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온다

경제 2024. 6. 27. 18:21

- 악순환의 첫 단추는 바로 플라자 합의였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이 문제 삼았던 것은 대 일 무역 적자였는데, 이것이 비단 일본만의 잘못은 아니었기 때 문이다. 사실 그보다 한참 전부터 미국의 제조업은 계속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미국 소비자들이 자국 제품보다 일본 제 품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미국은 제 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보다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을 키 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런 선택의 결과로 시장에 일본 제품이 범람하게 되었고 대일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다.
물론 일본도 잘못이 있었다. '일본식 경영' 혹은 '일본 기업의 경쟁력'을 너무 심하게 자랑하고 다녔다. 하버드대나 MIT 같은 미국 유수 대학의 교수들에게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하고 경영 자 료를 제공하면서, 그들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 기업의 우월 성을 홍보했다. 그 결과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들에 일본 기업의 성공 사례들이 넘쳐났고, 이것은 역으로 미국인의 감 정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들은 부동산, 영화사 등을 사들이며 미 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주요 건물들, 미국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영화사들이 하나둘 일본 기업 소유 로 넘어갔고 이러한 행태가 결국 국민적 반감을 유발했다. 일부 산업의 노동조합이나 일부 지역의 시민들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 을 시작했고, 때로 제품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 리고 이것을 이용한 것이 미국의 정치가들이었다. 그들은 엔화를 평가절상해 일본 제품의 수출을 강제적으로 차단하려 했고, 그것 이 바로 플라자 합의였다.
- 그런데 일본 정부의 양보는 플라자 합의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 직전인 1984년에 일본에 금융 협정을 요구해 관철시 켰고, 1986년에는 반도체 협정을 관철시켰다. 특히 반도체 협정은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었는데, 일본 반도체 기업의 미국 수출을 제 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해외 반도체를 수입하는 것까지도 미 국이 원하는 대로 강제해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제시한 반도체 수입 목표에 일본이 미달하 자 1991년 제2차 반도체 협정(신반도체 협정)을 요구했다. 이 신반도체 협정'은 일본의 해외 반도체 수입 목표를 30%까지 끌어 올 린 뒤 미국 반도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반도체까지 수입하도 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었 을까? 미국이 일본 기업의 팔다리를 묶어놓은 사이에 삼성전자나 TSMC 같은 외국 반도체 기업들이 급성장했고, 이것은 결국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요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에 추진된 '미일구 조협의' 내용을 보면 미국의 압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많았다.

- '인구절벽'을 경험한 최초의 선진국
우리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기에 모타니의 지적 중에 특히 새겨들어야 할 점이 많다. 그중 하나는 인구 감소가 수요 감 소를 유발하기 때문에 일본의 역대 정권들이 추진해온 공급 위주 의 정책으로는 문제해결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가 기업의 영 업이나 생산활동, 투자 등을 도와주더라도 인구 충격에 따른 수요 감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장기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발상 을 180도 바꾸어 수요 위주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사회 안전망을 촘촘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는 것이다. 특 히 빈곤층과 한계 빈곤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두텁게 해야 한 다. 그래야 그들이 안심하고 소비활동과 생산활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령자들이 생산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생산 가 능 인구의 감소를 상당 부분 커버할 수 있다. 소위 생산가능 인구 의 상한선을 높여주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돈 많은 고 령자에게 충분한 인센티브를 주어서 그들이 소비를 늘리도록 도 와야 한다. 만약 그것이 힘들면 고령자의 자산과 소득을 소비활동 이 왕성한 자녀 세대나 손자 세대로 조기에 이전하도록 해서, 젊은 세대가 더욱 적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비슷한 방법으로 여성 경제활동 인구를 늘리는 방법이 있다. 일본 사회는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여성들을 전업주부로 묶어두 거나 일을 하더라도 파트타임 잡에 머무르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불러내고, 또 파트타임보다는 전일제 로 일하게 하면 인구 충격을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 출산율이 떨어질 것이라 는 우려가 초기에 많았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 타났다. 취업한 여성들은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고, 덕분에 출산율 이 오히려 더 높아진 것이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더 많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그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 출산, 육아, 교육 등을 지원하는 복지 제도를 더욱 체계적으로 빈틈없이 갖출 수 있 다면 출산율도 올라가고 생산가능 인구도 확대되며 수요도 늘어 난다. 이러한 정책이 공급 위주의 경제 정책과 맞물릴 때 경제가 장기침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모타니의 처방전이었다.

- 4.19 혁명으로 탄생한 장면 내각도 경제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놓았다. 1961년부터 1966년까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 계획에 맞추어 경제개발을 시동했고, 그 이후 5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계 획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의 핵심은 바로 대기업에 의한 수출 주도 성장 정책이었다. 한정된 기업에 한정된 자금을 몰아주는 정책은, 일본이 경제발전 초기에 사용한 정책이었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군에서 근무한 박정희는 일본이 만주국에서 사용한 이 모델을 차용해 수출 주 도성장 정책을 실시했다.
'경사발전 모델'이라고도 불리는 이 발전 정책은 은행을 국유 화한 뒤 중앙 관료들이 한정된 자금을 특정 기업에 몰아주는 방식 이다. 경제개발 초기, 열악한 자금 사정 하에서 이 자금을 받은 기 업들은 특혜 금융을 받은 것과 같았다. 인플레이션이 높은 상황에 서 실질이자가 마이너스 수준이다 보니 자금을 받는 것 자체가 특 혜였다. 이 자금을 받은 기업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쉽게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고 또한 빠르게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 기업은 자금 지원의 대가로 정치인들에게 '와이로(뇌물)'를 주었고, 정치인들은 이 자금을 활용해 자신들의 정치 적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또 이들은 관료와 은행을 움직여 또다 시 한정된 자금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성장 을 도모했다. 일본에서는 '철의 삼각편대', 즉 정치가와 관료 및 기 업이 서로 유착해 경제를 운영했는데, 이런 방식이 초기 자본주의 성장에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구조에 더해 특혜 금융을 받은 기업들이 내 수 시장에 머물지 않고 수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더욱 빠 른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1960년대는 섬유, 신발 같은 경공업 제 품을 수출했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제품으로 방향을 전환해 철강과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전기·전자 제품 등을 수출했다. 그 결과 1960년에 3,28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이 1970년 에는 10억 달러, 1977년에는 100억 달러로 급증했다. 일본이 경 사발전 모델을 통해 수출을 10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로 늘리 는 데 16년이 걸렸는데, 한국은 7년 만에 100억 달러를 달성하 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 1960년에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도 1977년에는 13배 증가한 1,034달러가 되었다.

-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NTT 도코모가 애플보다 훨씬 앞서 스마트폰을 출시했지만, 내수 시장에만 몰두 하다가 세계 시장에서는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1999년에 도 코모는 세계 최초로 핸드폰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 모드-mode'를 내놓았다. 아이모드는 세계인의 일상생활을 바꿔 놓은 '스마트폰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 앱'이라는 앱 장 터에서 앱을 다운로드해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스템도 아 이모드가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핸드폰에 PC 기능을 결합한 아 이모드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6년 1월에 가입자 수가 4,568만 명을 넘어서면서 도코모는 세계 최대 무선 인터넷 공급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인들이 열광한 아이모드는 글로벌 시장에서 외면받았을까? 이유는 바로 도코모가 지나치게 일본만의 독자성 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아이모드를 사용하려면 NTT 도메인 등록 이 필수였고, NTT가 자체 개발한 앱만 사용해야 하는 폐쇄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결국 2007년에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며 스마 트폰 시장을 새롭게 열었을 때 아이모드는 일본만의 스마트폰으 로 전락했다. 휴대폰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결합하고 앱을 통해 다 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식은 동일했지만 아이폰은 전 세계의 개발자들이 함께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개방형 플랫폼open platform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전국의 중증환 자수를 팩스로 집계하는 모습이 뉴스에 나왔는데, 그걸 보고 모 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 1990년대까지도 팩스가 모든 국민에게 너무나 편리한 통신 수단이었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의 이점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감각에 기름을 부은 것이, 앞서 설명한 ISDN 동 축케이블로 전국의 인터넷망을 구축한 일본 정부의 오판이었다. 우리나라는 ADSL 광케이블로 인터넷망을 구축했기에 국민들이 고속 인터넷을 경험했고, 빠르고 편리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팩스를 보내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동축케이블로 인터넷을 깔아버렸기 때문에 이용자 입장에서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에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일본 인 특유의 신중함과 '점진적 개선incremental innovation'이라는 일본 식 접근방법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또 광케이블은 속도는 빠르지 만 설치 비용이 동축케이블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투자비를 회수 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반면 동축케이블은 빠른 시간에 투 자비를 회수할 수 있다는 재무적인 판단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 디지털 기술은 신속하게 보급된 후 사용자가 급격히 늘어나야 투자비가 쉽게 회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처럼 광케이블 로 인터넷망을 구축한 선택은, 아날로그식 판단으로는 무모한 선 택이었다. 그것도 기간망뿐만 아니라 각 가정까지 광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무식한 선택일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영역이다 보니 이러한 무모함과 과감함이 오히려 올바른 선택이 되었고, 일본의 합리적인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잘 못된 것이었다.

-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를 급소라 여기고 찌르려 했으니 한국도 그 보복으로 지방관광을 거부했다. 이것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한국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지방 중소도시 자민당 의원들이 타격을 받았고, 그들은 서서히 아베 정권에 비판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권 교체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이 현상이 아베 정권의 무모한 수출 규제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일 경제전쟁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보이지 않 는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은 중국, 러시아 같은 대륙 세력 을 봉쇄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2012년경부터 해왔다. 그리고 이것 이 미중 패권경쟁으로 전이되면서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 선택하지 않는 것을 '전략적 모호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어느 한쪽을 선택 하자며 '전략적 명확성'을 주장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그 리고 그 연장선에서 '안미경(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함께하자)'이니 '안 미경미(안보는 미국과, 경제도 미국과 함께하자)'니 하는 주장도 매우 잘못된 주 장이다. 우리나라는 전략적 자율성을 가지고 어느 나라든 자유롭게 교역 하면 된다. 이것이 자유무역이라는 글로벌 보편적 가치와도 일치한다.

- 그런데 국익을 지키기 위해 재미난 행보를 한 나라가 또 있다.
바로 대만이다. 대만은 미중 패권경쟁의 최전방에 위치한 국가로, 비슷한 상황인 우리가 특히 눈여겨봐야 한다. 2022년 8월 미국 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이 대만을 방문했고, 대만 또한 총통 이 미국을 방문해 미국으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는 등 친미적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미중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대만은 더욱 공격적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했다. 중국이 미사일을 쏘아대고 전투기로 영공을 통과하는 위협을 가해도 아 랑곳하지 않고 철저하게 실용주의 노선으로 나간 것이다. 이 틈을 타 중국 시장에서 우리나라를 제치고 수입 시장 점유율 1위를 차 지하기도 했다. 대만은 중국 시장에서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 한 노력도 꾸준히 하고 있다. 국민당 마잉주 전 총통이 중국을 방 문하는 등 중국과 미국에 양다리를 걸치며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 자녀 세대의 경제 행동도 마찬가지로 달라질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6~7만 달러 시대를 살아갈 세대라면, 기존의 통념과는 다 른 선택을 해야 한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유명한 논문 <우리 손 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년)에서 다다음 세대를 향한 조언을 유언처럼 남겼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앞으로 2%대의 경제성장을 할 것이기 때문에 특히 2가지를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경제적 비관주의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이나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라는 등의 경제적 비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존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돈이나 재화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버리고 수단보다는 목적을, 효율보다는 선함을 추구하라고 조언했다.
1930년에 발표한 논문이지만, 주요 내용은 2030년의 우리 자 녀 세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민소득 6~7만 달러 시대를 살 아갈 다음 세대는 경제가 제로 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할 것이라 는 비관주의를 버려야 한다. 선진국이 되었기에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률은 기대할 수 없어도 지속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일 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도 있 겠지만 평균적으로는 1~2%대의 안정적인 성장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니 우선 경제적 비관주의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세대에 만연한 물질주의, 물신주의도 함께 버려야 한다. 돈이면 최고고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 다. 케인스의 조언처럼 수단보다 목적을, 효율보다 선함을 추구해 야 한다.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리고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다.
특히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가 남겨준 사회적 자산social asset 향유하며 살아갈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전 국토에 사통팔달로 깔아 놓은 도로나 통신망 같은 인프라, 잘 개발된 관광지나 리조트 등 모든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이 축적되어 있다. 이것 은 개인의 자산으로는 계산되지 않지만,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자산이다. 다음 세대는 이것 또한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자산까지 고려한다면 1인당 평균 10만 달러 전후의 소득을 향유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선진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자주성의 확립
일부 소니 세대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리스펙트'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 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한국은 어리석게도 근대화의 조류에 올 라타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울분도 함께 있다. 이러다 보니 함께 모여서 메이지 유신을 공부하고 그 본고장 인 야마구치현을 방문하기도 한다. 그러면 야마구치 하기시에 있는 요시다 쇼인의 기념관을 가보기도 하고, 그가 길러낸 후학들의 면면을 보며 메이지 유신의 대단함에 경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곳이 아베의 지역구이고 일본 보수 우익들이 그곳을 의도적으로 성역화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더구나 그 후학들이 조선 총독으 로 부임해 물자를 수탈했던 사실이나 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 미암아 일본조차도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잘 모른 다. 그리고 그 군국주의는 태평양전쟁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일본 근대화의 입구인 메이지 유신만 봤지 그 말로인 태평양 전쟁의 참담한 내막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범들이 반공 을 기치로 정치가가 되고 일본 사회지도층으로 거듭난 것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패전을 종전이라고 하며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 미국을 숭상하고 아시아를 멸시하는 것도 모른다. 또 그들의 아들 딸이 대를 이어 정치가가 되고 사회지도층이 된 것도 잘 모른다. 강상중 전 도쿄대 교수도 메이지 유신의 비틀린 구조를 신랄 하게 비판했다. 국가는 떠올랐을지 몰라도 국민은 버려졌다는 것 이다. 약한 국민과 약한 사회 위에 강한 국가를 건설하다 보니 그 국가가 제국주의로 폭주하여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조선과 아시 아에까지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고 설명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강한 국민과 강한 사회를 가지고 있었기에 강한 국가를 견제하면 서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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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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