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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에티켓

인문 2025. 1. 24. 06:48

-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듣는 말의 세가지 패턴
첫째, 과소평가하기. 그 지혜들 속에는 단 하나의 교훈이 들어 있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기.
두번째, 스승 스타일로 교훈주기. 이들은 당신의 병을 귀중한 경험으로, 일종의 생존훈련으로, 육체 외의 정신과 영혼을 위한 훈육으로 보는 것. 모든 것에는 깊은 뜻이 있으니 그걸 깨달으라는 식
세번째, 해법제시.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예견하고, 당신의 병을 고칠 요법을 안다고 주장. 마인드 컨트롤이나 기도문 같은 게 당신을 낫게 해줄 거라면서 만약 그걸 시도하지 않으면 애석한 일이 될테고, 치유는 오직 당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으니 결코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말함.

- 당신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육체가 먼저 변하기 시작합니다. 느긋한 속도로는 아닙니다. 극단적이어서 마치 몸이 갑자기 불균형에 빠져 버린 듯 합니다. 힘은 다 빠져나가고, 나약함이 사지를 점령합니다. 분명 당신의 몸인데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런 느낌이 당신을 절망에 빠뜨립니다.
당신의 몸이 다른 때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죽음은 여러가지 종합적 증상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어떤 증상들은 일찍부터 몰래 스며듭니다.
어쩌면 변비나 설사를 하거나, 갑자기 딸꾹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가려움증일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피곤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잠이 안오죠. 점점 자주 메스꺼워집니다. 당신은 지쳐서 허약해져 버립니다.
그 모든 것들을 의사들은 증상의 부담이라 부릅니다. 당신을 그토록 무겁게 누르는 것은 통증만은 아닙니다. 당신 몸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커다른 의심을 하면서 말이죠.
죽음의 첫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은 이 쇠락을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날 아침 거울을 보면 도무지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이가 보인다고. 몸이 변화하고, 그 안에 살던 인간도 몸과 함께 변한다고요.
슬픔이 생활에 침투합니다.
다아신은 마지막으로 바다에 갔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갔던 거에요. 일터에서 차를 운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잔 것도 마지막이었습니다.
마지막 눈.
식당에서 마지막 영수증.
당신 머리 위로 뜬 마지막 달.
당신의 재능을 마지막으로 발휘한 것이에요.

- 어떤 사람들은 곰페르츠의 죽음의 법칙에 기반을 둔 통계학으로 위로를 삼기도 합니다. 즉 서른살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8년에 한번씩 바로 다음년도에 죽을 확률이 두배로 높아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40세이 죽는 것은 불행이고, 60세에 죽는 것은 운명이겠지만, 70세를 넘기기만 하면 통계학적으로 볼 때 더 이상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 서른부터 심장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마흔부터는 근육이 탄력성을 잃습니다.
쉰부터 뼈의 밀도가 낮아집니다.
예순부터는 평균적으로 치아의 3분의 1이 빠집니다.
일흔부터는 두개골 속의 뇌가 줄어듭니다.
당신은 낡아질 대로 낡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체계는 부서집니다. 죽음 역시 그와 동시에 충분히 빨리, 그렇게 진행됩니다.
삶에 갑자기 너무 짧은 동시에 너무 긴 시간이 주어집니다.
인생이 사그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생활을 이루는 모든 행위를 더 이상 차근차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혼자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돈을 관리할 수 있었고 약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시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씻고 청소하고 전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습니다.

- 삶의 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제3자의 입장이라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겠죠. 하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는 더이상 결정적 대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니까요.
그래서 경험많은 의사들이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겸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존중심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환자에게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적어도 너무 큰 희망을 주지 않도록 합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결국 당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요.

- 육체적 고통이란 말 그대로 육체의 고통입니다. 사회적 고통이란 마음으로 스며드는 절망, 어디에서 죽을지, 누가 임종을 지켜줄지, 남은 일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고통입니다.
영적인 고통은 의미에 관한 질문들, 죽음이란 게 왜 있는 건지, 왜 하필 나인지, 사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사후라는 게 있기나 한 건지에 대한 의문의 고통입니다.
심리적 고통은 두려움입니다. 고통을 당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외로움 앞의 두려움, 불확실성 앞의 두려움, 혼자인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죽음의 결정적 요인들 중 하나입니다. 두려움은 통증을 증가시킵니다.

- 폐가 작동을 멈추면 의식을 잃을 때까지 핏속에 이산화탄소가 늘어나는데, 이런 일은 수면상태에서 일어납니다. 결국 질식사로 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의식을 잃은 후에라야 당신은 산소부족으로 죽게 되니까요. 
실제로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호흡장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호흡장애는 실제로 공기를 공급받지 못해서 겪게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이 호흡장애를 일으키거나 유발하는 것입니다. 패닉 상태가 되면 숨을 헐떡거리게 됩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침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고요하게 함께 호흡을 한 뒤 환자를 자리에 앉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시원한 공기가 얼굴에 닿습니다. 이때 말초신경이 산소와 만나서 호흡을 다스려 줍니다. 손선풍기만으로도 효과가 있습니다.
통증의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증은 죽음의 모든 영역에서 의사들이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나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사들은 애초에 통증에 관한 면밀한 분석을 합니다. 주된 통증이 무엇이고, 무엇이 통증을 유발하는지, 다른 부위로 옮겨가기도 하는지, 통증의 기간과 강도, 통증의 느김, 누르듯 아픈지, 찌르르 아픈지, 살을 베이는 듯 아픈지, 쑤시듯 아픈지, 콕콕 찌르는 듯 아픈지, 묵직한 느낌인지, 아니면 타들어가는 느낌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에 소인 듯한 아픔? 날카로운 느낌? 은근한 복통? 혹은 폭발적 아픔인지, 통증의 부위가 어디인지까지 세세하게 말입니다.
어떤 이름으로 통증을 부르든 그들은 원인을 없애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들은 정확히 당신과, 당신이 느끼는 통증에 맞는 진통제로 재단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들은 통증을, 그것도 아주 잘 완화할 수 있습니다.

- 견딜 수 없을 정ㄷ로 심한 통증을 느끼고, 당신이 원하는 경우 의사들은 당신에게 투약하는 진통제 양을 더 많이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통증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대신 다른 것들도 모두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건 손실일 수도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 중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신이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부였던 이들과 손을 잡은 채 예전에 갔던 길을 걷고, 친구들을 만나거나 추억의 장소를 다시 가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라도 이런 작용에 대한 설명을 잘 들어둬야 합니다. 이런 옵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 이제 식욕도 점점 사라집니다. 무언가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게 수개월 전이었던가. 제일 먼저 사라지는 감각은 후각인데, 죽는 순간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라지기 시작해서 미각과 함께 없어집니다.
이제 맛있는 것이라곤 없습니다. 고기도 맛없고, 빵도 맛없고, 채소도 맛없고, 과일도 맛없습니다. 가장 좋아하던 요리도 맛이 없죠. 그중에서도 좀 오래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이스크림이나 얼린 과일입니다. 요구르트가 좋다는 사람도 있죠.
청어절임 한 입,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 검은 빵 한조각. 언젠가는 이런 작은 관심마저 사라집니다. 배가 고프지도 않습니다. 육체는 더 이상 뭘 원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 당신은 먹지 않아서 죽는 게 아닙니다. 죽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입으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말을 하기 어려워지고 당신의 목소리는 호흡처럼 들립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마지막으로 마쳐야 한다면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앞으로 더 쇠약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기회가 없습니다. 용서할게, 미안했어, 사랑해, 고마워, 잘 있어요, 라는 말을요.
그건 당신이 꼭 해야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가까이 지켜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달콤한 화해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수년 동안 갈라놓았던 틈을, 마치 죽음이라는 최정상에서 화합이라도 할 것처럼 하는 화해. 아름다운 죽음으로 절정을 맞는 찬란한 종결. 그런 생각은 오로지 건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상상입니다.

- 이제 허약해진 몸은 자꾸 잠을 자게 만듭니다.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길게. 모든 게 너무 힘듭니다. 대부분은 입으로 숨을 쉬기 때문에 입안 점막이 바짝 말라 침을 삼키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목구멍이 유리파편처름 건조하고 혀가 목구멍에 달라붙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느끼지만 마시는 것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런 욕구의 영역에서 벗어난 상탠까요. 그저 느낄 뿐.
얼마전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주사를 놓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삶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던 장기들은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순환계는 피를 신체의 핵심부문에만 집중해서 보냅니다. 최소한의 피를 공급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지요. 신장은 수분의 균형을 맞추는 기관입니다. 죽음이 임박하면 제일 먼저 자신의 임무를 제한하고 작동을 멈추는 장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분은 거의 방출되지 못합니다. 수분은 조직안에 저장되어 있다가 허파에 들어가 호흡을 가쁘게 합니다.
그래도 물을 마실 수 있는 한 마셔야 합니다. 의사가 완전히 주사로만 처리하게 두지 마세요.
누군가가 곁에 있는 사람은 얼음을 혀 위에 얹어 주거나 물기를 머금은 거즈를 빨게 하거나 스프레이로 입을 적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와인도 좋고 주스도 좋습니다. 산이 들어간 음료의 향기는 침샘을 자극시킵니다.
당신의 육체는 더욱더 심하게 쇠락합니다. 촛불을 불어 후 하고 끌 힘도 없어진 지금, 이제 죽기전 주변을 준비시킬 시간입니다. 특히 집에서 죽기를 바란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 수술실 수건이 초록색인 이유는, 그 위에 묻은 피가 끔직한 빨간색이 아닌 어두운 색의 얼룩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종양이 터질 가능성이 있는 환자의 침대 시트는 하얀색이면 안됩니다. 오직 초록색이어야 합니다. 불안정한 가운데서도 안정을 가져다 주니까요.

- 마지막 며칠은 심한 불안감이 휩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침대보를 쥐어뜯거나 옷을 벗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 버리려고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을 덮은 모든 것들을 훌훌 벗어버립니다. 그중에서 흔한 제스처는 움켜쥐거나 허공으로 손을 내뻗는 것입니다.
어떤 임종 환자들, 그중에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사람들은 상징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을 합니다.
가령 어떤 여성은 갑자기 산책용 장화를 달라고 합니다. 어떤 남성은 기차를 놓칠까봐 걱정하고요. 다른 이들은 가방에 짐을 싸고 외투를 달라고 하거나 임종의 침상에서 온 힘을 다해 세계여행 책자를 주문하기도 합니다. 의사들은 이것을 죽어가는 사람들의 상징언어라 부릅니다. 

- 의사들은 흔히 병이 죽음의 방향을 지시한다고 말합니다.
간에 병이난 사람들은 점점 늘어가는 기능 부전증과 함께 코마상태에 빠집니다. 신장에 병이난 사람들은 방출되지 못한 소변이 늘어나며 죽음이 진행되고, 폐에 병이든 사람들은 혈액내 이산화탄소가 증가해 의식불명에 빠집니다.
병동에서는 이제 점점 더 자주 당신을 살핍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죽음을 예고하는 무엇인가 다른 변화들이 나타나는지를 살핍니다.
모두가 당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당신은 얕은 숨을 쉽니다. 호흡이란 건 사실 굉장한 겁니다. 호흡은 무의식적으로 조절되면서도 의식적으로 조절이 가능하지요. 사는 동안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죽음을 앞둔 이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호흡은 이제 새로운 패턴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깊었다가 얕아지고 그러다 멈추고, 그 상태로 얼마간 숨을 멈추고 있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호흡이 시작됩니다. 겨울잠 자는 동물들이 이렇게 숨을 쉰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인간도.
당신은 호흡을 하는 동안 끙끙대고 신음합니다. 항상 그러거나 게속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반복됩니다. 당신 옆의 누군가는 이 호흡소리가 주는 인상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숨을 한번 쉴 때마다 그 안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또 누군가는 그 숨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죽음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줄 수 있는 것에서요.
어떤 의사들은 당신의 상태가 의식불명이기는 하지만 코마는 아니고, 일종의 꿈꾸는 상태라고 믿습니다. 손톱과 발톱은 푸르스름하게 변했고 어쩌면 무릎이나 뼈나 입술까지도 그럴겁니다. 피가 몸 안에서 빨리 돌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쇠약함이 입술을 헤벌리게 하고 뺨은 움푹 들어갑니다. 두 눈은 눈두덩 깊은 곳으로 쑥 들어가 버립니다. 코가 벌어진 입 위로 뾰족이 솟아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이런 모습은 의사가 치료를 멈추는 신호였을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는 사제가 작업을 넘겨받았습니다.

- 당신의 얼굴은 충격적입니다. 죽음이 당연한 섭리가 아니라 생활습관을 잘못 운용해 온 결과라고 믿는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충격적입니다. 젊거나 늙는 것이 자연스러운 육체의 흐름이 아니라 정신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현대사회의 시선 때문.
음식을 삼키는 반사기능은 약해져 구강 깊은 곳에 침이 고였습니다. 숨을 쉬면 공기가 그렁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죽음의 그르렁거립.
가족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 당신이 괴로워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양사들조차도 그건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이건 반사작용 같은 것. 보는 것 같은, 그르렁거리는 호흡소리를 들으면 많은 이가 즉각 어떤 행동을 요구합니다. 요양사들은 이런 경우에 오히려 이마를 봅니다. 통증 때문에 찌푸렸는지를요.
죽음이 임박하면 이마를 찌푸리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이제 통증의 악령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나 겁니다. 이제 임종의 시간이 아주 가까워졌다는 의미

- 아주 오래전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 심장이라고 생각했고, 호흡은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증명서라 믿음. 그래서 호흡이 멈추면 죽은 것이라고 했다.
현대 과학자들은 심장 대신 뇌를, 영혼대신 의식을 말할 뿐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 우리 현대인은 그것을 뇌라고 믿음.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우리가 저장한 것들, 기억들, 감정, 경험, 능력이다.
그래서 뇌 기능의 상실을 죽음이라고 선언. 뇌의 활동은 심장이 정지한 후 20초에서 30초 안에 멈춘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때 뇌가 육체로 신경전달물질을 내뿜는다고 한다. 세로토닌, 엔돌핀, 도파민 같은 것들. 사랑에 빠졌을 때, 땀 흘리며 운동했을 때, 섹스할 때 느꼈던 호르몬들이다.
엔돌핀이 나온다는 이론을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죽어가는 뇌가 마지막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절망적으로 알아내려는 노력이라는 것. 죽어가는 뇌가 적절하게 생을 빠져나가려고 마지막으로 터뜨리는 아름다운 불꽃이라는 것이다.

- 주인이 육체를 떠난 뒤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춘다. 그 즉시 혈소판, 적혈구, 백혈구들은 아래로 가라앉고, 육체의 맨 아래 부분에 축 늘어짐. 몸 안의 다른 종류의 액체들도 중력의 지배하에 바닥으로 떨어짐. 세포들은 얼마간 더 물질대사를 하다가 이내 생화학적 과정을 멈춤.
예전의 질서가 모두 무너진다. 시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폭발적 과정들은 외부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얼굴만이 작은 힌트를 나타낸다.
죽음의 시점에서 근육은 탄력성을 잃게 되는데, 망자의 얼굴에서 그 현상이 부드럽게 나타남. 당신의 표정은 조금전까지 죽음을 한껏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럼에도 그 어떤 근본적인 것이 변질되었다는 것만은 나타내는 얼굴이다.

- 이제 중요한 것은, 지금 중요한 것은, 서둘러 급히 해야할 일은, 무조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없다.
숨을 들이마셔 보세요. 시원하게 숨을 한번 쉬자고요.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있어보죠. 어쩌면 울거나 망자의 손을 잡은 채 있으면 됩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하면 됩니다.

- 누군가는 슬픔이 목구멍을 너무 막은 나머지 질식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임. 어떤 이들은 위의 통증으로 몸을 구부리고, 어떤 이들은 경련을 느끼기도 함. 어떤 이들은 어지럼증을, 또 어떤 이들은 팔다리가 무감각하거나 저리다고 느낌. 어쩌면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심장 주위로 무엇인가 조요들거나 꽉 누른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름.
어쩌면 그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이 너무 뜨거워 피부를 태우거나 긴장시킨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화가 전혀 안될지도 모르고, 마치 육체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체험하는 것이 이상하다거나 병적이라거나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그저 슬퍼하는 중이다. 내면의 동력 역시, 보통은 믿고 맡길 수 있던 판단시스템이 고장나기도 한다.
많은 이가 식욕을 잃는다. 음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다. 다른 이들에게는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 엄습한다. 슬픔 때문에 물을 마시는 것을 잊어버린다. 하도 울어서 눈물이 육체를 말리기 때문에 탈수가 된다. 
또 다른 이들은 술을 마셔댄다. 잠을 이루지 못하가너 쉼 없이 자기도 한다. 그들은 감각을 잃어버린 듯 느낀다. 아무것도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남겨진 이들이 느끼는 당신 없는 첫 주를 황량하고 황폐한 사막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은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 숲으로, 어떤 사람은 수 키로를 지나갔음에도 늘 똑같은 풍경 같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이 시기의 혼돈에 의미를, 어떤 의미라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훗날 이 시기의 이런 노력들이 소용없는 짓이었다고 생각. 추모의 슬픔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리고 어떤 감정들 속에 표현되든 말이다.

- 추모의 슬픔의 시기에 도움되는 요령
* 물을 마실 것 : 눈물때문에 탈수가 되므로
* 외출할 것 : 바람은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지 않으므로, 나무들은 누가 우는지에 관심 없으므로
* 움직일 것 : 이 모든 빌어먹을 상황에서 달라질 것이 없지만 그래도 운동할 것. 잠시 동안의 산책일지라도 운동은 진정작용이 있으므로
* 샤워할 것 : 모든게 아무 의미가 없는데 왜 몸을 씻고 빨래를 하냐고? 거의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게 정화작용을 하므로
* 먹을 것 : 조금이라도
* 무엇인가를 돌볼 것 : 꽃, 개, 자동차 등 무언가를 조금 돌보는 게 도움이 되니까
* 조심할 것 : 당신들을 위해서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슬픔의 파도가 높이 솟아 오르면 기계를 작동하거나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도로를 빨리 건너는 것은 위험하므로

- 슬픔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듬. 그리고 지치게 만듬.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그 슬픔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움. 그들은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참는다.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에 있을 때만이라도 체면을 지킨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하루 새 아침을 맞으며 일종의 무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그리 강력한 도움이 되진 않는다. 작은 제스처 하나, 작은 기억의 파편이 자기통제를 무너뜨리기 십상. 그러고 나면 고통이 파도처럼 높이 솟아오르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어져 흐른다. 탁자의 당신자리, 벽에 걸린 사진, 여전히 남아 있는 당신의 편지들

- 당신이 죽은지 6년이 되었는지, 어쩌면 7년, 8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당신이 마치 어제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을 추모하는 슬픔이 점점 더 침묵하게 될지 몰라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적 없는 사람들은 이 커다란 슬픔 덩어리가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줄어든다고 가정한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작아지고 부서져서 어느 날에는 완전히 사라진다며. 하지만 이건 완전히 틀렸다.
단지, 슬픔이 점점 더 작은 공간에 모여 있게 되는 것뿐이다. 슬픔은 예전과 똑같은 크기로 남아 있으며 없어질 수 없는 상태로 작은 공간에 놓이는 것이다. 슬픔은 여전히 남는다.
나이가 들어 느끼는 죽음의 슬픔은 조금 다르다. 죽음은 이제 나와 깊은 연관이 있게 된다. 자신 역시 이제 갈때가 되었다고 느끼는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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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4

Quote of the day 2025. 1. 24.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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