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계의 팽창, 세계의 불균형
- 아시아 해상교역의 특징은 정치,군사 세력이 분산되어 있고 문화적으로 극히 다양했다는 점. 이 광대한 영역은 다른 어느곳보다도 비동질적이었다. 이 말은 곧 아시아 각지의 상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의미. 해적과 같은 위험요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시아의 바다는 대체로 자유로운 상업무대였다. 상업활동의 중심지인 항구도시들은 대부분 이방인 상인들의 진입과 활동을 막지 않음. 후일 유럽상인들이 비교적 쉽게 아시사 현지 교역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이방인 상인들을 환영하는 이 지역의 특성 때문이었다. 근대초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바다는 말하자면 만국보편의 세계였음. 바닷길을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정보와 지식이 소통되는 세계, 그리하여 모든 지역이 서로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다. 예컨대 1178년 주거비가 쓴 영외대답이나 1225년 조여괄이 쓴 제번지를 보면 중국이 동남아 여러지역과 매우 활발히 교역을 했고, 각 지역의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명권이 유럽보다 세계지리를 훨씬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남아프리카를 그린 지도를 들 수 있다.
- 중국 정부는 필리핀 거주 중국인들이 두번 연속 대학살을 당하게 될 정도로 해외거주 화교들을 사실상 방치. 마닐라든 나가사키든 간에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유럽출신 상인, 사제, 군인들과 경쟁하지 못했다. 왕권의 후원을 받는 에스파냐인들, 국가의 지원을 받는 동인도회사의 강력한 힘 앞에서 중국상인들은 다만 개인적 조심성, 혹은 위험을 피해가는 자신들의 노하우로 버텨야 했다. 그러나 친척간의 협력이나 마을 공동체의 보호에 의존하는 정도로는 위험에 대처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때로는 학살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과 종교적 힘을 발휘하는 에스파냐인들, 직접 쇼군과 만나서 담판하는 네덜란드인들이 중국인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 결국 중국상인들은 그들 스스로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체제를 운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든 체제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국정부 주도로 인도양 세계를 통제하고 더 나아가서 전 세계의 바다로 나아갈 가능성은 정화 원정 종료 이후로 사라짐. 민간인들의 확산이 이루어졌지만 정부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이 역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결국 중국이 아메리카나 유럽으로 간 것이 아니고 유럽이 아시아의 바다로 들어왔다. 세계의 바다를 연결시킨 것은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 스틴스고르의 이론을 정리하면, 주로 무력을 이용하여 보호지대를 누리는 식이었던 포르투갈의 사업은 아시아의 기존 상업체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데 비해, 똑같이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시장경제를 통한 사업이익을 얻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의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포루투갈의 소위 에스타도 체제는 무력을 통해 상대의 이윤을 빼앗은 방식, 즉 재분배(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이윤의 일부를 자기가 취하는 것) 형태였다. 이러한 약탈 방식은 현지의 경제구조에 아무런 변화를 가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물론 무력을 행사했지만 그 목적은 약탈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교역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교역을 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무력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동인도 회사는 에스타도와는 원리적으로 다른 제도였으며, 따라서 아시아의 상업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컸다. 동인도회사의 사업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소위 현지무역이다. 이는 아시아의 어느 한 지역에서 구입한 상품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가서 처분하고 그 돈으로 그곳의 상품을 사서 다른 곳에 판매하는 식의 연쇄적 거래관계를 말함. 이 상업망이 잘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동인도 회사의 활동의 관건이었다. 스틴스고르는 동인도 회사의 이런 활동이 아시아 현지의 시장경제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고, 크게 보면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이 시장을 향한 생산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음.
- 19~20세기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변화의 씨앗은 그 이전에 준비되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 15~18세기에 세계의 무게중심은(인구로보나 총생산으로나) 여전히 아시아에 있었다. 유럽은 아시아에 비해 뒤처져 있었으며,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근본적으로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시기에 세계 각 지역은 서로 조우하고 교류와 충돌, 적응 등의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을 거친후 세계의 무게중심이 아시아로부터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세계의 패권을 쥐기 시작. 이는 단지 일부 국가가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패권국가들은 단지 앞서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체제를 세계 전체에 강요했기 때문이다. 인도, 중국, 오토만 등의 질서 혹은 조공체제는 무력하게 되거나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서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세계의 구조를 규정했다.
2장. 세계와 유럽의 조우: 유럽의 해상팽창
- 포르투갈은 세계팽창의 뇌관 역할을 함. 이 작은 국가가 전 세계 3대륙에 걸친 거대한 규모의 식민국가가 된 것은 흔히 미스터리로 표현된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주 많은 설명이 제시됨. 브로델은 이에 대해 전통적 설명과 새로운 설명으로 정리. 그가 말하는 전통적 설명은 아직까지 많은 교과서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이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출발하기에 유리했다. 이나라는 1253년부터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자국의 영토회복을 완수했으며, 그래서 외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여력을 가지게 되었다. 1415년에 지브롤터 해협 남쪽의 세우타를 점령하여 원거리 무역의 비결을 터득하고 십자군이라는 공격적 정신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다라가는 탐험여행의 문호가 열렸다. 이때 앙리케라는 영웅이 등장하여 탐험여행을 열정적으로 고취했다." 이런 견해를 수정하는 새로운 설명들은 다음과 같음. "우선 포르투갈은 무시할 만한 소국이 아니다. 이 나라는 수세기동안 이슬람 국가들가 접촉해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1358년에 리스본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서 아비스 왕조가 들어섰으며, 이 왕조에선느 부르주아 계급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이 해외팽창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반쯤 몰락한 귀족들은 해외에서 요새를 건설하고 그곳을 지휘하는 인력을 제공했다." 여기에 보충하여 좀더 새로운 설명들을 제시할 수 있다. 우선 포르투갈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 포르투갈의 특징은 한마디로 상이한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다는 점. 첫째, 이 나라는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나라는 이슬람권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기독교권의 영토회복을 완수한다는 종교적, 군사적 이데올로기가 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권이 발달된 문화를 흡수했고, 아프리카의 중요산물들(금과 말라게타 같은 향신료)을 교역하면서 부를 쌓았다.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 국가형성의 기본 이데올로기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리스본 시내에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슬람 구역이 존재했다. 편협성과 관용이 공존하는 이런 상태가 나중에 아시아의 고아나 말라카에서 한편으로는 지배와 정복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역과 전도에 주력하는 모순적 태도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리 외지에서 기꺼이 현지인들과 결혼하여 정착하는 포르투갈인들의 태도 역시 일찍부터 이민족 문화와 접촉한데서 싹텄을 것이다. 둘째, 이 나라는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중해권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지중해 지역상인들은 일찍부터 대서양 교역을 해 왔다. 이탈리아 선박이 북유럽 항로를 직접 개척한 데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15세기에 터키 세력의 강화로 동지중해 사업 전망이 어두워지자 지중해와 대서양의 연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 자본이 포르투갈로 많이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상인과 선원들도 이베리아 반도내의 상업 공동체로 많이 이주해갔다. 그러므로 포르투갈이 해외팽창은 분명 매우 독특한 현상이지만 사실 그것은 중세 이래 준비된 것이다.
3장. 근대 해양세계의 내면: 선박, 선원, 해적
- 근대초에 유럽의 배들이 규모가 커지고 디자인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배들은 실로 가소로운 수준. 사실 이 배들은 오늘날 한강유람선만한 배들이었다. 근대 초 유럽의 원양항해는 비유하자면 한강유람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인도양과 희망봉을 거쳐 유럽까지 항해하고 돌아오는 행위에 해당. 유럽의 해양탐사를 설명하면서 진취적인 용기 운운하는 것은 순전히 레토릭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작은 배를 타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 바다로 나아가 다른 대륙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를 넘는 용기가 필요. 이는 오늘날 우주선을 타고 다른 별로 가는 것과 유사한 경험일 것이다.
- 근대초 해양항해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진 위험에 찬 사업. 선박과 항해술이 발전하여 세계 각 지역간 소통이 가능해졌지만 해상위험이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었음. 이 시대 해상사업은 문자 그대로 모험사업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소자본을 가지고 시작한 벤처기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장되었다. 초기의 위험요소들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수익가능성이 확인되자 지금까지 사업의 전망을 주시하던 대자본과 정부도 간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변방 국가만이 아니라 중심국가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됨. 선박도 커지고 항해의 규모도 폭발적으로 증가. 여전히 위험성은 컸지만 그것을 내부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이렇게 대자본과 국가가 결탁하면서 자본주의 발전이 본격화됨. 그러나 이런 발전의 이면에는 그런 위험을 실제 몸으로 감내한 선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선상폭력현상이 언제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근대에 들어와 유독 심해진 것일까? 윌리엄 맥피는 '18세기에 들어서 해양생활이 거의 보편적 특징이 되었던 현상, 즉 선장이 그의 선원들을 극히 잔혹하게 다루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무제한적 권한 같은 것은 중세법 조항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 중세에도 선상에서 사적인 폭력이 이루어졌으이라고 상상할수는 있지만 근대에서처럼 선장 및 간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공식적 권위를 통해 살벌한 폭력을 위드른 일을 드물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극단적 선상폭력 역시 자본과 인력의 대규모 집중과 동시에 강력한 계서제가 형성된 근대의 특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계서제의 제일 아래에 깔려 있는 평선원들은 첫번째 희생자로서 크나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들은 근대 프롤레타리아의 때 이른 전형으로서 그들만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형성하며 이 체제에 저항. 그러나 폭령성이 더욱 심화되면서 결국 체제내의 저항을 넘어서 이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외부저항이 형성되었다. 해적 세계가 그것이다.
4장. 근대적 폭력, 폭력적 근대: 군사혁명과 유럽의 팽창
- 다른 지역보다 먼저 유럽에서 선박과 대포가 성공적으로 결합한 것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정적 요소중 하나라고 강조한 또 다른 연구자로는 맥닐이 있다. 유럽선박에 포가 장착된 이후 상대방에게 강제로 교역을 강요할 수 있고 해적질도 능하게 할 수 있었다. 사실 배에 포를 장착하는 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무거운 대포를 갑판 위에서가 아니라 흘수선에 두어야 함. 그러기 위해서는 선체 내부에서 포를 발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배의 양면에 방수처리를 한 포문을 내야 했다. 또 포를 쏠때 똑같은 힘으로 반동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 뒤로 되튀는 힘을 잘 처리하지 않을 경우 몇번 포를 쏘면 배가 깨지게 된다. 이를 해결한 것이 바퀴를 이용해 충격을 완화시키는 장치인 발사대이다. 이런 일련의 발전끝에 유럽배와 다른 지역 배 사이에는 무장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생김. 대서양의 험한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유럽의 배들은 처음부터 튼튼하게 건조한 데다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한 이후 큰 문제 없이 함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데 비해 인도양의 배들은 선체가 약하기 때문에 대포를 설치하기도 힘들고, 또 상대의 포 공격에 대단히 취약. 바로 이 점이 유럽 선박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었다 포르투갈 선박이 인도양에 가서 처음 벌인 해전에서부터 뚜렷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고 서양인의 출입을 통제할 대도 네덜란드인만 예외로 받아들인 데는 네덜란드 인들이 군사기술을 열심히 전수하려했던 요인도 작용. 흔히 일본의 군사기술에 대해 여기까지만 언급하지만 이는 한쪽 면만 본 것과 마찬가지. 일본의 군대에서 대포의 효능은 제한적이었으며, 조총은 전투의 승패를 가를만큼 결정적이지 않았따.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의 전통적 전술과 사무라이들의 장검이 더 가공할 힘을 발휘. 아닌게 아니라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일본의 총포제작은 오히려 쇠퇴. 다른 지역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열심히 서양식 총포를 배우려 했던 일본이 결국은 이를 포기하려 한 것은 미스터리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서양 포 제조술은 일본에서 정착하지 못했다. 일본인은 이제 포보다는 서양의 다른 군사기술, 즉 군사훈련, 전술론, 엔지니어링으로 관심을 옮겼다.
- 총포류를 포기한데는 사회사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임. 총은 하급서민들을 연습시켜 사용했던 반면, 기존의 장검은 사무라이층이 독점. 총포류가 발달하면 결국 사무라이층이 불필요하게 됨. 이런 점에서 기득권층인 사무라이층이 총포류를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사례를 보면 파커의 설명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커는 서양보다 전력이 약한 비유럽세력이 서양군사기술을 배우지 못하여 전쟁에서 지게 된다고 설명했지만, 일본은 서양 군사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했따기보다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가깝다. 그것은 일본이 서양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은 군사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과도 또 달라서, 18세기 이후에 유럽식의 군사혁명과 유사한 변화를 따라간 것으로 보임. 무엇보다 중국으로부터 대형 화포제조법이 도입된 것이 큰 변화를 가져옴. 영조 7년 서양식 대형화포인 홍이포가 조선 최초로 제작됨. 명발에 중국에 들어온 이 대포는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이 사용하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그 이후 수레를 이용하여 운반하게 됨에 따라 야전에서 용이하게 활용할 수 있어서 더욱 위력적이 되었다. 정약용의 언급이 이런 점을 말해준다.
- 유럽은 한번 전쟁을 하게 되면 최대한의 군사력을 동원해서 공격하는 경향. 이때 전쟁의 종교적 의례, 문화적 가치 등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전력을 다해 싸우는 총체전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모두 유럽의 적극적 호전성, 더 나아가서 최대한의 무력을 집중시키려는 열정을 강조한 바 있다. 그 결과 전쟁 피해 역시 극대화됨. 이에 비해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양상이 전개됨. 지도자의 지위와 권위는 그가 모을 수 있는 사람들 수에 달린 것이므로 전쟁에 임하는 양편 모두 사람들을 살상하는 전략을 가급적 회피. 전쟁의 일반적 목표는 포로를 많이 잡아서 노예로 팔거나 부려먹는 것. 그래서 전쟁이 의식화되기 쉽고, 결과적으로 인명손실이 적음. 그렇다고 해서 유럽 이외의 지역에 폭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중요한 차이는 일단 유럽인들이 전쟁에 돌입하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경향이 있음
- 유럽에서 일어난 군사혁명은 결과적으로 전 세계에 폭력이 더욱 넘쳐나도록 만들었다. 우선 유럽내에서 전쟁이 극도로 빈번해짐. 유럽대륙 전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완전한 평화를 이루던 시기는 16세기에 10년미만, 17세기에 4년, 18세기에 16년에 불과. 17세기에는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은 3년중 2년, 에스파냐는 4년중 3년, 폴란드와 러시아는 5년중 4년꼴로 전쟁중이었다. 전쟁기간/전체기간의 비율(95%), 전쟁발발빈도(3년에 한번), 전쟁의 시간 및 규모 등 모든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근대초기는 역사상 가장 호전적 시기였다. 그런데 군사상의 혁신이 일어난 곳은 유럽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결과는 유럽 밖에서 더 크게 나타남. 유럽내의 폭력성이 바깥으로 넘쳐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럽내부에서는 전쟁이 대개 한정된 목표를 놓고 벌어지고 일부 영토와 재산의 이전으로 결말을 보기도 하지만, 유럽인들이 해외로 나가 벌인 전쟁은 적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정치제도를 항구적으로 변경시키고 또 가능한 많은 재산을 강탈하는 식으로 치러졌따. 유럽에서 발원한 폭력이 외부세계로 나가는 현상은 15~18세기이 진행되다가 19세기에 틀을 잡았다. 유럽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장기간이 평화를 맞이. 1816~1914년의 시기를 흔히 평화의 세기라 부른다. 백년전쟁에 대비하여 백년평화라고까지 명명한 폴라니는 평화의 원인이 국제무역과 국제은행을 발달때문이라보 보았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파괴와 약탈보다는 생산과 교역을 통해 더 큰이익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
5장. 화폐와 귀금속의 세계적 유통
- 중국에 은이 대규모로 들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은의 유입이 중국경제에 도움이 되었는가. 혹은 방해가 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다. 첫째, 은의 유입과 동시에 극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주장. 무엇보다도 비단산업이 대단히 발전했는데, 이는 거대한 해외수요에 맞추어 산업재구조화를 이룬 사례에 해당. 중국의 전통적 비단산업은 물론 이전부터 발달해 있었지만 은 수입을 위해 더욱 확대됨. 단지 비단산업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내수산업과 상업이 은 유입 덕에 활성화되었다는 것이 폰 글란의 견해. '은 유입시기가 중국 국내경제의 상업화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 이를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것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이다. 그의 논지는 월러스틴의 주장의 역상이라 할 만하다. 프랑크에 따르면 1500년 이후부터 국제분업과 다각무역을 내용으로 하는 세계 경제가 존재했는데, 여기에서 생산과 부의 중심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였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은의 흐름이다. 아시아로 들어온 은은 축장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생산확대와 연결되었다. 도식적으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월러스틴이 구상한 세계 체제에서 유럽이 주도권을 잡고 전 세계의 유통을 지배하게된 중요한 계기의 하나는 유럽이 은의 흐름을 장악했다는 것인데, 프랑크는 그 논지를 뒤집어서 결국 은이 중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중국경제가 자극을 받아 발전했고, 또 세계체제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주장한 것. 은을 장악하는 곳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이 사실이라면 최종적으로 은이 도착한 곳이 중국이므로 이곳에서 자본주의가 꽃피었다는 주장으로, 일종의 중금주의라 할 수 있는 이 주장은 사실 논리적으로 매우 취약. 둘째, 중국에 유입된 은은 경제성장을 가져왔으나 경제발전은 저해하였다는 견해. 교과서적 설명에 따르면 성장은 총생산의 증가를 말하고 발전은 노동시간당 생산의 증가를 가리키므로 은의 유입이 성장을 가져왔으나 발전을 저해했다는 말은 중국 경제전체적으로 생산은 증가했으나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졌다는 주장. 이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면 은이 유입되면서 실질적으로 큰 부가 외부로 유출된 현상과도 연관됨. 즉 은의 유입대가로 유출된 중국 상품이 사실은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된 것이었으며, 따라서 화폐제의 불비로 인해 결과적으로 막대한 노동력의 집적물이 싼 값에 국외로 빠져나갔다는 것. 그 대표적 상품으로 거론되는 것이 비단. 사실 비단제품은 중국의 대외경제에서 대단히 높은 이윤을 가져다주었따. 비단제품은 중국 국내 가격에 비해 해외가격이 매우 높았다. 특히 바탑아와 마닐라처럼 유럽인이 통제하는 동남아 시장은 중국인들이 안정되게 높은 이윤을 확보하는 창구역할. 중국의 대외교역을 거시적으로 보면, 은과 비단제품의 교환이라해도 무리가 아님.
6장. 노예무역: 근대세계의 비극
- 초기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를 탐사한 결과는 아주 소박.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해외사업은 국가주의 성격이 강한데 비해 영국과 프랑스 경우는 상대적으로 개인의 이니셔티브가 강했으며 따라서 규모도 훨씬 작았다. 북미에서는 금이나 향신료가 나지 않고 기대했던 북서항로도 발견하지 못하자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매력적이지 않은 땅이었으므로 손을 놓았고 따라서 개인업자들이 사업을 주도하게 된 것. 특히 대구어업과 모피교역이 주요 사업분야였다.
-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가 될 북미 지역은 처음부터 거주민 사회의 건설을 주요 목표중 하나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남미와 달랐다. 영국은 이미 인구과잉 상태여서 적절히 인력을 해외로 유출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선 아일랜드에서부터 식민화 시도를 했는데, 이는 나중에 아메리카의 식민화 사업의 시험무대 역할을 했다. 많은 인구가 이주했다는 점이 영국 식민지가 다른 식민지와 구분되는 특징이었다. 전체적으로 북미의 영국 식민지로 유입된 인구는 36만~72만 사이로 추산됨. 그런데 이 인구가 지극히 높은 성장률을 보여서 1790년에는 300만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핵심적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주했기 때문. 북미에서는 유럽의 모국에서보다 인구증가율이 훨씬 높았다. 이에 비해 열대지역에는 남성들만 이주해 갔기 때문에 자연증가가 불가능했고, 따라서 메스티조 현상이 시작되어 인구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계속 인력을 공급해야 했다. 게다가 열대지역에는 상대적으로 질병이 더 많았다는 점도 인구성장에 불리한 요인이었다.
- 많은 연구자들은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해외팽창 방식과 네덜란드, 영국의 해외팽창 방식간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에서 영토정복의 경향이 뚜렸했고,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해상무역로를 건설했으나 그 방식은 아시아의 기존상업 네트워크의 일부를 빼앗은 다음 군사력을 이용하여 강제교역을 수행하거나 통행료를 징수하는, 소위 재분배 방식이었다. 이것은 곧 근대적인 자본의 운동법칙보다 정치적, 군사적 힘을 통한 약탈, 수취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앞의 두나라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체제를 아시아에 구축했으며, 이것은 정치적 군사적 힘이 곧바로 잉여수취에 쓰이기보다는 새로운 교환체제를 구축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의미. 낯선 세계로 뚫고 들어갈 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폭력의 사용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를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결국 이를 통해 시장체제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혁신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곧 국가권력과 자본이 적절하게 결합했음을 의미
7장 환경과 인간
- 구대륙의 동식물들은 신대륙에 널리 퍼졌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구대륙의 동식물이 신대륙의 동식물과의 싸움에서 늘 이기는 이유는 뭘까? 반대로 신대륙의 동식물이 구대륙에서 급속하게 퍼지는 것은 불가능할까? 크로스비는 신대륙의 동식물이 구대륙에 널리 보급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단언. 북미에서 가장 강한 종류의 생물들도 유럽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호주와 뉴질랜드원산식물은 한 종도 영국에 귀화하지 못했음. 동식물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막는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동식물의 보급은 언제가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향하는 일반적 현상이었다는 것. 크로스비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유라시아 대륙의 생물상이 신대륙의 생물상에 비해 훨씬 크고 복잡하게 진화해 왔다는 것이 핵심사항. 2억년전 지구상에는 하나의 대륙만 존재하다가, 이것이 점차 갈라져서 현재와 같은 여러 대륙으로 분리됨. 생태계 역시 하나의 거대한 단일체였다가, 바닷물로 대륙들이 고립된 이후 각 대륙의 생태계들이 독자적으로 진화해 감.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생태계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크고 복잡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 지역의 생물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따라서 더 강하게 진화. 유라시아 대륙과 여타 대륙의 동식물의 차이는 비유하자면 시베리아 호랑이와 호주의 캥거루 간의 차이와 같다. 동식물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유라시아의 세균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더 강화게 진화했고, 또 사람과 동물들 역시 이런 세균에 대해 더 강한 면역체계를 갖추어 감. 결국 유라시아 생태계 전체가 훨씬 강한 상태가 된 것. 서로 떨어져 진화해 왔던 각 대륙의 생물들이 15세기 말부터 인간의 해상활동 때문에 갑자기 조우했을 때 유라시아 생물들이 다른 대륙들의 생물들을 누르고 일방적으로 승리해 나간 배경이 이것이다.
- 호주의 사례를 놓고 볼 때 크로스비의 이론은 적어도 부분적 수정을 요함. 호주의 우림은 아주 강하고 적응력이 높은 생태계. 그동안 빙하기, 기후변화, 불에 모두 적응하면서 진화한 상태이기 때문. 따라서 개간작업 후 외래종이 아니라 토종 동식물들이 도로 증가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 이주민들로서는 끊임없이 재개간 작업을 해야 했으므로 결국 한계지에서는 경작을 포기. 물론 많은 외래종 동식물들이 호주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크로스비가 설명하듯이 마치 막강한 침략군이 속수무책의 원주민들을 몰아내며 진입해 들어오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이다.
- 유럽팽창이 전적으로 환경파괴만 일삼았다는 견해는 사실과 다름. 식민세력은 원래 모순적이고 이질적이고 양면적 양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환경변화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보호주의를 강구한 측면도 있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식민지 이전 시대에는 자연과 인간사이에 균형잡힌 황금기였으리라는 막연한 개념 역시 사실과 다름. 유럽인만이 지구환경을 파괴한 것은 아니며, 어떤 사회가 자신의 생활근거를 스스로 파괴한 사례는 많다. 다만 유럽의 팽창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폐해를 가한 것은 분명. 역설적으로 이렇게 심각한 환경파괴를 일으킨 이유에 유럽인들은 스스로 자연보호의 개념을 만들어 내게 됨.
- 전염병 발발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유럽인들의 해외진출은 엄청난 사건. 그야말로 생물학적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이 단기간에 서로 접촉하게 됨으로써 전 지구적인 병원균의 확산이 일어남. 이때 병원균들에 대한 사람들이 면역체계에 따라 생물학적 영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아시아는 생태학적으로 강한 곳이어서 유럽팽창으로 인한 생물학적 피해가 덜한 편이었다. 오히려 아시아 대륙은 역사적으로 흑사병, 콜레라 등의 질병을 수출한 사례가 많음. 아프리카 역시 생물학적으로 다른 지역과 다르게 진화했고, 그 결과 타 대륙 사람들에게는 낯선 질병들을 많이 지니고 있어서 이것이 유럽인들의 침투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함. 이에 비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아메리카 대륙. 이곳에서는 때로 한 지역의 인구전체가 몰살되는 경우도 발생. 태평양, 오세아니아 역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섬들이 떨어져 있는 이유로 아메리카에서처럼 대규모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 해상팽창 시대에 신대륙은 어느정도 피해를 입었는가? 정확한 수치는 알수 없고 다만 여러학자들의 추산만 있을 뿐이다. 그 추산치는 매우 다양해서 850만명으로부터 1억명이 훨씬 넘는 수치까지 범위가 넓지만 5000만명 이하이기는 힘들고 1억명을 넘지는 못하리는 것이 대체적 견해.
- 유럽은 한편으로 전 지구적 생태환경이 변화를 초래했고 다른 한편으로 그 변화를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배가시킴. 유럽은 자신의 내부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자원을 외부에서 조달. 유럽이 삼림이 고갈되어 심각한 자원부족 위기에 직면했을 때 아메리카 대륙에서 목재를 수입. 철과 플라스틱 및 기타 다양한 물질들이 일반화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사람들이 접하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나무로 되어 있고 동시에 가장 중요한 연료가 나무였던 그 당시에 목재는 실로 핵심적 자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목재부족은 오늘날의 석유고갈과 같은 의미를 띠는 문제. 목탄 부족이 제철업이 위기를 가져왔고 이것이 석탄을 이용한 철강생산 개발로 이어졌다는 점, 프랑스혁명 전야에 농촌의 가장 빈번한 문제가 공유림의 이용과 관련된 문제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대서양을 넘으면서까지 목재를 실어간 이유가 여기 있다. 목재를 하나의 사례로 들었지만 사실 유럽은 심각한 자원부족 문제, 혹은 더 일반적으로 표현해서 생태계의 한계에 봉착한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 설탕, 염로, 직물, 목재 등은 모두 막대한 인력과 동시에 생태적 요소가 투입되어야 하는 물품들임. 이것을 해외에서 조달한다는 것은 유럽이 직면했던 생태부담의 문제를 외부사회에 전가시킴으로써 해결한 셈. 포머란츠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중요 요인중 하나를 여기에서 찾는다.
- 이렇게 보면 유럽의 산업화는 해외 생태계 파괴 위에서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리한 자원개발은 심각한 생태계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음. 섬과 같은 작은 생태계는 심지어 기후마저 부뀌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흔히 전 세계 주민들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다 못해 아예 삶의 기반을 파괴하돈 했다. 서구문명의 침투에 대한 저항이 흔히 어머니인 자연의 파괴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는 것도 자연스런 귀결이다.
8장 기독교의 충격 : 사회의 위기와 의식의 위기
- 유럽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인디언들은 고등종교가 없거나 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의 종교는 다른 어느곳에서보다 더한 정도로 이 세계 속의 물질적, 정신적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따. 그러므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 전체의 뿌리를 뒤엎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럴진대 전도사들의 말 몇마디로 그들이 곧바로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 전도의 역사는 설득의 과정이기보다는 강압적으로 상대방 문화를 패망시키고 정복해버리든지 혹은 전도사 자신이 극단적으로 피학적 방식으로 인디언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9장 문화의 교류 : 언어, 음식, 과학기술
- 세계화된 유럽 언어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영어다. 영어는 현재 제1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보다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특징. 영어는 잉글랜드의 언어에서 그야말로 세계의 언어로 변화한 것. 영어는 장차 어떤 변화를 겪을 것인가?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난날 라틴어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가 여러개의 개별 언어로 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한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이라는 지지대가 사라지자 사멸하고 그대신 몇개의 로만스 언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로 분화됨.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지지와 영어의 보편화는 로마제국과 라틴어의 관계와 유사해 보이지만 장차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는 물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 여러지역간에 어떤 식으로든 접촉과 교류가 일어날 때 공통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즉 링구아 프랑카가 정해진다. 흔히 지적하는 바이지만 여러 문화현상 중 가장 안정적인 것이 언어다. 언어는 물로 장기적으로 변화하지만 짧은 시간에 급속하게 변할수는 없다. 또 외국어 학습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여러 문화요소 가운데 언어가 가장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 언어의 패러독스이다. 언어가 유연하게 변화, 적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언어의 충돌이 일어날 때 힘이 약한 언어는 자칫 그대로 도태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언어로 소통하는 현상이 발생. 광둥상인과 베이징 상인이 만나서 영어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로 가서 교역할 때 우선 유럽언어가 해당지역의 여러 언어들을 제치고 링구아 프랑카로 기능하곤 했다. 이 상황에서 여러 언어요소들이 뒤섞이면 피진이 되고 이것이 더 발전하면 크레올 언어가 만들어진다.
- 피진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언어가 만났을 때 임시로 형성된 초보적 언어. 당연히 문법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다만 필요한 단어들은 기존언어에서 빌려와 사용. 의사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문법보다 단어다. 어떤 사람이 문법은 틀렸지만 아는 단어를 쓰면 알아듣기 쉬우나 문법은 정통한데 단어가 틀리면 알아듣지 못함. 이렇게 형성된 임시언어가 시간이 흘러 어느정도 정착단계에 들어서면 새로운 변화가 시작. 단순했던 문법이 점차 복잡한 발전을 한다. 이때 원래의 모어의 문법요소보다는 현지에서 일어나는 혁신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럴경우 이 언어는 상당히 안정적 언어로 자리잡음. 때로 이 과정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어서 톡피신 같은 언어는 처음 피진단계에서 안정적 언어로 자리잡는데 90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 도달한 언어는 이제 크레올이라 불리게 됨. 크레올은 대개 해당지역에서 제2의 언어로 기능하기 쉬움. 그래서 때로는 공식언어로 공인받기도 하고 때로는 모어의 압박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밟기도 함
- 후추는 중세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아시아의 교역상품. 왜 그렇게 후추를 구하려 했을까? 유럽에서는 육류소비가 많은데 냉장시설이 없어 고기가 곧 변질되었다. 그래서 상한 맛을 숨기기 위해 강한 향신료가 필요했다. 혹은 후추를 듬뿍 묻혀서 고기를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님. 후추는 워낙 비싼 물품이어서 고기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일 수 없었다. 고기값보다 후추가 더 비쌌다. 후추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찾은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매운 맛 자체를 즐겼기 때문. 오늘날에는 유럽 음식들이 대체로 부드러운 맛이지만, 중세 유럽의 음식은 오늘날의 인도음식과 비스할 정도로 매웠따. 많은 사람들이 매운 맛을 추구하고 또 매울수록 고급이었으므로 부자 권력자들일수록 많은 후추를 사용. 한마디로 후추는 높은 지위의 상징이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향신료를 음식에 사용하는 외에 보석처럼 서로 선물하고 수집. 후추는 식탁위에 전시되었다가 몸소으로 섭취되는 권력의 표시였다. 이럴때에 맛은 사회적, 문화적, 심지어 정치적 현상이었다. 어떤 사회건 대개 그 지경 사람들이 좋아하고 또 공고히 지키려고 하는 맛의 구조가 있기 마련. 한 사회에서 특정한 맛을 내는 물질이 다른 지역에 전해지면 처음에는 대부분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쉬움. 그러나 그중 일부는 여러 노력끝에 결국 다른 사회로 전파되는데 성공함.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전 사회에서 그 음식에 내리던 문화적 해석은 흔히 왜곡되거나 완전히 새롭게 변형되기도 함. 대표적 예로 코코아를 들 수 있다. 마야를 비롯한 아메리카 문명에서 코코아는 원래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식품, 혹은 지배자나 귀족, 전사들의 음료였다. 초기에 이 음료에는 칠리페퍼와 같은 향신료를 첨가해서 맛이 쓰고 강했으며, 옥수수를 이용해서 걸쭉하게 만들었따. 마야와 아스텍족이 여기에 바닐라와 꿀을 집어넣어 맛을 완화시킨 후에야 우리에게 익숙한 맛이 나게 됨. 그런데 에스파냐 인들에 의해 이 음료가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다가 다시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나라로 보급되었을 때 이 음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용됨. 이 음료는 특히 에스파냐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유럽의 카톨릭 지역을 대표하는 음료가 됨. 코코아는 카페인은 적고 약간의 테오브로민을 함유하는데, 이것의 작용은 커피와 유사하지만 훨씬 약해서 중앙신경체계가 인식할 만큼의 자극을 미치지 않음. 그래서 자극효과가 적은 대신 훨씬 더 큰 영양가를 가짐. 이런 이유로 코코아는 유럽 귀족의 음료가 되었으며 특히 아침식사에 자주 이용됨. 그 결과 아침부터 맑은 정신으로 활동하는 부르주아의 음료, 그리고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음료인 커피와 대조적으로 코코아는 여유있고 유희적이며, 심지어는 성적인 의도와 통하는 것으로 간주됨. 이런 바로크적, 카톨릭적 육체성을 대변하던 이 음료는 구체제와 함께 몰락했다가 19세기에 또 다른 의미의 음식으로 재탄생. 그것은 어린이들의 음료로 각광받는 오늘날의 코코아와 널판지형 초콜릿으로 분화. 그리하여 과거에는 권력과 영광을 대변했던 음식이 이제 부르주아 사회에서 권력과 책임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여성, 아이)이 즐기는 음식으로 크게 변화
- 신대륙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은 구대륙 노동자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설탕이 고급 소비재에서 일상적인 소비재가 되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 소위 정크푸드의 대표적 첨가물이 되는 장기적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의 값싼 열량 공급원 역할을 하게 된 것. 산업혁명기 이후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칼로리 섭취가 증가하는 데 설탕이 기여한 몫은 매우 컸다. 잼을 바른 빵, 당밀 푸딩, 비스킷, 과일파이, 롤빵, 캔디 등 설탕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밀가루 형태의 복합 탄수화물과 조화를 이룬 음식들이 홍수를 이룸. 여기에 더해 차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는 습관이 일반화된 것 역시 노동자들이 열량을 추가로 공급받는 한 방식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설탕은 전체 칼로리 섭취의 14%를 차지.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노동계급의 가정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설탕을 통해 열량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간 차별성이 생겨났다는 점. 19세기 중 쇠고기 소비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물성 식품은 노동을 하며 임금을 받는 가장이 주로 소비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설탕 소비에 의존. 노동하는 남편이 매일 고기와 베이컨을 먹는 동안 아이들은 고작 일주일에 한번정도 고기를 먹는데 만족. 남편에게 충분한 음식을 주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은 습관적으로 부족한 식사를 함. 부족한 열량을 얻기 위해서는 자당, 즉 설탕을 섭취. 이와 같은 영국의 상황은 곧 전세계적으로 반복됨. 설탕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칼로리 부족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산업노동자들이 휴식시간에 가장 많이 먹는 식품이 됨. 값비싼 단백질 식품은 주로 성인남자가 독식하고, 자당은 주로여성과 아이들이 먹는다는 소비도식이 굳어짐. 심지어 영양실조로 인한 학령전 아동의 사망은 사실상 가장 널리 사용되던 인구억제 방법이었다.
- 매운맛을 내는 대표적 음식물인 고추의 원산지는 남미의 볼리비아로 추정됨.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이미 고추가 전파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곳 주민들이 아히라 부르던 고추가 유럽인들이 그토록 탐내던 아시아의 후추와 비슷한 상품으로 보고 에스파냐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에스파냐에 들어온 고추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함. 그 대신 고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감. 포르투갈 상인들이 브라질의 페르남부쿠에서 고추를 발견하고 이를 아프리카 서해안과 인도양으로 보낸 것. 이런 지점들로부터 말라카를 거쳐 마카오와 일본, 필리핀으로 전파되었고, 이곳에서 태평양을 건너 북미에 도착. 고추가 지구를 한바퀴 돌아온 것. 이때까지 걸린 시간은 50년이 채 못되니, 매운맛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얼나마 큰 흡인력과 중독성을 가진 것이지 짐작할 수 있다. 고추를 비롯한 여러 음식물의 전파과정은 통상 생각하는 경로와는 달리 매우 복잡한 길을 거쳐가기도 함. 우리나라와 일본에 고추가 전파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이며, 아직까지 그 과정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서 여러 이설들이 존재. 우리나라 문헌에는 일본을 통해 고추가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한국을 통해 고추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많다.
- 그동안 서양과 동양의 과학적 접촉의 성격에 대해 서구인들이 갖고 있던 견해는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임. 이를 대변하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견해임. 그는 유럽과 중국의 문명을 비교해 이야기하면서 유럽의 이성과 중국의 경험이라는 식으로 정리. 중국, 혹은 더 넓게 말해서 아시아 문명은 구체적 경험적 관찰에 능하여 많은 누적된 성과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종합하여 체계를 만드는 이성의 힘이 약하다는 것. 그의 주장의 원래 의도가 동양의 강점을 호의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라 볼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동양문명은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를 작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지적능력을 가진 유럽문명에 그것을 제공하는 역할만 부여받은 셈.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음. 인도의 식물학, 약초학은 대단히 오랜 기간 동안 자연에 대한 직접 관찰로 얻어진 귀중한 정보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방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작은 사례이지만 오르타나 레더가 수집하여 유럽으로 가져간 지식만 하더라도 단지 경험적 사실만이 아니라 인도이 분류체계 자체를 가져간 것이고, 이것이 린네의 식물분류학 내에 수용되어서 유럽의 학문 체계 발전에 일조. 또 일본의 란카쿠의 경우 일방적으로 유럽 학문체계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자체의 과학적 지식체계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수정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따. 이런 점을 보건대 서구와 다른 문명의 과학기술이 만난 경웅 상호 건설적인 방향으로 교류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시대의 전반적 역사흐름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서구세력이 결국 제국주의로 나아간 것과 유사하게 서구과학기술 역시 조만간 억압적, 지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 각 문명권에서 장구한 시간동안 발전해온 그 나름의 과학체계는 매우 큰 잠재력을 가진 인류지식의 보고인 경우가 많으나 근대 서구과학의 기계적인 힘 때문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마야문명의 좋은 사례. 이 지역은 원래 대단히 다양한 식물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고대 문명의 의학체계 내에서 알려진 약초만 해도 3만종이나 된다. 그러나 유럽문명과 조우한 직후 심대한 탄압을 받은 결과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이 멸실되었다. 유카탄의 주교 디에고 데란다는 1542년 마야의 민속신앙을 제거하기 위해 수천명의 원주민을 고문하고 학살했으며, 동시에 수많은 책을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름.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남은 유산은 매우 큰 잠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역에서 독일학자들이 18개월동안 연구한 결과만으로도 320가지의 약초를 수집하였다.
- 서구 근대과학기술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구사하는 효율적 체계이고 그 결과 인류의 복지를 크게 증대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 역시 엄청나게 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유럽 중심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세계의 여러 지역문명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린 서구이 과학기술문명을 일거에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다양한 전통문화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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