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역사 2025. 1. 22. 07:44

- 젓가락은 서양의 나이프와 완전히 다르다. 젓가락은 음식을 베거나 찌르거나 난도질하거나 잘라내는 것을 거부하는 식사도구다. 젓가락으로 먹는 음식은 이제 더 이상 폭력을 가해서 얻은 먹이가 아니라, 조화롭게 이동된 물질이다. 젓가락은 이전에 새모이와 밥으로 뚜렷이 구분되던 물질을 한 줄기 젖으로 바꾸었다. 젓가락은 지치지 않고 어머니가 밥을 한입 떠먹이는 것 같은 몸짓을 하는 반면, 창과 칼로 무장한 서양의 식사방식에는 포식자의 몸짓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숙고는 고대 중국에서 젓가락이 식사도구로 바뀌게 된 과정과 이유에 영향을 끼친 문화적 요인들을 검토하는 데 매우 유용. 바르트에 따르면,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음식을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젓가락은 약탈적이지 않다. 이런 주장을 편 사람은 바르트 말고도 많다. 16세기 아시아를 여행하며 젓가락을 본 많은 서양인은 아시아인의 젓가락 사용을 좀더 문명화된 식습관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공유했다.
중국인에게 이것은 소중한 문화적 신념이 되었다. 옥스퍼드대 중국학자 레이먼드 도슨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
"중국인에게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인지, 손가락 또는 나중 일이지만 나이프와 포크같은 하등한 도구로 밥을 먹는 사람인지만큼, 그렇게 명확한 기준은 없다."

- 왕런샹의 주장에 따르면 "포크의 사용은 고기 섭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크는 숟가락이나 젓가락과 달리, 음식물(고기)을 나르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 포크 사용은 일반적이지 않았따. 포크를 사용했던 사람들, 즉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상류층에 한정된 반면, 민중 대부분은 초식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반 민중은 고기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포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 왕런샹의 지적은 오늘날 포크가 고기뿐만 아니라 채소를 먹을 때도 효과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힘을 잃을수도 있지만, 고대중국의 조리습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여러 고고학 유물과 역사연구가 뒷받침하고 있다. 전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먹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먹는 도구도 달라지게 마련. 

- 음식사가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에 따르면, "대부분의 역사에서 (과학적 종자개량의 고된 과정을 통해 오늘날 놀랄 만큼 수확량이 다양한 밀 종자를 생산해내기까지) 쌀은 세상에서 견줄만한 것이 없는 수확량이 가장 많은 음식이었다. 다양한 토종종자가 있는 쌀은 1헥타아르당 평균 5.63명을 부양하는 반면, 밀은 3.67명, 옥수수는 5.96명을 부양한다. 역사 전반에 걸쳐,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더 인구가 많고, 생산성이 강하고, 더 창의적이고, 더 산업화되고, 더 기술이 발전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했다."
중국이 바로 이런 나라였다. 북부지방에서 고대 중국문명을 육성한 것이 기장이라면, 쌀은 남부지방의 문화를 발전시킨 주역. 시간이 흐르면서, 쌀은 농업과 먹거리체계에서 훨씬 더 막중한 자리를 차지했다.

- 고려말, 몽골의 발흥과 뒤이은 한반도 침략은 한국의 음식과 요리문화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킴. 몽골이 한반도를 점령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몽골은 수십 년동안 고려와 전쟁을 벌인 끝에, 1270년대 마침내 한반도를 평정하겨 거대한 몽골제국의 한 행정구역으로 편입. 몽골의 지배 덕분에, 그동안 불교의 영향으로 한국요리에서 배제되었던 고기를 사람들이 먹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인의 식탁에 고정적으로 오르는 음식이 됨. 물론 고기를 먹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그랬다는 말이다. 숯불에 고기를 굽거나 뜨겁게 달군 냄비에 얇게 썬 고기를 넣고 끓이는 것과 같은 몽골식 조리법도 고려인에게 소개됨. 중국인들의 여행기는 한국인이 13세기부터 어떻게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서 매우 흥미진진하고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인이 12세기에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양고기,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다고 전한다. 그러나 1488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동월이 쓴 조선잡록에는 조선사람들이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거위고기를 어떻게 먹었는지 설명하면서, 그 가운데 양고기를 가장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식생활에서의 이같은 두드러진 변화는, 말할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몽골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의미. 다시 말해, 금속제 식사도구가 한국인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가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금속제 식사도구가 널리 사용되었던 당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해 더욱 내구성이 높고 견고한 식사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음. 두 경우 모두 양고기 등 여러 동물고기의 섭취가 총체적으로 늘어난 것을 포함해, 유목민의 요리와 문화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젓가락 두 짝을 한데 모았을 때 또 다른 기능은 음식조각을 꼭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집는다는 말이 지나치게 강하고 공격적인 표현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음식물은 그것을 집어올리고 나르는 데 딱 피룡한 만큼보다 더 큰 압력은 결코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젓가락의 움직인은 재질(목기나 칠기)에 따라 훨씬 더 부들워질 수 있다. 그 동작에는 안아 옮길고 아이를 조심스레 다루는 어머니의 손길 같은 그런 포근함이 있다. 그때 가해지는 힘은 더 이상 강제로 눌러서 밀어내는 힘이 아니다. 우리가 음식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젓가락은 결코 음식물을 찢거나 썰거나 길게 자리지 않으며, 결코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다만 음식물을 분류하고 뒤집고 옮길뿐이다.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 일본어로 하시라고 말하는 젓가락은 다리를 뜻하는 말과 발음이 같다. 일본인에게 젓가락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실제로 사람과 사람,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현세와 내세 사이의 영적 소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군인이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누군가가 집을 멀리 떠나 있을 경우,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밥상에 그의 젓가락도 놓고 음식도 차려놓고는 한다. 이렇게 차려진 밥상을 가게젠이라 부르는데, 객지에 나간 사람의 안전과 안녕을 비는 마음을 표현한 것.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 쓰던 젓가락에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안전을 기원하는 가족의 소망이 그 다리를 통해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함. 사람이 한 번 쓴 젓가락에 그의 영혼이 깃든다는 이런 믿음은 일본인이 일회용 젓가락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도 되었다.

- 일본인은 현세와 내세를 서로 소통시키는 행위를 하시와타시(다리를 놓음)라 부름. 따라서 젓가락은 고인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장례식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어른이 젓가락으로 먹이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임종한 사람에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밥그릇에 젓가락 한 쌍을 꽂아서 밥을 준다. 밥그릇은 베갯맡에 두기에 그것을 마쿠라메시(우리말로 사자밥)라고 부르고, 밥그릇에 꽂은 젓가락은 세워서 꽂는다 하여 다테바시라 부른다. 고인에게 마지막 식사를 바친 뒤, 젓가락은 일본 전통 장례식에서 한 가지 역할을 더 수행한다. 그것은 하시와타시 행위다. 불교의 영향을 고려할 때, 일본인이 시신을 화장하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풍습이었다. 시신을 화장한 뒤, 상가의 가족들은 젓가락을 한 쌍씩 들고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유골들을 집어서 옆 사람에게 줄지어 전달. 이 행위는 그들과 죽은자, 현세와 내세 사이를 영적으로 연결하려는 것임. 실제로 일본인은 인생은 젓가락에서 시작해 젓가락으로 끝난다는 격언을 즐겨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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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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