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촌공업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16세기 이후 시장수요의 확대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짐. 특히 섬유 및 의복분야의 수요가 급증. 이런 섬유류 수요증가는 한편으로는 해외요인에서 비롯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화와 관련되어 있었음. 영국의 경우 17~18세기에 도시 인구가 이전보다 가파르게 증가. 18세기에 걸쳐 8만 이상 도시의 수와 그 도시 인구수는 적어도 2배 이상 증가. 18세기 초에 이미 전 인구의 11%를 차지할만큼 급성장. 이 도시인구가 의류수요증가의 배경을 이룸
- 원래 목면으로 실을 뽑고 면포를 짜는 기술이 유럽에 전해진 것은 14세기 경이었고 그 중 영국은 가장 늦은 편이어서 16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신교도들에 의해 전래되었으리라고 추정함. 초기에 면업분야는 양초심지용을 굵은 면사를 잣거나 또는 리넨과 면사를 섞은 혼방, 이른바 퍼스티언 면포를 짜는 수준이었음.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이후 랭카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면제품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짐. 이 시기 면업분야의 농촌공업이 활바라게 전개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18세기 삼각무역과 더불어 면제품 수요가 급증했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면직물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 우선 퍼스티언 면포는 리넨보다 더 싸고 부드러우며 염색도 어렵지 않았음. 면직물은 값쌈녀서도 보기좋은 옷감을 원하는 대중의 소비욕구에 걸맞았음. 더욱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구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시장확대에 따른 상품수요가 늘어남. 1580~1775년 사이에 영국력 아메리카 식민지로 35만명 이상의 백인노동자가 유입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75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아메리카 노예로 팔려감. 이 새로운 시장에서 면제품을 비롯해 리넨, 모직 등 의류수요가 크게 증가. 아메리카 시장의 수요증가를 보여주는 것이 영국수출시장의 변화임. 1700년 영국의 총수출액 중에서 아시아는 3%,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는 12%였음. 그러던 것이 1770년대 초에는 각기 18%, 43%로 급증. 이러한 변화는 특히 아메리카 시장의 확대에 뒤따른 것.
- 맨체스터 선대상인은 리버풀의 무역상에게서 원면과 마사를 구입해 면직공에게 일감을 맡김. 농촌 중매상인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직접 직포작업장을 운영하면서도 선대상인의 업무를 대신 맡음. 선대제 조직 내부의 갈등은 주로 이들과 면직공 사이에서 나타났음. 면직공 가운데서도 독립적인 사람들은 그 자신의 경영을 꾸려나가면서도 동시에 공정의 일부를 다른 예속상인-예속 면직공, 선대상인-중매상인-예속 면직공, 선대상인-독립면직공, 독립면직공-예속면직공 등 다양한 연결통로가 병존했음.
- 영국의 전통산업인 모직업이 아니라 면업 분야에서 기술혁신을 비롯한 산업화가 먼저 시작된 것은 국제무역 및 의류시장의 변화라는 18세기 세계사적 맥락과 깊이 관련된. 그렇지만 이는 산업화의 하나의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음. 당시 랭커셔 농촌공업지역에서 그 필요성에 부응하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었기 때문에 산업화로 연결된 것. 요크셔와 랭커셔 두 원산업화 지역을 비교할 경우 어떤 차이점을 찾을 수 있을까. 면업분야는 모직업에 비해 전통의 지배가 약했음. 길드적 관행이 특히 그러했음. 이와함께 가내수공업자들이 선대제 방식으로 좀더 정교하게 조직화되어 있었음. 전통의 영향이 두드러지지 않은 영역에서 혁신의 필요성과 열망이 축적된다면 실제로 혁신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을 것임.
- 공장이 대부분의 산업분야에서 생산의 지배적 형태가 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음. 공장제의 대명사로 알려진 면공업 분야에서조차 대규모 공장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중소규모 공장이 주류였음. 공장과 대규모 작업장 안에서도 기계화의 진척은 느렸음. 공장은 생산고정의 분업에 의해 작업을 단순화하고 그에 따라 다수의 미숙련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었음. 이런 점에서 보면 공장은 기계집중의 필요보다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통제할 필요성에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음.
- 18세기 후반 면공업의 산업화는 국제무역의 새로운 네트워크 창출과 더불어 수요증대의 한계에 직면한 영국 모직물 공업의 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됨. 여기에 산업혁명은 18세기 국제무역의 변화라는 세계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됨. 면방적업 분야에서 기술개량이 먼저 시작된 것은, 해외 면제품 시장에서 영국의 퍼스티언 면포가 인도산 면직물-머슬린, 캘리코, 진츠- 등에 비해 경쟁이 되지 않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음.
- 엥겔스 이래 랜즈같은 기술중심학파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연구자들은 산업혁명기 증기기관의 역할을 가장 중시.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는 증기기관과 면방적기 및 역직기의 발명가 더불어 시작한다"라는 엥겔스의 말은 물론, 산업혁명의 세가지 주요 특징 중의 하나로 "생물적 동력을 무생물적 동력으로 대체한 것"을 지적한 랜즈의 표현 등은 이를 여실히 보여줌.
- 개량된 기계가 매단계마다 더 크고 더 복잡하며, 그 결과 더욱 값비싼 것이 됨에 따라 방적공과 직포공 사이에 분업이 나타나기 시작. 후자는 이윤 높은 실잣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기계를 점차로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방차를 제쳐놓고 베틀에 매달렸으며 그가 필요한 면사는 외부의 재료에 의존했음. 그리고 전자는 베틀을 버리고 가장 좋은 최신의 방적기를 구입하는데 그의 자금을 사용. (방적과 직포의 분업이 전개되기 시작)
- 수직포공 몰락의 역사는 산업혁명기에 기계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소생산자들의 좌절과 고통을 전형적으로 보여줌. 직포공들은 그들의 번영과 몰락을 차례로 가져다준 기계제 대공업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절망적으로 수직기에 매달릴 뿐이었음. 물론 공장에 취업해 뮬방적공이나 감독으로 변신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임. 그러나 대부분은 수직포를 고집했는데, 공장에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들 또한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 그들은 어디서나 공장을 싫어했으며 존경받는 숙련장인이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이상에 집착. 경제적 궁핍 때문에 노동능력이 있는 수직포공을 대신해 아내와 자식들이 공장문을 두드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음. 당시 랭커셔 농촌지역의 수직포공들이 신흥 면공업 도시로 이주하는 경향이 높았고 그들의 가족이 면공장에 취업하는 일은 매우 흔했음.
- 시간의 산업화 개념은 역사적으로 시간 분할의 가속화로 표현됨. 전산업사외의 시간은 대체로 분할 또는 세분화의 필요성이 적었음. 그것은 밤과 낮, 여름과 겨울, 더위와 추위 등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져 있는, 일종의 농촌적 시간이었음. 그에 따라 전산업사회의 사람들은 짧은 단위로 구분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음. 시간분할은 단위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의 양이 급속하게 증가하거나 또는 일정한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질 때 필요함. 이렇게 보면 산업화 자체도 단위시간당 이룰 수 있는 일의 상대적 증대로 표현할 수 있음. 시간분할의 중요성은 이미 벤저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돈이다라는 경구에 집약됨. 역사적으로 보면 시간분할의 추세는 르네상스 시대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음. 시계의 보급은 이런 추세를 상징. 그렇더라도 시간분할이 좀 더 가속된 것은 산업혁명기에 이르러서였음. 공정을 나누는 분업자체도 시간의 세분화로 표현할 수 있음.
- 대자본은 타협 또는 양보를 넘어서서 공장규제를 통해 군소자본을 구축하려고 했음. 1833년의 공장입법을 둘러싼 대소자본간의 이해대립이야말로 자본일반의 발전과 자기증식을 의미. 무한정한 그리고 거침없는 노동일의 연장을 지향하는 개별 자본의 충돌의 그대로 관철된 초기의 면공장은 과도노동과 저임금, 어린아이와 연소자의 광범한 고용, 그들에 대한 강권적 지배가 남아 있는 곳이었음. 이런 조건아래서 특히 어린이와 연소자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황폐화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것이 마침내는 사회문제로 등장. 대자본은 공장규제를 둘러싼 회피할 수 없는 타협과정에서 인도적 책무를 내세우면서도 오히려 중소자본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추구하려고 했음.
- 19세기 후반 영국경제 쇠퇴문제가 논란이 되는 배경에는 독일과 미국 등 후발 산업국가가 등장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2차 산업혁명기에 전개된 새로운 기술혁신과 개량을 영국 제조업이 적극 도입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음. 19세기 말에는 오랫동안 경공업, 특히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기술혁신과 개량은 더 이상 자본축적의 토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기술이 되었음. 이에 비해, 중공업 분야의 새로운 기술혁인이 활력을 가져옴. 전기력의 사용, 내연기관의 보급, 유기화학산업, 공작기계의 발전, 제강분야의 기술개량 등이 함께 진행되면서 두번째 산업화의 물결이 있었음. 이전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고무, 석유 등이 새로운 공업원료로 주목 받음. 이와 함께 전기산업에 필수적인 구리,금 등 새로운 금속들도 중요한 공업원료로 등장.
- 무거운 근대성은 자본과 노동을 하나로 결합해 그들의 상호의존성을 강화시킴.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자본에 의존하는 임노동자의 지위에 길들여졌고, 기업가 또한 자본의 재생산과 성장을 임노동에 기댐. 그들의 모임은 고정된 장소가 있었음. 양측의 어느쪽도 쉽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없었음. 대공장의 벽은 두 당사자들을 공동의 감옥처럼 둘러쌈.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약하거나,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결합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음. 공장은 그들 공동의 거주지였음. 여기에는 어떤 형태든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동거의 양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 노동법, 담합구조, 국가의 복지제도 등은 모두 이 동거양식과 관련됨.
- 1차대전 이후 영국의 산업지도는 이전과 비교할 때 상당한 변화를 보여줌. 지금까지 수출산업의 중심지였던, 랭커셔, 요크셔, 웨일즈 남부, 스코틀랜드 지역은 극심한 불황으로 쇠퇴한 반면, 미들랜드와 런던 그리고 동남주 지역은 상대적으로 번영을 누림. 그 결과 전통적인 북부 공업지역에서 동남부로 노동력의 이동이 있었음. 불황이 심한 북부의 텅빈 암울한 공장과 런던 근교의 푸른잔디와 튤립으로 둘러싸인, 콘크리트와 유리와 철골빔으로 세워진 흰 건물의 대조야말로 양차대전 사이에 영국 경제의 빛과 어둠을 나타내는 것이었음.
- 1차 대전 이전 시기 미국의 자동차 기업과 비교할 경우 영국 기업의 특이성은 한 기업이 자동차 제작에 필요한 전 부품을 자체조달하려 했다는 점. 미국 자동차 회사는 조립생산자로 출발. 상당수 부품을 외부에서 공급받는 것이 관행이었음.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당시 영국 자동차 공장 숙련공들은 오랫동안 금속분야에 종사한 람들로서 금속가공에 관련된 다양한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었음. 따라서 그들은 한 작업장 안에서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에 더 적합했고 한사람이 여러 공정에 참여할 능력이 있었음. 다른 한편, 영국회사는 상대적으로 자본동원에 더 유리했음. 포드사는 초기에 자신의 기계를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 부품회사에 의존했지만, 영국 자동차 공장은 다양한 공작기계와 반자동기계를 한 공장 건물에 설치. 이 때문에 영국 기업은 조립생산 위주의 미국 기업의 생산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했음.
- 2차대전 이전에 비해 50년대 영국 산업구조는 소수의 거대기업이 특정 산업분야의 생산과 시장을 지배하는 과점적 성격이 좀더 뚜렷해졌으며, 산업별 전문화대신 그 경계를 넘나드는 다종생산기업이 증가. 거대기업간 합병과 상호투자도 잇달았음. 제국화학은 영국 나일론 방적회사를 흡수합병했고, 영국 석유의 새로운 생산설비는 디스트릴러즈 사의 자본투자로 이루어짐.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기업가나 노동자, 정책결정을 담당하는 관료와 정치인에게 이르기까지 불과 10여년 후에 영국제조업이 파국적 결말을 맞으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음. 번영의 시대에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영국 경제사에서 해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임.
-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한편으로는 영국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생산체제의 황금시대가 종국을 맞은 70년대초부터 나타난 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음. 영국뿐만 아니라 그 이후 프랑스, 미국 등 산업국가에서 제조업의 쇠퇴, 또는 대량생산체제의 동요징후가 분명히 드러남. 대량생산체제의 무게중심은 산업화의 역사가 오래된 국가에서 새로운 산업국가로 이동하고 있었음.
-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영국 경제를 넘어 대량생산 담론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줌. 현재 산업화의 역사가 오랜 나라들 가운데 제조업 경쟁을 유지하고 있는 독일과 일본은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함. 이들 나라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공생관계가 강한 것은 아마도 장인생산의 이상과 담론이 20세기에 다른 형태로 지속되었음을 보여줌.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대량생산의 원리가 장인생산을 모두 구축하지는 않았음 독이로가 일본에서 광범하게 뿌리를 내린 소기업주의는 장인생산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 고도로 집중화된 영국제조업이 쇠퇴한 반면, 일본이나 독일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의 대안으로서 장인생산의 원리를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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