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인은 나일강을 통해 다른 지역과 물자나 문화를 교류하며 더욱 번성하게 됩니다. 게다가 서쪽으로는 광활한 사 막이 펼쳐지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바다가 둘러싸니 외세의 침략 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환경까지 갖췄던 셈입니다.
이집트인들의 삶은 평화롭고 여유로웠기 때문에, 이 행복을 죽음 이후에도 누리고자 했어요. 사후 세계를 믿으며 영혼불멸 사상을 가진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을 '내세적 세계관'이라고 합 니다. 반면 외적이 사방에서 침입하기 좋은 개방적 지형에서 살 던 메소포타미아문명인은 사후 세계까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당장 먹고살기가 바쁘고 힘들었기 때문에 현생의 행복에 집중하는 '현세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지요.
시간이 흘러 이집트에는 도시와 계급, 국가가 형성됐는데요. 기원전 4천 년경에 이르자 남쪽의 상이집트와 북쪽의 하이집트 라는 두 개의 왕국이 탄생했고, 기원전 3000년경에는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하며 본격적인 초기 왕조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뒤의 이집트 통일 왕조는 크게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로 나 뉘는데요. 고왕국 시대는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시작한 이집트
최초의 융성기라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불립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뗐지만, 이제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서로 가지려고 싸 우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 논,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이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공격을 개 시한 이른바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보잘것없는 전력의 이스라엘군과 영국식 군사 교육을 받은 아랍 연합의 싸움. 언뜻 봐도 게임이 안 될 것 같지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군은 절박감이라는 최종 병기로 결국 도시를 지켜냈 고, 이집트가 속한 아랍 연합군은 분열되며 결국 전쟁에서 패배 합니다. 당시 이집트의 국왕 파루크 1세는 사치에 빠져 있고 나 랏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 와중에 전쟁에서 패전까지 하니 나 라가 시끄러웠죠. 이 틈을 타 이집트 군인 출신 가말 압델 나세 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1956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이로써 이집트의 군주제는 사라지고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집트 초대 대통령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 습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선박 통과를 금지당 해서 뿔이 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1956년 에 일어난 제2차 중동전쟁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자신들과 상 의도 없이 과격한 전쟁을 벌인 세 국가에 분노했고, 유엔의 중재 로 1년 뒤 전쟁이 종결됩니다. 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나세르를 중심으로 아 랍민족주의가 단결하게 됩니다.
1958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한 나라로 합쳐 아랍연합공 화국이 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국가를 무리하게 합치려니 통 합 운영에 문제가 발생했고, 3년 뒤 시리아의 독립선언으로 다시 분리됩니다. 이후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뒤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둔 6일 전쟁'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지요.
1971년에는 나세르에 이어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됩니 다. 사다트는 잃어버린 수에즈운하 동쪽, 시나이반도를 되찾기 위해 이를 갈고 복수를 계획했어요. 2년 뒤 제4차 중동전쟁이 발 생합니다. 이 전쟁으로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이 석 유 수출을 줄이고 원유 가격을 인상하면서 오일쇼크가 일어나죠. 1981년 사다트는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암살당하고, 부통령 인 호스니 무바라크 Hosni Mubarak가 대통령이 되어 철권을 휘두릅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민주주의 정부가 세워지는데요. 하지만 이슬람주의를 강조하며 종교와 정치를 결합하려는 세력과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려는 세 속주의 세력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집권 1년 만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면서 이슬람주의인 무르시 정권이 축출되고, 2014년 세속주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압델 파타 엘시시Abdel Fatah al-Sisi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 19세기 유럽을 세 단어로 정리하자면 '산업혁명', '제국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입니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다 닐 때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특히 독일의 민족주의는 정말 강력했어요. 중부 유럽을 느슨하게 묶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결국 해체된 19세기, 제각각 쪼개진 나라들이 다시 민족주의 정신하에 독일연방으로 묶이게 됩니다.
당시 독일연방 중에 오스트리아가 힘이 제일 셌고, 그 뒤를 프로이센이 바짝 따라오고 있었죠. 느슨한 연방을 강력히 통일하자는 여론 속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 자리에 앉힙니다. 과격파 비스마르크는 연설을 통해 그 유명한 철혈정책을 발표했어요.
- "독일의 통일 문제는 철과 피, 즉 군대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프로이센 주도하에 독일 통일을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비스마 르크는 의회와 대립하며 군비를 확장해갔고, 이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던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게 바로 1866년 6월 14일 발생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은 독일연방 내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었어요.
모두가 잘나가던 오스트리아를 눌렀다는 승리감에 취해 있었 지만 비스마르크는 냉정히 지금 상황을 계산합니다. 지금 오스트 리아에 굴욕을 주는 것보다는 독립국으로 놔두고 자존심 좀 챙겨 줘야 나중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로이센을 돕거나 최소한 중립 이라도 취할 것이라는 똑똑한 생각을 했던 거죠. 세계 정세 파악 이며,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머리 돌아가는 것이 장난이 아니죠? 이미 눈치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외교 천재였습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이미 능수능란하게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켜둔 상태였죠. 비스마르크의 물밑 작전 덕분에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에서 퇴출됐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1867년 북독일연 방을 수립해요.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통일을 견제했습니다. 특 히 이웃 나라 프랑스가 통일에 부정적이라고 파악한 프로이센은 먼저 프랑스부터 치기로 결정합니다. 3년 뒤에 일어난 '프로이 센-프랑스 전쟁'에서도 프로이센은 승리를 일궈냈죠.
이때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기도 합니다. 고작 여러 개로 쪼개진 독일연방 중 하나에 불과한 프로이센이 당시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를 꺾어버리다니, 프랑스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납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로 가는 마 지막 장벽,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마침내 독일 통일을 완성해요.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침략한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독일제국을 선포합니다.

- 1964년, 미국 군함이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의 습격을 받 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미 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으며 전쟁에 뛰어드는데요. 나중에 <뉴욕타임스>는 통킹만 사건에 대한 주요 정보가 왜곡된 상태로 전달됐음을 폭로해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허위 보고 를 근거로 베트남전쟁 개입을 결정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 는데, 개입의 궁극적인 원인은 도미노 이론이었습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쟁은 남북의 전면전으로 확 대됐습니다. 미국이 뛰어든 이 전쟁을 통상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는데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프 랑스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베트남의 독립 전쟁이었다면 제 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북베트남 사이의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1965년에 약 18만 명을 투입했던 미군은 4년 뒤에는 두 배 이상인 약 48만 명, 최대 54만 명까지 병력을 증강해 투입했습 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에도 파병을 요 청했는데요.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한국은 1964년에 의료진들을 파견한 후 백마부대,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지요. 베트남 옆에 있는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군대가 개입되면 서 전장은 베트남을 넘어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됐습니다.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하 지만 외세에 대해 끝없이 투쟁해 온 베트남 역시 만만치는 않았 습니다. 미국 역시 베트콩들의 게릴라 공격에 당하고만 있어 답 답한 상황이었어요. 꾸찌Cu Chi 지역의 정글 아래로 만들어진 약 250킬로미터의 '꾸찌 땅굴'은 베트콩들의 근거지였습니다. 밤이 되면 땅굴에서 튀어나와 미군을 습격하고 다시 땅굴로 들어가는 데, 바로 뒤쫓아도 미군의 커다란 덩치로는 그 작은 땅굴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엄청나게 어둡고 비좁은 땅굴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방향으로 뚫린 통로가 있는데, 땅굴은 지하 4층까지 뚫려 있고, 중간중간에는 식당이나 작전 회의실 같은 공간도 있었습니다.
공중전에 자신 있었던 미군, 하지만 공중에서는 울창한 숲밖 에 보이질 않고, 숲속에 숨어 있던 지대공미사일이 여기저기서 항공기를 격추했어요.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 이 치솟았죠. 베트남전쟁에서 그토록 민간인 학살이 많았던 이 유도 이 때문입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 게다가 지역 주민들은 베트콩을 도와주거나 숨겨주며 게릴라에 합세했기에 저 사람이 민간인인지 게릴라군인지 구별하기가 어 려웠다고 하죠.

- 19세기에 들어서자 중세 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고, 서양 열 강에 의해 이스라엘 땅은 새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이 됩 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점차 늘어 났고, 20세기 초에는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히브리어도 부활했어 요.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될 발판이 마련된 것이죠. '시온주의'란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 동으로, 예부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과 동의어로 사용된 '시 온'에서 딴 이름입니다.
그동안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서 늘 공동체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었고, 너무도 쉽게 집단증오의 희생양이 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유럽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땐,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었다는 소문으로 학살당하는가 하면, 십자군 전쟁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수도 없 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종교·문화·경제적인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중세 유럽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기 때문입니 다. 유럽인은 유대인을 경멸했으며, 유대 민족은 사회적 차별에 환멸을 느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땅을 향한 유대 인의 애착은 유대 민족이 조상의 땅을 되찾는다는 시온주의 사 상까지 이어진 거죠.
-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었고, 1917년 에 승전국 중 하나인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게 되었어 요. 영국은 불과 2년 전,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에게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선, "유대인, 너 희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 라고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가 유대인에 게는 이와 정반대의 약속을 한 겁니다. 이러한 '푸어 선언'으로 아랍인은 뒤통수를 맞았고, 유대인의 시온주의에 기름을 들이붓 게 됩니다. 결국 벨푸어 선언이 이스라엘 건국에 촉매 역할을 하 면서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된 셈이죠.
-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한다는 영국의 표명으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는 이주민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고, 유대인은 이를 민족적으로 부응해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이어갑니다. 하지 만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죠. 유대인의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으며, 거의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민족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1939년에 발발합니다. 전쟁 중 나치 정권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 체를 말살하려는 계획인 '홀로코스트'를 치밀하게 수행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히틀러는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고, 이로 인해 또다시 유대인의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즘은 급 격히 발전합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중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 가, 결국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겨버립니다.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로 쪼개서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하자고 제안하는데요. 유대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 였으나, 아랍인은 거부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이 가진 땅은 전체의 6퍼센트였는데, 유엔의 권고대로 땅을 분할 하게 되면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나 차지하게 되는 거 라, 아랍인 입장에서는 불평등한 제안이었죠.
- 유엔의 투표 후,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랍인은 이스라엘 땅으로 규정된 지역에서도 떠나지 않고 싸웠고, 이스 라엘은 아랍권의 반대에 맞서 텔아비브에서 건국을 선포하면서 아예 쐐기를 박아버립니다. 1948년,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에 이 스라엘이 건국된 것이었죠. 이스라엘이 건국되며 팔레스타인 땅 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내쫓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2,000년의 유랑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우리의 고향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였지만,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난민 이 된 대재앙이었어요.
이때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요.
이슬람교를 믿는 주변 국가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유대교와 기독 교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다음 날, 아랍 국가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고,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와 총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먼저 1948년에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을 두고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고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전쟁이라고 부 르는데요. 당시 이스라엘의 전력은 아랍 국가들에 비해 모든 면 에서 열세했어요. 당연히 전쟁은 아랍 국가들의 승리로 끝날 것 만 같았지만 이스라엘은 독립된 나라를 지키겠다며 죽기 살기로 싸웠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신무기로 전투력을 보강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과소평가한 데다 각자의 이익을 챙기려다 보니 서로 불신이 가득한 상태였고요.
결국 유엔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결됐는 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대략 80퍼센트를 차 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주민 약 80만 명이 인근 아랍 국가로 이동하면서 대규모 피난민이 발생하게 되었어요.
이후에도 유대인과 아랍인의 싸움은 계속 이어지다가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두 번째 전쟁은 '수에즈전쟁'이 라고도 불리는데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운하를 봉 쇄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선박 통행을 금지한 이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시 이스라엘은 물론 수에즈운하의 대주주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대응해 공격하면서 제2차 중 동전쟁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미국이 즉시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고 소련도 이를 지지하면서 결국 정전이 이뤄지게 됩니 다. 결국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인정 받으며 아랍권에서 입지를 높이게 됩니다. 또한 제2차 중동전쟁 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난 중동 지역에 미국과 소련이 앞다 투어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1967년에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전쟁'이라고도 부릅 니다. 인근 아랍 국가로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 중에서 유대인을 향한 테러 활동이 이어지며 중동 세계의 긴장 이 계속된 가운데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이 이스라엘과 한판 붙게 됐는데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 며 예루살렘 성지 획득과 함께 독립 초기의 여덟 배가 넘는 영토 를 지배하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더 많아지고 아랍 국가 의 반미 감정도 더욱 심해집니다.
뿌리 깊은 갈등이 계속 심화되는 가운데 1973년 10월 6일에 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시기는 이슬 람의 신성한 라마단 기간이자 유대교의 최대 명절이자 속죄일인 욤키푸르Yom Kippur였기 때문에 '라마단 전쟁' 혹은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 16세기 중반까지 화려했던 영광의 시대는 쉴레이만 1세가 사망하면서 점차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중심을 통제하자 유럽 열강들은 아시아와 직접 무역하기 위해 새로운 무역로를 모색했어요.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일찍이 세계지도를 그리며 모험을 시 작했고, 1492년에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유럽 열강들은 아메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키웠고, 오스만제국은 16세기 후반부터 쇠약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로마군이 철수한 후 브리튼섬은 혼란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로마의 빈자리로 사회 시스템이 와르르 무너진 거지요. 계속해 서 주변의 침략을 받자, 브리튼 사람들은 땅을 지키기 위해 용병 을 불러들였어요. 그들은 바로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 슨족 전사들이었지요.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섬 원주민들에게 땅을 제공받는 대신 섬을 방어해주기로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한 틈에 앵글로 색슨족은 오히려 브리튼섬을 장악해버립니다. 침략에 맞서 싸워달라고 부른 용병들이 오히려 정복자가 되어버린 거죠. 이렇게 앵글로 색슨족은 이 땅 의 새로운 주인이 됩니다. 원래 브리타니아로 불리던 브리튼섬은 이후 '앵글로인의 땅'이라는 뜻에서 잉글랜드라고 불리게 됩니다. 앵글로 색슨족은 서로 지역을 나눠 일곱 개의 작은 왕국을 세웠고, 이 왕국은 약 200년 동안 끊임없이 지배권 전쟁을 벌였습니다.
8세기 이후, 바이킹이라 불리는 북유럽 해적의 등장은 앵글 로 · 색슨족이 세운 칠왕국에도 피바람을 불러왔습니다. 파괴왕 바이킹의 무자비한 약탈로 인해 왕국에는 식량이 남아나질 않았 지요. 칠왕국 중 하나인 웨식스의 앨프레드대왕은 바이킹의 식 량 줄을 끊는 전략을 써서, 결국 바이킹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 땅따먹기 싸움을 계속하는 진짜 이유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새로운 전쟁 의 서막을 열어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지요. 러시아가 전쟁 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2014년, 러시아는 우 크라이나에 있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어요. 세계에서 가 장 광대한 육지 면적을 가진 러시아가 여전히 땅따먹기를 멈추 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우크라이나 침공의 핵심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NATO가 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나토는 냉전 초기에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이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군사동 맹이죠.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가입해서 친러가 아닌 친서방 진 영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절대 두고 볼 수 없었습 니다. 가뜩이나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됐을 때 소련 편이었던 옛 소련권 국가들이 줄줄이 나토에 가입했는데, 이제 코앞에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한다고 하니 푸틴은 심각한 안보 위기를 느낀 거지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원정 할 때도, 2차 대전 때 나치가 러시아를 침공할 때도 우크라이나 를 지나갔듯,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우크라이나는 러 시아의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완충지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크라이나 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원래 옛 소련에 소 속되어 있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국가이기도 하고, 두 나라의 공통적 뿌리는 키이우 공국에서 출발합니다. 현재 우크 라이나 수도가 키우고요. 푸틴과 많은 러시아인은 막강했던 옛 소련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하며 언젠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조지아를 잇는 과거 제국을 다시 세우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식량 창고'로 유명할 만 큼 기름진 흑토를 가지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탐나는 땅이죠.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라, 땅 부자 러시아가 예로부터 더 넓 은 영토를 갈구해온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1년 내내 얼지 않아 배가 출입할 수 있는 항구인 '부동항'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영 토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대부분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북쪽 에 있으니, 수많은 항구가 겨울마다 얼어버려서 배가 다니지 못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그토록 전력을 쏟 아왔던 거지요. 부동항은 러시아가 연중무휴로 해상 무역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글로벌 패권을 쥘 수 있는 해군력의 전략적 이동에도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현재 러시아가 유럽 쪽에 보유한 유일한 부동항은 폴란드 위 쪽에 있는 발트해의 칼리닌그라드인데요. 칼리닌그라드는 원래 독일 땅이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편입되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가 독립하자 러시아 본토와 뚝 떨어진 채 러시아의 중요한 부동항으로 자리 하고 있어요.
칼리닌그라드는 독일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요.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왕이 즉위 할 때마다 대관식을 치렀던 역사가 있고,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 엘 칸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일은 다시 칼리닌그라드를 되찾고 싶었지만, 1990년에 러시아가 동서 독일의 통일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러 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발트해를 공유하고 있던 핀란 드가 나토에 가입하면서, 발트해도 사실상 나토의 영향을 받게 되었지요.
러시아의 또 다른 부동항은 2014년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차지한 세바스토폴입니다.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으 로 나갈 수 있는 중요한 부동항이죠.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크림반도의 부동항 역시 안전을 보장하기 힘든 상황 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러시아는 어디로 눈을 돌리게 될까요? 지구온난화가 뜻밖에도 러시아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고 있습니다. 꽝꽝 얼었던 북극해의 얼음이 빠르게 녹고 있고, 소멸 시기는 10년 이 빨라진 2030년으로 예측되고 있어요. 이미 푸틴은 북극해에 서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실행해왔습니다.
앞으로 해빙이 녹아 북극해가 활짝 열릴 경우, 러시아는 18세 기 이후 그토록 온 탐해왔던 부동항을 손쉽게 얻게 되며 더 이상 서방 세력의 간섭 없이 강력한 해양 패권을 가질 수 있게 됩니 다. 지구본을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상상했을 때, 지구본 윗부분 의 북극해를 곧장 지나가면 아시아 대륙과 유럽을 최단기간으로 연결해주는 새로운 항로가 만들어지죠. 그래서 북극 항로는 강 대국들의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 무대로 떠오르게 되었고, 미국 과 중국도 이곳에서 열심히 기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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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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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장소였다. 그것은 방법에 대한 지식 노하우 know-how가 아니라 이유에 대한 지식 노와이know-why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굴 속 그림과 상징, 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다른 관습으로 발전했다. 노하우가 늘어나면서 인간은 거주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중 일부는 피난처로 사용했지만 일부는 의식 을 행하고(사원과 교회), 공연을 하고(극장과 공연장), 이야기를 하는 특 별한 경우에만 방문했다. 노하우를 발전시킬수록 우주에서 우리 위 치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 우리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새로운 방법도 더욱 발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노하우의 이야기는 도구, 과학, 기술 그리고 자연계를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노와이의 이 야기는 의미를 만드는 활동인 문화의 역사와 관련된다. 그것은 인문 학의 영역이다.
- 디지털 기술로 인해 문화 콘텐츠가 풍성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된 파일 형식, 웹사이트,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없게 되는 속 도 또한 가공할 정도로 빨라졌기에 과연 우리가 조상들보다 과거를 정말로 잘 보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문화의 저장과 배포 기술은 바뀌었지만 문화가 작용하는 방식, 즉 저장되고 전파되고 교 환되고 복원되는 방식을 지배하는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의 거 의 모든 문화가 끊임없이 서로 접촉하는 세상에서도 보존과 파괴, 상 실과 복구, 오류와 적응의 상호작용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된다. 우리 는 과거와 그 과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누가 문화를 소유하 고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두고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싸 운다.
- 현재까지 전해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대부분 교 육을 중요시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들이다. 이들의 유산은 이집트 사제들처럼 문자와 사원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도서관과 사원은 파괴될 수 있고 문자 체계 는 이집트 상형 문자가 그랬듯 잊힐 가능성이 있으니 문화의 저장에 만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마저 화재로 불타 서 수많은 그리스 문헌이 파괴되었고, 기독교 수도사들이 기독교 이 전 시대의 문헌은 필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또다시 수많은 작품이 사 라졌다. 플라톤의 사상이 살아남은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한 세 대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철학 이 널리 알려지고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파 방식 덕분에 플라톤은 철학계 안팎에서 후대 사상가와 작가에게 다양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토피 아 사회 건설에 몰두한 몽상가들은 아틀란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 았고 과학 소설 작가들은 대안적 미래라는 면에서 플라톤에게 끌렸 다. 플라톤은 연극에 직접 몸담은 뒤에 모의 현실을 비판했는데, 이 비판은 새로운 매체에 맞게 업데이트되었다. 1998년 영화 <트루먼 쇼>에는 미국의 전형적인 교외 지역에서 자랐으나 스스로 현실이라 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정교한 리얼리티 TV 쇼였음을 깨닫는 인물 이 등장한다. 1년 뒤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을 주제로 삼아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인물들에게 빨간 약을 내밀었다. 최근 페이스북이 발표한 메타버스가 실현되면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동시에 거짓 역사와 대안미래의 창시자인 플라톤은 분명 할 말이 많을 것이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라시아 교류망이 강화되고 곧 그의 왕 국 너머까지 확대되면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긴밀한 네트워크 가 만들어졌다. 30 이로 인해 농작물과 가축을 비롯해 기술과 문화적 표현 형식을 포함하는 모든 것의 교역이 가능해졌고 질병까지 전파 되었다." 인도 북부,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근동은 모두 비슷한 기 후대였기에 농작물과 가축이 쉽게 적응했다(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여행자들의 경우 불교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코끼리 때 문에 인도의 왕들을 우러러보았다). 이로 인해 인더스 계곡에서 시작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이르기까지 초기 문명의 접촉이 확산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피루즈 술탄에 이르는 정복과 점령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접촉은 폭력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문명의 접촉은 또한 석주와 문자에서 새로운 왕권 개념과 종교 개념에 이르기 까지 기술과 문화의 교환과 발전을 촉진했다.
어떤 면에서 유라시아 문화권은 이 교류망에 속했기 때문에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처럼 동서가 아닌 남북으로 뻗어 기후대가 다양한 대륙의 문화권보다 유리해졌다. 또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는 대체로 횡단과 항해가 훨씬 더 힘들었다. 물론 비교적 고립된 상태로 사는 사람들도 작물을 키우고, 동물을 가축화하고, 새로운 기술과 문 화 관습을 발전시킨다. 게다가 장거리에 걸친 문화 접촉에는 폭력뿐 아니라 질병의 확산 같은 상당한 단점도 뒤따랐기 때문에 고립이 축복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문화 접촉은 역동적인 과정을 촉발하여 인간이 상호작용하고 서로에게 이익을 얻는 방식을 증대시켰다.
-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가 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는 문화 접목의 영광을, 그 가능성과 미묘한 방법을 보여준다. 문화 접목은 패배나 열등함으로 인한 행동일 필요가 없다. 로마 문화의 다 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는 영향력 면에 서 (19세기 초 그리스 비극이 부흥하여 다시 상연될 때까지) 몇백 년, 아니 몇천 년 동안 그리스 극작가들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난 희곡을 썼다. 로마 건축가들은 그리스 모델을 바탕으로 새로운 건물과 사 원 양식을 만들어냈고, 로마 조각가와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플루 타르코스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한 쌍으로 묶어 그들이 얼마나 비 슷한지 보여주는 위인전을 씀으로써 두 문화를 하나로 결합했다. 복잡한 프레스코화, 아트리움 건물, 극장을 갖춘 폼페이는 로마의 문화적 접목의 결과를 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폼페이 광장옆 커다란 건물에 새겨진 베르길리우스의 명문은 로마의 신화적 기원이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라고 설명한다. 프레스코화부터 극장 에 이르기까지 폼페이 전체가 이러한 문화 실험의 증거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 통치 기술과 (도로에서 목욕탕에 이르는) 기반 시설, 군사 조직, 정치적 통찰력 때문에 로마를 우러러본다. 그러나 로마의 가장 놀라운 유산은 접목 기술이다. 사실 미국처럼 역사적· 지리적으로 거리가 먼 문화들이 로마에서 영감을 찾으려 한 것은 로 마가 그리스 문화를 접목시켰듯이 그들도 광대한 거리를 뛰어넘어 로마 문화를 접목시키고 문화 접목이라는 로마의 유산에 간접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한편, 남아시아 조각상은 폼페이와 그리 멀지 않고 조만간 다시 폭 발할 화산이 보이는 대도시 나폴리의 국립고고미술관에 자리를 잡 았다. 만약 화산이 폭발한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조각상을 약탈하거 나 어떤 방식으로든 가져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러면 조각상 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화산이 분출할 때 그녀가 지금 있는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고고학자에게 다시 발굴되기를 기다리 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리라.

-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거의 신화 같은 인물, 중국어 불교 정전을 바로잡고 개선하고 확장해 낸 여행자이자 순례자가 되었다. 이탈리 아어에는 번역가 트라두토레traduttore와 반역자 트라디토레traditore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이용한 농담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번 역가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향이 있으며 번역 작업이 얼마 나 선구적 일인지 종종 잊는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를 기억하는 사람 은 거의 없지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는 누구나 안다.) 오늘날에도 표 지에서 번역가 이름이 빠지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마치 우리는 항상 원본에 접근할 수 있으며, 책은 개개인의 천재가 만드는 것이고, 문 화매개자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믿고 싶어 하는 듯하다. 우리는 번 역가 덕분에 다양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때때로 인정받지 못하는 번역가의 노고에 모든 문화가 의지하고 있으므로 이런 태도 는 더욱 놀랍다. 고대에는 대규모 번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스 문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거나 불교 경전을 중국으로 들여온 것은 예외에 속했다." 당나라가 현장 같은 여행자와 번역가에게 의 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문화적 영웅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당나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현장이 대표하는 것은 그가 번역가로서 한 일보다 중요하다. 그는 (나중에 성지를 찾아 떠나는 기독교도들처럼) 수입된 문화를 쫓아서 그 근원을 찾아간 사람을 대표한다. 문화 수입은 복잡한 역장을 만 들어내기 때문에 수입된 문화가 새로운 현지 문화 host culture에 이미 오래전부터 동화된 후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수입 문화의 기원을 찾 아가면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중국 불자들은 인도에 끌렸으나 감히 서역으로 위험하고 금지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 의 없었다. 현장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다녀왔다. 더욱 중요한 사 실은 그가 성지를 방문하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소식을 가지 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현장이 가지고 돌아온 경전과 물건, 관찰과 경험 덕분에 중국 불교는 부처의 고향인 인도의 불교에 열등감을 느 낄 필요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집에 머물 러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준 순례자였다.
- 일본에 중국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은 두 나라가 몇백 년 동안 계획 적으로 문화 외교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두 나라의 교역은 1세기에 시작되었고 수나라와 당나라 때 가속화되어 외교 회담이 제도화되 었다. 이러한 문화 사절단은 보기 드문 문화 전이 전략이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로마와 그리스의 관계처럼 정복당하지 않았음에도 대규모로 문화를 수입한 또 다른 예에 해당한다. 세이 쇼나곤의 이 야기에서 중국은 고압적이고 어쩌면 위협적인 모습이지만 사실 중 국은 일본을 침략하려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일본이 문화재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견당사라는 외교 사절단을 기꺼이 보냈다. 로마는 그리스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은 중국을 군사 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음에도 문화를 수입했다. 또 로마에서는 그리 스 문화의 수입이 영향력은 컸다 해도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었던 반 면 일본에서는 황제로 대표되는 국가가 문화 전이를 계획했다. 일본 에서는 문화 수입이 정부 정책이었던 것이다.
- 우리는 문화를 평가할 때 독창성을, 언제 어디서 처음 발명되었는 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원조라는 주장은 종종 우월성 과 소유라는 미심쩍은 주장을 뒷받침할 때 사용된다. 그런 주장은 편 리하게도 모든 것이 어딘가에서 왔음을, 발굴되고 차용되고 옮겨지 고 구매되고 도난당하고 기록되고 복사되고 종종 오해받는다는 사 실을 잊는다. 무언가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문화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이며, 우리는 다음에 사용될 때를 기다리며 그 유적을 보존 하는 매개자에 불과하다. 문화에 소유자는 없다. 우리는 다만 다음 세대에 문화를 물려줄 뿐이다.
- 도시 혁명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집약 농업이었다. 도시 를 부양하려면 한곳에 매여 가축을 따라다니거나 새로운 사냥지로 옮겨 다니지 못하는 수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충분한 식량을 주변 지 역에서 운송해 와야 했다. 군사 정복이 아닌 식량 재배 능력이 도시 화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식량을 재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또 다른 기 술, 즉 저장 기술이 필요했다. (복합 주택에 곡식 저장실을 두었던 조각 가 투트모세가 잘 알았듯이) 저장이 가장 용이한 것은 곡물이었다. 곡식 은 일단 수확하면 장기간 보존이 가능했다. 저장한 곡물은 가뭄과 해충으로부터 안전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이 곧 밝혀졌다. 곡물 저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손에 넣었고, 이에 따 라 계층적 사회 구조가 탄생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부를 소유하게 되 었다. 부를 제한하는 것은 저장설비의 규모와 그것을 무력으로 통제 하는 능력밖에 없었다. 이집트 중앙집권 국가의 출현은 이러한 저장 혁명 초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알마문의 선조들은 바그다드를 건설하면서 곡식을 관리하는 고 대의 저장 혁명뿐 아니라 정보와 관련된 저장 혁명도 이용했다. 메 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완전한 문자 체계, 말을 그대로 표기하는 기 호 체계가 탄생하여 이야기를 비롯해 지식을 구술로 전달하는 여러 형태들의 저장이 가능해졌다. 세계 최초의 도서관 중 하나는 아시리 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역시 통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에 서 건설한 도시였다)에 세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 건설한 바그다 드에 과거의 문서 기록을 보존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야심 찬 궁전 도 서관 지혜의 창고가 포함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혜의 창고는 지식을 축적하는 동시에 다양한 정보 유형을 분류하는 새로운 체계 를 이용해 그 지식을 정리하는 곳이었다.
- 중세 바그다드는 제지 산업, 지혜의 창고, 번역가와 주해자, 학자 가 모여들어 아랍 학문 황금기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이번에도 건축 자재로 쓴 진흙벽돌이 문제였다. 진흙벽돌 은 풍족했고 최초의 도시 공간을 탄생시켰지만 몇 세대를 넘기지 못 했다. 보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바그다드의 불운은 버려진 네페르 티티의 아케타톤과 반대로 알 마문의 선조들이 도시를 세운 이후 끊 임없이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도시가 끊임없이 재건되었 다는 뜻이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건축물은 자취가 사라졌기 때문 에 우리는 지혜의 창고가 어떻게 생겼는지, 독특한 단독 건물로 존재 했었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는 남은 흔적을 통해서 지혜의 창고를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어마어마했고 바그다드뿐 아니라 아랍 제국 전체를 배움의 중심지로, 새로운 형태의 지식 보존과 생산이 개발된 곳으로 만들 었다. 어쩌면 지혜의 창고는 단독 건물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 번역, 종합한다는 아이디어, 즉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다른 문화의 산물을 대하는 태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이븐 시나는 한곳에서 꾸 준히 작업하거나 자기 책을 계속 소유하는 사치조차 누리지 못했지 만 그의 저작은 매우 중요했다.
바그다드에서 시작되어 이븐 시나가 완성한 번역 프로젝트는 아 랍 제국 덕분에 바깥으로, 점점 더 거대해지는 영토의 가장 먼 가장 자리까지 뻗어나갔다. 곧 이슬람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될 델리에서는 어느 술탄이 '치유The Healing'라는 이름이 붙은 이븐 시나의 가장 영향 력 있는 숨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아한 사본 제작을 의뢰했다. 
- 그가 바로 무함마드 이븐 투글루크이고, 그의 아들은 장차 아소카 석주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어쩌면 피루즈 술탄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이븐 시나의 사본을 보고 먼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 른다.
동시에 지혜의 창고는 서쪽으로 이베리아반도까지 영향을 미쳤고 아랍 세력은 그곳에 유럽 최대의 이슬람 지역을 만들었다. 이 경로를 통해서 이븐 시나의 저작과 바그다드 번역 프로젝트가 서유럽에 전 해졌다. 그 결과 재탄생, 즉 르네상스라는 잘못된 이름의 문화 차용 이 발생한다.

- 문화사에서 종종 그렇듯 파괴 세력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십자군은 아랍에서 학자들이 쓴 지식의 요약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발전했고 그리스 철학의 아랍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 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 카이로, 알 안달루스에 서 유입되는 문헌이 증가했고,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이 들어왔다. 기독교 작가들은 잃어버렸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을 발견했고(아랍 학자들이 아닌 유럽인들에게만 잃어버린 저작이었다), 이븐 시나와 같은 양식으로 숨마를 쓰기 시작했다. 유럽의 지식 생산 을 바꾸어놓은 이러한 유입을 두 번째 부흥으로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재탄생은 아니지만 경쟁하는 두 제국의 문화 접촉이 늘어났 을 뿐만 아니라 키케로 같은 고전 작가에 대한 흥미가 새롭게 살아나 면서 부흥과 차용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부흥인 동시에 수입이지만 그래도 부흥이라 부를 수 있다 면)의 영향이 수녀원과 수도원, 궁정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고, 무엇 보다도 이탈리아(볼로냐), 스페인(살라망카), 프랑스(파리), 영국(옥스퍼드)에서 서서히 등장하던 대학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은 그때 이후 지식 생산을 형성해 온 새로운 배움의 중심 기관이고 아랍 지혜의 창고에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일부 공청회와 저술(숨마) 형식, 심지 어는 특별한 졸업 가운이나 논문 심사처럼 대학과 관련된 일부 명칭 과 의식은 아랍에서 차용한 것이다.30 (이베리아반도와 유럽 전역 대학에 서 발달한 독특한 독서 관행과 주석은 유대교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 대륙이 스스로를 전적으로 기독교라고 간주할지, 어쨌든 이 슬람교는 아니라고 간주할지를 둘러싼 논쟁에 비추어볼 때 아랍의 사상과 제도가 12세기 유럽에 끼친 영향은 특히 중요하다. 둘 중 어 느 쪽을 택하든 말이 되지 않는다. 12세기의 부흥은 기독교 유럽을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그 덕분에 유럽은 이슬람 사상가들이 그리스 및 로마의 영향과 페르시아를 비롯해 멀리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의 영향을 결합해서 쓴 철학적 저술을 물려받았다.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와 사상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 이제 와서 그 둘 을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된다.

- 마침내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끄는 네 척의 배는 이슬람교도 항해사 들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기 쁨에 넘쳤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들에 감탄했다. 시장에는 향신료와 보석이 넘쳐났고 항구는 북적거렸으며 교역이 활발했다. 그렇다, 마 침내 아랍 세력이 지배하는 중동을 우회하는 항로를 찾아낸 것이다. 더 좋은 점은 인도 어디를 가든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 성인들이 인간의 코 대신 코끼리 코를 달고 있거나, 팔이 너무 많거 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가마 와 동료들은 이런 사소한 부분을 선뜻 무시했다.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땅에서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사이에 섞여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불만은 딱 하나였다. 여기서도 이슬람교도들이 해상 무역을 지배하면서 기독교 원주민들에게 온갖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했다. 그러 나다가마는 성가신 이슬람교도 경쟁자를 밀어내고 기독교도로 추 정되는 대군주들과 거래를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다가마와 동행했던 승무원과 승객들이 설명한 인도에 대 한 첫인상이었고 처음에는 이들의 의견이 포르투갈의 태도를 좌우했다. 그러나 반세기 후 카몽이스가 인도로 떠났을 때에는 포르투갈 도 초기 기록에 오류가 얼마나 많은지 이미 깨달았다. 아프리카 동부 에 전설 속의 강력한 기독교 왕은 없었다(포르투갈인들이 전쟁 중이던 에티오피아인들과 접촉해 이슬람교도에 맞서 싸우던 그들을 돕기는 했다). 기독교 성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도 조각상은 사실 힌두교 신이었다. 그리고 인도아대륙은 부분적으로 무슬림 통치자 무갈의 지배를 받 았는데 그는 현지의 힌두교 통치자를 내버려두거나 그들과 동맹을 맺을 때가 많았다. 카몽이스는 새로 알게 된 지식을 서사시에 넣음으 로써 다가마의 첫 항해가 만들어낸 심각한 오해를 일부 바로잡았다. 다가마가 인도의 이슬람교도 및 힌두교도와 접촉한 후 또 다른 충 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그가 가져온 물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사려 하지 않았다. 다가마가 준비한 선물과 견본은 우스꽝스러 울 정도로 조야했고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다가마와 동행한 군 인과 선원은 비싸게 팔 생각으로 직물 등의 상품에 돈을 투자했지만 포르투갈에서 구입한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음 을 알아차렸다. 이곳에서는 향신료뿐 아니라 거의 모든 물건이 더 값 비싸고 좋았으며 고국에서 보기 힘든 보석이 시장에 가득했다. 포르 투갈에 비해 장인은 솜씨가 더 좋고 상인은 더 부유했으며 궁전은 더 웅장했다. 이러한 부는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사람 들은 또한 유럽에서 본 것보다 훨씬 정교한 고대 유적에 감탄했다. 그들은 인도양의 부유한 교역망에서 가난하고 낙후된 이는 다름 아 닌 자신들임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24
포르투갈인과 만나 선물을 교환한 힌두교도 왕들은 이 허술한 여행자들이 향신료 무역을 위해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왔지만 팔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자 몹시 실망했다. 카몽이스의 서사시에서 다가마는 이처럼 미적지근한 환영을 이슬람교도들 탓으 로 돌리며 '나는 그저 탐험가로서 왔을 뿐"이라고 변명했고, 두고 보 라고, 다음번 돌아올 때는 "얼마나 대단한 상품을 살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다지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니었다.

- 루베르튀르의 성공은 전 세계 식민주의자들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옛 아프리카 노예들이 통치하는 국가가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고 제재와 위협으로 반격했다. 아이티는 제국 열강 의 공격에 포위당한 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아이티 혁명은 오랫동안 세계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미국과 프랑스에 초점을 맞춘 혁명 시대의 역사에서 제외되 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었다. 19세기에 아프리카계 미국 인 작가 윌리엄 웰스 브라운은 전기 시리즈를 쓰면서 투생 루베르튀 르를 포함시켰고, 사회 개혁가이자 노예 제도 폐지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역시 루베르튀르에게 존경을 표했다. 에티오피아 서사시 《케브라 나가스트》에 시선을 돌려 아프리카 고대 문명의 유산을 주 장하고 1915~1934년 미국의 아이티 점령에 저항했던 마커스 가비 역시 그를 존경했다.
- 1938년 카리브해 지역 역사학자 C. L. R. 제임스는 《흑인 자코뱅 당원》에서 투생 루베르튀르를 독립과 혁명의 역사 중심에 놓았다. 그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였다. 제임스는 유럽에서 파시즘이 부 상하던 시기에, 유럽 식민제국 대부분이 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가 곧 식민 지배자들을 몰아낼 것이 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때 투생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아프리 카도 깨어날 것이다."4
생도맹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계몽주의의 변방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다. 생도맹그야말로 계몽주의 사상의 힘과 모호함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도맹그는 무엇보다도 사상 자체 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인이 사상을 포착하 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야만 한 다. 철학자 G. W. F. 헤겔은 나폴레옹이 시대정신의 구현이며 말 등 에 탄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 렸으니 딱 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루베르튀르가 더 좋은 예였을 것이 다. 그는 말 등에 걸터앉아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전 세계 지도를 다 시 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진보하는 역사라는 개념은 해방과 민주화를 통한 정치적 발전이 든, 강력해진 기계를 통한 기술적 발전이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 은 물건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물질적 발전이든, 스스로 계속 발전하 고 있으며 이를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발전이 어디서나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각 분야의 발전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결합했고 영국에 사는 사람들, 적어도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정치적 해방,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기술 혁신, 식민지 영토에서 짜낸 부의 축적이 만들어낸 궤도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진보가 여러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는 생각은 예상치 못한 결 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한 해가 지나 면 다음 해가 온다는 사소한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갈수록 과거를 낯 설게 만드는 변화로 인해서 질적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모든 것은 변 화하며 새로운 환경이 사람들과 그들의 삶과 경험, 생각과 감정까지 바꾸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무작위적 변화가 아니었다. 온갖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변화를 겪었다. 중요한 것은 변 화를 한 방향, 즉 앞을 향해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었 다. 그 결과 과거는 축소되고 쇠퇴했다. 건물이 파괴되고 필사본이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한다는 것은 곧 현재와 과거 가점점 더 멀어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 들을 복원하거나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물 관은 과거로의 회귀이자 방문객들이 잠시나마 시간의 흐름을 거스 르게 해주는 타임캡슐이었다.

- 과거의 편린을 보존하려면 물건을 복원하여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재와 무척 달랐던 과거에 대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믿었는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과 거는 현재와 무척 다르기 때문에 고대 언어로 쓰인 문헌처럼 주의 깊 게 해독하고 재구성해야 했다. 문헌의 연대 측정 방법을 갖춘 문헌학이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고 과학이 또 다른 모델을 제공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을 면밀히 조사하는 모델, 가설을 시험하고 증거에 기초한 엄밀한 연구와 회의론을 통해 생각을 검증하는 모델이었다. 과거를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의 이름은 사료편찬학이었다.
19세기 역사가들에게는 검토하고 배울 수 있는 오래된 모델이 많 았다. 이 책에 실린 정보는 대부분 과거의 연대기 기록, 여행기, 서지 학자와 수집가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집트 사제들부터 투키디 데스 같은 그리스 작가들,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에서 일했던 학자들, 이야기를 구전으로 보존하고 전달한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들 출처와 모든 형태의 증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서야 과거에 대한 글을 쓸 때 가설을 검증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역사적 변화라 는 개념에 따라 반증을 검토하는 구체적 프로토콜을 따르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가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역사의 핵심이 "과거 경험의 본 질을 밝히는 것"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 우리는 여전히 역사주의 시대, 즉 꼼꼼하게 조사해서 쓴 역사 소 설들(보통 역사적 자료의 목록을 제공한다)과 박물관, 원본, 과거의 단편, 도서관과 문서고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세기 이후 세상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 왔고, 따라서 과거는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인간은 어디서나 낯설고 이해우리는 여전히 역사주의 시대, 즉 꼼꼼하게 조사해서 쓴 역사 소 설들(보통 역사적 자료의 목록을 제공한다)과 박물관, 원본, 과거의 단편, 도서관과 문서고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세기 이후 세상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 왔고, 따라서 과거는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인간은 어디서나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잔재와 마주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되살리고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상실감을 피할 수 없 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고학 유적지부터 박물관 과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보존 장치를 만들었고 역사가, 숙련 된 큐레이터, 소설가 같은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 영원히 잃어버릴 뻔 한 과거를 되살려냈다.
우리는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과학 덕분에 과거에 대한 많은 지식 과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분야의 많은 이론가 와 실천가들이 고급문화, 걸작, 문명의 표식을 나누는 기준이 무척 편협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과거를 다루는 과학을 추동하는 진보라는 개념 때문이며, 누가 앞서고 누가 뒤처졌는가에 대한 편향된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과거를 다루는 과학은 사람들 이 무엇을 발굴했는지 알려줄 수 있지만 그 물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그것은 후대인 우리 가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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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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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사역사학과 환국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 『삼국유사』를 오독해서 '환국' 이 등장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因의 이체자 문제를 넘어서서 당 대의 많은 사료가 '확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학자의 오독 때문에 '환국'이 등장하고 민족 자존감을 앙양시켜야 했던 역사가들이 '한국'을 주창하면서 잘못 읽은 단어가 널리 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이 과정이 바로잡혀가던 중에 유사역사가들이 '위대한 환국'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다. 애초에 잘못된, 있지도 않은, 사상누각이라는 말도 아까운 해프닝이 바로 '환국이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했는데, 환국의 난이야 말로 우리 역사상 사료 오독 제1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1966년에 문정창이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研究를 내놓 으면서 일제가 '환국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을 폈다. 식민사학자 이마 니시 류가 사서를 변조해가면서 환국을 말살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반일 감정에 편승해 시민들에게 먹혀들었고, 이후 유사역사가들의 단골 메뉴 가 되었다. 문정창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일제의 공무원으로 근무 하기 시작해서 1932년에는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942년에는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1943년에는 황해도 은율군수, 1945년에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 과장을 지낸 친일파다.
- 흑백논리를 벗어나야
유사역사가들의 큰 문제점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들은 신 채호가 한 말을 금과옥조로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식민사학이 된다는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다. 신채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 연 구를 병행했다. 그가 볼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고, 시대도 그를 학 문에만 매진하게 도와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 날 잘못된 것이 있으며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유사역사가들은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이 이병도의 학설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처럼 자꾸 거짓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병도의 학설 역시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사역사가들은 신채호의 주장 중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면 식민사학이라고 하고, 이병도의 주장 중 받 아들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흑백논리 라면 학문은 전혀 발전할 수 없는 고정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은 1960년대부터 발현해서 1970년대를 거치 며 증폭되었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이 태동도 하기 전에 살았던 신채 호가 유사역사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신채호를 역사학계에 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는 등의 거짓 선전선동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신 채호는 그렇게 유사역사학의 방패막이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 사학의 소중한 사람이다.

- 서로 다른 해석이 모여 발전을 이룬다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교과서에 실리면서 학계의 주류 통설처럼 여겨 진 면이 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한국사』(1995)에서는 백 제의 요서경략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학의 통설은 사실이 아닌 쪽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1974년 요서경략설이 실린 이후 2007년 한국사 교과서 개정안에 와서 야 요서경략설과 관련해 논란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라고 했고, 2015년 개정안 집필 기준에서 요서경략설이 빠졌다. 역사학에서 하나의 설이 교 과서에서 조정되기가 이렇게 오래 걸리고 어려운 것이다.
백제가 요서 지방을 차지하고 군을 설치하였다는 기사는 중국 정사에서 확인된다. 기사 작성 시점과 그 일이 있었던 시점이 멀지 않고, 백제와 중국 사 이에 사절의 왕래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해 석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의 논란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 도록 한다. (07개정 역사과 집필기준)
백제가 요서경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논문이 나오자 그에 반대하여 요서와 백제 간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논 문이 또 나오고, 그에 대해 다시 연구하는 논문이 나오면서 역사학계는 요서 지방의 변천을 두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가령 385년 요서 지방에 서는 후연 장군 여암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암은 후연에 잡혀온 부여인 후예로 여겨진다. 그런데 백제 왕실은 부여 씨로 보통 여 씨로 쓴다. 이런 사실이 백제가 요서를 경략한 것처럼 혼동하게 되는 요소였을 가능성도 높다. 반론 속에서 연구가 깊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립대 안정준 교수는 백제가 남조 국가들을 속여넘긴 것이 아니 라, 내막을 뻔히 알면서도 중화 중심의 국제적 권위를 내세움과 동시에 정권의 안정을 기하고자 백제가요서를 차지했다고 허풍을 친 것을 받아 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제 요서경략설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 것이다. 앞으로 이 주장을 두고 더욱 치밀한 검증이 있을 것이다.
역사학은 이와 같이 같은 사료를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서 발전해 나간다.
- 백제인의 선택
그럼 임나일본부라는 건 대체 뭘까? 왜 「일본서기』 안에 들어 있을까? 『일본서기』 안에는 백제 관련 사료가 많이 있다. 어떤 기록은 『삼국사 기보다 양도 많고 정확하여 백제 역사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백제 기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상당히 많은 백제인이 왜로 도망쳤기 때문에 벌어 진 일이다. 백제 망명객은 당시 왜에 비하면 학식이 훨씬 뛰어난 사람들 이었다. 이들은 신라를 향한 커다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고, 왜가 자신 들과 같은 이해관계에 놓이길 바랐다. 그런 결과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 벌했다는 이야기에 이리저리 살을 붙였고, 더 나아가 백제는 왜에 충성 하던 나라고 가야 연맹은 모두 왜가 지배한 곳이라는 역사 왜곡을 감행 한 것이다.
- 유사역사학과 임나
유사역사가들은 임나와 임나일본부를 구별하지 않는 전략을 쓰고 있 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임나일본부를 인정 하는 학자는 한 명도 없는데, 유사역사가들은 역사가들이 임나일본부를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임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 들이민다.
임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광개토왕비를 비롯해서 여러 사료에 등장 하는 나라 이름이다. 임나와 임나일본부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이것을 섞어버리고는 아예 임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 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가야 문화인 옥전고분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다라국 같은 경우도 『일본서기에 그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부정 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 말은 <양직공도>라는 중국 사료에도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말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일본서기를 이용해서 천황의 가계가 백제에서 온 것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인다. 그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엄정한 사료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 에 맞으면 집어오고 다르면 버리는 것뿐이다.
세계적으로도 임나일본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는 역사의 전반적인 추세에서 말이 안 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케임브리지 중국사의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의 허상을 잘 지적하 고 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여 되풀이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일본이 학계에 돈을 뿌려서 그렇다는 말도 한다. 그런 돈이 어디에 있는지 진짜 궁금하다.

- 다이나믹한 고대
고대에 문화가 전파되는 가장 빠른 길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승려들이 이동해서 중국으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했듯이, 사람 들이 직접 이동했다. 왜와 가까운 곳의 신라는 왜와 늘 충돌하면서 불편 한 관계였는데, 좀 더 멀리 있던 백제는 왜와 가깝게 지냈다. 신라라는 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두 나라가 가까웠던 만큼 많은 인적 교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왕 인. 담징화 등을 생각하며 한반도에서 일방적으로 일본에 문화 전 파가 있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몽골과 고려 사이에도 문화를 주고받은 것처럼 백제와 왜, 가야와 왜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신라 초기에 대신이던 호공은 왜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탈해 이사금尼師今(재위 57~80)도 왜국의 동북쪽에서 건너왔다고 나온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뿐만 아니라 남해안가에 있는 일본식 고분, 부여·공주 인근에서도 발견되는 일본식 고분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지만 교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자. 어떤 세 력이라고 하기에는 고분의 수가 너무 적다. 이들 고분은 6세기에 들어가 면 모두 사라진다. 이들 왜인은 한반도에 흡수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크 다. 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있던 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를 뒤흔들 수 있 는 강대한 세력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해서 일본식 고분 이 한반도에 존재하는지를 치열한 논쟁을 통해 규명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논쟁을 보면 역사가 완성된 형태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논쟁을 거쳐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 무영탑 전설은 1740년에 나온 화엄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에 처음 실렸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이 전설의 내용을 채록하면서 누이를 아내로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누이가 흔히 아내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무영탑』전설은 맺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로 끝났기 때문에 현진건 이후로도 그 결말이 수시로 변했다. 함세덕이 만든 연극 『무영탑에서 는 아사녀가 자살에 실패해서 아사달과 재회하는 해피엔딩이 되었고, 해 방 후 만들어진 여성국극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시신을 안고 영지로 걸어 들어가 자살한다. 아사달이 불상을 만드는 이야기는 사라져버렸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무영탑>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환상 을 보면서 영지로 뛰어들고 아사달을 사모했던 귀족 딸도 불 속에 뛰어 들어 죽는 것으로 표현했다.
옛날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다시금 재창작되어 마치 그 이야기가 있었 던 사실처럼 변하기도 한다. 아사달, 아사녀와 무영탑도 그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조선시대에도 피가 돌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긴다든가, 그 피에서 대나무가 자란다든가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 문인 홍세태洪世泰는 『유하집에서 피가 돌 속에 스며들 리 에서 없다는 점을, 정동유鄭東愈는『주영편에서 송도에 전해오는 글 가 운데 선죽교 전설을 전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선죽교 변善竹橋(1938)이라는 글에서 남 효온의 글에 정몽주가 죽은 장소가 적혀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광운대 김인호 교수가 「정몽주 숭배의 변화와 위인상」(2010)에서도 잘 논증한 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상징물의 큰 힘에 매료되면 재미도 없는 '사실'은 굳이 따르려 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 이후 형성된 믿음,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깨어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일반 대중 에게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우리는 왜 진짜 사실보다 허황한 이야기에 더 마음 이 끌리는 것일까?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민족 비하로 망가진 한국인의 자존 심을 채워줄 위인들이 필요했다. 이때 소환된 위인 중 하나가 충절의 상 징 정몽주였다. 이때부터 개성 관광의 필수적인 역사 코스로 선죽교가 등장했다. 선죽교의 핏자국, 대나무 전설은 눈으로 보면서 더욱 확실하 게 각인되었다.
전설은 전설로서 가치가 있다. 관광지를 만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야 기 창작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온 이야기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필요 는 없다. 하지만 역사를 논할 때는 전설과 사실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해 야 한다. 그것이 역사학의 의무이기도 하다.

- '주초위왕'이 처음 등장한 때는?
정말 벌레가 나뭇잎에 발라놓은 꿀을 따라서 파먹을 수 있을까? 나뭇 잎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꿀을 좋아할까?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꿀 을 좋아할 리가. 마치 사슴을 잡으려고 날고기를 놓아두었다거나, 늑대 를 잡으려고 당근을 놓아두었다는 것과 같다.
인하대 생명과학과 연구진에서는 실제 나뭇잎에 글자를 꿀물로 써서 벌레가 이것을 먹는지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이 실험 결과는 2018년 한 국곤충학회 학회지 『Entomological Research』 48호에 'Validation of 走肖 爲王: Can insects write letters on leaves?"라는 제목으로 실리기까지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벌레는 이 꿀물 글자에 입도 안 댔다. 이 실험에서 총40종의 나뭇잎이 동원되었다.
벌레가 꿀물 글자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럼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어떻게든지 있긴 있었을까? 나뭇잎에 '주초위 왕'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제11대 왕 중종 때가 아니 라 그보다 한참 후인 제14대 왕 선조 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에 사관이 따로 적어놓은 이야기다.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였다. (중략)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 워 대궐 안의 어구(개천)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기묘사화는 1519년에 일어났고, 「중종실록」은 1550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선조실록은 1616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다. 사관은 '주초위왕' 전설을 진짜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실록」에 빠졌기 때문에 굳이 적어놓겠다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 '주초'라는 전설이 있었다
「중종실록」에는 심정이 조광조를 모함한 내용이 적혀 있다. 심정 이 '주초대부走肖'이라는 말을 적어서 궁궐 안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앞서 본 「선조실록에서는 남곤이 한 일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선 심 정이 한 일로 달라져 있다. 남곤과 심정은 한 세트처럼 같이 묶어 이야기 하는 때가 많으니까 그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럼 '주초대부필'이란 무슨 뜻일까? '주초'는 조씨를 가리키는 것이라 고 이미 말했다. '대부'는 벼슬 이름이다. '필'은 붓이라는 뜻이다. 즉, '주 초대부필'은 '조 대부의 붓'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이 대체 무슨 모함에 이 용된다는 것인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 사실 이 글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있던 수보록이라는 예언서에 적혀 있던 글이다.
수보록에는 '목자장군검 주초대부필 비의군자지
부정삼한격'이라는 말이 있었다. '목자'는 이 씨를, '비의'는 배 씨를 가리키는데, 각각 태조 이성계, 조준趙浚, 배극렴克廉 을 뜻했다. 조준과 배극렴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말하자면, '주초대부필'은 조선 개국과 관련된 예언 문장이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태종은 수보록」은 말이 안 된다며 이런 예언서를 모두 수거해버렸다. 「수보록」에 있는 내용도 '주초위왕' 이야기처럼 시시각각 달라졌다. 다시 말해 이 책 역시 조작되었음이 분명하다. 태종은 수보록」 같은 예언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빨리 불살라버리게 함이 이씨 사직에 있어서 반드시 손실됨이 없을 것이다."
조선 개국을 위해서는 예언이 필요했지만 개국 이후에는 이런 말이 반란에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도고의 찬양과 이순신 자살설에 대하여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 鄕가 러일전쟁 축하연에서 이순신을 존경하고 자신을 넬슨Horatio Nelson에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이 역시 출전을 알 수 없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 야기로 보인다. 어떤 책에서는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한 말이라고 나오 기도 한다. 처음 이 일화가 언급된 책은 1964년에 나왔고 그 책에도 출처 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전에는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며 넬슨에 비교하곤 했는데, 러일전쟁 이후에는 도고를 동양의 넬슨이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 았던 도고의 말을 넣어서 이순신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 이순신이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일부러 자살하고자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이순신 은 이전에도 일본군의 조총에 어깨를 맞은 적이 있다.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일부러 총탄에 노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한참 뒤인 숙종 때 처음 나온 이야기다. 갑옷을 벗었다고 반드시 죽으리란 보장도 없다. 노량해전은 야간에 접근전으로 펼쳐진 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전함은 200척이 침몰되었고 50척만 빠져 나갔다. 일본으로 돌아가 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순신은 악착같이 싸웠고 그러다가 유탄에 맞아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자살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하는 것 은 목숨을 걸고 싸운 이순신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関 中을 보면 정조가 세손 시절 지워버린 듣지도 보지도 못할 끔찍한 일 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연쇄 살인마 였다.
사도세자는 스물세 살인 1757년 6월부터 살인을 시작했다. 내시를 죽 인 뒤 그 머리를 잘라 사람들에게 내보이기까지 했다. 사도세자가 죽인 내시, 궁녀가 백여 명이라는 말까지 있다. 광증이 깊어진 것이다.
사도세자에 동정적이던 남인 쪽 사람이 쓴 『대천록待錄』이라는 책에 도 사도세자가 백여 명을 죽였다고 나온다. 심지어 인두로 지지는 고문 도 가했다는 사실까지 적혀 있다.
사도세자는 대체 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일까?
- 1757년 2월에 사도세자를 아끼고 영조와의 관계를 잘 풀어보려고 노 력했던 정성왕후가 숨졌다. 잇달아 숙종의 계비였던 인원왕후 숨지자 사도세자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고 결국 그런 불안감이 살인으로 나타난 것 같다.
혜경궁 홍씨는 이 참혹한 일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알렸다. 영빈 이씨가 놀라며 영조에게 고하자고 했으나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연달아 죽어 나가니 영조도 결 국 눈치를 채고 말았다. 1758년 2월에 사도세자를 불러 물었는데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엇나간 원인에 자기의 엄한 훈육이 있는 것을 알고 자책했는데, 이미 때가 늦은 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기록이 보인다.
"정축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 는 궁녀와 내시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 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옷을 갈아입다 성질이 나 시중을 들던 후궁 경빈 박씨를 때려죽였다. 그뿐 아니라 경빈 박씨 소생의 두 살짜리 아들에게도 칼을 휘두른 뒤 연못에 던져버렸는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연잎에 걸린 아이를 건져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 정조는 아버지의 광증을 부인하지도, 그것을 드러내어 이야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위해서 현륭원隆閱라는 묘지명(석판에 새겨 무덤 에 함께 넣는 글)을 썼다. 이 묘지명에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조가 지은 묘지명이 이미 있었다. 정조는 이 묘지명을 없애 버리고 자신이 지은, 아버지를 찬양한 묘지명을 넣었는데, 1968년에 영 조의 묘지명이 발굴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조가 지은 묘지명에 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었겠느냐마는 세자 때로부터 이와 같은 것은 내가 들은 바 없다. 본래 풍요롭고 편안한 곳에 태어났으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미쳐버리기에 이르렀다.
- 변화하는 역사적 사건의 해석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잘못된 말 두가지를 비판했다.
하나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는 주장이다. 사 도세자가 죽을죄를 저질러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정조는 반역자의 아 들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 다른 하나는 사도세자가 병이 없었는데 영조가 모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죽였다는 말이다. 이 점 역시 사도세자의 광증을 자세히 기술해서 잘 못이라는 점을 밝혔다.
어떤 사건은 일어난 뒤에 정치적 사건으로 변하게 된다. 사도세자 사 건도 그러했다.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었을 때 정권은 노론에게 있었 으므로, 이 비극의 책임이 노론에게 있다는 정치적 공세가 생겨났다. 정조는 이런 정치적 갈등을 조정의 질서를 잡는 데 이용했다. 물론 아 버지의 잘못을 가려주고 추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세자가 소론을 위해서 뭔가를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조 즉위 후에 소론이 이 사건을 이용해서 노론을 공격했다. 후대에 벌어진 일로 과거 사건에 대한 추론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증거(사료)가 있어야 한다.
영조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쳐버린 세자는 폐해야 했고, 총명한 세손이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 로 만들어서 죽게 한 후 다시 세자의 지위를 복원해서 세손이 왕위를 이 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1960년대부터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는데, 최근에 와서 이 해석은 심각한 도전에 부딪혔다. 새로운 증거와 역사적 사건의 해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 기존의 당쟁설 주장은 광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중록』을 거짓 말 책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세자의 광 증 관련 증거는 매우 많다. 따라서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제 더는 주장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당쟁설은 사도세자가 총명하고 개혁 의지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전제가 무너진 셈 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용한 당파간 싸움은 임오화변의 결과이지 그 원 인이 아니다.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결론을 내려 놓고 증거를 수집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진실을 찾아 내기가 어려워진다. 역사 연구는 새로운 증거와 해석에 따라 기존의 관 념이 변화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 정조의 어찰 정치
정조는 신하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는 공작 정치를 운용했다. 왕 이 보내는 편지를 '어찰'이라고 부른다. 특히 비밀리에 보내는 어찰은 '밀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조만 이렇게 보낸 것은 아니고 다른 임금도 비밀리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선조, 효종孝宗(재위 1649~1659)도 신하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 다. 그러나 정조는 다른 임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지를 보냈다. 신 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 혜경궁 홍씨나 외조부 홍봉한 에게도 편지를 자주 쓴 걸 보면 편지 쓰는 걸 무척 즐긴 모양이다.
-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어찰 중 채제공, 조심태, 홍취영에게 보낸 것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정조의 어찰 중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 제일 많아 지금까지 297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부터 정 조가 죽기 직전이던 1800년 6월까지 4년 동안의 어찰이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어찰을 모두 없애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이것을 없애지 않고 보관했다. 이렇게 해서 정조의 비밀 정치가 오늘날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심환지는 영조 후반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비명에 죽은 임오화변 이후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세력을 노론 벽파라고 부르는데,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영수였다.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세력이니 정조 즉위 이후 세력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 자신을 호위한 홍국영洪國榮을 중용했는데, 홍국영이 과도하게 권력을 부리기 시작하자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 김종수였다.
얼핏 보기에는 정조와 대립한 노론 벽파가 정조에게 도전한 것 같지 만, 이 상소는 사실은 정조가 김종수를 시켜서 올리게 한 것이었다. 즉 정 조는 홍국영을 내치려 마음먹고 그를 위해 노론 벽파의 신하를 부리는 공작 정치를 한 것이다. 김종수가 올린 상소문을 지은 사람이 정조였으 니, 자기가 지은 상소문을 시치미 뚝 떼고 받아보았다는 이야기다.
정조는 이처럼 신하들을 어찰을 통해 비밀리에 부리는 무서운 정치가였다.

- 김정호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동여지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 잘못 알고 있는 것의 사실을 정리 해보자.
첫째,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하나만 만들지 않았다. 김정호는 <대동 여지도>뿐 아니라 지리인문서 동여도지東輿志」, 『여도비지輿圖備誌」, 대동지지를 편찬하였고, 지도는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등을 제작하였다.
둘째, <대동여지도> 판목은 대원군에 의해 불살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판목이 남아 있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판목을 통한 연 구로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더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셋째, 김정호는 옥에 갇혀 죽지 않았다. 김정호에 대해서 남겨진 기록 을 보면 지도가 압수당한 바도 없고 옥에 갇힌 죄인이 되었다고 볼 근거 도 없다.
넷째, 지도 유통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지도를 민간 이 제작하거나 유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조선 전기의 상 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물품 유통이 활발해지자 지도가 꼭 필요하게 되었다. 관리와 사대부는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수진본 지도를 애용했고 목장지도, 궁궐도, 역사부도 등 다양한 지도 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다섯째, <대동여지도>는 조선 지도의 계승자다. 최한기崔漢綺는『청구 도제에서 김정호가 어려서부터 지도에 깊은 뜻을 두고 지도 제 작의 장단점을 검토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지도인 <청구도>는 정조 때 만들어진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를 참고한 것이고 <해동여지도>는 신경준이 만든 <조선지도朝鮮地圖>를 변형한 것이다. 여섯째, 김정호가 직접 팔도를 답사하고 백두산을 올랐다는 말은 근거 가 없다. 김정호 당대의 현실을 보아도 타당성이 없다. 이 이야기는 일본 지도제작자 이노 다다타카의 일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내용은 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다. 김정호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우형, 이상태 등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1997년에 제대로 된 내용으로 김정호 이야기가 개정되었다.
김정호는 고위 관료인 신헌과 최한기, 최성환煥 등 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 지도를 제작하였고 판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기존의 지도를 섭렵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각종 지리서를 편찬한 위대한 지도 편집자였다.

- 간도 문제가 일어나다
청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일정 구간을 공터로 비워두고 사람들 이 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봉금령封禁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조 선과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한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지켜 지지는 않았고, 조선 사람들이 종종 땔감을 구하러 넘어가곤 하다 그곳 에 정착한 청나라 사람과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데 두만강 쪽은 청나라 에서도 아주 변경이어서 그랬는지 청나라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 다. 조선 말의 어지러운 상황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가는 유민이 있었다. 이들은 청과 조선의 국경 사이 빈 공간, 즉 간도에 정착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간도란 이렇게 두만강 북쪽 일부 지역이다. 지금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의 투먼시와 룽징시 일부다.
일본이 근대에 들어와 만든 조선 지도를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약간을 조선의 영토로 그린 지도가 있다. 바로 그 지역이 봉금령으로 사 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 곳이다. 일본은 그 땅을 청나라가 영토로 간 주하지 않은 땅으로 생각해서 조선의 영토로 잡았다. 이런 사고 방식은 후일 간도 문제에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1880년(고종 17년)에 봉금령을 해제했는데, 그제 야 두만강 너머에 수많은 조선인이 넘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이를 항의했다. 이런 문제는 쉽 게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은 울릉도를 비워두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는데, 그렇다고 울릉도를 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정기 적으로 순시하며 일본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비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인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면 안 되었다. 그것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두만강 너머에 조선인이 다수 넘어가 땅을 개간하고 있다는 (그래서 이 지역을 개간한 땅이라는 뜻으로 '간도'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을 청나라가 알았기 때문에 국경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회담을 열게 되었다. 이 회담은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고종 24년)에 두 번 열렸다. 1차 회담 때 조선 측 대표 이중하는 청나라가 깜짝 놀랄 주장을 했다.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 이름이라고 한 것이다. 이중하는 어떻게든지 이미 조선인이 개척한 간도를 유지하고, 싶어서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청나라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발하여 1차 회담은 종결되었다. 2차 회담 때 이중하는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 는 주장은 포기했다. 이중하는 1차 회담 후 직접 백두산에 올라가 답사를 해보았고, 그 결과 이런 주장이 통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이때 청 나라 측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지류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지류 를 국경선으로 잡고자 했고, 이중하는 가장 북쪽에 있는 지류를 잡고자 했다. 이 회담에서 이중하는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내 머리는 잘라갈지언정 우리 강역은 축소할 수 없다."
이 말은 간도를 내놓지 못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북쪽 경계를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유사역사가 중에는 이 주장을 교묘하게 1차 회담과 연결해서 간도 전체를 내놓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용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다.
청나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2차 회담도 결렬되고 간도 문제는 어정쩡하게 그냥 남아버렸다.
대한제국은 1903년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의 영 을 토화를 적극적으로 꾀했다. 이때부터는 다시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주장을 펼쳤다. 청나라는 강하게 반발했다. 청나라 압력이 거세지자 정 부는 이범윤에게 돌아오라고 했는데, 이범윤은 말을 따르지 않고 간도를 지키다가 러시아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 일제와 간도 문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일본제국에 빼앗기고 말았 다. 일제도 간도를 대한제국 땅으로 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에 적극적으 로 간도 영토화를 꾀했다. 일제의 논리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있던 국 경지대는 주인이 없던 땅인데 압록강 너머는 이미 청나라가 차지했으니 두만강 너머는 조선이 차지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앞서 일본인이 만든 지도가 이미 강 북안을 모두 조선 땅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는데, 바 로 그런 인식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점령했다. 조선의 영토가 크면 클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유사역사가들은 흔히 일제가 커다란 조선 영토를 줄이려고 애 썼다고 주장하는데, 일제 입장에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고대 영토는 축소할 수도 있다고? 강력한 상대를 발 아래 꿇렸다면 더욱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다. 상대가 허약해서 볼 것도 없이 제압 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에 불과하다.
일제는 1907년 8월에 간도 룽징촌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까지 갔다. 그런데 1909년 9월 4일 돌연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고 대신 만주 에 철도를 부설하는 권리를 챙겼다. 일본 안에서도 이 점을 안타깝게 생 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에 만주국을 건설해버려서 자연스럽게 간도는 만주국 영토가 되었기 때문 에 이런 불만도 사라져버렸다.
만일 토문강이 정말 송화강 지류였다면, 일제도 그걸 가지고 청나라와 물고 늘어졌을 것이며, 이중하도 그랬을 것이다. 또한 숙종 때 경계표지 물을 세울 때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목극등이 두만강을 따라 바다 에 이를 때까지 살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증거를 따라가 논지를 펼쳐야 한다. 그 증거가 오늘날의 현실에 불리한 점이 있다고 해 도, 현실에 맞춰 왜곡해서는 안 된다.
두만강 북쪽 간도 지방은 조선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너가 개척한 땅이다. 그러나 과거부터 조선 영토는 아니었다. 만일 대한제국이 외교 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중하 같은 뛰어난 협상가, 이범윤 같은 뚝심 있는 행정가를 내세워 청나라와 협상을 거듭했다면 간도를 수중에 넣을 수 있 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란 원래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 않는 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과거에서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교 훈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 현재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식 민사관이란 식민지 치하에 있어야 성립한다. 유사역사학의 선전선동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해방된 지 80년 가까이 되어간다.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모는 프레임은 1960년대 등장해서 50여 년이나 써먹고 있 는 중이다. 아무리 역사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동네라 해도 이젠 좀새 로운 걸 보여주면 좋겠다.
유사역사학의 기본적인 논리 중 하나는 위대한 한민족의 고대사를 일 제 식민사가들이 감춰왔다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나라 역사학자도 답습 한다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가들은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해줄 수 도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뭐하러 그러겠는가? 그리고 일제 식민 사가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일본 고문서학의 체계를 세웠다는 구로이타 가쓰미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사 편찬과 조선의 고적과 유적을 조사, 보존하는 일에 전념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16년간 지속된 『조선사』 편찬 사업에서 구 로이타는 봄, 여름의 휴가와 연말연시에 조선으로 건너와 편수 기획을 지도하고 사업을 독려했다. 그는 1916년 발족한 고적조사위원회의 중심 인물이었고 1931년 총독부에서 예산을 삭감하자 조선고적연구회를 설 립하여 외부자금을 조달하여 고적조사 사업을 계속했다.
대체 구로이타는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조선의 고적을 조사하고 보존 하려고 했던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를 만 든 것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로이타는 바 로 그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조선의 고적은 또 왜 보존하고자 노력했을까? 심지어 고적 보존 유지에 대한 법안은 일본보다도 3년이나 앞서서 시행되었는데 이런 법안 제정에 앞장선 것도 구로이타였다.
구로이타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2년 동안 유럽과 이집트 등지를 방문하여 발굴 조사 보존 사업 등을 살펴보았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구 열강이 식민지의 유적을 어떻게 다루는지 학습했다. 그는 배워온 것 을 조선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럼 구로이타는 대체 뭘 배웠을까?
열강은, 식민지에 있는 유적 건설자는 위대했지만 그 후손은 몰락하여 과거 영광을 구현할 수 없는 처지로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서 유적을 보존했다. 너희는 이제 이런 위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모두 잃 어버린 패배자라는 것을 뼈에 새겨주고 싶어 한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과거 유적은 바로 식민지인이 있는 그 자리에 보존되어야 했다.
- 만일 일제가 위대한 환국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논리다. 유사역사가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현대에 만든 책이면서 그 지은이들을 고대 인물로 위장해 놓았다. 고대 인물이 고대 관념을 가지고 쓴 것처럼 날조한 책이기 때문에 그 책을 보면서 고대인의 관념을 연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위서라고 한다.
이유립은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빈 몸으로 남하했다. 그러니 집안에 비전의 책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70년대 가 되어서 갑자기 자신이 해방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면서 『환단고기』를 꺼내들었으니 이것이 위서가 아닐 도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위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 을 수 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신뢰할 수 있는 사서가 되는 것도 아니 다. 『환단고기』는 70년대까지 알려진 여러 가지 사료가 담겨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은 『환단고기』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역사기록이 들어 있으므로 믿을 수 있는 사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안에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을 양념처럼 뿌려놓는다. 우리 민족이 드넓 은 영토를 소유하고 중국, 일본, 여진 등을 모두 지배했다는 망상을 집어 넣은 것이다.
우리 역사는 왜 이렇게 못났는가라고, 중국과 일본한테 침략이나 당하 고 결국은 식민지가 되어버린 못난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웅장한 가짜 역사에 혹하게 된다. 그리하여 환단고기에 푹 빠진 추종자 즉 '환빠'가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1979년에 한문본이 출판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6년에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한글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였다. 이 책을 번 역한 사람은 임승국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승국은 『환단고기』를 위조한 이유림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에 속했던 사람이고 역시 월간 『자유』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국사찾기협의회'는 당시 국정교과서였던 『국사 교과서가 식민사관 및 좌경화되어 있다고 공격하면서 국수주의적 역사관으로 『국사 교과 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한 단체다. 이들에 의해서 1981년에는 국회 에서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들 멤버는 국회 정치인을 동원할 수 있 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들을 이끈 수장은 초대 문교 부장관이었던 안호상浩相이었다.
- 안호상은 이승만 독재철학인 일민주의를 만든 사람이고 학원 의 병영화를 꾀해 학도호국단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임승국도 안호상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국수주의자였다. 이들은 극우적 성 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점을 별로 숨기지도 않았다. 임승국은 국회에 서 히틀러의 발언으로 훈계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에게 아첨을 떨며 국사 교과서 개정을 꾀하기도 했다.
『환단고기』가 등장하기 전에도 국사찾기협의회 회원들은 위대한 한민 족의 역사를 떠벌리고 있었다. 사실 『환단고기』는 이런 이야기를 집대성 한 책일 뿐이다.
역사는 고증과 비판의 학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가치와 신념에 의해 주장을 펼친다. 자신들의 가치와 신념에 맞는 증거만을 채택하고 그렇지 않은 증거는 기각한다. 그것은 잘 못된 것이거나 음모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민족을 위 해서 유리한 증거를 거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다른 나라도 다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가 있으니 다 른 아이도 건너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주장은 언뜻 역사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신념을 떠드는 사람을 가리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의 활동을 '유사역사학'이라고 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사이비역사학'이 라는 말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같은 뜻이다.
- pseudoscience라는 말이 있다. '유사과학' 또는 '사이비과학'이라고 번 역한다. 흔히 쓰이는 단어인데, 이를 두고 유사과학이 있으면 진짜 과학 이 따로 있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유사과학에 '학'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 니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눈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꼭두각시가 각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역사학처럼 보이게 치장 되어 있으나 역사학과는 다른 것이다. 유사역사학이 역사학의 일종이라 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인형에도 눈코입이 있고 팔다리가 있으니 사람이라 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이고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말이 나 마찬가지다.
- 유사역사가들은 위대한 조상을 창조해서 민족의 구심점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일부는 고대 사서의 모호한 구절을 과대해석하는 방법을 사용 했으나 더 대담한 이들은 날조된 역사책을 만들어냈다. 『환단고기』가 가 장유명하지만 이 책 하나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 이전에 이 같은 책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에 여러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필적할 괴서를 만들었다. 다만 환단 고기가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유명해졌을 뿐이다.
유사역사가들은 스스로를 '재야사학자', 또는 '민족사학자', 또는 '애국 사학자라고 부르면서 역사학자들을 '식민사학자', '이적사가', '용공사가', '매국사가', '친일파'라고 불러왔다. 이런 인식은 1960년대에 등장해서 1970년대에 확산되었다. 이들은 50년 동안 역사학계를 매도해왔다. 이 들이 사용한 이분법 프레임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상대를 악마화함 으로써 자신들 편을 만들어내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학자 를 악마화하는 방법은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독특한 방법이다.
- 과거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를 '강단사학자'라 부르고(이 용어는 원 래 유사역사학이 자신들을 대학 밖에 있는 '재야'라 칭하면서 이분법으로 사용한 것 이다)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학 박사학위 를 가지고, 심지어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유사역사학의 논리를 가지고 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유사역사학 쪽에서도 강단사학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추세로 변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역사학계의 우려가 있다. 유사역사학이라는 낙인찍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역사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정의되는가' 라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유사역사학'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금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돌이 있는데, 그것을 '시금석'이라 한다. 유사 역사학에도 시금석이 있다. 로널드 프리츠는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학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사료를 비판하고 증거를 통한 합리적인 추론을 해나가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에 서는 사료 비판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기록을 보면 사료 비판이라는 과정 없이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시 대와 공간을 뛰어넘으며 사료를 골라 먹으면서 자기만의 논리를 구성한 다. 그리고 기존 학설은 식민사학이라고 비난한다.
-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이라는 두 대립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의 반대말이 유사역사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학 안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고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 존재한다. 역사는 지 나가버린 과거의 흔적이며 그것을 누구도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진실로 모든 사람의 사고를 획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국정교과서였다.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위대한 고대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에게는 이미 정해진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서 위배되는 것은 배척해야 한다. 진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표에 위배된다면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이들은 한다. 역사학이 민족과 국가에 유용한 도구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심지어 유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인간이 살아온 과거를 살피면서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오는 학문이지 다른 국가와 민족의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다.

-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유래
5.16 쿠데타 후 한일수교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자 반대 시위가 거세 었다. 이때 반일 열기에 힘입어 일제강점기의 수난사를 쓴 책이 등장했 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일제강점기 동안 군수직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을 지낸 문정창이었다. '빼박'친일파인 그는 마치 고급 자료라도 가지고 있 는 척하며 책을 펴냈는데, 이 책 안에서 역사학계가 친일이라 일제강점 기 연구도 안 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때 역사학계를 친일파로 모는 프 레임이 처음 등장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역사학 전공자 를 친일파 집단으로 몰아서 유사역사가가 도덕적 우위를 장악하는 해괴 한 일이 벌어졌다.
- 한편, 1960년대에 이유립은 대전에서 대종교(단군을 신봉하는 종교)인으로 있다가 독립하여 자기 교를 이끌기 시작했다. 단단학회 교주로 올라 선 이유립은 대종교를 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가진 비전의 역사서인 『환단고기』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유립은 자신의 망상을 담은 여러 책을 만들어 각계에 보내며 호응을 해줄 사람들을 찾아 나갔다. 그때 이유립과 손을 잡게 된 사람이 초대 문 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었다. 이승만에게 일민주의(혈통에 기반한 극단 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이승만이 국시로 내세운 이데올로기)라는 파시즘 철학을 전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극우민족주의자였고 이유립과는 궁합 이 찰떡처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문정창, 안호상, 이유립 등이 모이면서 이들은 점점 더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여기에 5.16 쿠데 타에 참여했다가 물러나와 군에 납품하는 잡지 『자유를 발행하던 박창암이 합류했다. 박창암은 자유를 유사역사학의 기관지로 변모시켰다. 1975년 10월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자유는 1976년 1월호부터 유사역사학 주장을 전파했다. 전군에 이런 잡지가 납 품되었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컸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들은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공격했고, 집중 공격 타깃이 된 사람이 서울대 이병도 교수였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사편수 회의 수산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식 민지의 공공기관에 근무한 것으로 친일파 낙인을 찍기는 충분했다.
이유립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시를 투고하기도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사람이었는데 이병도를 식민사학자로 몰면서 각광을 받았다. 1976년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 연구』라는 책을 냈기 때문에 더더욱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 마침 1974년부터 한국사가 국정교과서로 바뀌었기 때문에 국사찾기 협의회는 국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국사 교과서에 자신들의 주장을 실을 수 있다면 전 국민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먼저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라는 재판을 걸었다. 당연히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그다음으로는 정치권을 동원해서 역사학계에 압력을 행사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1년에 국회에서 국사 교과서 공청회가 열리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쌍방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때 유사역사학 쪽에서는 이 유립을 토론자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이유립은 안호상을 매도 하는 글을 썼고, 그 길로 『자유에서도 퇴출되고 말았다.
이유립을 토론자에 넣어주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그는 이미 1979년에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내놓았고, 토론에서 이걸 들고 떠드는 순간 개망신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안호상 등이 이유립을 배제하는 길을 택한 것 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참 공교롭게도 『환단고기』는 일본의 극우 유사역사 가인 가지마 노보루島에게 전달되어 일역본이 나오게 되면서 역전의 길을 가게 된다. 1982년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출간되었고, 이 일역본을 다시 번역한 한단고기』가 1986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는 국수주의 서적이 범람하고 있었다. 백두산 민족의 대운이 열린다는 식의 이야기가 내놓기만 하면 대박이 나는 상황이었고 「한단고기』는 여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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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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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의 기원

역사 2024. 4. 26. 07:02

- 막걸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탁주다. 탁주는 증류주를 만들 기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만들어 마신 주종이다. 막걸리의 기 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술 자체가 고고학 유적 에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정보를 조합 해 처음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했던 시기를 짐작할 수는 있다. 막 걸리의 기원을 따져보자면, 주재료인 쌀이 재배되기 시작한 이후 에야 만들어 마셨을 테니 우리나라에서 쌀이 재배되기 시작한 시 점, 즉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이후부터 주조했다고 보는 게 적 절할 것이다. 하지만 막걸리 재료가 꼭 쌀뿐인 것은 아니므로 그전부터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빙하기가 끝나가면서 곡물이나 구근류(칡이나 감자같이 뿌리를 먹는 식물), 과일 이 풍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술을 만들게 되었다고 본다. 근동 지 역에서는 1만 5,000년 전부터 야생에서 풍부하게 자라는 밀을 이 용해 맥주를 만들었고, 이후 이집트 문명에서도 맥주를 널리 만들 어 마셨다. 그런데 이때의 맥주는 지금처럼 청량하고 맑은 음료가 아니었다. 오히려 탁하고 걸쭉한 막걸리 같은 것이었다. 즉, 초기 에는 맥주와 막걸리가 같은 종류의 술이었다.

-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발견된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에 서는 흐르는 물에 도토리가 담긴 망을 넣어서 타닌을 빼고 도토리 를 가공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살림터가 발견되었다. 도토리를 묵 형태로 가공해서 먹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도 도토리묵이라는 요리가 없다.
세계의 수많은 고고학자들은 신석기인들이 도토리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가공한 식품을 실제로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해외에서 한국을 찾은 고고학자들과 막걸리를 마시게 되 면 나는 꼭 도토리묵을 소개한다. 맛을 본 동료들은 젤리처럼 독 특한 식감을 지닌 안주가 1만 년의 역사를 지닌 그 전설의 음식이 냐며 경탄한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우리는 1만 년 동안 이어진 고고학적 안주를 보유한 나라의 후손들이니 말이다.

- 소주가 '세계의 술'이 된 것은 몽골제국 건국 시기부터다. 거대 한 제국이었던 몽골의 정복 활동과 역참으로 세계는 하나가 되었 다. 동서양 할 것 없이 몽골제국의 영향력이 미친 곳에서는 저마 다의 방법으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황실에서 증류주 제조를 관리 했던 거란과 달리 몽골제국은 증류 기술을 숨기지 않고 널리 확 산시켰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정복지에 소주 제조법을 전해주면 현지인들이 그 소주를 즐기는 가운데에 자연히 몽골제국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릴 것이라는 전략이었 다. 일종의 동화 정책이다.
피지배인들을 알코올로 다스렸던 것은 몽골뿐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술 식민주의 (alchoolosialisme)'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지배 국가가 피지배인들에게 술을 공급하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시키는 식민주의 전략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원주민을 정 복할 때,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벌할 때, 현지인의 반발을 누르 고자 사용한 방법이 바로 술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소주를 뜻하는 단어 '아라기'를 통해 짐 작할 수 있다. 몽골,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등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이고, 동남아 일대에도 증류주를 가리키는 말에 '아라 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에서 소주를 '아랄길(阿剌吉)'이라고 표현한 기록이 존재한다. 경상도 일대 방언에서는 '아라기'가 술 또는 술지게미를 가리킨다. 아라기는 아랍 지역의 증류 시설인 '알렘빅'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아랍어로 '땀'이라는 뜻이다. 증류 과정에서 술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땀과 같았기 때문 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는 소주를 '이슬'에 비유하곤 한다. 고려 시인 목은이색이 자신의 시에서 소주를 이슬로 표현 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역시 불순물을 걸러내고 정 화된 술을 만드는 증류 과정을 담고 있는 비유다.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으로 소통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세계는 소주(증류주)로 대동 단결하고 있던 셈이다.

- 젓갈은 한국 김치만의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일등 공신이 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는 생선 발효 문화가 발달 했다. 한반도의 서남해안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인들의 음식 문화 에서도 가자미식해(식해는 생선에 약간의 소금과 밥을 섞어 숙성시킨 식 품을 가리킨다)가 발달했다. 중국 기록에도 한 무제가 동이족의 땅에 서 젓갈류의 맛에 반해 '축이 오랑캐를 몰아냄)'라고 이름을 붙일 정 도였다고 한다. '오랑캐를 몰아낸다'라는 말의 뜻은 '오랑캐의 맛 을 따라간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돼지 한 마리 잡으러 갈까?" 라는 말이 "돼지고기 먹으러 갑시다"라는 말로도 통하는 것과 같 은 이치인 셈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채소 절임 요리 중에서도 한 국의 김치만큼 다양한 젓갈류로 그 풍미를 끌어올린 것은 거의 없다.

- 우리나라에서 삼겹살 구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하지만 비계가 낀 돼지고기에 대한 사랑은 그 역사가 무척 오래되어서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요리책에도 '세겹 살(삼겹살)은 돼지 중에 최고'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삼겹살 구이가 비교적 최근에야 유행하게 된 데는 비 계가 가진 특유의 잡내가 한몫했다. 지방이 가득한 비계는 고기의 여러 부위 중에서 인기가 없는 부위다. 자연스레 값도 싸다. 하지 만 돼지 종자 개량을 통해 특유의 잡내를 없애고 비계 사이에 살 이 들어차도록 한 결과, 삼겹살 구이라는 맛있는 음식으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돼지비계 요리를 사랑하는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여러모로 공 통점이 많다.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유목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는 점, 주변 강대국들의 침탈로 인한 질곡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또한,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으나) 두 나라 모두 오래전부터 농업이 주요한 산업이었지만 다양한 육가공 문화가 발달했다. 육류 단백질은 농경민들에게 결핍되 기 쉬운 영양소다. 그렇기 때문에 돼지비계처럼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부위를 가공해서 영양분을 섭취할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살 로나 삼겹살 구이 같은 요리를 개발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살로와 삼겹살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최고의 술안주라는 점 이다. 삼겹살에 소주이듯이 살로에는 보드카가 제격이다. 여기 에 상큼하고 아삭한 양배추 절임까지 곁들이면 우크라이나에서는 가히 최고의 안주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살로와 삼겹살 구이가 각각 우크라이나와 대한민 국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는 이 음식들 속에는 척박한 역사와 가난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내고자 했던 두 나라 민초들의 강인한 생존력이 담 겨 있기에 서민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조선 후기에 인기가 많았던 소불고기 요리로는 설하멱(下) 을 꼽을 수 있다. '눈 오는 날 찾는다'라는 뜻의 설하멱은 일종의 꼬치구이로, 소고기를 불에 구웠다가 찬물이나 눈에 넣어 식힌 후 기름을 발라서 다시 한번 구워 먹는 요리다. 지금도 유라시아 일 대에서 널리 유행하는 꼬치구이인 샤슬릭도 분무기 같은 것으로 물을 뿌리면서 고기를 구우니, 요리법이 비슷하다.
보다 대중적인 소고기 요리의 대표로 설렁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소의 머리, 내장, 뼈다귀, 발, 도가니 따위를 푹 삶아서 만든 국 또는 그 국에 밥을 만 음식인 설렁탕은 말뼈나 양뼈를 고아서 만든 몽골과 카자흐스탄 요리인 슈르파(또는 소르포)와 그 맛이 거 의 똑같다. 가축의 뼈를 푹 고아서 만든 이 음식들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부위까지 살뜰하게 조리해 영양 섭취를 해야만 했던 민중 들의 지혜가 담긴 레시피라고 할 수 있다.

-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선천적으로 많은 서양인들은 이처럼 주로 도수가 낮은 술을 마시며 해장한다. 위스키의 본고장이자 술꾼 많 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에서는 해장술을 '개털(hair of the dog)'이 라고 한다. 늑대 같은 맹수에게 물린 상처는 그 짐승의 털을 문지 르면 낫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말로, 쉽게 말해 '술병은 술로 고 친다'라는 뜻이다.
반면,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서양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적은 아 시아인들의 경우에는 술로 해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중국 사람 들은 해장 음식으로 연두부와 쌀죽, 일본 사람들은 된장국(미소시 루)에 낫토를 먹는다. 몽골 사람들은 원래 우유를 발효시켜 약하게 알코올 성분이 함유된 쿠미스를 마시며 해장을 했지만, 요즘에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맥주를 많이 먹는다.
각 나라마다 저마다의 해장 문화가 있지만, 우리나라만큼 '해 장'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한국에는 아예 '해장국'이라는 음식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한국에서 해장국을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 깊숙이 자리를 잡 았다.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회식을 한 다음 날이면 으레 함께 술자리를 한 이들 중 한 명이 "오늘은 해장국이나 할 까?" 하며 전날 멤버들을 다시 불러내어 합동으로 숙취 해소를 하 기도 했다.
다 같이 모여 해장을 하면서 전날 과음으로 인해 상했을 서로 의 건강을 생각해주고, 간밤의 여흥을 맑은 정신으로 거듭 이어가 는 해장 문화는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라고 여겨 진다. 우리나라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러시아나 폴란드에도 이런 지혜로운 해장 문화가 없다. 지금 당신이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 욱 행복한 이유는 아마도 내일의 따뜻한 해장국이 있기 때문은 아 닐까?

- 그렇다면 농사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지중해 동안의 팔레스타인에서 북부 메소 포타미아, 이란 고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처음 발생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설이 우세했다. 하지만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다지역 기원설을 더 지지한다. 중국에서도 약 1만 년 전부터 농사가 시 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나왔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약 1만 2,000년 전부터 호박, 박, 구근류 같은 것을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 었다. 즉, 농사는 동시다발적으로, 지역마다 독자적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사실 농사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농경의 도입은 직립보행과도 견줄 수 있다. 직립보행은 동물적인 능력을 희생함으로써 당장의 생존 가능성은 줄어들게 만들었지만, 그 대신 두뇌의 폭발적인 발 전을 가져왔다. 이로써 장기적 관점에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은 훨 씬 더 늘어났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사냥과 채집은 자연의 변화 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환경 적응성이 강한 활동이다. 눈앞의 먹잇감을 쫓거나 열매를 따면 그만이다. 만일 사냥감이 보 이지 않거나 더 이상 채집할 거리가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 면 된다.
반면, 농사는 한번 시작하면 그 지역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을 농사에 걸어야 했다. 또한, 의외로 영양 상태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사냥과 채집을 하다 보면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농사를 지을 경우 자연에서 나는 다양한 음식 자 원을 포기하고 오로지 선택해서 키운 작물만 먹어야 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비자발적 '원 푸드 다이어트'인 셈이다. 아이 러니하게도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의 신장은 더 작아졌고 각종 질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한, 농사로 인해 전쟁이나 갈등의 빈도 도 더욱 심해졌다. 사냥과 채집 대신 농사를 선택한 상황에서 곡 물 생산량이 떨어질 경우,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약탈이다. 비축해둔 식량은 인간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로부터도 지켜야 했 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층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농사만의 장점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주요한 장점은 인간 삶의 예측할 수 없는 요인 들을 최대한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령, 농사를 잘 지으려 면 치수(水)가 관건인데, 수리와 관개 시설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인류는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 울 수 있었다. 또한, 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공동체 내에서의 감 시와 통제를 강화하게 됨에 따라 법과 규칙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도 빠르게 발전해갔다. 이처럼 농경이 도입되면서 인류는 급 격한 도약을 하는데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 른다.

- 맨몸 격투기에 숨은 인류의 지혜
맨몸으로 하는 격투기가 인명 사상을 줄인다는 사실은 최근의 역사적 사례로도 확인된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 양국은 국경 지역 영유권을 두고 우수리 강의다만스키 섬에서 큰 분쟁을 겪 었다. 이때 양측은 화력 동원은 자제하면서 주먹만 사용한 싸움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덩치 좋은 군인들을 내세웠다가 나중에 육박 전이 격해지자 다른 부대에서 권투나 무술 경력이 있는 선수를 데 려와 투입했을 정도다. 하지만 끝내 육박전으로 해결이 되지 않자 양측은 화력을 사용하긴 한다. 그 결과, 양측 도합 수백 명의 사상 자가 발생하는 수준에서 분쟁이 마무리된다. 어떠한 전쟁도 일어 나지 않는 것이 백번 옳지만, 애초부터 화력을 사용했더라면 피해 수준은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선사시대 사회의 90퍼센트에서 폭력 분쟁이 있었으며 적 어도 2년에 한 번꼴로 실제 분쟁을 겪었다고 한다. 폭력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 내면에 내재된 본능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성을 아무 때나 드러냈다면 인간은 이미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맨몸으로 하는 격투기는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 내면의 폭력성 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하면서 재미있는 의식으로 승화시킨 결 과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용의 <각저도>에 그려진 고구려인과 서역에서 온 호인의 결투 장면은 새롭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 과 다른 타인에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이 커지 면 적개심이 되기도 한다.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씨름은 이방인에 대한 적개심을 격투 경기를 통해 해소하는 방편이었으리라. 또한, 경기가 열리는 장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축제의 장으로 만듦으 로써 모두가 하나로 화합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 사슴뿔 금관, 하늘과 땅을 잇다
1921년 발굴된 신라 금관총 금관은 사슴뿔과 나뭇가지를 모티 브로 하고, 곡옥(曲玉,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옥구슬)을 단 화려하고 독특한 형태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사실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금관은 흑해 연안,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도 발견된 바 있 다. 나아가서는 서쪽으로는 북유럽,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유적에서도 비슷한 모티브의 관들이 발견되었다.
북반구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슴뿔 모양의 관은 하늘의 대리인인 샤먼의 의식에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 슴뿔은 매년 자라므로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또한, 하늘로 뻗 어나가는 아름드리나무는 마치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를 연상하게 한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상징이었던 사슴뿔과 나무가 (금관 장식에 쓰인 이유다. 오늘날에도 유라시아 곳곳의 샤먼들은 신성 한 나무 아래에서 하늘과 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만주족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라 금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을 쓰고 그들이 신성하 게 모시는 자작나무 앞에서 샤먼이 부족을 대표하여 하늘에 제사 를 올렸다. 사슴뿔과 나무 모양으로 장식된 샤먼의 관은 신과 인 간이 소통하는 다리의 역할을 했다.
- 신라 금관은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반도 동 남쪽에 위치한 신라의 왕과 귀족이 쓰던 관이 북방 유라시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에 주목하면 이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금은 무르고 변형이 쉬운 물질이다. 따라서 금관을 착용하려면 가죽이 나 천으로 만든 관모(모자)를 쓰고 그 위에 금관을 덧써야 한다. 흥 미로운 점은 신라 귀족의 무덤에서 거의 빠짐없이 발견되는 관모 의 재료다. 이 관모의 재료는 섬세하게 가공한 자작나무 껍질이 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 남쪽 신라에서는 자라지 않는 나무로 주로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만 자라는 대표적인 북방계 수종이다.
-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자작나무의 껍질로 그릇, 모자, 가방 등의 생필품을 만들어 사용한다. 천마총의 말다래도 자작나 무 껍질을 복잡하게 가공해서 만들었는데, 그 위에 복잡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신라에서는 자작나무 공예술이 발달했다. 이는 당시 신라가 북방 지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작나무를 공급받는 무역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또한, 그것을 가공하여 예 술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기술이 출중했음도 의미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인 신라 금관에는 이처럼 우리 역사의 다양한 장면들이 숨어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고자 했던 고대 신라 왕족들의 열망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문화재 약탈의 아 픔, 그리고 이에 대항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문화에 대한 자부 심과 항일 의식까지 화려한 외양속에 반만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 겨 있는 것이다.
-  중국인들은 인삼을 직접 캐지 않고 굉장히 먼 데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삼의 대표적인 산지 는 백두산 일대다. 인삼은 일교차, 계절에 따른 기온차가 뚜렷하 고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약용작물이다. 중국과 인삼 교역을 시작한 시기는 고조선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두산 일 대에서 얻은 모피를 중국과 교역한 흔적이 있는데, 이때 한반도 인삼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졌던 것 같다.
우리 인삼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 어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진상품으로 중국에 인삼을 선물했 다. 고구려와 백제의 인삼이 유명하다는 기록은 6세기경부터 등 장한다. 통일신라도 당나라에 인삼을 보낸 기록이 있지만, 인삼의 품질이 고구려나 백제 인삼에 미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 당나라가 통일신라에서 보낸 인삼을 받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통일신라가 인삼의 주요 산지인 백두산 일대와 멀어서 생산 량이 적었던 데다 채취한 인삼을 저장하는 기술도 발달하지 못했 던 탓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인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발 해다. 신라 인삼에 대한 기록은 8세기 말 이후에 사라진다. 이 시 기는 발해가 한반도에서 인삼의 주요 거래 국가로 등장하는 시점 과 맞물린다. 발해의 영토는 시베리아 호랑이로 유명한 연해주 시 호테알린산맥과 백두산 일대로까지 확장되었는데, 이 지역이 바 로 인삼의 주요 산지였다. 일본도 8세기 초에 발해를 통해서 인삼을 처음 접한다. 발해는 기후가 냉랭하고 산세가 험한 지형에 위치했지만 그러한 토양에서 잘 자랐던 특산품 인삼 덕분에 이를 수 출해 국고를 쌓을 수 있었다.
최근 러시아의 발해 유적에서 발해가 인삼 산지로 유명했음을 밝혀주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바로 인삼을 채취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동물의 뼈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도 삼과 쇠는 상극이기 때문에 인삼을 채취할 때 나무나 골제로 된 도구를 사용한다. 흥 미롭게도 인삼 캐는 도구가 발견된 곳들은 발해 유적들 중에서도 최북단 산악 지역들이었다.

- 적절한 모방은 그 물건이 널리 사용되고 보급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 남쪽의 국가들은 중국과 직 접 교역하게 되는데 삼한의 우두머리들은 중국에서 사온 관리의 옷과 도장을 비롯해 중국제 명품을 무척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인 기가 있던 제품은 청동거울이었다. 한나라의 청동거울은 중국 내 에서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청동거울의 뒷면은 화려하게 장 식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둥그런 모양이 태양 같아서 행복과 부 를 상징했다. 청동거울은 실용성과 상징성을 겸비한 도구였다. 청 동거울은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야요이시대 무덤에서는 청동거울이 같은 장소에도 몇 개씩 발견되기도 한다.
- 그런데 이 중국 명품의 수요가 많아지자 그 대안으로 청동거울 을 모방한 제품이 널리 제작,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명 '본뜬거울' 이라고도 불리는 방제경(製鏡)이다. 방제경은 특히 약 2,000년 전 무렵 삼한이 있던 경상남도 일대에서 널리 유행했다. 얼핏 보 면 한나라 청동거울과 유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무늬가 조잡해 서 차이가 난다. 거울 뒷면의 무늬는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다 보니 문양이 다소 거칠더라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만들어 널리 사용한 것이다. 방제경 덕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거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방제경은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초기 백제시대의 집터 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이제 거울이 살아생전 귀하게 사용되다 가 무덤에 함께 묻히는 물건이 아니라 집에서 쓰다가 그냥 버릴 정도로 흔한 물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쯤 되면 방제경은 청동거 울의 어설픈 가품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보다는 더 많은 사람 들이 실용적인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발전된 형태 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심지어 방제경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흑해 연안이나 우크라이나에서도 발견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해서 교역이 왕성해지면서 중국제 물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이를 본뜬 방제경이 유통되었던 것이다.

- 전쟁 영화 포스터나 스틸 이미지를 보면 전장에 총을 꽂고 그 위에 철모를 걸어두어 시신이 있는 곳을 표시하는 장면이 종종 묘 사된다. 이는 약 3,000여 년 전 고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 전사 들이 땅에 낡은 칼을 꽂아 전사자를 위로하던 풍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 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초원 사람들이 낡은 칼을 전사의 상징으 로 숭배했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 풍습을 《역사》에서 는 '아키나케스', 《사기》에서는 '경로'라고 불렀는데, 동일한 말을 다르게 음차한 것이다.
이 풍습은 고대 그리스로 건너가서 전쟁의 신 아레스(Ares)의 상징이 된다. 한반도에서도 고인돌 앞에 비파형동검을 꽂아두고 숭배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화려한 황 금 보검이 아니라 날이 빠진 낡은 칼을 꽂아두는 것이 선뜻 이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저승과 이승을 반대로 생각했던 고대 유 목 민족들의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유물은 일부러 부러뜨리거나 깨서 기존의 형태를 훼손하여 넣는 경우가 흔하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왕이나 장군의 경우에는 시신을 거둔 뒤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안치했다. 2,500여 년 전 러시 아 알타이 초원의 파지리크 고분군 유적에서 왕족을 묻은 대형 무 덤을 발굴하던 중 흥미로운 인골이 발견되었다. 미라 형태로 발견된 무덤의 주인공은 머리 가죽이 벗겨진 상태였는데 벗겨진 부분 을 소가죽으로 덧대어둔 것이다. 오래전 동아시아에서는 적장을 죽이고 나면 목을 베어 그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풍습으로 유목 민족들의 경우에는 목 을 베는 대신 머리 가죽을 벗겨서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말의 꼬리 에 달고 다녔다. 아마도 미라로 발견된 왕족은 전쟁터에서 선봉에 나섰다가 희생을 당한 인물이지 싶다. 그의 부하들은 전장에서 목 숨을 잃고 머리 가죽이 벗겨진 수장의 유해를 고이 모셔와 적군에 게 훼손된 신체를 정성스레 복구시킨 후 무덤에 안장했을 것이다. 이런 풍습이 있다 보니 전사의 유골은 전쟁터에서 획득해야 하는 주요한 전리품이었다. 북방 유목 전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승기를 잡 았다고 해도 적의 무덤을 찾아 그 인골을 훼손해야 비로소 전쟁이 끝 났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무덤 에서 발견한 귀금속들을 전리품으 로 챙기기도 했다. 실제로 흉노의 고분을 발굴하다 보면 이미 도굴이 되어서 인골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 문신 과정은 침술과도 비슷해 치료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 다.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굴된 미라의 허리 아래 부분에는 마치 침을 놓은 듯 일렬로 점을 찍은 문신이 양쪽으로 남아 있다. 이 부 위는 공교롭게도 오래 말을 탈 경우 가장 통증이 심한 요추 부분 이다. 기마민족에게 요통은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이었을 터, 바늘 로 아픈 부위를 찔러 허리 통증도 줄이고 신령한 힘을 몸에 불어 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신을 완성하려면 바늘로 수백 번, 수천 번 몸이 찔리는 고통 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고통을 동반한 채 우리 몸을 도화지 삼아 새겨 넣은 문신은 고대의 정신문화가 담긴 메모리와 같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 문신은 특유의 주술적, 제의적 의미는 사라지 고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사람들이 몸의 털을 밀고 문신으로 표 식을 새겨 넣는 대신 신분과 계급에 맞는 옷과 화장으로 자신의 몸을 가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중에 문신은 근대화하지 못한 야만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또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문신은 고통을 감내하면 서도 자신의 지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가 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화장술이었다.

- 사실 옛사람들이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점을 쳤는지 등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나마 점복의 흔적으로 가장 많이 발굴되는 것은 복골이다. 복골은 짐승의 뼈로 만들 어진 점을 치는 데 쓰던 도구인데 짐승의 어깨뼈를 불로 지진 다 음 거기에 새겨진 금을 보고 점괘를 보는 방법, 거북의 껍데기나 짐승의 어깨뼈에 글자를 새겨 놓고 그것으로 점괘를 보는 방법 등 이 있었다. 뼈 부위 중에서도 어깨뼈(견갑골)가 선호된 이유는 가 장 얇은 뼈라서 잘 갈라졌기 때문이다.
- 복골의 풍습은 한반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다만, 상나라와 달리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 외에 점을 치는 방식이나 도구 등은 상나라의 그것과 모두 똑같다. 소나 돼지의 어깨뼈에 구멍을 일정하게 뚫어서 불 위에서 그을린 뒤 잘 갈라지게 한 복 골이 약 2,000년 전의 마한과 가야 사람들이 살던 서해안과 남해 안의 조개무지에서 다수 발견되기도 했다. 요즘에도 유독 어촌에 점집이 많은 편인데, 바다만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자연환경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복골 이 발견되기도 했다. 강릉 바닷가에 위치한 강문동의 늪지대에서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이 발굴된 것이다.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강문동에서 발견된 복골이 유일하다. 중국 상나라에서는 남방 바닷가에서 잡아온 귀한 거북의 등딱지를 짐승의 어깨뼈 대신 쓰기도 했지만, 말뼈는 사용한 적이 없다. 말의 사육 과 이용이 가장 활발했던 초원 지역에서도 말뼈로 만들어진 복골 은 거의 없다. 이들에게 말은 귀하게 돌보며 타는 동물이지 잡아 먹고 남은 뼈로 점을 쳐도 되는 동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들 을 종합해볼 때, 강문동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복골용 뼈로 말 뼈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말을 탈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소 나 돼지 같은 가축으로 인식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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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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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작전

역사 2024. 4. 17. 08:10

- 농업과 산업 기반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한 소규모 기습은 중세와 근대 초기의 전쟁에서 거의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습이 개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빚어낸 적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 역시 특수작전의 정의와는 맞지 않는다. 알레포 시장이나 오리올의 방앗 간 같은 시설들이 특수작전의 대상이 될 만큼 가치를 지니는 것은 오로지 독특한 정황이 갖춰졌을 때뿐이다.
군대에 필요한 장비가 갑옷, 칼, 투구 등 몇 가지밖에 없고, 보급품 을 위해 본국의 산업생산에 기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여기 서 반드시 강조해야겠다." 일반 화살과 석궁 화살은 대량으로 필요했다. 때로는 군주들이 수십만 개의 석궁 화살을 사들이거나 요구하 기도 했다. 잉글랜드 국왕 존은 1212년에 석궁 화살 21만 개를 구매 했고,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1272년에 석궁 화살 10만 개를 내놓 으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백년전쟁 때 프랑스에서 작전을 치던 잉글랜드 군대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장궁 화살이 필요했 다. 예를 들어 영국 왕이 1421년에 구매한 화살은 42만 5,000개나 된다"
그러나 현대에 비하면 이만한 수량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 다. 또한 중세 통치자들은 보통 필요한 만큼의 화살을 현장에서 제 작하거나 외국상인에게서 사들이는 방법을 썼다. 많은 도시와 마을 에 할당량을 정해주기도 했다." 하이메 1세가 1272년에 요구한 10만 개의 석궁 화살은 여러 마을이 나눠서 공급했다. 바르셀로나는 1만 5,000개를 공급하고, 우에스카는 4,000개를 공급하는 식이었다." 도 시와 지방에서 산업생산은 소규모 공방들이 담당했다. 대규모 조립라인에서 똑같은 물건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장인들이 손으로 일일이 물건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군대가 수십만 개의 화살을 본국에서 공급받는다 하더라 도, 전국에 흩어진 소규모 공방에서 많은 장인들이 만들어냈다. 이러 니 어느 한 도시의 공방 몇 군데를 파괴하기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하 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예컨대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작전을 시행 했다 해도, 발렌시아나 이탈리아 남부에서 작전 중인 아라곤 군대에 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화약이 혁명을 일으킨 뒤에도 이런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16세기까지는 그랬다. 군대가 요구하는 화약, 포탄, 화 승총탄의 양이 중세 군대가 요구하던 화살의 양보다 확실히 많기는 했다. 1513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 침공을 위해 화약 510톤을 실어 보냈고, 투르네 공성전에서는 대포 180문이 매일 최대 32톤까지 화 약을 소비했다." 1565년 몰타 공성전 때 튀르크 군대가 쏜 포탄은 13만 개로 추정된다. 화승총탄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다."
- 그러나 생산방법은 여전히 중세와 다를 바 없었으며, 외국 상인들에게서 사들이는 화약과 무기의 비중이 컸다. 특수작전의 유혹을 불러 일으킬 만큼 규모가 큰 무기 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약고는 매력적인 표적이었다. 기술적으로 파괴하기가 몹시 쉬웠 기 때문이다." 육군의 화약 운송열차, 함대에 보급되는 화약, 도시의 화약고 등을 날려버린다면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될 수 있었다. 예 를 들어 1453년 하버러 전투에서 헨트 시민군은 포병의 부주의로 화 약고 일부가 폭발하자 겁에 질려 도망쳐버렸다(헨트 시민들은 부르고뉴의 지나친 과세에 항의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제압되었다-옮긴이) 15세 기 말에는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이던 군대가 화약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푸는 일이 잦았다. 한편 포위된 도시 또 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면 적에게 함락되곤 했다."
그러나 화약고가 종종 사고로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화약고 를 목표로 특수작전이 시행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당혹스 러운 결과다. 어쩌면 특수작전에 대한 중세식의 인식이 여전히 지배 적이어서, 화약혁명 이후 나타난 새로운 전쟁 양상과 사건들 중 일부 가가려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들은 특수작전의 주요 표적이 었다. 그들이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전쟁 의지 전체를 지탱해주는 유 일한 존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도 시대에 상비군이나 상 시적인 군대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미군에 대 해 말하듯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군이나 아라곤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오로지 다양한 규모의 '프랑스계' 부대나 '아라곤' 부대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들은 영지 주둔 병력, 용병대, 민병대, 동맹국 지원대, 떠돌아다니는 개인 등이 임시로 한데 모여 형성된 부대였다. 원정이 끝나면 부대는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또 부대가 만들어질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충성심의 지속기간도 군대의 지속기간보다 아주 조금 더 길 뿐이 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 개개인과 지휘관들 사이의 유대가 아주 오랫동안 강력하게 지속되기도 했지만, 군대 전체는 다른 문제였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군대에는 기강 해이, 탈영, 반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반역이 만연했다. 군대의 동맹관계는 수시로 변할 때가 많았으므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얼마든지 적이 될 수 있었다. 영지 들의 충성심은 특히 내전이나 계승전쟁의 경우 변덕을 부리기 일쑤 였다. 용병들의 충성심은 이보다 훨씬 더 미약했고, 병사들과 장교들 은 물론 분대 전체가 전쟁을 하다 말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예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도 이런 짓은 밉살스럽게 여겨졌지만, 병사나 장교나 분대 가한 계절에는 이쪽 군주를 위해 싸우다가 다음 계절에는 반대편 군 주를 위해 싸우는 일은 그들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에는 여러 군대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자 뺏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부대들이 끊임없이 동맹을 바꿨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으로 싸우던 분대가 다음 전투에서는 '합스부르크'군으로 나타나곤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이 이런 군대에 합류하거나 군대를 떠나는 데에는 다양한 개인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들을 꼽아 보면 자신의 영주나 특정한 친구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 고정된 보수 와 전리품을 받아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사회적 지위를 높 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명예를 얻어 남성성을 확립하고 싶다는 욕 망, 모험에 대한 열망 등이 있다. 애국심이나 신앙심은 대개 이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군대를 하나로 묶어 지탱해주는 것은 순전히 사령관의 능력인 경우가 많았다. 군대를 구성하는 여러 부대의 충성 심은 추상적인 이상이나 정치체제보다 사령관을 향하고 있었다. 사 령관은 경우에 따라 영주이기도 하고, 친구나 동맹이기도 하고, 단순 히 돈을 지불하는 고용주이기도 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은 처음에 스위스의 소지주로 출발했으나, 16세기 말에는 가문 소유의 영 토가 북해에서부터 지브롤터까지 유럽을 뒤덮고, 필리핀부터 멕시코 까지 세계로 펼쳐져 있었다.
군대와 제국이 가문의 일인 것처럼, 전쟁의 목적 또한 사령관 본인 이나 가문의 이득을 위한 것일 때가 많았다. 전쟁은 왕가의 이익과 상 속권을 위해 군주들이 벌이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송사의 연장" 8 이 었다."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고, 이 시기의 모든 주요 분쟁 (아라곤-앙 주 전쟁, 백년전쟁, 장미전쟁, 이탈리아 전쟁 등)은 대체로 왕가의 상속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유럽의 모든 왕국, 공작령, 백작령이 계승전쟁으 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전쟁에서 지휘관의 비중이 이처럼 컸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적 사령관을 공격해서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전투나 포위 공격이나 원정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 암살과 납치의 가장 큰 약점은 불명예스러운 싸움방법이라는 점이 었다. 암살과 납치는 당시를 지배하던 정치문화의 약점을 온전히 이 용하는 한편, 바로 그 문화 전체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전적인 '죄수의 딜레마'(협력적인 선택이 둘 모두에게 최선인데도,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으로 인해 둘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는 현상옮긴이) 사례라 고 할 수 있다. 암살과 납치를 가장 먼저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엄청난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 정치질서도 변할 것이고, 이것이 모든 통치자들에 게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군사적 수단으로 다른 곳보다 훨 씬 더 암살에 의존했던 중세의 중동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안정적인 왕조와 영지를 찾아보기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더 힘들다는 점 이 좋은 예다. 
서유럽에서도 이단과 이교도에게는 암살과 납치가 널리 사용되었 다. 같은 기독교인에게도 가끔 사용되기는 했으나, 금기의식이 여전 히 남아 있었다. 이것이 봉건 정치체제가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하 는 데 기여한 요소였다. 이탈리아의 일부 군주와 폭군을 제외하면, 중 세나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니자리파와 유토피아인의 본을 따라 암살을 정치와 군사의 일반적인 도구로 이용하거나 특수한 암살부대 를 훈련시키려고 시도한 주요 정치세력이나 군대는 없었다. 암살을 군사적인 도구로 이용할 때도, 이것이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더럽고 부끄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암살과 납치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식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 런 작전이 성공을 거뒀을 때조차 명예에 흠집이 났다는 것을 뜻했 다.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언제나 대외적인 이미지 면에서 재앙을 만난 격이었다. 전투의 패배가 흔히 명예롭게 여겨지는 것과는 달랐다.!!"
- 18세기 이후 전쟁을 정당화한 논리들에도 불구하고, 납치와 암살 이 여전히 군사적 금기로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명예 와 계급 이익의 제단에 승리를 제물로 바치는 기사도 시대의 군인정 신이 아직도 남아 세계 지도자들을 적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토머스는 1983년에 특수작전을 다룬 글에서 명 예에 대한 기사도적 인식이 20세기가 밝은 지 한참 지났을 때까지도 특수작전의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직업 장교들이 특수작전을 "군인의 명예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머스 본인도 비록 특수작전의 최근 역사와 미래의 잠재력을 포괄적으로 개관하려고 시도하면서도, 암살의 시행방법과 유 용성에 대한 논의는 회피했다.
기사도의 '공정한 경기 규칙을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해버리고, 전 장에서는 승리를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라면 표적 사실과 정치적 암살에 부과된 제한과 그런 행위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인류의 완벽한 파멸을 위해 계산된 계획 을 수립하던 대통령, 의장, 원수 등도 다른 지도자들의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1976년에 미국의 제럴드 포드 대 통령은 미국 정부의 공무원들이 정치적 암살을 모의하는 것을 불법 으로 규정한 행정명령 제11905호를 발표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행정 명령 제12333호를 통해 이 명령을 지지했고, 그 뒤를 이은 모든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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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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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세계사

역사 2024. 3. 5. 07:07

- 근대가 시작된 이래로 당대의 기술적 진보가 독특하고 혁명적이라는 자만심은 항상 있었다. 물론 우리의 시대도 예외가 아 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다. 과학의 진보가 인간사에 미친 완전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그 120년 동안에 일어나서 사회구조의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기 술의 폭발로 눈을 돌려야 한다. 순식간에 이동 속도가 열 배로 증가했고 거의 즉각적인 통신이 이루어졌다. 19세기 초만 해 도 토머스 제퍼슨이 몬티첼로Montichello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여 행하는 데 열흘이 걸렸고 상당한 비용, 육체적 고통, 위험이 수 반되었다. 1850년에는 증기기관차의 등장으로 같은 여행을 이전보다 훨씬 적은 비용, 불편함, 위험으로 하루 만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스티븐 앰브로즈stephen Ambrose의 『불굴의 용기undaunted Courage』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생각해보라.
1801년의 세계에서 중요한 사실은 말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 직이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제조된 물건, 밀, 쇠고기, 편지, 정보 또는 그 어떤 명령이나 지시도 말보다 빠르지 않았 다. 제퍼슨과 동시대 사람들이 알기로 말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었다.
- 1837년에 영국에서 윌리엄 포더길 쿠크William Fothergill Cooke 와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 이 전신을 발명하면서 즉각적 인 통신이, 금세기에 비행기와 컴퓨터에 의해 일어난 변화가 왜 소하게 보일 정도로, 경제·군사·정치적 문제의 면모를 갑작스 럽게 바꾸어 놓았다. 전신이 나오기 전에는 원시적 통신기술이 일상적으로 크고 작은 비극을 낳았다.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이 1815년에 뉴올리언스에서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것은 헨 트Ghent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된 지 2주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1850년 이후에는 기술이 진보하는 속도가 가속되지 않고 느려 졌다. 1950년에 생존했던 서구 세계의 평균적 거주자는 2000 년의 기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 에, 1800년에 살았던 사람은 50년 후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혼 란을 겪었을 것이다.

- 통화에 관한 간략한 설명
모든 금융의 역사가 그래야 하듯이, 이 책은 당시의 통화-몇 가 지 예를 들자면 영국의 파운드pounds, 스페인의 페소pesos, 베네 치아의 두카트ducats, 피렌체의 플로린florins, 프랑스의 리브르 livres를 다룬다. 나는 모든 금액을 현대의 통화로 바꾸는 항상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작업으로 글을 어지럽히지 않기로 했다. 이에 관한 정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음의 대략적인 근사 치가 도움이 될 것이다. 유럽의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 국가에서 통화의 표준 단위는 1/8온스ounce (무게의 단위, 1온스는 28.35그램-옮긴이)짜리 작은 금화- (1파운드보다 약간 더 나가는) 영국의 기니 guinea, 리브르, 플로린, 두카트 같은였고, 이는 오늘날의 기준 으로 약 40달러의 가치에 해당한다. 1500년과 1800년 사이에 영국 신사의 연간 생활비는 총액 300파운드 정도였고, 농부와 노동자는 15~20파운드로 꾸려나갔다. 그러나 통화 가치의 하 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근사치조차도 아주 빈번하게 매우 부정 확하게 측정된다.
주된 예외는 기니와 리브르의 약 절반 정도 가치를 지닌 네 덜란드의 길더guilder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드라크마drachma는 대략 노동자나 농부의 하루 임금과 대략 비슷했다.

- 번영은 단순히 수력 댐, 도로, 전화선, 공장, 비옥한 농지, 심지어 거액의 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제 인프라의 핵심 요소를 이전하 는 방법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번영을 이식할 수도 없다. 가장 예외적 인 경우를 제외하고 국가의 번영은 물리적 대상이나 천연자연의 문제가 아니 다. 상호작용하고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하는 제도와 관행 institutions의 문제다. 1부에서는 이러한 제도와 관행이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 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제도와 관행이 부각된다.
*안전한 재산권. 여기에는 물리적 재산뿐만 아니라 지적 재산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가 포함된다-시민권
*세계를 탐구하고 해석하기 위한 체계적인 절차-과학적 방법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한 광범위하고 개방적인 자금원-현대적 자본시장
*중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사람과 재화를 운송하는 능력

- 네 가지 요소-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효율적인 자본시장, 그리고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가 모두 갖추어지기 전에는 국 가가 번영할 수 없다. 네 요소는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잠시 합 쳐졌으나 영어권 세계에서는 1820년경까지 안정적으로 자리 를 잡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머지 세계로 확산 하기 시작했다.
이들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경제 발전과 인간의 복지가 위태로워진다. 네 개의 다리 중 하나만 걷어차더라도 국가적 부 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이 전복되는 것이다.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를 당한 18세기의 네덜란드, 재산권이 상실된 공산주의 국 가들, 자본시장과 서구적 합리주의가 없는 여러 중동 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가장 비극적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서는 여전히 네 가지 요소 모두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 여러 세기에 걸친 경제 발전을 측정하고 싶다면 먼저 최저 생활 수준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를 물어야 한다. 매디슨은 1990년의 저개발 국가에서 연간 약 400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했다. 다음으로, 경제사학자들은 가 용한 모든 데이터를 사용하여 이 수준에서 살아가는 인구의 비 율을 결정한다. 인구의 거의 10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농 산물의 상당 부분을 수출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에 따라 연간 400달러의 생계 수준에 매우 근접하는 삶을 살아간다. 매디슨 처럼 1인당 400달러의 GDP 를 1세기 초의 유럽, 1950년의 중 국, 또는 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에 일률적으로 할당하는 것은 대단히 임의적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최소한 경제성장을 비교하고 측정하는 기준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은 '도시화 비율urbanization ratio', 즉 인구 1만 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율을 살펴 봄으로써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리 스와 로마의 전성기에도 인구가 1만 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사 람의 비율이 극히 미미했다. 1500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도 시가 15만 명의 주민이 있는 나폴리였다. 86만 5000명의 유럽인, 다시 말해서 대륙 인구의 약 1퍼센트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고 6퍼센트는 인구 1만 명 이상의 소도시에서 살 았다. 따라서 중세 시대에는 유럽인의 90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했다. 중세기에 유럽보다 훨씬 발전한 아시아의 위대한 문 명권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100퍼센트에 더 가까웠 고, 극소수 지배 엘리트의 막대한 부가 이 지역의 전반적 번영 의 수준을 높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1500년 이전에는 전 세계의 1인당 GDP가 매디슨이 정의한 400달러 의 생계 수준에 근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 미국에서는 1820년까지도 70퍼센트에 달하는 노동 인구가 농장에서 일했다. (미국은 농산물의 상당 부분을 수출했기 때문에 낮은 도시화 비율이 시사하는 것보다 생활 수준이 훨씬 더 높았다.) 1998년에 이 수치가 2퍼센트로 떨어졌다. 농장 생활을 낭만적으로 바라 보는 사람들은 현대 세계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빈곤의 강력한 지표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문명의 여명기에 는 상황이 반대였다. 인류는 훨씬 덜 생산적인 수렵과 채집에 종사하는 유목 민의 삶에서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정착된 농부의 삶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아 마도 당시의 수렵채집가들은 농부의 부드럽고 새롭고 영혼이 없는 삶의 방 식을 한탄했을 것이다.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농업은 여자들의 일로 업신 여겨졌다.)
- 아주 긴 역사적 발자취를 조사하는 일의 유리한 점은 성장 에 관한 커다란 불확실성까지도 '씻겨나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0년이라는 기간에 대하여 1인당 GDP의 시작이나 끝 을 두 배로 과대평가하더라도 연간 성장률에는 0.07퍼센트의 오차밖에 발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세계 1인당 GDP 성장률이 예컨대 0.5퍼센트 정도까지 높을 수 없었다. 성장률이 0.5퍼센트였다면 1인당 GDP가 오늘의 달러 가치로 400달러에서 2000년에 860만 달러로 늘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간의 대부분 동안 성장이 실제로 0에 매우 가까웠다고 확신할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극단적인 낙관적 추정치조차도 서기 1년부터 1000년까지의 기간 동안 세계 1인당 GDP의 두 배 또는 세 배 성장을 시사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서 1820년 이후 172년 동안에는 세계 1인당 GDP가 여덟 배로 성장했다. 같은 172년 기간에 영국의 1인당 GDP가 10배, 미국은 20배로 늘어났다.
- 5000년 전에 돈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전에도 인간은 빌려주 고 빌렸다. 수천 년 동안, 빌려준 곡물과 가축에 이자가 붙었다. 겨울에 빌린 곡식 자루나 송아지를 수확기에 두 배로 갚아야 했 다. 이러한 관행은 저개발 사회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고대 신용시장의 역사는 광범위하고 깊다. 비옥한 초승달- 수메르, 바빌론, 아시리아-지대의 초기 역사기록에서 많은 부 분이 돈을 빌려주는 일에 관한 기록이다. 함무라비의 유명한 바 빌로니아 법전-최초로 알려진 포괄적 법전도 상업적 거래를 다뤘다. 몇 가지 작은 예를 들면 충분할 것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1900년까지 수메르에서 보리를 빌려주는 통상적 금리는 33퍼센트, 은을 빌려주는 금리는 20퍼센트였다. 두 금리의 차 이는 보리를 빌려주는 것이 은을 빌려주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반영했는데, 후자는 소비되거나 부패할 수 없고 은 수확 silver crop이 흉작일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35
그런 금리는 장기적 프로젝트의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이자율이다. 연 20퍼센트의 이자율이면 4년도 안 되어 빚 진 돈이 두 배가 된다. 분별 있는 사업가나 기업이라면 그렇게 엄청난 미래의 부담을 지면서, 대규모의 상업적 시도가 대부분 그렇듯이, 5년 또는 10년 동안 수익을 내지 못할 프로젝트에 자 금을 대려고 돈을 빌리지 않을 것이다.
- 경제사학자 리처드 실라Richard Sylla에 따르면 이자율이 사회 의 건전성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이자율 도표는 사실상 사회의 열 곡선fever curve 이다. 불확실한 시기에 는 공공의 안전성과 신뢰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자율이 상승 한다. 광범위한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의 모든 주요 문명에서 U 자형 금리 패턴이 나타났다. 역사의 초기에는 이자율이 높았고 문명이 성숙하고 안정되면서 서서히 낮아졌다. 이는 발전의 정 점에서의 낮은 성장률로 이어졌고 마침내 문명이 쇠퇴함에 따 라 이자율이 다시 상승했다. 예를 들어 서기 1세기와 2세기 로 마 제국의 절정기에는 이자율이 4퍼센트 정도로 낮았다. 이러 한 과정은 장기적 ·평균적으로만 유지되고 단기적 변동이 심하다. 1세기와 2세기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단기적으로 이자율이 12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로마의 몰락(전통적으로 서기 476년으로 보는) 이후에 제국의 이 자율이 급상승했다. 약 2세기 후에 서구의 상업 활동은 무함마 드의 헤지라 Hejira(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하여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옮긴이)와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장악한 아랍제국의 부상 으로 또 한 차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지브롤터 해협의 통제 권을 확보한 아랍인들이 지중해 무역을 실질적으로 차단했다. 이자율의 역사적 흔적은 로마시대 후기에 홀연히 사라졌다 가 거의 1000년이 지난 뒤에야 영국에서 다시 나타난다. 12세 기 영국에는 40퍼센트를 훨씬 넘는 이자율의 기록이 있고, 이 탈리아에서도 같은 세기 후반의 평균적 이자율이 약 20퍼센트 였다. 보다 합리적인 미래를 예고하는 최초의 희미한 빛은 일찍 이 1200년경에 이자율이 8퍼센트까지 떨어진 네덜란드에서 나 타난다.
- 그렇게 높은 이자율은 자본시장의 실질적 부재를 의미했고, 수 세기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상업적·경제적 구속복이 되었다. 종교적 교리가 지적 진보의 목을 조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시 장의 부재가 일상적 상업 활동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금전 대 출에 대한 기독교의 금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금지의 기원은 출애굽기 22장 25절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이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고리대금업자 행세를 하지 말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상업 활동 자체가 사악하다"고 생각했고, 성 히에로 니무스는 "상인이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견해 를 밝혔다. 
- 1500년 이전에는 평균적인 인간의 웰빙이 정체되어 있었다. 지금쯤은 그 침체의 근원이 명백해져야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부의 창출에 따르는 인센티브가 없었다. 봉건 귀족, 국가, 교회, 또 는 일반 범죄자의 약탈로부터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로 어떤 유럽인도 감히 창의적이나 과학적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창조자가 종종 이 세상과 다음 세 상에서 비난을 받고 잊혀졌기 때문이다. 셋째로 부를 창출하는 발명과 서비스를 구상하더라도 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구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발명품이 대량 생산되더라도 발명가 가 자신의 제품을 광고하고 멀리 떨어진 도시의 소비자에게 저 렴하게 운송할 수 없었다.
- 농업으로의 전환을 '1차 경제혁명 (2차는 산업혁명)'이라 부른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더글러스 노스Douglas North는 말한다.
1차 경제혁명은 인간의 주요 활동이 수렵과 채집에서 정착 농 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었다. 그러한 변화가 상 당수 인간에게 인센티브의 변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혁명이 었다. 인센티브의 변화는 두 시스템의 서로 다른 재산권에서 나왔다. 자원에 대한 공동재산권이 존재할 때는 우월한 기술과 지식을 확보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 근대적 번영의 네 가지 기반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자본에 대한 손쉬운 접근,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중에 재산권이 가장 먼저 생겨났고, 재산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고대 세계에서 처 음으로 빛을 보았다. 현대 세계에서도 재산권이 네 가지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하다. 위대한 경제학자 P. J. 오루크가 말하듯이, "99퍼센트의 문자 해독률과 훈련되고 근면한 사회를 갖춘 북한 의 1인당 GDP는 900달러다. 문자 해독률이 43.7퍼센트이고 온 종일 커피를 마시면서 양탄자를 사라고 관광객을 성가시게 하 는 모로코의 1인당 GDP는 3260달러다."
그와 동시에 재산권만으로는, 다른 세 가지 요소를 갖추지 못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정체 및 쇠퇴가 보여주듯이, 경제성장 을 촉진하기에 충분치 않다.
- 왜 우리는 고대 세계의 작은 지역-문화적 영향력이 있었더라도에서 잠시 재산권이 꽃을 피운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세 가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재산권에는 독립적인 사법 체계가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참정권이 부여된 시민권이 사회의 생산성에 매우 중요하다.
*재산권만으로는 활기차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기에 충분치 않다.
- 고대 그리스인은 진보한 사람들이었지만, 경제성장에 필요한 다른 세 가지 조건, 즉 적절한 과학적 프레임워크, 정교한 자본시장, 효율적인 운송과 통신을 갖추지 못했다. 네 가지 조 건이 모두 융합하여 인류가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2000년 후의 일이었다.
- 고대 세계에서는,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채무불이행이 가혹 하게 다루어졌다. 로마에서는 아무리 작은 빚이라도 갚지 못하 면 채무자의 전 재산을 압류하여 경매에서 매각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채무자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혔는 데 이러한 관행이 서구 세계에서 채무자의 감옥debter's prison 으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채무불이행은 단지 법적 구제 책만이 아니고, 단순한 정의 구현의 요구를 훨씬 능가하는 처벌 방식이기도 했다. 가혹하기는 하지만, 노예제도로 채무불이행을 처벌한 그리스의 관행보다는 크게 개선된 방식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형태의 개인적 보증을 요구하는 것은 혁신 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모든 새로운 벤처사업은 상 당한 실패 가능성을 수반하고, 유능한 기업가는 그런 사업에 내 포된 위험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실패한 사업에서 재산을 잃는 것만 해도 충분히 나쁜 일인데 그 과정에서 자유까지 잃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1500년 이후에 영국에서 채무자의 감옥이 폐 지되고 유한책임회사가 탄생한 것은 자본시장의 상황을 크게 개선하고 세계의 경제성장을 촉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17세기는 코크가 관습법으로 왕실의 특권을 무력화한 것으 로 시작하여 영국 의회의 우위를 불러온 처참한 내전의 여파 속 에서 끝났다. 코크의 사법적 우위가 1688년 의회의 내전 승리 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이는 왕실의 몰락으로 인한 이익에 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았다.
다음 세기는 존 로크와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사법권 과 의회 권력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나머지 서구 세계로 전파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국가 권력을 세 개의 가지 행정 부, 입법부, 사법부로 분할하고 제한하는 거의 연속적인 과정에 따라 자유와 재산에 대한 개인의 권리가 강화되었다.
17세기 중반의 영국 내전 당시에 영국인의 재산은 인류 역사 상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했다. 그렇지만 다른 세 가지 요소가 충 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번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 진 200년 동안에 영국은 나머지 세 요소를 확보했고, 19세기의 증기기관과 전신의 발명으로 절정기에 이르렀다. 그 시점에서 영국과 영국의 딸 국가daughter nations들의 이점은 그들을 이전의 세대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의 번영으로 이끌게 된다.
- 1800년경 이전에는 재산이 토지와 동의어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가용한 토지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나 로마제국이 불안정하게 된 것은 그때문이었다. 토 지가 부족하고 비싸짐에 따라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인구가 점 점 더 적어졌다. 이는 사회의 복지에 이해관계가 있는 지주 시 민의 기반을 축소했다. 국가가 번영하려면 상당수의 시민이 재 산을 소유함으로써 국가의 정치적 프로세스에 개인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로 이해당사자 효과stakeholder effect다. 근대 이전 세계에서 토지가 고갈되어 이해당사자의 기반이 약해진 국가는 종말이 멀지 않은 국가였다.
반면에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는 농업의 집중화로 인하여 불안정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공황 이후의 미국에서 개별 농장의 수가 크게 줄었다는 것-크기는 늘어나고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구조사국이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한 1870 년부터 1935년까지 농장의 평균적 규모가 155에이커였지만, 1987년에는 세 배인 462 에이커로 늘어났다. 1900년에 미국인 의 9퍼센트가 농장을 소유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비율이 1퍼센 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한 세기 전보다 덜 안정적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 다. 이유는 간단하다. 후기산업사회의 경제는 시민을 이해당사 자로 만들기 위하여 토지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무제한적인 비 실물 자산과 자본의 소유권이 토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현대의 자본 소유는 20만 에이커에 불과한 경작지가 25만 인구에게 가용했던 아티카에서 달성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큰 비율의 인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토지의 소유에는 한계가 있지만 자본의 소유에는 한계가 없다.
서구의 근대적 시스템은 주로 영국의 관습법에서 유래하여 1000년 동안 서서히 고통스럽게 조립되었고, 영국의 식민지 개 척의 칼끝에서 그리고 미국의 혁명적 이상주의의 날개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오늘날, 현대 세계 번영의 원천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의 으뜸가는 중요성 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1700년 이전의 중요한 기계적 발명의 목록은 길지 않다.
풍차, 수차, 인쇄기 정도가 거의 전부다. 1700년 이후에는 끊임 없이 증가하는 발명의 급류가 흘러서 인류의 부를 쏟아냈다.
이러한 혁신의 폭발에 박차를 가한 것은 서구인이 자연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방식 자체의 혁명이었다. 서구 인과 서구문화 자체가 이러한 과학적 합리주의의 탄생으로 정 의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 혁명은 과학이, 또는 당시에 알려진대로 자연철학이 교회의 뿌리에서 단절될 것을 요구했 다. “인류는 영성과 세속성을 분리하고, 성령의 의도는 우리에 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하늘이 어떻게 움 직이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갈릴레오의 신조를 받 아들이기까지 번영하지 못했다.'
- 서기 1500년까지 수많은 지적인 관찰자들이 프톨레마이 오스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에 서 그중 한 사람, 프톨레마이오스 시스템의 여러 심각한 결함 을 밝혀낸 도메니코 노바라Domenico Novara를 만났다. 폴란드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여러 해 동안 의사로 일하다가 마침내 폴란드의 프라우엔부르크Frauenburg에 정착하여 당시의 원시적 인 도구로 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태양 중심 모델의 장점 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 그는, 1530년에 완성했지만 사망하기 직전인 1547년까지 출간되지 않았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volutionibus Orbinum Coelestium』에서 태양 중심 우주론을 지지하는 주장을 제시했다.
현대의 믿음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심각한 결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큰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우선 그 모델은 저자가 사망한 해가 되어서야, 당연히 라틴어로, 출간되었다.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성직자와 상인 엘리트뿐이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교회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게다 가 필멸의 운명이 곧 코페르니쿠스를 종교재판의 손이 닿지 않 는 곳으로 보냈다. 코페르니쿠스의 조수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Andreas Osiander는 자신의 안전을 우려하여 책의 내용이 순전한 가 설임을 선언하는 익명의 서문을 썼다. 그는 지구가 실제로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정함으로써 더 정확한 천문 학 계산이 가능하다고 했다.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행성의 운동, 특히 수성과 금성이 지 구 궤도 안쪽에 있기 때문에 태양에서 각각 28도와 48도 이상 은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프톨레마이오스 모델보 다 더 잘 설명했다.
-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만큼이 나 우아하지 못했다. 문제는 두 모델 모두, 나중에 케플러가 발견 했듯이, 실제로는 타원인 궤도를 완벽한 원형으로 가정했기 때 문에 주전원이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 시스 템에는 세 세트의 궤도와 주전원이 필요했다. 설상가상으로, 코페르니쿠스는 각각의 구체가 내·외부의 이웃과 밀접하게 접 촉하고 전체 우주가 그들의 집합적 두께로 구성된다는 프톨레 마이오스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우주에 광대한 공허가 존 재할 수 있다는, 한 세기도 더 지난 뒤에야 토머스 디거스Thomas Digges라는 영국인에 의하여 제안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서 벗어난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은 프톨 레마이오스 시스템보다도 더 복잡하고 어설픈 시스템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시스템은 실제로 대부분의 천문학 역사에서 자 세하게 설명하지 않을 정도로 복잡했다. 결국 두 모델 모두 동 일한 결함이 있었다. 두 모델의 유연성은 거의 모든 데이터를 수용할 수 있었고 반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했다.
과학적 모델에 가치가 있으려면 반증가능 falsifiable 해야 한다. 즉 모델과 모순되는 증거를 쉽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 든지 새로운 데이터에 맞춰서 원과 주전원이 조정될 수 있는 두 모델 모두 그렇지 않았다.
- 16세기의 평범한 유럽인은 1000년 동안 진정한 사회적, 지 적, 또는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고, 인간의 상황이 보편적으로 정적이라고static 생각했다. 베이컨의 놀라운 천재성은 세 가지를 깨달은 데 있었다. (1) 실 제로 문제가 있었고, 중세인의 상황이 전혀 자연적이 아니라는 것, (2) 연역적 체계가 잘못되었다는 것, (3) 자연계에 대한 지식 과 그에 따른 인류의 복지가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것. 인류의 운명을 개선하려면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선 입관 없이 사실을 모은 뒤에 분석하는 귀납적 체계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은 인간의 상황을 개선하는 다른 방법 - 유용한 지식의 획득을 통한-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아는 것이 힘 이었다. 1603년과 1620년 사이에 그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지 적 동원령intellectual call to arms이 되는 『신기관The New Organon』의 초 고를 완성했다.
『신기관』 1권은 과학에 큰 해를 끼친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다소 장황한 비난이다. "그들은 믿음을 유도하는 데 성공함으 로써 효과적으로 탐구심을 억누르고 멈춰세웠다." 베이컨에 따 르면 문제가 간단했다. 자연의 미묘함이 논증의 미묘함보다 몇 배 더 크기 때문에 실험 데이터와 분리된 빈약한 이론이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일을 해낼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의 관찰 도구 는 심각한 결함이 있고 다양한 유형의 우상idols에 지배된다.
*부족의 우상 idols of the Tribe. 베이컨은 부족을 인류 자체로 정의했다. 이 우상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는 불량거울 false mirror 이다.
*동굴의 우상 idols of the Cave. 이 우상은 개별적인 남성과 여성이 물질 세계를 인식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여기서 그 는 좀 떨어진 곳에 모닥불이 있는 플라톤의 동굴을 떠올린다. 동굴과 모닥불 사이로 사물이 지나가고, 사람은 동굴 벽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의해서만 그들의 본성을 안 다. 큰 그림자를 본 아메리카 인디언은 들소를 생각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캥거루를 생각한다. 이는 “한 사람의 신성한 암소가 다른 사람의 빅맥Big Mac이다"의 17 세기 버전이다.
*시장의 우상idols of the Market. 이 우상은 서로 간의 교류와 연 합으로 형성되는 아이디어다." 여기서 베이컨은 시간에 따른 단어의 의미 변화를 말하고 있다. 17세기 매사추세 츠에서 마녀라는 단어의 영향력은 오늘날과 달랐다. 간단 히 말해서 유행fashion.
*극장의 우상 Idols of the Theater. 이가장 흥미로운 우상은 비현 idols실적이고 보기 좋은 나름의 방식으로 창조된 수많은 무대연극으로 받아들인 시스템received system의 결과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 시스템이 주된 표적이었겠지만, 베이컨 이 세계의 종교도 겨냥했다는 추측 또한 유혹적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본성의 결함을 우상의 지위로 올려놓지 는 않았지만, 베이컨은 인간에게 세계에 자신이 발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질서와 규칙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현대 행동심리학의 개념을 3세기 앞서서 홀륭하게 예견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연관성 을 찾아내고 음모를 의심하는 특출난 능력을 갖춘, 패턴 을 찾는 영장류에 지나지 않는다.
『신기관 2권에서 베이컨은 귀납적 추론이라는 자신의 새로 운 방법을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수단 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측정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잘못된 해석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되는, 인간의 감각을 사용하는 일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자에게는 서로 다른 관찰자의 손에서 도 동일한 데이터를 낳는 방법과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일식의 경로에 대한 핼리의 정확한 예측이 대중을 전율시켰다. 그것은 관찰하고 가설을 세운 뒤에 검증하는 베이컨의 귀납 적인 과학적 방법의 승리를 알리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새로운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추론 체계 를 완파했고, 그에 따라 과학 분야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들 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이 완전히 분리되기까지는 적어도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당시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핼리와 뉴턴은 전능하신 분이 천체 운동의 법칙을 예정해 놓았다고 믿었던 독 실한 신자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진 실을 믿었다. 예를 들어 핼리는 지구와 혜성의 근접 상봉이 대 홍수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종류의 행성 충 돌이 대홍수의 원인이라 믿었던 뉴턴은 핼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1700년대에 뉴턴의 루커스Lucasian 수학교수직을 계 승한 윌리엄 휘스턴william Whiston은 런던의 대규모 청중에게 천 문학적 사건과 성서적 사건의 연관성에 관하여 강연했다. 뉴턴 조차도 중세기 미신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직 업적 삶과 글의 대부분이 연금술과 관련되었던 뉴턴은 결별하 기 전의 후크와 존 로크를 포함한 과학적 계몽주의의 저명인사 들과 연금술의 비밀에 대하여 활발하게 서신을 교환했다."

- 초창기 경제학자들은 이자율의 중요성을 잘 이해했다. 영국 에서 가장 오래된 경제 옵서버 중 한 사람인 조시아 차일드Josiah Child 경은 1668년에 "오늘날의 모든 국가는 돈의 비용으로 얼마 를 지불하는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얼마를 지불해왔는지에 정 확하게 비례하여 더 부유하거나 가난하다"고 지적했다. 차일드 에게 그러한 관계는 수학적이었다. 기업가가 정해진 금액의 이 자를 감당할 수 있다면, 이자율이 3퍼센트일때 6퍼센트일 때보 다 두 배의 자본이 가용하게 된다. 역사학자 T. S. 애슈턴Ashton은 말했다.
18세기 중반경에 경제 발전의 속도가 빨라진 단일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겠지만낮은 이자율에 주 목해야 한다. 깊은 광산, 튼튼하게 지어진 공장, 잘 건설된 운 하, 산업혁명의 집이 비교적 저렴한 자본의 산물이었다.
-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된 내전이 끝나고, 초청된 영국인 총독stadholder 빌럼 3세willem III가 오렌지 공 윌리엄 william of Orange으로 영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총 독은 지명되고 때로는 세습되는 네덜란드의 통치자라는 네덜란드의 특이한 직위였다.) 빌럼(윌리엄)은 영국에 혼자 오지 않았다. 세계 금융의 수도로서 암스테르담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감지한 베어링 Barings 가문과 호프 Hope 가문을 비롯한 금융 엘리트들이 그를 따 라 북해를 건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에 쫓겨서 포르투갈을 거 쳐 네덜란드로 갔던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계 유대인도 집단 으로 런던에 도착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리카도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포르투갈 계 유대인 이민자였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네덜란드인의 아이디어도 왔다. 영국인들은 열광적으로 네덜란드 금융을 복사했고, 17세기의 파괴적인 내전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영국의 자본시장이 네덜란드를 능가하게 되었다. 당연히 기존의 금융업자와 신참자 사이의 마찰도 생 겼다.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는 불평하는 시를 썼다.
우리는 왕이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비난하네
낯선 사람들, 독일인, 위그노 교도, 네덜란드인
자신의 공정한 국사에 대하여
영국의 의원들과는 거의 소통하지 않고
- 명예혁명 이후에 영국의 재정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었다. 첫째로 왕실이 의존하던 단기 부채가 이자지급과 원금상환이 소비세로 뒷받침되는 네덜란드식 장기 정부부채로 대체되었 다. 다음으로 영국 재무성이 투자 대중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지 는 (즉, 이자율을 가장 낮출 수 있는) 부채를 결정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류의 부채를 실험하면서 은행업계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의 회의 우위는 신뢰를 회복했다. 성공적인 사업가들이 하원을 가 득 채웠다. 정부의 채무불이행으로 피해를 입을 의원들로 구성 된 의회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마 지막으로 1749년에 헨리 펠럼 Henry Pelham 재무장관이 잡다하고 혼란스러운 정부대출을, 베네치아의 강제대출과 네덜란드의 영구연금처럼 만기가 없고 영구적으로 이자가 지급되는, 콘솔consols이라는 유명한 채권으로 통합했다. 콘솔은 오늘날에도 런 던에서 거래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국가대출이 상업대출과 무관하게 보이지만, 정부부채의 건전한 시장은 실제로 기업의 자금 조달에 필수적 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정부의 신용도가 널리 알려져 있고 부채의 거래량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정부부채는 가격을 책정하고 판매하기가 가 장 간단하다. 상업자본의 가격 책정과 판매의 메커니즘이 정부채권 및 어음과 동일하므로, 상업적 부채시장이 원활 하게 기능하기 전에 성공적인 정부부채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근대 이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정부부채가 기업가 에게 자본을 공급하기 위한 보조 바퀴training wheel 역할을 했다.
*정부 부채는 위험이 없는risk-free 투자에 대한 필수적 벤치 마크를 제공한다. 활발하게 거래되는 정부채권과 어음이 상인과 기업가에게 완벽하게 안전한 사업에서 요구되는 수익률의 지속적인 척도를 제시한다. 이것이 위험 할증 risk premium, 즉 대출의 위험성 때문에 이자를 추가로 요구 할 수 있는 기준선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펠럼이 정부 부 채를 통합했을 때 콘솔의 이자율은 3퍼센트였다. 이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차용인, 즉 1688년 이후의 영국 왕실에 제공할 수 있는 최저 금리에 해당했다. 따라서 다소 위험 한 상업적 벤처사업에는 6퍼센트, 투기적 사업에는 10퍼 센트 이상의 이자율이 요구될 수 있었다. 위험이 없는 대 출에 대한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이자율(정부 채권의 금리) 의 존재는 기업가에 대한 대출의 가격 책정을 더 쉽게 만 든다.
- 그렇다면 왜 네덜란드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은 이자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저축을 은행으로 가져갔는데 프랑스인, 독 일인, 인도인, 그리고 터키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배젓은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한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국가적 거버넌 스governance의 근대 이전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터키의 자본시장과 재산권의 결핍 때문에 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자신의 재산을 손 닿는 곳에 둘 수밖에 없었음을 상기하 라. 오스만제국의 부패,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보편적 상황, 오 늘날 다수의 비서구권 국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개인 재산의 보호가 없었거나 없는 곳에서는 혁신에 대한 인센티브가 없다. 설령 그런 미개한 땅 어딘가에 가슴이 뛰는 발명가가 있더라도 자신의 창조물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데 필요한 자본이 존 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모든 자본이 매트리스 밑에서 얼 어붙거나 금은 보석 장신구로 착용되고, 가장 중요하게는, 개인 금고 특히 황제의 금고에 보관된다.
이슬람의 이자 금지는 투르크인의 추가적인 약점이 되었다. 이자가 없으면 대출도 없고, 대출이 없으면 투자도 없다. 알리 파샤가 최후를 맞은 레판토 해전 당시에 서구에서는 이러한 제 한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무슬림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서 구에 비해 저조한 경제 상황이 주로 재산권과 자본시장의 초보 적 상태에 따른 결과였다. 터키 최초의 은행이-유럽인에 의하 여-설립된 1856년 이전의 오스만제국에는 우리가 아는 사유재투르크인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아마도 레판토 해전에 참전 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을 세르반테스의 말로 가장 잘 요약된다. "투르크인이 천하무적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전 세계가 알게 되었다." 투르크인은 그런 운명을 겪은 국가의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꺽이지 않을 것 처럼 보였던 다른 국가-17세기의 스페인과 소비에트 연방이 빠르게 떠오른다들이 자유 시민권과 기능을 발휘하는 시장의 부재로 인하여 결국 쇠락함에 따라 세르반테스의 말이 시대를 관통하는 메아리가 되었다.
- 증기기관에 의한 운송량의 증가는 기본적인 세 가지 경제적 투 입물-토지, 자본, 노동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시장을 평준화 equilibrate 하기 (균형을 맞추기)에 충분했다. 상품과 노동력이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국가 간에, 심지어 이웃한 도시 간 에도 상품 가격과 임금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이는 불균등한 토지 가격을 낳고, 효율적인 통신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 에는, 투자의 수익까지도 장소에 따라 크게 달라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가격 불균형이 적절한 해상 운송 수단이 부족했던 1870년 이전 세계의 경제 상황이었다. 영국에는 토지가 부족하 고 미국에는 풍부했기 때문에, 토지 가격과 그에 따른 식량의 가격이 영국에서 훨씬 더 비쌌다. 반면에 영국에는 노동력이 풍부 하고 미국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이 미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적었다. 따라서 임금이 낮고 물 가가 높은 영국에서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구매력이 미 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낮았다. (자본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자본이 미 국보다 훨씬 더 풍부했기 때문에 영국 자본의 수익률이 미국보다 낮았다.)
증기선의 출현이 미국과 영국 사이의 가격과 임금 차이를 평준화했다. 1870년에 런던의 쇠고기 가격이 신시내티보다 93 퍼센트 더 높았지만, 1913년에는 차이가 18퍼센트에 불과했다. 두 시점 사이에 토지의 임대가 미국에서 171퍼센트 증가했고, 영국에서는 똑같이 극적인 토지 가격의 하락과 함께 50퍼센트 감소했다.
두 나라의 상품 가격, 토지 가격, 임대료가 평형상태에 도달 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 임금도 균형을 이루었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값싼 식품 가격의 결과가 아니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더 쉽게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영국 현지의 노동시장이 위축 된 결과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더 나은 정보와 운송 수단이 더 수익성 높은 해외 투자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영국 자본의 수익률이 개선되었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 는 임금과 상품 가격이 국가 간에 균일하게 수렴하는 경향이 있 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런 방향으로의 첫 번째 거대한 발걸음은 증기 동력이 세계의 대양을 가로질러 상품과 인력을 대량으로 이동시킨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
- 1825년부터 1875년까지 반세기 동안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 식에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도 더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시대가 유례없이 급속한 기술적 변화 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진실에서 멀리 떨어진 생각은 없 을 것이다. 두 세대 전의 평균적인 시민이라면 컴퓨터, 제트 여 객기, 심지어 인터넷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서 1820년대부터 1875년까지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 은 반 세기만에 이루어진 철도 여행의 빠른 속도와 즉각적인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을 목격하고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인류 는 1825년 이후의 수십 년 동안과 같은 힘과 속도로 미래로 들 어선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 무엇이 19세기 초의 혁명적 변화와 이후 200년 동안 휴식의 신호도 없이 꾸준하게 지속된 부의 성장을 촉발했을까? 비유를 확장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나는 1800년까지의 서구 경제가 점점 불어나는 잠재력이 축적되는 저수지의 댐dam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 저수지reservoir에는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하여, 에드워드 코크와 후계자들의 탁월함에 힘입어 확대되고, 독점 권과 특허를 관장하는 법령과 판례법으로 보강된 영국의 관습 법이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과학적 계몽시대의 눈부신 지적 진 보와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영국인이 이루어낸 자본 시장의 순차적인 개선도 있었다.
이러한 성취가 실제로 개인의 웰빙을 개선했지만, 그 속도는 빙하의 움직임처럼 느렸다. 1500년과 1820년 사이에 평균 적인 서유럽 국가의 1인당 GDP가 연평균 약 0.15퍼센트의 비 율로 성장했다. 재산권의 강력한 보호가 장인들을 혁신으로 이끌었고, 과학적 합리주의가 그들이 작업할 도구를 제공했으 며, 자본시장이 그들의 경이로운 발명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자 금을 공급한 것은 사실이다. 부족했던 것은 공장을 가동하고 상 품을 운송하기 위하여 필요한 물리적 동력과 전체 프로세스를 조정하는데 필요한 통신의 속도였다.
증기기관과 전신의 발명은 말하자면 댐에 구멍을 뚫어서 유 례가 없는 경제성장의 급류를 풀어놓았다. 그 댐은 결코 재건될 수 없고, 서구의 성장도 가까운 미래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이제 1500년 이후 네덜란드의 놀라운 번영의 원천이 분명해진다.
*영국인에만 비견될 수 있는 강력한 재산권을 누린 국민. 
*종교개혁에 힘입어 네덜란드인이 교회의 도그마에서 벗 어난 것.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성이 초기의 여러 개신 교 국가, 특히 독일에 상처를 준 과도한 분열주의에서 네 덜란드를 구해냈다.
*낮은 이자율과 강력한 투자자 보호로 활성화된 네덜란드 자본시장의 풍부한 투자 자금.
*쉽고 저렴한 수상 운송의 이점이 있는 평탄한 지형.
- 네덜란드가 쇠퇴한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 복잡하다.
첫째, 이미 살펴본 것처럼, 네덜란드인은 1인당 기준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했지만, 경쟁국의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인구 증가율이 덩치 큰 경쟁자보다 훨씬 낮았다. 1700년에 네덜란드 인구가 190만에 불과했던 반면에 프랑스는 2150만, 영국은 860만이었다. 적은 인구 때문에 네덜란드의 총 GDP는 영국의 40퍼센트나 프랑스의 20퍼센트를 한 번도 넘지 못했다. 10
둘째, 네덜란드의 국내외 상업 활동에 관한 모든 논의에 반 드시 독점이라는 단어가 포함된다. 네덜란드인은 동인도의 향 신료 무역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당시의 가장 악명높은 외교적 분쟁의 하나가 암본Amboina 섬(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의 영국인 정착 지 파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네덜란드인이 영국인 정착민을 고문한 사건이 수십 년 동안 영국과 네덜란드의 관계를 악화 시켰다. 네덜란드 자체에서도 독점이 상업 활동을 방해했다. 예 를 들어 네덜란드 정부는 단일한 회사에만 항해 지도를 제작할 권한을 부여했는데, 그러한 조치가 1880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셋째, 네덜란드의 번영은 근대 서구의 거대한 부를 창조한 엔진인 기술 발전에 의존하지 않았다. 주마다 특허 시스템이 있 었지만 현저하게 활성화되지 못한 시스템이었다. 그 기간에 조 선 업체들이 플루트 선박fluit ship 같은 실질적 기술 발전을 이루 기도 했지만, 네덜란드의 기술 혁신은 대체로 산발적이었다. 17 세기 중반 황금시대의 절정기에 정부가 1년에 10여 건의 특허 를 부여했고, 1700년 이후에는 해마다 몇 건의 특허밖에 인가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무역, 특히 환적을 위한 곡물과 새로운 풍력 제재소에서 가공할 목재를 공급한 발트해 지역 의 무역에서 비롯되었고 수익성 높은 동인도 무역이 현금의 흐 름을 보충했다.
넷째, 네덜란드의 금융은 약간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다. 정부 가 아주 쉽게 자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었던 네덜란드는 18세 기에 빚더미에 파묻히게 되었다. 정부가 소비세로 차입을 뒷받 침했기 때문에 세율도 상승했다. 인상된 소비세율이 물가와 금의 상승으로 이어졌고 네덜란드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정치 체제는 위험한 대륙의 가장자리에 있는 느슨한 정치연합에 속한 7개국의 반자치 국가로 분 열된 체제였다. 강력한 중앙은행과 활기찬 국가 특허 시스템의 부재가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분명했다. 미국 건국의 아 버지들은 이러한 교훈을 잊지 않았다. 18세기 네덜란드의 분권 화된 기구와 그에 따른 애석한 정치적 운명이 미국의 헌법 논쟁 에 참여한 연방주의자들에게 객관적인 교훈을 제공했다. 그들 은 네덜란드가 정부의 무능, 주 사이의 불화, 외국의 영향력에 따른 수모, 위태롭게 유지된 평화,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특별 한 재난에 시달린 것을 보았다."
18세기 네덜란드 경제는 일방적(opsided인 경제였다. 활기차 고 수익성 높은 무역 부문에서 국내 경제가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창출된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술 발 전과 독점에 따른 제한으로 인하여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 결과 남아도는 막대한 투자 자금이 꾸준하게 국내의 이자율을 끌어 내리고, 네덜란드 제조업이 국제적 경쟁력을 잃을 정도로 국내 의 물가와 임금을 끌어올렸다.
네덜란드는 가발 periwig 사회가 되었다. 주로 투자소득으로 연 명하고 생산을 거의 하지 않는 인구의 비율이 점점 늘어났다. 잉 여 자본의 상당 부분이 해외, 특히 미국에 투자되어 미국 독립전 쟁 부채의 10~20퍼센트를 네덜란드인이 보유하게 되었다." 국가로서의 세계적 중요성이 끝나가는 작은 나라가 나머지 세계에 그렇게 많은 자본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8세기 말에 네덜란드가 외채 수입에 의존하게 된 것은 저 주와도 같았다. 미국의 부채 상환이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겨우 보장되었지만 다른 채무국 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포함한 여러 국 가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서 네덜란드의 손실이 눈덩이처 럼 불어났다.
- 모든 국가에는 수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입을 확보하는 방식이 종종 국가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오늘날에도 아프리 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직과 독점권의 판매가, 그에 따르는 경쟁과 성장의 저해와 함께, 너무도 손쉬운 정부의 수입 원을 제공한다. 근대 이전 시대의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러한 함 정에 곤두박질쳤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영국과 네덜란드도 조달하는 자 금과 독점권을 교환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시간이 가면서 모두에게 부과되는 소비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1700년 이후의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부로 향하는 길이 더 이상 정부 부서를 거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제조업, 상업, 또 는 무역에 종사함으로써 점점 더 부유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무역회사는 독점적 지위의 혜택을 누리 는 특권의 대가로 상당한 위험을 부담했다. 제한적 독점권을 부 여하는 오늘날의 특허법도 발명가가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수반한다. 어쨌든 1624년의 독점법이 영국에서 왕실이 자의적으로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행을 거의 종식시켰다. 반면에 프랑스 는 혁명 이후까지도 독점권을 축소하지 않았다. 이 두 사건 사 이에 있는 174년의 간격이 프랑스의 경제적 번영이 뒤처진 이 유를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엄밀한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지주와 소작인으로 이루어진 소유권 시스템은 매우 효율적이다. 농업 생산을 개선하려는 지 주의 인센티브가 자작농의 인센티브와 동일하다. 게다가 지주 에게는 토지를 개선하기 위한 자본이라는 월등한 자원이 있다. 지주가 지배하는 체제에서 일본의 농업 생산성이 유신 이후에 급속하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일본의 소작인과 지주의 갈등이 재앙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이 더 부 유해졌다. 지주 계급이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기반을 형성한다고 믿었던 맥아더의 점령군은 지주 계급의 파괴에 착수했다. 대 지주의 토지가 전쟁 이전 가격으로 보상되었다. 전후에 만연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진 엔화로 지급된 토지 보상은 몰 수나 다름없었다. 평균적 농장의 규모가 2.5에이커인 국가에서 10에이커 이상을 소유한 사람은 모두 대지주로 간주되었다.) 7475 소작인과 소작농 이 부유한 지주보다 우리의 동정을 더 많이 이끌어낼 수는 있지 만, 맥아더의 토지개혁이 부동산 시스템에 실질적인 폭력을 가 한 것도 사실이다. 라이샤워가 신랄하게 말했듯이, 혁명적인 개혁은 남의 나라에서 하기가 더 쉽고 재미있다." 일본의 토지개혁은, 사회적·정치적 결과가 무엇이었든 간에, 결국 경제적으 로 중요하지 않았다. 점점 더 산업화하는 국가에서는 토지의 소 유구조가 중요성을 잃는다.
맥아더가 일본인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은 자유민주주의 체 제에서 법치주의가 발휘하는 놀라운 힘을 자신도 모르게 보여 주게 된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그를 해임 했다. 일본인들은 보잘것없는 민간 지도자의 신랄한 편지가 그 토록 강력하고 존경받는 전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군사적 우산 덕분에 일본이 GDP의 1퍼센트만을 국방비로 지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의 첫 40년 동안의 자본과 인력에 대한 압도적인 군사적 요구 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가 성장한 것은 진정한 일본의 기적 이었다. 군국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난 일본의 경제는 2차 세계 대전의 잿더미 속에서도 힘차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전후의 급성장은 여러 가지 평범한 요인의 필 연적인 결과였다.
*일본인은 나머지 세계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30년간의 전 쟁과 경제적 재앙을 겪은 궁핍한 상태였다. 용량을 훨씬 밑도는 수준으로 산업이 돌아가고, 자본이 소비로부터 공장과 장비를 복구하고 현대화하기 위하여 전용되어야 할 때, 그 결과는 활발한 경제성장이 된다.
*미군의 주둔이 강대국을 가장 확실하게 탈선시키는 악마 의 손아귀 -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서 일본을 해방시켰다.
*맥아더가 도착하기 70년 전에 일본인들은 원시적이지만 적절한 재산 제도를 확립하고 서구식의 과학, 자본시장, 운송과 통신을 채택했다.
근면, 절약, 문해 능력을 강조하는 일본의 문화와 맥아더가 수입하기 전에 50년이 넘는 의회민주주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 도 도움이 되었다.
- 떠오르는 태양
1980년대에는 일본이 세계를 지배할 때까지 일본의 경제성장 이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1960년대에 나머지 선진세계가 전후 일본의 기적의 독일판인 라인강의 기 적을 초조하게 지켜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진지한 가능성이 결 코 아니었다. 첫째, 일단 재산권과 법의 지배가 확립되면 침체된 경제가 저절로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경 제의 성장이 지속되기는 훨씬 더 어렵다. 둘째, 제도의 축복은 일회성이다. 재산권과 법의 지배가 확립되고 나면 다른 영역에 서 성장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부유한 일본의 방위 를 보조하는데 빠르게 지쳐가고 있다. 머지않아 일본은 자국의 군사적 필요를 적절하게 충족하려는 열망을 되찾을 것이다. 일본이 다시 한번 지나치게 잘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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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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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흑역사

역사 2024. 2. 16. 07:25

- 유대인은 경제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은 그들의 정교한 금융 구조, 비즈니스 구조를 이용해 전 세계 각국 경제에서 중추 역할을 맡아 왔다. 세계사에 등장하는 여러 경 제 대국의 이면에는 반드시 유대인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은 교활한 고 리대금업자로 묘사된다. 근대 상업 은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 스차일드 Rothschild 역시 유대인이다.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금 융업, 대부업에 종사했다. 기록에 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부업체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무라슈 상회'이다. 여 기에 자금을 댄 유대인 70명의 이름이 아직도 남았다. 기원전 5세기 이집트의 오래된 파피루스 문서에도 유대인들이 대부업 을 했다고 기록되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부터 환전, 환율 등의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 했다. 이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로, 오늘날에도 금융의 핵 심이다. 전설적 투자자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역시 환 차익(환율 변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어떻게 유대인은 전 세계 금융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 게 되었을까? 이는 그들의 '이산', 즉 '전 세계로 흩어짐'과 관 련된다.
유대인들은 고대부터 율법에 따라 1년에 반 세겔을 교회에 헌납해야 했다. 이는 《구약 성경》에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라', '수확물 10분의 1은 신의 것' 등으로 기술된 내용에서 비롯된 규 칙이며, 나중에는 기독교의 '십일조'로 이어지는 제도이다.
- 유대인은 방랑생활을 하면서 무역업과 금융업에 뛰어난 능 력을 발휘했다. 그들에게 무역업은 천직이었다. 친척과 지인이 전 세계로 흩어져 거래처를 만들기도 쉬웠다. 또 세계 각지를 오가는 무역상이라는 직업은 박해를 받으면 바로 도망칠 수 있 었다. 상당수의 유대인이 무역업에 종사하게 된 이유였다.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동안 유대인들 은 양측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 유대인 무역상들은 대체로 양 측으로부터 온당한 대우를 받았다. 유대인은 무역 중개업자로 서 양측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은 표면적으로 대립했기 때문에 직거래를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무역은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 상인의 중개로 무역을 했다. 유대 상인들이 양측을 오가며 물품을 교역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전세계 무역의 중심이 되다
유대인은 서구 여러 나라에 아랍 국가들의 진귀한 물품을 들 여왔고, 아랍 국가에는 비단, 향료 등을 들여왔다.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13~15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에 도달했다. 네덜란드의 세계 진출과 함께 유대인들도 중남미 의 브라질에 진출했다. 중남미의 설탕, 커피 무역에는 유대인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유대인의 활약은 북아메리카와의 무역에서도 두드러졌다. 1701년 미국 인구의 1퍼센트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무역업자 의 12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보석, 산호, 직물, 노예, 코코아 등의 무역을 주도했다.
이처럼 그들은 세계 무역사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등장한다.
- 유대인 무역상들은 때때로 밀수에도 손을 댔다. 유대인 부자들 중에는 밀수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많다. 로스차일드 가 문도 그중 하나이다.
근대 유럽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다. 각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전쟁 중에는 당연히 물자의 수출입을 금지했다.
이는 이내 각국의 물자 부족을 불러왔고, 밀수를 막대한 이익을 낳는 장사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프랑스와 영국 전쟁 당시 로스차일드가 밀수로 큰 이익을 얻은 사례는 매우 유명하다. 프랑스와 영국 은 서로 경제적 봉쇄를 펼치고 있었는데, 로스차일드는 양측에 뇌물을 주면서 봉쇄 조치를 비껴 나갔다. 로스차일드는 이때의 자산을 밑천 삼아 세계적 은행가가 되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유대 상인의 밀수가 횡행했다. 남북 전쟁에서는 당연히 남부와 북부 사이에 물자 이송이 금지였다.
그 때문에 북부에서는 남부에서 생산되는 면화가 크게 부족했고, 남부에서는 북부 공산품과 커피가 부족했다. 이러한 물자를 밀수하면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기에 밀수업자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밀수업자 중에는 유대 상인들이 많았다. 당시 유대교의 랍비 (종교 지도자)는 '밀수는 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거듭 비 난했지만, 이는 거꾸로 당시 유대인의 밀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를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기 미국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강했다.
- 현재 사용되는 금융 제도 중에는 유대인이 개발하고, 발명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유가증권'을 발명한 사람도 유대인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유대인들 중에는 금융업자가 많았는데 그 들은 돈을 빌려줄 때 차용증서를 채권으로 유통했다. 차용증 서를 팔거나 할인을 한 것이다. 이것이 서양 유가증권의 시작 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에게 유가증권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다. 언제 추방 당할지, 언제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산을 '현물' 로 가지는 일은 위험했다. 현물은 한번 빼앗기면 되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증권은 그것을 가진 본인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가 없었다. 또 추방당할 때도 종이 한 장만 가지고 가면 된다. 유대인에게 유가증권은 여행자용 수표와 같았다.
그래서 증권거래소가 설치됐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와 서인 도 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했다. 영국 최초의 전문 주식 중개인도 유대인이라고 한다. 또 무기명 채권을 만든 사람도 유대인이었다.
-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이 갑자기 재산을 몰수 당하는 일은 종종 벌어졌다. 특히 지중해 무역을 할 때 스페인 해군 등은 배나 선적물이 유대인의 소유임을 알게 되면 합법적 으로 몰수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상 보험을 포함해 무역과 관련된 모든 서류에 허위로 기독교인 이름을 기재했다. 이것이 나중에 무기명 채권으로 발전하게 된다.
신용 대출을 시작한 사람도 유대인이라고 한다. 신용 대출은 담보를 잡지 않고 돈을 빌려 주는 제도이다. 담보의 가치로 대 출할 금액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도에 따라 대출 금액과 이자를 결정한다. 이로써 담보가 없는 사람 도 사업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 각종 복음서에는 교회를 불편하게 하는 내용도 많았다. 따라 서 교회에서는 그런 복음서를 거두어들여 가능한 한 세상에 퍼 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180년 무렵에는 '너무 많은 복음서가 세상에 나돌고 있다'는 이유로 주교 에이레나이오스는 몇몇 복 음서를 정리한 문헌을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날 《신약 성경>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정통으로 인정받은 아타나시우스 는 367년 당시 떠돌던 책자 가운데 스물일곱 권을 선별해 그의 부활절 편지에 제시했다. 이것이 393년 히포 공의회를 거쳐 397 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 성경》으로 정식 인정받는다. 즉, 《신약 성경>은 기독교 종파 중 하나가 만든 문서이다. 물론 신약 성경》에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 교회에 가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신약 성경>은 편찬될 당시부터 교회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세상에 나도는 숱한 복음서 중 마태(가톨릭은 마태오), 마가(마르 코), 누가(루카), 요한 네 사람이 쓴 것만 정통 복음서로서 《신약 성경》에 실었다. 그밖의 복음서는 모두 배제되었다.
- 《신약 성경>에는 철저한 '편집 방침'이 있었다. 기독교교회로 서는 가급적 많은 신도를 확보해야 하고, 신도들을 교회로 끌어 들여야 한다. 그래서 신을 매우 무서운 존재로 만들고 교회에 오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신약 성경에는 죄를 지으면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구절이 거듭 나온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복음서 (도마 복음, 유다 복음 등)에는 그런 기술이 별로 없다. 이 부분은 교회가 의도적으로 써넣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 《신약 성경>은 교회에 유리하게 작용하게끔 만들어졌다. 그 런데도 편찬의 통일성이 불충분했는지 성경 속에도 모순점이 많다. 가령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고귀한 집안의 출신으로 묘사되었는데, <누가 복음>에서는 서민 계급이 되고, <마가 복 음>에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각각의 복음서에서 저자의 의도에 따라 예수의 출신이 서로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신약 성경>을 편찬할 때 확인과 조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실어버린 탓이다. 즉, 예수가 어떤 집안에 서 태어났는가 하는 정보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호한 정보를 모아 《신약 성경>을 편찬한 것이다.
-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한 교회의 전략
앞서 말했듯이 신약 성경>은 누군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면 밀히 구성해서 쓴 책이 아니라, 수십 명, 수백 명이 쓴 문서를 모아 묶은 책이다. 교회에 유리한 문헌만 모았을 것이 분명하 지만, 전체 내용을 세세하게 확인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일단 정식 성경으로 인정되어 세상에 퍼지고 나면 그 뒤에 수 정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신약 성경>에는 '수정하지 못한 부 분'이 꽤 있다. 그러한 부분은 교회의 의도에서 벗어난 사실이 며, 본질은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 연결되려면 굳이 교회를 통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 회는 '교회는 신과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라는 방침을 취해 왔 다. 이는 신자 수를 늘리고, 신자를 교회에 묶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이었을 뿐이다.
- 교회세는 기독교 보급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바꿔 말해 유럽의 여러 나라가 세계를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교회 를 만들면 지역에서 교회세를 징수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교회 가 없는 '미개척지'에 점점 더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를 세우는 측에게는 '이것은 기독교 포교를 위한 것이다 라는 대의명분이었다. 교회세라는 이권을 얻기 위해 교회를 세 우면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며 스스로에게도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 없이 탐욕스럽게 교 회를 세워 나갔다.
'교회를 세우면 징세권이 생긴다'라는 '교회세 시스템'은 곧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왔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유럽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 세계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알 려진 바와 같이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한다. 이른바 '대항해 시대'이다.
대항해 시대는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의 향료를 구하기 위한 것'이 가장 큰 동기였다. 또 하나는 '기독교 포교'였다.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나침반, 조선기술이 발달하면서 세계 각 지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나갔다.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의 왕자이자 항해왕 엔히크 Henrique의 후원 등 국가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들에게 대항해는 곧 국가사업이기도 했다. 국가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늘 기독교 포교가 따랐다.
- 유럽의 왕들은 생각보다 가난했다
중세 유럽의 국왕이라고 하면 '절대 왕정'이라는 말이 떠오르 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넉넉한 경제력을 갖추었으리라 는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십일조 때문에 중 세 유럽 국가들은 큰 부담을 안았다. 대부분의 시민이 교회에 이미 세금을 냈기 때문에 국가에 세금을 낼 여유가 없었던 것이 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왕들은 재정적으로 매우 궁핍했다. 중세 유럽 국가에서는 국가 전체가 왕의 영토가 아니라 교회, 귀족, 제후가 각각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수는 국왕 이 직접 통치하는 영토인 '직할령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 영토는 결코 넓다고 할 수 없었다. 귀족이 통치하는 영토는 '귀족령' 이라고 했다.
국왕은 재원이 부족하면 직할령을 팔기도 했다. 게다가 중세 부터 근대에 걸쳐 유럽의 국왕들은 쉴 새 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 중에 특별히 세금을 걷기도 했지만 서민과 귀족, 제후들의 반발이 심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중세 유럽 국가들의 세금은 주로 관세나 간접세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는 세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유럽 각국은 어떻게든 교회세를 회피할 방법이 없는지 모색하게 되었다.

-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되어, 국가 단위로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오는 경우도 생겼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 들은 교회세 부담 때문에 고통을 겪어 종교 개혁은 뜻밖에 찾아 온 행운과 같았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이다.
헨리 8세 Henry Vill가 다스리던 16세기 초반, 영국 기독교인들 은 성경을 따라 십일조를 냈다. 십일조는 4등분이 되어 일부가 로마 교황에게 보내졌다. 세수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던 헨리 8 세는 종교 개혁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534년 '영국 국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 '국왕지상법'에 따라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다.
이로써 헨리 8세는 영국 기독교교회의 재산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십일조도 자신에게 내도록 했다.
- 헨리 8세의 이혼문제
기존의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배웠을 것이다.
헨리 8세는 스페인 왕녀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는 가톨릭교회로부터 떨 어져 나왔다.
그러나 사실 헨리 8세의 파문은 단순한 구실이었다. 간단히 말해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하도록 일부러 가톨릭교회와 영국의 관계를 끊고 가톨릭교회의 수입을 빼앗은 것이다.
실제로 헨리 8세가 캐서린과의 이혼을 인정하도록 교황에게 요구했을 때, 이미 헨리 8세와 교황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국왕 자신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십일조 헌납을 중단한 상태였 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교황에게 좋은 대답을 들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혼은 인정되지 못했고 파 문을 당하고 말았다. 헨리 8세가 의도한 결과였다.
- 고대부터 근대까지 유럽에서 절대적인 재정 권력을 쟁취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의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재정 권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흔히 '사치를 일삼던 왕실'에 분노 한 '과도한 세금에 허덕이던 민중'이라는 구도로 설명된다. "빵 을 달라”라며 외치는 민중을 향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a Antonia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했다 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그러나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고 알려졌다).
- 어쨌든 막대한 재물과 권리를 가진 프랑스 국왕과 고통을 받 는 민중이라는 이미지는 우리의 역사관 속에 깊게 자리 잡았 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이라고 하면 '절대 왕정'이라는 말이 떠 오르듯 절대 권력을 거머쥐고 국민을 괴롭혔다는 인상이 있다. 하지만 사실 프랑스 국왕은 그 정도로 막강한 권력도, 막대한 재산도 없었다. 도리어 역대 프랑스 국왕들은 여러 차례 파산 을 하기도 했다. 유럽의 다른 국왕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유산으로 빚을 물려준 프랑스 국왕들
프랑스 국왕은 왜 몇 차례나 파산 지경에 몰려야만 했을까? 바로 재정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성직자(교회)와 귀족은 막 강한 힘을 지녔고, 이들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았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인구는 2,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성직자는 10만 명에 불과한데도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 국의 10분의 1에 이르렀다. 성직자들은 정해진 세금을 내는 대 신 자신들이 정한 금액을 국가에 납부했다.
귀족 또한 40만 명이 채 안 되었지만, 프랑스의 90퍼센트 이 상의 부를 독차지했다. 즉, 당시 프랑스에서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민중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던 것이다. 국왕은 그런 민중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주변국과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비용 등을 확보해야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왕 루이 16세 Louis XI도 엄청난 빚을 안고 있었다. 전임 국왕의 7년 전쟁과 미국의 독립전쟁 지원 등의 전 쟁 비용 때문에 프랑스의 빚은 30억 리브르(한화 약 8천 억)에 달 했다.
그때까지 몇 차례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던 프랑스는 금융가로 부터 신용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이자는 5~6퍼센트로 높았고, 이 자만 해도 연간 2억 리브르 가까이 지급해야 했다. 당시 프랑스 의 국가 수입이 2억 6,000만 리브르 정도였고, 세입의 대부분이 이자를 무는 데 쓰였다.
- 사실 루이 16세는 상당히 국민을 염려했던 왕이었던 듯하다. 재정 위기 때 국민에게 더 이상의 세금은 걷지 않고, 귀족이나 교회(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역대 프랑 스 국왕들도 사실은 귀족이나 교회에 세금을 더 내라고 압박하 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왕이 귀족과 교회의 심한 반발 로 과세를 포기하고 말았다.

- 초기 불교 경전에 따르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가르침 을 설파하거나 수행을 시킨 일도 없었으며, 누구나 알기 쉬운 말로 세상의 도리를 설명했다. 붓다는 죽기 직전에도 제자들에 게 “앞으로는 세상의 도리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붓다는 생전에 누구에 게도 엄격한 수행과 어려운 교리로 짐을 지우지 않았으며, “누 구나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면 된다"라고 전했다.
- 초기 불교 경전에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담겼다는 사실은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불경에 기록된 설화 가운데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후세의 불교 교단은 이를 불교의 본질로 삼지 않았 다. 불교의 본질은 '오랜 수행 끝에 터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 세웠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바로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불교 교단과 승려들은 더 존재할 의미가 없어진다. 누구나 바로 실천할 수 있다면 지도하는 승려가 필 요 없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불교는 어렵고 엄격해야만 했다. 이후 붓다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교단을 만들었고, 경제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교리는 점점 어려워졌다. 엄격한 수행도 하게 되었다.
신도를 확보하고 기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불교의 가르침에 '고마움'을 느끼도록 해야 했다. 고마움을 한층 더 크게 만들려 면 불교의 가르침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인 편이 유리했다. 승 려들은 교리를 어렵게 만들고 엄격하게 수행함으로써 자신들 에게 위엄을 부여하고 신도와 기부를 늘리고자 했다.
기독교에서 '교회를 통해서만 신과 연결될 수 있다', '교회는 신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라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논지 와 흡사하다. 종교는 이런 식으로 비즈니스화 되어 간다. 전통 이 깊은 종교든 신흥 종교든 종교 비즈니스화의 기본 구조는 앞 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 돈이 돈을 벌게 만든 기부문화
사찰은 어떻게 이토록 막대한 재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중세 부터 사찰은 농지와 금전 등을 기부받았는데, 그것이 장원으로 발전해 갔다. 그러한 장원만으로도 넓이가 상당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사찰은 '신의 사자'이기도 했으므로 많은 사 람들이 '사찰에 기부하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 어, 교토의 니치렌 종파의 사찰 16곳의 회합 기록에는 1576년 기부를 요청한 지 불과 열흘 만에 1,200관문이 모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200관문은 쌀로 치면 1,000석(석은 다이묘나 무 가의 봉록 단위로 성인 한 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에 해당한 다) 안팎이다. 그만한 양이 불과 열흘 만에 모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대한 장원을 이용해 대부업도 겸했다. 장원 에서 나는 쌀이나 기부된 쌀은 전부 다 사찰에서 소비하기에는 양이 많았다. 그래서 남은 쌀을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출거'를 했다. 출거는 원래 국가가 가난한 농민에게 벼를 빌려주고 가 을에 이자를 붙여 반환하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빈민 대책이었지만 점차 이자 수입에 무게가 실리면서 어느새 국가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개인이 출거하는 일도 생겨 이를 '사출거'라고 불렀 다. 사출거는 이자가 매우 높았다. 즉, 고리대금이다. 이 고리대 금을 대대적으로 행했던 곳이 사찰 세력이었다. 그중에서도 히 에이잔은 중심적인 존재였다.
- 전국 시대의 일본은 불교 외에 또 다른 종교 문제를 안고 있 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기독교 비즈니스가 일본에도 밀려왔 던 것이다. 기독교 비즈니스가 대항해 시대를 가져왔다는 사실 은 앞에서도 말했는데, 유럽의 대항해 시대는 일본의 전국 시대 와 시기적으로 거의 겹친다.
1543년부터 1587년 반세기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에 서 온 무역선, 이른바 '남만선'들은 일본 각지에서 활발하게 교 역을 했다. 그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수회 선교사의 국외 추방을 명령한 '바테렌(신부) 추방령'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남만무역'이라고 하면 유럽의 희귀한 생산품을 실어 오는 '특별한 무역'이며, 이들 '외래품은 일부 다이묘나 부유한 상인들 손에만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만무역으로 들어온 수입품은 당시 일본 사회에 깊숙이 파 고들었다. 특히 무기, 군수물자는 다이묘에게는 꼭 필요한 물품 이었다. 총포는 일본에서도 만들었지만, 총탄을 만들 때 사용되 는 납과 탄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은 당시 일본에서 생산이 되지 않아 해외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었다. 남만무역을 거치지 않고서는 총포의 탄약, 화약의 원료 같은 물품은 구할 수 없었 다. 당시의 남만무역상들은 독점적으로 총포 관련 군수물자를 전국 시대 다이묘들에게 공급해 이익을 챙겼다고 할 수 있다.
- 남만선이 한 차례 뜨면 유럽의 무역상들에게는 막대한 부가 굴러들어 갔다. 당시 일본과 포르투갈의 무역 거래액은 1570년 대부터 1630년대까지 290~440만 크루자도(당시 포르투갈의 독자 적 화폐 단위)였다. 쌀값으로 치면 200만 석에서 400만 석 정도 로, 도쿠가와 정권의 1년 치 세금 수입에 버금가는 액수이다. 남만무역은 그 정도로 막대한 이익을 봤기 때문에 당연히 의무 도 따랐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마 교황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전 세계에 기독교를 포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 라 양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는 대가로 각지에 선교사를 파견해 교회를 세워야 할 의무를 지었다. 그 결과 양국이 세력을 넓힐 때마다 기독교 또한 그만큼 퍼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 포교와 '무역'은 표리일체,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선 교사가 각지에 파견되면 상인들도 함께 건너가 교역을 했다. 교역으로 얻은 이익의 일부는 교회에 환원되었고, 교회는 그 수 익으로 선교사들을 각지로 더욱 파견했다. 일본에 온 남만선도 마찬가지였다.
남만선이 일본에 왔을 때, 거래하는 조건으로 반드시 기독교 의 포교를 허가하라고 요청했다. '우리와 무역을 하고 싶다면 기독교 포교를 허가하라'라는 뜻이었다. 남만선과 교역을 하기 위해 다이묘들은 기독교의 포교를 인정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일본에 기독교가 급속하게 퍼져 나간 것이다.
- 남만무역이라고 하면 아주 먼 유럽에서 물자를 싣고 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은 마카오나 중국 항구에서 물자를 실어 왔다. 유럽의 물자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화물은 아시 아에서 조달했다.
왜 아시아의 생산품을 남만선이 실어 왔을까? 남만선이 등장 하기 전, 일본의 해외 무역은 왜구(일본 해적)가 지배하고 있었 다. 다만, 명나라 조정의 강력한 진압으로 16세기에는 왜구 세 력이 급속히 쇠퇴했다. 이 왜구를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나라 가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고, 고아를 근거지로 삼아 이듬해에는 말라카를 손에 넣으면서 동남아시아에서 본격적인 무역에 나섰다. 1513년에는 명나라와 통상 관계를 맺었다.
1557년에는 해적을 토벌한 보상으로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임대받았다. 그리고 마카오를 거점으로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 시아 일대에서 무역을 했다. 즉, 포르투갈은 왜구를 대신해 일 본의 해외 무역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전 세계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오스만 제국을 우회해 아시아와 교역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 다. 이로써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오스만 제국을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으나 오스만 제국도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1535년 프랑스와 특별 협정을 맺고 통상 특권 을 부여했다. 이는 프랑스 상인이 오스만 제국에서 장사를 할 경우에는 치외법권, 영사재판권, 개인세 면제, 재산·주거·통행 의 자유 등을 인정한 것이다. 관세도 일률적으로 부과했다. 결 과적으로 향신료에 붙던 특별 관세가 없어진 셈이다.
- 왜 기독교 국가인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협정을 맺었을까?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과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에 '적의 적은 아 군'이라는 의미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후 오스 만 제국은 1580년에 영국, 1612년에 네덜란드와 이와 유사한 특별 협정을 맺었다. 이처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에는 향신 료를 싸게 팔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의 향신료 무역을 방해 하려고 했다.
- 7세기 '알리'라는 인물이 칼리프가 되었는데, 이를 인정하는 파와 인정하지 않는 파로 분열했다. 알리를 인정하는 파가 '알 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시아파'가 되었다. 그리고 시 아파에서는 알리의 후손이 칼리프에 올랐다. 알리를 인정하 지 않는 파는 '이슬람의 관행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수 니파가 되었다. 이후 시아파와 수니파는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된다.
시아파는 10세기 무렵에 세력이 약해졌으나 16세기에 이란 지방에서 일어난 사파비 왕조Safavid dynasty가 시아파를 국교로 정하면서 부활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 이란 지방에 들어 선 이슬람 왕조이다.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대항 세력이었으며, 한때 이란 지방은 물론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남부까지 넓은 영역을 점령했다. 자연히 사파비 왕조의 영향력은 컸다. 지금도 시아파의 총본산은 이란인데, 이는 사파비 왕조에서 유래한 것 이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였다.
-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사사건건 대립했으며, 소규모 충돌이 영유권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티그리스강과 유 프라테스강의 하류에 있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놓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메소포타미아 문 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길이 200킬로미터, 가장 넓은 지점의 폭은 800미터에 이른다.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 문제는 지금으로부터 400~5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양쪽은 오 래전부터 아무런 득도 없는 소모전을 끝내고 싶어 했다. 1639 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처음으로 국경선이 정해졌다. 이때는 샤트 알 아랍 수로의 동쪽 지역에 국경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끊임없이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국경이 확정되고서 200년 뒤, 근대에 접어들어 사파비 왕조 의 뒤를 이어 카자르 왕조가 등장했다. 하지만 국경 분쟁은 끝 나지 않았다.
당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던 영국의 중개로 1847년 다시 국 경 확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샤트 알 아랍 수로 동쪽 연안이 국경으로 정해졌다. 이로써 국경이 약간 서쪽으로 옮겨 지면서 언뜻 카자르 왕조에는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은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서 카자르 왕조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실질적인 이득이 없는 결과에 카자 르 왕조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이 문제는 끝나지 않고 현대로 넘어왔다. 현재 카자르 왕조는 이란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라크로 계승되었지만,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의 대립은 계속된다. 고작 수로 하나로 400년이나 싸움을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샤트 알 아랍 수로는 양 쪽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페르시아만은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동서양을 잇 는 물류 거점이었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내륙과 페르시아만 을 연결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통로를 사용할 수 있고 없고는 차이가 컸다. 더구나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석유가 채굴되면서 샤트 알 아랍 수로의 가치는 한층 더 높아졌다.
- 지금도 계속되는 수로 분쟁
긴 싸움은 마침내 타협점을 찾아 1937년, 이란과 이라크는 국 경 조약을 체결했다. 종전대로 샤트 알 아랍 수로의 동쪽 연안 이 국경선으로 정해졌지만, 이란도 샤트 알 아랍 수로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사람들은 이로써 양국의 국경 분쟁이 마무리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1970년대 이란은 미국을 등에 업고 이라크에 국경선을 조정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친미 국 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라크도 저항할 수 없었고 1975년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중앙선을 국경으로 하는 데 합의했다. 결 과적으로 이라크는 샤트 알 아랍의 영유권을 절반은 빼앗긴 셈 이었다. 이라크는 이 원한을 풀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호메이니 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이끄는 새로운 정권은 반미 노선을 강화했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1980년 미국이 이란을 지원하지는 않는다는 계산 아래 이라크는 이란을 선제공격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때 미국은 이라크 편에 섰다. 당시의 이라크 지도자는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이었다. 즉, 미국은 과거에 사담 후세인을 지원했던 것이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은 8년 동안 이어지며 100만 명 이상의 사 상자를 냈다. 이처럼 큰 희생을 치렀지만 막상 국경선은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지금도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이 란과 이라크의 충돌은 이어지고 있다.
- 밸푸어 선언과 이스라엘의 탄생
현재 중동 지역의 갈등과 혼란은 이때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며 남긴 불씨로 인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서로 다 른 세 가지를 약속했다. 먼저, 아랍 사회에는 팔레스타인을 포 함해 중동 전체에서 오스만 제국을 대신할 아랍 왕국을 수립해 주기로 한다(후세인-맥마흔 서한, 1915년).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 이슬람 세계는 대부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은 부족도 있었기에 전후 독립을 조건으로 각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또 하나는 동맹국 프랑스를 상대로 한 약속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전체를 분할 통치하자는 비밀 약속이다(1915년, 사 이크스-피코 협정). 제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자 당시 세계적 강 국이었던 프랑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은 유대인에게 약속한 유대인 내셔널 홈(민족적 고향) 건설이다(1917년, 밸푸어선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현 재 이스라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방도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 던 곳이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독일과 오스만 제국이 속한 동맹국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때 가장 가혹하게 유대인을 박해했던 나라는 러시아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한 러시아와 싸우는 독일을 지지했던 것이다. 여러 번 말했다시피 유 대인은 고대부터 금융 분야에 뛰어난 민족이었다. 유명한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도 18세기 독일에서 세력을 키운 유대인 은행 가 가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금융 권력을 잡은 유대인 사회가 어느 진영을 지지할지 주목되었다. 물론 두 진영 모두 유대인 사회 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유대인을 아군으로 두면 전쟁 비용 을 조달하는 데 꽤 유리하기 때문이다. 고전하던 연합국 측 영 국이 꺼낸 비장의 무기는 유대인 사회에 달콤한 사탕 같았다.
- '밸푸어 선언'이라고 불리는 이 약속은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 Arthur Balfour가 유대인 사회를 대표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나면 팔레 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내셔널 홈의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 을 담았다. 영국은 유대인의 돈을 빌리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 역을 유대인에게 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영국의 제안은 유대인 사회의 오랜 열망을 잘 읽어 냈다고 할 수 있다.
밸푸어 선언에는 '유대 민족을 위한 내셔널 홈 national home 을 팔레스타인에 수립하는 것을 적극 찬성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유대인의 국가를 세운다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유대 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해석했다.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어렵사리 연합국 측이 승리를 거뒀지만, 전후 중동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더 없는 혼란에 빠졌다. 아랍 세계와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이 싹 탔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의 삼중 외교가 뿌린 씨앗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영국의 위임통치 령으로 지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에 는 약 75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그중 65만 명이 아랍인 이었다. 유대인도 거주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아랍인과 유대 인은 서로 친밀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대체로 평온하게 공존하 는 사이였다.
그러나 밸푸어 선언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사이는 틀어졌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 료 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 으나, 1931년부터 1935년 사이에 무려 15만 명이 이주한 것이 다. 이를 두고 아랍인 사회는 크게 반발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는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충돌이 잦았고 종종 대참사로 발전 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둔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립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영국은 마침내 위임통치를 포기하 고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넘겨 버렸다. 국제연합은 논의 끝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셋으로 분할하여 유대인 자치구, 아랍인 자 치구, 그리고 각 종교의 중요한 성지가 있는 이스라엘의 일부는 국제연합의 관리 아래에 둔다고 제안했다. 독립 국가 건설을 갈망하던 유대인 측은 마지못해 국제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였 지만 아랍인 측은 이를 거부했다. 유대인 측은 얻는 것이 있지 만 아랍인 측은 잃을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원수가 된 유대교와 이슬람교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되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이와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원래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웃 아랍 국가들도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에 반대하며 전쟁이 시작 되었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아랍 측에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이 참전했으며 영국군 장교들도 다수 아 랍군에 동참했다. 수적으로도 아랍군은 15만 명인데 비해 이스 라엘군은 많아야 3만 명이었다. 아랍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아랍 측은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었으나 긴밀한 연계 부족과 내부 균열로 말미암아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이스 라엘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이스라엘군에는 종군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많았던 데다 아랍군 내부의 응집력이 부족했던 탓에 도리어 이스라엘의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 결국 제1차 중동전쟁은 1949년 휴전협정을 체결하며 종결되 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아랍 측이 더 많은 것을 잃었다.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이 정한 유대인 자치구 이상의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에서 정해진 경계선이 현재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이스라엘의 국경선이다.
전쟁 중에 주변국으로 피신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스라엘 정부로부터 귀환을 허가받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수십만 명이 넘는 난민이 생겨났다. 그들 중에는 지금까지 몇 대에 걸 쳐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이슬람교인과 유대교인은 철천지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 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영토 문제'로 출발한 이스라엘 문제가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종교적 대립으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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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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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고대인의 계절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사용되던 한자 에 주목해보자. 원래 '일'은 태양, '월月', '석'은 달, '조朝’는 달빛 아래에서 잔디 사이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양, '년年'은 곡물이 열리 는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 문자다. 또 '춘'은 초목이 싹트는 모양, '추秋'는 귀뚜라미 같은 곤충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 문자라는 게 일 반적인 해석이다. 결국 먼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은 천문, 곡물, 생물의 모양을 보고 시간과 계절을 감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달력은 중요했다. 각 시대의 군주들도 천체 관측을 통해 달력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기에는 백성들의 삶 을 지킨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하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해 제사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였다. 이렇게 천문 관측을 통해 달력을 만드는 일을 관상수시觀象授時라고 부른다. 그런 가운데 1년을 사계절로 나누는 인식도 생겨났다. ‘하夏’와 '동'이라는 글자는 은나라 때(BC 11세기에 멸망)는 존재하지 않았 다. 그럼에도 동지冬至, 춘분春分, 하지夏至, 추분秋分에 관한 인식과 일출, 일몰을 관측하는 시스템은 은나라 이전부터 이미 정비되고 있었다. 이처럼 고대 중국인들도 대략적으로나마 계절과 달력을 파악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 아직 해가 뜰 시간은 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평단 (아침 6시경)이 되면 조정에서는 조회가 시작된다. 그 때문에 회의가 있는 날에는 이미 궁성 앞에 관리들이 모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실제로 전한의 무제는 평단 에 조서를 내리고 관리들은 '식시 (아침 9시경)'까지 그에 대한 자신 들의 의견을 올렸다.23 우리들 미래인에 관한 일이 황제의 귀에 들 어간 것도 어느 날 이 시간대에 일어난 일이다.
황제가 참석하는 회의는 매일 열리지는 않으며, 황제가 5일에 하 루 정도 정무를 돌본다면 성실한 편이다.  매월 1일과 15일에는 정 책을 결정하는 회의인 공경의公卿議가 열리는데, 이때는 일부 정부 고관뿐만 아니라 황제도 이른 아침부터 출석해야 한다. 3세기 말 에 쓰인 시는 '새벽부터 문서를 정리하고, 밤이 되어도 잠을 잘 여가가 없다'고 노래했는데, 한창 바쁜 시기에는 회의가 없는 날에도 관리들은 이미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조정의 관계자가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밤에 일찍 잠들기 때문 이다.
- 치의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충치를 만드는 원인 중 하나는 전분 이다. 현대 일본인은 쌀알을 조리해서 먹는 입식粒食과 면이나 떡 처럼 밀로 만든 분식粉食 등을 통해 끈적거리는 전분을 섭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충치의 한 원인이 된다. 하지만 당나라 이전 시대의 식생활은 그렇지 않다. 한나라 때 사람들은 대개 점성이 별 로 없는 좁쌀을 입식으로 먹었으며 밀을 재료로 하는 분식도 아직 많지 않았다. 이런 식생활이 당시에 충치를 억제했던 한 원인일지 도 모르겠다.
- 다음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남녀 모두 머 리를 길러서 묶었다. 머리를 묶는 모양은 다양하지만, 머리카락 끝 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습관의 기원은 BC 1000년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은나라 사 람들은 머리카락 끝으로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었기에 머리카락 끝을 숨기지 않으면 죽는다고 여겼다. 춘추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신분에 맞게 관을 써서 자신의 신분 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상하관계가 눈에 보이게 드러나고 사회질서가 안정되었다. 공자는 이런 신분질서의 안 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관례는 남자의 통과의례 중 하나로, 성인과 마찬가지로 관을 쓰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결국 지식인 과 관리들은 의무적으로 관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군주 앞에서 절 을 할 때 상투가 없으면 관을 고정할 수 없어서 관이 툭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상투가 점점 중요해졌다. 한편 주변 여러 민족은 대개 피발被을 하고 있었다. 피발이란 풀어 헤친 머리로, 지금의 일본 인이 하고 있는 일반적인 헤어스타일(똥 머리는 제외)이 바로 피발 이다. 남중국은 특히 피발이 많아서 중원과는 달랐다.
머리카락을 묶을 때 사용하는 빗은 주로 대나무나 대모玳瑁(바 다거북 등껍데기)로 만들며, 촘촘한 빗인 비와 듬성한 빗인 소梳가 있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얇은 검정색 비단으로 감싼 다음, 비 녀로 둘둘 감아서 상투를 튼다. 상투 아래쪽을 정련한 비단絹으로 묶고, 남는 끈 부분은 뒤로 늘어뜨린다. 비녀는 남녀 공용인 비 녀와 남성 전용인 비녀가 있다. 상투 모양은 다양하다.(도판 2-3) 또 한 문관은 붓을 비녀 대신 쓰기도 하고 귀에 끼우고 있기도 했으며, 보라색 주머니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관리에게 머리와 관은 아주 중요했다.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야 했기에 이발을 자주 하지 않았으며 전문적인 미용실도 없 었다. 그 대신 친구끼리 이발을 해주었다. 노년이 되면서 머리가 빠 진남성은 체(가발)를 썼다. 한나라 때의 벽화 중에는 관리들끼리 교제가 모티프인 그림들이 보이는데, 거기에는 대머리인데도 가 발을 쓰지 않고 버티는 관리들이 자주 나오며 그림에서 그들의 괴 로움을 엿볼 수 있다.(도판 2-4) 현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탈모는 큰 고민이었다. 전국 시대에는 '머리가 빠질까 봐 머리를 감 지 않으면 머리가 더 많이 빠진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다.
- 그 밖에도 노인들은 보통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당시 예법에서 50세 이상은 집 안에서, 60세 이상은 향리에서, 70세 이상은 도都에 서, 80세 이상은 조정 내에서도 지팡이를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허 용해주었다. 또 50세에는 노역을, 60세에는 병역을 면제해주었고, 70세인데도 조정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잔업 없이 정시에 퇴근 할 수 있게 하는 등 노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70 세가 넘으면 정부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는데, 그때는 구장鳩杖이라 고 하는 특별한 지팡이를 하사받았다. 구장은 손잡이 부분에 비둘 기장식이 붙어 있는 지팡이를 말한다.(도판 3-2) 왜 하필 비둘기인 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당시 말단 관리들도 잘 몰랐던 듯하다.
- 한 번 구장을 하사받은 노인은 경력이 있는 관리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관공서 안에서도 천천히 걸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노인을 폭행한 사람은 국가반역죄로 처벌받는 등 여러 가지 특전 을 받을 수 있었다.
전한 후기의 인구 통계를 살펴보면, 산둥반도 부근의 동해군東海 에는 남자가 70만 6064명, 여자가 68만 8132명이었는데, 그중에 서 6세 이하는 26만 2588명, 80세 이상은 3만 3871명, 90세 이상은 1만 670명, 70세 이상에서 구장을 받은 사람은 2823명이었다. 즉 노인 중에서도 구장을 하사받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 도시에 사는 아가씨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화장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에는 조장朝粧이라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 장하는 게 보통이었다. 전국 시대에는 '모장毛이나 서시西라는 미녀를 찬양해봤자 자신이 미녀가 되는 건 아니지만, 립밤, 페이스 파우더, 아이브로펜슬이 있으면 2배는 예뻐질 수 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화장은 여성의 미모를 향상시키는 지름길이었다. 
그 방법을 소개하면, 한나라 때는 눈물을 흘린 듯한 화장, 근심 있어 보이는 눈썹, 옆으로 기울어진 헤어스타일을 하고 살랑살랑 교태를 부리는 절요보折腰歩로 걸으며 치통으로 괴로운 듯한 표정 의 미소까지 지으면 어떤 남자도 단번에 무너졌다. 55 재미있게도 일부러 눈썹을 찌푸리는 여성도 있었다. 전설적인 미녀 서시가 아 픈 가슴을 부여잡고 눈썹을 찡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시골의 어떤 추녀가 그걸 따라했더니 너무나 추한 모습에 부유한 사람은 문을 닫고 가난한 사람은 보자마자 줄행랑을 놓았다는 풍문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 '찡그린 얼굴을 따라 한다'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교태도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 다음으로 화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눈썹은 누에더듬이를 닮은 모습인 아미峨眉를 선호한다. 털을 뽑아서 눈썹을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아이브로펜슬에 해당하는 대로 눈썹을 그린다. '남도南都의 석대'라는 브랜드 제품이 유명하다. 눈썹모양에도 유행이 있어서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마의 절반을 가리는 눈썹을 그리는 게 붐이었던 시대도 있다. 물론 모두가 같은 화 장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페이스파우더는 납, 수은, 쌀가루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특히 납으로 만든 파우더는 호분胡粉이라고 불렸다." 호분을 바른다고 해도 가부키 배우처럼 새하얗게 되기보다는 얼룩 없이 투명한 느낌이 드는 흰색으로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분을 바른 다음에는 즉 시 실크 퍼프를 사용해 닦아두자. 화장 때문에 피부가 거칠어지거 나 여드름을 터트렸다가는 도리어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옛날 에도 이런 부분에는 신경을 많이 썼다. 
화장품 상자인 염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천으로 문질러 얼룩을 닦아낸 다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도판 3-6) 일부러 보조개를 붙이는 화장도 있다.  화장할 때 남편이 도와주기도 했는데 부임지에서 혼자 근무하던 남편이 아내에게 '내가 돌아가면 눈썹 을 그려주겠소'라는 시가를 보낸 일도 있다. 하지만 애정 표현도 너 무 지나치면 주변 사람들이 뒤에서 험담을 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옻칠한 화장품 상자에는 향료인 산초를 가득 담고 그 안에 화장 도구를 넣어두었기 때문에 어느 화장 도구에서나 좋은 향기가 난다.
- 식사에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이 빠질 수 없다. 탄수화물은 생명 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원으로, 과일이나 꿀 혹은 곡물 속에 있는 전분을 통해 섭취한다. 전분은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점 에서 귀중하다. 한편 단백질은 보존하기 어려운데, 대두는 예외적 으로 보존하기 매우 쉬운 식품이다. 한나라 때는 북중국에서 대두를 즐겨 먹었다
하지만 다른 고단백 식재료는 보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건조, 탈수, 발효, 가열, 냉장, 냉동, 훈증, 밀폐 등을 통해 신선도를 유지 하는 기술이 꼭 필요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탄수화물과 단백질 이외에도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그래서 부식 즉, 반찬이 필요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대표적인 반찬은 채소다. 저렴한 채소로는 파, 부추 (야생 파나 달래를 포함할 수도 있음), 숙주가 있다. 32 한나라 때 시가에서 '출세했다고 해서 조강지처를 버리지 마라. 생선과 고 기가 싸다고 파와 부추를 버리지 마라. 삼베가 싸졌다고 골풀과 볏 짚을 버리지 마라'라고 했듯이, 빈민들 대부분은 골풀이나 볏짚을 엮어 몸을 가리고 파와 부추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추는 계란 과 함께 볶아서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 부추, 파, 숙주 외에도 다양한 채소를 먹었는데, 예를 들어 장안 에서는 진나라의 귀족인 소평이 심기 시작한 동릉과東陵瓜, 즉 오이가 유명했다.  오이는 음력 8월경에 껍질을 벗기고 절임으로 만들어서 먹는다. 그 밖에도 명아주 잎이나 콩잎 등이 저렴한 식 재료로 알려져 있다.  또 기근이 들었을 때는 뽕나무 열매, 부들, 돌콩, 달팽이, 우렁이 등도 먹었다.
이처럼 몇몇 채소가 반찬으로 인기를 얻은 반면, 평소에 쇠고기 를 반찬으로 먹는 서민은 거의 없었다. 이는 쇠고기가 입에 맞지 않 아서 그런 게 아니라 소가 귀한 데다 농사를 짓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전국·진한 시대에는 농사를 지을 때 부리는 소를 죽이 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도 있었으며, 함부로 쇠고기를 먹은 백성은 천벌을 받는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쇠고기는 제삿날이나 되어야 맛볼 수 있을 정도였고, 대신 개고기를 먹으며 참는 수밖에 없었다. 양고기 꼬치도 현대 중국에서는 싸지만 한나라 때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하급 관리조차 매일 찐 쌀과 채소를 먹었고 공무 출장 중에도 역사驛舍에서 곡물, 조미료, 부추나 파를 넣고 끓 인국을 먹는 게 고작이었다.  어쨌든 고기는 상당히 비쌌던 것으 로 보인다.
바다에 가까운 지역이나 하천 유역에서는 빈부에 상관없이 쉽 게 생선을 먹을 수 있었고, 활어회가 나오는 곳도 있었다.  내륙 지방에서도 생선을 좋아했는데, 예를 들면 전국 시대 노나라의 장 관이었던 공의휴公儀休가 생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그러한 요 구에 부응하기 위해 물고기를 양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선은 특정 지역에 한정된 식재료였다. 여기서는 가장 대중적인 채소를 먹는 걸로 하자.
- 채소의 조리 방법으로는 우선 수프(국)를 들 수 있다. 수프는 전 형적인 가정 요리로, 건더기가 많아서 프랑스 요리인 포토푀pot- au-feu와 비슷하며 서민들도 집에서 먹었던 듯하다. 어른이 되고 나 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수프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니 현대 일본인에게는 된장국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다른 레시피도 여러 가지 알려져 있었지만, 청동제 조리 기구를 사용하던 상 류계급과는 달리 서민은 토기나 와기瓦器로 조리하기 때문에 기름 과 화력이 필요한 볶음 요리나 튀김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민의 조리 방법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 상류계급의 부식
서민 요리와는 대조적으로 상류계급들은 소양·돼지·말·사슴·개. 토끼 등의 가축, 닭·꿩·오리·메추리·참새·기러기·백조·학 등의 조 류, 잉어·붕어·쏘가리 등의 생선을 먹었다. 특히 송아지, 새끼 양, 어린 새처럼 부드러운 고기를 선호했으며, 봄에는 번식기에 있는 거위를, 가을에는 어린 닭을, 겨울에는 온실에서 기른 아욱과 부 추를 먹는 등 계절마다 호화롭고 현란하기 그지없는 요리를 먹었다.  전국 시대의 왕 중에는 곰 발바닥이나 닭발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잉어회, 알배기새우 수프, 구운 자라 같은 메뉴도 있다.
- 부자들 중에는 식재료가 어떻게 길러졌는지부터 깐깐하게 신경 쓰는 미식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모유로 키운 돼지를 먹 는 미식가가 있어서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비난을 받았다.47 현대 에도 이베리코 돼지에게 도토리를 충분히 먹여서 맛있는 하몽을 만드는 방법이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사료를 통해 식재료의 맛을 좋게 만든다는 점에서 당시의 발상 자체는 지금과 비슷한 점이 있 다. 그렇게 하면 맛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필자도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하몽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호화로운 식사를 하면 서민들이 시기하므로 정치 인이라도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게 바람직했다. 또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비만, 통풍, 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데, 그때도 이미 그 런 식단의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었기에 독한 술이나 기름진 고기는 건강에 좋지 않다고 여겼다.
상류계급 사람들은 육류도 마음껏 먹었다. 조리법으로는 양념 을 한 육포인 오, 고기가 들어간 수프인 갱, 고기를 넣은 채소 수프인 탁濯, 육회·고기를 불에 구운 자, 조림 요리인 유濡 등이 있다. 수프는 누룩·소금·술 등을 기본으로 해서 어떤 재료를 추가 하느냐에 따라 메뉴가 달라지는데 잘게 자른 육포를 넣은 해갱醢 羹, 쌀가루와 고기를 넣은 백갱羹, 미나리와 고기를 넣은 건갱 羹, 순무와 고기를 넣은 봉갱羹, 씀바귀와 고기를 넣은 고갱苦羹, 이렇게 5개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곡물과 고기를 함께 조리하 는 요리도 있었다. 예를 들면 삼慘은 소·양·돼지 고기를 작게 자른 다음 찹쌀과 고기를 2:1의 비율로 섞어서 구운 요리다.
- 고기로 만든 꼬치구이도 부자들이 자주 먹던 음식으로, 요리사 가 고기를 나무 꼬치에 꿴 다음 뽕나무 숯과 같은 고급 숯으로 구워 서 만든다.  고기 부위도 세밀하게 나누었는데, 마왕퇴1호한묘馬 王堆一號漢墓에서 나온 부장품 목록인 유책遺冊을 보면, 지금과 마 찬가지로 고기를 등심, 삼겹살, 부채살, 간, 위, 천엽, 혀, 염통 등으 로 따로따로 나누어 부장副한 점이 흥미롭다.
상류계급이 사용하는 조미료도 아주 다양하다. 사탕수수즙인 탁장은 중요한 조미료였고 후한 시대에는 음료로도 먹었다. 사 탕수수는 고대에도 씹어 먹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탁장은 특히나 손이 많이 가는 조미료나 음료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아직 설탕 이 없었기 때문에 사탕수수는 중요한 감미료였다. 또 곰 발바닥을 먹을 때는 작약 뿌리를 섞은 장을 사용했다.
- 장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조미료 중 하나로 콩이나 고기, 생선에 다 소금, 누룩, 향신료를 더해서 만들며 거기에 젓갈을 섞어서 사 용할 때도 많다. 젓갈은 말린 고기 다진 것과 소금, 좁쌀로 만든 누 룩, 술을 섞어서 항아리에 넣고 밀폐한 다음, 백일 동안 숙성시켜서 만든다. 콩에 소금을 섞은 후에 어두운 곳에서 차분히 숙성시킨 메 주도 인기가 많다.  향신료로는 생강, 산초, 계피, 양하荷, 염교, 목련이 있고 전한 중기 이후에는 서역에서 마늘도 전해져 원래 중 국에 있었던 마늘과 함께 고기 요리에 사용되었다.  일반 가정에 서 먹을 수 있었던 양조棗는 대추의 일종으로, 입안을 깔끔하게 하는 데 좋다. 고추와 두부는 아직 없었기 때문에 마파두부는 당시 에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고대 요리는 지금의 중국 요리와는 전혀 다르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듯이 강렬한 양 념, 강한 향신료, 진한 술은 몸에 나쁘니까 여기서는 담백한 요리 를 먹기로 하자.
- 상류계급의 식탁에는 또 다른 진미가 있다. 후한 말 승상이었던 조조는 북방 지역에서 생산되는 요구르트(낙酪)를 입수해 신하들에게 나눠줬고, 동진 시대에는 승상인 왕도導가 방문객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그 후에 낙은 남쪽에도 전해졌다. 북위 시대 의「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책에는 건조한 치즈(乾酪)와 버터 오 일등의 유제품을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다. 유제품은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품인데 그 무렵에 북방 유목민 이 화북으로 몰려들면서 그 영향으로 북방의 식문화도 함께 유입 된 것으로 보인다. 장강 유역에서 나는 식해, 마름 열매, 창포무침도 화북에 진미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59 다만 이런 진미는 어디까지나 상류계급의 입에나 들어갈 뿐이었고, 서민과는 관계가 없는 음식이었다.
- 키도 작지 않은 편이 좋다. 진한 시대에는 백성에게 노역을 시 킬 때 키와 나이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국가가 백성들의 키를 기 록하고 있었다. 평균 신장을 명기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사서史書를 읽어보면 성인 남성은 대체로 7척(약 161cm)이라고 적혀 있다. 또한 문헌에는 특별히 키가 컸던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 는데, 8척(약 184cm) 이상인 사람은 대체로 “그 모습이 굉장히 크다 姿貌甚偉.", "용모가 아주 남다르다容貌絶異.”, “용모가 긍엄하다容貌 嚴"고 할 정도의 거구로 여겨졌다. 『삼국지』를 예로 들자면, 유비 의 키가 7척 5촌이라고 적은 것 외에는, 대개 8척 이상의 사람만 특별히 키가 크다며 언급하고 있다. '키가 8척이라도 병에 걸리지 않신장은 몸이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증거였다.
한편 6척 (138cm) 미만은 노역에서도 면제받고, 신체에 장애가 있 는 사람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아무리 고위관직에 오르고 영화를 누리려고 해도, 전국 시대의 맹상군孟嘗君처럼 키가 작으면 바보 취급을 당했다. 예를 들어 풍근馮勤의 일가친척은 모두 키가 컸는 데 오직 풍근만 키가 7척이 되지 않았다. 자식이 자기를 닮아 키가 작을까 봐 걱정이 된 풍근은 키가 큰 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가문, 자금, 인맥, 운이 없으면 애초에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시험에서 합격하기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좋은 교육을 받는 편 이 좋고, 경제 자본, 인적 자본, 사회 자본 등의 주변 환경도 중요하 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부모의 격차가 아이의 격차로 이어지기 때 문에 아이가 장래에 성공할지 여부가 아이의 능력만으로 결정된 다고 할 수는 없다. 진한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지금보다 더 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위진 시대가 되면 그런 경향성은 더욱 심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특급 관리로의 승진은 어떤 의미에서는 로또 당첨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역사책에는 '어렸을 때 가난했다'는 인물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데, 나중에 고위 관료가 된 경우도 있지만 사 실 그 내용을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된다. 역사책에 나오는 사례는 어디까지나 성공 스토리로 윤색된 내용이며, 중국 역사책에서는 이런 윤색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특급 관리는 부잣집 자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 므로 그들은 개인적인 이해득실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았고, 정치 적으로 언쟁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관리의 세 계는 이권을 다투는 아수라장이며, 현실 정치에 민의가 얼마나 반 영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백성은 관리들이 가진 엘리트로서의 긍 지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 요컨대 당시에는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불완전한 정보'에 둘러 싸여 있었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판매자가 구매자의 무지를 이용해 조 악한 물건을 질 좋은 상품으로 속여서 판매할 위험성이 있다. 구매자도 이런 점을 미리 경계해서 모든 상품의 품질을 의심하고 무조 건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려고 한다. 그 결과, 질 좋은 상품은 제값 에 팔리지 않고 전반적인 상품의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36 그러면 고대 중국인들이 언제나 그런 의심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 하 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시제와 고 객 관계일 듯하다.
이미 말했듯이 당시 대부분의 상거래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 인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만큼 상품 정보의 비대칭성을 줄일 수 있다. 지금의 일본에서는 일용잡화를 판매하는 가게가 시내 여 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보니 정말 싸고 좋은 물건을 사고 싶다면 시 내를 돌아다니며 가게들을 둘러봐야 하고 어느 가게에서 세일을 하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상점들이 시장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가게가 가장 저렴한지는 의외로 알아내기 쉬우며 가격 경쟁도 예상보다 치열하다.
또 시장에서는 종종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오래된 고객 관계 가 구축되어 있었다. 가령 유방劉邦은 젊었을 때 두 군데의 선술집 을 들락거리며 일 년 내내 외상으로 술을 마셨다. 이런 외상 매입을 세貰라고 부른다. 세는 전세, 월세라고 할 때의 그 세로, 무언가를 빌려 쓰고 내는 대가를 말한다. 이때 판매자는 구매자를 속이지 않 으며 상품 가격도 요동치듯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외상값 을 받지도 못하고 고객도 잃고 만다. 이런 고객 관계 역시 상품 가 격을 안정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참고로 집, 가축, 노예 등의 큰 거래에서는 한 번에 수천 전이 넘는 큰돈이 움직이기 때문에 실랑이를 피하기 위해 중개인인 쾌 가 활약한다. 중개인은 백성들 중에서 선정되는데, 상거래가 공정 하고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며 거래가 성사되면 수수료를 받 는다. 대개는 현지의 유지 중에서 선정된다. 어쨌든 참고로 한나 라 때 물가의 일부를 정리해두었다.(표 7-1) 표를 보면 곡물은 저렴 할 때 20l에 100전 정도, 말 한 마리는 5000전 정도, 소 한 마리는 3000전 정도였다. 노예는 1만 5000전 전후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 화전민은 봄에 삼림을 베어내고 건조시킨 뒤에 불을 놓아 태우고, 그곳에 볍씨를 뿌린다. 이렇게 땅에 불을 지르면 몇 가지 이점 이 있다. 첫째, 초목을 태워서 나오는 재에는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다. 둘째, 토양에 포함되는 염류도 열을 받으면 곡물에 잘 흡수된 다. 셋째, 땅에 불을 지르면 잡초·해충·병원균 등의 미생물을 제거 할 수 있다. 넷째, 흙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흙 속에 잠자고 있던 식물이 싹을 틔운다. 다섯째, 숲에 동물이 너무 많이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전에서는 첫해에는 잡초가 거의 나지 않고 해충도 적고 수확량도 많다. 하지만 3년이 지나면 다시 잡초가 늘 어나기 시작하고 땅속 영양이 부족해지므로 별도의 화전 후보지 두 곳을 선정한다. 원래의 밭은 휴경지, 휴한지로 만들어서 지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지른다. 
불로 인해서 손실되는 양분도 있어서 이를 보충해줘야 하기 때 문에 휴경 기간이 너무 짧으면 좋지 않다. 현대에 화전을 일굴 때 사용하는 도구는 불에 탄 나무를 베는 칼과 씨를 뿌릴 구멍을 내는 막대기 정도로 아주 단순하다. 따라서 고대의 화전민들도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농촌의 평균 수확량은 어땠을까?
이상을 바탕으로 농촌의 평균 수확량을 살펴보자. 빈부 격차는 크지만, 보통 마을 하나에는 약 100호가 있고 1호에 4~5명이 살고 있으며 일할 수 있는 노동 인구는 한 호당 2~3명이다. 결국 호는 대 체로 핵가족을 의미한다. 대개는 1호, 즉 한 집마다 30무畝 정도의 땅을 경작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는 어른 3명이 빠듯하 게 생활할 수 있는 수입이라서 당시에도 그들은 '빈(가난뱅이)'이라고 불렸다.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 찬가지겠지만 고작 그 정도의 수입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무畝'는 원래 100보步, 지금으로는 약 190m2에 해 당하는 토지 면적을 가리키지만, 적어도 한나라 초 이후로는 240보(약 457m2)의 토지 면적을 의미하게 된다. 당시 화전 1무에서 생 산되는 조의 수확량은 대체로 4곡斛, 즉 800에 조금 못 미치는 양이었다. 따라서 30무라면 120곡이 채 안 된다.
전국 시대 법률을 보면 벼·삼씨는 1무당 약 2.6두화(약 5.23l), 조. 보리는 1무당 약 1두(약 28), 기장·팥은 약 0.6두(약 1.2ml), 콩은 약 0.5 두(약 10)의 씨를 뿌리도록 되어 있다.19 1곡은 10두다. 품종 개량을 하지 않는 한 파종하는 양은 변하지 않으므로, 한나라 때도 대체로 비슷했을 것이다. 따라서 30무에 조를 심으려면 씨앗으로 조 3곡 이 필요하다.
- 여기에 더해 만약 수확의 10%를 세금으로 내고, 성인 남성이 1년 에 36곡, 여성이나 자녀가 25곡 정도를 소비했다면 20 수확한 곡물 은 더 이상 남지 않는다. 한 해 동안 종류가 다른 작물을 여러 번 심 고 수확하는 다모작은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곡물 수입은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 여기에 의류비, 관혼상제비, 제사비 등의 지출이 더해진다. 기근이나 전쟁이라도 있던 시기에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쑥, 명아주, 뽕나무 열매, 부들, 부추 같은 식물이나 달팽이라도 구해서 연명하는 수밖에 없지만23 어쨌든 30무를 경작하는 가난한 집에서는 농업 이외의 수입도 필 요할 것이다.
- 그런 부수입 중 하나는 농한기에 관청에서 비상근 관리나 노동 자로 일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최소한 식비와 의류 비만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노역형을 받는 죄수가 독 신일 경우 식비와 의류비를 지급했기 때문에  비상근 관리와 노 동자에게도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봐도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한 제국은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었 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유효 수요를 늘리는 케인스 정책과 같은 역 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여전히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기에 곡물 이외의 수입원을 가진 농민들이 많았다.
- 전국 시대 이전의 귀족 사회에서는 수작을 걸 때 남성이 여성에 게 노래를 부르고 여성이 답가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서 로의 연애 감정을 확인하는 것을 가원垣이라 부른다. 가원을 할 때는 여성들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잘생긴 남자를 찾는다. '미남 을 원했는데 두꺼비가 왔네'라는 여성의 한탄을 담은 재미있는 시 도 있다. 그러나 가원은 시가를 잘 읊을 수 있는 사람이나 주나라 때 귀족들이 하는 방식이며, 서민은 더 직설적으로 수작을 거는 경 우가 많았다.
- 장안의 유흥가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대로가 아니라 대로에서 벗 어난 좁은 골목을 따라 발달했다. 그래서 유흥가를 협사狹斜라고도 부른다. 협사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의미하는 말이다. 유흥가 의 기원은 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국가가 공인한 유흥가를 가리키는 말인 여려閭나 부려婦를 문헌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귀를 기울이면 왁자지껄한 남녀의 말소리도 들리고 예기 들이 움직일 때마다 팔찌와 패옥이 짤랑짤랑 부딪치는 소리도 들 린다.
- 예기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술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성 과 몸을 파는 여성을 아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춘추 시대 말기에는 군대 내부에 위안 시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매 춘 시설의 기원이 아닐까 한다.  또 한나라 때는 병사의 아내가 몰 래 전쟁터로 따라 가기도 했다. 아내라고 말은 하지만 정황상 이들은 호적에 등록된 정식 부인이 아니라 내연 관계에 있는 여성이거 나 매춘부였다. 
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예기는 흔히 비천하다고 하지만 아름다운 예기는 항상 인기가 많았으며 진나라 때의 녹주綠珠처럼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예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녹주는 갑부였던 석 숭이 과거 하노이 부근으로 출장을 갔을 때 그 미모에 대한 명 성을 듣고 사들인 기녀라고 한다. 그렇다면 녹주는 동남아계 미인 일 수도 있다. 또 후한 시대에는 황족인 유강劉이 음악을 잘하는 기녀 송윤閏을 사랑했고, 나중에 황족인 유착劉錯도 그녀에게 빠졌다고 한다. 이런 예기 쟁탈전은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며, 실제로 전한의 애제는 쓸데없이 예기를 둘러싼 다툼이나 일삼는 가신들의 모습을 보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기의 삶이 반드시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개중에는 부 자에게 의탁해 기생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후에 울적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아서 '예전에는 유흥가의 여 자, 이제는 방탕한 사람의 아내'라고 노래하는 슬픈 시가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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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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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애리조나 대학 환경유지센터 소장인 게리 나반Gary Nabhan은 "우리는 우 리 조상이 먹고 마신 결과물이다"라고 했다. 만약 우리 조상이 한 지역에 오래 살았다면 우리가 이 환경의 음식들에 유전적으로 적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동식물 등의 환경이 다른 낯선 장 소로 이주한다면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음식에 노출될 것이고 우리의 몸은 새 로운 음식들에 알레르기나 질병 같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특정 음식이 싫다는 감정을(심지어 고추처럼 고통을 일으키는 것까지도) 문화적 압 력에 의해 극복할 수 있고 나아가 싫었던 음식을 좋아하도록 자신을 움직일 수 도 있다. 결국 맛 감각은 학습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기억한 식재료의 맛이 현재에는 더 이상 같은 감각을 주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의 포도원은 필록세라라는 기생충에 의해 19세기경에 거의 다 파괴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포도는 그 이 전의 포도와 동일한 유전형질을 가진 것이 아니며 맛과 향기 또한 달라졌다.
- 처음으로 경작된 작물은 보리이며, 밀은 잡풀들에서 나왔는데 전 세계에 약 3만여 종이 있다. 엠머, 스펠트, 엔콘 품종의 고대 밀은 여러 겹의 껍질로 싸여 있는데, 특히 겉껍질은 매우 단단해 불에 구워야 제거할 수 있었고 그런 뒤 껍질을 비벼서 벗기는 타작을 거쳐야 비 로소 먹을 수 있는 밀알을 분리해낼 수 있 었다. 타작은 주로 소가 곡식을 밟아서 껍질을 벗기는 방식으로 하였고 그런 다 음 켜에 쳐서 가벼운 왕겨를 날려보내고 남은 알곡들만 모아서 이를 돌절구에 빻 아 가루로 만들었다. 기원전 800년대부 터는 가축의 힘을 빌리면서 타작이 쉬워 졌지만 그 전까지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 로 해야 하는 고된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 었다. 밀가루는 왕겨나 돌가루가 섞여 거친 밀가루에서 왕겨를 제거하기 위해 굽거나 치거나 부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는 밀반죽을 부풀게 만드는 성분인 글루텐을 파괴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밀로 만든 빵은 부풀지 않은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오늘날의 크래커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처럼 납작한 빵 모양은 밀과 물을 반죽하여 뜨거 운 팬에서 구워낸 인도의 차파티chapati (철판에 굽는 납작한 빵)나 기름에 튀겨낸 푸리 poori(유월절에 먹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 오븐에서 구워낸 유대인들의 무교병matzo 같은 것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7000년경에는 밀의 돌연변이 중에서 껍질이 부드러운 품종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연질밀이라고 부 르는 새 품종은 불에 굽지 않아도 껍질을 벗길 수 있었고 그 결과 반죽할 때 글 루텐이 만들어져 빵을 부풀게 하였다. 부풀린 빵은 이집트에서 처음 발명되었 는데 이는 아마도 우연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 꿀을 발효시킨 꿀술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발효된 음료일 것이다. 최 초의 꿀술은 들판에 남겨진 꿀 위에 비가 떨어져 고이고 거기에 이스트가 자라 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와인을 발명하기 전 그리스와 로마에서 꿀 술은 신에게 바치는 귀중한 제물이었고, 꿀은 고대인에게 신비로운 물질이었 다. 그리스인들은 꿀이 꿀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만들어지 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으므로 로마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져 나뭇잎 위에 내 려앉은 '별들의 타액이라고 믿었다. 꿀벌들이 새끼를 먹이기 위해 이꽃 저꽃 을 날아다니며 화분을 모으면 대부분의 화분에서 물이 증발되고 꿀이 남는데, 35~40%의 과당과 30~35%의 전화당 그리고 17~20%의 물과 약간의 효소들을 가진 복합물이 바로 그것이다.
- 인류는 매우 일찍부터 와인을 마셨다. 와인은 신화에 나오듯 디오니소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또 다른 우연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잘 익은 포 도를 으깨어 상온에 놓아두면 자연적으로 발효가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동물 가죽 주머니에 남아 있던 포도가 와인으로 변했을 것이다. 한편 동물 가죽은 단 시간에 와인을 숙성시키거나 옮기는 데는 제격이지만 장기간 보관하기에는 부 적당한 용기였다. 기원전 6000년경에는 진흙으로 만든 도기 호리병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 가느다란 병목과 마개를 가진 도기병은 와인이 공기와 접촉해 산화되어 식초로 변하지 않도록 했다. 고대인의 거주지에서 발굴되는 진흙 술 병들의 바닥에는 타르타르산이 가라앉아 있으며 이 물질은 와인이 증발하고 남 은 찌꺼기로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인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와인을 마셨는지 알 수 있다. 와인이 상류층 음료였다면 맥주는 대중 음료였고 맥주 역시 우연의 결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여자들은 밀이나 보리에 싹이 자 라면 단맛이 생기고 껍질을 까거나 빵을 만들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 이고, 그 뒤로 그들은 의도적으로 싹이 자라도록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러다 가 어느 날 싹을 틔운 곡식에 물이 들어가 발효가 시작되어 얼마 후에는 알코올 음료로 변하는 과정을 눈여겨본 여자들이 인류 최초의 주류제조자가 아닐까?
-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보존해야 죽은 후에 영혼이 그 육체를 찾아올 수 있다고 믿 었다. 먼저 코를 통해서 뇌를 다 빼내고 상체를 절개하여 위와 내장을 제거한 후 텅 빈 공간을 몰약이나 계피 같은 향신료로 채워 다시 꿰맸다. 그런 다음 시신을 나트론Na2CO3-10H20 이라는 미네랄 소금에 70일간 절인 다음 소금을 씻어내고 시 신을 면포로 감쌌다. 즉, 미라를 만든 것이다.
- 미라 만들기는 고위급 사제의 일이었다. 그들은 순결함의 상징이라며 삭발을 했는데 방충제가 없던 시절, 머리의 이를 미라가 된 파라오에게 옮기지 않 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제들은 방부 처리를 하면서 인체의 내장 구 조에 대해 많이 알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의술은 매우 발달하여 사제들이 부러 진 뼈를 맞추고 기원전 2500년경에는 뇌 수술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상처에는 꿀과 곰팡이 핀 빵을 발라 치료했다고 전해지는데,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꿀의 높은 당분이 세포에서 수분을 끌어냈을 것이고 곰팡이 핀 빵은 항생 효과를 냈 을 것이다. 이는 1928년 영국의 플레밍A. Fleming이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하면서 확인한 바 있다.
- 나일 강이 생명을 주는 신이라면 빵은 생명 그 자체였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에 서는 빵과 생명을 가리키는 말이 같다. 초기의 빵은 아주 단순했다. 밀가루와 물을 섞어서 동그랗고 납작한 반죽을 만들어 불가의 뜨거운 바윗돌에 올려놓 아서 구워내면 끝이었다. 나중에는 좀 더 다양하고 독특한 모양의 빵이 만들어 졌다. 음식 역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부푼 빵은 이집트인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한 학설에 따르면 굽고 남은 빵 반죽을 불가에 두었는데 공기 중의 이스트 균이 표면에 묻어 자라면서 부풀었을 것이고, 이 반죽을 구워 보니 맛과 질감이 더 좋아져 그 일부를 남겨 다음 반죽을 만들 때 넣었다는 추측이 있다. 다른 가 설은 이집트인이 빵을 반죽할 때 물 대신 맥주를 넣었는데 그 속에 있던 이스트 균이 자랐다는 이야기다.
- 어쨌든 물과 닿은 밀가루에서는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확장되면서 켜를 만들고 그 켜에 이스트가 내뿜은 이산화탄소가 차면서 놀라운 조직과 질감 을 갖춘 부푼 빵이 만들어진다. 반죽이 확실히 부풀어 오르면 다음의 반죽에 넣 기 위하여 그 일부를 떼어놓는다. 이렇게 해서 사워도우sourdough 빵이 등장했 다. 예전의 반죽을 일부 넣거나 맥주를 붓거나 맥주 발효통의 찌꺼기를 이용하 면 반죽이 부푼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새로운 제빵기술들이 나왔다. 밀폐 공간에 서 가열할 때 빵이 더 잘 부푼다는 것을 알면서 오븐이 발명되었고, 빵의 형태 를 잡기 위해 쓰는 삼각 또는 사각형 틀도 만들어졌다. 직업 제빵사들은 최소한 40여 가지 종류의 빵과 과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파라오의 축제 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 유대인은 식사와 관련해 많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코셔 Kosher 도살법이다. 이것에 따르면 신의 창조물 중 하나인 동물을 도살 할 때는 되도록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한다. 유대인은 동물을 거꾸로 매달아 아 주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경동맥을 끊었다. 이 방법은 사람이나 동물 모두에게 유익했다. 동물은 바로 의식을 잃어 고통이 짧았다. 그리고 몸속의 피가 중력에 의해 모두 빠져나와 사람에게 해롭다고 알려진 흰색 조직들을 모두 분별하여 떼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고 도살된 고기는 불결한 것으로 간 주되었다. 가축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도 마찬가지로 트레이프treyf(부정한 고기)라 며 금기시되었다. 코셔의 과정은 주방에서도 이어졌다. 고기는 물에 담갔다가 소금에 절이고 다시 씻기면서 남은 핏자국을 모두 제거했다. '코셔'나 '트레이 프'라는 단어는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 음식과는 관계없지만 원래의 의미를 살리는 쪽으로 그 뜻이 바뀌었는데, 예를 들어 영어로 코셔는 '정직하다, 고상 하다, 깨끗하다', 트레이프는 '불결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 지중해의 고대 음식들은 빵과 와인 그리고 올리브유 이 세 가지로 집약된다. 이러한 음식들은 일상생활의 주식인 동시에 신성시되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곡식의 여신인 데메떼르,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 그리고 올리브 나무를 아테네인들에게 준 아테네는 특별한 숭배를 받았다. 로마는 카르타고산 밀로 만든 공짜 빵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프랑스까지 이르는 넓은 식민지에 포도나무를 심었으며, 동방에서 난 정향과 계피에 열광하였다.
- 팍스 로마나 시대에 로마는 다른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국 의 내부는 줄곧 분열에 시달렸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치부되어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헌신하고 죽음까지 불사해 제국의 권력을 위협하 는 존재로 여겨졌다. 게다가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상류층에 의해 저질러지는 잔혹과 사치에 반발하는 유일한 종교였으므로 로마인들은 이들을 콜로세움에 서 다른사람이나 맹수와 유혈이 낭자한 검투를 벌이게 함으로써 징벌했다. 5만여 명을 수용할수 있었던 콜로세움에서 사람과 짐승의 혈투가 끝나면 곰 과 같은 동물들은 도살되어 상류층의 저녁거리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80년경에 건축된 콜로세움 colosseum이나 서커스 막시무스cir- cus maximus (가장 큰 원형 경기장) 또는 다른 경기장을 활용해 하층민을 세 가지 방식 으로 다루었다. 첫째는 도시 빈민이 배고픔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무 상으로 빵을 배급한 것이고, 둘째는 그들을 한곳에 모아 고문과 폭력의 구경거 리를 제공함으로써 마음속 분노와 적개심을 발산할 대상을 부여한 것이다. 끝으로 국가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콜로세움의 혈투를 이용했다. 로마의 권력층은 이러한 구경거리를 통해 하층민에게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저 아래 경기장에 서게 된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 로마의 영광이 사라진 뒤, 중세 농촌은 보릿고개와 기아로 허덕이는 농민들로 넘쳐났다. 그러다 보니 배고픈 농민들은 맥각균에 오염된 호밀로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 빵은 종종 환각 증상을 일으켜 '미친 빵'이라고 불렸다. 서구에서 맥각 중독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동안 동방에서는 반짝거리는 녹색 잎과 빨간색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졸음을 쫓아주고 머리를 맑게하는 음료인 커피가 출현하였다. 커피는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과 함께 동서양으로 퍼져 나갔다.
- 중세 온난기와 북유럽의 농업 혁명
950~1300년 사이에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전 지구상의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얼어 있던 북쪽 바다에서도 선박의 항해가 가능해졌고 작물의 생장기간 연장으로 곡식의 수확량도 크게 늘었다. 바이킹은 약탈을 중지하고 탐험을 시 작하여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정착했는데, 그린란드는 사실 아이슬란드보 다 더 추웠다. 하지만 정착민을 유도하기 위해 희망적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린란드로부터 남서로 이동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캐나다에 해당하는 뉴펀들 랜드로 들어갔다. '포도의 땅'이라는 뜻의 바인랜드vineland라고도 불리는 이곳 에서 이주민들은 야생 크랜베리 등의 덩굴식물을 발견하고 경작했다. 지금도 캐나다의 샌트로랜스 강 입구에는 바이킹 거주민의 흔적이 발굴되고 있다.
서기 1000년경에는 식물의 생장기가 더 길어짐에 따라 곡류 생산이 갑자 기 늘어나는 농업혁명이 시작되었다. 한해 농사를 짓고 나서 그 이듬해에는 휴 경을 해야 했던 농지를 세 부분으로 구획하여, 2년 농사짓고 1년 휴경하는 윤작 을 시행하였다. 한편 휴경기에는 농지의 지력을 증대하고 양분을 높이기 위 해 동물의 배설물을 묻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말에 마구를 매어 쟁기를 좀 더 효 과적으로 끄는 방법으로 수확률을 높였다. 하지만 병충해에 따른 피해가 발생 하기도 했다.
- 맥각균에 오염된 '미친 빵'
중세 식품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빵이다. 지난해의 수확을 다 소진했을 늦겨울, 곡식은 자라지만 아직 거둘 수 없는 한여름, 해마다 이렇게 두 차례씩 기아 가 반복되었다. 다급해진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설혹 그 작물 이 질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먹어치웠다. 호밀 은 종종 맥각균麥菌에 오염되었는데, 이 균에 중독되면 헛것을 보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팔다리에 괴저가 생겨 검게 변하거나 마비가 온다. 맥각균은 수확과 건조, 제분 심지어 제빵 과정을 거쳐도 없어지지 않았고, 이 균에 오염된 빵 은 무서운 병을 자주 일으켜 '미친 빵'이라고 불렸다. 11~16세기까지 500년 동 안 맥각 중독이 널리 퍼지자 중세인들은 이를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험한 맥각을 생활에 이용할 때도 있었는데, 아주 적은 양의 맥각을 출 산 촉진제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 유럽인의 생활은 온난화 덕분에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여전히 더 개 선할 게 많았다. 농노들은 영주의 토지에 구속되어 질 나쁜 빵을 먹으며 단조로 운 노동에 매달렸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설교했다. 하지만 이에 반하여 하나님이 좀 더 혁신적인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 하는 새로운 교황들도 나타났다. 한편 로마 제국이 유럽에서 쓰러져갈 때 지중 해동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폭넓게 힘을 얻고 있었다.
- 무슬림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생긴 힘의 공백을 메우며 로마의 영토를 그대로 접수했다. 그들은 유럽에서 스페인을 침략하고 사하라 사막을 포함 하는 북아프리카를 정복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양까지, 아시아에서는 페르시 아의 영토인 이라크와 이란과 서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지금 의 이라크에 있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바그다드는 100만에 이르는 인구 와 상업의 중심지로 새로운 로마로 떠올랐다. 무슬림의 배들은 지중해와 아라 비아 해 그리고 인도양까지 휘젓고 다녔으며 낙타를 모는 카라반들은 실크로 드를 따라 중국에서부터 아프리카의 사막까지 가서 교역을 벌였다.
이슬람교는 무슬림 제국의 건설을 도왔으며 이들의 음식과 문화에 다채로 운 색깔을 입혔다. 무슬림들은 순례 여행을 의무로 믿었고 그 여행길에서 다른 무슬림 상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언어를 쓰며, 단일한 통화 체계를 사용함으로써 세계적인 대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 사회 내부의 신뢰도가 높아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신용 거래를 위해 오늘날의 수표 결제 같은 방식의 지불보증서를 썼다. 수표check의 어원이 무슬림들의 지불보 증서인 새크saqq에서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국의 요리는 송나라 시대에 크게 발달해 이때 이미 중국의 3대 요리가 확립되었다. 페스트가 휩쓴 유럽에서는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먹을 것으로 가득 찬 무릉도원을 꿈꾸었다.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인쇄된 요리책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향신료를 더 싼 값에 구하고자 했던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찾아 대탐험에 나섰다. 한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 아메리카의 고대 제국들은 각각 독자적인 문화와 농업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 당시대부터 시와 음악 등의 예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요리의 발달은 이후 송나라 시대에 두드러져서 특히 960~1279년에 중국의 3대 요리가 확립 되었다. 북부와 양쯔 강 주변의 남부 그리고 사천 지방 요리가 그것이다. 광둥 요리는 그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북경에서 주도한 북부 요리는 조나 수수 같은 곡물과 육류, 유제품이 중심이었다. 밀도 재배되어 밀가루를 이용하여 만두나 튀긴 빵,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북부 요리는 남부 요리에 비해 그 맛이 덜 자극 적인 특징이 있다. 남부 요리는 주로 양쯔 강 유역의 광활한 논에서 나온 쌀, 생 선, 돼지, 채소, 과일이 주식이었다. 사천 요리 역시 쌀이 중심이었으며 차를 많 이 활용했다. 이 시기의 사천요리에는 오늘날과 달리 매운 고추나 땅콩이 들어 가지 않았다. 신세계에서 온 이런 작물들이 아직 중국에 선보이기 전이었기 때 문이다. 그럼에도 전통적으로 사천 요리가 몹시 매운 까닭은 '숨을 못 쉴 만큼 매운 맛을 내는 콩과 비슷한 식물'로 향을 내었기 때문인데, 이 식물은 산초일 것으로 추측된다.
-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 에서 몽골인은 유목민에서 정착민으로, 나아가 도시인으로 순식간에 변모했 다. 그들의 음식 역시 요리로 발전했다. 그전까지 유목민이었던 몽골인들은 초 원에서 가축 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았으며, 주로 양과 염소의 젖으로 만든 우 유, 버터, 치즈 등을 주식으로 삼았다. 그들이 가장 좋아한 음식은 마유를 발효 시킨 쿠미스koumiss라는 술이었는데, 마유에는 소의 유즙과는 달리 비타민 C가 많이 들어 있다. 그들은 마실 것이 없거나 말을 멈추고 쉴 만한 상황이 아니면 말의 목 동맥을 째고 말이 죽지 않을 정도의 피를 빨아 마셨고, 때로는 말고기 도 먹었다. 또 시베리아의 호랑이, 늑대, 곰, 멧돼지를 잡아 채소와 함께 뼈째 삶 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끓인 걸쭉한 수프의 이름은 몽골어로 '음식'과 동의어인 쉴렌shülen이었다.
-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던 몽골의 문화는 13~14세기에 확연히 바뀌었다. 그들의 새로운 요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받아들인 결과로 얻어 졌는데, 수프는 이제 이국적인 허브와 스파이스로 맛을 내었다. 음식 역사학자 인폴 부엘 Paul Buell에 따르면, 이 변화의 중심에는 투르크족이 있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다른 문화권보다 상류층인 투르크족에게 확장한 영토의 관리직을 맡겼는데, 그들은 무슬림 상인들과 접촉했고 아랍과 페르시아의 음식을 알고 있었다. 또 몽골인이 몰랐던 곡류 음식에 익숙했으며 여러 종류의 빵과 국수, 페이스트리를 만들 수 있었고 인도의 탄누르tannur 같 은 이동식 진흙 화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투르크족을 통하여 중동 지역 의 다양한 식재료가 중국에 소개되었는데, 음식 문화사에서 음식명에 식재료 의 이동이 이 시기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 
-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거쳐 통일신라에 이르는 동 안 곡물이 주가 되고 채소를 반찬으로 하는 한국 전통 식생활의 구조와 체 계가 완성되었다. 이후 삼국이 통일되면서 음식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 었는데, 특히 벼농사 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솥을 이용한 밥짓기가 일반화 되면서 쌀밥이 주식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 콩으로 만든 장, 고기나 어패 류로 만든 포, 젓갈, 채소절임 등이 밑반찬이 되는 상차림이 일상식의 기 본으로 정착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삼국 시대부터 술, 장, 채소절임과 같은 발효 음식이 발달하였다. 고려시대에 불교를 숭상하면서 각종 채소 음식이 늘어나 단 순한 장아찌류의 발효식품이 오늘날 우리가 김치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 로 발전하여 한국 김치의 전통을 확립했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유입된 차 재배가 활발해지면서 차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으며, 양주법도 크게 발 전해 소주가 등장했다. 쌈을 싸먹는 문화를 즐겼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 이다.
- 소빙하기
중세의 온난기 이후 1300년경부터 소빙하기가 이어졌다. 온도 변화가 그리 크지는 않아서 오늘날에 비하면 1~1.5°C 낮은 정도지만 이런 저온 현상이 농업 이나 해운업에 미친 영향은 심각했다. 빙하가 계곡으로 굴러떨어져 농장을 망 치고 표토가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경작지가 사라졌다. 식물의 생장기가 짧아지자 식품 생산량도 크게 감소했으며, 밀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고 제대로 건조되지 않아 썩어들어 갔다. 포도는 곰팡이로 뒤덮여 아예 와인을 빚을 수 없 거나 빚더라도 신맛이 강했다. 영국에서는 포도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정도 로 온도가 내려가 와인 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그러자 북유럽인들은 맥주, 위스키, 보드카 등과 같은 곡물 양조주로 눈을 돌렸다. 빙하 때문에 위험 해진 바다에서는 선박이 줄어들었고 인근 해역에서의 항해조차 어려워졌다. 그에 따라 수백 년 전에 덴마크의 식민지가 된 그린란드가 고립되었다. 그린란 드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원주민인 이누이트로부터 혹독한 추위 속에서 식량을 구하고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유럽인은 이누이트가 기독교를 믿지 않 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비문명인으로 여긴 나머지, 그들과 융화되기를 거부했 다. 그 결과 문화적 편견을 극복할 수 없었던 유럽인들은 굶어 죽었고 식민지는 사라졌다.
유럽에서는 굶주린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거리를 떠돌며 음식을 구걸하거나 훔쳤다. 수천구의 시신이 길거리에서 썩어가거나 공동묘지에 묻 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기도 했다. 용케 살아남았다 해도 빈혈 같은 결핍 성 질환에 시달렸고, 단백질 부족으로 몸이 부어오르고 기력이 쇠약해져서 농 사를 짓거나 요리를 할 수도 없었다. 동물들 역시 영양실조로 고통받았다. 사람 이든 동물이든 영양실조가 대물림되어 그 자식들 또한 병약하게 태어났고 기 생충 감염이나 설사는 물론, 치명적인 질병에도 쉽게 걸렸다.
- 페스트로 인한 심각한 인구 감소는 유럽인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빵을 비롯한 모든 상품의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물가 역시 따라서 올랐다. 키프로스나 시칠리아 같은 설탕 생산지에서는 인구가 심각하게 줄어들어 설탕 생산도 감소했다. 유럽의 일 부 지역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났는데, 땅을 소유했던 귀족들이 죽자 불법 거주자 들이 들어와서로 권리를 주장하며 싸웠고, 농노들은 도시로 달아나 십자군의 뒤 를 따랐다. 페스트는 교회의 권위마저 약화시켰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페스트가 왜 창궐하는지 설명하지도, 그것을 막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상업 활동을 금지한 교회를 무시하고 어디서나 장사를 벌이기 시작했 는데, 부자들이 생겨났고 특히 이탈리아에서 큰 부자가 많이 나왔다.
- 15세기 초 유럽의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가 향신료를 찾기 위한 새로운 항로 발견의 선두에 나섰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 엔리케 Henrique O Navegador는 이 를 위해 항해 학교를 세웠다. 4500년 전 세 가지 중요한 기술, 즉 바퀴, 쟁기, 돛 의 발명이 수메르인의 교역을 도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새로운 세 가지 기술의 발견이 유럽인의 항해를 도왔다. 중국인이 발명한 자석 나침반은 광활한 바다 에서 방향을 잡도록 도왔고, 아랍의 발명품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는 별의 위 치를 이용한 측량을 가능하게 했으며, 새로 등장한 삼각 돛 덕분에 배는 순행 뿐 아니라 역행도 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의 동해안까지 다다른 최초의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이 었다.
- 중국인 역시 오랜 세월을 통해 완성된 실크로드의 대안으로써 더 짧은 노선, 즉 해상로를 찾고 있었다. 1405~1433년에 명나라는 정화和중국 명나라의 환 관겸 전략가)로 하여금 일곱 차례나 원정에 나서게 함으로써 남태평양을 포함하여 페르시아 만과 아프리카까지 탐험하였다. 122m 길이의 돛대 아홉 개와 붉은 비 단 돛을 휘날리는 3백 척의 배로 이루어진 중국 함대는 분명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메리카까지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중간에 멈췄다. 정치권력의 이양이 대함대를 되돌아가게 한 것이다. 당시 중국을 지배 하고 있던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나라가 외국과의 교역에 참여함으로써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두 개 이상의 돛대를 단 선박의 건조를 불법으로 간주했고, 결국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상인에게는 무거운 세금 을 부과하고 농민에게는 면제를 해주어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장려했다.
유럽의 가톨릭교회가 상업에 대한 제한을 풀 때 중국은 반대로 엄격하게 통제했다. 단기적으로는 자국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서였지만, 장기적으로 는 나라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자 중국의 상인 계층 중 많은 이들이 본토를 떠나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부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중국은 이후 4백 년 동안 서양과의 교역을 경시하고 세계로부터 스스로 문을 닫았다. 그러는 동안 서양은 중국을 완전히 압도할 기술의 진보를 이루어냈고 마침내 중국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과거 중국인의 발명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총이었다.
- 고추는 영양가가 높고 비타민 A와 C, 리보플라빈이 풍부하며, 특효 성분인 캡사이신은 입 안의 통증기관을 자극한다. 신기하게도 고추의 화학적 구성은 또 다른 신세계 식물인 바닐라와 비슷하다. 식물 속의 매운 성분은 도대체 왜 생기 는 것일까? 고추의 매운맛은 씨를 퍼뜨리는 데 불리한 조건, 즉 동물에게 먹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생존 수단일 것이다. 고추 씨는 토끼 같은 작은 포유류에게 먹히면 왕성한 소화력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반면 새의 소화기관은 칠리 씨의 바깥쪽 보호막만 제거하기 때문에 개체가 퍼지는 데 완벽한 조건이 된다.

-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서는 수많은 식재료들이 오고갔다. '콜럼버스 교환'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교류는 양 대륙의 음식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카리브해에서는 설탕 농장이 세워졌고 삼각무역을 통해 수많은 흑인노예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 '콜럼버스의 교환'이란 동반구의 구세계와 서반구의 신세계가 충돌하면서 서 로의 음식, 동식물, 질병 등이 이동한 역사적 현상을 가리킨다. 역사학자들이 '접촉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자연스럽게 진화해온 생물들을 수백만 년 동안 지구 이곳저곳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겨우 5백여 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교환이 장기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언급하기는 너무 이르다.
- 16세기에 콜럼버스를 따라 신세계에 온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문화까지 점령했고 곧 자신들의 문화, 특히 음식을 새로운 스페인에 이식하기 시작 했다. 콜럼버스는 그 이듬해인 1493년 소, 말, 돼지, 염소, 양 같은 구세계의 가 축을 아메리카로 들여왔다. 양을 제외한 다른 가축들은 모두 황무지를 좋아하 여 선사시대의 상태로 돌아갔다. 돼지는 야생 멧돼지가 되었고, 양떼를 지키던 개는 자기 조상인 늑대처럼 변해 양을 잡아먹었으며, 말은 훌륭한 목초지를 따라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고 그 너머의 북아메리카 평원 야노스를 달렸다.
- 역사학자 알프레드 크로스비 Alfred Crosby가 강조했듯, 1600년에는 대부분의 구세계 주요 작물들이 아메리카에서 재배되었다. 식물성 식품들은 원주민 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새로 유입된 동물과 그것으로 만든 식품들 은 그들의 토착 음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이에 따라 자연 풍광이 변하고 나아 가 생태계의 재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축은 경이로운 속도로 번식해 돼지 13 마리가 3년 안에 700마리로 불어날 정도였다. 원주민이 식용 작물을 재배하던 땅에 소를 방목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직접 동물을 사육하는 경우도 있었다.
구세계에서 서반구로 유입된 동식물 중 일부는 밀항을 통해 들여왔고 잡 초 씨는 밀이나 거름 또는 동물 사료에 섞여 들어왔으며 구세계의 민들레와 데 이지도 같은 방법으로 옮겨왔다. 페스트와 발진티푸스를 옮겨온 검은쥐도 마찬가지였다. 버뮤다에서는 쥐가 유발한 기근이 일어났는데, 천적이 없는 쥐는 땅속을 파고 들어가 나무에 집을 짓고 닥치는 대로 식량을 먹어치워서 주민들 을 기아로 몰아넣었다. 감기, 디프테리아, 말라리아, 홍역, 천연두, 발진티푸스, 백일해 같은 질병 역시 대서양을 건너왔다.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 들어온 지 10년 후 토착 인구는 거의 1,000만 명 정도가 줄었다. 100년 후에는 원주민 의 90%가 사망했으며, 2,500만 명이던 인구가 100만 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유럽의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제러드 다이아몬 드Jared Diamond는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접촉의 시대'에 일어난 문제의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왜 신세계의 사람들은 면역력을 갖고 있지 않 았는가? 왜 그들에게는 유럽인을 거꾸로 전염시킬 자신들의 질병이 없었는가? 이에 대해 다이아몬드는 몇몇 가설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는 신세계 사람들에 겐 유럽인이 기르던 가축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가축의 몸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기생충이 신세계로 건너가 원주민들을 괴롭힌 것이다. 비슷한 예로, 로마를 전멸시킨 천연두는 소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다른 가설은 원주민들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면 인체 간 접촉에 의 해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고 그러면서 면역력도 강해진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 '접촉의 시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 유럽의 이주민들은 이미 소비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구세계의 식품을 신세계 에서 더 값싼 비용으로 대량 생산하는 데 관심이 많았는데, 한 가지 식품이 이 런 목적에 딱 들어맞았다. 이 식품은 세계 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했고, 대서 양 양안 모두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했으며, 수백만의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었 다.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냈으며, 호모 사피엔스의 식습관을 완전히 바 꾸어놓았다. 그것은 바로 사카룸 오피시나룸Saccharum officinarum이라는 학명을 지닌 설탕이었다.
설탕은 초콜릿과 커피, 차가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그 수요가 증가했다. 그 후 설탕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초콜릿, 커피, 차의 수요가 증가했는데, 이는 설탕의 수요를 더욱 늘렸다. 설탕이 점점 더 구하기 쉬운 식 품이 되자 가격이 떨어졌고, 자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에는 부유층의 약품이던 것이 18세기 중엽에는 가난한 사람들까지 일상적 으로 즐기는 식품이 되었다. 하지만 사탕수수를 기르고 수확하고 가공하는 일 은 극도로 고된 노동을 필요로 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이 그 고통을 떠 안았다.

- 메디치가의 카테리나가 프랑스에 온 지 100년 후 프랑스 요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라 바렌느의 등장은 중세요리에서 벗어나 섬세한 오트 퀴진의 시작을 알렸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이어졌고, 커피하우스는 정치적인 토론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근대화를 꿈꾸던 표트르 대제는 새로운 러시아 요리를 만들어냈다.
- 메디치가의 카테리나가 프랑스에 온 지 100년 후 프랑스 요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651년에 라 바렌느La Varenne라는 요리사가 『프랑스 요리 Le Cuisinier françois』라는 책을 출간함으로써 중세 요리의 종말과 오트 퀴진 haute cuisine의 시 작을 알렸다. 그의 이름을 따서 요리 학교를 세운 앤 윌란Anne Willan은 이 책을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이 책이 등장한 지 2년 후에 라 바렌느는 『프랑스 제과 Le Patissier françois』를 펴냈다.
『프랑스 요리는 육류용과 생선용의 두 가지 부용 bouillon (육류나 생선을 재료로 진 하게 끓인 국물)을 끓이는 방법으로 시작한다. 또 현대 소스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 는 최초의 루roux인 기름과 밀가루 농축제가 등장한다. 라 바렌느의 조리법의 특징은 섬세함이다. 일단 중세에 비해 향신료의 사용량이 크게 줄었고, 소금과 후추를 양념으로 사용하며 여기에 레몬즙을 짜 넣고 부케 가르니 bouquet garni를 곁들였으며, 엄청난 양의 계피, 메이스mace, 정향, 생강은 사라졌다. 특히 이 책 에는 육식하는 날과 육식하지 않는 날이 구별되어 있어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영향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요리에 송로버섯을 사용하여 중세의 체액 설이 사라졌음을 말해주었다.
- 커피를 사랑한 프랑스인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프로코페 Procope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1689년 파리에 열었다. 커피를 받아들인 거의 모든 곳에서는 두 가지 공통된 반응이 일어났 다. 첫째는 커피를 맛본 사람들의 열광이었고, 둘째는 정부의 억압이었다. 메카 에서는 커피하우스에서 단골손님들이 모여 자신을 조롱한다는 말을 들은 통치 자가 커피하우스의 문을 닫을 것을 명했으며 영국의 조지 2세도 같은 이유로 커피하우스를 폐쇄했다. 프랑스에서는 커피가 국가적인 음료였던 와인의 자리 를 뺐을까 염려하여 커피를 금지하려고 했고, 독일은 맥주 때문에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계속 커피를 마셨고 결국 금지령은 흐지부지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외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자유로웠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교황에게 이 무슬림의 음료를 금하라고 청원했음에도 커피는 금지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교황은 커피를 맛보더니 그것에 축복을 내렸다.
커피를 마시는 방법 역시 변했다. 9세기 이후부터 커피 빈을 갈아 가루로 만들어 이용했는데 그 전까지는 커피 빈을 동물기름과 함께 갈아 페이스트 형 태로 만들어 사용했었다. 커피를 갈아 만든 가루는 컵 밑바닥에 찌꺼기로 가라 앉아 마치 읽을 수 있는 형상처럼 보였는데, 이 때문에 점쟁이가 증가하기도 하였 다. 1710년, 치밀하고 효율적인 프랑스인들은 가루 커피를 천 자루에 넣고 그 위 에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을 발명하였다. 또 프랑스인들은 우유 를 첨가해 카페오레를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커피는 공공장소에서 마시는 상류 층의 저녁 음료에서 사적인 공간에서 아침에 즐기는 고급스런 중독제로 탈바꿈 했다. 이렇게 카페라테는 일반인에게로 퍼졌으며, 노동자층의 기호품이 되었다.
- 커피는 식습관 이상의 것을 변화시켰고, 나아가 사회적·정치적 관습까지 바꾸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알코올 없는 공공장소와 모임의 의미를 알게 되 었다. 사교적인 취미로 시작한 커피가 이후에는 정치 토론의 수단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정부에 대해 격론을 벌이는 풍조를 지배층이 걱 정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커피하우스에 서 퍼진 여론이 프랑스혁명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커피가 세계로 전파되는 데에는 한 프랑스 남자의 공이 컸다. 1723년 가브 리엘 마티유 드클리외 Gabriel Mathieu de Clieu는 커피가 카리브해에서 잘 자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커피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대서양을 건너는 내내 마치 아픈 아기를 달래듯 자기가 마시는 물까지 부어주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커 피나무는 카리브해에 잘 맞았고, 오늘날 세계에서 자라고 있는 수많은 커피나 무의 역사가 바로 이 묘목에서 비롯됐다.
- 메이플 시럽(단풍당)은 미국 원주민 요리에서 제일의 음식이었고 몇몇 부족에서 는 유일한 양념이었다. 메이플 시럽은 말린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의 맛을 돋우 기 위해 원주민이 꺼리는 소금 대신 사용되었다. 곰의 기름과 섞어 구운 사슴 고기의 소스에 넣거나, 끓인 생선에 뿌리거나, 베리와 곁들이거나, 그냥 그대로 먹거나 해서 하루에 450g을 섭취했다. 또 이 시럽으로 달콤한 음료를 만들기도 했는데, 부족끼리 화친을 맺을 때 피우는 담배와 함께 의식에 사용되었다.
메이플 시럽은 단풍나무, 호두나무, 히코리, 네군도단풍, 버터너트, 자작나 무, 플라타너스의 수액을 끓여 설탕 결정을 얻었다. 주로 여자들이 이 일을 했 는데 유럽인이 오기 전까지는 금속 냄비가 없었기 때문에 아주 힘든 일이었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그릇은 부피가 3~5L에 불과했고 자작나무 껍질이나 호 리병박으로 만든 탓에 불 위에 직접 놓을 수도 없었다. 이런 용기에 액체를 끓 이기 위해서는 불에 데운 돌을 던져넣을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식은 돌을 꺼 내고 다시 데운 돌을 넣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런 다음 무스 가죽으로 만든 370L짜리 통에 부어졌다. 유럽인이 금속 냄비와 도구를 들여오자마자 원주민 이 물물교환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시럽을 가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밤에 얼도록 밖에 두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위쪽의 얼음을 긁어냈다. 그렇게 해서 시럽만 남을 때까지는 며칠 밤이 걸렸 다. 완성된 메이플 시럽은 선물용으로 거푸집에 부어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곰 발바닥, 꽃, 별, 작은 들짐승 등 다양한 모양을 본 어느 유럽인은 마치 유럽의 어 느 박람회에서 제과사들이 만드는 생강빵 같다고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17세기 유럽의 저자들은 미국 원주민이 메이플 시럽과 설탕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자 자기들이 원주민을 가르쳤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풍나무를 연구한 헬렌 니 어링 Helen Nearing과 스콧 니어링 Scott Nearing이 지적한 것처럼 메이플 시럽과 관 련된 언어는 원주민들의 생활 전통에 더 가깝다. 메이플 시럽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는 '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이 빨리 흐른다', '우리들의 나무' 등으로 번역된다. 한편 이들은 흰설탕을 '프랑스의 눈'이라고 불러 그 기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어쨌든 원주민 부족의 도움으로 순례자들은 초창기 몇 년을 생존할 수 있었고 이를 자축하기 위해 축제를 열었다.
- 음식 역사학자인 존 헐 브라운John Hull Brown이 『초창기 미국 음료 Early American Beverages』에서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물론 어 린이도 알코올음료를 마셨다. 영국에서부터 친숙한 맥주는 식민지에서 가장 초기의 음료였다. 주로 여자들이 맥주 양조를 맡았고, 땅에서 자라는 것은 뭐든 지 이용했다. 옥수수, 토마토, 감자, 순무, 호박, 돼지감자를 이용해 만드는 식물 성 맥주를 비롯해,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사프라스sassafras 나무의 껍질과 메이플 시럽으로는 나무 맥주를 만들었다. 감, 레몬, 건포도로는 과일 맥주도 만들었다. 윈터그린 winter green으로 허브 맥주를, 생강과 올스파이스 그리고 계 피로는 향신료 맥주를 만들었다. 심지어 꽃으로 만든 장미 맥주와 당밀 맥주도 있다. 그들은 맥아 245kg, 홉 5.4kg, 이스트 4.7L, 물 272L를 가지고 한 번에 두 통의 에일ale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처럼 일단 맥주를 만들면 남겨 두었다가 빵을 부풀리는 데 썼고, 맥주 찌꺼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독일 인이 새로운 주정 기술을 전해주기 전까지 맥주는 그 맛이 썼다.
또 살구, 복숭아와 체리 씨, 코리앤더, 카르다몸, 아니스 씨 같은 중동에서 온 향신료를 이용해 증류주를 제조했다. 생강, 까치밥나무 열매, 체리로는 와인 을 만들었는데, 스위트 와인은 마데이라, 아조레스, 카나리 군도 같은 '와인 섬' 에서 수입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이 옥수수나 보리 또는 오트밀 로 위스키를 주조했다. 식민지 시대 미국인은 사과를 증류해 만든 강한사이다, 복숭아로 만든 피치 peachy와 배로 만든 페리 perry를 마셨다. 식민지 개척자들 은 알코올음료에 크림, 설탕, 계란, 메이스와 육두구 등을 넣어 만든 에그노그 eggnog를 즐겨 마셨다.

- 1789년 10월 6일, 빵을 구하지 못한 성난 여자들이 베르사유로 향했다. 프랑스혁명은 사람들의 먹는 것, 먹는 곳, 먹는 법 모두를 변화시켰다. 현대적인 레스토랑이 등장했고, 미식가라는 말이 생겨났다. 최초의 미식가라는 평가를 받은 브리야 사바랭에 이어 전설적인 요리사 카렘이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보스턴 차 사건이 미국독립의 불을 당겼다.
- 18세기는 계몽운동, 즉 합리주의의 시대이다. 중세가 미신이 팽배하고 무지한 '암흑의 시대' 였다면, 18세기는 과학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시대였다. 또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17세기 과학혁명의 산물이 생활에 이용되었다. 계몽운동은 음식 문화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새로운 음식을 누벨퀴진 nouvelle cuisine이라 한다. 피에로 캄포레시Piero Camporesi가 『이국적인 음료Exotic Brew』에서 지적했듯이, 계몽운동은 중세 음식 문화에서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부담스러운 육류 요리가 고급 식탁에서 사라지면서 쇠고기 소비도 크게 감소했다. 중세의 마지막 유물이라 할 수 있는 공작 요리도 마침내 없어졌고, 비둘기, 메추리, 개똥지빠귀 같은 야생 조류로 만든 요리가 등장했다. 생굴이나 송로버섯처럼 최음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음식이 유행했고, 마늘이나 양 파, 양배추, 치즈처럼 성욕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던 재료들이 고급 요리에 사 용되었다. 식사 전 감사 기도와 손을 닦는 의식도 사라졌다. 체이핑 디시chafing dish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은 상자 위에 접시를 올려놓아 음식의 온도를 유지하는 접시 세트)가 사용되면 서 시중드는 하인이 내내 방에 머물 필요도 없어졌다. 대신 사악한 음식, 즉식 욕이 전혀 없을 때에도 먹고야 말게 하는 그런 먹을거리들이 넘쳐났다. 매혹적 인 와인 덕에 졸음이 오다가도 마지막에 커피가 제공되어 다시 정신을 차리게 했고, 그렇게 밤은 계속되었다.

-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퍼진 감자기근은 감자만을 주식으로 하여 살아온 약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살아남은 아일랜드인들은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한편 통일된 이탈리아에서는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나 마르게리타 피자와 같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요리가 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에스코피에 같은 유명 요리사가 프랑스 요리를 더욱 발전시켰다.
- 역사학자인 앤더슨E. N. Anderson은 『중국의 음식The Food of China』에서 “광둥 식 요리는 중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요리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전역에서 조달한 가장 신선한 재료, 초를 다투는 타 이밍, 다양한 기법, 수백 가지에 이르는 훌륭한 요리들, 다른 문화로부터 새로 운 음식과 기법을 빠르게 흡수하는 능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혁신적인 음 식 문화를 가능케 했다. 새콤달콤한 돼지고기, 찹 수웨이chop suey, 차우멘 chow mein, 기름진 에그롤, 볶음밥 등 1950~1960년대 미국에서 유명해진 음식들은 사실 광둥식 요리가 아니다. 이것들은 미국인의 입맛에 맞게 단맛을 가미하고 대중화한 요리에 불과하다. 광둥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디저트를 거의 먹 지 않고, 음식에도 설탕을 많이 쓰지 않는다. 진짜 광둥식 요리에는 칠리 소스, 매운맛 겨자, 식초, 참기름, 간장과 굴 소스 등이 아주 적게 들어간다. 대신에 굴, 해삼, 오징어, 해파리, 민어 등 지역 특산물인 생선과 해산물을 찌거나 기름 에 볶거나 튀겨서 먹는다. 옥수수 전분이나 캔에 든 파인애플 주스, 화학조미료 에 찌든 음식이 아닌 것이다. 광둥인들은 이런 조리법과 그렇게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야만인처럼 여겼다.
- 광둥 요리의 섬세함은 '작은 먹을거리'라는 뜻의 딤섬 dim sum에 잘 나타난다. 딤섬은 한입 크 기의 덤블링으로, 반죽 속에 양념을 한 고기나 해 산물 재료를 채우고 찐 요리이다. 연꽃잎이나 대 나무 잎으로 싸서 찌기도 하는데, 멕시코의 옥수 수 껍질로 타말레 tamales를 싼 요리나 그밖에 문 화권에서의 바나나 잎을 사용한 것도 비슷한 요 리이다.
- 우리나라 식생활문화의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치며 한층 정비되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고추, 호박, 감자, 고구마 등의 남방식품이 유입되고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음식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고추는 전래된 직후 크게 보급되지는 않았으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김치에 사용되면서 점차 우리의 식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 온돌의 보급으로 일상의 상차림이 좌식으로 정착되었으며, 분청사기, 청화백자, 옹기, 유기 등의 식기가 보편화되면서 상차림의 격조와 편이성이 한층 신장되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은 음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불교의 상 징인 차문화가 쇠퇴하고 육식복원에 따른 견육식문화가 다시 생겨 나기도 하였다. 또 의약연구가 발달하면서 약식동원藥同源을 근간으로 한 식사관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가부장권 대가족 생활을 바탕으 로 각종 의례음식의 규범이 마련되었다.
조선 말 개화기에는 점차 외국의 식생활문화가 전래되었으며,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워진 손탁Sontag Hotel에서 양식과 커피를 팔기 시작하면서 상 류사회를 중심으로 서양요리가 보급되었다. 또 1890년 고종의 수랏간 내 인으로 일했던 안순환이 세종로에 명월관이라는 한국음식 전문요정을 개점하면서 일반인들도 궁중요리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 식이장애: 거식증과 폭식증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미국에서의 식욕은 성욕과 함께 금기의 대상이었다. 커피, 차, 초콜릿, 겨자, 식초, 피클, 향신료, 견과류, 건포도, 빵, 패스트리, 캔디, 알 코올 등은 여성에게 건강하지 않은 식욕을 일으키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또 육 류는 정신병이나 색정증 또는 둘 모두를 일으키는 가장 나쁜 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육류와 감자를 먹는 여성을 마치 짐승처럼 보았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 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음식을 먹었다. 여성과 함께 남성의 성적 충동도 사회적으로 통제를 받았는데, 남성들의 불건전한 생각을 자극하지 않도록 피 아노 다리까지도 가렸다. 여성은 무릎까지 버튼이 달린 신발을 신고, 그 위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와 페티코트를 입고, 심지어 불투명한 스타킹까지 신 었기 때문에 각선미를 과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성적 회피 경향은 음 식과 관련된 단어에도 반영되었다. 고상한 사람들은 '가슴'이나 '다리' 같은 단 어를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서 흰 살코기', '붉은 살코기' 같은 말로 돌려 표현했다.
여성의 식욕과 성욕을 억제하는 세상에 새로운 매너와 음식이 등장했고 미국 중상류층의 10대 소녀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질병이 나타났다. 음식과 부 가 풍족한 시대임에도 소녀들은 건강을 해치거나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될 때까지도 도통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을 한 영국 의사가 1868년에 처음으로 거식증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거식증은 1960년대가 되자 급격히 증가했다.
식이장애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거식증은 식욕 거부를 포함한다. 폭식 증은 폭식을 한 후 억지로 설사를 유도하거나, 관장을 하거나, 구토에 의해 먹 은 것을 다시 몸 밖으로 배출하는데, 처음에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강제로 토해내야 하지만 나중에는 뜻대로 구토를 유도할 수도 있다. 두 형태의 식이장 애에서 모두, 체중이 정상 최저치보다 15% 이상 감소하며, 월경이 3회 이상 중 단되고, 외모에 집착하는 증세를 보인다. 지나친 체중 미달임에도 소녀들은 거 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 건강과 자족을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이다. 1845년 7월 4일부터 1847년 9월 6일 까지 그는 인간에게 육식과 문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 에 나섰다.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월든 호수 근처의 숲 속에서 평화롭게 살았고, 인간의 삶과 산업혁명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글로 썼으며, 자기가 먹은 음식과 요리법, 그 비용 등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겼다. 소로우는 대부분의 미국인과는 다르게 채식주의를 신봉했다.
소로우는 자신이 구입하고 고르고 재배한 식품만 먹고 살았다. 그는 쌀, 엿 당, 호밀, 옥수수, 밀가루, 약간의 염장 돈육, 돼지기름, 설탕 등을 샀다. 그리고 포도, 야생 사과, 밤, 땅콩 등 제철 야생 과일과 견과류로 보충했다. 그는 콩과 감자, 완두콩 등을 재배했고 먹고 남는 것은 내다 팔았다. 소로우의 주당 식품 구입비는 27센트에 불과했다. 그는 육식과 문명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 했다.

- 20세기 초 유럽, 에스코피에와 리츠의 만남으로 레스토랑과 호텔업에서 큰 변화가 일 무렵 미국에서는 유럽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에 의해 다인종 · 다문화의 장이 열리면서 이들의 식문화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전 세계 식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때로는 식량이 무기를 대신해 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식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듯 식문화에서도 모든 옛것이 다시 새것이 된다. 오늘날 요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식문화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이에 공감을 느낀다. 즉, 우리 모두는 음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그 소중한 음식을 함께 나누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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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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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역사 2023. 12. 7. 11:42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아홉살에 자치통감을 외우고, 열네살에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서 신동이라 불렸다. 열아홉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905년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하고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하여 다시 상경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중국에 머무는 동안 여러 역사서를 집필하였다. 1925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표되어 치안유지법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10년형을 받고 뤼순감옥 복역중 1936년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조선상고사는 1930년 조선사연구초 발간에 이어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그 내용이 불완전하여 연재를 중지하고 수정하여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건강악화로 실현되지 못했다. 연재는 계속되어 신채호 사후인 1948년에 총 12편의 단행본으로 종로서원에서 출간되었다. 총론은 앞서 1924년에 완성되었다. 

총론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고증하는 방법, 역사를 개인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사회상을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 우왕의 혈통이 왕씨인지 신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요동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가능했는지 불가능했는지, 또 그 일의 결과가 이로웠을지 해로웠을지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뒤에 그것을 추진한 우왕과 반대한 이성계의 시비를 밝히는 것이 순서다. 마찬가지로 궁예의 혈통이 궁씨인지 김씨인지를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기존의 불교를 개혁하고 새로운 불교를 세우려 한 것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또 왕건이 아니었다면 궁예의 계획이 성공했을지, 만양 성공했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런 뒤에 불교개혁을 시도한 궁예와 그것을 반대한 왕건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 타당하다.

신채호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사회가 안정적일 때는 개인이 능력을 발휘하기 곤란하다. 사회가 불안정적일 때는 개인이 능력을 발휘하기가 쉽다. 결국 난세에 영웅이 나올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한다. 신채호는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 두각을 보이기 쉽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치원처럼 작은 칼로 세공이나 하는 하급 재주꾼도, 외국인을 모방해서 말하고 웃고 노래하고 곡하면 힘 들이지 않고도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인격적 자주성 없이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는 이런 이들은 민족적 특성을 매몰시키고 혼란만 조장하는 몹쓸 물건들이다. 사회를 지키려면 이런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신채호는 조선사다운 조선사를 쓰기 위해 조선상고사를 지었다. 조선사다운 조선사란 인간, 시간, 공간이라는 역사의 3대 요소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구현된 조선사를 말한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를 비판하며,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라 잃은 혼란스러움과 가난한 환경에서 이 정도의 저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충분한 시간과 자료, 그리고 답사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더욱 크게 이바지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한국사 #고대사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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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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