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은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장소였다. 그것은 방법에 대한 지식 노하우 know-how가 아니라 이유에 대한 지식 노와이know-why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굴 속 그림과 상징, 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다른 관습으로 발전했다. 노하우가 늘어나면서 인간은 거주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중 일부는 피난처로 사용했지만 일부는 의식 을 행하고(사원과 교회), 공연을 하고(극장과 공연장), 이야기를 하는 특 별한 경우에만 방문했다. 노하우를 발전시킬수록 우주에서 우리 위 치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 우리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새로운 방법도 더욱 발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노하우의 이야기는 도구, 과학, 기술 그리고 자연계를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노와이의 이 야기는 의미를 만드는 활동인 문화의 역사와 관련된다. 그것은 인문 학의 영역이다.
- 디지털 기술로 인해 문화 콘텐츠가 풍성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된 파일 형식, 웹사이트,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없게 되는 속 도 또한 가공할 정도로 빨라졌기에 과연 우리가 조상들보다 과거를 정말로 잘 보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문화의 저장과 배포 기술은 바뀌었지만 문화가 작용하는 방식, 즉 저장되고 전파되고 교 환되고 복원되는 방식을 지배하는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의 거 의 모든 문화가 끊임없이 서로 접촉하는 세상에서도 보존과 파괴, 상 실과 복구, 오류와 적응의 상호작용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된다. 우리 는 과거와 그 과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누가 문화를 소유하 고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두고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싸 운다.
- 현재까지 전해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대부분 교 육을 중요시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들이다. 이들의 유산은 이집트 사제들처럼 문자와 사원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도서관과 사원은 파괴될 수 있고 문자 체계 는 이집트 상형 문자가 그랬듯 잊힐 가능성이 있으니 문화의 저장에 만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마저 화재로 불타 서 수많은 그리스 문헌이 파괴되었고, 기독교 수도사들이 기독교 이 전 시대의 문헌은 필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또다시 수많은 작품이 사 라졌다. 플라톤의 사상이 살아남은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한 세 대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철학 이 널리 알려지고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파 방식 덕분에 플라톤은 철학계 안팎에서 후대 사상가와 작가에게 다양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토피 아 사회 건설에 몰두한 몽상가들은 아틀란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 았고 과학 소설 작가들은 대안적 미래라는 면에서 플라톤에게 끌렸 다. 플라톤은 연극에 직접 몸담은 뒤에 모의 현실을 비판했는데, 이 비판은 새로운 매체에 맞게 업데이트되었다. 1998년 영화 <트루먼 쇼>에는 미국의 전형적인 교외 지역에서 자랐으나 스스로 현실이라 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정교한 리얼리티 TV 쇼였음을 깨닫는 인물 이 등장한다. 1년 뒤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을 주제로 삼아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인물들에게 빨간 약을 내밀었다. 최근 페이스북이 발표한 메타버스가 실현되면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동시에 거짓 역사와 대안미래의 창시자인 플라톤은 분명 할 말이 많을 것이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라시아 교류망이 강화되고 곧 그의 왕 국 너머까지 확대되면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긴밀한 네트워크 가 만들어졌다. 30 이로 인해 농작물과 가축을 비롯해 기술과 문화적 표현 형식을 포함하는 모든 것의 교역이 가능해졌고 질병까지 전파 되었다." 인도 북부,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근동은 모두 비슷한 기 후대였기에 농작물과 가축이 쉽게 적응했다(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여행자들의 경우 불교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코끼리 때 문에 인도의 왕들을 우러러보았다). 이로 인해 인더스 계곡에서 시작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이르기까지 초기 문명의 접촉이 확산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피루즈 술탄에 이르는 정복과 점령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접촉은 폭력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문명의 접촉은 또한 석주와 문자에서 새로운 왕권 개념과 종교 개념에 이르기 까지 기술과 문화의 교환과 발전을 촉진했다.
어떤 면에서 유라시아 문화권은 이 교류망에 속했기 때문에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처럼 동서가 아닌 남북으로 뻗어 기후대가 다양한 대륙의 문화권보다 유리해졌다. 또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는 대체로 횡단과 항해가 훨씬 더 힘들었다. 물론 비교적 고립된 상태로 사는 사람들도 작물을 키우고, 동물을 가축화하고, 새로운 기술과 문 화 관습을 발전시킨다. 게다가 장거리에 걸친 문화 접촉에는 폭력뿐 아니라 질병의 확산 같은 상당한 단점도 뒤따랐기 때문에 고립이 축복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문화 접촉은 역동적인 과정을 촉발하여 인간이 상호작용하고 서로에게 이익을 얻는 방식을 증대시켰다.
-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가 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는 문화 접목의 영광을, 그 가능성과 미묘한 방법을 보여준다. 문화 접목은 패배나 열등함으로 인한 행동일 필요가 없다. 로마 문화의 다 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는 영향력 면에 서 (19세기 초 그리스 비극이 부흥하여 다시 상연될 때까지) 몇백 년, 아니 몇천 년 동안 그리스 극작가들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난 희곡을 썼다. 로마 건축가들은 그리스 모델을 바탕으로 새로운 건물과 사 원 양식을 만들어냈고, 로마 조각가와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플루 타르코스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한 쌍으로 묶어 그들이 얼마나 비 슷한지 보여주는 위인전을 씀으로써 두 문화를 하나로 결합했다. 복잡한 프레스코화, 아트리움 건물, 극장을 갖춘 폼페이는 로마의 문화적 접목의 결과를 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폼페이 광장옆 커다란 건물에 새겨진 베르길리우스의 명문은 로마의 신화적 기원이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라고 설명한다. 프레스코화부터 극장 에 이르기까지 폼페이 전체가 이러한 문화 실험의 증거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 통치 기술과 (도로에서 목욕탕에 이르는) 기반 시설, 군사 조직, 정치적 통찰력 때문에 로마를 우러러본다. 그러나 로마의 가장 놀라운 유산은 접목 기술이다. 사실 미국처럼 역사적· 지리적으로 거리가 먼 문화들이 로마에서 영감을 찾으려 한 것은 로 마가 그리스 문화를 접목시켰듯이 그들도 광대한 거리를 뛰어넘어 로마 문화를 접목시키고 문화 접목이라는 로마의 유산에 간접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한편, 남아시아 조각상은 폼페이와 그리 멀지 않고 조만간 다시 폭 발할 화산이 보이는 대도시 나폴리의 국립고고미술관에 자리를 잡 았다. 만약 화산이 폭발한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조각상을 약탈하거 나 어떤 방식으로든 가져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러면 조각상 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화산이 분출할 때 그녀가 지금 있는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고고학자에게 다시 발굴되기를 기다리 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리라.

-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거의 신화 같은 인물, 중국어 불교 정전을 바로잡고 개선하고 확장해 낸 여행자이자 순례자가 되었다. 이탈리 아어에는 번역가 트라두토레traduttore와 반역자 트라디토레traditore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이용한 농담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번 역가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향이 있으며 번역 작업이 얼마 나 선구적 일인지 종종 잊는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를 기억하는 사람 은 거의 없지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는 누구나 안다.) 오늘날에도 표 지에서 번역가 이름이 빠지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마치 우리는 항상 원본에 접근할 수 있으며, 책은 개개인의 천재가 만드는 것이고, 문 화매개자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믿고 싶어 하는 듯하다. 우리는 번 역가 덕분에 다양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때때로 인정받지 못하는 번역가의 노고에 모든 문화가 의지하고 있으므로 이런 태도 는 더욱 놀랍다. 고대에는 대규모 번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스 문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거나 불교 경전을 중국으로 들여온 것은 예외에 속했다." 당나라가 현장 같은 여행자와 번역가에게 의 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문화적 영웅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당나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현장이 대표하는 것은 그가 번역가로서 한 일보다 중요하다. 그는 (나중에 성지를 찾아 떠나는 기독교도들처럼) 수입된 문화를 쫓아서 그 근원을 찾아간 사람을 대표한다. 문화 수입은 복잡한 역장을 만 들어내기 때문에 수입된 문화가 새로운 현지 문화 host culture에 이미 오래전부터 동화된 후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수입 문화의 기원을 찾 아가면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중국 불자들은 인도에 끌렸으나 감히 서역으로 위험하고 금지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 의 없었다. 현장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다녀왔다. 더욱 중요한 사 실은 그가 성지를 방문하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소식을 가지 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현장이 가지고 돌아온 경전과 물건, 관찰과 경험 덕분에 중국 불교는 부처의 고향인 인도의 불교에 열등감을 느 낄 필요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집에 머물 러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준 순례자였다.
- 일본에 중국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은 두 나라가 몇백 년 동안 계획 적으로 문화 외교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두 나라의 교역은 1세기에 시작되었고 수나라와 당나라 때 가속화되어 외교 회담이 제도화되 었다. 이러한 문화 사절단은 보기 드문 문화 전이 전략이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로마와 그리스의 관계처럼 정복당하지 않았음에도 대규모로 문화를 수입한 또 다른 예에 해당한다. 세이 쇼나곤의 이 야기에서 중국은 고압적이고 어쩌면 위협적인 모습이지만 사실 중 국은 일본을 침략하려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일본이 문화재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견당사라는 외교 사절단을 기꺼이 보냈다. 로마는 그리스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은 중국을 군사 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음에도 문화를 수입했다. 또 로마에서는 그리 스 문화의 수입이 영향력은 컸다 해도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었던 반 면 일본에서는 황제로 대표되는 국가가 문화 전이를 계획했다. 일본 에서는 문화 수입이 정부 정책이었던 것이다.
- 우리는 문화를 평가할 때 독창성을, 언제 어디서 처음 발명되었는 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원조라는 주장은 종종 우월성 과 소유라는 미심쩍은 주장을 뒷받침할 때 사용된다. 그런 주장은 편 리하게도 모든 것이 어딘가에서 왔음을, 발굴되고 차용되고 옮겨지 고 구매되고 도난당하고 기록되고 복사되고 종종 오해받는다는 사 실을 잊는다. 무언가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문화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이며, 우리는 다음에 사용될 때를 기다리며 그 유적을 보존 하는 매개자에 불과하다. 문화에 소유자는 없다. 우리는 다만 다음 세대에 문화를 물려줄 뿐이다.
- 도시 혁명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집약 농업이었다. 도시 를 부양하려면 한곳에 매여 가축을 따라다니거나 새로운 사냥지로 옮겨 다니지 못하는 수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충분한 식량을 주변 지 역에서 운송해 와야 했다. 군사 정복이 아닌 식량 재배 능력이 도시 화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식량을 재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또 다른 기 술, 즉 저장 기술이 필요했다. (복합 주택에 곡식 저장실을 두었던 조각 가 투트모세가 잘 알았듯이) 저장이 가장 용이한 것은 곡물이었다. 곡식 은 일단 수확하면 장기간 보존이 가능했다. 저장한 곡물은 가뭄과 해충으로부터 안전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이 곧 밝혀졌다. 곡물 저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손에 넣었고, 이에 따 라 계층적 사회 구조가 탄생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부를 소유하게 되 었다. 부를 제한하는 것은 저장설비의 규모와 그것을 무력으로 통제 하는 능력밖에 없었다. 이집트 중앙집권 국가의 출현은 이러한 저장 혁명 초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알마문의 선조들은 바그다드를 건설하면서 곡식을 관리하는 고 대의 저장 혁명뿐 아니라 정보와 관련된 저장 혁명도 이용했다. 메 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완전한 문자 체계, 말을 그대로 표기하는 기 호 체계가 탄생하여 이야기를 비롯해 지식을 구술로 전달하는 여러 형태들의 저장이 가능해졌다. 세계 최초의 도서관 중 하나는 아시리 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역시 통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에 서 건설한 도시였다)에 세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 건설한 바그다 드에 과거의 문서 기록을 보존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야심 찬 궁전 도 서관 지혜의 창고가 포함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혜의 창고는 지식을 축적하는 동시에 다양한 정보 유형을 분류하는 새로운 체계 를 이용해 그 지식을 정리하는 곳이었다.
- 중세 바그다드는 제지 산업, 지혜의 창고, 번역가와 주해자, 학자 가 모여들어 아랍 학문 황금기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이번에도 건축 자재로 쓴 진흙벽돌이 문제였다. 진흙벽돌 은 풍족했고 최초의 도시 공간을 탄생시켰지만 몇 세대를 넘기지 못 했다. 보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바그다드의 불운은 버려진 네페르 티티의 아케타톤과 반대로 알 마문의 선조들이 도시를 세운 이후 끊 임없이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도시가 끊임없이 재건되었 다는 뜻이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의 건축물은 자취가 사라졌기 때문 에 우리는 지혜의 창고가 어떻게 생겼는지, 독특한 단독 건물로 존재 했었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는 남은 흔적을 통해서 지혜의 창고를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어마어마했고 바그다드뿐 아니라 아랍 제국 전체를 배움의 중심지로, 새로운 형태의 지식 보존과 생산이 개발된 곳으로 만들 었다. 어쩌면 지혜의 창고는 단독 건물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 번역, 종합한다는 아이디어, 즉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다른 문화의 산물을 대하는 태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이븐 시나는 한곳에서 꾸 준히 작업하거나 자기 책을 계속 소유하는 사치조차 누리지 못했지 만 그의 저작은 매우 중요했다.
바그다드에서 시작되어 이븐 시나가 완성한 번역 프로젝트는 아 랍 제국 덕분에 바깥으로, 점점 더 거대해지는 영토의 가장 먼 가장 자리까지 뻗어나갔다. 곧 이슬람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될 델리에서는 어느 술탄이 '치유The Healing'라는 이름이 붙은 이븐 시나의 가장 영향 력 있는 숨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아한 사본 제작을 의뢰했다. 
- 그가 바로 무함마드 이븐 투글루크이고, 그의 아들은 장차 아소카 석주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어쩌면 피루즈 술탄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이븐 시나의 사본을 보고 먼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 른다.
동시에 지혜의 창고는 서쪽으로 이베리아반도까지 영향을 미쳤고 아랍 세력은 그곳에 유럽 최대의 이슬람 지역을 만들었다. 이 경로를 통해서 이븐 시나의 저작과 바그다드 번역 프로젝트가 서유럽에 전 해졌다. 그 결과 재탄생, 즉 르네상스라는 잘못된 이름의 문화 차용 이 발생한다.

- 문화사에서 종종 그렇듯 파괴 세력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십자군은 아랍에서 학자들이 쓴 지식의 요약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발전했고 그리스 철학의 아랍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 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 카이로, 알 안달루스에 서 유입되는 문헌이 증가했고,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이 들어왔다. 기독교 작가들은 잃어버렸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을 발견했고(아랍 학자들이 아닌 유럽인들에게만 잃어버린 저작이었다), 이븐 시나와 같은 양식으로 숨마를 쓰기 시작했다. 유럽의 지식 생산 을 바꾸어놓은 이러한 유입을 두 번째 부흥으로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재탄생은 아니지만 경쟁하는 두 제국의 문화 접촉이 늘어났 을 뿐만 아니라 키케로 같은 고전 작가에 대한 흥미가 새롭게 살아나 면서 부흥과 차용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부흥인 동시에 수입이지만 그래도 부흥이라 부를 수 있다 면)의 영향이 수녀원과 수도원, 궁정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고, 무엇 보다도 이탈리아(볼로냐), 스페인(살라망카), 프랑스(파리), 영국(옥스퍼드)에서 서서히 등장하던 대학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은 그때 이후 지식 생산을 형성해 온 새로운 배움의 중심 기관이고 아랍 지혜의 창고에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일부 공청회와 저술(숨마) 형식, 심지 어는 특별한 졸업 가운이나 논문 심사처럼 대학과 관련된 일부 명칭 과 의식은 아랍에서 차용한 것이다.30 (이베리아반도와 유럽 전역 대학에 서 발달한 독특한 독서 관행과 주석은 유대교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 대륙이 스스로를 전적으로 기독교라고 간주할지, 어쨌든 이 슬람교는 아니라고 간주할지를 둘러싼 논쟁에 비추어볼 때 아랍의 사상과 제도가 12세기 유럽에 끼친 영향은 특히 중요하다. 둘 중 어 느 쪽을 택하든 말이 되지 않는다. 12세기의 부흥은 기독교 유럽을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그 덕분에 유럽은 이슬람 사상가들이 그리스 및 로마의 영향과 페르시아를 비롯해 멀리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의 영향을 결합해서 쓴 철학적 저술을 물려받았다.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와 사상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 이제 와서 그 둘 을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된다.

- 마침내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끄는 네 척의 배는 이슬람교도 항해사 들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기 쁨에 넘쳤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들에 감탄했다. 시장에는 향신료와 보석이 넘쳐났고 항구는 북적거렸으며 교역이 활발했다. 그렇다, 마 침내 아랍 세력이 지배하는 중동을 우회하는 항로를 찾아낸 것이다. 더 좋은 점은 인도 어디를 가든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 성인들이 인간의 코 대신 코끼리 코를 달고 있거나, 팔이 너무 많거 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가마 와 동료들은 이런 사소한 부분을 선뜻 무시했다.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땅에서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사이에 섞여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불만은 딱 하나였다. 여기서도 이슬람교도들이 해상 무역을 지배하면서 기독교 원주민들에게 온갖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했다. 그러 나다가마는 성가신 이슬람교도 경쟁자를 밀어내고 기독교도로 추 정되는 대군주들과 거래를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다가마와 동행했던 승무원과 승객들이 설명한 인도에 대 한 첫인상이었고 처음에는 이들의 의견이 포르투갈의 태도를 좌우했다. 그러나 반세기 후 카몽이스가 인도로 떠났을 때에는 포르투갈 도 초기 기록에 오류가 얼마나 많은지 이미 깨달았다. 아프리카 동부 에 전설 속의 강력한 기독교 왕은 없었다(포르투갈인들이 전쟁 중이던 에티오피아인들과 접촉해 이슬람교도에 맞서 싸우던 그들을 돕기는 했다). 기독교 성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도 조각상은 사실 힌두교 신이었다. 그리고 인도아대륙은 부분적으로 무슬림 통치자 무갈의 지배를 받 았는데 그는 현지의 힌두교 통치자를 내버려두거나 그들과 동맹을 맺을 때가 많았다. 카몽이스는 새로 알게 된 지식을 서사시에 넣음으 로써 다가마의 첫 항해가 만들어낸 심각한 오해를 일부 바로잡았다. 다가마가 인도의 이슬람교도 및 힌두교도와 접촉한 후 또 다른 충 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그가 가져온 물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사려 하지 않았다. 다가마가 준비한 선물과 견본은 우스꽝스러 울 정도로 조야했고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다가마와 동행한 군 인과 선원은 비싸게 팔 생각으로 직물 등의 상품에 돈을 투자했지만 포르투갈에서 구입한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음 을 알아차렸다. 이곳에서는 향신료뿐 아니라 거의 모든 물건이 더 값 비싸고 좋았으며 고국에서 보기 힘든 보석이 시장에 가득했다. 포르 투갈에 비해 장인은 솜씨가 더 좋고 상인은 더 부유했으며 궁전은 더 웅장했다. 이러한 부는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사람 들은 또한 유럽에서 본 것보다 훨씬 정교한 고대 유적에 감탄했다. 그들은 인도양의 부유한 교역망에서 가난하고 낙후된 이는 다름 아 닌 자신들임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24
포르투갈인과 만나 선물을 교환한 힌두교도 왕들은 이 허술한 여행자들이 향신료 무역을 위해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왔지만 팔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자 몹시 실망했다. 카몽이스의 서사시에서 다가마는 이처럼 미적지근한 환영을 이슬람교도들 탓으 로 돌리며 '나는 그저 탐험가로서 왔을 뿐"이라고 변명했고, 두고 보 라고, 다음번 돌아올 때는 "얼마나 대단한 상품을 살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다지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니었다.

- 루베르튀르의 성공은 전 세계 식민주의자들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옛 아프리카 노예들이 통치하는 국가가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고 제재와 위협으로 반격했다. 아이티는 제국 열강 의 공격에 포위당한 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아이티 혁명은 오랫동안 세계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미국과 프랑스에 초점을 맞춘 혁명 시대의 역사에서 제외되 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었다. 19세기에 아프리카계 미국 인 작가 윌리엄 웰스 브라운은 전기 시리즈를 쓰면서 투생 루베르튀 르를 포함시켰고, 사회 개혁가이자 노예 제도 폐지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역시 루베르튀르에게 존경을 표했다. 에티오피아 서사시 《케브라 나가스트》에 시선을 돌려 아프리카 고대 문명의 유산을 주 장하고 1915~1934년 미국의 아이티 점령에 저항했던 마커스 가비 역시 그를 존경했다.
- 1938년 카리브해 지역 역사학자 C. L. R. 제임스는 《흑인 자코뱅 당원》에서 투생 루베르튀르를 독립과 혁명의 역사 중심에 놓았다. 그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였다. 제임스는 유럽에서 파시즘이 부 상하던 시기에, 유럽 식민제국 대부분이 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가 곧 식민 지배자들을 몰아낼 것이 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때 투생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아프리 카도 깨어날 것이다."4
생도맹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계몽주의의 변방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다. 생도맹그야말로 계몽주의 사상의 힘과 모호함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도맹그는 무엇보다도 사상 자체 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인이 사상을 포착하 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야만 한 다. 철학자 G. W. F. 헤겔은 나폴레옹이 시대정신의 구현이며 말 등 에 탄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 렸으니 딱 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루베르튀르가 더 좋은 예였을 것이 다. 그는 말 등에 걸터앉아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전 세계 지도를 다 시 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진보하는 역사라는 개념은 해방과 민주화를 통한 정치적 발전이 든, 강력해진 기계를 통한 기술적 발전이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 은 물건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물질적 발전이든, 스스로 계속 발전하 고 있으며 이를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발전이 어디서나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각 분야의 발전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결합했고 영국에 사는 사람들, 적어도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정치적 해방,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기술 혁신, 식민지 영토에서 짜낸 부의 축적이 만들어낸 궤도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진보가 여러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는 생각은 예상치 못한 결 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한 해가 지나 면 다음 해가 온다는 사소한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갈수록 과거를 낯 설게 만드는 변화로 인해서 질적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모든 것은 변 화하며 새로운 환경이 사람들과 그들의 삶과 경험, 생각과 감정까지 바꾸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무작위적 변화가 아니었다. 온갖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변화를 겪었다. 중요한 것은 변 화를 한 방향, 즉 앞을 향해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었 다. 그 결과 과거는 축소되고 쇠퇴했다. 건물이 파괴되고 필사본이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한다는 것은 곧 현재와 과거 가점점 더 멀어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 들을 복원하거나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물 관은 과거로의 회귀이자 방문객들이 잠시나마 시간의 흐름을 거스 르게 해주는 타임캡슐이었다.

- 과거의 편린을 보존하려면 물건을 복원하여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재와 무척 달랐던 과거에 대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믿었는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과 거는 현재와 무척 다르기 때문에 고대 언어로 쓰인 문헌처럼 주의 깊 게 해독하고 재구성해야 했다. 문헌의 연대 측정 방법을 갖춘 문헌학이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고 과학이 또 다른 모델을 제공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을 면밀히 조사하는 모델, 가설을 시험하고 증거에 기초한 엄밀한 연구와 회의론을 통해 생각을 검증하는 모델이었다. 과거를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의 이름은 사료편찬학이었다.
19세기 역사가들에게는 검토하고 배울 수 있는 오래된 모델이 많 았다. 이 책에 실린 정보는 대부분 과거의 연대기 기록, 여행기, 서지 학자와 수집가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집트 사제들부터 투키디 데스 같은 그리스 작가들,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에서 일했던 학자들, 이야기를 구전으로 보존하고 전달한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들 출처와 모든 형태의 증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서야 과거에 대한 글을 쓸 때 가설을 검증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역사적 변화라 는 개념에 따라 반증을 검토하는 구체적 프로토콜을 따르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가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역사의 핵심이 "과거 경험의 본 질을 밝히는 것"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 우리는 여전히 역사주의 시대, 즉 꼼꼼하게 조사해서 쓴 역사 소 설들(보통 역사적 자료의 목록을 제공한다)과 박물관, 원본, 과거의 단편, 도서관과 문서고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세기 이후 세상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 왔고, 따라서 과거는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인간은 어디서나 낯설고 이해우리는 여전히 역사주의 시대, 즉 꼼꼼하게 조사해서 쓴 역사 소 설들(보통 역사적 자료의 목록을 제공한다)과 박물관, 원본, 과거의 단편, 도서관과 문서고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세기 이후 세상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 왔고, 따라서 과거는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인간은 어디서나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잔재와 마주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되살리고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상실감을 피할 수 없 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고학 유적지부터 박물관 과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보존 장치를 만들었고 역사가, 숙련 된 큐레이터, 소설가 같은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 영원히 잃어버릴 뻔 한 과거를 되살려냈다.
우리는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과학 덕분에 과거에 대한 많은 지식 과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분야의 많은 이론가 와 실천가들이 고급문화, 걸작, 문명의 표식을 나누는 기준이 무척 편협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과거를 다루는 과학을 추동하는 진보라는 개념 때문이며, 누가 앞서고 누가 뒤처졌는가에 대한 편향된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과거를 다루는 과학은 사람들 이 무엇을 발굴했는지 알려줄 수 있지만 그 물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그것은 후대인 우리 가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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