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 C. 451년 호민관이 '12표법'을 제정했다. 채무 때문에 병사를 노 예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로써 로마 최초의 성문법이 탄생했다. 이후 영토 확장을 거듭하며 여러 지 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통치자들은 모든 사무를 법률에 따라 다스리게 되었다. 이러한 로마법은 세계 금융체계를 완성하는 데 매 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법률 가운데 로마법을 계 승하지 않은 것이 없다. 로마법이 없었다면 유럽의 경제번영도, 은행 도, 주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법은 경제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을 만들어냈다. 바로 오늘날 금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과 권리와 의무의 동등성이다. 하지만 당시 로마는 노예제 사회로 이른바 사유재산, 자 유권 등은 노예주에게만 해당될 뿐 노예에게는 전혀 딴 세상의 이야 기였다. 노예 자체가 일종의 재산에 속하는데 어떻게 노예가 재산권 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물론 로마법 이외에도 고대 인류사회에는 여러 가지 법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로마법이 지금까지 이어지 고 있는 것은 법조항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사실 로마법에는 고 대 노예제 사회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가령 채권자가 채무자를 죽이거나 땅을 몰수하는 등의 조항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법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로마법에서 비롯된 법률이 비로소 독립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 문이다. 법률에 따라 공평한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반드시 재판을 통 해 죄를 정하고 형벌을 내려야 한다. 또한 특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는 그에 부합되는 특정한 행위가 존재해야 한다. 법정을 통해 죄의 유 무가 확정되면 반드시 법으로 정한 권리나 의무를 집행해야 한다. 이 것이 바로 법의 신성함이다.
- 로마 공화정은 군인들의 피로 세워진 나라로, 광활한 지역을 말발굽 으로 달리며 하나하나 정복해나갔다. 그러나 막상 유럽 지역 전체를 정복한 뒤에는 올림포스 신들의 현명함과 명석함을 저버리고 뻔뻔함 과 저속함만이 남게 되었다. 귀족들은 무자비한 약탈로 부를 축적하며 평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외면했다. 공화정 말기, 귀족과 평민들의 빈 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 소유자들 이 땅값을 올려서 팔 수 없도록 토지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결 과 원로원의 원로들과 귀족들의 반감을 사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 오늘날 고대 해저 유물을 발굴할 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저울 과 검이다. 바이킹족이 유럽을 약탈하며 모은 거대한 자금은 상업자 본이 되었다. 동양과 아라비아 지역에서 온 상인들은 바이킹족의 든 든한 자금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9세기 후반 북유럽 스칸디나비 아 지역의 황무지에는 어느새 번화한 상업지구가 들어섰다. 비르카 시장에서는 향료, 비단, 양모, 포도주, 유리, 청동기 등 당시 가장 사치스러운 소모품들이 집중적으로 판매되었다.
바이킹족은 본격적으로 상업활동에 나섰다. 862년 바이킹족은 슬라 브 지역에 키이우 공국을 세웠다. 이곳 역대 국왕들의 가장 중요한 업 무는 병사들을 이끌고 각 지역의 성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성을 약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성을 돌아 다니며 밀랍, 모피 등을 사들여 해마다 콘스탄티노플로 운송했다. 키 이우 공국은 작은 공국이었지만 흑해, 발트해, 카스피해 간의 교역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유럽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덕분에 그동안 아라비아 상인들이 지 중해 상권을 장악하며 값비싸게 팔던 동양의 상품들 가격이 크게 하 락하면서 대량으로 유럽에 유입되었다.
- 911년 바이킹족의 수장인 롤로 Rollo 또한 노르망디 공국을 세우고 본격적인 상업활동에 나섰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해까지의 항 로를 개척했다. 그 후 2세기 동안 아라비아-지중해 항로가 점차 시들 해지면서 이 항로가 유럽 해상무역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과거 바이 킹족이었지만 해상무역을 하면서 그들 역시 해적의 출몰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해적은 바로 같은 바이킹족 출 신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쌍방 모두 상대방에게 위협적인 존 재였기에 쉽사리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이들은 육지에서의 안전한 상 품 운송을 위해 유럽 곳곳에 성을 세워 상품을 보관하고 무역거래를 했다.
이렇게 해서 바이킹족은 유럽에서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 다. 1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발트해, 북아프리카, 인도까지 발길이 닿았다. 이처럼 왕성한 무역활동은 도시 발전과 경제 부흥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
벨기에의 사학자 앙리 피렌느Henry Pirenne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외부의 자극과 사례가 없었다면 농업문명 상태에 고착되어 있던 서유럽이 그토록 신속하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이킹족은 2세기 동안 유럽 대륙을 활보했지만 그 대가로 수만 명 이 목숨을 잃었으며, 모든 해적들이 돈을 벌어들인 것도 아니었다. 또 한 남편을 잃은 바이킹족의 미망인들은 비참한 생활을 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은 『덴마크 여인의 하프 연주에서 “...... 기나긴 밤 외로운 젊은 미망인은 슬픔을 억 누를 길이 없고......"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 10세기 후반 대부분의 바이킹족은 해상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북 유럽 본토에서는 씨족 부족사회 체제가 무너지면서 강력한 왕권체제 가 등장했다. 이제 바이킹족들은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다. 또한 1000년 무렵 북유럽인들은 그리스도교에 동화되어 대부 분 개종하게 되었다.
북유럽 사회는 서유럽을 약탈한 해적들의 세계였지만 서유럽은 북 유럽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서유럽 사회는 그리스도교를 통해 북유럽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970년 덴마크 왕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1000년에는 아이슬란드 왕실이 다신 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1024년에는 노르웨이 교회가 정식 으로 설립되었다.
1066년 노르웨이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바이킹 족의 신화도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 1119년 경건한 기사 아홉 명이 모여 템플 기사단을 결성했다. 그들 은 하느님 앞에서 가난, 고행, 신앙심, 복종을 맹세했다. 수십 년 뒤 템 플 기사단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키는 가장 핵심적인 군사력이 되었 다. 훗날 성 요한 기사단. 튜턴 기사단도 템플 기사단을 본떠 만들어 진 기사단이다. 그런데 사실 템플 기사단은 전혀 가난하지 않았다. 그 들은 예루살렘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재물을 수중에 넣었다. 그들은 참회자와 약탈자로서 이중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심지어 일 각에서는 템플 기사단이 예로부터 전해져오던 로마 제왕의 묘에서 엄 청난 보물을 발굴했다고 주장한다.
- 여하튼 템플 기사단은 예루살렘의 수호자로서 왕국을 세우고, 예루 살렘에 참배하러 오는 그리스도교도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템 플 기사단은 돈을 약탈하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정작 전투력은 형편없 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셀주크튀르크족의 반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쫓 겨나고 말았다.
동방원정의 목표를 위해 교황과 왕실은 템플 기사단이 계속해서 활 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템플 기사단은 그들에게 실망만 안겼다. 더 이상 그들이 바라는 대로 무력을 휘두르 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템플 기사단의 주된 역할은 하느님을 위해 솔 선수범하여 목숨을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느님 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전장에 보내는 것이었다.
- 교황과 왕실로부터 돈을 받은 템플 기사단은 그 돈을 밑천으로 새로 운 십자군에게 대출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군단이 있는 곳 마다 분점을 설치했다. 그 후 십자군 원정이 수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템플 기사단은 유럽과 중동 지역에 1,000여 개에 달하는 분점을 보유한 하나의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는 세속과 그리스도교 교의가 일체화된 조직으로서 지역, 업종, 국가를 초월한 국제적 금융조직으 로 발전했다.
템플 기사단은 상업에 대해서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환전 이 매우 좋은 돈벌이라는 사실은 금세 알아챘다. 이로써 신십자군은 여러 나라에 분포된 템플 기사단의 분점에서 증명서 한 장만으로도 쉽게 현금을 바꿔 쓸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일반 상인들도 템플 기사단의 송금체계를 이용하게 되었다.
- 독특한 규칙으로 템플 기사단은 대외적으로 명망을 쌓으며 명예를 얻었다. 템플 기사단은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돈을 모으 게 되면 죽은 뒤에 템플 기사단의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신앙에 기 초한 이러한 징벌은 금융 활동의 위험부담을 크게 줄였다. 훗날 템플 기사단의 규칙에는 하느님을 대하듯 주군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서약이 추가되었다. 이는 오늘날 고객 당사자 이외에는 그 누구도 돈 을 인출할 수 없는 스위스 은행의 규칙과도 비슷하다. 템플 기사단의 독특한 규칙은 그들에게 명성과 신뢰를 가져다주었다.
1232년 영국 대법관이 체포되자 영국의 헨리 왕은 대법관이 템플 기사단에게 맡겨놓은 재산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사단 은 위탁인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재산을 내놓을 수 없다고 거 절했다. 1250년에는 프랑스의 왕 루이 9세가 이집트 정벌에 나섰다가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다. 프랑스 대신들은 템플 기사단이 관리하고 있던 루이 9세의 돈으로 국왕의 보석금을 지불하려고 환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템플 기사단은 이 역시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13세기 후반에 이르자 템플 기사단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력 이 큰 조직으로 발전했다. 보유하고 있는 장원과 영지가 약 9,000곳에 달했으며 연간 수입이 600만 파운드를 넘었다. 당시 영국 왕실의 연 간 수입이 3만 파운드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라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이는 템플 기사단의 금융업이 본래의 단순한 저축에서 송금, 신탁관리로 확대되면서 전통적인 은행업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템플 기사단의 엄청난 부는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결 과를 초래하고 만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1337~1453년) 역시 특 별한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전쟁의 결과가 매우 우연적이었으며 두 나라 모두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기는커녕 왕권 약화라는 결과를 초 래했다. 반면에 전쟁을 지탱하던 금융체계는 공전의 발전을 이루었 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도 그 전쟁으로 금융이 크게 발전하리라 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1328년 임종을 앞둔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는 매우 황당한 유언을 남겼다. 후사가 없으니 영국 국왕이자 그의 외조카인 에드워드 3세에 게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인을 국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프랑스 귀족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래서 귀족들은 샤를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를 내세워 왕위를 계승 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백년전쟁이다. 하 지만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하다.
당시 플랑드르는 프랑스의 모직공업 도시로 영국 양모의 집산지이 기도 했다. 플랑드르에 군침을 흘리던 프랑스 왕실은 급기야 플랑드 르에 있는 영국 상인을 체포하고 상회의 특권을 빼앗았다. 이로 말미 암아 프랑스 왕실은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영국은 주된 재정 수 입원을 잃게 되었다. 양모 판매 루트가 차단되자 이를 묵묵히 두고 볼 리 없는 영국이었다.
1337년 11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 부대가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쟁이 100년 동안 이어지며 양국 모두 피폐해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 사실 전쟁은 이익 다툼에 불과하다. 돈과 양식을 훔치고 삶의 기반 을 빼앗는 것이다. 백년전쟁에서도 충분한 자금만 있었다면 프랑스 왕 은 궁수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영국 궁수들 도 모두가 용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영국 왕과 프랑스 왕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는 모두 '돈이 수행한 게 임'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매우 곤궁해서 전쟁을 벌일 만한 여유 가 없었음에도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엔 치욕적인 패배를 맞게 되었다. 1360년 영국과 프랑스는 브레티니 조약(Treaty of Brétigny, 백년전쟁 당 시 브레티니에서 맺은 휴전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칼레 항구와 아키텐 지방을 영국에게 할양했고 1364년에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런던 감 옥에서 사망했다. 백년전쟁의 첫 번째 대결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 렸다.

- 가격혁명과 무역 발전이 반드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 다. 그렇지 않다면 스페인이 그토록 빨리 몰락하고 대신 네덜란드가 해상 강국의 위치를 차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즉 무역 발달은 부 국강병의 충분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조건은 반드시 재산을 보호 해줄 존재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점이다. 제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봤자 누군가가 빼앗아가거나 훔쳐 가면 무슨 수로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스페인은 국가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가 격혁명 과정에서 스페인 상인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 을 만큼 정치와 밀착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 가의 배후에는 항상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바로 독일의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가문이었다. 이 가문 때문에 스페인은 왕실 독점에서 상인 독점으로 바뀌어 부가 극소수 사람들에게 집중되 었다. 때문에 훗날 스페인은 세계 패권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 앞서 언급했듯이 통화팽창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스페인은 이 를 증명하는 좋은 사례다. 푸거 가문은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며 왕실 을 제멋대로 조종했다. 그 결과 해외에서 약탈한 금과 은은 왕실과 푸 거 가문이 독점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많은 돈을 흥청망청 써댔다. 부는 왕실과 부유한 상인에게 집중되었고, 교역상품은 대부분 사치품이었으며, 자본은 국내 상공업에 흡수되지 못했다. 즉 해외탐험으로 약 탈한 금과 은이 국민들에게는 전혀 혜택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투자방식은 푸거 가문을 통해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16 세기부터 푸거 가문은 유럽 각국의 왕실과 교황청에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푸거 가문은 유럽 전체의 채권자로 명성을 날렸다. 대신 스 페인이 해외탐험을 통해 애써 가져온 은덩이는 모두 국외로 유출되었 다.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의 피와 땀의 대가로 축적한 부는 영국, 프 랑스 등지로 유입되어 그 나라 자본시장의 화폐를 풍족하게 했다. 하 지만 정작 스페인은 해외 투자를 통해 얻은 수익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페인이 해외탐험을 통해 금과 은 을 약탈하는 행위가 국가의 유일한 기간산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국가에게 이는 치명상과 다름없었다. 어차피 해외 식민지에서 약탈로 거액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자국의 국 가산업을 발전시킬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17세기에 들어 암스테르담의 금융업은 유럽 왕실을 대상으로 한 대 출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1756~1763년 동안 유럽에서 7년 전쟁 (1756~1763년에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 대국들이 둘로 갈라져 싸운 전쟁)이 터지자 네덜란드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7년 전쟁은 유럽의 모든 왕실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유럽 대륙은 물론 지중해, 북아메리카, 쿠바, 인도, 필리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국내 금융업자가 각국에 빌려준 돈은 국내에 보유한 현금(금과 은)의 15배에 달했다. 세계적으로 유통 되는 화폐를 보유한 국가에게 이처럼 대규모 대출은 거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일단 어느 한 은행에서 실물화폐로 교환하지 못할 경우 전 체 은행업은 물론 세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쟁이 7년 동안 지속되면 망하는 국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7년 동 안 지속된 전쟁은 참전한 유럽의 모든 왕실을 무너뜨렸다. 그중에서 도 가장 큰 낭패를 본 것은 네덜란드 은행이었다. 1763년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도 암스테르담은행은 대출해준 돈의 이자도 받지 못했고 여 러 은행에서는 대규모 인출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때문에 43개의 은행이 파산했다. 이때부터 암스테르담의 금융업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는 세계 패권을 다투는 최후의 보루를 잃게 되었다. 네덜란 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가 독점무역으로 크게 흥하는 동안 영국 은 명예혁명과 자산계급 혁명을 겪었다.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의 쇠락은 적수에게 화려한 장미꽃 한 다발을 바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패권을 장악할 국가가 새롭게 성장하면서 인류는 현대문명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 당시 영주의 토지는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 다. 하나는 농노가 농사를 짓는 땅이고 또 하나는 장원의 공유지였는 데 양쪽 땅 모두 부업으로 목축업을 할 수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목축업만을 하게 된 땅은 바로 장원의 공유지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인클로저 운동 당시 토지를 빼앗긴 농노와 산업혁명의 기반이 된 무산계급은 결코 동일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 었다는 사실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16~17세기에 일어났고 산업혁명 은 그로부터 최소 1세기 뒤에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클로 저 운동으로 농경지를 잃은 농노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실 농경지를 잃은 농노는 없었다. 18세기 후반까지 영국의 농민 수는 계속해서 증가 추세를 이루었다. 그럼 농경지를 목축지로 바꾸 지 않았단 말인가? 목축지로 바뀐 땅은 모두가 공유지였다. 본래 농경 지가 아니라 목축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는 것이다. 전국이 목축업에 주력한다고 해서 강대국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전국이 목축장으로 변하고 농노가 농경지를 잃 고 떠돌이가 된다고 해서 주력 산업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어느 시대든 토지는 중요한 사회적 부다. 하지만 사회적 부의 증대 는 물질적 생산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토지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절실하다. 토지는 그저 토지일 뿐 다른 생산방식을 응용해야만 비로소 부의 증대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을 강대국으로 키운 토대는 목축업의 배후에 있는 수공업의 발 전이었다. 새로운 생산방식은 기존의 농업 노동력을 해방시킬 수 있었 다. 농업 노동자들이 그동안 생계 터전이었던 땅에서 벗어나게 된 것 이다. 이로써 영국 국내 방직업은 단숨에 성장하면서 유럽에 필요한 옷감의 대부분을 생산하게 되었다. 때문에 역대 역사가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통렬히 비판하지만 칼 마르크스는 오히려 이렇게 평가했다. "당시 혁명은 자산계급 시대의 서막을 열면서 새로운 시대를 창조 했다."
인클로저 운동이 잔혹했는가?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양심 도 없는 사람들이었나? 농노들의 생활은 비참해졌는가?
대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상당수 농노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땅을 떠나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잔혹한 수단으로 노동자를 착취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랑자가 되어 떠돌지언정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는 것은 꺼려할 정도였다. 그래서 1601년에 제정된 빈 민구제법의 법률 규정을 핑계로 건강하면서도 일을 하지 않고 떠도는 부랑자의 경우 3회 이상 체포되면 사형에 처했다. 이를 두고 왕실과 자산계급의 파렴치한 결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삶은 고난이었기에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최고의 이상이었다.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이상은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령 영국에서 방직기 술 발명을 두고 산업혁명이라고 일컬은 것도 사실 당시에는 옷을 입 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꿈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 가는 것조차 힘든 각박한 생존환경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당시 인 류 최고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혹독한 자연환경에 맞서 싸웠고 이는 전혀 다른 생존 방식이 되었다. 가령 동양은 황제를 중심 으로 한 왕권체제, 유럽은 분권체제가 형성되었다. 이후 동양과 서양 에는 서로 다른 사회체제 속에서 각각의 가치관이 생겨났다. 오늘날 사람들은 왕권체제와 분권체제는 물과 불처럼 상반된 것이라고 여기 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천 년의 역사를 거듭하면서 왕권체제와 분권체제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시대마다 제각각 다른 해답이 나 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이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분권체제가 왕권체제보다 우월해지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 부터다.
외부의 도전에 왕권체제는 비교적 유리한 편이다. 가령 백성들을 혹 사시켜 수십 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쌓는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 을 잃었지만 결국에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졌 다. 이 장벽은 명청시대까지도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견고한 대문 역할 을 했다.
하지만 왕권체제에도 단점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경쟁이 없다 는 사실이다. 왕권사회는 피라미드 구조를 띠고 있는데 그 꼭대기에 는 황제가 있고 황제는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백성들 을 핍박하고 자원을 얻어낼 수 있다. 피라미드 아래로 내려갈수록 권력은 약해지고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줄어든다. 이러한 구조 에서 왕권은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으므로 끝도 없는 착취와 약탈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착취가 피라미드 최하위층의 생존환경을 극한으 로 몰고가면 돌이킬 수 없는 폭력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왕권에 저항 하는 이들의 목표는 자신의 이득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 권을 창출하는 데 있다. 새로운 왕권이 창출되면 새로운 피라미드 사 회가 만들어진다.
동양의 사회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는 순환을 했다.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권좌를 차지한 통치자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약탈 하며 그들의 재산권을 빼앗고 개성을 억압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 게 부의 축적에 대한 욕망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겠 는가?
서유럽은 왕권체제를 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왕권사회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로마의 카이사르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등 서유럽의 통치자들 가운데 동양처럼 왕 한 사람 에게 권력이 집중된 전제군주 체제를 꿈꾸지 않은 이는 없었을 것이 다. 하지만 서유럽 민족의 변천은 연속성이 없었다. 로마가 아테네 도 시국가를 정복하고,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공하고, 바이킹족이 게르만 국가를 침범하는 등 매시대 일어난 각 민족의 정복전은 한결같이 파 괴적이었다. 일단 이민족이 침입하면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부와 경 제적 기반이 초토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 역시 하나의 민족, 하 나의 왕조를 통해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서유럽은 원 시사회와 같은 권력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권력이 평형을 이루는 조건 아래에서 서유럽 각 지역의 실력은 균형 을 이루게 되었다. 약소국은 강대국과 정면충돌할 경우 무력으로 복 속되기 쉬웠으므로 충돌을 피하거나 양보했다. 때문에 서유럽의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10만 명 이상이 동원된 대규모 전쟁은 아테네와 로 마제국 시대의 몇 차례뿐이었다.
서유럽은 11세기까지만 해도 해적의 침입에 전전긍긍했고 도시와 영주는 작은 세력을 이루어 외적에 대항했다. 하지만 낙후된 농업생 산으로는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를 때까지 도 유럽의 문명은 아테네 시절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 설적이게도 유럽의 낙후는 시행착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봉 건영주제는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환경 조건을 제공했다. 영주에서 국왕에 이르기까지 일원화된 왕권체제가 세워져 있지 않아 각 지역은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이루었다. 비교적 우수한 해상운송 조건은 북유 럽 시장을 발달시켰고 기사도 정신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상업정신의 토대가 되었다. 서양의 분권체제는 이렇게 완성되어 갔다.
동양의 집권적 왕권체제와는 달리 유럽의 제도는 이성적으로 변천 했다. 물론 무수한 시행착오와 숱한 생명의 희생으로 얻어낸 합리적 이고 이성적인 제도였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유럽 민족문화에 통일성 을 부여했다. 마침내 영국에서는 의회와 보통법 체계가 마련되었고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유럽은 공업화와 시장의 변혁을 거쳤고, 시장교역은 현대 경제활동의 토대가 되었으며 인류가 생존경제(인간 다운 생활을 해나가기에 적합한 정도의 생산활동을 영위하는 경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전쟁은 세계 전쟁사상 하나의 기적이었다. 오 히려 전쟁이 경제발전을 촉진시켰으니 말이다. 독립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의 경제활동을 제약하고 압박하는 영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로써 전 세계의 상선이 이곳을 분주히 오가며 활발한 교 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강국이 되는 길은 어쩌면 이처럼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 1840~1850년대의 서부 개척과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 전쟁은 광대 한 토지를 미국에 안겨주었고 철도와 운하는 상업 운송의 동맥이 되 었다. 낮은 운송 비용과 빠른 운송 속도로 상업 발전에 활기를 더해주 던 때에 캘리포니아 금광의 발견으로 화폐가 넘쳐났다. 이러한 조건은 산업혁명 이후 미국 기업에 광대한 시장을 형성해주었다. 그러나 그 시장도 한도가 있었다. 철도가 광활한 국토를 한데 잇고 국민들에게 충분 한 방직품을 제공해주었을 때도 상품 판매량은 일상 소비수준을 유지 했다. 하지만 시장이 사라지자 시장이 폭발할 때 쌓인 생산력은 당연히 과잉되었고 결국 이러한 악순환의 반복으로 위기가 찾아온다.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구 시장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 다시 찾아왔다.
- 1861~1865년 미국 남북전쟁의 결과로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고 미 국 경제는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미국은 위 대한 국가가 될 수 없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싶다. "독립전쟁과 마찬가지로 남북전쟁은 그 저 결과가 위대했을 뿐이다"라고 말이다.
전쟁은 북부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1861년에 파산한 북부 의 은행이 1857년 금융위기 시절에 파산한 은행보다 더 많았을 정도 다. 전쟁이 터져 남부 농장주들에게 빌려준 대출금 3억 달러를 받을 수 없게 되자 파산에 이른 것이다. 1857년의 경제공황은 증권시장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그래도 회생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뉴 욕 증권시장에 주가 폭락을 가져왔고 결국엔 모든 주식들을 휴지조 각으로 만들어버렸다.
- 링컨은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데 도대체 어 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링컨이 생각해낸 방법은 너무도 단순하 고 어리석었다. 재무부 명의로 새로운 지폐를 찍어내는 것이었는데 바로 지폐 뒷면이 녹색으로 인쇄된 그린백 greenback이었다. 어마어마 한 규모의 그린백이 발행되자 사람들은 통화팽창의 위기에 대비해 집 안의 금고에 금을 쟁여두기 시작했다.
1863년 의회는 국가은행법을 통과시키고 정부에 그린백 3억 달러 를 발행할 권리를 부여했다. 상업은행은 그린백을 비축해야 하고 그 린백의 절반은 뉴욕 중앙은행에 보관하도록 했다. 이로써 링컨은 전 국의 화폐를 통일하고 중앙은행을 재건함으로써 전쟁 기간 중 혼란에 빠진 화폐 상태를 정리했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상당히 드라마틱했다. 전쟁을 하려면 물자가 필요하다. 전쟁 전 산업의 90%를 제조업이 차지했던 북부는 기존의 산 업을 기반으로 삼아 약간의 구조를 수정했다. 가령 수도관 생산라인 은 라이플총 생산라인으로 개조하고, 의류는 군복으로, 탈곡기나 파 종기 등은 전차 생산라인으로 각각 개조했다. 미국 역사상 새로운 공 업 투자가 시작된 것이다. 북부의 농업도 전쟁을 통해 발전 기회를 얻 었다. 전쟁으로 노동력이 감소하자 탈곡기, 파종기 등 대형 농업 기계 설비 생산량이 군수 제품과 함께 동반 성장했다. 그 결과 1861~1862 년 사이 영국으로 수출되던 북부의 밀은 수출량이 세 배나 증가했다. 어느 시대든 화폐는 증권시장을 자극한다. 화폐는 증권시장이라는 총의 탄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가 건강할 때에만 실물경제와 상호 원동력이 된다. 월스트리트는 지폐와 주식이 동시에 크게 증가한 것에 주목했다. 산업이 나날이 발전하자 월스트리트도 호황을 누 리게 되었다. 당시에는 다우존스 지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래량이나 뉴스, 사건 등을 통해 당시 큰 호황을 누리던 증권시장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 1894년 중국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날 즈음 미국은 이미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공업품 생산량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생 산량을 합한 것과 비슷했다. 미국은 이미 패권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 고 미국에 대적하는 국가는 마음대로 응징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미국은 이러한 영광을 계속해서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제국들처럼 미국의 발전도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바로 독점법이었다.
기업에게 독점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세계 최고의 기업을 보유한 경제대국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당시 US스틸, JP모건 등은 세계 시장을 요동시킬 만큼 막강한 기업이었다. 독점은 고이익을 창 출할 수 있고, 독점 단계의 기업은 자연히 자유경쟁 단계보다 개발 비 용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점은 미국 경제에 엄청난 수익 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고통도 안겨주었다.
첫 번째 문제는 독점기업이 벌어들인 돈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다. 1913년 록펠러와 J. P. 모건의 재산을 합한 액수는 미국 전체 자산의 3 분의 1을 차지했고 세계적으로는 10분의 1에 해당했다. 참으로 엄청 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문제는 독점기업이 연방정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의원들을 조 종했고 더 나아가 미국 정부의 내정과 외교정책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 문제는 노동자들이 가난에 찌들었다. 부가 소수의 사람들에 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이 얼마나 궁핍한 생활 을 해야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수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어떤 책에서는 유럽의 금융 대결이 제1차 세 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는 맞는 말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독일 두 나라의 금융전쟁이었다. 유럽의 경제 자원을 모두 소모하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지만 전쟁으로 승리의 왕관 을 차지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력 투쟁을 하기에 앞서 두 참전국은 금융 방면 에서 상대 국가의 경제를 와해시키려고 시도했다. 1914년 7월 말 영 국은행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어음 할인율을 3%에서 10%로 올려 자 금이 잉글랜드 땅에서 회전되도록 유도했다. 그러자 베를린은 즉각 패닉 상태가 되었다. 독일 은행에서는 대량인출 사태가 발생했으며 한 달 사이 예금액이 20%나 줄어들었다.
독일 은행의 처리 방식은 매우 단순하고 강압적이었다. 금태환을 중 단하고 국채를 화폐체계에 포함시켰다. 이는 화폐 발행량을 늘리는 것과 똑같이 매우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금본위제 시대에 금태환을 중단한다는 것은 외국에서 대출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끊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때마침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1914 년 8월 2일 독일이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했다. 무릇 전쟁은 돈을 필요로 한다. 이론적으로는 전쟁을 치르는 나 라는 세금 징수로 비용을 충당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전쟁 비용을 대출하여 조달한다. 그 이유는 첫째, 전쟁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거두거나 국내에서 대출을 할 경우 국민의 지지도가 하락할 수 있고 자금 조달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에서 이길 경우 외국에 빚진 돈을 패전국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 문이다. 가령 중국은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일본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때 배상금의 대부분은 일본이 다른 나 라에게 빚진 돈을 대신 갚아주는 데 쓰였다.
독일의 선택은 국내 은행에서 대출하여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었다. 전쟁 시작부터 영국으로부터 융자를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미국은 중립을 표방하고 나섰기에 돈을 빌리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 "독일은 유럽 대륙의 경제 중심으로서 독일의 구매력을 회복시켜야만 영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때문에 독일의 부흥은 그 깟 배상금을 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케인스의 건의에 따라 영국 정부는 독일의 전쟁배상금 정책을 다시 세우게 된 것이다. 미국 공화당도 이와 비슷한 의제를 의회에 내놓았 다. 전승국에 비해 독일은 전쟁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어서 나라를 재 건할 자금이 가장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배상금이 적을수록 좋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영국과 미국의 지지 아래 독일은 더욱 대담해졌다. 당시 독일은 비르트 내각이 경제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총사퇴하자 11월 우 익 성향의 빌헬름 쿠노 내각이 들어섰다. 그런데 쿠노 내각이 전쟁배 상금 지불기한을 무기한 연장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는 크 게 반발하며 독일을 맹비난했다. 결국 1923년 1월 11일 프랑스는 목 재 인도를 불이행한다는 명목 아래 총 10개 사단 10만 명에 달하는 병 사를 독일 루르 지방으로 보내 그곳을 점령했다. 루르 지방은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로서 독일 총인구의 10%가 거주하며 철강과 석탄 생산 량은 전국의 80%를 차지했다.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은 소극적인 저항정책을 펼 쳤다. 루르 지방의 관리들은 프랑스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며,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주민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프랑스의 루르 지방 점령은 미국과 프랑스,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급기 야 연합국의 전시 동맹관계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영국 수상은 미국을 방문하여 우호적인 회담을 통해 국제 정세 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즉 영국과 미국이 연합하여 프랑스의 독 주를 막고 독일을 돕자는 것이었다.
미국은 프랑스에 타격을 주기 위해 런던 시장에 프랑스 화폐를 대 규모 매도했다. 프랑스의 화폐는 순식간에 급락했고 프랑스 재무부의 신용도도 하락했다. 이어서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 정부의 루르 지방 점령을 비난하며 독일을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선포했다. 돈 앞에서는 친구도 없는 법이다. 이는 국제무대에서도 어김없이 통하는 진리였다.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아직 차갑게 식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적국과 연합하여 과거의 우방과 대적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독일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 아래 프랑스의 폭력적 침공이 해 결되지 않는 이상 프랑스에 단 한 푼의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루르 지방에서 단 1마르크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10억 프랑의 군사비를 배상하고 국제위원회를 재 소집하는 데 억지로 동의해야 했다.
- 6월 17일 루스벨트는 런던세계경제회의에 참석한 대표단에게 협의 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전보로 통보했다. 미국은 달러의 변동을 막는 그 어떤 약속도 해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어 6월 22일 미국 대 표단은 워싱턴 당국은 화폐가치를 잠시 고정시키는 조치가 현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긴다며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7월 3일 루스벨트는 다시금 전보로 대표단에게 이렇게 밝혔다. "잠정적인 고정환율 정책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운송 금지를 해제하여 제품의 교역을 편리 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럽 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 미국의 수출 상품을 확대시 키려는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 전보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어 렵사리 합의를 이루었던 세 나라 은행가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런던세계경제회의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7월 4일 회의석상에서 맥도널드 영국 수상은 휴회를 결정한 뒤 결정문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6월 16일에는 금융 안정에 찬성했다가 7 월 3일 돌연 변덕을 부려 합의문을 체결할 수 없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고 밝혔다. 더불어 한 국가의 화폐정책 때문에 세계경제회의를 더 이 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세계경제회의를 돌아보면 조폭사회의 우두머리가 만나 담판 을 짓는 것과 다름없었다. 영국과 미국 가운데 누가 세계의 1인자인 가하는 파워 게임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미국이 기존 의 강자였던 영국의 말을 따르지 않자 회의는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회의가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반 대로 회의가 결렬된 이후로 사람들은 영국의 파운드화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해결해야 할 국내문제가 산재해 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원화된 세계 경제체제 에서 그 어떤 국가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두머리가 자신의 안위만 돌보고 부하들이 죽든 말든 외면한 다면 그것은 우두머리 자신에게도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다. 물론 우두머리에게 자신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부하들만 챙기라고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우두머리에게는 한정된 조건에 서 부하를 보살필 책임이 있다. 부하들이 잘 지내야 조직력도 훨씬 강 해질 수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세계 최강국이 되려면 후진국에게 적 절한 지원을 하며 그들의 경제력을 키워주는 것이 좋다.
7월 런던세계경제회의가 결렬된 그달 런던 은행가에는 대량인출사 태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2억 파운드의 금이 빠져나갔고 급기야 그해 9월에는 금본위제를 폐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세계 각국이 앞다퉈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미국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영국은 아예 영국령 식민지를 통 합하여 영연방을 구축했다. 프랑스는 1931년부터 미국으로부터 3억 5,0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을 찾아갔다. 금본위제를 유지할 능력이 있 던 프랑스 역시 자국의 식민지를 규합하여 독자적인 금본위제 그룹을 형성했다. 미국 역시 강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중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들과 연합하여 '달러 그룹'을 형성했다. 이로써 미국, 영국, 프랑 스가 금융 삼국지를 연출하면서 세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수많은 교과서나 학술 서적들은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이 미국 월스 트리트의 뉴욕 증시였다고 입을 모은다. 끝도 없는 탐욕이 경제를 무 너뜨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투자자들 가 운데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시장 에서 승자가 될 수 없는 법이다.
실상 1929년 대공황의 진짜 발단은 월스트리트의 뉴욕 증시가 아니 었다. 1929년 당시 미국 전체 증권계좌는 154만 8,707개에 불과했다. 이는 여러 개의 증권계좌를 가진 투자자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150 만 개의 계좌 중에 보증금을 가진 계좌만이 투자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계좌는 50만 개도 되지 않았다. 때문에 설령 당시 1억 2,000만 명 에 달하는 미국인의 계좌를 다 합치더라도 뉴욕 증시가 그처럼 막대 한 손실을 입을 수는 없었다. 물론 원인은 있었다. 다만 뉴욕 증시가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제2차 산업혁명을 단행하여 산업마다 기계화가 이루어졌다. 자동차·라디오 · 청소기 · 냉장고는 이제 더 이 상 사치품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간편하고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고 익숙해졌지만 이러한 풍요로움은 얼마 가지 못했다. 산업이든 제품이 든 새로운 추세가 되고 유행을 타게 되면 처음에는 엄청난 폭리를 취 하기 마련이다. 1980년대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냉장고와 1990년대 에어컨을 떠올려보라. 당시 냉장고나 에어컨의 가격을 지금과 비교해보면 참으로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할 만큼 터무니없이 비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치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의 자동차업종, 화 학섬유업종, 전자업종은 가히 세계를 뒤바꿔놓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인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폭리도 당연히 뒤따라왔다. 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유망산업이라는 생각에 많은 사업가들이 이업 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체 산업이 확장되면서 유사제품이 시장으 로 쏟아져 나오자 제품의 단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제품이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면 이윤은 적어지고 시장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자금을 회수할 수는 없다. 공장에서는 새로운 제품이 계속해서 출시되지만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 다. 결국 판로가 막히면서 재고품이 창고에 쌓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산력 과잉'이다. 이는 모든 업종, 모든 제품의 마지막 귀결이기도 하다. 한때 시대적 대세로 유행을 이끌던 산업도 결국에는 이런 운명 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만일 모든 산업이 쇠퇴하지 않고 무조건 성장 만 한다면 정체되는 것은 인류의 진보뿐일 것이다.
물론 산업이 쇠퇴한다고 해서 매번 경제적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아 니다. 폭리를 취한 제품이 전 국민에게 보급되면 시장 포화로 쇠퇴의 길에 접어들지만 곧 새로운 산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회 의 부가 골고루 분배되지 못한다면 그 쇠퇴는 거의 재앙이 되어 돌아 온다. 앞서 언급했듯이 1920~1929년까지 미국은 독점기업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게다가 부의 불균형은 이미 미국 국내에만 국한된 문 제가 아니었다. 미국은 세계 금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었다. 반면 유럽 은 전쟁의 상흔으로 자금 부족에 시달리며 전쟁 채무조차 갚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할진대 무슨 돈으로 미국의 제품을 구입하겠는가? 부의 분배가 고르지 못하더라도 경제가 잘 돌아가면 대다수 사람들 은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저축이나 별도의 경제적 여 유가 없는 상태에서 경제가 쇠퇴하고 불경기가 닥치면 가난한 대다수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속수무책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수의 부자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자신의 돈을 실물경제에 쏟아붓지 않는다. 이 때문에 거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주식, 부동산, 골동 품, 보석 등 모든 것들이 거품이 될 수 있다.

- 연합국은 돈이 없고, 독일은 돈을 빌릴 데가 없고, 미국은 돈이 넘쳐나고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추축국들 앞에서 영국과 미국은 절망에 빠졌다. 자신들의 형제인 폴란드, 헝가리, 중국, 프랑스가 차례로 추축국에 함 락되고 이제 마지막으로 영국과 미국의 차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술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는 각자 진영을 구축하고 대치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 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기계화 부대를 이용해 속전속결로 적진 을 돌파해 깊숙이 침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술로 폴란드는 2주 만에 함락되었고 유럽의 절반이 44일 만에 독일의 전차 바퀴에 짓밟혔다.
그뿐인가, 불과 한 달 만에 소련 내륙 800킬로미터까지 진군하여 수백 만 명의 소련군을 투항시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독일은 바로 이 전격전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 다. 번개전이라고도 하는 이 전격전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뚫고 전진하 는 속도전이다. 군대가 속도를 높이는 만큼 군사력과 무기 소모도 만만 치 않았다. 속도전을 내려면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전쟁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만반의 준비를 했다. 1937년 2월에는 '제국은행 신질서법'을 공표하여 총통이 제국은행장을 겸직할 수 있도록 했다. 1939년에는 '제국은행법'을 공표하여 지폐 태환을 중단시켰고 중앙은행이 제국에 제공하는 대출액을 총통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때부터 나치스는 중앙은행의 국유화를 통해 전국의 자금을 장악했다.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전쟁 전의 준비로 막상 전쟁이 시작되 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전쟁 자금을 충당할 또 다 른 방법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대외 전쟁에서 가장 좋은 융자 방법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 전에서 패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외국에서 돈을 빌리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은가.
- 연합국에는 돈이 없었고 미국 군수품 산업체에는 이기적인 사업가 들이 득세를 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무기를 대여해주는 것이었다. 미 연방정부에서 무기를 사들여 연합국 에 대여해주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루스벨트의 싱크탱크는 산더미 처럼 쌓인 의회 문건 속에서 1892년도 판례를 찾아냈다. 공공의 이익 을 보호한다는 원칙에 의거하여 육군의 재산을 대여해줄 수 있는 권 한을 육군 사령관에게 부여한 판례였다.
이 판례에 의거하여 루스벨트는 렌드리스 법 Lend-Lease Act, 즉 무기 대여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판례의 육군 사령관을 대통령으로 바꿔 모든 종류의 국방물자를 대통령이 그 어떤 정부에게도 판매 · 대여 · 교 환해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941년 5월 6일 루스벨트는 중국을 무 기대여법 적용 국가에 포함시켜 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국의 국민 당정부에 총 8억 4,500만 달러를 원조했다.
- 영국 병사들도 현지의 화폐를 봉급으로 지급받았지만 본국의 고시 환율에 따라 달러로 환전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 해방구에는 암시장 이 성행했는데 고시환율보다 훨씬 높은 환율로 거래되었다. 병사들은 금세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들은 암시장에서 시장 환율로 현지의 화폐를 사서 군대 내에서는 고시환율로 달러를 환전했 다가 다시 암시장에 내다 팔아 이익을 챙겼다.
당시 전쟁은 근 3년 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지지부진한 전 투에 지친 독일 병사나 연합국 병사나 모두 주된 관심은 월급봉투였 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긴급화폐를 봉급으로 받는 독일 병사보 다 환율 차이를 이용해 돈벌이를 할 수 있었던 연합국 병사가 훨씬 사 기가 높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 무기대여법의 위대한 점은 전시에 연합군 작전을 지원한 것보다는 위급한 순간에 국제적인 협력정신을 발휘했다는 데 있다. 1942년 6월 11일 루스벨트는 연합국의 채무를 탕감해주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전쟁의 대가는 화폐로 계산할 수도, 비교할 수도, 상환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대가는 붉은 피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갚아야 합니다. 하지만 전쟁 비용은 평화 유지와 상호 번영의 방법으로 보상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새로운 전쟁 채무로 새로운 평화를 위태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승리의 평화야말로 우리가 상환받을 수 있는 유 일한 화폐입니다!"
덕분에 무기대여법은 각국의 분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1945년 8월 무기대여법의 효력이 끝나자 미국과 영국은 공동성명을 발표했 다. "무기대여법에 의거하여 연합국이 전쟁 중에 소실하거나 훼손, 소 비한 모든 미국 물자는 그 어떤 나라에도 재정적 부담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신을 근거로 1946년 미국은 영국에 공급한 모든 원조에 대한 구상권을 해지했고 이어서 인도,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벨기에,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노르웨이, 그리스, 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에 대한 채무도 모두 탕감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경제력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지어 준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원조가 있었기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프랑스, 심지어 소련, 중국 등 전 세계가 앞다퉈 달러를 빌렸다. 달러가 오늘날 세계 공통 화폐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기인 한다고 할 수 있다.

- 브레튼우즈 체제는 금 1온스당 미국 달러 35달러를 고정시키고 다른 통화도 미국 달러에 고정시켰다. 다시 말해 달러와 금을 고정환율로 정해서 미국 달러를 국가 간의 결제나 금융거래에 기본이 되는 기 축통화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는 적잖은 단점이 있었고 일부 단점은 치명 적이기까지 했다. 실상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부흥을 위해 1922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린 제노바 회의의 새로운 버전에 불 과했다. 당시에는 미국이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없었지만 지금은 미국의 주도 아래 더욱 까다로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각 나라 의 화폐는 자율적으로 금태환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유일하게 태환 이 가능한 달러마저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만 미국에 금태환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각국의 화폐가 '달러의 꼭두각시'가 된 것과 다 름없었다. 국제 금융거래 수단으로는 달러가 유일하며 미 연방은행은 국제 '중앙은행'이 되었다. 오로지 미국만이 달러를 감독 발행하여 자 본주의 세계의 무역과 금융을 조종하게 된 것이다.
- 이러한 체제는 당연히 미국에 유리했다. 전후 초기 미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브레튼우즈 통화 시스템 덕분 이었다. 하지만 불평등한 조건 아래 구축된 통화 시스템이 합리적인 통화제도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브레튼우즈 체제에 적잖은 단점이 있었지만 세계 금융사에 진보적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다. 1920~1930년대 국제 금본위제가 붕괴된 뒤 국제통화 시스템은 사분오열되었다. 파운 드, 금, 달러로 대표되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 독자적인 통화 그 룹을 형성했다. 설상가상 무역전쟁과 고관세, 외환 매도 등은 국제적 금융위기를 가져왔고,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는 국제 금본위제 붕괴 이후 분열되었던 국제통화 시스템을 안정시켰고, 더 나아가 서방 세계는 약 25년 동안 안정적인 금융체계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이룩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의 달러와 금을 고정환율로 정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금 준비금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황이나 금융위기를 화폐정 책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달러가 국제화폐였기 때 문에 대출·증여·원조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국제무역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
혹자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기타 국가의 수출과 자금 유동을 증대시켜 이 들 국가의 경제 회복과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금본위 체제일 때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경제적 번영을 이룩 했다."

- 1983년 3월 23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대통령은 이 른바 전략방위구상SDI"을 천명하며 별들의 전쟁을 선언했다. 이를 위 해 레이건은 공개적인 의회 연설로 기금 모금을 전개했다. 별들의 전 쟁은 간단히 말해 미국이 우주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레이저 와 전자포를 이용한 유도탄으로 미국 본토와 동맹국을 공격하는 소련 의 핵탄두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별들의 전쟁 선포로 소련의 핵 은 더 이상 위협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1984년 6월 10일 남태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은 유도탄을 발 사하여 캘리포니아 공군 기지에서 앞서 발사된 또 다른 유도탄을 160 킬로미터 상공에서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그날 미국의 모든 매스컴은 일제히 이 소식을 주요 뉴스로 알렸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별들의 전 쟁 계획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 1980년대는 미국에게도 매우 분주한 시기였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별들의 전쟁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중 하나가 소련의 오일 달러를 바닥내는 것이었다.
별들의 전쟁이 가동되던 첫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상당히 돈 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사우디아라비아의 1일 원유 생산량은 200만 갤런에서 600만 갤런으로 폭증했고 가을에는 900만 갤런에 달했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내려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고 있는 경제학 원리다. 1986년 세계 원유 가격이 불과 반년 만에 1배 럴당 30달러에서 12달러로 하락했다. 원유 가격의 하락으로 소련은 100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이는 소련의 달러 준비금의 50%에 달하 는 액수였다.
- 원유 가격이 하락하자 중동 산유국도 경제적 위기에 빠졌다. 이 때문에 소련의 무기 판매액도 20억 달러 감소했다. 이로 말미암아 소련 국민들은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또 다른 방법은 별들의 전쟁으로 기만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다. 오늘날 별들의 전쟁과 관련하여 적잖은 비밀 문건이 공개되고 있 는데, 그 문건에 따르면 별들의 전쟁의 유일한 목표는 소련이 군비 증 강에 더욱 많은 자금을 투입하도록 유도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1984년 남태평양 해군 기지와 캘리포니아 공군기 지에서 발사한 유도탄 명중 실험도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당시 실험 에서 미국은 유도탄에 추적장치를 부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모든 매스컴에서 이 실험을 크게 보도했던 것은 모종의 목적이 있었 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실험이 진짜였다면 설사 CIA나 FBI라 하더라도 그처럼 중요한 군사 기밀을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별들의 전쟁 계획이 추진된 1983~1993년까지 10년간 미국 의회가 승인한 예산은 350억 달러에 불과했다. 레이건이 호언장담했던 1조 달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달러가 세계화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 때문 이며 브레튼우즈 체제의 뿌리는 마셜 플랜이었다. 1945년 브레튼우즈 체제는 1929년 대공황의 교훈을 받아들여 '가격 안정, 시장의 융통성 과 다각적 자유무역'을 표방했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의 목표는 달러를 세계화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소련은 차치하고서라도 영 국, 프랑스도 동의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소련은 회의 관련 문건의 승인을 거부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문건의 일부 조항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각국에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47년은 인플레이션이 최고 절정에 달한 시기로 독일의 마르 크가 한때 시장에서 사라진 적도 있었다. 화폐제도를 재건하려면 화 폐에 대한 신뢰가 필요했다. 신뢰는 경제력에서 나오고 경제력은 금 보유량에서 나온다. 당시 충분한 금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밖 에 없었다.
각자 자국의 화폐에 대한 유럽인들의 신뢰감을 회복하려면 통화 시 스템이 미국의 달러와 연계되어 있어야 했다. 바로 이때 미국이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에 대량의 달러를 공급했다. 달러 자금이 여유로워지자 유럽 각국은 대외무역을 진행할 때 달러로 계산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 달러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유럽에 충분한 공산품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국제무역에서 달러로 계산하는 것이 당연시되자 연쇄효과 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불 범위가 점차 늘어나면서 달러가 서유럽 국가의 통화 시스템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화폐 의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셜 플랜은 서유럽에 무엇을 원 조했을까?
서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게 다가 해상 교통도 끊겨 미국으로부터 중고 선박을 대량으로 사들였 다. 독일은 비록 원조받은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미국으로부터 미국 평균 소비량의 두 배에 달하는 주스를 대량 매입했다. 이탈리아는 1억 7,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저렴한 스파게티 면을 구입했다.
- 1948년 4월 3일부터 1952년 6월 30일까지, 즉 마셜 플랜이 시행된 지 4년 3개월 만에 미국의 달러는 영국의 파운드를 대신해 세계화폐 의 왕좌에 정식으로 올랐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유럽은 세계무대에서 제 목소리를 낼 만큼 위상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마셜 플랜이 아니었다면 서유럽은 영원히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셜 플랜은 우리가 상상한 만큼 유럽 대륙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의 GDP 비중으로 추산해보면 당시 마 셜 플랜으로 서유럽에 투입된 원조금은 5,000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 는 2009년 중국의 한 해 투자액 4조 달러에 비교하면 매우 적은 액수 였다. 마셜 플랜 시행 기간에 영국은 독일 연방의 두 배에 달하는 거 액의 원조금을 받았지만 마셜 플랜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반면 독일연방은 단기간에 경제적 위기를 헤쳐나와 1948년에는 미국과 여러 서 유럽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마르크화 개혁을 단행했 다. 마침내는 오늘날 유로화의 기반이 된 마르크화 통화체제를 구축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셜 플랜은 유럽 통합의 기점이 되었을까? 그렇지는 않 다. 마셜 플랜이 없었더라도 당시 서유럽 6개국 간에 석탄철강 공동 계획이 가동되고 있었기에 유럽의 부흥은 유럽 국내 시장에 의존하여 전개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주도 아래 조직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도 결국에는 해체되고 말았을 것이다. 미국이 "우리가 아니었으면 영 국은 진작 독일에 합병되었을 것이다"라고 비난해도 영국은 결국 유 럽 공동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마셜 플랜은 유럽 부흥의 핵심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마셜 플랜이 아니더라도 유럽의 80, 90% 국가들은 비록 과정은 힘들 었겠지만 결국 경제위기를 헤쳐나왔을 것이다. 그럼 마셜 플랜이 아 니었다면 서유럽은 소련의 세력 범위로 복속되었을까? 그것 역시 아니다. 마셜 플랜이 아니더라도 서유럽은 사회주의 체제를 견제하며 소련과 대립했을 것이다.
-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에서 미국이 금태환을 못한 다는 것은 은행에 저축한 돈이 휴지조각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했 다. 1960년에 이르러서는 금 가격이 1온스당 35달러에서 40달러까지 상승했다. 그야말로 달러 재앙이 덮친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보호가 필요했던 서유럽은 그저 달러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써 서 도울 수밖에 없었다.
서방 국가들은 달러와 금의 환율 가격을 억제했다. 하지만 1961년 5 월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무려 12년 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베트콩을 상대하느라 미국은 해외 군수품 구입을 지속적으 로 확대해야 했다. 1968년 서방 국가의 국고에는 달러가 가득 쌓인 반 면 미국은 보유하고 있던 금이 점차 바닥을 드러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기 전인 1971년에는 급기야 건국 이래 줄곧 유지하던 잉여외환 보유기록이 끝을 맺었다. 남아 있는 금 준비금은 102억 1,000만 달러로 국가 단기부채인 678억의 15%에 불과했다.
서유럽도 달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가령 마르크는 서유럽에서 가장 강세를 이루던 화폐였는데 서독은 달러 환 율을 유지하기 위해 1971년 4월 연속해서 마르크화를 매도하고 대신 30억 달러를 매입했다. 그 결과 5월 5일에는 개장한 지 한 시간 만에 서베를린 외환시장에 10억 달러의 매도물이 나왔다. 이에 공정시장20 은 정부의 개입으로 폐장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스 위스의 외환시장도 모조리 폐장되었다.
- 결국 방법이 궁해진 서방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처럼 이중환율 제 double exchange rate system"를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서방 국가 중 앙은행의 금 준비금에는 개인용 금이 아니라는 의미로 녹색 리본을 부착했다. 개인 금의 달러 태환은 자유환율(외환의 수급에 따라서 자유로 이 변동하는 환율)을 적용하고, 녹색 리본이 부착된 금은 공정환율 official exchange rate28을 적용했다. 동시에 특별인출권을 만들었는데 바로 국 제통화기금의 SDR이다. 이는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을 때 국제통화기 금으로부터 무담보로 외화를 인출할 수 있는 권리다. SDR은 국제 결 제에 결제통화로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대체통화로 실제 상품을 구 입하는 데는 사용할 수 없다.
서유럽에서 달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미국은 한층 황당한 요구를 했다. 현재의 화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 각국에 자국의 화폐에 대한 평가절상을 요구한 것이다. 유럽 국가의 화폐가 평가절상되고 달러가 평가절하되면 유럽 국가의 국내 생산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유럽 국가들은 당연히 거부 의사를 표시 했다. 이에 미국은 세계화폐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결정을 했는데 이 는 곧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의무를 중단하는 동 시에 해외 상품에 대해 10%의 부가세를 징수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 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금융 삼국지를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소련 세력을 와해시키기도 전에 서방 세력에 균열이 일어날 판국이었다. 미국의 경제력은 여전 히 강했고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무시할 수 없었던 유럽 국가들은 미 국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1971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서독 등 10개 국가는 워싱턴에서 회 의를 열었다. 서유럽 국가의 화폐를 일제히 평가절상하는 대신 미국 은 10%의 수입부가세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국제 화폐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을 하루라도 빨리 착수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자메이카 회의였다.
1976년 1월 국제통화기금의 임시 위원회는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회의를 열고 킹스턴 체제 Kingston system에 합의했다. 킹스턴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각국에 환율제도의 재량권을 부여하여 변동환율제도 를 인정한 점이다. 이전까지는 각국의 환율이 달러와 금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각국이 환율제도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된 것 이다. 이 세상에 트리핀의 딜레마 Triffin's dilemma"에서 자유로울 수 있 는 화폐는 없다. 하지만 본위화폐 (standard money, 한 나라 화폐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화폐)가 없다면 트리핀의 딜레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에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는 법이다. 킹스턴 체 제는 좋게 말하면 국제화폐의 다원화였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다 원화 환율은 시장의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멋대로 이루어졌다. 자유자재로 변동하는 환율 은 경제를 조정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다. 가령 라틴아메리카의 채무 위기, 멕시코의 금융 위기, 브라질의 채무 위기,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 등이 있다. 이때부 터 세계 금융은 더 이상 평화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레이건 대통령이 퇴임할 당시 미국의 채무는 2만 6,000억 달러에 달 했고 그중 외채는 4,00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채권국 이자 동시에 세계 최고의 채무국이 된 것이다. 1987년 외국 자본이 미 국에서 얻은 수익은 미국 전체 해외 수익보다 높았다. 채무는 미국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급선무가 되었다.
레이건 집권 8년 동안 미국인들은 빚을 내어 소비하기 시작했다. 개 인 신용카드 사용액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가계 저축은 1987년 3.8% 이하로 떨어져 1947년 이래 최저 기록을 세웠다. 때문에 혹자는 말한 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레이건이 그 씨앗을 뿌렸고, 부시 부자 와 클린턴이 덩치를 키웠으며, 마지막에 오바마가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거품경제와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를 수면 으로 부상시킨 기폭제에 불과할 뿐 결코 원인이 아니었다. 허황된 거 품 속에서 일본인들은 이른바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일하지 않아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고 금융 투자만으로도 국외의 자산을 매입 하고 고소비를 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를 나쁘다고만 할 수 는 없다. 돈이 넘쳐나면 그만큼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은 것은 인 지상정이다. 다만 돈을 버는 방법과 분배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일본에서 금융 거품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곳은 금융 산업자본이 었다. 일본 국민들은 눈부신 경제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렸고 금융 거품 속에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등 상 당한 이득을 맛보았다. 하지만 금융 거품이 계속 이어졌다면 자본은 점차 한 곳에 집중되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의 집조차 장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일본의 금융 거품이 무서운 이유는 거품 자체가 일종의 '부의 불공 평한 재분배 시스템'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 운 점은 이러한 부의 재분배가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어 얼핏 보기에는 공평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다.

- 동남아시아 경제성장 모델의 결함
태국 바트화가 폭락했다. 바트화의 폭락은 경제 도미노 현상의 첫번 째 신호탄으로서의 시작을 알렸을 뿐 태국은 결코 최후의 경제 실패 국이 아니었다. 바트화의 폭락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긴 소로스는 다 음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바트화의 폭락이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를 몰고왔기 때문이다.
- 겉으로 보기에는 인도네시아 경제환경이 태국보다 좀 더 건전해 보 였다. 인도네시아 화폐 루피아ruphia는 이미 태국발 금융위기가 닥치 기 전에 점진적으로 평가절하를 시행하여 경제위기에서 탈피했고 이 는 국민들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다. 7월 11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환율 변동폭을 12%로 확대했는데 이때까지도 인도네시아 증시는 경제 안 정이라는 확신 속에서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참모습이 아니었다.
1998년 1월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의 경제위기가 점차 안정될 즈 음 루피아화의 환율이 급락했다. 1997년 7월 환율을 기준으로 계산하 면 200% 하락했고 증시는 50% 하락했다. 이로써 사회에 심각한 혼란 이 야기되었고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금융위기 중 가장 심각한 타 격을 입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도네시아는 기타 아세안 회원국에 비해 경제가 가장 엉망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인도네시아 경제의 참모 습이었다.
인도네시아의 금융시장은 상당히 경악스러운 모습이었다. 금융이 약탈자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인도 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Suharto가 심복들에게 즐겨 전하던 선물이 바 로 은행설립 허가증이었다고 한다. 은행설립 허가증을 얻는 것은 국 민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는 수단을 얻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금융 시스템에서 부실 대출률이 높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은행이 아니라 국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기구였다. 1997년 초 인도네 시아의 부실 대출률은 이미 30%를 넘어섰다.
과거 10년간 수하르토 정부는 7% 이상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며 국 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성장은 국민의 복지를 희생한 대가였다. 비록 경제성장으로 일자리가 늘어났지만 그 렇다고 국민의 복지까지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국민들의 재산상 손 실도 적지 않았다. 사건을 일으켜 국내 갈등의 씨앗으로 만드는 것은 수하르토 정부의 주특기였다. 권력자는 국민들의 무지와 분노를 이용 해 특정 계층 혹은 집단을 희생시켰고 더 나아가 극단적인 폭동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1998년 화교를 대상으로 한 인도네시아 학살 사 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지역의 경제가 조금씩 발전했지만 수하르토 정 부의 정치체제 아래 국민의 부는 특정 집단, 특정 권력자에게만 집중 되었다. 국민들이 저축한 돈은 금융 시스템에 의해 국가가 이미 탕진 한 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나쁜 시장'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면 비록 국민들의 생활은 유지되겠지만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기는 어렵다. 쉬운 예를 들면 해외시장에 의존 하여 생산성을 높여도 국민들 개인은 그 부를 누릴 수 없다. 어떤 나 라도 순풍에 돛 단 듯 경제가 영원히 순조로울 수만은 없다. 미국도 그러한데 하물며 동남아시아는 오죽하겠는가.
- 1990년대 초만 해도 세계는 동남아시아 경제의 기적에 갈채를 보냈 다. 하지만 1997년 이후 당시의 영광은 더 이상 재현되지 않았다. 이 후 상당수 사람들은 소로스를 비롯한 국제 유동성 자금이 아시아 외 환위기와 경제위기를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아시아 경제를 무너뜨리 기 위한 서방 세력의 음모라고 여겼고, 심지어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는 소로스에게 법적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국을 보라. 영국 환율체계도 소로스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영국 총리가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미국이나 소로스에게 책임을 전가하 지는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경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체가 결점이 있는 모델 이거나 혹은 출발점부터 이미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로스의 투자 기법은 그저 동남아시아의 경제 실패를 크 게 부각시켜준 것에 불과하다. 동남아시아 경제성장 모델의 치명적인 결함은 정부의 불합리한 간섭이며, 정부 조직이 경제 간섭을 이익 획 득의 수단으로 삼은 데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설사 수하르토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권력자가 경제를 부정축재의 도구로 사용했을 것 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
- 신경제의 가장 큰 결과는 미국이 신흥산업을 완전히 독점하게 된 것이다. 창의적 혁신산업으로 미국은 '고적자 고채무'의 생존모델이 지속될 수 있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신경제 시대부터 미국이 세계 금융 패권자의 지위를 악용해 전 세계를 착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착취하고 있다면 왜 전 세계 국가는 앞장서서 미국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려고 하는 걸까? 그것은 미국의 상품을 사지 않으면 안 되기 때 문이다.
오늘날 세계인이 인터넷 시대이자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미국의 창의력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 옷, 자원은 가장 효율적 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인데 그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시대 적 조류의 맨 앞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조류 자체가 미국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창의성의 근원은 개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어떤 프로그램이나 기획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성은 심사나 승인을 필 요로 하지 않는다. 복잡한 과정의 심사나 승인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 은 창의성이 아니다. 또한 창의성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시장의 이윤이 그 가치를 인정해주니까.

- GM은 1918년부터 '관리자 지주 계획'을 시행했다. 관리층의 봉급 과 기업의 당기 실적을 연계시킨 것이다. 때문에 새로 부임하는 고위 급 관리자는 당기 실적 압박에 시달렸고 인수합병은 당기 실적을 확 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GM은 독일의 폭스바겐처럼 장기적인 기술 개발에 나서지도 않았고, 마이바흐처럼 최고급 수제 기술을 도입하지도 않았으며, 일본 자동차 회사들처럼 연비 문 제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노조와의 관계에서도 관리자가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경우 파업을 초 래하여 당기 실적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컸기에 온건적인 태도 를 취했다. 또한 대리점에게도 판매실적을 종용하지 못했다. 대리점 이 판매실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폐업할 경우 당기 실적에 지장을 초 래하기 때문이다. 대신 GM의 경영진은 해외 인수합병 추진에 총력을 기울였다. 인수합병을 통해 매번 해외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고 단기 간에 당기 실적을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인수합병으로 GM은 공룡기업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창의성은 점차 사라졌다. GM에게 창의성은 그저 창의적인 홍보 개념에 불과했다. 가령 비실용적인 바이오연료 기술이 그 예다. 1980년대 GM은 바이오연료를 사용하는 소형차 새턴을 출시했고 1990년대에 는 EV1 전기자동차에 투자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기 술 개발 투자액이 크게 줄어들면서 결국은 기술 개발까지 인수합병에 의지하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 소형차가 시장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적 으로 석유파동이 일자 GM은 그제야 소형차가 자동차 시장을 장악하 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시장의 변화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동안 GM의 인수합병은 판매 루트 확장과 해외 브랜드 인 수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도 GM은 정부가 저유가정책을 유지하 도록 로비를 벌이는 데 거액의 자금을 쏟아부었고 심지어 EV1 전기자동차 개발 프로젝트도 폐기했다. 이 때문에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프리우스가 미국 시장에서 급성장하게 되었다.
장기적인 인수합병으로 GM은 최대 규모의 생산력을 보유하게 되었 다. 하지만 천하의 절세미녀도 나이가 들면 미모가 퇴색하기 마련이 다. 시간의 흐름에 맞게 연륜과 지성을 쌓지 않으면 단순히 미모만으 로 과거의 영광을 붙들 수는 없다. GM은 바로 세월에 미모가 퇴색된 절세미녀와도 같았다. 시대 변화에 맞게 끊임없는 기술력 향상을 도 모하지 않았기에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GM 스스로 생산력을 조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판매상에게 강 경한 태도를 취하거나 생산량을 줄이거나 혹은 노조에 압력을 가해 임금을 줄일 능력이 없었다. 2005년 GM 직원의 1일 평균 임금이 80 달러에 달한 반면 도요타는 50달러에 불과했다. GM이 내놓은 전략은 그저 프리미엄 차 혹은 경차를 만들거나 아니면 연구개발 비용을 줄 이는 것이었다.

- 경쟁 상대보다 앞서려면 끊임없는 창조를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는 결코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제도 창조든 기술 창조든 순서에 따른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중대한 창조는 매우 큰 의 의가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창조는 매우 어렵지만 각각의 창조마다 엄청난 이익이 따라온다. 하 나의 창조가 생기면 이를 본뜨는 모방자가 벌떼처럼 몰려들고 신흥산 업과 새로운 상품에 투자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로 인류 의 생활이 변화한다. 산업혁명 · 전기혁명 · IT 혁명 등이 그 예다.
모든 창조는 저마다 생명 여정이 있다. 창조의 처음 시작 단계에는 값비싼 사치품으로 생산되다가 점차 단가가 낮아지고 나중에는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면서 창조의 사명이 종료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흔히 생산 과잉이 발생한다. 그래서 서양의 초창기 경제위기 상황에서 는 남아도는 우유가 땅바닥에 버려졌고 넘쳐나는 제품과 기계설비가 부서져 나갔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경제위기의 요인은 국민의 구매 력이 극도로 위축된 것이다. 바로 서양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효수요 부족이다. 과잉 생산능력은 구매력이나 유효수요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이는 경제성장 이론에서 '연속형 소멸'이라고 불린다. 창조가 소 멸되어도 투자는 지속된다.
그럼 산업 투자 루트가 없다면 돈은 어디로 갈까? 바로 거품이다. 거품은 매우 아름답고 다양하지만 그 결말은 항상 똑같다. 바로 소멸 이다. 하지만 거품이 소멸되어도 인간은 계속해서 생존해야 하고 지 속적으로 부를 창출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자연스레 약탈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약탈이 극에 달해서 발생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의 목적과 수단은 단 하나다. 돈을 미끼로 더 많은 돈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 리고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기존의 부를 파괴 하고 새로운 부의 분배를 가져온다. 물론 과잉 생산능력을 위해 새로 운 수요도 창조해야 한다. 이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미 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탈을 반복하는 전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 이때 또 다른 창조가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기존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경제이론에서 말하는 소 위 '창조형 소멸'로, 간단히 말해 헌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여 이로써 또 한번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 생존경제에서 벗어나 1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동서양 금융위기의 본질은 시종일관 바뀐 적이 없다. 동남아시아는 수출주도형 전략에 의존하고, 다른 나라의 창조를 모방하고,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경제 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의 이점을 이용하는 것은 기존의 약탈 방식과 다를 바 없으며 독자적인 창조 능력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모방형 창조의 이점이 모두 소진되면 유동성 과잉이 발생하고 그다음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1929년의 대공황과 똑같이 '창조의 잠재력 소진'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하나는 산업혁명의 잠재 력을 소진했고, 다른 하나는 정보화 창조 에너지를 소진했다. 인류의 이성으로 이룬 새로운 창조만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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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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