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46건

  1. 2014.10.17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2. 2014.10.17 시계와 문명
  3. 2014.10.13 오래된 신세계
  4. 2014.10.13 기술의 문화사
  5. 2014.10.12 한국인의 기원
  6. 2014.10.12 과학기술과 제국주의
  7. 2014.10.12 불량직업 잔혹사
  8. 2014.10.12 대중문화 5000년의 역사
  9. 2014.10.12 18세기의 맛
  10. 2014.10.11 설탕, 세계를 바꾸다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저자
김덕호, 문지영, 이정희, 송충기, 박진희 지음
출판사
에코리브르 | 2013-09-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근대 산업 사회를 형성한 주역이자 자본과 노동의 중재자로서,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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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엔지니어는 자수성가한 기술자들의 사회적 지위향상 노력을 통해 형성. 하지만 이들 초창기 엔지니어를 배출한 도제 제도가 강력하게 유지되면서 전문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대학에서의 공학교육이 매우 더디고 불완전하게 진행되었으며,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 또한 전문직업인으로 정착하는데 그침. 프랑스의 엔지니어는 상층부의 국가 엔지니어와 중하층의 민간 엔지니어가 뚜렷하게 구별됨. 18세기 말 이래 프랑스는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국가엔지니어를 양성. 이들은 혁명(프랑스 혁명, 산업혁명)과 전쟁(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두가지 키워드로 대변되는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부산물이었음.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로 성장한 국가 엔지니어는 19세기 중엽부터는 민간엔지니어와 경쟁하면서 학교서열과 교육내용이 계급적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엔지니어 집단 내부에 다양성과 계층화가 진행. 독일의 경우 19세기 초부터 정부가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엔지니어 양성과 수급에 나섰다는 점이 두드러짐. 프랑스와 달리 독일의 국가적 지원은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민간 엔지니어 양성으로도 이어짐. 교육을 통한 산업부흥이라는 모토아래 바우 아카데미부터 폴리테크닉 학교, 고등기술학교로 이어지는 다양한 근대 엔지니어 양성기관이 발달. 이들 교육기관과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는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
- 유럽의 사례를 추종하려 한 미국에서는 그와 같은 선진모델을 채택하면서 미국적 엔지니어를 형성. 미국의 근대 공학교육은 프랑스를 모방하면서 시작.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영국식 도제훈련방식의 영향이 컸음. 이리 운하 건설사업 같은 공공 토목 프로젝트는 사회적 측면에서 엔지니어 양성 공간 역할을 수행했지만, 연방정부는 1862년 모릴 법을 통해 주립대학이 공과대학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정문제를 해결해줌. 모릴 법 때문에 이들 대학에서 엔지니어가 대규모로 배출됨.
- 산업화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기술교육, 즉 공학교육은 각국의 산업 및 경제발전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거칠게 답한다면, 유럽의 대부분 고등 기술교육 기관이 가졌던 우선적 관심은 그 시대 산업이 요구하는 종류의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음. 요컨대 반복적으로 공론화된 국력에 대한 우려가, 즉 상대적 쇠퇴에 대한 우려가 새로운 형태의 교육 기관에 대한 공적 투자를 이끌어낸 경우가 더 많았음. 덕분에 신설하는 기술교육 기관은 대부분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존 엘리트의 보수적 태도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이들 기관은 사회적, 문화적 보수주의 성향을 갖게 됨. 그 결과, 대학의 학문 경력주의와 위계구조는 실제적 훈련보다 이론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며, 학문화 과정이 전개됨. 그리하여 원래는 산업을 위해 만든 학교가 공학의 중심지로 진화하게 됨.
- 엔지니어로서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과정을 보면, 미국 엔지니어가 국가와 독특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 뚜렷해짐. 예컨대 이리운하 건설사업같은 공공 토목 프로젝트가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역할을 수행. 이런 공공사업의 감독자들이 엔지니어-관리자-공직자를 겸하는 계층으로 성장했고, 이들이 장인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엔지니어로 여겨짐. 한편, 유럽국가와 달리 미국의 상류층에서 엔지니어를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한 사회문화적 배경에는 전통적 상류층이 부재한 미국에서 엔지니어-관리자나 발명가-기업가가 나름대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 것도 있음. 이 점에서 미국 엔지니어가 19세기 후반에 겪은 위계화의 한 뿌리는 19세기 전반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음. 프랑스 엔지니어와 달리 미국 엔지니어는 초창기부터 독립적인 엘리트로서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신분을 지닐 수 없었으며, 전문적으로 집단의 진입을 제한해 엘리트로서의 특권을 유지하지도 못했음. 즉, 특권적 권리를 갖는 엘리트 엔지니어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음. 현장 경험을 존중하는 풍토 때문에 프랑스나 독일처럼 국가 엔지니어와 민간 엔지니어 간의 장벽도 없었으며, 학위증이 엔지니어의 지위를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기능하지도 않았다고 보아야 함.
- 앙시앵 레짐 이래 프랑스 엔지니어는 대부분 고위 기술관려, 공병장교 등 국가 엔지니어단에 소속되어 높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특권을 향유. 이성적, 합리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계몽주의 시대의 엔지니어는 높은 교육적 성취와 과학지식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공학교육=엘리트 교육 또는 엔지니어를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인식하는 풍조가 조성됨. 19세기 영국의 도제제도와 대조를 이루며 주로 이론교육에 집중했던 프랑스의 고등공학교육과 국가 엔지니어의 단체정신은 공익정신과 애국심에 바탕을 둔 직업적 의무를 이행하는 데 충실하게 했음. 이로써 엔지니어는 귀족들 사이에서 모집한 공병장교보다 높은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기 위해 애썼으며, 지휘관 또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음.
- 18~19세기 프랑스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과 성장은 자율적 진화과정이라기보다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논리에 따른 시대적 산물로 볼 수 있음. 계몽주의 시대의 진보개념과 함께 출현한 근대 엔지니어 집단은 국가 및 사회의 진보와 직결되는 대중적 이미지와 정체성을 발전시켜 갔으며, 19세기 산업화 초기에는 실증주의와 생시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회개혁가, 또는 중재자로서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며 조직화의 길을 걸음. 국가 엔지니어와 경쟁하던 산업화 초기 민간 엔지니어의 정체성과 위상은 엔지니어가 민간부문의 산업생산에 관심을 갖도록 프랑스 정부가 체계적으로 유도한 결과, 곧 국가가 제공한 새로운 기술교육 및 직업 모델을 통해 형성됨. 민간 엔지니어 직업이 형성된 데는 프랑스 혁명이 끼친 간접적 효과도 있었음. 혁명으로 길드가 와해하면서 숙련된 장인을 양성하던 도제제도가 약화되었고, 혁명의 결과 기계 관련 기술자와 기계공 같은 숙련 노동자의 부족현상이 심화됨. 특히 석탄업과 제철업 같은 분야에서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는데, 이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은 새로운 엔지니어 양성 및 직업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음.
- 우선 독일 엔지니어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해 탄생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님. 국가가 근대화의 필요성 때문에 이들을 양성했고, 또 양성한 다음에는 이들을 고용. 그러므로 한마디로 이들은 적어도 초기에는 (나중에는 민간부문의 기술자도 양성했지만)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엔지니어였음. 둘째, 이들은 주로 공식적 교육기관을 통해 양성되어음. 독일은 어느나라보다 자격증 제도가 발전한 국가인데, 엔지니어라는 직업도 마찬가지였음. 공식적 교육과정을 거쳐 국가가 주관하는 자격증을 획득해야 비로소 이들은 엔지니어라는 신분을 감출 수 있었음. 셋째, 수공업적 전통임. 독일에는 지금도 수공업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근대 엔지니어의 형성과정에서도 장인정신 및 도제식 수업같은 수공업 전통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이것은 엔지니어 집단의 정체성에서뿐만 아니라 이들의 양성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났음. 예컨대 실무적 현장을 중시하는 점이 독일 엔지니어의 독특한 성격으로 남았음.
- 영국에서 엔지니어는 오랫동안 공병, 즉 군대 엔지니어를 가리키는 용어였음. 그러나 1770년 무렵 민간에서 군대 엔지니어와 비슷한 일을 하는 전문기술자가 등장했고, 이들은 공병과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민간 엔지니어라고 불렀음. 이들은 1760년부터 도로와 운하건설같은 토목분야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철도부설, 증기기관차와 정밀공작기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 이런 민간 엔지니어는 컨설턴트, 독립사업가, 피고용인 등 여러 지위를 갖고 있었음.
- 유럽 대륙에서는 일찍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은 공학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이론과 실기를 혼합한 교육을 통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했음. 그러나 영국은 다른 길을 걸음. 산업혁명 이후에도 실기 위주의 전통적 도제 제도를 통해 기술인력을 양성했으며, 이는 근대 엔지니어가 등장한 뒤에도 계속됨. 특히 전문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귀족형 도제제도인 문하생 제도가 거의 필수코스였음. 말하자면 실력있는 엔지니어의 작업장 또는 기술현장이 전문교육 기관 역할을 한 것. 그리고 오랫동안 토목엔지니어 협회 같은 전문 단체의 회원가입여부가 엔지니어로서 자격을 증명하는 장치로 작용했음. 이런 방식은 의사, 법률가 같은 영국의 다른 전문직 양성에서도 일반적이었음. 영국 왕실은 민간단체에 왕실 특허장을 수여해 권한을 위임하고 그 단체가 스스로 인력 양성과 자격조건을 규제하도록 했음. 왕실 특허장을 받은 법률가 단체 또는 의사단체가 인정하는 교육기관이 양성과정을 규제했으며, 대학교육이 이들 전문직의 자격요건은 아니었음. 이는 한편으로는 전문단체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교육의 정착과 확산이 프랑스나 독일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기 때문.
- 미국은 영국처럼 산업혁명에 의한 비약적 경제성장에 따라 교통망 구축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후진국으로서 국가차원에서 기본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이었음. 또한 항구도시와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지역 사이의 원활한 물류이동을 위해서도 대규모 공공사업이 필요했음. 아울러 신생국의 13개주를 하나의 연방으로서 효율적으로 통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이런 공공사업은 연방 혹은 주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진행되었음. 그 결과를 우리는 교통혁명 혹은 운송혁명이라고 부름.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미국에서는 영국과 달리 연방정부 혹은 주 정부가 필요한 경우 산업화의 토대를 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 이는 미국이 모든 분야에서 자유방임 정책을 지속했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어긋나는 현상이기도 함. 미국에서 공공기관의 의지와 재정적 도움이 없었다면, 즉 건국 초기에 공공사업을 벌이지 않았따면 토목 엔지니어는 미국사회에서 그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임.
- 초기 미국 기계 엔지니어의 대체적 정체성은 식민지 시기부터 내려온 명문가의 일원이거나 그들과 합작한 장인이었음. 명문가 출신의 기계 제작자는 당연히, 비록 근대적 과학중심 교육은 아니지만,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 또한 서로 혼인관계로 연결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정부의 권력을 동원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 존 스티븐스 3세는 미국 특허법 제정과정을 주도한 가장 강력한 청원자였으며, 리빙스턴은 당시 미국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외교상대인 프랑스 대사였음. 영국 출신 슬레이터처럼 그들과 합작한 상인은 기계제작자로 변신하면서 유서깊은 명문가의 일원이 되거나 그에 버금갈 정도로 신분상승을 이루어 당대나 다음 세대에는 명문가와 혼맥으로 연결됨. 예를 들어 풀턴은 리빙스턴가의 사위였으며, 루즈벨트는 라트로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
- 제퍼슨 대통령 시대(1801~188) 이후 미국은 영토팽창과 인구증가에 직면해 대서양 연안과 내륙을 연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음. 특히 1803년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뒤에는 미국의 영토가 두배 이상 넓어졌음. 훗날 교통혁명이라 일컫는 일련의 대규모 토목사업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 여기에 필요한 토목 엔지니어는 1세대 토목 엔지니어에 의해 영국적 도제식 현장교육을 통해 양성됨. 게다가 무엇보다 이리운하 건설은 현장 훈련 시스템이 미국에서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줌. 이 운하 공사를 통해 많은 토목 엔지니어가 배출되었으며, 1825년 이리운하가 완공된 후에는 이곳에서 양성된 엔지니어가 미국 전역에서 토목사업 분야의 주역으로 등장. 즉, 운하뿐 아니라 철도나 수로사업, 도시의 하부구조 건설 등에서도 그들의 토목지식을 활용할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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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시계와 문명

역사 2014. 10. 17. 22:51

 


시계와 문명

저자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3-08-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13세기 후반, 유럽과 아시아의 길을 결정지을 사건이 일어났다....
가격비교

- 중세의 기술진보는 최근의 열광적 저술들이 무비판적 독자들을 착가가하게 할만큼 급속하거나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진보가 일어났으며 그 수준은 상당했음. 11세기부터 15세기말까지 유럽기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보했음. 농업을 비롯해 건축, 항해, 조선, 직물, 야금술, 목공, 회계, 금융, 운송, 에너지 생산과 전술 분야가 발달. 기술사에 관한 어떤 책을 보든 독자는 이런 진보의 세부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음. 저자는 중세 유럽에서 적지 않은 수의 무명 수공업자들이 그들답게 다소 조잡하지만 결연한 방식으로, 온갖 종류의 바퀴와 장치, 다양한 형태의 나사를 갖고 실험했다는 사실을 강조. 고대에도 이런 종류의 기구에 대한 취미가 있는 아르키메데스나 헤론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음. 하지만 그들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그들의 노력은 호기심 어린 실험단계나 제한적인 응용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음. 기계들은 비잔티움과 이슬람 중동은 예술적 기교가 뛰어난 기술전통을 유지하면서 고대인들의 예를 따랐고 두 지역 모두 기계장치를 다루는 수공업자가 있었음. 그러나 그런 수공업자의 수는 언제나 극소수였음. 더구나 당시의 수요구조와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는 대개 수공업자의 솜씨를 회전목마나 압축공기분수, 자동필 등과 같은 화려한 오락거리, 즉 비잔티움과 무슬림 통치자들의 극적 장관에 대한 열광을 충족시키는 일로 국한시켰음. 반대로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시작. 이들은 응용역학을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 연구했음.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
- 숙련 이주민들이 가져온 자극이 경제에 지속적 효과를 낳으려면 수혜국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에 문을 열어야 했음. 많은 이탈리아 기술자들이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으로 갔지만 오스만 경제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음. 반면 숙련공의 유출은 한 나라의 쇠퇴에 일조하면서 동시에 쇠퇴의 징후이기도 했음. 예를 들어 많은 수의 유능한 수공업자를 잃은 이탈리아는 역동적이고 고도로 수용적인 사회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정체되고 보수적 사회로 바뀌었음. 17세기 초에 파인스 모리슨은 르네상스 후기의 이탈리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음. 자신들이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며, 이탈리아에서는 훌륭하고 유익한 것이 많이 나고 불후의 예술작품과 건축물이 많다고 생각. 이는 그들이 외국으로 아예 나가지 않거나 좀처럼 나가지 않기 때문. 그들은 전쟁에 따라나서거나 외국과 교역하기 위한 모종의 필요에 의해서만 바깥으로 나감.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거나 알려진 것은 이탈리아에서 모두 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은 자국의 지식과 지혜를 자만함. 마침, 숙련 노동력을 수입하던 나라들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도 채택했는데 이 새로운 신앙에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 지상주의는 문자해득을 장려함으로써 인적자원의 질적 향상에 기여. 이것들과 다른 요인들이 결합하여 1550년부터 1650년 사이 유럽 경제력의 균형추가 이동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 베사리온 추기경이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로 가서 서방의 최신기술을 배우라고 촉구한지 두세기가 지난 후, 기술발달과 경제발전의 지도적 위치는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야금술에 한해서는 스웨덴이 차지하게 됨.
- 실리주의적 풍조는 중세 도시 문명에서 탄생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촉진했으며 베이컨 철학에 의해 범위가 좁혀지고 강화되었음. 그리고 이 풍조는 새로운 기계에 대한 커져가는 열광과 그러한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나타났음. 다른 한편으로, 역학, 화학, 현미경 관찰, 정성 천문학은 이제 막 태동했고 새로운 탐구분야로의 진입장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 가브리엘 하비는 1593년에 "뛰어난 숙련공이나 생각이 있는 근면한 전문 직업인이라면 비록 학교에서 배운적이 없거나 책을 읽지 않을지라도 누구나" 과학의 진보에 눈에 띄는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적었음. 이것은 장밋빛 과장이었음. 한세기가 지난 후 더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존 에벌린은 로버트 보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계에 밝지만 생각이 엉뚱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변 그중 많은 부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투덜거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도구 제작자같은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많음. 유럽의 상황과 중국의 지배적 상황을 대조한 조지프 니덤 교수는 근본적으로 옳았음. 그는 이렇게 적음. "유럽에서는 중국과 달리 일정한 영향이 작동했다. 실제적 지식가 수학공식 간의 교차로 나아가는 그러한 현상의 일부는 신사와 기술자가 교류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유럽의 사회변화와 틀림없이 관련이 있다. 사실 그것은 신사가 기술과 과학의 문제에 전념해도 위신을 잃지 않게 된 사회문화적 변화와도 적지 않은 관계가 있다. 유럽에는 학자와 수공업자 이외에도 학자나 수공업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아마추어 과학자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음. 17세기와 18세기 초기 과학의 진보에서 이 명인들이 했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확실히 숙련공들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컸음.
- 종은 중세 도시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음. 종은 공동체의 삶을 지배했고 종소리는 만물을 질서와 평온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음. 모두가 종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종소리는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했음.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불이 났거나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군대나 평화로운 모임에 소집하며,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때, 일터에 나갈 때 기도할 때와 싸울 때를 알려주고 장을 열 때와 닫을 때를 알리고, 교황의 선출과 국왕의 즉위, 승전을 축하했음. 널리 퍼진 믿음에 따르면 종소리는 폭풍과 전염병을 막는데도 도움이 되었음. 도시와 교회, 수도원이 아름다운 종이나 소리가 맑은 종을 갖는 것은 그곳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장치도 개발됨. 톱니바퀴와 왕복 지렛대로 구서오딘 이런 장치들이 기계식 시계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음. 마지막으로 중세에는 천문학자와 점성학자를 포함한 사람들이 있었음. 그들은 지구의나 천구의를 만들고 그것들이 별과 행성의 운행을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데 관심이 많았음.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러한 장치들을 제작하면서 개발된 기술이 수공업자들로 하여금 기계식 시계를 제작하는 데에도 한걸음 더 다가서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시계였으므로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 대장장이, 일반적인 금속 노동자인 것은 이해할 만함. 하지만 가내용 시계와 회중시계가 점차 흔해진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화. 더 작은 시계들은 값비싼 장치였고 부유층이 소유. 시계는 사치품이라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를 특징짓는 장식과잉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음. 새로운 유행을 만족시켜야 하는 수공업자들은 대장장이나 자물쇠공보다 보석 세공인의 기술이 필요했음.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다란 공공 시계 제작자와 작은 시계 및 회중시계 제작자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
- 과학연구 활동이 만발하고 폭발적인 활기를 띤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에 새로운 과학의 대변자들은 측시학에 열렬한 관심을 보임. 그들이 보기에는 시계는 우수한 기계였고 시계는 그들을 사로잡음.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한 매혹 이상이 존재. 16세기와 17세기는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을 목도하고 대양항해가 크게 확장된 시기. 천문학자와 항해자 모두 정확한 경도를 결정하고 별이 뜨는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한 정밀한 측시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과학혁명의 핵심인 역학의 기본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음. 시간을 측정하고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문제에 몰두한 사람들로는 갈릴레이,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로버트 후쿠, 호바르트 벤델런, 니콜라스 파티오, 빌헬름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음.
- 적어도 17세기 말까지 시계산업은 커다란 자본설비나 복잡한 조직이 필요하지 않았음. 수요측면에서 만족스러운 여건만 조성된다면 커다란 시계산업 중심지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은 몇 안되는 수공업자들뿐이었음. 이미 지적한 것처럼 17세기 중반에 파리에는 시계장인이 24명이었고 시계산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의 장인숫자도 그보다 많지 않았음. 산업을 건설하거나 파괴하려면 십여명의 수공업자를 해고하거나 떠나게 하면 되었음. 오늘날 우리의 측시학 수준은 그렇게까지 취약하지 않지만, 더 고차원적인 수준에서 뛰어난 과학자 십여명을 골라 학살한다면 여러 과학분과의 진보가 정체될 것임. 뉘른베르크와 아우크스부르크는 쇠퇴한 반면 제네바와 런던은 시계산업의 주요 중심지로 부상. 두지역 모두 산업의 발달은 소수의 피난민의 유입- 적지만 귀중한 분량의 인간기술의 투입과 관련이 있었음.
- 처음으로 극동에 도달했을 때 유럽인들은 주로 향신료에 관심이 있었지만 다른 여러 상품, 즉 일본산 구리, 인도산 면직물, 페르시아산 비단과 카펫, 중국산 도자기, 17세기 말부터는 중국산 차도 이윤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림. 그러나 무역의 주요 장애물은 동양의 산물과 교환할 때 내놓을 상품이 자신들에게 거의 없었다는 점.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과학에서 서양의 우위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동양은 내놓을 원자재와 상품이 많았던 반면 서양은 아시아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거의 내놓지 못했던 상황을 쉽게 상상하지 못함.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지배적인 양상이었음. 대포를 탑재한 원양범선으로 유럽인들은 대해의 주인이 되어 이슬람의 해운과 교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아시아 내 무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음. 일본의 은을 중국에, 일본의 구리를 중국과 인도에, 향신료 제도의 정향을 인도와 중국에, 인도산 면직물을 동남아에, 페르시아산 카펫을 인도에 가져옴으로써 유럽인들은 해운과 상업활동에서 만족스러운 이윤과 수익을 얻음. 이것으로 유러벵 수입되는 아시아의 생산물 일부에 대금을 지불. 그러나 수익은 충분치 않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아시아 수입품에 대해서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대규모의 정금을 이전하는 방법으로 지불할 수 밖에 없었음. 대량의 은이 레알화, 즉 세비야에서 주조된 에스파냐 은화나 멕시코 달러,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주조된 은화, 프랑스 크라운화, 네덜란드 릭스달러 은화 형태로 매년 아시아의 수중에 들어감.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의 무역흑자 덕분에 유럽인들은 은을 풍부하게 구할 수 있었음. 에스파냐의 아케리카 식민지와 극동 사이에 필리핀을 통해 비교적 제한된 형태로 직접적 교역이 이뤄지고 있었음. 하지만 이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유럽으로, 그곳에서 다시 동쪽의 아시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방향으로는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것이었음. 아시아의 상품은 유럽으로 갔고 유럽의 상품은 아메리카로 갔음.
- 서양인들에게 서양상품에 대한 동양의 낮은 수요는 심각한 문제였음. 하지만 그보다 더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의 제품들이 주요 경제부문에 걸쳐 유럽시장에서 유럽의 상품과 성공적으로 경쟁한다는 사실. 브리스톨의 상인이었던 존 캐리가 표현한대로 동인도 무역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데 우리의 정금을 수출할 뿐 우리의 상품이나 제품은 거의 수출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제조된 상품을 수입해와 우리 제품의 소비를 저해하기 때문. 동인도의 비단과 광목이 영국으로 수입되어 영국 직물업에 어려움을 야기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 거론할 필요도 없음. 영국으로서는 인도의 리카도가 등장해 비교우의의 법칙을 들어 영국은 모두 양치기로 전환하고 필요한 직물은 인도에서 전부 수입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영국인들을 설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음. 그 대신 영국은 인도산 직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일련의 법령을 통과시켰고 얼마간 좋은 결과를 얻음.
-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라고 그리고 왜 중국은 산업화로 나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함. 그러나 로빈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님.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님. 어쩌면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름.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의미할지도 모름.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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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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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세계

역사 2014. 10. 13. 20:31

 


오래된 신세계

저자
숀 윌리엄 밀러 지음
출판사
너머북스 | 2013-07-0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무한한 발전을 뒤쫓는 이들에게는 당신 또한 사라져도 상관없는 ...
가격비교

- 오늘날 우리는 1492년에 아메리카 인구가 4천~7천만이었고 그 대부분은 지금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살았다고 믿음.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에는 총 2400만명 가량이 살았을지도 모름. 남아메리카도 엇비슷했을 것임. 카리브 제도에만 300~700만이 살았음. 멕시코를 뺀 북미 땅에는 200~300만뿐이었음. 불행히도 우리는 북아메리카 쪽에서, 그것도 뒤늦게 나온 이야기를 자주 들었음. 북아메리카가 처녀지였다는 전설은 나중에 온 유럽인 정착민들의 증언에 따른 것인데, 사실 그 땅은 유럽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아무도 살지 않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 사라진 땅이었음. 적어도 이 사실만큼은 분명함. 정복 이전에 빈 땅이란 없었음. 정복 이전에는 어디에나 수많은 문명과 부족들이 밀고 당기며 살고 있었음. 북아메리카에서 정복자들은 텅 빈 변경을 만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것임.
- 안데스 지방은 문명을 일으키기 쉽지 않은 곳임. 안데스 지방에서는 가뭄과 홍수와 느닷없는 서리로 3년마다 흉년이 들었음. 잉카 사람들은 이런 예측가능한 자연재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임. 그들은 창고에 남는 곡식을 저장하고, 힘을 모아 눈부시게 훌륭한 기반시설과 밭을 만들고, 자신들의 공동체와 친족들을 매우 다양한 고도와 기후대에 퍼뜨려 자연재해에 맞섬. 자연을 바꿀 수 없는 곳에서는 자연의 한계에 자신들을 맞추었음. 물론 기술에 지나지 않는 계단밭, 치남파, 검은 흙, 화전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앙아메리카와 페루 사람들이 세계 나머지 지역과 자기들끼리도 별개로 농업과 문명을 발명했으며 그러한 발명은 지난 1000년 사이에 한 것이 아니라 4000년도 더 지난 옛날에 했다는 점.
- 옥수수에는 필수 아미노산 8가지 가운데 7가지 성분이 있음. 아미노산 일곱가지 가운데 트립토판은 옥수수에 매우 단단히 붙어 있어 소화가 잘 안되지만 중앙아메리카 여성들은 옥수수를 석회에 불려 트립토판을 사람이 흡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문명에 기여. 옥수수에 모자란 것은 리신뿐인데, 이것은 콩에 많이 함유됨. 여러 전통 음식이 그렇듯 옥수수와 콩을 같이 먹으면 필요한 모든 단백질을 충분히 얻을 수 있어서 고기를 따로 먹지 않아도 됨. 고기를 못 얻거나 아주 작게 얻은 아스텍 사람들도 채소만 먹으면서도 그 지역에서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던 셈. 단백질 때문이 아니라면 왜 서로 잡아먹었는가? 투피족은 복수하려고 전쟁포로를 먹었음. 기본적 종교관념이라 할 수 있음.
- 유럽인과 원주민의 자연관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자연의 앞날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을 것임. 원주민은 자연재해를 막고 이 땅위의 삶터를 영원히 지키고자 신에게 빌고 희생제물을 바쳤음. 유럽 사람들은 세기말의 대격변이 찾아오길 빌었음.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을 끝내고 구원받아 하늘로 가고싶어 했음. 유럽 사람들은 자연에 구원받을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자연 그 자체가 파괴되기를 바랐음.
- 원주민 문화에서 땔나무, 연료, 물, 흙의 양분을 마구 써댔다는 증거는 차고 넘침. 때로 그 소비속도는 자연자원이 다시 쌓이는 속도보다 더 빨랐음. 그러나 환경을 마구잡이로 다룬 것 때문에 어떤 특정 문화가 망했다거나 적어도 그런 잘못이 멸망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확증할 증거는 없음. 정치, 군사, 사회, 경제 문제만으로도 아메리카의 옛 문화의 폐허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임. 문명의 쇠락 이야기, 즉 사람이 잘못해서 자연이 망가졌고 문화도 망했따는 설명은 참으로 매력적임.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일수도 있음. 하지만 이런 설명이 정말로 주장하는 점은 우리가 뉘우치고 다르게 행동하기만 한다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 마치 모든 일이 사람의 뜻과 움직임에 달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때때로 손도 댈 수 없는 엄청난 자연재해로 문화가 멸망하기도 함. 어떤 문화가 망하는 데 자연이 분명하게 얽혀 있다해도 그것이 사람이 잘못해서 물욕을 부려서 환경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은 말도 안됨. 때로는 문화와 자연의 관계와는 아무 상관없는 자연재해도 일어남.
- 이베리아 사람들이 전쟁에 성공한 핵심원인이 질병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 천연두나 다른 유라시아 질병이 없었다 해도 이베리아 사람들이 칼, 갑오, 총, 말만으로도 원주민 제국을 뒤엎고 아메리카의 새 지배자가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함. 하지만 질병이 없었다면 아메리카 정복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임. 어쩌면 이베리아인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와 더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름. 그곳에서 유럽인은 해안무역과 다른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소수 지배층으로 남았음. 그리고 그 지역문화는 거의 멀정하게 비교적 바뀐 것 없이 살아남았음. 아메리카가 유럽제국의 정치체가 뻗어나간 것 그 이상이 된 이유는 질병 때문임. 마침내 아메리카는 신세계가 된 것임.
- 설탕자원은 자원소비가 매우 큰 농업임. 재배지를 만드는 데 숲을 태우고 땅의 양분이 바닥나는 것은 다른 작물재배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 하지만 설탕 농업은 땔감을 많이 쓰다보니 농장에서 한참 떨어진 숲까지도 파괴됨. 사실 브라질이 식민지로서 성공을 거둔 것은 설탕의 유별한 강탈능력 덕분이었음. 대서양 섬들 가운데 마데이라처럼 사람이 한번도 살지 않았던 섬으로 기름진 처녀지와 빽빽한 숲이 있었음.
- 정복이 낳은 결과와 콜럼버스의 교환 또한 신세계 경제활동의 특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침. 원주민 수백만명이 죽으면서 농업이 뻗어나갈 넓은 개척지가 열림. 유럽과 정복이전의 아메리카에서 사람들은 땅을 조심해서 다뤄야만 했음. 농부가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땅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땅으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했기 때문. 그때는 개척할 땅이 없었지만 정복 이후 아메리카에는 빈 땅이 엄청나게 많았음. 눈앞에 널린 게 옥토였으니 한곳의 비옥도를 유지하려고 비료를 주고 윤작하는 데 노력과 비용을 들이는 일이 의미없을 정도였음. 게다가 새 식량과 가축이 들어오고 열대 농업의 생산성까지 높아지자 갑자기 식량이 넉넉해진 농부들은 단일 작물 재배를 위험을 무릅쓰고 해볼만한 일로 받아들임. 땅과 식량이 귀한 곳에서는 단일작물 재배는 설사 그것이 식량작물이라 해도 위험한 시도임. 하나뿐인 작물이 흉작을 겪으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됨. 여러 작물을 기르는 것은 먹을 거리를 확보하려는 전략이었음. 그러나 식량이 많을 때는 단일작물 재배도 바보짓이 아닌 잘 계산된 투자로 보일 수 있음. 그 작물이 비록 식량작물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임.
- 식민지 시기의 거의 모든 독점체계는 몇 안되는 사람의 배만 불리며 나머지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는 데 한 몫함. 그러나 뜻밖에 독점이 자연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 에스파냐의 식민주의가 무너지고 산업자본주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브라질 나무나 고래처럼 계속 생겨나는 자원을 거둬들이는 일은 이기적이고 엄격한 제한 덕분에 영원히 지속가능했을지도 모름
- 40년대 말 과테말라 사람들은 대부분 땅이 없었음. 그런데 연합 청과물회사는 콰테말라 국토안에 엄청난 넓이의 토지를 쓰지도 않고 놀려둠. 연합청과물 회사가 경작하는 땅은 과테말라에서 회사가 가진 전체 땅의 5%에 지나지 않았음. 과테말라 사람들은 회사의 행태에 항의하기 시작. 52년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대통령은 연합청과물회사에 쓰지 않는 땅을 과테말라에 돌려줄 것을 요구. 그러면 정부는 회사가 최근 소득신고에서 신고한 부동산 가치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할 계획이었음. 과테말라 민족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땅을 주고 과테말라를 풍요롭게 하고자 그 조치를 정당화함. 안 쓰는 땅에서는 수출품도 안나오고 먹을 것도 나오지 않음. 과테말라는 먹을거리도 상당부분 수입하고 있었음. 이에 연합청과물회사는 항의하고, 저항하고, 공산주의라 외쳐댔음. 53년 아르벤스 대통력은 결국 토지계획을 밀어붙임. 연합청과물회사가 안 쓰던 땅 1700평방 킬로미터가 과테말라 국민에게 돌아옴. 물론 연합청과물회사는 과테말라 정부에서 영향력을 꽤 잃은 상태였음. 그러나 미국 행정부에는 회사의 친구들이 권력자로 남아있었음. 54년 미 중앙정보국이 조직하고 미공군이 지원하는 반란군이 과테말라 시를 폭격하고 아르벤스를 끌어내림. 그리고 그 자리에 한 독재자를 앉힘. 독재자는 연합청과물회사에 이전의 모든 땅과 특권을 돌려줌.
- 인류역사에는 1만년전의 정착농경 확립, 17세기의 윤작법, 20세기의 작물 육종학 및 유전자 조작 작물 같은 농업혁명이 있었음. 새똥과 함께 시작된 근대 비료 혁명은 그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 구아노 전에도 비료를 썼으나 그 비료들은 효과도 적고 일손도 많이 가는 것이었음. 이 방식으로 19세기까지 세계 농업은 수백만명의 배를 채울 수 있었음. 하지만 농민들이 수십억명을 먹여 살리게 된 것은 구아노와 그 뒤를 이은 질산염과 다른 화학비료 덕분. 꾸역꾸역 늘어나는 인구만큼 음식이라는 연료도 늘어나야 하지만 19세기까지 땅심은 음식생산을 제한하는 요소였음. 농업은 윤작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어 농업 생산량이 두배로 늘어난 일도 많았음. 구아노는 그 자체 힘만으로도 수확량을 두배 더 올렸음. 더 중요한 사실은 구아노를 쓰는 농부는 원하는 작물을 원하는 곳에 윤작도 안하고 휴한지도 없이 심을 수 있다는 점이었음. 농부들은 구아노로 해마다 풍작을 누릴 수 있었음. 구아노 덕에 옛날에는 거의 수확이 없었던 곳에도 작물을 기를 수 있었음. 그러나 문화는 구아노를 높이 평가하기를 꺼림. 파종기, 조면기를 발명한 사람들, 쇠 쟁기와 트랙터를 설계한 사람들, 작물이나 재배법을 개발한 이들처럼 사람이 부리는 재주와 기술발전을 칭송하는 편을 더 좋아함.
- 라틴아메리카만큼 수력 에너지에 의존을 많이 하는 지역도 없음. 멕시코 전력의 30%가 댐에서 나오고, 칠레는 전력의 60를 수력으로 얻음. 콜롬비아는 75%, 브라질은 95%임. 반면 미국은 전기를 대부분 석탄으로 생산하여 댐으로 얻는 전력은 13%뿐임. 댐은 확실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음. 어떤 나라에서는 70년부터 지금까지 한 사람이 쓰는 전기량이 네배 증가. 덕분에 몇백만명이 더 건강하고 편하게 살게 됨. 댐덕분에 라틴 아메리카는 석유를 많이 수입할 필요가 없음. 그러나 1세기도 지나지 않아 라틴 아메리카는 대형 댐에 따르는 대가를 깨닫기 시작. 이른바 라틴아메리카의 하얀 석유는 깨끗하고 재생가능한 자원이라고들 함.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은 댐 건설 계획에 앞서 댐 건설에 따르는 이익이 손해보다 더 큰지 정확하게 계산해보려 하지 않았음. 계산을 하더라도 건설 후 수십년을 내다 보았음.
- 일부 댐이 측정가능한 이익을 가져왔다 하더라도 댐의 수명문제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큰 걱정을 불러 일으킴. 유달리 지진이 많은 지역에서는 댐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수도 있음.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는 남음.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싸고 큰 건축물인 댐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바라는 일을 해줄 것인가? 댐 옹호자들은 순진하게도 이 거대 건축물이 피라미드만큼이나 영원할 것이라 생각함. 하지만 시간은 댐하고 친하지 않음. 퇴적작용은 심각하게 댐을 위협. 게다가 여러 라틴아메리카 강처럼 토사가 많은 강이나 인간활동으로 풍화작용이 심해진 지역에서는 그 위협이 커짐. 정부는 댐을 만드는 데 수십억 달러를 펑펑 쓰면서도 저수지 상류의 분수령과 숲과 땅을 지키는 데 한푼도 안쓰거나 아주 조금 씀. 처음에는 대서양변의 숲 한가운데 있던 빌링스 저수지가 지금은 비대해진 상파울루 시가지에 둘러싸이고 물에는 토사가 쌓여 지저분할 뿐만 아니라 깊이마저 얕아지고 있음. 56년에 농민들을 쫓아낸 아이티의 댐은 86년에 문을 닫았음. 침적물이 너무 많이 쌓여 저수지를 쓸 수 없었기 때문. 발전과 홍수조절 20년을 하려고 그렇게 많은 돈과 일손을 댐 건설에 쏟았단 말인가? 높이 196미터, 길이 7.7킬로, 전기 1만 2500메가 와트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이타이푸 댐은 건설비용으로 180억 달러가 들었음.
- 문화는 20세기에 들어 힘이 매우 세졌고 인간은 자연 앞에서 훨씬 쉽게 성공을 누릴 수 있었음. 오늘날 인류는 그 어느때보다 인구가 많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안전함. 그러나 사람들은 에너지에 중독되었고, 에너지는 여전히 문화의 만병통치약으로 기능함. 석유와 댐과 원자력 발전소와 에탄올을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지으면 에너지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지레짐작함. 그래서 에너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나랏돈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음. 그에 견주어 에너지수요를 줄이면서 오늘날 삶의 질을 더 끌어올리거나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기술에 쓰는 돈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우리는 에너지에 굶주린 과학기술로 만들어낸 도구사용을 끊임없이 늘려가며 오늘날 우리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음. 내연기관, 합성질소비료, 콘크리트 댑, 포장고속도로, 농약 사용 가운데 하나라도 내던져 보라. 그러면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것 상당수가 무너져 내릴 것임. 우리는 도구 가짓수를 늘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끝없는 탐욕을 부리기보다는 더 슬기롭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임.
- 우리는 먼 조상들은 석유도, 화학비료도, 살충제도 쓸 수 없었으니 밥거리를 어디서 얻을지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함. 이것 또한 현대인들의 오만에서 나온 거짓말임. 먼 옛날에도 아메리카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았음. 재난만 발생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음. 또한 이 사람들은 대개 농사를 직접 지었고, 밥거리가 어디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았음. 현대인들은 완전히 다름. 우리 중에 방금 먹은 밥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름. 먹을 것이 어디서 오고, 환경에 어떤 대가를 치르며,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모름 석유의 힘은 우리를 샌존의 가장 밑뿌리에서 떼어놓아 얼마나 피해가 크고 미래가 얼마나 위협받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했음. 우리는 슈퍼마켓과 식당에서 언제까지나 푸짐하고 다양한 식사를 할 수 있으리라 믿음. 먹을거리가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 같은 마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역사상 그 어느 미신보다 더 꽉 막힌 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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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문화사

역사 2014. 10. 13. 20:29

 


기술의 문화사

저자
마르티나 헤슬러 지음
출판사
생각의나무 | 2013-06-28 출간
카테고리
기술/공학
책소개
기술은 인류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가? 19세기 이후 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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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와 엔진의 사용과는 별도로 제조업 공장의 한 특징이라 할수 있는 것은 분업. 분업으로 인해 작업공정과 시간을 맞추는 것은 필수적 요소가 됨. 그러다보니 노동자의 훈련된 작업태도가 요구됨. 70년대와 80년대에 이루어진 사회역사적 연구에서는 이런 노동자들의 훈련되고 표준화된 태도와 개별적 단계로 잘게 쪼개진 작업공정을 묘사했음. 새로운 시대는 인간의 노동을 시계의 흐름과 공장의 규율에 맞추도록 강요했고 만약 그 규칙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통제와 벌칙을 감수해야 했음. 이때 통제는 주로 노동자의 시간엄수와 노동의무 완수에 대한 것이었음. 처벌은 보수를 삭감하거나 해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아이들의 경우는 체벌을 받기도 했음. 이와 같은 훈련된 작업방식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음.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공장일에 숙련되지 않은 새로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사슴에게 쟁기를 다루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함. 19세기 말까지도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의 훈련부족과 불규칙성, 불건전한 노동윤리 의식에 대해 불평. 영국의 사회역사학자인 에드워드 톰슨은 오랜기간에 걸친 노사관계의 내면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 "첫번째 노동자 세대에게 주인은 기간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했고 두번째 세대는 위원회를 결성하여 좀더 짧은 노동시간을 위해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줄이는 투쟁을 했으며, 세번째 세대는 근무시간 초과수당을 위해 투쟁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성향을 파악했고 그 범주 안에서 투쟁을 했다. 시간은 곧 돈이라는 교훈을 너무 잘 파악한 것이다."
- 19세기에 영국에서 출현한 공장 시스템은 시장의 확장과 노동력 부족이라는 현상과 맞물려 이후 미국에서 더 발전됨. 1850년 영국의 한 평론가가 이것을 미국적 생산방식이라고 불렀음. 그는 이것을 유럽과는 현저하게 차별되며 무기제조업 분야와 철도분야 그리고 시계와 재봉기계, 자전거 제조업 분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새롭게 등장한 생산방식이라고 설명. 미국식 생산방식이라는 표현은 1880년대에 형성됨. 이 표현은 또한 규격화와 표준화, 정확한 제조방식과 부품의 호환성 등을 의미했음. 이 시스템의 목적은 기계를 사용하고 노동자의 고용을 줄이는 것이었음.
- 자전거나 자동차 그리고 비행기와 같은 운송수단은 활용계획이나 기술적 발전과정 그리고 사용자층이나 생산조직 면에서 처음부터 상호연관성과 유사성을 갖고 있었음. 자전거는 애당초 개인적인 운송수단으로 개발되었으며, 개인적 이동활동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음. 이는 오토바이도 마찬가지였는데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오토바이가 발명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되었고, 50년대에는 자동화된 이동수단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 비행기도 초기에는 개인적 용도의 이미지가 강했음. 미국에서는 모든 이들이 비행기 격납고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음. 초기의 자동차 생산자들은 자전거와 마차의 원리를 이용해서 기술적 발전을 꾀함. 전화기가 처음에는 말하는 전보로 인식된 것과 마찬가지로 차량도 특수한 자전거의 한 종류로 간주되었음. 1903년 처음으로 비행기 엔진을 개발한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판매상이었으며, 자신들의 작업장을 비행기 제조 실험장소로 이용했음. 이 세가지 교통수단은 단지 개념적이고 기술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음. 비행기 조종사들은 대부분 그 이전에 자전거나 자동차 경주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음. 세가지 운송수단 모두 초기에는 모험 스포츠를 위한 발명품이었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모험가들이 스릴과 도전을 이용한 것이었음.
- 새로운 기술은 승승장구했을 것 같은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즉각적인 성공을 거둔 역사가 거의 없음. 오히려 그 과정에는 기술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사회적 토의와 수용과정이 늘 뒤따랐음. 거기에는 비판적 토론과 기술수용의 지연, 반대와 무관심 혹은 이용을 꺼리는 시기가 존재. 19세기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종종 자전거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이는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바람을 맞아 일그러진 얼굴을 조롱조로 표현할 때 사용되었음. 기차나 자동차의 빠른 속도도 소화불량이나 대뇌활동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경고의 대상이 되었음. 철도가 들어선 초기에는 특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음. 프랑스에서는 1840년대에 철도에 관한 질문 논쟁이 격렬하게 오감. 일례로 프랑스의 한 기술자는 철도가 석유의 채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매일 여기저기에서 자연개발 지역이 확장되고 있지만 그 확장은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 이와 비슷한 반론이 자동차 산업의 초기에 줄을 이었으며, 석유가 곧 고갈되리라는 우려가 큰 비중을 차지. 중국에서는 1870년에 최초로 건설된 철도가 건설 직후 해체되기도 함. 이는 자연의 조화가 깨질 것을 두려워한 지역 주민들 때문이었음. 자동차도 초기에는 사회적 거부감이 심했음. 차가 내뿜는 냄새와 먼지, 말들이 달리는 차를 보고 물러서거나 겁을 먹는 현상, 그리고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는 일 등으로 특히 농촌에서는 자동차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이로 인한 격렬한 항의가 잇따르기도 했음. 또한 말주인이나 짐마차 제조업자 혹은 이륜짐차 주인들은 자동차의 전파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라는 명백한 이유로 자동차의 보급을 반대. 그렇지만 자동차에 대한 적대감은 하나의 과도기적 현상이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감이 줄어들면서 자동차는 빠르게 받아들여졌음.
- 하르트무트 로자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의 문화와 싸워야 하는 문화전쟁에 대해 언급했음. 그러면서 세가지의 결론을 내림. 첫째, 기술의 발전과정은 직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단계별로 이루어지며 항상 그 과정에는 발전속도를 늦추게 하는 방해와 반대, 반동이 일어나며 일시적으로 발전을 퇴보시키기도 한다. 두번째, 기술발전의 추세를 쫓다보면 어쩔수 없이 가속과 감속의 단계를 거치게 되며 늦출 것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번째 결론이 흥미로움. 그것은 현재까지 모든 문화전쟁은 가속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인데, 이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전파를 의미
- 기술적 재해는 산업시대의 새로운 현상만은 아님, 고대에도 평균 배 네척중 한척은 실종되었음. 역사적으로 기술화의 과정에는 언제나 사고와 재해가 연관되어 있었음. 비베 바이커는 기술문화의 허약함에 대해 이렇게 말함. "기술문화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연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티븐 그레이엄과 나이젤 스리프트는 기술재해란 "예상치 못한 일탈이 아니라 기술의 일부이다. 기차를 발명한다는 것은 기차사고를 발명하는 것이며, 비행기를 발명한다는 것은 비행기 사고를 발명하는 것과 같다."라고 주장. 19세기 이후로 사고의 강도도 확실히 달라졌으며 역사적으로 새로운 현상이 되었음. 기술재해와 관련한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도 증가. 기술재해는 또한 점점 더 경제와 사회 그리고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 기차여행이 처음 시작된 지 몇년 되지 않아 기차로 인한 사고는 무서울 정도로 증가했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새로운 현상이었음. 18세기에는 마차의 차축이 부러지더라도 느리게 달리던 마차가 큰 진동과 함께 멈춰설 뿐이었지만, 1842년 5월 일어난 베르사유와 파리구간을 달리는 기차사고는 전 유럽을 경악시킨 최초의 기차사고였음. 서구세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기차사고로 인해 이처럼 위험한 기술을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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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기원

역사 2014. 10. 12. 21:12

 


한국인의 기원

저자
이홍규 지음
출판사
우리역사연구재단 | 2010-11-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유전학자가 제시한 우리의 뿌리찾기이 책은 유전학을 중심으로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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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구석기 문화를 처음 만든 것이 신인류였고, 네안데르탈인의 무스테리안 문화보다 월등하였음. 이 문화의 형성과정에 네안데르탈인의 영향이 있었으며, 이 문화는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과 시베리아로 퍼져 나감. 최소 3그룹 이상의 신인류 문화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음.
-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DNA는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만 전달됨.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수정을 일으켜 다음 세대의 아기가 만들어질 때, 정자 꼬리 부분에 있던 미토콘드리아가 떨어져 나가고, 핵이 있는 머리부분만 난자로 들어가기 때문. 세포에는 핵이 하나 있고, 핵에는 DNA가 엄청나게 많으나, 각 유전자는 한쌍이 있음. 미토콘드리아에는 37개의 유전자가 하나로 묶여 있고, 유전자 묶음이 미토콘드리아마다 5~10개 정도 있음. 또 세포마다 미토콘드리아가 수십개 내지 수천개 들어 있어서, DNA의 밀도가 엄청나게 높음. 이런 특성 때문에 소량의 시료만 있어도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를 할 수 있음. 미토콘드리아는 세포가 1개에서 2개로 늘어날 때, 평균 수백개씩 늘어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핵 DNA에 비해 거의 10~20배나 잘 생김. 미토콘드리아 DNA는 동물마다 다르고, 사실 사람마다 아주 조금씩 다름. 유전자의 차기가 자주 생기면 유전자 계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됨. 프레데릭 생어가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 전부를 밝혔다고 했는데, 1만 6569개의 A, T, G, C가 두줄로 된 동그라미를 만드는 구조를 하고 있음. 한가닥 사슬이 있고, A에는 T가 마주보고, G에는 C가 마주보고 있고, 두 사슬이 이중의 동그라미를 만드는 형태임. 이 서열은 생어가 일하던 영국 대학도시의 이름을 따서 케임브리지 표준서열이라고 부름.
- 어떤 종족이 한 곳에 모여 오래 살아가면 그 사람들의 유전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변이도가 점점 증가. 그 이룹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면 이주해 가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는 원 거주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보다 다양성이 줄어듬. 전체 주민 중 일부만 움직이기 때문에 일부 유전형, 그것도 후손유전형을 가진 사람만이 이주하게 되기 때문. 예를 들어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오사카, 중국 연변 지역으로 많이 이주. 오사카에는 경상도 사람들과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갔고, 연변에는 이북 사람들, 특히 함경도 사람들이 주로 옮겨감. 그래서 오사카와 연변의 우리 동포들이 가진 유전적 다양성은 그 기원지인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유전적 다양성에 비해 훨씬 덜함. 이런 현상은 일반적이어서 사람뿐 아니라 식물, 동물의 기원을 따질때도 사용됨. 말, 소, 개 등 가축이 처음 흑해 부근 등에서 사육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이런 원칙을 적용한 결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유전적 변이도가 가장 다양하다는 것은, 그래서 아프리카가 인류기원의 중심부라는 것을 의미.
- 현생인류의 공동 어머니에 대한 개념은 20만년 전 살고 있던 단 한 사람의 여성이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은 아님. 미토콘드리아 DNA는 같지만 상염색체가 다른 여성들이 당시에 많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
- 현생인류의 형성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름. 분자시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방법과 정확성에 대해 아직 학자들은 논쟁을 벌이고 있음. 분자시계로 시간계산을 할 때에는 두가지 중요한 변수가 있음. 첫째, 계산에 사용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이고, 둘째, 돌연변이가 생겨서 다음세대로 전해지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하는 것임. 이른바 세대교체기간임. 몇년이면 세대가 바뀔까? 보통 20년이라는 것이 정설임. 사람이 20세가 되면 자식을 낳고, 이 아이들이 20세가 되면 다음 세대가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임. 물론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균치로 잡음. 돌연변이는 몇 세대에 한번 생길까? 돌연변이의 수, 돌연변이의 발생비율, 평균 세대교체 기간을 알면 최근 공통조상의 형성시기를 계산할 수 있음. 이런 변수들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분자시계로 계산한 연대는 오차가 큼
- 미토콘드리아 DNA 하플로 그룹 분포의 분석에서 얻는 결과
* 현생인류의 공동 선조가 되는 어머니는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기원
*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L3 유전형의 후손이고, 모두 M, N, R 큰 하플로그룹(큰 그룹)에 속함. 아프리카를 떠난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형들임. 아프리카를 떠난 시기는 약 6~7만년전임
* L3의 후손형으로는 큰 그룹 M과 N의 두가지형만 나옴. M과 N의 형성시기가 거의 같은 것은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탈출하였고, 아프리카를 나온 후 바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는 의미
* 큰 그룹 M은 모두 동아시아에 분포하고, 유럽에는 큰 그룹 N의 후손들만 있고, 큰 그룹 N의 후손형 중 A, Y, N9, X, 그리고 큰그룹 R의 후손형 B, F, R 등이 동아시아에 분포함. 우리나라에는 이런 형들이 거의 다 존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유전형들은 어떤 경로로 한반도로 이동해 왔을까? 큰 그룹 M에 속한 유전형들은 유럽에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해안 루트를 거쳐 한반도와 동아시아로 온 것으로 추정됨. C, D, E, G, Z, M 등의 하플로 그룹을 가진 사람들임. 동북아로 이동해 오지 않은 하플로 그룹도 있는데, 파푸아 뉴기니에서 발견되는 Q형이 그런 사례
- 05년 미국 시카고 대학 유전학작 브루스 란 연구팀은 사이언스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오는 논문을 발표
* 뇌의 크기를 결정하는 유전자로 마이크로세팔린이란 유전자와 ASPM이란 유전자가 있는데, 이 두 유전자는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최근에야 크게 선택되어 빈도가 증가했음.
* 그 진화의 시기가 마이크로세팔린-D 유전형은 약 3만 7000년(1만 4000년~6만년)전으로 계산됨. 이 시기는 후기구석기 문화의 발달시기와 일치하며, ASPM이 형성된 시기는 약 5800년 전으로 인류의 예술활동 증가 시기와 일치
* 마이크로세팔린-D 유전형의 빈도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주 높으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사람에게서 아주 낮음
* 마이크로세팔린-D 유전자를 얻은 것이 인류에게 어떤 지적 능력의 변화를 주었을지 모름. ASPM은 'abnormal spindle-like, microcephaly-associated'라는 유전자의 약자
- 브루스 란이 발표한 논문의 중요성
* 인종에 따라 뇌의 크기를 결정하는 유전자에 차이가 있다
* 그에 따라 뇌의 크기와 어떤 지적 능력이 달라진다
* 이런 변화가 인류 진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결과를 두고 브루스 란은 인류가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 경쟁에서 이기면 살아남고, 지면 도태된다는 의미
- 막스 플랑크 연구소 볼프강 에나르트와 공동연구자들은 사람의 FOXP2 유전자를 생쥐에 넣고 뇌의 기능, 특히 발음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 새로 유전자를 획득한 생쥐의 뉴런에 상당한 변화가 생기고, 생쥐가 이전에는 내지 않던 낮은 소리를 내는 것을 발견. FOXP2가 발음에 영향을 준 것임. 여기에 중요한 돌연변이가 생긴 것이 현생인류에게 엄청난 경쟁력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생인류는 성조언어를 사용하였고, 중앙아시아에서 알타이에 이르는 어느지역에서 현생인류가 마이크로세팔린-D 유전형을 얻어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된 후 후기구석기 문화를 만들었는데, 5800년 전쯤 이 사람들 중 ASPM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나타나 ASPM-D 유전형을 갖게 된 사람이 새로운 언어능력을 갖게 되었고,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비성조언어를 쓰기 시작
- 네오테니 현상은 어린이화 또는 유년화 현상이라 부르는데, 어떤 생물이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때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진화하는 경우를 말함. 애완견의 모습은 늑대의 어릴적 모습과 흡사. 이 진화한 생물체에서는 다 자라난 개체가 되어서도 여러 생리적 현상이나 모습이 시간적으로 덜 발달된 것처럼 보임.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때 모습이 유지되는 것. 네오테니 현상은 기나긴 지구 역사 중에서 수백만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인류가 침팬지와의 공동조상으로부터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발달해 나왔는가?를 설명해주는 가장 간단한 해답임. 인류의 두개골은 침팬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크고 앞으로 튀어나와 있으며, 몸에는 털이 없어 침팬지의 태아때 모습과 아주 흡사. 몽골리안의 체질이 네오테니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유럽인보다 더 발달된 모습이라는 의미가 있어 구미 각국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음. 그러나 진화는 눈먼 시계공이 만드는 시계처럼 그 결과가 좋을 것인지 나쁠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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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제국주의

역사 2014. 10. 12. 21:11

 


과학기술과 제국주의

저자
대니얼 R. 헤드릭 지음
출판사
모티브북 | 2013-11-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제국주의에 대한 통념을 뒤집다! "그것이 어떠하였는가"현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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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함의 초기역사는 기술혁신과 제국주의의 동기 사이의 상호작용을 보여줌. 맥그리거 레어드는 아버지가 주철공장과 조선소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니제르강 탐험대에 대한 관심으로 바꿀 수 있었음. 피콕은 고전에 대한 깊은 지식과 러시아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 거주 영국인들의 본토와 빠른 연락에 대한 관심을 유프라테스강에 대한 증기선 탐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음. 이들의 관심이 합해져 동인도 회사는 포함의 첫번째 주요 구매자가 됨. 그리고 동인도 회사가 포함을 구입한 덕분에 우리는 기술혁신이 제국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제국주의적 동기가 기술혁신으로 이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음. 그보다는 수단과 동기가 호의적인 상호 피드백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자극했다고 말할 수 있음.
- 과학적인 기나나무 생산은 제국주의 기술의 대표적인 것임. 이러한 기술 없이는 유럽 식민주의는 아프리카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며 다른 열대지방에서는 비용이 훨씬 더 들었을 것임. 동시에 이 기술의 개발은 몇몇 식물원의 전문과학지식,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장려, 인도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의 땀과 노동, 이 모두가 하나로 묶여 신제국주의의 원인이자 신제국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은 분명함. 강을 달릴 수 있는 증기선은 열악한 수송 장애를 제거했고, 키니네는 말라리아를 제거. 이 두가지가 함께 작용해서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은 식민지가 되었음. 다시 말해 아프리카는 유럽과 유럽인들의 조건에 따라 거래하게 된 것임. 이제까지는 아프리카의 분할은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이후의 프랑스의 정치심리학이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야심의 결과 또는 수에즈 운하의 부산물로 종종 설명되어 왔고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할 바가 없음. 그러나 아프리카 분할은 증기선, 키니네 예방법, 속사 라이플의 결과이기도 했음.
- 근대 총포 발전은 소규모의 발전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결과. 이 소규모 발전의 출발점도 다른 경우가 많았고 어떤 경우는 수세기가 걸리기도 했음. 이 발전과정에서 두 단계가 특별히 중요함. 먼저, 격발뇌관, 강선, 장방형 탄환, 그리고 종이 탄약통을 통해 전장식 총포가 완벽해진 것. 두번째 단계는 후장식이 프러시아 침타총에서 시작되어 맥심기관총이 된 것임. 1860년대 전장식에서 후장식으로 기술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일반적인 기술발전이 아니었음. 유럽인들과 비서구인들 사이의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벌려 놓았고, 세기말의 제국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음.
- 1850년대 군사용 라이플은 그보다 앞서 나왔던 머스킷에 비해 정확성과 점화의 일관성면에서 훨씬 우수했음. 그러나 사용하기에는 여전히 시간이 걸리고 불편. 총신이 쉽게 막히고 연기를 내뿜었으며, 종이 탄약통은 약하고 습기에 취약. 최악인 것은 병사가 서 있을 때만 장전을 할 수 있었음. 아군보다 무장이 안된 적과 싸울 때는 그 이점이 상당했지만 그것도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음. 유럽의 식민지 군대가 압도적인 화력을 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후장식 혁명을 기다려야 했음. 총을 뒤로 장전하는 아이디어는 총포 설계에서의 다른 모든 기술 혁신과 마찬가지로 수세기 동안 반복해서 나타났다가 결국 현실화 됨. 퍼거슨, 라이플, 홀 라이플. 샤프스 카빈 같이 초창기에 실제로 쓰인 몇몇 후장식 총은 미국식 총으로 아마도 개척기에 화기에 대한 욕구 때문에 나타난 결과
- 제국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 해상제국임. 미노아인들,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바이킹족들은 모두 자기 주변의 바다를 한 동안 지배. 그러나 자신의 함대와 상선으로 세계의 거의 모든 바다를 지배했던 국가, 다시 말해 진정으로 전 지구적 제해권을 가졌던 나라는 단 한나라만 있었음. 19세기 대영제국이었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영국의 힘이 영국인들의 국민성의 독특한 강점이나 신의 은총에서 왔다고 주장. 또 다른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신뢰할 수 없는 성격과 탐욕 때문이라고도 했음. 한 아랍인 족장은 체스니의 유프라테스 탐험대 대원에게 이런 말을 했음. 영국인들은 개미같지요. 한 사람이 고기 한점을 발견하면, 백명이 따라붙지요. 그러나 지구상의 바다를 휘어잡는 데는 신의 은총이나 신뢰할 수 없느 성격과는 다른 것이 필요. 우수한 기술과 그 기술을 지지해줄 경제력이 필요. 영국인들이 어렵게 획득한 해상패권은 19세기 초 미국의 조선 붐에 의해 위협을 받음. 미국인들의 조선붐은 값싼 목재를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었던 데서 온 것. 그러나 쇠로 배를 만들게 되면서 영국인들의 우위는 보호됨. 영국은 1840년에 세계선박 총톤수의 4분의 1을 소유하고 있던 데서 1850년에는 42.7%로 늘었고, 1차대전까지 40%에서 50% 사이를 유지. 1890~1914년 사이에는 세계의 해상무역의 반이 영국인 소유의 배에 의해 이루어졌고, 영국은 세계의 새로운 선박의 3분의 2를 건조. 영국이 증기엔진과 금속 선체 산업에서 선두를 유지하는 데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음. 영국은 영향권 내에 있는 해안들에서 몇 마일 안되는 곳에 세계적으로 가장 질 좋은 증기선용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된 곳을 갖고 있었음. 편리한 석탄 공급항의 경우처럼 나중에 인도양 주변(나탈, 벵갈, 보르네오)에서 발견된 석탄의 대부분도 영국의 식민지에서 나온 것. 영국은 세계 해저 케이블 망을 지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해상 석탄 공급도 실제로 독접. 이 요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20세기의 석유, 무선통신과 비교하면 잘 드러남. 석유, 무선통신 가운데 어느것도 그것을 소유한 나라에 석탄과 해저 케이블을 통해 영국이 누렸던 정도의 우위를 제공하지는 못했음.
- 19세기에 해운업과 통신이 크게 팽창했던 것은 세계의 경제에 관련해서 일어났던 그보다 훨씬 더 큰 변화의 일부분이었음. 모든 역사시대를 지나서 19세기까지 오면서 동양과 서양 사이의 교역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었음. 하나는 중동을 통하든 아프리카를 돌든 운송비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차, 자기, 향신료, 인디고, 비단, 진주, 보석, 금괴나 은괴 같이 아주 귀한 물건들만 교역할 가치가 있었음. 다른 하나는 교역의 본질상 균형이 맞지 않았다는 점. 동양은 유럽인들이 탐내는 상품들을 공급했지만 유럽인들은 금괴나 은괴, 그리고 나중에는 아편 외에 줄 것이 거의 없었음. 이런 오래된 시스템을 깬 것이 증기선이었고, 서로 부피 큰 상품들은 저가의 운임으로 교환하는 새로운 경제관계를 촉진시킴. 유럽은 산업생산품(면, 기계류, 철, 석탄)을 동양의 값싼 농업생산품과 원자재(밀, 쌀, 황마, 고무, 구타 페르카, 주석)및 다른 생산품과 교환
- 증기, 케이블, 수에즈 운하는 그보다 500년 전의 신대륙 발견 보다 더 동서양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킴. 포르투갈의 소형 범선과 스페인의 갤리온선은 바다 때문에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접촉하게 함으로써 전 지구적 에쿠메네로 완성. 그리고 19세기의 새로운 기술로 인해 상품과 사람과 사상이 끊임없는 흐름으로 바뀜. 제한적인 교역관계를 갖고, 고립되어 있던 자급자족 경제가 19세기의 새로운 기술로 인하여 기본적인 상품을 취급하는 단일 세계시장의 부분이 됨. 그들의 전통적 교역, 기술, 정치관계는 약해지고 서양의 기술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전 지구적 문명의 기초가 놓이게 됨
- 19세기 중반의 제국주의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촉수가 인도에서 버마, 중국, 말레이반도, 아프가니스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홍해로 뻗어나간 것. 영토 면에서는 이보다도 훨씬 더 인상적으로 신제국주의를 표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19세기 말의 몇십년 동안 아프리카를 서로 가지려고 한 것. 그러나 아프리카의 분할이 이윤획득의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공통된 시각. 이런 점은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설명할 수 있음. 발명품 하나하나를 기술과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음. 그러나 기술혁시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 때문에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패턴을 보지 못해서는 안됨. 어느 시대에나 기술의 진보는 있었지만 아프리카 분할에 참여한 제국주의자들에게 유용했던 혁신기술들은 1860년에서 1880년의 20년 동안에 특히 많이 나타나 그 첫 효과를 발휘했음. 바로 이 20년은 키니네 예방법으로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고, 제국의 변경에 주둔하던 군인들 사이에서는 속사의 후장식 총이 전장식 총을 대체하던 때였고, 복식기관, 수에즈 운하, 해저 케이블로 인해 증기선이 정부 보조금을 받는 우편물 로트만이 아니라 원양의 보통 화물사업에서도 범선에 대해 경쟁력을 갖추게 된 기간이었음. 1880년에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해 떠났던 유럽인들은 그들보다 20년 먼저 떠났던 사람들보다 자연에 대해서 또 자신들이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훨씬 우세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고,더 안전하고 편하게 임무를 달성할 수 있었음.
-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 제트비행기, 위성, 무기시스템 같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강대국 정부만 연구개발비를 댈 수 있고, 또 일반적으로도 강대국 정부들만 적극적으로 연구개발하려는 주요 기술혁신에 익숙해 있음. 19세기 유럽국가의 정부들은 제국주의 외에도 신경써야 할 다른 문제들을 많이 갖고 있었음. 산업화, 사회 갈등, 국제적 긴장, 군사 준비태세, 그리고 예산의 균형을 위한 노력 같은 모든 문제들이었음. 영, 프, 벨, 그리고 독일의 지배집단 내부에서는 식민지가 필요한가와 제국주의의 비용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음. 후장식 총, 기관총, 증기보트, 증기선, 키니네 예방법과 다른 기술혁신의 결과물들은 침투, 정복, 새 영토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을 재정적인 면과 인간의 조건, 모두에서 낮추어준 것. 이 기술들 때문에 제국주의의 비용효과가 커져서 정부만이 아니라 작은 집단들도 제국주의에서 한 역할을 하게 됨
- 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낸 토킹 드럼을 이용해서 소통할 수 있음. 유럽인들은 이것을 부풀려서 거대한 신화로 만들고, 아프리카인들은 밤에 북의 진동을 이용해서 대륙을 가로질러 서로에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 물론 이 신화는 서양인들이 장거리 통신에 얼마나 집착해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 실제로는 19세기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었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음. 아편전쟁 이전 중국의 조정은 광저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틀린 정보를 갖고 있었고, 영국, 버마,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개발을 모르고 있었음. 니제르 강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그 강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있었음. 스탠리는 콩고에서 화기나 백인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남. 아프리카 전역에서 전사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배웠고, 이웃의 경험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었음. 물론 아프리카인들이나 아시아인들이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경우들이 분명히 있기는 함. 인도의 토호들은 유럽인들을 고용해서 병력을 훈련시켰음. 에티오피아의 베즈비스 카사는 영국군 병장에게 캐논포를 만들게 했고, 사모리 뚜레는 프랑스에서 총포술을 배워오도록 대장장이를 보내기도 했음. 메흐메트 알리는 나라를 근대화하려는 속성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유럽인 엔지니어들과 관리를 두었음.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그 자체가 매우 드문일들이었고, 대부분 불충분했다는 점. 19세기에 서양의 기술발전을 따라갈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 뿐이었음. 그러나 대조적으로 서양인들은 기술적인 것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 있어서도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임. 아프리카에 있던 서양의사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프랑스와 영국에서 발표했으며, 미국의 대포 제작자들은 자신들의 제품을 런던에 전시. 영국 전문가들은 대포제조기술을 배우러 미국까지 갔고, 울즐리 장군은 제안을 하기 위해 미국의 발명가 히람 맥심을 방문. 맥그리거 레어드는 니제르강에서 일어난 알에 대해 듣고 고무되어 새로운 종류의 배 만들기를 시험하게 되었음. 네덜란드와 영국 식물학자들은 아시아에서 기를 식물을 얻기 위해 남아메리카까지 갔고, 인도네시아에 있던 서양 과학자들은 세계의 독자들을 위해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논문을 발표. 가장 최신형 라이플은 각국에서 모방되어 시험을 위해 식민지로 보내짐. 우편과 전신에 의해 전세계의 산물, 가격, 상품의 양에 대한 최신정보가 전 세계로부터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들어가기도 하고, 소식이 전해지기도 함. 그리고 주요 신문은 해외에 특파원을 보내 먼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자세한 기사를 실음. 지금이나 그때나 서양의 사람들은 가장 최근의 뉴스에 굶주렸으며 유용한 기술혁신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철이든 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이든 키니네 예방법이든 기관총이든 복식 기관이든 한 곳에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 존재가 다른 곳에 빠르게 알려지고 실제로도 이용됨.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이웃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더 많았음. 이것이 유럽인들이 가진 토킹 드럼 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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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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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직업 잔혹사

역사 2014. 10. 12. 07:44

 


불량직업 잔혹사

저자
토니 로빈슨, 데이비드 윌콕 지음
출판사
한숲출판사 | 2005-10-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 저자는 영국의 ...
가격비교

- 중세 초상화 중에는 장정된 책에 글을 쓰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종종 등장. 하지만 단언컨대 이것은 예술적 허구임. 당시에는 각기 다른 고급 피지위에 글을 모두 적고 나서 그것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음. 그들은 긴 의자에 앉아 작업했고, 동물의 뿔을 잉크병 대용으로 사용. 피지 위에 글자를 적는 것은 오히려 새기는 작업에 가까웠음. 일단 글을 곧게 쓸 수 있도록 자로 줄을 그은 다음엔 피지에 글자 모양대로 구멍을 냈음. 이렇게 구멍과 구멍을 연결시켜 글씨를 써나감. 그 모습은 만년필로 글을 쓴다기 보다 똑똑 두드린다는 느낌을 주었을 것임. 잉크로 쓴 글씨는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성가시긴 해도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이 방법을 선호했음.
- 상어고기를 안전하게 먹으려면 내장을 빼내고 연골과 대가리를 제거한 후 여름에는 6주간 겨울에는 세달간 땅속에 묻어야 함. 그래야 이 기간 동안 세균이 분해한 시안화물이 생기고 상어고기에서 빠져나옴. 역사가들 중에는 세균발효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상어고기를 오줌으로 적신 후 땅속에 묻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음. 이윽고 발효기간이 지난 상어고기를 땅속에서 꺼내보면 고기의 육질은 말랑말랑해지고 암모니아 냄새가 남. 다음으로 고기를 깨끗이 씻어 두달간 건조실에 넣어둠. 그렇게 말리고 나서야 고기를 감싸고 있는 갈색 외피를 벗겨내고 작은 조각으로 잘라 마음놓고 먹을 수 있음. 이즈음 상어고기는 부드러운 치즈같은 점성이 생김.
- 여자 마법사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직업이라서 그녀는 환자들만큼이나 궁핍하게 살며 치즈같은 현물이나 지붕수리 같은 노무의 형태로 치료비를 받기도 했음. 치료비를 받은 마법사는 그 대가로 후두염 환자에서부터 유방암 환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환자들에게 아주 불가사의한 치료제를 제공. 여자 마법사가 열악한 직업인것은 단지 돈을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음. 약재 마련의 어려움과 이 일이 지닌 위험한 성격이 이들을 최악의 직업종사자로 등극하게끔 만들었음. 수중에 돈이 없어 약제사에게 약을 살수 없었던 마법사는 주변의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며 천연재료를 공짜로 구해 약을 지음. 만일 그녀가 약초나 그것과 비슷한 효능을 가진 식물인 기침에 효과 있는 발삼을 분비하는 나무나 서양고추나물 따위만을 채취했다면 이것은 현대인의 감각에도 어느정도 맞았을 것임.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 치료약의 주성분은 선충과 벌레, 동물 시체 조각 그리고 똥이었음. 특히 조제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똥이 마법의 성분으로서 다량 첨가되었음. 다음과 같은 약을 짓기 위해 여자마법사는 광주리와 삽을 들고 온갖 가축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작업시간의 절반을 보내야 했을 것임.
* 출혈상처인 경우 돼지가 방근 눈 따뜻한 똥을 바른다
* 황달인 경우 양의 똥을 맥주에 타서 하룻밤 묵혔다가 마신다
* 천연두 흉터를 없앨 경우, 양의 똥을 포도주에 타서 하룻밤 묵혔다가 마신다
* 통풍의 경우 비둘기똥으로 만든 고약을 붙인다
* 유방에 궤양이 생기거나 대머리 증세가 나타난 경우 거위똥을 쓴다
* 난청의 경우 잿빛 선충을 말똥에 버무려 썩힌 것을 양쪽 귀에 집어 넣는다
* 치통의 경우 고양이 귀를 빻아 사흘간 이빨에 붙여둔다
하지만 모든 민간요법이 이처럼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었음. 예를들어 가시투성이인 쐐기풀을 콧구멍에 넣어 코피를 멎게 한 것은 야만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쐐기풀 가시에는 수혐지혈제 성분이 들어 있으니 아주 터무니 없는 치료법은 아님. 마찬가지로 중세의 보양식이던 벌레 스튜도 효과가 있었을 것임. 당시 농부들은 축제일이나 휴일이 아니고서는 고기를 먹기 힘들었음. 평소 이들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부추, 양파, 완두콩 따위로 맛을 낸 귀리죽과 함께 치즈를 살짝 바른 보리빵이 주식이었음. 이런 상황에서 벌레스튜는 비용부담 없이 소량이나마 고기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게 해줌
- 중세 종교에 잔인한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님. 중세 종교는 영국 중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오래된 유산을 남겼음. 바로 고딕양식의 대성당들 이야기. 그러나 이들 대성당과 같은 건축물이 또한 끔찍한 직업의 전당에 오를 만한 직업들을 남김. 중세시대 세워진 이들 대성당은 자신감과 안정감을 보여줌. 당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고대 로마시대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축조된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었음. 대성당 건축은 해당 도시의 지역적 자부심을 상징했을 뿐 아니라 지역 경기 활성화에도 엄청난 효과가 있었음. 오늘날 자동차 플랜트나 휴대폰 생산공장의 신축이 그러하듯 중세의 웅장한 교회단지 건립은 그 파급효과가 지역경제 전체에 미쳤음. 대성당 건축 초기 시절에 교회설계를 맡은 사람들은 열정적 아마추어들이었음. 박학다식한 이들 수도원장 혹은 주교는 건축기술과 공학기술의 전통적 원리들을 연구/조사하여 직접 공사를 설계하고 자금도 조달하였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건축기술이 복잡해지자 공사감독과 설계자의 역할은 유럽을 주유하던 명망있는 전문직업인 자유계약 건축가에게 넘어갔음. 이들은 대석조공으로 불리었음. 대석조공은 분명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최고의 직업에 속하지 않았을까?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음. 하지만 그들은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공사관리자로서 실로 방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운용을 체계화해야 했음. 건축부지는 물론, 돌을 캘 채석장과 대들보로 쓸 나무를 벨 숲, 그리고 그 건축자재들을 때때로 수백킬로나 떨어져 있는 공사장까지 실어나를 수송체계까지 이 모든 것이 대석조공의 공사관리 운용계획에 포함되었음. 프랑스에 세워진 오튕 대성당의 경비지출 내역은 대석조공의 일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지 보여줌. 이 지출내역은 또한 한 도시에 대성당이 세워짐으로써 발생하는 적하효과의 혜택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렸는지도 나타냄.
-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제까지 수도원 쪽으로 쏠려 있던 돈의 흐름을 왕의 금고쪽으로 돌려 놓음. 게다가 무적의 영국 해군이 이끈 군사적인 승리는 상업의 번창과 국력의 증대를 가져왔고 이렇게 축적된 부는 추종자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됨. 유럽대륙으로부터는 인본주의 사상이 유입되었음. 미술분야에서는 독일 출신 화가 한스 홀바인이 영국으로 건너와 튜더 시대의 위대한 정치선수들을 그린 불멸의 대작을 내놓는가 하면, 음악분야에서는 토머스 텔리스와 윌리엄 버드, 존 다울런드같은 작곡가들이 독특한 영국적 소리를 만들어냈음. 그리고 영국 르네상스에 불을 당긴 에드먼드 스펜서와 영국 문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작가들은 영어의 위상을 끌어올림. 하지만 이러한 튜더시대의 변혁은 대부분 겉만 번지르르한 눈속임일뿐임. 16세기 영국인의 삶의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사뭇 다름. 당시 대다수 영국인들은 새로운 튜더왕조의 생활방식 보다는 과거 중세시대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따랐음. 이는 영국의 르네상스가 궁정과 도시를 중심으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따랐음. 이는 영국의 르네상스가 궁정과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 당시 영국인의 6%만이 도시에 살았고 그중 절반을 런던사람들이 차지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시골에 거주. 그들의 삶은 영국 문화의 부흥보다는 잦은 흑사병 창궐과 1550년대와 1590년대에 있었던 두번의 대기근 사태에 더 영향을 받았음.
- 장약은 세가지 화합물이 혼합된 단순하면서도 치명적 물질임. 탄소 10%, 유황 15%, 질산칼륨, 즉 초석 75%가 혼합. 초석에 들어 있는 질산염은 연소시 팽창하며 산소를 발생시켜 탄소와 폭발반응을 일으킴. 머스킷으로 탄알 한개를 발사하려면 장약 25그램이 필요하며 포탄하나를 발사하는데는 400그램이 필요. 따라서 전시에 상당량의 초석이 요구되었음. 그 전부를 마련한 사람이 초석장이였음. 초석장이는 우유배달원과 토지관리인, 농장일꾼, 분뇨 수거인이 묘하게 결합된 사람이었음. 그가 하는 일은 간단함. 스튜어트 시대에 질산염의 주요 공급원은 토양속에 오랜 시간 묻혀 있는 동안 질산칼륨과 질산나트륨으로 분해된 우리의 익숙한 친구, 오줌과 똥이었음. 초석장이는 우선 거리에서 오줌으로 흠뻑 젖은 흙을 찾아낸 뒤, 부족한 양은 구식이지만 꽤 효과적인 중노동을 동원하여 충당. 그는 변소, 돼지우리, 거름더미, 비둘기장을 비롯해 구아노 한 그릇이 토양속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감. 분뇨 수거인이 단순히 배설물을 치우는 일을 했다면, 초석장이는 그것을 상품으로 바꾸는 역할을 함. 화학물질이 풍부한 흙 수톤을 옮겨야 했던 초석장이들은 종종 탈장 증세를 보이곤 했음. 그래서 이 고된 작업의 고통을 다소나마 덜어보려는 의도에서 우유배달원식 수거방식이 생겨남. 1652년 존 부룩 경과 토머스 러셀은 오줌에서 직접 질산염을 추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냄. 그로 인해 런던과 웨스트민스터에서는 분뇨의 문전 수거방식이 장려되어, 각 가정은 여름엔 하루 한번, 겨울에는 이틀에 한번씩 실내 변기를 문밖에 내놓음. 그러면 초석장이가 거리를 돌면서 그 귀중한 액체를 통에 담음. 그것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끈적끈적하였을지는 몰라도 초석장이에게는 삽질하느라 허비했던 시간을 되찾아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기술이 비능률적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초석장이 세계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수거용 소변통은 2년 후 폐기됨. 결국 초석장이는 예전의 확실하고도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돌아감. 만약 초석장이에게 천진무구한 흙의 아들이란 인상을 받았다면 잊어버려라. 장약은 열성적 아마추어에게 맡겨두기엔 너무나 중요한 물자였다. 국가 방위는 영국의 지상과제였기 때문. 초석이 필요했던 국가에겐 그것의 출처따윈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음. 초석장이들은 아무 집에나 들어가 여기저기를 파헤칠 수 있는 특권을 국왕으로부터 부여받았음.
- 흑사병을 치유한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빵제조업자 그것도 부주의한 빵 제조업자였음. 1666년 9월, 빵집 푸딩 레인에서 시작된 불길은 런더 대화재로 이어짐. 스튜어트 시대 들어 두번째 천재지변인 이 화재는 첫번째 천재를 뿌리째 없애버림. 하지만 그 이유를 속 시원히 밝혀낸 사람은 없음. 사실 흑사병은 그 후로도 상당기간 산발적으로 조금씩 발생했지만 대화재는 런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쥐떼를 몰아냄으로써 대역병을 종식시키는데 기여
- 19세기에 성냥은 작은 나뭇개비들을 흰 인에 담그는 공정인 침지를 거쳐 만들어짐. 화학물질인 흰 인에서 피어오르는 증기는 성냥 제조공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인산괴사라는 무서운 병의 원인. 이 병의 최초증세는 이가 욱신거리면서 잇몸과 턱이 부어오르는 것임. 그리고 나서 종기가 생기고 더러운 배설물을 몸 밖으로 내어보냄. 썩어가는 환자의 턱뼈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섬뜩한 야광장난감처럼 희미한 불빛을 발했을 것임. 이 병은 외과적으로 턱뼈를 제거하는 고통스러운 수술이 유일한 치료법이었음. 스웨덴과 미국은 인의 사용을 금지했지만 영국정부는 그런 조치가 자유무역을 제한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이들 국가를 본받지 않았음.
- 무두장이들은 동네 푸줏간이나 도살장에서 생가죽을 직접 얻음. 도개 이집트때부터 암소와 송아지, 황소, 수소, 돼지, 말, 양, 개의 생가죽을 무두질함. 각 짐승의 생가죽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님. 송아지 생가죽을 무두질하면 린디스판 복음서의 송아지 피지처럼 가장 부드러운 유피가 얻어지는 데 반해, 황소, 수소의 생가죽은 장화를 비롯해 질긴 가죽제품에 적당한 튼튼한 유피를 제공했음. 사람의 피부에도 장점이 없지 않음. 앞서 우리는 결국엔 에든버러의 왕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포켓판 팩이 된 유명한 시체도둑 윌리엄 버크의 경우가 있음. 그리고 스코틀랜드 영웅 윌리엄 월레스도 적인 영국군의 피부를 벗겨 허리띠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음. 그렇지만 무두장이들은 친구와 친척을 소금물에 절이고 싶은 유혹을 억누르고 네발짐승의 생가죽에만 집중. 그들은 도살장에서 미리 손질하여 소금에 절인 다음 씻어 놓은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생가죽을 한꺼번에 수레로 실어 나름. 그런 다음 단내나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석회갱에 넣어 모근을 느슨하게 하고 지방조직을 연하게 함. 석회갱 속에 든 용액은 물에 소석회를 부어 만들었음. 중세 무두장이들은 오늘날 다목적 방청윤활세정제인 WD-40만큼이나 도처에 퍼져 있던 오줌을 추가했을 것임. 생가죽이 석회갱 속에서 부패와 연화작용을 수주간 거치고 나면, 무두장이는 적당하다고 판단될 때에 생가죽을 꺼내 플레싱 빔이라는 커다란 굽은 작업대에 올려 놓고 털을 뽑고 덜 부패된 살을 제거했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작업이 아님. 석회를 잔뜩 머금은 생가죽은 굉장히 무겁고 미끌거렸음. 석회의 역한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털무더기들은 무두장이가 잡기 무섭게 손에서 빠져나갔음. 게다가 용케 생가죽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더라도 자루가 둘 달린 굽은 칼로 털을 제거하는 지루한 작업이 기다림. 이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과 일의 단조로움을 결합시키면서도 강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정말 어려운 일. 이 단계에서는 아주 작은 털 한올까지 제거해야 했음. 일단 무두질이 끝나고 나면 털조각이 제거되지 않을테니 말이다. 털이 삐죽이 나 있는 신이나 핸드백을 원하는 사람은 없음. 털이 모두 제거된 생가죽은 뒤집어 오랫동안 석회수에 담가둔 후 팽윤된 지방조직을 날카로운 칼로 벗겨냈음. 벗겨낸 지방은 모아두었다가 비누를 만드는 곳에 보냄. 지금까지도 충분히 힘든 일이었으나 정말 고된 일은 지금부터임. 이 단계에서 개똥이 등장하기 때문. 탈모와 지방제거를 거친 생가죽은 베이팅갱에 넣어졌음. 생가죽을 알칼리액에 담가 석회를 제거하고 더욱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베이팅 작업. 현재 보건안전 규정상 인공대용품이 쓰이고 있지만 빅토리아 시대만 해도 베이팅용 알칼리액은 물에 개똥을 탄 구역질 나는 것으로서 탈모실 구석에서 계속해서 부패했음. 그런데 왜 하필 개똥이었을까? 개똥은 개의 위의 잔류성분을 함유하고 있음. 이들 성분 중에 강산과 효소는 본래 고기를 소화하는 기능을 수행. 개똥 물에 잠깐 담가두면 생가죽은 석회가 제거되고 세균과 효소가 침투하여 나긋나긋하고 유연해짐. 생가죽은 베이팅갱 속에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담가두지만 그 갱속의 똥은 수주간 묵혀둔 것이었음. 무두장이들은 오래 숙성한 개똥을 선호했음. 게다가 석회와 베이팅갱에서 자연적으로 풍기는 악취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듯 빅토리아 시대의 무두장이들은 특유의 반응증강법을 추가. 무두과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갱 아래에 설치한 증기관을 통해 다양한 액체를 가열했던 것. 그 개똥 침전물은 따뜻한 수프가 되어 배설물의 장막을 무두공장과 주변지역에 드리웠음. 무두장이의 기술은 생가죽을 적당한 기간 동안 베이팅갱에 넣어두었다 최종적으로 타닌액에 1년동안 담가두는 것이었음. 무두질엔 우리가 차를 통해 섭취하는 타닌과 같은 것이 필요. 단, 무두공장에서 찻잎은 손만한 오크나무껍질이었음. 생가죽을 점점 농도가 진해지는 이 차에 담근후 최종적으로 헹구고 지붕아래 천천히 조심스레 말림.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느라 피운 불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났음. 연기에 타닌갱의 냄새, 석회갱의 악취, 베이팅액의 고약한 냄새가 뒤범벅됨. 이런 연기와 세균, 화학약품의 결합은 무두장이들의 각종 건강 질환과 퇴행성 질환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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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5000년의 역사

저자
프레드 E. H. 슈레더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14-02-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신화, 마녀, 신들림, 농담, 히스테리, 발라드, 종교........
가격비교

- 물표 체계의 발전과정을 보면 물표와 기호의 관계가 우연이 아니며, 물표가 물자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음. 최초의 물표가 발견된 신석기 초기는 인류사회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음. 물표는 농경과 작물화, 가축화가 옛 경제를 서서히 대체한 신석기 현상의 일환이었을 것임. 따라서 농경에 다른 정착생활로 기록이 필요하게 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음. 초기 농경민은 새로운 문제들에 부딪혔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확물의 저장이었음. 수확물의 일부는 일가족이 일년내내 춘궁기에 먹고살기 위해 저장해야 했으며, 씨앗의 일부는 파종하기 위해 따로 떼어두어야 했음. 두번째 문제는 생태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물자를 얻는 것이었음. 이들은 유목생활을 계속하는 부족과 교역관계를 맺고 먼 지방의 외래산물과 원료를 수확물과 교환했을지도 모름. 따라서 식량자원을 관리하고 타 부족과 교역해야 할 필요성이 기록의 필요성을 낳았으리라 짐작됨.
- 통념과 달리 문자는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9000년 이전에 서남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기록체계의 발전단계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름. 이 최초의 회계체계는 다양한 기하학적, 불규칙적 형태의 물표가 토대가 됨. 이 체계는 기원전 4000년전까지 별다른 수정없이 쓰이다가 교역이 발달하자 급격히 변화됨. 상거래용 물표를 안전히 보관할 진흙용기 표면 안에 든 물표 개수를 표시해 새긴 것. 물표의 이미지(또는 기호)를 이용하는 체계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이내 기존기록 체계를 대체. 이 가설이 옳다면 고대 점토판의 특징들, 특히 진흙을 재료로 쓴 이유와 모양이 볼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음. 둘다 점토판의 선조인 불라의 특징이기 때문. 이것은 초기의 일부기호가 추상적 형태인 이유(물표의 형태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와 문작 방대한 지리적 영역에서 급속히 받아들여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임. 문자는 서남아시아 전역에서 5000년 동안 쓰이던 옛 기록체계에서 빌려온 친숙한 형태를 기반으로 함
- 크기, 인구, 부는 저마다 달랐지만, 로마세계에서 도시로 인정되는 공동체는 예외없이 그 밖의 모든 인간조직과 구별되는 기본적이고도 공통되는 특징이 있었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완전한 지방자율 또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누린다는 것. 본질적으로 자치는 공동체의 제한된 영역에 적용되는 규칙을 통해 표현됨. 이것은 주로 로마의 세나투스(원로원)나 그리스의 불레(심의위원회)에 해당하는 심의위원회의 형태를 띰. 입법기능과 선거기능을 갖춘 시민체 전체집합은 포풀루스, 에클레시아, 데모스를 이룸. 시민체의 선거로 해마다 선출되어 공동체의 구체적 업무를 수행하는 행정장관도 필수 요소였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독자적 창건설화와 뚜려산 과거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과거사는 대개 수많은 법령의 형태로, 또한 과거의 시민과 외국 지도자가 공동체에 헌정한 헌물의 형태로 나타남. 이런 헌물은 주요 공공기념물과 건축물의 형태로 구현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지속적 자부심을 불어넣음. 공동체가 갖추어야 하는 마지막 필수요소는 시민체의 수호신에 대한 자체적 신앙관습이었음. 형태와 내용은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이러한 필수요소를 갖추지 못한 공동체는 도시로 규정되지 않았음. 하지만 도시의 지위를 얻기 위해 무엇보다 로마의 공식 승인을 받는 것이 중요했음. 승인은 영구적이지 않았으며 로마의 뜻에 따라 부여되기도 철회되기도 함. 쇠락하거나 특히 분쟁 시기에 불명예를 저지른 공동체가 촌으로 추락하는 일이 종종 일어남. 그러면 기존의 정치적 삶을 더는 인정받을 수 없었음. 공동체가 여전히 거대한 인구를 자랑하고 전문화와 기능적 활동, 사회적, 문화적 삶을 독자적으로 표현하며 물질적 번영을 구가하더라도, 더는 도시로 분류되지 않음.
- 고대세계에는 여러 수준의 도회적 위계들이 두 측면에서 조화를 이룸. 도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번영하는 데는 이런 조화가 필수적이었음. 도회적 위계는 도시(또는 도시라 분류한 지역단위)와 시골 촌/읍이라는 두개의 수준으로 뚜렷이 나뉨. 두 수준은 도시민과 촌사람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삶의 표현을 토대로 계층화된 무게중심을 유지. 하지만 도시와 도시적 삶을 살아가려면 도시민에게 필요한 잉여생산물을 공급받아야 했음. 그 대가로 도시는 사회적, 문화적 생활양식과 폭넓은 세계관을 촌사람들에게 제공했음. 도시민의 세련된 삶은 실제로는 부차적인 것이었음. 상당한 규모의 농업 생산과 부에 기반하는 단단한 경제적 토대 없이는 도시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 따라서 도시의 세련된 삶은 사치(도회적 위계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에 의해 지탱되는 사치)였음.
- 지배계급은 제의적 신들림을 언제나 미심쩍게 여김.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음. 신을 직접 체험하고 접하면 중개자 (즉, 신앙을 국가적 목적에 이용하고 지배계급에 해를 미칠 수 잇는 자들이 종교를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는 사제집단)가 필요없어지기 때문. 제의 참가자들은 평범한 일상생활의 경계를 뛰어넘음. 지배계급은 사람들이 이런 경계를 넘는데 익숙해지면 계급같은 정치적 경계까지도 넘으로 들지 않을까 우려했음. 디오니소스는 언제나 하층계급의 신이었음. 로마인들이 특히 두려워한 것은 평민의 대중집회가 국가, 즉 지배계급의 통제와 감시를 받지 않고 열리는 것이었음.
- 생식을 위한 섹스조차 필요없다고 여긴 초기 기독교 시대를 시작으로 생식을 위한 섹스만 허용한 중세시대를 지나는 동안, 기독교 교부들이 성교의 예방적, 치료적 효과를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음. 따라서 이들은 히스테리의 신체적 병인을 부인해야 했음. 그렇지 않는다면 섹스가 자연스러운 것, 즉 인간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 이에 따라 히스테리가 기능장애란 관념도 거부해야 했음. 소마(몸)와 프시케(마음)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하는 것은 치료를 위해 죄악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 반면에 귀신들림을 원인으로 제시하면 히스테리의 성적 기원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엇음. (물론 귀신은 대개 음탕한 존재로 묘사되었으며 음욕을 채우려 드는 것이 특징이었음.) 게다가 질병과 정신이상의 원인으로 귀신을 부각시키는 것은 고대 후기의 여타 추세와도 잘 들어맞았음. 당시에 두드러진 추세 중 하나는 히포크라테스 학파로 대표되는 과학적 접근법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 고대 후기에 창궐한 무서운 전염병들은 의술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음. 게다가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와 기근도 잦았음. 토지의 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노예제도의 문제점이 커지자, 사람들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당하는 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현세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잃고 내세의 축복에 눈을 돌리기 시작. 귀신에 대한 믿음은 새로 등장한 기독교가 옛 이교도 신앙과 융화하는 데 한몫했으며, 악의 존재에 대한 그럴듯한 근거를 대중문화에 제공. 기독교인은 옛 이교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보다는 이들이 실제로는 사람이었다가 귀신이 되었다고 설명
- 1000년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신들림으로 광기를 설명하는 견해는 흥미롭게 변화해 왔음. 광기는 신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에서 저주로 바뀜. 퇴마사를 부르고 찾아가는 횟수로 보건대, 고대 후기의 일반적 추세(이를테면 금욕주의)가 더 강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광기에 시달린 듯 함. 이 자리에서 논지를 전개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고대세계에 일어난 변화들(사회/경제적 관계, 의료, 철학, 종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노예사회의 모순이 격화되고 더 높은 차원의 경제구조인 봉건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을 반영. 우리 사회에서 귀신들림에 대한 관심과 믿음이 다시 생긴 것은, 모순이 격화되어 사회제도가 무너지고 있음을 뜻하는지도 모름
- 고대에 주술과 마녀술이 실제로 행해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면 그 기원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이 물음에 대답하는 이론을 내놓음. 그중에는 터무니없는 것도 있고 그럴듯한 것도 있음. 이를테면 마녀술이 심리적 요인 때문이라는 가설이 제기됨.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나 개인의 정신장애라는 것. 하지만 마녀술 현상은 전적으로 보편적이면서도 일관됨. 주술과 의식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기본적으로 동일. 환각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일어날 수는 없음. 마음과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이며, 따라서 환각은 언제나 개별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 어떤 사람들은 마녀술의 기원이 맥각(호밀 이삭이 곰팡이에 감염되어 생기는 돌기로 먹으면 경련을 일으킬 수 있음.)이나 이와 비슷한 약물이라 생각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음. 마녀술은 기독교 교회가 이단과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라는 주장되 있었음. 11~17세기 유럽의 마녀재판을 생각하면 무척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토착문화에서 발견되는 마녀술은 전혀 설명하지 못함
- 주술과 마녀술은 고대 농경사회의 풍작기원 의식의 잔재로 보아야 함. 과거에는 풍작기원 의식을 여자가 주관했음. 이 이론에서는 최초의 공동체가 농경/모계 사회였다고 가정.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 초기에는 남자들이 여전히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여자들은 뒤에 남아 촌락일을 돌보았기 때문. 물론 여기에서 촌락은 매우 포괄적으로, 즉 소규모 집단이나 가족, 부족의 거주지라는 의미. 브리포에 따르면, 남녀의 역할구분은 타고난 본능과 기질을 토대로 정해진 것. 남성은 굳세고 지칠줄 모르는 사냥꾼이며 식량과 모험을 찾는 방랑자임. 반면에 여성은 집을 만듬. 최초의 집과 오두막, 천막은 여자가 만들었음. 오늘날에도 어떤 부족은 남자가 밖에서 자고 여자는 보금자리에서 살아감. 남자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동안 여자는 가족과 공동체의 대소사를 맡음. 여자의 지위가 높아진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음. 첫째, 임신과 분만은 남자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킴. 자연적 재생산 과정을 모르는 남자들은 여자가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음. 월경도 마찬가지임. 게다가 인간유아는 동물중에서 어미 의존도가 가장 높음. 성숙해 어미로부터 떨어지는 데 걸리는 기간이 어떤 종보다도 김. 이 때문에 자식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식량을 가져다주는 존재에 불과. 더 중요한 사실은 씨앗을 작물화하는 방법을 여자들이 처음 알아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신화가 이를 입증함. 농경의 기원을 다루는 거의 모든 신화는 농경을 발견한 공을 여자에게 돌림. 그도 그럴 것이 곡물과 과일처럼 모아들일 수 있는 야생식량을 채집하는 것이 여자의 임무였으므로, 씨앗이 떨어져서 다시 결실을 맺는 과정을 발견한 것이 여자였을 것. 경작의 비밀을 처음 알아낸 것이 남자라 하더라도 밭을 일군 것은 어쨌거나 여자였음. 남자는 여전히 짐승을 사냥하거나 목축(중석기 시대 시작)하고 있었기 대문. 따라서 초창기의 여성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부계사회에서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
- 그리스, 로마 마녀술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전시대 마녀의 의식과 주문 상당수가 생계유지를 위한 풍작기원 종교에서 직접 기원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음. 풍작을 기원하는 초창기 여사제는 작물을 자라게 하고, 계절을 길들이고, 비를 내리게 하고, 아이가 태어나게 할 수 있었음. 그리스, 로마 시대 들어 마녀는 여사제의 지위를 잃음.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남성이 오래전에 이들의 권한을 대부분 차지했기 때문. 하지만 옛 종교를 간직한 하층계급에는 주술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 일부의식은 원래 의미를 거의 잃어버렸지만 나머지 의식은 예전의 목적이 그대로 유지되었음. 해충을 구제하는 의식이 카토시대까지 여전히 쓰인 것, 고전시대 마녀술에서 사랑의 주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마녀의 적은 무능력이나 불임을 두려워한 반면 마녀의 친구는 성공과 다산을 기대한 것, 모든 마녀가 비약을 만든 것, 로마에서 베스타의 여사제가 그토록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 것, 로마에서 주술을 언급한 첫 사례가 이웃의 경작지에서 생산력을 빼앗는 행위를 금지한 법률이란 것, 최초의 신이 경작과 수확을 주관하는 어머니 대지의 여신이었다는 것, 마녀가 모두 예외없이 여자인 것은 이 때문. 그리스, 로마의 마녀는 단순한 문학적 허구가 아니었음. 그 기원은 공동체를 위해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을 지낸 여사제이며, 그 후예는 20세기 마녀들임
- 신약 외경 배후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몇가지가 눈에 띔. 첫째, 정경 복음서를 보완하려는 욕구가 있었음. 네 복음서는 심지어 네 복음서를 모두 합쳐도, 예수의 일생을 완전히 그려내지 못함. 예수의 생에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에는 매우 넓은 공백이 있음. 예수가 태어나 선교활동을 시작하기까지의 시기는 복음서에서 완전히 누락되어 있으며, 부활과 승천 사이에서 지상에서 머문 40일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음. 이같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기독교인들이 호기심을 느꼈으며 누군가 그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음. 그 결과물은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구였음. 하지만 이들 작품이 유포되기 시작하자 초신자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였음. 실제로도 이들 전승 상당수는 중세 교회의 교리체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신약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과정이 관찰됨.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예수와 관련해 여러차례 언급된 사람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의 남편 요셉, 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 본디오 빌라도는 그중 일부에 불과. 바울과 열두제자를 비롯한 사도들에 대해서도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임. 사도들의 선교활동과 최후도 알려져 있지 않음. 따라서 이번에도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해 신약에 누락된 정보를 채워넣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됨. 또 다른 동기는 일반적인 기독교 대중에게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하려는 욕구. 기독교 교회는 교인들이 연극과 서커스처럼 노골적이고 잔인한 이교도 오락을 즐기거나 혼음이 이루어지던 목욕탕 같은 공공시설물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음. 이교도의 통속문학을 읽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음. 그 이유는 2세기 로마 소설을 흘끗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음. 아풀레이우스의 황금당나귀는 시작부터 루키우스와 하녀 포티스의 성행위를 자세히 묘사하며, 끝에 가서는 루키우스를 이시스 여신에게 개종시키기까지 함. 교회가 이런 읽을거리를 권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음. 하지만 제약을 가하려면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제시해야 했기에 기독교 통속문학이 급속히 성장. 이에따라 기독교인 독자들은 사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벌이는 모험담을 비롯한 읽을거리를 즐길 수 있었음.
-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이 단순히 관료주도적 종교개혁으로 표현되었다는(즉 정치적 통치기구가 대응조치를 결정했다는) 가정은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했음. 시의회나 제후는 종종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조치를 취해야 했으며, 시민들은 새로운(또는 낡은) 종교를 열렬히 옹호하고 결정권을 행사했음. 대중의 동기는 단순한 한가지 원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요인이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역할을 단지 경제정의나 참정권, 종교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보아서는 안됨. 물론 제후의 군사력이 대중운동을 짓밟은 경우도 많았지만, 대중의 의지는 그뒤로도 살아남아 지역이 종교를 결정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음.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소수파는 제도권 예배를 거부하거나 박해를 감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종교적 독립을 추구. 따라서 독일의 종교개혁의 향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역할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물질적, 영적 요인의 중요성을 경시해서는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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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맛

역사 2014. 10. 12. 07:33

 


18세기의 맛

저자
안대회, 정병설, 이용철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2-2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왜 교황청은 버터에 면죄부를 발행했을까? 감자는 어쩌다 악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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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음식, 특히 프랑스 요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부드럽고 섬세한(달리 표현하면 느끼한) 맛을 내게 되었을까? 천년전 중세시대에도 유럽인들은 그런 맛을 좋아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음. 놀랍게도 후추를 많이 첨가한 유럽의 중세음식은 오늘날의 인도음식보다 더 매웠고, 매울수록 더 고급음식으로 쳤음. 귀족들의 경우 음식에 후추를 쳤다기 보다 오히려 후추를 즐기기 위한 베이스로 다른 음식재로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음. 이런 매운음식이 물러나고 부드럽고 순한 맛 위주의 음식이 널리 퍼진 것은 근대 이후의 일. 말하자면 유럽에서는 미각의 구조가 신료 중심의 중세의 구조로부터 향료 중심의 근대의 구조로 변화했다고 표현할 수 있음. 그런 큰 변화의 흐름에서 핵심적 역할은 한 것은 버터였음.
- 새로운 맛을 평가하고 새로운 조리법을 퍼뜨리는 주역은 대개 상층사회 인사들임.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어떤 음식을 즐기는 것은 그들만이 그 음식을 독점한다는 점과 무관치 않음. 그런 면에서 보면 맛의 유행에서 희소성은 지극히 중요한 요소임. 중세 유럽에서 매운맛이 그토록 고귀한 지위를 누린 것은 후추가 워낙 고가의 상품이기 때문. 후추는 지상낙원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얻는다는 전설까지 가미되어 최고의 상품으로 승격. 보석처럼 후추를 수집하고 선물한 데에서 알 수 있듯 후추는 단순히 맛을 위한 재료일 뿐 아니라 일종의 의식요소이기도 했음.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진출하고자 한 욕구는 세계사를 움직인 큰 동력으로 작용했는데, 그런 엄청난 사건이면에는 맛의 추구라는 언뜻 시시해 보이는 현상이 존재. 그런데 정작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직항로가 개척되고 후추가 대량으로 수입되자 모든 것이 바뀜. 가격이 하락하여 모든 사람이 후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상류층은 그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 17세기에 프랑스 엘리트들은 후추대신 다른 향료를 찾았고, 최대한 섬세한 맛을 추구하기 시작. 유럽음식의 역사를 장기적 시각에서 고찰할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중세의 매운 맛에서 근대의 부드러운 맛으로 이행한 것이고, 그 정점을 차지한 것이 18세기 프랑스 요리였음. 그것이 오늘날까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해왔음.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한 그 현상이 이제 바뀌어가고 있음.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사회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히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 오늘날 독일인의 식탁에 오르는 사워크라우트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13세기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진 중국의 쏸차이나 고려의 김치 등 동양의 절인 배추에서 유래. 지구력이 강한 말을 무기삼아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이 기마민족은 안장 주머니에 그들의 전통 음식인 육포와 동아시아를 정복하고서 받아들인 절인 배추를 식량으로 갖고 다니며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유럽에 전해진 것. 쏸차이는 신맛 나는 채소를 뜻하므로 사워크라우트와 의미상으로도 정확히 일치. 이후 식량으로서 배추가 지니는 가치가 알려지면서 14세기에는 독일에서 배추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됨. 근대초에 접어들면서 배추농사는 독일 땅에 서서히 확산됨. 그러다가 30년 전쟁(1618~48)으로 독일 경제가 황폐화되면서 배추는 싼값에 쉽게 배를 불릴 수 있는 서민식단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됨. 이렇게 하여 17세기 이후로 사워크라우트는 모든 서민가정에서 담가먹는 대표적 음식이 됬으며, 특히 우리 김장김치처럼 동절기에 대비해 반드시 마련해야 하는 음식이 됨. 항로에 오르는 독일선원도 이 고향음식을 배에 싣고 다니며 즐겨 먹었는데, 그 덕분에 사워크라우트는 18세기에 대항해 시대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의 주인공 역할을 맡으며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
- 유럽에 들어온 감자는 처음에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상당히 꺼리던 식물. 울퉁불퉁하고 못생겼으며 더러는 시꺼멓기까지 한 외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땅밑에서 자란난다는 점. 그리고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잘 자란다는 점까지, 아직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럽인들에게는 감자는 뭔가 악마의 계략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미심쩍고 수상한 느낌을 주었음. 특히 중세 유럽에서 흑마술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독성이 강한 벨라도나의 꽃과 감자의 꽃이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점은 의심을 더 키웠음. 감자에 대한 첫번째 편견은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생각. 나병은 유럽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병 가운데 하나였음. 이런 편견은 아마도 감자의 껍질이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나환자의 피부를 연상시켰기 때문일 것임. 감자가 일찍 수입된 프랑스의 몇몇 지방에서는 이 이유를 들어 감자재배를 금지하기도 했음. 두번째 편견은 감자가 미약, 즉 성적 흥분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 사실 처음 이런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토마토와 고구마였는데, 감자는 고구마와 생김새가 비슷했기 때문에 덩달아 의심을 받게 된 것으로 보임. 이후에 아일랜드와 북유럽 등 감자를 많이 먹게 된 지역에서 높은 인구성장률을 보이자, 이것도 감자의 최음효과 때문이라고 해석되기도 했음. 이는 물론 감자덕택에 그 지역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졌기 때문.
- 18세기 커피하우스가 공론의 장이라는 공적 영역을 형성한 것과 유사하게, 맥주를 판매하던 에일하우스, 혹은 펍이라 불리던 술집은 소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집단적 쾌락을 공유하는 여흥의 공간을 형성. 커피하우스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확인했음.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에일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면서, 즉 소비의 쾌락을 공유하면서 공동체적 정체성을 만들고, 또 확인했던 것. 비슷한 기능을 하던 태번(숙소와 식당, 술집이 함께 있는 여흥공간)과 인(고급숙소와 술집이 결합된 형태)이 점차 고급화되고 진숍이 기층민을 빠르게 흡수해가는 와중에도 맥주를 주로 판매하던 에일하우스와 펍은 그 수와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해 나감. 그런데, 맥주는 앞서 언급한 소비재들과는 다른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음. 대부분의 사치재가 영국의 교역확대에 힘입어 국내유입이 증가된 수입품이었던 데 반해, 맥주는 원료와 생산시설 모두 영국의 내수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 18세기 들어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맥주주조 업체는 대규모 생산시설을 갖추기 시작. 국가경제에서 맥주가 차지하는 비중도 자연스레 커져갔음. 맥주는 단순히 영국의 오래된 전통음료일 뿐 아니라, 성장하는 영국의 미래를 보장하는 기간품목으로 인식되었던 것.
- 양성화된 맥주산업은 불법적인 진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제어하는 역할까지 담당. 18세기 내내 폭증했던 진의 수요는 정부의 골칫거리였음. 진의 생산과 유통을 양성화하여 이를 제어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세법과 인허가법을 입법했으나, 결과적으로 진 유통의 지하화는 더욱 심해졌음.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영국 의회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합법적 맥주유통을 활성화하는 법안이었음. 1830년 마침내 공표된 비어하우스법은 이런 노력을 집대성한 법. 이 법안은 가정이나 펍에서 맥주를 팔기 위해 내야하는 인허가세를 2파운드로 크게 하향조정했고, 이전에 요구되었던 음성적 진의 유통을 위축시키는 이러한 방밥을 통해 18세기 내내 음성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어 각종 사회 경제적 문제를 일으키던 진은 그 영향력이 크게 감소. 맥주는 다양한 경제행위에서 거래의 윤활유 역할을 하기도 했음. 흔히 18세기 커피하우스의 역할을 논할 때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상거래와 정치적 토론이 함께 다루어지곤 하는데, 각종 보험업무를 제외한 상거래 행위 대부분은 태번이나 인, 에일하우스와 같이 맥주를 주로 파는 장소에서 이루어졌음. 주식거래소나 영국은행 근방에 있는 태번은 거래자드로 항상 성황을 이루었고, 각종 이익단체나 클럽에서는 단골 에일하우스나 펍을 지정해서 그곳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논하고 각종 계약을 체결. 맥주는 이들에게 일정 정도의 흥분을 허락하면서, 그 흥분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들과의 상호교류를 통해 더 큰 이익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 맥주는 흥정을 부추기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매개체였음. 이처럼 맥주는 단순히 전통적 의미에서 영국 문화를 상징하는 소비재일 뿐 아니라, 18세기에 들어 나타난 성장의 징후들, 다시 말해 도시화, 상업화, 산업화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중요한 상품이었음. 호가스의 맥주거리가 찬양하는 맥주의 맛, 번영과 만족, 행복의 맛은 18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난 시장경제에 대한 기대와 낙관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음.
- 1554년 영호남 지방에 기근이 닥쳤음. 조선정부는 세종대왕의 구황촬요를 언해하여 전국에 반포. 국가가 구황방을 언해해 전국적으로 보급한 첫번째 사례였음. 서문을 쓴 우부승지 이택은 서울 사람들의 습속이 사치스러워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데 더욱이 죽 먹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아침에 좋은 밥을 지어먹고는 저녁에 밥 짓는 연기가 사라져버리니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토로하고 느릅나무 껍질, 솔잎 등은 오곡보다도 사람의 위장에 유익하고 성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 구황촬요에는 솔잎을 먹으면 받드시 뒤다르는 변비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유피, 즉 느릅나무 껍질을 우려낸 물이나 가루가 효과적이라고 강조.
- 18세기 조선에서는 단맛의 원천을 꿀과 조청에서 주로 확보. 이에 비해 일본, 류큐국, 중국으로부터 확보한 사탕은 그것이 백사탕이든지 흑사탕이든지, 아니면 설탕이든지 연백당이든지 간에 약재 혹은 단맛을 강화하는 용도로 부분적으로 쓰였을 뿐임.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가 밝혔듯이 서유럽에서도 설탕은 처음에 향신료이자 의약품이었음. 18세기 이후 중앙아메리카에서 운영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은 설탕의 대독점가를 양산. 설탕의 대량생산과 그로 인해 발생한 설탕위주 단맛 소비는 사탕수수 농장주와 설탕 가공업주, 유통업주와 은행가 그리고 노예상인을 권력자로 만들었음. 이러한 사정은 적어도 18세기 일본의 사쓰마 번에 의해서 독점된 아마미 군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도 부분적으로 현실화되고 있었음. 하지만 조선에서는 20세기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설탕이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
- 영국에 가서 차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영국에서 마시는 홍차가 맛있다고 느꼈을 것임. 영국에서 마셔보고 맛있어서 국내에 사들고 와서 끓여 마시면 같은 맛이 나지 않음. 왜일까? 수질이 다르기 때문. 영국의 물은 경수인 반면, 우리나라 물은 연수임. 석회염 등 광물질이 다량 포함된 경수에서는 차의 맛을 내는 탄닌이 잘 우러나지 않음. 17세기말~18세기 초에 영국인들이 마셨던 녹차는 아마도 매우 옅은 맛이었을 것임. 반면 녹차에 비해 탄닌이 훨씬 많이 들어있는 발효차는 영국의 경수에도 진하게 잘 우러남. 또한 물을 식혀서 찻잎을 여러번 우려내 마시는 녹차와는 달리 홍차는 물을 끓여서 찻주전자에 한번에 우려낸 다음 뜨겁게 마시는 것이 포인트임. 일년내내 비가 많이 오고 을씨년스런 날씨가 계속되는 영국에서 홍차는 추위를 덜어주었음.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마시면서 영국인들은 보다 위생적인 식생활을 하게 됨. 영국인들이 중세부터 거의 끼니마다 맥주를 마셨던 일차적 이유는 위생때문이었음. 오염된 식수 때문에 질병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에 맥주는 건강음료였던 셈. 그러다 과다한 알콜섭취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면서 서아시아와 동북아 지역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맛의 커피와 홍차가 맥주의 대안으로 떠오름
- 1741년 80만 파운드의 차를 소비한 영국인들은 1750년 250만 파운드, 1784년에는 1100만 파운드에 가까운 차를 소비. 1693년에서 1793년 사이에 차수입이 400배나 증가했다는 놀라운 통계도 있음. 차소비가 미친 경제적 영향에 대해서는 다소 상반된 견해가 있음. 노동자들이 진이나 맥주대신 차를 선호하게 되면서 더 건강한 몸으로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국의 산업화가 촉진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노동자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구해야할 돈으로 차를 사 마시면서 오히려 더 허약해졌다는 주장도 있음. 1756년에 차에 대한 에세이를 출간한 조너스 핸웨이는 차가 영국인의 건강을 해치고 일을 방해하며 개인의 자산을 축내고 국가의 부를 유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주문. 영국인이 차를 마시면서 여성화되어 나약하고 무기력한 국민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믿었던 핸웨이에게 차는 도덕적 해이, 사회적 혼돈, 경제적 파탄, 아울로 국가적 낭비를 불러온 재앙이었음. 차소비가 한창 늘어나던 시대에 핸웨이의 격한 반응은 빈축을 샀음. 예컨대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문인이었던 새뮤얼 존슨은 핸웨이의 견해가 지나치다며 깎아내렸다고 함. 그러나 차는 실제로 영국경제에 갈수록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 영국인들은 점점 더 많은 차를 소비했지만 중국은 영국이 내놓을 수 있는 물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대문에 영국은 갈수록 심한 무역적자를 떠안게 됨. 이 불균형때문에 영국은 자국에서 재배하기 힘든 차를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했고, 중국에 아편수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아넘겨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려 했음. 19세기 아편전쟁은 사실 차전쟁이었던 셈.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사건 역시 식민지 미국에서의 차수입과 유통을 통제하려 했던 영국의 정책에 반발한 시민들이 제국의 간섭없이 차 마실 권리를 주장한 사건이었음.
- 커피가 유럽에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의 일. 처음에 커피는 아랍인들이 즐겨마신다는 이유로 악마의 음료라고 비난받았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커피를 마셔본 후 이런 음료를 마시는 즐거움을 이교도에게만 허용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선언하면서 커피에 세례를 주었음. 그러나 후일 역사는 교황의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증명함. 유럽에 확산되기 시작한 커피와 카페는 기독교의 교원에 반대한 계몽주의 운동의 촉매역할을 했기 때문. 최초로 계몽주의의 싹이 튼 영국에서는 1650년 경부터 커피가 수입되어 소비되기 시작했으며, 옥스퍼드와 런던에서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음.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공간에 철학자, 문인, 정치가들이 모여들면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점화됨. 영국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 존 로크 역시 커피하우스의 단골이었음. 1676년 영국의 검사장은 찰스 2세와 왕국에 대한 불경죄를 구실삼아 커피하우스를 폐쇄할 것을 명령했지만 반발이 너무 거세게 일어 칙령을 철회해야 했음. 마농 레스코의 작가 아베 프레보가 영국을 방문한 후 "정부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모든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커피하우스는 영국의 자유를 위한 의자"라고 했을 정도로 커피하우스는 영국의 정치지형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그러나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차가 수입되어 커피를 밀어내게 되었고, 이후 영국과 항상 대립하던 프랑스가 명실상부한 카페의 왕국으로 부상.
- 지금도 그렇지만 커피중독은 당시에도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음.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커피로 인한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 바흐의 커피 칸타타는 커피를 좋아하는 딸과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갈등을 소재로 삼고 있을 정도. 커피 애호가인 쥘리는 이성의 절제를 통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부르주어의 방식을 선택함. 쾌락은 금지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절제하게 방임되어서도 안됨. 무절제한 쾌락의 추구는 쾌락 자체를 습관으로 만들어 쾌락의 강도를 약화시키고, 이른바 자유의 수단인 돈을 낭비하게 만들기 때문. 사람의 육체적 쾌락 역시 마찬가지. 사랑의 육체적 쾌락은 그 강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절제되어야 함. 그러지 않으면 그 쾌락은 곧 소진되고 사랑의 감정마저 사라져버릴 위험에 처할 것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주의의 신화적 상징으로 제시한 오디세우스처럼,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려 바다에 빠져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이성의 밧줄로 자신을 묶는 것이 필요. 우리는 생프뢰의 말에서 계몽주의의 이것은 정신적 가치를 위해 감각이나 감정의 쾌락을 금지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통해 오히려 쾌락을 극대화하는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음.
- 18세기는 흔히 계몽과 이성의 시대라고 여겨짐. 그러나 한편으로 18세기는 욕망과 쾌락의 시기이기도 했음. 프랑스에서는 17세기말부터 기성의 도덕적 종교적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 이들은 리베르탱이라고 불렸음.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단지 자유로운 사상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 구속에서 벗어나 육체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한 오를레앙 공은 대표적인 리베르탱으로 남녀가 어우러진 야회를 즐겼으며 이 야회를 장식한 것은 샴페인이었음. 병마개가 터져 튀어오르며 뿜어져나오는 거품으로 여인의 노출된 어깨를 적시는 장면은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야회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줌. 카사노바와 사드 후작은 18세기의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그들에게 와인이란 성적인 금기와 억압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구현하는 매개물이었음.
- 프랑스에서 와인의 맛을 평가할 때 쓰는 용어중에 테루아라는 말이 있음. 이 말은 번역하기 까다로움. 사전에서는 '산지특유의 맛' 정도로 옮기고 있지만 충분한 설명이라고 보기 어려움. 테루아는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다양한 요소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 기후, 토양, 재배자의 정성과 양조기술 등 와인 맛과 관련된 모든 요소가 테루아에 포함됨. 그 모든 요소가 마친 DNA의 이중나선처럼 뀨여서 이루어진 것이 테루아라는 개념. 테루아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은 19세기임. 1855년 파리에서 열린 와인 박람회에서 보르도 와인이 산지에 따라 와인의 등급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19세기 후반에는 재배지역이 와인의 질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됨. 20세기 초부터는 와인과 치즈 생산업자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 요리책 작가, 요리사 등 음식의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들도 생산지와 맛을 관련시키기 시작. 이에 따라 테루아는 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료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됨. 이후 테루아는 AOC(원산지 명칭의 통제) 제도의 구축으로 이어져 지역농업을 보호하고 프랑스 와인의 명성을 높이는데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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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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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세계를 바꾸다

역사 2014. 10. 11. 17:49

 


설탕 세계를 바꾸다

저자
마크 애론슨, 마리나 부드호스 지음
출판사
검둥소 | 2013-09-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설탕은 세계를 바꾸었다.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닌 인류 역사에 막...
가격비교

- 기원후 400년 이래 침입자들이 로마를 휩쓸며 지나갔고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유럽은 더욱 폭력적이고 무지하고 극심한 분열상태에 있었음. 무슬림이 고대 그리스의 언어를 연구하는 동안, 유럽인 대부분은 손가락을 이용한 셈법에 의지하고 있었고 극소수만이 글을 읽을 줄 알았음. 돈 될만한 사업을 좇는 일부 상인들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감히 아주 멀리까지 떠나는 모험을 하지 않았음. 바깥세계는 그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일 뿐이었음. 그래도 모든 사람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향신료로 자신들의 음식에 맛, 특히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여 할지도 모르는 한가지 맛을 내기를 좋아했음. 비록 출간되는 책마다 향신료의 신화를 반복적으로 싣고 있을지라도 향신료의 인기는 부패한 육류나 생선의 맛을 돋우는 것과 무관했음. 값비싼 향신료를 구매할 여력이 있는 영주는 신선한 고기나 생선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것들이 항시 준비되어 있었음. 한 요리사가 맛이 간 음식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향신료는 지독한 냄새나 맛을 감출 수 있었음. 인기가 높아진 향신료를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게 되면서 후추, 생각, 설탕, 때때로 사프란 등의 향신료는 값비싼 필수품이 되었음. 진정한 부자들만이 수컷 향유고래의 창자속에 생기는, 생소하면서도 향기로운 바다의 맛을 제공하는 용연향같은 고가품을 살 수 있었음.
- 십자군 전쟁은 전쟁 그 이상의 것이었음. 그것은 또한 정보교환의 장이었음. 유럽인들이 무슬림과 접촉한 결과 그들은 꽁꽁 봉인된 자신만의 세계를 부수고 나오기 시작. 그들은 수학을 배웠으며 일부학자들에 따르면 풍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됨. 풍차는 유럽인들이 과거 전혀 쓸모 없었던 습지에서 물을 빼내 경작지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준 아주 훌륭한 동력장치였음. 더 많은 토지와 함께 유럽인들은 더 많은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음. 무슬림들이 가졌던 이 지식은 유럽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줌. 무슬림에 대한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설탕을 가져다 주었음. 성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 기독교도들은 보통 사람들이 꿀나무라고 부르는 갈대랑 아주 흡사한 어떤 숙성된 식물들을 목격했고 배고 고픈 상태에 있던 우리는 그 꿀같은 맛때문에 하루종일 그것들을 씹었다고 기록. 여러 성지에서 기독교도의 십자군 전쟁도 실패했음. 유럽인들은 무슬림들에게서 빼앗은 지역들은 아주 오랫동안 보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음.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시칠리아, 사이프러스, 로도스 섬 등 지중해의 비옥한 섬들을 통제하게 되었음. 그곳에서 그들은 사탕수수 재배법, 설탕 정제법 등 무슬림에게서 배운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 설탕 정제법은 귀중한 지식이었음. 사탕수수를 기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설탕을 만드는 것은 특별한 도전에 직면하는 것이기 때문.
- 많은 설탕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많은 노동자들을 수수밭에 풀어놓고, 그들이 수숫대를 자르고 수숫단을 끌고 와 밟아 시럽으로 만든 후 그 시럽이 가열실로 흘러가게 하는 단일시스템을 설비하는 것. 이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들은 시간과 싸우면서 부글부글 끓는 액체를 조리하고 불순물을 씻어내 가장 달콤한 시럽을 가장 달콤한 설탕으로 환원시킴. 이는 벌꿀의 시대였던 지난 수천년 동안 남성들과 여성들이 했던 방식의 농경이 아님. 그것은 공장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 안에서 대규모 사람들이 모든 단계를 정확하게 주어진 시간안에 함께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 시스템은 붕괴하고 만다. 무슬림들은 설탕을 취급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농업을 고안해냈고 이는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불리게 되었음. 플랜테이션은 새로운 기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물을 기르고 베어내고 정제하는 것을 조직화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음. 통상적으로 농가에는 소와 돼지, 닭, 경작지, 과일로 가득찬 과수원이 있기 마련이며, 종류가 다른 많은 식품을 소비하고 판매함. 그와 반대로 플랜테이션은 오로지 한가지 목적만 있었음. 즉, 그것은 기르고 빻고 끓이고 말려서 원거리 시장에 판매하는 단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 사람은 설탕만 먹고 살 수 없으므로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된 사탕수수는 그것을 수확한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도 없었음. 수천 킬로 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구매자들의 열망 단 하나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기계들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된 농가는 인류 역사에서 그 이전에는 결코 없었음. 플랜테이션에는 50명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노동자 무리들이 있었음. 제조공장이 재배작물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재배와 제조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음. 그리고 모든 노동은 극도로 엄격하며 옥죄는 규율에 의해 관리되었음. 무슬림들은 이 새로운 형태의 농경을 위한 규칙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 무슬림들과 기독교도들은 노예를 이용하여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실험을 수행. 지중해의 설탕 플랜테이션들에서 일하던 많은 노예들은 처음에는 러시아인들이나 전쟁에서 사로잡힌 이들이었음. 그러나 심지어 이 모든 정교한 조직안에서도 설탕과 관련된 두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 그 통들이 계속 끓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땔감이 필요했음. 나중에야 설탕 경작자들은 으스러진 사탕 수숫대를 연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냄.
- 점점 더 많은 유럽인들이 노예노동과 함께 신세계에서 자라는 설탕을 부를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시작. 설탕 재배는 처음에 히스파니올라에서 선풍을 일으킴. 근처 멕시코에서 아즈텍인들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농업은 스페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음. 그러나 그로 인해 다른 유럽인들이 설탕이 주는 막대한 부를 찹아 선두에 나설 기회를 얻음. 유럽인들은 다음으로 브라질을 설탕 중심지로 만듬. 영국인들이 뒤따라 바베이도스를 설탕섬으로 탈바꿈시킴. 그 후 프랑스인들은 다시 한번 히스파니올라에서 옥토를 발견. 더 많은 설탕이 재배될수록 그것을 빻기 위한 더 많은 제조공장이 세워졌고 설탕을 실어나를 배를 대기 위한 더 많은 부두가 건립되었고 플랜테이션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노예화된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공급됨
- 전통적으로 영국 노동자들은 맥주를 직접 주조해서 주식인 빵과 함께 마심. 1700년대 후반 한 스코틀랜드 작가는 더 이상 맥주를 사 마실 수 없는 상항에 처한 노동자들에게 차는 맥주를 마시는 중하층 사회의 경제적 대체제가 되었다고 논평. 아시아에서 운송해온 차와 서인도제도에서 가져온 설탕은 맥주보다 값싼 음료를 만들었다. 새로운 음료는 곧바로 값싸면서도 필수적 상품이 되었음. 왜 영국인들이 특히 저가의 뜨거운 음료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공장들때문이었음. 영국은 주로 농원이나 탄광, 작은 점포 등 전통적 장소에서 돈을 벌던 것에서 공장으로 이행한 최초의 국가였음. 1800년대 초 영국인들은 직물을 짤 기계를 어떻게 제작하고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하여 그 방직기계들을 돌릴지를 해결. 공장 노동자들은 집을 떠나 일터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음. 그들은 자신만을 위한 식량을 재배하는 농지위에 서 있지도 않았고 간식을 먹고 싶다고 도중에 일을 멈출 수 있는 가게안에 있지도 않았음. 그대신 그들은 장시간 함께 일했고 허락을 받고 난 후에야 휴식을 취했음. 공장 노동자들은 들고 다니기 쉬우면서 다음 휴식시간까지 에너지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값싼 음식이 필요했음. 영국전역, 특히 맨체스터와 리버풀과 같이 검은연기로 가득 찬 도시들에서는 공장안에 호각소리가 울려퍼지면 노동자들은 일제히 쥐고 있던 프레스를 내려놓고 우르르 몰려 나와 설탕으로 단맛을 낸 차 한잔을 재빨리 마심. 그들은 보통 따뜻한 음료에 빵 조각을 적셔 먹음. 곧 영리한 공장장은 이 잠깐의 휴식과 단것을 한입 먹고 싶어하는 욕구는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 그래서 영국 노동자들에게 설탕으로 맛을 낸 쿠키와 사탕이 제공됨. 오늘날 에너지바라고 불리는 이런 식품들은 노동자들이 그것을 재빨리 집어먹고 장시간 교대근무를 수행하도록 촉진함. 1800년경부터 설탕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경제기구인 영국 공장들이 가동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기초식품이 됨. 설탕은 에너지와 미량의 영양분, 또 가장 빈곤한 노동자조차고 기대할 수 있는 따뜻한 차에 가미되는 달콤한 맛을 제공.
- 영국인들은 왜 직물가공공장을 건설한 최초의 국민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벌어들인 재산과 그들이 형성한 교역망, 노예와 설탕 교역을 통해 그들이 발전시킨 금융제도 때문이었음. 아닌게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된 값싼 직물은 노예들에게 옷을 입히는데 이용되었음. 영국공장들은 설탕에 의해 건설되고 돌아가고 지불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음.
- 1765년 4월 7일 일요일 저녁 북아메리카 로드아일랜드에서 남성 한무리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상선 폴리에 올라가 화물인 커다란 통을 공격. 커다란 통마다 설탕섬들에서 실어오는 당밀이 들어있었음. 이 사건은 보스톤 차 사건이 일어나기 8년전에 일어났는데, 그 쟁점은 같았음. 영국 의회는 북아메리카인들에게 아무런 통지도 없이 설탕에 세금을 부과했고 식민지 개척자들은 격노했음. 순수하고 단순하게 말해서 당밀 통들을 배에서 굴려 바다로 빠뜨려 설탕세를 내지 않겠다고 하는 로드아일래드인들은 영국인들의 입장에서 밀수꾼들이나 다름 없었음. 하지만 그 아메리카인들은 자신들이 세금에 저항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노예가 될 것이라고 주장. 그 아메리카인들이 믿기로는 자유민에게는 스스로의 힘과 두뇌와 의지로 일구어 온 것에 대한 권리가 있었음. 분명히 자유인들은 여전히 법률을 준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그러한 규칙들을 제정하는 데 자신들의 말과 목소리가 담겨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음. 자유인들은 왕 같은 아버지를 조용하게 충실히 따르는 아이들이 아니었음.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어른들이었음. 이것은 낡은 꿀벌의 시대 (이 시기 한 인간의 책무는 살아 있는 동안 쓸모 있으면서 순종적이고 자신의 숙명에 만족하는 것이었음.) 로부터 벗어나는 중대한 첫걸음이었음. 미국인들에게 재산을 소유하고 제어하는 일은 자유와 노예제 사이의 차이과 같은 것이었음. 그들은 어떠한 세금에 대해서도 저항했지만 그들에게 설탕은 대단히 취약한 약점이었음.
- 아이티이들이 프랑스군을 무찔렀을 때 나폴레옹은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높은 섬들과 함께 막대한 설탕수익을 얻겠다는 꿈도 잃었음.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갓 획득한 북아메리카 땅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음. 그것이 방대한 루이지애나 땅을 그가 단돈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제퍼슨에게 판매한 이유였음. 여러 교과서에서 미국의 루이지애나 매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 설탕 매입이라고 명명되어야 함. 아이티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달성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가의 중앙부를 구성할 땅을 프랑스로부터 획득.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아이티 노예소유주들에게 새로운 짐을 제공했음. 설탕 농장주들이 아이티혁명으로부터 도주할 때 일부는 쿠바의 오리엔테 지방으로 이주했고, 또 다른 일부는 북아메리카, 곧 루이지애나로 이주. 아이티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과 감독관들이 뉴올리언스로 도착할 때만 해도 노예 폐지론자들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종식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음. 노예제 종식을 위한 이 운동은 루이지내아 상황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극이었음. 사실 노예들이 라우지(형편없는) 애나라고 부른 이 주는 미국 아프리카인들에게 최악의 장소였음. 그것은 또 다른 카리브해의 반복, 곧 사형장이었음. 노예무역이 폐지된 후에도 모든 미국 노예 주에서 노예인구는 꾸준히 증가. 그것은 충분히 많은 노예 어린이가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되었기 때문. 이 규칙에 예외가 되었던 지역이 딱 한 곳 이었음. 바로 루이지애나였음. 루이지애나 현지에서 태어난 노예인구가 계속 감소했음. 설탕은 살인귀나 진배없었음.
- 재즈는 루이지애나에서 생김. 10대로 구성된 인구집단, 그것도 대부분 남자들인 이들이 속내를 말하고 주인에 맞서며 자신들이 세상에서 누구인지를 널리 알리는 방식의 하나로서 자신들만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영감을 어떻게 얻었던 것일까? 주인들이 노예들을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만든 기계안의 톱니바퀴라고 각인시켰을 때 푸에르토리코의 봄바, 브라질의 마쿨렐레, 루이지애나의 재즈는 모두 사람들에게 삶을 살아가고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다양한 사고와 꿈과 열정을 품을 기회를 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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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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