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에서 고래로

역사 2024. 7. 14. 11:17

- 한국인들에게 변화의 속도는 눈부셨다. 1920년에 한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농촌에서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았다. 그들이 살았던 집은 말 그대로 네 개의 벽과 지붕으로 이뤄진 건물이 었다. 그 안에는 수도 시설도 화장실도 없었다. 그들은 <양반> 이 소유한 땅에서 일하면서 간신히 살아갈 정도의 음식을 얻 었다. 혹은 더 나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노비가 되거나 일 본에 있는 공장이나 만주에 있는 위안소로 보내졌다. 그러나 50세가 되기 전인 1979년에 그들은 중산층 근로자가 되었다. TV와 라디오, 냉장고, 그리고 깨끗한 화장실을 갖춘 현대적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파트 창문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혹은 대전에서 공장이 거의 날마다 들어서는 장면을 지켜봤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꽤 좋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영화를 보 거나 최신 발라드를 들으며 여가를 보냈다. 열심히 일했다면, 제주도 여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박정희와 <재벌>은 천생연분이었다. 박정희는 성장을 이 끄는 국내 기업과 함께 한국 경제를 통제하고자 했다. <재벌> 들은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고, 기업이 한국 경제를 지배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들 스스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박정희 정권은 선택적인 <재벌> 허가권과 값싼 이자로 대출을 주고 잠재적인 해외 경쟁자에게는 적대적 인 경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재벌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했 다. 36 현대의 정주영, LG의 구인회와 그의 아들 구자경, 삼성 의 이병철, SK의 최종현 등 <재벌 회장들은 국민 모두가 아는 인물이 되었다. 재벌들은 경제기획원에 자문을 제공했다. 그 러나 박정희는 <재벌>이 달성해야 할 경제 목표까지 제시하는 등 세부적인 경제 관리에 나섰기 때문에 마찰이 있었다. 3"그 리고 때로 단순한 마찰을 넘어서는 사건도 있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재벌> 지도자를 부패 혐의로 투 옥하겠다고 협박했다. 재벌 지도자들은 박정희 정부와 협력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만든 모든 것을 잃고 수감되었다.38 박정 희와 재벌은 결국 공생 관계를 이뤘다. 한쪽에 좋은 것은 다른 쪽에게도 좋았다. 그리고 한국 경제에도 좋았다. 국가의 최고 대학을 졸업한 젊고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한 가지 꿈을 꿨다. 그것은 재벌 기업에 들어가서 그들이 약속하는 부와 지 위를 누리는 것이었다.
경제 정책과 이를 따르는 재벌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갖 춘 박정희는 자신의 선진국 계획을 밀고 나갔다. 재선이 있었 던 1967년에 박정희 정권은 2차 5개년 계획을 내놨다. 그 계획 은 분명하게도 수출에 집중했다. 3" 한국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 력을 활용해서 미국과 나머지 서구 국가에 제품을 공급하는 <공장>이 되어야 했다.
- 성차별주의는 유교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으로 인해, 그리 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한국 경제라고 하는 새로운 현실과 혼합되면서 심화되었다.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1953년에 도입 원) 호주제 아래에서 남성은 법적으로 가정을 이끄는 사람이 었다. 그러한 제도 안에서 남성이 사망하면 아내가 아니라 장 남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여성은 결혼하고 나면 남편의 가정 에 속하게 되었고, 유산과 은행 계좌에 대한 접근, 그리고 모든 형태의 경제적 활동에서 차별을 받았다." 호주제는 동일한 노 동에 대해 여성에게 낮은 임금을 지불하는 하나의 구실로서 악용되었다. 결국 여성은 자신을 돌봐 줄 남편을 만날 때까지 일할 뿐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아버지나 손위 형제가 그 역할 을 맡았다. 많은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 짐으로 여겼다. 1953년 낙태가 불법화되고 이후 1973년부터 특정한 조건에서만 허용 되었음에도, 여성 태아에 대한 낙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1970년대에는 한국 역사에서 또 다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 다. 그것은 중산층의 등장과 확대였다. 많은 한국인이 처음으 로 생존 경제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었다. 그들은 언 제나 원했던 취미에 돈을 쓰고, 불과 한 해 전만 해도 여유가 없어 보였던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혹은 당연히 누릴 만한 짧은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소득을 올렸다. 그렇게 대규모 소 비문화가 1970년대에 한국에서 <탄생했다. 조용필이 자신 의 형제에게 <부산항에 돌아오라고 노래할 때 한국인들을 춤 을 췄다. 84 TV 드라마에서 장희빈 역할을 인상적으로 소화했 던 윤여정은 한국 시청자에게 조선 왕조의 영광스러운 나날을 선사했다. 그리고 장미희는 영화 「겨울여자」에서 성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여성의 역할로 한국 관객들을 꿈꾸게 했다.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했다. 일하지 않을 때는 미국인들처럼 즐기기를 원했다. 70년대가 저물 무렵에 TV는 한국에서 일반 적인 가전제품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클럽으로 몰려들었고 거 기서 다음의 록 스타와팝스타가 탄생했다.
중산층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한국 경제의 근대화 덕분 에 계속해서 증가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나라가 외국인을 위 해 싸구려 티셔츠나 바지를 생산하는 공장으로만 남기를 원치 않았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선진국 비전과 맞지 않았다. 그의 인기는 개발주의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있었 다. 나아가 박정희는 강력한 군대를 원했다. 자국 방어를 위해 미군에 의존하는 모습은 강력한 나라의 건설에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는 1972년과 1977년 5개년 계획을 통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한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1972년 경제 계획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그것은 의 류와 장난감으로부터 전자 제품과 기계, 석유화학, 조선업으 로의 이동이었다. 그리고 1977년 경제 계획은 그러한 산업에 더욱 집중했다.
- 박정희의 비전은 한국 경제가 아직 기술적으로 발전된 산업에서 경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던 세계은행을 비롯한 여러 다른 해외 전문가들의 생각과 충돌했다. 박정희 의 일부 자문위원들조차 그의 비전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 나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한국의 역량을 의심했던 많은 이 들에게 현대의 포니는 상징적인 존재로 모습을 드러냈다. 포 니는 한국이 처음으로 국내에서 개발한 자동차였다. 생산은 1975년 12월에 시작되었다. 몇 달 만에 포니는 남미로 수출되 었고, 이후에는 유럽과 북미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초기 모델 에서는 화재 사고가 있었다. 문짝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도장은 값싸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88 전문가들 은 조롱 섞인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현대의 정주영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포니의 품질을 재빨리 개선했다. 소비 자들도 이를 인식했다. 매출은 급증했다. 포니는 미국이나 유 럽의 값비싼 자동차만큼 내구성이 강한 경제적인 자동차가 되 었다. 정주영은 그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다. 박정희 역시 그랬 다. 그리고 한국 전체가 그랬다.
- 전두환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가난한 대가족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의 가구들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 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군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은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 박정희가 죽기 한 해 전, 전두환은 준장으로 승진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무렵에 그는 한 단계 더 올라섰다. 당시 그는 보안 사령부 사령관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그는 적절한 자리에 있 었다.
보안사령관이라는 지위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죽음 을 수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수사가 아 니었다. 이는 전두환이 권력의 차지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 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출발점이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당 시 정승화는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를 체포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분 명한 장애물이었다. 
- 그리고 자신의 초창기 독 재에 반대할 세력을 끌어모을 위험이 있는 3김을 잡아들였 다. 김대중에게는 사형까지 내렸다. 사형은 20년 형으로 낮아 졌다가, 결국 미국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입으로 추방으 로 바뀌었다.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나서 안전함을 느낀 전 두환은 육군 예비역으로 예편했다. 8월에는 최규하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8월이 가기 전에 전두환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선거인단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 었다.

- 변화의 흐름은 도시 중산층의 등장과 성장으로 뚜렷해졌 다. 1987년 기준으로 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은 전체 노동 인구의 50퍼센트에 달했고, 이는 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해 제조업 분야는 전체 노동력의 40퍼센 트를 차지했다.  급여 수준은 아직 높지 않았지만, 점점 더 많 은 사람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 파트를 장만했다. 그리고 자동차와 TV, 냉장고를 살 여유를 누렸다. 또한 고급 레스토랑에 가거나 미장원에서 머리를 했 다. 게다가 정부가 해외여행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하면서 휴가를 이용해 해외로 떠났다.
- 중산층의 증가가 박정희 시절의 엄격한 검열이 완화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한국 문화의 특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매 출 기준으로 전두환 시절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영 화 「깊고 푸른 밤」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위장결혼을 한 캘리 포니아의 불법 이민자의 힘든 삶을 그렸다. 그는 결국 위장결 혼을 깨고 임신한 아내를 한국에서 데려온다.  다음으로 인기 높았던 「고래사냥」은 사랑에 실패하고 환멸을 느낀 젊은 남자 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는 윤락가에서 춘자를 만나 그녀가 잃 어버린 말과 고향을 찾도록 도움을 준다.  이들 영화는 일상 적인 삶이 가져다주었던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는 증가하는 중산층의 관심을 자극했던 주제였다.
변화는 음악 분야에서도 찾아왔다. 한국의 발라드는 1960년대에 블루스와 미국의 발라드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 다. 그리고 1980년대에 한국 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발라드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85년 이광조의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은 30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80년대 말에는 변진섭이 등장해서 <발 라드의 왕자>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발라드는 가족 간 약 속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연애와 결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 중산층 한국인들의 정서를 잘 표현해 주었다. 그 가사 에서 아픔은 짝사랑에 관한 내용이었고 기쁨은 평생을 함께할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였다.
- 한국 사회의 변화는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한국인들은 자유롭게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 었다. 자동차나 TV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즐길 것인지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선택할 수 없 단 말인가? 한국인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사무실과 공장이 점차 증가하는 중산층으로 가 득 차게 되면서 다양한 자유를 누리는 삶과 독재 치하의 삶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 1987년 4월에 전두환은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간접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분노했다. 둘은 신한민주당을 떠나 각자 자신의 정당을 세웠다. "
- 한국인들 또한 전두환의 발표에 분노했다. 당시 시위와 파업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1월에는 경찰이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을 고문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처 음에 당국은 박종철의 사인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의사와 검사, 기자, 목사 등으로 이뤄진 단체가 진실을 규명해 냈다." 전두환 정권은 단지 살인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상을 덮으려 했다.
서울로부터 2,600킬로미터 떨어진 필리핀에서 독재자 페 르디난드 마르코스 Ferdinand Marcos는 수십 년에 걸쳐 그 똑같은 일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86년 2월 에드사 혁명으 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필리핀은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땅에서도 그러한 일을 이룩하고자 했다. 전 두환의 4월 발표는 민주주의를 향한 한국인들이 열망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파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1986년 276건이었던 시위는 1987년 3,749건 으로 크게 증가했다. "한국은 통제 불능한 사회가 되었다. 군 사적 방법만으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광주 민중항쟁의 유 혈 사태가 다시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한국 상황을 우려한 레 이건과 그의 행정부는 전두환이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공적, 사적인 차원에서 로비를 벌였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 위원장은 전두환을 상대로 사적인 로비를 벌였다.  어쨌든 서울은 올림픽을 유치해야 할 국가였다. 당시 노태우가 올림픽 준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6월 9일, 이한열이 머리에 치명상은 입었다. 다음 날 노태 우는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수십만 명의 한 국인이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렇게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한국인이 거리로 나섰다. 파업 건수는 늘 어났다. 전두환, 그리고 이제 노태우가 더 이상 폭력에 의존하 지 말라는 국제 사회의 압박을 받았다. 게다가 경찰이 시위대 를 해산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최루탄의 재고가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이제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말고는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투쟁이 시작되었다. 국민은 승리를 염원했다.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을 선언했다. 폭력은 멈췄 다. 한국인들은 원하던 바를 얻었다. 노태우는 장관들을 비롯 하여 정치인과 기자들로 가득한 방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국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연설을 할 참이었다. 이는 나 중에 「6.29 선언」으로 알려진 대국민 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발전을 위한 특별 선언이었다. 

- 1987년 10월, 한국의 헌법은 2023년을 기준으로 마지막이자 아홉 번째로 수정되었다. 국회가 새 헌법을 통과시키고 난 뒤, 유권자의 94퍼센트 이상이 국민 투표를 통해 이를 승인했다. " 그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은 오직 한 번, 그리고 갱신이 불가능 한 5년 임기 동안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유권자인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그 렇게 한국은 강력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대통령은 5년 후새 로운 이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지 속적인 쇄신을 보장했다.
- 노태우는 1987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전두환의 쿠데 타에 동참했고, 전두환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전두환 방식의 독재 정권을 이어 나가기가 불가능해지고 나서야 민주주의로 의 이양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노태우 정권의 많은 고 위 인사는 전두환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정 부 조직은 전두환 정권은 물론 많은 경우에 박정희 정권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에 비판자들은 노태우 정권을 <5.5>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이는 전두환의 제5공화국과 그들이 보 기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제6공화국 사이에 있는 정권을 일컫 는 말이었다.
- 그리고 비판자들은 한국의 보수적인 민주화>에 대해 말했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독재자들은 사라졌 다. 한국인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되었으며, 정당은 권력을 차지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체제 의 전면적인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 서 권력을 잡고 독재만큼이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편안해 보이는 기존 엘리트 집단을 대체하지 못했다. 제도와 정당은 스스로 쇄신하지 못했고 젊은이들은 민주화된 정치적 권력이 라는 전리품을 나눠 갖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 그 중요성은 비교적 낮지만 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상징하는 롯데월드가 1989년에 서 울에서 문을 열었다. 롯데월드는 당시 세계 최대의 실내 놀이 공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21세기까지도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많은 한국인은 사회 동요와 저항, 시위의 분위기에서 벗 어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힘들게 얻은 소득과 민주주의를 누 리고 싶어 했지만 그 새로운 테마파크가 과거와의 단절을 상 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사는 실제로 전두환 시절인 1984년에 시작되었다. 

- 워싱턴 컨센서스consensus. 이는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미 재무부가 추진했던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말한다. 세 기관은 모 두 걸어서 15분 거리 내에 자리 잡고 있고 백악관에서도 멀지 않다. 1980년대에 세 기관은 이 개혁 프로그램을 밀어붙였으 며, 특히 남미 지역에 집중했다. 전두환 역시 그 프로그램에 관 심을 가졌지만 궁극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냉전 시대가 지나간 후, 세 기관은 중동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사 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이 정책을 실행했다. 동 아시아 지역도 포함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에는 세 가지 신자유주의 원칙이 있다. 1980년대 이후로 변하지 않고 그대 로 남은 그 원칙이란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자유화를 말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금융 위기와 대규모 실업 사태를 유발 하면서 전 세계 국가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 도 1990년대에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개발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단 하나의 분명한 길처럼 보였다.
이전에 한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관련된 정책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한국 경제의 개발 모형은 민간 기업들과 협력하는 국가의 <잘 보이는 손>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특히 재벌을 비롯한 많은 기업이 국가가 관리하기에 그 덩치가 지나치게 커졌다. 그리고 1990년대 초 한국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면 을 맞이했다. 정치가 완전한 자유를 맞게 된 상황에서 한국은 정책적인 차원에서 경제 간섭주의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경 제는 완전히 자유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미국을 비롯하 여 서유럽과 일본과 같은 부유한 나라들은 어쨌든 자유 경제 를 도입하지 않았던가? 이는 노태우, 그리고 특히 김영삼이 직 면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자유화를 향해 나아가기로 선택했 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한국이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다.

-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과학 기술 자문 위원회는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특수 효과는 특히 놀라웠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더 충격적인 사실이 숨어 있었다. 1년 후 「쥬라기 공원은 현대가 150만 대의 자동차를 판매 하는 것과 맞먹는 수입을 벌어들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룡 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사실이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가장 무시무시한 측면이었다. 한국 정부도 전 세계에 수출할 수 있 는, 이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상품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정부로서는 고맙게도 한국의 기업가들은 인기 있는 문화 상품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러한 분위기에서 SM 엔터테인먼트와 YG 엔터테인먼트, 그 리고 JYP 엔터테인먼트가 각각 1995년과 1996년, 1997년에 설립되었다(SM 엔터테인먼트의 기원은 1989년으로까지 거 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케이팝의 놀라운 성공 신화를 주도한 <3대>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영화 제작사들 또한 크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영화사들이 인 기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왜 우리는 할 수 없단 말인가? 이에 강제규는 한국 특수 요원들과 북한 공작원의 이야기를 그린 「쉬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삼성을 비롯한 여러 기업은 그 작품을 한국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자금을 투자했다. 1999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수 익을 올린 작품이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흥행 몰이에 성공했다. 이처럼 문화는 한국의 또 다른 성장 동 력으로서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김영삼의 경제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경제 성장률은 1994년과 1995년에 9퍼센트를 넘어섰다. 1993년 3퍼센트에 가깝던 실업률은 1996년에 2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불평등 수준은 낮게 유지되었다. 한국은 첨단 선박에서 고유한 케이팝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각화된 상품과 수출에 힘 입어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해 있었다.

- 그런데 한국은 어쩌다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까? 그것은 IMF가 지지했던 워싱턴 컨센서스 정책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97년 한국을 강타한 금융 위기는 본질 적으로 1990년대에 걸쳐 한국이 선택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이 국내 부패 척결의 정책 실패와 맞물리면서 벌어진 결과물 이었다. 국내와 해외 요인이 결합하면서 한국 경제는 불행한 운명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OECD 가입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을 강력하게 압박함으로써 금융 위기를 재촉했다. 한국 정부는 자본 이동 의 자유화 규정을 지켜야 했다. 금융 시스템의 자유화 규정은 국내 기업과 은행이 정부 승인 없이도 외화표시채권을 발행 하도록 하고, 해외 투자자가 원화 표시 채권을 매입하도록 허 용하며,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주식을 사들일 수 있는 한계를 없애는 방안을 담았다. OECD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럼에도 노태우와 김영삼 정부에서 일했던 많은 관료는 이러한 압박을 오히려 환영했다. 그 이유 는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쨌 든 한국의 은행과 기업들은 장기적인 국내 프로젝트를 뒷받침 하기 위해 달러로 표시된 단기 채권을 대규모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좋은 조합이 절대 아니었다. 동시에 부패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정부와 재벌 간의 연결 고리는 그대로 남았다. 실제로 김영삼의 아들은 1997년 5월에 한보 스캔들과 관련된 뇌물수수 및 탈세 혐의로 체포되 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그 철강기업의 여러 임원 이 김영삼의 아들을 비롯하여 장관과 대통령 측근을 포함한 여러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김영삼은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한보 스캔들은 정부와 재벌의 긴밀한 연결 고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줬다. 한 국정부에게는 부패를 뿌리 뽑을 능력, 혹은 어쩌면 의지가 없 어 보였다.
- 나아가 많은 재벌 기업은 은행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혹은 정부의 압력 행사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것은 노 태우 정부도, 그리고 김영삼 정부도 쉬운 대출과 재벌 투자, 그 리고 경제 성장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보 스캔들은 결국 정부 관료들이 그 철강 거물에게 값싼 대 출을 제공하도록 은행을 압박한 사건이었다. 은행들이 자발적 으로, 혹은 정부 압력으로 재벌에게 대출을 제공하고 OECD 가입에 따른 개혁으로 해외 자본이 유입되는 가운데 한국 경 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문제의 조짐은 1997년 1월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당시 한보는 60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파산을 신청했다. 삼미철강과 음료 기업인 진로, 자동차 기업인 기아, 쌍방울 등 여러 다른 재벌 기업이 뒤를 이어 파산을 신청하거 나정부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35개 은 행이 힘을 모아 파산을 막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82 한국 경제 전반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점점 더 많 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부채 문제를 드러내면서 한국은 구조 적 위기에 봉착했다.
마지막 타격은 태국에서 왔다. 1997년 7월 태국은 갑작스러운 자본 인출사태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단기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 하고 있었다. 또한 태국의 바트는 투기 공격을 받았다. 7월 2일 태국 정부는 환율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달러에 대한 바트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돈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후 투 자자들은 태국에 투자한 돈을 회수했다. 단기 달러 표시 채권 을 상환할 수 없게 된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하나씩 쓰러졌다. 겁을 먹은 해외 투자자들은 똑같은 운명에 처할 위험이 있는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필리핀과 특히 인도 네시아가 물망에 올랐다. 그리고 한국의 차례가 왔다.
투자자들이 한국으로부터 돈을 빼내 가기 시작할 때, 한국정부와 은행, 기업들은 서울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무실에서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기업의 파산 은 은행에 엄청난 부실 채권을 남겼다. 은행들은 단기 달러 표 시 채권을 상환해야 했다. 한국은행은 미국 달러 대 원화의 가 치를 유지하기 위한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위기에 직면했다. 중앙은행이 두 통화 간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면 은 행과 기업들은 부채를 상환할 수 없었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 면 한국 기업들은 외국 채권자에게 달러를 상환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11월 21일에 김영삼 정부는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역사로 남았다. 이 일은 한국인들이 1960년대 이후, 첫 진보 대통령 선출과 더불어 깨어나고 싶은 악몽으로 기록되었다.

- 2002년 12월은 386 세대를 위한 진실의 순간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2000년 총선에서, 그리고 2002년 6월 지방선거 에서 이름을 바꾼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을 이겼다. 그리고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한 이회창은 대선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했다.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은 혜성처럼 나타난 후보자였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처음으로 국민경선제를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다. 제5공화국 청문회 스타이기도 한 노무현은 경선에서 이길 것으로 보이지 않았 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그리고 그는 대선 운동 기간 내내 여 론조사에서 이회창을 추격했다. 선거가 임박했을 무렵에 노 무현과 이회창은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나이 많은 유권자들은 전통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 고자 하는 의지가 더 높았다.
- 선거 당일에 386 세대는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투표장에 나섰다. 동시에 노무현은 한국의 X 세대는 물론, 밀레 니얼 세대로부터 <예상치 못한> 지지를 얻었다. 1970년대에 태어난 X 세대는 386 세대를 비롯한 이전 세대에 비해 더 자 유로웠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특별한 애착을 느끼지도 않았다. 어쨌든 한국의 독재에 맞선 김대중의 투쟁은 그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 싸움은 기껏해야 그들이 어린아이였거나 10대 시절에 겪었던 지나간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대 중의 진보적 개혁의 계속되기를 원했고, 이는 또한 노무현의 약속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이후로 태어난 밀레니얼은 대학생 단체가 그들에게 불어넣었던 더 자유로운 가치관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냉담한 것으로 알려 진 밀레니얼 세대는 온라인 뉴스를 통해, 그리고 문자 메시지 와 막 시작되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집결했다. 당시 한국에 막 들어왔던, 그리고 인터넷의 위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 던 외국인들은 어떻게 이 새로운 매체가 당시 그들의 나라에 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쳤는지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는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 노무현은 아마도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일 것이다. 2000년에 창간되어 한국 최초로 독자들의 기고를 기사로 실 었던 온라인 신문인 오마이뉴스는 386 세대와 X 세대, 특히 젊은 밀레니얼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 이러한 젊은 매체 가 당시 선거의 판도를 뒤집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 는사람은 거의 없다."

- 사회적 변화와 호주제 폐지
진보주의 10년은 한국의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와 함께 이뤄 졌다. 그 변화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노력에 의해, 그 리고 동시에 스스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었다. 무엇보다 사회 속 여성의 역할이 크게 바뀌었다. 1990년 대 중반 상속권과 이혼에 따른 권리와 관련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막기 위해 도입된 법률의 변화는 즉각적인 효과를 드 러냈다. 1990년대 초에서 노무현의 임기가 막바지에 이른 2007년 사이에 이혼율은 두 배 이상 높아졌다. 다른 한편으로 출생률은 지속적인 하향세를 그렸다." 동시에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1997년에서 2007년 사이에 26세 이하에서 31세이상으로 높아졌다.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용인 가능한 모습이 되었다. 물론 보편적인 현상은 아 니었지만 미혼모도 더 이상 사회적 금기가 아니었다. 결론적 으로, 2000년 중반 한국 여성들은 과거의 유교 가치관의 명령 에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선진국 여성들과 같은 방식으 로 행동했다. 그리고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이나 여학생의 목 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이러한 흐름은 계속 해서 이어졌다.

- 2013년 2월 박근혜는 한국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한국 역사상 왕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 대 통령이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보수 진영에서도 일부 반 대세력은 이러한 점에서 박근혜를 비판했다. 그들은 새 대통 령이 좀처럼 소통하지 않으며 은밀한 방식으로 아무런 논의 없이 의사 결정을 내린다고 지적했다. 10 실제로 대중과의 단절 과 은밀한 의사 결정 방식은 이후 박근혜가 몰락하게 되는 원 인이 되었다.
그래도 박근혜는 취임 후 몇 달 동안 허니문 기간을 누렸다. 그녀는 내부적인 분열로부터 거리를 유지했고, 불평등 해소를 위해 노무현의 정책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박근혜는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36곳에 달하는 정 부 및 공공기관을 이전했다." 박근혜는 이명박과는 달리 성 장 그 자체보다 행복과 자기 충족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후 5월에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는 미 의회의 상하원 합동회의에 서 이례적인 연설을 했고 호평을 받았다. 이는 고국에서 새 대 통령의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름 동안에 그녀의 지지율은 60퍼센트를 넘어섰다. 12 박근혜는 보수주의자였지 만 이명박과 비교할 때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자였다. 그 리고 상대 진영과의 분열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 다. 이는 일부 진보주의자조차 인정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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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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