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46건

  1. 2014.10.21 인간이력서
  2. 2014.10.21 상업의 세계사
  3. 2014.10.19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
  4. 2014.10.19 상거래의 역사
  5. 2014.10.19 프라토의 중세상인
  6. 2014.10.18 배낭에 담아온 중국
  7. 2014.10.18 넓은 땅 중국인의 성격지도
  8. 2014.10.18 인류의 발자국
  9. 2014.10.18 문화의 패턴
  10. 2014.10.18 위대한 퇴보

인간이력서

역사 2014. 10. 21. 20:32

 


인간 이력서

저자
볼프 슈나이더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2013-01-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만들어진 승리자들],[위대한 패배자]의 저자 볼프 슈나이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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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은 계획하지 않고, 쓸모 없는 것을 무수히 만들며, 미래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 하지만 자연은 오늘 여기에 이로운 것을 정확하고도 무자비하게 선택함. 그리고 인간 역시 당연히 창조의 정점이 아니며, 동물세계는 인간의 목적을 위해 발달한 것이 아님. 자연은 수백만년에 걸쳐 수입억의 유인원 가운데 적, 경쟁자, 맹수, 곤충, 기생충, 난관을 가장 잘 극복할 수 있는 개체를 골라냈음.
- 사냥은 성의 구성과 역할을 정했음. 거의 2백만년 동안 오로지 남자들만 사냥을 했으며, 같은 기간동안 여자보다 많은 근육과 땀샘 그리고 더 적은 피하지방을 갖게 됨. 케냐의 인류학자 리처드 리키는 남성들의 지배성이 사냥 독접권에서 왔다고 주장. 그는 고기야말로 강력한 통화라고 했음. 영양가가 가장 좋은 음식을 얻고 또 분배하는 사람은 권력과 존경을 받았음. 그래서 당시에는 도살장이 없었다. 집단전술과 죽일 의도를 가지고 달리는 동물에게 자연이 선택적으로 선사한 것은 죽이고자 하는 욕망, 교활성, 독, 그리고 갈아먹는 이빨 등임. 다윈이 한숨을 쉬며 인정했던 생존투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다른 모든 종을 최대한 위험에 빠뜨리는 기술임
- 인간의 경우 성적으로 성숙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모든 동물에 비해 긴데, 그것은 다음 두가지를 의미.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지식을 쌓을 기회가 오랫동안 있으며, 어른들에게는 따뜻하고 안전한 둥지를 짓고 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음. 마침내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생기는데, 이런 관계로부터 유명한 노래와 시, 어머니의 날, 심지어 몇가지 영웅적 행동들이 나옴. 많은 위대한 남자들이 지닌 동력 중에는 의심할 바 없이 어머니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음. 그런데 남자들은 침팬지 수컷처럼 하루종일 늘어져 있는 대신 왜 그렇게 많은 의무를 짊어질까? 물론 자신에게 보답이 생기기 때문. 모든 동물들의 경우 암컷은 특정한 짝짓기 시기에만 교미를 원하고 허락하는 데 반해, 여자는 언제나 섹스의 준비가 되어 있음. 방황하는 사냥꾼에게 자신을 연결하고, 그에게 지속적 쾌락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를 부모로서의 역할에 참여시키는 것은 모든 여자들에게 최고의 성공임. 이에 반해 동물적 리듬에 따라 뜨거워지는 여자들은 보호자를 찾을 가능성이 낮고, 따라서 자기아이의 생존가능성도 작아짐. 따라서 섹슈얼리티는 이미 수십만년 전부터 아기를 낳는 일뿐만 아니라 짝을 맺고 아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음. 그에 대해 카톨릭 교회가 오늘날까지 내켜하지 않아도 어쩔수 없는 사실임
- 로마는 제국을 거의 발로 정복했지만,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음. 기원후 2세기의 로마제국은 아르메니아에서 포르투갈 그리고 이집트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5천킬로미터에 걸쳐 있었으며, 8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음. 이것이 당시까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최대의 조직력이었음. 로마의 도로는 1미터 이상 판뒤 포석과 자갈을 깔아 날씨와 상관없이 토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음. 도로 폭은 알프스 지역은 2미터, 평지는 8미터였으며 갓돌과 이정표, 그리고 말을 교환하고 숙박할 수 있는 역들이 갖추어져 있었음.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도로에는 대부분 지붕이 없는 파발 마차가 정기적으로 다님. 비상시에는 부대가 도로를 통해 이동했는데 보통 하루에 80~100킬로를 이동할 수 있었고, 급한 경우에는 180킬로까지도 가능. 파발꾼은 하루에 몇차례나 말을 교환하면서 3백킬로를 이동. (칭기즈칸의 전령은 4백킬로까지 달렸다고 전해짐) 철도가 승리의 행진을 하기 전까지 이 거리와 시간은 오랫동안 극복되지 않았음.
-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럽인들이 상륙하지 전까지 말과 바퀴가 알려져 있지 않았음. 따라서 길을 닦을 때도 탈것과 말을 생각할 수 없었고, 도로는 흔히 계단과 좁은 현수교로 이어짐. 두세개의 역마다 가족과 함께 오두막에 사는 전령들이 있었고, 오두막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인 몇 킬로 간격으로 국도에 따라 세워졌음. 그들은 철도가 놓였을 때부터 있던 건널목지기처럼 항상 준비된 상태로 살았음. 이웃전령이 다가오면 그에게 다가가 물건을 건네받거나, 아니면 함께 뛰면서 입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또는 색실 매듭을 이용한 잉카의 메시지 방식을 전달 받음. "전령은 왕에게 충실해야 했으며, 게을러서는 안되고 사슴과 매처럼 빨라야 했음. 그들의 아내와 아들들은 비밀을 지켜야 했음. 또한 그들은 밤이고 낮이고 간에 쉬지 못했음."라고 17세기에 기록된 스페인 연대기는 전하고 있음. 그들은 정말 비밀을 잘 지킴. 스페인 정복자들은 뇌물과 고문으로도 비밀을 캐내지 못하였으며, 이는 시스템의 승리였음
- 관광산업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 시초 또한 아주 미약했다는 것을 우리는 거의 잊고 살아감. 과거에는 여행이라고 하면 병력의 이동이나 출정을 의미했고, 여행하는 사람이란 기마용병을 말함. 20세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인류는 자의든 타의든 출정에 참여할 때에야 비로소 고향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미군은 군대에 와서 세계를 경험하라는 표어로 병사를 모짐. 군인과 해적, 선원과 순례자와 용감한 상인들만 먼 나라를 경험하는 이들이었음. 괴테처럼 세번이나 스위스를 여행하고 이탈리아를 한번 기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일부 상류계층에 부여된 특권이었고 그마저도 모험심이 강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음. 이런 여행은 꽤나 거창하게 이루어지기 일쑤여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1816년 마차 세대와 수십명의 하인 그리고 살아 있는 닭으로 가득찬 닭장을 대동한 채 제네바 호수로 향했음. 관광산업의 시작은 여행을 즐기는 영국인들의 습성과 영국적 스포츠 정신의 산물이었음. 동시에 저 황막하고 수천년전부터 악명높은 알프스 산맥을 아름답게 느낄수도 있고 그곳에서 휴가를 보낼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맥을 같이함. 알프스 산맥은 오늘날 전 세계 관광산업의 25%정도를 차지. 알프스가 아름답다는 해괴한 주장을 펴면서 이목을 끈 것은 루소였음. 스위스의 발레주를 여행하면서 강한 인상을 받은 루소는 1761년 출간되어 18세기 프랑스 문단의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신엘로이즈에서 알프스의 신비로운 장관에 현혹된 나머지 "빛나는 정상들이 빚어내는 빛의 향연"이 정신과 감각을 황홀하게 만든다고 적었음.
- 크루즈 여행은 사실 평화적 방법으로 진행되는 제국주의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음.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쳐들어가 서구의 생활양식을 퍼뜨리고 배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시중을 받음. 모든 허드렛일은 아시아인들의 차지로, 그들은 박봉을 받으며 주 7일 근무를 함. 본국의 각종 노동법과 세법을 피하는 것이 사업수완의 일부이고, 불법으로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음. 대다수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궁핍한 현지 여행지에 도착하면 상인과 걸인, 아이들이 선박과 관광버스 사이에서 관광객들에게 달려듬. 여행객들이 그곳에 남기고 가는 것은 두가지, 바로 돈과 지구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 고기 1킬로 그램의 칼로리와 단백질 함유량을 채우려면 가축에게는 그것의 최소한 세배, 평균적으로 일곱배, 많게는 10배 정도에 해당하는 사료를 먹여야 하는 경우도 흔치 않음. 물론 대부분의 영양소는 동물들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사용함. 이런 상황에서 지구상에서 기아게 허덕이는 수십억 인구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육류 과소비 문화에 회의를 품는 것은 당연함. 소의 자연식단인 풀은 인류가 사육하는 전 세계 15억 마리가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함. 결국 소들은 대개 곡물사료를 먹게 되는데 이는 발육기간을 단축한다는 한가지 이점이 있지만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를 낳음. 첫째, 소의 소화기는 곡물을 처리하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투입되는 항생제가 먹이사슬 체계에 편입됨. 둘째 전세계 곡물수확량의 절반정도가 가축사료로 사용되는데, 이는 전 세계 농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임. 셋째, 가축 사료용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특히 브라질에선 벌목이 횡행하고 있음. 넷째, 과도한 양우 수로 인해 농축사료를 수입해야 하는 나라들 (독일이 대표적이며 네덜란드의 양우산업도 급속히 팽창하고 있음)은 사료 생산을 위한 땅뿐만 아니라 가축의 배설물을 처리할 땅 또한 부족한 실정. 마지막으롤 유엔 식량 농업기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축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체 온실가스이의 25%를 차지하며 이는 교통으로 발생하는 양보다 많음. 61년부터 07년 사이에 인류 1인당 육류 소비량은 두배로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동안 인구가 두배이상 증가한 것을 고려하면 육류소비량은 네배 이상 증가한 셈.
- 이제껏 폭염보다는 한파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더 많다는 점도 생각해볼 문제임. 더위로 인한 사망률은 열대 지역의 기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가뭄과 풍토병, 일사병을 동반할 경우 더 높아질 수도 있음. 하지만 14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유럽을 보면 한파의 영향이 얼마나 지속적인지 알수 있음. 이 기간동안 지구 기온은 평균 섭씨 1~1.5도 내려갔는데 학자들은 이를 소빙하기라 부름. 이때에는 빙하의 면적이 증가했고 식물 새장기도 6주 짧아졌음. 그 결과는 흉장, 가축몰사, 기아, 전염병, 인구감소로 이어짐. 이런 배경에서는 유럽이 다시 따뜻해지기 시작한 사실에 대해 기뻐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 것임. 즉, 앞으로 다가올 온도상승도 부담없이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음.
- 전 세계를 포괄하는 세계화의 단계
(1) 탐험과 발견 :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지구가 구일 것이라 추측했고, 세계에 대한 정학한 정보도 없던 당시에 이미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세계를 양분했음. 지구가 구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콜럼버스였고 이를 증명한 것은 마젤란 이었음
(2) 경제력을 통한 지배 : 이 역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처음 시도했고,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그 뒤를 이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미 1848년에 세계 시장이 형성되었음. 부르주아 계급은 형성된지 1백년도 안 되어 과거 모든 시대를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음. 그들은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야만적인 나라들을 문명권으롤 끌어들인다는 것
(3) 개발원조 : 잘사는 몇몇 국가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품으려는 시도로서 다면적이고 문제점이 있으며, 간단히 다루기에는 매우 복잡한 사안임
(4) 군사력을 통한 지배 :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고, 세계사에서 새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음.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02년 발표한 국가안보 전략의 목적이 바로 군사력을 통한 세계 지배임. 미국은 그들이 적합하다고 간주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입지를 지킬 권리가 있다고 보고 있음. 여기에는 예방전쟁도 포함됨
(5) 경제적, 문화적 상호교류 : 이는 최근 25년간의 경향으로, 오늘날의 의미에서 세계화란 다른 어느것보다도 빠르고 전방위적이며 비교적 정부의 개입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함. 경제와 문화권 간의 상호교류는 마찬가지로 서양의 거대권력과 기타 세계 사이에서 시작되었지만 무게 중심은 변하고 있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선진국, 특히 미국의 문화적 우월성임.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때문.
- 인간은 평화를 사랑하는 존재가 아님. 인간은 늘 이웃부족과 종족을 향해 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고, 개인의 공격욕구와 집단의 공격욕구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음.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분쟁과 전쟁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음. 그러나 호모사피엔스에겐 이런 생물학에 맞서는 문화적 진화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생물학적 진보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점은 그 과정이 수천년이 아니라 수백년, 아니 수십년 만에 이루어진다는 것. 인류는 하늘을 날기 위해 새들이나 곤충들처럼 수백만년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음. 오토릴리엔탈의 첫 활공 이후 달 착륙까지 불과 78년밖에 걸리지 않았음. 1912년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던 상류계측 남성들이 군소리 없이 가난한 여성들을 보트에 태워 보낸 것은 그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자신의 권력본능과 우월본눙을 억누를 수 있었기 때문. 오늘날에는 결투가 더 이상 19세기처럼 어느 한쪽의 죽음으롤 끝나지 않고, 테니스 경기에서처럼 승자를 짓밞아 버리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패자가 승자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만 보더라도 문화가 자연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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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상업의 세계사

역사 2014. 10. 21. 20:21

 


상업의 세계사

저자
고바야시 다카시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4-01-16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보통 고대 문명이라 하면 누구나 농경 사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가격비교

- 막스베버는 오리엔트 고대 제국의 문화를 관개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하안문화라고 명명하고 오리엔트형 관료제 부역 국가를 모델로 아시아 역사를 조감했음. 또한 마르크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기초로 아시아 사회 정체론을 전개. 물론 막스 베저는 오리엔트 교역활동도 함께 고려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 그러나 오리엔트와 이슬람, 인도, 중국 등 여러 아시아 문명은 단순히 토지와 노동을 기초로 하는 생산양식론과 공동체론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여 각각의 개성적 풍토와 교역권을 가진 세계-경제를 성립시켰음.
- 아시아 여러문명은 바로 세계-경제로서 제각기 일정한 교역권을 지니고 성립했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문명을 세계체제의 구조로 파악한 브로델이 그것을 자본주의 세계 경제 이전의 세계-경제로 파악했다는 것. 브로델이 말하는 세계-경제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된 세계경제가 아님. 그것은 자본주의가 확산하기 이전 세계 제국 주변부에 성립한 일정한 교역권을 말함. 그는 세계-경제가 세계의 한 단면에 불과하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대체로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일정한 지역간의 연락 및 교환을 통해 유기적 통일을 이룩한 교역권이라고 설명했음. 또한 그 특징은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어 왕래하는 점이라고 지적. 실제로 그러한 의미의 세계-경제라면 아시아 지역에서 상당히 광범하게 발전했음.
- 오리엔트 지역이 문명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은 전적으로 빗물에 의존한 천수농경에서 관개농경으로의 전환이었음. 오리엔트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류와 지류 유역에서 천수농경에 의한 농지개발을 진행하여 기원전 4000년에서 3400년경에는 본격적인 관개농경을 전개. 관개 농경은 일시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지역으로 퍼져나감. 이와 함께 관개농경에 필요한 집단노동이 조직됐으며, 상당한 잉여 생산물의 집적과 더불어 농경촌락을 통합하는 신전지배가 등장. 더욱이 기원전 3400년에서 3100년 사이에는 이곳에 스텝지대 유목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도시가 등장했고 기원전 3100년에서 2800년 사이에는 많은 도시국가가 성립. 이때 우르크, 우르, 라가슈, 운마 등 수메르계의 여러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2400년경에는 셈계 유목민인 아카드인이 수메르 국가를 정복하여 아카드 시대가 시작됨
- 메소포타미아의 여러제국과 이집트 제국은 관개농경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직하기 위한 국가였고, 토지는 모두 국가소유로 제도화됨. 이와 달리 그리스 제국은 천수농경에 의한 소농민 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됐으며 토지는 공동체 소유와 병행하여 가족집단 소유로 귀속되어 있었음. 따라서 토지의 협소함을 보충하기 위해 해상교역이 발달했으며 그곳에 연해 문화의 연해형 제국이 성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
- 그리스인들이 이집트를 편입시켜 확대한 교역망이 시장과 교역의 결합을 기초로 하여 시장교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 이것은 드물게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임. 이론적으롤 말하면 시장은 개인적 수요와 공급에 의존하지만 교역은 일정한 제도적 테두리 안에서 공동체 간에 이루어짐. 따라서 시장의 발전은 그대로 교역과 결합되지 못하고, 교역의 발전 역시 쉽게 그대로 시장과 결합되지 않음. 그런데도 그리스에서는 이 두가지가 결합하여 시장 교역의 길이 열렸고, 그리스식 세계-경제가 성립되었음.
-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시장과 교역이 결합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시장은 물론 아테네의 아고라 시장임. 아고라에서는 시민이 시장교환의 담당자로 자유롭게 매매활동을 했음. 아고라 시장이 성립한 것은 그리스가 사적 소유자로서의 시민을 구성요소로 한 폴리스 국가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며, 시민은 개인 소유 토지에서 생산한 재화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음. 그러나 곡물만은 별개였음. 폴리스 국가의 천수농업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어 곡물수입은 국가가 엄붕하게 관리하고 있었음. 따라서 폴리스 국가의 곡물거래는 아고라를 벗어나 교역항에서 이루어졌음. 국내 생산물의 자유매매가 가능한 시장과 국가의 관리가 필요한 교역항은 제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님. 폴리스 국가의 경제는 가정에서의 재분배, 국가수준의 재분재, 시장교환이라는 세가지 수준의 균형 위에 성립했으며, 곡물수입은 바로 국가수준의 재분배에 해당했기 때문
- 물론 아테네는 곡물 뿐 아니라 목재, 철, 청동, 마, 납 등에 대해서도 통제교역을 실시하며 강력한 독접권을 보호하고 유지했음. 그 점에서 아테네의 통제교역은 다른 곳과 비교하여 시장교환의 요소가 많기는 했지만 교역과 시장은 역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음. 그럼에도 그리스는 곡물생산 기지인 이집트를 지배하여 시장과 교역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던 것임. 폴라니의 설명에 의하면 그러한 결합을 완성한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이었음. 그리스의 이집트 총독인 클레오메네스가 곡물생산 기지인 이집트의 국내공급을 국가 통제하에 재편성하고 곡물수출을 정부가 독점하도록 한 것. 이로써 국제적 가격형성 시장이 출현했으며, 이 가격형성 시장의 참가자는 역할에 따라 네종류로 나뉨. 첫번째 그룹은 이집트에 머물면서 곡물수출의 실제 임무를 맡음. 두번째 그룹은 곡물을 배에 싣고 항해함. 세번째 그룹은 로도스 섬에 주재하며 그곳을 거래의 중심지로 삼음. 네번째 그룹은 그리스 각지의 항구에 주재하며 위탁재화를 취급하면서 로도스 주재원에게 가격의 움직임을 알림.
- 이리하여 곡물은 배로 이집트에서 로도스로 운반되었고, 로도스에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서 최신 가격정보가 끊임없이 들어왔음. 그 정보에 따라 곡물을 실은 배는 가격이 가장 높은 도시를 향해 출발하거나 로도스에서 곡물을 매각. 이런 조건에서 로도스의 가격은 그리스 여러 도시의 평균가격을 반영하는 경향을 띰. 수많은 그리스 도시간의 곡물가격은 비로소 일관된 기초 위에 놓였고, 공급은 가격을 따라 이동하게 됨. 드디어 공급이 정치적 영향력이라든가 군사력에 의해 멋대로 움직이지 않고 현실의 필요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됨. 그리스 세계-경제는 바로 이렇게 성림. 그것은 아테네 아고라의 직접적 발전이 아니라 국가적 독점 무역을 매개로 한 교역과 시장의 결합이자, 아고라 시장의 비약이었음.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발전은 오리엔트 여러 제국에는 없었던 아테네 아고라의 시장 교환이 직접적 원인인 것처럼 알려져 있음. 그러나 사실 그리스 세계-경제는 독점무역에 기초한 국가의 관리, 즉 아고라의 죽음의 비약에 의해 달성된 것임.
- 아랍 사회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븐 할둔은 이슬람 사회를 바두라는 사막 오아시스 농경 목축 사회와 하둘이라는 상업도시 사회의 두 유형으로 나눔. 그리고 농경 목축민은 소박하고 선량하면서도 용감한 기질을 가지고 생활하며 도시민보다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농민과 도시주민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한 것은 유목민의 강인한 아사비야, 곧 연대의식이었다고 지적.
- 아시아 여러 제국의 주변부에 존재했던 교역활동을 세계-경제로 파악한 브로델도 이 이슬람 도시의 시장을 국제적 만남의 장소로 표현. 확실히 이슬람 도시는 기본적으로 대교류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혈연, 지연, 부족, 종교, 문화의 차이를 넘어 개방된 융합의 장소가 됨. 이슬람 도시는 모스크와 시장이라는 종교적, 경제적 기능을 중심으로 그물로 둘러친 것처럼 넓은 교역망을 만들었음. 바그다드라는 거대한 문화경제적 중심을 중추로 한 교역망 위에는 여러 중계도시가 늘어서서, 인도양 연안지역, 북방 유라시아, 비잔틴 제국, 지중해 연안부, 사하라 남쪽 기슭의 나이저 강 유역까지도 교역망의 말단이 이어졌음. 그것은 바로 이슬람의 문화경제적 교류권의 성립이고, 하나의 이슬람 세계-경제의 형성이었음.
- 중국 상업혁명의 기축이 된 것은 몽골제국이 중국 전지역에 확립한 상업도시형 지배체제였음. 상업도시형 지배는 유목민 우위의 농목 복합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로 제일 먼저 이슬람 세계에서 형성됐음. 원 왕조는 그것을 행성제도로써 구체적으로 제도화했음. 원 왕조는 중국 전토를 지배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적 중앙 집권적 관료제도를 채용했음. 지방 행정조직에는 황제직속의 행중서성을 중국 재래의 노, 주, 현이라는 지방 행정 조직위에 설치했고 그것이 지방 최고 통치기관이 됨. 행성을 설치한 장소는 대륙의 실크로드와 남래 교역료가 결합하여 중국 경제의 대동맥이 된 허난, 산시, 간쑤, 쓰촨, 후난, 장시, 장쑤, 저장, 윈난 등지였음. 설치된 장소만 보아도 그 체제가 몽골의 길을 따라 상업도시를 거점으로 주변의 농촌을 지배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매우 명료함. 사실 몽골제국의 국가 재정 정책은 전통적인 중농억상책이 아니라 극히 중상주의적이었음. 중앙 정부 수입의 80%이상이 소금전매에 따른 이윤과 15%가 넘게 부과되는 상업세였음. 게다가 상인들이 각지에 납부하던 통관세가 철폐됐고, 상품에 붙는 세금으로는 최종 매각지에서 매상세를 일률적으로 3%만 내면 됐음. 기타 토지에서 세금 수입은 중앙에 상납하지 않아도 좋은 지방세가 됨.
-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진전된 서유럽의 상업혁명을 연구한 브로델이 지적한 것처럼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서유럽 지역은 아직 이슬람 세계-경제의 주변부에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는 이슬람권의 여러 도시와 콘스탄티노플 등지에서 금화와 은화를 입수하여 호화로운 견직물을 구입하고 이것을 서쪽으로 전매하고 있었음. 그 이탈리아가 급속히 서유럽 세계 경제의 중추로 성장. 여기서 말하는 서유럽의 세계 경제란 상업 혁명의 전개로 도시국가 재분배 경제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시장 교역이 지배적 경제활동이 되면서 서유럽 지역을 하나로 묶은 국제적 상업망을 형성한 상태를 말함. 아시아 여러 제국을 중추로 한 세계-경제와 달리 서유럽에서는 여러 도시국가의 지배를 뛰어넘은 시장 교역망이 형성됨. 물론 그것이 지리적으로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다는 의미는 아님. 지배적 경제활동이 된 시장 교환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확립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것은 소규모 세계경제라고 말해야 할 것임
- 그 선두에 선 것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이며,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이탈리아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은 4차 십자군 원정이었음. 십자군의 출항 기지가 된 이탈리아의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같은 도시에서는 수송선이 대형화하여 거선이 되었으며 몇개의 기독교 국가가 중동이 성지에 뿌리를 내림. ㅇ에 중동으로 향하는 돌파구가 열려, 후추, 향신료, 비단, 마약 등 매력적 상품에 대응할 수 있는 교역의 길이 열림. 베네치아는 그때까지 비잔틴 제국에 기생하고 있었지만 십자군 원정 이후 이탈리아 여러 도시가 비잔틴의 재산으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며 또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이익을 올리기도 했음. 동지중해 연안에서 서아시아 내륙부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몽골의 길을 통해 서유럽은 확실히 좀더 세계경제화됨. 피렌체는 1250년에, 제노바는 더 빠른 시기에, 베네치아는 1284년에 금화를 주조. 그것은 이슬람권 디나르화에 대한 이탈리아의 경제적 해방을 상징하는 획기적 사건이었음.
-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상업혁명은 일찍 성숙했지만, 상품 화폐 경제화의 파도속에서 농촌 사회가 붕괴했고 도시에 모여든 수공업자와 유목민은 빈민화됨. 그뿐 아니라 거기에 대응한 국가이 통제교역이 강해지면서 이슬람의 상업 도시형 지배가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 다양한 민족을 통합한 이슬람의 질서는 쇠퇴. 국가권력과 유착한 아얀 계급 지배구조의 확립은 그 귀결점이었음. 그들은 통제교역의 중개자로 활동했지만 이미 이슬람 세계에서 생산과 판매의 조직자는 아니었으며 지방에 국한된 지역 경제권의 담당자가 되어 이슬람 세계-경제를 위축시켰던 것. 이슬람의 바다는 서유럽의 바다로 변했고 이후 이슬람 세계는 세계에서 지역으로 분열되어 서아시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내륙부에 한정되었음.
- 북인도보다 훨씬 상품 화폐 경제를 발전시키고 남인도에 상당히 넓은 면포 교역시장을 만든 힌두 상인이 무엇때문에 서유럽 여러 나라의 교역상에게 뒤처졌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카스트 분업의 발전을 기반으로 인도 각지에서 향주라는 지방 유력자층이 형성되었고, 그들이 도시와 농촌의 시장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됨. 브라만의 지배를 대신한 향주계층의 대두는 분명이 인도에서 발달한 상업혁명의 귀결이었음. 그리고 그들은 이슬람 세계의 아얀이나 중국의 향신과 거의 동일하게 국내생산과 판매의 조직자였지만 벵골만을 무대로 발전한 인도 세계-경제의 담당자는 될 수 없었음.
- 아시아를 무대로 한 상업혁명이 일본을 제외하고는 내향화한 반면 서유럽의 상업혁명은 봉건사회의 벽을 뚫고 발전하여 서유럽의 세계경제를 탄생시킴. 그러나 아시아의 세계-경제와 서유럽의 세계-경제는 왜 공존할 수 없었는가? 대략 세계 체제로 서유럽의 발전을 분석해보면, 서유럽식 세계경제를 형성하려면 국경을 뛰어넘어 이윤의 축적을 바라는 상인과 기업가가 끊임없이 중심-반주변-주변이라는 3층구조를 가진 국제분업 체계를 편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본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음. 또한 아시아의 세계-경제가 형성한 중심-주변 관계와 달리 서유럽식 세계경제에는 그 탄생부터 중추지역의 경제발전이 끊임없이 주변지역을 저개발의 개발로 몰아넣는 구조가 존재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할 수 있을 것임.
-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대서양, 인도양 무역은 서유럽 세계경제를 확대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면서도 두 나라의 공업화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함.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은 양상이 달랐음.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세계경제의 주변부로 편입시키고 네덜란드를 주도적 상업국가로 끌어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함. 네덜란드는 16세기 말에 이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농산물 생산에 특화된 농업부문을 유지했고 공업부문에서는 당시 양대 산업이었던 섬유산업과 조선업에서 우위를 지킴. 그리고 암스테르담 은행으로 연결된 상업망 덕분에 세계의 창고가 되었으며, 또한 세계은행의 지위를 획득. 중심부가 된 네덜란드는 1602년 설립한 동인도 회사의 활동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및 아시아 지역 일부를 서유럽 세계경제의 주변부로 편입시킴.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동인도 회사가 전개한 무역정책이 그때까지 지역간 교역에 의존한 중계 교역에 머무르지 않고 정복지의 현지인을 지배하여 상품작물의 재배를 관리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목표로 했다는 점. 네덜란드는 1619년 바타비아(지금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한 것을 시작으로 1638년에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입항했으며 말라카 해협을 식민지화하는 것과 동시에 1663년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동쪽 끝 무스카트로 진출. 또한 베트남 남부에서 싱가포르까지 침략하여 식민지 경영에 착수. 네덜란드가 취급한 중요한 동양 물산은 우선 후추와 향료였으며, 그것은 1648년부터 1650년까지 전체 상품 매입액의 66%, 1698년부터 1650년 사이에는 23%에 이르렀음.
- 전후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은 사회주의의 도전때문도 아니고 주변부 지역에서 일어난 자원민족주의의 저항 때문도 아니었음. 전후 자본주의의 위기는 오히려 그 발전을 지탱하는 포드주의적 축적체제가 성숙하면서 나타났음. 국경을 초월한 다국적 기업의 발전과 함께 풍요로운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생산시스템이 국내에서 환경오염의 벽에 부딪히고, 대외적으로도 자원고갈을 초래하여 원료가격을 급격히 앙등시킨 것. 따라서 당연히 생산비용은 상승하고 기업이윤은 줄어들었으며, 이와 동시에 케인스의 유효수요 정책도 한계를 드러냈음. 국경을 초월한 다국적 기업의 발전을 가능케 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국가의 재정정책으로는 충분히 규제할 수 없게 된 것. 전후 풍요로운 사회를 유지해 온 복지국가의 국민주의적 경제 틀은 녹아 없어지고 일국 단위의 유효수요 정책으로는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짐. 그것은 곧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한계였음. 71년 닉슨 쇼크가 상징하는 것처럼 미국의 달러를 기축으로 하는 전후 국제 통화체제는 붕괴됐고,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또다시 재편을 강요받게 됨
- 대륙 아시아에서 해양 아시아로 크게 전개되었던 아시아 여러 민족은 서유럽에서 탄생한 세계경제의 확대과정에서 해양 아시아의 개척지를 상실했고, 아시아의 발전은 내륙부로 깊에 매몰됨. 전쟁과 혁명의 태풍이 세계를 뒤덮고 2차대전을 계기로 아시아 여러 민족이 독립한 후에도 미소 냉전 체제 아래 이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음. 그러나 89년 동유럽 혁명을 계기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미소 냉전체제가 종언을 고함에 따라 이런 세계 상황은 일변함. 이렇게 폐쇄된 상황을 일변시킨 것은 정보혁명을 매개로 한 세계경제의 새로운 전개였음. 전후 자본주의의 번영을 지탱한 거대한 과학기술의 개발이 정체한 대신 초소형 전자기술이 발달. 이 기술을 습득한 다국적 기업은 국경과 체제를 뛰어넘어 활동했으며 세계적 규모의 상호 의존이 전에 없이 깊어졌음. 그 결과 아시아 여러 민족을 내륙부에 가두어 놓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가 크게 변했음. 이로써 전후 세계를 이끌어 온 미국이 쇠퇴하고 일본을 비롯한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이 급속히 발전함과 동시에 소렴을 중추로 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고 중국도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길을 걷기 시작.
- 미국을 중추로 한 전후 자본주의는 이를 전후로 정보혁명을 매개로 하는 포스트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로 크게 변화. 거기서 확립된 새로운 생산 시스템은 중심부에서는 정보혁명에 의한 초소형 전자기술과 고임금 노동을 결합한 생산라인을 유지하면서도 주변부에는 이식된 초소형 전자기술과 저임금 노동을 결합한 생산라인을 만들어냄. 이것을 하나의 직접적 생산조직으로 만든 것이 바로 국제 분업체제임. 그 안에서 국경과 체제를 초월한 다국적 기업이 활발하게 활동했음. 이로써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재편되고 그 과정에서 미소냉전 체제가 붕괴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새로운 지역 경제권을 형성. 이 포스트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핵이 된 초소형 전자기술은 전후 자본주의를 유지한 지식집약적, 자본집약적 거대기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설비투자가 적고 다양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효율적인 다품종 소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었음. 따라서 전후에 독립한 주변부 국가들은 이것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고, 거기서 저임금 노동과 결합한 수출가공 공업이 발전하여 새로운 국제분업 시스템이 성립. 그것은 이제까지 중심구 국가가 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주변부 국가가 원료 및 자원을 공급하는 식으로 이루어진 수직적 분업이 아니었음. 오히려 이식된 첨단 기술과 저임금 노동에 의한 수출 가공공업을 기축으로 수평적 분업을 발전시켜 주변부 국가의 자본축적을 가능케 한 것이었음. 이 초소형 전자기술 개발과 중심국가와 주변국가의 결합으로 중층화된 국제분업에 재빨리 대응한 나라가 80년대 후반 일본과 서독이었음. 그 결과 미일 경제 주도권의 교대와 확대된 유럽 공동체의 발전이 가능해짐. 그뿐 아니라 일본의 첨단기술산업과 주변부의 저임금 노동을 결합한 수출가공공업의 발전은 아시아 주변부의 저임금 노동을 결합한 수출가공공업의 발전은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킴. 이로써 유럽 공동체를 중추로 한 유럽연합과 미국을 중추로 한 북미자유무역권과 함께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지 경제권이 형성되었음. 그것은 중국을 포함하여 구성된 화남 경제권을 중추로 하지만 넓게는 동해에서 중국, 한반도의 남해, 게다가 동남아 해역에 걸쳐 연쇄적으로 형성된 몇 개의 국지 경제권으로 구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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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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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

저자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출판사
도서출판북북서 | 2008-11-14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슬람의 종교적 관념이 빚어낸 커피와 커피문화는 서아시아 지방에...
가격비교

- 네덜란드 상인이 예전처럼 커피를 아라비아 상인에게 최대한 싸게 산 뒤에 다른 상인들과 경쟁하면서 가능한 비싸게 팔던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커피를 생산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커피는 유럽의 식민지주의 역사를 검게 물들이는 상품이 되었고, 문자 그대로 지구상의 자연과 인간을 개조하는 근대의 대표적 상품의 길을 걷기 시작.
- 17세기 전형적 자본주의 국가 네덜란드의 수단은 철저하고 또 합리적이었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바의 지배세력을 폭력으로 제압하지 않았음. 아니 오히려 그들과 결탁하는 형태로 그들에게서 커피재배에 필요한 모든 권리를 현금으로 사들임. 자바의 지배세력은 어느정도의 독립적 권력을 인정받았고, 그 권력을 이용하여 자바주민들에게 네덜란드를 위한 커피재배를 강요.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는 현지의 지배층에게도 큰 이익을 보장해주는 방식이었음. 자바의 농민은 커피 플랜테이션에서 무보수로 일하던가, 아니면 자신의 농지 일부를 커피를 재배하는데 제공할 것을 강요당함.
- 커피는 결코 자연적 음료가 아님. 그냥 두어도 개나 고양이가 마시는 그런 음료가 아님. 창고에 쌓아둔 커피콩은 뒤도 거들떠 보지 않음.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수피들의 특수한 인간적, 정신적 욕구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 아이들이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처음부터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음. 그런 커피가 이렇게 대량으로 소비되려면, 상업자본은 인간에게 커피에 대한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내적 욕구를 만들어내야 했음. 상업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장치임. 커피라는 신종 음료의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 재력을 갖춘 상인들은 호화로운 커피의 집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방법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내적 자연에 가공을 덧붙여 커피에 대한 욕구를 정착시켜 나갔음. 그렇게 해서 일단 사람들 사이에 내적 욕구로 정착된 상품이 이번에는 외적 자연에 손을 대기 시작. 새롭게 생겨난 인간의 욕구는 커져가지만 외적 자연은 저절로 대응해주지 않음. 따라서 외적자연이 원생림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작물을 위한 밭이었는지는 상관없이, 커피생산을 위해 재편성되어야 했음. 커피문명의 발전은 선진자본주의 제국에서 조달된 무슈자본과 ,서인도 제도, 중남미, 아프리카 등의 마담 대지가 결합하여 인간과 자연의 개조를 추진하게 됨
- 상업자본은 국내 모직물산업의 육성을 모색해야 함. 하지만 상업자본가에게는 가격격차가 생명임. 제품가격을 최저로 억제해야 함. 반대로 이것은 산업자본가에게는 불만사항임. 17세기의 영국은 산업자본이 상업자본에 맞서 투쟁을 벌이고 마침내 우위에 서게 되는 시대였음. 산업자본이 왕권과 깊은 관련을 맺은 거대 독점 상업자본을 상대로 벌인 투쟁의 특수성은, 커피하우스의 특수성을 잘 설명해줌. 왕권과 거대상업자본이 기존의 공적세계를 점유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업자본가는 민간인 이었으며, 공권력 행사를 허락받지 못한 인간, 그런 의미에서는 개인이었음. 결국은 아직도 제로의 제3계급이었음. 그런 그들이 왕권과 상업자본에 대해 투쟁을 전개하고 산업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공적세계와는 다른 공적 세계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음. 말하잠녀 중세저긴 공중목욕탕의 온탕에 몸을 담그고 내몰려서는, 왕이나 정부의 공권력에 대항하는 근대적 권력팩터로 동원된 것. 하지만 그들을 동원하려 해도 영국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음. 신문, 라디오, TV, 전화 아무것도 없다.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은 팸플릿과 입소문을 통해 새로운 권력팩터가 되어가고 있는, 판단하고 비판하는 대중을 어떻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일지에 달려 있었음. 바로 그때, 새로운 공적제도인 커피하우스가 생겨난 것.
- 청교도 혁명과 뒤이은 왕정복고 시대의 영국에 확립된 커피하우스라는 근대시민사회의 공공적 제도와 커피라는 상품의 이미지는, 근엄한 청교도의 이데올로기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음. 이슬람 수피즘의 정신적 비호속에 탄생한 커피는 저 독특한 깨어있는 도취감이 특징. 커피의 그러한 상품적 특성은 적어도 자본주의의 기본적 윤리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냉정하게 깨인 종교로서의 청교도주의와 어울리는 것이었음.
- 커피하우스는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구유였음. 근대시민사회의 여러 제도들이 그곳에서 준비됨. 또한 커피하우스는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근대시민사회에 맞게 개조해주는 장소이기도 했음. 커피는 사람을 깨어있게 하고, 이성적으로 만들어주고, 수다를 떨게 하는 액체로 각인됨. 진지하게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사람을 끌어모은 것은 커피라 불리는 검고 쓴 음료자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공공장소의 매력이었고, 진정한 상품은 커피가 아니라 정보임. 여하튼, 오후 6시가 되면 커피하우스는 사람들로 넘쳤음.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떨고, 대화를 나누고, 비즈니스를 마무리 짓고, 무엇보다 정치적 뉴스를 듣고, 중요한 사건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자 커피하우스로 몰려듬.
- 약 반세기에 걸쳐 런던 시민생활의 중심을 차지한 커피하우스는 어찌된 일인지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급격히 쇠락. 1714년 약 8000곳을 헤아렸던 커피하우스가 1739년에는 551곳으로 줄었음. 커피하우스가 쇠락한 원인인 여러가지로 언급되지만, 그중 하나는 커피하우스의 사회적 기능을 다했다는 것. 커피하우스가 자유롭고 데모크라틱한 분위기였다고는 해도, 긴 안목으로 보면 클럽으로 가는 가교역할을 한 것에 불과. 공개지향적인 커피하우스가 각각 특수한 고정고객층을 확보하면서 폐쇄적인 클럽으로 변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 노예무역이 프랑스 혁명의 혁명적 이념을 지지하는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했다는 것은 역사의 짓궂은 아이러니이기도 함. 하지만 노예무역을 축젇된 낭트와 보르도의 풍요는,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자유를 추구하고 해방을 부르짖는 자부심을 갖게 했으며, 제3계급에게는 아직은 제로다 하고 외칠 수 있는 자기주장의 터전을 마련해주었음.
- 상품 페티시즘과 자연과 인간사이의 착취와는 같은 메달의 양면과 같음. 지구를 한개의 메달로 치면, 커피는 화려한 페티시즘과 음산한 착취를 반복하면서 확산된 근대의 전형적 상품임. 유럽이 커피생산지에 강요한 것은 극단적 모노컬처였음. 그런 결과로, 이들 나라는 커피수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됨. 그 예로 79년 아프리카 제국을 살펴보면 커피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우간다 98%, 부룬디 82%, 에티오피아 75%, 르완다 71%의 극단적 수치를 보임. 커피문명의 세계사적 결과는 적도 근처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른바 커피벨트를 형성하는 커피산출국과 주로 북반구에 위치한 커피소비국과는 지리적 대조를 이룸. 서로 멀리 떨어진 커피생산지와 커피소비지를 이어주기 위해 커피를 실은 배들이 세계의 바다를 오갔음. 연간수출총액 120억불, 커피는 세계 무역 전체에 원유에 뒤이어 2위를 차지. 둘다 시커먼 액체지만, 원유와 커피의 차이는 확연함. 모터리제이션이 일반화된 현대산업사회에서 석유는 없어서는 안될 원료임. 그에 반해 커피는 사치품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기호식품이란 점은 부인할 수 없음. 바로 이점이 석유 산출국들은 과거의 식민지 지배국에 대한 강력한 대항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 반해, 커피산출국은 여전히 커피소비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함. 문제는 정치적 부분에만 그치지 않음. 커피 모노컬처의 부자연스러운 생산시스템은 해당 국가의 생태계를 무너뜨렸음. 커피라는 상품생산의 역사는 행복한 아라비아 예멘 이래로 무슈자본과 마담대지의 결혼의 역사였지만, 이들이 반드시 행복한 부부는 아니었음. 레비스틀스의 슬픈열대는 한편으로는 슬픈 커피벨트의 기록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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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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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래의 역사

역사 2014. 10. 19. 13:38

 


상거래의역사

저자
한스외르크바우어 외 지음
출판사
삼진기획(도)(주)(+청운출판사) | 2003-05-0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책소개907-3 200여점의 예술 작품을 통해 인류의 경제사를 ...
가격비교

- 그리스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창조자이면 수많은 시인과 정치인을 배출. 하지만 그리스가 이룩한 놀라운 경제기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음. 그리스의 경제기적은 해상무역,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인 화폐에 기반을 둠. 다시 말해 그리스인들은 금의 무게를 달아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종전의 방법을 탈피하고 명실상부한 동전을 주조해서 사용. 화폐와 상업의 도입으로 가난한 목동무리는 부유한 민족으로 거듭났으며 복지체계도 마련됨. 그리고 이 복지체계의 기반위에서 그리스의 매력인 아름다운 정신이 꽃필 수 있었음.
- 19~20세기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에서 재화의 가격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 하지만 이런 인식은 2천년전인 기원전 2세기 살았던 중국인 학자 치엔이 이미 주장한 바 있음.
"산둥지방에서는 생선, 소금 유약, 비단, 악기가 생산되며 양쯔강 남쪽에 위치한 키앙난에서는 삼나무, 생강, 계피, 주석, 진사, 코뿔소 뿔, 바다거북 껍질, 진주와 모피가 생산된다. 북부지방에서는 말, 소, 양, 모피와 짐승의 뿔이 생산된다."
"이 물건들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산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죽은 조상의 제사를 위해서도 쓰인다. 농부들은 이 물건들을 생산하고, 도매상인들은 이것들을 시골에서 도시로 운반하고, 수공업자들은 가공하고, 소매상인들은 판매한다. 이 모든 일들이 정부나 철학자의 도움 없이 이루어진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가격의 조정이 이루어진다. 싼 물건은 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높은 물가를 낮춘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의 직업에 종사한다. 그것은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 모든 물건이 자발적으로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은 채 생산되고 필요로 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과정이 매우 자연스런 방식으로 나름대로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 1520년 푸거의 거래망은 유럽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었음. 야콥 2세 때에는,
* 지구차원으로 발전하는 세계시장을 기회로 이용. 그는 국내 섬유제품에서 출발하여 벨벳, 비단, 향, 향료, 밀랍, 꿀, 사프란(착색 향미료) 등 이국적 제품까지 거래 품목을 다양화
* 은과가 구리의 채굴을 독점
* 긴 안목을 갖고 용감한 무역정책을 채택, 거래망을 확충
- 야콥 2세때 이르러 푸거는 또 중요한 금융업자로 발전. 그들은 황제와 교황 그리고 북유럽과 폴란드 및 헝가리의 성직자를 위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신자들이 교회에 돈을 내고 그 죄를 용서받는 면죄부 거래에도 손을 댔음. 하지만 이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의 주 공격대상이 되어야 했음. 푸거는 주로 중개료 징수를 통해 금융 서비스에서 이익을 올림. 푸거는 일단 손을 댄 영역은 모조리 독점하려는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권력도 엄청나게 커짐. 1511년부터 1527년까지 푸거 기업연합은 연평균 54.5%의 이익률을 기록. 푸거사의 사업규모는 피렌체 부호 메디치 가문이 가장 번창했을 때의 다섯배에 달했음.
- 19세기는 차 무역의 위대한 시대였음. 영국이 1831년 동인도회사의 차 무역독점을 해체한 뒤 새로운 국민음료가 된 차의 무역은 중간이윤이 높았기 때문에 경쟁이 심했음. 경쟁의 효과는 특히 운송분야에서 나타났는데 쾌속화물선의 경우 중국에서 런던까지 95일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됨. 모든 회사가 햇차를 맨 먼저 시장에 내놓아 좋은 값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햇차 수확때는 마치 화물선 경주가 벌어지는 것 같았음. 1866년에는 중국에서 11척의 화물선이 동시에 출발했는데, 그중 3척이 동시에 런던에 도착하기도 했음. 오늘날에는 스리랑카에서 로테르담까지 컨테이너 선박으로 18일이 소요되지만 고급차는 특별히 항공기로 운송됨.
- 산업혁명이라 불리던 이 시기는 인류 역사상 첫번째 대량 소비시대이기도 함. 하지만 거품이 너무 커졌음. 1872년의 세계경제는 엄청난 실망과 거대한 추락 그 자체였음. 복지의 상승폭이 너무 커졌고, 물품의 세계적 수요도 너무 커졌으며, 주문의 홍수도 너무 과했고, 가격도 너무 높이 치솟았음. 상업의 세계는 끔찍한 퇴락을 겪어야 했음. 물론 이 모든 재앙은 자유경쟁의 탓으로 돌려짐. 그리하여 보호주의자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보호관세가 새로운 슬로건이 됨. 폐쇄적 시장경제와 높은 보호관세는 마침내 제국주의로 이어짐. 무역상들은 그늘속에 묻혔고 제조업자들이 권력을 쥐게됨.
- 1800년부터는 25년을 주기로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 19세기의 첫 25년은 독일의 시각에서 보자면 함부르크가 런던, 암스테르담의 뒤를 이어 유럽에서 세번째로 중요한 상업도시로 발전하는 성장기로 기록됨. 하지만 그때까지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대외무역은 벌써 그 핵심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었음. 1798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831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고 해체됨. 미국독립(1783년)으 여파로 남미의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 그리하여 무역제국주의자들의 독점적 무역장벽은 무너지게 됨. 1825년~1859년은 상거래의 두번째 혁신단계. 독일 관세연합(1834)이 창립된 것도 이때임. 관세연합으로 그때까지 독일내에 상존했던 수많은 관세장벽들이 제거됨. 영국과 프랑스의 상업조약도 같은 맥락에 있었음. 1849년 당시 맨체스터의 상인회 회장이었던 리처드 코브던이 주도로 영불 상업조약이 체결됨. 큰 흐름으로 보면 이들은 오늘날의 유로랜드로 가는 선구적 모델임. 1850년부터 1875년까지는 상조회와 소비자협동조합이 창립되던 시대. 상조회는 1844년 영국 직조공의 붉은 선구자들이 결성한 것이 첫 출발이었고, 그 뒤를 이어 1845년 저축 및 소비자 협회가 캠니츠에서 1851년 소비자협회가 취리히에서, 1852년 수공업자 협동조합이 델리취에서 그리고 생필품 분배협회가 함부르크에서 결성됨. 1854년 독일에서는 농민들을 위한 라이프아이젠 농업신용조합이 생김. 1875년부터 1900년까지는 백화점들이 주도. 1869년 프렝탕 백화점과 라파예트가 문을 열었고, 1872년 페히트, 1877년 벤칭(나중의 카우프링), 1879년에는 로온하르트 티츠와 울워스, 1881년에는 카르슈타트, 1882년에는 오스카 티츠가 문을 열었음. 1900부터 1925년의 시기는 협동조합들이 초지역적으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협력하던 시대였음. 1903년에는 666개 소비자연합이 참가한 독일 협동조합 중앙협회가 결성되었거, 1907년에는 독일 상인협동조합 동맹이 결성. 1925년부터 1950년까지는 통신판매업이 생겨난 시대. 1924년 에두쇼가 커피 통신판매를 시작했고, 1925년에는 클링겔과 바우어가 첫활동을 개시. 1926년에는 벤츠통신판매사가 출범했고, 1927년에는 구스타프 쉬케단츠 합자회사, 1929년에는 바더와 쇠프플린이 문을 열었음. 1950년부터 1975년 전후 재건시기는 셀프서비스의 도입기였음. 셀프서비스의 도입은 상점의 다량복제 그리고 지점 시스템의 기반이 됨. 1949년 함부르크의 프로덕션은 전후 최초의 기업으로 셀프서비스 상점을 열었음. 그 뒤를 이어 1952년 카이저스, 네덜란드의 하인, 1953년 텐겔만, 1957년 테르플로트와 스노에크가 도매업에서 현금판매주의 영업방식으로 대규모 할인점을 열었음. 1959년 영국과 캐나다가 합작한 최초의 슈퍼마켓 웨스턴 콘체른이 생기자 독일의 4대 백화점 기업인 카르슈타트, 카우프호프, 헤르티, 호르텐은 에클뢰 주식회사를 세움. 외국 슈퍼마켓 기업의 독일 내 성장세를 막아보려는 의도였음. 마지막으로 1975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기는 대형할인점과 대형쇼핑센터의 단계. 미국과 영국에서는 공장 아웃렛 센터도 크게 대두됨. 이런 유통형식상의 혁신과 함께 조직적 혁신, 다시 말해 국제화가 이루어짐.
- 1585년 안트베르펜의 몰락, 상업제국 푸거의 몰락, 한자동맹의 약화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관문이 됨. 게다가 스페인이 지역연합의 형성하고 1609년 평화협정을 맺자 네덜란드 상업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됨.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선박의 완벽한 제조와 설비(돛, 삭구, 무기),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해양지도와 설계도 등 중요 사업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노동자 기숙사를 건설했고, 거대한 창고와 자체 조선소까지 보유. 1664년 암스테르담에 길이 180미터, 폭 20미터에 높이가 4층인 중앙창고가 신축되기도 함. 향료. 도자기, 비단, 금과 은 등 상품의 원활한 유통, 그리고 국내외 인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선박의 운행도 시간표에 맞춰 정기적으로 이루어짐. 성공적인 상거래와 그 상거래의 미래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면밀히 계획된 조직구조와 로지스틱스가 필요했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했고 또 일관성있게 실천에 옮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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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프라토의 중세상인

역사 2014. 10. 19. 13:35

 


프라토의 중세 상인

저자
이리스 오리고 지음
출판사
앨피 | 2009-09-14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 책을 읽고 오늘날 프라토 거리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가격비교

- 피렌체에서처럼 프라토에서도 모직물 길드의 성립 초기에는 많은 장인들이 대개 독립적이었음. 특히, 직조공, 보풀 세우는 장인, 방적공과 염색공이 그러했음. 또한 원모를 구입해서 양보 상인에게 판매하며 상인과 장인 사이에서 중개인 역할을 한 몇몇 소규모 사업가, 즉 양모 판매상이 있었음. 이런 상인들에게 양모를 구입한다음 실로 만들어서 다시 이 상인들에게 되팔았던 독립된 실 거래상도 있었음. 그러나 프란체스코 시절에 이런 소규모 분야들이 모두 '아르테 델라 라나', 곧 모직물 길드에 흡수됨. 이제 모직물 직종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경향으로 운영됨. 모직물 상인은 다양한 종류의 장인들을 고용한 대규목 기업가가 되었음. 가장 가난하고 의존적인 이들은 양모를 세탁하는 장인과 보풀을 세우는 장인이었음. 그들은 그들이 세탁실과 작업장에서 신던 나막신을 뜻하는 촘피라는 이름으로 부릶. 그들 바로 위에 있었던 방적공, 날실 제조공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독립성을 누림. 그들 대다수는 경제적, 도덕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톳대와 날실대, 직조기를 가지고 작업했음. 맨처름 독립적인 길드를 구성했던 염색공도 점차 모직물 길드에 흡수되어 모직물 길드의 규칙을 준수해야 했음. 자신들의 작업장과 작업도구를 갖고 있던, 마지막 공정을 담당하는 장인들(축융, 가위질, 수선, 포장) 만이 부분적이지만 계속 독립을 유지했음
- 그러나 최종적으로 길드 법령을 이용해 직물생산을 통제하고, 결과적으로 직물생산에 종사하는 모든 이의 생활을 통제했던 사람은 자본주의적인 모직물 상인이었음. 이런 통제가 얼마나 세세하고 꼼꼼했는지는 길드의 법령이 보여줌. 특히 축융하는 장인과 포장하는 장인은 직물을 인수하기도 전에 담보 명목으로 보증금을 내야했고, 독립적인 성향의 염색공들은 수많은 특별 예방책들로 묶였음. 그들은 길드 대표들에게 신의와 복종을 맹세했고, 자신들에게 맡겨진 모든 직물과 실을 작업해서 돌려주어야 했으며, 길드 소유가 아닌 것은 어떤 직물도 염색해서는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염료를 사용할지와 대청(염색재료)이나 검은색으로 염색할 직물의 종류까지 정확하게 지시받음
- 실제로 직물거래사업의 가장 큰 약점은, 특히 작은 상사들의 경우 초기 자본지출과 수익의 실현 사이에 필연적으로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는 것.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양모를 구매해서 완제품을 최종판매하기가지 그 거래를 완성하는 데 적어도 3년반이 걸렸음. 첫단계(마요르카에서 프라토 작업장까지 양모를 운송하는)에 14개월이 소요. 1394년 피렌체에 있는 프란체스코 상사는 팔마 디 마요르카에 있는 분점에 주문장을 보냈음. 분점에서는 양털을 깎는 이듬해 5월 대리인을 미놀르카로 파견하여 미노르카산 양모와 양가죽 29자루를 구매하고, 에스파냐 선박을 전세냄. 선박은 폭풍우 때문에 7월말에야 미노르카에 도착. 그러고 나서 카탈루나의 페니스콜라 항구로 출항했고, 카탈루냐 해안을 따라 바르셀로나까지 갔음. 여기서부터 공해를 가로질러 피사로 갔음. 당시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던 바르셀로나까지는 다른 두 선박의 호위를 받음.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 피사항 까지는 단독으로 항해했기 때문에 선박의 안전을 위해 열두명의 궁수를 탑승시킴. 바르셀로나에서 피사항까지는 7주가 걸렸음. 양가죽은 피사항에서 나귀에 실어 육로로 피사까지 운송했고, 양모는 바다와 강을 이용해서 운반했음. 피사에서 양모는 39자루로 다시 포장되었고, 그중 21자루는 피렌체에 있는 고객에게, 18자루는 프라토에 있는 프란체스코의 창고로 보내짐. 그 자루는 1396년 1월 14일 프라토에 도착했음.
- 양모를 운송하는 데만 6개월이 걸린 것이다. 다음 단계는 양모를 직물로 바꾸는 것. 양모를 두드리고, 선별하여 기름을 제거하고 씻고, 빗질하고 보풀을 세워 실 감는 막대에 얹고 실을 잣는 일이 여기에 속했음. (이 작업은 자신의 농가에서 일하는 농부 96명의 아낙들이 담당) 그 다음 실을 재서 나누고 직물을 짠 뒤 피륙의 마디를 없애고 (여전히 축축한 상태에서) 보풀을 베어 내고 펴서 말린 뒤 보풀을 세우고 다시 한번 보풀을 제거하는 작업이 이어졌음. (붉은 색으로 염색할 경우) 이 직물은 염색장인들에게 인계됨. 그런뒤 다시 보풀을 베어 마지막에 눌러서 접었음. (각 과정은 전문화된 장인이 담당) 7월 말, 길이가 35야드쯤 되는 직물 여섯필이 준비됨. 판매용 직물은 마요르카를 거쳐 에스파냐나 북서아프리카 시장을도 다시 보내고자 두자루로 포장됨. 하지만 당시는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들이 모두 피렌체와의 무역을 중단한 시기였음. 그래서 두자루는 7월14일 노새에 실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볼로냐와 페라라를 경유에 베네치아로 보냈음. 그곳에서 베네치아 선박에 실어 9월 1일 최종목적지인 팔마 디 마요르카에 도착. 이 여행에는 단 7주가 걸림. 그 다음에 완제품 판매라는 마지막 단계가 시작됨. 예외적으로 심각했던 역병(1348년 대역병때가 아니라 그 뒤에 발생한 흑사병) 이후 시장은 침체되었고, 직물의 색깔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 같음. 프란체스코 상사는 모든 직물을 발렌시아로 보냈고, 그곳에서 처분하지 못한 직물의 일부를 나중에 북서아프리카로 보냈음. 이 가운데 일부는 다시 팔마로 돌아왔음. 양모를 주문하고 나서 3년반이 지난 1398년 봄에야 마침내 직물이 모두 팔렸음.
-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프란체스코와 그 동업자들이 얼마나 많은 수익을 얻었는지 알아보자. 모든 비용(원료구입, 포장, 수송, 세금, 보험, 세금과 관세, 제작과 판매)을 공제하고 남은 이윤은 투자금의 8.92%에 불과했음.
- 1368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가 한 말이라고 전해지는 예언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음. 이 예언에 따르면 "땅속의 벌레들이 머지 않아 사자, 표범, 늑대들을 잔인하게 삼켜 버리고 지빠귀와 작은 닭이 탐욕스러운 독수리를 먹어치울 것이다. 동시에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민중들이 독재자와 거짓 배반자들을 파괴할 것이다. ... 그때 대기근과 역병이 일어나 나쁜 사람들은 죽고, 교회는 세속재산을 모두 빼앗길 것이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속삭이던 예언은 점차 더 크게 이야기되고 널리 퍼져나갔음. 이는 이전 두세기 동안의 경제구조를 지탱했던 사고체계가 점진적으로 붕괴되고 있음을 의미. 권위, 특히 길드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 존경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길드의 법령들은 그것들이 항상 확언하는 것처럼 신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음. 이런 믿음은 널리 받아들여짐. 심지어 1333년에는 모직물 길드의 대표자들이 피렌체와 피에솔레의 주교들에게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가난한 방적공들에게 파문이라는 위협을 행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정도임
- 그는 매일 나쁜 소식을 예상하며 전쟁, 흑사병, 기근, 봉기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음. 어떤 정부가 안정되어 있다는 말도, 어떤 사람이 정직하다는 말도 믿지 않음. 1397년 루카 델 세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당신은 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만큼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장사를 해보면 인간이 위험한 존재이며 인간과 거래하는 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썼음. 그가 지나치게 많은 자금을 한 사업에 투입하지 않고, 사업동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위임하지 않으며, 자신의 부를 되도록 많은 부문에 분산시키고, 손실이 나면 즉시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여 한 분야에서 잃은 것을 다른 분야에서 만회한 것은 바로 이런 두려움 때문이었음. 그가 부자가 된 것도 이런한 주의, 즉 끊임없는 경계심 덕분이었음.
- 상인으로서 프란체스코의 두드러진 점은 활동이 다양했다는 점. 아비뇽에서 무기거래상으로 출발한 그는 그 다음에 포목상, 프라토에 가서는 직물제작업자가 되었고, 피렌체에서 다시 상점 주인이 됨. 이후 그는 수출입 무역으로 성공했고, 다양한 상사들의 핵심 동업자가 됨. 이를 통해 양모, 직물, 베일, 곡물, 금속, 가죽, 향신료, 그림과 보석 등을 취급. 1404년에는 직물의 마무리 과정을 담당하는 아르테 디 칼리말라 길드에도 가입. 짧은 기간이었지만 프라토시의 곡물과 포도주 관세징수를 맡기도 함. 그는 보험업에도 손댔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은행을 설립. 이처럼 다양한 사업형태는 프란체스코 시대의 전형적 특징이었음. 이 시대에는 국제상인과 소규모 상인간의 차이가 도매냐 소매냐, 즉 상품거래량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유형의 사고방식에 달려 있었음. 지역상인은 삶의 방식에서나 진취성, 인색함의 측면에서 여전히 장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음. 즉, 지역상인은 익숙한 고객들과 거래하면서 자신이 속한 길드의 규칙을 엄격히 지키며 큰 모험을 하지 않고 작은 이윤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음. 반면 알베르티 상사처럼 대형상사의 핵심동업자이든 아니면 프란체스코 상사처럼 작은 상사의 핵심동업자이든 상관없이. 국제상인은 조상인 여행상인의 진취적 정신과 과감함을 어느정도 갖고 있었음. 그는 큰 모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위험을 가능한 한 넓은 영역에 분산시켜 부담을 줄였음. 국제상인은 외국어와 외국생활에 익숙했고, 해외시장의 요구에 잘 적응했으며, 상인이자 은행가였고, 도매업과 소매업을 동시에 했음.
- 프란체스코가 일련의 빛나는 대성공이 아닌, 작은 이윤을 계속 축적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음. 위험을 피하고 가능한 한 많은 기회를 잡으면서 말이다. 그가 다른 많은 동시대인들과 달리 어떻게 성공적으로 파산을 피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음. 14세기 첫 반세기에 활동한 대형상사들과 그보다 약간 작은 프란체스코 시대의 상사들은 무역, 산업, 은행업, 정치 등 모든 영역의 사업활동에 참여했음. 이런 상인들이 달성한 엄청난 권위와 힘음 거의 전적으로 신용에 근거. 이들이 처분할 수 있었던 자금과 그들이 다양한 활동으로 얻은 연간 매출액 사이의 불균형은 놀라울 정도임. 그들은 자신들을 추방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외국 군주가 요구하는 자금대부를 결코 거부할 수 없었고, 도시성벽을 방어하고자 도시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것을 거부할 수도 없었음. 그들으니 정치적, 군사적 재앙이 일어나면 맨 먼저 피해를 입는 첫 희생자들이었음. 상사가 크고 힘이 세면 셀수록 그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더 컸다고 할 수 있음. 그런데 프란체스코와 같은 상인은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었고 실제로 피했음. 라포 마체이와 도메니코 디 캄비오는 프란체스코의 대담함에 놀랐지만, 사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음. 프란체스코의 작은 상사들은 좀더 큰 규모의 상사들과 달리 정치와 거리를 둠. 그는 왕이나 고위 성직자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전쟁자금을 제공하지도 않음. 당시에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고향에서조차 어떤 정치적 파당에도 관여하지 않음. 그가 신뢰한 것은 자신처럼 건실한 상인과 자시 상사와 같은 상사들이었음. 그래서 비록 알베르티나 소데리나, 말라바일라, 귀니지 상사와 같은 당시 일류 상사와 맞먹는 위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다른 상인들처럼 정치나 전쟁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았음. 그는 자신의 배가 모든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음.
- 합자회사는 대부분의 중세 상업조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남. 그러나 막강한 해상공화국들의 상업조직은 코멘다라 불리는 형태였음. 이것은 한 상인은 국내에 머물면서 자금을 제공하고 다른 상인은 해외로 여행하며 사업을 수행하는, 주로 단기간의 피동적 동업관계였음. 반면 토스카나 지역의 상업조직은 콤파니아라는 형태였음. 동업자들은 각자 자본의 투자와 경영을 동시에 맡고, 다른 동업자들이 초래한 부채에 대해서도 공동책임을 져야 했음. 콤파니아의 이런 구조, 그들의 사업방식과 그들이 누린 엄청난 신용은 그 기원을 살펴보면 잘 이해됨. 콤파니아는 원래 같은 집에 살면서(콤파뇨 : 빵을 같이 먹는 사람) 같은 빵을 자르며,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그래서 상대의 행동에 무한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으로 구성된 작은 합자회사를 가리켰음. 물론 동업자들은 임금을 받지 않고, 콤파니아의 번영은 그들의 기술과 활동에 달려 있었음. 콤파니아는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가족처럼 안정적이었고, 콤파니아의 신용은 부분적으로는 그 가족이 소유한 견고한 토지재산에 근거했음. 나중에 콤파니아의 범위가 확대되어 가족외부의 성원까지 포함하게 되었고,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콤파니아를 결성하기도 했음.
- 상인의 현명함은 "모든 행동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 즉 무엇을 잡아야 하고 무엇을 포기하는지를 아는 것, 너무 멀리 나가지 않는 것,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넘어서는 일을 맡지 않는 것"에서 드러남. 현명한 상인이라면 옷이나 다른 물건에 대한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소비를 피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려는 것만큼 마음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명한 상인이라면 너무 인색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신중함이라는 걸 알아야 함. 예를 들어 장인과 중간상인들에게 응당 치러야 할 것 이상을 지불하는 것이 늘 잘못은 아임. 판사나 심판자들은 쓴 돈은 항상 잘 쓴 돈이다. 성경 말씀에도 선물은 현자의 눈을 멀게하고, 정직한 사람의 말을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도 현명함은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어떤 문서도 문자 그대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시간과 장소와 정도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신중하게, 그리고 문서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의도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모든 거래는 처음부터 의심해서 살펴야 한다. 상인들을 유혹하고자 속임수와 나쁜 계략이 많이 사용되고, 모든 사람이 돌멩이가 자기 손에서 황금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구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친구를 선택해야 한다. 다양한 부류의 친구를 사귀는 것은 좋지만 쓸모없는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은 좋지 않다. 부유한 친구들과 사귈 때에도 항상 경계해야 한다.
- 1366년 피렌체 고위 정무관들은 흑사병으로 인한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고려하여 몽골이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수입과 판매를 허가했음. 단,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교도이거나 이교도 지방 출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음. 그리하여 중세 마지막 두세기동안 피렌체 사회는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게 됨. 토스카나 도시들에서는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 밑으로 심지어 포폴로 미누토, 즉 억압받고 배고픈 군중보다도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새로운 계급(인간적 권리나 법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가족도 없는, 주인이 붙여준 이름 외에는 이름조차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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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 담아온 중국

역사 2014. 10. 18. 17:18

 


배낭에 담아 온 중국

저자
우샹후이 지음
출판사
흐름출판 | 2012-06-22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중국은 세계의 새로운 패권으로 떠올랐다....
가격비교

- 청나라 옹정황제가 쓴 대의각미록에는 "짐은 중국인이 아니다. 짐은 외국의 군주로서 중국을 다스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버젓이 나와 있음. 어디 그뿐인가. "가장 천한 달단인(타타르족, 과거 몽고족을 부르던 말)들은 한족관리에게 복종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복종한 것이다.", "노예민족에 대한 통치를 실현하면서 대대적인 종족차별이 실되었다.", "태감은 모두 한족이었다. 이는 한족 멸절의 상징성이 뚜렷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등은 당시 영국 대사 조지 매카트니 백장 1세가 청나하를 방문한 후에 쓴 견문록에 나와있는 증언들임. 당시 대청제국은 중국을 약 150년간 식민통치하고 있었음.
- 낙후는 진보에 의해 통치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제국주의의 기본적 인식. 중국은 본토에서 자생된 제국주의와 외래 제국주의를 포함해 최소 2000년에 이르는 가장 오래된 제국주의의 혈통을 보유하고 있음. 공산주의도 제국주의가 더욱 확장된 형태일뿐. 중국은 제국주의에서 단 한번도 떠나 있었던 적이 없음. 중국의 모든 소수민족지구 가운데 제국주의의 확장을 통해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지 않은 곳이 있는가.
- 대만 사람이 중국에 가면 자신들의 문명이 발전했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중국인이 대만에 가면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함. 중국 사회의 낙후성이 민족의 열등성 때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 대만이 해낸 것을 중국은 왜 못하겠느냐 하는 자기 위안임
- 칭다오의 아름다움은 독일에서 온 것. 독일풍 분위기가 없었담녀 칭다오는 이렇게 멋진 도시가 될 수 없었을 것임. 칭다오는 1897년 독일에 강제 점령당해 독일의 조계지가 되었으며 그 후에도 일본군에 의해 두차례나 점령당했음. 일본군은 급하게 왔다가 총총히 떠났지만 칭다오를 조계지로 삼은 독일은 칭다오를 계획도시로 건설했음. 칭다오 사람들이 독일에 느끼는 친근함은 대만인들이 일본에 느끼는 친근함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임
- 장쩌민은 1985년부터 1989년까지 4년동안 상하이 시장,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 중공중앙정치국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총서기를 거쳐 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름. 덩샤오핑이 낙점한 후계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음. 중국의 임기제가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또 하나의 사례.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 최고 정책결정조직으로 9명의 상무위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합의제를 실시해 일상적 업무는 표결에 부치지 않고 대화로서 합의점에 도달. 얼핏 들으면 화합을 중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상무위원들이 서로 무리지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음. 장쩌민이 13년 동안 당, 정, 군의 대권을 쥐고 있는 동안 상하이방은 중국 최고권세를 가진 비공식 계파로 떠올랐음.
- 인류문명은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천천히 진보함. 중국은 후발주자의 장점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음. 선진국이 겪은 시행착오를 중국은 대부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임.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가 모두 슈퍼시티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증명된 사실.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중국적 사고는 21세기 인류문명 발전에 역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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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땅 중국인 성격지도

저자
왕하이팅 지음
출판사
새빛에듀넷 | 2010-07-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중국 30여 개의 행정구역별로 그곳 사람들의 전체적인 성격을 전...
가격비교

- 베이징 사람들은 정치, 문화의 중심지인 수도시민답게 정치에 관심이 많음. 이들에게 정치를 빼면 음식에 소금이 빠진 듯 생활이 무미건조해지고 맘. 오랫동안 정치와 권력의 중신에 있었던 관계로 베이징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권력형 상인들이 많음. 황실에서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권력과 손을 잡고 이를 이용해 돈을 벌었음. 관료들로부터 정보를 빼내고 각종 이권에 개입. 상하이 사람들이 문화, 예술을 예술적 관점에서 본다면, 베이징 사람들은 정치적 배경과 인사관계, 간부의 태도 등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평가함. 베이징 사람은 이념을 논하고 광둥사람은 장사를 논하며, 베이징 거리에는 구호가 만연하고 광둥거리에는 광고가 넘친다. 그들은 사업을 할 때도 관료냄새를 풍기며 정치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음. 상인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지나친 정치적 관심은 시장경제에 부작용을 미칠 때가 많음. 상업행위가 관료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경우가 많고 관료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임. 그렇지만 베이징 사람들과 사업할 때는 그들의 정치적 정서를 비난해서는 안되며, 그들의 이런 특성을 이용하면 사업을 더 순조롭게 할 수 있음.
- 문학작품에서도 텐진 사람들은 거칠고 속된 이미지로 굳어져 있지만, 실제 텐진 사람들의 성격은 매우 복잡함. 항구도시의 분방한 면이 있는가하면 조계지의 호화로움과 섬세한 면도 있음. 그들의 성격도 계혹 변화하고 발전하는 중. 항구문화에서 유래된 거친 면이 점점 약화되고 있음. 텐진의 치안이 전국 대도시중 가장 좋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함
- 돈을 벌고 싶으면 선전남자를 찾고, 즐겁게 놀고 싶으면 베이징 남자를, 안심하고 살고 싶으면 텐진 남자를 찾으라는 말이 있음. 몇가지를 감수할 수 있으면 텐진남자와 연애를 해도 무방하다.
(1) 텐진 남자는 낭만을 모른다. 커피숍이나 음악회를 가느니 같은 돈을 주고 샤브샤브를 먹는게 낫다고 생각. 아니면 그 돈을 아껴두었다가 추운 겨울날 당신을 위해 따뜻하지만, 결코 예쁘지는 않은 털장갑이라도 살 것임.
(2) 텐진남자는 유행에 둔감. 프티부르주아, 보보이줌. 보헤미안 같은 신조어는 가볍고 실속없는 것이라 여기며 거들떠보지도 않음.
(3) 텐진남자는 타협을 모름. 이거다 싶은 사람이나 일에는 전폭적 신임을 보내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끝까지 의리를 지킴
- 애국은 허베이 사람들의 정신이요 가장 두드러지는 품격임.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원인으로 인해 오늘날 허베이 사람들에게는 몇가지 특징이 형성됨
(1) 전통과 예의를 중시하지만 진취적 기상은 상대적으롤 떨어짐. 유교문화는 중국의 주류문화로서 허베이에서 특히 그 영향력을 키웠음. 한편 허베이는 원, 명, 청시대에는 수도와 가까웠기 때문에 통치자가 방비에 신경을 쓴 지역이기도 함. 조정에서는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한 충성심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일단 모반자가 나타나면 폭력으로 진압. 그렇다 보니 이 지역 사람들은 조정에 대해 순종적.
(2) 허베이 사람들은 분수를 지키고 살며, 모험심이 부족. 이 지역은 평원과 산지의 비율이 반반인데, 평원에 사는 인구가 절대적으롤 많음. 곡창지대이므로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어 모험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3) 온화하고 예절바른 겉모습 뒤에는 강인함과 반항정신이 감추어짐. 국경에 인접한 지대라 직접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음. 특히 베이징가 그 북쪽 지역은 중원을 둘러싼 소수민족과의 싸움이 자주 벌어져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괴로움을 겪음. 그래서 허베이 지역은 순종적 성격 뒤에 반항정신을 숨긴 사람들이 많음. 특히 괴롭힘을 당하다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일으키는 이들의 반항은 통치자에게 큰 위협이 되었음.
(4) 허베이 사람들은 단결력이 강하지 않으며 고향에 대한 집착이 크지 않음. 대부분 평원에서 성장한 이들은 가혹한 자연조건과 투쟁하지 않고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음. 아마 이런 점 때문에 고향에 대한 애착과 서로 협력하는 정신이 강하지 않은 것 같음. 이런 문화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허베이 사람들은 자신을 요란하게 내세우기 보다는 신중한 성격을 갖게 됨. 허베이 문화정신을 널리 떨치고 문화의 동력을 일으키려면 강력한 문화적 리더십이 있어야 하는데 베이징과 텐진 지역없이는 중심축이 없으며 문화적 활력도 떨어짐. 그나마 베이징, 텐진 두 직할시의 문화적 영향력으로 허베이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 다행
- 칭하이 남성들은 권력과 재물을 동경은 할 지언정 숭배하지는 않고, 찬탄은 하더라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자존심이 있음. 칭하이 사람들은 사업에 소질이 없음. 너무 솔직해서 사기도 많이 당함. 통계에 따르면 98~05년 사이 공안에 접수된 경제관련 범죄 중 99%가 칭하이 상인이 외지인에게 당한 사기사건이었음.
- 고대 실크로드는 닝샤 북부지방을 통과하면서도 한동안 닝샤인의 사업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음. 특히 닝샤의 무슬림들은 장사에 관심이 많아 몇 백년에 걸쳐 서부의 여러 나라와 매우 긴밀한 정치, 무역관계를 수립. 당시의 닝샤상인들은 그야말로 전국각지를 누비고 다녔음. 그런데 오늘날의 닝샤는 상황이 다름. 운수업은 산둥사람이, 플라스틱 제품은 후난사람이, 옷은 저장사람이 팔고 있으며, 건축자재는 푸젠사람이, 건설시공은 쓰촨사람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음. 인촨에서 고급해물요리 전문점은 모조리 광둥사람이 열고 있음. 장사가 잘되는 상가의 주인은 원저우 사람이며, 제일 좋은 건축물은 모두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지음. 닝샤 사람들은 그들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음. 이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농업사회에 머물러 있음.
- 북부지방이 고원문화 위에 간간히 초원문화가 섞여 있다면, 남부 지방은 장강문화로 붉은 꽃을 피우고 황하문화로 녹색잎을 띄웠다고 할 수 있음. 그래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이며 거친듯 하면서도 지혜롭고 손재주가 뛰어남. 투박한 듯 하면서도 매끄럽고, 시련을 견디는 인내심이 있는가하면 안일한 면이 없지 않음. 현실에 안주하면서도 조바심이 많아 불안해 함. 산시 사람의 성격은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함. 온화하면서도 계략이 뛰어난 남방사람들과는 다름. 산시 사람들은 광둥사람들과 저장 사람들이 말할 때 소곤댄다고 곧잘 흉을 보기도 함. 같은 서북사람이라도 간쑤 사람과 산시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 산시 사람들은 충의와 신용을 중시하고, 유쾌한 성격으로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성격이 급함. 그에 비하면 간쑤 사람들은 차분하고 온화하여 어떤 일이라도 서두르는 법이 없음
- 고대 황제가 중시하는 두 지역이 있었으니 그 중 하나는 쓰촨이요, 하나는 산시. 쓰촨에서는 곡식과 돼지만 충분하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었음. 즉 쓰촨의 곡식이 풍작이면 돼지를 살찌울 수 있기에 충분한 돼지고기를 확보해 백성들이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음. 산시에서는 식초와 일종의 소주인 분주만 있으면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음. 산시의 물은 알칼리성이 강해서 음식에 식초성분을 넣어 중화시켜 먹었음. 오랫동안 식초는 이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자리 잡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식초로 간을 해야 비로소 제 맛이 남.
- 의를 저버리지 않는 산시 사람들은 장사를 할 때도 신용을 가장 중시. 그들의 장사철학은 근래에 들어서 직업도덕과 공정한 경쟁을 위한 시장규칙을 준수하는 행동으로 나타나, 탁월한 성과와 함께 사회적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음. 따라서 산시사람과 거래할 때는 마음을 놓아도 좋음. 그들은 결코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임. 산시에는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켜 근검절약으로 거부가 된 사람들이 많음. 그래서 이들과 비즈니스를 할 때는 공연히 허풍을 떨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더욱 신뢰를 얻을 수 있음.
- 끓는 물에 양고기나 각종 채소를 집어 넣어 익혀먹는 중국시 샤브샤브 훠궈는 원래 충칭에서 시작되어 역사가 1700년 이상 된 쓰촨의 대표요리임. 커다란 원형 냄비 안에 고기, 채소, 해물 등 원하는 재료를 잔뜩 넣어 익혀먹는 훠궈는 짧은 시간에 열을 가해 조리함으로써 원재료의 맛과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음.
- 산둥을 제노의 땅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둥사람들이 춘추전국 시대의 제나라와 노나라의 후예들이기 때문. 제나라는 현지의 토착문화를 흡수하여 발전시켰으며 노나라에서는 공자를 대표로 하는 유가사상 학설이 탄생했음. 이 두 고대문화의 차이를 보면 제나라는 효용과 이익을 따지며 노나라는 윤리를 내세움. 제나라는 혁신을 강조하는 데 비해 노나라는 전통을 중시. 산둥은 이러한 제나라와 노나라의 문화가 풍부하게 조화를 이룬 역사의 땅임. 노나라의 공자가 제창하고 맹자, 순자 등이 계승한 유학사상은 산둥 문화의 핵심으로 사회적 기초를 다지면서 산둥인의 성격을 형성. 산둥 사람들에게는 유학사상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 상하이 사람들은 똑똑하고 치밀하여 타지방 사람들로부터 계산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음. 오랫동안 경쟁이 치열한 대도시에 살아가며 상업을 중시한 결과 형성된 성품. 치밀한 계산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기에 이들에게 치밀함은 가치관이자 생존능력을 의미. 상하이 사람들은 출장을 갈 때 비싼 기차표를 사주면 싸구려 자리로 바꾸고 차액을 챙기는 경우가 많음
- 비즈니스의 첫째, 상하이 사람들의 비즈니스 목적은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뿐. 이들은 돈을 벌수 있다면 모르는 사람과도 주저없이 협력함. 협상을 할 때는 이윤에만 관심을 둠. 아무리 유명한 인사의 아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상대의 신분에는 관심이 없음. 협상할 때는 상대의 옷차림을 보고 어떤 자질을 가졌는지 한눈에 판단함. 둘째, 상하이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할 때는 상도덕과 법규를 준수하라. 불법거래는 절대로 안한다는 것이 상하이 사람들의 원칙임. 개혁개방 초기 연해 지역에서는 밀수가 성행했고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탈법에 의한 돈벌이가 장사의 비결로 통했지만, 상하이 상인들은 이런 행위에 동참하지 않았음. 법규를 준수하지 않으면 그들의 신뢰를 잃고 협력 관계가 깨짐. 셋째, 인내심을 발휘하라. 상하이 사람들은 협상을 진행하기 전에 대부분 사전에 시장과 상대방의 상황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분석하는 등 충분한 준비를 거침. 지나치게 꼼꼼해서 이것저것 따지기 때문에 이들과의 비즈니스에는 인내심이 필요. 하지만 담판에 성공하고 계약서에 서명한 후에는 진행이 매우 순조롭기 때문에 오래 참은 보람이 있을 것임. 넷째, 사전에 각종 위험요소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주어라. 거래를 할 때 생길 수 있는 변수와 리스크에 대해 사전에 이야기해주어야 함. 그래야 도중에 생기는 분쟁과 의혹, 불신을 피할 수 있음. 다섯째, 저쪽에서 가격을 제시하기 전에 이쪽의 속사정을 반드시 이야기해주고 합리적으롤 상담을 진행하라. 그래도 그쪽에서 제시하는 가격이 터무니 없이 높다면 미련없이 포기해야 한다.
- 장시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분지 콤플렉스가 있음. 북쪽으로 입구가 나 있는 분지형태의 지역인데다 바다에 면해 있지도 않아서 외부와의 교류가 적었음. 반면 기후가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려 농작물이 성장하기에는 좋은 환경이었음. 그래서 큰 고생을 하지 않고도 생존에 필요한 먹을거리를 장만할 수 있었음. 이런 우월한 자연조건은 땅에 대한 집착을 낳았고 땅을 버리고 나가 다른 일을 하기를 꺼리게 됨
- 후난 사람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고추를 닮았다고 할 수 있음. 고추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3백여년 밖에 되지 않았음. 역사서는 고추가 명나라 말기에 해상운송을 통해 페루와 멕시코에서 중국에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음. 고추를 즐겨먹는 지역은 쓰촨성, 허난성, 윈난성, 구이저우성임. 고추는 여름에는 습기를 물리치고 겨울에는 한기를 가시게 해주는 기능이 있어 이들 지역에서 널리 재배됨
- 광둥사람들의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단연 전국 최고임. 그들의 쓰는 돈 중에는 식비가 가장 많음. 광둥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유명하며 중국 식문화의 개척자이자 실천자임. 광둥은 아열대 기후에 속하고 지형의 변화가 많아서 물자가 풍부. 또한 중국과 외국간 교류의 중심이며 각지의 여행객과 상인이 운집하여 광둥의 식문화를 풍부하고 다채롭게 발전시몄음. 식재광둥, 즉 요리의 고장 광둥이라고 표현될만큼 광둥요리는 국내외에 유명함
- 둥베이, 시베이, 상하이, 베이징 지역 사람들의 발성방식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음. 이 네지역 사람들의 발성부위가 모두 다르다는 것. 예를들면, 상하이 사람들은 혀끝을 이용해서 발성을 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비교적 가늘고 부드러우며 힘을 들이지 않고 말함. 이는 상하이 사람들의 조용하고 우아하며 꼼꼼한 성격과도 맞아 떨어짐. 반면 베이징 사람들은 대부분 비음이 강하고 약간은 오만하며 웬만한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투인데, 이는 베이징 황제가 사는 수도라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 베이징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이 많고 시야가 넓어 스스로 당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 시베이 사람들은 전형적인 소박함과 진실한 서부의 특징을 보여줌. 이들은 흉강의 공명을 이용해 발성하고, 어떤 말이든 습관적이든 앞에는 아자를 끝에는 마자를 붙임. 둥베이 사람은 혀의 뿌리 부분을 이용하여 발성하며, 발음 하나에도 온 힘을 쏟아부음. 그래서 이 지방에서 길을 가다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목청이 터져라 목울대를 울리며 말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음. 둥베이 방언은 타지와는 말하는 어조도 다르지만, 그 밖에 어떤 문자로도 해석이 불가능한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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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발자국

역사 2014. 10. 18. 17:13

 


인류의 발자국

저자
앤터니 페나 지음
출판사
삼천리 | 2013-04-12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자연사의 큰 흐름 속에서 조망해 보는 세계사“지구의 생애와 인류...
가격비교

- 오늘날 기후체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가 크지만, 지구온난화가 수십억년 전에는 산소를 배출하는 남조식물을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하고 해빙을 촉발시켰으며 물속에서 산소와 철의 작용을 촉진시켰음. 철은 산소가 있으면 물에서 분리되고 대양 바닥에 가라앉아 광상을 이룸. 이 밖에도 지표 온도가 무척 높아 증발이 많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꽤 많은 비가 내렸음. 비가 대기중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씻어냈을 것이고, 그것이 탄산이 되었을 것임. 이어서 탄산은 대륙으로 스며들고 땅에 스며든 침전물이 대양으로 흘러들어가면서 화학작용을 거쳐 석회석이 됨. 철과 석회석 광상은 오랜시간을 지나며 빙하석 형태의 광상이 되고, 먼 미래에 인류의 제조업이나 산업활동에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르게 되는 해양 퇴적물을 끌어들였음.
- 6억 5천년 전 무렵 지구의 탄소 양에 나타난 변화가 지구의 기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음. 이 기간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오늘날의 2~3배 수준까지 떨어졌음. 이산화탄소 감소현상은 탄소가 온갖 종류의 암석에 흡수되고 해양저가 확장되며 땅위의 생태계가 다양한 식물군을 갖춰 나가면서 나타났음. 온난화로 지구의 녹지화가 계속 진행된 반면에 이산화탄소의 양의 감소로 지구는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냉각되었음. 이산화탄소 양의 변동은 과거 1억5천만년 동안 주기적으롤 등장한 빙하시대의 역사를 이치에 맞게 설명해주기도 함. 규칙적 양상을 보인 빙하시대는 더 최근인 75만년 전에도 등장. 9만 5천 8백만년 정도 지속된 빙하시대와 1만~3만 년에 이르는 간빙기가 거의 10만년마다 나타났음. 이런 흐름을 고려해보면, 인류문명은 현재의 간빙기에 꽃을 피운 셈
- 호모 에렉투스는 가혹한 기후의 역경속에서도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도구 제작자가 되어 번성. 이는 그들의 지능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함. 호모 에렉투스는 호모 하빌리스가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고 1백만년 동안 사용해온 매우 단순한 올두바이 도구 대신에 양날이 있는 아슐 손도끼를 발명. 힘이 세고 지능이 더 우수한 종과 경쟁할 수 없었던 호모 하빌리스는 호모 에렉투스가 행사한 압력에 굴복. 호모 에렉투스가 불의 힘을 활용하고 불을 이용해서 열을 가하거나 어둠을 밝혔다는 사실은 훨씬 중요함. 그들은 이 두가지 발전을 통해서 환경을 좀더 쉽게 지배할 수 있었음. 그들은 육식동물로서 이제 동물과 식물을 요리할 수 있게 됨. 동물의 사체를 뒤져서 얻든 사냥을 해서 얻든 동물성 단백질을 더 많이 섭취하게 되었고, 이 단백질이 식단에 추가되면서 건강이 좋아지고 수명도 늘어남. 또 불을 이용해서 포식자들의 공격을 막고 주거지를 따뜻하게 하기도 했음.
- 과학자들은 14500~12900년 전에 북대서양의 거대한 빙상과 빙산이 줄어들면서 전반적 온난화 추세가 나타났다고 가정.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지고 건조해지면서 수로와 물이 풍부한 초지가 줄어들고, 말과 영양을 비롯한 몸집이 큰 사냥용 초식동물이 사라짐. 인류는 이런 변화에 적응해서 사슴과 땅 다람쥐, 쥐, 거북이, 새 같은 좀 더 작은 동물을 사냥.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이런 변화를 광역 스펙트럼 혁명이라고 부름. 기후가 따뜻해지고 강수량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플라이스토세 후기 인류가 재배한 식물들의 수확이 늘어났음.
- 장기적인 온난화 추세가 중단되고 영거 드라이아스 기후라고 부르는 빙하기(12600~11600년 전)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수렵채취 활동을 줄이고 노동집약적 개간활동에 뛰어듬. 이동을 덜 해도 되는 좀더 영구적인 곳에 정착을 하면서 인구가 점차 늘어났음.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유기물질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일부 야생식물 가운데 먹기에 가장 좋은 식물을 골라 그 씨앗을 땅에 심음.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혹독한 추위가 아마도 야생식물을 재배하고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생산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임. 이렇듯 장기간에 걸친 식량부족과 그것이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식량부족은 농업을 역사적 서사로 서술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
- 젖을 빨리 떼고 아이를 낳는 간격을 줄이는 일은, 부드럽고 맛있으며 소화가 잘 되는 이유식을 입수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이 있음. 이유식은 대개 탄수화물이 풍부하고 영양가가 높은 일년생 토종식물이었음. 얇고 효율적인 도자기 그릇 덕분에 이유식을 끓이는 작업이 수월해졌음.
- 농경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데는 기후변화가 한몫했음. 6000~5200년 전 무렵에 지구가 따뜻해지고 농경이 확산되어 오늘날 마그데부르크-쾰른-리에주 지역으로 알려진 중유럽에서도 처음으로 곡물이 생산됨. 이런 확산추세는 2900~2300년 전 무렵에 한랭기가 시작되면서 멈추었음. 더위와 추위, 습윤과 건조의 극단을 오가는 변덕스러운 기후가 수백년 동안 지속되다가 1000~1300년 무렵에는 온난기가 이어짐. 기후학자들인 중세 온난기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중유럽과 북유럽으로 농업이 급속히 확산됨.
- 1750~1850년에 농부들은 파종과 추수를 교란시키는 변덕스러운 날씨체계에 직면. 가을과 봄에 내린 치명적 서리 때문에 자라나는 작물이 모조리 죽었음. 기상 악화에 뒤이어 대기 중에 수백만 톤의 연기와 재를 날리며 태양광선이 지표면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는 화산폭발이 여러차례 일어남. 1788년과 1789년 일본과 아이슬란드에서 화산이 폭발했고, 1816년에는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산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났음. 이런 화산폭발은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렸고 전 세계의 곡물 수확량을 감소시켜 기아를 확산시킴.
- 공업과 매뉴팩처 시대의 유럽에서 농부들이 점점 늘어나던 도시 인구와 팽창하는 농촌인구의 식량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 인구의 95%가량이 농업에 종사할 정도로 세계 경제에서 농업이 압도적이었지만, 농민과 도시 빈민은 주기적으로 식량 부족사태에 직면. 농촌과 도시 거주민들 대다수는 좋은 시절에도 제대로 먹지 못했음.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소득 가운데 60~80% 이상을 영양가가 별로 없는 곡물을 사는 데 지출
- 수렵채취인이 초창기 농부들보다 좀더 균형잡힌 식사를 하고 키가 좀더 컸으며 충치가 더 적었음. 하지만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천연자원에는 제약이 많아 인구 규모와 증가율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음. 수렵채취인들은 걸어서 하룻길 정도에 있는 서식지만 이용할 수 있음. 날마나 길을 떠났닥 주둔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야 함. 식량을 구하는 일은 서식지의 생태와 접근성에 달려 있음. 이런 기능을 단 하루에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함. 그래서 수렵채취인들에게는 동식물과 적절한 강수량이 생존의 필수요건. 그들의 가족 부양능력은 동식물의 양에 달림. 이런 생활방식을 유지하느라 인구밀도가 제곱킬로미터 당 1명을 넘어서지 않았음.
- 야생식물 경작과 더불어 가축을 사육하게 되면서 초기 농부들은 전염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임. 야생동물이나 가축과 접족하면서 동물의 체액이나 배설물에 들어 있는 감염성 미생물에 노출될 위험이 나타남. 개는 광견병은 물론, 그보다는 덜하지만 주로 말에서 감염되는 무시무시한 파상풍을 옮길 수도 있음. 천연두와 결핵은 원래 소에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 왔음. 하지만 지금은 천연두는 낙타에서 옮고 결핵은 버팔로나 야생조류를 비롯한 여러 동물들에서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소는 홍역과 디프테리아를 옮김. 인플루엔자는 조류와 돼지, 닭에서 생기고 일반감기는 사람이 말과 접촉하면서 시작됨. 호흡기 감염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작됨.
- 인구의 성장과 감소는 때때로 식량공급의 변동이나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음. 지난 천년기(11~20세기)의 초기 몇 세기에 인구가 수십억명이 아니라 수백만명에 불과했던 것은 인간의 활동과 관계없이 전 지구나 반구에 기후변화가 나타났기 때문. 모든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태양활동의 장기변화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구의 장기변동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이었음. 뉴질랜드 석순에 있는 광물 침전물 자료와 고대 나무에 있는 탄소-14 침전물과 농도자료, 기후변화와 사망률 기록, 농업 생산성 등을 기술한 역사자료를 비교해보면 중위도 기후에 상당한 일관성이 나타난 것으로 보임. 중세 온난기(800~1200년)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구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목격. 더 나은 도구를 사용하고 새로운 마구덕분에 소보다 끄는 힘이 더 센 말을 이용하면서 농업생산성이 늘어났음. 콩과 식물을 심고 비료를 사용하면서 토양의 필수 영양소가 고갈되는 것을 막음. 생산이 늘어나자 도시가 성장하고 역내무역이 확대됨. 소빙기(1300~1850년)에는 기온아 하락하고, 특히 1590~1670년 무렵에 기온이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식량이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 1500~1650년까지 오스만제국과 중국, 영국의 곡물가격이 500%나 상승. 곡물생산을 줄고 사망률이 늘어났으며 출산율과 기대수명이 낮아짐. 1670년~1800년 이후 소빙기가 물러나고 비교적 따뜻한 시기가 이어지면서 식물 생육기가 더 길어지고 식량이 늘어나 가격도 떨어짐.
- 요즘 기준으로 볼 때 18세기까지만 해도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었음. 심지어 소득분포 상위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이 있었음. 영양상태가 좋아진 것은 농업생산량이 늘어나고 소비할 식량이 더 많아지면서부터. 농업기술이 개량되면서 적은 수의 노동자들이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게 됨. 이렇게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중소 도시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됨.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었고 이런 사람들은 생산자들의 주류에 들지 못했음. 산업 시대 이전 1730년대 영국이 거둔 놀라운 풍작은 최고의 출산율과 더불어 상품과 서비스 시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옴. 영양상태가 좋은 인구가 공업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됨. 산업시대 이전에도 인구가 급증하기는 했지만 농업 사회가 수요에 맞추어 생산을 늘리지 못한 까닭에 그 성장이 빛을 바랬음.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질병에 취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구붕괴 현상이 나타났음. 인구학적 변천과 전염병학적 전환이 영국에서는 18세기에 전개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됨.
- 메소포타미아의 기록관리자들은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초창기 도시 생활의 소통을 위해서 외국의 이름이나 지역, 사물을 번역할 발음 부호를 갖춘 공통의 기호언어를 발명. 이것이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수메르에서 낱말표기를 음절문자로 전환하는 데 영감을 불어넣음. 기원전 제5천년기가 끝나기 이전에 대외무역이 확산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문자가 등장. 시리아와 크레타, 터키, 남이란, 인더스강 유역, 중국이 그런 곳임. 문자 전통은 이처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고대 도시들의 상업적 성격 때문에 생겨났을지도 모름. 이런 도시로 청동기 시대 수메르인들이 인더스강 유역이나 이란의 해안 지역과 교역을 할 때 들르게 되는 딜문(오늘날 바레인)이라는 섬이 있었음. 이 섬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를 인더스 문명과 이들 사이에 위치한 이란의 해안지역을 연결하는 화물집산지 구실을 했음.
- 구리를 처음 사용한 시기는 1만년전 부터 9천년전에 이르는 1천년 간의 기간이었음. 이 시기에 구리에 열을 가하고 망치로 두드려 간단한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음. 7천년 전에는 인류가 섭씨 1000도 정도로 열을 가하면서 광상의 표층에서 구리를 벗겨냈음. 고고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 초기 취락과 선왕조 시대 이집트, 인더스 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사회, 고대 중국에서 구리로 만든 고리와 끌, 도끼, 칼, 창을 찾아냈음. 구리 광상의 표층이 고갈되자 노동집약적인 활동이 필요한 심부채광을 하게 되었고 그 작업을 노예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음.
- 중세까지 유럽이 괴철로를 사용해서 철을 소량으로 생산한 데 비해 중국은 2300년 전에 이미 용광로 기술을 이용해서 철을 대량생산하기 시작. 유럽에서는 아직 이 기술을 발명하지 못한 채 근처의 나무를 이용할 수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저마다 철을 만들고 있었음. 반면에 중국에서는 한나라 황제들이 철 생산을 통제하고 독접하여 숲 근처가 아니라 인구밀집지역과 행정 중심지 근처에 제철소를 세움. 중국에서는 앞선 기술 덕분에 생산이 전례없는 규모로 늘어났으며, 제철소가 행정 중심지와 인구밀집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재와 그을음, 연기가 도시환경을 오염시켰음. 삼림이 고갈되면서 여기저기서 연료위기가 발생했고 새 연료로 대체가 일어나고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게 되었음. 연료사용과 발명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철강생산이 급증. 용광로는 적어도 하루에 500킬로그램 규모로 대량생산을 하기 위한 발명품임. 용광로는 몇 주나 몇 달동안 중단없이 가동해야 함. 따라서 연료와 광석의 공급능력, 풍부한 노동려, 생산량을 소화할 수 있는 시장, 수송역량 등이 생산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였음. 용광로에 공급할 숯이 끝없이 필요하게 되자 땔감나무를 구하는 일이 늘 고민거리였음. 그 결과 2300년 전 중국의 철 생산은 서기 1700년 식민지 아메리카의 제철소와 흡사하게 숯을 생산하는 삼림 근처나 삼림지대와 연결이 되는 수송망을 따라서 생겨난 제철단지 같은 생산조직이 필요했음. 삼림지대가 고갈되자 연료 공급원에 더 가까운 곳으로 제철시설을 옮겨갔음.
- 1775년 무렵에는 아시아, 주로 중국과 인도가 전 세계에 공급된 상품의 80%가량을 생산. 당시 유럽이나 신세계의 유럽 식민지들은 아시아의 거대 국가들을 상대로 품질이나 가격경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인도가 전 세계 면포의 25% 정도를 생산. 빛깔이 곱고 품질이 좋은 가벼운 면포가 주를 이룸. 캘리코는 섬세하고 촉감이 부드러웠으며 유럽제품보다 쌌음. 유럽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였음.
- 1차 아편전쟁 (1839~1842)에서 영국이 중국을 물리치면서 다가올 20년 동안 체계적 아편무역의 길이 열리게 됨. 그래서 해마다 3천톤에 달하는 아편 5만상자 가량이 중국에 판매됨. 중독이 확산되면서 인도와 터키에서 재배한 아편대금으로 은이 중국 밖으로 흘러나감. 영국 정부의 강요로 중국 정부는 아편을 합법화할 수 밖에 없었고 공급업자들에게 여러 항구도시를 개방. 중국 농민들이 아편거래로 이득을 보기 위해서 밭작물을 면화에서 양귀비로 바꾸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현금 유동성이 늘어남. 이런 결정은 식량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흉작과 기근에 더욱 취약하게 됨. 19세기 말에 중국인은 전 세계 아편 공급량의 95%를 소비하고 있었고 인도가 주요 공급자였음. 두 나라 사이의 마약무역은 서유럽에서 산업화가 시작되기까지 수백년 동안이나 누려온 세계 최대 제조업 중심지라는 그들의 지위를 무너뜨리는 데 이바지.
- 잭 골드스톤은 중국이 공장생산 모델을 채택하지 않은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설명을 내놓음. 명나라(1368~1644) 초부터 남성들은 밭을 가구고 작물을 경작하고 면화를 재배하고 세척하고 말렸음. 여성들은 가정에서 실을 잣고 베를 짜고 음식을 준비.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나 역할을 구분하고 위계적 사회규범와 엄격한 도덕률이 마련됨. 심지어 20세기까지도 방직공장에 여성을 고용하는 일은 저항에 부딪히고 실패로 돌아가기 일쑤였음. 한가지 예외는 있었음. 상하이에 일본인이 소유한 방직공장들에서는 노동자의 72.9%가 여성이었음. 1897년에는 중국의 방직공장 34개 가운데 26개가 상하이에 이었음. 193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인 여성들 10% 미만이 공장에서 근무.
- 1850년에 영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업은 농업이었고 집안일이 그 뒤를 이음. 전체적으로 면방직 공장 노동자보다 건설 노동자의 수가 더 많았음. 석탄이나 금속을 캐내는 광부들보다 제화공의 수가 더 많았고, 제철공에 비해 대장장이의 수가 더 많았음. 공업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아직 성숙기에 접어들지는 않았음. 1870년까지만 해도 증기기관은 광업과 직물업, 야금술 세 분야의 산업에서 주로 사용했음. 다른 분야에서는 주로 물레바퀴에 의존.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는 증기력 사용이 10배나 증가.
- 영국에서는 공유지를 사유지로 전환하는 인클로저 법령으롤 노동자들이 농장에서 쫓겨나 도시로 내몰림. 미국에서는 가족이 늘어나고 유산으로 받게될 농장규모가 작아지면서 형제자매들이 일자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음. 농가에 가족들이 너무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주를 했고 이들이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이 되었음.
- 설탕의 생산과 유통만큼 소비세계를 크게 바꿔 놓은 상품은 없음. 중독성이 있는 담배도 그렇게 하지 못함. 경작자들이 생산품목을 바꿨음. 대개는 담배재배에서 설탕생산으로 바꿈. 설탕이 1640년에 유럽시장에 들어오면서 사탕수수가 영국에서 가장 이문이 높은 아메리카의 환금작물이 되었음. 설탕은 1600년부터 1800년까지 곡물과 고기, 생산, 담배, 소, 향신료, 의류, 금속무역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만들면서 국제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상품으로 뛰어오름. 설탕은 인간관계와 농업생산, 전 지구적인 식생활의 변화를 주도한 유일무이한 소비상품이었음. 설탕혁명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슬픈 것이었음. 설탕혁명으로 다양한 혼합농업이 설탕 단작 농업으로 바뀌었으며, 이 단작농업은 삼림벌채와 토양침식을 유발하고 카리브해 지역의 변화무쌍한 기후체게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음.
- 백화점은 소비자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구매자와 판매자의 가격흥정을 가로막는 가격시스템을 만들어 냈으며 새로운 판매전략을 발명해 냄. 연예인들의 추천, 제품의 심미적이고 문화적인 가치홍보, 잠재적 구매자들의 모방을 부추기는 양식화되고 낭만적인 이미지의 모델 활용이 제품에 신분과 가치를 더하도록 디자인한 새로운 판매전략들이었음. 백화점이 등장하면서 대중소비가 시작되었고 신분과 맛, 예술, 성별인식 등에 관한 문화적 의미들이 소비양식에 영향을 주었음.
-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신다. 세상에서 여기보다 더 자주 바람을 이용하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 10세기 아랍 작가들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주변 지역을 이렇게 묘사. 풍차는 주로 맷돌을 돌리거나 논밭에 댈 물을 길어올리는 데 사용. 이 풍차가 중세에 유럽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동쪽에 있는 중국으로 확산되었음. 1500년부터 1800년까지 풍차가 대륙 에너지 수요의 4분의 1을 공급하고 나머지는 수력과 근력이 담당. 1200년에 십자군들이 돌아오면서 유럽으로 가져온 풍차와 수차 덕분에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노동에서 해방되었음. 기술사가인 린 화이트가 그 해방을 이렇게 서술. "중세 후기의 주요 자랑거리는 대성당이나 서사시도, 스콜라 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복잡한 문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땀 흘리는 노예나 막노동꾼의 등이 아니라 비인간 노동으로 지은 건축물이었다."
- 산업화는 어떤 면에서 전 세계 경제력의 균형을 바꾸어 놓은 증기기관 혁명이었음. 18세기 말에 영국 공장에서 생산된 직물이 인도의 오래된 공업을 무너뜨리고 수천명의 노동자들을 쫓아냈음. 18세기에는 전 세계 총생산의 70%가 인도와 중국, 유럽 사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음. 19세기 말에는 중국의 몫이 7%로 줄고 인도의 몫이 2%로 줄었으며, 유럽이 60%나 되는 엄청난 양을 생산하고 미국이 20%를 생산. 세계 강대국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음. 그 대부분이 인류역사에서 그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에너지의 흐름에서 비롯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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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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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역사 2014. 10. 18. 12:37

 


문화의 패턴

저자
루스 베네딕트 지음
출판사
연암서가 | 2008-08-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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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펭글러의 가장 가치 있고 독창적 분석은 서구문명의 대조적 통합형태를 내세웠다는 점. 그는 두개의 위대한 운명사상을 구분. 그러니까 고전세계는 아폴로적이었고, 현대세계는 파우스트적이라는 것. 아폴로 형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우수한 부분들로 이루어진 질서 있는 우주라고 생각. 이 우주에는 의지라고는 들어설 자리가 없고, 갈등은 사악한 것임. 인성이 내적으로 성숙한다는 사상은 그에게는 낯선 것임. 그는 인생이 언제나 참사의 그늘아래 있는데 참사는 늘 외부에 있으며 잔인하게 인간을 위협. 아폴로 형 인간의 비극적 클라이맥스는 일사적 체험의 유쾌한 풍경을 마구 파괴하는 순간임. 이런 현상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방식, 같은 겨과로 벌어질 수 있음. 반면에 파우스트형 인간은 자신을 장애물과 줄기차게 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 그는 개인적 생활이란 곧 내면적 생활의 발달이라고 봄. 존재의 참사는 과거 그가 선택한 사항들과 체험들의 필연적 결과임. 갈등은 존재의 필수조건임. 그것이 없으면 개인적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고 존재의 피상적 가치만 획득될 뿐임. 파우스트 형 인간은 영원무한을 동경. 그래서 그의 예술은 그것을 획득하려고 손을 내뻗음. 파우스트형과 아폴로형은 정반대되는 두가지 인생관이며, 어느 한쪽의 가치는 다른 한쪽에게는 낯설고 사소한 것이 되어버림
- 다른 문화권에서 결혼은 권위가 행사되는 보편적 상황임. 하지만 푸에블로 족들 사이에서 결혼은 거의 어떤 형식 절차 없이 이루어짐.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결혼이라고 하면 재산권과 경제교환이 수반되고, 이런 경우 나이든 사람들이 특권을 행사함. 하지만 주니 결혼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음. 푸에블로 족은 소유를 별로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 같으면 아주 까다로운 결혼의 상황이나 기타 여러가지 상황들 (젊은이에게 집단의 재산을 투자하는 여러 문화형태들) 을 가볍게 처리함. 아니, 주니 족은 그런 복잡한 상황을 사전 차단해 버리는 것임. 이런 모든 문화적 조치 덕분에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노출될 가능성이 별로 없음. 말리노프스키의 지적에 의하면, 트로브리안드 부족사회의 구조는 서양사회의 아버지 권위를 외삼촌에게 부여하고 있고, 그래서 그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음. 주니 족의 경우 외삼촌 조차도 그런 권위(부권)를 행사하지 못함. 그런 권위가 필요한 상황은 용납되지 않음. 아이는 부권에 대한 적개심 혹은 부권과의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상적 백일몽 따위는 전혀 없이 성장. 이런 식으로 성장한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도 부권이 필요한 그런 상황을 상상하지 못함. 따라서 아이의 성년식은 주니 족에게는 낯선 것이 됨. 그러니까 세계 여러지역에서 줄기차게 발견되는 성인식들과 비교하면 낯선 것이라는 이야기. 왜냐하면 성인식이란 권위를 가진 자가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 노골적으로 그것을 행사하는 의식이기 때문.
-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주술과 종교는 초자연력에 대응하는 상호보완적 방식임. 종교는 초자연적 세계와 개인을 바람지갛게 연결시켜 주는 것인 반면, 주술은 그 세계를 통제하려는 테크닉을 말함
- 멜라네시아 대부분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호혜적 상거래에 대한 엄청난 열정은 도부족에게서도 발견됨. 모든 도부족이 가장 열정적으로 욕망하고 또 가장 열정적으로 남의 성공을 시기하는 두 분야가 있는데, 하나는 물질의 소유이고, 다른 하나는 섹스임. 주술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열중하는 분야임. 하지만 이 두분야(물질소유와 섹스)와 관련하여, 주술은 목적이라기보다 수단이고 그 두 분야의 성공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임. 도부처럼 배신과 의심이 난무하는 공동체에서 물질적 성공은 서양문명에서 인정되는 경제적 목표와는 많은 대조를 보임. 재화의 축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배제됨. 어떤 이웃이 풍작을 거두었고 그것을 남들이 염탐했는데도 시인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치명적 주술의 원인이 될 수 있음. 거들먹거리며 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 그래서 이상적 상술은 카운터(판매대) 시스템임. 그러니까 물건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가지만 어느 한 사람의 영구적 소유로 남지 않게 하는 것. 바로 이런 시스템이 도부에서 정착됨. 도부제도의 일상생활 중 하이라이트는 대략 직경 150마일 이내의 해역에 흩어져 있는 12개 섬들 사이의 국제간 교역임. 이 섬들을 통칭하여 쿨라 링이라고 부름
- 쿨라 링은 동그라미 형태를 이루고 있는 섬들을 가리키는데, 이 동그라미를 기준으로 반년마다 한 종류의 귀중품이 어느 한쪽으로 이동하고, 또 다른 종류의 귀중품이 반대쪽으로 이동하여 거래됨.
- 쿨라 교역은 이런 외형적 절차를 놓고 볼 때 좀 황당무계하게 보이나 그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리 황당무계한 것은 아님. 멜라네시아와 파푸아의 많은 지역들은 현지 특화 산업을 가진 공동체로 가득함. 쿨라 링에 들어온 어떤 섬은 녹석을 가다듬고, 어떤 섬은 카누를 만들고, 어떤 섬은 도자기, 어떤 섬은 목각, 또 다른 섬은 혼합 염료 등 다양하게 물건을 만들어냄. 주요 귀중품의 거래를 위해 의례적 흥정을 하는 동안 이런 물품들도 함께 교환됨. 이런 쿨라링의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볼 때 이 제도는 너무 극단적으롤 보일지 모름. 그러나 상호교환의 열정이 잘 발달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이런 제도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보이지 않음. 조개 팔찌와 목걸이가 움직이는 방향도 실은 그런 상황의 형편에 바탕을 둔 것. 조개 팔찌는 쿨라 링의 북쪽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트로커스 조개로 만든 것이고, 목걸이는 링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이 남부에서 수입해 만든 것. 따라서 동쪽 제도보다 이런 물품들을 많이 갖고 있는 서쪽 제도는 국제간 교역을 할 때, 북쪽 귀중품은 남쪽으로 보내고, 남쪽 귀중품은 북쪽으로 보냄
- 도부의 뿌리깊은 체면존중은 미국의 문화적 배경에서도 친숙한 것. 체면존중을 하다보니 도부 사람들은 심술궂은 특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 또한 퓨리턴의 체면존중에서도 발견되는 특성. 그러나 차이점이 있음. 우리는 이런 콤플렉스를 성적욕망의 부정 혹은 섹스의 평가절하와 결부시킴. 하지만 이런 결부가 필연적인 것은 아님. 가령 도부사회에서는 심술궂음과 체면존중이 혼전난교와 공존하고 또 성적 욕망과 테크닉에 대한 높은 평가와 결부되어 있음. 도부의 남녀는 모두 성적 만족을 높게 평가하고, 또 그런 만족의 성취를 굉장한 관심사로 삼음. 남편이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될 경우, 그런 남편을 지원해주는 그런 사태에 대한 무관심과 몰입을 규정한 남성만의 규약 같은 것이 없음. 도부의 남녀는 성적 욕망의 변화를 무자비하게 이용. 반면에 주니족은 그런 변화를 부족내의 제도에 의해 조절해 줌. 도부 여자가 결혼하면서 받게 되는 전형적 성교육은 남편의 바람기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편을 가능한 한 피곤하게 만드는 것. 섹스의 육체적 측면을 전혀 과소평가하지 않음. 따라서 도부 사람들은 심술궂고, 체면치레가 강하고, 성적욕망이 강하며, 질투와 의심과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음. 그가 어떤 번영의 순간을 맞이했다면 그건 이 사악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갈등에서 적수를 패배시키고 힘들게 따낸 것. 도부의 좋은 사람이란 이런 갈등에서 공로를 많이 세운 사람임. 그는 험난한 세상을 나름대로 이겨내고 어느 정도 번영을 이루어 누구에게나 내보일 수 있는 자임. 그가 도둑질을 하고, 어린아이를 죽이고, 주술을 자주 사용하고, 과감하게 사기를 치는 것 따위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임
- 도부의 생활은 다른 사회 같으면 제도적으로 최소화해 버리는 적개심과 악감정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킴. 도부의 제도는 그런 극단적 형태를 최고조로 고양시킴. 도부 사람들은 아무런 억압의식 없이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악의 악감정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감. 그들의 인생철학에 의하면, 인간 사회와 자연력에 퍼붓는 그들의 악감정을, 어떤 특정 개인을 희새얌 삼아 집중적으로 퍼붓는 것을 생활의 미덕으로 여김. 그가 볼 때 일상생활은 노골적인 투쟁의 장임. 살인적 적대감을 가지고 상대방과 격돌하여 그로부터 인생의 좋은 것들을 빼앗아내야 하는 것. 이 투쟁에서 그가 신임하는 무기는 의심과 잔인함이고, 그 자신이 남에게서 자비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남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도 없음.
- 북서해안에서 심술궂음과 자살은 그들이 몰입하는 승리와 수치라는 게임의 자연스러운 보완무임. 승리를 비롯하여 수치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인정하는 단 하나의 감정 스펙트럼 내에서 그런 반응이 확대되거나 축소되었음. 승리는 당당하다고 착각하여 마음껏 즐기는 반면, 수치는 죽음의 원인이 되었음. 그들은 단 하나의 감정 스펙트럼만을 알았고 그것을 모든 경우에 사용했으며, 심지어 그럴듯하지 않은 경우에도 들이댔음. 그들의 사회는 이런 승리와 수치의 관점에서 일상생활을 잘 영위해 나가는 자에게 모든 보상을 주었음. 무엇보다도 개인의 에고가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이 가장 소중했음. 친구들의 행동, 물질적 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 등은 에고의 안전성을 가장 크게 위협. 이런 에고에 타격을 입은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확실하고도 특별한 기술이 있었음. 만약 이런 기술을 쓸 수 없다면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음.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에고의 과대망상에 모든 것을 걸었음. 자존심이라는 거품이 터졌을 때, 그는 의지할 버팀목이 없었음. 부풀어 오른 자아가 붕괴해 버리면 그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함
- 문화적 특성들은 인간의 행동에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제사항이 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화에서 지역적으로 과도성장했기 때문에 강제사항이 되었음. 도부 부족이 인간적 본성의 기본이라고 보는 한가지 생활양식은 근본적으로 배신이고 그에 대한 병적인 공포임. 마찬가지로 콰키우틀 족은 인생을 일련의 경쟁상황으로만 인식. 인생에서의 성공은 오로지 이웃에게 얼마나 수치심을 안겨주었는지 그것으로 평가됨. 그들이 이런 생활 양식이 그들의 문화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믿음. 하지만 문화제도의 중요성은 그 제도의 유용성이나 필연성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음.
- 언어학이 무수하게 많은 소리들 중 어떤 것들만을 선택하여 활용음소로 삼는 것처럼, 문화도 인간의 연령대, 자연환경, 인간의 활동 등 다양한 관심사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스펙트럼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여 패턴을 형성. 다시 말해 어떤 문화의 정체성이란 바로 이 스펙트럼의 어떤 부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됨. 음소에 파열음. 폐쇄음. 순음, 치음, 치찰음, 유성음, 무성음, 구음, 비음, 연구개음이 있듯이 문화에도 혼인과 가족, 친족, 사회조직, 경제체계, 정치와 법, 종교, 개인의 인성, 언어, 예술, 환경 등 강조점이 다르게 놓이는 다양한 분야가 있는 것임. 이런 분야 중 어떤 것에 집중하여 문화가 형성되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문화패턴이 결정됨. 베네딕트는 주니 문화의 경우는 종교행위에 집중하는 이성적인 아폴로 패턴으로, 도부족은 의심과 배신의 거래를 강조하는 편집병적 패턴으로, 콰키우틀 족은 재산과 부의 이용과 관련하여 과대망상적 디오니소스의 패턴을 갖고 있다고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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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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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퇴보

역사 2014. 10. 18. 07:39

 

 


니얼 퍼거슨 위대한 퇴보

저자
니얼 퍼거슨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민주주의와 자유경제에 신음하는 서양의 오늘, 무엇이 문제이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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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한 부채에 시달리는 국가라면 어디든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런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음과 같음
(1) 기술혁신을 이용하고 경기부양책을 신중히 동원해 성장률을 금리보다 높임
(2) 공공부채 중 상당부분에 대해서는 채무를 불이행하고 민간부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산을 신청
(3) 그런 다음 통화의 평가절하와 인플레이션을 통해 채무를 모조리 없앰.
하지만, 주류학파에서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 국가가 이 세가지 조치 중 어떤 것을, 아니면 어떤 것들을 결합해 쓸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경제이론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음.
- 지금, 경제강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 중에는 20년대와 50년대에 거듭 그랬던 것처럼 인플레를 통해 채무를 싹 쓸어버리는 초강수를 둘 수 있는 국가가 없어보임.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화폐적 현상이라는 프리드먼의 유명한 격언도 누가 그 과다한 돈을 만들어내고 왜 그런 방법을 쓰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못함.
- 정말로 바람직한 제도는 만들어내기가 무척 어려움. 하지만 반대로 나쁜 제도는 쉽게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국가가 그리 오랫동안 가난하고, 무지하며, 비위생적이고, 피투성이롤 지내야 했던 까닭임
- 1770년대의 애덤 스미스가 보기에 중국이 경제적으로 정체상태에 있었던 이유는 그 나라의 법률과 제도에 있었음. 그렇다면 같은 식으로 오늘날의 서양의 경제, 사회, 정치적 어려움도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서양제도의 쇠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일단 서양이 지난 500년간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상대적 쇠퇴의 길을 겪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 1978년 평균적으로 중국인보다 20배나 부유했던 미국인은 오늘날 겨우 다섯배 앞서 있을 뿐임
- 영국 역사의 궤도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한가지 제도가 있음. 노스와 와인개스트는 명예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을 통해 영국이라는 나라가 국가 차주로서 신뢰를 얻게 된 점이라고 주장. 명예혁명 이듬해인 1689년부터 영국의회는 세금부과를 통제, 개선하고, 왕실의 씀씀이를 감사하며, 개인 재산권을 보호하고, 채무 불이행을 효과적으로 막았음. 이런 조치는 자기 강제력을 지니고 있었음. 누구보다도 부동산 소유자들이 의회를 통해 권리가 보호되는 바로 그 계층이었기 때문. 그 결과 영국은 과거 왕실이 습관적으로 채무불이행을 하거나 제멋대로 세금을 매기고 국민들의 재산을 징발하던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큰돈을 빌릴 수 있게 됨. 그래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차입관련 재무비용이 늘어나지 않고도, 오히려 그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공공부채가 급속도로 축적되는 시기가 열림. 사실상 이것은 긍정적 변화였음. 이를 통해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 어느때보다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작은 섬나라가 위대한 대영제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또한 부자들에게 유가증권 투자를 장려하여 금융혁명의 길을 텄고, 이를 통해 영국 국민이 저축한 돈은 운하와 철도, 상업과 식민지 건설, 철공산업과 섬유산업에 이르기까지 전분야로 활발히 공급됨. 프랑스와 수많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채는 어마어마하게 커져 1815년 이후 10년간 GDP의 260%까지 이르렀지만 여기에는 짭짤한 수익이 뒤따랐음. 대부분 빚으로 자금을 댄 영국 해군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세계적인 제국건설을 도움. 게다가 워털루 전투 이후 100년에 걸쳐 지속적인 성장과 재정흑자가 합쳐져 이 빚은 성공적으로 감축됨. 채무불이행 사태도, 인플레도 없었음. 그렇게 영국은 전세계를 지배했음.
- 문제의 핵심은 공공부채가 투표권조차 없는 어린세대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를 희생시켜 현재의 유권자 세대를 부양한다는 사실. 이런 면에서 볼 때 흔히 정부부채라 부르는 통계치 자체가 실은 매우 잘못되어 있음. 거기에는 정부가 돈을 빌리면서 발행한 공채의 합계금액만 들어가 있기 때문. 발행한 공채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 그 채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 늘어날 수 밖에 없으므로-설령 현재 최대 국가 차주들이 누리고 있는 낮은 금리상태가 유지된다 하더라도-현재, 그리고 미래에 취업상태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부담이 늘어남. 그리고 채권의 형태로 되어 있는 공식적 채무에는 그보다 훨씬 큰 금액이 미국의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사회보장제도 같은 복지계획의 단기공채가 빠져 있음.
-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와 세입 사이의 차액을 감당하려면 모든 연방세금을 즉각 64% 인상하거나 모든 연방지출액을 즉각 40% 삭감해야 함.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첫번째 시나리오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영웅적 리더의 지휘아래 개혁 지지자들이 젊은이들 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에게도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재정정책을 내세우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투표하라고 설득하는 것. 정부재정개혁을 시작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하지만 실현가능성은 더욱 높은 두번째 시나리오가 발생할 것. 서양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현재의 무책임한 정책을 이어가다가는 그리스나 다른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을 따라 하나둘씩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것임. 이 과정은 먼저 신용의 손실로 시작되었다가, 차입관련 재무비용의 증대로 이어지고는, 결국 정부가 최악의 순간에 강제로 소비를 줄이고 세금을 높이는 결과로 끝나고 말 것임. 이 시나리오의 결말에는 채무불이행과 인플레가 뒤따름. 우리 모두 아르헨티나의 처지로 전락하는 것. 세번째 가능성은 현재 일본과 미국, 어쩌면 영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 부채가 계속해서 쌓여 가지만 통화수축에 대한 두려움과 중앙은행의 채권구입, 세계 나머지 국가들로부터 몸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로 인해 정부의 차입관련 재무비용은 유례없이 낮게 유지됨. 이 시나리오의 문제점은 수십년에 걸쳐 성장률 역시 낮거나 제로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임. 즉 애넘 스미스가 이야기한 정체상태의 새로운 버전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
- 채무과잉은 오랜기간(평균 23년) 낮은 성장률(1.2%)이라는 결과를 가져와쓰며, 채무과잉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경제산출량은 거의 4분의 1이나 감소. 물론 성장감소가 반드시 실질금리 인상의 결과인 것은 아님. 중요한 것은 채무와 성장간의 비선형 관계임. 채무가 GDP의 90%를 넘을 때에만 성장률이 저하되기 때문에 적자 운영이라는 습관은 그것이 진정 유해해 지기 전에 이미 확립됨. 이런 점은 민간부문 디레버리징으로 인한 총수요 축소에 대처할 올바른 대응법은 이미 채무를 지고 있는 공공부문이 더 많은 돈을 빌리는 것이라고 믿는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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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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