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에서 위기의 규모는 상당히 컸지만, 경기침체는 V자 모양으로 전개되었다. 99년부터는 2세대 외환위기이후로 유럽에서 그랬듯이, 그리고 유럽에서와 비슷한 이유로 급격한 침체가 지나고 경기가 빠르게 회복됨.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한 것이 수출경쟁력을 크게 강화해, 경상수지가 크게 개선되면서 경기회복을 뒷받침.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아시아의 신흥국들 중 일부에는 구제금융을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런 사실이 아시아 지역의 금융위기가 유럽보다 훨씬 파괴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줌.
역사 전반을 통틀어 외환위기의 충격이 한 나라에만 국한된 경우는 거의 없다. 라틴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주변국들이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이 때로는 무역을 통해 서로 통합된다는 사실로도 외환위기의 지역적 특성을 설명할 수 있음. 한 국가의 통화가치를 극심하고도 빠르게 떨어뜨리는 위기는 이웃한 국가의 경쟁력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침. 또한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일수록 비슷한 재화와 용역을 수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관계에 있으며 동일한 세계 공급사슬에서 한 부분을 차지함. 따라서 어느 한 국가가 자국 통화에 대하여 대규모 평가절하를 단행하면, 다른 국가도 수출경쟁력을 유지하려고 평가절하를 단행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이웃한 국가들이 비슷한 문화와 언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비슷한 경제구조, 제도, 정책뿐만 아니라 비슷한 약점까지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아시아 금융위기는 아시아 전역에서은행부문에 대한 전반적 신뢰가 부족해 널리 확산되었을 수도 있다.
3세대 외환위기가 주는 중요한 교훈은 어느 한 국가에서 발생한 충격이나 위기가 다른 국가로 확산하는 전염성을 띠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시아 금융위기는 남미 지역에서 대규모 자본유출을 불러왔다. 남미 지역경제가 아시아 지역경제와 구조족으로 다르고,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단계적 통로역할을 하는 무역 혹은 금융 관련 연결고리가 거의 없었는데도 말이다.
- 3세대에 걸친 외환위기는 정책입안자에게 다양한 교훈을 남김. 먼저 1세대 모델은 과도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80년대 라틴아메리카 국가처럼 경제의 기초조건이 취약할 때, 투기꾼들은 경제붕괴를 예상하고 그 나라의 통화를 대량으로 매도하려고 했다. 2세대 모델은 92년 유럽 환율 메커니즘 위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정환율 유지와 고용유지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투기꾼들은 정책입안자의 의지를 시험하면서 외환위기를 일으킬 수 있었다. 따라서 신뢰할 수 있는 정책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국가들은 경제의 기초적 여건이 건실해 위기를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교훈은 3세대 모델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바로 전염성이다. 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가 널리 퍼진데서 알 수 있듯이 투자자들은 신흥시장에서 핫머니를 빠르게 유출할 수 있다. 투자자들이 신흥국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할수도 있기 때문에, 정책 입안자들은 자국경제가 위기를 촉발할 수 있는 무분별한 매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차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
- IMF 보고서에 따르면, 무너진 경제가 장기적으로 회복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는 폭락이후로 10개월이 상당히 중요. 이 보고서는 정부가 느리게(4년 혹은 그 이상) 행동했을 때, 국민이 겪는 고통이 컸다고 전한다. 일본은 행동하는 데 8년이 걸렸다.
정부와 재무성이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은 원인은 비공식적이고도 관계에 기초한 규제관행으로 상황의 진정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령회사와 계열사로 부실대출을 넘기는 방식으로 장부를 꾸민 경우도 있었다. 은행이 부실채권을 장부에서 지울 때에도 담보물을 시장각격으로 평가하지 않고 구매가격에 회수한 것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도 재무성은 은행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부실대출의 규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가 회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 속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 그와 같은 행동을 공모했을 것이다.
- 80년대 후반, 주식시장 상승과 저금리 기조로 저리의 자금이 경제 전체를 휩쓸었다. 86년 말부터 91년 초 사이, 투자와 자본지출은 일본 경제성장에서 자그마치 3분의 2를 차지. 이런 규모를 가늠하자면, 일본경제는 매년 한국의 GDP가 더해지고 5녀만에 프랑스의 GDP가 더해지는 수준. 그리고 이런 시절이 끝날 무렵, 일본경제는 유럽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독일의 2배에 달했다.
주식과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90년대에 잃어버린 수십년의 첫번째 10년이 도래했다. 주택을 소유한 수백만명이 자신의 자산이 마이너스가 된 것을 깨달았다. 도쿄 주택가격이 워낙 비싸서 교외로 밀려난 많은 사람이 이제는 팔리지도 않는 집에서 직장까지 2시간이 걸리는 출근을 해야했다. 또한 경제성장률이 4%에서 1%로 급격히 하락하면서 이제는 18년마다가 아닌, 70년마다 2배씩 증가하는 소득에 적응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들이 경험한 잃어버린 10년, 아니 30년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경험할 경제성장의 둔화가 평균소득에 미치는 극적인 영향력이었다.
일본 은행들은 자산가격의 변동성에 취약해 부실대출을 흡수할 만한 여력이 부족했다. 공적 자금투입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고 자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를 좀 더 신속하게 해결하고 시장에 대한 불신을 거두며 자본 적정성을 회복하기 위한 자본투입을 주저했다. 이는 시장과 경제가 회복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규제를 보류하고 뒤늦게 부실대출의 실제규모를 깨닫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부실대출이 증가했고, 이로써 일본 은행들의 대차대조표가 손상되고 일본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
- 성장을 회복하고 디플레이션을 퇴치하기 위한 분투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내 금융위기의 여파는 유난히도 고통스럽게 밀려왔다. 소비자들이 물가하락을 예상해 구매를 뒤로 미루며 수요를 위축시켰고 회복을 더디게 했다. 그리고 이는 오랫동안 고착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아베신조 총리는 두번째 재임기간이던 12년부터 20년까지 아베노믹스라는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일본경제는 체계적 금융위기의 오랜 충격이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줌.
일본 금융위기는 역사를 통틀어 다른 금융위기들과 공유하는 특성인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의 과열, 그리고 이에 따른 버블의 붕괴와 함께 촉발된 측면이 있다. 일본의 정책 입안자들은 대공황 당시에 저질렀던 오류들 중 상당수를 되풀이했다. 그들은 너무 느리고 소극적으로 대처해 디플레이션을 고착시켰고 폭락이 오랜 침체로 이어지게 했다. 특히 일본 경제는 30년에 걸쳐 성장이 둔화되고 디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회복이 더뎠다.
동시에 일본의 폭락과 그 여파는 신뢰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히 일본경제는 30년에 걸쳐 성장이 둔화되고 디플레가 지속되면서 회복이 더뎠다.
동시에 일본의 폭락과 그 여파는 신뢰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여주었다. 일본 정부는 금융 시스템에 내재한 부실채권 문제를 해결하는데, 특히 은행 자본을 재조정하고 예금자를 위한 안전망을 강화하고 파산지경에 이른 은행을 관리하고 이들의 자산을 처분하는 임시기구를 설립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이용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늦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임. 재무성의 늦장 대처는 위기를 악화시키고 신뢰를 손상시켰다. 일본 국민들은 재무성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납세자가 낸 돈을 사용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일본경제를 멈추게 할 수도 있는 체계적인 은행위기에 직면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 IMF가 나서서 구제하기에는 일본경제의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 재무성이 신뢰를 잃은 것이 금융위기의 수습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 고통이 오래가게 했다.
- 95년 빠른 주가상승은 연준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닷컴버블이 그해에 시작된 것으로 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이들이 95년 8월 9일 넷스케이프라 신규상장을 한 것을 닷컴붕괴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넷스케이프라 네비게이터 브라우저를 통해 수익을 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신규상장에서 주가가 2배 넘게 오르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넷스케이프의 기업가치는 그날 거래 마감시각에 27억불에 달했다.
모든 이들이 닷컴붐의 시작일이 95년 8월 9일이라는데 동의하는 것은 아님. 경제학자 브래드 드롱과 콘스탄틴 매긴은 98년까지는 의미있는 버블이 없었다고 주장. 그들은 나스닥에서는 99년에버블이 생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스닥에서는 주식가치의 의미있는 상승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뉴스가 될만한 사건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가치총액이 2배넘게 증가. 또한 그들은 시장이 폭락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를 뒷받침할만한 중요한 뉴스가 없었다고 지적. 버블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왜 시작되었는지, 왜 터졌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우선 버블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없다. 때로는 버블이 터지는 것에 대한 다양한 원인이 제기되는데, 이것이 정책 입안자들의 버블분석을 어렵게 한다. 심지어 그린스펀도 결국에는 비이성적 과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그는 시장이 "수백만 투자자들의 판단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들 중 다수가 주요 주가지수를 구성하는 기업들의 전망에 정통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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