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누이트족은 전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얼음 황무지에서는 권력과 영토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나은 것을 가진 그룹도 없다. 모두가 바다가 주는 선물로 먹고 살았다. 그러나 이누이트 역시 여러 이유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함. 이들에게도 살인은 낯선 것이 아님. 하지만 이누이트의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학살한다거나 마을 주민이 모조리 다른 마을 주민의 노예가 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조직적 학살이라는 뜻의 전쟁은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이는 전쟁이 인간의 보편적 행위가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 공격성과 권력욕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의 공격성이 최악의 형태로 발현된 전쟁을 과연 이 세상에서 추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된다. 그에 관해서는 진지한 검토가 필요. 공격성은 단추 하나를 누른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님. 물론 억제할 수는 있지만 공격성을 억제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공격성은 차곡차곡 쌓이다가 언젠가 격렬한 폭력으로 폭발하고야 만다. 20세기, 축적된 폭력의 에너지는 두 차례에 걸친 대형 재앙으로 터졌다. 계몽된 현대는 전쟁을 이성의 수단으로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인류는 자멸의 벼랑까지 내몰렸다. 그러므로 수백년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전쟁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생각은 전쟁을 평화의 단절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를 전쟁이라는 정상상태의 중단으로 보았던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에 와서도 전쟁은 정당화가 필요없는 행위로 보았다. 분명 전쟁은 고난을 의미하지만, 삶이란 결국 끝없는 투쟁과 고난, 인내의 연속이 아니던다. 사람들은 전쟁을 추앙하지는 않지만 전사를 숭배하면 전사의 지도력과 무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했고 전사만이 자신들이 타고난 불행을 막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19세기까지 군인은 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직업의 관문이었다.
- 현대의 군국주의는 전쟁을 자연상태로 보았던 과거의 세계관에 빚지고 있음. 그 결과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자였던 헬무트 폰 몰트케는 전쟁을 '신이 만든 세계질서의 일원'이라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영원한 평화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결코 '아름답지 않은 꿈'이라고 말이다. 그는 말했다. "전쟁이 없다면 세상은 유물론의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전재이 순수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몰트케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전쟁은 자연성의 일반적 표현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폭력성을 근거로 한다. 전쟁은 자연재해처럼 외부에서 닥쳐 온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나온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증오와 평화를 향한 동경 역시 인간의 본성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렇기에 전재이란 극도로 모순되며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인류 사회의 현상인 것이다. 인간은 전쟁과 평화, 증오와 사랑, 권력과 무욕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줄타기를 하고 있다.
- 20세기의 참혹한 전쟁들에서는 과거의 기사도 정신 같은 것은 희미한 불꽃 정도만 살아 숨 쉴 뿐이었고, 그마저 전쟁의 와중에 자행된 온갖 대량 학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사도의 이상이 인류의 문화 발전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이 환상이고 희망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기사도는 교육과 공공생활에 잠재적 영향을 미쳤고, 사회의 윤리수준을 높여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투행위나 전쟁을 위대한 교육자로 치켜세우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다. 기사도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정신이었지만 기사들의 숭고한 시대는 지나간지 이미 오래다.
- 놀랍게도 서양세계에서는 전투기술을 숭고함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적이 없었다. 중세 기사도 시대의 검술은 전혀 그 맥을 잊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기독교가 너무 철학적이지 않은 종교였다. 유럽의 기사는 검술을 분쟁해결의 기술로 생각했을 뿐, 그들의 검술에는 철학이 없었다. 아시아인의 시각은 달랐다. 검술은 고도의 기술적 숙련일 뿐 아니라 정신적 깨달음을 이르는 길이었다. 뛰어난 기술과 정신적 깨달음은 둘이 아니다. 서로를 더 높여 주는 조건이 된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기사도가 처음부터 불교나 도교철학과 결합되어 발전했다. 불교나 도교는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무사 사무라이는 생과 사, 흥망성쇠를 초월하며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검은 사무라이의 영혼이다." 이 말은 사무라이의 충절과 자기희생, 경외심과 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을 상징. 동양 사상에서는 철학과 종교가 별개의 것이 아님. 사무라이의 검에도 영혼이 있다. 그래야만 검은 사무라이의 영혼이 될 수 있다. 이는 다시 검을 제작하는 기술의 철학을 요구. 때문에 일본에서는 검을 만드는 장인들이 존경을 받고 명성을 누렸다. 사무라이의 검은 죽음을 부르는 물건이 아니라 삶을 체현하는 방편이었다. 검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고 인간성을 해치는 악과 싸워 지상에 정신적 안녕을 불러오는 힘의 대변자다. 사무라이에게 전쟁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님. 무사는 죽을 수 있으나 악에 맞서는 전쟁 자체는 항상 삶에 기여. 그러나 정작 무사는 그런 생각조차 없다. 무사의 정신은 텅 비어 있다. 사무라이는 직관으로 싸운다. 모든 동작은 저절로, 동작 그 자체를 위해 탄생한다. 전쟁은 기술이다. 그림이나 음악, 다도, 꽃꽂이와 다르지 않다. 전쟁은 무엇보다 진리를 찾는 길이며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무사는 한가지만 생각한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운다. 적을 이기기 위해 앞만 보며 전진하는 것, 이것이 사무라이에게 필요한 전부임. 그렇게 하자만 정신과 신체가 완전히 자유로워야 함. 무사가 되려면 의지력과 혹독한 훈련과 철학, 종교가 뒷받침되어야 함. 이런 기초가 없다면 절대 대가에 이를 수 없다.
- 손자병법은 전쟁의 일반전술을 설명한 최초의 저서이자 가장 천재적 작품임. 보통 우리는 전략이라는 말을 군의 지휘와 전쟁계획에 관한 이론으로 생각함. 그러나 손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음. 그의 학설은 다양한 관심, 특히 이해관계와 목표가 충돌하는 경우, 다시 말해 개인이나 집단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등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상호행동의 모든 분야에 적용 가능. 나의 이념과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손자볍법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제시
- 종교는 사랑의 계명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인류사의 일부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걸까? 전쟁이 먼저일까? 종교가 먼저일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둘이 공존했다는 주장이 우세. 성경에서도 그런 면모가 엿보임. 기독교 최초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카인과 아벨의 형제간 대립과 살해는 신과 직접적 관련이 있음. 인간의 본성인 호전성이 종교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임. 종교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인간의 선한 면이 종교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인간의 선한 면이 승리하도록 돕지만, 승리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전쟁을 전제로 함. 사랑과 폭력, 이 둘의 대립은 수많은 종교에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물론 종교에 따라 정도이 차이가 있어서 동양의 종교가 서양종교보다 훨씬 평화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는 일신론과 관련이 있음. 유일신은 다른 신을 허용하지 않음. 이같은 신의 이기주의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지 않음. 신지어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임. 반대로 힌두교처럼 많은 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타 종교이 신에게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더구나 불교와 도교는 애당초 신이 없다. 동북아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종교전쟁이 덜 일어났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이는 동양의 종교가 교권을 형성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련됨. 동양의 성직자들은 명망은 누렸지만 세속적 권력은 갖지 않았다. 전쟁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 십자군 전쟁은 이른바 성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성전은 광신주의에서 태어나며 예외없이 실패하고 만다. 십자군 전쟁 전체(1096~1270)도 엄청난 실패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후의 역사가 입증하듯 종교전쟁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 종교적 박해와 전쟁은 적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 뿐이다.
- 십자군 전쟁을 촉구한 표면적 이유는 그리스 정교를 이슬람의 침공으로부터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비잔티움 전체가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박해는 십자군 기사들의 만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슬람 세계에서 존경을 받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도 많았음. 이 모든 것이 십자군 기사들의 탐욕과 거짓 신앙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슬람을 향한 그들의 증오는 이슬람의 증오를 낳았고, 결국 양측은 편협한 광신으로 맞섬. 그리고 광신주의의 대결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세계는 두터운 신앙의 커튼 뒤로 숨어버렸고 일부는 서구식 진보를 거부한 채 오늘날가지 커튼을 걷지 않고 있다. 십자군전쟁의 역사가 불행했던 이유는 순수한 신앙심이 후안무치의 탐욕과 인간 멸시로 뒤덮여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는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인간의 나쁜 측면까지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살인과 약탈도 쉽사리 신의 뜻으로 해석해버림. 그렇기에 종교는 그 어떤 파렴치한 행동에도 악용될 수가 있고 지금까지도 가장 위험한 문화의 폭발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유럽은 과거의 끔찍했던 역사 때문에 성급한 대응을 자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 참담했던 세월 동안 유럽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전쟁을 피하는 방법을 학습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다름. 미국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 대해 현대문명의 십자군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 한때 미국민 대다수가 현대의 십자군 이념에 휩쓸린 가운데 부시가 속한 감리교의 열성분자들이 이런 주장을 펼침. 유럽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유럽은 유럽연합에 터키를 받아들여 종교, 문화간 갈등을 완화하려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음. 이스라엘까지 가입시킨다면 금상첨화일 것임
- 30년 전쟁은 아직 미완성인 세 개의 나라가 유럽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스페인을 거느린 합스부르크 제국, 그리고 제국과 정치적 경계가 불확실했던 프랑스, 마지막으로 발트해의 지배자로 만족하지 못한 스웨덴이 그들이다. 이 3개국 모두 근본적으로 유럽의 지배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다.
-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협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원하는 것은 뻔했다. 고대 서로마 제국의 유산, 다시 말해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상에 건설된 신의 왕국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바람은 기독교가 분열되면서 갈가리 찢어졌다. 교회의 분열과 신, 구교의 대립은 수백 개의 소국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품고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던 독일제국을 위협.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적 위치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보헤미아의 저항이 제국에 결정차를 날렸다. 한마디로 말해 전쟁의 진짜 원인은 제국이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지배자들의 위기의식이었던 것. 이같은 권력욕의 소용돌이에서 30션 전쟁이 자라났다. 전체적 갈등은 기틀이 제대로 잡힌 국가들의 대립이 아니라 도저히 파악하기 힘든 대립, 이해관계, 목표/조직형태의 뒤죽박죽 속에서 탄생했다. 30년 전쟁은 전통적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는 안정된 국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 따라서 30년 전쟁은 18세기까지 이어진 국가형성 과정 속에서 일어난 대립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국가들이 유럽대륙의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 다투는 과정에서 생겨난 격렬한 충돌이었다. 제 기능을 다하는 국가 시스템끼리의 충돌이 아니라 현대적 국가조직으로 향하는 과도기에 일어난 전쟁이었기에 그렇게나 혼란스럽과 복잡했던 것이다. 그 혼란을 거치는 동안 각 나라와 세력은 전 유럽을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욕망을 접어야 했다. 모두 다른 나라가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뿐이었다. 일종의 예선경기였던 셈. 어쨌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으며 패권을 추구했던 다양한 세력들은 불안하나마 균형을 회복. 열강들은 네덜란드나 보헤미아 같은 소국들에게도 국가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간의 갈등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낳은 데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의 결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쟁의 경제적 원인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간과되었음.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원인은 안전한 무역로와 지하자원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들 수 있음. 전쟁의 당사자들이 종교적 대립보다는 무역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확인됨. 그리하여 구교 지역이었던 쾰른은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에 대해 엄격한 중립정책을 고수. 이웃한 네덜란드와의 다각적 무역관계가 신앙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
- 30년 전쟁은 유럽이 전쟁을 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인식 또한 의미가 깊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유럽경제는 전반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고, 특히 농업부문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 이 같은 경제성장은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세계무역을 통해 시장확대로 이어짐. 한 역사가의 말을 들어보자. "30년 전쟁은 16세기 경제도약으로부터 탄생. 이런 비약적 발전을 통해 부로 목숨을 부지했고 결국 이 부를 파괴하였다." 16세기에는 금속제련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이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 생산을 가능하게 만듬. 또 30년 전쟁동안 10만명의 용병이 다양한 부대에서 활동. 이는 그 전 세기에 유럽의 인구가 약 25% 증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30년 전쟁은 그 직전까지 아주 잘나갔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전쟁으로 수많은 물적자원과 인적자원을 잃을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그 정도로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 유럽이 도시인구의 4분의 1, 농촌인구의 40% 이상을 잃은 이 엄청난 재앙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사회 전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던 덕분.
- 30년 전쟁의 끄트머리에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커지자 결국 유럽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백기를 들고 평화조약을 체결. 오랫동안 방관하며 체력을 비축해 두었던 두 나라(프랑스, 스페인)만이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로도 10년을 더 싸움. 모든 나라가 전쟁으로 탈진하자 일시적 세력균형이 찾아옴. 그 결과 처음으로 여러 독립국으로 이루어진 유럽이 가능해짐. 이런 정치적 균형은 종교적 대립마저 약화시켰다. 3대 종교(카톨릭, 루터파, 칼뱅파)의 영향권도 확정됨. 이제 유럽에서 종교는 더 이상 전쟁의 불씨가 되지 못했다. 30년 전쟁은 이후 오랫동안 유럽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별도의 전장보다는 마을과 도시가 주된 전쟁터가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30년 동안 독일의 인구는 1600만에서 1100만으로 감소. 대부분이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광폭해진 군인들의 잔혹한 만행에 희생된 사람도 많았다. 30년 전쟁은 오랜 전쟁기간과 잔혹함, 이후에 미친 영향 등에서 인간의 극한 체엄이었고, 여러 세대를 넘어서까지 흔적을 남겼다. 더구나 종교전쟁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드르이 신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 둘 다 나폴레옹의 전쟁방법을 전쟁론의 원칙으로 삼았지만 조미니는 전술, 즉 개별전투에 더 비중을 두었다. 전술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이라 보았다. 반면에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즉 지도 위에서 짜는 장기계획을 더 선호. 물론 두 사람은 전략과 전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로써 현대 전쟁론의 가장 중요한 두 개념, 전술과 전략이 등장. 전술을 전장에서 싸우는 기술, 병력을 장소와 계절조건에 따라 최적으로 배치하는 기술.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올바른 전술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질서정연하고 효과적이도록 만들어야 함. 전략은 전장 자체를 굽어보면서 전쟁을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전쟁의 목표에 맞게 전투를 활용하는 기술임. 여기에 세번째로 병참학, 즉 군수품 보급조직이 추가됨. 병참을 잘 운영해야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음.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술의 문제점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반면 조미니는 주로 전술에 관한 원칙과 사상을 발전시켰음. 조미니의 이론이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에 비해 주목을 덜 받은 이유가 그 때문인지 모름. 현대전에서 전략이 전술보다 중요함. 전술은 개별전투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지만 몇 년에 걸쳐 넒은 공간에서 치르는 전쟁 전체를 이기려면 치밀하고 유연한 전략이 필요한 법
- 근본적으로 클라우제비츠는 모든 전쟁이 사회활동이라고 단언했음. 전쟁이 사회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 혁명적 사회의 군대는 군주제 사회의 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하며, 민주주의 사회의 전쟁방식은 독재사회와는 다름. 그러므로 전쟁의 형태는 전쟁을 하는 사회의 정부형태에 좌우됨. 이로써 전쟁의 주체는 백성이 아니라 국가, 더 정확히 말해서 정부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 전쟁은 국가에 의해, 국가를 위해, 국가에 맞서 실행되는 조직화된 폭력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이 존재하지만 그 대부분은 전쟁이라 불리지 않는다
-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수행하는 일반적 원칙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함.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첫번째 원칙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우리가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아붇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절제한다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성공의 가능성이 분명치 않다 해서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그러한 최선의 노력이 결코 불이익을 안겨 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 그로 인해 나라가 심한 압박을 받는 다 해도 불이익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압박은 금세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에 도움만 된다면 적국에 대한 온갖 만행도 정당화될 수 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이 유럽에서 일으킨 전쟁은 바로 이런 클라우제비츠의 원칙을 따랐다.
- 이슬람과 유럽의 식민정책은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에 심각한 상처로 남아 있음. 125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으로 사라진 사람은 4000만이 넘는다. 이처럼 초기 이슬람의 식민정책(7-8세기)와 유럽의 식민정책(16세기)은 아프리카의 농예화를 낳았지만, 19세기 유럽의 후기 식민정책은 노예제도를 종식시킴. 특히 교회의 지배계급과 달리 노예제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비판했던 유럽의 소수 기독교인들이 큰 공을 세움. 유럽 열강들은 자기들끼리 아프리카를 분할한 뒤 짧은 기간 안에 노예무역을 금지. 그 이유는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커피, 카카오, 차, 지하자원 등)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도 일부는 식민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 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따라서 터키의 식민지였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면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이 시기만 해도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 1차대전 중에는 유대-아랍 여단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고, 50년대 초만 해도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함께 사는 키부츠가 있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임
- 1918년의 패배는 독일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치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듬. 그랬기에 그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했고, 1차대전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독일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바로 이런 잠재적 복수심을 히틀러는 교묘하게 이용. 복수심을 자극하며 베르사유의 치욕을 갚아주겠노라고 약속. 독일국민은 고무되었고 히틀러를 믿었다. 그가 짧은 시간안에(나치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수 국민의 생활여건을 개선해주었기 때문. 특히 1차대전 이후 대량실업과 극심한 빈곤 등 재앙 수준에 이른 열악한 경제상황은 사회적 아버지인 지도자를 향한 강렬한 욕구를 일깨움. 황제의 자리를 대신하여 국가의 정상에 서 줄 강력한 인물을 갈망했고,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무자비한 행동, 과거의 영화와 존경을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으로 독일 국민들의 이상을 충족시켜 줌.
- "독일의 본질이 세상을 치유한다"는 이미 독일 제국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독일의 사명을 히틀러가 다시 일깨움.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과 전 세계, 특히 동유럽 국민들과 비교되는 인종적, 문화적 우월감 등 기존의 편견에도 다시 불을 지폈다. 독일인들은 동유럽 주민들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추방을 해도, 노예로 삼아도 마땅한 민족으로 취급. 많은 수의 독일국민이 그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사회에 만연한 그 사상을 그저 급진시켰을 뿐이다. 지배민족은 하류인간들이 점거하고 있는 생활공간을 차지할 권한이 있기에 독일은 동유럽에 식민지 제국을 건설할 세계사적 사명을 안고 있다! 히틀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숨어 잇는 망상을 자극하며 쉼 없이 떠들어 댔다. 독일 대중은 독일제국의 광신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미 히틀러의 망상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 왜 전세계는 범죄국가 나치 독일에 그렇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을까? 장기적으로 볼 때 의기소침하여 골골거리는 독일보다는 군사력으로 당당히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일이 세계 평화를 위해 더 바람직하다고 믿었기 때문. 프랑스의 군사력을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독일이 무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동등한 군사력 따위는 애당초 히틀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초기에 세계의 눈이 무서워 그런 척했을 뿐이다. 프랑스와 세력균형에 도달했어도 독일은 엑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 45년 이후 전쟁에 가장 많이 참전한 나라의 순위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영국이 1순위를 차지. 이는 영국이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렸고, 식민지 해체가 전쟁을 동반했기 때문. 지난 40년 동안만 살펴보면 미국이 단연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난한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세력권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느껴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 전쟁은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땅에서만 자라는 열매라는 사실을. 따라서 세계의 영원한 화약고는 대부분 값진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지역이다. 서아시아가 그렇고 아프리카의 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이 그렇고, 특히 카스피해 주변지역이 그렇다. 인종간 민족간 경제적 이해관계가 엄청난 폭발력의 화합물을 만든다. 이 화합물의 폭발력을 더욱 키우는 것은 서구 산업국가들(최근에는 중국까지도)의 생활방식이 온통 석유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 예컨대 미국은 엄청난 수의 자동차들에 연료를 공급하자면 사우디 같은 독재 산유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전쟁 역시 진짜 이유는 미국과 유럽으로 석유를 자유롭게 수송하자는 목적이었다. 미정부는 모든 유전의 최대한 착취 정책을 옹호. 특히 서아시아 유전들이 목표다. 그러면서도 자원절약이나 대체 에너지 개발에는 큰 관심이 없음. 어쩔 수 없이 석유와 폭력의 위험한 관계가 발생하고, 이는 앞으로 점점 더 첨예한 대립을 낳을 것이다. 재생이 불가능한 천연석유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그에 반해 수요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테니 말이다.
- 그럼에도 천연자원과 산업국가들의 이해관계만으로 45년 이후에 발발한 모든 전쟁을 설명할 수는 없음. 또 다른 이유는 서구의 부자나라들이 제3세계에 현대화의 압력을 행사하고 급진적 변혁을 강조하기 때문. 서구는 상품을 수출하느 데 그치지 않고 제3세계에 자신들의 경제형태, 사회질서, 가치관, 이상을 강요.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수의 제3세계 국가들이 붕괴 위험에 처해 있음. 특히 낡은 것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서구식 개혁과 전통의 마찰이 극심한 지역에서 내전이 자주 발발. 물론 이런 상황이 자동적으로 전쟁을 점화하는 건 아님. 평화를 유지하는 가난한 나라들도 많다. 그러므로 상황이 위태로워지려면 인종갈등이나 종교갈등 같은 뭔가 다른 것이 추가되어야 함. 그래야 상황이 위기로 치달아 갑자기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 전쟁이 인종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환경, 더 정확하게 말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환경조건도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함. 예를 들어 물 부족이 심각한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강 상류 국가가 많은 양의 물을 채수하거나 강물을 오염시키면 하류 국가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결국 갈등이 초래됨. 유프라테스강(터키,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강(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 나일강(에티오피아, 수단, 이집트) 연안은 물론 과거 소련 연방국이었던 중앙아시아 몇 개국에서 향후 이런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음. 기후 역시 급속도로 악화될 조짐이 강하고, 이런 기후변화 또한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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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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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짓들의 역사

역사 2019. 5. 7. 12:48

- 야생에 사는 어떤 종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굶어죽는 것이 아님. 걷기나 달리기로 A에서 B로 떠나 수렵하거나 채집할 때 생존을 위한 칼로리가 필요하다는 것. 술은 그런 조상들에게 생명유지에 필요한 귀한 칼로리를 보장. 과일에서 나는 숨길 수 없는 발효냄새는 언제 최고의 칼로리가 되는지 알아차리기 쉽게 했음. 뭔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면 그 과일이 잘 익었다는 뜻. 우리 원숭이 조상들은 그것의 에탄올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을 발달시켰음. 과학자들은 음식과 술을 같이 먹고 마시는 것이 음식을 먹은 후에 술을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칼로리를 섭취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술이 섞인 것을 먹는 것은 매우 좋은 생존전략이어서 취한 냄새를 잘 맡는 원숭이들만이 많은 짝짓기를 하고 후세에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었다.
- 88년 출간된 음악의 기원에서 버클리대 월트 프리드만은 인간이 음악을 만든 시점은 불을 만지기 시작한 시점보다 더 오래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시사했음. 약물이나 도시, 그리고 다른 위안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좋은 음악을 듣고 도파민에 취한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경험 중 하나였음. 어쩌면 스톤헨지 건축자들은 그들이 세운 구조물의 음향효과를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잘 작동되도록 개선시키는 데 충분한 음악적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름
- 신을 믿은 안 믿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일 큰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커닝 페이퍼를 찾고 있다. 우리가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내가 섹스를 하면 무엇이 괜찮은가? 심지어 원숭이들조차 이 답이 내부에서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사람에 따라 철학에서, 역사에서, 자기 삶에 있는 경탄스런 사람으로부터 답을 찾기도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가장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유명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 나투프 문화권(지중해 연안 레반트 지역에 존재했던 문화. 농경시대 이전에 이미 정착생활을 함)에서 잔치는 UN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부족들은 이웃, 심지어 적들조차 잔치에 초대했고 자신들이 얼마나 공격적인지 떠벌릴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곤 했음. 잔치를 여는 것은 동맹을 굳건히 하고 정치적 의견충돌을 조정할 뿐만 아니라 힘을 과시하는 한가지 방법이었다. 헤이든 박사가 그 전 과정에 대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잔치를 벌이는 것은 일종의 회전시스템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어느 가족이 일주일에 한 번 잔치를 하면 다른 가족이 다음 주에 하고, ... 이를테면 돌아가면서 잔치를 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 돌고 돌았다. 그 사회는 동시대의 산업사회보다 훨씬 더 사교적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관계는 맥주로 견고하게 다져졌다."
헤이든 박사는 이 과정을 단지 '맥주가 문명을 창조했다'로 기술하는 것과 다른 대안의 요지를 제시했음.
"복잡한 공동체는 더 많은 잔치를 하고 양조된 음료는 자원에 대한 더 많은 투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큰 가치와 높은 지위를 대변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맥주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농업의 증가였다"
맥주 양조가 농업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맥주양조는 매우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지위를 가졌다는 상징이었기 때문에 맥주를 충분히 만드는것은 14000년 전의 국가에서는 매우 중요했다.
- 맥주는 양조과정에서 물 속에 있는 비우호적 미생물을 사멸시킨다. 와인은 알콜 함유량이 매우 높아 마실 때마다 물을 타서 마실 수 있었다. 이것은 물을 훨씬 더 안전하게 만들었고 고대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만년 유물이 되지 않게 했다.
- 술을 마시는 것은 문화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기방어의 수단이었다. 신뢰할 수 없는 물이지만 생존을 위해 마실 수밖에 없었을 때 술이 보호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대인들ㅇ느 술 중독으로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방어할 수단 또한 필요로 했음.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심. 그리고 배 속에 술만 채워지지 않도록 음식을 같이 먹음. 이런 사회적 관습이 때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효과가 없을 때 그들은 피타고라스의 컵을 사용했다
- 과학자들은 역사속에서 위험을 감수했지만 운이 좋았던 인간들의 유전적인 흔적을 발견했음. 우리 인체에는 도파민을 언제 어떻게 방출할지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DRD4라는 유전자가 있다. 그런데 우리 중 약 20% 정도는 DRD4의 변종 DRD4-7R를 갖고 있다. 몇몇 연구는 이 변종 유전자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이 유전자가 온수욕조로 침입하는 친구를 돕겠다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사람들과 친구가 제발 붙잡히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사람을 가르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하지만 과신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놀라운 규칙성을 보였다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시사.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DRD4-7R은 4-5만년전에 처음 나타남. 이 시점은 최초의 인간들이 안전한 거주지를 떠나 바다건너에 더 좋은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 위험이 적을 때는 실패해도 그렇게 큰 타격이 없고 뜻밖의 횡재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악플러들이 실제 현실에선 잘 싸우지 않으면서 온라인에서 온종일 죽치고 앉아 자신의 무용담을 끝없이 떠벌리는 이유임. 자신만만하고 무모하고 자기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태곳적 시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움켜쥐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승리. 이 쉬운 승리는 그들을 계속 배불리 먹게 만들었음. 그리고 과신은 고대의 갈등상황에서 조상들이 화가 날 때 대응 방법으로 쓴 또 다른 개똥 같은 행동과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 언쟁과 비방 전쟁이 인간 언어의 역사에서 특히 새로운 발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식적인 모욕은 중세의 스코틀랜드인이나 베오울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감. 언어학자, 리지야나 프로고바 치와 존 로크에 따르면 인간언어의 진화는 욕에 많은 신세를 졌다고 한다. 그들은 09년 논문 '합해지려는 충동: 의식적인 모욕과 구문의 진화'에서 합성어를 만드는 능력이 아이들 언어발달의 가장 초기단계중 하나라고 지적함. 합성어는 모욕적인 말에도 사용됨. dare-devil(무모한 사람), kill-joy(흥을 깨는 사람), pick-pocket(소매치기), scatter-brain(정신 산만한 사람), turn-coat(변절자) 같은 말고 mother-fucker(후레자식) 같은 것이 동사와 명사의 합성으로 알려짐. 이런 합성어는 인간의 언어 전반에서 발견됨. 그리고 suck-cow나 fuck-wind처럼 두 단어를 결합시키는 경향은 모든 인간구문에 기본기둥을 이룸. 인간의 언어에서 이런 합성어가 잦은 것은 정교하고 유머러스하고 불경하지만 폭력적이 아닌 방식으로 경쟁자를 모욕하는 것이 적합한 효용성이 있음을 시사함. 이 말은 이것을 잘하는 인간이 인간 언어의 토대에 영구적 족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 한 집단의 공개적 비아냥은 자만심에 찬 젊은 사냥꾼들의 가슴을 식히려는 것이었음. 쿵족은 도살하는 날까지 고기에 대해 리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했다. 나중에 고기가 나누어지고 지방과 고기 덩어리가 질 좋은 것임이 뚜렷하게 드러났을 때 리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 소가 너무 말라서 먹을 것이 없다니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에요?" 그러자 쿵족은 연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박사는 당황했다. 그제야 쿵족의 친구중 하나가 우쭐해하는데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설명. "젊은이가 소를 잡으면 그는 자신을 최고로 혹은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게 됩니다. 쿵족은 젊은이가 어떤 것이든 자만심을 갖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 자만심이 언젠가 다른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 자만심과 오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문제임. 하짐나 그것들이 일이십년만다 한 번씩 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고기로 망신주기는 인류학자들이 레벨링 메커니즘이라 부르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가 한 개인이 동료들보다 너무 높이 올라갈 때 부드럽게 누르는 방법이다. 쿵족은 겸손함을 최대한 유지하게 하는 방법으로 비아냥을 사용함. 비아냥은 글로 적절하게 전달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온라인 소통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장의 다른 것처럼 비아냥은 인터넷 시대의 도래로 정말 최고조에 달했다. 자아도취, 비아냥, 욕은 언제나 우리를 짜증나게 해왔다. 하지만 옛날 옛적에는 우리 종이 생존을 확보하려면 그것들이 필요했다. 과신은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호모사피엔스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도록 위험한 기회를 붙잡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다. 추한 모욕과 공격적 허세는 젊은 세대에게 물리적 충돌을 피하게 했고 남는 시간에 섹스를 하게 했다. 현대에 이런 행동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가장 짜증스러운 정도까지 왔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행동이 인간발달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허세는 우리 유전자 속에 암호화되어 모든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 모두는 욕에 엄청난 신세를 지고 있다
- 도블린 박사가 성 금요일 실험에 대해 자신의 '장기 후속 연구와 방법론적 비평'속에 요약한 내용이다.
"실험에 참가한 피실험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들의 성금요일의 실로시빈 경험을 진정으로 신비한 성격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 기술했고, 그들의 영적 삶에 있어 가장 좋은 부분 중 하나였다고 특징지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접촉에 성공한 버섯환각제의 복용자 8명 중 5명이 성직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신앙에 헌신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 당시 약물이 불러일으킨 신비한 경험이 그들의 영적 삶에서 가장 사실적인 순간 중 하나로 여겼음. 이 증거는 마법의 버섯과 다른 환각제가 종교적 숭배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또한 연이어 훨씬 더 큰 이런 의문이 들게 한다. 초기 우리 조상들이 버섯을 사용한 것이 종교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를 했을까?
- 버섯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약물 중 하나. 인간이 버섯으로 최초의 환각 체험을 한 것이 언제 무렵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7~9천년전 동굴벽화를 보면 실로시빈 함유버섯으로 보이는 것이 있음. 대략 6천년전 스페인의 또 다른 동굴 벽화에는 다른 종의 환각버섯이 그려져 있음. 9천년전에 인간은 야생동물들 속에서 서 있을 틈이 없었다. 고난 속에서 늑대와 싸운 인간이 왜 술을 마시고 싶어 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술은 고통을 무디게 하고 호전성을 증가시킨다. 하지만 버섯을 많이 섭취하는 것은 치명적인 사자나 새나 이 땅의 악몽 같은 것들과 싸우는 것은 고사하고 그냥 있는 것 자체를 전략적으로 위험하게 만든다. 선사시대에 환각체험은 순전히 유흥으로 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따. 그래서 고대인들은 접신의 방법으로 환각제를 사용했고 그것을 통해 환영을 본 것을 값진 것으로 여겼다. 한가지 이론이 옳다면 버섯 환각체험은 기술적으로 인간이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진균류 민속학자인 고든 왓슨은 최초로 환각버섯이 인간종교의 탄생에 핵심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 인간의 사고가 일차 과정 사고와 이차과정 사고로 나누어진다. 말과 개념을 분석하고 그것을 세상에 대한 실용적 이해와 비교하는 것은 이차과정 사고다. 일차과정 사고는 훨씬 더 묘하다. 그것은 우리 뇌가 수면이나 정신적 발박, 그리고 어린시절 판타지에 빠져든 상태다. '카우치에서 실험실까지'라는 책에 내가 좋아하는 기술이 있다. "일차 과정 사고는 비교적 불확실한 느낌이 특징이다. 이런 상태에서 무엇이 무엇이란 확신은 힘을 잃고 마법적 설명이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일차과정 사고는 현상에 대한 기적적이고 환상적이고 종교적 설명을 수용하기 쉬운 마음상태다. 실로시빈 같은 약물은 그런 사고에 최첨단 고속도로 역할을 한다. 인간의 뇌 속에서 일차과정 사고의 존재는 실제로 측정될 수 있다.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많이 아는 것처럼 일차과정 사고는 대뇌변연계에서 부분적으로 일어남. 그것은 피질 하부에 위치해 너무 깊이 파묻혀 있어 국부적 측정도구로도 일어나는 일을 상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밀주가 스며든 오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려면 피실험자의 두개골을 자르고 뇌 자체에 전극을 꽂아야 한다. 뇌를 자르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50-60년대 이후로 일차과정 사고를 측정하는 일을 하지 못했음. 하지만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 다 했던 시절에 이루어졌던 연구는 왓슨이 발견한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2010년에 로빈 카하르트 해리스와 칼 프리슨은 이 해묵은 연구를 다시 분석해 보고는 정신발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램 상태로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환각물질에 취한 사람들의 뇌에서 일차과정 사고의 신호로 여겨지는 단계적 활성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현실법칙의 실마리를 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키케온이라는 약물로부터 어느정도 도움을 받음. 키케온은 마약성 와인 같은 것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엘레우시스의 제전이 끝날 때 참석자들에게 마시게 했음. 참석자들이 이 의식을 비밀로 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위협을 받았음에도 구체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이 행사는 9일간의 금식 끝에 있었고 참석자들은 환각작용이 강력한 키케온을 마신 후에 사후의 생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고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 대마초가 적법성을 얻어갈수록 그것을 둘러싼 낭비문화는 앞으로 점점 심해질 것임. 그것은 애초에 대마초가 금지되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문제다. 대마초는 인간사용의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의식이 문제성 있는 사용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사실 고대의 스키타이인이었다면 가족전체가 있는 자리가 아니고서는 약에 취할수가 없다. 서구 역사에서 대마초는 헤로도토스로 거슬로 올라감. 그는 스키타이인으로 알려진 유라시아 기병대가 대마초를 사용한 방식에 대해 최초로 기술. 스키카이인들은 상당량의 물을 말 등에 지고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전 세계적인 활동무대가 주로 사막지대였기에 물로 몸을 씻는 습관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향과 나무를 진흙과 섞어 온 몸에 문지름으로써 기본위생을 처리하는 쪽을 선호. 일상에서는 그렇다호 해도 장례식에는 더 철저한 정화의식을 해야 했다. 이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술.
"스키타이인들은 대마 씨앗을 타는 돌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즉시 그리스에서 태우는 향보다 훨씬 더 기분좋은 증기가 발산된다. 그 향에 일행은 어쩔 줄 모르고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씻는 것 대신에 행해지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두가지 점이 약간 회의적임. 첫번째는 연기에 목욕하는 것이 여하튼 사람들을 깨끗하게 해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두번째는 헤로도토스의 주장대로라면 대마씨앗을 태웠는데 커피 그라운드를 태우는 것만큼 사람들을 취하게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야생에서 자라는 대마초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꽤 지저분한 식물이다. 어쩌면 스키타이인들은 씨앗만 태운 것이 아니라 식물 전체를, 즉 씨앗, 줄기 등 모든 것을 불 위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태웠을 가능성이 높음. 대마연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감에 휩싸이게 하고 크게 울부짖게 만들었다고 구체적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크게 울부짖었다는 것은 취해서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 커피의 첫잔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와 상관없이 커피는 종교적 숭배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잠들지 않는 수도원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최초로 카페인 중독에 걸린 종교인들은 수피교도들이다. 커피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증거가 15세기 후반에 수피교도들이 디크르를 할 때 커피를 헌신 보조제로 사용한 것을 보여줌. 디크르는 밤 예뱅다. 숭배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신은 더 좋아한다. 커피가 수피들에게 한 역할은 커피가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하는 역할과 다르지 않음. 17세기 초에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사실상 종교행위의 일부가 되었다. 교주 이클라스 칼와티의 추종자들은 매년 겨울이면 칼와(독방에서 하는 영적 훈련) 혹은 피정(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조용히 자신을 살피고 기도하며 지내는 일)에 들어가 3일간 금식하며 커피만 마셨다고함. 위궤양을 발생시키기도 했지만 커피는 밤새 디크르를 하고 아침까지 기도가 이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 지아니니는 발 페티시가 역사 속에서 성행위 감염증이 발생할 때 같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주목. 13세기에는 성적매력이 있지만 콘돔이 없는 십자군 덕택에 임질이 두드러지게 증가. 이 시게 중세작가들과 시인들은 인간의 발에 길고 상세한 러브레터를 썼다. 16세기에 매독이 기승을 부렸을 때 발 페티시는 다시 한번 각광을 받았다. 지아니니아 그의 팀은 성 감염 질환의 발생이 끝난 후 30-60년 사이 발 페티시 언급에 대한 빈도수가 감소한 것과 다른 모든 기간 중에 에로티시즘이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에 집착한 것을 주목. 하나같이 흥미진진한 데이터지만 비극적이게도 중세의 에로티가에 대한 기록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지아니니와 그의 용감한 동료들은 미국의 대중 포르노 잡지 8종에서 지난 30년을 대표할 수 있는 외설물을 수집. 그들이 60년에서 80년대 중반까지 발행된 잡지에서 발에 집중된 사진을 찾아서 집계한 결과 평균 5-10개 사이였다. 86년에 그 수가 수직상승했는데 그 시점은 에이즈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음. 연구자들은 98년 간행된 잡지에 평균 40개 이상의 발 그림이 있는 것을 찾아냄. 기본 데이터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한 가지 가설은 우리 뇌가 터무니없는 것의 에로틱화를 점점 발달시켜 가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역병에 감염되지 않으면서 충동을 만족시키는 안전 메카니즘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발 페티시가 비슷한 페티시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 종의 에로틱박스에 있는 유일한 도구도 아니고 가장 오래된 도구도 아니다.
- 엑스터시는 임신하는 순간 뇌에서 대량으로 생성되기 시작하는 화학물질인 옥시토신을 분비하게 함. 엑스터시를 과다복용하는 것은 정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환각을 초래할 수 있지만 치료수준의 복용은 맑은 정신을 거의 변함없이 유지시킴. MDMA는 불안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큼 삶의 질을 나쁘게 하지 않는다. 편집증의 자리에 믿음과 공감이 자리잡는다. 최근의 영상연구는 MDMA가 두려움에 활성화되는 편도라는 뇌의 영역을 진정시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외상후스트레스장에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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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화탄소 농도는 인류가 경작지와 목초지를 확보하고자 중국, 인도, 유럽 등시에서 삼림을 파괴하고 불태우기 시작한 8000년 전부터 서서히 증가. 메탄은 인류가 쌀농사를 짓기 위해 관개를 도입하고 전례 없는 규모로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한 5000년 전에 비슷한 규모로 증가. 이 두가지 변화는 처음에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문명이 발생하고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지구 기후에 점점 더 많은, 더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쳤다
- 소행성 충돌로 비단 공룡뿐 아니라 숱한 생명체들이 사라졌으므로, 그것은 다윈이 100여년전 예상한 진화과정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 생명체들은 필시 수천만년 혹은 수억년 동안 이용가능한 생태적 지위와 생존수단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윈이 주장한 것과 대동소이한 방식으로 다투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소행성 충돌의 생존자들은 비슷한 다른 존재들이 사라진 틈을 타서 더 많이 번식했고, 따라서 더 오래 살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경쟁에서의 승리는 작은 이득이나 손실에 의해 좌우된다. 말하자면 생명의 진화를 제어하는 요소란 마치 보험회사 소속의 공인회계사가 연연하는 것 같은 사소한 차이다. 몇 억 년에 한 차례씩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외계에서 날아들어 질서정연한 세계를 송두리째 재정비한다. 대다수 종이 멸종하며, 그에 따라 살아남은 동물들은 별안간 한때는 경쟁이 치열했던 생태적 지위를 넉넉하게 보장받는다. 이제 그들은 그런 처지를 활용해 좀더 느긋하게, 다윈이 말한 이른바 재능 다양화를 도모했다. 진화의 이 같은 측면은 '행성 간 사격연습장 속의 삶'이라 불렸다. 이러한 대대적 공격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일부 작은 동물들 뿐이었다.
- 6500만년 전 소행성 충돌사건을 계기로 공룡시대가 저물고 포유류 시대가 열림. 본시 작고 보잘것 없고 설치류처럼 생겼던 포유류는 이내 고래 등 지상에서 가장 커다란 동물을 포함하는, 좀더 덩치 크고 복잡한 생명체 집단으로 진화. 그 가운에 하나의 계통은 오늘날 여우원숭이와 매우 흡사한 동물로 진화함. 수천만 년 전에 살았던, 꽉 붙들 수 있는 앞발과 잡기에 적합한 꼬리를 지니고 나무를 타고 다닌 원숭이 모습의 동물이었다. 이 계통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약 1000만년 전 원시적 유인원 형태로 진화. 그후 약 500만년 전 그들로부터 침팬지와 우리 선조들이 속한 집단이 떨어져 나왔다. 450만~400만년 전, 아프리카에 출현한 오스트랄로피테신은 화산재에 발자국을 남긴 동물들처럼 네다리가 아니라 두발로 일어서서 똑바로 걷기 시작. 직립보행 자세로 변했다는 것은 두개골을 받치는 등뼈의 위치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네 발로 걷는 동물의 경우는 등뼈가 두개골의 뒤쪽으로 이어지는 반면, 똑바로 서서 두발로 걷는 동물은 머리통이 정확히 등뼈의 위쪽에 놓인다
- 15~10만년 전 어느 때쯤, 아프리카에서 거의 현재와 유사한 인류가 등장. 그들은 신체적으로는 거의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어졌다. 선조들보다 키도 크고 뇌 크기도 한층 더 커짐. 그들 역시 선조들처럼 돌을 쪼개서 도구를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진일보한 기술을 동원. 좀더 현명하게 돌을 골라 한층 더 다양하고 정교하고 다듬어진 도구를 제작. 우리는 그들이 시체를 매장하고 환자를 돌봤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환자를 간호했다는 것은 다른 이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기형을 지닌 채 성년기를 살았던 개인의 화석 유해가 발굴된 데 따른 결론임. 처음에는 그들 역시 선조들처럼 사냥꾼에게 거의 혹은 전혀 위해를 가하지 않는 작은 사냥감에 주로 의존했다. 지능이 꽤나 높은 인간이 어찌 그리 믿기지 않을 만큼 원시적인 생활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희한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뇌는 지금 우리의 뇌가 감당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오늘의 우리로서는 당연하다 싶은 상식의 기반이 부족했다. 그들의 아기 한 명을 현대사회에 데려와 키운다면, 그가 천체물리학자, 목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가능성이 지금의 우리와 하등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장구한 세월동안, 지축의 기울기가 늘 일정하게 유지된 것은 아님. 1840년대 프랑스 천문학자 위르뱅 르베리에는 거대 행성들(주로 목성)의 중력당김에 의해 지축의 기울기가 4만 1000년 주기로 22.2도에서 24.5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밝힘. 4.1만년마다 기울기는 최대에서 최소로, 다시 최대로 달라진다는 의미. 기울기 주기는 길이도 진폭도 일정함. 2.3도에 이르는 지축 기울기의 점진적 변화가 낮 동안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높이를 달라지게 만든다. 2.3도의 변화라니 하찮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태양이 항시 하늘에 낮게 떠 있는 고위도 지방에서는 큰 차이를 만들어냄. 북극권 북쪽과 남극권의 경우, 한겨울에는 결코 태양을 볼 수 없다. 끝없는 극야가 펼쳐지는 것임. 반면 한여름에는 태양이 결코 지지 않고, 지극히 낮은 각도로 지평선 주위를 느리게 돌며 떠 있다. 낮은 태양고도상의 아주 작은 변화조차 전달되는 태양 복사에너지 양에 유의미한 차이를 가져다 준다.
- 기후를 변화시키는 두번째 방법은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달라지게 만드는 것. 흔히 볼 수 있는 전구에서 손을 30센티 정도 뗀 다음 다시 10센티 가량 더 떼보면 이 주장을 실감할 수 있다. 열원과의 거리는 분명한 차이를 느끼게 해주며, 전구 열의 양을 통해 태양에서 나오는 평균적 열의 양을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지구가 공전하는 동안 태양까지의 거리를 달라지게 만드는 것은 지구 궤도의 이심율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구 궤도가 둥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하지 않은 원형, 즉 타원형임. 따라서 지구는 공전궤도상의 한 지점(근일점)에 있을 때가 그 반대편(원일점)에 있을 때보다 태양에 약 500만킬로 더 가까움. 이것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평균거리(1.55억킬로)에서 벗어나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변하다. 일반적을 이심율이라 불리는 이 타원율은 오랜 기간에 걸쳐 변화함. 이심율이 거의 10만년 주기로 변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또한 르베리에의 업적. 매우 드물지만 이심율이 0으로 떨어지면,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궤도가 완벽한 원형이 됨. 대부분의 기간동안 지축 기울기는 타원형이고, 이심률은 끊임없이 변화함. 이심률의 변화는 지축기울기의 변화보다 더 불규칙함. 또한 최고 이심률과 최저 이심률 간의 변화폭도 크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이심률은 지구궤도를 원형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지구궤도상의 위치에 따라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달라지게 만듬. 지구와 태양의 거리에 영향을 미치는 지구궤도의 두번째 측면은 지축의 세차운동. 지구는 팽이처럼 기울어진 지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번씩 자전함. 또한 1년에 한번씩 태양주위를 공전. 이 역시 평평한 표면에서 서서히 원형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대다수 팽이들에서 확인가능. 그러나 팽이는 흔히 세번째 종류의 운동을 보여주기도 함. 즉 기울어진 방향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꾸면서 흔들흔들 하는 것이다. 지축을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는 지구의 방향변화는 기울기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짐. 1800년대 프랑스 수학자 장 르 롱 달랑베르는 세차운동이 어떻게 태양주위를 공전하는 지구궤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최초로 밝힘. 그는 기울어진 지축이 지구궤도상에서 느리게 한번 흔들리는 데 약 2.2만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냄. 2.2만년은 지구가 하루에 한번 자전하는 것, 혹은 1년에 한 번 공전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긴 기간이다. 지구가 지구궤도상에서 이러한 흔들거림 가운데 단 한번을 경험하는 데는 2.2만번의 공전이나 800만번이 넘는 자전과 맞먹는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 만약 여러분이 그처럼 느린 흔들거림을 감지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 팽이를 주시해야 할 것임
- 기나긴 세월 동안 인간과 동물이 진화과정을 함께 해온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에 필적할 만한 대멸종이 일어나지 않았따. 이러한 관찰은 사리에 닿는다. 인간에게 쫓기는 사냥감이 그 압박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 (이를테면 혼자 지내는 습관이나 일정치 않은 예측불허의 이주유형 등)을 개발할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멸종을 초래한 원인이 인간이라는 결론은 수많은 과학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샀다. 그들은 1.25만년전 남북아메리카에 살았던 한 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설사 클로비스 창촉을 장착한 무기를 지녔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 모든 동물들을 삽시간에 대멸종으로 몰아갈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초기 미국인들이 대멸종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종의 마지막 개체까지 일일이 창으로 찔러죽일 필요는 없었다. 인간은 조직적 집단 속에서 사냥하면서 언어적 의사소통과 불을 써서 동물 무리를 크고 작은 협곡이나 제한된 지역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불로 위협하면서 동물떼를 몰아가노라면 어느 때는 그들이 한꺼번에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또 어느 때는 동물들이 막다른 궁지에 몰려 허둥대가 허망하게 살해당하기도 함. 이 시기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해골 무더기가 절벽 바닥 가장자리에 수북이 쌓인 채 발견되었는데, 더러 그 가운데 가장 위에 놓인 해골만 식량감으로 도살당했다는 증거가 나오곤 한다. 사냥 전략들이 어찌나 잘 먹혀들었던지 그것들을 다채롭게 구사하자 동물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인구 생태학자들이 최근에 진행한 연구는 대형 포유류 종은 매년 그들 인구의 일부만 골라 죽여도 놀라우리만큼 빠른 시일내에 멸종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줌. 대다수 대형 포유류는 임신기간이 긴 데다 한 번에 새끼를 조금씩밖에 낳지 못해서 더디게 번식하므로, 사망률이 정상치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쉽사리 피해를 입음. 출생률과 사망률의 장기적 영향력을 계산함으로써 인구변화를 모의실험한 모델들은 사망률이 정상치를 조금만 상회해도 수백년 내에 멸종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적어도 두가지 관점에서 보자면, 수렵-채집-어로 생활에서 농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첫째, 수렵채집인은 다양한 출처에서 식량을 얻으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 같은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수많은 동식물은 당연히 영양적 균형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그에 비해 식량을 한두 가지 곡물에만 과도하게 의존하면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으로 이어져 영양실조를 초래하기 십상. 이런 관점에서 보면 1.2만년 전 사람들이 점차 몇 개에 불과한 곡물에 의존한 것이 꼭 그렇게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었다. 둘째, 몇몇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근동지역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같은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 씨를 뿌리고 돌보고 추수하는 것보다 품이 덜 든다고 한다. 원시인들은 최소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최대의 식량을 거두어들이고자 끊임없이 우선순위에 따른 합리적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렇듯 농업의 등장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살아가던 이들로 하여금 나날의 일상을 농사짓는 일로 서서히 옮아가도록 내몬 몇가지 요인이 있었다. 반건조한 이 지역의 초원에선 이례적일 정도로 다양한 곡물이 야생상태로 자라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재배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밀(에머밀과 외알밀), 보리, 호밀 등속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모두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탄수화물 급원이었다. 완두콩이나 렌틸콩은 훌륭한 단백질원이었다. 천연식량이 더없이 풍부하다는 것은 이 지역만의 고유한 특색이었다. 풍부함의 원천은 부분적으로 근동의 반건조성 기후에 따른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건기가 길어서 매년 일년생 식물이 거의 반 죽는다. 따라서 식물은 생식을 위해 씨앗을 만들어내는 데 에너지를 소비함. 식용 씨앗은 인간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식량이다. 반면 물이 풍부한 숲에서 자라는 초목은 대체로 인간에게 먹을 것을 거의 제공해주지 않으며, 사막은 척박한 불모지나 다름 없음. 따라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주민들은 곡물을 통해 필요한 식량을 얻긴 했지만, 여전히 야생 씨앗을 채집하거나 사냥을 하거나, 장소에 따라서는 물고기를 잡아서 영양분 섭취를 늘려나갔다. 그들은 이처럼 여러 자원을 한꺼번에 활용함으로써 영양결핍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야생 식량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자란 까닭에 농사가 시작될 무렵 일찌감치 몇몇 기술혁신을 이루게 된다. 게다가 곡물을 자르는 원시적 돌낫, 곡식을 담아 나르는 데 쓰는 직조 소쿠리, 곡물을 갈기 위한 절구 등 다른 곳에서 거둔 기술혁신의 성과도 빠르게 수용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선 농업으로의 전환이 점점 더 탄력을 받기 시작. 처음에 사람들은 야생 곡식이나 콩과 식물을 땄다. 구하기도 쉽고 맛도 좋으며, 특정계절에는 수많은 식량자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 이것은 채집이지 농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1.1만년 전 무렵 야생곡물종과 유연관계에 있는 곡물들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범람지대에서 그들이 자연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을 한참 벗어난 장소에 나타나기 시작. 인간이 개입하거나 손댔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완두콩 같은 보호받는 곡식알갱이들은 서서히 크기가 애초의 야생형태보다 열배나 커졌다. 사람들은 적은 시간에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가장 큰 곡식 알갱이나 채소를 거두어들였다. 당초 이러한 선택은 그저 당연한 일이자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문제였고, 이것은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곡식은 수백년에 걸쳐 점차 서로 밀접한 관련은 맺었따. 사람들이 거듭 큰 씨앗을 선택함에 따라 곡식은 다른 식물들과 겨루어야 하는 야생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잡종으로 진화. 쉴새 없이 이동하면서 자식을 데리고 다녀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고 믿을만한 식량원이 확보되자 사람들은 자녀를 더 많이 낳았고, 자연스레 인구도 늘기 시작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또 한가지 이점은 그곳이 사육하기 쉬운 것으로 드러난 여러 야생동물의 서식지였다는 사실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강조한 대로, 쉽게 사육하기 힘든 동물 유형도 숱하게 많다. 태생적으로 너무 사납거나 겁이 많거나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는 동물도 있으며, 그저 너무 작아 쓸모가 없는 동물도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염소, 양, 돼지, 소의 선조들이 야생상태로 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운이 좋은 곳이었다
- 현대의 주요 종교들은 모두 3200-1400년 전에 출현. 구약성서는 주로 3200년 전 모세의 시기부터 예수탄생 전 세기까지 일어난 사건을 다룸. 동아시아 종교적 인물 거개가 몇 백 년 사이에 태어났다. 기원전 604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교를 이끈 노자가 태어났고, 기원전 570년에는 석가모니가 인도 북쪽 네팔에서 탄생. 기원전 551년에는 공자가 탄생. 나중에 서양달력의 기원이 된 예수의 탄생으로 서력기원이 시작됨. 서기 570년에는 무함마드가 태어남. 세계의 종교를 쓴 휴스턴 스미스에 따르면, 일부 종교사가들은 이 기간에 종교적 각성이 비교적 활발했던 이유를 농업의 부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함에서 찾았다. 대다수의 종교 창시자들은 전반적으로 사라들 삶에 깊은 윤리적, 도덕적 관심을 기울였지만, 특히 날로 풍요로워지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딱한 처지에 마음을 썼다.
- 인간활동은 지난 5000년간 비정상적 메탄농도 증가뿐 아니라 메탄 농도가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은 사실을 그럴싸하게 설명해줄 수 있다.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인간은 산업시대가 도래하기 전 수천년간 대기중의 메탄양을 급속하게 증가시킨 주범이다. 초기의 인위적 영향은 그 이전의 수십만년 동안 발생한 자연적 변동 폭의 70%에 이름. 메탄의 경우 인위적인 시대가 약 5000년 전경부터 시작된 것이다.
- 기후 시스템의 주요인들(태양 복사 에너지 변화, 빙상의 퇴각속도, 해수면 상승, 식생의 변화 등)은 하나같이 지난 네차례의 간빙기와 그에 이어지는 몇 천년 동안 비슷하게 움직였지만, 오직 현재 간빙기에만 초기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했다. 반면 그에 앞서는 세 차례 간빙기에서는 이산화탄소가 꾸준히 하강곡선을 그렸다. 결국 최근 이산화탄소 증가를 자연적 요소에 근거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하나같이 과거 세차례의 간빙기에 이산화탄소가 감소한 현상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자연적 요소를 배제하면 다시금 딱 한가지 설명만이 남는다. 즉 인간이 이산화탄소를 비정상적으로 증가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인간은 8000년 전부터 산업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3000억톤이 넘는 탄소를 대기중에 더해준 것으로 보였다.
- 어찌 그토록 적은 인간이 그리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단 말인가? 초기에 인간이 대기중에 이산화탄소를 방출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삼림 벌채를 통해서였다. 8000년 전에서 250년 전까지 3000억톤에 달하는 탄소를 방출하려면 산업혁명 이전의 삼림벌채가 산업시대 2000년동안의 두배가 넘어야 했다. 오늘날에는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열대우림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탓에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에 비해 연간 삼림벌채 속도 추정치가 200년 전에는 오늘날의 10% 수준이었으며, 훨씬 더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찮으리만치 작은 수치로 줄어듬. 이렇게 보자면 1750년 이전까지의 총 삼림파괴가 그 이후의 두배가 넘는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이 들린다. 그러나 일반적 통념에 따른 견해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간과했다. 바로 시간이다. 지난 200년 동안 삼림벌채나 기타 다른 것들의 처분에 따른 탄소배출의 평균속도는 연간 약 7억 1500억 톤의 탄소가 배출된다. 그러나 탄소가 서서히 증가한 그 이전 시대는 그보다 40배나 더 긴 7750년에 걸쳐 있다. 이전 시기의 총 탄소배출량을 3000억톤에 맞추려면 탄소 배출량의 속도가 연간 산업시대 평균(7억 5000만톤)의 5%에 불과한 4000만톤에 그쳐야 함. 결국 속도는 20분의 1이지만 40배 더 긴 기간동안 지속되었으므로 총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두배가 된다. 이솝우화에서처럼, 느리게 움직이지만 일찌감치 출발한 거북이 빠르게 움직이지만 너무 늦게 출발한 토끼를 이긴 것이다. 이 간단한 계산을 통해서 보면ㅁ 비로소 초기 탄소 방출량이 총 3000억 톤에 달한다는 주장이 그럴법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산은 인간이 비정상적인 이산화탄소 증가의 주범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증가의 두가지 특징과 일치하는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첫째, 이산화탄소 곡선이 증가세로 돌아선 8000년 전에 석기시대 인류가 상당한 속도로 삼림을 파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필요. 둘째, 인류가 저지른 삼림파괴의 누적효과로 산업시대 훨씬 이전에(이 경우 무려 2000년 전에) 이미 이산화탄소가 매우 큰 폭으로 증가한 현상을 설명해주는 증거 또한 필요
- 기후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지잔 8000년을 이전 빙하기와 다음번 빙하기 사이에 낀 짧은 막간으로, 자연적으로 기후가 안정된 시기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내용은 지난 8000년 간의 따뜻하고 안정된 기후가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뜻하고 안정된 기후는 실상 시작되었어야 마땅한 자연적 냉각과 인간이 야기한 온난화 효과에 따른 상쇄가 빚어낸 우연적인 유사균형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같은 새로운 개념이 맞는다면, 인간문명이 초래한 기후란 부분적으로 인간의 농업활동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우리 인간은 무려 수천년 전부터 기후 시스템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떠오른 것이다.
- 8000년 전 자연적인 기후는 따뜻했다. 여름에 태양 복사 에너지가 강하고 자연적인 온실가스 수준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자연적인 지구궤도 변화에 따라 여름 태양 복사에너지 양은 꾸준이 줄어들었고, 자연적 냉각이 이어졌다. 지난 몇 천년간 이러한 냉각 추세는 빙하작용이 가능해지는 문턱에 다다랐지만, 인간이 빙하작용을 피할 만큼 기후를 따뜻하게 유지해줄 온실가스를 대기에 더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극지방 기후는 지난 5000년 동안 태양 복사 에너지 양의 변화로 인해 실제로 냉각되었지만, 인간이 온실가스를 더해주는 바람에 빙상이 생성되지 않았다. 지난 200년간의 산업시대에 방출된 온실가스로 인해 지구 기온은 빙하작용이 가능한 온도를 넘어서버렸다.
- 70년대 점차적인 지구궤도 변동이 빙상의 성쇠를 좌우한다는 밀란코비치 이론이 맞는다고 확인해준 것은 기후과학이 일군 성공가운데 하나였다. 임브리 부녀가 80년 발표한 논문은 다음 빙하기가 임박했음을 (고작 1000-2000년 내에 시작될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그 연구결과를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일부 과학자들은 그 결과를 보고 지극히 단견이라 할 만한 다음과 같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 즉 1960-70년대에 진행된, 지구 기온이 같은 수준을 유지하거나 약간 낮아진 것을 보고 새로운 빙하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한 것이다. 80년대에, 수십년간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승했다는 직접적 측정치들이 쏟아져 나오자 대다수 기후과학자들은 급속한 이산화탄소 증가가 훨씬 더 느린 지구궤도 변화보다 가까운 미래의 기후변화에 한층 더 중요한 요인이 되리라 믿었다. 결국 장기적 냉각화보다는 단기적 온난화에 관한 우려가 더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떠올랐따. 그 무렵 온난화는 언론으로부터 이례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더러는 환경단체 대변인들이 미래의 온난화가 미칠 수도 있는 해악에 관해 필요 이상의 불안을 부추기는 과장된 언급을 쏟아내기도 했다. 90년대는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반격이 가해졌다. 과학계가 이 주제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미래의 빙하작용에 관한 예측에서 미래의 열파에 관한 경고로의 이동은 과학적 무능의 예로 언급되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그렇게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요약된 결과들은 이 주제에 관해 더욱 폭넓은 관점을 제공한다. 빙하기가 임박했음을 암시하기 위해 70년대에 새롭게 확증된 지구궤도 이론에 의존한 대다수 과학자들은 틀림없이 느리고 장기적인 지구궤도 주기라는 맥락에 비추어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새로운 빙하기를 당장 내일이 아니라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임박했다고 본 거이다. 이런 재해석을 통해 대다수 과학자들은 실제로 불필요하게 불안을 부추기는 사람들보다 사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구결과들을 보면, 초기 인간활동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 없었다면 지난 수천년간 지구가 대규모의 자연적 냉각과정을 겪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몇 천 년 전부터 적어도 소규모로나마 빙하작용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번 빙하기는 임박한 게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어야 마땅한 것이다. 한편 60-70년대의 미미한 기후냉각을 보고 빙하기가 도래하는 조짐이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린 일부 과학자들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실제로도 비판받았다. 그들의 결론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 오늘날 가장 정확한 추정치에 따르면 단지 유럽인과 접촉한 사실만으로 숨진 아메리카 원주민이 약 5000만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전 산업시대의 역사를 통틀어, 세계 인구 크기에 비례해, 그리고 지금껏 출몰한 최악의 세계적 유행병들 가운데 단연 최대 규모의 유행병이었다. 당시 지구상에서 살아가던 대략 5억명의 인류 가운데, 10%에 이르는 약 5000만 명이 남북아메리카에서 죽어갔다
- 세계적 유행병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변화가 지난 2000년간의 기후변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기후 시스템이 두배의 이산화탄소 수치가 4-10ppm 감소하면 지구기후는 0.04-0.1도 냉각할 것이다. 이러한 냉각은 추웠던 로마시대(200-600년), 따뜻했던 중세시대(900-1200년), 그리고 다시 추웠던 소빙기(1300-1900년)에 관측된 기온변화의 상당부분을 말해줌. 화산분화나 태양활동의 미세한 변화같은 요인이 기온변화에서 맡은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적 과정은 실험을 통과하지 못한 반면, 세계적 유행병 가설은 어쨌거나 재구성된 기온감소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산화탄소 감소규모를 설명해주었다.
- 대다수 과학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관측에 동의한다. 첫번째, 지난 200년 동안 온실가스 농도는 자연적 수준을 넘어 급격하게 증가했다. 두번째, 전 지구의 온도는 지난 125년 동안 이례적으로 빠르게 0.6-0.7도 상승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당장에라도 인간이 일으킨 전례 없는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말처럼 그리 쉽게 정당화될 수 없다. 믿을 만한 기후과학자라면 관측된 온난화의 적어도 일부는 분명 온실가스 농도 증가 때문이라는 데 동의하겠지만, 온난화 전체가 온실가스에 의해서만 야기되었다고는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요인들도 기후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산업시대에 인간이 기후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려면 우선 그 요인들부터 찾아내야 한다. 한가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관측결과가 있다. 바로 인간이 이산화탄소와 메탄을 증가시켰는데도 지난 200년의 기후 온난화는 전산업시대에 인간이 만들어낸 정도에 그쳤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가장 주된 설명은 기후 시스템이 급격하게 도입된 온실가스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수십년이 걸리므로, 지난 반 세기 동안 지구 기온이 폭발적인 온실가스 증가를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그럴듯한 설명은 다른 산업 배기가스들이 대기에 배출되면서 온실가스로 인한 온난화 효과를 일부 소거했다는 것이다. 미래에 온실가스로 인한 온난화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화석연료 생산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수지타산이 맞는지, 우리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온실가스 가운데 얼마만큼을 얼마나 빠르게 대기중에 내보낼지, 그리고 기후 시스템이 그들의 투입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할지에 달려 있다. 이 같은 예상에서 가장 불확실한 점은 미래의 기술발달이 인류 연원의 온실가스를 얼마나 줄여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 선조들은 수백만 년 동안 기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 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영향력은 작지만 서서히 커지기 시작. 그러다 급기야 지난 세기에는 인간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자연을 능가했다. 이런 추세는 다가오는 수백년 동안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남짓한 세월 동안 화석연료 시대는 대체로 막을 내릴 테고, 그러면 기후 시스템은 천천히 자연적인 (좀더 추운) 상태로 접어들 것이다.
-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온실가스가 비교적 서서히 증가(이산화탄소 40ppm과 메탄 250ppb) 했는데도 지구 기온이 비교적 크게 상승(0.8도) 한데 반해, 산업시대에는 큰 폭으로 증가한 온실가스(이산화탄소 100ppm과 메탄 1000ppb)가 지구 기온을 고작 0.6도만 상승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들 반응의 상대적 규모는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요인이 그 차이를 설명해준다. 첫번째 설명은 거북과 토끼의 차이다. 즉 온실가스 농도가 전산업시대에는 서서히 증가했지만 산업시대에는 몹시 빠르게 증가한 나머지 기후 시스템이 미처 그 결과를 기온에 반영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기후 시스템은 온실가스 증가 같은 새로운 방향의 자극에 제대로 반응하기까지 수십년이 걸린다. 우리는 이러한 지체를 기후 시스템의 반응시간이라고 부른다
- 바다의 순환에 미치는 이 모든 영향력을 한꺼번에 고려해볼 때다. 바다의 평균 반응시간 추정치는 25-75년 사이다. 바다는 지구표면의 70%를 차지하고,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더 많은 열을 저장할 수 있으므로, 전체 기후 시스템의 평균 반응시간도 같은 범위에 놓인다. 가장 정확한 추정치는 아마도 30-50년일 것이다. 이 반응시간은 온실가스가 증가한 두 번의 시기에서 다른 결과를 보인다. 전산업시대에는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증가속도가 한정 없이 느려서 장장 수천 년에 걸쳐 있었다. 기후 시스템은 온실가스가 변화하고 몇 십년이 지나면 반응을 보이는데도, 수세기가 흐르는 동안 온실가스 농도의 증가 속도가 어찌나 더뎠는지 기후 시스템은 당시 존재하는 온실가스 양과 거의 전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 산업시대에는 대기중의 온실가스 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증가분의 절반을 웃도는 양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졌다. 산업시대에 온실가스 증가의 최초 조짐은 1800년 무렵 드러났지만, 1900년까지 증가분은 전체의 20% 미만이었다. 1950년경에조차 현재까지의 이산화탄소, 메탄 증가분의 30%가 못 되는 정도만 기록하고 있었다. 따라서 산업시대의 온실가스 증가분 가운데 나머지 70%는 기후 시스템의 반응시간 추정치에 상당하는 기간(30-50년) 동안 일어난 셈이다. 한마디로 기후 시스템은 결국 일어나게 될 온난화의 상당 부분을 미처 기록할 겨를이 없었다. 몇몇 추정치에 따르면, 현재의 온실가스 수치로 인해 결국 일어나게 될 온난화의 절반 이상은 아직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우리가 미래에 배출할 온실가스를 어떻게든 제한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예컨대 대기중의 온실가스 농도를 향후 몇 십 년간 정확하게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식으로), 기후 시스템이 서서히 현재의 온실가스 농도와 전면적인 균형을 이루게 됨에 따라, 지구 기후는 계속 따뜻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이처럼 기후가 반응하기까지 시간 자체가 존재한다는 점이 전산업시대와 비교해 산업시대에 온실가스가 크게 증가했음에도 온난화 정도가 너무나 작은 것처럼 보이는 주된 이유다
-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불일치의 원인에 관한 두번째 설명은 산업 시대에 기후를 냉각함으로써 온실가스의 온난화 효과를 반감시키는 다른 종류의 배기가스들이 대기에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전산어시대에는 그것들이 배출되지 않았거나 배출된 중 배기가스들 가운데 온실가스가 아닌 것은 바로 이산화황이다. 이산화황 가스는 대기중에 배출되면 에어로졸이라는 작은 입자로 변한다. 화산 분화로 발생하는 황과 달리 이 황 입자는 성층권에 도달하지 않는다. 성층권에서라면 황 입자가 정착하기까지 몇 년 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테지만, 대기권에서는 대신 수백미터에서 수천 미터 상공으로 상승한 뒤 우세풍으로 타고 서서히 배출지점에서 벗어남. 이산화황의 3대 주원천은 미국 중서부, 유럽(특히 구소련에서 분리된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중국이다. 에어로졸 기둥은 하강기류를 타고 복사에너지를 일부 반사하므로 그들이 기후에 미치는 효과는 지역적 차원의 냉각이다. 냉각의 정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입자의 크기, 모양, 색깔과 관련된 복잡한 세부사항들, 그리고 그것이 대기권에서 어느 높이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짐. 이 에어로졸은 며칠 혹은 몇 주 내로 비에 의해 대기에서 씻겨 나가지만, 그런 일은 이들이 하강기류를 타고 수백에서 수천 킬로를 떠다닌 뒤에야 일어난다
-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다는 말은 지극히 불길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남극대륙 가장자리의 빙붕은 남극대륙의 안쪽에서 바깥으로 이동하는 얼음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채워지며, 그 얼음 역시 내린 눈에 의해 계속 새로 보충된다. 다시 말해 얼음은 언제나 그 체제 내에서 돌아다지므로 빙상 크기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음.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더러 떨어져나간다는 사실은 장기적인 의미에서는 안정적인 체제의 정상적 일부분이다. 오직 남극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빙붕이 지난 세기들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드러날 때만 우리는 인위적 온실가스 온난화가 그 같은 추세를 부추겼노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러한 추세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남극대륙의 얼음이 안정적인 것 같다
- 지구 온난화에 관한 숨은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와 미래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예측된 미래 온난화의 대부분을 피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감축하려면, 거의 대다수가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만한 가혹한 경제적 희생을 감수해야 함. 즉 여행아나 난방을 위한 연료값이 훨씬 더 비싸지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온도조절장치를 훨씬 낮거나(겨울), 높게(여름) 설정해야 하고, 상당비용을 투자해 발전소를 개선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 대체해야 함. 이러한 시도들은 경제나 삶의 질에 현저한 방해가 될 테고, 그것을 반기는 시민은 거의 없을 것읻. 우리는 현재 기술로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완화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일만한 경제적 여력이 안된다. 이 기저의 진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논의를 좀더 분명한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해주기는 할 것이다.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를 정말로 피하고 싶어하는지 솔지갛게 질문해 보아야 함. 사람들은 대체로 겨울이 다가오면 투덜대고 여름이 시작되면 반가워한다. 눈이 내리지 않는 선벨트 지역(미국에서 연중 날씨가 따뜻한 남부 및 남서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중서부와 뉴잉글랜드 지역에 피해를 안겨준 눈과 착빙성 폭풍우에 관한 뉴스 보도를 접하면 그와 무관한 자신의 처지에 안도감을 느낀다. 수백만명이 은퇴 후 남부로 이사를 떠나지만, 북부로 거처를 옮기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추운 주의 거주민들은 투표함 앞에서 어느 쪽에 표를 던질지 저울질해야 한다. 지금처럼 추운 날씨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올릴 것인가, 아니면 세금은 현재 수준으로 묶어두고 미래의 3월은 지금의 4월처럼, 미래의 11월은 지금의 10월처럼 되게 할 것인가. 나는 그들이 결코 날씨를 더 춥게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결정을 내릴 것 같지가 않다.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려는 대규모 기획은 어떤 것이든 결국에 가서는 저변에 깔린 이러한 태도와 부딪치게 될 것이다.
- 환경 극단주의자들은 기업 대변인들이 탐욕스러운 석탄 회사와 석유회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음으로써 썩을대로 썩었다고 성토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입장에서 비롯된 적극적인 조치들이 대중에게 큰 비용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환경 옹호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란 장 자크 루소가 주창한 고결한 야만인을 품위있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고결한 야만인이란 과거에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사냥할 뿐 그 이상은 조금도 탐하지 않은 채 환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원주민들을 일컬음. 그들은 소위 순정한 원시시대를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지난 200년 동안의 악과 대비시킨다. 그리고 산어발달을 인간이 최초로, 유일하게, 진정으로 자연을 공격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이 책은 순수한 자연세계라는 개념은 신화임을 보여주었다. 실상 전산어시대의 문화도 오랫동안 환경에 적잖은 영향을 끼쳐온 것이다. 최초의 영향은 여러 대륙에서 대부분의 대형 포유류와 유대목 동물을 멸종으로 내몬 개선된 사냥기술에서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몇 천년 뒤 인간은 농업발달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로 환경에 좀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따. 대대적인 삼림파괴와 관개로 인한 토지이용 변경은 토양을 침식하고 악화시켰다. 수 천년 전의 농사 관행으로 온실가스가 다량 방출되었으며, 지구 기후가 변화했다. 전산업시대는 기술도 비교적 원시적이었으며 인구도 수십 억이 아니라 수억 단위였지만, 당시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지구의 환경과 기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실제로 적잖은 증거를 통해 철기시대, 심지어 석기시대 말엽에도 사람들이 오늘날의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지구풍경에 끼친 1인당 영향은 훨씬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 수밖에 없었으며, 대다수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숲을 잘라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평균 수십에이커의 숲을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 지구 기후사에 대한 오랜 관심이 낳은 결과이겠지만, 미래를 향한 나의 걱정은 서로 연관되는 일련의 문제들이 모아지는 경향이 있다. 즉 과거에 서서히 이루어진 과정을 거쳐서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한, 일단 써버리고 나면 영영 사라져버릴 선물이다. 그 선물에 대한 나의 걱정은 간단하다. 즉 그것이 줄어들거나 완전히 고갈된다면, 우리 인간은 비교적 저렴한 대체물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은퇴할 즈음이면 많은 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나의 개인적 관심사 또한 우리 손자손녀들이 살아갈 세상까지 뻗어나간다. 나는 그애들이 노년에 이를 무렵이면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선물들의 일부가 더 이상 무한정한 자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누가 봐도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때쯤이면 우리 손사손녀 세대는 1800년대 말에서 21세기 초반까지를 짧았지만 너무나 운 좋은 버블의 시기, 즉 억세게 재수 좋은 인류 몇 대가 대체로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도 못한채 그 선물들을 대부분 써버린 시기였노라고 회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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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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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동굴에서는 수많은 화로의 흔적이 발견되었기에, 이런 증거에 기초해 그들이야말로 최초에 빈번하게 불을 사용한 인류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화로가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즉 난방용인지 조리용인지 또는 짐승의 습격을 막기 위해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음. 또 화로의 흔적이 있어도 그들이 동굴에 정주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음. 그러나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동굴에서 동물의 뼈가 발견되었다는 점. 그 뼈들은 네안데르탈인이 먹은 동굴의 찌꺼기라고 생각되는데, 주로 붉은 사슴, 가젤, 순록, 산토끼 등 중소형 동물이다. 그들은 중소형 동물을 대체 얼마나 먹었을까? 인골에 잔존하는 콜라겐 구성요소인 탄소나 질소의 비율을 측정해 음식물의 구성을 확정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그들의 육식비율을 구했더니 무려 80%에 이르는 높은 수치였다. 이것은 현재 북극권에서 주로 순록고기를 먹고 사는 라프인의 90%에 가깝다. 이렇게 높은 육식 비율이라면 네안데르탈인은 필시 유능한 사냥꾼이었을 것이다. 사실 평균키가 남성 167센티, 여성이 160센티의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뇌의 용량은 1450cc였다고 함. 요컨대 현재 일본인보다 크다
- 현생인류가 언제부터 불을 능동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사용하려면 나무를 모으거나 보존해야 했을 테고, 불을 계속 피우려면 신중함과 조심성이 필요. 즉 불을 관리하는 데는 우회적 행동이나 연기된 만족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고고학자 카트린 페를레는 불이 이용되는 데 필요한 조건은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정신적 진보라고 말한 것.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조직을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불의 관리, 즉 불의 지배는 인간진화의 발전과정과 같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불의 지배야말로 인간의 진화를 초래한 것. 이에 대해 하으츠블룸은 '불을 지배하는 능력은 특수한 사회적, 정신적, 육체적 특성의 동시 발전에 따라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 왜 야생동물은 불을 사용한, 즉 요리된 음식을 좋아할까? 그것은 그들이 고에너지 음식물을 직감적으로 인식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기 때문. 음식물은 대체로 요리를 하면 쓴맛이나 떫은 맛이 줄어들고 단맛이 증가. 즉 맛이 좋아짐. 그뿐 아니라 영장류는 음식물의 다양한 특성, 즉 까칠하고 끈적하고 기름기가 많은 따끈하고 차가운 것에 대해 직감적으로 반응하는 신경회로를 갖고 있다. 인간의 뇌가 그런 능력을 가졌따는 사실은 04년 처음 밝혀졌다. 즉 인류가 영장류와 같은 반응으로 날것보다는 요리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 고기에 대해 말하자면, 근섬유가 작은 고기가 더 부드럽다. 그래서 닭고기가 소고기보다 부드러운 것. 그러나 고기의 단단한 정도는 변화한다. 도살된 동물의 체내에 있는 글리코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으로 변하고, 그 변성작용의 결과로 고기가 부드러워짐. 며칠 지난 고기는 효소로 단백질의 일부가 파괴되기 때문에 더욱 부드러워 짐. 하지만 고기의 단단한 정도를 가장 잘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요리다. 그것은 고기를 단단하게 하는 결합조직에 열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 하지만 근섬유는 가열하면 딱딱해진다. 그렇다면 요리의 숙달정도가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랭엄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아주 부드러운 음식물을 식사에 도입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종은 소화의 중노동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에너지를 많이 절약할 수 있엇다. 몸이 해야 하는 일을 불이 대신해 준 것이다."
요컨대 요리는 칼로리의 원천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고, 요리한 것이 날것보다 우수한 이유다
- 불을 제어할 수 있게 되자 필연적 결과로 공동체가 통합되었다. 불을 관리하려면 일을 분담해야 했기 때문. 불이 중심기능을 하게 된 것은 조리에 사용되기 전의 일이고, 조리와는 관계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불에는 조리 외에도 사람들을 모으는 작용, 즉 밝기나 따뜻함이 있으며 유해한 동물이나 육식동물로부터 보호하는 작용이 있는 것이다.
- 불과 음식이 결부되었을 때 공동체 생활에 좋든 싫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중심이 생겨났다. 조리를 통해 음식물의 가치가 높아지자 음식물은 단순한 영양원이 아니었고, 훌륭한 가능성이 새로 열렸다. 식사는 희생의 공유, 친목, 의식의 장이 되고, 불이 가져오는 신비한 변화의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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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시장을 억압한 사회주의자
- 테어도어 루즈벨트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음. 그를 비판적으로 본 의견은 각각 촘스키, 하워드 진, 마크 트웨인, 네오콘(공화당 중심의 신보수주의자)들의 의견이다. 미국 신보수주의자들이 루즈벨트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트러스트를 금지시키는 반독점법을 만들었기 때문. 하지만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그를 싫어할 리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도전을 막아내고 자유시장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 영국 자본주의에 날개를 달아준 산업혁명의 상징이자 그 혁명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상징이 철도이고 토핌 햇 경이 그러한 철도를 대표하는 인물. 그래서 그의 공로를 인정한 왕실은 산업자본가들에게 기사작위를 내렸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나 비틀즈 멤버 폴 메카트니 같은 문화계 인물에게도 기사작위가 수여되기도 했다. 2016년 1월 영국 미러지에서는 비틀즈 멤버였던 링고스타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자는 노동당 대변인 마이클 더거의 주장과 함께 투표가 진행되었다. 링고스타는 토마스와 친구들의 애니메이션 첫번째 토마스 목소리 성우이기도 함. 백작이나 선원 존도 영국적 캐릭터로, 둘다 탐험과 여행을 좋아한다. 백작은 소도어 섬에 자산을 많이 소유한 영국 귀족임. 선원 존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인 답게 해군에서 퇴역한 이후에도 탐험정신을 잃지 않고 소도어 섬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로 다니는 캐릭터이다. 한마디로 토마스와 친구들에 나오는 주요인간 캐릭터들은 영국 산업혁명의 상징인 철도산업과 관계가 있거나 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영국 제국의 확산과 관련 있는 인물들. 철도회사 사장인 토핌 햇 경과 소도어 섬의 지주이자 자산가인 백작이 친구인 것은 우연이 아님. 영국 역사를 살펴보면 부르주아와 지주는 역사적 동맹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러한 전통이 자연스레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에도 드러난 것이다.
- 영국 부르주아는 프랑스혁명 때 귀족과 왕족을 단두대에서 죽였던 프랑스 부르주아와는 달리 왕실과 귀족이 지위를 보존시키고 그에 대한 대가로 정치, 경제, 사회적 주도권을 확보. 철도회사 사장인 토핌 햇 경이 기사작위를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영국적 상황 속에서 가능했던 것. 그리고 영국 시민혁명인 명예혁명이 지주, 자본가, 귀족의 타협에 의해 성사된 혁명이었듯이 토마스와 친구들에서도 귀족이자 지주인 백작과 귀족작위를 받은 철도회사 사장이 친구인 것은 그러한 역사가 반영된 것이다.
- '영국병'이란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60년대와 70년대 영국의 복지가 지나쳐서 경기침체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사용됨. 보수주의자들은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지속적으로 임금이 상승했고, 생산성이 저하되어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영국 경제의 특징을 고복지, 고비용, 저효율을 기반으로 하는 영국병으로 진단했고, 실제 영국 경제는 76년 IMF의 지원을 받는 상황까지 치달음. 이런 상황속에서 대처는 79년 집권하자마자 영국병을 치료하겠다며 여러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이런 정책을 대처리즘이라고 함. 대처리즘은 복지축소, 노조와 파업에 대한 강경대응, 재정치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완화와 경쟁촉진 등으로 구성됨. 일반적으로 대처리즘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내용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 대처에 대한 평가. 대처리즘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림. 먼저 긍정적 평가에 대해 살펴보자. 긍정론자들은 대처를 280년 동안 배출된 영국의 55명 수상 가운데 유일학 ~주의가 붙는 철의 여인으로 칭송. 대처리즘에 대한 긍정론자들이 대처를 칭찬하는 이유는 법과 원칙을 내세워 노조의 파압을 잠재웠다는 것. 과감한 규제철폐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켰으며, 긴축재정을 통한 물가인상 억제, 정부규모 축소, 실력 성과제도 도입 등을 통해 영국의 경제성장률을 플러스로 돌려놓았음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도 기여했다고 평가. 게다가 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의 국력을 과시했다는 점과, 각종 기업의 민영화와 감세를 단행했다는 점도 높이 산다. 대처의 정책중 가장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은 84년부터 1년간 이어진 광산 노조 파업에 대한 대응. 생산성이 낮은 탄광의 폐쇄발표, 1년간 석탄 생산량 65% 급감, 파업노조원과의 충돌로 경찰관 3500명 부상 등의 상황 속에서도 대처는 노조원 9000명을 연행하는 등의 강경정책을 실시하여 노조의 저항을 억눌렀다. 별다른 배경이 없는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대처에게 노동자들의 단결과 파업은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게으름뱅이들의 생떼로 보였을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 미국 대통령 레이건도 그녀와 비슷한 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제시했고, 이들의 이런 정책을 흔히 신자유주의라 부름
- 대처리즘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주로 복지정책의 후퇴에 대한 것이었다. 대처는 시장원리만을 강조하여 사회복지를 후퇴시킨. 그로 인해 부자와 빈자간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경쟁과 효율성은 증대됨. 그래서 영국을 황금만능주의의 무자비한 사회로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재임기간 동안 빈곤율이 약 2배로 증가했고, 지니계수가 79년 0.25에서 90년 0.34까지 증가. 게다가 광산 폐쇄, 각종 국영기업체 민영화 및 노동유연화 등을 통한 실업률 증가로 많은 가정이 해체되어 소위 대처세대라 불리는 10대들이 탄생. 즉,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흡연과 알콜에 의존하는 무기력한 청소년들을 증가시킴. 게다가 대처리즘의 성과라 칭송받는 경제성장의 경우도, 대처가 총리가 된 것은 79년이고 영국 경기가 회복된 것은 90년대 중반이므로 대처가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평가에는 무리가 있음. 그리고 경제성장의 성과는 금융업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인데, 그 이면에는 제조업의 몰락이 감추어져 있음. 실제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완전히 몰락한 상태임
-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은이 유럽에 쏟아져 오자 물가가 상승했는데, 이런 변화를 가격혁명이라고 함. 가격혁명 때문에 이윤율이 높아진 상업에 너도나도 뛰어들었고, 그로 인한 상업의 비약적 발전을 상업혁명이라 함. 신항로 개척으로 세계적 규모의 시장이 형성됨에 따라 상품의 대량생산을 추진하게 됨. 그래서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공장에서 상품을 대량생산하는 방식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것을 산업혁명이라 함. 이렇게 성장하게 된 신흥 상공업자인 부르주아가 자신들이 이윤추구에 방해가 되는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만들어낸 사건을 시민혁명이라 함.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침략하여 수탈을 일삼는 제국주의의 길에 들어섬. 다라서 아프리카 해안을 처음으로 항해했던 이름모를 이슬람 상인보다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오늘날 중앙 아메리카와 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은 에스파냐어를 쓰고,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이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이 중국으로부터 강탈한 마카오라는 도시가 존재하고 일본인들에게는 덴푸라와 빵이 전해졌던 것이다.
- 일본의 3대진미는 성게알전(우니), 숭어알젓(카라스미), 해삼창자젓(고노와타)을 꼽는다. 그런데 이 세가지 음식의 공통점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모두 젓갈이라는 것. 또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에도 막부)의 지배자인 쇼군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는 것. 냉장보관을 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젓갈류의 음식이 고급음식이었고, 당시 최고 진미는 당대 최고 지배자인 쇼군에게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랬던 스시가 오늘날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생선과 밥을 삭혀서 시큼한 맛을 내는 대신 식초를 뿌려 신맛을 내는 방식이 도입되었기 때문. 식품이 발효되어 곰삭은 신맛과 식초의 신맛은 분명히 다를 터인데, 왜 그런 방식을 채택했을까? 그 이유는 오랫동안 발효하는 과정을 기다릴 수 없는 사정이 생겼기 때문. 그 사정이란 일본의 경제성장과 인구증가, 특히 도시인구 증가로 인해 식료품 수요가 급증했고 전통적 스시 제조방식으로는 공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비싼 가격이 매겨질 수 밖에 없기 때문. 전통적 스시는 발효시키는 기간이 길 뿐만 아니라 귀중한 밥을 버려야 하는 음식이다. 따라서 도시의 서민들이 즐기기에는 너무 비싼 음식. 그래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서민들에게 스시를 제공하기 위해 발효기간을 생략하는 대신 발효된 맛을 흉내내기 위해 식초를 뿔니 밥 위에 생선을 얹어냈던 것. 이것이 스시가 슬로우푸드에서 패스트푸드로 변화하는 과정임
- 일본인들의 음식을 통한 근대화 노력의 결정판은 바로 돈가스. 일본의 왕이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까지 육식을 장려했지만 오랫동안 육식을 하지 않던 일본인들이 거부감 없이 육식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음식이 바로 돈가스임. 돈가스라는 단어는 영어의 포크 커틀릿에서 포크에 해당하는 돈, 커틀릿을 일본식으로 읽은 카츠레츠가 합쳐진 단어
-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무기가 DDT였다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무기는 정로환과 콩나물이었다. 어느 전장이나 병사들을 괴롭히는 질병이 있기 마련. 전쟁터의 질병은 굶주림과 비위생적 환경때문에 발생하는데, 대개는 깨끗하지 않은 물 때문에 발생하고 가장 흔한 병이 복통과 설사다. 그 점은 일본군이나 러시아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아무 대책이 없었떤 러시아군과는 달리 일본군에게는 대책이 있었는데 바로 정로환이다. 일본 군부는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약을 개발하여 병사들에게 매일 먹도록 했따. 그랬더니 배탈과 설사로 죽는 병사들의 숫자가 획기적으로 감소. 주성분이 크레오소트라서 크레오소트환으로 부르다가. 러일전쟁이후 정복할 정, 러시아 로, 약 환의 세글자를 조합하여 정로환이라 부름. 정로환이 유명해지며 여러 제약사들에서 만들었고, 72년에는 한국 동성제약에서도 만들기 시작. 어쨌든 정로환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러시아를 정복하는 약이란 의미로 사용됨. 이후 정로환은 중일전재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필수품을 사용되었다.
- 미쓰비시 광업이나 미쓰비시 중공업 못지 않은 전범기업이 있다. 니콘이다. 엄밀히 말하면 니콘의 전신인 일본광학공업이 문제다. 이 회사는 1차대전 중인 1917년 영구, 독일 등 유럽으로부터 광학병기 수입이 불가능해지자 잠망경, 탐조등용 반사경 등의 국산화를 위해 미쓰비시가 출자해서 만든 기업.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광학공업에서는 총 23000명의 노동자들이 쌍안경, 렌즈 잠망경, 조준경 등의 군수물자를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 미쓰비시 중공업이 일본 제국군대에 무기를 제공했고, 미쓰비시 광업이 그 무기를 작동시키고 군대와 장비를 제작, 운반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 반면 니콘의 전신 일본광학공업은 일본군이 사용할 무기에 눈을 달아준 셈. 그러다 종전 후 군수품 대신 카메라를 주력사업으로 하여 니콘 카메라를 내놓았다. 그런데 미쓰비시 그룹 내 다른 계열사는 물론이고 다른 기업들도 그랬고, 나치에게 협력했던 폭스바겐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들이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그 어떤 기업고 반성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그런데 2016년 3월 독일 자동차회사 BMW사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2차대전 당시 나치당에 군수물자를 납품하고 포로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것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한다'는 발표를 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BMW라는 브랜드는 역사적으로 명품이라 할 만하다.
- 영화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는 늘 마티니를 마심. 마티니는 진이나 보드카에 베르무트(와인과 브랜디를 섞은 술)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이다. 진의 알콜 농도가 대개 40도, 보드카는 45-50도. 여기세 첨가하는 베르무트도 평균 14도인 와인과 40도인 브랜디를 섞은 술이므로 강력한 폭탄주인 셈. 그래서인지 마티니를 좋아한 유명인들은 다들 강력한 인생을 살았다. 늘 임무수행의 중압감 속에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스파이 007은 물론, 2차대전을 이끈 미국 루즈벨트나 영국 수상 처칠 등이 즐겨 마심. 또한 1차대전, 에스파냐 내전, 2차대전에 참전했던 미국 소설가 헤밍웨이도 인생의 주요 기간을 폭탄과 함께 지냈다. 그런 의미에서 마티니는 전쟁같은 삶에 어울리는 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 마티니의 주재료인 진은 40도짜리 독주이므로 그 자체가 강력한 술이다. 그래서인지 진은 가장 강력한 술을 요구하던 시대에 유행. 진은 산업혁명기 영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호식품의 지위를 넘어 생명수 수준의 술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진은 값싸게 취할 수 있는 고마운 술이기 때문. 진을 파는 주점은 주로 빈민가에 많았고 주점에는 진에 취해 쓰러지면 자고 갈 방도 제공했다. 그나마 그런 방은 항상 만원이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가가 마차에 치어 죽거나 하수구에 빠져죽는 사람도 속출. 주점 간판에는 "1페니로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만취할 수 있다"는 광고도 등장. 당시 한 문학가는 진이 빈민들의 주식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 한국에 N포세대, 일본에 사토리 세대가 있다면 타이완에는 딸기 세대가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의미의 3포세대라는 말에서 시작. 여기에 집과 인간관계가 추가된 5포세대, 꿈과 희망이 추가되어 7포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하다가, 포기할 것이 너무 많아 N포세대까지 확대. 일본 사토리세대에서 사토리는 깨달음, 득도란 의미. 즉 득도한 것처럼 출세, 성공, 심지어 자동차, 해외여행도 포기한 80년대 후반 이후 출생한 세대를 말함. 타이와 딸기세대는 딸기가 물러서 잘 상하는 것에 비휴해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여 사회나 정치에 무관심한 81년 이후 출생한 세대를 가리킴. 이런 용어를 보면 동아시아 젊은이들은 공통적으로 기성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던 출세나 성공보다 자기 만족적인 것을 추구.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의지력이 약해 쉽게 포기하고, 자신들을 힘들게 만드는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세대로 비춰짐.
- 아류 제국주의와 촌놈들의 제국주의. 박노자는 14년 1월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친미성향이 거의 내면화되어 있는 한국 지배자들은 각종 자유무역협정으로 미국 등 중심부 자본에 국내 고수익 투자기회를 제공해 가면서 미국 주도의 신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승해 일종의 아류 제국으로서 농지, 에너지 약탈부터 저임금 노동착취까지 세계의 주변부에서 또 하나의 작은 식민모국으로 군림'하고 있다며 한국의 그러한 행태를 아류제국주의로 규정. 한편 우석훈은 저서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이제 한국 자본주의는 내적 불균형과 모순의 악화로 필히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북한을 일종의 내부 식민지화하면서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의 길로 들어서는 중국의 제국화 및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 우석훈이 한국을 촌놈들의 제국주의라 한 것은 미국처럼 대놓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정권을 붕괴시키지는 못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편승한 작은 제국으로의 모습을 촌스럽다 표현한 것.
- 휴대폰과 티셔츠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대표하는 상품. 티셔츠가 60-70년대 섬유산업으로 대표되는 노동집약적 제조업 육성 및 수출증대를 통해 성장한 과거 한국경제를 대표한다면, 휴대폰은 오늘날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대표 IT상품. 과거 노동집약적 제조업 중심의 성장이 독재정권의 강력한 노동탄압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오늘날 민주화가 진행된 한국에서 그런 방식은 불가능해짐. 그래서 선택된 곳들 중 하나가 바로 캄보디아. 캄보디아에는 여전히 강력한 개발독재를 추진할 정부가 존재하기 때문. 어떻게 보면 오늘날 캄보디아인들은 과거 한국인들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휴대폰의 경우 60-70년대 세계의 하청공장이었던 한국이 오늘날에는 세계에 하청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콩고나 브라질에서 한국의 휴대폰 없체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경제는 하청 국가에서 원청국가로 성장했을지 모르나 사회적, 윤리적 책임감과 태도는 그 위상에 걸맞지 않는 수준임을 보여줌.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개발독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폐해는 한국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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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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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조건

역사 2018. 8. 8. 08:21

- 생물학적 순종이 변화하는 환경에 매우 허약한 것처럼 문화적으로도 폐쇄적인 순혈주의는 환경변화에 취약.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 더구나 다양한 생각이 끼여들 여지가 없어 쉽게 극단주의로 빠짐. 다른 생각이라는 이름의 제어장치가 없는 자동차인 셈이다. 그래서 급속도로 몰락한 제국들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짐. 멀리갈 필요도 없이 20세기 초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제국이나 나치의 제3제국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스페인도 순혈주읭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1. 로마시민권
- 훗날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로마의 특성을 이야기했다. "로마제국의 건설과 로마시민들의 며엉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가 사비니인들의 사례를 통해 적들을 로마시민으로 받아들여서라도 나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 키케로의 말처럼 통합노선은 이후에도 계속됨. 새로운 부족이 로마에 합병될 때마다 귀족들은 로마귀족이 되어 원로원에 의석을 보장받았고 평민들은 로마시민이 되어 투표권을 부여받음. 따라서 후대에 로마를 이끈 사람들은 대부분 오리지널한 로마인이 아니다. 로마의 제1의 슈퍼스타 카이사르를 배출한 율리우스 가문은 알비롱가 출신이며,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를 통치한 클라우디우스 가무은 건국 초기에 5천명의 일족을 이끌고 집단이민을 온 사람들이다. 아마 20세기 초강대국인 미국의 민족구성이 고대 로마의 민족구성과 가장 유사할 것이다.
- 폐쇄적인 아테네도 처음부터 외국인에게 폐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성장기의 아테네는 외국인들에게 무척 개방적인 국가였다. 아테네 발전의 기초를 닦은 솔론의 시대에는 아테네에 거주하는 재능있는 외국인들에게 시민권을 나누어주어서 아테네에 동화시키고자 노력. 발전의 동력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솔론의 시대 이후 등장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더욱 개방적인 정책으로 아테네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다. 문제는 아테네가 패권국가로 성장한 뒤에 발생.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패권국가의 시민은 상당한 이권을 가짐. 경제적으로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동맹국의 시민들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이렇게 시민권의 가치가 올라가면 초기에 인심좋게 시민권을 나누어주던 태도가 돌변하게 마련. 시민권이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최종적으로는 순수한 아테네인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시민구너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 사실 아테네의 시민권을 이 정도로 폐쇄적인 상태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페리클레스였다. 그러니 페리클레스가 만년에 겪은 곤욕은 자업자득인 셈. 아테네가 시민권문제에서만 폐쇄적으로 굴었으며 그나마 나았을텐데 아테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갔다. 동맹국의 시민들은 2등국민 취급하기 시작. 사실 폐쇄적인 시민권과 동맹국에 대한 오만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등장할 수밖에 없다. 시민권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논리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순수하고 우월한 존재인데 불순물이 끼어드는 게 싫다는 감정이 폐쇄적 시민권 정책을 만드는 것. 이렇게 스스로를 우월한 존재라고 믿고 이방인을 열등한 불순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이방인들에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내의 동맹국들에게 말 그대로 지배자로 굴기 시작. 동맹의 돈을 횡령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테네에 건물을 짓고, 아테네의 배를 만들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 그리고 동맹국들이 조금이라도 반발할 조짐을 보이면 가차없이 응징을 가했다. 이렇게 되면 동맹국들 역시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아테네가 강하니까 아테네 밑에 있지만 언제든지 아테네가 약해지기만 하면 바로 뒤통수를 치겠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지는 것이다.
- 개방성은 위기의 순간에 보답을 받았다. 한니발에 의해 군사적으로 완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국들은 로마를 버리지 않았던 것. 사실 이들 동맹국들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미 로마 시민권을 획득해서 로마인으로 살고 있었다. 삼니움족 출신 집정관인 오타릴리우스 크라수스를 생각해보라. 그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로마라는 공동체 안에서 아주 흔한 예에 불과했다. 동맹국들에게 로마는 이미 자기자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였다. 남이 아닌것이다. 로마는 그들에게 이미 조국이었다.
2. 세계제국 몽골
- 몽골군이 가진 잔인하고 야만적 이미지 덕에 우리는 몽골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몽골군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일단 몽골군은 숫자가 너무 적었다. 전체를 다 모아야 겨우 10만이다. 이 숫자를 갖고 세계 모든 나라와 싸운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게 돌격하다가 희생이 커지면 세계정복은 오히려 불가능했다. 따라서 몽골군은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음. 결정적 순간이 아니면 정면공격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강력한 관통력을 가진 활을 이용했다. 초원에서의 사냥법을 그대로 응용하여 적군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적중률 높은 화살공격을 퍼부었따. 이 공격으로 적군의 기가 꺾이고 혼란에 빠지면 유목민의 특유의 곡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일단 기가 꺾인 군대는 더이상 군대가 아니다.
-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킴. 순수한 몽골인만의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다. 몽골군의 가장 주요한 주력군은 몽골초원의 경기병이다. 몽골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하는 이들은 말 그대로 타고난 기병이다. 당연히 기마술이 뛰어나고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다룬다. 더군다나 최소한의 보급만으로도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능력 덕에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 없었따.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이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 몽골군이 아무런 보급부대도 없이 세상 끝까지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의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능력이 결정적 역할을 함. 이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이들이 경기병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약점. 경기병이라는 단어가 알려주는 것처럼 이들은 거의 갑옷을 걸치지 않음.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가죽을 덧댄 매우 가벼운 갑옷을 걸쳤다.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입고, 가벼운 장비만을 걸치는 것이다. 그래야 말도 지치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갑옷을 거의 걸치지 않는다는 것은 방어력이 약하다는 의미. 견고한 방법을 이루고 있는 보병의 밀집부대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이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가능한 정면충돌을 피했따. 대신 활을 이용했는데 몽골군은 관통력이 높은 매우 강력한 활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공격을 회피하는 그들의 약점을 어느정도 커버가능.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약점을 감출 수 있는 전술도 개발해냈다. 그들이 사냥터에서 항상 사용하는 방식을 전쟁터로 끌어들인 전술이었다. 우선 사냥터에서 짐승을 몰듯이 적군을 몰아 원형으로 둘러싼다. 몽골군은 적에 비해 월등한 기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적군은 사냥원진을 활용한 몽골군의 포위망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곤 엄청난 숫자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몽골의 활은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복합재질로 되어 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었다. 따라서 사거리가 매우 길고 관통력이 높았따. 따라서 이 정도 공격만으로도 상당한 살상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살 공격의 심리적 효과였다.
- 몽골인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몽골은 피정복민들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 또한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몽골은 오랫동안 유목민의 생활을 했고, 정주사회의 전문가들을 갖고 있었으나 이들에게 강제로 일하게 하지는 않음. 오히려 대우도 좋았고 존경도 받았기에 외부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섬. 다시 말해 이들 전문가는 몽골에 융합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음
-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초원의 기마병들은 단 한번도 양자강을 넘지 못했다. 결국 쿠빌라이칸은 지지부진한 남송전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결정. 자신의 최대 강점이던 기병중심의 기동전을 포기하기로 함. 대신 보병과 수군이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이런 유연성은 사실 역사상 쉽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거의 전 세계를 정복할 정도로 훌륭한 효과를 보인 전투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전투방식을 배운다는 것은 앞으로의 역사적 사례에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성장기 몽골제국의 지도자들이 가진 사고의 유연성은 실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보병과 수군이 전투의 중심이 됨에 따라 기존에 몽골이 정복한 다양한 지역의 군대가 몽골군에 새로운 힘이 되었다. 산성을 중심으로 한 전투에 익숙한 북중국의 옛 금나라 군대와 한족군대, 그리고 고려군이 몽골군의 전면에 등장했고 한족과 고려군이 주축이 되어 대규모 수군이 건설되기 시작. 여기에 지난 번 서남아 원정에서 몽골제국에 포함된 페르시아 기술자들이 새로운 투석기를 만들어 몽골군에게 제공했다. 이슬람교도인 알라웃딘과 이스마일이 만들었기 때문에 회회포라고 불린 이 투석기는 밧줄이나 나무의 복원력을 이용하는 기존의 투석기와는 달리 평형추의 낙하 회전력을 이용해 돌을 발사했다. 투석기 팔 반대편에 무거운 추를 달고 여러 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줄을 감아 투석기 팔을 내린 후, 돌을 싣고 순간적으로 줄을 풀면 추가 떨어지면서 투석기 팔과 연결된 대를 회전시켜 돌을 날려보냈다. 보통 50~100킬로의 돌을 300미터까지 날렸다고 한다
- 몽골의 통신망인 잠이 만들어지자 갑자기 중국의 의사가 바그다드까지 이동했다. 베네치아 상인이 중국에 갔다. 한국의 종이가 이슬람 도시에서 사용되었다. 이슬람 강철이 중국에서 사용되었따. 갑자기 사람과 사상, 의약품 그리고 재화가 이곳저곳으로 이동. 세계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만 해도 아시아와 유럽의 직접적 접촉은 없었다. 재화가 한 도시에서 다른 곳으로 매우 느리게 이동했다. 하지만 칭기즈칸 시대 이후, 유럽과 아시아는 계속 접촉을 이어감. 사상과 재화, 의약품, 그리고 종교가 끊임없이 이동했다. 이는 근대 세계 시스템의 토대였다.
- 결국 유럽인이 몽골에게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셈. 몽골에 세금을 바칠 필요도 없었고 약탈당하지도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때 시작된 모든 무역으로 이익을 얻음. 베네치아의 폴로 가문처럼 중국에 가서 새로운 사상을 가져올 수 있었음. 곧 유럽인들은 유럽의 놀라운 새 재화와 사상을 갖게 됨. 일례로 인쇄기가 있다. 유럽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남. 화약을 가져왔고 전에 없던 많은 것들을 갖게 됨. 유럽은 문명의 가장자리에 있던 작은 지역에서 문명의 한가운데로 나오게 됨
- 현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흥미로운 영향을 준 제국은 몽골. 몽골은 13~14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통신공간을 만들었음. 이 공간을 통해 통치술이 전해졌고 많은 다른 것들도 들어옴. 몽골제국에 의해 지금의 중동 혹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이 연결되었다. 과학과 의약품, 지도제작, 요리가 소통되기 시작. 몽골의 거대한 제국 공간의 창조로 거대한 문화의 결합이 벌어짐
3. 대영제국의 탄생
- 중세 이후 대항해 시대가 찾아오자 유럽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됨. 대서양을 통해 먼 바다로 진출하면서 먼 바다에도 적합한 배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 갤리선은 당연히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았다. 우선 인간의 힘으로 항해를 하는 배는 육지에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 한 척의 갤리선, 그것도 빠른 기동이 필요한 전투용 갤리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숫자의 노잡이가 필요. 그런데 이들은 인간이므로 당연히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식량과 식수를 항상 공급해줘야 했다. 갤리선 한 척을 움직이는 데는 일종의 연료처럼 엄청난 양의 식량과 식수가 필요. 따라서 갤리선이 육지를 벗어나 항해할 수 있는 거리는 대체로 육지에서 2~3일 거리가 고작이었다.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를 벗어나면 갤리선은 사실상 무용지물인 셈이었다. 반면 범선은 소수의 인원만으로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에 원거리 항해에 적합했다. 결국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범선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대항해 시대의 선발주자로 나선 범선을 우리는 카략선이라 부름. 카략선이 이룬 진보의 가장 중요한 점은 돛대가 많아진 것이다. 기존 범선은 대부분 하나의 사각돛에 의존해서 항해한 반면 카략선은 세개의 돛대를 달고 바다로 나섬. 당연히 빠른 항해가 가능했고 범선의 크기도 더 커지기 시작. 그런데 카략선은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배에 많은 짐을 싣기위해 배의 앞부분과 꼬리부분을 많이 높여 놓은 것. 이렇게 되면 무게 중심이 높아지기 때문에 급격한 회전가튼 빠른 기동은 불가능해짐. 하지만 전투중에는 이런 빠른 기동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무리해서 급회전을 하다보면 중심을 잃고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자랑하던 메리로즈호도 1545년 프랑스 함대와의 전투중에 뒤집어져서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이래서는 전투용으로 사용되기에 아직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카략선이 등장한 뒤에도 전투용 함선으로 갤리선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카략선보다 진보된 갈레온선이 등장하자 해전의 중심은 급격히 범선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갈레온 선은 배의 꼬리부분인 선미는 아직 높은 편이지만 앞머리인 선수부분이 매우 낮아졌고 이에 따라 배의 안정성이 높아짐. 안정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돛대도 더 높고 크게 세울 수 있었는데 당연히 돛도 더 많이 달 수 있게 됨. 돛이 많아지면 추진력이 높아져 배가 빨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더불어 배의 앞부분이 낮아지면서 전반적으로 날렵해진 점도 속도향상에 기여. 갈레온의 등장과 함께 범선은 전장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 이 갈레온을 한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 바로 존 호킨스였다. 존 호킨스는 새로운 배를 개발하면서 그때까지의 주먹구구식 건조방식을 버리기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했다. 바로 설계도를 그린 것이다. 그 당시 호킨스가 그린 설계도는 현재 캠브리지 대에 남아 있다. 호킨스가 그린 설계도를 보면 그가 지금까지의 주먹구구식 함선 설계방식을 버리고 기하학에 입각해서 완전히 새로운 배를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영국전함은 스페인 전함보다 더 빨랐으며, 중무장도 더 잘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거대함선은 대부분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무장상선이었따. 이들은 대부분 돈을 받고 화물을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원양항해로 나르기 위해 설계됨. 반면 영국의 교역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고, 사실상 해적행위를 주로 했다. 영국 함선들은 빠르긴 했으나 화물을 싣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페인의 함선이 더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을 놓고 봤을 때, 영국 함선들이 훨씬 적합했다. 1573년 새로운 설계에 기반한 첫번째 배 드레드 노트 호가 건조된 이후 1588년까지 영국은 총 18청긔 레이스 빌트 갈레온을 보유하게 되었고, 16척의 왕실 갈레온도 거의 동급의 성능을 가질 수 있도록 개조됨. 구식으로 설계된 스페인 함선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혁신적 함대가 대서양에 등장한 것이다.
- 영국 해군이라고 해서 배위에 보병을 태우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님. 영국이 보병을 태우지 않은 것은 영국에 보병다운 보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우고 싶어도 태울 사람이 없었던 셈. 하지만 결핍은 혁신의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영국해군은 어쩌면 결정적 약점이 될 수도 있었던 보병부족이라는 상황을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아예 해전방식을 바꾸는 것.
- 영국 지휘관들이 준비한 방식은 적 보병이 아예 건너오지 못하도록 포격전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고 새로운 것인 만큼 실제로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보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국으로서는 이게 유일한 방식이기도 했다.
- 칼레에서 벌어진 스페인과 영국의 대결에서 영국은 어떻게 승리했을까? 간단히 말해 기술력에서 앞섰고 혁신을 빠르게 받아들였기 때문. 우선 영국의 배는 스페인 배보다 빠르고 회전능력도 뛰어났다. 게다가 화포를 많이 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화력에서도 스페인 배를 압도했따. 그 위에 대포산업에서도 영국은 스페인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영국산 주철대포는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청동대포를 대체할 만한 성능을 갖고 있었고 이 저렴한 대포를 대량 생산한 덕분에 스페인 배에 비해 몇배나 많은 대포로 무장할 수 있었다. 해전에 대한 기본개념도 스페인은 구태의연한 반면, 영국은 혁신적이었음. 스페인은 일단 해전이 벌어지면 첫번째 대포를 발사한 후 곧바로 화승총이나 창을 잡고 위로 올라간다는 전술을 갖고 있었다. 적의 배로 건너가 육박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국은 첫발을 발사한 후에도 연속해서 포탄을 사격했따. 스페인군의 목적은 적을 죽이는 것이지만 영국군의 목적은 적의 배를 격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 어떤 전술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는 실제 전투에서 증명됨.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런 영국 해군의 혁신이 오히려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영국 해군이 보병이 적함에 뛰어드는 전술을 적용하지 않고 포격전에 치중했던 것은 애초에 영국에 믿을 만한 보병이 없었기 때문. 주철대포를 개발한 것도 청동대포를 만들만한 자원이 부족하고 재정도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 반면 스페인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혁신의 기회를 놓칠 수 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보병의 위력을 지키기 위해 포격전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무관심했고 대포의 개발에도 덜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혁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스페인 함대는 레판토 해전의 빛나는 승리 이후 불과 17년 만에 낡은 유물로 전락해 버린 것. 자신이 이미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낡은 사고를 비웃는 것처럼 혁신의 속도는 항상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 스페인의 종교적 불관용이 미친 영향도 놓쳐서는 안된다. 스페인도 주철대포의 효용성에 주목하고 주철대포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 하지만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주는 공포 때문에 기술자들은 한 사람도 스페인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혈통과 순수성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새로운 기술의 결합이란 양립하기 어려운 법이다. 결국 칼레 해전은 해전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음. 영국이 새롭게 선보인 전술의 효과가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다투어 영국식 해전기술을 받아들였다.
- 위대한 영웅인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최고의 승리를 영국에 안겨줌. 그리고 시대를 바꿔 넬슨의 트라팔가 해전으로 국가적 신화가 교체됨. 지금 영국의 시 중심뿐만 아니라 실제 모든 영어권 국가에 가면, 트라팔가 광장이 있다. 이렇듯 이 이야기는 영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줌. 1588년 이후 영국은 위대하고 강력한 해상국가가 됨.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믿는다. 백년 동안 스스로에게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줌. 그리고 드디어 이야기가 현실이 됨. 1714년 영국은 매우 뛰어난 해군력을 갖게 됨. 1588년이 아니다. 해상을 장악하는 데 120년이 걸렸따. 스스로에게 계속 이야기했기 때문. 계속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 세계를 보는 방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이루어냈다. 무적함대에 대한 승리는 영국이 위대한 해상국가라는 것을 증명.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해석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신념이다.
4.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
- 보통 마녀사냥이라 종교재판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 그러니까 14세기 이전에 주로 횡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 오히려 근대국가가 성립한 15세기 이후에 더욱 기승을 부린 것이 바로 종교재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세는 카톨릭이라는 단일한 이념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사실 사냥감을 찾기가 더 어려웠음. 하지만 15세기 이후 유럽이 확장을 시작하면서 유럽 내부에 이질적인 분자들 그러니까 무슬림이나 유대인 등이 늘어가자 오히려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냥해야 할 이질분자들을 쉽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게 됨
- 종교적 관용을 독립의 명분으로 삼자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소수자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듬. 특히 유대인들이 대거 북부 네덜란드로 몰려들기 시작. 원래 유럽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스페인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알함브라 칙령으로 스페인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포르투갈로 이주. 그런데 포르투갈에까지 스페인 종교재판의 마수가 뻗어오자 결국 포르투갈조차 떠난 유대인들은 새롭게 부상한느 상업의 중심지이자 상대적으로 종교적 문제에 관대했던 저지대 국가로 옮김. 그중에서도 암스테르담에 앞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앤트워프에는 경제력과 기술력을 함께 갖춘 유대인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펠리페 2세의 종교탄압이 시작되자 앤트워프도 더이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1576년 벌어진 스페인군의 앤트워프 약탈 사건은 저지대 국가의 남부지역이 더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종교적 관용을 내건 네덜란드 북부 7개주뿐이었다. 당연히 대규모 이주가 시작됨. 유대인뿐 아니라 탄압을 두려워한 신교도들 역시 북부 네덜란드로의 이주대열에 합류. 결국 1560년대부터 1589년까지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 남부지역 인구는 급격히 감소. 앤트워프의 경우 8만 5천명에서 4만 2천명으로 감소. 공업중심지였던 겐트와 브뤼주 또한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함. 반대로 네덜란드 북부의 암스테르담과 레이덴 혹은 하를렘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함. 종교적 자유가 이민자들을 네덜란드 북부로 이끈 것이다. 1570년부터 1670년 사이 자유의 땅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명에서 20만명으로 증가. 레이덴 인구는 1만 5천명에서 7만 2천명으로 증가
-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 혹은 이단자들을 빠르게 포용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가 열림. 단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네덜란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우선 바다에서 시작됨. 조선업과 해운업이 먼저 네덜란드의 번영을 이끌기 시작. 엄청난 경쟁력을 바탕으로 유럽 해운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주민들과 함께 새로 유입된 선박건조기술을 활용해 당시로서는 파격적 범선을 만들어냄. 경제적이고 속도가 빠른 플류트 선이다.
- 중세시대 유대인들이 담당했던 역할 중 하나는 돈의 관리. 유대인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대부업과 군수품을 제공하는 데 특출한 능력을 보임. 유대인들이 떠나고, 대제국이 된 스페인은 당시 필요했던 돈을 모으고, 대출받고, 지출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다량의 은이 낭비되었따. 능력있는 사람들의 부재가 이것의 부분적 원인이었다. 스페인의 재정난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인데, 스페인의 상황은 17세기 초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더욱 심각해진다. 네덜란드에서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을 포함하여 유럽내에서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기에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됨.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만들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스페인의 영향력을 유지시키는 것 또한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 1964년 미국, 미시시피 자유여름
- 미국으로 이민 온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은 노동의 소중함을 알고, 근면을 사랑했을까? 그리고 씨앗과 농기구를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기 위해 왔을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에는 스페인 이민자들과 똑같이 싸워서 빼앗기 위해 이민을 왔다. 당연히 씨앗이나 농기구 따위는 가져오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이 도착한 땅에는 잉카나 아즈텍처럼 세련된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미국에 이민 온 이민자들은 매우 희박한 인구밀도를 가진 미개발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나마 적은 수의 인디언들도 유럽인들이 탐낼만한 것은 가진게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빼앗아 먹을 게 없는 땅이었다. 총과 칼을 먹을수는 없기 때문. 그렇게 몇차례의 이민자들이 몰살당한 후에야 청교도 이민자들은 이 땅에서 일해야만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씨앗과 농기구를 가진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민자들이 새로 개척해야 하는 땅이었으므로 다행히 착취적인 시스템이 구축돌 여지가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에는 이미 조직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국가기구 위에 빨대를 꼽고 빨아먹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하지만 북미는 이런 빨대를 꼽을 만한 곳이 전무했다. 더군다나 땅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넓은 데 비해 인구밀도가 매우 희박했기 때문에 유럽 각지로부터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이 이민자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북미 대륙에서 대체로 환영받을 수 밖에 없었따.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종교성 순수성 따위를 지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독립이전부터 종교적으로 구대륙의 어떠한 나라에 비해서도 관용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1789년의 독립국가 건설은 이러한 종교적 관용을 국가 원칙으로 만들었다.
- 종교적 자유가 네덜란드에 번영의 기반을 만들어준 것처럼 미국에서도 종교적 관용이 미국의 발전에 원동력이 됨. 유럽 각지에서 최신기술을 가진 숙련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유럽각국도 가만히 앉아서 두뇌 유출을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신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의 해외이주를 막는 법안들이 속속 만들어졌고 심하면 반역죄로 다스렸다. 하지만 금지법안만으로는 인력 유출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미국은 유럽보다 인력이 부족했기에 임금이 훨씬 높았고 신개척지라 기회가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종교나 민족따위를 따지지 않았다. 이민자들에 대한 입국제한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따. 국경선은 말 그대로 누구든지 들어오세요라며 그냥 열려 있었다. 19세기 초반에만 250만 명이 자국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미국의 인구는 순식간에 2-3배로 증가. 하지만 여전히 인구는 부족했고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서부개척이 본격화되자 인력 부족은 더 심각해짐. 아니 이민을 통한 폭발적 인구증가 없이는 서부개척 자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숙련 노동자가 아니라 단순 노동자들도 대거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세대가 아니라 이미 당대에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세대가 아니라 이미 당대에 미국사회의 주류에 편입해서 성공신화를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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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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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역사

역사 2018. 5. 6. 10:10
- 유럽에서 남성복식이 여성의 복식에 비해 훨씬 간소하고 저렴해진 것은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 1700년경만 해도 귀족을 제외한 중류 이하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오히려 두배정도 옷을 많이 갖고 있었고, 그 가치도 여성들이 소장한 옷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이 되면 모든 계층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옷을 소장하기 시작. 이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적게는 5배에서 많게는 10배가 넘는 옷값을 지출하게 됨
-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수수한 옷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고 호화롭게 치장한, 그런 옷이 잘 어울리는 연약한 존재이기를 요구. 왜 그랬을까? 17세기 중반이후 유럽은 간헐적 절대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장세로 돌아섰고,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 이 시기 산업은 해외교역보다 국내소비의 확장에 기대어 돌아가던 상태였다. 경제의 큰 축을 이루던 직물산업은 18세기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상태. 한마디로 물건은 넘쳐났고, 경제는 돌아가야 했고, 그 한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해가고 있었다. 남성들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아내나 딸, 연인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금전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학자는 소스타인 베블런
- 버나드 맨더빌의 논고를 필두로 악덕으로 규정되던 사치가 공익에 기여한다는 사상이 제기되기 시작. 맨더빌은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런던에서 개업의로 지내면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1723년에 출판한 꿀벌의 우화는 애덤스미스 등 영국과 유럽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침. 꿀벌의 우화는 사치옹호론, 자선학교 유해론, 자유방임론 등을 주창한 글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사치를 악덕으로 폄하하는 당시의 인식을 위선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 그는 사람이 사는 데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것을 모두 사치라고 규정한다면 사치가 아닌 것은 세상에서 찾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그런 사치로 인해 경제가 돌아가므로 절약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것은 원칙적으로 모순이라고 지적. 맨더빌이 보기에 사치가 탐욕과 약탈을 부추긴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탐욕과 약탈은 실제로는 "남성이 지배하는 정부 탓이며 나쁜 정치 때문"이었기 때문. 그의 발언은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전통적 관념에 선을 긋는 일대 선언이었다. 그 발언으로 인해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오랜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사치를 악덕으로 몰아갔던 사치논쟁이 점차 안락함과 편리함 쾌락, 사교성, 취향, 심미안과 세련미 등에 대한 논의로 흘러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치논쟁에서 새롭게 나타난 논의들은 근대성 논쟁에서 다루는 수많은 화두를 이미 의제로 부각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맨더빌의 일갈이 나온 후 3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수많은 근대성 논쟁과 탈근대 논의를 거친 오늘까지도 여성의 드레스는 여전히 화려한 데 비해 남성의 턱시도는 단순하다는 사실이다.
- 유럽 엘리트들은 도자기 같은 중국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중국 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학자 안토니 파그덴은 타 문화권의 물건을 애호하는 현상이 타자를 소유하가조 하는 욕구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던 중국도자기의 물질적 가치 뒤에는 중국문화가 표상하는 상징가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일은 말콤 워터스의 주장처러 단순히 물질가치만이 아니라 상징가치 형태로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였다. 중국 도자기를 사들이고 전시하는 일은 유럽의 지배계급에게 특권에 걸맞은 행동과 미덕을 실천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됨. 그런데 상업의 발달로 인해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견고한 엘리트 장벽이 점차 허물어지자 지위상승 욕구에 불타는 중간계층이 상류층의 소비행위를 따라하기 시작. 이제 중간계층에서도 중국 도자기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생겨남. 그들은 소박하나마 선반에 중국도자기를 올려놓고 바라보며 만족해했다.
- 비누가 가장 제국주의적 상품으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값이 싸고 크기가 작아서 운반이 용이했을 뿐 아니라, 진보와 위생이라는 가치 아래 제국주의적 강압적 이미지도 희석할 수 있었기 때문. 그래서인지 청결과 위생관리를 위한 상품들의 광고는 종종 극단적으로 인종차별적이거나 국수주의적 양상을 띤다. 1891년 물에 뜨는 비누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세운 아이보리 비누광고에는 개울가에서 한 흑인 어린이가 아이보리 비누로 돛단배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의 표정에는 문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데, 만약 광고의 등장인물이 백인어린이여도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 위생과 청결에 대한 강조는 서양인이 생각하는 자연스런 상태를 아프리카인들에게 이식하려는 것.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청결개념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더럽고 냄새나는 야만인으로 인식해야지만 비누같은 문명세계의 물건에 대한 수요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 이런 측면에서 비누는 제국주의적 상품의 선봉에서 쐐기돌이나 마찬가지다. 비누가 아프리카에서 필수품으로 자리잡는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단순한 피식민지인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자들의 장기적 기획에 부응할 소비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열린 광고 컨벤션에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치약이나 비누를 파는 것이 아니고 이를 닦고, 몸을 씻는 새로운 방식을 파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하는 방법을 파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방식이란 결국 치약이나 비누같은 새로운 물건을 이용하는 방식을 말함. 이렇게 치약과 비누를 사용해본 사람은 가글액과 치실은 물론 제모제에서 탈취제에 이르기까지 향후 수없이 개발될 상품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는 셈이었다.
- 1885년 프렌치 와인 코카라는 이름의 강장제로 상표등록을 했던 코카콜라는 알콜 성분이 문제가 되자 와인대신 설탕시럽을 넣어 1886년 코카콜라로 재탄생. 음료수로 상품화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약 대용으로 소비됨. 1890년대 광고에서도 여전히 이상적인 자양강장제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 18세기 장터에서 구경꾼들은 돌팔이 의사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려 필요하지도 않은 강장제를 구매. 19세기에 본격화된 약광고는 멀쩡한 신체상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만들어냄. 아파서 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약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 것. 오늘날에도 의료시장은 의료상품 및 서비스의 공급과 이에 대한 소비 욕망인 수요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결국 약, 건강식품, 건강보조기구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육체는 거대한 소비의 장이 되어버림. 물질적 신체와 의약품, 그리고 비물질적인 욕망은 서로 뒤엉켜 변주하며 새로운 사회적 기준과 행위를 만들어낸다. 비아그라가 출시된 후 성적 능력의 새로운 척도가 나타났다든가, 사회적 압력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성형수술을 하는 세태나, 친구들과 단체로 목욕탕에서 마치 놀이처럼 눈썹문신을 받는 사례들을 생각해보라. 여기서 나타나는 욕망, 압력, 행위 들은 생리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질병과 치료, 심지어 약의효과도 물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으로, 이 또한 인문학적 시선으로 봐야 한다.
- 미국에서는 19세기 말에야 에이본 레이디가 등장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여성 방문판매원이 활동. 숙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화장품만을 취급하는 여성 방물장수 매분구의 존재가 나타남. 혹자는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이 집안의 여성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존재였다고 평가. 1962년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화장품 방문판매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고객의 대부분은 주로 전업주부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 화장품 전체 매출의 90% 이상이 방문판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케팅 연구자들은 이런 방문판매의 성공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 무엇보다 당시 화장품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부족했던 소비자들에게 판매원들이 직접 방문해 제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 주효. 다르게 말하면 판매원들의 수준이 높았고 훈련도 잘 이루어져다는 뜻. 또한 상대적으로 좁은 소비자 커뮤니티 안에서의 경쟁심도 판매율 상승의 동인. 즉, 이웃이나 친구가 샀으므로 덩달아 구매하거나 과시적 욕구에서 더 비싼 것을, 혹은 더 많이 사고자 하는 도익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미용에 대한 전반적인 상담을 개인적 차원에서 받을 수 있고, 다양한 견본품 제공이나 마사지 서비스 등으로 소비자가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방문판매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요인이었다.
- 베블런은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습성을 갖게 된다고 지적. 그래서 산업적으로 발달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정생활에 대해 공개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생겨남.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상류층 사이에는 프라이버시 개념과 과묵의 습관이 필수적 예법으로 자리잡게 됨.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서두에서 언급한, 집에서 무엇을 먹는지 친구들이 모르게 하라는 금지령은 노동계급 나름의 프라이버시 예법일 수 있었다. 오늘날 SNS에는 자신이 먹은 음식을 찍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이 새로운 유행을 볼 때면 의문이 생기곤 한다. 그 음식사진들은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빅토리아 시대적 예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걸까? 혹은 그것들이 뽐낼 수 있는 음식이어서 자랑하는 걸까?
- 물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집착이 용인되는 한편, 그것이 결국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갈등과 모순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다니엘 벨은 이를 일컬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정의. 한쪽에서는 프로테스탄드 윤리와 연결된 금욕과 통제의 가치가 고양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쾌락주의와 즉각적 만족에 근거를 둔 소비주의적 윤리가 동시에 발전하면서 갈등과 모순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성형수술의 역사는 코를 복원하는 수술에서 출발. 15세기 말부터 유럽에 매독이 유행하면서 코를 잃어버린 사람이 많아짐. 코뼈에 매독균이 감염되면 연골조직이 붕괴되면서 코가 망가지는데, 이는 성병과 관련되어 도덕적 타락의 표지로 여겨짐. 그때문에 코 복원수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 이마의 피부를 절개해서 그대로 뒤집어 코 위에 덧씌우는 등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끔찍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사실상 이런 수술은 초창기 미용성형이었던 셈. 이런 맥락에서 유럽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성형수술은 곧 코수술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 흥미롭게도 19세기 유럽사람들은 유대인이 유럽인보다 아프리카인데 가깝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흑인과 피가 섞여 있거나 혹은 최소한 인종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 가설이었다. 그런데 물욕과 큰 관계가 없는 흑인과 달리 유대인은 재물욕심이 많은 탐욕스런 집단으로 여겨졌고 유대인의 긴코 혹은 매부리코는 악덕의 표상이 됨
- 94년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외모가 금전적 이익과 결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결론은 평균이상의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12% 정도 더 높은 소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이후 외모와 자본주의적 이익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수많은 연구를 촉발. 2012년 한국인 2만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도 외보가 본인 혹은 배우자의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도출됨. 그런데 성형수술로 외모가 달라진 경우에는 어땠을까? 흥미롭게도 성형수술로 외모가 개선되어 수입이 증가하더라도 그 수준이 성형수술비용을 충당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따. 연구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성형은 투자라기보다 본인의 즐거움을 위한 소비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띤다고 결론지었다.
- 17세기 바스의 발달과 인공온천장의 설립은 소비혁명의 테제를 재검토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됨. 18세기에 부를 축적한 중간계급의 자신감과 공론장의 확대로 인해 소비에 대한 수요가 생겼고, 소비혁명이 일어났다는 테제 말이다. 18세기 이전, 이미 16~17세기에 온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사람들은 활발하게 그 서비스를 소비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종교개혁이 불러온 사회전반의 세속화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어쩌면 서비스 분야에서에의 소비혁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보다 먼저 발달했고, 그거이 본격적 소비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 대박람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850년대 영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 산업화와 해외 식민지 수탈로 얻은 대영제국의 풍요가 조금씩 사회하층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한 것. 노동시간 단축, 임금상승 등 노동계급의 상황도 개선되어감. 1830~40년대 차티스트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던 사회적 불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좀더 여유로운 시절이 도래. 수정궁을 찾은 노동자들은 이제 더이상 집단행동을 통해 권리를 찾으려 하는 위험한 군중이 아니었다. 이들은 거대한 상품더미의 스펙터클을 보러 모여든 구경꾼이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박람회가 단지 구경꾼을 끌 수 있는 볼거리만 제공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조직위원회는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향후 넘쳐나는 영국산 제품을 사용해줄 소비자를 양산하려고 했다. 그리고 주 타겟은 아직도 검약과 노동의 미덕을 굳게 믿고 있던 중간계급과 그 아래계급이었다. 산업화가 진전되어감에도 19세기 중간계급과 심지어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조차도 나날이 화려해지는 소비의 영역에서 상당히 소외되어 있었다. 이처럼 특별한 소비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이들에게 대박람회는 일종의 새로운 교육과 경험의 장이 되어야 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주저하는 소비자들을 유치하고, 길들이기 위해 주최측은 1실링짜리 입장권과 더불어 영광스런 상품들이 거래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모토를 내세웠다.
- 상품으로 채워진 수정궁은 그야말로 거대한 박물관이자 시장이었다. 나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스펙터클한 새로운 물질세계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난생처름 보는 물건들과 지구 저 먼 곳으로부터 가져온 다양하고 신기한 상품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 엄청난 가짓수와 규모는 상품의 쓰임새와는 별도로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상품이라는 것 자체를 새로운 근대적 기호로 각인시켰다. 비록 관람하는 시간은 달라도 수정궁에서는 왕족부터 노동자까지 모두 같은 상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토머스 리처즈의 말처럼 그 경험은 "콕 집어 말할수는 없지만 이 진귀하고 고급스런 물건들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누구나의 손에 평등하게 쥐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했던 것이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자라는 새로운, 하나의 집단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다이엘 부어스틴은 백화점은 사치적 소비를 평등화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누구든 상관없이 원하기만 하면 눈앞에 값비싼 물건이 놓이기 때문. 그렇게 보자면 상품 카탈로그도 마찬가지. 누구든 카탈로그를 펴기만 하면 바로 눈앞에 수천가지의 물건이 펼쳐지기 때문. 그런데 그것을 과연 소비의 평등화라 주장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마이클 셔드슨은 부어스틴의 주장에 반박하며, 백화점이 소비의 평등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를 둘러싼 열망과 욕구의 평등화를 제공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 백화점의 진열장이나 카탈로그는 사람들을 거대한 상품의 세계로 자연스레 인도. 눈앞에 펼쳐진 상품들의 파노라마는 모르고 살아도 별 상관이 없을 온갖 물건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욕망은 사회적 지위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체험일 터였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셔드슨의 주장처럼 백화점이나 상품 카탈로그는 욕망의 평등화를 가져오는 매개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욕망의 평등화는 결코 소비의 평등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평등해진 욕망으로 인해 오히려 이미 계급화된 소비능력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 차라리 보지 않았으며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상대적 박탈감 말이다. 상품 카탈로그는 온갖 물건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격을 적나라하게 명시한다. 나아가 특정 상품과 어울릴 다른 상품이나 액세서리를 소개한다거나 나아가 그 상품이 놓일 공간가지도 제안. 이런 맥락에서 평등화된 욕구는 소비를 향해 활활 타오를수도 있지만 반대로 씁쓸함만 남긴 채 곧바로 꺾일수도 있다.
- 1740년까지도 북미 평범한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검소하고 검소한 삶을 영위. 그런데 영국에서 소비혁명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수많은 물건이 식민지에 쏟아져 들어오게 됨. 옷, 직물, 도자기, 유리제품, 금속제품, 차, 신문 등 갖가지 영국제 상품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식민지 구석구석에까지 퍼져나감. 식민지인들은 순종적 소비자들이어서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물건을 사는데서 자유의 의미를 맛보았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제 상품을 쓴다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은 본국과 자신들이 하나로 연결된 상상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는 이미 대서양 경제 공동체였고, 18세기 중엽에 식민지인들은 적어도 영국 수출품의 25%이상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의 동의 없이 과세된 강제조세는 이 평화로운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북미 주민들은 영국에 분노했으며 독립이라는 선택을 고려하게 됨. 그동안 식민지인들은 영국제 상품을 구입해 소비하면서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선택권이며 부르주아적 미덕을 배웠던 터였다. 그 것은 동시에 자신들이 영국에 소속감을 느끼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본국과 일체감을 느끼게 했던 상품들은 곧 저항을 위한 소품이 됨. 이 소품들, 즉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은 혁명가의 팸플릿에 적힌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실제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국 상품 수입거부운동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었기에 식민지의 다른 협의체에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도덕률과 원칙들이 도출될 수 있었다.
- 70년대 중반 이래 계속된 경기침체와 대량해고가 외제품의 범람과 이민지 출신 노동자의 증가때문일까? 마약 그렇다면 애국소비운동만 성공한다면 경제위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계속된 해고조치는 훨씬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익증대를 주목적으로 삼은 기업가들은 생산의 자동화 공정을 추진하고,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조가 발달하지 않은 작은 기업에 하청을 주는 한편 노동자를 해고했다.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비용절감을 내세워 기존 공장을 폐쇄하는 한편, 황량한 중서부 지역에 새로 조립공장을 세움. 노조가 바이 아메리칸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제너럴모텃터스, 포드, 크라이슬러의 빅3 기업은 신속히 해외로 진출. 80년대 말에 포드는 마쓰다 주식의 25%, 크라이슬러는 미쓰비스 주식의 24%를 소유하게 됨. 이런 상황이 되자 완전한 미국제라고 믿고 산 포드 자동차는 멕시코에서 멕시코 노동자가 만든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일본의 혼다는 오하이오 공장에서 미국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심지어 혼다는 전미자동차노조 UAW 상표를 부착할수도 있었다. 반면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포드는 그 상표를 붙일 수 없었다. 이제 상표로 상품의 국적을 가리는 일이 별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 20세기 중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리처드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들은 왜 미국 정치가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나 계급투쟁으로 나아가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들이 찾아낸 결정적 원인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소비경제의 확산. 근대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존립이 물질처럼 취급되는 물화를 겪게 되며, 인간은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로 전화.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삶의 질과 동일시 되면서 계급모순이나 계급불평등이 은폐된다. 사람들은 물질적 안락을 추구하며 사회적 상향 이동성에 대한 희망을 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저명한 역사가 다이엘 부어스틴도 소비가 사회적 연대를 희석시킨다며,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의해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연대한다고 한탄. 대량생산된 상품이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피상적 경험일뿐이라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과 균질화된 문화가 인간의 존재를 무기력한 야예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도 나오기 시작. 그 가운데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소비자 비평에 관한 한 가장 염세적 견해를 피력.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그 자체를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문화를 만들어내며, 그 결과 마치 마약중독처럼 그것을 주입받는 수동적 시민이 양산된다고 주장. 장 보드리야르 또한 소비자란 19세기 초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고 비조직적인 개인들로, 칭찬 받으며 아첨에 속아 넘어가는 얼간이 같은 존재라고 조소. 이처럼70년개까지 학계에서는 소비가 인간의 삶에서 시민권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를 제거해나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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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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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역사 2017. 10. 21. 18:02

1장. 세계의 팽창, 세계의 불균형
- 아시아 해상교역의 특징은 정치,군사 세력이 분산되어 있고 문화적으로 극히 다양했다는 점. 이 광대한 영역은 다른 어느곳보다도 비동질적이었다. 이 말은 곧 아시아 각지의 상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의미. 해적과 같은 위험요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시아의 바다는 대체로 자유로운 상업무대였다. 상업활동의 중심지인 항구도시들은 대부분 이방인 상인들의 진입과 활동을 막지 않음. 후일 유럽상인들이 비교적 쉽게 아시사 현지 교역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이방인 상인들을 환영하는 이 지역의 특성 때문이었다. 근대초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바다는 말하자면 만국보편의 세계였음. 바닷길을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정보와 지식이 소통되는 세계, 그리하여 모든 지역이 서로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다. 예컨대 1178년 주거비가 쓴 영외대답이나 1225년 조여괄이 쓴 제번지를 보면 중국이 동남아 여러지역과 매우 활발히 교역을 했고, 각 지역의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명권이 유럽보다 세계지리를 훨씬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남아프리카를 그린 지도를 들 수 있다.
- 중국 정부는 필리핀 거주 중국인들이 두번 연속 대학살을 당하게 될 정도로 해외거주 화교들을 사실상 방치. 마닐라든 나가사키든 간에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유럽출신 상인, 사제, 군인들과 경쟁하지 못했다. 왕권의 후원을 받는 에스파냐인들, 국가의 지원을 받는 동인도회사의 강력한 힘 앞에서 중국상인들은 다만 개인적 조심성, 혹은 위험을 피해가는 자신들의 노하우로 버텨야 했다. 그러나 친척간의 협력이나 마을 공동체의 보호에 의존하는 정도로는 위험에 대처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때로는 학살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과 종교적 힘을 발휘하는 에스파냐인들, 직접 쇼군과 만나서 담판하는 네덜란드인들이 중국인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 결국 중국상인들은 그들 스스로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체제를 운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든 체제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국정부 주도로 인도양 세계를 통제하고 더 나아가서 전 세계의 바다로 나아갈 가능성은 정화 원정 종료 이후로 사라짐. 민간인들의 확산이 이루어졌지만 정부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이 역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결국 중국이 아메리카나 유럽으로 간 것이 아니고 유럽이 아시아의 바다로 들어왔다. 세계의 바다를 연결시킨 것은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 스틴스고르의 이론을 정리하면, 주로 무력을 이용하여 보호지대를 누리는 식이었던 포르투갈의 사업은 아시아의 기존 상업체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데 비해, 똑같이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시장경제를 통한 사업이익을 얻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의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포루투갈의 소위 에스타도 체제는 무력을 통해 상대의 이윤을 빼앗은 방식, 즉 재분배(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이윤의 일부를 자기가 취하는 것) 형태였다. 이러한 약탈 방식은 현지의 경제구조에 아무런 변화를 가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물론 무력을 행사했지만 그 목적은 약탈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교역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교역을 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무력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동인도 회사는 에스타도와는 원리적으로 다른 제도였으며, 따라서 아시아의 상업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컸다. 동인도회사의 사업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소위 현지무역이다. 이는 아시아의 어느 한 지역에서 구입한 상품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가서 처분하고 그 돈으로 그곳의 상품을 사서 다른 곳에 판매하는 식의 연쇄적 거래관계를 말함. 이 상업망이 잘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동인도 회사의 활동의 관건이었다. 스틴스고르는 동인도 회사의 이런 활동이 아시아 현지의 시장경제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고, 크게 보면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이 시장을 향한 생산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음.
- 19~20세기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변화의 씨앗은 그 이전에 준비되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 15~18세기에 세계의 무게중심은(인구로보나 총생산으로나) 여전히 아시아에 있었다. 유럽은 아시아에 비해 뒤처져 있었으며,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근본적으로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시기에 세계 각 지역은 서로 조우하고 교류와 충돌, 적응 등의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을 거친후 세계의 무게중심이 아시아로부터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세계의 패권을 쥐기 시작. 이는 단지 일부 국가가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패권국가들은 단지 앞서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체제를 세계 전체에 강요했기 때문이다. 인도, 중국, 오토만 등의 질서 혹은 조공체제는 무력하게 되거나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서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세계의 구조를 규정했다.

2장. 세계와 유럽의 조우: 유럽의 해상팽창
- 포르투갈은 세계팽창의 뇌관 역할을 함. 이 작은 국가가 전 세계 3대륙에 걸친 거대한 규모의 식민국가가 된 것은 흔히 미스터리로 표현된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주 많은 설명이 제시됨. 브로델은 이에 대해 전통적 설명과 새로운 설명으로 정리. 그가 말하는 전통적 설명은 아직까지 많은 교과서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이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출발하기에 유리했다. 이나라는 1253년부터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자국의 영토회복을 완수했으며, 그래서 외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여력을 가지게 되었다. 1415년에 지브롤터 해협 남쪽의 세우타를 점령하여 원거리 무역의 비결을 터득하고 십자군이라는 공격적 정신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다라가는 탐험여행의 문호가 열렸다. 이때 앙리케라는 영웅이 등장하여 탐험여행을 열정적으로 고취했다." 이런 견해를 수정하는 새로운 설명들은 다음과 같음. "우선 포르투갈은 무시할 만한 소국이 아니다. 이 나라는 수세기동안 이슬람 국가들가 접촉해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1358년에 리스본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서 아비스 왕조가 들어섰으며, 이 왕조에선느 부르주아 계급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이 해외팽창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반쯤 몰락한 귀족들은 해외에서 요새를 건설하고 그곳을 지휘하는 인력을 제공했다." 여기에 보충하여 좀더 새로운 설명들을 제시할 수 있다. 우선 포르투갈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 포르투갈의 특징은 한마디로 상이한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다는 점. 첫째, 이 나라는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나라는 이슬람권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기독교권의 영토회복을 완수한다는 종교적, 군사적 이데올로기가 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권이 발달된 문화를 흡수했고, 아프리카의 중요산물들(금과 말라게타 같은 향신료)을 교역하면서 부를 쌓았다.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 국가형성의 기본 이데올로기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리스본 시내에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슬람 구역이 존재했다. 편협성과 관용이 공존하는 이런 상태가 나중에 아시아의 고아나 말라카에서 한편으로는 지배와 정복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역과 전도에 주력하는 모순적 태도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리 외지에서 기꺼이 현지인들과 결혼하여 정착하는 포르투갈인들의 태도 역시 일찍부터 이민족 문화와 접촉한데서 싹텄을 것이다. 둘째, 이 나라는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중해권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지중해 지역상인들은 일찍부터 대서양 교역을 해 왔다. 이탈리아 선박이 북유럽 항로를 직접 개척한 데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15세기에 터키 세력의 강화로 동지중해 사업 전망이 어두워지자 지중해와 대서양의 연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 자본이 포르투갈로 많이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상인과 선원들도 이베리아 반도내의 상업 공동체로 많이 이주해갔다. 그러므로 포르투갈이 해외팽창은 분명 매우 독특한 현상이지만 사실 그것은 중세 이래 준비된 것이다.

3장. 근대 해양세계의 내면: 선박, 선원, 해적
- 근대초에 유럽의 배들이 규모가 커지고 디자인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배들은 실로 가소로운 수준. 사실 이 배들은 오늘날 한강유람선만한 배들이었다. 근대 초 유럽의 원양항해는 비유하자면 한강유람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인도양과 희망봉을 거쳐 유럽까지 항해하고 돌아오는 행위에 해당. 유럽의 해양탐사를 설명하면서 진취적인 용기 운운하는 것은 순전히 레토릭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작은 배를 타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 바다로 나아가 다른 대륙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를 넘는 용기가 필요. 이는 오늘날 우주선을 타고 다른 별로 가는 것과 유사한 경험일 것이다.
- 근대초 해양항해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진 위험에 찬 사업. 선박과 항해술이 발전하여 세계 각 지역간 소통이 가능해졌지만 해상위험이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었음. 이 시대 해상사업은 문자 그대로 모험사업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소자본을 가지고 시작한 벤처기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장되었다. 초기의 위험요소들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수익가능성이 확인되자 지금까지 사업의 전망을 주시하던 대자본과 정부도 간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변방 국가만이 아니라 중심국가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됨. 선박도 커지고 항해의 규모도 폭발적으로 증가. 여전히 위험성은 컸지만 그것을 내부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이렇게 대자본과 국가가 결탁하면서 자본주의 발전이 본격화됨. 그러나 이런 발전의 이면에는 그런 위험을 실제 몸으로 감내한 선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선상폭력현상이 언제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근대에 들어와 유독 심해진 것일까? 윌리엄 맥피는 '18세기에 들어서 해양생활이 거의 보편적 특징이 되었던 현상, 즉 선장이 그의 선원들을 극히 잔혹하게 다루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무제한적 권한 같은 것은 중세법 조항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 중세에도 선상에서 사적인 폭력이 이루어졌으이라고 상상할수는 있지만 근대에서처럼 선장 및 간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공식적 권위를 통해 살벌한 폭력을 위드른 일을 드물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극단적 선상폭력 역시 자본과 인력의 대규모 집중과 동시에 강력한 계서제가 형성된 근대의 특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계서제의 제일 아래에 깔려 있는 평선원들은 첫번째 희생자로서 크나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들은 근대 프롤레타리아의 때 이른 전형으로서 그들만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형성하며 이 체제에 저항. 그러나 폭령성이 더욱 심화되면서 결국 체제내의 저항을 넘어서 이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외부저항이 형성되었다. 해적 세계가 그것이다.

4장. 근대적 폭력, 폭력적 근대: 군사혁명과 유럽의 팽창
- 다른 지역보다 먼저 유럽에서 선박과 대포가 성공적으로 결합한 것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정적 요소중 하나라고 강조한 또 다른 연구자로는 맥닐이 있다. 유럽선박에 포가 장착된 이후 상대방에게 강제로 교역을 강요할 수 있고 해적질도 능하게 할 수 있었다. 사실 배에 포를 장착하는 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무거운 대포를 갑판 위에서가 아니라 흘수선에 두어야 함. 그러기 위해서는 선체 내부에서 포를 발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배의 양면에 방수처리를 한 포문을 내야 했다. 또 포를 쏠때 똑같은 힘으로 반동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 뒤로 되튀는 힘을 잘 처리하지 않을 경우 몇번 포를 쏘면 배가 깨지게 된다. 이를 해결한 것이 바퀴를 이용해 충격을 완화시키는 장치인 발사대이다. 이런 일련의 발전끝에 유럽배와 다른 지역 배 사이에는 무장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생김. 대서양의 험한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유럽의 배들은 처음부터 튼튼하게 건조한 데다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한 이후 큰 문제 없이 함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데 비해 인도양의 배들은 선체가 약하기 때문에 대포를 설치하기도 힘들고, 또 상대의 포 공격에 대단히 취약. 바로 이 점이 유럽 선박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었다 포르투갈 선박이 인도양에 가서 처음 벌인 해전에서부터 뚜렷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고 서양인의 출입을 통제할 대도 네덜란드인만 예외로 받아들인 데는 네덜란드 인들이 군사기술을 열심히 전수하려했던 요인도 작용. 흔히 일본의 군사기술에 대해 여기까지만 언급하지만 이는 한쪽 면만 본 것과 마찬가지. 일본의 군대에서 대포의 효능은 제한적이었으며, 조총은 전투의 승패를 가를만큼 결정적이지 않았따.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의 전통적 전술과 사무라이들의 장검이 더 가공할 힘을 발휘. 아닌게 아니라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일본의 총포제작은 오히려 쇠퇴. 다른 지역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열심히 서양식 총포를 배우려 했던 일본이 결국은 이를 포기하려 한 것은 미스터리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서양 포 제조술은 일본에서 정착하지 못했다. 일본인은 이제 포보다는 서양의 다른 군사기술, 즉 군사훈련, 전술론, 엔지니어링으로 관심을 옮겼다.
- 총포류를 포기한데는 사회사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임. 총은 하급서민들을 연습시켜 사용했던 반면, 기존의 장검은 사무라이층이 독점. 총포류가 발달하면 결국 사무라이층이 불필요하게 됨. 이런 점에서 기득권층인 사무라이층이 총포류를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사례를 보면 파커의 설명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커는 서양보다 전력이 약한 비유럽세력이 서양군사기술을 배우지 못하여 전쟁에서 지게 된다고 설명했지만, 일본은 서양 군사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했따기보다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가깝다. 그것은 일본이 서양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은 군사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과도 또 달라서, 18세기 이후에 유럽식의 군사혁명과 유사한 변화를 따라간 것으로 보임. 무엇보다 중국으로부터 대형 화포제조법이 도입된 것이 큰 변화를 가져옴. 영조 7년 서양식 대형화포인 홍이포가 조선 최초로 제작됨. 명발에 중국에 들어온 이 대포는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이 사용하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그 이후 수레를 이용하여 운반하게 됨에 따라 야전에서 용이하게 활용할 수 있어서 더욱 위력적이 되었다. 정약용의 언급이 이런 점을 말해준다.
- 유럽은 한번 전쟁을 하게 되면 최대한의 군사력을 동원해서 공격하는 경향. 이때 전쟁의 종교적 의례, 문화적 가치 등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전력을 다해 싸우는 총체전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모두 유럽의 적극적 호전성, 더 나아가서 최대한의 무력을 집중시키려는 열정을 강조한 바 있다. 그 결과 전쟁 피해 역시 극대화됨. 이에 비해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양상이 전개됨. 지도자의 지위와 권위는 그가 모을 수 있는 사람들 수에 달린 것이므로 전쟁에 임하는 양편 모두 사람들을 살상하는 전략을 가급적 회피. 전쟁의 일반적 목표는 포로를 많이 잡아서 노예로 팔거나 부려먹는 것. 그래서 전쟁이 의식화되기 쉽고, 결과적으로 인명손실이 적음. 그렇다고 해서 유럽 이외의 지역에 폭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중요한 차이는 일단 유럽인들이 전쟁에 돌입하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경향이 있음
- 유럽에서 일어난 군사혁명은 결과적으로 전 세계에 폭력이 더욱 넘쳐나도록 만들었다. 우선 유럽내에서 전쟁이 극도로 빈번해짐. 유럽대륙 전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완전한 평화를 이루던 시기는 16세기에 10년미만, 17세기에 4년, 18세기에 16년에 불과. 17세기에는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은 3년중 2년, 에스파냐는 4년중 3년, 폴란드와 러시아는 5년중 4년꼴로 전쟁중이었다. 전쟁기간/전체기간의 비율(95%), 전쟁발발빈도(3년에 한번), 전쟁의 시간 및 규모 등 모든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근대초기는 역사상 가장 호전적 시기였다. 그런데 군사상의 혁신이 일어난 곳은 유럽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결과는 유럽 밖에서 더 크게 나타남. 유럽내의 폭력성이 바깥으로 넘쳐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럽내부에서는 전쟁이 대개 한정된 목표를 놓고 벌어지고 일부 영토와 재산의 이전으로 결말을 보기도 하지만, 유럽인들이 해외로 나가 벌인 전쟁은 적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정치제도를 항구적으로 변경시키고 또 가능한 많은 재산을 강탈하는 식으로 치러졌따. 유럽에서 발원한 폭력이 외부세계로 나가는 현상은 15~18세기이 진행되다가 19세기에 틀을 잡았다. 유럽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장기간이 평화를 맞이. 1816~1914년의 시기를 흔히 평화의 세기라 부른다. 백년전쟁에 대비하여 백년평화라고까지 명명한 폴라니는 평화의 원인이 국제무역과 국제은행을 발달때문이라보 보았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파괴와 약탈보다는 생산과 교역을 통해 더 큰이익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

5장. 화폐와 귀금속의 세계적 유통
- 중국에 은이 대규모로 들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은의 유입이 중국경제에 도움이 되었는가. 혹은 방해가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다. 첫째, 은의 유입과 동시에 극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주장. 무엇보다도 비단산업이 대단히 발전했는데, 이는 거대한 해외수요에 맞추어 산업재구조화를 이룬 사례에 해당. 중국의 전통적 비단산업은 물론 이전부터 발달해 있었지만 은 수입을 위해 더욱 확대됨. 단지 비단산업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내수산업과 상업이 은 유입 덕에 활성화되었다는 것이 폰 글란의 견해. '은 유입시기가 중국 국내경제의 상업화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 이를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것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이다. 그의 논지는 월러스틴의 주장의 역상이라 할 만하다. 프랑크에 따르면 1500년 이후부터 국제분업과 다각무역을 내용으로 하는 세계 경제가 존재했는데, 여기에서 생산과 부의 중심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였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은의 흐름이다. 아시아로 들어온 은은 축장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생산확대와 연결되었다. 도식적으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월러스틴이 구상한 세계 체제에서 유럽이 주도권을 잡고 전 세계의 유통을 지배하게된 중요한 계기의 하나는 유럽이 은의 흐름을 장악했다는 것인데, 프랑크는 그 논지를 뒤집어서 결국 은이 중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중국경제가 자극을 받아 발전했고, 또 세계체제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주장한 것. 은을 장악하는 곳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이 사실이라면 최종적으로 은이 도착한 곳이 중국이므로 이곳에서 자본주의가 꽃피었다는 주장으로, 일종의 중금주의라 할 수 있는 이 주장은 사실 논리적으로 매우 취약. 둘째, 중국에 유입된 은은 경제성장을 가져왔으나 경제발전은 저해하였다는 견해. 교과서적 설명에 따르면 성장은 총생산의 증가를 말하고 발전은 노동시간당 생산의 증가를 가리키므로 은의 유입이 성장을 가져왔으나 발전을 저해했다는 말은 중국 경제전체적으로 생산은 증가했으나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졌다는 주장. 이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면 은이 유입되면서 실질적으로 큰 부가 외부로 유출된 현상과도 연관됨. 즉 은의 유입대가로 유출된 중국 상품이 사실은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된 것이었으며, 따라서 화폐제의 불비로 인해 결과적으로 막대한 노동력의 집적물이 싼 값에 국외로 빠져나갔다는 것. 그 대표적 상품으로 거론되는 것이 비단. 사실 비단제품은 중국의 대외경제에서 대단히 높은 이윤을 가져다주었따. 비단제품은 중국 국내 가격에 비해 해외가격이 매우 높았다. 특히 바탑아와 마닐라처럼 유럽인이 통제하는 동남아 시장은 중국인들이 안정되게 높은 이윤을 확보하는 창구역할. 중국의 대외교역을 거시적으로 보면, 은과 비단제품의 교환이라해도 무리가 아님.

6장. 노예무역: 근대세계의 비극
- 초기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를 탐사한 결과는 아주 소박.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해외사업은 국가주의 성격이 강한데 비해 영국과 프랑스 경우는 상대적으로 개인의 이니셔티브가 강했으며 따라서 규모도 훨씬 작았다. 북미에서는 금이나 향신료가 나지 않고 기대했던 북서항로도 발견하지 못하자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매력적이지 않은 땅이었으므로 손을 놓았고 따라서 개인업자들이 사업을 주도하게 된 것. 특히 대구어업과 모피교역이 주요 사업분야였다.
-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가 될 북미 지역은 처음부터 거주민 사회의 건설을 주요 목표중 하나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남미와 달랐다. 영국은 이미 인구과잉 상태여서 적절히 인력을 해외로 유출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선 아일랜드에서부터 식민화 시도를 했는데, 이는 나중에 아메리카의 식민화 사업의 시험무대 역할을 했다. 많은 인구가 이주했다는 점이 영국 식민지가 다른 식민지와 구분되는 특징이었다. 전체적으로 북미의 영국 식민지로 유입된 인구는 36만~72만 사이로 추산됨. 그런데 이 인구가 지극히 높은 성장률을 보여서 1790년에는 300만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핵심적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주했기 때문. 북미에서는 유럽의 모국에서보다 인구증가율이 훨씬 높았다. 이에 비해 열대지역에는 남성들만 이주해 갔기 때문에 자연증가가 불가능했고, 따라서 메스티조 현상이 시작되어 인구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계속 인력을 공급해야 했다. 게다가 열대지역에는 상대적으로 질병이 더 많았다는 점도 인구성장에 불리한 요인이었다.
- 많은 연구자들은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해외팽창 방식과 네덜란드, 영국의 해외팽창 방식간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에서 영토정복의 경향이 뚜렸했고,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해상무역로를 건설했으나 그 방식은 아시아의 기존상업 네트워크의 일부를 빼앗은 다음 군사력을 이용하여 강제교역을 수행하거나 통행료를 징수하는, 소위 재분배 방식이었다. 이것은 곧 근대적인 자본의 운동법칙보다 정치적, 군사적 힘을 통한 약탈, 수취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앞의 두나라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체제를 아시아에 구축했으며, 이것은 정치적 군사적 힘이 곧바로 잉여수취에 쓰이기보다는 새로운 교환체제를 구축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의미. 낯선 세계로 뚫고 들어갈 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폭력의 사용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를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결국 이를 통해 시장체제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혁신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곧 국가권력과 자본이 적절하게 결합했음을 의미

7장 환경과 인간
- 구대륙의 동식물들은 신대륙에 널리 퍼졌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구대륙의 동식물이 신대륙의 동식물과의 싸움에서 늘 이기는 이유는 뭘까? 반대로 신대륙의 동식물이 구대륙에서 급속하게 퍼지는 것은 불가능할까? 크로스비는 신대륙의 동식물이 구대륙에 널리 보급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단언. 북미에서 가장 강한 종류의 생물들도 유럽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호주와 뉴질랜드원산식물은 한 종도 영국에 귀화하지 못했음. 동식물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막는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동식물의 보급은 언제가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향하는 일반적 현상이었다는 것. 크로스비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유라시아 대륙의 생물상이 신대륙의 생물상에 비해 훨씬 크고 복잡하게 진화해 왔다는 것이 핵심사항. 2억년전 지구상에는 하나의 대륙만 존재하다가, 이것이 점차 갈라져서 현재와 같은 여러 대륙으로 분리됨. 생태계 역시 하나의 거대한 단일체였다가, 바닷물로 대륙들이 고립된 이후 각 대륙의 생태계들이 독자적으로 진화해 감.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생태계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크고 복잡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 지역의 생물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따라서 더 강하게 진화. 유라시아 대륙과 여타 대륙의 동식물의 차이는 비유하자면 시베리아 호랑이와 호주의 캥거루 간의 차이와 같다. 동식물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유라시아의 세균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더 강화게 진화했고, 또 사람과 동물들 역시 이런 세균에 대해 더 강한 면역체계를 갖추어 감. 결국 유라시아 생태계 전체가 훨씬 강한 상태가 된 것. 서로 떨어져 진화해 왔던 각 대륙의 생물들이 15세기 말부터 인간의 해상활동 때문에 갑자기 조우했을 때 유라시아 생물들이 다른 대륙들의 생물들을 누르고 일방적으로 승리해 나간 배경이 이것이다.
- 호주의 사례를 놓고 볼 때 크로스비의 이론은 적어도 부분적 수정을 요함. 호주의 우림은 아주 강하고 적응력이 높은 생태계. 그동안 빙하기, 기후변화, 불에 모두 적응하면서 진화한 상태이기 때문. 따라서 개간작업 후 외래종이 아니라 토종 동식물들이 도로 증가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 이주민들로서는 끊임없이 재개간 작업을 해야 했으므로 결국 한계지에서는 경작을 포기. 물론 많은 외래종 동식물들이 호주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크로스비가 설명하듯이 마치 막강한 침략군이 속수무책의 원주민들을 몰아내며 진입해 들어오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이다.
- 유럽팽창이 전적으로 환경파괴만 일삼았다는 견해는 사실과 다름. 식민세력은 원래 모순적이고 이질적이고 양면적 양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환경변화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보호주의를 강구한 측면도 있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자연과 인간사이에 균형잡힌 황금기였으리라는 막연한 개념 역시 사실과 다름. 유럽인만이 지구환경을 파괴한 것은 아니며, 어떤 사회가 자신의 생활근거를 스스로 파괴한 사례는 많다. 다만 유럽의 팽창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폐해를 가한 것은 분명. 역설적으로 이렇게 심각한 환경파괴를 일으킨 이유에 유럽인들은 스스로 자연보호의 개념을 만들어 내게 됨.
- 전염병 발발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유럽인들의 해외진출은 엄청난 사건. 그야말로 생물학적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이 단기간에 서로 접촉하게 됨으로써 전 지구적인 병원균의 확산이 일어남. 이때 병원균들에 대한 사람들이 면역체계에 따라 생물학적 영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아시아는 생태학적으로 강한 곳이어서 유럽팽창으로 인한 생물학적 피해가 덜한 편이었다. 오히려 아시아 대륙은 역사적으로 흑사병, 콜레라 등의 질병을 수출한 사례가 많음. 아프리카 역시 생물학적으로 다른 지역과 다르게 진화했고, 그 결과 타 대륙 사람들에게는 낯선 질병들을 많이 지니고 있어서 이것이 유럽인들의 침투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 이에 비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아메리카 대륙. 이곳에서는 때로 한 지역의 인구전체가 몰살되는 경우도 발생. 태평양, 오세아니아 역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섬들이 떨어져 있는 이유로 아메리카에서처럼 대규모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 해상팽창 시대에 신대륙은 어느정도 피해를 입었는가? 정확한 수치는 알수 없고 다만 여러학자들의 추산만 있을 뿐이다. 그 추산치는 매우 다양해서 850만명으로부터 1억명이 훨씬 넘는 수치까지 범위가 넓지만 5000만명 이하이기는 힘들고 1억명을 넘지는 못하리는 것이 대체적 견해.
- 유럽은 한편으로 전 지구적 생태환경이 변화를 초래했고 다른 한편으로 그 변화를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배가시킴. 유럽은 자신의 내부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자원을 외부에서 조달. 유럽이 삼림이 고갈되어 심각한 자원부족 위기에 직면했을 때 아메리카 대륙에서 목재를 수입. 철과 플라스틱 및 기타 다양한 물질들이 일반화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사람들이 접하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나무로 되어 있고 동시에 가장 중요한 연료가 나무였던 그 당시에 목재는 실로 핵심적 자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목재부족은 오늘날의 석유고갈과 같은 의미를 띠는 문제. 목탄 부족이 제철업이 위기를 가져왔고 이것이 석탄을 이용한 철강생산 개발로 이어졌다는 점, 프랑스혁명 전야에 농촌의 가장 빈번한 문제가 공유림의 이용과 관련된 문제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대서양을 넘으면서까지 목재를 실어간 이유가 여기 있다. 목재를 하나의 사례로 들었지만 사실 유럽은 심각한 자원부족 문제, 혹은 더 일반적으로 표현해서 생태계의 한계에 봉착한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 설탕, 염로, 직물, 목재 등은 모두 막대한 인력과 동시에 생태적 요소가 투입되어야 하는 물품들임. 이것을 해외에서 조달한다는 것은 유럽이 직면했던 생태부담의 문제를 외부사회에 전가시킴으로써 해결한 셈. 포머란츠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중요 요인중 하나를 여기에서 찾는다.
- 이렇게 보면 유럽의 산업화는 해외 생태계 파괴 위에서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리한 자원개발은 심각한 생태계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음. 섬과 같은 작은 생태계는 심지어 기후마저 부뀌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흔히 전 세계 주민들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다 못해 아예 삶의 기반을 파괴하돈 했다. 서구문명의 침투에 대한 저항이 흔히 어머니인 자연의 파괴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는 것도 자연스런 귀결이다.

8장 기독교의 충격 : 사회의 위기와 의식의 위기
- 유럽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인디언들은 고등종교가 없거나 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의 종교는 다른 어느곳에서보다 더한 정도로 이 세계 속의 물질적, 정신적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따. 그러므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 전체의 뿌리를 뒤엎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럴진대 전도사들의 말 몇마디로 그들이 곧바로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 전도의 역사는 설득의 과정이기보다는 강압적으로 상대방 문화를 패망시키고 정복해버리든지 혹은 전도사 자신이 극단적으로 피학적 방식으로 인디언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9장 문화의 교류 : 언어, 음식, 과학기술
- 세계화된 유럽 언어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영어다. 영어는 현재 제1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보다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특징. 영어는 잉글랜드의 언어에서 그야말로 세계의 언어로 변화한 것. 영어는 장차 어떤 변화를 겪을 것인가?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난날 라틴어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가 여러개의 개별 언어로 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한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이라는 지지대가 사라지자 사멸하고 그대신 몇개의 로만스 언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로 분화됨.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지지와 영어의 보편화는 로마제국과 라틴어의 관계와 유사해 보이지만 장차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물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 여러지역간에 어떤 식으로든 접촉과 교류가 일어날 때 공통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즉 링구아 프랑카가 정해진다. 흔히 지적하는 바이지만 여러 문화현상 중 가장 안정적인 것이 언어다. 언어는 물로 장기적으로 변화하지만 짧은 시간에 급속하게 변할수는 없다. 또 외국어 학습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여러 문화요소 가운데 언어가 가장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 언어의 패러독스이다. 언어가 유연하게 변화, 적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언어의 충돌이 일어날 때 힘이 약한 언어는 자칫 그대로 도태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언어로 소통하는 현상이 발생. 광둥상인과 베이징 상인이 만나서 영어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로 가서 교역할 때 우선 유럽언어가 해당지역의 여러 언어들을 제치고 링구아 프랑카로 기능하곤 했다. 이 상황에서 여러 언어요소들이 뒤섞이면 피진이 되고 이것이 더 발전하면 크레올 언어가 만들어진다.
- 피진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언어가 만났을 때 임시로 형성된 초보적 언어. 당연히 문법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다만 필요한 단어들은 기존언어에서 빌려와 사용. 의사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문법보다 단어다. 어떤 사람이 문법은 틀렸지만 아는 단어를 쓰면 알아듣기 쉬우나 문법은 정통한데 단어가 틀리면 알아듣지 못함. 이렇게 형성된 임시언어가 시간이 흘러 어느정도 정착단계에 들어서면 새로운 변화가 시작. 단순했던 문법이 점차 복잡한 발전을 한다. 이때 원래의 모어의 문법요소보다는 현지에서 일어나는 혁신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럴경우 이 언어는 상당히 안정적 언어로 자리잡음. 때로 이 과정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어서 톡피신 같은 언어는 처음 피진단계에서 안정적 언어로 자리잡는데 90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 도달한 언어는 이제 크레올이라 불리게 됨. 크레올은 대개 해당지역에서 제2의 언어로 기능하기 쉬움. 그래서 때로는 공식언어로 공인받기도 하고 때로는 모어의 압박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밟기도 함
- 후추는 중세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아시아의 교역상품. 왜 그렇게 후추를 구하려 했을까? 유럽에서는 육류소비가 많은데 냉장시설이 없어 고기가 곧 변질되었다. 그래서 상한 맛을 숨기기 위해 강한 향신료가 필요했다. 혹은 후추를 듬뿍 묻혀서 고기를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님. 후추는 워낙 비싼 물품이어서 고기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일 수 없었다. 고기값보다 후추가 더 비쌌다. 후추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찾은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매운 맛 자체를 즐겼기 때문. 오늘날에는 유럽 음식들이 대체로 부드러운 맛이지만, 중세 유럽의 음식은 오늘날의 인도음식과 비스할 정도로 매웠따. 많은 사람들이 매운 맛을 추구하고 또 매울수록 고급이었으므로 부자 권력자들일수록 많은 후추를 사용. 한마디로 후추는 높은 지위의 상징이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향신료를 음식에 사용하는 외에 보석처럼 서로 선물하고 수집. 후추는 식탁위에 전시되었다가 몸소으로 섭취되는 권력의 표시였다. 이럴때에 맛은 사회적, 문화적, 심지어 정치적 현상이었다. 어떤 사회건 대개 그 지경 사람들이 좋아하고 또 공고히 지키려고 하는 맛의 구조가 있기 마련. 한 사회에서 특정한 맛을 내는 물질이 다른 지역에 전해지면 처음에는 대부분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쉬움. 그러나 그중 일부는 여러 노력끝에 결국 다른 사회로 전파되는데 성공함.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전 사회에서 그 음식에 내리던 문화적 해석은 흔히 왜곡되거나 완전히 새롭게 변형되기도 함. 대표적 예로 코코아를 들 수 있다. 마야를 비롯한 아메리카 문명에서 코코아는 원래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식품, 혹은 지배자나 귀족, 전사들의 음료였다. 초기에 이 음료에는 칠리페퍼와 같은 향신료를 첨가해서 맛이 쓰고 강했으며, 옥수수를 이용해서 걸쭉하게 만들었따. 마야와 아스텍족이 여기에 바닐라와 꿀을 집어넣어 맛을 완화시킨 후에야 우리에게 익숙한 맛이 나게 됨. 그런데 에스파냐 인들에 의해 이 음료가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다가 다시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나라로 보급되었을 때 이 음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용됨. 이 음료는 특히 에스파냐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유럽의 카톨릭 지역을 대표하는 음료가 됨. 코코아는 카페인은 적고 약간의 테오브로민을 함유하는데, 이것의 작용은 커피와 유사하지만 훨씬 약해서 중앙신경체계가 인식할 만큼의 자극을 미치지 않음. 그래서 자극효과가 적은 대신 훨씬 더 큰 영양가를 가짐. 이런 이유로 코코아는 유럽 귀족의 음료가 되었으며 특히 아침식사에 자주 이용됨. 그 결과 아침부터 맑은 정신으로 활동하는 부르주아의 음료, 그리고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음료인 커피와 대조적으로 코코아는 여유있고 유희적이며, 심지어는 성적인 의도와 통하는 것으로 간주됨. 이런 바로크적, 카톨릭적 육체성을 대변하던 이 음료는 구체제와 함께 몰락했다가 19세기에 또 다른 의미의 음식으로 재탄생. 그것은 어린이들의 음료로 각광받는 오늘날의 코코아와 널판지형 초콜릿으로 분화. 그리하여 과거에는 권력과 영광을 대변했던 음식이 이제 부르주아 사회에서 권력과 책임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여성, 아이)이 즐기는 음식으로 크게 변화
- 신대륙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은 구대륙 노동자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설탕이 고급 소비재에서 일상적인 소비재가 되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 소위 정크푸드의 대표적 첨가물이 되는 장기적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의 값싼 열량 공급원 역할을 하게 된 것. 산업혁명기 이후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칼로리 섭취가 증가하는 데 설탕이 기여한 몫은 매우 컸다. 잼을 바른 빵, 당밀 푸딩, 비스킷, 과일파이, 롤빵, 캔디 등 설탕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밀가루 형태의 복합 탄수화물과 조화를 이룬 음식들이 홍수를 이룸. 여기에 더해 차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는 습관이 일반화된 것 역시 노동자들이 열량을 추가로 공급받는 한 방식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설탕은 전체 칼로리 섭취의 14%를 차지.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노동계급의 가정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설탕을 통해 열량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간 차별성이 생겨났다는 점. 19세기 중 쇠고기 소비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물성 식품은 노동을 하며 임금을 받는 가장이 주로 소비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설탕 소비에 의존. 노동하는 남편이 매일 고기와 베이컨을 먹는 동안 아이들은 고작 일주일에 한번정도 고기를 먹는데 만족. 남편에게 충분한 음식을 주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은 습관적으로 부족한 식사를 함. 부족한 열량을 얻기 위해서는 자당, 즉 설탕을 섭취. 이와 같은 영국의 상황은 곧 전세계적으로 반복됨. 설탕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칼로리 부족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산업노동자들이 휴식시간에 가장 많이 먹는 식품이 됨. 값비싼 단백질 식품은 주로 성인남자가 독식하고, 자당은 주로여성과 아이들이 먹는다는 소비도식이 굳어짐. 심지어 영양실조로 인한 학령전 아동의 사망은 사실상 가장 널리 사용되던 인구억제 방법이었다.
- 매운맛을 내는 대표적 음식물인 고추의 원산지는 남미의 볼리비아로 추정됨.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이미 고추가 전파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곳 주민들이 아히라 부르던 고추가 유럽인들이 그토록 탐내던 아시아의 후추와 비슷한 상품으로 보고 에스파냐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에스파냐에 들어온 고추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함. 그 대신 고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감. 포르투갈 상인들이 브라질의 페르남부쿠에서 고추를 발견하고 이를 아프리카 서해안과 인도양으로 보낸 것. 이런 지점들로부터 말라카를 거쳐 마카오와 일본, 필리핀으로 전파되었고, 이곳에서 태평양을 건너 북미에 도착. 고추가 지구를 한바퀴 돌아온 것. 이때까지 걸린 시간은 50년이 채 못되니, 매운맛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얼나마 큰 흡인력과 중독성을 가진 것이지 짐작할 수 있다. 고추를 비롯한 여러 음식물의 전파과정은 통상 생각하는 경로와는 달리 매우 복잡한 길을 거쳐가기도 함. 우리나라와 일본에 고추가 전파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이며, 아직까지 그 과정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서 여러 이설들이 존재. 우리나라 문헌에는 일본을 통해 고추가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한국을 통해 고추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많다.
- 그동안 서양과 동양의 과학적 접촉의 성격에 대해 서구인들이 갖고 있던 견해는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임. 이를 대변하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견해임. 그는 유럽과 중국의 문명을 비교해 이야기하면서 유럽의 이성과 중국의 경험이라는 식으로 정리. 중국, 혹은 더 넓게 말해서 아시아 문명은 구체적 경험적 관찰에 능하여 많은 누적된 성과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종합하여 체계를 만드는 이성의 힘이 약하다는 것. 그의 주장의 원래 의도가 동양의 강점을 호의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라 볼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동양문명은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를 작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지적능력을 가진 유럽문명에 그것을 제공하는 역할만 부여받은 셈.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음. 인도의 식물학, 약초학은 대단히 오랜 기간 동안 자연에 대한 직접 관찰로 얻어진 귀중한 정보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방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작은 사례이지만 오르타나 레더가 수집하여 유럽으로 가져간 지식만 하더라도 단지 경험적 사실만이 아니라 인도이 분류체계  자체를 가져간 것이고, 이것이 린네의 식물분류학 내에 수용되어서 유럽의 학문 체계 발전에 일조. 또 일본의 란카쿠의 경우 일방적으로 유럽 학문체계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자체의 과학적 지식체계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수정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따. 이런 점을 보건대 서구와 다른 문명의 과학기술이 만난 경웅 상호 건설적인 방향으로 교류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시대의 전반적 역사흐름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서구세력이 결국 제국주의로 나아간 것과 유사하게 서구과학기술 역시 조만간 억압적, 지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 각 문명권에서 장구한 시간동안 발전해온 그 나름의 과학체계는 매우 큰 잠재력을 가진 인류지식의 보고인 경우가 많으나 근대 서구과학의 기계적인 힘 때문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마야문명의 좋은 사례. 이 지역은 원래 대단히 다양한 식물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고대 문명의 의학체계 내에서 알려진 약초만 해도 3만종이나 된다. 그러나 유럽문명과 조우한 직후 심대한 탄압을 받은 결과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이 멸실되었다. 유카탄의 주교 디에고 데란다는 1542년 마야의 민속신앙을 제거하기 위해 수천명의 원주민을 고문하고 학살했으며, 동시에 수많은 책을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름.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남은 유산은 매우 큰 잠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역에서 독일학자들이 18개월동안 연구한 결과만으로도 320가지의 약초를 수집하였다.
- 서구 근대과학기술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구사하는 효율적 체계이고 그 결과 인류의 복지를 크게 증대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 역시 엄청나게 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유럽 중심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세계의 여러 지역문명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린 서구이 과학기술문명을 일거에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다양한 전통문화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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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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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조선에 살다

역사 2017. 10. 9. 13:08

- 군청의 소재지는 대체로 군에서 가장 큰 읍이다. 그러나 읍이라고 해봐야 시골마을보다 규모가 약간 클 뿐이고, 마을의 여느 집보다 크고 위압적인 모습을 지닌 관청건물을 빼면 다른 마을과 별다른 것이 없다. 더구나 이들 관청 건물은 대부분 낡았고 매우 황폐한 꼴을 하고 있어서 곧 기우뚱 거리다가 무너질 것만 같다. 이런 상황은 대체로 오늘 해야할 일을 내일만이 아니라 가급적 먼 시점까지 미루려 하는 조선적 원칙의 탓으로 돌릴 수 있따. 조선인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무슨 걱정이야. 오늘 괜찮으면 됐지, 내일 일을 누가 아나"
- 의사가 세균과 미생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서울 주민들은 이 좋은 시절이 오기 훨씬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들이 세균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이유는 1년에 한번씩 두달동안 찾아오는 장마가 모든 개천과 수로들을 씻어내리기 때문이리라. 또하나 이들이 무사한 이유는 1년 중 석달동안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이들 동양의 세균들을 꼼짝 못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서구세계의 대도시들과 달리 서울은 일손을 놓고 휴일을 보내는 큰 도시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직업도 없고 어떤 종류의 일도 하지 않는 수천명의 특별한 존재가 있다. 이들은 길을 거닐고,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며, 옛 지혜의 심오함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선비 역할을 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이들이 바로 양반 혹은 사대부들이다. 그들은 여러해 동안 한문공부를 해서, 국왕 폐하께서 이런 무가치한 인간 벌레들에게 관직이라는 은총을 내리면 그것을 감읍하여 받아들일 존재들이다.
- 주막의 방에는 베게로 쓰이는 목침말고는 이불은 물론 어떤 형태의 가구도 없다. 볏짚 돗자리로 덮여 있는 따뜻한 방바닥만이, 내가 이 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주막들에서 보았거나 여러날 밤을 지내며 경험한 잠자리의 전부다. 객실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5미터의 정도의 크기로, 한방에 열다섯 내지 스무명이 동시에 들어간다. 어떤 방은 가로, 세로 모두 2.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아, 바닥에 누워 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상자안의 정어리들처럼 포개져 있다"라는 말이 연상된다. 한번은 한 방에서 서너명과 함께 잔 적이 있는데, 내가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문을 조금만 열어놓자고 큰 소리로 말하자, 한 손님은 겁에 질려 차지하고 있던 따뜻한 아랫목에서 일어나 아주 밖으로 갔다. 모든 문들을 꼭꼭닫아, 잠자는 기쁨을 온통 만끽할 수 있는 다른 방을 찾아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몹시 추운 날 밤, 하루종일 입는 옷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덮을 거리도 없는 형편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가급적 찬바람을 멀리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 주막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냄새는 전적으로 교육의 문제지, 실제 문제는 아니다. 다시 말해, 냄새가 향기로우냐, 불쾌하냐는 것은 대체로 그 냄새에 길들여졌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객의 경우 어느 따뜻한 봄날 밤 이 주막에 들러 오랜 기간 머무르기 전까지는 분명 이 고을에서 뭔가 썩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여행객에게는 꽤나 불쾌한 이 모든 냄새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맛있는 식사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고 식욕을 돋우는 요소로 작용.
- 미국돈으로 10센트면 저녁과 아침식사를 포함한 하룻밤의 숙박료가 된다. 아니, 숙박료가 덤으로 포함된 저녁과 아침밥값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숙박에는 돈을 받지 않고, 아침, 점심, 저녁식사에만 모두 같은 가격을 매긴다. 10센트는 이나라 최고수준의 주막인 경우이고, 더 허술한 주막에서는 이런 정도도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생계비가 이렇게 싼데도 왜 사람들이 더 여유롭게 살지 못하나 의아해할 것이다. 이는 일반 노동자가 하루종일 열심히 일해서 버는 돈이 10센트이고, 그래서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면 그가 종일 일한 하루치 임금을 다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조선의 노동자에게 10센트를 받는 주막은 미국 노동자에게 2달러 50센트나 3달러를 받는 여인숙보다 결코 싼 것이 아니다.
- 딸이 아닌 아들에 대한 비합리적 욕망 자체는 조상숭배에 근원을 둠. 소년은 자라서 그 가족의 제주가 되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알맞은 제물이 준비되고 있는지, 제사가 제대로 진행되는지를 감독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소년들을 잘 교육하여 조상을 공경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은 부모의 큰 소망이다. 이런 것이 부모들로 하여금 소년들이 버릇없게 될 정도로 비위를 맞추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이 더 하고픈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면, 부모가 죽은 후에 아들이 부모의 관심사를 등한히 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후세계에서의 행복은 후손들이 제사를 얼마나 잘 지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딸들은 원칙적으로 이런 의식을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가족에는 아들이 있어야 하며,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양자를 들여야 한다.
- 여성들의 노동과 고생이 하찮게 여겨지는 가운데, 그들의 희망을 영원히 짓밟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이름없는 존재라는 사실. 어린 소녀에게는 가족내의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일종의 이름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하면, 그녀의 이름도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그녀가 결혼하는 날 그녀는 이름뿐 아니라 정체성까지 잃게되어, 그 이후로는 단지 누구의 아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의 집(댁)으로 알려지게 된다.
- 그녀가 신령스런 축복을 받아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면, 모든 이웃들로부터 축하를 받을 것이며, 그 이후부터는 소년의 어머니로 알려진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누구엄마로 부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제 야망의 정점에 도달한다. 그녀는 아들을 가져, 그 아들이름에 의해서 그렇지 못한 마을의 다른 여인들과 위치가 구별되는 것이다. 이나라 관습에 비춰보면 그녀는 단지 그것일 뿐이고, 그녀의 남편도 그녀를 그렇게 대한다. 만약 결혼후, 그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때, 그는 그녀를 내보내거나, 교환하거나, 팔아버리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이혼의 첫번째 사유가 아들을 낳지 못한 죄요, 두번째 사유는 시어머니에게 말대꾸한 죄다.
- 관광객이 서울에 오게되면, 9시경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든 후 도시를 구경한다. 그는 세상이 조용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고국에서 늘 보아온 광경과 비교할 때 조용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전혀 활기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있는 사람들도 하루종일 걸어봐야 다음 길모퉁이에나 갈 정도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조선 사람들이 매우 게으르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 4시에 일어나 나가본다면, 바로 저 졸고 있는 듯이 보이는 거리가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엄청나게 붐비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9시경에 탈 것을 타고 수킬로 밖으로 나가보면, 먼 지방에서 도시로 와서 자신의 생산품을 팔고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남자들과 아이들로 길가가 부산한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 시골농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후 일하러 나간다. 9시경에 아내가 들판으로 새참을 들고 나오면, 농부는 이를 먹고 담배를 피운후 잠시 누워 낮잠을 잔다. 바로 그러할 때 관광객이 그를 보고서는 자신이 늦잠을 자는 동안 농부가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른채 농부가 매우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정오에 농부는 집에 돌아가 밥과 김치로 차린 든든한 점심을 들고 다시 짧은 낮잠을 즐긴다. 농부는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 일하다가 오전과 비슷한 오후새참을 들고 한참 담배를 피운후 일을 시작하여 마음내킬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 관직을 맡은 양반아래에는 농민, 그 다음에는 상인의 신분이 있다. 상인의 수는 많지만 몹시 영세하여,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라면 아예 상인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 전에는 보부상이라고 하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행상과 지방상인으로 구별되었는데, 그들은 정치에도 측며에서 간여하여 관리들이 감히 맞서려 하지 않을 정도다. 간혹 그 조직이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는 하지만, 지난 10년간 보부상 조직은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거의 힘을 상실. 전성기의 보부상 조직은 규율이 엄격했으며 서양의 노동조합보다 조합의 기술에서 한수 위였따. 보부상 조직과 유사한 조합들이 소매상인과 다른 직종에서도 존재했다. 한 마부와 흥정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도시의 마구간 조합장이 반대해 거래가 깨졌다. 따라서 시골상인은 그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장사를 할 수 없다.
- 많은 조선 어린이들은 신체의 한 부분에 흉터가 있다. 아팠을 때 불로 지져서 생긴 자국이다. 가장 흔한 곳은 정수리와 등인데, 흔히 영아나 유아시절에 생긴 것이다. 어린이가 이름모를 심한 질병에 걸리면, 한의사가 와서 어떤 가연성 물질을 정수리에 놓고 태운다. 시골사람들은 이런 치료법을 매우 신뢰한다. 많은 흉터가 이를 잘 말해준다. 정수리에 흉터가 있는 한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가 갓난아기였을 때 숨이 끊어졌는데 한의사가 정수리에 불을 놓아 살렸다고 한다. 이렇게 온갖 치료법이 듣지 않는 불치병을 다스린다며 조그마한 양쪽 등에 뜸을 놓아 생긴 흉터를 가진 어린이를 흔히 볼 수 있다.
- 천연두에 관해 아주 이상한 미신이 있다. 한 아이가 천연두에 걸려 죽은후 가족중 다른 아이가 또 같은 병에 걸리면 그 아이가 회복될 때까지 죽은 아이를 묻지 않는다는 것. 무덤을 파면 마마귀신이 모욕을 느껴, 다른 아이의 얼굴을 긁어 평생 흉측한 모습이 남도록 병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아이의 시신은 거적에 싸거 나무에 묶어 놓거나 개들이 넘보지 못할 높은 단에 올려 놓아 귀신을 격노시키지 않은 채 묻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 사망이 선언되자마자 누군가 서둘러 부엌에 가서 쌀밥 세그릇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짚신 세켤레가 준비되어, 쌀밥과 함께 적절한 장소에 놓여 혼령에게 제물로 바쳐졌따. 제물을 차리는 장소는 보통 지붕위나 근처 언덕 혹은 네거리의 길가가 된다. 여행할 때마다 적어도 한차례 이상 길가에 쌀밥과 짚신이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지금 막 죽은 사람의 혼령과 그를 동반해가는 저승사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 여로는 멀기에 출발하기 전에 잘 먹이고 신발을 갈아신겨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관습은 조선인의 내세에 관한 믿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혼령들에게 알리려고 그의 친구가 망자의 속옷을 벗겨 지붕위로 가지고 올라가 시신이 누워있는 장소 위에서 공중에 흔들어대며 망자의 이름을 부른다.
- 모든 해악은 정치에 있어서의 최고의 악인, 즉 1인 통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조선의 정부와 법률츼 체계는 국왕은 백성이 아버지이며 지배자라는 관념위에 세워져 있다. 국왕의 손아귀에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 것. 이런 경우 모든 관리는 백성이 아니라 국왕에게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관리의 일차적 관심사가 사리를 탐하고 국왕의 마음에 드는 것일 경우, 백성들이 자신을 무어라 여기며 자신의 업무수행 방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보통 관직을 얻는 방법은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공직 희망자의 지적, 도덕적 능력보다는 주머니의 크기가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관리가 받는 봉급은 적다. 그래서 관리는 백성으로부터 돈을 벌게 되어 있다. 백성들이 하는 말이 맞다면 보통의 관리들은 다 그런 셈이다.
- 세금을 징수하는 원칙은 아마 걷을 수 있는 모든 것,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간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중앙정부가 일정한 금액을 필요로 하면, 각 도의 관찰사에게 할당이 되고, 여기서 다시 각 고을의 사또를 거쳐, 나라를 위해 기꺼이 그런 업무를 수행하려고 하는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 국왕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동안 총액이 얼마나 부풀려지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다. 물론 이런 돈을 거두는 사람은 당연히 그 수고비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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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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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대투쟁은 6월항쟁의 정치적 효과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그 주요원인 중 하나는 6월 항쟁 지도부였던 국민운동본부의 급속한 해체. 야당과 재야의 연합체인 국민운동본부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목표가 6.29선언으로 성취되자 노동자대추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 야당은 당면한 대선국면을 주도하기 위해 정치 협상에 주력하면서, 정부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데 반대함과 동시에 노동자대투쟁의 확산도 우려. 명망가 중심의 재야세력은 기층, 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력이나 동원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적극적인 전략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또한 직선제 개헌이라는 국민운동본부의 목표는 한편으로 광범위한 대중들을 거리의 정치로 운집시키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6.29선언을 통해 정부가 그것을 수용한 후에는 더이상 대중적 힘을 모아내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 이런 한계가 결국 군사독재가 타도되지 않은 직선제 개헌으로 귀결된 것.
- 87년에서 91년까지 대략 4년 동안 한편으로는 혁명적 민주화의 열망이 전국적으로 불타오르고 민중운동 세력이 기초적인 조직화의 틀을 마련해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89년 황석영, 문익환, 임수경의 방북과 관련된 공안통치와 90년 1월 22일 보수대연합이라 불리는 3당합당을 통해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 과정을 끊임없이 역전시키려고 했다. 민주화의 힘과 탈민주화의 힘이 교차적으로 대립하는 국면. 4년의 시공간은 민주화가 확대될 것인가, 축소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지배세력과 저항세력의 중대한 결전의 장이었지만, 91년에 결과적으로 민중운동세력은 패배했고, 민주화 과정은 최소한의 극히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만 허용되는 것으로 귀결됨.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재야,지식인운동은 고립되거나 해체되고, 혁명이라는 화두는 89~91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유의미성을 상실했다.
- 음식문화와 관련한 중요한 지표는 GDP 500달러. 이 수준을 넘어서면 경제성장의 성과로 육류소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 이런 변화를 영양학적 전환이라고 함. GDP가 5000달러를 넘기면, 기아와 기생충, 그리고 감염성 질환대신 심장질환이나 암 또는 당뇨같은 식원성 질환이 더 중요한 질병으로 부상하는 역학적 전환이 일어남. 이런 역학적 전환시점에 음식문화 수준에서는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 흥미로운 것은, 정치학자들은 1인당 GDP 5000불을 민주화가 이루어질 경우 그 성과가 쉽사리 역전되지 않는 문턱이라고 말한다는 점. 이런 사실은 음식문화, 경제성장, 정치적 민주화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존재함을 시사. 1인당 GDP 5000불 시기부터 증가하는 육류소비는 5000불 즈음에 발생하는 역학적 전환의 중요 원인가운데 하나다. 육류소비의 증가가 심혈관 질환의 원인이 되는 지방섭취를 늘리기 때문. 하지만 영양학적 전환을 역학적 전환으로 이끄는 경제성장은 식단의 변화나 외식사업 성장같은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함. 예컨대 소비와 주택의 개선, 가족구조의 변화와 성별불평등의 완화, 그리고 교육수준의 향상 등 다양한 사회, 문화적 역량의 향상을 동반. 이런 욕구분화와 역량강화는 정치적 수준에서는 민주화를 촉진하는 힘이기도 함. 우리의 경우 1인다 GDP 500불을 넘긴 때가 74년이고, 5000불을 넘긴때는 89년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시점 사이에서 영양학적 전환과 역학적 전환, 그리고 민주화의 진전을 이루었다.
- 원조 밀가루 요리는 다양성에 일정한 기여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전국적이고도 포괄적인 현상이었다. 밀은 전후의 가난한 시절에 칼국수와 수제비를 통해 널리 퍼졋고, 곧 건면과 인스턴트 라면, 그리고 짜장면을 거쳐 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 레퍼토리와 빠르게 접맥되어 갔으며 소비량도 급격히 증가. 국가가 식생활에 개입한 것도 밀소비 증가에 크게 기여. 원조 농산물 결제가 달러 차관결제로 전환되기 시작한 60년대말부터 박정희 정권은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해 두가지 노력을 기울임. 하나는 국내 쌀 증산을 위한 통일벼 재배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주곡인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한 혼분식 장려. 통일벼 사업은 처음엔 성공하는 듯 했지만, 70년대 말 연속된 냉해로 인해 실해하는데, 한국형 녹색혁명의 싱거운 종말인 셈이다. 혼분식 장려는 사실 모자라는 것은 덜 먹게 하고 남는 것은 더 먹게 하라는 매우 간단한 전략. 하지만 사람들의 미각이란 그렇게 간단히 변하지 않음. 따라서 국가가 원하는 수준의 혼분식을 위해서는 대중의 저항을 분쇄하는 강력한 동원이 필요했다. 폭력적이다시피 한 국가동원의 대표적 사례는 학교에서의 혼식검사와 분식강제 그리고 정부에서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을 무미일로 지정해 식당에서 밥을 팔지 못하게 강제한 것. 이런 국가개입의 결과는 밀의 영양학적 우수성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고 밀에 대한 대중적 취향이 강화되는 것.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대기업의 밀수입이 이루어짐으로써 제분업 및 제과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음. 80년대 음식문화 변동의 중심축이 식단의 육식화였다고 한다면, 60~70년대에는 식단의 분식화라고 할 수 있음. 이런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분식집이라는, 요리법 내지 요리전통이 아니라 식재료가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음식점의 증가였다.
- 쇠고기 수입을 통한 가격조절 그리고 수입쇠고기와 국내산 쇠고기의 가격차이에서 정부가 얻는 수입을 축산기금으로 운용하며 국내 축산업을 개선하려 했던 정부의 노력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 들어서도 쇠고기 가격의 등락은 계속해서 발행했지만 사회분위기는 70년대 중반 성난 분위기와 비교하면 한결 약화됨. 그보다 더 눈에 띄는 현상은 쇠고기 소비욕구의 고급화 경향. 그리고 그런 현상의 중심에는 갈비가 자리잡고 있다. 82년 신문들은 신사동과 논현동 일대의 10여개의 대형 가든의 풍경을 전한다. 거대한 주차장, 대형 수족관, 고급 관상수, 인공폭포가 있고, 수백개의 외등과 내등으로 치장한 휘황찬란한 대형 숯불갈비집들은 사회적 부가 집결되던 강남의 자신감과 팽만한 소비욕구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이런 갈비에 대한 열망과 선호가 어느정도인지는 갈비라는 말이 다름이 아니라 소갈비를 가리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고급 쇠고기에 대한 소비욕구를 대변하는 갈비는 수요만큼 충분히 공급하기 어려운 부위다. 소 한마리에서 고작 26대가 나오고 그중에서도 아래쪽 갈비는 구이용으로 상품성이 떨어짐. 그래서 사람들은 모자란 갈비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돼지갈비도 선호했고, 80년대부터는 닭갈비 같은 요리마저 유행. 특히 닭갈비 유행은 사람들이 닭을 먹을때조차 상징적으로 갈비를 먹고 싶어했음을 말해준다. 대중이 갈비소비 욕구를 해소하게 된 계기는 한국의 대미무역 흑자를 이유로 농축산물 개방을 요구한 미국의 압력으로 88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었다.
- 대중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 가격장벽을 상실한 것은 선망의 지위를 잃는다. 갈비의 대중화는 갈비의 지위상실 과정이기도 했다. 갈비 대신 선망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등심이었는데, 거기엔 90년대 본격화된 축산업의 논리가 작동. 본래 갈비를 선호한 이유는 식육이 목적이 아니었던 소를 도축해서 얻을 수 있는 대부분의 부위기 질긴데 비해, 갈비뼈 부위는 운동량이 적은 부위여서 덜 질긴데다 양념이 될 경우 갈비뼈 속의 성분까지 녹아나와 감칠맛이 훌륭했기 때문. 공장식 축산은 운동량이 적고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라 근내 지방량이 충분한 어린 소들의 연한 쇠고기를 공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등심이 소의 등급을 결정하는 부위가 되자 공장식 축산업은 갈비공급에서 유리한 황소를 기피하고 암소와 거세우를 선호나는 방향으로 진화. 이에 따라 갈비는 점차 공급량이 적고 발골과 손질에 비용이 많이 드는, 이윤이 적은 고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갈비에 대한 대중소비의 길이 완성되자 전통시대로부터 최고의 식육자리를 지켜온 갈비는 축산업과 식육식당이 선호하는 등심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공급측면에서 선호되는 것이 결국은 미각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일반적 법칙이 이런 식으로 관철된 셈이다
- 양돈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문제 해결이 필요했음. 하나는 돼지고기 소비의 계절적 변동성 극복. 우리는 여름에 돼지고기 먹기를 꺼리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여름에도 돼지고기 소비가 왕성해, 양돈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수출은 돼지고기 소비를 균등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도축된 돼지고기 부위들이 특별히 기피되는 곳 없이 고르게 소비되는 것. 판매를 위해서는 부위별 요리와 그것에 상응하는 소비가 중요. 적당한 지방량과 씹는 맛이 좋은 목살과 갈비는 구이가 된다. 등심과 안심은 돈가스가 된다. 다리살은 불고기감이나 찌개거리가 되고, 발은 족발이 되고, 뱃살은 기름이 흥건한 삼겹살구이나 수육이 될 것이다. 여하튼 문제는 국내에서 너무 수요가 많아 공급이 따르기 어렵거나 국내에서 별로 선호되지 않는 부위다. 일본으로의 수출은 이런 문제를 일부 해결해 줌. 국내에서도 60년대 이래 경양식집이 소비처가 되어주었지만 그다지 왕성하게 소비되지는 않던 등심과 안신을 일본이 수입해간 것이다.
- 80년대를 통해 식육문화에서 영광의 길을 걸은 것은 닭고기. 이 시기를 지나면서 더이상 닭고기로 불리지 않고 치킨이라는 국제화된 명칭을 얻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요리법과 유행의 진원지가 되었기 때문. 전체로서의 치킨산업 성공에는 닭고기가 가진 자질과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행운이 작용. 치킨산업 성공의 정점에는 양념통닭이 자리잡는데, 양념통닭에는 해방후 한국인의 미각이 걸었던 모든 행로가 응결되어 있다. 어떤 식육이 특정 시기에 역사적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행운이 작용. 특히 경쟁자의 제거는 그런 행운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은 여름에 돼지고기를 소비하길 꺼렸다. 여름에는 소의 도축도 좋지 않았다. 농번기이기도 했지만 여름에 도축된 소는 맛이 떨어졌다. 온대 계절풍 지대의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 한국인들은 닭과 개를 먹었다. 이 말은 식육의 관점에서 개와 닭은 경쟁관계라는 의미. 하지만 이 역사적 경쟁관계는 86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이루어진 도심에서의 개고기 판매금지조치로 인해 쉽게 결판이 났다. 졸지에 뱀탕, 토룡탕과 더불어 도매금으로 혐오식품이 되어버린 개고기를 파는 식당들은 영업을 계속하기 위해 개장국을 사철탕 같은 희한한 이름으로 바꾸는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도심에서 밀려난 영세한 음식점들이 국가의 공식적 식육관리 밖에 자리하며 합리적이고 위생적인 도축을 입증할 길없이 개고기를 팔아야 하는 상황, 그리고 애완견 문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상황으로 인해 개고기는 우리의 식육문화에서 급속히 쇠퇴. 하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경쟁자의 몰락만으로 부족. 비워진 공간을 채울 능력이 있어야 함. 이 점에서 닭고기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보유. 소와 돼지는 사육기간이 길어 공급탄력성이 떨어짐. 이에 비해 닭은 사육기간이 짧음. 품종개량과 사료 발달로 육계의 출하시기는 대락 부화후 35일. 출하에 6개월 이상이 필요한 돼지나 2년 이상이 필요한 소에 비하면 닭은 생산자 관점에서 가장 유리.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닭고기가 적절한 요리법을 거쳐 완성된 음식으로서 미각의 수준에서 환영을 받아야 함. 여름철 백숙과 삼계탕에 한정된 소비를 넘어서야 하는데, 이는 계절적으로 집중된 소비를 연중소비로 확장하는 것이기도 해야 함. 그런 의미에서 닭고기 요리에서 이정표를 세운 것은 60년대 초에 유명세를 얻은 전기구이 통닭이다. 이는 닭고기를 삶는 요리에서 오븐요리로 이전시켰고 닭고기를 겨울에도 즐기기 좋은 음식으로 만들었다.
- 치킨산업 연구자 정은정이 재치있게 말했듯, KFC와의 싸움에서 KFC(코리안 프라이드 치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두가지. 우선 KFC가 하지 않은 두가지 전략을 활용했기 때문. 하나는 배달이고 다른 하나는 맥주와 함께 파는 것. 전자는 식민지 시대 냉면배달에서 짜장면 배달로 이어져온 긴 문화적 전통의 활용이고, 후자는 치맥이라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 그 다음으로 양념통닭의 개발. 확실히 양념통닭은 분식점이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일상적으로 떡볶이를 먹어온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음식이었다. 분식을 수용하고 밀떡을 맛나게 먹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 다음 시기 식육문화의 길을 연 것이다. 염지단계에서 글루탐산이 활용되고, 식용유로 튀기고 그럼으로써 35일 키워진 닭의 무미함을 감추고, 튀김옷의 느끼함을 다시 고추장 양념으로 삭히고, 매운맛은 다시 달콤한 설탕과 콘시럽으로 달래고, 실파도 얹고, 마늘도 다져 얹은 이 음식에는 산업과 미각이 서로를 강화하며 달려온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 대중의 동요와 불만 속에서 출현한 전두환 정권은 60~70년대 국가주의 스포츠 정책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81년 8월 서울올림픽 유치결정이 그 결정적 계기가 됨. 정권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지상과제를 내걸고, 여기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음. 통금해제와 해외여행 부분적 자유화 등 일련의 자유화 조치들도 올림픽 개체를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됨. 집권 초기 신문, 방송 등 언론계를 통폐합해 권력의 통제아래 두는 데 성공한 전정권은 신문의 스포츠면을 100% 이상 늘리는 등 스포츠 붐을 조성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올림픽 종목에 포함되는 전략스포츠 분야의 경우 올림픽에서 성과를 내도록 하는 데 모든 초점이 맞추어짐. 전면 개정된 국민체육진흥법은 노골적으로 86,88 양 대회의 지원을 목적으로 했음을 밝힐 정도였다.
- 80년 출범한 전정권은 70년대와 다른 방향의 사회정치를 추구. 유신정권은 두발과 복장까지 단속할 정도로 규제를 강화했으나 80년대는 개방화와 자율화에 초점이 맞추어짐.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교복자율화 등이 대표적 사례로, 이는 사회라는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의 변화와도 관계 있음. 신군부는 박정권과의 차별화를 도모하는 한편 좀더 대중적 이미지를 위해 사회정의, 사회복지, 민주주의를 강조. 이례로 신군부의 정권접수가 막바지에 이른 80년 8월, 그들은 민주복지국가건설을 내세움. 같은 맥락에서 신군부는 82년부터 시작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이름을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바꿈. 복지를 중시하겠다는 뜻에서 사회를 추가한 것. 정권은 또 새마을 운동을 대체할 사회정화운동을 출범시켜 도시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개입하기 시작. 경제성장 우선이나 민족주의 활용 같은 발전국가의 특성은 계속 이어졌지만 말이다.
- 올림픽은 전정권이 추구하던 정책들의 수행에 매우 유용했다. 예로부터 스포츠는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좀더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의 역할을 해왔다. 선진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올림픽개최는 발전주의와 쉽게 연결될 수 있음. 나아가 사회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규율, 시민사회의 정치적 동의 확보에도 매우 유용했다.
- 정권과 언론은 88올림픽이 선진국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전하는 한편, 올림픽을 내세워 다양한 갈등을 봉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사회문제로 여겨지는 것들을 없애, 풍요롭고 평화로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한 정권의 의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올림픽 이후 풍요를 과시하는 분위기가 더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공간이 바로 강남이다. 88년 압구정에 1호 맥도날드 체인점가 1호 원두커피 전문점이 들어섬. 강남은 처음부터 중산층 이상의 거주지였지만,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렇다할 기반시설이 없어 베드타운에 가까웠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강남에 백화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곳이 소비의 중심지로 떠오름. 한편 가시권의 무질서와 비위생을 제거하려던 정권의 움직임은 역설적의로 빈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탄생시킨 계기가 됨. 올림픽 준비로 생계를 위협당안 철거민과 노점상들은 89년 전국빈민연합을 결성. 신문기사에 빈민과 위화감이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등장한 것도 이해였다.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행해진 사회정치는 우리 사회에 뚜렷한 차이를 지닌 2개 집단을 부상시켰다. 풍요를 과시하게 된 이들과 감시대상이 되거나 사회로부터 배제당한 이들 말이다. 올림픽을 계기로 전정권이 펼친 사회정치는 사회에 균열의 선을 긋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 80년 12만 2683호의 단독주택과 7만 6889호의 아파트가 건설됨. 호수로만 보면 아파트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6%정도였으나, 80년대의 출발이 되는 이 해는 우리나라에서 단독주택이 아파트보다 많이 지어진 마지막해임. 이후 아파트는, 비록 2000년대 초반 전체 공급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까지 떨어지긴 했지만, 언제나 다른 형태의 주택들보다 더 많이 지어졌다. 그런 점에서 80년대는 아파트의 증가세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시기이자, 아파트가 향후 한국의 대표적 주거형태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예측하게 만든 시기.
- 80년대는 비교적 물가가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주택과 관련된 지표는 그렇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초저물가 시대 초고가 부동산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킴. 주택시장을 통제하고자 했던 정부정책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민간기업, 특히 대형 건설사의 주택건설은 태업이라 할 만큼 부진했고, 공급량이 부족해짐에 따라 집값이 상승. 80년 초화화 아파트의 분양가가 평당 100만원 정도였는데, 90년 소형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215만원에 달했다. 원가연동제를 통해 주택가격이 꾸준히 상승했기 때문. 주택가격이 안정된 시기에도 전셋값은 요동을 쳤다. 87년 1월에는 한달만에 강남 소형아파트 전세값이 30%나 오른 일도 있었다. 87년에는 서울을 포함한 전국 모든 주요도시에서 주택 임대료가 상승. 이 무렵 집값은 안정세를 이어갔던 탓에 전세가가 집값의 70~80%선까지 오름. 춘천, 원주와 서울 강남구 일부 아파트에서는 전세가와 집값이 역전되는 현상도 나타남. 이유는 여러가지 였다. 3저호황,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 번후 베이비붐 세대의 주택시장 진입, 도시의 2차산업발전과 제조업 노동력의 확대, 정부의 물가통제와 이에 따른 주택건설업계의 공급부진, 집값안정으로 인한 주택매입욕구저하, 증시호황에 따른 부동산 유입자금 감소 등이 전셋값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 주택부족 및 가격상승, 세입자의 증가 및 주거상황 악화 등은 정부가 직접 행동에 나서게끔 이끌었다. 87년 민주화 이후 극심한 사회변화 속엣 집권한 노정권은 88년 향후 6년간 200만호를 건설할 것이라 발표. 그럼에도 부동산 가격 상승이 멈추지 않자 이듬해 4월 정부는 다시 30만호를 한꺼번에 공급하는 5개 신도시계획을 발표. 민간건설을 조장하지 않고는 주택공급 목표량을 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여전히 모순에 빠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토지공개념을 도입해 부동산투기를 잡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집값이 올라야만 작동하는 민간공급장치를 유지했기 때문. 어찌됐든 88~91년 동안 서울지역 아파트값이 평균 2.6배 상승하고, 당시 건설역량을 뛰어넘는 신도시 주택대량공급계획이 시행된데다 89년 10월 기존의 분양가 상한제가 폐지되고, 원가연동제가 도입되면서 민간건설업체들의 주택공급량도 급증
- 북한은 왜 80년대 중반 전자음악을 본격적으로 수용했을까? 80년대는 북한체제가 가장 안정적이었던 시기. 정권 수립 초기에는 권력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있었고, 60년대에는 중국, 러시아와의 외적갈등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내부의 권력다툼은 60년대부터 김일성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권력 후계구도 역시 70년대를 지나면서 안정됨. 여기에 80년대 들어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어느정도 성과를 내면서 경제적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정치와 경제의 안정 속에서 인민들의 문화적 욕구또한 높아짐. 이전까지 북한의 문화는 항일무장투쟁이나 미제와의 전쟁처럼 외부세력과의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주된 내용을 했음. 그러나 이제 북한체제 내부의 문제를 다독여줄 문화가 필요하게 된 것. 체제안정으로 인한 자신감 상승과 함께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의 등장도 북한문화의 새 변수로 다가왔다. 80년대는 광복으로부터 40년, 6.25전쟁으로부터는 3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적 감성을 요구. 우리식 음악으로는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음악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은 인민들의 다양한 생활을 반영한 가요가 부족하다고 지적. 음악인들이 인민을 정치적으로 교양하는데 집중하느라 근로자들의 다양한 생활과 정서를 반영하는 데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김정일은 처녀에 대한 노래를 비롯해 여성에 대한 노래도 나오는 것이 없다고 지적하며, 이를 봉건사상의 잔재에 의한 것으로 보았따. 이 밖에도 어린이를 위한 노래나 자장가, 결혼식, 환갑잔치에 부를 노래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 86년부터 거품이 붕괴한 90년까지 5년간 일본은 거품경제에 지배되었다. 실질경제성장률은 크지 않은데도, 부동산과 주식가격이 비정상적으로 폭등해 소비가 크게 늘고 호경기가 이어짐. 달러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크게 개선되지 못하자, 미국은 일본 상품 수입규제 같은 보호조치를 취하는 한편, 일본에 시장의 추가개방을 요구. 이에 일본은 나카소네 총리가 직접 나서 미국제품을 사라고 선전하는 것으로 대응. 한편 일본은행은 내수확대를 위해 87~88년 공정이율 2.5% 저리정책을 실시. 엔화가치 상승으로 내부자금이 넘쳐났던 대기업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반면 엔고에 따른 수출경쟁력 하락으로 제조업 신규투자는 크게 줄었다. 빌려가는 사람이 없어 은행에 돈이 쌓여 있으니 일본시장에는 돈이 넘쳐나는 과잉유동성이 발생. 일본정부는 엔고에 따른 수출시장 위축을 감안해 내수를 확대하기로 했다. 87년 금융완화와 재정확대로 시중에는 더 많은 돈이 풀림. 부동산과 주식가격이 폭등하자, 쌓인 돈을 주체하지 못하던 은행이 나서서 부동산에 대한 직접투자와 부동산 투자회사 및 제2금융권에 대한 대출을 크게 늘림.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혁명. 1,2차 석유파동이후 세계 금융시장에는 런던을 중심으로 오일달러시장이 발달. 금리규제를 받는 미국은 예금금리가 5% 정도지만, 규제없이 자유금리 체계를 운용하는 유로시장에서는 금리가 15%까지 치솟음. 자연스레 자금은 금리가 높은 유로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국가가 자금흐름을 통제할 수 없는 구조가 나타남. 이에 따라 증권회사들이 예금금리 규제를 받지 않는 고금리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은행도 금리규제 철폐를 요구하면서 금융자유화의 시대가 열림. 미국은 84년부터 일본에 금융시장 개방을 요구. 정부도 국제자본의 이동과 금융업무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며 단계적으로 금융자유화를 추진. 이리하여 거품경제 상태의 일본에는 국내자본에 해외자본까지 가세한 투기성 자금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의 투기성 금융상품기법까지 도입되면서, 일본 거품규모는 계속 커짐.
-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90년 일본 전체 토지가격 총액은 85년 말의 2.4배로 폭등하여 미국전체 토지가격의 4배나 되었다. 물론 전후 일본경제동향을 살펴보면, 55년부터 90년까지 소비자물가가 약 5배 오른데 반해 전국 평균주택가격은 약 72배나 올랐다. 부동산불패 신화가 생기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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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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