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ka와 2.8ka 사이의 간격은 1400년.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의 시간과 거의 일치함. 또 주나라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보내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진술은 기자로 대표되는 중국계 이주민과 단군으로 대표되는 고조선 원주민 세력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고, 결국 단군 그룹이 패배하여 근거지를 옮겼다는 사실을 말해줌. 이후 단군은 아사달로 복귀했으나 숨어지내며 산신이 되었다. 정치적 권력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환웅그룹이 선진적 농경기술을 들고 오자 원주민 무리 가운데 호랑이 부족이 물러났던 역사가 기자그룹과 단군그룹 사이에 재현된 것.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렇게 기후변화가 가져온 충격을 극복하면서 시작되었다.
- 한 무제가 가장 우려한 시나리오는 흉노가 고조선 같은 주변국과 손을 잡고 한나라를 둘러싸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보다 손쉬운 외교적 방법으로 풀고 싶었는지 한 무제는 일단 고조선에 사신을 파견. 신하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조선 우거왕으로부터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하자 한 무제는 신속하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즉 고조선 정벌고 한사군 설치는 동쪽에서 흉노를 견제하고 고립시키는 대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정책이었다. 한나라는 고조선 정벌 10년 뒤인 기원전 99년 흉노원정을 재개했고 흉노를 완전히 제압.
- 수나라와 당나라가 엄청난 국력소모를 감수하면서 수차례 고구려를 침공한 배경도 이때와 별로 다르지 않음.
(1) 대륙에 통일국가가 세워지고,
(2) 내부 혼란을 정비하고 나면,
(3) 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반도로 향함.
한반도가 중국 중심의 중화체제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 한 무제 이래 이어진 중국의 대한반도 인식이었다. 시진핑 시대가 공고해지며 한중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 평양에서 한나라 목간이 발견된 일은 두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하나는 그 무렵 평양이, 즉 당시 낙랑군이 한나라 행정구역의 일부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낙랑군에서 한나라 본토와 마찬가지로 체계적 인구조사를 실시했다는 것. 인구를 파악하는 것은 세금수취와 밀접함. 다시 말해 이 자료는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계적 행정이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이다. 그동안 무덤이나 발굴품 등을 통해 평양이 낙랑군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해왔지만, 구체적인 문서를 통해 입증된 것은 처음이었다.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북한 학계를 통해서 발표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이 자료의 신빙성에 힘을 더한다. 이로써 한사군 만주설은 힘을 잃게 됨.
- 목간에 따르면 초원 4년(기원전 45년) 낙랑군은 총 25개 현으로 구성됨. 호수는 4만 3845호. 전년보다 584호가 증가했으며, 인구는 28만 여명으로 전년보다 7800여명 증가. 기원전 45년이면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이 약 60년 가량 지난 때다. 인구와 호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은 고조선이 붕괴된 혼란을 딛고 낙랑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줌.
- 낙랑군의 존재를 외면하면 도리어 고구려의 빛나는 역사가 빛을 잃게 된다. 한반도에서 낙랑군을 축출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사업이 아니다. 선진 문물과 토지를 확보한 낙랑군은 오랜기간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곳을 탐낸 고구려는 이미 3대 대무신왕을 시작으로 몇번이나 공략하려 했지만, 15대 미천왕 때에서야 낙랑군을 정복할 수 있었다. 미천왕은 낙랑군과 그 아래 있던 대방군까지 정복하면서 중국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 이후 원나라 때 일부를 제외하면 중국은 한반도에 영토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니 고구려의 낙랑군 정복은 한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낙랑군이 사라진 뒤 비로소 한반도에는 더 발달한 정치체제가 출현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이 낙랑군을 통해 그런 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 교과서에는 국가의 흥성을 주로 중앙집권화의 성공, 귀족등 기득권 세력 억제, 종교를 통한 국론통일 등으로 설명하고는 함.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정치적 시각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 조건대로라면 지금 세계에서 가장 흥성해야 할 나라는 사우디를 비롯한 몇몇 이슬람 국가다. 하지만 이런 국가들이 가장 흥성한다고 보기 어렵거니와 지금 중동의 몇몇 국가들이 부상한 것은 저 세가지 조건을 충족해서가 아니라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석유가 가져다준 부가 원천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가야의 영화, 신라의 부상, 그리고 신라와 가야의 국력역전은 국제 유통망의 변화에서 수반되었다. 길이 어느 쪽으로 바뀌느냐에 따라 이들 국가의 운명도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그 역사적 분기점에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던 신라는 한반도 트로이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길의 변천 그리고 기회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알았던 신라 지도부의 판단력이 만든 결과였다.
-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서 고구려를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강력한 군사력과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앞세우는 것이다. 아니면 태왕사신기처럼 온갖 판타지가 겹쳐진 광개토 대왕의 신화적 활약상을 강조함. 하지만 고구려는 군사강국이기에 앞서 외교강국이었다. 고구려=군사강국을 떠올리지만 실은 고구려의 흥망은 돌궐, 설연타, 철륵 같은 북방세력을 다루고 중국 왕조를 상대하는 외교술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고구려는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수도를 이전해가면서 해상로를 틀어막았고, 거의 매년 중국에 사신을 보냄. 그렇게 얻은 정보를 활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국제정치의 판을 짰다. 중국 왕조의 갖은 위협 속에서도 700년간 만주에서 존속했던 고구려의 저력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 지일파 국왕의 시대
무령왕 그러니까 사마가 태어날 무렵 백제는 건국 이래 최대위기였다. 국가의 기반이 되던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겼고 국왕은 수시로 교체되었다. 고구려에 의해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이 막히는 바람에 외교적으로도 위축되었다. 혼돈을 추스르고 국력을 회복하려면 한강유역을 대신할 땅을 확보해야 했다. 또한 그것은 한강유역만큼 농업생산성을 갖춘 땅이어야 했다. 당시 그런 조건에 부합하면서 백제가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는 곳이 지금의 전남지역이었다.
전남은 원래 백제땅이 아니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교과서에도 4세기 근초고왕 때의 전남을 백제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근래 연구들은 전남이 꽤 오랫동안 백제에 복속되지 않고 마한이라는 정치적 독립체를 유지했다는 쪽에 힘을 싣고 있다. 근초고왕 때 일시적으로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곳을 백제 영역으로 완전히 흡수하거나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것. 백제가 한성을 내주기 전까지는 고구려와 경기도, 황해도에서 피터지게 싸웠던 만큼 이 지역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성을 내준 뒤 백제 수도가 웅진(공주)와 사비(부여)로 내려오면서 전남지역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백제에게 중요한 땅이 됨. 하지만 북방에서는 고구려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섣불리 남부로 돌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임. 백제로서는 일본의 지원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
무령왕은 이런 배경에 의해 선택된 군주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과 강한 커넥션을 가진 무령왕이 다스리던 백제에는 일본 출신 인사들이 들어와서 활동할 여건이 충분했음. 실제로 왜계 관료가 백제 조정에서 활동한 기록도 있다. 일본 조정에도 백제출신관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서로 각국 조정에서 친백제, 친왜 여론을 형성하며 가교 역할을 했을 것이다.
- 고려는자유무역 국가였나
고려는 조선과 달리 상업과 무역이 발달해 외국상인이 많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짐. 조선보다 무역이 활발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무역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다.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반세기가 지난 무렵부터 민간무역을 엄격히 막음. 최승로는 "해상 왕래로 배가 난파되어 사망하는 자가 많고 중국인들이 무역하는 이들을 천하게 여긴다"면서 민간무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종은 이를 따랐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고 중국에서 천하게 여긴다는 건 어디가지나 명분일 뿐, 여기에는 깊은 정치적 고려가 있다.
왕건집안은 해상무역을 통해 일어선 가문. 무역으로 큰 부를 얻고 그것을 기반으로 군사력까지 보유한 군벌세력이 되었음. 그런데 전국에는 외척인 나주 오씨를 비롯해 이런 세력이 많았다. 즉 제2, 제3의 왕건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왕권으르 튼튼히 하려면 이런 위협요소를 제거해야 했다.
다만 개국 초기에는 결혼동맹으로 엮인 왕실의 인척이자 개국공신인 이들의 기반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도리어 왕실이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치 궁예가 왕건의 반란으로 무너졌듯이 말이다. 이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4대 광종 때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 등으로 중앙집권화의 초석을 마련한 뒤, 6대 성종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민간무역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 명나라가 상업이나 무역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하는 쪽으로 회귀한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1368년, 즉 14세기 후반은 한랭기의 충격이 수십년간 쌓인 때. 그렇기 때문에 급선무는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농업생산성을 회복해야 했다. 그러니 백성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점포에서 주판을 잡기보다는 시골의 농지로 돌아가 호미와 괭이를 들기를 바랐을 것임. 비슷한 시기 개국한 조선도 비슷한 정책을 폈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의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동한 것이 삼남지역의 식량생산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한랭화로 인해 황해도나 평안도, 경기북부에서는 이전보다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량생산은 남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식량생산지와 수도의 거리를 더욱 좁힐필요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중농억상 정책은 원라아와 고려에 대한 부정일수도 있지만, 기후가 만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인류문명은 결국 기후와 얼마나 친숙해지느냐에 흥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것이 고려말인 이유도 기후영향. 최근 지적되고 있지만 원나라는 목화씨 반출을 막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이때 목화씨를 고려로 들여온 것은 백성들이 추운 기후에 적응하려면 더 따뜻한 소재가 필요했기 때문.
- 과거 나당전쟁 때 당나라가 신라와의 싸움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서쪽으로 군대를 돌렸던 예가 있다.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토번이 쳐들어왔기 때문. 당에게는 대한반도 전략보다는 대토번 전략이 훨씬 중요했다. 수도가 가깝기 때문. 따라서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현재의 중국이 대한반도 정책에 얼마나 촉각을 세우고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방어체계인 사드도입에 맹렳게 반발하는 배경도 마찬가지.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비교적 이른시기 참전한 것도 한반도를 빼앗기면 수도 코앞에 일본군이 오기 때문이다. 미중갈등이 증폭할수록 중국은 한국을 포기하기 어렵다. (조영현교수)
- 제임스 팔레 교수는 "인구의 30%가 노예라는 점에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반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학자들은 노비가 양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이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일정량의 현물만 바치면 되는 납공노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흑인 노예나 중국과 일본에 있었던 노예보다는 자유로운 처지였다는 점을 강조함. 납공노비는 사실상 양인과 별 차이가 없었고, 그랬기에 양천교혼이 활발. 사실 노비가 양인보다 월등하게 비참한 삶을 살았다면, 자녀가 노비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노비와 결혼한 양인이 많지는 않았을 것. 하지만 매매와 상속이 가능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노비의 신분은 일반 양인과는 달랐다.
- 노비의 존재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달하기 어려운 결정적 요인. 근대국가로 발전하려면 산업이 발전해야 하고 산업이 발전하려면 공장이나 도시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 19세기말까지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 프랑스, 미국, 그리고 아시아의 일본은 신분제의 굴레를 비교적 빨리 벗어던짐으로써 산업화 단계에서 도시와 공장에서 일하는 인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노동력 대부분이 양반집안의 노비로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령 자본가가 있어도 노동자를 구할 수 없었음. 공장을 짓기 어려운 이유다. 월그을 받는 노동자가 없으면 사회전체 구매력도 떨어진다. 구매력이 떨어지면 상업발달에도 한계가 있다. 노비문제는 조선이 20세기초 망할 때까지 농업국가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만든 큰 이유였다.
- 혹자는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조선이 일본에 대해 해금정책을 쓴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이런 해석은 당시 무역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 조선은 조공무역을 통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확보했다. 이와 함께 명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두고 안보를 보장받았다. 그 대가로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을 포기한 것. 임진란 때 일본에 당한 수모를 떠올림 조선이 명의 체제에 속한 탓에 허약해진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개국부터 임진왜란까지 200년 동안 안정을 누렸다. 이런 상황은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반면에 명나라로부터 조공기회를 얻지 못한 일본은 필연적으로 해외시장진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해로를 차단한 상황에서 해양국가 일본이 대체시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동남아였고, 그 지역을 대상으로 왕성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선택이 옳아 보여도 그것은 당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대한 적응과정이었을 뿐이다. 즉 조선과 일본의 선택은 지정학적 차이, 조공질서에 대한 처지 등이 작용한 것. 이를 두고 조선이 해금정책을 펼쳤다고 비난하는 것은 현재 시각에서 당대를 재단하는 것이다. 활발한 무역을 펼쳤던 고려조차도 중국 외에는 해외시장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반도 국가는 중국 이외의 시장을 개척할 만큼 물산이나 수출품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물론 조선과 달라진 현재의 대한민국은 이때를 반면교사 삼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는 지혜다.
- 동남아 시장을 개척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중국시장을 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란을 일으킨 이유중 하나가 경제였다. 히데요시는 해안 지역 다이묘들이 밀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지방 다이묘들이 무역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명나라에 정식무역을 제안했음. 하지만 명나라는 조공, 책봉체제를 이탈한 일본과 무역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명에게 무역이란 경제보다는 외교, 안보의 수단이었다. 이런 마찰은 히데요시로 하여금 전쟁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명나라와 마시를 통해 교역한 몽골도 마찬가지. 몽골은 교역을 확대하고자 했지만, 과거 몽골의 지배를 받은 명은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음. 이쪽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을 받은 명나라의 상황을 북로남왜라 표현하는데,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마찰이 원인. 그러니까 이들은 명나라 조공시스템의 문제아였던 것. 그에 비해 조선은 모범생이었다. 명에 사신을 보내는 기회를 가장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무역문제로 폭력사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
- 조선도 혹한이 이어지며 1600년대에는 압록강이 얼어붙는 일이 빈번. 청나라 기병들이 언제든 강을 건너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 그래서 인조실록에는 강이 이미 견고하게 얼어붙어 남북의 경계가 없으니 강 연안의 방비가 급한 것은 이전에 비해 백배나 된다, 라거나 압록강 일대가 얼어붙은 후에는 하나의 평지가 되니, 철기가 달려오는 것이 질풍보다 빠르다, 는 등의 우려섞인 보고가 여러차례 등장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모두 한겨울에 발생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조선 조정도 언제든 후금이 기병을 앞세워쳐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압록강이 얼면 경상, 전라, 충청도의 군사를 국경일대로 이동시켰다가 봄이 되어 압록강이 녹으면 다시 내려보내도록 했다.
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으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언론이나 다수의 군사전문가들은 3월이 되면 러시아의 진격이 무뎌질 거라 예상. 러시아 모스크바부터 우크라이나 키이우까지의 평야지대가 녹아 진흙탕이 되면서 전차들의 진격이 어려워진다는 것. 실제로 봄이 되자 러시아의 전격전은 어려워졌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듬. 하지만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 1636년의 청나라군사들은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 청천강, 임진강 등을 전속력으로 건너며 열흘도 안되어 한양을 위협할 수 있었다.
- 소빙기가 대동법을 살리다
격렬한 반대에도 현종 때 대동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소빙기와 함께 닥친 경신대기근의 영향이 컸다. 세금부담을 낮추어주지 않으면 험악해진 민심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 않아 세금징수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지도층의 위기감이 팽배해진 것.
대동법은 그런 미증유의 위기에 조선의 지도층이 국가의 존속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친 결과였다.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혁신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하기 전에는 중간상인에게 주어야 하는 커미션 등 때문에 토지 1결당 70-80두 가량을 내야했는데, 대동법이 자리잡으면서 1결당 12두로 고정되어 세금부담이 1/7~1/8 정도로 내려감.
이렇게해서 위기를 넘긴 조선은 18세기에 황금기를 맞이하며 안정을 누림. 18세기 영정도 시대의 안정은 이 대동법 덕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더 있다. 앞서 대동법에 의지를 보였던 효종은 충청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 반대 여론 때문에 확대실시는 후대로 미룬 것. 그런데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성공해 민생이 나아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대가 심했던 전라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그렇게 해서 대동법은 전라도로 확대됨.
- 조선의 역사에서 현종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다. 세종이나 정조같은 성군으로 꼽히는 것은 고사하고, 효종이나 순조처럼 딱히 내놓을 만한 업적이 없었던 임금보다도 인지도가 낮다. 하지만 현종은 조선을 구한 여성 히어로같은 군주였으며, 그의 치세는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17세기 조선은 약 100년에 걸쳐 여러차례의 전쟁과 정변, 참혹한 대기근과 전염병을 겪어야 했다. 경신대기근때는 약 100만명이 사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0%. 백성의 유망, 경작지 황폐화, 국가재정 파탄 등 도저히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현종은 이 모든 악재가 누적된 상황에서 왕위에 오름. 현종시대를 덮친 대기근과 전염병은 그대로 자연재해였다. 같은 시기 유라시아 대륙이 대부분 비슷했다. 유럽도 페스트로 대규모 희생자가 나왔고, 중국과 일본도 비슷한 위기를 겪음. 당시 조선의 시스템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종은 좌절하지 않고 재난을 극복하려고 노력. 그는 이전까지 왕실이 받아왔던 각종 공물을 줄이고, 조정을 독려해 구휼작업에 나서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온갖 방법을 강구. 그래도 전례없는 대위기 속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자연재해를 군주의 몸가짐이나 정치적 올바름으로 연결지어 해석하던 조선사회에서 이같은 미증유의 재난이 현종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결
- 조선통신사가 남기는 메시지 두가지
하나는 전선을 두개 만들지 않으려 했던 조선왕조의 고민. 조선은 북에서 후금의 위협이 증대하자, 임란을 일으킨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는 선택을 함. 조선의 국력으로 양쪽을 감당할 수 없다고 진단했기 때문. 심지어 일본에서 군수물자인 조총을 수입하려고도 했다. 비록 병자호란으로 무너지긴 했지만, 조선이 이런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이후 중국에서 인삼시장이 닫혔을 때 일본시장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또 다른 교훈은 일본에 대한 관심과 경계다. 조선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통신사를 보내면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파악. 적어도 통신사가 제대로 기능한 17-18세기에는 양국 국력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고,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위기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통신사는 19세기 중반부터 단절되었다. 이후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 한양집중화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문과급제자의 지역별 비율이다. 과거시험은 조선시대 권력과 재력 그리고 사회적 권위를 획득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니 과거 급제자의 비율을 따지는 일은 요즘 의대나 SKY합격자 수를 지역별로 따져보는 것과 비슷.
급제자를 100명 이상 낸 가문은 1그룹(15개), 40-99명을 낸 그룹은 2그룹(26개), 1-39명을 낸 가문은 3그룹(117개)로 구분. 그런데 100명 이상 급제자를 낸 1그룹 가문중 한양출신은 17세기 전반만 해도 평균 60% 정도였는데, 17세기 후반에는 74%로 늘어나고, 19세기에는 80%를 넘어섬.
우리가 흔히 안동김씨라 부르는 19세기 세도정치가분도 정확히 구분하면 한양에 자리잡은 장동김씨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 선두였던 김상헌의 후예들로 장동 일대에 모여살았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권력까지 장악해 경화거족이라 불렸다. 장동김씨 외에도 달성서씨, 풍산홍씨, 파평윤씨, 전주이씨, 반남박씨, 청송심씨, 경주김씨 등이 대표적 경화거족으로 꼽힘. 이런 가문에 속한 한양거주집안에서 문과 급제자가 다수 배출된 것.
1789년(정도 13년) 문과 급제자 현황 역시 한양집중화의 한 면모를 보여줌. 당시 서울인구(18만 9153명)은 전국인구(740만 3606명)의 2.6%에 불과했는데, 문과 급제자는 45.9%를 차지. 서울독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양의 장점은 차고도 넘쳤다. 지금도 강점으로 꼽히는 정보와 교통요소는 이때도 마찬가지.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치르는 정규문과 외에도 별시, 증광시 등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과거시험이 있었다. 한양과 경기도는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었고, 과거를 치르는 장소와 거리도 가까워 시험에 응시할 여건이 좋았다. 반면 한양에서 며칠이나 걸리는 영호남에서는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빴다.
- 구한말 역사에서 조선이 국권침탈을 맞이하게 된 가장 결정적 패착은 국제관계에 대한 오판. 중국밖에 몰랐던 조선의 국왕은 열강에 대해 너무 순진하게 접근했다. 그래서 조선의 힘을 키우기보다는 열강을 이용하려 했다. 처음에는 미국에 기대려 했고, 그다음에는 영국과 러시아에, 그리고 필요에 따라 청나라와 일본에도 보호를 기대. 남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면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어야 함. 고종은 그럴 능력이 없었고 국권침탈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주요 인재들도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에 속하거나 소속을 갈아탔다. 당대 조선의 인재로 꼽혔던 민영익, 김윤식은 친청파, 한때 조선의 미래를 이끌고 갈 인물이라 평가받던 김옥균, 박영효는 친일파. 훗날 친일파 거두가 되는 이완용은 을미사변 직후까지만 해도 친러파 핵심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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