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사실 '땅 투자의 장인이다. 미국은 1867년 알래스카를 러 시아로부터 단돈 720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국무장관 윌리엄 수 어드가 이 땅을 사들이자 일각에서는 '수어드의 바보 짓folly' 이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알래스카에 묻혀 있는 원유와 천연자원을 고려하면 바보짓이 아닌 여우처럼 영악한 행위로 성공적인 투자였다.
서두에 알래스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제 좀 더 세부적으로 깊게 들어가 미국의 여러 주들과 유럽 국가들의 경제 규모를 비교해 보기 위함이다. 현재의 변화를 보려면 다른 주들의 역사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알래스카의 GDP는 636억 달러다. 단순 비 교하면 유럽의 슬로베니아 (622억 달러), 라트비아(422억 달러), 에스 토니아 (381억 달러)보다 크다. 크로아티아(710억 달러)나 리투아니아 (705억 달러)와 비교해 크게 모자라지 않는 수준의 경제 규모를 자 랑하고 있다.
미국은 1803년 프랑스가 식민지를 건설해 소유하고 있던 루이지 애나를 구입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가격 은 1500만 달러. 미국 재무부는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 영국과 네덜란드의 투자자들에게 팔았는데, 나중에 원금에 이자까지 모두 갚는 데 쓴 돈이 2331만 달러 정도다.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이는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다. 그는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항구를 손에 넣고 싶은 욕심에 프랑 스에 접근했다. 제퍼슨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주프랑스 공 사를 지내 프랑스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당시에 미국이 사들인 루이지애나는 현재의 루이지애나주에 국 한되지 않는다. 지금 기준으로 15개 주의 영토 전부 혹은 일부를 아 우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아칸소, 아이오와, 미주리, 네브래스카, 캔 자스, 오클라호마, 미네소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몬타나 등 의 전체 또는 일부가 프랑스가 판 루이지애나의 일부였다.
- 나폴레옹이 미국에 있는 거대한 식민지를 팔아버린 건 아메리카 식민지로 분산된 힘을 모아 유럽의 맹주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팔아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영국을 견제하는 것이 프랑 스의 우선순위였던 것이다.
루이지애나를 팔아버린 나폴레옹이 얼마나 배가 아플지 따져보 자. 프랑스가 미국 정부에 팔아버린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구성했던 15개 주의 2022년 GDP를 더하면 5조 2412억 달러인데 프랑스 GDP (2조 7840억 달러)의 거의 두 배 정도다.

- 독일이 프랑스보다 앞서 달리게 된 이유로는 우선 게르하 르트 슈뢰더 총리 재임 시절 노동 개혁에 성공한 효과를 누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총리로 재직한 슈뢰더는 노동단체를 핵심 지지층으로 두는 중도좌파 사민당 소속이다. 오랫 동안 근로자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해 온 사민당이 정권을 잡았 지만, 슈뢰더는 배신(?)이라도 하듯 영미식으로 개혁했다.
슈뢰더는 2002년 '하르츠 개혁'이라고 불리는 노동 개혁 방안을 발표해 2년으로 묶여 있던 파견근로의 허용 기간을 폐지했다. 사측 입장에서는 고용 유연성이 높아진 것이다. 또한 고령자 취업 촉진 을 위해 52세 이상은 근로계약을 사측이 자유롭게 제시한 조건으로 맺을 수 있게 했다. 32개월이던 실업급여 지급 기간을 55세 미만은 12개월, 55세 이상은 18개월로 줄였다. 복지 혜택을 누리며 근로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일터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핵심 지지층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국가 경쟁력은 제고됐다. 특 히 하르츠 개혁은 독일 경제의 심장격인 자동차 조립공장이 해외로 나가지 않고 독일 내에 머무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프랑스 에서 자동차 회사들이 동유럽, 남미, 북아프리카 등으로 생산시설 을 대거 이전해버린 것과 달랐다. 자국 내 차량 생산량이 2000년에 는 독일 552만 대, 프랑스 334만 대였다. 하지만 2018년에는 독일 512만대, 프랑스 227만 대로 더블 스코어 이상이 됐다.
하르츠 개혁으로 독일은 '미니잡'이라 불리는 월 소득 400유로(2013년 이후 450유로) 이하의 임시 근로직을 양성화했다. 슈뢰더는 미니잡을 가진 사람에게 사회보장세와 소득세를 면제해 주면서 아 르바이트식이라도 일단 일을 이어갈 수 있게 장려했다. 프랑스에서 는 근로자의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노동계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독일식 미니잡을 만들기가 어렵다.
하르츠 개혁을 시작한 2002년만 하더라도 연간 실업률은 독일 8.6%로 8.3%인 프랑스보다 높았다. 이후 독일은 꾸준히 실업률이 낮아졌지만 프랑스는 높은 실업률을 해소하지 못했다. 2022년 독 일 실업률은 3.1%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를 이뤘다. 반면 프랑스 는 7.3%로 독일보다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높았다.
- 게다가 2005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취임한 독일은 이후 강력 한 재정 통제로 나랏빚을 적절하게 줄인 반면, 프랑스는 계속해서 방만한 재정을 유지했는데 이 역시 두 나라 사이의 경쟁력이 벌어 진 원인의 하나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이던 2007년 GDP 대비 국가채무는 프랑스 64.5%, 독일 64.2%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하 지만 이후 프랑스는 나랏빚을 제어하지 못했고, 독일은 공공 분야 를 중심으로 강력한 긴축재정을 전개했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인 2019년 GDP 대비 국가채무는 프랑스가 97.4%로 불어난 반면 독일은 58.9%로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보다 더 낮아졌다.

- 독일이 휘청거리는 원인의 핵심은 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에너지를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독일 경제의 아킬레스건 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전쟁 직전 독일은 천연가스의 55.2%, 석탄 의 56.6%, 석유의 33.2%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특히 독일이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았던 게 패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팬데믹으로 세계적으로 공급 망이 붕괴되고, 전쟁 중인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가 순조롭게 수급 되지 못하자 나라가 초토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에너지에 의존하는 제조업, 화 학을 비롯한 핵심 산업이 커다란 상처를 입고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공장을 돌릴 에너지원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데다, 2022년 전 기요금이 10배가량 폭등하는 등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생산 원가 도 대폭 올라 높은 인플레이션에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월스 트리트저널은 "팬데믹에 따른 공급망 붕괴,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급등, 물가 상승과 금리 급등으로 독일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고 했다.
독일은 수출 중심으로 경제를 꾸려나가는 나라다. 하지만 팬데믹 시기 이후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전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특히 미· 중간 사이가 나빠지다 보니 수출 주도형 경제 모델이 예전처럼 원 활하게 굴러가지 못하고 있다.

- 지금은 ICT뿐 아니라 대부분 산업 분야에서 '규모의 경제' 싸움 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강소기업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의 매머드 기 업을 당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의 횡포를 지적하기만 하고 국가대표급 기업을 키우지 않는다면 국가 간 경쟁에서 뒤처지 기 마련이다.
특히, 이탈리아가 중소기업에 의지하는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가 뒤처진 대표적인 나라다. 이탈리아는 1980~90년대만 해도 영국 과 경제 규모가 비슷했다. 1990년 이탈리아 GDP는 스페인의 2배, 한국의 4배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강한 중소기업이 대들보였다.
- 1980년대 안경테, 가구, 타일 등 틈새 시장에서 강소기업이 여럿 등 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탈리아는 자본시장 발달이 더딘 탓에 뭉 칫돈 수혈이 어려워 공룡 기업을 키우기가 난망했다. 노조 등쌀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사업가들은 노조 설립 의무가 없는 15인 이하 소기업에 자족하려 했다. 그러다 온라인 비즈니스 시대로 접어들자 크게 뒷걸음질하고 있다. 2023년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에 이탈 리아 기업은 5개뿐인데, 그중 50위 안에 든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 그뿐 아니라 500대 기업에 드는 이탈리아 기업 5곳도 ICT나 제 조업체는 전무하며 모두 에너지, 은행, 보험, 우편 업종으로서 국가 기간산업에 해당한다. 이탈리아가 작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기간 사업을 하는 국내 1위 업체가 덩치가 커진 경우에 불과하다. 인구 로 이탈리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대만이 <포천> 글로벌 500대 기 업에 7개사를 올려놓고 있고, 그중 국영석유회사인 대만중유CPC만 빼고 나머지 6곳이 모두 첨단 업종인 것과 대조적이다.

- 딥마인드 외에도 유럽의 테크 기업이 미국 기업의 품에 안긴 사 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발트 3국 중에서 가장 작은 에스토니아 에서 태어난 스카이프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3년 스웨 덴의 니클라스 젠스트롬, 덴마크의 야누스 프리스, 에스토니아의 아흐티 헤인라가 창업한 스카이프는 2005년 미국의 전자상거래 기 업 이베이에 26억 달러에 팔렸다. 2009년에는 이베이가 사모펀드 를 중심으로 한 투자자 그룹에 스카이프를 넘겼고, 2011년에는 마 이크로소프트가 스카이프를 85억 달러에 사들였다. 한때 세계 휴 대전화 시장을 호령한 핀란드의 노키아도 2013년 단말기 사업 부 문을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다.
유럽의 기술 기업들이 미국에 넘어가는 건 장기간 상당의 적자를 감수하면서 투자를 이어 나갈 유럽 내 기업들이 부족하기 때문이 다. 미국 빅테크에 잠식된 유럽 기업은 딥마인드와 스카이프뿐만이 아니다. 애플은 2018년 덴마크의 시각 효과 스타트업 스펙트랄을 사들였다. 같은 해 애플은 런던에 본사를 둔 음악 앱 샤잠도 매입했다. 2018년에 페이스북도 영국의 블룸스베리 AI를 인수했다. 구글도 영국에 있던 모바일 그래픽 툴 회사 그래픽스퍼즈를 매수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키워놓은 싹수 좋은 기술을 미국 빅테크들이 막 강한 자금력을 동원해 싹쓸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 이크로소프트는 유럽 게임사였던 닌자 시오리Ninja Theory를 자회사로 만들었고, 승차 공유 서비스 기업 리프트도 런던에 근거를 둔 증강 현실AR 스타트업 블루 비전 랩스의 주인이 됐다. 이런 인수 사례를 보면 유럽 테크 업계의 서글픈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인수되 는 기업 입장에서는 미국의 빅테크 품에 안긴 이후 모기업의 자금 력을 바탕으로 조금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 고용 유연성이 높은 미국 경제는 대기업의 대규모 감원 같은 위기 도 새로운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갖추고 있다. 2023년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직원들을 대거 내보냈다. 이는 고용시장에는 다소 충격이 있었지만, 이들 직원을 채용한 기업들은 우수한 기술 자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세계 최대 농기계 업체 존 디어가 이 사례의 대표격이다. 1837년 창업한 존디어는 현재 자율 주행 농기계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 인 력이 중요한데, 빅테크의 감원은 존 디어가 필요한 소프트웨어 인 재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고용 유연성이 높아 쉽게 잘릴 수 있다는 건 유럽식 사고방식으로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존 디어 사례에서 보듯 인력 배치를 효율적으로 하고 새로운 산업 변화에 빠른 대처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2023년 연례 주주총회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중국과 중동에서 탈달러화를 시도하는데 달러가 더 이상 기축통화가 아닌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을까요?" 그러자 버핏 회장은 단칼에 자르듯 대답한다. "우리(달러)가 기축통화이고, 다른 통화가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노 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역시 '달러 종 말론'을 무시하라고 했다.
달러와 유로화의 힘의 차이는 단적으로 코로나 사태 대응 당시 엿볼 수 있었다.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코로나위기가 본격화됐을 때 GDP의 25.4%에 해당하는 재정적 대응을 해 서 유럽 주요국 및 선진국 그룹의 재정적 대응 규모를 압도했다.
유로존 국가들도 막대한 재정을 경기 대응을 위해 퍼붓긴 했지 만, 경제 규모 대비로는 미국보다 적은 비용을 썼다. 재정 악화를 염 려해 조심스럽게 움직인 것이다. 걱정 없이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과 달리 반복되는 재정 위기로 어려움을 겪은 유럽이 보수적인 접근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통화의 힘 차이에서 비롯된다.
미국식 강력한 법치주의도 달러의 힘을 떠받치고 미국식 자본주 의를 지탱하는 발판이다. 투자 컨설팅사 720 글로벌'의 창립자 마 이클 레보위츠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법치주의 rule of law는 미국 시민과 기관의 인권, 재산, 계약 및 절 차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많은 국가에서도 유사한 법적 절차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기준에 부합하는 국 가는 거의 없다. 미국의 법률 시스템은 미국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외국인을 동등하게 보호한다."
이런 이야기는 미국식 법치주의가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 에 신뢰도를 높이고 그와 연동해 달러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보호한 다는 뜻이다. 이런 법률적 보호는 막대한 액수의 달러 관련 차입과 투자 수요를 끌어오기 위해 미국이 당연히 선택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 720 글로벌 창립자 레보위츠는 이렇게 묻는다.
"(자국 화폐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중국, 러시아, 사우 디아라비아가 정말로 기축통화 보유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 람들은 자문해 보자. 만약 여러분이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그런 국가 들의 은행 시스템에 자금을 맡길 수 있을까?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과 연 그런 국가들끼리 서로를 신뢰하고는 있을까?"

- 유럽의 짧은 근로 시간은 과거처럼 떵떵거리고 잘 살 때라면 아 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높은 삶의 질을 누리는 것으 로 볼 수 있어 귀감이 될 수 있고, 실제로 2차대전 이후 오랫동안 그 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유럽에서는 적게 일해도 괜찮은 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21년 팬데믹 도중에도 "우리 자신을 보면 다른 나라보다 확실히 일을 덜 하고 있으며, 그것은 엄연한 사 실"이라고 했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독일 재무장관도 러시아 대우 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적 타격이 크자 "독일인들이 전쟁 중에도 더 오래 일해서 취약한 국가 경제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촉구 했다. 일을 더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X(옛 트위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영을 보장하기 위해 더 많은 성장 추진력, 더 많은 스타트업, 더 많은 초과 근로 시간입니다"라고 썼다.

- 피케티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지키려는 '상인 우파'와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 로서 사회적 위치를 잃지 않으려는 '브라만 좌파'가 권력 투쟁을 전 개하는 사이 많은 사람이 소외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교육 엘리트(브라만 좌파)와 자산 엘리트(상인 우파) 간의 공 생이 이뤄지고 두 진영이 담합을 통해 정치 체제를 나눠 가지고 있 다"고 강조했다. 정치 권력을 쥔 이들이 진영으로 갈려져 있는 것처 럼 보여도 실질적으로 한통속이라는 것이다. 특히, 피케티가 "좌파 엘리트 계층이 부를 재분배하고 서민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원래의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는다"고 꼬집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 길게 보면 우파든 좌파든 유럽에서 엘리트 지배 집단은 수백 년 전 귀족의 후손들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우 파로 또는 좌파로 갈라졌지만 결국은 양쪽 모두 기득권층이며, 서로 간에 권력 경쟁에 몰두한다. 피케티는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는 귀족 사회 없이 이민자들이 넘어와 일찌감치 시민 사회를 건설한 미국과는 역사적으로 국가의 생성 과정상 다른 부분이다.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아시아 주요국의 사회 구조와도 상이한 대 목이다. 이런 식으로 엘리트끼리 좌우충돌하는 현상은 국가 경쟁력 을 높이거나 조금씩 추락하는 유럽의 위상을 다시 제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유럽 전반에서, 특히 프랑스에는 피케티가 꼬집는 '부유한 집안의 잘 배운 좌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캐비어 좌파'라고 부르며 조롱한다. 서민은 엄두도 못내는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좌파를 자처한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 파와의 권력 투쟁에 탐닉하면서 평범한 이들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등한시하기 때문에 불평등이 커진다고 피케티는 지적한다.
- 영국에서도 프랑스의 '캐비어 좌파'와 비슷한 '샴페인 좌파' 또는 '샴페인 사회주의자'라는 표현이 있다. 노동당은 당명에서 볼 수 있 듯 근로자들의 권익 보호가 최우선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좌파 엘 리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와 우파와의 권력 다툼에 집중하면 서 원래의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노동당의 출발은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었는데 어느 순간 '대도시에 사는 반골기질의 먹물 지식인'을 위한 정당으 로 바뀌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역시나 엘리트주의가 묻어 있다. 독일의 중도좌파 정당인 사민당 역시 비슷한 궤도를 걷고 있다.

- 이민자 유입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계층 간 갈등에 국한되면 다행 이다. 그러나 심각한 종교 갈등과도 연동되고 있어 유럽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유럽에 온 이민자와 난민은 중동과 북아프리 카에서 온 사람들이 많고, 이들은 거의 대부분 무슬림이다. 일상의 문화와 사고 체계가 유럽의 전통과 뿌리부터 다르다. 여기서 비롯 되는 갖가지 갈등이 이미 유럽에서는 첨예화됐다.
미국도 불법 이민자로 홍역을 앓고 있지만 대체로 멕시코 이남의 중남미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중남미는 가톨릭 국가들이기 때문에 미국에 온 이민자들이 종교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는 적다. 이와 달 리 유럽으로 온 이민자와 난민은 유럽인들에게 이질적인 이슬람교 도라는 점에서 분열과 갈등의 수위가 훨씬 높다. 이것 역시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가르는 무시 못할 요소다.
- 과거 북아프리카 식민지를 많이 거느린 역사로 인해 유럽에서 무슬림 비율이 가장 높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전체 인구 6545만 명 (2021년) 가운데 무슬림이 10%를 넘었다고 본다. 프랑스에만 무슬 림이 부산 인구의 2배가 넘는 700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미 프 랑스에서는 이슬람교가 가톨릭에 이어 제2의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이슬람교도들은 알제리계 소년 나엘의 사망 때 반정부 시위를 대 대적으로 벌인 것처럼 프랑스 정부나 주류 사회가 인종적, 종교적 탄압의 소지를 제공하면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다. 때 로는 테러나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프랑스에선 2011년 이후에만 170여 건의 이슬람 테러로 280명이 넘게 희생됐다. 대표적인 사례 가 2015년 발생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사건이다.
평소 자극적인 만평으로 논란을 자주 일으켰던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냈다. 무함마드가 알몸 으로 엉덩이를 드러내는 모습을 그린 만평이다. 무함마드를 그림으 로 그리는 것 자체를 금기로 여기는 무슬림 입장에선 굉장히 모욕 적인 묘사다.
샤를리 에브도는 예전에도 풍자의 수위가 심해 비판을 자주 받았 다. 대개의 프랑스인들은 '샤를리 에브도는 극단적이며 그들에 동 의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의 종교에 대한 풍자와 비판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는 사고방 식이 다르다. 무함마드가 조롱당하자 무슬림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 다. 결국 무슬림 테러조직이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실을 찾아가 총 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12명이 숨졌다.

- 결론적으로 이상고온으로 인한 피해는 미국보다는 관광업 비중이 높은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는 위도가 낮아 여름철 폭염에 시달리는 남유럽의 타격이 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럽에서 북쪽으로 관광객들이 더 몰릴 것으로 예상된 다.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유럽 내에서 북쪽이 잘 살고 남 쪽이 더 못사는 '남저북고'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되며, 이는 유럽의 분열에 가속도가 생길 확률을 높이게 된다.
2011년 남유럽 재정 위기 당시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나라 살림 을 망가뜨린 남유럽 국가들을 회생시키는 방안을 놓고 EU 안에서 갈등이 컸다. 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독일, 네덜란드에서는 남유 럽을 돕는 데 떨떠름한 사람들이 많다.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남유럽인들을 위해 왜 어렵게 번 돈을 써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 하는 여론이 제법 있다.
이상고온이 촉발하는 여름철 폭염으로 남유럽 관광산업이 타격 을 입을수록 북유럽이 상대적으로 더 잘 살게 되고, 유럽 내 남북 갈 등은 고조될 확률이 높다. 기후가 일으키는 영향이 앞으로 세계 질 서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관전 포 인트다.

- 국민들이 행복함을 느끼는 나라가 미국에 앞서 14개국이나 있고, 그중 10개국이 유럽 국가라는 건 생각해 볼 문제 다. 또한 유럽 3대국보다 북유럽의 작은 나라 국민들이 더 행복함 을 많이 느끼는 것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국력과 국민의 행복이 꼭 정비례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근년에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눈길을 끈다. EU 통계기구인 유로 스타트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EU 회원국에서 거주 허가를 받은 미국인은 7만 6221명이었다. 나라별로는 프랑스(1만 2220명), 스페인(1만 1156명), 독일 (9367명), 네덜란드(6791명), 이탈리아 (6599명) 순이었다. 이주를 선택한 이유야 다양할 수 있지만 유럽인 의 삶의 질이 더 높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 유럽 내 미국인이 얼마나 많아지는지에 대해 주간지 이코노미스 트가 각국 통계를 취합한 자료를 보면 2013년 1만 5500명이던 네 덜란드 내 미국인은 10년 후인 2022년 2만 4000명으로 늘었다. 같 은 기간 포르투갈에서도 1만 명으로 3배가 됐고, 스페인에서도 2만 명에서 3만 4000명으로 불어났다. 미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영 국에 거주 중인 미국인의 숫자는 2013년 13만 7000명에서 2021년 에 16만 6000명까지 뛰었다.
이렇게 유럽으로 가는 미국인들은 미국보다 안정적인 유럽의 의 료 체계, 미국에 비해 안전하고 편리한 교통 시스템, 여유로운 생활 환경 등에 이끌린다. 유럽에서는 영어만 구사해도 생활에 불편이 없다. 요즘은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업무 시간에 영어만 사용하는 글로벌 기업 지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네덜란드는 학사 과정의 28%가 영어로 진행된다.
- 게다가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가 일반화되면서 유럽에 거주하면서 미국 회사의 일을 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의 극심한 정치적 분열이 싫다며 유럽에 가서 사 는 이들이 증가했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유럽의 짧은 근로 시간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흑인 의 경우 유럽이 인종 차별 수위가 낮기 때문에 이주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유럽 이주 행렬이 나타나는 건 소득이 더 높고 경제 수준이 더 높은 나라에서 산다고 해서 삶이 반드시 더 행복 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 삶의 질의 관점에서 볼 때 유럽이 미국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미국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 자인 MIT 교수 대런 아세모글루는 “(미국 같은) 일부 국가들은 소위 '무자비한 자본주의'를 채택해 더 큰 불평등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많은 혁신을 이끌어내면서 기술 선도 국가가 된다"며 "스칸디나비 아 국가들은 이러한 무자비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혜택에 무임 승차하면서 좀 더 포용적인 자본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세모글루의 주장은 미국이 위험과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선도적으로 강력한 시장 중심 원칙에 입각해 전 지구적으로 인간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기술 발전을 이뤄내고 있고, 나머지 국 가들은 미국의 이런 '헌신'에 따른 낙수 효과를 누린다는 얘기다. 유 럽이 내세우는 평등과 복지의 강점도 기술 발전을 선도하는 미국이 만들어낸 전 세계적인 경제 성장의 결과라는 해석이다. 이는 모든 국가가 북유럽 국가 스타일의 복지 제도를 운용할 수는 없다는 의 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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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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