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흑역사

역사 2022. 7. 30. 09:04

-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퇴각할 당시, 병사들 중 수천 명이 열병에 걸렸다. 빌뉴 스를 거쳐 후퇴하던 25,000명의 병사 중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3,000명이 채 되 지 않았다. 고고학자 및 전염병을 연구하는 일련의 사학자들은 현대의 DNA 분석과 고미생 물학paleomicrobiology의 최신 기법을 적용한 연구를 통해 사망한 군인의 치아속질(ooth pulp 에 서 발진티푸스와 참호열 균을 찾아내었다. 단순히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진 군인도 있었 지만, 사망자의 약 3분의 1 정도는 이가 옮기는 질병에 감염되어 끝내 사망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는 이의 배설물을 통해 옮겨진 박테리아를 통해 치명적인 전염병이 전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에 기초하여 발굴단은 매장지의 흙에서 미세한 기생충을 찾아내 유전자 물질을 추출하는 선구적 기술을 사용하여 분석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발견한 유전자 물질을 통해, 두 세기가 흐른 지금까지도 기생충에 남은 질병 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니Pediculus humanus humanus는 머리카락이나 음부에 기생하는 머릿니와 달리 옷의 봉제선 속에 숨어 사는데,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을 타고 이동 하는 기마 포병대 장교의 군복 재킷에 기생하고 있었다.
몸니는 숙주가 열이 펄펄 날 때까지 숙주를 물어뜯고,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숙주의 몸 으로 옮아 박테리아를 전염시켰다. 부대원 전체가 제대로 씻지 못한 상태로 지저분한 막사 에서 다닥다닥 붙어 생활하는 환경이었으니, 새로운 숙주를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 다. 나폴레옹 시대까지도 해충과 질병 간의 관계가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발 진티푸스나 참호열 등의 질병은 역사적으로 감옥열 혹은 선박열ship Fever 등으로 불리었고, 사람들은 좁은 곳에서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는 감옥이나 선박 안 같은 환경에서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전까지, 발진티푸스와 장 티푸스 같은 질병은 군인에게 치명적이었으며, 통계학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이나 크림 전쟁 같은 장기전이 치러질 경우 기생충은 무기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 항생제가 등장한 이래, 티푸스를 포함한 많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유행성 질병이 만연했지만, 19세기 사람들이 싸구려 기성복이나 중고 의류에 기생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처럼, 오늘날 선진국 사람들이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의 노동 착취적인 공장에서 생산된 옷이 전염병을 옮길 것이라고 특별 히 염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병원은 여전히 옷에 의한 전염병 감염의 온상으로 지목된다. 의료진이 입은 오염된 의류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보면 안심하기엔 아 직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의사의 가운, 넥타이, 청진기 등 의료 전문가의 상징인 옷차림은 환자에게 치명적인 박테리아를 옮길 수 있는데, 이 중에는 항생제인 메티실린에 내성이 있는 포도상구균, 일명 MRSA(항생제 내성 세균)으로 알려져 있는 세균이 포함된다.
- 오염된 흰색 가운은 우리를 치료하고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 의사라는 존 재에 대한 배신과도 같다. 한편 남성 의사들은 진료할 때 착용한 실크 넥타이를 거의 한 번 도 드라이클리닝한 적이 없다는 조사 결과가 있어 충격을 준다. 2006년에 스코틀랜드의 의사 4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70퍼센트의 의사들이 한 번도 넥타이를 세탁한 적 이 없다고 밝혔고, 나머지 30퍼센트도 평균 5개월 간격으로 넥타이를 세탁한다고 밝혔다. 다른 연구에서는 의사가 착용한 넥타이에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세탁하는 셔츠보다 훨 씬 더 많은 박테리아가 서식하며, 넥타이 50개 중 8개는 항생제 내성 세균이 묻어 있다고 증언한다.
다른 연구에서는 병원 직원과 방문객의 옷에 누룩곰팡이 포자가 묻어 올 수 있으며,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의 환자가 이를 들이마시면 치명적인 폐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어른들이 안심시켜 주기 위해 꼭 껴안는 경우가 많은 아이들이 특히 위험하다.
- 《꿈속의 장식 Adorned in Dreams》를 쓴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1844년 작《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숙녀가 치장을 위해 사용하는 특 정 물품들이 노동자의 건강에 가장 슬픈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다.” 엥겔스는 여성들의 패션 아이템이 노동자의 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 해서는 바르게 판단했지만, 정작 그가 매일 쓰고 다 니는 모자에 독극물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는 까맣게 몰랐다. 지금은 펠트지로 만든 모자를 쓰는 남성이 거의 없지만, 엥겔스 시대에 남성이 모자를 쓰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격식 있는 차림의 필수 요소가 아니지만, 사실 모자는 많은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의복 생활의 중심 아이템이었 다. 중앙난방이 생기기 전에 모자는 실용적인 이유에서도 중요했다. 모자는 착용자의 체온을 유지하고 습기를 막아주어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모 자를 쓰고, 들어 올리며 인사하고, 휴대하는 방법을 둘러싼 복잡한 의례는 모자가 거의 사 라진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그저 신비로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일상 속에서 계급 간의 구별을 강화하려는 사회적 압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모자는 이러한 이유로 신발과 더 불어, 서양 남성의 옷장 속에서 비싸지만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였던 것이다.
- 수은이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모자 산업에 사용 된 이유는 남성 소비자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해당 산업에 종사 하던 남성 노동자의 상당수는 수은으로 인하여 천천히 죽음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수은의 사용은 사회적 성별과 계급에 따른 차별의 결과였다. 중상류 계층의 남성은 패션의 유혹과 위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집단으로 여겨졌으며, 패션은 이러한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는다고 간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수은의 위험성에 대한 논쟁은 의학계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만 이루어졌다.  루이스 캐럴의 미친 모자 장수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독성을 품은 모자 산업 에 대한 우려는 사회 전반으로 퍼지지 못했다. 
-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펴낸 《기술의 역사 History of Technology》를 쓴 에릭 존 홈야드Eric John Holmyard는 19세기 전반에는 염색 가능한 색상에 눈에 띄게 추가된 색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옳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비소로 내는 녹색은 기술적으로 안료pigment에 속하는데, 안료는 물에 녹지 않는 반면 염색은 물 같은 수용성 용제를 사용해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물건과 이미지를 훑어보면 눈부신 색채 기술의 혁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의 패셔너블한 옷과 각종 소비재, 인테리어는 화학적으로 생산된, 완전히 새로운 녹색으로 아름답게 칠해져 있다.
- 1780년대 이전의 녹색은 복합적인 색으로, 파란색과 노란색 염색을 섞어서 생산했다. 예를 들어 푸른빛이 도는 대청woad 염료 통에 천을 담근 뒤 다시 노란색 염료 통에 담그게 나 그 반대 순서로 염색해 만드는 식이었다. 간신히 녹색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천 연 염료 중 노란색은 빛에 쉽게 바랬기 때문에 색이 금방 변했다. 천연 염료는 다루기도 상 당히 어려웠다. 한편 구리에서 나온 녹청.verdet이 있었지만, 광물성 도료였기에 부식하거나 독성이 강한 문제가 있어 17세기까지는 극장 장식 등 특별한 용도로만 사용했다.
그러니 밝고 맑은 색을 내는 이 새로운 녹색은 보는 이의 눈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었을 까. 햇빛과 인공조명 아래서도 기적처럼 화려한 광채를 뽐내는 녹색의 화학 물질은 가격이 저렴했고 사용법도 비교적 쉬워 발명된 후 80년 이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뒤늦게 알 려진 독성으로 인해 거부하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 1862년 초, 슈어러가 사망한 곳인 세인트 판크라스 교구의 담당 의사였던 힐리어 Hillier 박사는 추밀원에 특별 보고서를 올리고자 하였다. 명망 있는 법의학 교수였던 윌리엄 가이 Tilliam Guy 가 보고서 작성에 고용되었고, 매우 흥미롭지만 꽤나 분노를 부르는 보고서를 완 성하였다. 그는 17세의 조화 제작자로 버저론의 공방에서 일했던 프랜시스 롤로Francis Rollo 의 죽음에 비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발견했으며, 슈어러를 진찰했던 의사가 버저론 의 사업체에서 일하는 여성 100명 중 50명 정도에게 치료를 권고했다는 사실도 발견하였 다. 후일 해당 공방은 이슬링턴Islington의 에식스Essex 가에 위치한 훨씬 환기가 잘되고 덜 비는 곳으로 이전했으나, 가이가 직접 만난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여전히 만성적인 비소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고 비교적 나이가 많은 한 여인은 탈모와 더불어 외음부가 감염되어 앉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는 18세 이하의 어린이가 비소 산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포함해 여러 제안을 했지만, 비소 염료 사용을 완벽하게 제한할 수는 없었다. 생산의 자유를 제한하여영국 경제에 해를 끼칠 만한 방법은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만약 나의 연구가 여러 치명적인 사례를 발견했다면, 비소 염료를 사용하는 산업의 완전한 금지를 제안하는 것이 옳다. 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덧붙이면서, 사망 사례 단 한 건'으로 전체 산업을 억누르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위험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주장하는 경제 논리는 사람의 건강을 누르고 결국 승리하였다. 건강에 대한 위험을 충분히 신경 쓰지 않는 현상은, 영국에서 위험한 물질을 사 용하는 모든 산업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성냥 제조에는 인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노동자의 턱뼈를 녹여 괴사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증상을 초래하였다. 현존하는 위험 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성냥 제조업계는 1890년대까지 공식적으로 규제를 받지 않았다.
- 아닐린 염료의 원료인 유독성 화학 물질 벤젠은 석탄 채굴과 그 부산물에서 유래한 산업화 의 유산이었다. 가스등과 가스 난방 같은 석탄을 사용한 발전은 19세기 초반 고래기름과 양초수지와 같은 천연 조명 원료의 부족 사태를 겪으며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석탄 에서 나오는 끈적이는 검은색 진흙 형태의 콜타르 coil tam, 부산물이 넘치게 되었다. 당시 화 학자들은 이 진흙을 의학이나 상업 분야에 적용할 방안을 모색하였고,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을 합성하는 데 쓰거나 염료로 활용될 가능성을 찾아내었다.
- 아닐린 염색은 과학적, 의학적 및 상업적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는 면 역학과 화학 요법의 발전도 있는데,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염색해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또한 합성 향수와 식료품 염색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닐린을 기반으로 한 화합물에 남은 치명적인 독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퍼킨의 발명은 수많은 기념비적인 문헌과 이미지에 반복적 으로 언급되었다. 비소가 선명한 녹색의 잎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한 잡지에 실린 찬사에 드러나듯, 아욱 꽃의 칙칙한 갈색이 도는 보라색’은 퍼킨에 의해 '맛깔스러운 바이올렛 색’ 이란 신세계를 창조하였다.  1859년에는 프랑스의 화학자 에마뉴엘 베르갱Emmanuel Verguin 이 '풍성한 크림슨 레드’ 색으로 군복에 널리 사용되게 된 푹신fuchsine을 제조하였다.
- 염색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직업의 위험성은 더욱 만천하에 공개되게 되었다. 염색을 할 때에는 원래 조색과 표백 및 염료 정착을 위해 매염제로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독성 물질이 사용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크롬chrome이 가죽 태닝과 염색에 널리 사용되고 있었 다. 이 물질은 노동자의 손에 크롬 홀chrome hole로 알려진 구멍 같은 흔적을 남겼는데, 이 증 상의 별칭은 로시뇰rossignol(밤꾀꼬리) 또는 나이팅게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증상이 발현된 노동자는 밤마다 새처럼 울부짖었기 때문이었다.
직업성 피부병에 관한 논문에 실린 한 이미지는 크롬 증기가 스타킹을 염색하던 한 남 성의 팔과 목에 가져온 고통스러운 발진 증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그림 11). 또 다른 직 업병 관련 논문에는 노동자들이 보호 장갑도 없이 원사에서 염료를 손으로 짜내며 염색 일 을 하고 있고 기껏해야 궂은일 정도로 부른다고 되어 있다. 논문의 저자는 염색 산업에 종 사하는 노동자들이 기관지염과 같은 호흡기 질환, 습진과 같은 피부병, 빈혈 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업계 노동자 사이에서는 청색증eyanosis 증상도 보고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청색증은 산소 부족으로 인하여 입술과 사지 끝이 파랗게 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아닐린은 방광암 및 고환암의 발병률을 크게 높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세기에 발전하는 염색 산업의 수혜를 맛보며 형형색색으로 차려입었을 여성은 남성 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가 아닐린 중독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는 것은 꽤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염료의 독성으로 인한 최악의 사례는 일부 아 이들 혹은 성인 남성에게서 주로 발견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중상류층 여성은 아동과 성 인 남성에 비해 차분하고, 우아하며 정적인 태도를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남성과 아이들은 일하고, 걸어 다니고, 심지어 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며 뛰어다닌다. 이들이 입고 있는 셔츠와 양말, 신발, 심지어 모자 밴드는 땀에 흠뻑 젖기 마련이었다. 최근 아디다스 이노베이션 팀의 학술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성은 땀의 대부분을 등과 이마를 통해 배출하며, 운동을 할 때 여성의 두 배 정도의 땀을 흘린다.
원래 비소를 사용한 에메랄드그린 색이나 아닐린 염색으로 합성한 오색찬란한 색은 피부에 직접 닿는 옷에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빨간색만큼은 오랫동안 남성 과 아이들의 양말, 여성의 스타킹, 플란넬 속옷, 페티코드 및 노동자 계급 남성이 입는 셔츠 에 사용되었다. 전통적으로 빨간색 염색은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뿌리나 연지벌레와 같은 곤충으로부터 얻은 염료를 사용했는데, 나방과 같은 해충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 라 색이 오래가고 무엇보다 피부에 안전했다. 의사들은 빨간색을 류머티즘 관절염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추천하기도 했는데,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대중은 빨간색 플란넬 천을 특별히 위생적일 것이라고 믿어 속옷으로 선호하였다.
- 스타일리시한 19세기 여성들이 마치 반짝이는 에메랄드나 모브 색상 가운을 입은 컬러풀 한 보랏빛 새처럼 보였던 반면, 기계 문명 시대의 민간인 남성은 냉철하고 점잖은 검은색을 선호하였다. 검은색은 티 없이 맑은 흰색만큼이나 유지하기 힘든 색으로 부유층의 특권이었다. 슈트의 경우 저렴한 검은색 염색은 빨리 색이 바래여 지저분한 어두운 녹색이나 노란색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광을 내지 않은 검은색 부츠나 구두는 진흙이 튀긴 자국 때문에 회색으로 보였다.  백인 여성은 피부가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장갑과 양산으로 무장한 채 납 성분이 든 액 상 진주 유액을 얼굴에 발라 부드럽고 온화한 흰색으로 빛나는 피부를 가지려 했다. 이에 대조되는 벨벳처럼 짙은 검은색은 그들의 남성 파트너들이 여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남성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외모를 가꾸는 데 시간과 공을 엄청나게 들였다. 남성의 액세서리들은 광택을 낸 강철과도 같이 윤기가 흐르 는, 말 그대로 산업사회의 숭고함이 반영된 미학으로 받아들여졌다. 광택을 낸 가죽으로 만든 검정 구두는 자연스러운 윤기가 흐르는 실크 소재 정장 모자와 짝을 이뤘다. 남성 신발 에 요구되는 검은색 허세를 제공하기 위해 검정 구두약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 남성용 신발은 디자인과 유지 비용, 상태에 따라 그가 어떤 사회적 계층에 속해 있는지 단번에 유추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지표였다. 오늘날 우리는 싫증 나면 바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하고, 심지어 빨아서 신을 수도 있는 신발을 신고 깨끗한 콘크리트 보도를 지나 는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19세기 사람들의 사치품이었던 신발의 위상을 잊고 산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 보면 19세기의 도로는 위험투성이로 보일 것이다. 지저분하고, 진흙투성이에 다 거의 비포장도로였던 길에 말의 배설물과 다른 쓰레기들이 가득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 겠는가. 오직 일부의 남성들만이 다른 이의 도움 없이 (혹은 마차 없이) 자신의 신발을 완벽 하게 광택이 흐르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구두닦이 소년과 새로이 보급된 우산, 그리고 몇몇 건축공학이 일군 혁신적인 공간이 야말로 재력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보행자들이 파리에서 깨끗한 신발을 유지할 수 있는 방 법이었다. 옻칠을 하거나, 래커를 바르거나, 광택을 낸 가죽은 퀴르 베르니cuit vermi 라고 불 렸는데, 이는 보호 기능이 있었다. 몇 겹으로 바니시를 칠해 만든 신발은 방수 효과가 보다 뛰어났고 진흙이 튄 자국도 제거하기 쉬웠다. 그러나 19세기에 바니시를 칠한 가죽은 백랍 이나 유독한 가연성 용제를 사용했으며 그 때문에 끔찍한 악취를 풍기기 일쑤였다. 
- 한편으로는 칭송받던 절약 정신이야말로 20세기의 첫 30년 동안 가장 심각한 연쇄 니트로벤젠 중독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었다. 밝은 갈색이나 노란색의 신발에 때가 많이 묻으면 액상 구두약 용액을 발라 검정이나 갈색으로 다시 염색할 수 있었는데, 이 용액을 미국에서는 프렌치드레싱French Dressing이라고 불렀다(그림 14). 이 용액에서 검정색 염료의 접착 제로 주로 사용한 것은 유독한 액상 아닐린이나 더 독하지만 그보다 저렴했던 니트로벤젠 이었다. 이 용액으로 구두를 적시면 증발 과정에서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증기가 발생하 였다. 또한 액상 형태였기 때문에 신발 위쪽의 천 부분이나 가죽에도 스며들었고, 땀이 난 발이나 발목의 피부를 통해 몸에 흡수될 수 있었다. 그로 인한 비극은 주로 일생에서 기념 할 만한 순간에 자주 일어나곤 했다. 예의를 갖춰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최선을 다해 임하려면 구두도 최선을 다해 광택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 2011년 영국 신문 〈더 가디언 The Guardian)의 뷰티 칼럼니스트 샐리 휴즈Sali Hughes는 '염 색약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을까? Could Your Hair Dye Kill You?'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그녀 가 기사를 쓴 시점은 스코틀랜드의 17세 소녀 타바사 맥코트Tabatha McCourt가 염색약에 들어 있던 p-페닐린다이아민p-phenylenediamine 또는 PPD라고 불리는 성분에 대한 다수의 부작용으로 사망한 지 한 달이 지난 후였다. 휴즈 자신도 원래 빛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나 단골 미용실의 권유로 머리를 염색한 후 비슷한 알레르기 반응을 겪고 입원한 경험도 한몫했을 것이다.
- 비록 색조 화장품에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PPD는 오늘날에도 로레알L'Oréal, 클레어롤Clairon과 에이본Avon 등 유명 제조사의 제품을 포함한 99퍼센트에 달하는 머리카 락 염색약에 사용되고 있다. 이유는 새치를 효과적으로 물들여 주기 때문이다. 미용용품에 사용되는 수많은 다른 독성 성분들, 예를 들어 립스틱과 옷 속의 납 성분부터 염색약에 든 PPD 성분에 이르기까지, 진즉에 역사 속 유물이 되었어야 할 오염 물질들은 여전히 우리 삶 의 수많은 영역에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각 제조사들의 경제적 필요성과 미용에 대한 사 회적 필요성이 그것들을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남성이 부 츠를 염색하고 광택을 내기 위해 구두를 손질하는 곳으로 몰려들었듯이,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새치 섞인 머리카락을 사회적으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색으로 염색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몸을 옥죄는 코르셋과 신발에 대한 의학 문헌에는 익숙하나, 다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중세에는 남성용 양말이 발전하여, 남성은 다리를 드러내기 위 해 두 갈래로 갈라진 옷을 입었던 반면, 여성은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긴 스커트 착용이 권장되었다. 남성이 스커트를 입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의 일이거나 공장에서 노동을 하 기 위한 경우에 국한되었다. 한편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은 20세기 초에 페미니스트 의상 개 혁가들이 풍성한 실루엣의 여성용 바지인 블루머bloomer와 같은 옷을 도입하려고 시도했으 나 50년 넘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20세기 초까지 스포츠나 오트 쿠튀르의 경우를 제 외하고 여성이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조롱과 저항이 심했다는 뜻이다.
1880년대는 의상 개혁가들이 탐미주의 운동의 산물인 헐렁하고 늘어진 가운을 필수복장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고, 주류 패션에서 유행한 무릎 아래에 내부 띠를 두른 폭 좁 은 스커트는 여성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한 시기였다. 한 의상 개혁가는 1880년 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대부분의 사람들은 걷는 데서 오는 즐게 움이 없어졌다고 한다. 체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몇 발짝 걸을 때마다 무겁고 폭이 좁은 스커트가 주는 피로감을 심각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행동을 제약하는 스커트가 유행 전선을 넘나들고, 아방가르드 시대를 살았던 여성은 배우를 비롯하여 몸매를 온전히 드러내는 시스sheath(칼집이라는 뜻) 스커트 또는 고대 그리 스 의상을 연상시키는 디렉투아르 Directoire(프랑스 혁명기 총재 정부 시대의 양식) 스커트에 몸을 밀어 넣어야 했다. 이러한 몸에 착 달라붙는 스커트는 종아리와 허벅지를 드러내는 슬릿 이 있어 밝은 색깔의 스타킹을 과시하는 한편, 착용자의 다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스커트가 타이트해질수록 이를 입고 걷기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의 이동성을 교묘하게 제한하는 스타일인, 호블 스커트로 대체되었다.
- 관객과 부대 담당자가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용수들은 계속 불에 잘 타는 성질의 옷을 입었다. 옷에 불이 붙어 희 생된 무용수의 비극 중 하나는 그녀들이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처 럼 위험한 노동 조건에 대해 불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 '밑바닥 요정들 중 다수는 위험수당을 벌기 위해 지상에서 몇 미터나 위에 떠 있는 와이어를 타고 연기하겠다고 조르기까지 했다. 19세기 발레리나는 엄격 한 훈련과 고통을 견디는 거의 초인적인 능력 으로 잘 알려진 육체 노동자였다. 선택받은 극소수의 여성 스타는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됐지만, 발레단의 일반 단원들은 극도로 가난 한 노동 계급 출신이었다. 발레의 공공연한 비 밀 중 하나는 파리 오페라 Paris Opéra처럼 위엄 있는 기관에서조차 젊은 발레리나들이 가계 수입을 올리려는 제 엄마들의 손에 팔려 온, 못 먹고 과로하기 일쑤인 매춘부였다는 사실이다.
- 셀룰로이드는 셀룰로스celulose(섬유소)라는 유기 화학물을 모방한 것으로, 셀룰로이드 제조에 사용하는 면이나 목재 펄프처럼 인화성이 높은 문제가 있었다. 화학자들은 셀룰로 이드를 질산염 처리해 장뇌camphor(지방고리 모양 케톤의 일종 - 역주)와 섞은 다음, 최종 제품 을 만들기 위해 다른 화학 물질과 결합하는데 이때 거의 화약과 비슷한 수준의 폭발력이 생겼다. 질산염 처리가 가장 강하게 된 제품을 면화약uncotton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 만 자일로나이트(식물ylos에서 나왔음을 뜻함) 또는 피록실린.pyroxyline(불pyro과 나무xyline를 뜻 함) 등 다른 상표명은 원재료를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의 이름이었다. 여기에 셀룰로이드 자 체가 인화성이 높다는 소식이 퍼지자, 불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은 빠르게 사라졌다.
1845년 독일계 스위스 화학자 크리스티안 쉽바인Christian Schönbein은 아내가 없는 사 이에 주방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질산과 황산을 쏟았고, 아내의 면 앞치마로 닦아 낸 다음 앞치마를 난로 앞에 걸어서 말렸다. 그런데 앞치마가 열을 받자 저절로 불이 붙어 연기도 없이 사라졌다. 쉰바인은 이 발견이 지닌 군사적 잠재력을 재빨리 깨달았고, 자신의 발명품에 면화약 guncotton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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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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