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 조선에 살다

역사 2017. 10. 9. 13:08

- 군청의 소재지는 대체로 군에서 가장 큰 읍이다. 그러나 읍이라고 해봐야 시골마을보다 규모가 약간 클 뿐이고, 마을의 여느 집보다 크고 위압적인 모습을 지닌 관청건물을 빼면 다른 마을과 별다른 것이 없다. 더구나 이들 관청 건물은 대부분 낡았고 매우 황폐한 꼴을 하고 있어서 곧 기우뚱 거리다가 무너질 것만 같다. 이런 상황은 대체로 오늘 해야할 일을 내일만이 아니라 가급적 먼 시점까지 미루려 하는 조선적 원칙의 탓으로 돌릴 수 있따. 조선인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무슨 걱정이야. 오늘 괜찮으면 됐지, 내일 일을 누가 아나"
- 의사가 세균과 미생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서울 주민들은 이 좋은 시절이 오기 훨씬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들이 세균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이유는 1년에 한번씩 두달동안 찾아오는 장마가 모든 개천과 수로들을 씻어내리기 때문이리라. 또하나 이들이 무사한 이유는 1년 중 석달동안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이들 동양의 세균들을 꼼짝 못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서구세계의 대도시들과 달리 서울은 일손을 놓고 휴일을 보내는 큰 도시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직업도 없고 어떤 종류의 일도 하지 않는 수천명의 특별한 존재가 있다. 이들은 길을 거닐고,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며, 옛 지혜의 심오함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선비 역할을 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이들이 바로 양반 혹은 사대부들이다. 그들은 여러해 동안 한문공부를 해서, 국왕 폐하께서 이런 무가치한 인간 벌레들에게 관직이라는 은총을 내리면 그것을 감읍하여 받아들일 존재들이다.
- 주막의 방에는 베게로 쓰이는 목침말고는 이불은 물론 어떤 형태의 가구도 없다. 볏짚 돗자리로 덮여 있는 따뜻한 방바닥만이, 내가 이 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주막들에서 보았거나 여러날 밤을 지내며 경험한 잠자리의 전부다. 객실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5미터의 정도의 크기로, 한방에 열다섯 내지 스무명이 동시에 들어간다. 어떤 방은 가로, 세로 모두 2.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아, 바닥에 누워 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상자안의 정어리들처럼 포개져 있다"라는 말이 연상된다. 한번은 한 방에서 서너명과 함께 잔 적이 있는데, 내가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문을 조금만 열어놓자고 큰 소리로 말하자, 한 손님은 겁에 질려 차지하고 있던 따뜻한 아랫목에서 일어나 아주 밖으로 갔다. 모든 문들을 꼭꼭닫아, 잠자는 기쁨을 온통 만끽할 수 있는 다른 방을 찾아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몹시 추운 날 밤, 하루종일 입는 옷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덮을 거리도 없는 형편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가급적 찬바람을 멀리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 주막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냄새는 전적으로 교육의 문제지, 실제 문제는 아니다. 다시 말해, 냄새가 향기로우냐, 불쾌하냐는 것은 대체로 그 냄새에 길들여졌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객의 경우 어느 따뜻한 봄날 밤 이 주막에 들러 오랜 기간 머무르기 전까지는 분명 이 고을에서 뭔가 썩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여행객에게는 꽤나 불쾌한 이 모든 냄새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맛있는 식사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고 식욕을 돋우는 요소로 작용.
- 미국돈으로 10센트면 저녁과 아침식사를 포함한 하룻밤의 숙박료가 된다. 아니, 숙박료가 덤으로 포함된 저녁과 아침밥값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숙박에는 돈을 받지 않고, 아침, 점심, 저녁식사에만 모두 같은 가격을 매긴다. 10센트는 이나라 최고수준의 주막인 경우이고, 더 허술한 주막에서는 이런 정도도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생계비가 이렇게 싼데도 왜 사람들이 더 여유롭게 살지 못하나 의아해할 것이다. 이는 일반 노동자가 하루종일 열심히 일해서 버는 돈이 10센트이고, 그래서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면 그가 종일 일한 하루치 임금을 다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조선의 노동자에게 10센트를 받는 주막은 미국 노동자에게 2달러 50센트나 3달러를 받는 여인숙보다 결코 싼 것이 아니다.
- 딸이 아닌 아들에 대한 비합리적 욕망 자체는 조상숭배에 근원을 둠. 소년은 자라서 그 가족의 제주가 되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알맞은 제물이 준비되고 있는지, 제사가 제대로 진행되는지를 감독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소년들을 잘 교육하여 조상을 공경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은 부모의 큰 소망이다. 이런 것이 부모들로 하여금 소년들이 버릇없게 될 정도로 비위를 맞추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이 더 하고픈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면, 부모가 죽은 후에 아들이 부모의 관심사를 등한히 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후세계에서의 행복은 후손들이 제사를 얼마나 잘 지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딸들은 원칙적으로 이런 의식을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가족에는 아들이 있어야 하며,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양자를 들여야 한다.
- 여성들의 노동과 고생이 하찮게 여겨지는 가운데, 그들의 희망을 영원히 짓밟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이름없는 존재라는 사실. 어린 소녀에게는 가족내의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일종의 이름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하면, 그녀의 이름도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그녀가 결혼하는 날 그녀는 이름뿐 아니라 정체성까지 잃게되어, 그 이후로는 단지 누구의 아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의 집(댁)으로 알려지게 된다.
- 그녀가 신령스런 축복을 받아 아들을 낳고 어머니가 되면, 모든 이웃들로부터 축하를 받을 것이며, 그 이후부터는 소년의 어머니로 알려진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누구엄마로 부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제 야망의 정점에 도달한다. 그녀는 아들을 가져, 그 아들이름에 의해서 그렇지 못한 마을의 다른 여인들과 위치가 구별되는 것이다. 이나라 관습에 비춰보면 그녀는 단지 그것일 뿐이고, 그녀의 남편도 그녀를 그렇게 대한다. 만약 결혼후, 그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때, 그는 그녀를 내보내거나, 교환하거나, 팔아버리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이혼의 첫번째 사유가 아들을 낳지 못한 죄요, 두번째 사유는 시어머니에게 말대꾸한 죄다.
- 관광객이 서울에 오게되면, 9시경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든 후 도시를 구경한다. 그는 세상이 조용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고국에서 늘 보아온 광경과 비교할 때 조용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전혀 활기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있는 사람들도 하루종일 걸어봐야 다음 길모퉁이에나 갈 정도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조선 사람들이 매우 게으르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 4시에 일어나 나가본다면, 바로 저 졸고 있는 듯이 보이는 거리가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엄청나게 붐비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9시경에 탈 것을 타고 수킬로 밖으로 나가보면, 먼 지방에서 도시로 와서 자신의 생산품을 팔고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남자들과 아이들로 길가가 부산한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 시골농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후 일하러 나간다. 9시경에 아내가 들판으로 새참을 들고 나오면, 농부는 이를 먹고 담배를 피운후 잠시 누워 낮잠을 잔다. 바로 그러할 때 관광객이 그를 보고서는 자신이 늦잠을 자는 동안 농부가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른채 농부가 매우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정오에 농부는 집에 돌아가 밥과 김치로 차린 든든한 점심을 들고 다시 짧은 낮잠을 즐긴다. 농부는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 일하다가 오전과 비슷한 오후새참을 들고 한참 담배를 피운후 일을 시작하여 마음내킬 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 관직을 맡은 양반아래에는 농민, 그 다음에는 상인의 신분이 있다. 상인의 수는 많지만 몹시 영세하여,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라면 아예 상인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 전에는 보부상이라고 하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행상과 지방상인으로 구별되었는데, 그들은 정치에도 측며에서 간여하여 관리들이 감히 맞서려 하지 않을 정도다. 간혹 그 조직이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는 하지만, 지난 10년간 보부상 조직은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거의 힘을 상실. 전성기의 보부상 조직은 규율이 엄격했으며 서양의 노동조합보다 조합의 기술에서 한수 위였따. 보부상 조직과 유사한 조합들이 소매상인과 다른 직종에서도 존재했다. 한 마부와 흥정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도시의 마구간 조합장이 반대해 거래가 깨졌다. 따라서 시골상인은 그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장사를 할 수 없다.
- 많은 조선 어린이들은 신체의 한 부분에 흉터가 있다. 아팠을 때 불로 지져서 생긴 자국이다. 가장 흔한 곳은 정수리와 등인데, 흔히 영아나 유아시절에 생긴 것이다. 어린이가 이름모를 심한 질병에 걸리면, 한의사가 와서 어떤 가연성 물질을 정수리에 놓고 태운다. 시골사람들은 이런 치료법을 매우 신뢰한다. 많은 흉터가 이를 잘 말해준다. 정수리에 흉터가 있는 한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가 갓난아기였을 때 숨이 끊어졌는데 한의사가 정수리에 불을 놓아 살렸다고 한다. 이렇게 온갖 치료법이 듣지 않는 불치병을 다스린다며 조그마한 양쪽 등에 뜸을 놓아 생긴 흉터를 가진 어린이를 흔히 볼 수 있다.
- 천연두에 관해 아주 이상한 미신이 있다. 한 아이가 천연두에 걸려 죽은후 가족중 다른 아이가 또 같은 병에 걸리면 그 아이가 회복될 때까지 죽은 아이를 묻지 않는다는 것. 무덤을 파면 마마귀신이 모욕을 느껴, 다른 아이의 얼굴을 긁어 평생 흉측한 모습이 남도록 병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아이의 시신은 거적에 싸거 나무에 묶어 놓거나 개들이 넘보지 못할 높은 단에 올려 놓아 귀신을 격노시키지 않은 채 묻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 사망이 선언되자마자 누군가 서둘러 부엌에 가서 쌀밥 세그릇을 마련했다. 이와 동시에 짚신 세켤레가 준비되어, 쌀밥과 함께 적절한 장소에 놓여 혼령에게 제물로 바쳐졌따. 제물을 차리는 장소는 보통 지붕위나 근처 언덕 혹은 네거리의 길가가 된다. 여행할 때마다 적어도 한차례 이상 길가에 쌀밥과 짚신이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지금 막 죽은 사람의 혼령과 그를 동반해가는 저승사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 여로는 멀기에 출발하기 전에 잘 먹이고 신발을 갈아신겨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관습은 조선인의 내세에 관한 믿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혼령들에게 알리려고 그의 친구가 망자의 속옷을 벗겨 지붕위로 가지고 올라가 시신이 누워있는 장소 위에서 공중에 흔들어대며 망자의 이름을 부른다.
- 모든 해악은 정치에 있어서의 최고의 악인, 즉 1인 통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조선의 정부와 법률츼 체계는 국왕은 백성이 아버지이며 지배자라는 관념위에 세워져 있다. 국왕의 손아귀에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 것. 이런 경우 모든 관리는 백성이 아니라 국왕에게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관리의 일차적 관심사가 사리를 탐하고 국왕의 마음에 드는 것일 경우, 백성들이 자신을 무어라 여기며 자신의 업무수행 방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보통 관직을 얻는 방법은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공직 희망자의 지적, 도덕적 능력보다는 주머니의 크기가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관리가 받는 봉급은 적다. 그래서 관리는 백성으로부터 돈을 벌게 되어 있다. 백성들이 하는 말이 맞다면 보통의 관리들은 다 그런 셈이다.
- 세금을 징수하는 원칙은 아마 걷을 수 있는 모든 것,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간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중앙정부가 일정한 금액을 필요로 하면, 각 도의 관찰사에게 할당이 되고, 여기서 다시 각 고을의 사또를 거쳐, 나라를 위해 기꺼이 그런 업무를 수행하려고 하는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 국왕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동안 총액이 얼마나 부풀려지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다. 물론 이런 돈을 거두는 사람은 당연히 그 수고비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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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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