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 전략이 본격적인 빛을 발한 것은 진의 효공시대에 이르러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앙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효공을 보좌하여 강력한 개혁 정책인 이른바 상앙변법을 시행하면서부터 통일을 향한 구체적인 걸음이 시작됨. 그리고 이후 혜문황, 무왕, 소왕, 효문왕, 장양왕 등 후대왕들이 지속적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여섯 제후국을 공략한 끝에 그 완성의 꼭짓점 즈음에 진 시황이 왕으로 등극
진 시황은 장기로 비유하면 마치 선대왕들이 장기간 차곡차곡 깔아놓은 부국강병이라는 포석 안에 적들을 코너로 몰아넣고 언제든 맘만 먹으면 외통수 장군을 부를 수 있는 시점에 왕위에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이런 선대왕들의 공덕에 힘입어 비교적 손쉽게 여섯 제후국을 제압하고 천하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 진제국의 통일과 지정학적 요인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던 전국칠웅 중에서 진나라는 원래 그다지 천하를 통일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는 아니었다. 진나라는 주 평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후로 분봉을 받았기에 그 역사가 너무 짧았다. 게다가 영토의 대부분이 서북부지역의 척박한 땅이었기에 연안지역의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토대로 한 전국시대의 잘나가는 국가들이 보기에는 전혀 존재감 없는 변방의 미개하고 야만적 국가에 불과했음.
그러나 거꾸로 이런 지역적 척박함과 역사가 짦은 취약점이 후에 육국 연합군이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 절대적 이유가 된다. 사실 진나라의 영토가 매우 척박했다는 건 소위 좀 잘산다는 연안지역 국가들의 시점이었을 뿐이다. 전한시대 사상가 가의는 과진론에서 이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바라보았다.
괜히 분쟁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어 다른 나라들과 잦은 전쟁에 휘말릴 염려도 없고, 저 멀리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매우 견고한 천혜의 요새를 갖추고 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도 매우 유리하니 누구의 간섭 없이 장시간 국력을 축적할 수 있는 탁월한 지리적 요건을 지녔다.
게다가 타국에 비해 역사가 짧고 문화적 전통이 없음은 현대 미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히려 새로운 정치실험과 창조적이고 실용적 제도를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한 진나라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기질 때문에 상앙의 변법을 통한 제도개혁이 보다 쉽게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천하를 통일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제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 진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이유
통일제국이 탄생하기까지는 수백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몰락은 실로 순식간에 가까웠다. 사실 통일제국 진시황이 이룩한 정치시스템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음. 진 시황은 사회, 문화, 경제, 정치 등 여러 방면에서 기틀과 제도를 마련하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놀라운 업적을 남김. 그렇다면 진제국은 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진 시황은 통치자로서 쌓은 놀랄운 업적에 비례해 폭군으로서의 부정적인 면도 많이 알려져 있음. 실제로 그는 현실성 없는 통치제도와 가혹한 법 집행으로 통치기간 내내 줄곧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와 그 측근들의 성급한 판단에 의해 짧은 시간 안에 변화된 새로운 제도들은 이해하기도 적응하기도 힘들었던 일반 백성들에게는 고된 핍박과 지옥같은 삶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진제국이 멸망한 궁극적 원인을 두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는데, 그 첫번째로 과도한 군사 및 노동력 동원으로 인한 백성들의 반발. 한나라 개국초기나 다른 왕조에서도 볼 수 있듯 보통은 오랜 전란이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면 그간 여러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 하고 노동력 징발을 자제하고 세금을 감하는 등 어질고 의로운 정치를 통해 내부통치를 공고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대규모 군사행동 및 대형 토목공사를 끊임없이 추진. 군사적으로는 북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남으로 남월을 공략하는 등 계속 전시체제를 유지해 백성들을 끊임없이 지치게 한 것. 게다가 경제적으로는 만리장성이나 직도, 치도 등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방대한 토목공사 및 심지어 지배층이나 향유가 가능한 호화와 사치의 대명사인 아방궁 신축, 능묘 조성 등을 무리하게 진행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제국말기에는 이를 못 견뎌 스스로 자살을 하는 자도 줄을 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정책들로 인해 진 시황이 통치하는 동안 나날이 제국의 영토가 늘어나고 사회간접기반을 확충하여 널리 변방에까지 그 위세를 떨쳤으나 백성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시대 이래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온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고 행복한 삶을 염원하고 있었으나 정작 통일 후의 진제국이 백성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과중한 조세와 부역, 가혹한 형벌과 굶주림 뿐이었다. 그러니 아마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나라 전체가 캄캄한 감옥처럼 느껴졌을 것임. 결국 이와 같은 지배계급과 농민계급의 모순 및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진 시황 사후에 순식간에 붕괴전야와 같은 혼란을 부르는 단초가 된다.
통일 전 자신들만의 영토를 갖고 있었던 6국의 제후들은 진시황의 사후 통제가 느슨해진 것을 기다려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신호로 저마다의 지역에서 반란군을 일으켜 진을 협공하여 몰락시킴. 이것은 진이 멸망에 이른 보다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6국을 차례로 정복함으로써 통일국가를 이룩했으나 결국에는 6국의 잔재세력에 의해 다시 몰락하고 만 것이다.
- 유방의 리더십은 항우와의 초한전쟁에서 빛을 발했다.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에서 가장 큰 차이는, 항우는 모든 권한을 자기 한 사람에게 집중시킨 반면, 유방은 자신의 권한을 늘상 부하들에게 대폭 위임했다는 것이다. 항우는 겉으로는 부하를 위하는 척했으나 전공을 세운 부하에게 상을 내리거나 자기의 권력을 나누어주는 데에 무척 인색했다. 그런 반면 유방은 타고난 호방한 성격을 바탕으로 늘 부하들의 살길을 먼저 열어주는 대인이었다.
이렇게 지도자가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가, 혹은 적절히 권력을 분배하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리더십의 문제를 떠나서 국가조직의 안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 이는 초한전쟁 당시 유방과 항우의 관계에서도 극명하게볼 수 있다.
초나라의 경우 모든 권력이 항우 한 사람에게 너무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 휘하의 장수들은 모든 상황을 항우에게 보고하고 또 항우의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승기를 확실히 잡은 상황에서도 매번 항우의 명을 기다리느라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고 혹여 패배라도 할 때면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상황에 맞는 적당한 전략을 구사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음.
반면 유방 휘하의 장수들은 재밌게도 그 반대였다. 그들은 매번 쫓기다가도 다시 모이고 또 상대의 매서운 공격에 맥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다시 만나기를 여러번 거듭하다보니 다들 자생적으로 노련하게 변화. 도망다니느라 정신 없던 유방은 그들에게 일일이 명령을 내릴 수도 없으니 다들 알아서 자기 몫을 수행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고, 이에 유방 휘하의 장수들은 어느새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여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됨.
- 당시 군사력으로 보더라도 유방 휘하 장수들의 개별전투력은 항우의 대군에 비해 보잘 것 없었지만 반대로 그들에겐 민첩한 기동력과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판단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비록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유방의 합리적 권력분배는 휘하 장수들의 독자적 전투 수행능력을 배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오랜 초한전에 있어 항상 열세이던 유방이 철옹지성 같은 항우를 꺾고 천하를 얻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됨.
유방은 전승되어 오는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평민 출신에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얽혀 있는 여러 고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매사에 두려운 것이 없었고 늘 패기가 넘쳤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귀인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그 귀인이 뛰어난 인재임을 알아보는 천부적 안목이 있었음. 더 나아가 그는 인재를 어느 곳에 써야할지 알았고 늘 배우려는 자세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또한 본인의 능력이 모자라 비록 직접 나서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해 최대한의 효과를 보았다. 이 모든 요인이 그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