로운 기계의 발명으로 수많은 방적기와 방직기가 쓸모 없어짐. 새로운 공장이 탄생하기 전인 18-19세기에 기계파괴 시도가 일어남. 1721년 법 제정 직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인기수입품은 인도산 실이었으나 기발한 기계가 발명된 이후에는 원면이 산업혁명의 소재이자 교역품으로 떠오름. 1720년대 초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수입한 원면은 150만 파운드였는데, 1790년대 말에는 3000만 파운드로 급증
- 영국 동인도회사는 17세기에 향료제도를 네덜란드에 빼앗기면서 인도의 섬유로 눈을 돌렸듯, 18세기에는 완성된 면직물과 실크라는 고수익 무역을 빼앗기자 무게중심을 다시 옮겨다. 이번에는 중국과의 차 무역이 새로운 관심분야였다.
- 차와 설탕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었으며 소비량이 나란히 증가. 설탕 생산자들은 차 소비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차 마시기를 장려. 영국 동인도회사 역시 설탕에 같은 입장을 취함. 18세기에는 영국에서 수천 킬로 떨어진 곳,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되는 차와 설탕이 귀족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애용하는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 17-19세기 신세계에서 유럽으로(커피, 면직물, 설탕, 럼, 담배), 유럽에서 아프리카로(섬유를 비롯한 제조품), 아프리카에서 신세계로(노예) 대성양을 횡단하여 일어난 삼각무역이라는 상거래에 대해 대부분 학생들이 배움. 하지만 전체 그림을 지나치게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단거리 교역은 무시되었음. 예를 들어 영국 선박은 자메이카에서 필라델피아로 인디고 염료를 싣고 간 다음 옥수수를 선적하여 런던까지 나르고, 런던에서는 양모를 실어 르아브르로 이동하고, 거기서 프랑스 실크를 실어 아프리카 노예해안으로 떠났을 것이다. 한편 동양에서는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영국은 캘리코에 열광했고 차에 취했지만, 자급자족하고 자기만족 상태인 중국인의 물건과 교환할만한 교역품을 찾기가 만만치 않았음. 대서양에서처럼 원활히 진행되는 체계가 필요했음. 대서양 삼각무역의 한 축이던 노예무역이 이후 수백년 동안 인종관계를 악화시켰듯, 19세기 인도 및 중국과의 불평등한 교역은 오늘날까지도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1. 자유무역의 승리와 비극
- 중국에서 동양과 서양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로 나뉜 지역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중국에는 교역이란 개념이 없었음. 황제는 조공을 받을 뿐이었고 그 대가로 외국의 탄원자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식. 하지만 조공을 받고 하사품을 전달하는 교환행위는 현실적으로 다른 아시아 상업중심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교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 중국은 영국이 시암같은 일반적 속국이라고 크게 착각했고 그 오판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 아편으로 중국 전체 인구와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통념은 오해다. 첫째, 마약은 가격이 꽤 비쌌기 때문에 대체로 고위관리나 상인이 소비. 둘째, 주류와 마찬가지로 마약도 사용자의 일부에서만 치명적 중독현상이 나타남. 악명 높은 아편굴도 지저분한 명성과는 거리가 있었음.
- 황제와 고관들은 아편에 의한 심신약화에 도덕적 분노를 표출.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한 대목은 마약이 무역수지에 미치는 악영향이었음. 중국은 17세기 유럽의 여느 군주들처럼 유럽형 중상주의 이론을 지지. 1800년 이전의 차 교역은 중상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에 매우 유리했음. 영국 동인도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1806년을 기점으로 은의 유출입 흐름이 바뀜. 1806년 이후 중국의 아편수입량이 차 수출량을 넘어섰고, 중국 은이 처음 해외로 유출되기 시작. 1818년 이후에는 은이 중국 수출품에서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음.
- 사회규범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변하곤 한다. 예를 들어 1600년에는 개화한 유럽인조차 흑인 노예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따. 1800년에 유럽인이나 다수의 중국인은 영국이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늘날 아편 못지 않게 중독성이 강한 담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전 세계에서 윌리엄 자딘과 제임스 매디슨의 후예들이 적극적으로 담배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 1776년 국부론 발간 이후 1846년 곡물법이 폐지되기까지 스미스, 리카도, 코브던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의 이론적 정치적 기반을 닦음. 글로벌 경제는 코브던-슈발리에 조약의 체결 이후 수십년 동안 전성기를 누림. 보호주의자들은 값싼 수입 농산물 때문에 농민들이 재앙을 맞을 것이라 예상. 처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품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 하지만 곡물법이 폐지되고 한 세대 후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러시아에서 저렴한 곡물이 쏟아져 등러와 영국과 유럽대륙의 농민들을 덮쳐다. 1913년 영국은 밀 소비량의 80%를 수입했지만, 20세기 초 사리 판단이 분명한 영국인 가운데 나라의 산업기반을 놔두고 과거의 농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세계 곡물의 침입이 유럽대륙에서는 각기 다른 형태로 전개됨 1880년대에 처음으로 자유무역에 대한 거센반발이 일어난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그러한 흐름이 유지됨. 새로운 글로벌 경제에 대한 19세기의 반응은 21세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유무역이 전반적으로는 인류에게 이익을 안겨줬어도, 새로운 질서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패배자들도 양산했음

12. 기술혁신과 대륙횡단 무역
- 자유무역론자와 보호주의자 사이으 갈등이 남북전쟁 발발에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1861년 남부 6개주의 분리독립과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부는 군자금이 필요했으며, 나중에는 연금과 재건에도 자금이 절실했음. 이 모든 비용을 감당하려면 수십억 달러의 수입세를 거두는 수밖에 없었음. 이제는 남부인의 성가신 반대도 없었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관세장벽을 거리낌없이 세웠다. 이때 만들어진 가공할만한 관세장벽은 남북전쟁 이후 50년 이상 미국의 산업을 영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는 방패역할을 했다.
- 역사적으로 교역량의 증가는 늘 승자와 패자를 양산. 운송비의 하락 덕에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우크라이나의 농부와 목장 주인은 유럽대륙에 곡물과 육류를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었음. 반면 저렴한 국산목재와 범선에 대한 전문지식에 의존하던 미국의 조선사는 영국의 증기선과 철강기술에 자리를 내줌. 1850-1910년에 대서양에서 운반된 화물의 5분의 2는 유니언잭(영국국기)을 게양한 선박으로 이동되었으나, 성조기를 단 선박으로 운반된 비중은 10분의 1에 불과했음. 인도 역시 패자에 속했다. 면직물과 황마 재배자들은 번영을 누렸으나 범선 위주의 해운업은 증기선과 수에즈 운하의 조합으로 황폐화되었음. 1차대전 발발로 인도 선박은 연안무역조차 할 수 없었으며 조선업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특파원처럼 낙관적인 관찰자들은 글로벌 교역이 빚어낸 기적에 놀라워했지만 반발은 반세기 이상 자유무역을 지연시켰으며, 파괴적 양차 대전이 발발하는 데 적잖이 기여. 오늘날 세계화를 둘러싼 투쟁에도 배경을 제공했다.

13. 대공황과 보호무역주의
- 영국과 1900년 이전 미국에서는 노동력과 자본이 같은 입장에 있다. 영국의 경우 보호무역이 유리함. 독일에서 자본과 토지를 가진 집단으 마르크스 주의에 기울던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반대. 이 경우 자본가와 지주는 철강과 호밀 연합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 텐데, 철강은 희소한 자본요소를 막대하게 투입해야 하는 산업임. 독일의 도시 노동자들은 자유무역을 원했음. 풍부한 요소인 노동력을 가진 집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세계관에도 적합했기 때문. 자유무역은 산업발전과 완전한 자본주의로 이어지고 이후 필연적으로 균열이 일어난 다음 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레시피에 반드시 팔요한 재료였음. 지나치게 논리적이었던 마르크스는 관세에 반대했다.
"우리 시대의 보호주의 체제는 보수적인 반면 자유무역 체제는 파괴적이다. 과거의 민족을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적대감을 극단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한마디로 자유무역 체제는 사회혁명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 같은 혁명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한다."
- 20세기 전반 전 세계 애국자들은 세계를 자기 터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큰 고통을 야기했음. 미국은 보호가 보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한 나라에 수입이 없으면 수출도 불가능함. 또한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하기 전에도 무역전쟁이 실제 전쟁을 촉발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고립주의와 보호주의가 대재앙에 기여했음을 감지했다.
- 근대 세계화의 역사는 크게 4개 기간으로 나뉨.
1기는 1830-85년으로 운송 및 통신비용이 빠르게 하락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로 무역량이 크게 증가하며, 임금, 지대, 임차료, 금리가 세계적으로 수렴하던 시대.
2기는 1885-1930년으로 아메리카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유럽의 보호무역론자들의 반발을 일으킨 시기. 운송비가 지속적으로 하락한 덕분에 반발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3기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통과된 1930년에 시작되었고, 운송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했으나 대대적 관세인상에 그 효과가 묻힘.
4기는 1945년에 시작되었으며, 미국이 앞장서서 자유무역을 주창한 시기로서 세계무역의 수문이 열림. 세계무역의 실질가치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후 50년 동안 연간 6.4% 수준을 기록. 1945-98년 세계 무역량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5%에서 17.2%로 증가

14. 세계화를 둘러싼 논쟁
- 선박은 과거에도 그랬듯 가까운 미래에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장거리 운송수단으로 각광받을 것임. 따라서 원활한 해상교역을 위해서는 요충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함. 고대 이래 유럽의 상인과 해군은 전략적 해협과 해로의 가치를 인식했고, 차지하는 경로에 따라 기근으로 고통받는 나라가 갈리기도 했음.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는 2500년 이상 해상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바스코 다가마의 경로로 인도양을 탐험하는 유럽인의 최우선 목표는 말라카, 호르무즈,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통과였으며 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상황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며, 과거와 비교해 수에즈와 파나마라는 두 곳의 인공 요충지가 더 생겼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세계 교역의 80%가 선박을 통해 일어나며 대다수 선박은 요충지 일곱 곳 가운데 한 군데, 때로는 두세 군데를 지나기도 한다.
- 자유무역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무역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과장해 왔음. 19세기 역사는 무역이 성장의 엔진이라는 주장에 의문부호를 던짐. 만약 자유무역이 국부를 창출하는 길이었다면 역사상 최고수준의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절대 번영할 수 없읐을 것임. 유럽은 관세인하의 황금기인 1860-80년의 성장률이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던 1880-1900년보다 더 높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호무역주의 기간이 성장류이 더 높았음. 또한 1880년 이후 보후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유럽의 경제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영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음.
-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자들도 이 점을 놓치지 않았으며, 1996년 대통령 선거후보였던 패트릭 뷰캐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음
"워싱턴, 해밀턴, 클레이, 링컨과 이후 공화당의 대통령이 쌓아올린 관세장벽의 뒤에서 미국은 농업이 주를 이루던 해안 공화국을 세계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산업국가로 만들었다. 불과 한세기 만에 이룬 성취는 오늘날 폄하하는 보호무역정책이 성공을 거둔 결과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는 뷰캐넌 만이 아니다. 다수의 경제사학자들이 뷰캐넌과 의견을 같이 하는데, 그중에는 폴 베어록같은 저명한 학자도 있음. 근대의 계량분석기술은 자유무역을 19세기성장의 엔진으로 볼 증거가 취약함을 확인시켜줌. 엄격한 계량적 연구는 오히려 1800년대 보호무역주의가 실제로는 경제발잔을 이끌었음을 시사. 19세기 초 미국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마크 빌스가 수행한 민감도 분석은 해밀턴, 애덤스파, 케어리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줌. 높은 관세가 아니었다면 "뉴잉글랜드의 산업부문은 절반이 파산했을 것이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케빈 오루크도 19세기 유럽의 부유한 8개국과 미국 및 캐나다에 대해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관세수준과 경제성장률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남. 관세율이 높을수록 나라가 더 나은 성과를 낸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의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림
"19세기에 관세와 성장률이 양의 상관관계에 있었다는 베어록의 가정은 성장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요소를 통제한 상황에서 최근에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에 적용했을 때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나타났다."
- 미국이 19세기 관세 인상이 이로웠다는 데 동의 하지 않는 무역역사학자들도 있음. 버클리의 브래드포드 들롱은 보호무역주의는 뉴잉글랜드 기업인들이 영국의 최첨단 증기선과 산업기술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지연시켰다고 지적. 관세인하가 기존 뉴잉글랜드 공장을 황폐화했을 것이라는 빌스의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번영을 누리고 자본집약적인 첨단 산업부문을 육성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들롱은 주장. 하지만 45년 이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경제사학자 에드워드 데니슨의 구체적 분석에 따르면, 50-60년 GATT 관세인하는 북부유럽의 성장률을 1% 정도 추가하는데 그쳤으며 미국에는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60년 이후가 되자 자유무역이 특히 개도국에 이롭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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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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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경생활이 정착생활에 선행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실제 벌어진 일은 그 반대였음. 일단 한 곳에 머물러 살게 된 이후에야 농경같이 오랜 시간 땅에 묶여 있어야 하는 활동이 가능해짐. 풍부한 야생곡물과 그로 인해 가능해진 정착생활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선행요소였다. 곡물을 주식으로 삼던 수렵채집민들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싹이 돋고 몇 개월 후면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아는 것과 그 동안 유지해왔던 생활방식을 버리고 농경을 주 생활수단으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농경이 효율적 식량확보수단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고되고 반복적 노동을 필요로 했음. 야생에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면 수렵채집민들은 굳이 힘들게 농사를 짓는 것보다 자연이 주는 것을 그대로 거두어들이는 쪽을 택했다.
- 결국에는 풍족한 식량공급에 안정적 정착생활이 더해져 나타난 인구증가가 이곳의 수렵채집민들을 농민으로 변화시킴. 한동안은 주변의 자연자원을 더욱 집약적으로 채집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어느 시점ㄴ에서 인구는 자연이 지탱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자연으로부터 그것이 허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수렵채집민들은 자연에 기술과 노동을 투입해 그것을 변형시켜야 했음. 농경이 시작된 것이다. 레반트의 나투프 문화에서는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3천년이 지난 후에야 농경사회가 나타났는데, 이는 수렵채집민들이 과거의 생활방식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줌
- 불리한 환경 때문에 농업생산력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서유럽은 동방에 비해 발전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적 불리함은 중세 이후에 오히려 서유럽을 전근대적인 고착상태에서 끌어올리는 조건으로 작용. 불리한 자연환경에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힘에 의한 생산력의 증폭효과가 필요했음. 달리 말하면 서유럽에서는 농업생산력의 증가가 시장이 성장한 이후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무력집단이 시장의 확장에 의해 증가된 농업잉여의 일부를 흡수하며 성장했지만 시장을 억누를 만큼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다
- 지방분권적 무력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의 수는 보통 많아야 수천 명 정도. 당시의 낮은 생산력으로 이보다 큰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 이렇게 전투가 소규모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수의 귀족 전사들이 전장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병사들을 먹이고 무장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전장에 동원되는 병사들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10배 이상으로 증가. 전국시대에 중원의 왕국들은 작으면 수만에서 많게는 십만 이상의 병사들을 전쟁터에 보냈다.
- 귀족전사는 농민들에게 기생하며 군림하는 이들의 계급적 특성상 그 수가 적었다. 서기 981년 독일제국에는 다 합해야 5천~6천 정도의 기사가 있었고, 1200년경 일본에는 비슷한 숫자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수만 명 이상이 맞붙어 싸우는 대규모 전장에서 소수의 귀족전사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평민병사는 일반대중이라는 거대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적은 비용으로 무장할 수 있는 보병으로 싸웠음. 장평에서 희생된 조나라 병사들은 대다수가 보병이었고, 마우리아 군대의 주축도 엄청난 수의 보병이었음.
- 양질의 무장을 갖추고 잘 훈련받은 평민병사는 귀족적 군대를 상대로 대등함 이상의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오만한 귀족들은 전장에서도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했음. 중세 유럽의 전쟁사를 보면 귀족기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투를 패배로 이끄는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음. 이러한 반항적 군대를 가지고 정교한 전술을 펼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돌격해서 상대진영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기사군대가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술이었다. 이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전투는 귀족전사들이 서로를 향해 돌격하여 싸움을 벌이는 단순한 결투의 성격이 강했음. 반면 평민병사는 귀족들보다 상관의 명령을 잘 따랐다. 비록 이들은 개인적 전투능력은 떨어져도 다양한 병과를 이루어 효율적 전술을 운용하기에 용이했음.
- 백년 전쟁 동안 영국군의 보병중심 군대가 그들보다 규모가 큰 프랑스의 기사중심 군대를 상대로 연속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평민군대의 이점이 작용한 결과. 프랑스의 기사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지형에서도 무모하게 돌격을 고집하다가 진영을 잘 갖춘 궁수와 보병에게 거듭 참패를 당했음. 귀족전사들은 전장을 주도하던 위치에서 밀려났고 그 자리는 대규모의 평민보병에게 돌아갔다. 유럽에서 이러한 전환이 가장 앞서서 일어났던 곳은 남쪽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빨랐던 스페인이었다. 테르시오라는 밀집보병 전술을 사용한 스페인군은 1503년 체리뇨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이후 수십만의 압도적 병력규모를 바탕으로 140년 동안 군사적 패권을 유지했다. 대규모화된 전투에서 귀족기사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 돈키호테는 기사의 영광이 이야기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환상으로 전락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 전사귀족이 지배하는 지방분권적 사회질서가 무너진 이후 세 지역에 나타난 변화상을 보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임. 역사학자 에버하르트에 의하면 "만약 그 후 역사의 진행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시의 중국을 관찰한다면 명백한 변화의 흐름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중국에는 시장경제 대신 전제적 황제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20세기초까지 중국을 지배. 그 원인은 이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무력집단이 성장해 나왔기 때문.
- 왕의 통제하에 있고 항시적으로 유지되는 군대를 얻은 중앙권력은 그것을 적군가 싸우는 데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는 데도 사용. 강력한 군사력을 얻은 중앙무력집단은 반항적 귀족들을 제압하고 지배력을 확장해감. 그렇다고 귀족들이 단순한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님. 군사적으로 무력해져 생산자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귀족들은 중앙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관직을 차지함으로써 다시금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됨. 다만 과거와 같이 귀족들이 권력을 사적인 세습재산으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관직을 잃으면 그에 따르는 권력도 사라짐. 시장과 중앙권력은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증가한 농업잉여를 흡수하며 동시에 성장. 당시 인도와 중국사회를 보면 한편에서 상인들이 거부를 모으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거대한 제국이 잉태되고 있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자신들을 하층 카스트로 취급하는 브라만교에 반발한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에 힙입어 브라만교를 위협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 역시 불교를 후원했던 아소카는 인도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여불위는 상업을 통해 모은 막대한 재산을 이용해 재상의 자리에 오름. 그의 아들로 의심받은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고, 그것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다스렸다. 유럽에서도 상공업이 발달한 근대 초기는 절대왕정의 시대였음. 이 시기는 지방분권적 무력집단의 지배에서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지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음. 지방귀족들의 권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아직 중앙 무력집단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자 일시적으로 무력집단 지배력의 공백기가 생겨남. 그 결과 무력집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잉여가 시장에 공급되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활기넘치는 시대가 나타남. 그러나 일단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강력한 형태를 갖추고 나면 시장과 무력집단의 부자연스런 동거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집중된 힘은 지방분권적 무력집단보다 훨씬 강한 중압감으로 사회와 시장을 짓누르기 시작.
- 무력집단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될수록 지배계급이 문인화되는 현상이 나타남. 군대가 미천한 평민들로 채워지자 군인이 되는 대신 귀족들은 거대한 군대와 그 군대에 의해 뒷받침되는 관료조직을 관리하는 문인관료로 탈바굼. 지배계급이 문인화되었다고 해서 무력집단이 생산자들을 지배하는 근본적 수단이 바뀐 것은 아님. 관료들은 그 수하에 그들을 대신해 폭력을 행사할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음. 과거 귀족들이 무기를 들고 직접적 무력을 행사했다면 이제는 국가의 군사조직을 통제함으로써 무력을 행사하게 된 것.
- 일본은 250개간 넘는 번국으로 나누어져 있었음. 이렇게 잘게 분열되어 있는 일본의 무력집단은 사회에 대한 장악력이 중앙집권적인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약했음. 때문에 지속적으로 농업산출량이 증가하는 동안에도 다이묘들은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늘리는 데 어려움을 겪음. 그 결과 농민들에게 지워진 세금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짐. 덕분에 일본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상당히 높았음. 19세기 일본인의 평균수명은 35-45세 정도였는데, 이는 동시대 청나라보다 10년 이상 높고 동시대 서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음.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이미 일반대중들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정도의 여유가 있었음. 에도막부 말기에는 전체 남성의 40%와 여성의 10%가 정규교육을 받음. 덕분에 남성 인구중 절반 이상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아주 높은 수준이었던 일본의 교육수준은 이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 농민들의 손에 남은 잉여는 시장에 공급되었고 그 결과 경제의 상업화가 진행되었음. 막부 말기에 이르면 일본의 많은 지역에서 과거의 자급자족적 농업은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생산하는 상업적 농업에 자리를 내주었다. 농경사회에서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이 상업화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서유럽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일어날 수 있었던 전제조건이었다.
- 에도 시대에 시장에 공급된 농업잉여는 각종 사적 기업을 번창시켰다. 이 시기에 형성된 기업전통, 상업자본, 상업망과 금융망 등은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음. 상업화된 농업은 높은 생산력은 근대화에 필요한 비용을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또한 상업적 농업하에서 임금노동에 익숙해진 일본의 농민들은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노동형태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다.
- 그리스와 동양의 제국들 사이에 존재했던 정치체제의 차이는 무력집단과 생산자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스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무력집단의 성장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적인 정치체제는 고대 그리스 이전에도 많은 지역에서 나타났다. 사실 인류가 수렵채집민으로 유랑하던 시절 인간사회는 전체적으로 아주 평등했다. 권력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현상은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 무력집단이 성장하면서 나타났다. 고대그리스처럼 농경문명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이후에도 민주적 체제가 시행된 경우는 예외적이기는 했지만 고대 그리스 이외에도 여럿이 존재했다
- 기원전 8세기 그리스는 급속한 경제적 팽창을 경험했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인구가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리스인들은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부족해진 토지를 찾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림. 그리스인에 의한 지중해 연안의 식민활동이 시작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져 금속이 보다 싼 가격으로 유입되었고 동방에서 새로운 금속기술이 도입되어 무기를 만드는 비용이 내려감.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데다 무기의 평민들이 가담하면서 중장보병의 규모가 커지자 과거 소수의 귀족들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대규모 보병군대에 적합한 밀집방진 전술인 팔랑크스가 나타났다. 무장을 갖춘 평민들은 귀족들의 권력독점에 도전했다. 견고하게 뿌리박힌 귀족 셀겨에 맞서기 위해 평민들은 구심점을 필요로 했고 참주가 그 역할을 맡았다. 기원전 7세기 중반부터 일련의 야심가들이 평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귀족들이 장악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재정권을 수립. 참주의 권력은 평민을 지지기반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평민들이 귀족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를 필요로 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음. 평민들이 귀족들을 억제할 자신감을 갖게 되자 참주의 필요성은 사라졌고 그의 권력기반은 침식되어 갔다. 그리하여 참주정은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낀 평민들과 귀족들의 연합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후 그리스에는 시민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체제가 형성됨.
- 비록 경제발전으로 더 넓은 계층이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지만 모두가 청동갑옷을 마련할 만한 경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 아테네의 경우 남성시민의 40-60%는 무장을 갖출만한 여력이 없었따. 테테스라 불린 이들은 관직을 소유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가난한 시민들이 국가의 군사력에 기여할 기회는 바다에서 찾아왔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해안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상 그리스에서는 해양활동이 활발했고 해군의 중요도가 높았다. 영화 벤허에서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가며 노를 젓는 것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갤리선의 노를 젓는 자리에는 노예가 아닌 시민들이 선호되었다. 국가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예들에게 함대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꺼림칙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노예들에게 노를 젓는 자리를 맡길 때는 전투가 끝난 후 시민권을 주기로 약속하거나, 아니면 노예들을 먼저 시민권자로 만든 후에 노를 잡게 했다.
- 그리스의 민주적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음. 비록 그리스의 민주적 전통이 최후를 맞이한 것은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군대에 짓밟힌 이후였지만, 그리스의 시민권력은 마케도니아에 의한 정복 이전부터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로간에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만성적인 전쟁상태에서는 전문적인 군대가 필요했음. 농지를 돌봐야 하는 시민군대를 무한정 전쟁터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의 권력기반이었던 시민전사의 전통이 부식되었고 용병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력자들에게 권력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만들었다. 또한 점증하는 군사적 분쟁은 그 안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군지도자들의 입지를 강화시킴. 그 결과 군대를 기반으로 한 군주제가 자라났다.
- 동부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일련의 대제국인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는 모두 상대적으로 척박한 농경지역에서 기원한 민족들에 의해 건설됨. 사막의 유목민 베두인들로부터 주로 병력을 제공받았던 초기 아랍제국의 군대는 농민출신은 아니었지만 역시 가진 것이 많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리스 로마인들의 군사적 성공은 가난했기에 더 강한 보병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민족들이 부유한 문명들을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던 당시의 역사적 흐름의 일부였다.
- 가난했기 때문에 무력집단의 성장이 억제되서 군사적으로 강력했던 민족이 제국의 주인이 된 후 부유해졌지만 그 결과 무력집단의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군사적으로 약화되어 제국의 붕괴로 이어지는, 말하자면 배고픈 늑대가 배부른 돼지가 되는 과정은 아시리아 이후에 등장했던 다른 제국들도 겪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로마제국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기원전 7세기까지 로마인들이 전투를 치르는 방식은 고전시대 초기의 그리스와 비슷했다. 무장을 갖춘 귀족전사들은 개별적으로 적과 전투를 벌였고 이들의 뒤에는 무장을 갖추지 못한 평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다녔다. 이후 그리스에서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변화과정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더 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6세기를 거치면서 부유해진 로마는 오두막집들이 모여 있던 촌락에서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했다. 같은 시기에 그리스의 팔랑크스 전술이 되입되어 4천명 정도로 이루어진 중장보병 군단이 조직되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자비로 무장을 갖출 여유가 있는, 토지를 보유한 농민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철기제조술의 전래이후 로마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뒤덮고 있던 울창한 숲이 철제 도끼에 의해 잘려나가 농경지로 바뀌었고 철제보습을 단 쟁기로 보다 수월하게 땅을 갈 수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수많은 단위로 쪼개져 있던 부족들이 통합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해 가던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성인 남성중 10%는 군대에 있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2백만명 이상이 군복무를 하고 있었던 셈. 이탈리아 남성들은 평생동안 최소 4년을 군대에서 보냈음. 당시 마넝적 전쟁상태에 있던 이탈리아에서 이들의 군생활은 거의 항상 실전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병사들은 오랜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베테랑 군인들이었다. 이탈리아가 로마에 의해 통합된 후 이탈리아의 강인한 병사들은 로마의 군대로 편입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정복을 완료시킬 동력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 범이탈리아출신 중장보병이었다.
- 전쟁은 로마인들에게 있어 일상적 삶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들의 사회는 전쟁을 위해 짜여졌고 무를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잡음.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군사적 업적이 필수. 로마역사상 최고 부호였떤 크라수스가 굳이 말년에 그에게 비참한 죽음을 선사해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난 이유도 그에게 모자랐던 전쟁터에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였음. 로마인들은 이웃민족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군사기술을 다듬어갔다. 초기에는 단순히 그리스의 팔랑크스를 모방한 수준이었던 로마군단은 수많은 전투와 패배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개조를 거듭해 극도로 효율적인 전쟁기계로 진화해감
- 농업생산력이 낮은 서유럽에 중앙집권적 제국이라는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는 형태이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대의 고속도로였떤 지중해를 통해 농업생산력이 높은 동방엣 생산된 잉여를 서방으로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던 서방이 동방을 정복하고 그 부를 강탈하여 제국의 지배도구인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지탱시킨 것. 당시 제국의 세입에 대한 자세한 수치상의 정보를 알 수는 없지만 이집트 한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입이 제국의 전체 세입의 최소 3분의 1에서 많게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방의 군사력이 약화되자 동방으로부터 제국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를 빼앗아 올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이후 로마시는 더 이상 제국의 권력중심지가 아니었다. 북부 발칸 출신 장군들은 그들의 군사기지에서 제국을 통치하다가 324년에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겨버림. 이제 동방의 잉여는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로 흘러들어감. 로마시로 향하던 이집트의 곡물 수송선들은 새로운 로마시로 방향을 바꿈. 이후 동방의 잉여로 유지되던 서방의 제국은 필연적 붕괴를 향해 나아갔다.
- 부유한 동양의 문명들에서도 과거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시기에는 지방분권적 사회가 나타나지만 그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서유럽보다 2천년 정도 앞서서 서유럽에서 나타났던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봉건적 사회가 형성되었음. 중세의 서유럽이나 동시대의 동양이나 정부가 운영되는 방식은 달랐어도 그것은 근본적 원리는 동일했다. 바로 폭력이었다. 중세 서유럽을 지배하던 자들은 전사계급이었다. 이들은 견고한 성채에 거점을 두고 군사력을 통해 주변지역을 지배했다.
- 우리에게 익숙한 말을 탄 기사는 9세기 이후에야 널리 퍼졌다. 그 이전까지는 귀족들도 주로 보병으로 싸웠다. 자유민 전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초기 프랑크 왕국의 군대는 거의 전적으로 보병이었다. 가난한 자유민 병사들은 방어장비를 거의 갖추지 않고 전장에 나감. 갑옷은 고사하고 투구를 쓴 자도 많지 않았다. 이 시기 프랑크족과 전투를 치른 비잔틴 사람들은 이들을 반쯤 벌거벗은 보병으로 묘사. 군대의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값비싼 장비인 중장갑과 말의 사용이 늘어났다. 그러나 8세기가지는 과거의 보병중심적인 성향이 이어졌다. 프랑크족 기병들은 말을 전장으로 이동한 뒤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웠다.
- 1439년 국왕에게 프랑스 최초의 상비군이 주어졌고, 또한 그것의 유지를 위해 전국적인 세금을 부과할 권한이 부여됨. 전문적이고 규율잡힌 군대를 얻은 프랑스는 곧 영국의 침략군을 그들의 국토에서 몰아냈다. 새로운 형태의 군대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더 우월한 군사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18세기까지 귀족기병에 의존한 폴란드처럼 변화에 뒤처진 국가는 외국군대에게 정복당해 지도상에서 사라짐. 프로이센은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의 군대에게 짓밟힌 후 국왕에게 강력한 상비군을 쥐어줌. 이 변방의 소국은 약 2세기 후 독일 전역을 통일. 강력한 군대를 손에 넣은 유럽의 군주들은 약 2천년 전 전국시대 중국의 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시기였는데, 이 시기 동안 전쟁이 없었던 해는 다 합해 10년 정도에 불과. 주변국들과의 군사력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군대의 규모를 늘려감.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군대규모는 1530년과 1710년 사이에 10배로 증가.
- 군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을 통제하는 국왕의 권력도 증대됨. 과거 지방에서 독자적 지배자로 행세하던 귀족들은 중앙권력에 복속되었고,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왕의 통제를 받는 관료조직이 들어섰다. 거대한 국가권력기구의 정점에 선 왕은 유일한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이른바 절대왕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에서 절대주의의 시대를 연 것은 가장 남쪽에 위치해 농업생산력이 높았던 스페인이었다. 16세기 카스티야의 몇몇 농장에서는 밀의 파종량 대비 수확량이 8배에서 9배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1500년 무렵 영국과 프랑스의 수확량은 파종량의 5배를 조금 넘는 정도였고 독일에서는 이 수치가 5배 아래였다.
- 무거운 쟁기의 보급에 의해 촉발되었던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13세기에 이르러 한계에 다다랐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정체되었고 그 세기 말부터는 늘어난 인구를 먹이기 위해 고지대나, 모래땅, 습지같이 척박한 한계지까지 경작지가 지나치게 확장된 영향으로 평균 산출량이 감소하기 시작. 무거운 쟁기는 산업시대 이전에 농경에 적용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기술이었다. 중세 초기 무거운 쟁기의 확산 이후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농업에서 그와 같은 기술상의 혁신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서유럽이 과거 동방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천 년 동안의 정체상태에 빠져들 차례인 듯 보였다. 그러나 서유럽의 농민들은 기술상의 혁신이 아닌 새로운 동력에 의해 다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이루어내다. 이 새로운 동력은 바로 시장이었다.
- 파종량 대 수확량 비율 1:4라는 저조한 수치가 일반적이었던 13세기에도 예외적으로 높은 수확고를 거둔 몇몇 지역들이 있었다. 도시가 만들어낸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지역들이 그곳이었다. 됫의 시장은 농민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농민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그들이 가진 한정된 토지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식량을 생산하도록 노력했다. 높은 생산성은 노동과 자본을 아끼지 않고 투자함으로써 달성되었다. 도시의 시장과 연결된 지역에서 농민들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일했다. 일손이 더 필요하면 임금노동자들이 고용됨. 지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양의 거름이 시비되었는데, 이 중 상당부분은 외부로부터 구입되었다. 토지를 보다 집약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휴한지를 줄일 수 있는 농법과 가축의 수를 늘려 보다 많은 거름을 얻을 수 있는 농법이 시도되었다. 종종 근대농업의 혁신으로 지목되는 이러한 변화들은 근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에도 이미 존재했더 것이었다.
- 종종 근대 농업의 혁신으로 지목되는 이러한 변화들은 근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후기에도 이미 존재했던 것이었음. 다만 근대에 이르러 시장의 영향력이 확장된 이후에야 많은 노동과 자본이 소요되더라도 생산성이 높은 이러한 집약적 농경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됨. 시장이 발달함에 따라 또한 각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의 자연환경에 가장 적합한 작물과 가축에 집중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음. 과거 자급자족적 사회에선 각 지역이 거의 모든것을 스스로 생산해야 했기에 그 지역에서 잘 자라지 못하는 농작물도 재배해야 했다. 시장이 발달하여 교역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다른 산물들을 얻을 수 있게 된 이후에야 각 지역에 가장 적합한 작물로 생산의 집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서유럽은 정말 딱 적장한 환경에 위치해 있었다. 무겅누 쟁기의 도입 이후 기술적 요인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서유럽의 농업생산력은 사회를 과도기적 단계로 들어서게 할 정도의 수준에 있었다.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지방 분권적 무력집단의 지배가 해체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적 무력집단 역시 아직 미미한 수준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무력집단 지배력의 공백상태는 무력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난 잉여가 시장에 공급되게 만들어 시장이 성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음. 이후 시장의 성장에 의해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늘어난 잉여 중 일부가 중앙 무력집단에 공급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조금씩 성장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성장은 전적으로 시장의 성장이라는 1차적인 현상이 의존해 일어난 2차적 현상이었다. 시장이 먼저 성장한 다음에야 그것에 의해 증가한 잉여를 배분받아 중앙권력이 성장할 수 있었음. 따라서 중앙 무력집단의 성장은 시장의 성장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음.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어느정도 성숙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시장은 이미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일시적으로 중앙 무력집단이 과도하게 성장해 시장을 위축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장이 위축되면 시장에 의해 증가했던 농업생산력이 감소했음. 그 결과 농업잉여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중앙 무력집단 역시 위축됐고, 시장은 다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시장이 마침내 폭력에 이한 강제력을 밀어내고 사회의 지배적 원리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영국의 젠트리 역시 중세시대 전사귀족의 하부계층이었음. 그런데 중국의 소귀족들과 달리 젠트리들은 관료조직이라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의존할 수 없었음. 영국의 빈약한 중앙권력은 관료들을 먹여살릴 만한 자원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 지방 관리들은 거의 무료로 관직에 봉사했으며, 수입이 있는 관직이라도 수입이 일시적이고 변변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장에서 평민병사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더 이상 전사 지배계급으로 행세할 수 없게 된 영국의 소귀족들은 따라서 뭔가 다른 부분에서 수입을 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시장이 그 해답을 제공.
- 젠트리들은 그들의 토지를 세심히 관리하고 충분한 노동과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늘어난 산물은 시장에 판매하여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적용됐음. 이미 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경제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만 하면 시장의 성장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었고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자본가로 변모할 수 있었음. 젠트리들은 상업적 농업 외에도 상공업에 투자하는 등 생산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새로운 경제적 환경에서 가장 번영하는 계층이 되었다. 워릭셔 주에서 젠트리들의 평균 자산가치는 153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거의 4배로 증가. 평민 계층 중에서 농업과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자들은 젠트리 계층으로 편입되었음. 대귀족들은 경제적 논리가 지배적이 되어가는 시대에 그들의 하급자들보다 더디게 적응했다. 지나간 시대에서 누렸던 권력이 컸던 자일수록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 그 결과 대귀족들은 16세기말 한때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영국의 조그만한 왕실은 대귀족들 중 아주 일부에게만 충분한 수입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때문에 대귀족들도 결국에는 생산활동에 발을 들여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로 관심을 돌린 대귀족들은 17세기에 상당한 경제적 회복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영국의 귀족계급은, 특히 그 중 젠트리는 훗날의 자본가계층의 시조와 비슷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이미 생산자로 전환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났던 귀족과 생산자들 사이의 대결이 일어나지 않았다. 생산자와 충돌을 일으킬만한, 진정한 의미에서 무력집단이라고 할 만한 것은 허약한 국왕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 한때 학계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을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학자들이 양측의 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상태를 세미랗게 조사해본 결과 이러한 부르즈아 혁명이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싸움은 무력집단과 생산자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 양측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젠트리들은 이미 시장으로 돌아서 있었다. 한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문제는 부르주아가 양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양측에서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차이는 종교였다. 랭커셔에서 의회파에 가담한 귀족의 73.6%가 청교도였던 반면 왕당파에 가담한 귀족의 65.5%가 카톨릭 신자였다. 많은 수가 그들이 속한 지역이 어느 쪽에 서기로 결정했느냐에 따라, 또는 점령당했는가에 따라 편을 정했다. 그 외에 각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이상, 왕에 대한 충성심 및 동정심, 혹은 전쟁에 뛰어들어 한 몫 잡아보려는 계산 등이 어느 편을 택할지에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젠트리들은 내전에 무관심했고 분쟁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꺼려했다. 젠트리의 60% 이상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미 지방에서 사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중앙에서도 의회를 통해 왕권을 제약할 수 있었던 젠트리들은 왕권의 소멸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었다. 기득권층인 이들은 현재의 사회가 격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음. 그래서 의회파의 편에 섰던 의원들에게도 국왕자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었음. 의회파와 왕당파 의원들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이미 제한적인 왕권을 더 깎아낼 것인지 말 것인지에 있었다. 의회파는 왕당파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찰스 1세게에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다. 그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스코틀랜드 군대를 끌어들여 일어난 2차 내전이 진압된 후에도 의회는 여전히 국왕과 협상하는 쪽을 택했다.
- 영국에서 절대왕권을 세우려고 했던 찰스 1세의 헛된 시도가 야기한 사건들은 당시 사회의 주도권이 이미 무력집단에서 시장으로 넘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국에서는 기후적 조건 때문에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시장의 성장이 일어난 후에야 그것에 의해 증가된 농업잉여를 공급받아 성장할 수 있다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는데, 섬나라의 특성상 군사력까지 갖지 못한 영국의 왕실은 잉여흡수능력이 더욱 떨어져 발육부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시장에 더 많은 잉여가 공급될 수 있게 해주었고, 또한 중앙 무력집단에서 수입원을 찾지 못한 지배계층이 생산활동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덕분에 경제성장에 아주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었다. 1600년에 이를 때까지 영국의 경제는 당시의 최고 선진지역이었던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비교해서도 조금 뒤처져 있었다. 17세기에는 대륙에서 군대의 규모와 함께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급성장하면서 대륙이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퇴보와 정체상태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 국왕의 권세가 절정에 달했던 태양왕의 치세는 경제적으로는 침체의 시기였음. 중세 이후 유럽 상공업의 중심지로 독보적인 경제발전을 구가하던 네덜란드 역시 비대해진 군대와 관료조직에 발목이 잡혔다. 주변이 대국들이 가하는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17세기말 인구 200만의 네덜란드는 10만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군대와 관료조직은 그 무거운 유지비용으로 경제를 짓눌렀다. 17-18세기 네덜란드의 세금부담은 영국보다 몇 배 이상 무거웠다. 또한 국가의 관료조직이 제공하는 짭짤한 관직은 사람들의 관심이 생산적인 활동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18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는 자들은 대부분이 관직을 가진 자들이었음.
- 영국에서는 대륙의 국가들이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에 깔려 허우적거리던 시기에 시장이 성장이 지체없이 이어졌다. 시장의 영향력이 확산되면서 과거에 예외적인 일부 지역에서만 달성되었던 높은 수확량이 18세기 말이 되면 영국의 일반적 농업생산력이 되었다. 1600년경까지만 해도 영국 농민들의 노동생산성은 프랑스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지만 1700년경에 이르면 프랑스보다 15% 이상 높아졌고 1800년경에는 그 차이가 44%로 벌어짐. 시장의 생산력 증폭현상은 농업뿐만 아니라 공업에도 적용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산업혁명이었다. 최근 들어 학자들은 산업혁명의 연속적 성격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8세기 후반 이전에도 시장의 성장과 함께 공업생산성의 꾸준한 발전이 이어졌음. 우리가 산업혁명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이 성장속도에 급격한 가속이 붙은 시기였다.
- 무역과 식민지에 의해 창출된 해외시장도 공업품의 수요를 만들어내는 데 어느정도 역할을 했으나, 당시의 산업성장을 주도한 것은 역동적으로 성장하던 내수시장이었음. 시장의 성장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혁명적 발전은 산업사회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식량생산량이 급증함에 다라 16세기 초에 200만명이 조금 넘었던 영국의 인구는 18세기 말에는 800만 이상으로 증가. 늘어난 인구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상품이 소비될 잠재적 시장을 제공해줌. 또한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농가소득을 증가시키고 식품가격을 하락시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산업생산품을 구매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해줌. 1750년경 영국 농업의 노동생산성은 전체 인구의 46%를 차지하는 농업인구가 54%의 비농업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었음. 더 이상 땅을 일굴 필요가 없게 된 사람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공장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이 아닌 다른 부분에 종사하는 사회는 더이상 농업사회가 아니었다.
- 프랑스에서 중앙무력집단의 성장은 시장의 성장이라는 1차적 현상에 의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거기서 나온 잉여를 분배받아 일어난 2차적 현상이었다. 중앙 무력집단은 시장의 성장이 먼저 일어난 이후에야 그것에 뒤따라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시장을 중앙무력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음. 17세기에 중앙무력집단이 지나치게 성장하여 시장을 짓누르자 농업생산력이 정체 또는 감소됨. 농업잉여의 공급이 정체 또는 감소하자 중앙무력집단의 성장은 중단되었고 그 결과 시장에 가해지는 압박도 누그러짐. 그리하여 시장은 태양왕의 시대를 살아남았고 18세기에는 다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1715년 이후 프랑스 경제는 17세기의 정체에서 탈출하여 긴 성장국면에 진입했다. 루이 14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프랑스 교역규모는 5배로 증가.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성장은 전에 없이 역동적인 것이었음.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연간 1%에 달해 당시 산업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영국의 0.7%보다 더 높았다고 추정했다.
- 영국의 귀족들과 달리 프랑스 귀족들은 번듯하게 성장한 관료조직과 군대에서 새로운 부와 지위의 원천을 찾을 수 있었음. 관직은 급료에 더해 수수료와 뇌물 등으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추가적 수입을 가져다줌. 왕의 신임을 얻어 고위관작에 오르게 되면 한순간에 부귀영화를 거머쥘 수 있었다. 과거 자신들의 지방을 호령하던 대귀족들은 관직가 관대한 연금, 하사금을 얻기 위해 왕의 궁전 주변으로 모여들었음. 귀족들은 거대하게 팽창한 왕의 군대에서 장교자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차지. 루이 14세 시대에는 2만명 가량의 장교가 있었는데, 그중 80%는 귀족출신이었음. 장교들은 일반 병사들보다 최소 10배 이상의 급료를 받았다. 17세기 말에 전체 귀족남성의 1/6, 군복무 연령대 귀족의 약 1/3에서 1/2이 군대에 속해 있었음.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부와 권력을 얻을 상당한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은 영국 귀족들과 달리 천한 생산활동으로 거의 돌아서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의 귀족들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것을 막아 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됨. 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 귀족들은 경제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만 하면 영국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본가로서 시장의 성장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임. 그러나 프랑스의 중앙무력집단이 제공한 기회는 귀족들의 관심을 묶어둘 만큼 충분히 화려했다.
- 시장의 발전에 의한 도시의 성장은 많은 수의 생산자들을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 집결시켜 생산자들의 조직력을 강화시켰고, 이 조직력은 필요시에 군사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중앙집권적인 무력집단의 지배를 받은 문명들에서도 농업의 높은 생산성으로 인해 농업잉여를 소비하는 도시가 발달. 무굴제국에서는 인구의 15%가 도시에 거주했고, 송나라에서는 인구의 20%, 고대 이후 이집트에서는 25%이상이 도시에 거주. 그러나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시는 생산자가 아니라 무력집단이 한 군데 모여 주변의 농촌지역을 지배하는 행정과 군사중심지로 성장. 상업과 공업 등 생산적 부분이 도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부수적인 수준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도시의 성장이 생산자들의 조직력과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송나라 카이펑은 파리보다 규모가 더 큰 도시였지만 그 인구 중 25만명은 관료들과 그의 가족들이었고, 도시의 안과 주변에 최대 30만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 장인들도 인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들 중 다수가 국가가 운영하는 작업장에 속해 있어 사실상 국가에 종속되어 있었다.
- 서유럽에서 도시의 성장을 가능하게 해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시장의 성장에 의해 이루어졌음. 따라서 도시의 성장은 시장과 연결된 생산적 부분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장의 성장에 의해 증가한 농업잉여의 일부를 제공받은 중앙집권적 무력집단의 행정조직이 도시에 더해졌지만 도시의 생산자적 성격을 잠식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루이 16세는 약 2만명의 군대를 파리 인근에 동원했지만 이 병력으로 파리를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
- 국가의 더 많은 구성원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주어질수록 더 많은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권리를 가진 국가를 위해 기꺼이 군사적 의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사회가 민주적이 될수록 국민의 역량 중 더 많은 부분을 외국과의 무력투쟁에 동원할 수 있게 됨. 즉 국가의 군사적 효율성이 높아짐. 과거 부족적 단계의 사회가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것도 이 때문. 부족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자유민 남성 전체를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음. 또한 이들은 무력집단에 의해 억지로 끌려나온 피지배자들보다 싸우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 무력집단은 그들 부 중 커다란 부분을 정치권력의 독점에서 얻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될 수 없었음. 반면 부르주아들은 무력집단과 달리 그들의 부를 기본적으로 경제적 수단을 통해 얻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독점을 포기하더라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민주주의와 타협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무기력한 패배로 부유한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정치체제로는 외국군대를 물리칠만한 국민적 역량을 끌어낼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들은 민중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정치적 양보를 했다. 하인을 제외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됨. 그로부터 약 한달 후, 갓 입대한 의용군으로 이루어져 훈련도 경험도 부족했지만 높은 사기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프랑스의 의용군은 발미에서 당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았던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아냈다.
-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장의 성장에서 비롯되어 일어난 두개의 혁명은 그것이 가지는 우월성으로 인해 곧 주변국가들로 확산되었다. 두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시장경제도 같이 퍼져나갔다. 대륙의 국가들은 앞다투어 영국에서 일어난 경제적 혁신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산업지역에 기계와 공장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바다 건너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나타남. 기득권층이 가졌던 특권의 포기를 의미했던 정치부분에세의 혁명은 전파가 더뎠고 많은 진통이 야기됨. 1814년 마침내 프랑스를 꺾은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랑스 혁명을 무효로 만들려고 시도. 그러나 시장경제가 퍼져나가면서 무력집단의 정치권 독점은 결국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국가간의 군사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국은 보다 넓은 계층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했다. 1807년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에게 패배하여 영토의 거의 절반을 빼앗긴 이후에 마침내 농노데를 폐지. 그로부터 약 60년 후에는 모든 남성에게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여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오히려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개혁의 결과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제압하고 독일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변화의 근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변화를 수용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식민화라는 결과로 지리적 불운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월등한 기술력과 생산력, 그리고 정치제도의 뒷받침을 받은 서양의 근대적 군대는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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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누이트족은 전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얼음 황무지에서는 권력과 영토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나은 것을 가진 그룹도 없다. 모두가 바다가 주는 선물로 먹고 살았다. 그러나 이누이트 역시 여러 이유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함. 이들에게도 살인은 낯선 것이 아님. 하지만 이누이트의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학살한다거나 마을 주민이 모조리 다른 마을 주민의 노예가 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조직적 학살이라는 뜻의 전쟁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이는 전쟁이 인간의 보편적 행위가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 공격성과 권력욕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의 공격성이 최악의 형태로 발현된 전쟁을 과연 이 세상에서 추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된다. 그에 관해서는 진지한 검토가 필요. 공격성은 단추 하나를 누른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님. 물론 억제할 수는 있지만 공격성을 억제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공격성은 차곡차곡 쌓이다가 언젠가 격렬한 폭력으로 폭발하고야 만다. 20세기, 축적된 폭력의 에너지는 두 차례에 걸친 대형 재앙으로 터졌다. 계몽된 현대는 전쟁을 이성의 수단으로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인류는 자멸의 벼랑까지 내몰렸다. 그러므로 수백년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전쟁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생각은 전쟁을 평화의 단절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전쟁이라는 정상상태의 중단으로 보았던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에 와서도 전쟁은 정당화가 필요없는 행위로 보았다. 분명 전쟁은 고난을 의미하지만, 삶이란 결국 끝없는 투쟁과 고난, 인내의 연속이 아니던다. 사람들은 전쟁을 추앙하지는 않지만 전사를 숭배하면 전사의 지도력과 무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했고 전사만이 자신들이 타고난 불행을 막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19세기까지 군인은 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직업의 관문이었다.
- 현대의 군국주의는 전쟁을 자연상태로 보았던 과거의 세계관에 빚지고 있음. 그 결과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자였던 헬무트 폰 몰트케는 전쟁을 '신이 만든 세계질서의 일원'이라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영원한 평화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결코 '아름답지 않은 꿈'이라고 말이다. 그는 말했다. "전쟁이 없다면 세상은 유물론의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전재이 순수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몰트케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전쟁은 자연성의 일반적 표현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폭력성을 근거로 한다. 전쟁은 자연재해처럼 외부에서 닥쳐 온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나온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증오와 평화를 향한 동경 역시 인간의 본성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렇기에 전재이란 극도로 모순되며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인류 사회의 현상인 것이다. 인간은 전쟁과 평화, 증오와 사랑, 권력과 무욕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줄타기를 하고 있다.
- 20세기의 참혹한 전쟁들에서는 과거의 기사도 정신 같은 것은 희미한 불꽃 정도만 살아 숨 쉴 뿐이었고, 그마저 전쟁의 와중에 자행된 온갖 대량 학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사도의 이상이 인류의 문화 발전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이 환상이고 희망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기사도는 교육과 공공생활에 잠재적 영향을 미쳤고, 사회의 윤리수준을 높여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투행위나 전쟁을 위대한 교육자로 치켜세우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다. 기사도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정신이었지만 기사들의 숭고한 시대는 지나간지 이미 오래다.
- 놀랍게도 서양세계에서는 전투기술을 숭고함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적이 없었다. 중세 기사도 시대의 검술은 전혀 그 맥을 잊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기독교가 너무 철학적이지 않은 종교였다. 유럽의 기사는 검술을 분쟁해결의 기술로 생각했을 뿐, 그들의 검술에는 철학이 없었다. 아시아인의 시각은 달랐다. 검술은 고도의 기술적 숙련일 뿐 아니라 정신적 깨달음을 이르는 길이었다. 뛰어난 기술과 정신적 깨달음은 둘이 아니다. 서로를 더 높여 주는 조건이 된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기사도가 처음부터 불교나 도교철학과 결합되어 발전했다. 불교나 도교는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무사 사무라이는 생과 사, 흥망성쇠를 초월하며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검은 사무라이의 영혼이다." 이 말은 사무라이의 충절과 자기희생, 경외심과 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을 상징. 동양 사상에서는 철학과 종교가 별개의 것이 아님. 사무라이의 검에도 영혼이 있다. 그래야만 검은 사무라이의 영혼이 될 수 있다. 이는 다시 검을 제작하는 기술의 철학을 요구. 때문에 일본에서는 검을 만드는 장인들이 존경을 받고 명성을 누렸다. 사무라이의 검은 죽음을 부르는 물건이 아니라 삶을 체현하는 방편이었다. 검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고 인간성을 해치는 악과 싸워 지상에 정신적 안녕을 불러오는 힘의 대변자다. 사무라이에게 전쟁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님. 무사는 죽을 수 있으나 악에 맞서는 전쟁 자체는 항상 삶에 기여. 그러나 정작 무사는 그런 생각조차 없다. 무사의 정신은 텅 비어 있다. 사무라이는 직관으로 싸운다. 모든 동작은 저절로, 동작 그 자체를 위해 탄생한다. 전쟁은 기술이다. 그림이나 음악, 다도, 꽃꽂이와 다르지 않다. 전쟁은 무엇보다 진리를 찾는 길이며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무사는 한가지만 생각한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운다. 적을 이기기 위해 앞만 보며 전진하는 것, 이것이 사무라이에게 필요한 전부임. 그렇게 하자만 정신과 신체가 완전히 자유로워야 함. 무사가 되려면 의지력과 혹독한 훈련과 철학, 종교가 뒷받침되어야 함. 이런 기초가 없다면 절대 대가에 이를 수 없다.
- 손자병법은 전쟁의 일반전술을 설명한 최초의 저서이자 가장 천재적 작품임. 보통 우리는 전략이라는 말을 군의 지휘와 전쟁계획에 관한 이론으로 생각함. 그러나 손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음. 그의 학설은 다양한 관심, 특히 이해관계와 목표가 충돌하는 경우, 다시 말해 개인이나 집단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등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상호행동의 모든 분야에 적용 가능. 나의 이념과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손자볍법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제시
- 종교는 사랑의 계명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인류사의 일부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걸까? 전쟁이 먼저일까? 종교가 먼저일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둘이 공존했다는 주장이 우세. 성경에서도 그런 면모가 엿보임. 기독교 최초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카인과 아벨의 형제간 대립과 살해는 신과 직접적 관련이 있음. 인간의 본성인 호전성이 종교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임. 종교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인간의 선한 면이 종교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인간의 선한 면이 승리하도록 돕지만, 승리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전쟁을 전제로 함. 사랑과 폭력, 이 둘의 대립은 수많은 종교에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물론 종교에 따라 정도이 차이가 있어서 동양의 종교가 서양종교보다 훨씬 평화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는 일신론과 관련이 있음. 유일신은 다른 신을 허용하지 않음. 이같은 신의 이기주의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지 않음. 신지어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임. 반대로 힌두교처럼 많은 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타 종교이 신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더구나 불교와 도교는 애당초 신이 없다. 동북아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종교전쟁이 덜 일어났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이는 동양의 종교가 교권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련됨. 동양의 성직자들은 명망은 누렸지만 세속적 권력은 갖지 않았다. 전쟁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 십자군 전쟁은 이른바 성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성전은 광신주의에서 태어나며 예외없이 실패하고 만다. 십자군 전쟁 전체(1096~1270)도 엄청난 실패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후의 역사가 입증하듯 종교전쟁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종교적 박해와 전쟁은 적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뿐이다.
- 십자군 전쟁을 촉구한 표면적 이유는 그리스 정교를 이슬람의 침공으로부터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비잔티움 전체가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박해는 십자군 기사들의 만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슬람 세계에서 존경을 받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도 많았음. 이 모든 것이 십자군 기사들의 탐욕과 거짓 신앙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슬람을 향한 그들의 증오는 이슬람의 증오를 낳았고, 결국 양측은 편협한 광신으로 맞섬. 그리고 광신주의의 대결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세계는 두터운 신앙의 커튼 뒤로 숨어버렸고 일부는 서구식 진보를 거부한 채 오늘날가지 커튼을 걷지 않고 있다. 십자군전쟁의 역사가 불행했던 이유는 순수한 신앙심이 후안무치의 탐욕과 인간 멸시로 뒤덮여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는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인간의 나쁜 측면까지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살인과 약탈도 쉽사리 신의 뜻으로 해석해버림. 그렇기에 종교는 그 어떤 파렴치한 행동에도 악용될 수가 있고 지금까지도 가장 위험한 문화의 폭발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유럽은 과거의 끔찍했던 역사 때문에 성급한 대응을 자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 참담했던 세월 동안 유럽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전쟁을 피하는 방법을 학습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다름. 미국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 대해 현대문명의 십자군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 한때 미국민 대다수가 현대의 십자군 이념에 휩쓸린 가운데 부시가 속한 감리교의 열성분자들이 이런 주장을 펼침. 유럽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유럽은 유럽연합에 터키를 받아들여 종교, 문화간 갈등을 완화하려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음. 이스라엘까지 가입시킨다면 금상첨화일 것임
- 30년 전쟁은 아직 미완성인 세 개의 나라가 유럽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스페인을 거느린 합스부르크 제국, 그리고 제국과 정치적 경계가 불확실했던 프랑스, 마지막으로 발트해의 지배자로 만족하지 못한 스웨덴이 그들이다. 이 3개국 모두 근본적으로 유럽의 지배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다.
-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협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원하는 것은 뻔했다. 고대 서로마 제국의 유산, 다시 말해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상에 건설된 신의 왕국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바람은 기독교가 분열되면서 갈가리 찢어졌다. 교회의 분열과 신, 구교의 대립은 수백 개의 소국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품고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던 독일제국을 위협.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적 위치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보헤미아의 저항이 제국에 결정차를 날렸다. 한마디로 말해 전쟁의 진짜 원인은 제국이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지배자들의 위기의식이었던 것. 이같은 권력욕의 소용돌이에서 30션 전쟁이 자라났다. 전체적 갈등은 기틀이 제대로 잡힌 국가들의 대립이 아니라 도저히 파악하기 힘든 대립, 이해관계, 목표/조직형태의 뒤죽박죽 속에서 탄생했다. 30년 전쟁은 전통적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는 안정된 국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 따라서 30년 전쟁은 18세기까지 이어진 국가형성 과정 속에서 일어난 대립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국가들이 유럽대륙의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 다투는 과정에서 생겨난 격렬한 충돌이었다. 제 기능을 다하는 국가 시스템끼리의 충돌이 아니라 현대적 국가조직으로 향하는 과도기에 일어난 전쟁이었기에 그렇게나 혼란스럽과 복잡했던 것이다. 그 혼란을 거치는 동안 각 나라와 세력은 전 유럽을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욕망을 접어야 했다. 모두 다른 나라가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뿐이었다. 일종의 예선경기였던 셈. 어쨌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으며 패권을 추구했던 다양한 세력들은 불안하나마 균형을 회복. 열강들은 네덜란드나 보헤미아 같은 소국들에게도 국가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간의 갈등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낳은 데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의 결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쟁의 경제적 원인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간과되었음.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원인은 안전한 무역로와 지하자원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들 수 있음. 전쟁의 당사자들이 종교적 대립보다는 무역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확인됨. 그리하여 구교 지역이었던 쾰른은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에 대해 엄격한 중립정책을 고수. 이웃한 네덜란드와의 다각적 무역관계가 신앙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
- 30년 전쟁은 유럽이 전쟁을 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인식 또한 의미가 깊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유럽경제는 전반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고, 특히 농업부문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 이 같은 경제성장은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세계무역을 통해 시장확대로 이어짐. 한 역사가의 말을 들어보자. "30년 전쟁은 16세기 경제도약으로부터 탄생. 이런 비약적 발전을 통해 부로 목숨을 부지했고 결국 이 부를 파괴하였다." 16세기에는 금속제련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이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 생산을 가능하게 만듬. 또 30년 전쟁동안 10만명의 용병이 다양한 부대에서 활동. 이는 그 전 세기에 유럽의 인구가 약 25% 증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30년 전쟁은 그 직전까지 아주 잘나갔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전쟁으로 수많은 물적자원과 인적자원을 잃을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그 정도로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 유럽이 도시인구의 4분의 1, 농촌인구의 40% 이상을 잃은 이 엄청난 재앙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사회 전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던 덕분.
- 30년 전쟁의 끄트머리에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커지자 결국 유럽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백기를 들고 평화조약을 체결. 오랫동안 방관하며 체력을 비축해 두었던 두 나라(프랑스, 스페인)만이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로도 10년을 더 싸움. 모든 나라가 전쟁으로 탈진하자 일시적 세력균형이 찾아옴. 그 결과 처음으로 여러 독립국으로 이루어진 유럽이 가능해짐. 이런 정치적 균형은 종교적 대립마저 약화시켰다. 3대 종교(카톨릭, 루터파, 칼뱅파)의 영향권도 확정됨. 이제 유럽에서 종교는 더 이상 전쟁의 불씨가 되지 못했다. 30년 전쟁은 이후 오랫동안 유럽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별도의 전장보다는 마을과 도시가 주된 전쟁터가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30년 동안 독일의 인구는 1600만에서 1100만으로 감소. 대부분이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광폭해진 군인들의 잔혹한 만행에 희생된 사람도 많았다. 30년 전쟁은 오랜 전쟁기간과 잔혹함, 이후에 미친 영향 등에서 인간의 극한 체엄이었고, 여러 세대를 넘어서까지 흔적을 남겼다. 더구나 종교전쟁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드르이 신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 둘 다 나폴레옹의 전쟁방법을 전쟁론의 원칙으로 삼았지만 조미니는 전술, 즉 개별전투에 더 비중을 두었다. 전술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이라 보았다. 반면에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즉 지도 위에서 짜는 장기계획을 더 선호. 물론 두 사람은 전략과 전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로써 현대 전쟁론의 가장 중요한 두 개념, 전술과 전략이 등장. 전술을 전장에서 싸우는 기술, 병력을 장소와 계절조건에 따라 최적으로 배치하는 기술.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올바른 전술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질서정연하고 효과적이도록 만들어야 함. 전략은 전장 자체를 굽어보면서 전쟁을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전쟁의 목표에 맞게 전투를 활용하는 기술임. 여기에 세번째로 병참학, 즉 군수품 보급조직이 추가됨. 병참을 잘 운영해야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음.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술의 문제점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반면 조미니는 주로 전술에 관한 원칙과 사상을 발전시켰음. 조미니의 이론이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에 비해 주목을 덜 받은 이유가 그 때문인지 모름. 현대전에서 전략이 전술보다 중요함. 전술은 개별전투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지만 몇 년에 걸쳐 넒은 공간에서 치르는 전쟁 전체를 이기려면 치밀하고 유연한 전략이 필요한 법
- 근본적으로 클라우제비츠는 모든 전쟁이 사회활동이라고 단언했음. 전쟁이 사회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 혁명적 사회의 군대는 군주제 사회의 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하며, 민주주의 사회의 전쟁방식은 독재사회와는 다름. 그러므로 전쟁의 형태는 전쟁을 하는 사회의 정부형태에 좌우됨. 이로써 전쟁의 주체는 백성이 아니라 국가, 더 정확히 말해서 정부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 전쟁은 국가에 의해, 국가를 위해, 국가에 맞서 실행되는 조직화된 폭력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이 존재하지만 그 대부분은 전쟁이라 불리지 않는다
-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수행하는 일반적 원칙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함.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첫번째 원칙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우리가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아붇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절제한다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성공의 가능성이 분명치 않다 해서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그러한 최선의 노력이 결코 불이익을 안겨 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 그로 인해 나라가 심한 압박을 받는 다 해도 불이익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압박은 금세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에 도움만 된다면 적국에 대한 온갖 만행도 정당화될 수 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이 유럽에서 일으킨 전쟁은 바로 이런 클라우제비츠의 원칙을 따랐다.
- 이슬람과 유럽의 식민정책은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에 심각한 상처로 남아 있음. 125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으로 사라진 사람은 4000만이 넘는다. 이처럼 초기 이슬람의 식민정책(7-8세기)와 유럽의 식민정책(16세기)은 아프리카의 농예화를 낳았지만, 19세기 유럽의 후기 식민정책은 노예제도를 종식시킴. 특히 교회의 지배계급과 달리 노예제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비판했던 유럽의 소수 기독교인들이 큰 공을 세움. 유럽 열강들은 자기들끼리 아프리카를 분할한 뒤 짧은 기간 안에 노예무역을 금지. 그 이유는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커피, 카카오, 차, 지하자원 등)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도 일부는 식민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따라서 터키의 식민지였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면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이 시기만 해도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 1차대전 중에는 유대-아랍 여단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고, 50년대 초만 해도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함께 사는 키부츠가 있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임
- 1918년의 패배는 독일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치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듬. 그랬기에 그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했고, 1차대전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독일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바로 이런 잠재적 복수심을 히틀러는 교묘하게 이용. 복수심을 자극하며 베르사유의 치욕을 갚아주겠노라고 약속. 독일국민은 고무되었고 히틀러를 믿었다. 그가 짧은 시간안에(나치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수 국민의 생활여건을 개선해주었기 때문. 특히 1차대전 이후 대량실업과 극심한 빈곤 등 재앙 수준에 이른 열악한 경제상황은 사회적 아버지인 지도자를 향한 강렬한 욕구를 일깨움. 황제의 자리를 대신하여 국가의 정상에 서 줄 강력한 인물을 갈망했고,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무자비한 행동, 과거의 영화와 존경을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으로 독일 국민들의 이상을 충족시켜 줌.
- "독일의 본질이 세상을 치유한다"는 이미 독일 제국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독일의 사명을 히틀러가 다시 일깨움.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과 전 세계, 특히 동유럽 국민들과 비교되는 인종적, 문화적 우월감 등 기존의 편견에도 다시 불을 지폈다. 독일인들은 동유럽 주민들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추방을 해도, 노예로 삼아도 마땅한 민족으로 취급. 많은 수의 독일국민이 그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사회에 만연한 그 사상을 그저 급진시켰을 뿐이다. 지배민족은 하류인간들이 점거하고 있는 생활공간을 차지할 권한이 있기에 독일은 동유럽에 식민지 제국을 건설할 세계사적 사명을 안고 있다! 히틀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숨어 잇는 망상을 자극하며 쉼 없이 떠들어 댔다. 독일 대중은 독일제국의 광신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미 히틀러의 망상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 왜 전세계는 범죄국가 나치 독일에 그렇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을까? 장기적으로 볼 때 의기소침하여 골골거리는 독일보다는 군사력으로 당당히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일이 세계 평화를 위해 더 바람직하다고 믿었기 때문. 프랑스의 군사력을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독일이 무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동등한 군사력 따위는 애당초 히틀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초기에 세계의 눈이 무서워 그런 척했을 뿐이다. 프랑스와 세력균형에 도달했어도 독일은 엑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 45년 이후 전쟁에 가장 많이 참전한 나라의 순위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영국이 1순위를 차지. 이는 영국이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렸고, 식민지 해체가 전쟁을 동반했기 때문. 지난 40년 동안만 살펴보면 미국이 단연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난한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세력권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느껴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 전쟁은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땅에서만 자라는 열매라는 사실을. 따라서 세계의 영원한 화약고는 대부분 값진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지역이다. 서아시아가 그렇고 아프리카의 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이 그렇고, 특히 카스피해 주변지역이 그렇다. 인종간 민족간 경제적 이해관계가 엄청난 폭발력의 화합물을 만든다. 이 화합물의 폭발력을 더욱 키우는 것은 서구 산업국가들(최근에는 중국까지도)의 생활방식이 온통 석유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 예컨대 미국은 엄청난 수의 자동차들에 연료를 공급하자면 사우디 같은 독재 산유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전쟁 역시 진짜 이유는 미국과 유럽으로 석유를 자유롭게 수송하자는 목적이었다. 미정부는 모든 유전의 최대한 착취 정책을 옹호. 특히 서아시아 유전들이 목표다. 그러면서도 자원절약이나 대체 에너지 개발에는 큰 관심이 없음. 어쩔 수 없이 석유와 폭력의 위험한 관계가 발생하고, 이는 앞으로 점점 더 첨예한 대립을 낳을 것이다. 재생이 불가능한 천연석유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그에 반해 수요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테니 말이다.
- 그럼에도 천연자원과 산업국가들의 이해관계만으로 45년 이후에 발발한 모든 전쟁을 설명할 수는 없음. 또 다른 이유는 서구의 부자나라들이 제3세계에 현대화의 압력을 행사하고 급진적 변혁을 강조하기 때문. 서구는 상품을 수출하느 데 그치지 않고 제3세계에 자신들의 경제형태, 사회질서, 가치관, 이상을 강요.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수의 제3세계 국가들이 붕괴 위험에 처해 있음. 특히 낡은 것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서구식 개혁과 전통의 마찰이 극심한 지역에서 내전이 자주 발발. 물론 이런 상황이 자동적으로 전쟁을 점화하는 건 아님. 평화를 유지하는 가난한 나라들도 많다. 그러므로 상황이 위태로워지려면 인종갈등이나 종교갈등 같은 뭔가 다른 것이 추가되어야 함. 그래야 상황이 위기로 치달아 갑자기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 전쟁이 인종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환경, 더 정확하게 말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환경조건도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함. 예를 들어 물 부족이 심각한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강 상류 국가가 많은 양의 물을 채수하거나 강물을 오염시키면 하류 국가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결국 갈등이 초래됨. 유프라테스강(터키,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강(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 나일강(에티오피아, 수단, 이집트) 연안은 물론 과거 소련 연방국이었던 중앙아시아 몇 개국에서 향후 이런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음. 기후 역시 급속도로 악화될 조짐이 강하고, 이런 기후변화 또한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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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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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짓들의 역사

역사 2019. 5. 7. 12:48

- 야생에 사는 어떤 종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굶어죽는 것이 아님. 걷기나 달리기로 A에서 B로 떠나 수렵하거나 채집할 때 생존을 위한 칼로리가 필요하다는 것. 술은 그런 조상들에게 생명유지에 필요한 귀한 칼로리를 보장. 과일에서 나는 숨길 수 없는 발효냄새는 언제 최고의 칼로리가 되는지 알아차리기 쉽게 했음. 뭔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면 그 과일이 잘 익었다는 뜻. 우리 원숭이 조상들은 그것의 에탄올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을 발달시켰음. 과학자들은 음식과 술을 같이 먹고 마시는 것이 음식을 먹은 후에 술을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칼로리를 섭취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술이 섞인 것을 먹는 것은 매우 좋은 생존전략이어서 취한 냄새를 잘 맡는 원숭이들만이 많은 짝짓기를 하고 후세에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었다.
- 88년 출간된 음악의 기원에서 버클리대 월트 프리드만은 인간이 음악을 만든 시점은 불을 만지기 시작한 시점보다 더 오래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시사했음. 약물이나 도시, 그리고 다른 위안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좋은 음악을 듣고 도파민에 취한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경험 중 하나였음. 어쩌면 스톤헨지 건축자들은 그들이 세운 구조물의 음향효과를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잘 작동되도록 개선시키는 데 충분한 음악적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름
- 신을 믿은 안 믿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일 큰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커닝 페이퍼를 찾고 있다. 우리가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내가 섹스를 하면 무엇이 괜찮은가? 심지어 원숭이들조차 이 답이 내부에서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사람에 따라 철학에서, 역사에서, 자기 삶에 있는 경탄스런 사람으로부터 답을 찾기도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가장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유명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 나투프 문화권(지중해 연안 레반트 지역에 존재했던 문화. 농경시대 이전에 이미 정착생활을 함)에서 잔치는 UN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부족들은 이웃, 심지어 적들조차 잔치에 초대했고 자신들이 얼마나 공격적인지 떠벌릴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곤 했음. 잔치를 여는 것은 동맹을 굳건히 하고 정치적 의견충돌을 조정할 뿐만 아니라 힘을 과시하는 한가지 방법이었다. 헤이든 박사가 그 전 과정에 대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잔치를 벌이는 것은 일종의 회전시스템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어느 가족이 일주일에 한 번 잔치를 하면 다른 가족이 다음 주에 하고, ... 이를테면 돌아가면서 잔치를 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 돌고 돌았다. 그 사회는 동시대의 산업사회보다 훨씬 더 사교적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관계는 맥주로 견고하게 다져졌다."
헤이든 박사는 이 과정을 단지 '맥주가 문명을 창조했다'로 기술하는 것과 다른 대안의 요지를 제시했음.
"복잡한 공동체는 더 많은 잔치를 하고 양조된 음료는 자원에 대한 더 많은 투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큰 가치와 높은 지위를 대변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맥주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농업의 증가였다"
맥주 양조가 농업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맥주양조는 매우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지위를 가졌다는 상징이었기 때문에 맥주를 충분히 만드는것은 14000년 전의 국가에서는 매우 중요했다.
- 맥주는 양조과정에서 물 속에 있는 비우호적 미생물을 사멸시킨다. 와인은 알콜 함유량이 매우 높아 마실 때마다 물을 타서 마실 수 있었다. 이것은 물을 훨씬 더 안전하게 만들었고 고대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만년 유물이 되지 않게 했다.
- 술을 마시는 것은 문화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기방어의 수단이었다. 신뢰할 수 없는 물이지만 생존을 위해 마실 수밖에 없었을 때 술이 보호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대인들ㅇ느 술 중독으로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방어할 수단 또한 필요로 했음.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심. 그리고 배 속에 술만 채워지지 않도록 음식을 같이 먹음. 이런 사회적 관습이 때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효과가 없을 때 그들은 피타고라스의 컵을 사용했다
- 과학자들은 역사속에서 위험을 감수했지만 운이 좋았던 인간들의 유전적인 흔적을 발견했음. 우리 인체에는 도파민을 언제 어떻게 방출할지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DRD4라는 유전자가 있다. 그런데 우리 중 약 20% 정도는 DRD4의 변종 DRD4-7R를 갖고 있다. 몇몇 연구는 이 변종 유전자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이 유전자가 온수욕조로 침입하는 친구를 돕겠다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사람들과 친구가 제발 붙잡히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사람을 가르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하지만 과신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놀라운 규칙성을 보였다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시사.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DRD4-7R은 4-5만년전에 처음 나타남. 이 시점은 최초의 인간들이 안전한 거주지를 떠나 바다건너에 더 좋은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 위험이 적을 때는 실패해도 그렇게 큰 타격이 없고 뜻밖의 횡재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악플러들이 실제 현실에선 잘 싸우지 않으면서 온라인에서 온종일 죽치고 앉아 자신의 무용담을 끝없이 떠벌리는 이유임. 자신만만하고 무모하고 자기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태곳적 시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움켜쥐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승리. 이 쉬운 승리는 그들을 계속 배불리 먹게 만들었음. 그리고 과신은 고대의 갈등상황에서 조상들이 화가 날 때 대응 방법으로 쓴 또 다른 개똥 같은 행동과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 언쟁과 비방 전쟁이 인간 언어의 역사에서 특히 새로운 발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식적인 모욕은 중세의 스코틀랜드인이나 베오울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감. 언어학자, 리지야나 프로고바 치와 존 로크에 따르면 인간언어의 진화는 욕에 많은 신세를 졌다고 한다. 그들은 09년 논문 '합해지려는 충동: 의식적인 모욕과 구문의 진화'에서 합성어를 만드는 능력이 아이들 언어발달의 가장 초기단계중 하나라고 지적함. 합성어는 모욕적인 말에도 사용됨. dare-devil(무모한 사람), kill-joy(흥을 깨는 사람), pick-pocket(소매치기), scatter-brain(정신 산만한 사람), turn-coat(변절자) 같은 말고 mother-fucker(후레자식) 같은 것이 동사와 명사의 합성으로 알려짐. 이런 합성어는 인간의 언어 전반에서 발견됨. 그리고 suck-cow나 fuck-wind처럼 두 단어를 결합시키는 경향은 모든 인간구문에 기본기둥을 이룸. 인간의 언어에서 이런 합성어가 잦은 것은 정교하고 유머러스하고 불경하지만 폭력적이 아닌 방식으로 경쟁자를 모욕하는 것이 적합한 효용성이 있음을 시사함. 이 말은 이것을 잘하는 인간이 인간 언어의 토대에 영구적 족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 한 집단의 공개적 비아냥은 자만심에 찬 젊은 사냥꾼들의 가슴을 식히려는 것이었음. 쿵족은 도살하는 날까지 고기에 대해 리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했다. 나중에 고기가 나누어지고 지방과 고기 덩어리가 질 좋은 것임이 뚜렷하게 드러났을 때 리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 소가 너무 말라서 먹을 것이 없다니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에요?" 그러자 쿵족은 연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박사는 당황했다. 그제야 쿵족의 친구중 하나가 우쭐해하는데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설명. "젊은이가 소를 잡으면 그는 자신을 최고로 혹은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게 됩니다. 쿵족은 젊은이가 어떤 것이든 자만심을 갖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 자만심이 언젠가 다른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 자만심과 오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문제임. 하짐나 그것들이 일이십년만다 한 번씩 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고기로 망신주기는 인류학자들이 레벨링 메커니즘이라 부르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가 한 개인이 동료들보다 너무 높이 올라갈 때 부드럽게 누르는 방법이다. 쿵족은 겸손함을 최대한 유지하게 하는 방법으로 비아냥을 사용함. 비아냥은 글로 적절하게 전달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온라인 소통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장의 다른 것처럼 비아냥은 인터넷 시대의 도래로 정말 최고조에 달했다. 자아도취, 비아냥, 욕은 언제나 우리를 짜증나게 해왔다. 하지만 옛날 옛적에는 우리 종이 생존을 확보하려면 그것들이 필요했다. 과신은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호모사피엔스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도록 위험한 기회를 붙잡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다. 추한 모욕과 공격적 허세는 젊은 세대에게 물리적 충돌을 피하게 했고 남는 시간에 섹스를 하게 했다. 현대에 이런 행동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가장 짜증스러운 정도까지 왔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행동이 인간발달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허세는 우리 유전자 속에 암호화되어 모든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 모두는 욕에 엄청난 신세를 지고 있다
- 도블린 박사가 성 금요일 실험에 대해 자신의 '장기 후속 연구와 방법론적 비평'속에 요약한 내용이다.
"실험에 참가한 피실험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들의 성금요일의 실로시빈 경험을 진정으로 신비한 성격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 기술했고, 그들의 영적 삶에 있어 가장 좋은 부분 중 하나였다고 특징지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접촉에 성공한 버섯환각제의 복용자 8명 중 5명이 성직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신앙에 헌신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 당시 약물이 불러일으킨 신비한 경험이 그들의 영적 삶에서 가장 사실적인 순간 중 하나로 여겼음. 이 증거는 마법의 버섯과 다른 환각제가 종교적 숭배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또한 연이어 훨씬 더 큰 이런 의문이 들게 한다. 초기 우리 조상들이 버섯을 사용한 것이 종교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를 했을까?
- 버섯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약물 중 하나. 인간이 버섯으로 최초의 환각 체험을 한 것이 언제 무렵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7~9천년전 동굴벽화를 보면 실로시빈 함유버섯으로 보이는 것이 있음. 대략 6천년전 스페인의 또 다른 동굴 벽화에는 다른 종의 환각버섯이 그려져 있음. 9천년전에 인간은 야생동물들 속에서 서 있을 틈이 없었다. 고난 속에서 늑대와 싸운 인간이 왜 술을 마시고 싶어 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술은 고통을 무디게 하고 호전성을 증가시킨다. 하지만 버섯을 많이 섭취하는 것은 치명적인 사자나 새나 이 땅의 악몽 같은 것들과 싸우는 것은 고사하고 그냥 있는 것 자체를 전략적으로 위험하게 만든다. 선사시대에 환각체험은 순전히 유흥으로 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따. 그래서 고대인들은 접신의 방법으로 환각제를 사용했고 그것을 통해 환영을 본 것을 값진 것으로 여겼다. 한가지 이론이 옳다면 버섯 환각체험은 기술적으로 인간이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진균류 민속학자인 고든 왓슨은 최초로 환각버섯이 인간종교의 탄생에 핵심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 인간의 사고가 일차 과정 사고와 이차과정 사고로 나누어진다. 말과 개념을 분석하고 그것을 세상에 대한 실용적 이해와 비교하는 것은 이차과정 사고다. 일차과정 사고는 훨씬 더 묘하다. 그것은 우리 뇌가 수면이나 정신적 발박, 그리고 어린시절 판타지에 빠져든 상태다. '카우치에서 실험실까지'라는 책에 내가 좋아하는 기술이 있다. "일차 과정 사고는 비교적 불확실한 느낌이 특징이다. 이런 상태에서 무엇이 무엇이란 확신은 힘을 잃고 마법적 설명이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일차과정 사고는 현상에 대한 기적적이고 환상적이고 종교적 설명을 수용하기 쉬운 마음상태다. 실로시빈 같은 약물은 그런 사고에 최첨단 고속도로 역할을 한다. 인간의 뇌 속에서 일차과정 사고의 존재는 실제로 측정될 수 있다.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많이 아는 것처럼 일차과정 사고는 대뇌변연계에서 부분적으로 일어남. 그것은 피질 하부에 위치해 너무 깊이 파묻혀 있어 국부적 측정도구로도 일어나는 일을 상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밀주가 스며든 오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려면 피실험자의 두개골을 자르고 뇌 자체에 전극을 꽂아야 한다. 뇌를 자르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50-60년대 이후로 일차과정 사고를 측정하는 일을 하지 못했음. 하지만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 다 했던 시절에 이루어졌던 연구는 왓슨이 발견한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2010년에 로빈 카하르트 해리스와 칼 프리슨은 이 해묵은 연구를 다시 분석해 보고는 정신발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램 상태로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환각물질에 취한 사람들의 뇌에서 일차과정 사고의 신호로 여겨지는 단계적 활성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현실법칙의 실마리를 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키케온이라는 약물로부터 어느정도 도움을 받음. 키케온은 마약성 와인 같은 것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엘레우시스의 제전이 끝날 때 참석자들에게 마시게 했음. 참석자들이 이 의식을 비밀로 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위협을 받았음에도 구체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이 행사는 9일간의 금식 끝에 있었고 참석자들은 환각작용이 강력한 키케온을 마신 후에 사후의 생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고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 대마초가 적법성을 얻어갈수록 그것을 둘러싼 낭비문화는 앞으로 점점 심해질 것임. 그것은 애초에 대마초가 금지되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문제다. 대마초는 인간사용의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의식이 문제성 있는 사용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사실 고대의 스키타이인이었다면 가족전체가 있는 자리가 아니고서는 약에 취할수가 없다. 서구 역사에서 대마초는 헤로도토스로 거슬로 올라감. 그는 스키타이인으로 알려진 유라시아 기병대가 대마초를 사용한 방식에 대해 최초로 기술. 스키카이인들은 상당량의 물을 말 등에 지고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전 세계적인 활동무대가 주로 사막지대였기에 물로 몸을 씻는 습관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향과 나무를 진흙과 섞어 온 몸에 문지름으로써 기본위생을 처리하는 쪽을 선호. 일상에서는 그렇다호 해도 장례식에는 더 철저한 정화의식을 해야 했다. 이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술.
"스키타이인들은 대마 씨앗을 타는 돌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즉시 그리스에서 태우는 향보다 훨씬 더 기분좋은 증기가 발산된다. 그 향에 일행은 어쩔 줄 모르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씻는 것 대신에 행해지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두가지 점이 약간 회의적임. 첫번째는 연기에 목욕하는 것이 여하튼 사람들을 깨끗하게 해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두번째는 헤로도토스의 주장대로라면 대마씨앗을 태웠는데 커피 그라운드를 태우는 것만큼 사람들을 취하게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야생에서 자라는 대마초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꽤 지저분한 식물이다. 어쩌면 스키타이인들은 씨앗만 태운 것이 아니라 식물 전체를, 즉 씨앗, 줄기 등 모든 것을 불 위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태웠을 가능성이 높음. 대마연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감에 휩싸이게 하고 크게 울부짖게 만들었다고 구체적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크게 울부짖었다는 것은 취해서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 커피의 첫잔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와 상관없이 커피는 종교적 숭배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잠들지 않는 수도원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최초로 카페인 중독에 걸린 종교인들은 수피교도들이다. 커피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증거가 15세기 후반에 수피교도들이 디크르를 할 때 커피를 헌신 보조제로 사용한 것을 보여줌. 디크르는 밤 예뱅다. 숭배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신은 더 좋아한다. 커피가 수피들에게 한 역할은 커피가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하는 역할과 다르지 않음. 17세기 초에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사실상 종교행위의 일부가 되었다. 교주 이클라스 칼와티의 추종자들은 매년 겨울이면 칼와(독방에서 하는 영적 훈련) 혹은 피정(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조용히 자신을 살피고 기도하며 지내는 일)에 들어가 3일간 금식하며 커피만 마셨다고함. 위궤양을 발생시키기도 했지만 커피는 밤새 디크르를 하고 아침까지 기도가 이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 지아니니는 발 페티시가 역사 속에서 성행위 감염증이 발생할 때 같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주목. 13세기에는 성적매력이 있지만 콘돔이 없는 십자군 덕택에 임질이 두드러지게 증가. 이 시게 중세작가들과 시인들은 인간의 발에 길고 상세한 러브레터를 썼다. 16세기에 매독이 기승을 부렸을 때 발 페티시는 다시 한번 각광을 받았다. 지아니니아 그의 팀은 성 감염 질환의 발생이 끝난 후 30-60년 사이 발 페티시 언급에 대한 빈도수가 감소한 것과 다른 모든 기간 중에 에로티시즘이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에 집착한 것을 주목. 하나같이 흥미진진한 데이터지만 비극적이게도 중세의 에로티가에 대한 기록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지아니니와 그의 용감한 동료들은 미국의 대중 포르노 잡지 8종에서 지난 30년을 대표할 수 있는 외설물을 수집. 그들이 60년에서 80년대 중반까지 발행된 잡지에서 발에 집중된 사진을 찾아서 집계한 결과 평균 5-10개 사이였다. 86년에 그 수가 수직상승했는데 그 시점은 에이즈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음. 연구자들은 98년 간행된 잡지에 평균 40개 이상의 발 그림이 있는 것을 찾아냄. 기본 데이터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한 가지 가설은 우리 뇌가 터무니없는 것의 에로틱화를 점점 발달시켜 가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역병에 감염되지 않으면서 충동을 만족시키는 안전 메카니즘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발 페티시가 비슷한 페티시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 종의 에로틱박스에 있는 유일한 도구도 아니고 가장 오래된 도구도 아니다.
- 엑스터시는 임신하는 순간 뇌에서 대량으로 생성되기 시작하는 화학물질인 옥시토신을 분비하게 함. 엑스터시를 과다복용하는 것은 정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환각을 초래할 수 있지만 치료수준의 복용은 맑은 정신을 거의 변함없이 유지시킴. MDMA는 불안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큼 삶의 질을 나쁘게 하지 않는다. 편집증의 자리에 믿음과 공감이 자리잡는다. 최근의 영상연구는 MDMA가 두려움에 활성화되는 편도라는 뇌의 영역을 진정시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외상후스트레스장에에도 도움이 된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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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화탄소 농도는 인류가 경작지와 목초지를 확보하고자 중국, 인도, 유럽 등시에서 삼림을 파괴하고 불태우기 시작한 8000년 전부터 서서히 증가. 메탄은 인류가 쌀농사를 짓기 위해 관개를 도입하고 전례 없는 규모로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한 5000년 전에 비슷한 규모로 증가. 이 두가지 변화는 처음에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문명이 발생하고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지구 기후에 점점 더 많은, 더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쳤다
- 소행성 충돌로 비단 공룡뿐 아니라 숱한 생명체들이 사라졌으므로, 그것은 다윈이 100여년전 예상한 진화과정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 생명체들은 필시 수천만년 혹은 수억년 동안 이용가능한 생태적 지위와 생존수단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윈이 주장한 것과 대동소이한 방식으로 다투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소행성 충돌의 생존자들은 비슷한 다른 존재들이 사라진 틈을 타서 더 많이 번식했고, 따라서 더 오래 살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경쟁에서의 승리는 작은 이득이나 손실에 의해 좌우된다. 말하자면 생명의 진화를 제어하는 요소란 마치 보험회사 소속의 공인회계사가 연연하는 것 같은 사소한 차이다. 몇 억 년에 한 차례씩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외계에서 날아들어 질서정연한 세계를 송두리째 재정비한다. 대다수 종이 멸종하며, 그에 따라 살아남은 동물들은 별안간 한때는 경쟁이 치열했던 생태적 지위를 넉넉하게 보장받는다. 이제 그들은 그런 처지를 활용해 좀더 느긋하게, 다윈이 말한 이른바 재능 다양화를 도모했다. 진화의 이 같은 측면은 '행성 간 사격연습장 속의 삶'이라 불렸다. 이러한 대대적 공격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일부 작은 동물들 뿐이었다.
- 6500만년 전 소행성 충돌사건을 계기로 공룡시대가 저물고 포유류 시대가 열림. 본시 작고 보잘것 없고 설치류처럼 생겼던 포유류는 이내 고래 등 지상에서 가장 커다란 동물을 포함하는, 좀더 덩치 크고 복잡한 생명체 집단으로 진화. 그 가운에 하나의 계통은 오늘날 여우원숭이와 매우 흡사한 동물로 진화함. 수천만 년 전에 살았던, 꽉 붙들 수 있는 앞발과 잡기에 적합한 꼬리를 지니고 나무를 타고 다닌 원숭이 모습의 동물이었다. 이 계통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약 1000만년 전 원시적 유인원 형태로 진화. 그후 약 500만년 전 그들로부터 침팬지와 우리 선조들이 속한 집단이 떨어져 나왔다. 450만~400만년 전, 아프리카에 출현한 오스트랄로피테신은 화산재에 발자국을 남긴 동물들처럼 네다리가 아니라 두발로 일어서서 똑바로 걷기 시작. 직립보행 자세로 변했다는 것은 두개골을 받치는 등뼈의 위치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네 발로 걷는 동물의 경우는 등뼈가 두개골의 뒤쪽으로 이어지는 반면, 똑바로 서서 두발로 걷는 동물은 머리통이 정확히 등뼈의 위쪽에 놓인다
- 15~10만년 전 어느 때쯤, 아프리카에서 거의 현재와 유사한 인류가 등장. 그들은 신체적으로는 거의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어졌다. 선조들보다 키도 크고 뇌 크기도 한층 더 커짐. 그들 역시 선조들처럼 돌을 쪼개서 도구를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진일보한 기술을 동원. 좀더 현명하게 돌을 골라 한층 더 다양하고 정교하고 다듬어진 도구를 제작. 우리는 그들이 시체를 매장하고 환자를 돌봤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환자를 간호했다는 것은 다른 이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기형을 지닌 채 성년기를 살았던 개인의 화석 유해가 발굴된 데 따른 결론임. 처음에는 그들 역시 선조들처럼 사냥꾼에게 거의 혹은 전혀 위해를 가하지 않는 작은 사냥감에 주로 의존했다. 지능이 꽤나 높은 인간이 어찌 그리 믿기지 않을 만큼 원시적인 생활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희한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뇌는 지금 우리의 뇌가 감당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오늘의 우리로서는 당연하다 싶은 상식의 기반이 부족했다. 그들의 아기 한 명을 현대사회에 데려와 키운다면, 그가 천체물리학자, 목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가능성이 지금의 우리와 하등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장구한 세월동안, 지축의 기울기가 늘 일정하게 유지된 것은 아님. 1840년대 프랑스 천문학자 위르뱅 르베리에는 거대 행성들(주로 목성)의 중력당김에 의해 지축의 기울기가 4만 1000년 주기로 22.2도에서 24.5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밝힘. 4.1만년마다 기울기는 최대에서 최소로, 다시 최대로 달라진다는 의미. 기울기 주기는 길이도 진폭도 일정함. 2.3도에 이르는 지축 기울기의 점진적 변화가 낮 동안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높이를 달라지게 만든다. 2.3도의 변화라니 하찮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태양이 항시 하늘에 낮게 떠 있는 고위도 지방에서는 큰 차이를 만들어냄. 북극권 북쪽과 남극권의 경우, 한겨울에는 결코 태양을 볼 수 없다. 끝없는 극야가 펼쳐지는 것임. 반면 한여름에는 태양이 결코 지지 않고, 지극히 낮은 각도로 지평선 주위를 느리게 돌며 떠 있다. 낮은 태양고도상의 아주 작은 변화조차 전달되는 태양 복사에너지 양에 유의미한 차이를 가져다 준다.
- 기후를 변화시키는 두번째 방법은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달라지게 만드는 것. 흔히 볼 수 있는 전구에서 손을 30센티 정도 뗀 다음 다시 10센티 가량 더 떼보면 이 주장을 실감할 수 있다. 열원과의 거리는 분명한 차이를 느끼게 해주며, 전구 열의 양을 통해 태양에서 나오는 평균적 열의 양을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지구가 공전하는 동안 태양까지의 거리를 달라지게 만드는 것은 지구 궤도의 이심율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구 궤도가 둥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하지 않은 원형, 즉 타원형임. 따라서 지구는 공전궤도상의 한 지점(근일점)에 있을 때가 그 반대편(원일점)에 있을 때보다 태양에 약 500만킬로 더 가까움. 이것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평균거리(1.55억킬로)에서 벗어나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변하다. 일반적을 이심율이라 불리는 이 타원율은 오랜 기간에 걸쳐 변화함. 이심율이 거의 10만년 주기로 변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또한 르베리에의 업적. 매우 드물지만 이심율이 0으로 떨어지면,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궤도가 완벽한 원형이 됨. 대부분의 기간동안 지축 기울기는 타원형이고, 이심률은 끊임없이 변화함. 이심률의 변화는 지축기울기의 변화보다 더 불규칙함. 또한 최고 이심률과 최저 이심률 간의 변화폭도 크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이심률은 지구궤도를 원형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지구궤도상의 위치에 따라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달라지게 만듬. 지구와 태양의 거리에 영향을 미치는 지구궤도의 두번째 측면은 지축의 세차운동. 지구는 팽이처럼 기울어진 지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번씩 자전함. 또한 1년에 한번씩 태양주위를 공전. 이 역시 평평한 표면에서 서서히 원형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대다수 팽이들에서 확인가능. 그러나 팽이는 흔히 세번째 종류의 운동을 보여주기도 함. 즉 기울어진 방향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꾸면서 흔들흔들 하는 것이다. 지축을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는 지구의 방향변화는 기울기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짐. 1800년대 프랑스 수학자 장 르 롱 달랑베르는 세차운동이 어떻게 태양주위를 공전하는 지구궤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최초로 밝힘. 그는 기울어진 지축이 지구궤도상에서 느리게 한번 흔들리는 데 약 2.2만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냄. 2.2만년은 지구가 하루에 한번 자전하는 것, 혹은 1년에 한 번 공전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긴 기간이다. 지구가 지구궤도상에서 이러한 흔들거림 가운데 단 한번을 경험하는 데는 2.2만번의 공전이나 800만번이 넘는 자전과 맞먹는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 만약 여러분이 그처럼 느린 흔들거림을 감지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 팽이를 주시해야 할 것임
- 기나긴 세월 동안 인간과 동물이 진화과정을 함께 해온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에 필적할 만한 대멸종이 일어나지 않았따. 이러한 관찰은 사리에 닿는다. 인간에게 쫓기는 사냥감이 그 압박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 (이를테면 혼자 지내는 습관이나 일정치 않은 예측불허의 이주유형 등)을 개발할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멸종을 초래한 원인이 인간이라는 결론은 수많은 과학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샀다. 그들은 1.25만년전 남북아메리카에 살았던 한 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설사 클로비스 창촉을 장착한 무기를 지녔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 모든 동물들을 삽시간에 대멸종으로 몰아갈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초기 미국인들이 대멸종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종의 마지막 개체까지 일일이 창으로 찔러죽일 필요는 없었다. 인간은 조직적 집단 속에서 사냥하면서 언어적 의사소통과 불을 써서 동물 무리를 크고 작은 협곡이나 제한된 지역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불로 위협하면서 동물떼를 몰아가노라면 어느 때는 그들이 한꺼번에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또 어느 때는 동물들이 막다른 궁지에 몰려 허둥대가 허망하게 살해당하기도 함. 이 시기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해골 무더기가 절벽 바닥 가장자리에 수북이 쌓인 채 발견되었는데, 더러 그 가운데 가장 위에 놓인 해골만 식량감으로 도살당했다는 증거가 나오곤 한다. 사냥 전략들이 어찌나 잘 먹혀들었던지 그것들을 다채롭게 구사하자 동물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인구 생태학자들이 최근에 진행한 연구는 대형 포유류 종은 매년 그들 인구의 일부만 골라 죽여도 놀라우리만큼 빠른 시일내에 멸종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줌. 대다수 대형 포유류는 임신기간이 긴 데다 한 번에 새끼를 조금씩밖에 낳지 못해서 더디게 번식하므로, 사망률이 정상치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쉽사리 피해를 입음. 출생률과 사망률의 장기적 영향력을 계산함으로써 인구변화를 모의실험한 모델들은 사망률이 정상치를 조금만 상회해도 수백년 내에 멸종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적어도 두가지 관점에서 보자면, 수렵-채집-어로 생활에서 농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첫째, 수렵채집인은 다양한 출처에서 식량을 얻으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 같은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수많은 동식물은 당연히 영양적 균형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그에 비해 식량을 한두 가지 곡물에만 과도하게 의존하면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으로 이어져 영양실조를 초래하기 십상. 이런 관점에서 보면 1.2만년 전 사람들이 점차 몇 개에 불과한 곡물에 의존한 것이 꼭 그렇게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었다. 둘째, 몇몇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근동지역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같은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 씨를 뿌리고 돌보고 추수하는 것보다 품이 덜 든다고 한다. 원시인들은 최소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최대의 식량을 거두어들이고자 끊임없이 우선순위에 따른 합리적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렇듯 농업의 등장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살아가던 이들로 하여금 나날의 일상을 농사짓는 일로 서서히 옮아가도록 내몬 몇가지 요인이 있었다. 반건조한 이 지역의 초원에선 이례적일 정도로 다양한 곡물이 야생상태로 자라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재배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밀(에머밀과 외알밀), 보리, 호밀 등속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모두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탄수화물 급원이었다. 완두콩이나 렌틸콩은 훌륭한 단백질원이었다. 천연식량이 더없이 풍부하다는 것은 이 지역만의 고유한 특색이었다. 풍부함의 원천은 부분적으로 근동의 반건조성 기후에 따른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건기가 길어서 매년 일년생 식물이 거의 반 죽는다. 따라서 식물은 생식을 위해 씨앗을 만들어내는 데 에너지를 소비함. 식용 씨앗은 인간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식량이다. 반면 물이 풍부한 숲에서 자라는 초목은 대체로 인간에게 먹을 것을 거의 제공해주지 않으며, 사막은 척박한 불모지나 다름 없음. 따라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주민들은 곡물을 통해 필요한 식량을 얻긴 했지만, 여전히 야생 씨앗을 채집하거나 사냥을 하거나, 장소에 따라서는 물고기를 잡아서 영양분 섭취를 늘려나갔다. 그들은 이처럼 여러 자원을 한꺼번에 활용함으로써 영양결핍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야생 식량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자란 까닭에 농사가 시작될 무렵 일찌감치 몇몇 기술혁신을 이루게 된다. 게다가 곡물을 자르는 원시적 돌낫, 곡식을 담아 나르는 데 쓰는 직조 소쿠리, 곡물을 갈기 위한 절구 등 다른 곳에서 거둔 기술혁신의 성과도 빠르게 수용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선 농업으로의 전환이 점점 더 탄력을 받기 시작. 처음에 사람들은 야생 곡식이나 콩과 식물을 땄다. 구하기도 쉽고 맛도 좋으며, 특정계절에는 수많은 식량자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 이것은 채집이지 농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1.1만년 전 무렵 야생곡물종과 유연관계에 있는 곡물들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범람지대에서 그들이 자연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을 한참 벗어난 장소에 나타나기 시작. 인간이 개입하거나 손댔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완두콩 같은 보호받는 곡식알갱이들은 서서히 크기가 애초의 야생형태보다 열배나 커졌다. 사람들은 적은 시간에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가장 큰 곡식 알갱이나 채소를 거두어들였다. 당초 이러한 선택은 그저 당연한 일이자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문제였고, 이것은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곡식은 수백년에 걸쳐 점차 서로 밀접한 관련은 맺었따. 사람들이 거듭 큰 씨앗을 선택함에 따라 곡식은 다른 식물들과 겨루어야 하는 야생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잡종으로 진화. 쉴새 없이 이동하면서 자식을 데리고 다녀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고 믿을만한 식량원이 확보되자 사람들은 자녀를 더 많이 낳았고, 자연스레 인구도 늘기 시작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또 한가지 이점은 그곳이 사육하기 쉬운 것으로 드러난 여러 야생동물의 서식지였다는 사실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강조한 대로, 쉽게 사육하기 힘든 동물 유형도 숱하게 많다. 태생적으로 너무 사납거나 겁이 많거나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는 동물도 있으며, 그저 너무 작아 쓸모가 없는 동물도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염소, 양, 돼지, 소의 선조들이 야생상태로 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운이 좋은 곳이었다
- 현대의 주요 종교들은 모두 3200-1400년 전에 출현. 구약성서는 주로 3200년 전 모세의 시기부터 예수탄생 전 세기까지 일어난 사건을 다룸. 동아시아 종교적 인물 거개가 몇 백 년 사이에 태어났다. 기원전 604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교를 이끈 노자가 태어났고, 기원전 570년에는 석가모니가 인도 북쪽 네팔에서 탄생. 기원전 551년에는 공자가 탄생. 나중에 서양달력의 기원이 된 예수의 탄생으로 서력기원이 시작됨. 서기 570년에는 무함마드가 태어남. 세계의 종교를 쓴 휴스턴 스미스에 따르면, 일부 종교사가들은 이 기간에 종교적 각성이 비교적 활발했던 이유를 농업의 부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함에서 찾았다. 대다수의 종교 창시자들은 전반적으로 사라들 삶에 깊은 윤리적, 도덕적 관심을 기울였지만, 특히 날로 풍요로워지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딱한 처지에 마음을 썼다.
- 인간활동은 지난 5000년간 비정상적 메탄농도 증가뿐 아니라 메탄 농도가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은 사실을 그럴싸하게 설명해줄 수 있다.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인간은 산업시대가 도래하기 전 수천년간 대기중의 메탄양을 급속하게 증가시킨 주범이다. 초기의 인위적 영향은 그 이전의 수십만년 동안 발생한 자연적 변동 폭의 70%에 이름. 메탄의 경우 인위적인 시대가 약 5000년 전경부터 시작된 것이다.
- 기후 시스템의 주요인들(태양 복사 에너지 변화, 빙상의 퇴각속도, 해수면 상승, 식생의 변화 등)은 하나같이 지난 네차례의 간빙기와 그에 이어지는 몇 천년 동안 비슷하게 움직였지만, 오직 현재 간빙기에만 초기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했다. 반면 그에 앞서는 세 차례 간빙기에서는 이산화탄소가 꾸준히 하강곡선을 그렸다. 결국 최근 이산화탄소 증가를 자연적 요소에 근거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하나같이 과거 세차례의 간빙기에 이산화탄소가 감소한 현상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자연적 요소를 배제하면 다시금 딱 한가지 설명만이 남는다. 즉 인간이 이산화탄소를 비정상적으로 증가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간은 8000년 전부터 산업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3000억톤이 넘는 탄소를 대기중에 더해준 것으로 보였다.
- 어찌 그토록 적은 인간이 그리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단 말인가? 초기에 인간이 대기중에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삼림 벌채를 통해서였다. 8000년 전에서 250년 전까지 3000억톤에 달하는 탄소를 방출하려면 산업혁명 이전의 삼림벌채가 산업시대 2000년동안의 두배가 넘어야 했다. 오늘날에는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열대우림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탓에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에 비해 연간 삼림벌채 속도 추정치가 200년 전에는 오늘날의 10% 수준이었으며, 훨씬 더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찮으리만치 작은 수치로 줄어듬. 이렇게 보자면 1750년 이전까지의 총 삼림파괴가 그 이후의 두배가 넘는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이 들린다. 그러나 일반적 통념에 따른 견해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간과했다. 바로 시간이다. 지난 200년 동안 삼림벌채나 기타 다른 것들의 처분에 따른 탄소배출의 평균속도는 연간 약 7억 1500억 톤의 탄소가 배출된다. 그러나 탄소가 서서히 증가한 그 이전 시대는 그보다 40배나 더 긴 7750년에 걸쳐 있다. 이전 시기의 총 탄소배출량을 3000억톤에 맞추려면 탄소 배출량의 속도가 연간 산업시대 평균(7억 5000만톤)의 5%에 불과한 4000만톤에 그쳐야 함. 결국 속도는 20분의 1이지만 40배 더 긴 기간동안 지속되었으므로 총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두배가 된다. 이솝우화에서처럼, 느리게 움직이지만 일찌감치 출발한 거북이 빠르게 움직이지만 너무 늦게 출발한 토끼를 이긴 것이다. 이 간단한 계산을 통해서 보면ㅁ 비로소 초기 탄소 방출량이 총 3000억 톤에 달한다는 주장이 그럴법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산은 인간이 비정상적인 이산화탄소 증가의 주범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증가의 두가지 특징과 일치하는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첫째, 이산화탄소 곡선이 증가세로 돌아선 8000년 전에 석기시대 인류가 상당한 속도로 삼림을 파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필요. 둘째, 인류가 저지른 삼림파괴의 누적효과로 산업시대 훨씬 이전에(이 경우 무려 2000년 전에) 이미 이산화탄소가 매우 큰 폭으로 증가한 현상을 설명해주는 증거 또한 필요
- 기후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지잔 8000년을 이전 빙하기와 다음번 빙하기 사이에 낀 짧은 막간으로, 자연적으로 기후가 안정된 시기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내용은 지난 8000년 간의 따뜻하고 안정된 기후가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뜻하고 안정된 기후는 실상 시작되었어야 마땅한 자연적 냉각과 인간이 야기한 온난화 효과에 따른 상쇄가 빚어낸 우연적인 유사균형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같은 새로운 개념이 맞는다면, 인간문명이 초래한 기후란 부분적으로 인간의 농업활동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우리 인간은 무려 수천년 전부터 기후 시스템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떠오른 것이다.
- 8000년 전 자연적인 기후는 따뜻했다. 여름에 태양 복사 에너지가 강하고 자연적인 온실가스 수준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자연적인 지구궤도 변화에 따라 여름 태양 복사에너지 양은 꾸준이 줄어들었고, 자연적 냉각이 이어졌다. 지난 몇 천년간 이러한 냉각 추세는 빙하작용이 가능해지는 문턱에 다다랐지만, 인간이 빙하작용을 피할 만큼 기후를 따뜻하게 유지해줄 온실가스를 대기에 더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극지방 기후는 지난 5000년 동안 태양 복사 에너지 양의 변화로 인해 실제로 냉각되었지만, 인간이 온실가스를 더해주는 바람에 빙상이 생성되지 않았다. 지난 200년간의 산업시대에 방출된 온실가스로 인해 지구 기온은 빙하작용이 가능한 온도를 넘어서버렸다.
- 70년대 점차적인 지구궤도 변동이 빙상의 성쇠를 좌우한다는 밀란코비치 이론이 맞는다고 확인해준 것은 기후과학이 일군 성공가운데 하나였다. 임브리 부녀가 80년 발표한 논문은 다음 빙하기가 임박했음을 (고작 1000-2000년 내에 시작될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그 연구결과를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일부 과학자들은 그 결과를 보고 지극히 단견이라 할 만한 다음과 같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 즉 1960-70년대에 진행된, 지구 기온이 같은 수준을 유지하거나 약간 낮아진 것을 보고 새로운 빙하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한 것이다. 80년대에, 수십년간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승했다는 직접적 측정치들이 쏟아져 나오자 대다수 기후과학자들은 급속한 이산화탄소 증가가 훨씬 더 느린 지구궤도 변화보다 가까운 미래의 기후변화에 한층 더 중요한 요인이 되리라 믿었다. 결국 장기적 냉각화보다는 단기적 온난화에 관한 우려가 더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떠올랐따. 그 무렵 온난화는 언론으로부터 이례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더러는 환경단체 대변인들이 미래의 온난화가 미칠 수도 있는 해악에 관해 필요 이상의 불안을 부추기는 과장된 언급을 쏟아내기도 했다. 90년대는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반격이 가해졌다. 과학계가 이 주제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미래의 빙하작용에 관한 예측에서 미래의 열파에 관한 경고로의 이동은 과학적 무능의 예로 언급되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그렇게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요약된 결과들은 이 주제에 관해 더욱 폭넓은 관점을 제공한다. 빙하기가 임박했음을 암시하기 위해 70년대에 새롭게 확증된 지구궤도 이론에 의존한 대다수 과학자들은 틀림없이 느리고 장기적인 지구궤도 주기라는 맥락에 비추어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새로운 빙하기를 당장 내일이 아니라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임박했다고 본 거이다. 이런 재해석을 통해 대다수 과학자들은 실제로 불필요하게 불안을 부추기는 사람들보다 사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구결과들을 보면, 초기 인간활동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 없었다면 지난 수천년간 지구가 대규모의 자연적 냉각과정을 겪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몇 천 년 전부터 적어도 소규모로나마 빙하작용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번 빙하기는 임박한 게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어야 마땅한 것이다. 한편 60-70년대의 미미한 기후냉각을 보고 빙하기가 도래하는 조짐이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린 일부 과학자들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실제로도 비판받았다. 그들의 결론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 오늘날 가장 정확한 추정치에 따르면 단지 유럽인과 접촉한 사실만으로 숨진 아메리카 원주민이 약 5000만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전 산업시대의 역사를 통틀어, 세계 인구 크기에 비례해, 그리고 지금껏 출몰한 최악의 세계적 유행병들 가운데 단연 최대 규모의 유행병이었다. 당시 지구상에서 살아가던 대략 5억명의 인류 가운데, 10%에 이르는 약 5000만 명이 남북아메리카에서 죽어갔다
- 세계적 유행병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변화가 지난 2000년간의 기후변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기후 시스템이 두배의 이산화탄소 수치가 4-10ppm 감소하면 지구기후는 0.04-0.1도 냉각할 것이다. 이러한 냉각은 추웠던 로마시대(200-600년), 따뜻했던 중세시대(900-1200년), 그리고 다시 추웠던 소빙기(1300-1900년)에 관측된 기온변화의 상당부분을 말해줌. 화산분화나 태양활동의 미세한 변화같은 요인이 기온변화에서 맡은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적 과정은 실험을 통과하지 못한 반면, 세계적 유행병 가설은 어쨌거나 재구성된 기온감소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산화탄소 감소규모를 설명해주었다.
- 대다수 과학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관측에 동의한다. 첫번째, 지난 200년 동안 온실가스 농도는 자연적 수준을 넘어 급격하게 증가했다. 두번째, 전 지구의 온도는 지난 125년 동안 이례적으로 빠르게 0.6-0.7도 상승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당장에라도 인간이 일으킨 전례 없는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말처럼 그리 쉽게 정당화될 수 없다. 믿을 만한 기후과학자라면 관측된 온난화의 적어도 일부는 분명 온실가스 농도 증가 때문이라는 데 동의하겠지만, 온난화 전체가 온실가스에 의해서만 야기되었다고는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요인들도 기후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산업시대에 인간이 기후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려면 우선 그 요인들부터 찾아내야 한다. 한가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관측결과가 있다. 바로 인간이 이산화탄소와 메탄을 증가시켰는데도 지난 200년의 기후 온난화는 전산업시대에 인간이 만들어낸 정도에 그쳤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가장 주된 설명은 기후 시스템이 급격하게 도입된 온실가스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수십년이 걸리므로, 지난 반 세기 동안 지구 기온이 폭발적인 온실가스 증가를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그럴듯한 설명은 다른 산업 배기가스들이 대기에 배출되면서 온실가스로 인한 온난화 효과를 일부 소거했다는 것이다. 미래에 온실가스로 인한 온난화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화석연료 생산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수지타산이 맞는지, 우리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온실가스 가운데 얼마만큼을 얼마나 빠르게 대기중에 내보낼지, 그리고 기후 시스템이 그들의 투입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할지에 달려 있다. 이 같은 예상에서 가장 불확실한 점은 미래의 기술발달이 인류 연원의 온실가스를 얼마나 줄여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 선조들은 수백만 년 동안 기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 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영향력은 작지만 서서히 커지기 시작. 그러다 급기야 지난 세기에는 인간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자연을 능가했다. 이런 추세는 다가오는 수백년 동안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남짓한 세월 동안 화석연료 시대는 대체로 막을 내릴 테고, 그러면 기후 시스템은 천천히 자연적인 (좀더 추운) 상태로 접어들 것이다.
-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온실가스가 비교적 서서히 증가(이산화탄소 40ppm과 메탄 250ppb) 했는데도 지구 기온이 비교적 크게 상승(0.8도) 한데 반해, 산업시대에는 큰 폭으로 증가한 온실가스(이산화탄소 100ppm과 메탄 1000ppb)가 지구 기온을 고작 0.6도만 상승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들 반응의 상대적 규모는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요인이 그 차이를 설명해준다. 첫번째 설명은 거북과 토끼의 차이다. 즉 온실가스 농도가 전산업시대에는 서서히 증가했지만 산업시대에는 몹시 빠르게 증가한 나머지 기후 시스템이 미처 그 결과를 기온에 반영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기후 시스템은 온실가스 증가 같은 새로운 방향의 자극에 제대로 반응하기까지 수십년이 걸린다. 우리는 이러한 지체를 기후 시스템의 반응시간이라고 부른다
- 바다의 순환에 미치는 이 모든 영향력을 한꺼번에 고려해볼 때다. 바다의 평균 반응시간 추정치는 25-75년 사이다. 바다는 지구표면의 70%를 차지하고,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더 많은 열을 저장할 수 있으므로, 전체 기후 시스템의 평균 반응시간도 같은 범위에 놓인다. 가장 정확한 추정치는 아마도 30-50년일 것이다. 이 반응시간은 온실가스가 증가한 두 번의 시기에서 다른 결과를 보인다. 전산업시대에는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증가속도가 한정 없이 느려서 장장 수천 년에 걸쳐 있었다. 기후 시스템은 온실가스가 변화하고 몇 십년이 지나면 반응을 보이는데도, 수세기가 흐르는 동안 온실가스 농도의 증가 속도가 어찌나 더뎠는지 기후 시스템은 당시 존재하는 온실가스 양과 거의 전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 산업시대에는 대기중의 온실가스 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증가분의 절반을 웃도는 양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졌다. 산업시대에 온실가스 증가의 최초 조짐은 1800년 무렵 드러났지만, 1900년까지 증가분은 전체의 20% 미만이었다. 1950년경에조차 현재까지의 이산화탄소, 메탄 증가분의 30%가 못 되는 정도만 기록하고 있었다. 따라서 산업시대의 온실가스 증가분 가운데 나머지 70%는 기후 시스템의 반응시간 추정치에 상당하는 기간(30-50년) 동안 일어난 셈이다. 한마디로 기후 시스템은 결국 일어나게 될 온난화의 상당 부분을 미처 기록할 겨를이 없었다. 몇몇 추정치에 따르면, 현재의 온실가스 수치로 인해 결국 일어나게 될 온난화의 절반 이상은 아직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우리가 미래에 배출할 온실가스를 어떻게든 제한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예컨대 대기중의 온실가스 농도를 향후 몇 십 년간 정확하게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식으로), 기후 시스템이 서서히 현재의 온실가스 농도와 전면적인 균형을 이루게 됨에 따라, 지구 기후는 계속 따뜻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이처럼 기후가 반응하기까지 시간 자체가 존재한다는 점이 전산업시대와 비교해 산업시대에 온실가스가 크게 증가했음에도 온난화 정도가 너무나 작은 것처럼 보이는 주된 이유다
-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불일치의 원인에 관한 두번째 설명은 산업 시대에 기후를 냉각함으로써 온실가스의 온난화 효과를 반감시키는 다른 종류의 배기가스들이 대기에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전산어시대에는 그것들이 배출되지 않았거나 배출된 중 배기가스들 가운데 온실가스가 아닌 것은 바로 이산화황이다. 이산화황 가스는 대기중에 배출되면 에어로졸이라는 작은 입자로 변한다. 화산 분화로 발생하는 황과 달리 이 황 입자는 성층권에 도달하지 않는다. 성층권에서라면 황 입자가 정착하기까지 몇 년 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테지만, 대기권에서는 대신 수백미터에서 수천 미터 상공으로 상승한 뒤 우세풍으로 타고 서서히 배출지점에서 벗어남. 이산화황의 3대 주원천은 미국 중서부, 유럽(특히 구소련에서 분리된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중국이다. 에어로졸 기둥은 하강기류를 타고 복사에너지를 일부 반사하므로 그들이 기후에 미치는 효과는 지역적 차원의 냉각이다. 냉각의 정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입자의 크기, 모양, 색깔과 관련된 복잡한 세부사항들, 그리고 그것이 대기권에서 어느 높이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짐. 이 에어로졸은 며칠 혹은 몇 주 내로 비에 의해 대기에서 씻겨 나가지만, 그런 일은 이들이 하강기류를 타고 수백에서 수천 킬로를 떠다닌 뒤에야 일어난다
-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다는 말은 지극히 불길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남극대륙 가장자리의 빙붕은 남극대륙의 안쪽에서 바깥으로 이동하는 얼음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채워지며, 그 얼음 역시 내린 눈에 의해 계속 새로 보충된다. 다시 말해 얼음은 언제나 그 체제 내에서 돌아다지므로 빙상 크기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음.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더러 떨어져나간다는 사실은 장기적인 의미에서는 안정적인 체제의 정상적 일부분이다. 오직 남극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빙붕이 지난 세기들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드러날 때만 우리는 인위적 온실가스 온난화가 그 같은 추세를 부추겼노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러한 추세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남극대륙의 얼음이 안정적인 것 같다
- 지구 온난화에 관한 숨은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와 미래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예측된 미래 온난화의 대부분을 피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감축하려면, 거의 대다수가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만한 가혹한 경제적 희생을 감수해야 함. 즉 여행아나 난방을 위한 연료값이 훨씬 더 비싸지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온도조절장치를 훨씬 낮거나(겨울), 높게(여름) 설정해야 하고, 상당비용을 투자해 발전소를 개선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 대체해야 함. 이러한 시도들은 경제나 삶의 질에 현저한 방해가 될 테고, 그것을 반기는 시민은 거의 없을 것읻. 우리는 현재 기술로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완화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일만한 경제적 여력이 안된다. 이 기저의 진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논의를 좀더 분명한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해주기는 할 것이다.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를 정말로 피하고 싶어하는지 솔지갛게 질문해 보아야 함. 사람들은 대체로 겨울이 다가오면 투덜대고 여름이 시작되면 반가워한다. 눈이 내리지 않는 선벨트 지역(미국에서 연중 날씨가 따뜻한 남부 및 남서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중서부와 뉴잉글랜드 지역에 피해를 안겨준 눈과 착빙성 폭풍우에 관한 뉴스 보도를 접하면 그와 무관한 자신의 처지에 안도감을 느낀다. 수백만명이 은퇴 후 남부로 이사를 떠나지만, 북부로 거처를 옮기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추운 주의 거주민들은 투표함 앞에서 어느 쪽에 표를 던질지 저울질해야 한다. 지금처럼 추운 날씨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올릴 것인가, 아니면 세금은 현재 수준으로 묶어두고 미래의 3월은 지금의 4월처럼, 미래의 11월은 지금의 10월처럼 되게 할 것인가. 나는 그들이 결코 날씨를 더 춥게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결정을 내릴 것 같지가 않다.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려는 대규모 기획은 어떤 것이든 결국에 가서는 저변에 깔린 이러한 태도와 부딪치게 될 것이다.
- 환경 극단주의자들은 기업 대변인들이 탐욕스러운 석탄 회사와 석유회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음으로써 썩을대로 썩었다고 성토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입장에서 비롯된 적극적인 조치들이 대중에게 큰 비용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환경 옹호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란 장 자크 루소가 주창한 고결한 야만인을 품위있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고결한 야만인이란 과거에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사냥할 뿐 그 이상은 조금도 탐하지 않은 채 환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원주민들을 일컬음. 그들은 소위 순정한 원시시대를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지난 200년 동안의 악과 대비시킨다. 그리고 산어발달을 인간이 최초로, 유일하게, 진정으로 자연을 공격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이 책은 순수한 자연세계라는 개념은 신화임을 보여주었다. 실상 전산어시대의 문화도 오랫동안 환경에 적잖은 영향을 끼쳐온 것이다. 최초의 영향은 여러 대륙에서 대부분의 대형 포유류와 유대목 동물을 멸종으로 내몬 개선된 사냥기술에서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몇 천년 뒤 인간은 농업발달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로 환경에 좀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따. 대대적인 삼림파괴와 관개로 인한 토지이용 변경은 토양을 침식하고 악화시켰다. 수 천년 전의 농사 관행으로 온실가스가 다량 방출되었으며, 지구 기후가 변화했다. 전산업시대는 기술도 비교적 원시적이었으며 인구도 수십 억이 아니라 수억 단위였지만, 당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지구의 환경과 기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실제로 적잖은 증거를 통해 철기시대, 심지어 석기시대 말엽에도 사람들이 오늘날의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지구풍경에 끼친 1인당 영향은 훨씬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 수밖에 없었으며, 대다수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숲을 잘라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평균 수십에이커의 숲을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 지구 기후사에 대한 오랜 관심이 낳은 결과이겠지만, 미래를 향한 나의 걱정은 서로 연관되는 일련의 문제들이 모아지는 경향이 있다. 즉 과거에 서서히 이루어진 과정을 거쳐서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한, 일단 써버리고 나면 영영 사라져버릴 선물이다. 그 선물에 대한 나의 걱정은 간단하다. 즉 그것이 줄어들거나 완전히 고갈된다면, 우리 인간은 비교적 저렴한 대체물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은퇴할 즈음이면 많은 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나의 개인적 관심사 또한 우리 손자손녀들이 살아갈 세상까지 뻗어나간다. 나는 그애들이 노년에 이를 무렵이면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선물들의 일부가 더 이상 무한정한 자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누가 봐도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때쯤이면 우리 손사손녀 세대는 1800년대 말에서 21세기 초반까지를 짧았지만 너무나 운 좋은 버블의 시기, 즉 억세게 재수 좋은 인류 몇 대가 대체로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도 못한채 그 선물들을 대부분 써버린 시기였노라고 회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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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동굴에서는 수많은 화로의 흔적이 발견되었기에, 이런 증거에 기초해 그들이야말로 최초에 빈번하게 불을 사용한 인류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화로가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즉 난방용인지 조리용인지 또는 짐승의 습격을 막기 위해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음. 또 화로의 흔적이 있어도 그들이 동굴에 정주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음. 그러나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동굴에서 동물의 뼈가 발견되었다는 점. 그 뼈들은 네안데르탈인이 먹은 동굴의 찌꺼기라고 생각되는데, 주로 붉은 사슴, 가젤, 순록, 산토끼 등 중소형 동물이다. 그들은 중소형 동물을 대체 얼마나 먹었을까? 인골에 잔존하는 콜라겐 구성요소인 탄소나 질소의 비율을 측정해 음식물의 구성을 확정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그들의 육식비율을 구했더니 무려 80%에 이르는 높은 수치였다. 이것은 현재 북극권에서 주로 순록고기를 먹고 사는 라프인의 90%에 가깝다. 이렇게 높은 육식 비율이라면 네안데르탈인은 필시 유능한 사냥꾼이었을 것이다. 사실 평균키가 남성 167센티, 여성이 160센티의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뇌의 용량은 1450cc였다고 함. 요컨대 현재 일본인보다 크다
- 현생인류가 언제부터 불을 능동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사용하려면 나무를 모으거나 보존해야 했을 테고, 불을 계속 피우려면 신중함과 조심성이 필요. 즉 불을 관리하는 데는 우회적 행동이나 연기된 만족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고고학자 카트린 페를레는 불이 이용되는 데 필요한 조건은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정신적 진보라고 말한 것.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조직을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불의 관리, 즉 불의 지배는 인간진화의 발전과정과 같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불의 지배야말로 인간의 진화를 초래한 것. 이에 대해 하으츠블룸은 '불을 지배하는 능력은 특수한 사회적, 정신적, 육체적 특성의 동시 발전에 따라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 왜 야생동물은 불을 사용한, 즉 요리된 음식을 좋아할까? 그것은 그들이 고에너지 음식물을 직감적으로 인식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기 때문. 음식물은 대체로 요리를 하면 쓴맛이나 떫은 맛이 줄어들고 단맛이 증가. 즉 맛이 좋아짐. 그뿐 아니라 영장류는 음식물의 다양한 특성, 즉 까칠하고 끈적하고 기름기가 많은 따끈하고 차가운 것에 대해 직감적으로 반응하는 신경회로를 갖고 있다. 인간의 뇌가 그런 능력을 가졌따는 사실은 04년 처음 밝혀졌다. 즉 인류가 영장류와 같은 반응으로 날것보다는 요리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 고기에 대해 말하자면, 근섬유가 작은 고기가 더 부드럽다. 그래서 닭고기가 소고기보다 부드러운 것. 그러나 고기의 단단한 정도는 변화한다. 도살된 동물의 체내에 있는 글리코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으로 변하고, 그 변성작용의 결과로 고기가 부드러워짐. 며칠 지난 고기는 효소로 단백질의 일부가 파괴되기 때문에 더욱 부드러워 짐. 하지만 고기의 단단한 정도를 가장 잘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요리다. 그것은 고기를 단단하게 하는 결합조직에 열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 하지만 근섬유는 가열하면 딱딱해진다. 그렇다면 요리의 숙달정도가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랭엄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아주 부드러운 음식물을 식사에 도입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종은 소화의 중노동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에너지를 많이 절약할 수 있엇다. 몸이 해야 하는 일을 불이 대신해 준 것이다."
요컨대 요리는 칼로리의 원천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고, 요리한 것이 날것보다 우수한 이유다
- 불을 제어할 수 있게 되자 필연적 결과로 공동체가 통합되었다. 불을 관리하려면 일을 분담해야 했기 때문. 불이 중심기능을 하게 된 것은 조리에 사용되기 전의 일이고, 조리와는 관계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불에는 조리 외에도 사람들을 모으는 작용, 즉 밝기나 따뜻함이 있으며 유해한 동물이나 육식동물로부터 보호하는 작용이 있는 것이다.
- 불과 음식이 결부되었을 때 공동체 생활에 좋든 싫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중심이 생겨났다. 조리를 통해 음식물의 가치가 높아지자 음식물은 단순한 영양원이 아니었고, 훌륭한 가능성이 새로 열렸다. 식사는 희생의 공유, 친목, 의식의 장이 되고, 불이 가져오는 신비한 변화의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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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어도어 루즈벨트에 대한 평가(긍정)
* 강한 미국 만들기의 초석을 놓은 대통령
* 미국인 중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명
- 테어도어 루즈벨트에 대한 평가(부정)
* 악랄한 제국주의자이자 최악의 정신병자
* 혁신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
* 남북전쟁 이래 미국에 내린 최악의 재앙
* 자유시장을 억압한 사회주의자
- 테어도어 루즈벨트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음. 그를 비판적으로 본 의견은 각각 촘스키, 하워드 진, 마크 트웨인, 네오콘(공화당 중심의 신보수주의자)들의 의견이다. 미국 신보수주의자들이 루즈벨트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트러스트를 금지시키는 반독점법을 만들었기 때문. 하지만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그를 싫어할 리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도전을 막아내고 자유시장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 영국 자본주의에 날개를 달아준 산업혁명의 상징이자 그 혁명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상징이 철도이고 토핌 햇 경이 그러한 철도를 대표하는 인물. 그래서 그의 공로를 인정한 왕실은 산업자본가들에게 기사작위를 내렸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나 비틀즈 멤버 폴 메카트니 같은 문화계 인물에게도 기사작위가 수여되기도 했다. 2016년 1월 영국 미러지에서는 비틀즈 멤버였던 링고스타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자는 노동당 대변인 마이클 더거의 주장과 함께 투표가 진행되었다. 링고스타는 토마스와 친구들의 애니메이션 첫번째 토마스 목소리 성우이기도 함. 백작이나 선원 존도 영국적 캐릭터로, 둘다 탐험과 여행을 좋아한다. 백작은 소도어 섬에 자산을 많이 소유한 영국 귀족임. 선원 존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인 답게 해군에서 퇴역한 이후에도 탐험정신을 잃지 않고 소도어 섬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로 다니는 캐릭터이다. 한마디로 토마스와 친구들에 나오는 주요인간 캐릭터들은 영국 산업혁명의 상징인 철도산업과 관계가 있거나 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영국 제국의 확산과 관련 있는 인물들. 철도회사 사장인 토핌 햇 경과 소도어 섬의 지주이자 자산가인 백작이 친구인 것은 우연이 아님. 영국 역사를 살펴보면 부르주아와 지주는 역사적 동맹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러한 전통이 자연스레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에도 드러난 것이다.
- 영국 부르주아는 프랑스혁명 때 귀족과 왕족을 단두대에서 죽였던 프랑스 부르주아와는 달리 왕실과 귀족이 지위를 보존시키고 그에 대한 대가로 정치, 경제, 사회적 주도권을 확보. 철도회사 사장인 토핌 햇 경이 기사작위를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영국적 상황 속에서 가능했던 것. 그리고 영국 시민혁명인 명예혁명이 지주, 자본가, 귀족의 타협에 의해 성사된 혁명이었듯이 토마스와 친구들에서도 귀족이자 지주인 백작과 귀족작위를 받은 철도회사 사장이 친구인 것은 그러한 역사가 반영된 것이다.
- '영국병'이란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60년대와 70년대 영국의 복지가 지나쳐서 경기침체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사용됨. 보수주의자들은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지속적으로 임금이 상승했고, 생산성이 저하되어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영국 경제의 특징을 고복지, 고비용, 저효율을 기반으로 하는 영국병으로 진단했고, 실제 영국 경제는 76년 IMF의 지원을 받는 상황까지 치달음. 이런 상황속에서 대처는 79년 집권하자마자 영국병을 치료하겠다며 여러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이런 정책을 대처리즘이라고 함. 대처리즘은 복지축소, 노조와 파업에 대한 강경대응, 재정치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완화와 경쟁촉진 등으로 구성됨. 일반적으로 대처리즘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내용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 대처에 대한 평가. 대처리즘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림. 먼저 긍정적 평가에 대해 살펴보자. 긍정론자들은 대처를 280년 동안 배출된 영국의 55명 수상 가운데 유일학 ~주의가 붙는 철의 여인으로 칭송. 대처리즘에 대한 긍정론자들이 대처를 칭찬하는 이유는 법과 원칙을 내세워 노조의 파압을 잠재웠다는 것. 과감한 규제철폐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켰으며, 긴축재정을 통한 물가인상 억제, 정부규모 축소, 실력 성과제도 도입 등을 통해 영국의 경제성장률을 플러스로 돌려놓았음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도 기여했다고 평가. 게다가 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의 국력을 과시했다는 점과, 각종 기업의 민영화와 감세를 단행했다는 점도 높이 산다. 대처의 정책중 가장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은 84년부터 1년간 이어진 광산 노조 파업에 대한 대응. 생산성이 낮은 탄광의 폐쇄발표, 1년간 석탄 생산량 65% 급감, 파업노조원과의 충돌로 경찰관 3500명 부상 등의 상황 속에서도 대처는 노조원 9000명을 연행하는 등의 강경정책을 실시하여 노조의 저항을 억눌렀다. 별다른 배경이 없는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대처에게 노동자들의 단결과 파업은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게으름뱅이들의 생떼로 보였을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 미국 대통령 레이건도 그녀와 비슷한 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제시했고, 이들의 이런 정책을 흔히 신자유주의라 부름
- 대처리즘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주로 복지정책의 후퇴에 대한 것이었다. 대처는 시장원리만을 강조하여 사회복지를 후퇴시킨. 그로 인해 부자와 빈자간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경쟁과 효율성은 증대됨. 그래서 영국을 황금만능주의의 무자비한 사회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재임기간 동안 빈곤율이 약 2배로 증가했고, 지니계수가 79년 0.25에서 90년 0.34까지 증가. 게다가 광산 폐쇄, 각종 국영기업체 민영화 및 노동유연화 등을 통한 실업률 증가로 많은 가정이 해체되어 소위 대처세대라 불리는 10대들이 탄생. 즉,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흡연과 알콜에 의존하는 무기력한 청소년들을 증가시킴. 게다가 대처리즘의 성과라 칭송받는 경제성장의 경우도, 대처가 총리가 된 것은 79년이고 영국 경기가 회복된 것은 90년대 중반이므로 대처가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평가에는 무리가 있음. 그리고 경제성장의 성과는 금융업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인데, 그 이면에는 제조업의 몰락이 감추어져 있음. 실제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완전히 몰락한 상태임
-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은이 유럽에 쏟아져 오자 물가가 상승했는데, 이런 변화를 가격혁명이라고 함. 가격혁명 때문에 이윤율이 높아진 상업에 너도나도 뛰어들었고, 그로 인한 상업의 비약적 발전을 상업혁명이라 함. 신항로 개척으로 세계적 규모의 시장이 형성됨에 따라 상품의 대량생산을 추진하게 됨. 그래서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공장에서 상품을 대량생산하는 방식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것을 산업혁명이라 함. 이렇게 성장하게 된 신흥 상공업자인 부르주아가 자신들이 이윤추구에 방해가 되는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만들어낸 사건을 시민혁명이라 함.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침략하여 수탈을 일삼는 제국주의의 길에 들어섬. 다라서 아프리카 해안을 처음으로 항해했던 이름모를 이슬람 상인보다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오늘날 중앙 아메리카와 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은 에스파냐어를 쓰고,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이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이 중국으로부터 강탈한 마카오라는 도시가 존재하고 일본인들에게는 덴푸라와 빵이 전해졌던 것이다.
- 일본의 3대진미는 성게알전(우니), 숭어알젓(카라스미), 해삼창자젓(고노와타)을 꼽는다. 그런데 이 세가지 음식의 공통점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모두 젓갈이라는 것. 또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에도 막부)의 지배자인 쇼군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는 것. 냉장보관을 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젓갈류의 음식이 고급음식이었고, 당시 최고 진미는 당대 최고 지배자인 쇼군에게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랬던 스시가 오늘날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생선과 밥을 삭혀서 시큼한 맛을 내는 대신 식초를 뿌려 신맛을 내는 방식이 도입되었기 때문. 식품이 발효되어 곰삭은 신맛과 식초의 신맛은 분명히 다를 터인데, 왜 그런 방식을 채택했을까? 그 이유는 오랫동안 발효하는 과정을 기다릴 수 없는 사정이 생겼기 때문. 그 사정이란 일본의 경제성장과 인구증가, 특히 도시인구 증가로 인해 식료품 수요가 급증했고 전통적 스시 제조방식으로는 공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비싼 가격이 매겨질 수 밖에 없기 때문. 전통적 스시는 발효시키는 기간이 길 뿐만 아니라 귀중한 밥을 버려야 하는 음식이다. 따라서 도시의 서민들이 즐기기에는 너무 비싼 음식. 그래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서민들에게 스시를 제공하기 위해 발효기간을 생략하는 대신 발효된 맛을 흉내내기 위해 식초를 뿔니 밥 위에 생선을 얹어냈던 것. 이것이 스시가 슬로우푸드에서 패스트푸드로 변화하는 과정임
- 일본인들의 음식을 통한 근대화 노력의 결정판은 바로 돈가스. 일본의 왕이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까지 육식을 장려했지만 오랫동안 육식을 하지 않던 일본인들이 거부감 없이 육식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음식이 바로 돈가스임. 돈가스라는 단어는 영어의 포크 커틀릿에서 포크에 해당하는 돈, 커틀릿을 일본식으로 읽은 카츠레츠가 합쳐진 단어
-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무기가 DDT였다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무기는 정로환과 콩나물이었다. 어느 전장이나 병사들을 괴롭히는 질병이 있기 마련. 전쟁터의 질병은 굶주림과 비위생적 환경때문에 발생하는데, 대개는 깨끗하지 않은 물 때문에 발생하고 가장 흔한 병이 복통과 설사다. 그 점은 일본군이나 러시아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아무 대책이 없었떤 러시아군과는 달리 일본군에게는 대책이 있었는데 바로 정로환이다. 일본 군부는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약을 개발하여 병사들에게 매일 먹도록 했따. 그랬더니 배탈과 설사로 죽는 병사들의 숫자가 획기적으로 감소. 주성분이 크레오소트라서 크레오소트환으로 부르다가. 러일전쟁이후 정복할 정, 러시아 로, 약 환의 세글자를 조합하여 정로환이라 부름. 정로환이 유명해지며 여러 제약사들에서 만들었고, 72년에는 한국 동성제약에서도 만들기 시작. 어쨌든 정로환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러시아를 정복하는 약이란 의미로 사용됨. 이후 정로환은 중일전재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필수품을 사용되었다.
- 미쓰비시 광업이나 미쓰비시 중공업 못지 않은 전범기업이 있다. 니콘이다. 엄밀히 말하면 니콘의 전신인 일본광학공업이 문제다. 이 회사는 1차대전 중인 1917년 영구, 독일 등 유럽으로부터 광학병기 수입이 불가능해지자 잠망경, 탐조등용 반사경 등의 국산화를 위해 미쓰비시가 출자해서 만든 기업.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광학공업에서는 총 23000명의 노동자들이 쌍안경, 렌즈 잠망경, 조준경 등의 군수물자를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 미쓰비시 중공업이 일본 제국군대에 무기를 제공했고, 미쓰비시 광업이 그 무기를 작동시키고 군대와 장비를 제작, 운반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 반면 니콘의 전신 일본광학공업은 일본군이 사용할 무기에 눈을 달아준 셈. 그러다 종전 후 군수품 대신 카메라를 주력사업으로 하여 니콘 카메라를 내놓았다. 그런데 미쓰비시 그룹 내 다른 계열사는 물론이고 다른 기업들도 그랬고, 나치에게 협력했던 폭스바겐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들이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그 어떤 기업고 반성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그런데 2016년 3월 독일 자동차회사 BMW사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2차대전 당시 나치당에 군수물자를 납품하고 포로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것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한다'는 발표를 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BMW라는 브랜드는 역사적으로 명품이라 할 만하다.
- 영화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는 늘 마티니를 마심. 마티니는 진이나 보드카에 베르무트(와인과 브랜디를 섞은 술)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이다. 진의 알콜 농도가 대개 40도, 보드카는 45-50도. 여기세 첨가하는 베르무트도 평균 14도인 와인과 40도인 브랜디를 섞은 술이므로 강력한 폭탄주인 셈. 그래서인지 마티니를 좋아한 유명인들은 다들 강력한 인생을 살았다. 늘 임무수행의 중압감 속에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스파이 007은 물론, 2차대전을 이끈 미국 루즈벨트나 영국 수상 처칠 등이 즐겨 마심. 또한 1차대전, 에스파냐 내전, 2차대전에 참전했던 미국 소설가 헤밍웨이도 인생의 주요 기간을 폭탄과 함께 지냈다. 그런 의미에서 마티니는 전쟁같은 삶에 어울리는 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 마티니의 주재료인 진은 40도짜리 독주이므로 그 자체가 강력한 술이다. 그래서인지 진은 가장 강력한 술을 요구하던 시대에 유행. 진은 산업혁명기 영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호식품의 지위를 넘어 생명수 수준의 술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진은 값싸게 취할 수 있는 고마운 술이기 때문. 진을 파는 주점은 주로 빈민가에 많았고 주점에는 진에 취해 쓰러지면 자고 갈 방도 제공했다. 그나마 그런 방은 항상 만원이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가가 마차에 치어 죽거나 하수구에 빠져죽는 사람도 속출. 주점 간판에는 "1페니로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만취할 수 있다"는 광고도 등장. 당시 한 문학가는 진이 빈민들의 주식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 한국에 N포세대, 일본에 사토리 세대가 있다면 타이완에는 딸기 세대가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의미의 3포세대라는 말에서 시작. 여기에 집과 인간관계가 추가된 5포세대, 꿈과 희망이 추가되어 7포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하다가, 포기할 것이 너무 많아 N포세대까지 확대. 일본 사토리세대에서 사토리는 깨달음, 득도란 의미. 즉 득도한 것처럼 출세, 성공, 심지어 자동차, 해외여행도 포기한 80년대 후반 이후 출생한 세대를 말함. 타이와 딸기세대는 딸기가 물러서 잘 상하는 것에 비휴해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여 사회나 정치에 무관심한 81년 이후 출생한 세대를 가리킴. 이런 용어를 보면 동아시아 젊은이들은 공통적으로 기성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던 출세나 성공보다 자기 만족적인 것을 추구.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의지력이 약해 쉽게 포기하고, 자신들을 힘들게 만드는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세대로 비춰짐.
- 아류 제국주의와 촌놈들의 제국주의. 박노자는 14년 1월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친미성향이 거의 내면화되어 있는 한국 지배자들은 각종 자유무역협정으로 미국 등 중심부 자본에 국내 고수익 투자기회를 제공해 가면서 미국 주도의 신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승해 일종의 아류 제국으로서 농지, 에너지 약탈부터 저임금 노동착취까지 세계의 주변부에서 또 하나의 작은 식민모국으로 군림'하고 있다며 한국의 그러한 행태를 아류제국주의로 규정. 한편 우석훈은 저서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이제 한국 자본주의는 내적 불균형과 모순의 악화로 필히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북한을 일종의 내부 식민지화하면서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의 길로 들어서는 중국의 제국화 및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 우석훈이 한국을 촌놈들의 제국주의라 한 것은 미국처럼 대놓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정권을 붕괴시키지는 못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편승한 작은 제국으로의 모습을 촌스럽다 표현한 것.
- 휴대폰과 티셔츠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대표하는 상품. 티셔츠가 60-70년대 섬유산업으로 대표되는 노동집약적 제조업 육성 및 수출증대를 통해 성장한 과거 한국경제를 대표한다면, 휴대폰은 오늘날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대표 IT상품. 과거 노동집약적 제조업 중심의 성장이 독재정권의 강력한 노동탄압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오늘날 민주화가 진행된 한국에서 그런 방식은 불가능해짐. 그래서 선택된 곳들 중 하나가 바로 캄보디아. 캄보디아에는 여전히 강력한 개발독재를 추진할 정부가 존재하기 때문. 어떻게 보면 오늘날 캄보디아인들은 과거 한국인들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휴대폰의 경우 60-70년대 세계의 하청공장이었던 한국이 오늘날에는 세계에 하청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콩고나 브라질에서 한국의 휴대폰 없체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경제는 하청 국가에서 원청국가로 성장했을지 모르나 사회적, 윤리적 책임감과 태도는 그 위상에 걸맞지 않는 수준임을 보여줌.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개발독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폐해는 한국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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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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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조건

역사 2018. 8. 8. 08:21

- 생물학적 순종이 변화하는 환경에 매우 허약한 것처럼 문화적으로도 폐쇄적인 순혈주의는 환경변화에 취약.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 더구나 다양한 생각이 끼여들 여지가 없어 쉽게 극단주의로 빠짐. 다른 생각이라는 이름의 제어장치가 없는 자동차인 셈이다. 그래서 급속도로 몰락한 제국들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짐. 멀리갈 필요도 없이 20세기 초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제국이나 나치의 제3제국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스페인도 순혈주읭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1. 로마시민권
- 훗날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로마의 특성을 이야기했다. "로마제국의 건설과 로마시민들의 며엉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가 사비니인들의 사례를 통해 적들을 로마시민으로 받아들여서라도 나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 키케로의 말처럼 통합노선은 이후에도 계속됨. 새로운 부족이 로마에 합병될 때마다 귀족들은 로마귀족이 되어 원로원에 의석을 보장받았고 평민들은 로마시민이 되어 투표권을 부여받음. 따라서 후대에 로마를 이끈 사람들은 대부분 오리지널한 로마인이 아니다. 로마의 제1의 슈퍼스타 카이사르를 배출한 율리우스 가문은 알비롱가 출신이며,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를 통치한 클라우디우스 가무은 건국 초기에 5천명의 일족을 이끌고 집단이민을 온 사람들이다. 아마 20세기 초강대국인 미국의 민족구성이 고대 로마의 민족구성과 가장 유사할 것이다.
- 폐쇄적인 아테네도 처음부터 외국인에게 폐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성장기의 아테네는 외국인들에게 무척 개방적인 국가였다. 아테네 발전의 기초를 닦은 솔론의 시대에는 아테네에 거주하는 재능있는 외국인들에게 시민권을 나누어주어서 아테네에 동화시키고자 노력. 발전의 동력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솔론의 시대 이후 등장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더욱 개방적인 정책으로 아테네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다. 문제는 아테네가 패권국가로 성장한 뒤에 발생.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패권국가의 시민은 상당한 이권을 가짐. 경제적으로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동맹국의 시민들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이렇게 시민권의 가치가 올라가면 초기에 인심좋게 시민권을 나누어주던 태도가 돌변하게 마련. 시민권이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최종적으로는 순수한 아테네인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시민구너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 사실 아테네의 시민권을 이 정도로 폐쇄적인 상태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페리클레스였다. 그러니 페리클레스가 만년에 겪은 곤욕은 자업자득인 셈. 아테네가 시민권문제에서만 폐쇄적으로 굴었으며 그나마 나았을텐데 아테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갔다. 동맹국의 시민들은 2등국민 취급하기 시작. 사실 폐쇄적인 시민권과 동맹국에 대한 오만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등장할 수밖에 없다. 시민권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논리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순수하고 우월한 존재인데 불순물이 끼어드는 게 싫다는 감정이 폐쇄적 시민권 정책을 만드는 것. 이렇게 스스로를 우월한 존재라고 믿고 이방인을 열등한 불순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이방인들에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내의 동맹국들에게 말 그대로 지배자로 굴기 시작. 동맹의 돈을 횡령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테네에 건물을 짓고, 아테네의 배를 만들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 그리고 동맹국들이 조금이라도 반발할 조짐을 보이면 가차없이 응징을 가했다. 이렇게 되면 동맹국들 역시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아테네가 강하니까 아테네 밑에 있지만 언제든지 아테네가 약해지기만 하면 바로 뒤통수를 치겠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지는 것이다.
- 개방성은 위기의 순간에 보답을 받았다. 한니발에 의해 군사적으로 완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국들은 로마를 버리지 않았던 것. 사실 이들 동맹국들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미 로마 시민권을 획득해서 로마인으로 살고 있었다. 삼니움족 출신 집정관인 오타릴리우스 크라수스를 생각해보라. 그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로마라는 공동체 안에서 아주 흔한 예에 불과했다. 동맹국들에게 로마는 이미 자기자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였다. 남이 아닌것이다. 로마는 그들에게 이미 조국이었다.
2. 세계제국 몽골
- 몽골군이 가진 잔인하고 야만적 이미지 덕에 우리는 몽골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몽골군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일단 몽골군은 숫자가 너무 적었다. 전체를 다 모아야 겨우 10만이다. 이 숫자를 갖고 세계 모든 나라와 싸운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게 돌격하다가 희생이 커지면 세계정복은 오히려 불가능했다. 따라서 몽골군은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음. 결정적 순간이 아니면 정면공격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강력한 관통력을 가진 활을 이용했다. 초원에서의 사냥법을 그대로 응용하여 적군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적중률 높은 화살공격을 퍼부었따. 이 공격으로 적군의 기가 꺾이고 혼란에 빠지면 유목민의 특유의 곡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일단 기가 꺾인 군대는 더이상 군대가 아니다.
-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킴. 순수한 몽골인만의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다. 몽골군의 가장 주요한 주력군은 몽골초원의 경기병이다. 몽골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하는 이들은 말 그대로 타고난 기병이다. 당연히 기마술이 뛰어나고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다룬다. 더군다나 최소한의 보급만으로도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능력 덕에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 없었따.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이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 몽골군이 아무런 보급부대도 없이 세상 끝까지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의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능력이 결정적 역할을 함. 이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이들이 경기병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약점. 경기병이라는 단어가 알려주는 것처럼 이들은 거의 갑옷을 걸치지 않음.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가죽을 덧댄 매우 가벼운 갑옷을 걸쳤다.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입고, 가벼운 장비만을 걸치는 것이다. 그래야 말도 지치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갑옷을 거의 걸치지 않는다는 것은 방어력이 약하다는 의미. 견고한 방법을 이루고 있는 보병의 밀집부대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이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가능한 정면충돌을 피했따. 대신 활을 이용했는데 몽골군은 관통력이 높은 매우 강력한 활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공격을 회피하는 그들의 약점을 어느정도 커버가능.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약점을 감출 수 있는 전술도 개발해냈다. 그들이 사냥터에서 항상 사용하는 방식을 전쟁터로 끌어들인 전술이었다. 우선 사냥터에서 짐승을 몰듯이 적군을 몰아 원형으로 둘러싼다. 몽골군은 적에 비해 월등한 기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적군은 사냥원진을 활용한 몽골군의 포위망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곤 엄청난 숫자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몽골의 활은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복합재질로 되어 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었다. 따라서 사거리가 매우 길고 관통력이 높았따. 따라서 이 정도 공격만으로도 상당한 살상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살 공격의 심리적 효과였다.
- 몽골인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몽골은 피정복민들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 또한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몽골은 오랫동안 유목민의 생활을 했고, 정주사회의 전문가들을 갖고 있었으나 이들에게 강제로 일하게 하지는 않음. 오히려 대우도 좋았고 존경도 받았기에 외부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섬. 다시 말해 이들 전문가는 몽골에 융합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음
-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초원의 기마병들은 단 한번도 양자강을 넘지 못했다. 결국 쿠빌라이칸은 지지부진한 남송전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결정. 자신의 최대 강점이던 기병중심의 기동전을 포기하기로 함. 대신 보병과 수군이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이런 유연성은 사실 역사상 쉽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거의 전 세계를 정복할 정도로 훌륭한 효과를 보인 전투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전투방식을 배운다는 것은 앞으로의 역사적 사례에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성장기 몽골제국의 지도자들이 가진 사고의 유연성은 실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보병과 수군이 전투의 중심이 됨에 따라 기존에 몽골이 정복한 다양한 지역의 군대가 몽골군에 새로운 힘이 되었다. 산성을 중심으로 한 전투에 익숙한 북중국의 옛 금나라 군대와 한족군대, 그리고 고려군이 몽골군의 전면에 등장했고 한족과 고려군이 주축이 되어 대규모 수군이 건설되기 시작. 여기에 지난 번 서남아 원정에서 몽골제국에 포함된 페르시아 기술자들이 새로운 투석기를 만들어 몽골군에게 제공했다. 이슬람교도인 알라웃딘과 이스마일이 만들었기 때문에 회회포라고 불린 이 투석기는 밧줄이나 나무의 복원력을 이용하는 기존의 투석기와는 달리 평형추의 낙하 회전력을 이용해 돌을 발사했다. 투석기 팔 반대편에 무거운 추를 달고 여러 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줄을 감아 투석기 팔을 내린 후, 돌을 싣고 순간적으로 줄을 풀면 추가 떨어지면서 투석기 팔과 연결된 대를 회전시켜 돌을 날려보냈다. 보통 50~100킬로의 돌을 300미터까지 날렸다고 한다
- 몽골의 통신망인 잠이 만들어지자 갑자기 중국의 의사가 바그다드까지 이동했다. 베네치아 상인이 중국에 갔다. 한국의 종이가 이슬람 도시에서 사용되었다. 이슬람 강철이 중국에서 사용되었따. 갑자기 사람과 사상, 의약품 그리고 재화가 이곳저곳으로 이동. 세계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만 해도 아시아와 유럽의 직접적 접촉은 없었다. 재화가 한 도시에서 다른 곳으로 매우 느리게 이동했다. 하지만 칭기즈칸 시대 이후, 유럽과 아시아는 계속 접촉을 이어감. 사상과 재화, 의약품, 그리고 종교가 끊임없이 이동했다. 이는 근대 세계 시스템의 토대였다.
- 결국 유럽인이 몽골에게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셈. 몽골에 세금을 바칠 필요도 없었고 약탈당하지도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때 시작된 모든 무역으로 이익을 얻음. 베네치아의 폴로 가문처럼 중국에 가서 새로운 사상을 가져올 수 있었음. 곧 유럽인들은 유럽의 놀라운 새 재화와 사상을 갖게 됨. 일례로 인쇄기가 있다. 유럽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남. 화약을 가져왔고 전에 없던 많은 것들을 갖게 됨. 유럽은 문명의 가장자리에 있던 작은 지역에서 문명의 한가운데로 나오게 됨
- 현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흥미로운 영향을 준 제국은 몽골. 몽골은 13~14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통신공간을 만들었음. 이 공간을 통해 통치술이 전해졌고 많은 다른 것들도 들어옴. 몽골제국에 의해 지금의 중동 혹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이 연결되었다. 과학과 의약품, 지도제작, 요리가 소통되기 시작. 몽골의 거대한 제국 공간의 창조로 거대한 문화의 결합이 벌어짐
3. 대영제국의 탄생
- 중세 이후 대항해 시대가 찾아오자 유럽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됨. 대서양을 통해 먼 바다로 진출하면서 먼 바다에도 적합한 배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 갤리선은 당연히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았다. 우선 인간의 힘으로 항해를 하는 배는 육지에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 한 척의 갤리선, 그것도 빠른 기동이 필요한 전투용 갤리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숫자의 노잡이가 필요. 그런데 이들은 인간이므로 당연히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식량과 식수를 항상 공급해줘야 했다. 갤리선 한 척을 움직이는 데는 일종의 연료처럼 엄청난 양의 식량과 식수가 필요. 따라서 갤리선이 육지를 벗어나 항해할 수 있는 거리는 대체로 육지에서 2~3일 거리가 고작이었다.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를 벗어나면 갤리선은 사실상 무용지물인 셈이었다. 반면 범선은 소수의 인원만으로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에 원거리 항해에 적합했다. 결국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범선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대항해 시대의 선발주자로 나선 범선을 우리는 카략선이라 부름. 카략선이 이룬 진보의 가장 중요한 점은 돛대가 많아진 것이다. 기존 범선은 대부분 하나의 사각돛에 의존해서 항해한 반면 카략선은 세개의 돛대를 달고 바다로 나섬. 당연히 빠른 항해가 가능했고 범선의 크기도 더 커지기 시작. 그런데 카략선은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배에 많은 짐을 싣기위해 배의 앞부분과 꼬리부분을 많이 높여 놓은 것. 이렇게 되면 무게 중심이 높아지기 때문에 급격한 회전가튼 빠른 기동은 불가능해짐. 하지만 전투중에는 이런 빠른 기동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무리해서 급회전을 하다보면 중심을 잃고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자랑하던 메리로즈호도 1545년 프랑스 함대와의 전투중에 뒤집어져서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이래서는 전투용으로 사용되기에 아직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카략선이 등장한 뒤에도 전투용 함선으로 갤리선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카략선보다 진보된 갈레온선이 등장하자 해전의 중심은 급격히 범선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갈레온 선은 배의 꼬리부분인 선미는 아직 높은 편이지만 앞머리인 선수부분이 매우 낮아졌고 이에 따라 배의 안정성이 높아짐. 안정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돛대도 더 높고 크게 세울 수 있었는데 당연히 돛도 더 많이 달 수 있게 됨. 돛이 많아지면 추진력이 높아져 배가 빨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더불어 배의 앞부분이 낮아지면서 전반적으로 날렵해진 점도 속도향상에 기여. 갈레온의 등장과 함께 범선은 전장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 이 갈레온을 한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 바로 존 호킨스였다. 존 호킨스는 새로운 배를 개발하면서 그때까지의 주먹구구식 건조방식을 버리기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했다. 바로 설계도를 그린 것이다. 그 당시 호킨스가 그린 설계도는 현재 캠브리지 대에 남아 있다. 호킨스가 그린 설계도를 보면 그가 지금까지의 주먹구구식 함선 설계방식을 버리고 기하학에 입각해서 완전히 새로운 배를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영국전함은 스페인 전함보다 더 빨랐으며, 중무장도 더 잘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거대함선은 대부분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무장상선이었따. 이들은 대부분 돈을 받고 화물을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원양항해로 나르기 위해 설계됨. 반면 영국의 교역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고, 사실상 해적행위를 주로 했다. 영국 함선들은 빠르긴 했으나 화물을 싣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페인의 함선이 더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을 놓고 봤을 때, 영국 함선들이 훨씬 적합했다. 1573년 새로운 설계에 기반한 첫번째 배 드레드 노트 호가 건조된 이후 1588년까지 영국은 총 18청긔 레이스 빌트 갈레온을 보유하게 되었고, 16척의 왕실 갈레온도 거의 동급의 성능을 가질 수 있도록 개조됨. 구식으로 설계된 스페인 함선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혁신적 함대가 대서양에 등장한 것이다.
- 영국 해군이라고 해서 배위에 보병을 태우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님. 영국이 보병을 태우지 않은 것은 영국에 보병다운 보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우고 싶어도 태울 사람이 없었던 셈. 하지만 결핍은 혁신의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영국해군은 어쩌면 결정적 약점이 될 수도 있었던 보병부족이라는 상황을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아예 해전방식을 바꾸는 것.
- 영국 지휘관들이 준비한 방식은 적 보병이 아예 건너오지 못하도록 포격전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고 새로운 것인 만큼 실제로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보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국으로서는 이게 유일한 방식이기도 했다.
- 칼레에서 벌어진 스페인과 영국의 대결에서 영국은 어떻게 승리했을까? 간단히 말해 기술력에서 앞섰고 혁신을 빠르게 받아들였기 때문. 우선 영국의 배는 스페인 배보다 빠르고 회전능력도 뛰어났다. 게다가 화포를 많이 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화력에서도 스페인 배를 압도했따. 그 위에 대포산업에서도 영국은 스페인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영국산 주철대포는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청동대포를 대체할 만한 성능을 갖고 있었고 이 저렴한 대포를 대량 생산한 덕분에 스페인 배에 비해 몇배나 많은 대포로 무장할 수 있었다. 해전에 대한 기본개념도 스페인은 구태의연한 반면, 영국은 혁신적이었음. 스페인은 일단 해전이 벌어지면 첫번째 대포를 발사한 후 곧바로 화승총이나 창을 잡고 위로 올라간다는 전술을 갖고 있었다. 적의 배로 건너가 육박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국은 첫발을 발사한 후에도 연속해서 포탄을 사격했따. 스페인군의 목적은 적을 죽이는 것이지만 영국군의 목적은 적의 배를 격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 어떤 전술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는 실제 전투에서 증명됨.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런 영국 해군의 혁신이 오히려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영국 해군이 보병이 적함에 뛰어드는 전술을 적용하지 않고 포격전에 치중했던 것은 애초에 영국에 믿을 만한 보병이 없었기 때문. 주철대포를 개발한 것도 청동대포를 만들만한 자원이 부족하고 재정도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 반면 스페인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혁신의 기회를 놓칠 수 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보병의 위력을 지키기 위해 포격전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무관심했고 대포의 개발에도 덜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혁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스페인 함대는 레판토 해전의 빛나는 승리 이후 불과 17년 만에 낡은 유물로 전락해 버린 것. 자신이 이미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낡은 사고를 비웃는 것처럼 혁신의 속도는 항상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 스페인의 종교적 불관용이 미친 영향도 놓쳐서는 안된다. 스페인도 주철대포의 효용성에 주목하고 주철대포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 하지만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주는 공포 때문에 기술자들은 한 사람도 스페인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혈통과 순수성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새로운 기술의 결합이란 양립하기 어려운 법이다. 결국 칼레 해전은 해전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음. 영국이 새롭게 선보인 전술의 효과가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다투어 영국식 해전기술을 받아들였다.
- 위대한 영웅인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최고의 승리를 영국에 안겨줌. 그리고 시대를 바꿔 넬슨의 트라팔가 해전으로 국가적 신화가 교체됨. 지금 영국의 시 중심뿐만 아니라 실제 모든 영어권 국가에 가면, 트라팔가 광장이 있다. 이렇듯 이 이야기는 영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줌. 1588년 이후 영국은 위대하고 강력한 해상국가가 됨.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믿는다. 백년 동안 스스로에게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줌. 그리고 드디어 이야기가 현실이 됨. 1714년 영국은 매우 뛰어난 해군력을 갖게 됨. 1588년이 아니다. 해상을 장악하는 데 120년이 걸렸따. 스스로에게 계속 이야기했기 때문. 계속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 세계를 보는 방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이루어냈다. 무적함대에 대한 승리는 영국이 위대한 해상국가라는 것을 증명.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해석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신념이다.
4.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
- 보통 마녀사냥이라 종교재판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 그러니까 14세기 이전에 주로 횡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 오히려 근대국가가 성립한 15세기 이후에 더욱 기승을 부린 것이 바로 종교재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세는 카톨릭이라는 단일한 이념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사실 사냥감을 찾기가 더 어려웠음. 하지만 15세기 이후 유럽이 확장을 시작하면서 유럽 내부에 이질적인 분자들 그러니까 무슬림이나 유대인 등이 늘어가자 오히려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냥해야 할 이질분자들을 쉽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게 됨
- 종교적 관용을 독립의 명분으로 삼자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소수자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듬. 특히 유대인들이 대거 북부 네덜란드로 몰려들기 시작. 원래 유럽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스페인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알함브라 칙령으로 스페인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포르투갈로 이주. 그런데 포르투갈에까지 스페인 종교재판의 마수가 뻗어오자 결국 포르투갈조차 떠난 유대인들은 새롭게 부상한느 상업의 중심지이자 상대적으로 종교적 문제에 관대했던 저지대 국가로 옮김. 그중에서도 암스테르담에 앞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앤트워프에는 경제력과 기술력을 함께 갖춘 유대인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펠리페 2세의 종교탄압이 시작되자 앤트워프도 더이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1576년 벌어진 스페인군의 앤트워프 약탈 사건은 저지대 국가의 남부지역이 더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종교적 관용을 내건 네덜란드 북부 7개주뿐이었다. 당연히 대규모 이주가 시작됨. 유대인뿐 아니라 탄압을 두려워한 신교도들 역시 북부 네덜란드로의 이주대열에 합류. 결국 1560년대부터 1589년까지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 남부지역 인구는 급격히 감소. 앤트워프의 경우 8만 5천명에서 4만 2천명으로 감소. 공업중심지였던 겐트와 브뤼주 또한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함. 반대로 네덜란드 북부의 암스테르담과 레이덴 혹은 하를렘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함. 종교적 자유가 이민자들을 네덜란드 북부로 이끈 것이다. 1570년부터 1670년 사이 자유의 땅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명에서 20만명으로 증가. 레이덴 인구는 1만 5천명에서 7만 2천명으로 증가
-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 혹은 이단자들을 빠르게 포용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가 열림. 단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네덜란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우선 바다에서 시작됨. 조선업과 해운업이 먼저 네덜란드의 번영을 이끌기 시작. 엄청난 경쟁력을 바탕으로 유럽 해운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주민들과 함께 새로 유입된 선박건조기술을 활용해 당시로서는 파격적 범선을 만들어냄. 경제적이고 속도가 빠른 플류트 선이다.
- 중세시대 유대인들이 담당했던 역할 중 하나는 돈의 관리. 유대인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대부업과 군수품을 제공하는 데 특출한 능력을 보임. 유대인들이 떠나고, 대제국이 된 스페인은 당시 필요했던 돈을 모으고, 대출받고, 지출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다량의 은이 낭비되었따. 능력있는 사람들의 부재가 이것의 부분적 원인이었다. 스페인의 재정난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인데, 스페인의 상황은 17세기 초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더욱 심각해진다. 네덜란드에서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을 포함하여 유럽내에서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기에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됨.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만들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스페인의 영향력을 유지시키는 것 또한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 1964년 미국, 미시시피 자유여름
- 미국으로 이민 온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은 노동의 소중함을 알고, 근면을 사랑했을까? 그리고 씨앗과 농기구를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기 위해 왔을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에는 스페인 이민자들과 똑같이 싸워서 빼앗기 위해 이민을 왔다. 당연히 씨앗이나 농기구 따위는 가져오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이 도착한 땅에는 잉카나 아즈텍처럼 세련된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미국에 이민 온 이민자들은 매우 희박한 인구밀도를 가진 미개발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나마 적은 수의 인디언들도 유럽인들이 탐낼만한 것은 가진게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빼앗아 먹을 게 없는 땅이었다. 총과 칼을 먹을수는 없기 때문. 그렇게 몇차례의 이민자들이 몰살당한 후에야 청교도 이민자들은 이 땅에서 일해야만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씨앗과 농기구를 가진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민자들이 새로 개척해야 하는 땅이었으므로 다행히 착취적인 시스템이 구축돌 여지가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에는 이미 조직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국가기구 위에 빨대를 꼽고 빨아먹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하지만 북미는 이런 빨대를 꼽을 만한 곳이 전무했다. 더군다나 땅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넓은 데 비해 인구밀도가 매우 희박했기 때문에 유럽 각지로부터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이 이민자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북미 대륙에서 대체로 환영받을 수 밖에 없었따.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종교성 순수성 따위를 지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독립이전부터 종교적으로 구대륙의 어떠한 나라에 비해서도 관용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1789년의 독립국가 건설은 이러한 종교적 관용을 국가 원칙으로 만들었다.
- 종교적 자유가 네덜란드에 번영의 기반을 만들어준 것처럼 미국에서도 종교적 관용이 미국의 발전에 원동력이 됨. 유럽 각지에서 최신기술을 가진 숙련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유럽각국도 가만히 앉아서 두뇌 유출을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신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의 해외이주를 막는 법안들이 속속 만들어졌고 심하면 반역죄로 다스렸다. 하지만 금지법안만으로는 인력 유출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미국은 유럽보다 인력이 부족했기에 임금이 훨씬 높았고 신개척지라 기회가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종교나 민족따위를 따지지 않았다. 이민자들에 대한 입국제한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따. 국경선은 말 그대로 누구든지 들어오세요라며 그냥 열려 있었다. 19세기 초반에만 250만 명이 자국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미국의 인구는 순식간에 2-3배로 증가. 하지만 여전히 인구는 부족했고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서부개척이 본격화되자 인력 부족은 더 심각해짐. 아니 이민을 통한 폭발적 인구증가 없이는 서부개척 자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숙련 노동자가 아니라 단순 노동자들도 대거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세대가 아니라 이미 당대에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세대가 아니라 이미 당대에 미국사회의 주류에 편입해서 성공신화를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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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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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역사

역사 2018. 5. 6. 10:10
- 유럽에서 남성복식이 여성의 복식에 비해 훨씬 간소하고 저렴해진 것은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 1700년경만 해도 귀족을 제외한 중류 이하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오히려 두배정도 옷을 많이 갖고 있었고, 그 가치도 여성들이 소장한 옷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이 되면 모든 계층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옷을 소장하기 시작. 이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적게는 5배에서 많게는 10배가 넘는 옷값을 지출하게 됨
-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수수한 옷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고 호화롭게 치장한, 그런 옷이 잘 어울리는 연약한 존재이기를 요구. 왜 그랬을까? 17세기 중반이후 유럽은 간헐적 절대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장세로 돌아섰고,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 이 시기 산업은 해외교역보다 국내소비의 확장에 기대어 돌아가던 상태였다. 경제의 큰 축을 이루던 직물산업은 18세기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상태. 한마디로 물건은 넘쳐났고, 경제는 돌아가야 했고, 그 한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해가고 있었다. 남성들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아내나 딸, 연인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금전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학자는 소스타인 베블런
- 버나드 맨더빌의 논고를 필두로 악덕으로 규정되던 사치가 공익에 기여한다는 사상이 제기되기 시작. 맨더빌은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런던에서 개업의로 지내면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1723년에 출판한 꿀벌의 우화는 애덤스미스 등 영국과 유럽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침. 꿀벌의 우화는 사치옹호론, 자선학교 유해론, 자유방임론 등을 주창한 글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사치를 악덕으로 폄하하는 당시의 인식을 위선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 그는 사람이 사는 데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것을 모두 사치라고 규정한다면 사치가 아닌 것은 세상에서 찾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그런 사치로 인해 경제가 돌아가므로 절약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것은 원칙적으로 모순이라고 지적. 맨더빌이 보기에 사치가 탐욕과 약탈을 부추긴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탐욕과 약탈은 실제로는 "남성이 지배하는 정부 탓이며 나쁜 정치 때문"이었기 때문. 그의 발언은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전통적 관념에 선을 긋는 일대 선언이었다. 그 발언으로 인해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오랜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사치를 악덕으로 몰아갔던 사치논쟁이 점차 안락함과 편리함 쾌락, 사교성, 취향, 심미안과 세련미 등에 대한 논의로 흘러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치논쟁에서 새롭게 나타난 논의들은 근대성 논쟁에서 다루는 수많은 화두를 이미 의제로 부각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맨더빌의 일갈이 나온 후 3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수많은 근대성 논쟁과 탈근대 논의를 거친 오늘까지도 여성의 드레스는 여전히 화려한 데 비해 남성의 턱시도는 단순하다는 사실이다.
- 유럽 엘리트들은 도자기 같은 중국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중국 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학자 안토니 파그덴은 타 문화권의 물건을 애호하는 현상이 타자를 소유하가조 하는 욕구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던 중국도자기의 물질적 가치 뒤에는 중국문화가 표상하는 상징가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일은 말콤 워터스의 주장처러 단순히 물질가치만이 아니라 상징가치 형태로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였다. 중국 도자기를 사들이고 전시하는 일은 유럽의 지배계급에게 특권에 걸맞은 행동과 미덕을 실천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됨. 그런데 상업의 발달로 인해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견고한 엘리트 장벽이 점차 허물어지자 지위상승 욕구에 불타는 중간계층이 상류층의 소비행위를 따라하기 시작. 이제 중간계층에서도 중국 도자기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생겨남. 그들은 소박하나마 선반에 중국도자기를 올려놓고 바라보며 만족해했다.
- 비누가 가장 제국주의적 상품으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값이 싸고 크기가 작아서 운반이 용이했을 뿐 아니라, 진보와 위생이라는 가치 아래 제국주의적 강압적 이미지도 희석할 수 있었기 때문. 그래서인지 청결과 위생관리를 위한 상품들의 광고는 종종 극단적으로 인종차별적이거나 국수주의적 양상을 띤다. 1891년 물에 뜨는 비누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세운 아이보리 비누광고에는 개울가에서 한 흑인 어린이가 아이보리 비누로 돛단배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의 표정에는 문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데, 만약 광고의 등장인물이 백인어린이여도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 위생과 청결에 대한 강조는 서양인이 생각하는 자연스런 상태를 아프리카인들에게 이식하려는 것.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청결개념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더럽고 냄새나는 야만인으로 인식해야지만 비누같은 문명세계의 물건에 대한 수요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 이런 측면에서 비누는 제국주의적 상품의 선봉에서 쐐기돌이나 마찬가지다. 비누가 아프리카에서 필수품으로 자리잡는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단순한 피식민지인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자들의 장기적 기획에 부응할 소비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열린 광고 컨벤션에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치약이나 비누를 파는 것이 아니고 이를 닦고, 몸을 씻는 새로운 방식을 파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하는 방법을 파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방식이란 결국 치약이나 비누같은 새로운 물건을 이용하는 방식을 말함. 이렇게 치약과 비누를 사용해본 사람은 가글액과 치실은 물론 제모제에서 탈취제에 이르기까지 향후 수없이 개발될 상품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는 셈이었다.
- 1885년 프렌치 와인 코카라는 이름의 강장제로 상표등록을 했던 코카콜라는 알콜 성분이 문제가 되자 와인대신 설탕시럽을 넣어 1886년 코카콜라로 재탄생. 음료수로 상품화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약 대용으로 소비됨. 1890년대 광고에서도 여전히 이상적인 자양강장제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 18세기 장터에서 구경꾼들은 돌팔이 의사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려 필요하지도 않은 강장제를 구매. 19세기에 본격화된 약광고는 멀쩡한 신체상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만들어냄. 아파서 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약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 것. 오늘날에도 의료시장은 의료상품 및 서비스의 공급과 이에 대한 소비 욕망인 수요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결국 약, 건강식품, 건강보조기구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육체는 거대한 소비의 장이 되어버림. 물질적 신체와 의약품, 그리고 비물질적인 욕망은 서로 뒤엉켜 변주하며 새로운 사회적 기준과 행위를 만들어낸다. 비아그라가 출시된 후 성적 능력의 새로운 척도가 나타났다든가, 사회적 압력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성형수술을 하는 세태나, 친구들과 단체로 목욕탕에서 마치 놀이처럼 눈썹문신을 받는 사례들을 생각해보라. 여기서 나타나는 욕망, 압력, 행위 들은 생리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질병과 치료, 심지어 약의효과도 물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으로, 이 또한 인문학적 시선으로 봐야 한다.
- 미국에서는 19세기 말에야 에이본 레이디가 등장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여성 방문판매원이 활동. 숙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화장품만을 취급하는 여성 방물장수 매분구의 존재가 나타남. 혹자는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이 집안의 여성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존재였다고 평가. 1962년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화장품 방문판매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고객의 대부분은 주로 전업주부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 화장품 전체 매출의 90% 이상이 방문판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케팅 연구자들은 이런 방문판매의 성공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 무엇보다 당시 화장품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부족했던 소비자들에게 판매원들이 직접 방문해 제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 주효. 다르게 말하면 판매원들의 수준이 높았고 훈련도 잘 이루어져다는 뜻. 또한 상대적으로 좁은 소비자 커뮤니티 안에서의 경쟁심도 판매율 상승의 동인. 즉, 이웃이나 친구가 샀으므로 덩달아 구매하거나 과시적 욕구에서 더 비싼 것을, 혹은 더 많이 사고자 하는 도익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미용에 대한 전반적인 상담을 개인적 차원에서 받을 수 있고, 다양한 견본품 제공이나 마사지 서비스 등으로 소비자가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방문판매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요인이었다.
- 베블런은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습성을 갖게 된다고 지적. 그래서 산업적으로 발달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정생활에 대해 공개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생겨남.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상류층 사이에는 프라이버시 개념과 과묵의 습관이 필수적 예법으로 자리잡게 됨.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서두에서 언급한, 집에서 무엇을 먹는지 친구들이 모르게 하라는 금지령은 노동계급 나름의 프라이버시 예법일 수 있었다. 오늘날 SNS에는 자신이 먹은 음식을 찍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이 새로운 유행을 볼 때면 의문이 생기곤 한다. 그 음식사진들은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빅토리아 시대적 예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걸까? 혹은 그것들이 뽐낼 수 있는 음식이어서 자랑하는 걸까?
- 물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집착이 용인되는 한편, 그것이 결국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갈등과 모순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다니엘 벨은 이를 일컬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정의. 한쪽에서는 프로테스탄드 윤리와 연결된 금욕과 통제의 가치가 고양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쾌락주의와 즉각적 만족에 근거를 둔 소비주의적 윤리가 동시에 발전하면서 갈등과 모순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성형수술의 역사는 코를 복원하는 수술에서 출발. 15세기 말부터 유럽에 매독이 유행하면서 코를 잃어버린 사람이 많아짐. 코뼈에 매독균이 감염되면 연골조직이 붕괴되면서 코가 망가지는데, 이는 성병과 관련되어 도덕적 타락의 표지로 여겨짐. 그때문에 코 복원수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 이마의 피부를 절개해서 그대로 뒤집어 코 위에 덧씌우는 등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끔찍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사실상 이런 수술은 초창기 미용성형이었던 셈. 이런 맥락에서 유럽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성형수술은 곧 코수술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 흥미롭게도 19세기 유럽사람들은 유대인이 유럽인보다 아프리카인데 가깝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흑인과 피가 섞여 있거나 혹은 최소한 인종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 가설이었다. 그런데 물욕과 큰 관계가 없는 흑인과 달리 유대인은 재물욕심이 많은 탐욕스런 집단으로 여겨졌고 유대인의 긴코 혹은 매부리코는 악덕의 표상이 됨
- 94년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외모가 금전적 이익과 결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결론은 평균이상의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12% 정도 더 높은 소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이후 외모와 자본주의적 이익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수많은 연구를 촉발. 2012년 한국인 2만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도 외보가 본인 혹은 배우자의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도출됨. 그런데 성형수술로 외모가 달라진 경우에는 어땠을까? 흥미롭게도 성형수술로 외모가 개선되어 수입이 증가하더라도 그 수준이 성형수술비용을 충당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따. 연구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성형은 투자라기보다 본인의 즐거움을 위한 소비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띤다고 결론지었다.
- 17세기 바스의 발달과 인공온천장의 설립은 소비혁명의 테제를 재검토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됨. 18세기에 부를 축적한 중간계급의 자신감과 공론장의 확대로 인해 소비에 대한 수요가 생겼고, 소비혁명이 일어났다는 테제 말이다. 18세기 이전, 이미 16~17세기에 온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사람들은 활발하게 그 서비스를 소비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종교개혁이 불러온 사회전반의 세속화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어쩌면 서비스 분야에서에의 소비혁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보다 먼저 발달했고, 그거이 본격적 소비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 대박람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850년대 영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 산업화와 해외 식민지 수탈로 얻은 대영제국의 풍요가 조금씩 사회하층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한 것. 노동시간 단축, 임금상승 등 노동계급의 상황도 개선되어감. 1830~40년대 차티스트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던 사회적 불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좀더 여유로운 시절이 도래. 수정궁을 찾은 노동자들은 이제 더이상 집단행동을 통해 권리를 찾으려 하는 위험한 군중이 아니었다. 이들은 거대한 상품더미의 스펙터클을 보러 모여든 구경꾼이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박람회가 단지 구경꾼을 끌 수 있는 볼거리만 제공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조직위원회는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향후 넘쳐나는 영국산 제품을 사용해줄 소비자를 양산하려고 했다. 그리고 주 타겟은 아직도 검약과 노동의 미덕을 굳게 믿고 있던 중간계급과 그 아래계급이었다. 산업화가 진전되어감에도 19세기 중간계급과 심지어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조차도 나날이 화려해지는 소비의 영역에서 상당히 소외되어 있었다. 이처럼 특별한 소비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이들에게 대박람회는 일종의 새로운 교육과 경험의 장이 되어야 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주저하는 소비자들을 유치하고, 길들이기 위해 주최측은 1실링짜리 입장권과 더불어 영광스런 상품들이 거래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모토를 내세웠다.
- 상품으로 채워진 수정궁은 그야말로 거대한 박물관이자 시장이었다. 나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스펙터클한 새로운 물질세계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난생처름 보는 물건들과 지구 저 먼 곳으로부터 가져온 다양하고 신기한 상품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 엄청난 가짓수와 규모는 상품의 쓰임새와는 별도로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상품이라는 것 자체를 새로운 근대적 기호로 각인시켰다. 비록 관람하는 시간은 달라도 수정궁에서는 왕족부터 노동자까지 모두 같은 상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토머스 리처즈의 말처럼 그 경험은 "콕 집어 말할수는 없지만 이 진귀하고 고급스런 물건들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누구나의 손에 평등하게 쥐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했던 것이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자라는 새로운, 하나의 집단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다이엘 부어스틴은 백화점은 사치적 소비를 평등화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누구든 상관없이 원하기만 하면 눈앞에 값비싼 물건이 놓이기 때문. 그렇게 보자면 상품 카탈로그도 마찬가지. 누구든 카탈로그를 펴기만 하면 바로 눈앞에 수천가지의 물건이 펼쳐지기 때문. 그런데 그것을 과연 소비의 평등화라 주장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마이클 셔드슨은 부어스틴의 주장에 반박하며, 백화점이 소비의 평등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를 둘러싼 열망과 욕구의 평등화를 제공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 백화점의 진열장이나 카탈로그는 사람들을 거대한 상품의 세계로 자연스레 인도. 눈앞에 펼쳐진 상품들의 파노라마는 모르고 살아도 별 상관이 없을 온갖 물건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욕망은 사회적 지위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체험일 터였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셔드슨의 주장처럼 백화점이나 상품 카탈로그는 욕망의 평등화를 가져오는 매개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욕망의 평등화는 결코 소비의 평등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평등해진 욕망으로 인해 오히려 이미 계급화된 소비능력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 차라리 보지 않았으며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상대적 박탈감 말이다. 상품 카탈로그는 온갖 물건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격을 적나라하게 명시한다. 나아가 특정 상품과 어울릴 다른 상품이나 액세서리를 소개한다거나 나아가 그 상품이 놓일 공간가지도 제안. 이런 맥락에서 평등화된 욕구는 소비를 향해 활활 타오를수도 있지만 반대로 씁쓸함만 남긴 채 곧바로 꺾일수도 있다.
- 1740년까지도 북미 평범한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검소하고 검소한 삶을 영위. 그런데 영국에서 소비혁명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수많은 물건이 식민지에 쏟아져 들어오게 됨. 옷, 직물, 도자기, 유리제품, 금속제품, 차, 신문 등 갖가지 영국제 상품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식민지 구석구석에까지 퍼져나감. 식민지인들은 순종적 소비자들이어서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물건을 사는데서 자유의 의미를 맛보았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제 상품을 쓴다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은 본국과 자신들이 하나로 연결된 상상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는 이미 대서양 경제 공동체였고, 18세기 중엽에 식민지인들은 적어도 영국 수출품의 25%이상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의 동의 없이 과세된 강제조세는 이 평화로운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북미 주민들은 영국에 분노했으며 독립이라는 선택을 고려하게 됨. 그동안 식민지인들은 영국제 상품을 구입해 소비하면서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선택권이며 부르주아적 미덕을 배웠던 터였다. 그 것은 동시에 자신들이 영국에 소속감을 느끼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본국과 일체감을 느끼게 했던 상품들은 곧 저항을 위한 소품이 됨. 이 소품들, 즉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은 혁명가의 팸플릿에 적힌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실제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국 상품 수입거부운동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었기에 식민지의 다른 협의체에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도덕률과 원칙들이 도출될 수 있었다.
- 70년대 중반 이래 계속된 경기침체와 대량해고가 외제품의 범람과 이민지 출신 노동자의 증가때문일까? 마약 그렇다면 애국소비운동만 성공한다면 경제위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계속된 해고조치는 훨씬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익증대를 주목적으로 삼은 기업가들은 생산의 자동화 공정을 추진하고,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조가 발달하지 않은 작은 기업에 하청을 주는 한편 노동자를 해고했다.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비용절감을 내세워 기존 공장을 폐쇄하는 한편, 황량한 중서부 지역에 새로 조립공장을 세움. 노조가 바이 아메리칸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제너럴모텃터스, 포드, 크라이슬러의 빅3 기업은 신속히 해외로 진출. 80년대 말에 포드는 마쓰다 주식의 25%, 크라이슬러는 미쓰비스 주식의 24%를 소유하게 됨. 이런 상황이 되자 완전한 미국제라고 믿고 산 포드 자동차는 멕시코에서 멕시코 노동자가 만든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일본의 혼다는 오하이오 공장에서 미국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심지어 혼다는 전미자동차노조 UAW 상표를 부착할수도 있었다. 반면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포드는 그 상표를 붙일 수 없었다. 이제 상표로 상품의 국적을 가리는 일이 별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 20세기 중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리처드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들은 왜 미국 정치가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나 계급투쟁으로 나아가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들이 찾아낸 결정적 원인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소비경제의 확산. 근대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존립이 물질처럼 취급되는 물화를 겪게 되며, 인간은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로 전화.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삶의 질과 동일시 되면서 계급모순이나 계급불평등이 은폐된다. 사람들은 물질적 안락을 추구하며 사회적 상향 이동성에 대한 희망을 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저명한 역사가 다이엘 부어스틴도 소비가 사회적 연대를 희석시킨다며,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의해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연대한다고 한탄. 대량생산된 상품이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피상적 경험일뿐이라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과 균질화된 문화가 인간의 존재를 무기력한 야예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도 나오기 시작. 그 가운데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소비자 비평에 관한 한 가장 염세적 견해를 피력.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그 자체를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문화를 만들어내며, 그 결과 마치 마약중독처럼 그것을 주입받는 수동적 시민이 양산된다고 주장. 장 보드리야르 또한 소비자란 19세기 초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고 비조직적인 개인들로, 칭찬 받으며 아첨에 속아 넘어가는 얼간이 같은 존재라고 조소. 이처럼70년개까지 학계에서는 소비가 인간의 삶에서 시민권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를 제거해나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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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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