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에서 남성복식이 여성의 복식에 비해 훨씬 간소하고 저렴해진 것은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 1700년경만 해도 귀족을 제외한 중류 이하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오히려 두배정도 옷을 많이 갖고 있었고, 그 가치도 여성들이 소장한 옷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이 되면 모든 계층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옷을 소장하기 시작. 이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적게는 5배에서 많게는 10배가 넘는 옷값을 지출하게 됨
-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수수한 옷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고 호화롭게 치장한, 그런 옷이 잘 어울리는 연약한 존재이기를 요구. 왜 그랬을까? 17세기 중반이후 유럽은 간헐적 절대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장세로 돌아섰고,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 이 시기 산업은 해외교역보다 국내소비의 확장에 기대어 돌아가던 상태였다. 경제의 큰 축을 이루던 직물산업은 18세기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상태. 한마디로 물건은 넘쳐났고, 경제는 돌아가야 했고, 그 한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해가고 있었다. 남성들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아내나 딸, 연인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금전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학자는 소스타인 베블런
- 버나드 맨더빌의 논고를 필두로 악덕으로 규정되던 사치가 공익에 기여한다는 사상이 제기되기 시작. 맨더빌은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런던에서 개업의로 지내면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1723년에 출판한 꿀벌의 우화는 애덤스미스 등 영국과 유럽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침. 꿀벌의 우화는 사치옹호론, 자선학교 유해론, 자유방임론 등을 주창한 글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사치를 악덕으로 폄하하는 당시의 인식을 위선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 그는 사람이 사는 데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것을 모두 사치라고 규정한다면 사치가 아닌 것은 세상에서 찾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그런 사치로 인해 경제가 돌아가므로 절약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것은 원칙적으로 모순이라고 지적. 맨더빌이 보기에 사치가 탐욕과 약탈을 부추긴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탐욕과 약탈은 실제로는 "남성이 지배하는 정부 탓이며 나쁜 정치 때문"이었기 때문. 그의 발언은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전통적 관념에 선을 긋는 일대 선언이었다. 그 발언으로 인해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오랜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사치를 악덕으로 몰아갔던 사치논쟁이 점차 안락함과 편리함 쾌락, 사교성, 취향, 심미안과 세련미 등에 대한 논의로 흘러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치논쟁에서 새롭게 나타난 논의들은 근대성 논쟁에서 다루는 수많은 화두를 이미 의제로 부각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맨더빌의 일갈이 나온 후 3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수많은 근대성 논쟁과 탈근대 논의를 거친 오늘까지도 여성의 드레스는 여전히 화려한 데 비해 남성의 턱시도는 단순하다는 사실이다.
- 유럽 엘리트들은 도자기 같은 중국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중국 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학자 안토니 파그덴은 타 문화권의 물건을 애호하는 현상이 타자를 소유하가조 하는 욕구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던 중국도자기의 물질적 가치 뒤에는 중국문화가 표상하는 상징가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일은 말콤 워터스의 주장처러 단순히 물질가치만이 아니라 상징가치 형태로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였다. 중국 도자기를 사들이고 전시하는 일은 유럽의 지배계급에게 특권에 걸맞은 행동과 미덕을 실천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됨. 그런데 상업의 발달로 인해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견고한 엘리트 장벽이 점차 허물어지자 지위상승 욕구에 불타는 중간계층이 상류층의 소비행위를 따라하기 시작. 이제 중간계층에서도 중국 도자기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생겨남. 그들은 소박하나마 선반에 중국도자기를 올려놓고 바라보며 만족해했다.
- 비누가 가장 제국주의적 상품으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값이 싸고 크기가 작아서 운반이 용이했을 뿐 아니라, 진보와 위생이라는 가치 아래 제국주의적 강압적 이미지도 희석할 수 있었기 때문. 그래서인지 청결과 위생관리를 위한 상품들의 광고는 종종 극단적으로 인종차별적이거나 국수주의적 양상을 띤다. 1891년 물에 뜨는 비누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세운 아이보리 비누광고에는 개울가에서 한 흑인 어린이가 아이보리 비누로 돛단배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의 표정에는 문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데, 만약 광고의 등장인물이 백인어린이여도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 위생과 청결에 대한 강조는 서양인이 생각하는 자연스런 상태를 아프리카인들에게 이식하려는 것.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청결개념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더럽고 냄새나는 야만인으로 인식해야지만 비누같은 문명세계의 물건에 대한 수요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 이런 측면에서 비누는 제국주의적 상품의 선봉에서 쐐기돌이나 마찬가지다. 비누가 아프리카에서 필수품으로 자리잡는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단순한 피식민지인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자들의 장기적 기획에 부응할 소비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열린 광고 컨벤션에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치약이나 비누를 파는 것이 아니고 이를 닦고, 몸을 씻는 새로운 방식을 파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하는 방법을 파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방식이란 결국 치약이나 비누같은 새로운 물건을 이용하는 방식을 말함. 이렇게 치약과 비누를 사용해본 사람은 가글액과 치실은 물론 제모제에서 탈취제에 이르기까지 향후 수없이 개발될 상품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는 셈이었다.
- 1885년 프렌치 와인 코카라는 이름의 강장제로 상표등록을 했던 코카콜라는 알콜 성분이 문제가 되자 와인대신 설탕시럽을 넣어 1886년 코카콜라로 재탄생. 음료수로 상품화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약 대용으로 소비됨. 1890년대 광고에서도 여전히 이상적인 자양강장제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 18세기 장터에서 구경꾼들은 돌팔이 의사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려 필요하지도 않은 강장제를 구매. 19세기에 본격화된 약광고는 멀쩡한 신체상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만들어냄. 아파서 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약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 것. 오늘날에도 의료시장은 의료상품 및 서비스의 공급과 이에 대한 소비 욕망인 수요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결국 약, 건강식품, 건강보조기구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육체는 거대한 소비의 장이 되어버림. 물질적 신체와 의약품, 그리고 비물질적인 욕망은 서로 뒤엉켜 변주하며 새로운 사회적 기준과 행위를 만들어낸다. 비아그라가 출시된 후 성적 능력의 새로운 척도가 나타났다든가, 사회적 압력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성형수술을 하는 세태나, 친구들과 단체로 목욕탕에서 마치 놀이처럼 눈썹문신을 받는 사례들을 생각해보라. 여기서 나타나는 욕망, 압력, 행위 들은 생리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질병과 치료, 심지어 약의효과도 물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으로, 이 또한 인문학적 시선으로 봐야 한다.
- 미국에서는 19세기 말에야 에이본 레이디가 등장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여성 방문판매원이 활동. 숙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화장품만을 취급하는 여성 방물장수 매분구의 존재가 나타남. 혹자는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이 집안의 여성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존재였다고 평가. 1962년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화장품 방문판매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고객의 대부분은 주로 전업주부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 화장품 전체 매출의 90% 이상이 방문판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케팅 연구자들은 이런 방문판매의 성공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 무엇보다 당시 화장품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부족했던 소비자들에게 판매원들이 직접 방문해 제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 주효. 다르게 말하면 판매원들의 수준이 높았고 훈련도 잘 이루어져다는 뜻. 또한 상대적으로 좁은 소비자 커뮤니티 안에서의 경쟁심도 판매율 상승의 동인. 즉, 이웃이나 친구가 샀으므로 덩달아 구매하거나 과시적 욕구에서 더 비싼 것을, 혹은 더 많이 사고자 하는 도익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미용에 대한 전반적인 상담을 개인적 차원에서 받을 수 있고, 다양한 견본품 제공이나 마사지 서비스 등으로 소비자가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방문판매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요인이었다.
- 베블런은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습성을 갖게 된다고 지적. 그래서 산업적으로 발달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정생활에 대해 공개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생겨남.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상류층 사이에는 프라이버시 개념과 과묵의 습관이 필수적 예법으로 자리잡게 됨.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서두에서 언급한, 집에서 무엇을 먹는지 친구들이 모르게 하라는 금지령은 노동계급 나름의 프라이버시 예법일 수 있었다. 오늘날 SNS에는 자신이 먹은 음식을 찍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이 새로운 유행을 볼 때면 의문이 생기곤 한다. 그 음식사진들은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빅토리아 시대적 예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걸까? 혹은 그것들이 뽐낼 수 있는 음식이어서 자랑하는 걸까?
- 물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집착이 용인되는 한편, 그것이 결국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갈등과 모순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다니엘 벨은 이를 일컬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정의. 한쪽에서는 프로테스탄드 윤리와 연결된 금욕과 통제의 가치가 고양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쾌락주의와 즉각적 만족에 근거를 둔 소비주의적 윤리가 동시에 발전하면서 갈등과 모순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성형수술의 역사는 코를 복원하는 수술에서 출발. 15세기 말부터 유럽에 매독이 유행하면서 코를 잃어버린 사람이 많아짐. 코뼈에 매독균이 감염되면 연골조직이 붕괴되면서 코가 망가지는데, 이는 성병과 관련되어 도덕적 타락의 표지로 여겨짐. 그때문에 코 복원수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 이마의 피부를 절개해서 그대로 뒤집어 코 위에 덧씌우는 등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끔찍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사실상 이런 수술은 초창기 미용성형이었던 셈. 이런 맥락에서 유럽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성형수술은 곧 코수술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 흥미롭게도 19세기 유럽사람들은 유대인이 유럽인보다 아프리카인데 가깝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흑인과 피가 섞여 있거나 혹은 최소한 인종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 가설이었다. 그런데 물욕과 큰 관계가 없는 흑인과 달리 유대인은 재물욕심이 많은 탐욕스런 집단으로 여겨졌고 유대인의 긴코 혹은 매부리코는 악덕의 표상이 됨
- 94년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외모가 금전적 이익과 결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결론은 평균이상의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12% 정도 더 높은 소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이후 외모와 자본주의적 이익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수많은 연구를 촉발. 2012년 한국인 2만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도 외보가 본인 혹은 배우자의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도출됨. 그런데 성형수술로 외모가 달라진 경우에는 어땠을까? 흥미롭게도 성형수술로 외모가 개선되어 수입이 증가하더라도 그 수준이 성형수술비용을 충당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따. 연구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성형은 투자라기보다 본인의 즐거움을 위한 소비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띤다고 결론지었다.
- 17세기 바스의 발달과 인공온천장의 설립은 소비혁명의 테제를 재검토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됨. 18세기에 부를 축적한 중간계급의 자신감과 공론장의 확대로 인해 소비에 대한 수요가 생겼고, 소비혁명이 일어났다는 테제 말이다. 18세기 이전, 이미 16~17세기에 온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사람들은 활발하게 그 서비스를 소비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종교개혁이 불러온 사회전반의 세속화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어쩌면 서비스 분야에서에의 소비혁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보다 먼저 발달했고, 그거이 본격적 소비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 대박람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850년대 영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 산업화와 해외 식민지 수탈로 얻은 대영제국의 풍요가 조금씩 사회하층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한 것. 노동시간 단축, 임금상승 등 노동계급의 상황도 개선되어감. 1830~40년대 차티스트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던 사회적 불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좀더 여유로운 시절이 도래. 수정궁을 찾은 노동자들은 이제 더이상 집단행동을 통해 권리를 찾으려 하는 위험한 군중이 아니었다. 이들은 거대한 상품더미의 스펙터클을 보러 모여든 구경꾼이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박람회가 단지 구경꾼을 끌 수 있는 볼거리만 제공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조직위원회는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향후 넘쳐나는 영국산 제품을 사용해줄 소비자를 양산하려고 했다. 그리고 주 타겟은 아직도 검약과 노동의 미덕을 굳게 믿고 있던 중간계급과 그 아래계급이었다. 산업화가 진전되어감에도 19세기 중간계급과 심지어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조차도 나날이 화려해지는 소비의 영역에서 상당히 소외되어 있었다. 이처럼 특별한 소비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이들에게 대박람회는 일종의 새로운 교육과 경험의 장이 되어야 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주저하는 소비자들을 유치하고, 길들이기 위해 주최측은 1실링짜리 입장권과 더불어 영광스런 상품들이 거래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모토를 내세웠다.
- 상품으로 채워진 수정궁은 그야말로 거대한 박물관이자 시장이었다. 나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스펙터클한 새로운 물질세계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난생처름 보는 물건들과 지구 저 먼 곳으로부터 가져온 다양하고 신기한 상품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 엄청난 가짓수와 규모는 상품의 쓰임새와는 별도로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상품이라는 것 자체를 새로운 근대적 기호로 각인시켰다. 비록 관람하는 시간은 달라도 수정궁에서는 왕족부터 노동자까지 모두 같은 상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토머스 리처즈의 말처럼 그 경험은 "콕 집어 말할수는 없지만 이 진귀하고 고급스런 물건들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누구나의 손에 평등하게 쥐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했던 것이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자라는 새로운, 하나의 집단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다이엘 부어스틴은 백화점은 사치적 소비를 평등화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누구든 상관없이 원하기만 하면 눈앞에 값비싼 물건이 놓이기 때문. 그렇게 보자면 상품 카탈로그도 마찬가지. 누구든 카탈로그를 펴기만 하면 바로 눈앞에 수천가지의 물건이 펼쳐지기 때문. 그런데 그것을 과연 소비의 평등화라 주장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마이클 셔드슨은 부어스틴의 주장에 반박하며, 백화점이 소비의 평등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를 둘러싼 열망과 욕구의 평등화를 제공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 백화점의 진열장이나 카탈로그는 사람들을 거대한 상품의 세계로 자연스레 인도. 눈앞에 펼쳐진 상품들의 파노라마는 모르고 살아도 별 상관이 없을 온갖 물건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욕망은 사회적 지위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체험일 터였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셔드슨의 주장처럼 백화점이나 상품 카탈로그는 욕망의 평등화를 가져오는 매개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욕망의 평등화는 결코 소비의 평등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평등해진 욕망으로 인해 오히려 이미 계급화된 소비능력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 차라리 보지 않았으며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상대적 박탈감 말이다. 상품 카탈로그는 온갖 물건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격을 적나라하게 명시한다. 나아가 특정 상품과 어울릴 다른 상품이나 액세서리를 소개한다거나 나아가 그 상품이 놓일 공간가지도 제안. 이런 맥락에서 평등화된 욕구는 소비를 향해 활활 타오를수도 있지만 반대로 씁쓸함만 남긴 채 곧바로 꺾일수도 있다.
- 1740년까지도 북미 평범한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검소하고 검소한 삶을 영위. 그런데 영국에서 소비혁명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수많은 물건이 식민지에 쏟아져 들어오게 됨. 옷, 직물, 도자기, 유리제품, 금속제품, 차, 신문 등 갖가지 영국제 상품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식민지 구석구석에까지 퍼져나감. 식민지인들은 순종적 소비자들이어서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물건을 사는데서 자유의 의미를 맛보았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제 상품을 쓴다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은 본국과 자신들이 하나로 연결된 상상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는 이미 대서양 경제 공동체였고, 18세기 중엽에 식민지인들은 적어도 영국 수출품의 25%이상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의 동의 없이 과세된 강제조세는 이 평화로운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북미 주민들은 영국에 분노했으며 독립이라는 선택을 고려하게 됨. 그동안 식민지인들은 영국제 상품을 구입해 소비하면서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선택권이며 부르주아적 미덕을 배웠던 터였다. 그 것은 동시에 자신들이 영국에 소속감을 느끼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본국과 일체감을 느끼게 했던 상품들은 곧 저항을 위한 소품이 됨. 이 소품들, 즉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은 혁명가의 팸플릿에 적힌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실제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국 상품 수입거부운동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었기에 식민지의 다른 협의체에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도덕률과 원칙들이 도출될 수 있었다.
- 70년대 중반 이래 계속된 경기침체와 대량해고가 외제품의 범람과 이민지 출신 노동자의 증가때문일까? 마약 그렇다면 애국소비운동만 성공한다면 경제위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계속된 해고조치는 훨씬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익증대를 주목적으로 삼은 기업가들은 생산의 자동화 공정을 추진하고,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조가 발달하지 않은 작은 기업에 하청을 주는 한편 노동자를 해고했다.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비용절감을 내세워 기존 공장을 폐쇄하는 한편, 황량한 중서부 지역에 새로 조립공장을 세움. 노조가 바이 아메리칸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제너럴모텃터스, 포드, 크라이슬러의 빅3 기업은 신속히 해외로 진출. 80년대 말에 포드는 마쓰다 주식의 25%, 크라이슬러는 미쓰비스 주식의 24%를 소유하게 됨. 이런 상황이 되자 완전한 미국제라고 믿고 산 포드 자동차는 멕시코에서 멕시코 노동자가 만든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일본의 혼다는 오하이오 공장에서 미국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심지어 혼다는 전미자동차노조 UAW 상표를 부착할수도 있었다. 반면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포드는 그 상표를 붙일 수 없었다. 이제 상표로 상품의 국적을 가리는 일이 별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 20세기 중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리처드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들은 왜 미국 정치가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나 계급투쟁으로 나아가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들이 찾아낸 결정적 원인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소비경제의 확산. 근대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존립이 물질처럼 취급되는 물화를 겪게 되며, 인간은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로 전화.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삶의 질과 동일시 되면서 계급모순이나 계급불평등이 은폐된다. 사람들은 물질적 안락을 추구하며 사회적 상향 이동성에 대한 희망을 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저명한 역사가 다이엘 부어스틴도 소비가 사회적 연대를 희석시킨다며,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의해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연대한다고 한탄. 대량생산된 상품이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피상적 경험일뿐이라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과 균질화된 문화가 인간의 존재를 무기력한 야예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도 나오기 시작. 그 가운데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소비자 비평에 관한 한 가장 염세적 견해를 피력.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그 자체를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문화를 만들어내며, 그 결과 마치 마약중독처럼 그것을 주입받는 수동적 시민이 양산된다고 주장. 장 보드리야르 또한 소비자란 19세기 초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고 비조직적인 개인들로, 칭찬 받으며 아첨에 속아 넘어가는 얼간이 같은 존재라고 조소. 이처럼70년개까지 학계에서는 소비가 인간의 삶에서 시민권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를 제거해나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수수한 옷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고 호화롭게 치장한, 그런 옷이 잘 어울리는 연약한 존재이기를 요구. 왜 그랬을까? 17세기 중반이후 유럽은 간헐적 절대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장세로 돌아섰고,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 이 시기 산업은 해외교역보다 국내소비의 확장에 기대어 돌아가던 상태였다. 경제의 큰 축을 이루던 직물산업은 18세기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상태. 한마디로 물건은 넘쳐났고, 경제는 돌아가야 했고, 그 한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해가고 있었다. 남성들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아내나 딸, 연인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금전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학자는 소스타인 베블런
- 버나드 맨더빌의 논고를 필두로 악덕으로 규정되던 사치가 공익에 기여한다는 사상이 제기되기 시작. 맨더빌은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런던에서 개업의로 지내면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펼친 인물이었다. 1723년에 출판한 꿀벌의 우화는 애덤스미스 등 영국과 유럽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침. 꿀벌의 우화는 사치옹호론, 자선학교 유해론, 자유방임론 등을 주창한 글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사치를 악덕으로 폄하하는 당시의 인식을 위선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 그는 사람이 사는 데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것을 모두 사치라고 규정한다면 사치가 아닌 것은 세상에서 찾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그런 사치로 인해 경제가 돌아가므로 절약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것은 원칙적으로 모순이라고 지적. 맨더빌이 보기에 사치가 탐욕과 약탈을 부추긴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탐욕과 약탈은 실제로는 "남성이 지배하는 정부 탓이며 나쁜 정치 때문"이었기 때문. 그의 발언은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전통적 관념에 선을 긋는 일대 선언이었다. 그 발언으로 인해 사치와 여성을 연결시키는 오랜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사치를 악덕으로 몰아갔던 사치논쟁이 점차 안락함과 편리함 쾌락, 사교성, 취향, 심미안과 세련미 등에 대한 논의로 흘러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치논쟁에서 새롭게 나타난 논의들은 근대성 논쟁에서 다루는 수많은 화두를 이미 의제로 부각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맨더빌의 일갈이 나온 후 3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수많은 근대성 논쟁과 탈근대 논의를 거친 오늘까지도 여성의 드레스는 여전히 화려한 데 비해 남성의 턱시도는 단순하다는 사실이다.
- 유럽 엘리트들은 도자기 같은 중국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중국 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학자 안토니 파그덴은 타 문화권의 물건을 애호하는 현상이 타자를 소유하가조 하는 욕구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던 중국도자기의 물질적 가치 뒤에는 중국문화가 표상하는 상징가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일은 말콤 워터스의 주장처러 단순히 물질가치만이 아니라 상징가치 형태로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였다. 중국 도자기를 사들이고 전시하는 일은 유럽의 지배계급에게 특권에 걸맞은 행동과 미덕을 실천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됨. 그런데 상업의 발달로 인해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견고한 엘리트 장벽이 점차 허물어지자 지위상승 욕구에 불타는 중간계층이 상류층의 소비행위를 따라하기 시작. 이제 중간계층에서도 중국 도자기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생겨남. 그들은 소박하나마 선반에 중국도자기를 올려놓고 바라보며 만족해했다.
- 비누가 가장 제국주의적 상품으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값이 싸고 크기가 작아서 운반이 용이했을 뿐 아니라, 진보와 위생이라는 가치 아래 제국주의적 강압적 이미지도 희석할 수 있었기 때문. 그래서인지 청결과 위생관리를 위한 상품들의 광고는 종종 극단적으로 인종차별적이거나 국수주의적 양상을 띤다. 1891년 물에 뜨는 비누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세운 아이보리 비누광고에는 개울가에서 한 흑인 어린이가 아이보리 비누로 돛단배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의 표정에는 문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데, 만약 광고의 등장인물이 백인어린이여도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 위생과 청결에 대한 강조는 서양인이 생각하는 자연스런 상태를 아프리카인들에게 이식하려는 것.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청결개념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더럽고 냄새나는 야만인으로 인식해야지만 비누같은 문명세계의 물건에 대한 수요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 이런 측면에서 비누는 제국주의적 상품의 선봉에서 쐐기돌이나 마찬가지다. 비누가 아프리카에서 필수품으로 자리잡는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단순한 피식민지인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자들의 장기적 기획에 부응할 소비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열린 광고 컨벤션에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치약이나 비누를 파는 것이 아니고 이를 닦고, 몸을 씻는 새로운 방식을 파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하는 방법을 파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방식이란 결국 치약이나 비누같은 새로운 물건을 이용하는 방식을 말함. 이렇게 치약과 비누를 사용해본 사람은 가글액과 치실은 물론 제모제에서 탈취제에 이르기까지 향후 수없이 개발될 상품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는 셈이었다.
- 1885년 프렌치 와인 코카라는 이름의 강장제로 상표등록을 했던 코카콜라는 알콜 성분이 문제가 되자 와인대신 설탕시럽을 넣어 1886년 코카콜라로 재탄생. 음료수로 상품화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약 대용으로 소비됨. 1890년대 광고에서도 여전히 이상적인 자양강장제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 18세기 장터에서 구경꾼들은 돌팔이 의사의 현란한 말솜씨에 홀려 필요하지도 않은 강장제를 구매. 19세기에 본격화된 약광고는 멀쩡한 신체상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만들어냄. 아파서 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약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 것. 오늘날에도 의료시장은 의료상품 및 서비스의 공급과 이에 대한 소비 욕망인 수요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결국 약, 건강식품, 건강보조기구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육체는 거대한 소비의 장이 되어버림. 물질적 신체와 의약품, 그리고 비물질적인 욕망은 서로 뒤엉켜 변주하며 새로운 사회적 기준과 행위를 만들어낸다. 비아그라가 출시된 후 성적 능력의 새로운 척도가 나타났다든가, 사회적 압력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성형수술을 하는 세태나, 친구들과 단체로 목욕탕에서 마치 놀이처럼 눈썹문신을 받는 사례들을 생각해보라. 여기서 나타나는 욕망, 압력, 행위 들은 생리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인문학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질병과 치료, 심지어 약의효과도 물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으로, 이 또한 인문학적 시선으로 봐야 한다.
- 미국에서는 19세기 말에야 에이본 레이디가 등장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여성 방문판매원이 활동. 숙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화장품만을 취급하는 여성 방물장수 매분구의 존재가 나타남. 혹자는 여성들의 외출이 쉽지 않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이 집안의 여성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존재였다고 평가. 1962년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화장품 방문판매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고객의 대부분은 주로 전업주부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나라 화장품 전체 매출의 90% 이상이 방문판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케팅 연구자들은 이런 방문판매의 성공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 무엇보다 당시 화장품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부족했던 소비자들에게 판매원들이 직접 방문해 제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 주효. 다르게 말하면 판매원들의 수준이 높았고 훈련도 잘 이루어져다는 뜻. 또한 상대적으로 좁은 소비자 커뮤니티 안에서의 경쟁심도 판매율 상승의 동인. 즉, 이웃이나 친구가 샀으므로 덩달아 구매하거나 과시적 욕구에서 더 비싼 것을, 혹은 더 많이 사고자 하는 도익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미용에 대한 전반적인 상담을 개인적 차원에서 받을 수 있고, 다양한 견본품 제공이나 마사지 서비스 등으로 소비자가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방문판매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요인이었다.
- 베블런은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습성을 갖게 된다고 지적. 그래서 산업적으로 발달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정생활에 대해 공개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생겨남.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상류층 사이에는 프라이버시 개념과 과묵의 습관이 필수적 예법으로 자리잡게 됨.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서두에서 언급한, 집에서 무엇을 먹는지 친구들이 모르게 하라는 금지령은 노동계급 나름의 프라이버시 예법일 수 있었다. 오늘날 SNS에는 자신이 먹은 음식을 찍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이 새로운 유행을 볼 때면 의문이 생기곤 한다. 그 음식사진들은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빅토리아 시대적 예법이 완전히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걸까? 혹은 그것들이 뽐낼 수 있는 음식이어서 자랑하는 걸까?
- 물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집착이 용인되는 한편, 그것이 결국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모순은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갈등과 모순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다니엘 벨은 이를 일컬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정의. 한쪽에서는 프로테스탄드 윤리와 연결된 금욕과 통제의 가치가 고양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쾌락주의와 즉각적 만족에 근거를 둔 소비주의적 윤리가 동시에 발전하면서 갈등과 모순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성형수술의 역사는 코를 복원하는 수술에서 출발. 15세기 말부터 유럽에 매독이 유행하면서 코를 잃어버린 사람이 많아짐. 코뼈에 매독균이 감염되면 연골조직이 붕괴되면서 코가 망가지는데, 이는 성병과 관련되어 도덕적 타락의 표지로 여겨짐. 그때문에 코 복원수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 이마의 피부를 절개해서 그대로 뒤집어 코 위에 덧씌우는 등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끔찍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사실상 이런 수술은 초창기 미용성형이었던 셈. 이런 맥락에서 유럽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성형수술은 곧 코수술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 흥미롭게도 19세기 유럽사람들은 유대인이 유럽인보다 아프리카인데 가깝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흑인과 피가 섞여 있거나 혹은 최소한 인종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 가설이었다. 그런데 물욕과 큰 관계가 없는 흑인과 달리 유대인은 재물욕심이 많은 탐욕스런 집단으로 여겨졌고 유대인의 긴코 혹은 매부리코는 악덕의 표상이 됨
- 94년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외모가 금전적 이익과 결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결론은 평균이상의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12% 정도 더 높은 소득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이후 외모와 자본주의적 이익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수많은 연구를 촉발. 2012년 한국인 2만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도 외보가 본인 혹은 배우자의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도출됨. 그런데 성형수술로 외모가 달라진 경우에는 어땠을까? 흥미롭게도 성형수술로 외모가 개선되어 수입이 증가하더라도 그 수준이 성형수술비용을 충당할 만큼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따. 연구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성형은 투자라기보다 본인의 즐거움을 위한 소비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띤다고 결론지었다.
- 17세기 바스의 발달과 인공온천장의 설립은 소비혁명의 테제를 재검토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됨. 18세기에 부를 축적한 중간계급의 자신감과 공론장의 확대로 인해 소비에 대한 수요가 생겼고, 소비혁명이 일어났다는 테제 말이다. 18세기 이전, 이미 16~17세기에 온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사람들은 활발하게 그 서비스를 소비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종교개혁이 불러온 사회전반의 세속화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어쩌면 서비스 분야에서에의 소비혁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보다 먼저 발달했고, 그거이 본격적 소비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 대박람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850년대 영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 산업화와 해외 식민지 수탈로 얻은 대영제국의 풍요가 조금씩 사회하층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한 것. 노동시간 단축, 임금상승 등 노동계급의 상황도 개선되어감. 1830~40년대 차티스트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던 사회적 불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좀더 여유로운 시절이 도래. 수정궁을 찾은 노동자들은 이제 더이상 집단행동을 통해 권리를 찾으려 하는 위험한 군중이 아니었다. 이들은 거대한 상품더미의 스펙터클을 보러 모여든 구경꾼이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박람회가 단지 구경꾼을 끌 수 있는 볼거리만 제공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조직위원회는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향후 넘쳐나는 영국산 제품을 사용해줄 소비자를 양산하려고 했다. 그리고 주 타겟은 아직도 검약과 노동의 미덕을 굳게 믿고 있던 중간계급과 그 아래계급이었다. 산업화가 진전되어감에도 19세기 중간계급과 심지어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조차도 나날이 화려해지는 소비의 영역에서 상당히 소외되어 있었다. 이처럼 특별한 소비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이들에게 대박람회는 일종의 새로운 교육과 경험의 장이 되어야 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주저하는 소비자들을 유치하고, 길들이기 위해 주최측은 1실링짜리 입장권과 더불어 영광스런 상품들이 거래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모토를 내세웠다.
- 상품으로 채워진 수정궁은 그야말로 거대한 박물관이자 시장이었다. 나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스펙터클한 새로운 물질세계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난생처름 보는 물건들과 지구 저 먼 곳으로부터 가져온 다양하고 신기한 상품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 엄청난 가짓수와 규모는 상품의 쓰임새와는 별도로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상품이라는 것 자체를 새로운 근대적 기호로 각인시켰다. 비록 관람하는 시간은 달라도 수정궁에서는 왕족부터 노동자까지 모두 같은 상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토머스 리처즈의 말처럼 그 경험은 "콕 집어 말할수는 없지만 이 진귀하고 고급스런 물건들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누구나의 손에 평등하게 쥐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했던 것이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자라는 새로운, 하나의 집단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다이엘 부어스틴은 백화점은 사치적 소비를 평등화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누구든 상관없이 원하기만 하면 눈앞에 값비싼 물건이 놓이기 때문. 그렇게 보자면 상품 카탈로그도 마찬가지. 누구든 카탈로그를 펴기만 하면 바로 눈앞에 수천가지의 물건이 펼쳐지기 때문. 그런데 그것을 과연 소비의 평등화라 주장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마이클 셔드슨은 부어스틴의 주장에 반박하며, 백화점이 소비의 평등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를 둘러싼 열망과 욕구의 평등화를 제공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 백화점의 진열장이나 카탈로그는 사람들을 거대한 상품의 세계로 자연스레 인도. 눈앞에 펼쳐진 상품들의 파노라마는 모르고 살아도 별 상관이 없을 온갖 물건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욕망은 사회적 지위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체험일 터였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셔드슨의 주장처럼 백화점이나 상품 카탈로그는 욕망의 평등화를 가져오는 매개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욕망의 평등화는 결코 소비의 평등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평등해진 욕망으로 인해 오히려 이미 계급화된 소비능력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 차라리 보지 않았으며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상대적 박탈감 말이다. 상품 카탈로그는 온갖 물건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격을 적나라하게 명시한다. 나아가 특정 상품과 어울릴 다른 상품이나 액세서리를 소개한다거나 나아가 그 상품이 놓일 공간가지도 제안. 이런 맥락에서 평등화된 욕구는 소비를 향해 활활 타오를수도 있지만 반대로 씁쓸함만 남긴 채 곧바로 꺾일수도 있다.
- 1740년까지도 북미 평범한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검소하고 검소한 삶을 영위. 그런데 영국에서 소비혁명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수많은 물건이 식민지에 쏟아져 들어오게 됨. 옷, 직물, 도자기, 유리제품, 금속제품, 차, 신문 등 갖가지 영국제 상품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식민지 구석구석에까지 퍼져나감. 식민지인들은 순종적 소비자들이어서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물건을 사는데서 자유의 의미를 맛보았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제 상품을 쓴다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은 본국과 자신들이 하나로 연결된 상상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는 이미 대서양 경제 공동체였고, 18세기 중엽에 식민지인들은 적어도 영국 수출품의 25%이상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의 동의 없이 과세된 강제조세는 이 평화로운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북미 주민들은 영국에 분노했으며 독립이라는 선택을 고려하게 됨. 그동안 식민지인들은 영국제 상품을 구입해 소비하면서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선택권이며 부르주아적 미덕을 배웠던 터였다. 그 것은 동시에 자신들이 영국에 소속감을 느끼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본국과 일체감을 느끼게 했던 상품들은 곧 저항을 위한 소품이 됨. 이 소품들, 즉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은 혁명가의 팸플릿에 적힌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실제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영국 상품 수입거부운동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었기에 식민지의 다른 협의체에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도덕률과 원칙들이 도출될 수 있었다.
- 70년대 중반 이래 계속된 경기침체와 대량해고가 외제품의 범람과 이민지 출신 노동자의 증가때문일까? 마약 그렇다면 애국소비운동만 성공한다면 경제위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계속된 해고조치는 훨씬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익증대를 주목적으로 삼은 기업가들은 생산의 자동화 공정을 추진하고,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조가 발달하지 않은 작은 기업에 하청을 주는 한편 노동자를 해고했다.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비용절감을 내세워 기존 공장을 폐쇄하는 한편, 황량한 중서부 지역에 새로 조립공장을 세움. 노조가 바이 아메리칸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제너럴모텃터스, 포드, 크라이슬러의 빅3 기업은 신속히 해외로 진출. 80년대 말에 포드는 마쓰다 주식의 25%, 크라이슬러는 미쓰비스 주식의 24%를 소유하게 됨. 이런 상황이 되자 완전한 미국제라고 믿고 산 포드 자동차는 멕시코에서 멕시코 노동자가 만든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일본의 혼다는 오하이오 공장에서 미국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심지어 혼다는 전미자동차노조 UAW 상표를 부착할수도 있었다. 반면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포드는 그 상표를 붙일 수 없었다. 이제 상표로 상품의 국적을 가리는 일이 별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 20세기 중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리처드 호프스태터 같은 학자들은 왜 미국 정치가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나 계급투쟁으로 나아가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들이 찾아낸 결정적 원인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소비경제의 확산. 근대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존립이 물질처럼 취급되는 물화를 겪게 되며, 인간은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로 전화.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삶의 질과 동일시 되면서 계급모순이나 계급불평등이 은폐된다. 사람들은 물질적 안락을 추구하며 사회적 상향 이동성에 대한 희망을 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주장이다. 저명한 역사가 다이엘 부어스틴도 소비가 사회적 연대를 희석시킨다며,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의해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연대한다고 한탄. 대량생산된 상품이 사람들을 연결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피상적 경험일뿐이라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과 균질화된 문화가 인간의 존재를 무기력한 야예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도 나오기 시작. 그 가운데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소비자 비평에 관한 한 가장 염세적 견해를 피력.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그 자체를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문화를 만들어내며, 그 결과 마치 마약중독처럼 그것을 주입받는 수동적 시민이 양산된다고 주장. 장 보드리야르 또한 소비자란 19세기 초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고 비조직적인 개인들로, 칭찬 받으며 아첨에 속아 넘어가는 얼간이 같은 존재라고 조소. 이처럼70년개까지 학계에서는 소비가 인간의 삶에서 시민권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를 제거해나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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