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여 년 전에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 Max Weber는 체제 정당성의 근거로 전통적 권위 traditional authority, 카리스마적 권위 charismatic authority, 합리적법적 권위 rational-legal authority를 들었다. 전통 을 근거로 한 체제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라는 이유로 군주 에게 복종한다. 베버는 절대 왕정 시대의 중국을 전통적 지배의 전 형적 사례로 들었다. 1911년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2천 년 동안 유지된 절대 군주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공화 체제가 수립되면 서 전통에 근거한 체제의 정당성도 함께 붕괴했다. 카리스마를 바 탕으로 한 체제에서는 뛰어난 지도자에 대한 추종과 경외가 정권 의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학자들이 마오쩌둥 시 절의 중국을 이러한 카리스마적 통치의 전형적 사례로 든다.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국민 주권을 회복한 위대한 지도 자 마오쩌둥은 동시대 및 후배 정치인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 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의 사 망과 함께 그의 카리스마에 기대 체제의 정당성을 지키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근대 민주주의의 존립 근거이기도 한 합리적 - 법적 권 위에 기대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경우에는 특정 개인이 아니 라 법과 관료주의적 행정 절차가 시민 복종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전제 국가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중국의 역사 중 합리적법적 권위가 시민 복종의 근간을 이뤘던 적은 한 번도 없었 다고 봐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인치'가 '법' 를 압도하는 상황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 마오쩌둥 시대 이후, 당과 정부의 책임 영역을 명확히 밝히고, 중 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구성된 별도의 집단 지 도 체제를 확립하고, 당과 정부 관료에 대해 정년 및 임기 제한 규 정을 두는 등 다양한 제도 개혁을 통해 합리적법적 정당성 창출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법제 화 움직임이 최근 들어 역전되는 분위기다. 시진핑 체제하에서 모 든 권력이 최고 지도자에게 집중됐고, 공산당이 정부보다 상위에 있음을 재천명했으며,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앞두고 정년과 임기 제한 규정도 만지작거렸다.
현재의 중국 체제를 보면 베버가 말한 체제 정당성의 세 가지 근 거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마오쩌둥 사망 이후 40여 년 동안, 그리고 동유럽의 공산 체제가 붕괴한 후 25년 동안 중국의 공산정권이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이 모순 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강압'만으로는 중국 공산정권이 지금 껏 건재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전의 일부 공산정권 과 비교하자면 중국은 공안기관이 그렇게 노골적이며 강압적으로 국민의 생활을 감시하고 간섭하지는 않는다(동독의 비밀경찰과 비교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기관에서 수행한 여론 조사 결과 중국 공산정권에 대한 시민의 지지가 여전한 것으로 나 타났다. 정치학자 웬팡 탕Wenfang Tang 은 저서 《대중영합적 권위주의 Populist Authoritarianism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핵심 정치 제도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신뢰, 국정 수행에 대한 만족도, 정치 체계 혹은 현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지지 등을 포함해 다양한 기준으로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를 측정해보면, 중국인은 다른 어떤 국가의 국민 보다 자국 정권에 대해 일관되게 높은 지지도를 보인다. 중국인의 자국 정치에 대한 지지도는 심지어 대다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보다도 높다.”
- 시진핑의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미래를 향해 '되돌아가는 것처 럼 보인다. 어떤 측면에서는 마오쩌둥주의의 제도와 가치가 복원되 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진핑의 정치 철학은 마오쩌둥의 사상과 궤를 달리한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젊은이를 혁명의 길로 이끌었으나, 지금 시진핑의 중국에서 마오쩌둥주의를 지지하는 이 념 자경단이 계속 용인되기는 힘들 것이다. 부패와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시진핑 정권에서 마오쩌둥은 마치 자철석 같은 존재다. 마오쩌둥은 시진핑의 정책을 그리고 시 진핑이라는 개인의 국가·사회적 역할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주 는 궁극적인 도구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주시'라 불리 는, 중국공산당 역사상 유일무이한 종신 주석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여전히 톈안먼 광장에 걸려 있고, 중국인은 계속해서 마오쩌둥의 시신이 안치된 기념관을 찾을 것이다. 중국에게 그리고 중국인에게 마오쩌둥은 아직도 중요한 존재다.

- 소련 해체의 길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중국공산당
민족 갈등은 중국 근대사를 얼룩지게 하며 내내 정부를 괴롭힌 골 칫거리였다. 20세기 초, 국민당은 비한족 또한 '중국인'으로 인식하 고 이들이 한족의 규범에 동화돼 결국은 하나가 되리라 기대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된 온정주의적 태도는 안타깝게도 비한족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한족의 불만에서 기회를 포착한 쪽은 공산 당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비한족의 외면을 받는 '중국화' 정책을 버리고, 비한족 집단에게 더 큰 자치권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분리 독립권마저 부여하겠다는 단서까지 달았다. 헌법 제정 이 이루어지기 훨씬 전에 이 단서 조항은 없어졌으나, 소수 인종의 종교 · 문화 · 언어를 보호한다는 조항은 포함됐다.
-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한족 우월주의'가 미칠 부정적 영향을 공 개적으로 비난했고, 비한족 집단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문화대혁명기에는 소수 민족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잠시 접어두기도 했으나, 1980년대에 다시 부활하면서 그들에 대한 비 교적 진보적인 정책이 많이 시행됐다. 1990년대에는 소수 민족의 자치권 요구, 특히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인의 요구가 거세 질 것을 우려한 당 지도부의 판단에 따라 진보적인 정책 대부분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2000년대 초에는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 직이 국경을 초월해 등장하면서 신장 지구의 민족 갈등 문제가 더 욱 복잡해졌다.
중국은 오랜 왕조 통치 시대를 거쳐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 전제 국가의 탈을 벗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족 문제에 관한 20세기 해법은 이제 내려놔야 한다. 중국 변방 지역에서 빈발하는 민족 갈등은 직접 당사자인 비한 뿐 아니라 현 중국의 지배 민족인 한족에게도 엄연한 현실이다. 양 쪽 모두 과거를 돌이켜볼 때 각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소 련의 해체 과정을 지켜본 중국공산당은 이와 유사한 일이 중국에 서 벌어지는 일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막고 싶어 한다. 비 러시아 민족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 것이 패착이고, 이 '잘못된' 정책이 소련 해체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티베트인, 위구르인, 몽골인들 중에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캐 나다의 토착민들이 직면해야 했던 운명이 자신들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고유의 생활 방식은 없어졌고, 말살된 고유문화는 박제 신세가 돼 박물관에 보존된 채 관광객들의 눈요 깃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앞선 나라들의 예를 드러내놓고 언급하려 하지는 않는다('원주민은 중국에서 금기시하는 단어다). 그러나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는 점을 우려하는 분위기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 혹은 차선책으로 공 식적 최고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려 하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02년부터 2012년 까지 국가 주석을 지냈던 시진핑의 전임자 후진타오는 권좌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러나 시진핑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장쩌민은 개 혁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덩샤오핑과 함께 모든 공식 직 함을 내려놓고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막강한 권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 2012년 시진핑이 국가 주석 자리 에 오른 것도 80대인 장쩌민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 다. 즉, 권좌에서 내려온 후에도 여전히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장쩌민의 막후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쩌민은 공직 에서 은퇴한 지 한참 됐고 공식적으로는 정치권에서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2002년과 2012년에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할 때 자 신의 측근 인사를 상무위원으로 선출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 다. 장쩌민의 전임자 덩샤오핑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력 을 행사했다. 1980년대 말에 정치권에서 공식 은퇴한 이후에도 덩 샤오핑의 정치적 영향력은 변함없이 작동했다. 덩샤오핑은 1987년 11월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제외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 났다. 그러나 이로부터 2년 후인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가 발발 했을 때 인민해방군을 동원한 시위대 진압을 승인한 것은 덩샤오 핑이었다. 개혁 지향적 경제 의제를 재차 강조하며 경제 성장의 불 씨를 당겼던 것도 1992년의 남부 지역 순시 때였다. 공식 은퇴 이 후에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사람이 장쩌민이나 덩샤오핑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중국 정치권의 일반적 현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고, 그 밖에도 공식 직위 없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다.

- 100여 년 전에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 Max Weber는 체제 정당성의 근거로 전통적 권위 traditional authority, 카리스마적 권위 charismatic authority, 합리적법적 권위 rational-legal authority를 들었다. 전통 을 근거로 한 체제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라는 이유로 군주 에게 복종한다. 베버는 절대 왕정 시대의 중국을 전통적 지배의 전 형적 사례로 들었다. 1911년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2천 년 동안 유지된 절대 군주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공화 체제가 수립되면 서 전통에 근거한 체제의 정당성도 함께 붕괴했다. 카리스마를 바 탕으로 한 체제에서는 뛰어난 지도자에 대한 추종과 경외가 정권 의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학자들이 마오쩌둥 시 절의 중국을 이러한 카리스마적 통치의 전형적 사례로 든다.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국민 주권을 회복한 위대한 지도 자 마오쩌둥은 동시대 및 후배 정치인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 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의 사 망과 함께 그의 카리스마에 기대 체제의 정당성을 지키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근대 민주주의의 존립 근거이기도 한 합리적 - 법적 권 위에 기대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경우에는 특정 개인이 아니 라 법과 관료주의적 행정 절차가 시민 복종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전제 국가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중국의 역사 중 합리적법적 권위가 시민 복종의 근간을 이뤘던 적은 한 번도 없었 다고 봐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인치'가 '법' 를 압도하는 상황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 마오쩌둥 시대 이후, 당과 정부의 책임 영역을 명확히 밝히고, 중 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구성된 별도의 집단 지 도 체제를 확립하고, 당과 정부 관료에 대해 정년 및 임기 제한 규 정을 두는 등 다양한 제도 개혁을 통해 합리적법적 정당성 창출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법제 화 움직임이 최근 들어 역전되는 분위기다. 시진핑 체제하에서 모 든 권력이 최고 지도자에게 집중됐고, 공산당이 정부보다 상위에 있음을 재천명했으며,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앞두고 정년과 임기 제한 규정도 만지작거렸다.
현재의 중국 체제를 보면 베버가 말한 체제 정당성의 세 가지 근 거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마오쩌둥 사망 이후 40여 년 동안, 그리고 동유럽의 공산 체제가 붕괴한 후 25년 동안 중국의 공산정권이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이 모순 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강압'만으로는 중국 공산정권이 지금 껏 건재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전의 일부 공산정권 과 비교하자면 중국은 공안기관이 그렇게 노골적이며 강압적으로 국민의 생활을 감시하고 간섭하지는 않는다(동독의 비밀경찰과 비교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기관에서 수행한 여론 조사 결과 중국 공산정권에 대한 시민의 지지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 다양한 역사서와 전기 자료를 바탕으로 역대 왕조 및 황제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중국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왕조는 없다. 49개 중국 왕조 가운데 5대 10국 시대의 후한後漢 (947~950)처럼 단명한 왕조부터 장장 289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당나라(618~907년)까지 왕조의 존 속 기간은 매우 다양하며, 이들의 평균 존속 기간은 70년이었다. 중 화인민공화국이 2019년까지 건재하다면 역대 왕조의 평균 존속 기 간인 70년에 얼추 도달할 것이다.
둘째, 왕조 몰락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정치 엘리트의 반란이다. 역대 왕조 대다수가 외적이나 민중의 반란이 아니라 구정 권 출신의 이른바 정치 엘리트 때문에 무너졌다. 예를 들어 한나라 를 세운 초대 황제 유방은 고향인 패현 (지금의 장쑤성 - 옮긴 이)의 시골 마을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로 일하다가 진나 라 타도 세력에 합류했다. 유방이 이끄는 군대가 다른 두 명의 농 민이 이끌었던 또 다른 반란군보다(진승과 오광이 이끈 농민 반란군을 말한다-옮긴이) 먼저 수도인 함양을 함락시켰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조 가운데 하나인 당나라는 이전 왕조인 수나라 때의 지방관 이연이 세웠다. 수나라 말기에 수많은 농민 반란군이 봉기 했으나 대부분이 수나라 군대에 패퇴하거나 이연이 이끄는 군사에 진압됐다. 중국 왕정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1911년의 신해혁명도 농민이 아니라 청나라의 지방군 수뇌부로 구성된 이른바 엘리트 집단이 주도한 일이었다. 한나라 말기의 장각, 명나라 말기의 이 자성청나라 말기의 홍수전 같은 농민 출신 반란군 장수 는 민중의 지지와 호응 속에 대단한 명성을 얻었음에도 권좌에 오 르는 데는 실패했다. 엘리트 집단은 반란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자 원과 지식을 더 많이 지니고 있으며, 정치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정부군의 요새, 무기고, 곡물 창고, 정부 문서, 지도, 기타 보물 등이 어디에 있는지도 다 알고 있다. 큰 도시를 가본 적이 없는 농민 반란군에게 황궁이 있는 수도首都는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황궁 안을 손바닥 보듯 잘 아는 정치 엘리트는 황제의 거처로 바로 쳐들어갈 수 있다. 패현의 주리(법률 담당 관리-옮긴이) 출신으로서 유방의 핵심 참모였던 소하는 유방군이 수도로 입성한 직후 진나라 황궁에 보관된 지도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셋째, 자연스럽게 권좌에서 물러난 황제는 절반밖에 안 된다. <표 2>는 총 282명의 중국 황제가 어떻게 폐위됐는지를 보여준다. 전체 황제 가운데 절반은 자연사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나머지 절 반은 불상사(살해, 반정, 퇴위 강요, 자살 강요 등)를 통해 비정상적 으로 폐위됐다. 그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폐위 원인은 내란시에 사망하거나 독살당하는 것이다. 외란, 즉 외적의 침략 때문에 권좌에서 물러난 황제는 극소수(7명)다. 황제의 폐위 원인이나 왕 조의 몰락 원인은 서로 비슷하다. 가장 큰 위협 요소는 사회 내부나 외적이 아니라 정권, 즉 조정朝廷 내부에 있었다.
넷째,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후계자를 미리 지정한 황제가 더 오 래 살았다. 황제 282명 가운데 130명(46%)이 자신의 뒤를 이을 황 태자를 정했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황제에 즉위하고 나서 5년 내에 후계자를 정해놓았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실 혼례와 관련해 종교적 차원의 제한이나 통제가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을 많이 둘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었고, 선택지가 다양한 까닭에 유능한 사람이 후계자로 채택될 가능성이 컸다. 통계적 분석 결과 후계자를 정해놓은 황제는 그렇 지 않은 경우보다 강제 폐위될 확률이 64%나 낮았다. 후계자를 지 정하지 않는 경우는 황제에게 아들이 없거나 다른 승계 방식을 채 택한 때였다. 예를 들어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 황제는 방계승 계(황족 중 연장자를 우선으로 함) 방식과 후보자 중 최적임자를 왕으 로 추대하는 방식을 혼합했다. 그 결과 몽골 황제 가운데 자신의 아 들이 후계자였던 경우는 33.33%에 불과했고, 황제의 평균 재임 기 간은 10.8년이었다. 다음 왕조 명나라를 세운 한족 황제의 평균 재 임 기간 17.8년보다 훨씬 짧았다.
후계자를 정해놓는 것은 왜 황제에게 도움이 되는가? 경제학자 고든 털럭 Gordon Tullock의 주장대로, 후계자를 정하면 정치 엘리트 집단이 현 황제가 아니라 후계자의 통치를 전제로 훗날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즉, 지금 황제보다 후계자 밑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행동을 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후계자를 정해놓는 것에도 위험은 존 재한다. 털럭이 지적한 바와 같이 황제가 후계 구도를 공식화하면 후계자는 황제를 암살하고 일찌감치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황태자의 문제 crown prince problem 라고 하는데, 마오쩌둥은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 교훈을 되새 기게 됐다. 마오쩌둥이 지정한 후계자 린뱌오가 최고 지도자 자리 를 노리고 마오쩌둥이 탄 열차를 폭파하려 한 것이다. 털럭은 차라 리 권력을 세습하는 방식이, 황제가 재임하는 동안에도 그 이후에 도 정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황태자 가 된 황제의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 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 중국 정부는 미국과 지역 우방국 그리고 안보 파트너의 군사적 취약점을 겨냥해 군대를 조직 · 육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중국의 영유권 분쟁에 섣불리 개입하는 것이 얼마 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린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미사일 기지 를 비롯한 지상기지를 기반으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세력 의 개입을 차단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적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무력화시키는 전 략은 일반적 방어 전술보다 비용이 훨씬 덜 들고 작전을 구사하기 도 쉽다. 이는 '육지를 이용해 해상을 통제한다'는 인민해방군의 전 통적 전술 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중국 정부의 목적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자국의 '핵심' 안보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도 아마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중국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중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첫째,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치명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 것이 이 상적) 외국 군대의 개입을 아예 차단하는 방법이다. 미국과 그 우방 국에 중국의 군사력이 막강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이처럼 강한 군대를 상대하려면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는 점을 내비침으로써 분쟁에 개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겠다는 전략이다. 두 번째는 다소 저급한 방식이다. 중국 해경과 민병대를 이용 해 전쟁과 평화의 중간 상태인 '회색 지대'에서의 대결을 조장함으 로써 전쟁의 문턱 바로 밑에서 야금야금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기도 한 시진핑은 중국 이 추구하는 목적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인민해방군이 현 대전 수행 능력을 갖추도록 야심 찬 개편을 실시했으며 나머지 두 주축군의 전력도 보강했다.

- 중국 최정예 군 조직인 인민해방군은 기술적인 요소와 관련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기술적 측면에서 군 전력의 첨단화가 이루어질수록 비용 부담이 점점 증가하게 되고, 이는 향후 더 발전 되는 상황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진보하기는커녕 외국군과의 경쟁 상황에서 현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최첨단 기술 혁신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므로 목표 달성 자체도 쉽지 않다. 이는 미국이 이미 겪었던 현실이기도 하다. 당연 한 말이겠지만 첨단 무기 체계 및 이와 관련된 인프라는 재래식 무 기를 포함한 이전의 단순한 체계보다 구축과 운용, 유지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군사 장비와 무기 체계가 노동 집약적 차원 에서 기술 집약적 차원으로 진화함에 따라 그동안 중국군이 누렸 던 비용우위 효과도 점점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인민해방군이 점점 정밀하고 기술 집약적인 체계로 나아갈수록 외국에서 도입한 기술 을 현지화하는 데서 비롯되는 상대적 이점이 줄어들고, 첨단 기술 및 체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부분에서의 비용우위도 점차 감소할 것이다. 게다가 최첨단 장비 및 무기를 운용하려면 정확한 상호 작용 시스템이 필요한데 중국은 이를 구축하는 데 따른 정밀 장비, 전자 장치, 기타 복잡한 기술 체계에서 여전히 취약한 상태다. 중국 이 국내 기술과 외국 기술을 단편적으로 혼합하는 방식을 선호하 는 것도 이러한 취약성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중국은 군사적으로 미국만큼 정교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근해에서의 팽창주의 야심을 달성하는 데는 충분한 수단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만큼의 첨단성과 정교성은 원거리 전투에서 필 수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지리적인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군사 안보 측면에서 중국의 발전은 원거리 교전에 수반되 는 여러 문제, 미국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 등 다양한 암초 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 호구제가 만들어낸 기형적 도시화
중국의 정치·경제 제도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이 바로 '호구제'라 는 가구 등록 제도다. 이는 도농 간 인구 이동 관리를 목적으로 한 다. 말이 이동 '관리'이지 실질적으로는 이동 제한'에 더 가깝다. 중 국공산당은 1950년대 초에 농촌 거주자의 도시 이주를 막기 위해 일종의 인구 관리 체계인 호구제를 시행했다. 1980년대에는 이 제도를 좀 완화해 농촌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는 것을 허용했다. 그 러나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농촌 호구를 지닌 도시 이주자는 여러 가지 차별 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다수 학자는 호구제가 '2등 시민' 을 양산하는 제도라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나아가 흑인에게 신분 증명서 소지를 의무화한 인종차별적 제도와 흡사하다는 이들도 있 다. 호구제는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 불안이나 사회 갈등 등 도시화에 따른 각종 병리 현상을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 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 호구를 지닌) 도시 이주자의 사회·경제적 배제에 따른 인적 비용 발생은 물론이고, 부적절한 노 동력 배분, 비정상으로 높은 저축률, 도시 지역의 소비 둔화 등 다 양한 문제를 만들어냈다.
노동 시장과 시민 집단의 이중적 구조는 토지 관리 제도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중국의 토지 제도는 국유제와 집체體 소유 제로 이분화돼 있다. 도시 지역의 토지는 국유지로 돼 있는데, 농 촌 지역의 토지는 집체 소유지로서 공동 관리의 대상이다. 농촌 거 주자는 도시로 이주할 때 토지를 매각하거나 토지 소유권을 이전 할 수 없게 돼 있다. 이 때문에 도시 이주가 제한되는 한편 농촌에 는 소유권이 불분명한 미경작 토지와 빈집이 넘쳐난다. 집체 소유 토지를 건설용으로 써야 할 때는 국가만이 이를 국가 소유의 도시 지역 토지로 전환해 활용할 수 있다. 도시 지역에서는 지방 정부가 '국가'를 대표해 토지 소유자로서 임대료를 징수한다. 따라서 이 제 도는 지방 정부로 하여금 농민으로부터 낮은 가격으로 토지를 수용한 다음 높은 시장가로 임대해 수익을 올리는 일에 몰두하게 한 다. 이 때문에 토지의 도시화가 시민의 도시화보다 훨씬 빠르게 진 행되면서 토지 자원의 부적절한 배분과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중국 국토자원부는 식량 생산을 위한 농지가 줄어들자 국가 식량 안보에 필요한 농지 한계선은 1억 2,000만 헥타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각 지방 정부가 농지 한계선을 유지함과 동시에 건설용 부지 할당량 확보를 위한 경쟁을 벌이면서 정부 기관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 한 자녀 정책은 가혹하고 악명 높은 출산 정책이었다. 이는 인구통 계학적으로 불가피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닌, 한마디로 결함이 많은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 정 부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 두 자녀를 허용하는 예외 조항을 둔 채 한 자녀 정책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중국과 중국인을 완 전히 바꿔놓았다.
일반적 차원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물론 이 정책이 출 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중국 정부는 4억 명 정도의 출산 감소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하나 최소 절반은 부풀려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럼 에도 시장의 힘과 사회적 변화의 물결과 더불어 양적·질적 향상을 도모한 인구 정책 덕분에 교육 수준이 높고, 신체적·정신적으로 건 강하며, 다방면의 지식을 갖춘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새롭게 등장한 '신중국인'은 중국을 국제 사회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게 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또 이 정책은 사회적·인 구통계학적으로 현대 국가에 걸맞은 시민을 만들어내면서 중국 사 회를 현대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적 효과를 내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 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이 가혹한 정책을 견뎌내 야 했던 농촌 여성이 신체적·정신적으로 입은 피해는 수치화하기 어려울 정도다. 영아 살해를 통해 피폐해진 여성의 삶, 남아 선호에 따라 태중 여아의 낙태가 일상화된 부분은 또 어떠한가? 단 한 명 뿐인 아이를 잃었을 때 정상적인 가정을 만들고 싶었던 소박한 꿈 이 산산조각 나면서 부모가 겪었을 상실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는 수치화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손실이다.
- 한 자녀 정책이 출산 부문의 새롭고 현대적인 규범(자질이 우수 한 아이', '체계적으로 양육하는 부모' 등)에 걸맞은 '개인'을 만들어낸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규범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국가가 제 공하는 사회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탈자'도 양산했다. 이 정책 과 관련해 금지된 행위 가운데 하나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는 일 이었다. 국가 시책을 어기고 둘째를 낳은 부모는 국가로부터 엄중 한 제재를 받는다. 그리고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아이, 이른바 '검 은 아이 (헤이하이즈)는 이보다 훨씬 큰 불이익을 받는다. 호구 에 오르지 못하는 이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돼 국가 가 제공하는 사회복지 혜택에서 배제된다. 따라서 교육과 보건·의료 서비스는 물론이고 취업과 결혼 심지어 사망과 관련한 그 어떤 권리나 혜택도 받지 못한다. 또한 출산이나 성적 취향, 결혼 등에서 중국의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또 다른 유형의 '비현대 인'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동성 부부, 미혼모, 무자녀 성인 등은 사 회적으로 배제된 채 살아가며 규범을 따르라는 사회적 압박을 견 뎌내야 한다.
한 자녀 정책은 전체 인구 구조도 뒤틀어놓았다. 노인 인구는 증 가하는 반면 생산 가능 인구는 줄어들면서 1억 5,000만 명을 약 간 웃도는 한 자녀 세대가 연로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됐다. 남아 선호 전통이 여전한 상황에서 한 자녀 정책은 가뜩이 나 불균형한 성비 격차를 더욱 넓혀놓았다. 여아 100명에 대해 남 아 119명으로, 세계에서 성비 불균형이 가장 심하다. 이 때문에 여 성은 상대를 골라가며 결혼을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정 도인데 반해 남성은 그렇지가 못하다. 하위 계층에 속한 남성 중 2,000만~4,000만 명은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한 채 이른바 노총각으 로 남아 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수용 가능한 정상적 방법으로는 결혼을 할 수가 없다. 이에 따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빈 가지'로 불 리는 이들 노총각은 원치 않는 비정상인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 중국도 발전을 거듭하다보면 결국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의 '법' 사회로 진입하게 되리 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순진하고 섣부른 생각은 잠시 접어 둘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2014년 10월, 중국공산당 18기 4중 전회(중앙위원회 4차 전체 회의)에서 법치에 관한 결정문을 통해 '법에 따른 국가 통치', 즉 '의 법치국依法治國'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중 국이 법체계를 정비하면서 법률 부문의 발전을 도모한 목적이 무 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 샤오핑 이론, 3개 대표론, 그리고 주요 연설에서 드러난 시진핑의 사상'을 계승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 결정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당의 리더십이야말로 중국식 사회주의의 핵심이며 사회주의 법치 실현 을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당의 지도력이 법에 따른 통치 과정 의 모든 측면에 미치는 일에서 중국식 사회주의 법치 국가 건설의 초석 이 다져진다. 헌법에도 중국공산당의 주도적 지위와 역할이 명시돼 있 다. 당이 계속해서 사회주의 법치의 중심에 서야 한다. 당과 국가 존립 의 명운이 여기에 달렸으며, 민족을 불문한 모든 국민의 이익과 행복 또 한 여기에 달렸다. 법에 따른 국가 통치의 기본 동력 또한 여기에서 나 온다. 당과 사회주의 법치는 같은 것이다. 사회주의 법치 실현에는 당의 리더십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컨대 법치는 당이 주도해야 하고, 당은 사회주의 법치에 의존해야 한다.
공산당은 이 결정문의 의미와 목적을 곡해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당과 이념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한 다. 즉, 입법·행정·사법을 비롯한 국가 통치 개념과 운영 방식, 법 조계와 법조인 교육, 기타 법제도의 모든 측면에 하나의 조직체로 서당과당의 공식적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중국 학생은 다양한 이유로 미국을 택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역사적인 부분이다.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기 전 유학길에 올 랐던 중국인 대부분이 미국으로 갔다. 19세기에 청나라가 최초로 해외 교육 사절단을 보냈던 곳도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였다. 1900년대 초에는 일본 유학이 많아졌고, 분야에 따라 독일이나 영 국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래도 중국 학생이 가장 선호했던 곳은 미국이었다.
중국의 2대 명문 가운데 하나인 칭화대학도 처음에는 미국 유학 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시작했다. 말하자면 일 종의 미국 유학생 양성기관이었던 셈이다. 청나라 조정이 미국 유 학 준비생을 위한 예비 학교로서 유미학무처游美學務處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칭화대학의 시초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일리노이대학 에드 먼드 제임스Edmund J. James 총장의 권유로 의화단 사건 때 받은 배상금 일부를 미국 유학생 양성 사업에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개설 한 유미학무처가 1911년 칭화학당淸華學堂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 제임스 총장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중국의 젊은 세대에게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면 후일 윤리 · 지성 ·상업적 차원에서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교육 사업이 시작되고 첫 10년 동안 일리노이대학 대강당을 본떠 만든 건물 등이 포함된 미국식 캠퍼스가 조성됐다. 나중에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게 될 학 생들이 현지 환경에 익숙해지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후 칭화 '학당' 은 '학교'로 개칭되면서 종합대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는 동안 미국과의 친밀한 관계는 계속 유지됐다.

- 마오쩌둥은 공자를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자신의 꿈에 가장 적대적인 인물로 인식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 정권은 공자 를 서구 신자유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항마로 인식한다. 유교적 통 치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중국 정부의 행보와 함께 두드러지 고 있는 새로운 흐름도 있다. 한때 전통 문화라며 폄하했던 것들을 이제는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을 둔 국제 활동이 바로 그것이 다. 요컨대 중국 정부는 중국어와 중국 문화 전파를 위해 세계 곳곳 에 '공자학원學院이라는 일종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있다. 한때 파괴의 대상이었던 전통이 이제는 또 다른 비전으로 간주되면 서 21세기 인류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 는 것이다. 이전까지 공자는 인간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전통적 세계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일반적 차원에서는 서구 근대성의 그림자인 소외, 개인주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대 안으로, 좀 더 특수하게는 서구 통치 방식의 역기능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 과거제의 기원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과 거제가 관료 등용의 주요 수단이 된 것은 10세기 말에 이르러서였 다. 처음에는 문장력을, 그다음에는 사서에 대한 해석 능력을 시험 하는 관문이었다. 따라서 과거제는 각 현에 공립 교육 기관 하나와 사립 학당 수백 개를 두는 교육 체계 정립으로 이어졌다. 13세기에 몽골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 원나라는 과거제의 역할을 엄격히 제한하면서도, 향교와 같은 공립 교육 기관과 서원 같은 사설 교육 기관을 많이 설립했다. 16세기 유럽인의 관점에서 과거제는 철학 자가 왕이 돼야 한다는 플라톤의 철인 정치 이론과 매우 닮아 보였 다. 어쨌거나 중국 같은 거대한 국가가 '교육'을 관직에 오르기 위 한 필수 관문이자 관리가 되고자 하는 자의 준비 과정으로 삼았다 는 사실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다.
- 이러한 상황은 (중세 귀족의 몰락, 상업의 발달, 지역 사회 내 엘리트 지식인의 영향력 증대 등과 함께) 중국의 '거대함'과도 연관되어 있었 다. 예를 들어 과거 준비를 열심히 하고도, 또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많아지는 시기가 있었고 이들은 각 지 방의 지식인으로 남게 됐다. 따라서 전국 어느 지역에 가든 비슷한 수준의 지식과 능력, 가치관을 지닌 엘리트가 포진하게 됐다. 관료 가 되기 위한 준비라는 차원에서만 보면 과거 중심 교육은 일종의 직업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뛰어난 문장력, 과거 기록물에 대한 지식과 해석 능력 등을 요하는 과정이었다. 과거 공부는 공자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가 주장하는 '자신을 위한 공부' 개념에 더 가까웠다. 추론, 비판적 사고, 다양한 관점, 역사적 깊이, 도덕적 선택 등 과거제에 기반을 둔 교육 체계는 사실 과학만 빠진 이상적 인문교양 교육과 다를 바가 없다. 현대 교육의 기본 목적에도 단순 히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기본적 가 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포함된다.
가치관 함양이라는 차원에서, 배우는 사람에게 어떤 가치관을 어떻게 심어줘야 하느냐는 늘 중요한 쟁점이다. 인의가 중요한 가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가 중요한가? 사물을 탐 구하고 지식을 얻는 것이 중요한가? 분명한 것은 이러한 부분에서 도 옛것을 되살리는 일과 새것을 창조하는 일, 국가를 위해 봉사하 는 것과 가족을 위해 일하는 것 등 상충하는 가치가 늘 존재했다는 점이다.

- 그런데 오늘날 중국에서 이 같은 쟁점이 또다시 부상했다. 처음 에는 시장 경제 체계에서의 자유가 곧 정치 부문에서의 자유로 이 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세계화와 시장 경제에서 비롯된 불평등 심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사회주의 시대의 집산주의 정책으로의 회귀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신좌파 간의 갈등 으로 쟁점이 재점화됐다. 그러다가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사람들 이 나타났다. 말하자면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중국 고유의 '중도적 노선'에서 답을 찾자는 주장이었다. 사실 '중화'라는 기치 아래 위대한 국가를 운운하는 자긍심의 원천에는 한때 봉건적이라며 폄하했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위대함을 순전히 '힘'의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은 다른 국가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만이 강 대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또 중국의 위대함은 공자의 가치를 토대로 융성했던 문명을 회복하는 데서 찾아야 한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유학적 가치가 인본 주의적인지 전제주의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지만 말 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진영과 노선을 불문하고 지식 인들 모두가 과거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각기 중국의 미래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기 위해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는 점 이다.
- 현재 공산당 지도부는 유교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 양쪽의 손을 모두 들어주고 있다. 시진핑은 베이징대학을 방문해 저명한 유교 사상가 고탕이지에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탕이지에는 중국 이라는 국가의 위대성을 회복하는 길은 유교 사상의 부활에 달렸 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가치의 기본 토대로서 《대학>을 가르치 기도 했다. 중국의 대학은 '국학교육 차원에서 정부로부터 많 은 지금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이는 다른 문명과 역사에 대한 이해 와 경험을 바탕으로 자국 정권을 비판하는 지식인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문학부 쪽 사람들에게는 기회였다. 진정한 중국의 가치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에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 은 물론이고 현 정권의 지지자이자 비판자의 역할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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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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