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국 병원들은 상담실이나 명상실 같은 여유공간을 설치해 두고, 종교에 관계없이 환자나 보호자들이 와서 기도하고 울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 국내 대형병원에는 명상실이 들어갈만한 공간을 온통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어 병원에 온 것인지 백화점에 온 것인지 분간이 안된다. 오늘날 한국의 병원은 과연 누구를 위한 병원일까.

- 법조계와 의료계의 시각이 다른 문제의 본질은 의료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음을 의료현장에서 종사하는 사람 외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폐렴환자에게 항생제는 필수다.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치명적(회생불가능)이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환자를 회생시킬 수 있다. 물론 항생제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달리 표현하면, 항생제를 써서 환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99퍼센트 이상의 이득과 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손해를 비교해 결정하게 되는 절대적 의료행위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의사의 결정과 행동은 절대적이고, 무한 책임을 진다. 이같은 의학적 결정은 회생가능, 회생불가능으로 이원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진료현장에서 이뤄지고 있는 의학적 결정은 그렇지 못하다. 인위적으로 인체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연명도구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회생가능성 예측이 굉장히 어려워졌다. 법은 회생가능성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둘 중 하나의 답변을 요구하지만, 진료현장에서는 회생가능성의 판단이 100%와 0%로 명확히 구분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확률을 예측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 80년대 병원에서 일했던 의사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임종에 임박한 환자를 구급차에 실어 집으로 모셔다 드리는 일이었음. 집을 떠나 객사하는 것을 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 그러나 사회가 병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됨에 따라 91년 10%대에 불과하던 병원에서 임종하는 말기암 환자 비율이 2010년에는 90%에 근접했고, 연명장치가 계속 발전하면서 임종의 의료화 현상도 가속화됨.
현대 의학으로 더는 치료가 불가능하며, 중환자실 의료기기로 생명연장만 가능하다고 할 때 그렇게라도 살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나 진료현장에서는 의료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상황이 애매할수록 더 많은 검사나 치료를 행하고, 상태가 위중해지만 일단 연명장치부터 적용하는 것이 관행이 됨.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의학적 결정에 대해 사회가 의료진을 보호할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
그 결과 리엔재단이 2010년 발표한 임종의 질 보고서에서 한국은 OECD국가중 최하위권을 기록. 1등을 차지한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가 국민 1인당 CR, MRI등 고가 의료장비 보유대수는 네배에 달하고, 항암제를 포함한 약은 두 배 이상 쓰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임종의 질은 의료수준이나 경제적 요인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임종의 질을 떨어뜨리는 의료행위가 이뤄지는 이면에는 투병과 임종과정에 환자 본인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한국만의 특수한 가족문화도 있다.

- 회생가능성 없어 임종을 앞둔 환자나 보호자가 할 수 있는 의료선택은 크게 두가지.
첫째, 생명이 붙어 있는 기간을 연장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가능한 연명의료를 모두 시행하는 의료집착적 행위. 많은 경우 환자가 회복할 수 있기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이쪽을 선택. 
둘째, 삶의 기간보다 질에 중점을 두고 가능한 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완화의료. 의료진은 기본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함. 이런 병원 시스템 속에서는 현대의학으로 치료불가능한 환자뿐 아니라 고령으로 자연사를 앞두고 있는 노인에게도 모든 의학적 방법을 동원해 생명연장을 시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짐. 
그렇지만 임종과정에서 일어나는 호흡곤란에 인공호흡기를 적용하고, 신장기능이 떨어지면 투석을 해서 절대적 생존기간을 늘리는 것이 환자에게 의미있는 삶을 주지 못할 뿐더러 결과적으로 임종단계의 고통받는 기간만 연장했다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일일까.

- 카톨릭에서 제정한 의학윤리 지침서에서는 인공호흡기 같은 예외적 의료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지만 간호행위, 영양공급 등 필수 의료행위는 통상적인 도덕적 의무라고 제시. 반면 서양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영양공급 문제도 포함된 경우가 많다.
한편 한국의 의료현황은 크게 다름. 국내의 한 조사에 따르면, 말기 암 환자의 83%가 임종 이틀 전까지 정맥주사를 통해 영양공급을 받는 것으로 나타남.
우리나라에서 회생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에게 행하는 의료행위에 대한 의견일치율은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경관영양공급, 정맥영양공급, 항생제, 마약성 진통제 순이다.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등은 예외적 연명의료로 보는 반면, 영양공급, 항생제, 진통제 사용은 통상적 필수 진료행위로 여기고 있다.

- 서구에서 의사가 전문직으로 존경받는 직업인 이유 중 하나는 왕진 때문이었을 것임. 늦은 밤 환자의 가족이 의사 집 문을 두드리면 의사가 급히 잠옷을 갈아입고 진료가방을 챙겨 비바람을 뚫고 환자 집으로 가는 장면은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에서는 아직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 의사가 그 환자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려운 순간을 함께 하고 도와주기 위해 달려와준 것만으로도 환자의 가족들은 그 의사를 신뢰할 것임.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의사가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왕진 형태의 진료가 이뤄졌지만 지금은 잊혀가는 과거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는 시설에서 진료를 받는게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왕진제도가 사라져버린 가장 직접적 원인은 건강보험제도. 우리제도는 환자가 의료기관을 방문해 받는 검사, 시술, 약 등에 기준한 체계이므로 의사들은 많은 수의 환자에게 검사지와 처방전을 발부해야 한다는 압박 아래 환자와의 만남인 진료행위는 오히려 등한시 되고 있는 것이다. 왕진은 진료행위가 핵심인 의료행위이며 따라서 환자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현해 의료체계에 만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태되고 말았음.
70년대 이후 의학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환자를 찾아간다는, 다시 말해 환자를 중심으로 하는 의사의 자세를 배우지 못했다. 환자와 의사의 만남보다는 검사나 약을 앞세우고, 환자의 입장보다는 관리하기 편리한 제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 건강보험 수가에는 간병과 관련된 비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선진국에서는 의료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간병 서비스를 한국 의료정책은 외면. 08년부터 장기요양보험제도를 실시하고 있지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해당되거나 또는 65세 미만에서는 노인성 질병을 가진 자만 수급대상으로 지정됨. 이런 조건에 부합하더라도 간병비 지원은 요양시설이나 집에 있을 때만 가능함. 병이 악화되어 의료기관에 입원하면, 일반 환자뿐 아니라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환자 조차 간병지원을 받을 수 없음.
중증질환으로 진단되면 검사비와 약값은 건강보험이 대부분을 지원해주고 본인은 5%만 지불하면 되지만,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 돌보는 간병인은 개인부담으로 고용하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직장을 그만두는 희생까지 감수해야 함. 지금도 병원의 모든 시스템은 40년 전과 마찬가지로 환자를 간병할 가족이 있는 것을 전제로 운영되기에 보호자 없이 혼자 병원에 오는 환자는 입원하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 매년 7만명의 암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임종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 호스피스, 완화의료라는 적극적 간병서비스가 절실한데도 불구하고 재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미뤄오다가 17년 8월에갸 건강보험 지원을 받게 됨. 전체 암 사망자 중 호스피스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은 환자는 17.5%에 불과.이와 반대로 효능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아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높은 선진국에서도 보험급여가 되지 않는 고가의 검사나 신약에 대한 급여확대에 한국은 보험재정을 쏟아붓고 있다.
장기 간병에 지쳐 노인부부가 동반자살을 하고, 부모나 자식인 환자를 살해하는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들의 간병문제를 의료와 분리해서 접근하는 정책은 현실과 맞지 않음.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의 마지막에 마주치는 10가지 질문  (0) 2025.01.25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뜰 수 없겠지만  (0) 2025.01.25
죽음의 에티켓  (0) 2025.01.24
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꿈꾼다  (0) 2025.01.22
블루베일의 시간  (0) 2025.01.22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