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사역사학과 환국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 『삼국유사』를 오독해서 '환국' 이 등장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因의 이체자 문제를 넘어서서 당 대의 많은 사료가 '확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학자의 오독 때문에 '환국'이 등장하고 민족 자존감을 앙양시켜야 했던 역사가들이 '한국'을 주창하면서 잘못 읽은 단어가 널리 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이 과정이 바로잡혀가던 중에 유사역사가들이 '위대한 환국'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그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다. 애초에 잘못된, 있지도 않은, 사상누각이라는 말도 아까운 해프닝이 바로 '환국이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했는데, 환국의 난이야 말로 우리 역사상 사료 오독 제1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1966년에 문정창이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研究를 내놓 으면서 일제가 '환국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을 폈다. 식민사학자 이마 니시 류가 사서를 변조해가면서 환국을 말살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반일 감정에 편승해 시민들에게 먹혀들었고, 이후 유사역사가들의 단골 메뉴 가 되었다. 문정창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일제의 공무원으로 근무 하기 시작해서 1932년에는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942년에는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1943년에는 황해도 은율군수, 1945년에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 과장을 지낸 친일파다.
- 흑백논리를 벗어나야
유사역사가들의 큰 문제점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들은 신 채호가 한 말을 금과옥조로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식민사학이 된다는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다. 신채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 연 구를 병행했다. 그가 볼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고, 시대도 그를 학 문에만 매진하게 도와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 날 잘못된 것이 있으며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유사역사가들은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이 이병도의 학설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처럼 자꾸 거짓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병도의 학설 역시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사역사가들은 신채호의 주장 중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면 식민사학이라고 하고, 이병도의 주장 중 받 아들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흑백논리 라면 학문은 전혀 발전할 수 없는 고정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은 1960년대부터 발현해서 1970년대를 거치 며 증폭되었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이 태동도 하기 전에 살았던 신채 호가 유사역사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신채호를 역사학계에 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는 등의 거짓 선전선동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신 채호는 그렇게 유사역사학의 방패막이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 사학의 소중한 사람이다.

- 서로 다른 해석이 모여 발전을 이룬다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교과서에 실리면서 학계의 주류 통설처럼 여겨 진 면이 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한국사』(1995)에서는 백 제의 요서경략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학의 통설은 사실이 아닌 쪽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1974년 요서경략설이 실린 이후 2007년 한국사 교과서 개정안에 와서 야 요서경략설과 관련해 논란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라고 했고, 2015년 개정안 집필 기준에서 요서경략설이 빠졌다. 역사학에서 하나의 설이 교 과서에서 조정되기가 이렇게 오래 걸리고 어려운 것이다.
백제가 요서 지방을 차지하고 군을 설치하였다는 기사는 중국 정사에서 확인된다. 기사 작성 시점과 그 일이 있었던 시점이 멀지 않고, 백제와 중국 사 이에 사절의 왕래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해 석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의 논란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 도록 한다. (07개정 역사과 집필기준)
백제가 요서경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논문이 나오자 그에 반대하여 요서와 백제 간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논 문이 또 나오고, 그에 대해 다시 연구하는 논문이 나오면서 역사학계는 요서 지방의 변천을 두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가령 385년 요서 지방에 서는 후연 장군 여암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암은 후연에 잡혀온 부여인 후예로 여겨진다. 그런데 백제 왕실은 부여 씨로 보통 여 씨로 쓴다. 이런 사실이 백제가 요서를 경략한 것처럼 혼동하게 되는 요소였을 가능성도 높다. 반론 속에서 연구가 깊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립대 안정준 교수는 백제가 남조 국가들을 속여넘긴 것이 아니 라, 내막을 뻔히 알면서도 중화 중심의 국제적 권위를 내세움과 동시에 정권의 안정을 기하고자 백제가요서를 차지했다고 허풍을 친 것을 받아 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제 요서경략설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 것이다. 앞으로 이 주장을 두고 더욱 치밀한 검증이 있을 것이다.
역사학은 이와 같이 같은 사료를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서 발전해 나간다.
- 백제인의 선택
그럼 임나일본부라는 건 대체 뭘까? 왜 「일본서기』 안에 들어 있을까? 『일본서기』 안에는 백제 관련 사료가 많이 있다. 어떤 기록은 『삼국사 기보다 양도 많고 정확하여 백제 역사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백제 기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상당히 많은 백제인이 왜로 도망쳤기 때문에 벌어 진 일이다. 백제 망명객은 당시 왜에 비하면 학식이 훨씬 뛰어난 사람들 이었다. 이들은 신라를 향한 커다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고, 왜가 자신 들과 같은 이해관계에 놓이길 바랐다. 그런 결과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 벌했다는 이야기에 이리저리 살을 붙였고, 더 나아가 백제는 왜에 충성 하던 나라고 가야 연맹은 모두 왜가 지배한 곳이라는 역사 왜곡을 감행 한 것이다.
- 유사역사학과 임나
유사역사가들은 임나와 임나일본부를 구별하지 않는 전략을 쓰고 있 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임나일본부를 인정 하는 학자는 한 명도 없는데, 유사역사가들은 역사가들이 임나일본부를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임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 들이민다.
임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광개토왕비를 비롯해서 여러 사료에 등장 하는 나라 이름이다. 임나와 임나일본부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이것을 섞어버리고는 아예 임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 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가야 문화인 옥전고분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다라국 같은 경우도 『일본서기에 그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부정 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 말은 <양직공도>라는 중국 사료에도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말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일본서기를 이용해서 천황의 가계가 백제에서 온 것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큰 힘을 기울인다. 그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엄정한 사료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 에 맞으면 집어오고 다르면 버리는 것뿐이다.
세계적으로도 임나일본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는 역사의 전반적인 추세에서 말이 안 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케임브리지 중국사의 경우에도 임나일본부의 허상을 잘 지적하 고 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가들은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여 되풀이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일본이 학계에 돈을 뿌려서 그렇다는 말도 한다. 그런 돈이 어디에 있는지 진짜 궁금하다.

- 다이나믹한 고대
고대에 문화가 전파되는 가장 빠른 길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승려들이 이동해서 중국으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했듯이, 사람 들이 직접 이동했다. 왜와 가까운 곳의 신라는 왜와 늘 충돌하면서 불편 한 관계였는데, 좀 더 멀리 있던 백제는 왜와 가깝게 지냈다. 신라라는 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두 나라가 가까웠던 만큼 많은 인적 교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왕 인. 담징화 등을 생각하며 한반도에서 일방적으로 일본에 문화 전 파가 있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몽골과 고려 사이에도 문화를 주고받은 것처럼 백제와 왜, 가야와 왜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신라 초기에 대신이던 호공은 왜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탈해 이사금尼師今(재위 57~80)도 왜국의 동북쪽에서 건너왔다고 나온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뿐만 아니라 남해안가에 있는 일본식 고분, 부여·공주 인근에서도 발견되는 일본식 고분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지만 교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자. 어떤 세 력이라고 하기에는 고분의 수가 너무 적다. 이들 고분은 6세기에 들어가 면 모두 사라진다. 이들 왜인은 한반도에 흡수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크 다. 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있던 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를 뒤흔들 수 있 는 강대한 세력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해서 일본식 고분 이 한반도에 존재하는지를 치열한 논쟁을 통해 규명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논쟁을 보면 역사가 완성된 형태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논쟁을 거쳐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 무영탑 전설은 1740년에 나온 화엄불국사 고금역대 제현 계창기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에 처음 실렸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이 전설의 내용을 채록하면서 누이를 아내로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누이가 흔히 아내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무영탑』전설은 맺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로 끝났기 때문에 현진건 이후로도 그 결말이 수시로 변했다. 함세덕이 만든 연극 『무영탑에서 는 아사녀가 자살에 실패해서 아사달과 재회하는 해피엔딩이 되었고, 해 방 후 만들어진 여성국극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시신을 안고 영지로 걸어 들어가 자살한다. 아사달이 불상을 만드는 이야기는 사라져버렸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무영탑>에서는 아사달이 아사녀의 환상 을 보면서 영지로 뛰어들고 아사달을 사모했던 귀족 딸도 불 속에 뛰어 들어 죽는 것으로 표현했다.
옛날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다시금 재창작되어 마치 그 이야기가 있었 던 사실처럼 변하기도 한다. 아사달, 아사녀와 무영탑도 그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조선시대에도 피가 돌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긴다든가, 그 피에서 대나무가 자란다든가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 문인 홍세태洪世泰는 『유하집에서 피가 돌 속에 스며들 리 에서 없다는 점을, 정동유鄭東愈는『주영편에서 송도에 전해오는 글 가 운데 선죽교 전설을 전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선죽교 변善竹橋(1938)이라는 글에서 남 효온의 글에 정몽주가 죽은 장소가 적혀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광운대 김인호 교수가 「정몽주 숭배의 변화와 위인상」(2010)에서도 잘 논증한 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상징물의 큰 힘에 매료되면 재미도 없는 '사실'은 굳이 따르려 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 이후 형성된 믿음,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깨어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일반 대중 에게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우리는 왜 진짜 사실보다 허황한 이야기에 더 마음 이 끌리는 것일까?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민족 비하로 망가진 한국인의 자존 심을 채워줄 위인들이 필요했다. 이때 소환된 위인 중 하나가 충절의 상 징 정몽주였다. 이때부터 개성 관광의 필수적인 역사 코스로 선죽교가 등장했다. 선죽교의 핏자국, 대나무 전설은 눈으로 보면서 더욱 확실하 게 각인되었다.
전설은 전설로서 가치가 있다. 관광지를 만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야 기 창작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온 이야기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필요 는 없다. 하지만 역사를 논할 때는 전설과 사실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해 야 한다. 그것이 역사학의 의무이기도 하다.

- '주초위왕'이 처음 등장한 때는?
정말 벌레가 나뭇잎에 발라놓은 꿀을 따라서 파먹을 수 있을까? 나뭇 잎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꿀을 좋아할까?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꿀 을 좋아할 리가. 마치 사슴을 잡으려고 날고기를 놓아두었다거나, 늑대 를 잡으려고 당근을 놓아두었다는 것과 같다.
인하대 생명과학과 연구진에서는 실제 나뭇잎에 글자를 꿀물로 써서 벌레가 이것을 먹는지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이 실험 결과는 2018년 한 국곤충학회 학회지 『Entomological Research』 48호에 'Validation of 走肖 爲王: Can insects write letters on leaves?"라는 제목으로 실리기까지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벌레는 이 꿀물 글자에 입도 안 댔다. 이 실험에서 총40종의 나뭇잎이 동원되었다.
벌레가 꿀물 글자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럼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어떻게든지 있긴 있었을까? 나뭇잎에 '주초위 왕'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제11대 왕 중종 때가 아니 라 그보다 한참 후인 제14대 왕 선조 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에 사관이 따로 적어놓은 이야기다.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였다. (중략)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 워 대궐 안의 어구(개천)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기묘사화는 1519년에 일어났고, 「중종실록」은 1550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선조실록은 1616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다. 사관은 '주초위왕' 전설을 진짜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실록」에 빠졌기 때문에 굳이 적어놓겠다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 '주초'라는 전설이 있었다
「중종실록」에는 심정이 조광조를 모함한 내용이 적혀 있다. 심정 이 '주초대부走肖'이라는 말을 적어서 궁궐 안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앞서 본 「선조실록에서는 남곤이 한 일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선 심 정이 한 일로 달라져 있다. 남곤과 심정은 한 세트처럼 같이 묶어 이야기 하는 때가 많으니까 그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럼 '주초대부필'이란 무슨 뜻일까? '주초'는 조씨를 가리키는 것이라 고 이미 말했다. '대부'는 벼슬 이름이다. '필'은 붓이라는 뜻이다. 즉, '주 초대부필'은 '조 대부의 붓'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이 대체 무슨 모함에 이 용된다는 것인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 사실 이 글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있던 수보록이라는 예언서에 적혀 있던 글이다.
수보록에는 '목자장군검 주초대부필 비의군자지
부정삼한격'이라는 말이 있었다. '목자'는 이 씨를, '비의'는 배 씨를 가리키는데, 각각 태조 이성계, 조준趙浚, 배극렴克廉 을 뜻했다. 조준과 배극렴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말하자면, '주초대부필'은 조선 개국과 관련된 예언 문장이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태종은 수보록」은 말이 안 된다며 이런 예언서를 모두 수거해버렸다. 「수보록」에 있는 내용도 '주초위왕' 이야기처럼 시시각각 달라졌다. 다시 말해 이 책 역시 조작되었음이 분명하다. 태종은 수보록」 같은 예언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빨리 불살라버리게 함이 이씨 사직에 있어서 반드시 손실됨이 없을 것이다."
조선 개국을 위해서는 예언이 필요했지만 개국 이후에는 이런 말이 반란에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도고의 찬양과 이순신 자살설에 대하여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 鄕가 러일전쟁 축하연에서 이순신을 존경하고 자신을 넬슨Horatio Nelson에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이 역시 출전을 알 수 없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 야기로 보인다. 어떤 책에서는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한 말이라고 나오 기도 한다. 처음 이 일화가 언급된 책은 1964년에 나왔고 그 책에도 출처 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전에는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며 넬슨에 비교하곤 했는데, 러일전쟁 이후에는 도고를 동양의 넬슨이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있지도 않 았던 도고의 말을 넣어서 이순신을 칭송할 필요는 없다.
- 이순신이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일부러 자살하고자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이순신 은 이전에도 일본군의 조총에 어깨를 맞은 적이 있다.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일부러 총탄에 노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한참 뒤인 숙종 때 처음 나온 이야기다. 갑옷을 벗었다고 반드시 죽으리란 보장도 없다. 노량해전은 야간에 접근전으로 펼쳐진 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전함은 200척이 침몰되었고 50척만 빠져 나갔다. 일본으로 돌아가 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순신은 악착같이 싸웠고 그러다가 유탄에 맞아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자살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하는 것 은 목숨을 걸고 싸운 이순신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関 中을 보면 정조가 세손 시절 지워버린 듣지도 보지도 못할 끔찍한 일 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연쇄 살인마 였다.
사도세자는 스물세 살인 1757년 6월부터 살인을 시작했다. 내시를 죽 인 뒤 그 머리를 잘라 사람들에게 내보이기까지 했다. 사도세자가 죽인 내시, 궁녀가 백여 명이라는 말까지 있다. 광증이 깊어진 것이다.
사도세자에 동정적이던 남인 쪽 사람이 쓴 『대천록待錄』이라는 책에 도 사도세자가 백여 명을 죽였다고 나온다. 심지어 인두로 지지는 고문 도 가했다는 사실까지 적혀 있다.
사도세자는 대체 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일까?
- 1757년 2월에 사도세자를 아끼고 영조와의 관계를 잘 풀어보려고 노 력했던 정성왕후가 숨졌다. 잇달아 숙종의 계비였던 인원왕후 숨지자 사도세자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고 결국 그런 불안감이 살인으로 나타난 것 같다.
혜경궁 홍씨는 이 참혹한 일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알렸다. 영빈 이씨가 놀라며 영조에게 고하자고 했으나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연달아 죽어 나가니 영조도 결 국 눈치를 채고 말았다. 1758년 2월에 사도세자를 불러 물었는데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엇나간 원인에 자기의 엄한 훈육이 있는 것을 알고 자책했는데, 이미 때가 늦은 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기록이 보인다.
"정축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 는 궁녀와 내시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 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옷을 갈아입다 성질이 나 시중을 들던 후궁 경빈 박씨를 때려죽였다. 그뿐 아니라 경빈 박씨 소생의 두 살짜리 아들에게도 칼을 휘두른 뒤 연못에 던져버렸는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연잎에 걸린 아이를 건져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 정조는 아버지의 광증을 부인하지도, 그것을 드러내어 이야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위해서 현륭원隆閱라는 묘지명(석판에 새겨 무덤 에 함께 넣는 글)을 썼다. 이 묘지명에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조가 지은 묘지명이 이미 있었다. 정조는 이 묘지명을 없애 버리고 자신이 지은, 아버지를 찬양한 묘지명을 넣었는데, 1968년에 영 조의 묘지명이 발굴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조가 지은 묘지명에 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었겠느냐마는 세자 때로부터 이와 같은 것은 내가 들은 바 없다. 본래 풍요롭고 편안한 곳에 태어났으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미쳐버리기에 이르렀다.
- 변화하는 역사적 사건의 해석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잘못된 말 두가지를 비판했다.
하나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는 주장이다. 사 도세자가 죽을죄를 저질러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정조는 반역자의 아 들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 다른 하나는 사도세자가 병이 없었는데 영조가 모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죽였다는 말이다. 이 점 역시 사도세자의 광증을 자세히 기술해서 잘 못이라는 점을 밝혔다.
어떤 사건은 일어난 뒤에 정치적 사건으로 변하게 된다. 사도세자 사 건도 그러했다.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었을 때 정권은 노론에게 있었 으므로, 이 비극의 책임이 노론에게 있다는 정치적 공세가 생겨났다. 정조는 이런 정치적 갈등을 조정의 질서를 잡는 데 이용했다. 물론 아 버지의 잘못을 가려주고 추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세자가 소론을 위해서 뭔가를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조 즉위 후에 소론이 이 사건을 이용해서 노론을 공격했다. 후대에 벌어진 일로 과거 사건에 대한 추론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증거(사료)가 있어야 한다.
영조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미쳐버린 세자는 폐해야 했고, 총명한 세손이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 로 만들어서 죽게 한 후 다시 세자의 지위를 복원해서 세손이 왕위를 이 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1960년대부터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는데, 최근에 와서 이 해석은 심각한 도전에 부딪혔다. 새로운 증거와 역사적 사건의 해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 기존의 당쟁설 주장은 광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중록』을 거짓 말 책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세자의 광 증 관련 증거는 매우 많다. 따라서 사도세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제 더는 주장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당쟁설은 사도세자가 총명하고 개혁 의지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전제가 무너진 셈 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용한 당파간 싸움은 임오화변의 결과이지 그 원 인이 아니다.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결론을 내려 놓고 증거를 수집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진실을 찾아 내기가 어려워진다. 역사 연구는 새로운 증거와 해석에 따라 기존의 관 념이 변화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 정조의 어찰 정치
정조는 신하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는 공작 정치를 운용했다. 왕 이 보내는 편지를 '어찰'이라고 부른다. 특히 비밀리에 보내는 어찰은 '밀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조만 이렇게 보낸 것은 아니고 다른 임금도 비밀리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선조, 효종孝宗(재위 1649~1659)도 신하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 다. 그러나 정조는 다른 임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편지를 보냈다. 신 하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 혜경궁 홍씨나 외조부 홍봉한 에게도 편지를 자주 쓴 걸 보면 편지 쓰는 걸 무척 즐긴 모양이다.
-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어찰 중 채제공, 조심태, 홍취영에게 보낸 것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정조의 어찰 중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 제일 많아 지금까지 297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부터 정 조가 죽기 직전이던 1800년 6월까지 4년 동안의 어찰이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어찰을 모두 없애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이것을 없애지 않고 보관했다. 이렇게 해서 정조의 비밀 정치가 오늘날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심환지는 영조 후반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 사도세자가 비명에 죽은 임오화변 이후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세력을 노론 벽파라고 부르는데,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영수였다.
정조의 등극을 반대한 세력이니 정조 즉위 이후 세력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 자신을 호위한 홍국영洪國榮을 중용했는데, 홍국영이 과도하게 권력을 부리기 시작하자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 김종수였다.
얼핏 보기에는 정조와 대립한 노론 벽파가 정조에게 도전한 것 같지 만, 이 상소는 사실은 정조가 김종수를 시켜서 올리게 한 것이었다. 즉 정 조는 홍국영을 내치려 마음먹고 그를 위해 노론 벽파의 신하를 부리는 공작 정치를 한 것이다. 김종수가 올린 상소문을 지은 사람이 정조였으 니, 자기가 지은 상소문을 시치미 뚝 떼고 받아보았다는 이야기다.
정조는 이처럼 신하들을 어찰을 통해 비밀리에 부리는 무서운 정치가였다.

- 김정호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동여지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 잘못 알고 있는 것의 사실을 정리 해보자.
첫째,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하나만 만들지 않았다. 김정호는 <대동 여지도>뿐 아니라 지리인문서 동여도지東輿志」, 『여도비지輿圖備誌」, 대동지지를 편찬하였고, 지도는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등을 제작하였다.
둘째, <대동여지도> 판목은 대원군에 의해 불살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판목이 남아 있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판목을 통한 연 구로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더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셋째, 김정호는 옥에 갇혀 죽지 않았다. 김정호에 대해서 남겨진 기록 을 보면 지도가 압수당한 바도 없고 옥에 갇힌 죄인이 되었다고 볼 근거 도 없다.
넷째, 지도 유통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지도를 민간 이 제작하거나 유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조선 전기의 상 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물품 유통이 활발해지자 지도가 꼭 필요하게 되었다. 관리와 사대부는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수진본 지도를 애용했고 목장지도, 궁궐도, 역사부도 등 다양한 지도 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다섯째, <대동여지도>는 조선 지도의 계승자다. 최한기崔漢綺는『청구 도제에서 김정호가 어려서부터 지도에 깊은 뜻을 두고 지도 제 작의 장단점을 검토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정호가 최초로 만든 지도인 <청구도>는 정조 때 만들어진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를 참고한 것이고 <해동여지도>는 신경준이 만든 <조선지도朝鮮地圖>를 변형한 것이다. 여섯째, 김정호가 직접 팔도를 답사하고 백두산을 올랐다는 말은 근거 가 없다. 김정호 당대의 현실을 보아도 타당성이 없다. 이 이야기는 일본 지도제작자 이노 다다타카의 일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내용은 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다. 김정호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우형, 이상태 등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1997년에 제대로 된 내용으로 김정호 이야기가 개정되었다.
김정호는 고위 관료인 신헌과 최한기, 최성환煥 등 사대부들의 도움을 받아 지도를 제작하였고 판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기존의 지도를 섭렵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각종 지리서를 편찬한 위대한 지도 편집자였다.

- 간도 문제가 일어나다
청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일정 구간을 공터로 비워두고 사람들 이 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봉금령封禁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조 선과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한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지켜 지지는 않았고, 조선 사람들이 종종 땔감을 구하러 넘어가곤 하다 그곳 에 정착한 청나라 사람과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데 두만강 쪽은 청나라 에서도 아주 변경이어서 그랬는지 청나라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 다. 조선 말의 어지러운 상황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가는 유민이 있었다. 이들은 청과 조선의 국경 사이 빈 공간, 즉 간도에 정착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간도란 이렇게 두만강 북쪽 일부 지역이다. 지금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의 투먼시와 룽징시 일부다.
일본이 근대에 들어와 만든 조선 지도를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약간을 조선의 영토로 그린 지도가 있다. 바로 그 지역이 봉금령으로 사 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 곳이다. 일본은 그 땅을 청나라가 영토로 간 주하지 않은 땅으로 생각해서 조선의 영토로 잡았다. 이런 사고 방식은 후일 간도 문제에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1880년(고종 17년)에 봉금령을 해제했는데, 그제 야 두만강 너머에 수많은 조선인이 넘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이를 항의했다. 이런 문제는 쉽 게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은 울릉도를 비워두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는데, 그렇다고 울릉도를 영토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정기 적으로 순시하며 일본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비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인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면 안 되었다. 그것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두만강 너머에 조선인이 다수 넘어가 땅을 개간하고 있다는 (그래서 이 지역을 개간한 땅이라는 뜻으로 '간도'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을 청나라가 알았기 때문에 국경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회담을 열게 되었다. 이 회담은 1885년(고종 22년)과 1887년(고종 24년)에 두 번 열렸다. 1차 회담 때 조선 측 대표 이중하는 청나라가 깜짝 놀랄 주장을 했다.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 이름이라고 한 것이다. 이중하는 어떻게든지 이미 조선인이 개척한 간도를 유지하고, 싶어서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청나라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발하여 1차 회담은 종결되었다. 2차 회담 때 이중하는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 는 주장은 포기했다. 이중하는 1차 회담 후 직접 백두산에 올라가 답사를 해보았고, 그 결과 이런 주장이 통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이때 청 나라 측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지류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지류 를 국경선으로 잡고자 했고, 이중하는 가장 북쪽에 있는 지류를 잡고자 했다. 이 회담에서 이중하는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내 머리는 잘라갈지언정 우리 강역은 축소할 수 없다."
이 말은 간도를 내놓지 못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북쪽 경계를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유사역사가 중에는 이 주장을 교묘하게 1차 회담과 연결해서 간도 전체를 내놓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용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다.
청나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2차 회담도 결렬되고 간도 문제는 어정쩡하게 그냥 남아버렸다.
대한제국은 1903년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의 영 을 토화를 적극적으로 꾀했다. 이때부터는 다시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주장을 펼쳤다. 청나라는 강하게 반발했다. 청나라 압력이 거세지자 정 부는 이범윤에게 돌아오라고 했는데, 이범윤은 말을 따르지 않고 간도를 지키다가 러시아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 일제와 간도 문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일본제국에 빼앗기고 말았 다. 일제도 간도를 대한제국 땅으로 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에 적극적으 로 간도 영토화를 꾀했다. 일제의 논리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있던 국 경지대는 주인이 없던 땅인데 압록강 너머는 이미 청나라가 차지했으니 두만강 너머는 조선이 차지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앞서 일본인이 만든 지도가 이미 강 북안을 모두 조선 땅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는데, 바 로 그런 인식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점령했다. 조선의 영토가 크면 클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유사역사가들은 흔히 일제가 커다란 조선 영토를 줄이려고 애 썼다고 주장하는데, 일제 입장에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고대 영토는 축소할 수도 있다고? 강력한 상대를 발 아래 꿇렸다면 더욱 자랑스러워지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다. 상대가 허약해서 볼 것도 없이 제압 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에 불과하다.
일제는 1907년 8월에 간도 룽징촌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까지 갔다. 그런데 1909년 9월 4일 돌연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고 대신 만주 에 철도를 부설하는 권리를 챙겼다. 일본 안에서도 이 점을 안타깝게 생 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에 만주국을 건설해버려서 자연스럽게 간도는 만주국 영토가 되었기 때문 에 이런 불만도 사라져버렸다.
만일 토문강이 정말 송화강 지류였다면, 일제도 그걸 가지고 청나라와 물고 늘어졌을 것이며, 이중하도 그랬을 것이다. 또한 숙종 때 경계표지 물을 세울 때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목극등이 두만강을 따라 바다 에 이를 때까지 살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증거를 따라가 논지를 펼쳐야 한다. 그 증거가 오늘날의 현실에 불리한 점이 있다고 해 도, 현실에 맞춰 왜곡해서는 안 된다.
두만강 북쪽 간도 지방은 조선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너가 개척한 땅이다. 그러나 과거부터 조선 영토는 아니었다. 만일 대한제국이 외교 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중하 같은 뛰어난 협상가, 이범윤 같은 뚝심 있는 행정가를 내세워 청나라와 협상을 거듭했다면 간도를 수중에 넣을 수 있 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란 원래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 않는 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과거에서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교 훈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 현재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식 민사관이란 식민지 치하에 있어야 성립한다. 유사역사학의 선전선동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해방된 지 80년 가까이 되어간다.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모는 프레임은 1960년대 등장해서 50여 년이나 써먹고 있 는 중이다. 아무리 역사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동네라 해도 이젠 좀새 로운 걸 보여주면 좋겠다.
유사역사학의 기본적인 논리 중 하나는 위대한 한민족의 고대사를 일 제 식민사가들이 감춰왔다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나라 역사학자도 답습 한다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가들은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이해해줄 수 도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뭐하러 그러겠는가? 그리고 일제 식민 사가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일본 고문서학의 체계를 세웠다는 구로이타 가쓰미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사 편찬과 조선의 고적과 유적을 조사, 보존하는 일에 전념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16년간 지속된 『조선사』 편찬 사업에서 구 로이타는 봄, 여름의 휴가와 연말연시에 조선으로 건너와 편수 기획을 지도하고 사업을 독려했다. 그는 1916년 발족한 고적조사위원회의 중심 인물이었고 1931년 총독부에서 예산을 삭감하자 조선고적연구회를 설 립하여 외부자금을 조달하여 고적조사 사업을 계속했다.
대체 구로이타는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조선의 고적을 조사하고 보존 하려고 했던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를 만 든 것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로이타는 바 로 그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조선의 고적은 또 왜 보존하고자 노력했을까? 심지어 고적 보존 유지에 대한 법안은 일본보다도 3년이나 앞서서 시행되었는데 이런 법안 제정에 앞장선 것도 구로이타였다.
구로이타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2년 동안 유럽과 이집트 등지를 방문하여 발굴 조사 보존 사업 등을 살펴보았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구 열강이 식민지의 유적을 어떻게 다루는지 학습했다. 그는 배워온 것 을 조선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럼 구로이타는 대체 뭘 배웠을까?
열강은, 식민지에 있는 유적 건설자는 위대했지만 그 후손은 몰락하여 과거 영광을 구현할 수 없는 처지로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서 유적을 보존했다. 너희는 이제 이런 위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모두 잃 어버린 패배자라는 것을 뼈에 새겨주고 싶어 한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과거 유적은 바로 식민지인이 있는 그 자리에 보존되어야 했다.
- 만일 일제가 위대한 환국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논리다. 유사역사가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현대에 만든 책이면서 그 지은이들을 고대 인물로 위장해 놓았다. 고대 인물이 고대 관념을 가지고 쓴 것처럼 날조한 책이기 때문에 그 책을 보면서 고대인의 관념을 연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위서라고 한다.
이유립은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빈 몸으로 남하했다. 그러니 집안에 비전의 책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70년대 가 되어서 갑자기 자신이 해방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면서 『환단고기』를 꺼내들었으니 이것이 위서가 아닐 도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위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 을 수 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신뢰할 수 있는 사서가 되는 것도 아니 다. 『환단고기』는 70년대까지 알려진 여러 가지 사료가 담겨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은 『환단고기』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역사기록이 들어 있으므로 믿을 수 있는 사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안에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을 양념처럼 뿌려놓는다. 우리 민족이 드넓 은 영토를 소유하고 중국, 일본, 여진 등을 모두 지배했다는 망상을 집어 넣은 것이다.
우리 역사는 왜 이렇게 못났는가라고, 중국과 일본한테 침략이나 당하 고 결국은 식민지가 되어버린 못난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웅장한 가짜 역사에 혹하게 된다. 그리하여 환단고기에 푹 빠진 추종자 즉 '환빠'가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1979년에 한문본이 출판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6년에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한글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였다. 이 책을 번 역한 사람은 임승국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승국은 『환단고기』를 위조한 이유림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에 속했던 사람이고 역시 월간 『자유』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국사찾기협의회'는 당시 국정교과서였던 『국사 교과서가 식민사관 및 좌경화되어 있다고 공격하면서 국수주의적 역사관으로 『국사 교과 서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한 단체다. 이들에 의해서 1981년에는 국회 에서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들 멤버는 국회 정치인을 동원할 수 있 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들을 이끈 수장은 초대 문교 부장관이었던 안호상浩相이었다.
- 안호상은 이승만 독재철학인 일민주의를 만든 사람이고 학원 의 병영화를 꾀해 학도호국단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임승국도 안호상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국수주의자였다. 이들은 극우적 성 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점을 별로 숨기지도 않았다. 임승국은 국회에 서 히틀러의 발언으로 훈계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에게 아첨을 떨며 국사 교과서 개정을 꾀하기도 했다.
『환단고기』가 등장하기 전에도 국사찾기협의회 회원들은 위대한 한민 족의 역사를 떠벌리고 있었다. 사실 『환단고기』는 이런 이야기를 집대성 한 책일 뿐이다.
역사는 고증과 비판의 학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가치와 신념에 의해 주장을 펼친다. 자신들의 가치와 신념에 맞는 증거만을 채택하고 그렇지 않은 증거는 기각한다. 그것은 잘 못된 것이거나 음모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민족을 위 해서 유리한 증거를 거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다른 나라도 다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가 있으니 다 른 아이도 건너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주장은 언뜻 역사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신념을 떠드는 사람을 가리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의 활동을 '유사역사학'이라고 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사이비역사학'이 라는 말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같은 뜻이다.
- pseudoscience라는 말이 있다. '유사과학' 또는 '사이비과학'이라고 번 역한다. 흔히 쓰이는 단어인데, 이를 두고 유사과학이 있으면 진짜 과학 이 따로 있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유사과학에 '학'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 니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눈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꼭두각시가 각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역사학처럼 보이게 치장 되어 있으나 역사학과는 다른 것이다. 유사역사학이 역사학의 일종이라 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인형에도 눈코입이 있고 팔다리가 있으니 사람이라 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이고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말이 나 마찬가지다.
- 유사역사가들은 위대한 조상을 창조해서 민족의 구심점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일부는 고대 사서의 모호한 구절을 과대해석하는 방법을 사용 했으나 더 대담한 이들은 날조된 역사책을 만들어냈다. 『환단고기』가 가 장유명하지만 이 책 하나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 이전에 이 같은 책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에 여러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필적할 괴서를 만들었다. 다만 환단 고기가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유명해졌을 뿐이다.
유사역사가들은 스스로를 '재야사학자', 또는 '민족사학자', 또는 '애국 사학자라고 부르면서 역사학자들을 '식민사학자', '이적사가', '용공사가', '매국사가', '친일파'라고 불러왔다. 이런 인식은 1960년대에 등장해서 1970년대에 확산되었다. 이들은 50년 동안 역사학계를 매도해왔다. 이 들이 사용한 이분법 프레임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상대를 악마화함 으로써 자신들 편을 만들어내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학자 를 악마화하는 방법은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독특한 방법이다.
- 과거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를 '강단사학자'라 부르고(이 용어는 원 래 유사역사학이 자신들을 대학 밖에 있는 '재야'라 칭하면서 이분법으로 사용한 것 이다)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학 박사학위 를 가지고, 심지어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유사역사학의 논리를 가지고 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유사역사학 쪽에서도 강단사학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추세로 변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역사학계의 우려가 있다. 유사역사학이라는 낙인찍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역사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정의되는가' 라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유사역사학'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금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돌이 있는데, 그것을 '시금석'이라 한다. 유사 역사학에도 시금석이 있다. 로널드 프리츠는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학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사료를 비판하고 증거를 통한 합리적인 추론을 해나가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에 서는 사료 비판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기록을 보면 사료 비판이라는 과정 없이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시 대와 공간을 뛰어넘으며 사료를 골라 먹으면서 자기만의 논리를 구성한 다. 그리고 기존 학설은 식민사학이라고 비난한다.
- 역사학과 유사역사학이라는 두 대립항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의 반대말이 유사역사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학 안에는 다양한 논의가 있고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 존재한다. 역사는 지 나가버린 과거의 흔적이며 그것을 누구도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진실로 모든 사람의 사고를 획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국정교과서였다.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위대한 고대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에게는 이미 정해진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서 위배되는 것은 배척해야 한다. 진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표에 위배된다면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이들은 한다. 역사학이 민족과 국가에 유용한 도구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심지어 유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인간이 살아온 과거를 살피면서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오는 학문이지 다른 국가와 민족의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다.

-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유래
5.16 쿠데타 후 한일수교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자 반대 시위가 거세 었다. 이때 반일 열기에 힘입어 일제강점기의 수난사를 쓴 책이 등장했 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일제강점기 동안 군수직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을 지낸 문정창이었다. '빼박'친일파인 그는 마치 고급 자료라도 가지고 있 는 척하며 책을 펴냈는데, 이 책 안에서 역사학계가 친일이라 일제강점 기 연구도 안 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때 역사학계를 친일파로 모는 프 레임이 처음 등장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역사학 전공자 를 친일파 집단으로 몰아서 유사역사가가 도덕적 우위를 장악하는 해괴 한 일이 벌어졌다.
- 한편, 1960년대에 이유립은 대전에서 대종교(단군을 신봉하는 종교)인으로 있다가 독립하여 자기 교를 이끌기 시작했다. 단단학회 교주로 올라 선 이유립은 대종교를 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가진 비전의 역사서인 『환단고기』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유립은 자신의 망상을 담은 여러 책을 만들어 각계에 보내며 호응을 해줄 사람들을 찾아 나갔다. 그때 이유립과 손을 잡게 된 사람이 초대 문 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었다. 이승만에게 일민주의(혈통에 기반한 극단 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이승만이 국시로 내세운 이데올로기)라는 파시즘 철학을 전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극우민족주의자였고 이유립과는 궁합 이 찰떡처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문정창, 안호상, 이유립 등이 모이면서 이들은 점점 더 역사학계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여기에 5.16 쿠데 타에 참여했다가 물러나와 군에 납품하는 잡지 『자유를 발행하던 박창암이 합류했다. 박창암은 자유를 유사역사학의 기관지로 변모시켰다. 1975년 10월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자유는 1976년 1월호부터 유사역사학 주장을 전파했다. 전군에 이런 잡지가 납 품되었으니 그 해악이 얼마나 컸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들은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공격했고, 집중 공격 타깃이 된 사람이 서울대 이병도 교수였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사편수 회의 수산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식 민지의 공공기관에 근무한 것으로 친일파 낙인을 찍기는 충분했다.
이유립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에 시를 투고하기도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사람이었는데 이병도를 식민사학자로 몰면서 각광을 받았다. 1976년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 연구』라는 책을 냈기 때문에 더더욱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 마침 1974년부터 한국사가 국정교과서로 바뀌었기 때문에 국사찾기 협의회는 국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국사 교과서에 자신들의 주장을 실을 수 있다면 전 국민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먼저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라는 재판을 걸었다. 당연히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그다음으로는 정치권을 동원해서 역사학계에 압력을 행사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1년에 국회에서 국사 교과서 공청회가 열리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쌍방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때 유사역사학 쪽에서는 이 유립을 토론자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이유립은 안호상을 매도 하는 글을 썼고, 그 길로 『자유에서도 퇴출되고 말았다.
이유립을 토론자에 넣어주지 않은 이유는 자명했다. 그는 이미 1979년에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내놓았고, 토론에서 이걸 들고 떠드는 순간 개망신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안호상 등이 이유립을 배제하는 길을 택한 것 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참 공교롭게도 『환단고기』는 일본의 극우 유사역사 가인 가지마 노보루島에게 전달되어 일역본이 나오게 되면서 역전의 길을 가게 된다. 1982년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출간되었고, 이 일역본을 다시 번역한 한단고기』가 1986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는 국수주의 서적이 범람하고 있었다. 백두산 민족의 대운이 열린다는 식의 이야기가 내놓기만 하면 대박이 나는 상황이었고 「한단고기』는 여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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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카인드

사회 2024. 5. 11. 07:18

- 이 모든 슬픈 이야기에서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사실은 주된 행위자 모두가 같은 덫에 빠졌다는 점이다. 히틀러와 처칠, 루스벨트와 린데만 등 이들 모두는 문명의 수준이 보기보다 얄팍하다는 심리학자 귀 스타브 르봉의 주장을 따랐다. 그들은 공습을 가하면 이런 허약한 외피는 산산조각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폭격을 가할수록 문명의 껍데기 는 점점 더 두꺼워졌다. 얇은 막이 아니라 굳은살이었던 것 같다.
불행하게도 군사전문가들은 이해가 느렸다. 이로부터 25년 뒤 미군은 베트남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총량의 3배에 이르는 폭탄을 떨어뜨리게 된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실패했다.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우리는 어떻게든 이를 부인해온 것이다. 오늘날까지 많 은사람은 런던 대공습 기간동안 영국인이 보여준 회복력은 영국인의 특 이한 속성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인의 특성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속성이다.

-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난 재난은 극단적 사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재 난 기간 중의 역학은 거의 항상 동일하다. 역경에 처하면 그에 대응해 협 력의 물결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당국은 당황해 2차 재난을 일으킨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2009년에 출간한 《이 폐허를 응시하라A Paradise Built in Hell》에서 카트리나의 여파에 대해 뛰어난 통찰을 드러낸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가 받은 인상에 따르면 엘리트가 공황에 빠 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모두의 인간 본성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독재자와 전제군주, 주지사와 장군들은 모두 자신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시나리오가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너 무자주 무력에 의존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이기심에 의 해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하는 탓이다.

- 나는 뉴스가 개인의 발전에 좋다고 믿으며 자랐다. 참여하는 시민으로 서 우리의 의무는 신문을 읽고 저녁에는 뉴스를 시청하는 것이다. 뉴스 를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민주주의 는 더욱 튼튼해진다. 아직도 많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뉴스의 이 같은 효 용을 말하며 권하지만 과학자들의 결론은 이와 크게 다르다. 수십 건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뉴스는 정신 건강에 해롭다. 1990년대 처음으로 이 분야의 연구를 개척한 사람은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였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도 만들었다. '잔혹한 세계 증후군' syndrome'으로, 임상 증상은 냉소주의, 염세, 비관주의 등이다. 뉴스를 신봉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동의할 가능성이 더 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우리 개 개인이 세상을 개선하는 데 무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스 트레스를 받고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더욱 크다.

- 우리 인간은 왜 그렇게 비관적인 뉴스에 취약한 것일까? 두 가지 이유 가 있다. 첫 번째는 심리학자들이 부정편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많이 이끌린다. 과거 인류가 사냥과 채집을 하던 시절, 거미나 뱀을 보고 너무 자주 겁을 먹는 편이 아 주 드물게 무서워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나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두려워 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면 틀림 없이 죽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등에 가용성 편향이라는 짐도 지 워져 있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면 상 대적으로 그것이 흔하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우리가 매일 끔찍한뉴스에 폭격을 당하는 탓에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왜곡된다. 대형 항공사고, 어린이 납치, 참수형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에 똬리를 트는 경향이 있다. 레바논의 통계학자 나심 탈레브Nassim Taleb가 냉담하게 지적했듯이 "우리 는 뉴스에 노출되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다."
디지털시대에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는 점점 더 극단적이 되어갈 뿐 이다. 예전에는 언론인들이 독자 개개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대중을 위해 글을 썼다. 하지만 오늘날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당신을 충격과 공포에 떨게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당신을 클릭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또 당신 의 관심을 끌고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개인별 맞춤 광고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같은 현대 미디어의 광란은 일상에 대한 공격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리는 삶은 예측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좋기는 하지만 지루하다. 따라서 우리는 지루한 삶을 살 고 있는 훌륭한 이웃을 더 좋아하지만(감사하게도 대부분의 이웃은 여기에 해당 한다), '지루함'은 당신을 주목하게 만들수없다. '좋다'는 광고를 팔수없 다. 그래서 실리콘밸리는 어느 스위스 소설가의 재담처럼 "뉴스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설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면서도 우리에게 점점 더 선정적인 클릭베이트를 계속 제공하는 것이다.

- 야생 여우는 생후 약 8주가 지나 성체가 되면 급격히 공격적이 된다. 하지만 류드밀라가 선택적으로 번식시킨 여우들은 영원 히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었다. 온종일 노는 것에만 열중했다. 훗날 류드 밀라는 "길들인 여우들은 성체가 되는 임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기록했다.24
한편 신체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여우의 귀가 아래로 처지고 꼬 리가 말리며 털에 반점이 나타났다. 주둥이는 짧아졌으며 뼈는 더 가늘어 지고 수컷은 점점 더 암컷을 닮아갔다. 심지어 개처럼 짖기 시작했다. 또 한얼마 지나지 않아 사육사들이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이전 까지 여우에게서 결코 본적이 없는 행동이었다. 기억해둘 것은 이런 특징 중 어느 것도 류드밀라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유일한 기 준은 친밀감이었다. 다른 모든 특징은 그저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 이 실험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1978년 구소련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생물학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연구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진 화론은 자본주의자들의 음모가 아니었고, 공산당국은 이제 구소련 과학 을 부흥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해 8월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에서 유전학 국제학술대회를 주최했다. 참가자들은 6,000명을 수용할 수 있 는 크렘린궁전에서 환대를 받았다. 샴페인은 넘쳐났으며 캐비아는 굴러 다녔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드미트리의 이야기만큼 회원들에게 깊은 인 상을 주지 못했다. 간단한 소개 후 조명이 어두워지고 비디오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화면에서는 은여우가 꼬리를 흔드는 등 실제로 있을 법하지 않은 존재가 튀어나왔다. 객석에서는 합창처럼 탄성이 터져 나왔고, 조명이 다시 켜진 뒤에도 흥분한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는 한참 계속되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아직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디오 상영 직후 자신의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순한 여우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덜 분비했고, 세로토닌(행복 호르몬)과 옥시토신('사랑 호르몬)을 더 많이 분비했다. 드미트리는 발표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이런 현상 은 여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 이론은 "당연히 인 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 돌이켜보면 이것은 역사적인 발언이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 전자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지 2년 뒤 사람들은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났다'고 결론지었는데, 여기 무명의 구소련 유전학자가 그 반대의 주 장을 펼친 것이다. 드미트리 벨라예프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길들여진 유인원이다. 가장 친화적이고 성품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자식을 갖는 현상이 수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종의 진화는 '가장 우호적인 자의 생존'에 근거를 두고 있다.

- 네안데르탈인은 천재와 비슷하다. 개개인의 뇌는 더 컸지만 집단으로 서는 똑똑하지 못했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는 개별 호모 사피엔스보 다 더 똑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피엔스는 더 큰 집단을 이루어 모 여 살았고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더 자주 이주했으며, 아마 모방도 더 잘 했을지도 모른다. 네안데르탈인이 초고속 컴퓨터였다면 우리는 구 식 PC이지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던 셈이다. 우리는 더 느렸지만 더 잘 연결되었다. 일부 과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 발달 역시 사교성의 산물이다. 언어는 모방자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의 매우 좋은 예이다. 언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류드밀라의 여우가 짖기 시작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인간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호모 퍼피는 결국 이들을 모두 쓸어버렸을까? 이 같은 생각으로 스릴 넘치는 읽을거리나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 이보다 설득력 있는 이론은 우리 인간이 마지막 빙하기(기원전 11만 5000년 전부터 기원전 1만 5000년 전)의 혹독한 기후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 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한 덕분이다.

- 1877년 전염병이 마침내 진정되었을 때 살아남은 주민은 110명에 불 과했다. 800년 전 카누를 타고 해안에 도착했던 첫 정착민들과 거의 같은 숫자였다. 전통은 사라지고 의식은 잊히고 문화는 파괴되었다. 노예상인 들과 그들의 질병은 마침내 원주민과쥐가 달성하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 이스터섬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문명을 망가지도록 낭비한 이기적인 섬 주민들의 이 야기 중에서 남은 부분은 무엇일까? 별로 없다. 전쟁도 기근도 다른사람을 잡아먹은 일도 없었다. 삼림 벌채는 땅을 황량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비옥하게 만들었다. 1680년경에는 대량학살이 이루어지지 않 았다. 수세기 후인 1860년경까지 진정한 쇠퇴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 고섬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쇠퇴하는 문명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문명을절벽에서 밀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토착 식물과 동물종들을 멸종시킨 쥐라는 재앙이 뜻하지 않 게 유입된 것처럼 주민들이 그들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순조롭지 못한 시작 이후 가장 눈에 띈 것은 회복탄력성 과적응성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세상이 그들을 보아왔던 것보다 훨씬 더 똑똑했다. 그렇다면 이스터섬은 여전히 우리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적 절한 비유일까? 보어세마 교수와 대화를 나눈 지 며칠 후 나는 "기후변화 탓에 이스터섬 석상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공표한 신문 머리기사를 보았다. 과학자들은 해수면 상승과 해안침식의 영향을 분석했으며, 기사는 이들이 예측하는 시나리오를 반영했다
나는 기후변화에 대해 회의적이지 않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도 전이며, 대처할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 다. 그러나 내가 회의적인 것은 붕괴라는 숙명론적 수사이다. 우리 인간 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거나 더 나쁘게는 지구의 재앙이라는 인식이 다. 나는 이런 인식이 '현실적으로 널리 퍼질 때 의심을 품으며, 여기에 출 구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회의적이 된다. 너무 많은 환경운동가들이 인류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한다. 나의 두려움은 그들의 냉소주의가 자기충족적 예언, 즉 지구 기온이 변함없이 오르는 동안 우리를 절망으로 마비시키는 노시보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기후행동 역시 새로운 현실주의를 적용할 수 있다.
보어세마 교수는 나에게 "문제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들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해낼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라 고 말했다.
이스터섬이 이를 증명한다. 섬 주민들은 마지막 나무가 사라졌을 때 수 확량을 높이는 새로운 기술로 농업을 다시 일구었다. 이스터섬의 실제 이 야기의 주인공은 수완이 매우 좋고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임박 한 파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르지 않는 희망의 원천이다.

- 조작된 인간 본성 실험
무자퍼 셰리프 박사의 조작이 사악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이것은 17년뒤 날조되는 시나리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표면적으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과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은 공통점이 많다. 피험자가 24명의 백인 남성이었으며, 착한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악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실험이었다." 그러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필립 짐바르도의 연구는 의심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사기였다.
2007년에 출간된 그의 <루시퍼 이펙트>를 읽으면서 의심이 들기 시작 했다. 나는 그의 교도소 '교도관들이 자발적으로 가학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짐바르도 자신도 수없이 많은 인터뷰와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교도관이 "법, 질서 및 존경심을 유지하기 위해 자체 규칙을 만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짐바르도는 《루시퍼 이펙트》에서 실험 전 토 요일에 갑자기 교도관들과 만났다고 언급했다. 그날 오후 그는 교도관들 에게 각자 맡을 역할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의 지시는 착각할 수 없는 내 용이었다.
우리는 좌절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그들 속에 두려움을 심을 수
있다. [・・・・・・]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개성을 제거할 것이다. 그들 은 수인복을 입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번호를 부여받으며 오직 번호로만 불릴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모 든 것을 통해 우리가 그들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무력감이다.14
이 구절에 이르렀을 때 나는깜짝놀랐다.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자가자 신의 교도관을 훈련시켰다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다니. 교도관들 스스 로가 수감자들을 번호로 부르거나 선글라스를 쓰거나 가학적인 게임 등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었 다. 뿐만 아니라 짐바르도는 실험이 시작되기 전 토요일에 마치 그와 교 도관이 같은 팀인 것처럼 이미 '우리'와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는 실험이 진행됨에 따라 짐바르도 자신이 교도소 감독관으로서의 역 할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짐바르도 는 첫날부터 명령을 내렸다.
- 필립 짐바르도는 40년 동안 수백 건의 인터뷰와 기사에서 스탠퍼드 교 도소 실험의 교도관은 아무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변함없이 주장해왔다. 각종 규칙, 처벌 및 수감자들에게 가한 모욕 등 모든 것을 그들 스스로 생 각해냈다는 것이다. 짐바르도는 재피를 그저 이 실험에 휩쓸린 평범한교 도관 중 한명으로 묘사했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17가지 규칙 중 11 가지를 재피가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수감자들을 맞이하는 절차에 대한 세부적인 의례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도 재피였다.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는 것? 그의 생각이었다. 수감자들의 옷을 벗기는 것? 마찬가지이다. 15분 동안 벌거벗은 채로 서 있게 강요하는 것? 이 또한 재피의 생각이었다.
재피는 실험 전 토요일 다른 교도관들과 함께 6시간을 보내면서 체인 과 방망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재피 는 "나는 일어날 일 일어나야만하는 일에 대한 목록을 가지고 있다"고교 도관들에게 이야기했다." 이 혹독한 시련이 끝난 뒤 동료 교도관들은 그 의 '창의적인 가학적 발상을 칭찬했다. 한편 짐바르도 역시 가학적인 게 임 계획에 기여했다. 그는 수감자들의 수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오전 2시 30분과 오전 6시에 깨워 점호를 하는 등 빡빡한 일정을 잡았다. 수감자들 에 대한 가벼운 처벌로 팔굽혀펴기를 제안하거나 담요에 가시가 있는 스 티커나 꺼끌꺼끌한 풀씨를 넣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독방에 감금하는 것이 좋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짐바르도가 실험을 제어하는데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무 엇일까? 대답은 단순하다. 애초에 짐바르도는 교도관들에게 관심이 없었 다. 처음부터 그의 실험은 수감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수감자들이 극 심한 압박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싶었다. 얼마나 지루해할까? 얼마나 좌절할까? 얼마나 두려워할까? 교도관들은 스스로 짐바르도의 연구보조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짐바르도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 각해보면 타당한 일이다. 짐바르도가 그들의 가학적인 행동에 충격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이것이 실험의 진정한 교훈이라는 생각은 모두 사후에 조작된 내용이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밀그램의 실험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사람들의 선 함을 옹호하는 책을 쓰려고 하면 몇 가지 큰 도전 과제가 목록으로 주어 진다. 윌리엄 골딩과 그의 어두운 상상력, 리처드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 자》,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사기를 꺾는 이스터섬 이야기, 그리고 살아 있 는 심리학자 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필립 짐바르도 등. 하지만 내 목록 맨 위에는 스탠리 밀그램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의 충격 기계 실험만 큼냉소적이고 우울한 동시에 유명한 연구는 본적이 없다.
몇 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칠 무렵 나는 그의 유산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탄약을 모았다고 생각했다. 먼저 최근에 공개된 그의 개인기록보관소가 있는데, 그곳에는 치부를 드러내는 자료가 상당히 많이 있음이 밝혀졌다. "보관소의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그 이면을 보 고 싶었어요." 지나 페리가 멜버른을 방문했을 때 나에게 한 말이다(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이 사기라고 폭로한 지나 페리와 동일 인물이다. 7장 참조). 페리가 말하는 '환멸의 과정'은 그렇게 시작되어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통렬하게 기록한 책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녀가 폭로한 내용은 그녀를 밀그램 팬에 서 신랄한 비평가로 바꾸어놓았다.
먼저 페리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살펴보자.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명성 과 찬사를좇는 의욕 넘치는 심리학자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 를 얻기 위해 오도하고 조작한 남자. 자신을 신뢰하고 돕고자 했던 사람 들에게 의도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준 인물.
- 1970년대에 밀그램의 실험을 재현한 심리학자 돈믹슨Don Mixon도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사실 사람들은 선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커다란 고통도 참아낸다. 좋은 사 람이 되려고 애쓰는 데 온 힘을 다한다......."24 다시 말해서 충분히 강하 게 압박하고 찌르고 재촉하고 미끼를 던지고 조작하면 우리 중 많은 사람 에게 실제로 악을 행하게 할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 어 있다. 그러나 악은 표면을 들추기만 하면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악 을 끌어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하는것처럼 악을 위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의도는 7장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생 교도관 데이브 에셜먼은 명시적인 지시를 받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렇게까지 했을지 궁금해하던 인물이다. 그 역시 자신에 대해 '내심은 과학자였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했기 때문에 자신이 긍정적인 일을 한 것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이것은 애초 교도소 연구라는 개념을 생각해낸 짐바르도의 연구 보조 원인 데이비드 재피도 마찬가지였다. 재피는 연구의 숭고한 의도를 지적 함으로써 선의의 교도관들에게 더욱 강경한 노선을 취하도록 자신감을 주었다. 그는 마음이 흔들리는 교도관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작업한 결과를 가지고 [............]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자 보세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교도관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교도관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궁극적으로 데이비드 재피와 필립 짐바르도는 자신들의 작업이 교도 소 시스템을 완전히 개편하는 충격요법으로 작용하기를 바랐다. 재피는 “이 연구로부터 개혁을 위한 매우 진지한 권고사항이 나오게 되기를 기대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우리 모두가 음, 단지 사디스트이기 때문 에 이런 일을 하려는것이 아니다"라고 교도관을 안심시켰다. 

- 아렌트에 관한 오해
이를 염두에 두고 아돌프 아이히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961년 4월 11일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 장교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후 14주 동안 수백 명의 증인이 증언대에 섰으며, 검찰은 아이히만이 어떤 괴물인지 보 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것은 법원의 재판 사건 그 이상이 었다. 대규모의 역사 수업이었고, 수백만 명이 시청한 미디어의 구경거리 이기도 했다. 시청자 중에는 그의 아내가 뉴스 중독자'로 묘사한 스탠리 밀그램이 있었는데, 그는 재판의 진행 과정을 면밀히 추적했다.
한편 한나 아렌트는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아이히만의 문제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았는데 그들이 변태적이거나 가학 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은 예전에도 끔찍하고도 무서울 정도로 정상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라고 기술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아이히만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의 평범성을 나타내는 인물로 서 생각없는 '살인 관료'를 대변하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야 역사학자들은 매우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1960년 이스 라엘의 비밀요원에게 체포될 당시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 숨어 있었 다. 네덜란드의 나치 친위대(SS) 장교였던 빌럼 사센Willem Sassen은 그곳에 서 몇 개월 동안 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센은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홀로코스트가 나치 정권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조작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아 이히만은 "나는 아무 후회도 없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1945 년 이미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다. "나는 웃으며 나의 무덤 속으로 뛰어 들 것이다. 내 양심 속에 500만 명의 인간이 있다는 느낌이 나에게 엄청 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32 비뚤어진 생각과 환상으로 가득 찬 1,300 쪽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면 아이히만은 생각 없는 관료가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는 광신자였다. 그는 무관심이 아니라 신념에 따라 행 동했다. 밀그램의 실험 대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스스로 선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악행을 저질렀다.
-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나는 아돌프 히틀러나 상관들로부터 사전에 명 시적인 지시를 받지 않고는 크든 작든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증언 했다. 이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나치들은 "단지 명 령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그의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 후 역사학자들이 깨닫게 된 사실은 제3제국의 관료제도 내에서 내려 온 명령은 내용이 모호한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식 명령이 거의 내 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창의성에 의존해야 했다.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lan Kershaw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히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총통의 정신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 하면서 "그를 위해, 그를 바라보고 일했다."33 이는 나치당원들에게 점점 더 급진화하는 당원들이 히틀러의 호감을 얻기 위해 더욱더 과격한 조치 를 고안하는 남보다 한발 앞서기 위해 경쟁하는 문화를 조성했다.

- 방관자 효과는 여전히 많은 교과서 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2011년에 발표된 메타 분석은 방관자가 긴급 상 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메타 분석은 연구에 대한 연구로 수많은 연구 사례를 분석한다. 이번 메타 분석은 라 타네와 달리의 첫 번째 실험(학생들이 있는 방)을 포함해 지난 50년 동안 방 관자 효과를 다룬 것 중 가장 중요한 105건의 연구를 검토했다!"
이 연구에서 두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방관자 효과가 존재 한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기 때문에 비상 상황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우리는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비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통찰은? 생명이 위험한 비상상황에서 (누군가 익사하거나 공격을 당하고 있음) 목격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별도의 방에 격리되지 않음), 역방관자 효과가 나타난다. 논 문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추가적인 목격자들이 있으면 도움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증가한다."
- 충격적인 사실은 실제 이야기에서 살아남은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이 다. 운명적인 그날 밤 실패한 것은 평범한 뉴요커가 아니라 당국자들이었 다. 키티는 혼자가 아닌 친구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근본적 으로 목격자의 존재는 과학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것과 정반대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대도시, 지하철, 붐비는 거리에서 혼자가 아니다. 우 리에게는 서로가 있다.
그리고 키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예상 밖의 반전이 있었다. 키티가 죽은 지 5일 후퀸스주민인 라울 클리어리는 거리 에서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대낮에 텔레비전을 들고 이웃집에서 나 오는 중이었다. 라울이 그를 막아서자 그 남자는 자신을 일꾼이라고 주장 했다. 그러나 라울은 의심스러워 이웃인 잭 브라운에게 전화를 걸어 "배 니스터가 이사를가나요?"라고 물었다. 브라운은 "전혀 아니에요"라고 대 답했다. 두 남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잭이 그 남자의 차량을 움직일 수 없 게 만드는 동안 라울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출동한 경찰은 (도망갔던) 도둑이 다시 나타나자마자 체포했다. 바로 몇 시간 뒤 그는 범행을 자백 했다. 무단 침입뿐 아니라 큐 가든스에서 젊은 여성을 살해한 사실도 시 인한 것이다. 그렇다. 키티의 살인범은 두 명의 목격자가 개입한 덕분 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살인범 체포 사실을 보도한 신문은 단 한 곳도 없 었다.
이것이 키티 제노비스의 실제 이야기이다. 심리학과 1학년뿐만 아니라 언론인 지망생도 반드시 읽어야 할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 쳐주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얼마나 자주 엉 망이 되는가. 둘째, 기자들이 선정적인 이야기를 팔기 위해 얼마나 교묘 하게 자판을 두드리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때는 정확히 위급한 상황에서라는 점이다.

- '친절한' 테러리스트
나는 이런 발상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네덜란드에서 자란 10대 시절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용맹한 영웅들과 나쁜 악당들 사이의 장렬한전투인 20세기의 <반지의 제왕> 정도로 상상했다. 하지만 모리스 자노위츠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악 의 기원이 타락한 악당들의 가학적 성향이 아니라 용감한 전사들의 결속 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가진 최고의 특성 인 우정, 충성, 결속이 수백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역사상 최악의 대 학살을 저지르게 고무시킨 영웅적 투쟁이었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 Roy Baumeister에 따르면 우리의 적이 악의로 가득한 가학성애자들이라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순수한 악의 신화'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의 적은 우리와 흡사하다.

- 문제는 인간 본성에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첫 번째 실 험 이후 몇 년 뒤 햄린과 그녀의 팀은 같은 주제의 다른 연구를 생각해냈 다. 이번에는 유아들에게 통밀 비스킷과 녹색 콩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 는 기회를 주어 선호도를 확인했다. 그런 다음 아기들에게 하나는 크래커 를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콩을 좋아하는 2개의 인형을 제시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아기들이 어떤 인형을 좋아하는지 관찰했다. 당연히 압도적으 로 많은 아기들이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는 인형에게 끌렸다. 놀라운 사실 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인형이 비열하고 다른 인형이 착한 것으로 밝혀진 뒤에도 이 선호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햄린의 동료 중 한 명은 "우리가 계속해서 발견한 것은 아기들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좋은] 사람보다는 실제로 비열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사실 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사실을 알면 알수록 우울해지지 않는가? 말하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다. 아기 연구소의 연 구원들은 아기들이 낯선 얼굴, 알수없는 냄새, 외국어, 이상한 억양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십 가지 실험을 실시했다. 마치 우리 모두가 타고난 외국인 혐오자인 듯하다.

- 그런 다음 나는 이것이 '우리의 치명적인 부조화의 증상일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선호하 는 것은 인류가 존재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별 문제가 되지 않다가 문명 이 발전하면서 비로소 문제가 된 것일 수도 있을까? 인류 역사의 95퍼센 트가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떠돌아다니면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 우리는 낯선 사람과 함께 고개를 넘을 때 언제라도 멈춰 서서 대화를 나 눌 수 있었으며, 그 사람은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요즘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우리는 익명의 도시에 살고 있으며,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보는 언론과 언론인에게서 나온다. 문제는 이들이 썩은 사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낯선 사람을 그렇게 의심하게 된 것이 놀라운 일인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 한우리의 타고난 혐오감이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을까?

- 블룸 교수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공감은 절망적으로 제한된 기술이라 고 말한다. 공감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 즉 우리가 냄새를 맡고 보고 듣 고 만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밴드의 팬들, 그리고 아마도 길거리에 있는 노숙자 등에 게. 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의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학대당한 동 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귀여운 강아지들에게 공감을 느낀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경우 슬픈 배경 음악이 점 점 크게 울리는 동안 주로 카메라가 확대하는 대상에게 공감을 느낀다.
나는 블룸의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뉴스라는 현대의 현상과 꼭 닮았다 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1장에서 우리는 뉴스가 스포트라이트처럼 작 동하는 것을 보았다. 공감이 특정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오도하는 것처 럼 뉴스도 예외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속인다. 한가지는 확실하다. 더 나 은 세상은 더 많은 공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덜 용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해자와 더 많이 동일시할수록 적에 대해 더 일반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소수에게 밝은 스 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적의 관점은 보지 못하게 된다. 다른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강아지 전문가 브라이언 헤 어가 이야기한 우리를 지구상에서 가장 친절하면서도 잔인한 종으로 만 드는 메커니즘이다. 슬픈 진실은 공감과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 이 함께한 다는 것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이다.

- 여기에서도 우리는 텔레비전과 영화산업에 속아 넘어갔다. <왕좌의 게임> 같은 시리즈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는 다른사람을 꼬챙이로 찌르는 것이 식은 죽 먹기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몸을 찌 르는 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지난 1만 년 동안 전쟁에서 발생한 수억 명의 사상자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에 대한 법의학적인 조사가 필요하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사망 원인을 예로 들 어보겠다.
기타 : 1퍼센트 화학: 2퍼센트
폭발, 압착 : 2퍼센트
지뢰, 부비트랩 : 10퍼센트
총알, 대전차 지뢰 : 10퍼센트
박격포, 수류탄, 공중 폭탄, 포탄 : 75퍼센트
뭔가 눈치챘는가? 이 희생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대부분이 원격 으로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병사들은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이 버튼을 누르거나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지뢰를 설치한 결과 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바지를 추켜올리
- 어느 시대에서나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멀리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이 백년전쟁(1337~1453) 동안 크레시와 아쟁쿠르에서 프랑스를 패배시킨 방법이었다. 스페인 정 복자들이 15, 16세기에 아메리카를 정복한 방법이자 오늘날 미군이 무장 무인기 편대로 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군대는 장거리 무기 외에도 적과의 심리적 거리를 넓히는 수단을 추구 한다. 만약 상대방을 해충으로 묘사하는 방법 등으로 그들을 비인간화할 수 있다면 상대를 정말로 인간이 아닌 것처럼 대하기가 더 쉬워진다. 또 한 병사들을 마약에 취하게 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공감능력과 폭력에 대한 반감을 무디게 만들 수도 있다. 트로이에서 워털루, 한국에서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취하게 만드는 물질의 도움 없이 싸운 군대는 거의 없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만일 독일 군대가 메스암페타민 알약(일명 크리스탈메스 극도의 공격성을 유발할 수 있는 마약) 3500만정을 먹지 않았다면 1940년 파리가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군대는 군인들을 '조건화할 수 있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셜 대령의 권유로 이를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신병들은 신병 훈련소에서 전우애뿐만 아니라 가장 잔인한 폭력성도 고취되어 병사들 은 '죽여! 죽여! 죽여!'라고 목이 쉴 때까지 외쳐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대부분 죽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은 이런 종류의 훈련 이미지 를 보여주자 충격을 받았다.
- 요즘 병사들은 더 이상 평범한 종이 과녁으로 연습하지 않는다. 인간형 상의 과녁을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하도록 훈련을 받음으로써 총을 쏘는 것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반응이 된다. 저격수들은 훈련이 훨씬 더 과격하다. 검증된 방법 중 하나는 훈련 병이 특수 장치로 인해 강제로 눈을 크게 뜨고 의자에 묶여 앉아 있는 동 안 점점 더 끔찍한 일련의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고난 뿌리 깊은 감정인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현대 군대에서 전우애의 중요성은 작아졌다. 그 대신 미국의 한 참전용사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만들어진 경멸" 을 갖게 되었다. 이 조건화는 실제로 효과가 있다. 이러한 기법으로 훈 련을 받은 병사들과 구식 군대를 마주치게 하면 구식 군대는 매번 박살이 나고 만다. 1982년의 포클랜드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구식 훈련을 받은 아르헨티나 군대는 비록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영국의 조건화된 사격 기 계와 맞붙었을 때 승리의 기회가 전혀 없었다.
또한 미군은 '발사율을 높이는 데 어렵사리 성공해 총을 쏘는 병사의 비율을 한국전쟁에서는 55퍼센트, 베트남전쟁에서는 95퍼센트까지 높 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수백만 명의 젊은 병사들을 훈련 중 세뇌시킨다면 베트남전쟁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 럼 이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다른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때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인가도 함께 죽었다.
- 마지막으로 적과 거리를 쉽게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 있다. 바로 지도 자들이다. 높은 곳에서 명령을 내리는 군대나 테러 조직의 지휘관은 적 에 대한 공감의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병사들은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지도자들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테러 전문가와 역사학자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권력을 가진 사 람들의 심리학적 상태는 독특하다.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theh 같은 전쟁범죄자들은 권력에 굶주린 편집증적 나르시시스트의 전 형적 사례이다." 이와 비슷하게 알카에다와 이슬람 무장단체 IS 지도자 들은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연민이나 의심으로 괴 로워하는일이 거의 없다."

- 권력은 타인에게 무감각해지게 만드는 마취제처럼 작용하는 것 같다. 2014년 연구에서 세 명의 미국 신경학자는 '경두개 자기자극 기계'를 사 용해 권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인지 기능을 검사했다. 그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공감에 핵심적인 역 할을 하는 정신적 과정인 미러링mirroring을 방해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항상 미러링을 한다. 누군가 웃으면 당신도 웃는다. 누군가 하품을 하면 당신도 하품을 한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매우 약하다. 이는 마치 플러그가 뽑힌 것처럼 자신들이 더 이상 동료 인간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덜 받으면 그들 이 더 냉소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게 사실일까?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권 력의 영향 중 하나는 타인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 만약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으르고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들에게는 감독과 감시, 관리와 규 제. 검열과 명령이 필요하고 여기는 것이다. 또한 권력은 당신을 다른 사 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당신이 이 모든 감시를 담당해 야 한다고 믿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권력을 갖지 못하면 정반대의 결 과가 나타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힘이 없다고 느끼는사람들은 자신 감도 훨씬 떨어진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를 주저하고 집단에서 스스 로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며 자신의 지능을 과소평가한다."
- 권력자들에게 이러한 망설임은 편리하다. 자기 의심은 사람들이 반격 할 가능성을 낮추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스스로 침묵하 기 때문에 검열이 불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노시보효과가 작동하는 것 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을 어리석은 것처럼 대하면 그들은 스스로 어리석 다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는 통치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추론하 게 만든다. '대중은 너무 멍청해서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비 전과 통찰력을 가진 내가 책임을 맡아야 해.' 하지만 진상은 정확히 그 반 대가 아닌가? 우리를 근시안적으로 만드는 것이 권력 아닌가? 정상에 오 르면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싶은 동력이 감소한다. 공감은 필수 요 소가 아니게 된다. 자신이 보기에 비합리적이거나 짜증나는 사람은 무시 하거나 제재하거나 가두거나 이보다 더욱 나쁘게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 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으므로 편 협한 시각을 갖게 된다.
- 이는 공감 테스트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 이유와도 연결지을 수 있다. 2018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실시한 대규모 연구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가져오는 유전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대신 과학자 들이 사회화라고 부르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았다. 권력이 분배되는 전통 적 방식 때문에 남성을 이해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직관력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끈질기게 지속되는 이유는 아마 도 이와 같은 불균형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의 시각으 로 세계를 볼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가.

- 정착 생활이 시작되고 불평등이 심화됨에 따라 족장과 왕은 자신이 신 민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이유를 정당화해야 했다. 즉 그들은 선 전을 하기 시작했다. 유목민족의 족장들이 모두 겸손했던 것과 달리 이제 지도자들은 잘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왕은 자신이 신성한 권리에 의해 다스리고 있다거나 그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오늘날 권력의 선전은 더 미묘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독창적인 이 데올로기를 설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부 개인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권위, 지위 또는 부를 갖는 것이 '마땅한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장점merit' 논리를 사 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가 큰 장점이 있는지 어떻게 결정할까? 누 가 사회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지 어떻게 판단할까? 은행가 아니면 청소 부? 간호사 혹은 항상 고정관념 밖에서 생각하는 소위 교란자? 자신에 대 한 이야기를 잘 만들어낼수록 자신의 몫은 더 커진다. 사실 문명의 진화 전체를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이론을 지속적으로 고안해낸 통치자들의 역사로 볼 수 있다.
- 우리가 수천 명의 낯선 사람들과 함께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서로를 시야에서 놓 쳤다. 수천, 수만 명 혹은 100만 명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방법 이 없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불신이 자라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 들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에 기생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등골이 휘도록 일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래서 통치자들에게는 대중을 감시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모든 것을 듣고, 모든것을 보는사람. 모든 것을 보는 눈 바로 하느님이다. 새로운신들이 복수심을 품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은 모든 사람을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감시하는 슈퍼 리바이어던 이 되었다. 신은 당신의 생각도 감시한다. 성경의 '마태복음 10장 30절에 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전지적 존재는 이제 하늘에서 세상을 지켜보고 감시, 감독하다가 필요한 경우 공격을 가했다.
신화는 인류를 돕는 열쇠였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전에 다른 종들 이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수백만 명의 낯선 사 람들과 대규모로 함께 일할 수 있게 했다. 더욱이 이 이론은 위대한 문명 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거대한 위조의 힘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계속해 서 이야기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상상 의 산물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서 《사피엔 스》 (2011)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 모두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것 중심으로 돌아간다."
- 이는 매혹적인 이론이지만 한가지 단점이 있다. 인류 역사의 95퍼센트 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의 유목민 조상들은 이미 150명의 친 구라는 마법의 한계를 넘어섰다. 물론 우리는 소집단을 이루어 사냥 및 채집을 했지만 집단들도 정기적으로 구성원을 교환했다. 그 결과 우리는 교차 꽃가루받이를 하는 호모 퍼피의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3장에서 파라과이의 아체족과 탄자니아의 하드자족의 경우를 살 펴보았다. 이들은 평생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난다.29
게다가 선사시대 사람들 역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독창적인 신화를 창조해 서로에게 전해주어 수많은 사람이 협력하 는 바퀴가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 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5장 참조)은 수천 명이 협력해서 건설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선사시대에는 이런 신화들이 불안정했다는 점이다. 족장은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기념물은 빠르게 파괴 될 수 있다. 두 인류학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선사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불평등이라는 정령이 어떻게든 병에서 빠져나 올 때까지 태초의 순수함 속에서 유유자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기보 다는 정기적으로 문제의 병을 여닫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제의적인 시대극 안에 불평등을 가둬두고 자신들이 기념물을 건설했듯이 신들과 왕국을 만들어냈으며, 그 이후에 다시 한 번 이것들을 즐겁게 해체했다.

- 일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democracy'라는 분산형 권력 시스템을 설계함으로써 이에 대처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사람들이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그리스어에서 '데모스demos'는 '사람들'을, '크라토스kratos'는 '권력'을 의미 한다)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루소는 이미 이러한 형태의 정부가 더 정확하게는 '선출된 귀족제'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왜 냐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권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누 가우리를 지배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또한 이 모델이 애초에 사회의 평민을 배제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헌법을 살펴보면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원래 당시의 민주적 경향 을 제어하기 위해 설계된 귀족 문서"였다는 데 동의한다.35 일반 대중이 정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가 결 코 아니었다. 지금도 모든 시민은 누구나 공직에 출마할 수 있지만 기부 자 및 로비스트들로 구성된 귀족적 네트워크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는 힘들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왕조적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케네디 가문, 클린턴 가문, 부시 가문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더 나은 지도자를 계속해서 원하지만 이런 희망은 너무 자주좌 절된다. 켈트너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친절하고 겸손한 덕분에 당선되더라도 권력은 이런 자질을 잃게 만들거나 애초에 그런 훌륭한자 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층적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마 키아벨리안은 한발 앞서 있다. 그들은 경쟁에서 이기는 궁극적인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 무기는 뻔뻔함이다.

- 우리는 앞에서 호모 퍼피가 수치심을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우리가 동물계의 모든 종 중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몇 안 되는 부 류에 속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수천 년 동안 수치심은 지도자를 길들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과적인 장치일 수 있다. 수치심은 규칙이나 규정, 비난이나 강압보다 더 효과적이다. 수 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제어하기 때문이다. 기대에 어긋났다 고 느낄 때 또 자신이 가십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말에 자신이 없어지고 역력히 얼굴을 붉힌다." 수치심에는 분명히 어두 운면(예를 들어 빈곤으로 인한 수치심)도 있지만 만약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 는다면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라. 지옥이 열릴 것이다.

- 계몽주의의 모순은 인간본성에 대한 묘사를 검토할 때 두드러진다. 표 면적으로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 같은 철학자들은 냉소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근대 자본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는 모든 사람이 이기 적이라는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책을 읽어보면 계몽주의 작가들이 완고한 냉소주의자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자본주의의 경전이 될 운명)을 출판하기 17년 전에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 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 려 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라고 보는가와 상관없이 그의 본성에는 몇 가지 원칙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만들며, 그들의 행복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원칙 말이다. 그것으로부 터 얻는 것이라고는 그것을 보는 즐거움밖에 없을지라도.
- 스미스와 흄 같은 영향력 있는 합리주의자들은 공감 및 이타주의와 관 련해 인간이 보여주는 방대한 능력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철학자 들이 우리의 훌륭한 자질에 그토록 익숙하다면 그들의 제도(민주주의, 무 역, 산업)는 왜 비관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을까? 왜 그들은 인간 본성에 대 한 부정적인 견해를 계속 키워왔을까?
그 대답은 계몽주의 사상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정확하게 표현한 데이 비드 흄의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악한이라고 생각 해야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격언에 불과하다. 물론 어떤 격언이 실제로는 거짓이면서 정치에서는 참이어야 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해 보 이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흄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 으면서도 사람의 본성이 이기적인 것처럼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속에 노시보라는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 다. 이것이 계몽주의와 더 나아가 우리 현대사회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인간 본성에 대한 틀린 모델을 기반으로 사회를 계속 운 영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일까?
1장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은 우리가 그것을 신봉하기 때문에 진실이 된다는 것을 비관주의는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 다. 현대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타고난 이기주의자라 가정하고 이기적 인 행동을 부추기는 정책을 옹호했다. 정치인들이 정치가 냉소적인 게 임이라고 스스로 확신했을 때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제 우리 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을까? 머리를 사용하고 이성을 활용해 새로운 제도를 설계할 수 있을까? 인간 본성에 대해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운영되는 기관은 가능할까? 학교와 기업, 도 시와 국가가 인간에 대해 최악의 경우 대신 최선을 기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 로젠탈은 자신의 발견에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이름을 붙였 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조각가로 자신의 창작물 중 하나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신들이 그의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인물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렇다. 우리가 헌신하는 믿음 역시 진실인지 상상인지의 여부에 관계없 이 현실화되어 세상에 커다란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1장에서 언급한 플라시보 효과와 유사하지만 기대 효과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사람에게 미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처음에 나는 1960년대 미디어의 각광을 받은 다른 모든 실험과 마찬가 지로 이 오래된 연구가 틀렸다는 것이 지금쯤이면 확실히 밝혀졌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피그말리온 효과는 심리학 연구에서 중요한 발견으로 남아 있다. 군대, 대학, 법정, 가족, 요양원 및 조직 내에서 수백 건의 연구결과를 통해 검증되었다. 사 실 그 효과는 로젠탈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항상 강력하지는 않다. 특히 아이들이 지능검사에서 나타내는 성적에 이르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에 시행된 비판적 리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 다. “교사의 기대가 학생들에게 명확한 영향을 실제로 미치는 일이 최 소한 종종 일어난다는 자연적이고 실험적인 증거가 풍부하다.” 높은 기대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관리자들이 활용하면 피고용인들 의 업무 성과가 향상된다. 장교들이 활용하면 병사들은 더 열심히 싸운 다. 간호사들이 활용하면 환자는 더 빨리 회복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젠탈의 발견은 그와 그의 팀이 바라던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의 한 심리학자는 "피그말리온 효과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위대한 과학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일으켰어야 할 변화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이는 매우 실망스럽다"라고 한탄했다. "
한 가지 더 좋지 않은 소식은 긍정적인 기대가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악몽도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피그말리온효 과의 반대인 골렘 효과Golem Effect는 원래 프라하 시민을 보호하던 생물이 일탈해서 괴물로 변한다는 유대인 신화 속 이름에서 유래했다. 피그말리 온 효과와 마찬가지로 골렘 효과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누군가에 대해 부 정적인 기대를 할 때 우리는 그들을 자주 쳐다보지 않게 되며 그들과 거 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자주 웃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우리 는 로젠탈의 학생들이 '멍청한' 쥐를 미로에 풀어놓았을 때 했던 일을 똑 같이 반복한다.

- 골렘 효과는 일종의 노시보이다. 가난한 학생들은 더 뒤처지게 만들고, 노숙자는 희망을 잃게, 고립된 10대들은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는 또한 인종차별의 이면에 있는 사악한 메커니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대치가 낮으면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고 이것은 다른사람들의 기대를 더욱 떨어뜨려서 자신의 성취를 더욱 낮게 만들기 때문이다. 골렘 효과와 부정적인 기대를 증가시키는 악순환이 조직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증거도 있다."

- 인터뷰어: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 있나요?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요스: 저도 그의 책을 읽었지만 한 마디도 믿지 않아요.'
인터뷰어: 인맥 쌓기 모임networking session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까?
요스: 대부분의 경우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재확인하는 게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터뷰어: 직원들에게 어떻게 동기를 부여합니까?
요스: 그러지 않습니다. 동기부여를 하는 것은 윗사람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터뷰어: 당신의 수평선에 있는 작은 점은 무엇입니까? 당신과 팀원들에게 영감을 주는 먼 곳의 목표 말입니다.
요스: 나에게 그런 목표는 없습니다. 작은 점에서 받는 영감은 전혀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런던의 왕립예술 협회로부터 권위 있는 앨버트 메달을 수여받았다. 이 메달을 수여받은사 람은 월드 와이드 웹www의 두뇌인 팀 버너스리, DNA 구조를 밝힌 프랜 시스크릭, 그리고 뛰어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등이 있다. 2014년 11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출신인 요스 드 블록이 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영국 학계의 거물이 그의 기조연설을 듣기 위해 참석했다. 드 블록은 서툰 영어로 처음에는 수상 소식이 농담인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농담 이 아니었다. 마침 알맞은 때에 이루어진 수상이었다.

- 문제는 우리 아이들이 자유를 관리할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에게 자유를 부여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것은 중대한 질문이다. 심리학자 브라이언 서턴스미스Brian Sutton-Smith는 "놀이의 반대는 일이 아니다. 놀이의 반대는 우울증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유도 놀이도 내재적 동기도 없이 일하는 방식은 우울증 이 급속히 확산되는 것을 부채질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우울증은 이제 전 세계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질병이 되었다. 우리의 가장 큰 결핍은 은행 계좌나 예산 명세서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 우 리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부족하다. 놀이가 부족하다.
나는 아고라를 방문한 뒤 희망의 빛을 보았다. 시예프드루먼은 나를 역에 내려주면서 다시 한번 크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오늘 말을지 나치게 많이 한 것 같아요." 사실이지만 나도 그의 학교를 잠깐이라도 걸 어보면 상당히 많은 확신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것이라며 그 를 칭찬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이것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다. 아고라는 수렵채집 사회와 동일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 은 다양한 연령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 코치와 놀이 리더의 지원을 받는 공동체에서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둘 때 가장 잘 배운다. 드 루먼은 이를 '교육 0.0'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호모 루덴스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 시장과 국가가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은 공유지를 흡수한 것은 오로지 지 난 1만 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이는 과거 모든 사람이 공유했던 땅에 대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 최초의 족장과 왕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오 늘날 식수원에서 생명을 구하는 약물, 새로운 과학 지식에서 우리 모두가 부르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공유지를 도용하는 것은 주로 다 국적 기업들이다(19세기 히트작 '생일 축하곡Happy Birthday'은 2015년까지 워너뮤 직그룹이 저작권을 소유해 수천만 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였다). 또는 전 세계 도시 전역을 보기 흉한 광고판으로 도배한 광고산업의 부상을 가져올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의 집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면 우리는 그것을 기물파손이 라고 한다. 그러나 광고의 경우는 공공 공간을 훼손할 수 있으며 경제학 자들은 이를 '성장'이라고 일컬을것이다.

-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공정하게 이야기하면 적어도 한 사람은 개릿 하딘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았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대학이 여성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던 시대의 야심만만한 정치경제학자이자 연구원이었다. 그리고 하딘과 달 리 오스트롬은 이론적 모델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현실 세계에서 실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싶어 했다. 하딘의 논문이 간과 한 중요한 세부사항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인간은 말할 수 있다. 농부와 어부 그리고 이웃은 자신의 밭이 사막으로 변하지 않고, 호수에서 물고기가 남획되지 않고, 우물이 마르지 않도록 합의하는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이스터섬 주민들이 계속해서 협력하고, 참여 예산 책정자들이 건설적 인 대화를 통해 결정을 내리듯이 일반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공유지를성 공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오스트롬은 스위스의 공유 목초지와 일본의 경 작지에서 필리핀의 공동 관개시설 및 네팔의 수원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공유지 사례를 기록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오스트럼이 들여다본 모든 곳에서 드러난 사실은 하딘이 주장한대로 자원을 공유하는 것이 비극을 만드는 비법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34
물론 공유지는 이해 상충이나 탐욕의 희생양이 될 수 있지만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오스트롬과 그녀의 팀은 총 5,000여 곳 이상의 현재 운용 되고 있는 공유지 사례를 수집했다. 여기에는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곳 이 적지 않은데, 어업권을 두고 제비를 뽑는 오랜 전통의 터키 알라니아 의 어부나 부족한 장작 사용을 공동으로 조정하는 스위스퇴르벨 마을의 농부 등을 들 수 있다. 오스트롬은 자신의 획기적인 저서 《공유의 비극을 넘어》 (1990)에서 공유지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설계 원칙' 을 공식화했다. 예를 들어 공동체에는 최소한의 자율성과 효과적인 감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오스트롬은 성공을 위한 청사진은 따로 없 다고 강조했다. 공유지의 특성은 궁극적으로 지역적 맥락에 의해 형성되 기 때문이다.

- 깨진 유리창, 부서진 삶
깨진 유리창 이론의 기사가 디 애틀랜틱>에 처음 실린지 약 40년이 지났다. 그동안 윌슨과 켈링의 철학은 미국의 가장 먼 곳, 나아가 유럽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졌다. 말콤 글래드웰은 티핑 포인 트》에서 이 이론을 대성공이라고 평가했고, 나 역시 첫 저서에서 그 이론 에 대해 열광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범죄학자들이 더 이상 이 이론 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실 <디 애틀랜틱>의 기사를 읽자 마자 내 마음에 경고등이 켜졌어야 했다. 윌슨과 켈링의 이론은 한 가지 모호한 실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실험에서 한 연구원은 꽤 괜찮은 동네에 일주일 동안 자동차를 세워 두고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망치를 가지고 돌아와서 창문 한 개를 부숴버렸다. 그러자마자 수문이 열린 듯 불과 몇 시간만에 길을 가던 평범한사람들이 자동차를 완파해버렸다. 그 연구원 의 이름은 바로 필립 짐바르도였다.
- 어떤 과학 저널에도 게재되지 않은 짐바르도의 이 자동차 실험은 깨진 유리창 이론에 영감을 주었고, 그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과 마찬가지로 이 이론은 그 이후로 철저히 반박당했다. 예를 들어 윌리엄 브래튼과 그 의 추종자들이 내놓은 '혁신적 치안 유지는 뉴욕시의 범죄율 하락과 전 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범죄율은 이전부터 하락하고 있었고, 이는 경찰이 잡범은 잡지 않았던 샌디에이고 같은 다른 도시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깨진 유리창 이론에 대해 30개의 연구를 메타분석한 2015년 결과에 따르면 브래튼의 공격적인 치안 전략이 범죄를 줄이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전혀, 아무것도 없다. 갑판을 닦는다고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막을수없었던 것처럼 주차위반 딱지를 발부한다고 동 네가 더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초기에 '그래, 부랑자와 술주정뱅이를 체포한다고 해서 심각한 범 죄가 줄어드는 건 아니지. 하지만 여전히 공공질서를 강제할 필요는 있 다'고 반응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질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뉴욕시에서 체포 건수가 치솟 았을 때 경찰의 위법 행위에 대한 보고 역시 급증했기 때문이다. 

- 말콤 글래드웰의 책을 읽은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 깨진 유리창 이론 을 뒷받침하는 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완전히 비현실적인 관점이라는 것 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는 껍데기 이론의 또 다른 변형으로, 뉴욕의 경 찰이 평범한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게 만들었다. 작은 실수라 도 그것이 훨씬 더 나쁜 길로 빠지는 단초가 될 수 있으며, 결국 우리 문명 의 껍데기는 극히 얇다는 것이다.
한편 경찰관들은 내재적 동기 없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관리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서가 서류상 최대한 좋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상사들에게 훈련을 받았다. 이 말은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는 일을 잊어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유리창을 수리하고, 집을 꾸미고, 지역 주민들의 우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질서정연한 교도소가 신뢰감을 내뿜듯 깔끔한 동네는 훨씬 더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유리창을 수리하고 나면 그 유리창을 더 활짝 열 수 있는 법이다. 하 지만윌슨과 켈링의 이론은 주로 깨진 유리창이나 어두운 거리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입건되고 구속되고 규제되는 보통사람들에 관 한 것이었다. '깨진 유리창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비유였다.
윌슨 교수는 끝까지 굳건한 입장을 유지했는데, 2012년 사망할 때까지 브래튼식 접근법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의 공동 저자 인 조지 켈링은 증폭되는 의심에 시달렸다. 그는 깨진 유리창 이론이 너 무 자주 잘못 적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심사는 항상 깨진 유리 창자체에 관한 것이지 가능한 많은 흑인과 유색인종을 체포하고 투옥하 는 것이 아니었다. 2016년 켈링은 "깨진 유리창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일을 나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인정했다. 전국의 경찰서장이 그 이론 을 언급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뇌리에 두 단어가 스쳐갔다. '이런 망할'

- '만델라식 방법'이 순진하다고 믿는 데서 시작한 미국인 에리카 체노 웨스Erica Chenoweth의 최근 연구를 살펴보자. 그녀는 현실 세계에서 힘은 총 구를 통해 발휘된다는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19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저항 운동에 관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2014년 체노웨스는 "그 뒤에 나는 계산을 해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비폭력 운 동의 성공률은 50퍼센트가 넘었지만 폭력적 운동에서는 겨우 26퍼센트 에 불과했던 것이다. 체노웨스는 비폭력 운동의 성공률이 높은 주된 이유 는 바로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무려 평균 11배 이상 참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량이 높은 젊은이 들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노인과 장애인도 여기 포함된다. 정권은 그 런 군중을 이길 수 있는 준비가되어 있지 않다. 선이 악을 압도하는 방법 은 바로 숫자로 압도하는 것이다.

- 오랫동안 1914년 크리스마스의 휴전은 감상적 동화에 불과하거나 더 나쁘게는 반역자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신화 취급을 당했다. 휴일이 끝나고 전쟁이 재개되자 10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실제로 발생했던 일은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 다. 1981년 BBC 다큐멘터리 <무인지대의 평화>가 방영되면서 비로소 이 이야기가 단지 한낱 소문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영국 전선 의 3분의 2가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전투를 중단했다. 대부분의 경우 영국 측에 우정의 제안을 한 독일인과 관련이 있다(벨기에와 프랑스가 담당한 전선 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모두 10만명 이상의 병사가 손에서 무기를 내려 놓았다" 사실 1914년 크리스마스의 평화는 하나의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스페인 내전과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 중에도 같은 일이 일어 났으며, 미국의 남북전쟁, 크림전쟁 및 나폴레옹전쟁에서도 일어난 일이 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크리스마스만큼 광범위하고 갑작스러운 곳은 없 었다.

- 우리가 스스로의 참호 속에 몸을 숨기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 는 증오를 유발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든 인류를 반영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거의 모든 악성 게시물을 익명으로 올리는 소수의 온라인 트롤처럼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가장 신랄한 키보드워 리어들도 다른때에는 사려 깊은 친구나 애정 어린 간병인일 수 있다. 사람들이 원래 친절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것은 감상적이거나 지나치 게 순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화와 용서를 믿는 것은 용감하고 현실 적이다. 뮬런로웨의 호세 소콜로프는 콜롬비아 군대의 한 장교가 광고대 행사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몇 달 뒤 그는 작전 중 사망했는데, 호세는 친구에게서 배운 내용을 여전 히 기억하며 감정적이 된다. 장교는 그에게 "나는 이 일을 하고 싶다. 관 대함이 나를 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부하들도 스스로 더 강인하다고 느끼게 해준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세월만큼 오래된 진리이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들과 마찬가지 로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신뢰와 우정에 관 한진실이자 평화의 진실이다.

- 한 남자가 여자를 납치해 그녀를 5년 동안 라디에이터에 묶어놓는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역사상 한 번쯤 일어났을 사건이다. 이것은 사회 에 대한 혹독하게 현실적인 분석이라고 일컬어진다. 만일 내가 사랑에 빠 지는 사람들을 다룬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화를 만들면 오늘날 영국에 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약 100만 명 정도인데도 그것은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감상적인 표현이라고 평가받는다. (리처드 커티스Richard Curtis(1956))

- 얼마전 리카르는 신경과 전문의인 타니아 싱어Tania Singer의 초청을 받아 뇌스캐너 안에서 아 침을 보내게 되었다" 싱어는 우리가 공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공감에 대안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알고 싶어 했다. 싱어는 실험 준비를 위해 전날 저녁 리카르에게 루마니아 고아원의 외로운 고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게 했다. 다음 날 싱어는 리카 르의 머리를 스캐너에 밀어 넣으면서 그에게 고아들의 텅 빈 눈빛을 떠올 려달라고 요청했다. 가늘고 긴 팔다리도 떠올려보라. 리카르는 싱어가 요 청한 대로 루마니아 고아들이 어떻게 느꼈을지를 가능한 열심히 상상했 다. 1시간 뒤 그는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 이것이 공감이 우리에게 행하는 일이다. 공감은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이후 실험에서 싱어는 지원자 그룹에게 눈을 감고 가능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라고 주문했다. 이 실험은 날마다 15분씩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그들은 한계에 부딪혔고, 주말이 되자 모든 참가자들이 더 비 관적으로 변했다. 나중에 한 여성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기차에서 동료 승객들을 쳐다보았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고통뿐이었다 고 한다."
리카르와의 첫 번째 실험 이후싱어는 다른것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다 시 한번 그녀는 스님에게 루마니아의 고아에 대해 생각해달라고 요청했 지만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하지는 말아달라고 했다. 그보다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완벽하게 수련해온 기술을 적용해 그들과 함께가아니라 그 들을위해 느끼기를 원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대신 따뜻함과 배 려, 보살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집중했다. 그들의 고통을 개인적으 로 경험하는 대신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했다.
- 싱어는 그 차이를 모니터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리카르의 뇌에 서 완전히 다른 부분이 밝아진 것이다. 공감은 대부분 귀 바로 위의 앞뇌 섬엽을 활성화하지만, 이때 반짝인 것은 그의 선조체와 안와전두피질이 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리카르의 새로운 사고방식은 우 리가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공감과는 달리 연민은 우리의 에 너지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사실 그 후 리카르는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연민이 동시에 더 통제되고, 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더 건설적이기 때문 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행동 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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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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