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만 2천 년 동안의 기후변동과 기후사를 되돌아보면, 최근 2천~3천 년 사이에 발생한 한 가지 특이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특이점이란 바로 온난기에는 문화와 사회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가 발전하며 전성기를 누린 반면, 한랭기는 불안과 위기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문자의 발명이나 새로운 문명의 대두, 다양한 조직과 기구의 형성과 발전 등 인류가 이뤄낸 역사적 발전 대부분은 홀로세lolocene라는 지질 시대, 즉 온난기에 집중되어 있다.
홀로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시작은 기후온난화였다. 물론 홀로세 내내 기온이 지속적으로 높았다는 뜻은 아니다. 온도 가 뚝 떨어진 시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기원전 4100년부터 기원 전 2500년경까지 사하라 사막의 일부가 초원에서 황무지로 변해 버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학자들은 홀로세가 대략 서기 2000년을 기준으로 1만 1,700년 전쯤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독일 아 이펠 산맥 지대의 마르maar형 호수인 마르펠트 호수의 퇴적물을 분 석한 결과 역시 그와 비슷했다. 홀로세의 시작 시점을 대략 기원전 9640년으로 본 것이다.
- 고대 기후최적기의 온난 건조한 날씨는 로마제국이 서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 길을 열어 주었다. 그 당시 기후는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작물이나 가축을 키워 식량을 조달하는 켈트식 빙하기 농경보다는 지중해성 기후에서나 재배가 가능한 곡물과 포도 농사에 더 적합했다. 그러나 기원후 300년경부터 기후가 급변하면서 남유럽 전체가 한랭다습한 지역으로 바뀌었고, 이로써 농업에 기반을 둔 로마제국의 경제도 성장을 멈추게 됐다
- 250년경부터는 뚜렷한 냉각 현상이 관찰되었고 536년에는 급 기야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그토록 급격한 온도 하강을 초래한 원 인을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분명 구체적인 이유가 있 었고, 당시 기록적 혹한은 인구 지형도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비가 내리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고, 곡물이나 포도 농사에서 도 풍년을 기대할 수 없었다. 4세기 전반에는 강수량이 잠시나마 늘어났다.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 통치 하에서 로마제국이 잠시 안정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굳건하게만 보이던 로마제국은 395년 완전히 분열되 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서로마제국과 그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살아남은 동로마제국으로 분열된 것이다. 이후 서로마제국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난다. 전쟁이 발발하고,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인구수가 줄어들고, 경작을 포기해야 하는 땅의 면적도 늘어났 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경작이 가능했던 땅들이었지만 대자연의 어머니는 갑자기 등을 돌렸고, 이후 경작이 불가능한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주해 버렸다.  나중에 비잔틴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 국보다 정치적으로 더 큰 번영을 누렸고 기후도 더 온난했다. 다습한 여름 날씨 덕분에 풍작은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덕분에 5세기 동로마제국은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서로마제국은 16세의 어린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이민족들로 구성된 군대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1453년 투르크족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동로마제국은 자신들의 영토로 이주해 오는 이민들을 적극 수용하고 통합하면서 점점 더 큰 번성을 누렸고, 서로마제국의 속주를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6세기 들어 최악의 기후가 동로마제국을 덮쳤고,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 발생했다.
- 사실 535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는 선사 시대에 일어난 토바 화산 폭발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한 기후변화를 모두가 자각할 수 있는 정도로 컸다. 주교이자 교회역사가인 에페소스의 요하네스 Johannes of Ephesos는 그 당시 상황을 이
렇게 표현했다.
"태양은 어두웠고, 그 어둠이 18개월 동안이나 지속됐다. 햇빛은 하루 4시간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 빛조차 매우 희미했다. 모두가 태양이 다시는 원래의 광력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 미틸레네의 즈카리아스Zacharias of Mytilene 역시 비슷한 의견으로, “대낮의 태양도 밤중의 달빛도 어두컴컴했다” 라고 기술했다. 학식이 매우 높다 해서 수사학자scholasticus'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즈카 리아스가 체험했던 그 시기는 일찍이 동방에서 볼 수 없었던, 그야 말로 기이한 시기였다. 즈카리아스는 동장군이 맹위를 떨쳤던 그 시절 겨울에 대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만큼의 많은 눈이 내렸 다. 심지어 새들이 멸종될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라고 기록했다. 추 위는 무엇보다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혔다. 에페소스의 요하네스는 “과실이 익지 못했고 포도주에서는 시큼한 맛이 났다” 라고 썼다.
-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생장 속도가 확연히 느려진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현상은 스코틀랜드와 스웨덴, 칠레, 캘리포니 아, 심지어 호주의 태즈메이니아 섬 등 세계 도처에서 동일하게 관 찰됐다. 핀란드의 어느 대학이 실시한 연륜연대학적dendro-chronological 연구 결과, 536년에 기온이 갑자기 급강하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후 평균 기온은 두 차례에 걸쳐 다시금 뚝 떨어졌고, 542년에는 급기야 1,500년 만에 최저 온도를 기록했다.
일조량 감소, 지속적으로 내리는 눈과 비, 혹은 그 정반대의 경 우인 지속적 가뭄, 가뭄과 가뭄 사이에 내리는 우박을 동반한 폭우 등 극심한 기상이변은 고대 말기 농업 중심의 사회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그것이 곧 생존을 위협하는 흉년과 대기근으로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6세기 무렵, 그 이전에도 늘 그랬고 그 이후 몇 백년 동안에도 그랬듯, 수많은 이들이 일용할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 배불리 먹은 경우에도 영양 상 태는 불균형했다. 이상기후로 인한 흉년이 한 차례 지나고 나면 국 민들의 건강 상태는 극도로 악화됐고 면역력도 떨어졌다.
그 시절 나무 표본들을 연륜연대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간격이 좁은 나이테들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 도 흉년은 한차례가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수차례 발생했을 가능 성이 높다. 어쩌면 지중해 동편에 살고 있던 이들, 즉 동로마제국의 국민들은 비록 풍족하지는 않지만 올리브와 채소를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던 덕분에 다른 지역에 비해 영양 상태가 그나마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고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올리브 나무에서 수확할 수 있는 열매의 양도 줄어들었고, 과육의 품질도 저하됐다. 화산 폭발이 초래한 기상 대이변이 지중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의 식단에도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 불리는 흑사병 역시 기상 대이변 직후에 발생했다.
- 기후를 둘러싼 논의에서 중세 온난기는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오래전의 얘기라 큰 관심을 두지 않 던 테마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사람이 기후변화에 최 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이론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자연발생적 기후변화가 늘 있어 왔다는 증거로 흔히 중세 온난기를 꼽곤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기후변화도 호들갑을 떨어야 할 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중세 중엽에도 이 정도 폭의 기후변화는 있 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서 반박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인류와 문명의 발전이 한랭기보다는 온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 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온난기를 거론하며 오늘날의 지구온 난화도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에는 도저 히 동의할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지구온난화가 극심한 기상이변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몇몇 섬나라 들과 해안 지역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최소한 기후학자 중 과반 수는 이러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스웨덴 왕립공과대학은 최근 1천 년도 더 지난 중세 전성기를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재단하는 행위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입 증하는 분석 자료를 내놓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대용 자료들을 이용해 온도를 추정하는 방식은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 에 20세기 후반의 기후 상승폭이 중세 온난기의 최고 상승폭보다 더 컸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하지만 그 반대의 주장을 뒷 받침하는 근거는 더더욱 빈약하다. 최근 20년보다 중세 온난기가 더 더웠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1315~1323년 사이, 기근과 그 여파로 발생한 질병 때문에 사망한 유럽인들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수백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기근은 사람들의 의식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기근이라는 형태로 발생한 대멸망의 전령사는 중세 초반의 암흑기 이후 유럽 사 회에 거대한 타격을 입혔다. 어쩌면 그때의 대기근이 사상 최악의 기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321년에서 1322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여전히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발트 해의 넓은 면적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이후 천만다행으로 날씨가 다시 회복되었다. 사람들 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또 다른 재앙을 예감하지는 못했다. 흑사병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던 것이다.
- 그 시절의 대기근은 동화와 전설의 소재로도 사용됐다. 어느 사악한 주교가 굶주린 백성은 외면한 채 자기만 살겠다고 식량을 몰래 쌓아 두었다가 결국 쥐들에게 잡아먹힌다는 '빙겐Bingen의 쥐 탑’ 이야기도 당시 대기근에서 기원한 것이고, 그로부터 약 500년뒤 그림 형제가 발굴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 역시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하던 당시를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야기 속 마녀에게는 길을 잃고 우연히 자신의 집에 오게 된 두 아이가 반가운 '식재료'에 불과했던 것이다.
-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기상학과 교수 마이클 E. 만은 “북반구의 경우 기온이 최저로 떨어지는 일이 시기적으로는 다르게 나 타났지만, 몇몇 예외 지역을 빼고는 대략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15~19세기 사이의 기온이 11~14세기에 비해서는 0.3도가 량 낮았고, 20세기 후반에 비해서는 0.8도가량 낮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 시기를 통틀어 가장 추웠던 시기는 15세기 후반이었고, 17세기와 19세기가 두 번째로 가장 추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남반구에는 소빙하기의 흔적이 훨씬 더 분산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 소빙하기의 시작과 종료 시점을 정확히 규명하기는 매우 힘들 다. 유럽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많은 이들이 기온이 저하되기 시작한 14세기를 빙하기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지만, 그보다 더 이 전에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1315년을 전후한 10년을 소빙하기의 시작점으로 보는 시각은 충분히 개연성 이 있다. 대기근을 초래했던 기상이변이 일어났고, 그 10년 동안 중 세 온난기의 기상 상황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종료 시점은 많은 학자들이 19세기 중반을 지목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기 즈음에 산업화가 점점 더 진행되면서 각종 유해 물질의 배출량이 늘어났고, 그로 인해 기온이다시 상승했다.
소빙하기의 기온을 끌어내린 원인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연 구가 진행됐다. 그 결과 태양의 활동 즉, 흑점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중 가장 중요한 항성인 태양의 흑점 변화에 대한 관찰은 1607년에 이미 시작됐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카메라 오브스쿠라 Camera obscura를 이용해 종이 위에 태양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담았다. 그게 아마도 태양의 흑점을 관찰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이후 갈릴레이는 태양의 흑점을 보다 면밀하게 관찰하고 연구 했다. 소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추웠던 시절을 즈음하여 태양의 흑 점 활동은 최소로 줄어들었다. 학계에서는 그 시기를 마운더 극소기 Maunder minimum’라 부른다.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워드 월터 마운더Edward Walter Maunder의 이름을 딴 것인데, 대략 1645년부터 1715년까지를 가리킨다.
- 기온 저하를 부른 또 다른 유력한 원인은 화산 폭발이다. 화산 이 폭발하면 분출된 미립자들은 대기권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에어로졸을 형성하고, 에어로졸은 지면에 닿는 햇빛의 양을 감소시킨다. 1452~1453년, 태평양의 작은 섬 바누아투에서도 한 차례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유난히 추웠던 1580~1600년에는 아 시아와 태평양, 라틴아메리카에서 화산이 다섯 차례나 폭발했다.
그중 하나가 1600년 페루에서 일어난 화산 대폭발로, 에스파냐 의 정복자들이 현지에 정착해 살면서 남긴 기록물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산학자들은 이와 관련해 여름 기온이 평소보다 훨씬 더 낮았던 여덟 개의 시간대를 여덟 차례의 화산 대폭발과 연결시키기 도 했다. 심각한 기상이변을 초래한 화산 대폭발은 현재까지 몇 차 례 발생했다. 1815년과 그 이듬해를 '여름이 없는 해'로 만들어 버 린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Tambora 화산 폭발도 그중 하나다.  한편, 산업화로 인한 각종 환경 문제를 걱정하는 게 일상이 된 21세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기온 저하의 원인이 하나 더 있다. 1347년과 1350년 흑사병 이후 인구가 급감하면서 삼림 면적이 늘 어난 것이 기온 하강의 원인이라는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얼핏 생 각하기에는 삼림 면적이 늘어나면 무조건 좋을 것 같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이산화탄소가 추위를 불러왔다는 이론에서는 숲 면적이 늘어나면서 나무가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도 늘어났다.
- 사실 이산화탄소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온실가스와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우리 모두는 깨 끗한 지구 환경을 위해 탄소 가스 배출에 대해 모종의 죄책감을 느 껴 어떻게든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쉽 게 말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면 온난화 현상도 줄어들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너무 적어도 탈이라는 데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산화탄소가 너무 부족하면 온도가 너무 내려가서 소빙하기처럼 추운 시대가 돌아올 수 있다. 나아가 차디찬 날씨는 전쟁이나 사회적 불안, 위기 등을 초래할 수 있고, 이런 혼란 속에서 옛날의 마녀사냥 같은 것이 다시금 되살아나면서 모두들 희생양을 찾으려 혈안 이 될 수도 있다. 마녀사냥은 유럽 근세 초기에 발생한,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집단 학살한 비극적 참사였다. 구교, 신교 가릴 것 없 이 수많은 종교계 지도자들이 마녀사냥에 직접 가담했다.
참혹한 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1560~1600년 사이였 다.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그 이외의 악천후가 발생 했을 때에도 모두들 이 같은 현상을 몰고 온 죄인 색출'에 열을 올 렸다. 죄인들은 물론 아무 죄 없는 희생양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마 을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악마와 결탁을 맺은 마녀들이 술수를 부린다고 굳게 믿었다. 주민의 조급함이나 미신, 흉년 등으로 인해 마녀사냥이 줄지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 20세기 들어 각종 분석 기술과 도구가 발달되면서 탐보라 화산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엄청났는지가 입증됐다. 그린란드나 남극에서 채취한 얼음 기둥을 분석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빙핵 분석법을 활용하면 어느 시대에 어떤 가스 성분이 대기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를 알 수 있고, 거기에 나이테 분석법을 추가하여 시대별 연평균 온 도도 추정할 수 있다. 얼음 기둥이나 나이테 같은 대용 자료들은 특 정 시대의 기후나 기후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간접 증거로 작용한 다. 거기에 다시 역사적 기록물들을 조합하면 정확도가 꽤 높은 그 림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작된 탐보라의 초상 화'에서는 탐보라 화산 폭발이 11~20세기 사이에 일어난 인류 최 대의 기후 재앙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탐보라 화산의 폭발 규모는 그야말로 '폭발적' 이었다. 가스와 화산재가 고도 43킬로미터까지, 다시 말해 성층권까지 치솟았다. 당시 분출된 물질들의 전체 합이 100 입방킬로미터에 달할 정도였 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케임브리지 대 학교의 화산학자 클라이브 오펜하이머는 지난 2천 년 동안의 화산 폭발에서 분출물의 도달 고도가 탐보라보다 높았던 화산 폭발은 단 한 건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뉴질랜드의 타우포Taupo 화산 폭발이 그것인데, 당시 분출물이 무려 51킬로미터 고도까지 치솟았다. 타 우포 화산 폭발은 181년, 로마제국이 황금기를 맞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일어났다.
- 당시 로마제국의 어느 현명한 학자 한 명이 후세의 화산학자들에게 중대한 자료를 남겼다. 소小 플리니우스 Gaius Plinius Secundus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소 플리니우스는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 화산폭발과 폼페이의 멸망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오 늘날 화산학자들은 소 플리니우스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에서 강력 한 화산 폭발을 ‘플리니언 폭발plinian eruption’이라 부르고, 그보다 강도가 더 높은 파국적인 폭발은 '울트라 플리니언 폭발ultra plinian eruption'이라 부른다. 1815년 탐보라 화산의 폭발 강도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는 8단계로 구분되는 화산폭발지수VEI, Volcanic Explosivity Index를 보면 알 수 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강도는 5였고, 1883년 크라 카타우 화산 폭발의 강도는 6이었다. 탐보라의 강도는 7이었는데, 인류 역사상 강도 7의 화산 폭발은 탐보라를 포함해 총 5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 강도인 8에 도달한 폭발도 2건이 있었다. 하지만 이 2건은 모두 역사 이전의 선사 시대에 일어난 것들이다.
-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해 인근 지역은 며칠 동안 어둠에 잠겼고, 많은 시설들이 파괴됐다. 4월 10일 자정에는 폭발로 인해 발생 한 쓰나미가 자바 섬 동쪽 해안을 강타했고, 쓰나미로 인한 직접적 인 사망자 수만 해도 7만 1천 명에서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후 몇 달 동안 기근과 역병이 이어지면서 희생자 수는 불어났다. 한편, 당시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기상이변이 19세기에 발생한 대 표적 역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파키스탄, 인도, 방글 라데시, 미얀마, 스리랑카 등이 속한 인도 아대륙Indian subcontinent에 서는 계절풍이 중단되는 등 다양한 기상이변이 일어나면서 그때까 지 현지에서 자주 발생하던 벵골 콜레라의 변종 역병이 대두됐다. 1817년부터는 이 변종 콜레라가 전 세계로 널리 퍼졌다.
- 1816년 여름, 중서부 유럽의 낮 평균 기온은 1810~1819년 기온에 비해 1~2도가량 낮았는데, 1810~1819년은 근대에 접어든 이후 가장 추운 10년이었다. 1951~1970년과 비교해도 1816년 여름 의 기온이 3도나 낮았다. '3도 정도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기 상학 분야에서는 엄청나게 큰 차이다. 1816년, 북반구는 1400년 이후 두 번째로 추웠다. 1400년 이래 1816년보다 더 추웠던 해는 1601년 단 한 해뿐이었다.
- 여름이 없는 해 1816년은 당연히 인류에게 혜택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장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기 상층부의 에어로졸 덕분에 비나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면 형형색색의 일몰 광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영국 출신의 윌리엄 터너는 그 화려한 장관과 땅이 품은 생동감 넘치는 색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저녁이 품은 특별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은 대표적인 화가다. 런던 테이트 모던에 소장 중인 풍부한 색감 의 〈치체스터 운하Chichester Canal)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당시 사람들 이 비록 기상이변 때문에 고통 받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대자연 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은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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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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