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조건

역사 2018. 8. 8. 08:21

- 생물학적 순종이 변화하는 환경에 매우 허약한 것처럼 문화적으로도 폐쇄적인 순혈주의는 환경변화에 취약.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 더구나 다양한 생각이 끼여들 여지가 없어 쉽게 극단주의로 빠짐. 다른 생각이라는 이름의 제어장치가 없는 자동차인 셈이다. 그래서 급속도로 몰락한 제국들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짐. 멀리갈 필요도 없이 20세기 초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제국이나 나치의 제3제국은 순혈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스페인도 순혈주읭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1. 로마시민권
- 훗날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로마의 특성을 이야기했다. "로마제국의 건설과 로마시민들의 며엉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가 사비니인들의 사례를 통해 적들을 로마시민으로 받아들여서라도 나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 키케로의 말처럼 통합노선은 이후에도 계속됨. 새로운 부족이 로마에 합병될 때마다 귀족들은 로마귀족이 되어 원로원에 의석을 보장받았고 평민들은 로마시민이 되어 투표권을 부여받음. 따라서 후대에 로마를 이끈 사람들은 대부분 오리지널한 로마인이 아니다. 로마의 제1의 슈퍼스타 카이사르를 배출한 율리우스 가문은 알비롱가 출신이며,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를 통치한 클라우디우스 가무은 건국 초기에 5천명의 일족을 이끌고 집단이민을 온 사람들이다. 아마 20세기 초강대국인 미국의 민족구성이 고대 로마의 민족구성과 가장 유사할 것이다.
- 폐쇄적인 아테네도 처음부터 외국인에게 폐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성장기의 아테네는 외국인들에게 무척 개방적인 국가였다. 아테네 발전의 기초를 닦은 솔론의 시대에는 아테네에 거주하는 재능있는 외국인들에게 시민권을 나누어주어서 아테네에 동화시키고자 노력. 발전의 동력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솔론의 시대 이후 등장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더욱 개방적인 정책으로 아테네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다. 문제는 아테네가 패권국가로 성장한 뒤에 발생.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패권국가의 시민은 상당한 이권을 가짐. 경제적으로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동맹국의 시민들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다. 이렇게 시민권의 가치가 올라가면 초기에 인심좋게 시민권을 나누어주던 태도가 돌변하게 마련. 시민권이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최종적으로는 순수한 아테네인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시민구너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 사실 아테네의 시민권을 이 정도로 폐쇄적인 상태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페리클레스였다. 그러니 페리클레스가 만년에 겪은 곤욕은 자업자득인 셈. 아테네가 시민권문제에서만 폐쇄적으로 굴었으며 그나마 나았을텐데 아테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갔다. 동맹국의 시민들은 2등국민 취급하기 시작. 사실 폐쇄적인 시민권과 동맹국에 대한 오만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등장할 수밖에 없다. 시민권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논리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순수하고 우월한 존재인데 불순물이 끼어드는 게 싫다는 감정이 폐쇄적 시민권 정책을 만드는 것. 이렇게 스스로를 우월한 존재라고 믿고 이방인을 열등한 불순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이방인들에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내의 동맹국들에게 말 그대로 지배자로 굴기 시작. 동맹의 돈을 횡령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테네에 건물을 짓고, 아테네의 배를 만들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 그리고 동맹국들이 조금이라도 반발할 조짐을 보이면 가차없이 응징을 가했다. 이렇게 되면 동맹국들 역시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아테네가 강하니까 아테네 밑에 있지만 언제든지 아테네가 약해지기만 하면 바로 뒤통수를 치겠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지는 것이다.
- 개방성은 위기의 순간에 보답을 받았다. 한니발에 의해 군사적으로 완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국들은 로마를 버리지 않았던 것. 사실 이들 동맹국들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미 로마 시민권을 획득해서 로마인으로 살고 있었다. 삼니움족 출신 집정관인 오타릴리우스 크라수스를 생각해보라. 그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로마라는 공동체 안에서 아주 흔한 예에 불과했다. 동맹국들에게 로마는 이미 자기자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였다. 남이 아닌것이다. 로마는 그들에게 이미 조국이었다.
2. 세계제국 몽골
- 몽골군이 가진 잔인하고 야만적 이미지 덕에 우리는 몽골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몽골군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일단 몽골군은 숫자가 너무 적었다. 전체를 다 모아야 겨우 10만이다. 이 숫자를 갖고 세계 모든 나라와 싸운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게 돌격하다가 희생이 커지면 세계정복은 오히려 불가능했다. 따라서 몽골군은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음. 결정적 순간이 아니면 정면공격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강력한 관통력을 가진 활을 이용했다. 초원에서의 사냥법을 그대로 응용하여 적군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적중률 높은 화살공격을 퍼부었따. 이 공격으로 적군의 기가 꺾이고 혼란에 빠지면 유목민의 특유의 곡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일단 기가 꺾인 군대는 더이상 군대가 아니다.
-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킴. 순수한 몽골인만의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이 원래의 몽골인에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다. 몽골군의 가장 주요한 주력군은 몽골초원의 경기병이다. 몽골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하는 이들은 말 그대로 타고난 기병이다. 당연히 기마술이 뛰어나고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다룬다. 더군다나 최소한의 보급만으로도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능력 덕에 보급부대가 거의 필요 없었따. 기록에 의하면 자신들이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 몽골군이 아무런 보급부대도 없이 세상 끝까지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의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능력이 결정적 역할을 함. 이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이들이 경기병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약점. 경기병이라는 단어가 알려주는 것처럼 이들은 거의 갑옷을 걸치지 않음.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가죽을 덧댄 매우 가벼운 갑옷을 걸쳤다. 기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입고, 가벼운 장비만을 걸치는 것이다. 그래야 말도 지치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갑옷을 거의 걸치지 않는다는 것은 방어력이 약하다는 의미. 견고한 방법을 이루고 있는 보병의 밀집부대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이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가능한 정면충돌을 피했따. 대신 활을 이용했는데 몽골군은 관통력이 높은 매우 강력한 활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공격을 회피하는 그들의 약점을 어느정도 커버가능.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약점을 감출 수 있는 전술도 개발해냈다. 그들이 사냥터에서 항상 사용하는 방식을 전쟁터로 끌어들인 전술이었다. 우선 사냥터에서 짐승을 몰듯이 적군을 몰아 원형으로 둘러싼다. 몽골군은 적에 비해 월등한 기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적군은 사냥원진을 활용한 몽골군의 포위망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곤 엄청난 숫자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몽골의 활은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복합재질로 되어 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었다. 따라서 사거리가 매우 길고 관통력이 높았따. 따라서 이 정도 공격만으로도 상당한 살상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살 공격의 심리적 효과였다.
- 몽골인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몽골은 피정복민들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 또한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몽골은 오랫동안 유목민의 생활을 했고, 정주사회의 전문가들을 갖고 있었으나 이들에게 강제로 일하게 하지는 않음. 오히려 대우도 좋았고 존경도 받았기에 외부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섬. 다시 말해 이들 전문가는 몽골에 융합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음
-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초원의 기마병들은 단 한번도 양자강을 넘지 못했다. 결국 쿠빌라이칸은 지지부진한 남송전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결정. 자신의 최대 강점이던 기병중심의 기동전을 포기하기로 함. 대신 보병과 수군이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이런 유연성은 사실 역사상 쉽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거의 전 세계를 정복할 정도로 훌륭한 효과를 보인 전투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전투방식을 배운다는 것은 앞으로의 역사적 사례에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성장기 몽골제국의 지도자들이 가진 사고의 유연성은 실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보병과 수군이 전투의 중심이 됨에 따라 기존에 몽골이 정복한 다양한 지역의 군대가 몽골군에 새로운 힘이 되었다. 산성을 중심으로 한 전투에 익숙한 북중국의 옛 금나라 군대와 한족군대, 그리고 고려군이 몽골군의 전면에 등장했고 한족과 고려군이 주축이 되어 대규모 수군이 건설되기 시작. 여기에 지난 번 서남아 원정에서 몽골제국에 포함된 페르시아 기술자들이 새로운 투석기를 만들어 몽골군에게 제공했다. 이슬람교도인 알라웃딘과 이스마일이 만들었기 때문에 회회포라고 불린 이 투석기는 밧줄이나 나무의 복원력을 이용하는 기존의 투석기와는 달리 평형추의 낙하 회전력을 이용해 돌을 발사했다. 투석기 팔 반대편에 무거운 추를 달고 여러 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줄을 감아 투석기 팔을 내린 후, 돌을 싣고 순간적으로 줄을 풀면 추가 떨어지면서 투석기 팔과 연결된 대를 회전시켜 돌을 날려보냈다. 보통 50~100킬로의 돌을 300미터까지 날렸다고 한다
- 몽골의 통신망인 잠이 만들어지자 갑자기 중국의 의사가 바그다드까지 이동했다. 베네치아 상인이 중국에 갔다. 한국의 종이가 이슬람 도시에서 사용되었다. 이슬람 강철이 중국에서 사용되었따. 갑자기 사람과 사상, 의약품 그리고 재화가 이곳저곳으로 이동. 세계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만 해도 아시아와 유럽의 직접적 접촉은 없었다. 재화가 한 도시에서 다른 곳으로 매우 느리게 이동했다. 하지만 칭기즈칸 시대 이후, 유럽과 아시아는 계속 접촉을 이어감. 사상과 재화, 의약품, 그리고 종교가 끊임없이 이동했다. 이는 근대 세계 시스템의 토대였다.
- 결국 유럽인이 몽골에게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셈. 몽골에 세금을 바칠 필요도 없었고 약탈당하지도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때 시작된 모든 무역으로 이익을 얻음. 베네치아의 폴로 가문처럼 중국에 가서 새로운 사상을 가져올 수 있었음. 곧 유럽인들은 유럽의 놀라운 새 재화와 사상을 갖게 됨. 일례로 인쇄기가 있다. 유럽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남. 화약을 가져왔고 전에 없던 많은 것들을 갖게 됨. 유럽은 문명의 가장자리에 있던 작은 지역에서 문명의 한가운데로 나오게 됨
- 현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흥미로운 영향을 준 제국은 몽골. 몽골은 13~14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통신공간을 만들었음. 이 공간을 통해 통치술이 전해졌고 많은 다른 것들도 들어옴. 몽골제국에 의해 지금의 중동 혹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이 연결되었다. 과학과 의약품, 지도제작, 요리가 소통되기 시작. 몽골의 거대한 제국 공간의 창조로 거대한 문화의 결합이 벌어짐
3. 대영제국의 탄생
- 중세 이후 대항해 시대가 찾아오자 유럽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됨. 대서양을 통해 먼 바다로 진출하면서 먼 바다에도 적합한 배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 갤리선은 당연히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았다. 우선 인간의 힘으로 항해를 하는 배는 육지에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 한 척의 갤리선, 그것도 빠른 기동이 필요한 전투용 갤리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숫자의 노잡이가 필요. 그런데 이들은 인간이므로 당연히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식량과 식수를 항상 공급해줘야 했다. 갤리선 한 척을 움직이는 데는 일종의 연료처럼 엄청난 양의 식량과 식수가 필요. 따라서 갤리선이 육지를 벗어나 항해할 수 있는 거리는 대체로 육지에서 2~3일 거리가 고작이었다.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를 벗어나면 갤리선은 사실상 무용지물인 셈이었다. 반면 범선은 소수의 인원만으로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에 원거리 항해에 적합했다. 결국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범선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대항해 시대의 선발주자로 나선 범선을 우리는 카략선이라 부름. 카략선이 이룬 진보의 가장 중요한 점은 돛대가 많아진 것이다. 기존 범선은 대부분 하나의 사각돛에 의존해서 항해한 반면 카략선은 세개의 돛대를 달고 바다로 나섬. 당연히 빠른 항해가 가능했고 범선의 크기도 더 커지기 시작. 그런데 카략선은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배에 많은 짐을 싣기위해 배의 앞부분과 꼬리부분을 많이 높여 놓은 것. 이렇게 되면 무게 중심이 높아지기 때문에 급격한 회전가튼 빠른 기동은 불가능해짐. 하지만 전투중에는 이런 빠른 기동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무리해서 급회전을 하다보면 중심을 잃고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자랑하던 메리로즈호도 1545년 프랑스 함대와의 전투중에 뒤집어져서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이래서는 전투용으로 사용되기에 아직 문제가 많았다. 따라서 카략선이 등장한 뒤에도 전투용 함선으로 갤리선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카략선보다 진보된 갈레온선이 등장하자 해전의 중심은 급격히 범선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갈레온 선은 배의 꼬리부분인 선미는 아직 높은 편이지만 앞머리인 선수부분이 매우 낮아졌고 이에 따라 배의 안정성이 높아짐. 안정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돛대도 더 높고 크게 세울 수 있었는데 당연히 돛도 더 많이 달 수 있게 됨. 돛이 많아지면 추진력이 높아져 배가 빨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더불어 배의 앞부분이 낮아지면서 전반적으로 날렵해진 점도 속도향상에 기여. 갈레온의 등장과 함께 범선은 전장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 이 갈레온을 한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 바로 존 호킨스였다. 존 호킨스는 새로운 배를 개발하면서 그때까지의 주먹구구식 건조방식을 버리기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했다. 바로 설계도를 그린 것이다. 그 당시 호킨스가 그린 설계도는 현재 캠브리지 대에 남아 있다. 호킨스가 그린 설계도를 보면 그가 지금까지의 주먹구구식 함선 설계방식을 버리고 기하학에 입각해서 완전히 새로운 배를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영국전함은 스페인 전함보다 더 빨랐으며, 중무장도 더 잘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거대함선은 대부분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무장상선이었따. 이들은 대부분 돈을 받고 화물을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원양항해로 나르기 위해 설계됨. 반면 영국의 교역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고, 사실상 해적행위를 주로 했다. 영국 함선들은 빠르긴 했으나 화물을 싣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페인의 함선이 더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을 놓고 봤을 때, 영국 함선들이 훨씬 적합했다. 1573년 새로운 설계에 기반한 첫번째 배 드레드 노트 호가 건조된 이후 1588년까지 영국은 총 18청긔 레이스 빌트 갈레온을 보유하게 되었고, 16척의 왕실 갈레온도 거의 동급의 성능을 가질 수 있도록 개조됨. 구식으로 설계된 스페인 함선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혁신적 함대가 대서양에 등장한 것이다.
- 영국 해군이라고 해서 배위에 보병을 태우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님. 영국이 보병을 태우지 않은 것은 영국에 보병다운 보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우고 싶어도 태울 사람이 없었던 셈. 하지만 결핍은 혁신의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영국해군은 어쩌면 결정적 약점이 될 수도 있었던 보병부족이라는 상황을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아예 해전방식을 바꾸는 것.
- 영국 지휘관들이 준비한 방식은 적 보병이 아예 건너오지 못하도록 포격전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고 새로운 것인 만큼 실제로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보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국으로서는 이게 유일한 방식이기도 했다.
- 칼레에서 벌어진 스페인과 영국의 대결에서 영국은 어떻게 승리했을까? 간단히 말해 기술력에서 앞섰고 혁신을 빠르게 받아들였기 때문. 우선 영국의 배는 스페인 배보다 빠르고 회전능력도 뛰어났다. 게다가 화포를 많이 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화력에서도 스페인 배를 압도했따. 그 위에 대포산업에서도 영국은 스페인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영국산 주철대포는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청동대포를 대체할 만한 성능을 갖고 있었고 이 저렴한 대포를 대량 생산한 덕분에 스페인 배에 비해 몇배나 많은 대포로 무장할 수 있었다. 해전에 대한 기본개념도 스페인은 구태의연한 반면, 영국은 혁신적이었음. 스페인은 일단 해전이 벌어지면 첫번째 대포를 발사한 후 곧바로 화승총이나 창을 잡고 위로 올라간다는 전술을 갖고 있었다. 적의 배로 건너가 육박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영국은 첫발을 발사한 후에도 연속해서 포탄을 사격했따. 스페인군의 목적은 적을 죽이는 것이지만 영국군의 목적은 적의 배를 격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 어떤 전술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는 실제 전투에서 증명됨.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런 영국 해군의 혁신이 오히려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영국 해군이 보병이 적함에 뛰어드는 전술을 적용하지 않고 포격전에 치중했던 것은 애초에 영국에 믿을 만한 보병이 없었기 때문. 주철대포를 개발한 것도 청동대포를 만들만한 자원이 부족하고 재정도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 반면 스페인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혁신의 기회를 놓칠 수 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보병의 위력을 지키기 위해 포격전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무관심했고 대포의 개발에도 덜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혁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스페인 함대는 레판토 해전의 빛나는 승리 이후 불과 17년 만에 낡은 유물로 전락해 버린 것. 자신이 이미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낡은 사고를 비웃는 것처럼 혁신의 속도는 항상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 스페인의 종교적 불관용이 미친 영향도 놓쳐서는 안된다. 스페인도 주철대포의 효용성에 주목하고 주철대포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 하지만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주는 공포 때문에 기술자들은 한 사람도 스페인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혈통과 순수성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새로운 기술의 결합이란 양립하기 어려운 법이다. 결국 칼레 해전은 해전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음. 영국이 새롭게 선보인 전술의 효과가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다투어 영국식 해전기술을 받아들였다.
- 위대한 영웅인 프란시스 드레이크는 최고의 승리를 영국에 안겨줌. 그리고 시대를 바꿔 넬슨의 트라팔가 해전으로 국가적 신화가 교체됨. 지금 영국의 시 중심뿐만 아니라 실제 모든 영어권 국가에 가면, 트라팔가 광장이 있다. 이렇듯 이 이야기는 영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줌. 1588년 이후 영국은 위대하고 강력한 해상국가가 됨.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믿는다. 백년 동안 스스로에게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줌. 그리고 드디어 이야기가 현실이 됨. 1714년 영국은 매우 뛰어난 해군력을 갖게 됨. 1588년이 아니다. 해상을 장악하는 데 120년이 걸렸따. 스스로에게 계속 이야기했기 때문. 계속 사실이라고 믿었기 때문. 세계를 보는 방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은 이루어냈다. 무적함대에 대한 승리는 영국이 위대한 해상국가라는 것을 증명.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해석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신념이다.
4.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
- 보통 마녀사냥이라 종교재판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 그러니까 14세기 이전에 주로 횡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 오히려 근대국가가 성립한 15세기 이후에 더욱 기승을 부린 것이 바로 종교재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세는 카톨릭이라는 단일한 이념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사실 사냥감을 찾기가 더 어려웠음. 하지만 15세기 이후 유럽이 확장을 시작하면서 유럽 내부에 이질적인 분자들 그러니까 무슬림이나 유대인 등이 늘어가자 오히려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냥해야 할 이질분자들을 쉽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게 됨
- 종교적 관용을 독립의 명분으로 삼자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소수자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듬. 특히 유대인들이 대거 북부 네덜란드로 몰려들기 시작. 원래 유럽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스페인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알함브라 칙령으로 스페인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포르투갈로 이주. 그런데 포르투갈에까지 스페인 종교재판의 마수가 뻗어오자 결국 포르투갈조차 떠난 유대인들은 새롭게 부상한느 상업의 중심지이자 상대적으로 종교적 문제에 관대했던 저지대 국가로 옮김. 그중에서도 암스테르담에 앞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앤트워프에는 경제력과 기술력을 함께 갖춘 유대인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펠리페 2세의 종교탄압이 시작되자 앤트워프도 더이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1576년 벌어진 스페인군의 앤트워프 약탈 사건은 저지대 국가의 남부지역이 더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종교적 관용을 내건 네덜란드 북부 7개주뿐이었다. 당연히 대규모 이주가 시작됨. 유대인뿐 아니라 탄압을 두려워한 신교도들 역시 북부 네덜란드로의 이주대열에 합류. 결국 1560년대부터 1589년까지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 남부지역 인구는 급격히 감소. 앤트워프의 경우 8만 5천명에서 4만 2천명으로 감소. 공업중심지였던 겐트와 브뤼주 또한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함. 반대로 네덜란드 북부의 암스테르담과 레이덴 혹은 하를렘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함. 종교적 자유가 이민자들을 네덜란드 북부로 이끈 것이다. 1570년부터 1670년 사이 자유의 땅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명에서 20만명으로 증가. 레이덴 인구는 1만 5천명에서 7만 2천명으로 증가
-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 혹은 이단자들을 빠르게 포용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가 열림. 단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네덜란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우선 바다에서 시작됨. 조선업과 해운업이 먼저 네덜란드의 번영을 이끌기 시작. 엄청난 경쟁력을 바탕으로 유럽 해운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을 얻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주민들과 함께 새로 유입된 선박건조기술을 활용해 당시로서는 파격적 범선을 만들어냄. 경제적이고 속도가 빠른 플류트 선이다.
- 중세시대 유대인들이 담당했던 역할 중 하나는 돈의 관리. 유대인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대부업과 군수품을 제공하는 데 특출한 능력을 보임. 유대인들이 떠나고, 대제국이 된 스페인은 당시 필요했던 돈을 모으고, 대출받고, 지출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다량의 은이 낭비되었따. 능력있는 사람들의 부재가 이것의 부분적 원인이었다. 스페인의 재정난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인데, 스페인의 상황은 17세기 초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더욱 심각해진다. 네덜란드에서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을 포함하여 유럽내에서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기에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됨.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만들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스페인의 영향력을 유지시키는 것 또한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 1964년 미국, 미시시피 자유여름
- 미국으로 이민 온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은 노동의 소중함을 알고, 근면을 사랑했을까? 그리고 씨앗과 농기구를 가지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기 위해 왔을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에는 스페인 이민자들과 똑같이 싸워서 빼앗기 위해 이민을 왔다. 당연히 씨앗이나 농기구 따위는 가져오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이 도착한 땅에는 잉카나 아즈텍처럼 세련된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미국에 이민 온 이민자들은 매우 희박한 인구밀도를 가진 미개발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나마 적은 수의 인디언들도 유럽인들이 탐낼만한 것은 가진게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빼앗아 먹을 게 없는 땅이었다. 총과 칼을 먹을수는 없기 때문. 그렇게 몇차례의 이민자들이 몰살당한 후에야 청교도 이민자들은 이 땅에서 일해야만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씨앗과 농기구를 가진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민자들이 새로 개척해야 하는 땅이었으므로 다행히 착취적인 시스템이 구축돌 여지가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에는 이미 조직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국가기구 위에 빨대를 꼽고 빨아먹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하지만 북미는 이런 빨대를 꼽을 만한 곳이 전무했다. 더군다나 땅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넓은 데 비해 인구밀도가 매우 희박했기 때문에 유럽 각지로부터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이 이민자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북미 대륙에서 대체로 환영받을 수 밖에 없었따.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종교성 순수성 따위를 지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독립이전부터 종교적으로 구대륙의 어떠한 나라에 비해서도 관용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1789년의 독립국가 건설은 이러한 종교적 관용을 국가 원칙으로 만들었다.
- 종교적 자유가 네덜란드에 번영의 기반을 만들어준 것처럼 미국에서도 종교적 관용이 미국의 발전에 원동력이 됨. 유럽 각지에서 최신기술을 가진 숙련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유럽각국도 가만히 앉아서 두뇌 유출을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신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의 해외이주를 막는 법안들이 속속 만들어졌고 심하면 반역죄로 다스렸다. 하지만 금지법안만으로는 인력 유출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미국은 유럽보다 인력이 부족했기에 임금이 훨씬 높았고 신개척지라 기회가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종교나 민족따위를 따지지 않았다. 이민자들에 대한 입국제한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따. 국경선은 말 그대로 누구든지 들어오세요라며 그냥 열려 있었다. 19세기 초반에만 250만 명이 자국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미국의 인구는 순식간에 2-3배로 증가. 하지만 여전히 인구는 부족했고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서부개척이 본격화되자 인력 부족은 더 심각해짐. 아니 이민을 통한 폭발적 인구증가 없이는 서부개척 자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숙련 노동자가 아니라 단순 노동자들도 대거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세대가 아니라 이미 당대에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세대가 아니라 이미 당대에 미국사회의 주류에 편입해서 성공신화를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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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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