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히브리스

역사 2023. 6. 9. 13:30

- 수만 년의 시간을 두고 현생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에 나타난 것이 왜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후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고유전학과 인류사의 보편적 이해에 중요한 질 문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계산 수치에 따르면 대략 3만 9000년 전, 늦어도 3만 7000년 전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축출함으 로써, 즉 현생인류가 나타난 직후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졌다. 하지만 새로운 연대 측정에 따르면 완전히 다른 역사가 펼쳐진다. 현생인류 는 최소 5000년 동안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함께 살다가, 현생 인류가 유럽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 어쨌든 현생인류는 최초의 문화 기술을 통해 세계라는 구조에서 고유한 종이라는 독보적인 지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러한 의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우월함이 유전적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증 거도 많다. 아프리카에서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공통의 조상 으로부터 분화되고 90가지 차이가 생긴 후 현생인류는 우월해지기 시작했다. 이 돌연변이 중 하나가 일종의 망상을 일으켜 그 유전적 토대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개체군에게까지 뻗쳐, 이 개체군이 목적 없는 방랑자가 되지 않고 신비주의, 음악, 동굴 벽화 등을 통해 삶에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 아닐까?
현생인류는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에 세계를 정복하고 네안데르 탈인과 데니소바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현생인류의 승리를 유전 자를 통해 입증할 수 있는 날이 오려면 아프리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기존의 설을 반박하는 것이다. 호모 사 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를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이야기는 고고학계에서 정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현생인류는 오 랜 기간 도움닫기를 하고 숱한 퇴보를 감수해야 했다. 네안데르탈인 과 데니소바인이 자신들만의 거처를 발견했던 북쪽은 우리 조상들 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들은 인류의 요람, 남아프리카에서 성 장하다가 성공가도에 올랐다. 남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유 전적 '인종의 용광로'가 탄생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수많은 만물의 영장 후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 초기 인류의 방랑벽은 대단했다. 이런 성향은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만 생기면 각 집단들은 북쪽으로 이 주를 시도했다. 이들이 꼭 이주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아프 리카 대륙은 이곳에서 세력을 확산시키기에 공간이 충분한 매력적 인 사냥터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유라시아의 절반보다 조금 컸 지만 빙하기에 북반구에서 남쪽의 기온과 그곳의 동식물에 길들여 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은 근동 지방, 인도아대륙, 동남아시아 등 일부에 불과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비아프리카인 호모 에렉투스는 180만 년 전 캅카스 지역에 살았고 훨씬 더 북쪽으로 이 동을 시도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일시적으로 날씨가 온화해진 시기 를 이용해 이동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인도양을 따라가는 남방 통로 는 수천 년 동안 호모 에렉투스의 왕래가 활발했던 곳일 수 있다. 아 주 이른 시기부터 이곳에서는 우리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인류 종들 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입증하는 새로운 발굴물들이 규칙적으로 발견되었다.
- 기저 유라시아인이 유라시아인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차단된 채 살아가는 동안 다른 이들은 세계 정복을 시작했다. 이들은 언젠가 기저 유라시아인과 이웃이 될 터였다. 장벽이 푸르러지거나 녹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것은 3만 년 전, 어쩌면 2만 년 전의 일로 추측 된다. 어쨌든 약 1만 5000년 전의 근동 지방은 유전적으로 거의 균 등하게 2개의 개체군으로 표현된다. 기저 유라시아인들은 네안데르 탈인의 DNA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근동 지방 최초의 농경민들에게서도 이러한 고인류가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8000년 전 기저 유라시아인의 DNA는 유럽으로 이동했다. 아나 톨리아의 농경민은 이 시기에 유럽의 수렵채집인을 밀어냈다. 이 DNA는 유전자 이동으로 네안데르탈인의 비중이 감소해 현재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 반면 아나톨리아인이 진출하지 않았던 아시아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곳에서 네안데르탈인의 DNA는 일정하게 유 지되었고 유럽인보다 그 비중이 높았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 아 원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조상들이 아프리카에서 나 온 직후부터 분리의 역사는 우리의 유전자에도 새겨져 있다. 그래서 현재의 유럽인들은 평균 2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고,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0.5퍼센트 더 많이 지 니고 있다.
- 아프리카에서 현생인류가 사피엔스로 성숙해지고 아라비아반도에 서 기반을 잡은 후에도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 있는 다리는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다. 기후 모델에 따르면 이 지역은 약 3만 년 전 해협양 측의 강우량이 감소해 생명체가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의 통로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오랜 기간 다른 세계 사람들과 차단되어 있다가 약 1만 년 전 사하라 사막이 푸르러지고 북부 통로로 다시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빙하기 동안 해수면이 낮아져 새로운 고향을 찾아 떠났다가 지구의 기후가 온난해지고 수천 년 동안 유라시아의 초기 개체군과 접점이 없었던,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도 이와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늑대와 하이에나, 빙 하와 스텝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성공하기 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이 길의 끝에서 진화 역사상 최 초로 인간의 문화가 생물학적 특성을 이겼다. 빙하기, 굶주림, 가혹 한 자연의 피해를 덜 입은 고인류들은 문명이 탄생한 후에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조상들은 이들에게서 유용한 유전자를 빼앗아왔다. 이를테면 우리가 세계의 지붕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운 유전자 말이다.
- 아프리카의 우리 조상들이 근동 지방으로 이주할 때 나타났던 병목 현상은 지금도 비아프리카인의 유전자를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오늘 날의 세계 인구가 약 1만 명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출발했다면 비아 프리카인은 대략 그 절반에서 시작했다. 이주민들은 유전자풀의 일 부만 나타낸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차지하는 비 중을 제외하면 현재 사하라 이남 이외 지역의 DNA는 완벽하게 아 프리카인의 스펙트럼 내에 있다. 이후에 유라시아인이 된 이들의 조 상은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이러한 집단 규모는 현대 의 관점에서는 크지 않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당시 근동 지방에 서는 인구 밀도가 꽤 높은 편에 속한다.
- 마찬가지로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은 최대 약 5000명인 '장기 개체 군 크기'를 나타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유럽 전역과 아시아의 절반 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이 데이터에 따르면 식량 공급량이 감소했 던 혹한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때 네안데르탈인의 수는 500개 체까지 감소했다. 이들은 거의 멸종 직전에 이르렀다. 네안데르탈인 들이 카니발리즘에 빠졌던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추측도 완전히 잘 못된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 게놈에 잠재적으로 유해한 돌연변 이가 축적된 상태였으리라는 추측도 이보다 훨씬 작은 개체군 크기 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동족들 이 종종 매우 좁은 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혼혈로 유전자 변형이 생겼다. 가장 먼 저 발견된 유전자 변형 중 하나는 두꺼운 피부를 만드는 데 관여했 다. 이러한 유전자의 특성은 추운 북부 지방에서 틀림없이 유용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확실히 자연선택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현재 살아 있는 유라시아인의 70~80퍼센트에게서 케라틴 생산에 관여하는 게놈의 위치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변 형이 나타난다. 케라틴은 피부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손톱을 형성 하는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 생산량이 증가하면 피부가 더 튼튼하고 두꺼워져 열손실을 감소시킨다.
소위 네안데르탈인의 색소 형성 유전자에 이와 동일한 효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피부 두께의 경우처럼 이러한 유전자 변형에 관한 연구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이것은 어떤 조합이 어떤 반응 을 일으키는지 특정하기 어려운 유전자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의 색소 형성 유전자가 더 어두운 피부와 더 밝은 피부 중 어디에 관여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러 한 유전자 변형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피부색은 어둡게 발현될 수도 있고 밝게 발현될 수도 있다. 물론 네안데르탈인 주변에 있던 현생인류에게서 밝은 피부가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짐작케 하는 증 거도 많다. 예를 들어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색소를 더 적게 형성 해 햇빛이 부족한 북부 지방에서 더 효율적으로 비타민 D를 생산했 다는 것이다.
- 네안데르탈인의 색소 형성 유전자는 특히 오늘날의 영국인, 평균 이상이나 평균 이하의 어두운 피부를 가진 모든 영국인에게서 발견 되었다. 이러한 유전자 변형은 피부색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특징일지라도 유전자의 외적 형태, 소위 표현형이 항상 명확하게 결 정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게놈은 이진 코드가 아닌, 수십억 개에 달하는 염기쌍들의 변형과 조합에 숨겨진 정보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우수한 컴퓨터보 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흡연자 유전자'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네안데르탈인 에게서 물려받은 이러한 유전자 변형은 현재 중증·고도 흡연자에게 서 자주 생긴다. 이 유전자는 담배, 구체적으로는 담배의 성분인 니코틴 중독에 훨씬 취약한 특성과 관련이 있다. 어쨌든 다음 두 가지 는 확실하다. 첫째,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담배가 없었다. 둘째, 가장 위험한 신경독 가운데 하나인 담배를 선호하는 것과 담배 연기에 포 함되어 있는 발암 물질이 어떤 생명체의 생존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는 진화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 지 이유 모두 문제의 유전자 변형이 담배에 대한 친화력 외에, 이유 전자 보유자에게 '자연선택'에서 유리한 다른 특성을 발현시켰을 것 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이것이 어떤 특성인지 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네안데르탈인이 담배 말기와 담배 재배 기술을 터득했더라면 동굴이 유해 물질로 가득했으리라는 사 실만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유전자 변형은 다른 중독 장애와는 관련이 없다.
-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또 다른 유전적 특성이 있었다. 추운 북부 지 방의 현생인류에 비해 신체적으로 건강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현대 유럽인에게서는 선천적 면역 체계를 담당하는 톨유사 수용체 중 하 나에서 작용하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단편이 발생하는 빈도가 평 균보다 높다. 이것은 당시 유라시아에 나타났던, 인간에게 위험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적응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 만 어떤 병원체가 정확하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세계 유전자풀에 존재하는 다른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단편 을 살펴보아도, 이 단편이 우연히 확산되었는지, 어떤 장점을 가지 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힐 수 없다. 이 유전자 단편을 보유한 사람은 통증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그다지 기뻐할 일은 아닐 것이다. 현 재의 기준에서 네안데르탈인은 이 유전자 단편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의 8세 어린이와 같은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통해 암호화된 통증 수용체를 실험실에서 제 작한 후 전기 신호에 대한 민감성을 측정함으로써 알려진 사실이다. 네안데르탈인의 통증 유전자를 보유한 유럽인은 전체 유럽 인구 의약 1퍼센트이며 드물게 나타난다. 반면 멕시코와 남아메리카의 원주민 가운데 둘 중 한 명은 이 유전자 단편을 가지고 있다. 이 유전자 단편은 통증에 대한 민감도가 더 높거나, 유전자와 관련이 있거 나, 알려지지 않은 특성이 있건 간에, 이 유전자 단편은 자연선택의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 후 정착되 었거나,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할 때 병목 현상이 있었던 개체 군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아메리카에서 이 단편이 확산 된 것은 유전적 우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을 통해 현생인류가 물려받은 통증에 대한 민감성이 미지의 대륙을 발견했을 때 장점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 다. 통증에 대한 민감성은 독성이 있는 식물 등을 접했을 때 신체에 경고 신호를 보낸다. 이것은 낯선 지역에서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 동식물의 특성을 잘 알았던 네안데 르탈인이 이러한 유전적 특성을 물려준 것인지 그 답은 알 수 없다.
- 네안데르탈인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프로게스테론을 더 많이 생 산했기 때문에 다산을 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이 갖춰져 있었고, 이 것은 더 큰 개체군을 형성하는 데 확실한 생물학적 이점이었을 것이 다. 현생인류는 더 온화한 기후와 생존 기회가 더 많았던 남쪽에서 더 많은 것을 채워 나갔다. 북쪽으로 이동해 네안데르탈인과 혼혈을 했던 현생인류는 자연선택의 이점도 함께 물려받았다. 영국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현대 유럽 여성의 약 60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여성의 유전자 단편을 보유하고 있다.
-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갖기 시작한 이래 동물권을 세 개의 큰 범 주로 분류했던 듯하다. 최대한 많이 먹어치워야 해서 죽여야 하는 동물, 멀리하거나 바로 죽여야 하는 위험한 동물, 위험하지 않지만 먹을 수 없고 성가시면 죽일 수도 있는 동물. 우리 조상들이 유라시 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거대 동물을 멸종시키는 데는 몇천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동물을 다루는 법을 발견했다. 공존과 이용이었다. 하지만 야생 동물을 가 축으로 길들이는 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이었다. 이 시도는 동남아 시아에서 거대한 낙농 및 도축용 쥐를 사육하면서 시작되었다기보 다는 더 북쪽에 있는 아시아와 유럽에 양, 염소, 소, 돼지를 기른 선 구자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전에 석기 시대 유라시아 사람들이 예속물이 아닌 충직한 동반자로 여겼던 동물이 있다. 다름 아닌 개였다.
- 늑대가 가축화되던 초창기에는 틀림없이 새끼 강탈도 있었을 것이 다. 인간은 늑대 새끼에게 젖을 먹일 필요가 없게 되자마자 어미 늑 대를 죽이고 사육을 도맡았을 것이다. 이 행위는 다양한 장소와 시 대에 걸쳐 수차례 시도되었고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미 늑대가 새끼 늑대를 물었을 때, 때로는 사육자들을 물 었을 때, 종종 주인을 공격해 목숨을 잃는 늑대들에게 이런 일이 벌 어졌다. 여러 세대를 지나자 충직한 짐승들이, 어쩌면 다른 수렵·채 집인 집단에서도 길들여져 유사한 특성을 갖게 된 짐승들과 짝짓기 를 하며 점점 우세해졌다. 현대의 개들은 수백 년이라기보다는 수십년에 가까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사육을 통해 길들여졌다. 애완용 여우의 사육에 관한 구소련 출신 학자의 장기 연구 결과를 통해 알 려졌듯이 이러한 성격적 특징에서는 유전자 발현이 중요하다. 1959년 러시아의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Dmitry Belyayev는 대 규모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늑대가 개로 진화할 수 있었는 지 밝히고자 했다. 인간에게 충직하게 길들여진 개의 성격적 특징은 의식적인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그의 연구 가설이 나중에 사실로 입 증되었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벨랴예프는 캐나다의 모피 사육 장에서 사들인 은여우 집단에 대한 진화 모의실험을 빠른 속도로 진 행했다. 그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적고 살짝 무는 습성을 보이는 여우들끼리 교배시켰고, 이 과정을 다음 세대에서 반복 시행했다.
- 10세대에서 20세대가 지난 후에 그는 이 방법으로 여우들이 꼬리 를 흔들고 사육자의 손을 핥는 반응을 하도록 완벽하게 길들였다. 이와 동시에 점점 길들여지는 여우들에게서 처진 귀, 말린 꼬리, 짧 은 주둥이 등 대체로 사람들이 귀엽다고 여기는 외적 특성들이 나타 났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적으로 '귀엽다'고 여겨지는 특성은 아니 었다. 이것은 진화를 통해 학습된 인간의 관점에서 짐승의 충직함을 암시하는 특성이 가축화 과정에서 강화된 것에 불과했다. 벨랴예프 의 실험은 동물이 인간을 좋아하는 특성에 관한 유전적 소인이 특정 한 신체적 특징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 실험 결과에 따르면 교배된 여우를 길들일 때에도 어미 를 통해 습득한 후천적 특성이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이 문제를 파 헤치기 위해 나중에 벨랴예프는 쥐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쥐를 실험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더블링 타임(배가 시간)이 훨씬 짧고 유전 과정을 관찰하기가 더 좋기 때문이었다. 그사이에 그 는 세상을 떠났지만 실험실에서는 여전히 여우가 사육되고 있다. 쥐 실험에서도 공격적인 쥐들과 온순한 쥐들을 분리했다. 새로 낳은 새 끼 중 가장 온순한 쥐들뿐만 아니라 가장 공격적인 쥐들과도 교배시 켰다. 여기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쥐 개체군이 생겼다. 현재 시베 리아의 실험실 방문객들을 황홀함, 두려움, 공포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개체군이 탄생한 것이다. 방문객들이 실험실에 들어오자마자 온순한 쥐들은 유순하고 붙임성 있게 행동한 반면, 다른 쥐들은 철 창으로 달려들고 방문객들에게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이 쥐들이 격 리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방문객의 얼굴을 할퀴었을지도 모른다. 쥐 들의 행동은 사회화를 통해 변하지 않았다. 온순한 성격의 새끼 쥐 들은 태어난 후 공격적인 어미에게 보내졌어도 온순한 성격이 변하 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온순함과 공격성은 후천적 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되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 아프리카에서 이미 호모 에렉투스는 사냥을 했기 때문에 온순한 짐승들은 살아남을 기회가 없었다. 이 짐승들의 유전자에 인간에 대 한 두려움이 자리 잡도록, 인간과 거리를 두도록 긍정적 자연선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현생인류의 진화가 지능적으로 동물을 길들 이도록 진행되었을 때, 여기에 필요한 돌연변이는 아프리카의 동물 권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생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에 도착한 후, 그러니까 다채로운 동물권이 개별적으로만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 탈인, 데니소바인과 으르렁거리고 있던 시절이 되어서야 현생인류는 가축화에 적합한 유전체를 보유한 동물을 만났다. 늑대는 물론이고 나중에는 오로크스와 물소 길들이기에도 성공했다.
늑대의 가축화와 목축이 아프리카 이외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프리카 동물들의 유전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러 요인 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일 테지만 말이다.  수렵 채집인은 아프리카에서 가축 사육자로 발전할 수 없었다. 그곳의 동물군은 이 볼품없 는 두 발 달린 존재에게 어떤 치명적인 위력이 내재되어 있는지 아 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해역 뒤에 펼쳐진 새로운 땅은 우리 조상들에게 큰 무리 없이 사냥터가 되었다.
고기를 차지하려는 이주민들의 탐욕은 무자비하고 끝이 없었다. 그들이 정복한 땅에서 인구가 증가했고 땅에 대한 탐욕은 지구 끝에 닿을 때까지 계속 커져갔다. 전 세계적 수렵 채집 시대 말에 다양 한 개체군들이 일부는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살았고 사냥 을 할 때 서로 방해하며 위협했다. 빙하기 말 북반구에서 인간의 주 거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동시에, 수확량이 풍부한 생활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시대의 두개골에 뚫린 구멍과 골격에 남은 싸움의 흔적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활과 화살로 대 치했다.
- 농경민들은 북서부에서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심지어 이 거대 한 대륙의 남쪽까지 진출했다. 신석기 혁명은 동쪽에서는 인도 아대 륙까지, 북쪽에서는 캅카스에서 유럽의 스텝 지대까지 확산되었다. 고고학적으로 이러한 팽창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어떤 방식 으로 진행되었는지에 관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유전자 데이터를 통해 훨씬 더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특히 유럽의 관점에서 신석기 시대, 즉 신석기인들의 확 산과 관련해 답을 찾기 위한 논쟁이 치열했다. 신석기시대가 확대된 것인가, 아니면 신석기인들이 확산된 것인가? 유럽의 수렵채집 인이 정착 생활양식을 수입한 것인가, 아니면 이웃에게 밀려난 것 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는 데에 유전자 데이터만큼 명확한 것은 없 다. 유럽의 수렵채집인은 우위를 빼앗겼고 옆으로 밀려났다. 그것 도 불과 수백 년 사이에 말이다. 신석기 팽창 이전에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농경민들과 완전히 다르다. 이들의 뼈에서는 당시 아나톨리아 거주자들과 동일한 DNA가 발견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나타났을 때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땅을, 아 시아에서는 데니소바인의 땅을 차지했다. 이와 유사하게 최초의 농 경민들에게 이 팽창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들의 생활양식과 더 많은 후손을 낳을 수 있는 기회는 수렵 채집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축출에 반드시 몰살이 뒤따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렵 채집인은 덜 비옥한 땅, 특히 유럽의 북부 지역으로 후퇴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전자 데이터 는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수렵 채집인 DNA는 스칸디나비 아인과 발트족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데, 농경민 유전자와 거의 동일한 비중을 차지한다. 반면 독일 중부와 프랑스 남부에 펼쳐진 비옥한 지대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출발점에 가까워질수록 수렵·채 집인 요소가 훨씬 적게 나타난다.  유럽에서 기존의 정착민과 새로 운 이주민의 혼혈기는 거의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토착 수렵 채집인과 아나톨리아 이주민의 후손들이 서로를 잘 피하며 지내왔던 듯하다.
- 아나톨리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농경문화가 번성했고 농경에 사용할 수 있는 경작지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중국의 초기 농민 들은 약 6000년 전 지금의 태국과 베트남으로 이주한 다음 수마트 라로 진출했다. 소위 호아빈Hoabinhian 문화의 수렵 채집인이 사라지 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보르네오와 자바 지역까지의 DNA에 나타난 중국 남부 농경민의 특성을 들 수 있다. 북부에서도 같은 일 이 벌어졌다. 처음에 농경민은 한반도로 이동했고, 약 3500년 전에 는 배를 타고 일본의 섬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농경민은 고도로 발달한 수렵 채집 문화를 만났다. 이 문화는 수천 년 전 근동 지방의 나투프인들의 정착생활과 매우 흡사하다. 일본의 원주민들이 초 기 형태의 농경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말이다. 어쨌든 조몬 문화권에 있던 사람들은 1만 5000년 전에 이미 토기를 제작했던 세계 최초의 도공으로 여겨진다. 조몬 문화 후기 토기에서는 놀라운 예술적 기교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 대륙에서 밀려들어온 이주민들을 이기지 못 했다. 조몬 문화는 새로운 이주민들이 정착해 수백 년에 걸쳐 일본 전역의 섬으로 확산된 후 사라졌다. 수렵 채집인은 밀려났다. 일본 의 최북단과 최남단의 섬에서는 고대 일본의 수렵 채집인의 DNA 비중이 가장 높다. 오늘날 일본인에게서 이 비중은 평균 10퍼센트이 고, 북부에서는 두 배 이상 높다. 조몬 유전자 비중은 최후의 수렵. 채집인의 후손들인 아이누족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 북부의 섬 홋카이도에 살고 있으며, 이들 중에는 조몬 유전자를 50퍼센트 이상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섬 타이완은 빙하기에 아시아 대륙의 일부였다. 약 5000년 전에 이주한 동아시아인들이 이 섬을 차지하기 전에는 이곳에도 수렵 채집인이 살았다. 대륙과의 상호작용이 거의 없었던 일본에는 농경민이 이주한 후 놀라울 정도로 동질적인 유전자 구조가 정착되었다. 반면 타이완은 인류의 마지막 대팽창 행렬의 교두보였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동아시아 유전자는 지구의 절반, 즉 아프리카 해안의 인도양 최서단에서 태평 양의 아메리카 해안까지 확산되었다.
최대 90퍼센트가 물로 덮여 있는 반구를 수반구라고 하는데, 수반 구의 모든 군도를 인류는 커다란 돛이 달린 쌍동선 형태의 배를 타 고 정복했다. 이 배에는 돼지, 닭, 쥐, 옛 고향에서 재배종으로 길들 여진 경제 식물이 실려 있었다. 지구에서 이용 가능한 마지막 땅을 찾아 발견자들은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항해했다. 전설의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유전자 흔적 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뉴질랜드를 거쳐 하와이와 이스터섬을 향했 다. 특히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서 인류의 정복은 모든 가용 자원을 착취한다는 의미였다. 정착민들은 다른 섬을 발견해야 이러한 자원 의 유한성을 피할 수 있었다. 더는 발견할 섬이 없고 성장 지향적 생 활양식이 많은 지역은 파열되고 있었다.
- 오스트로네시아 팽창 당시 항해자들은 생존에 필요한 것도 함께 가 져왔다. 개, 돼지, 닭, 그리고 쥐까지. 특히 쥐는 바다를 건너는 여행 에서 저항력이 있기 때문에 영양원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던 듯하 다. 코코야자도 인류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건너왔다. 물론 섬들, 특 히 미크로네시아의 아주 작은 섬들에서는 유라시아나 아메리카에도 있었고 신석기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농경이라는 선택지에 한 번도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도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에 해당하는 전 지역에서 대형 농경지는 거의 볼 수 없고, 뿌리채소 경작이나, 닭과 돼지 등 방목지가 필요 없고 단순 분해자 역할을 하는 짐승 사육이 주를 이룬다.
섬 주민들도 훌륭한 음식 재활용자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멀리 떨어진 섬으로 팽창을 시도할 때마다 인류는 확산에 성공했 던 듯하다. 음식 재활용자라는 단어에는, 에너지를 저장하고 분해한 다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신진대사 체계가 지방과 에너지를 비축해두었다가 수십 일에서 수 주가 걸리는 여행 동안 분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탐사 여행에서 긴 굶주림의 시기를 견 디고, 새로운 섬에서 처음에 농경의 기반을 다지는 시기를 극복해야 할 때, 유전자는 생존에 유리한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에 이 유전자 는 축복이었다.
반면 당, 지방, 단백질 결핍에 시달릴 일이 없는 오늘날의 후손에 게 이것은 저주가 될 수 있다. 비만증에 걸리기 쉬워 건강을 해칠 위 험성이 매우 높고 평균 수명이 감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 재 세계 10대 비만증 국가 중 8개국이 태평양의 군도에 있다. 오스 트로네시아 팽창의 유전적 병목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 있는 '절약 유전자'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세계 20대 비만증 국가를 살펴보면 태평양 연안 국가 외에 8개국은 아랍 지역에 있다. 대부분이 지난 수천 년 동안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오랜 가뭄과 기근을 이겨내야 했던 지역이다. 20대 국가 중 이러한 지리적 분류에 어긋나는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
- 오스트로네시아 팽창 시기에 태평양 전역과 인도양 일부로 이주한 인간은 우리 종이 배출한 가장 재능이 뛰어나고 대담한 뱃사람들이 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여정은 섬에서 끝이 났다. 이들은 고기 잡이를 하러 떠났으나 여기에서 해상국가가 탄생하지는 않았다. 건 조建造에 필요한 천연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5세기와 16세기 에 세계 대양의 정복자로 부상한 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 이었다. 불과 100년 만에 이들은 중남미를 정복해 유전자 지도를 완 전히 뒤바꿔놓았다. 17세기 초반 영국이 뒤를 이어 주도적인 해상 세력이 되었고, 이후 수백 년 동안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해 전 세계 를 주름잡았다. 아메리카 북부에 잇달아 서유럽인의 DNA가 새겨졌 고 이곳에서도 원주민들이 축출되었다. 이 대목에서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후 노예무역의 과도한 성행으로 아프리카 요소가 신세계에, 특히 아메리카 북부에, 이어서 중부와 남부에까지 도달했다. 현재 아메리카는 아프리카 외에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대륙이 되었다.
- 인도의 엘리트들
4900년 전 유럽을 뒤집어놓은 스텝 주민들의 이동은 수적 우위를 바 탕으로 했다. 이것은 현대인의 게놈에 쓰여 있으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우위는 띠무늬 토기 및 종형 토기 문화가 정착되 는 과정뿐만 아니라 유럽 언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문화적 우세와 도 관련이 있다. 이전에 사용되던 거의 모든 언어를 몰아낸 인도유럽 어족은 스텝 지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상언어가 7000여 년전에 신석기 혁명과 함께 이베리아반도로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스크어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언어 축출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 악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로, 거의 모든 구어와 문어 에 이런 표현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의 정복자들이 토착민의 언어를 수용했다는 역사적 사례가 존재할 것이다.
인도의 사례에서 이것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가장 최 근의 유전자 데이터에 따르면 스텝 팽창은 안드로노보 문화의 전성 기였던 약 3600년 전에 인도아대륙에 상륙했다. 현재 인도 북부 에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인 산스크리트어에서 기원한 힌디어가우 세한 반면, 인구 13억 명의 국가인 인도의 남부로 내려갈수록 인도 유럽어족 계통에 속하지 않는 드라비다어의 비중이 높아진다. 스텝 DNA의 비중도 같은 방식으로 감소한다. 북부에서는 스텝 DNA의 비중이 평균 30퍼센트인 반면, 남부에서는 5퍼센트 미만이다.
- 인도의 북부와 남부뿐만 아니라 계층들 간에도 스텝 요소 비중 이 다르게 분포되어 있다. 하필 사회적 특권 계급, 즉 전통적으로 힌 두교 승려가 많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의 경우 북부와 남부에서 동일하게 스텝 DNA 요소가 평균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 다. 카스트의 다른 계급에서는 인구 단면도에 걸맞게 DNA의 스텝 요소 비중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감소한 반면, 브라만의 경 우에는 북쪽에서 이동한 유전자들이 인도아대륙 전역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전자 연구 결과가 최소한의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지라 도 정치적으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의 공식적인 신분제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출생해서 결혼하고 사망할 때 까지 현실의 삶에 여전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 전통에 서 브라만에게는 가장 높은 계층으로서 특별한 역할이 주어진다. 이 들은 구전으로 전승되던 종교 텍스트를 책으로 편찬한 경전 《베다》 를 가르치는 선생이나 학자다. 이러한 전승 문헌에서도 이주민들이 북쪽에서 인도로 정확하게 약 4000년에서 3500년 전에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이주민들을 '인도아리아인'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더 하얀 피부로 인해 다른 인도인과 차이가 나 는 브라만들의 위치가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명확해진 셈이다.
새로운 유전자 연구 결과는 브라만이 구별된 계층이 아니라, 이주 민을 통해 유입된 DNA 요소가 평균 이상으로 우세함을 입증할 뿐 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 결과는 많은 전통주의자들이 최신 생명공학 의 분자 데이터를 제시하며 시대착오적인 카스트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브라만의 대부분이 남아시아에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 20세기는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히브리스 Homo bybris로 만들었다. 호모 히브리스는 자신의 이성을, 즉 다른 모든 생명체와 두드러진 차이를 만드는 기관을 전보다 더 잘 다룰 줄 안다. 이 기관은 인간을 여기까지 인도했고, 지구를 부하 용량의 한계까지, 무엇보다 이런 의미에서 형성하고 착취하는 한계까지 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제 지구의 한계가 인간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화의 특성으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팽창, 영원한 진보는 인간에게 더 이상 가능 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리한 종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았다. 하 지만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이 결정권을 가진 종으로 우뚝 선 것은 모든 경쟁을 물리친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 문명의 지속은 신석기시대 이후 자원 경쟁 에서 다른 생물보다 우세하고, 그들을 억압하거나 제거한 것과 불가 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은 돌도끼를 만들고, 최초로 불을 사용하고, 최초의 동굴 벽화를 그려온 이래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거룩해짐으 로써 영생을 보장받고, 더 숭고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사 로잡혀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전적으로 표현해 거의 모든 진화 과정을 결정하는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의 산물이었다. 최근까지 인류는 일시적인 승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통치권이 지 구라는 행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적은 우리 자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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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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