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병리학

경제 2024. 6. 19. 07:07

- 경제질병은 병균의 침투와 같은 외부 충격에 의해서 경제의 생리적 기능이 붕괴됐을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이 문제 는 바로 뒤에 다시 거론한다). 따라서 병리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접근해 야 비로소 경제질병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해명해낼 수 있고, 장 차 나타날 결과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야 경제위기 혹은 경제질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적합한 처방이 가능하며, 미리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경제위기나 경제파국에 대한 경제학계의 연구는 대중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 병리학적 접근이 라고 보기는 어렵다.
생물학에서는 생리학과 함께 병리학이 발전해 있다면, 생물학 의 이론체계와 흡사한 경제학도 생리학적 접근과 함께 병리학적 접근을 함께 추구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병리학 적 접근방법을 도입하면 경제학은 경제현상을 지금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며, 여러 경제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책이나 해결책 역시 지금보다 훨씬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2022년 10월에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가 터졌다. 그 금액은 2 천억 원으로서 본원통화의 0.07% 그리고 총유동성의 0.003%에 불과했다. 이런 미미한 금액의 사태가 터진 뒤, 건설업계 전반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다른 산업에도 전염되 어 전반적인 유동성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경제병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원리 중 하나인 '신용파괴원리'가 본격적으로 작동했고, 이에 따라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진행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로 국내경기는 2022년 3분기부터 급격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분기별 성장률을 보면, 1분기와 2분기에 각 각 연률 2.6%와 3.0%를 기록한 뒤, 3분기에는 갑자기 성장률이 1.3%를 기록하여 반 토막이 났으며, 4분기에는 -1.5%를 기록함 으로써 축소재생산에 들어가고 말았다.
경제병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급속한 경기후퇴는 신용창 조의 역과정인 신용파괴의 원리가 작동하여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경제병리학은 위와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경제파국으로 치닫는 금융위기를 한창 집필 중이던 2022년 하반기 초에 이미 예측할 수 있게 해줬다. 그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쉽 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줬다. 간단히 말해, 그 원인은 미국의 고금 리와 강달러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고금리가 국내저축을 미국으로 이탈시켰고, 강달러는 국내에 투자되었던 국내 및 국제 금융자본을 미국으로 빨려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우 리 경제에서 유동성이 수축되는 일이 벌어졌고, 유동성 수축은 신용파괴원리를 본격적으로 작동시켰다. 그래서 국내경기는 위 에서 살펴본 것처럼 급속하게 하강하고 말았다.

- 그럼 금융위기는 왜 발생할까? 금융위기는 단독으로 발생하 기도 하지만, 외환위기가 금융위기로 발전하기도 한다. 특히 외 환위기가 발생한 경우에는 예외 없이 금융위기가 뒤를 잇거나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는 흔히 '쌍둥이 위기Twin Crises'로 불린다.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거의 모든 나라는 금융위기를 함께 겪었으므로 외환위기를 금융위기에 포 함시켜도 무방할 정도이다. 참고로 그라시엘라 카민스키와 카르 멘 라인하트는 금융위기 Banking crisis가 선행한 뒤에 외환위기 Currency crisis가 발생한다고 주장했으나, 역사적으로는 그 선후관계가 바 뀌는 게 일반적이었다. 외환위기가 물밑에서 진행함으로써 금융 위기를 부르고, 금융위기가 외환위기를 물위로 끌어올려 심각하 게 진행시켰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 문제는 장차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살펴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인 사례 즉, 주택시장을 중심으로 살펴 보자. 주택 수요는 저축이 충분히 이뤄져야 일어나므로, 주택가 격은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비로소 상승하기 시작한다. 주택가격 의 상승은 일반 물가의 상승이 이미 일어난 다음에 뒤늦게 시작 한 만큼 짧은 기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단기간에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이 벌어지면, 2년이나 3년 더 저축해야 집 을 살 능력이 생기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유혹을 일으킨다. 무리 하게 많은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려는 유혹이 그것이다. 가격이 폭등하고 나면 2~3년 더 저축하더라도 집을 살 수 없는 일이 벌 어질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많은 빚 을 내서 집을 사는 것은 미래의 수요가 현재로 이동해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에 나타나야 할 수요가 이처럼 현재로 이동해오면 부동산의 수요는 배가되고 그 가격은 폭등한다. 부동산 투기열풍 과 거품은 이렇게 일어난다. 이런 투기열풍과 거품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미래 수요가 현재로 이동해 왔으므로,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면 수요가 이동해 간 시기가 반드시 닥친다. 이 경 우에는 수요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 가격은 장기간 정체하거나 급락한다. 더 먼 미래의 수요가 계속 이동해 온다면 가격 하락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 역시 지속가능성은 없다. 현재 수 요와 미래 수요가 합쳐지는 경우에 비로소 폭등한 가격이 유지 되기 때문이다. 가격 폭등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정체하거 나 하락으로 전환하면, 현재 수요까지 미래로 이동해 가는 새로 운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 거품이 꺼지면서 가격은 폭락한 다. 1990년대 초의 일본과 2008년 이후의 미국에서, 2022년 하반 기의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 '신용파괴원리'란 '신용창조원리'가 반대로 작동하는 것을 뜻 하므로 신용창조의 승수효과는 신용파괴 과정에서도 비슷한 위 력을 발휘한다. 한보사태의 신용파괴 압력을 이론적으로 계산해 보면, 당시 화폐발행액에 대한 광의유동성 신용승수가 약 30배였 으므로 그 금액은 약 200조 원에 이른다(한보 부실채권 6.6조원 × 신용승 수 30배 = 200조원). 이것은 광의유동성의 1/3 규모였다. 이 정도라면 금융위기가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우리 몸의 혈액 1/3 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태였다. 외환위기 직후에 공적자금을 160조 원이나 투입한 것은 이런 신용파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공짜 자금'이라고 비아냥댔지만 이것은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말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외환위기 같은 중병에 걸렸다면, 이것을 치료하기 위한 약값과 수술비를 지불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 미국 대공황이 전례 없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한 가장 큰 이유는 위와 같은 은행공황 때문이었다. 대공황 기간에 네 차례의 은 행공황이 발생했는데, 은행공황으로 인해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 진 결과 예금통화가 파괴되었고, 이에 따라 통화공급이 급속히 감소하고 금리가 상승해 경기는 더욱 악화됐다.2 또한 은행공황 은 투자자와 소비자의 위기감을 부채질함으로써 총수요를 위축 시켰다. 한마디로, 신용파괴원리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사태를
방치한 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으로 대공황을 초래하고 말 았다.

- 영국이 세계 금융패권을 탈환하려 했던 정책 즉, 파운드 가치를 절상시켜 금본위제를 회복하려 했던 정책이 얼마나 심각한 후유증과 부작용을 빚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1차 세계대전 직후에 펼쳐졌던 영국의 환 율정책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실패가 영국경제로 하여금 1920 년대 내내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했으며,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 할 수밖에 없게 했다. 그 덕분에 세계대공황이 발발했던 때는 영 국경제가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호조를 보였다.
반면에, 환율정책의 실패로 영국이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 던 1920년대 중후반에 프랑스의 환율정책은 운 좋게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국내경기를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경 제가 호조를 지속하자 프랑스는 경제패권을 노리고 영국의 뒤를 따라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데 집착했다. 결국 프랑스의 국내경 기는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급락했다. 

- 경제난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던 1930년에는 프 랑스의 군사비 지출이 독일에 비해 세 배 이상 많았다.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인 1933년에는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정권 교체가 빈번했던 1935년부터 독일의 군사비가 프랑스보다 앞서 기 시작했고,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38년에는 독일의 군사비가 프랑스보다 8배 이상 많아졌다. 1937년의 독일 군사비는 1930년에 비해 20배 이상 증가했으나, 프랑스 군사비는 전년도에 비해 오히려 줄었다. 그만큼 프랑스는 1930년대 내내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이런 모든 원인은 금본위제에 대한 집착 즉, 환율정책이 실패한 데 있었다.
- 물론 당시에 독일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던 것 은 지속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물자 생산을 위한 동원경제 체제가 성장률을 일시적으로 상승시켰을 따름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소련과 중국 등의 공산권이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던 것도 동원경제 체제의 성과였다. 그러나 동원경제 체제 는 성장률을 일시적으로 높일 수 있지만, 유휴 노동력과 유휴자 원이 고갈되면 곧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소련은 1960년대 중 반부터, 중국은 1960년대 말부터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하기 시 작했다. 히틀러의 동원경제 체제도 실패하고 전쟁 역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약세가 좀처럼 멈추지 않자 1987년 2월에는 '환율을 현재 수준에서 안정시킨다.'라는 '루브르 합의'가 주요 국가들 사이에서 이뤄졌다. 달러 가치가 여기에서 더 하락하면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짐으로써 세계경 제에 심각한 금융위기가 닥칠 수 있었으므로 이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본은 저금리를 유지해 달러 시세를 지탱해줬다. 이 정책은 엔 강세를 억제하기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저금리가 지나치게 오래 유지됨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장 기간 상승세를 보였던 부동산과 주식 시장은 더 활황을 보였고 그 거품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엔 강세에 겁을 먹은 일본기업은 설비투자에 몸을 사렸다. 국 내 생산설비를 외국으로 옮기는 일까지 벌어져 '산업 공동화'라 는 화두가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 영향으로 기업의 국내 투자가 부진해지자 은행은 자금을 운용할 곳이 줄었다. 예금은 계속해서 쌓였으므로 대출 출구를 새롭게 찾아야 했는데, 그곳이 바로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일본의 국제수 지 흑자는 마냥 커졌고, 엔 가치는 계속 상승 압력을 받았다. 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은행이 달러를 사들여야 했으며, 이렇게 풀려나간 돈은 또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으로 흘러갔다. 이런 거품경기의 영향으로 일본경제는 1980년대 후반에 붐을 만끽했다. 부동산 투자로 벌어들인 수익률은 대략 연평균 30%에 달했다. 기업은 부동산 투자의 수익이 철강이나 자동차 혹은 TV 등의 제조에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은행 차입금을 이용해 부동산 투자자로 변신했다.  부동산 거품
은 1989년에 정점까지 부풀어 오른 뒤 1990년부터 순식간에 꺼 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신용파괴원리가 작동하면서 심각한 금 융위기가 닥쳤고 경기는 계속 하강했다.
왜 일본 정책당국은 이런 경기하강에 대비하지 못했을까? 1980년대 후반에는 엔 강세에 힘입어 주요 자원의 수입 가격이 계속 하락함으로써 물가는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물가만 안정 되면 경제성장은 지속가능하다는 미국식 인식이 정책당국을 비 롯해 경제전문가 사회를 지배했으므로 위기감이나 문제의식을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불행히도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거품은 언젠가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수요가 시간이동을 한 때가 반드 시 닥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하락하 여 거품이 붕괴되면, 신용파괴리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했 다. 아니, 몰랐다.
- 도대체 무엇이 일본경제를 장기침체의 늪에 빠뜨렸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경제학계에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내생변수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에 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내생변수에서 원인을 찾는 대표적인 것 으로는 미야자기 요시카즈가 주장한 '복합불황론'을 들 수 있다. 그는 1992년에 발간한 『복합불황이라는 책에서 '유효수요 부족 에서 오는 순환적 실물경제의 후퇴와 금융부문의 신용경색에 의 한 유동성 부족이 겹친 중층적 불황'을 일본경제가 겪게 되었다 고 밝혔다. 141
이것은 경기침체의 원인으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경기침체 를 장기화시킨 원인으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실물경제의 후퇴와 신용경색이 겹쳤다고 하더라도 경기침체의 기간이 지나치게 길었 다. 무엇보다, 경기가 잠시 회복했다가 다시 하강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995 년과 1996년에는 각각 1.9%와 2.6%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2년 연속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그 뒤부터 다시 경 기가 하강했다. 2000년에도 2.3%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경기가 잠시 회복됐으나 곧이어 연평균 0% 대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말 았다. 따라서 복합 불황은 1994년까지의 경기후퇴에만 해당한다 고 봐야 한다.
반면에, 구조론자들은 일본경제의 문제점을 제도와 문화에서 찾았다. 대표적으로 사이토 세이치로는 '일본경제가 역사의 공백 에 빠진 진정한 원인은 캐치업 체제에서 당연한 전제로 삼아온 국가적 국민적 목표가 1985년경에 거의 달성되었고, 일본 전체가 목표 상실의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했다. 142 "과거에 는 세 가지 사회적 구조가 성장장치로 자리를 잡아 캐치업 체제 를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첫째는, 은행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화 로 집약되는 안정적이고 확고한 전후 금융체제의 성립이었다. 이 른바 호송선단 방식이다. 둘째는, 일본식 경영 신화로 일컬어지는 확고한 일본식 기업시스템의 형성이었다. 셋째는, 민·관 협조 신 화와 정·관·재의 일본 사령탑 체제의 확립이었다."라고 그는 주장 했다. 143 간단히 말해, 선진국을 따라잡는 캐치업이 끝났을 때는 이런 옛 체제가 경쟁력을 잃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부 주도 형 경제가 아니라 시장 주도형 경제로 탈바꿈해야 했고, 안정성 보다는 역동성을 추구해야 했으며, 탈락 없는 공존 형 사회에서 적자생존을 허용하는 사회로 진화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 은 배와 큰 배, 속도가 빠른 배와 느린 배를 가리지 않고 함께 끌 고 가는 호송선단형이 아니라 적자생존형의 신축적인 경제운영 이 이뤄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경제위기가 1991년 이래 30년 이상 지속됐어도 일본경제의 산업경쟁력과 국제경쟁력은 최근까지 세계 최강에 속했다. 초장기 불황 속에서도 경상수지는 대규모 흑자를 기록했을 정도 였다. 국내경기가 모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던 1996년에는 내수 가 살아나면서 경상수지 흑자가 658억 달러로 줄어든 적도 있지 만 곧 1천억 달러를 넘어섰다. 2001년에는 세계적으로 경기가 부 진하고 일본 생산설비의 해외이전이 활발해지면서 그 흑자 규모 가 878억 달러까지 줄었으나 그 뒤에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섬으 로써 2003년부터는 1천억 달러를 넘어섰고 2007년에는 2천억 달 러까지 넘어섰다. 2013년에는 경상수지가 몇 개월 동안 일시적으 로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2014년부터는 다시 안정적인 흑자 로 돌아섰다(2015년에는 1,356억 달러 흑자).
- 따라서 일본경제가 초장기 경기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원인은 구조적인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데 있다고 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던 기업들의 동 력에 의해서라도 일본경제는 진즉 성장가도에 다시 올라섰어야 했다. 기업들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국가경제 가 침체의 늪에서 헤맬 이유는 하나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바로 경제정책이 실패를 거듭했던 데 있다. 정책 실패가 잠시 회복되던 경기를 다시 후퇴로 돌아서게 하곤 했던 것이다. 경제정책이 실패를 거듭했다면 새로운 정책을 다양하게 모색하는 것이 정상이고, 그중에서 어느 하나는 성공을 거뒀어야 하 는데, 왜 성공할 정책을 지금껏 찾아내지 못했을까? 그 이유도 딱 하나, 관념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현실에서는 오 히려 더 나쁜 결과를 빚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데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경 제학자들이나 경제전문가들이 경제를 회생시킬 정책을 찾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경제에 바람직하다고 굳게 믿었던 정책이 사실 은 경기후퇴를 불러오지 않고는 이런 일은 벌어지기 어렵다. '사 고의 벽'이 작동한 셈이다. 
- 경상수지 흑자의 누적은 외환보유 고 증가와 그에 따른 통화팽창 압력으로 작용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해외자산을 취득해야 하는데, 해외자산 취득은 수익성 이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게 쉽지는 않다. 또한 경상수지 흑자와 그에 따른 외환보유고와 해외자산의 증가는 환율의 하락을 부르기 마련인데, 이것은 해외자산의 평 가손을 부른다. 예를 들어 환율이 120엔일 때 구입한 1억 달러 짜리 해외자산의 가치는 120억 엔이지만, 환율이 100엔으로 떨 어질 경우에는 100억 엔으로 그 가치가 20%나 떨어진다. 그래서 일본 기업과 금융회사의 재무지표는 더욱 악화됐고, 이에 따라 금융기관의 부실이 쌓여 금융위기를 가속화시켰다.
-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위와 같은 국내 자본의 해외 투자는 국내 소득의 해외 유출을 뜻한다는 것이다. 국내 소득이 이처럼 해외로 유출되면 내수는 부족해지고, 이것은 국내경기의 부진을 부른다. 국내경기가 부진해지면 부진해질수록 기업은 수출 증대 에 더욱 목맬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른 수출의 증가는 다시 경상 수지 흑자를 키움으로써 환율의 하락 압력을 가중시키고, 환율 하락은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율을 안정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외환 의 해외 유출을 촉진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 이다. 이 악순환은 일본경제가 장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다.
하지만 수출 증가와 경상수지 흑자는 클수록 좋다는 것이 경 제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 '사고의 벽'을 형성하여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는 장 기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다. 경상수지 흑자가 장기간 지 속되어 축적되면 일본경제처럼 초장기 경기침체를 불러오기 때 문이다. 외국자본의 국내 투자가 감소하는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유하자면,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이 급성질환을 일으킨다면, 경상수지 흑자의 누적은 만성질환을 일 으킨다.

- 그럼 일본경제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려울까? 경제를 살 려낼 방법이 전혀 없을까?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국내경기의 급등과 급락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래야 경제성장이 지속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경기흐름에 대한 정확한 진단 과 적시의 금리 및 재정 정책 등이 요구된다. 둘째, 환율방어와 재정투입 등의 시장개입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그 래야 시장기능이 살아날 수 있다. 셋째,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공 공부문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야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 력을 강화할 수 있다. 넷째, 과도한 국가부채가 국가경제의 회생 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이것을 일본은행이 인수하여 재정 부담 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는 화폐발행이 점진적으로 증 가하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생산자물가 상승률을 초과하게 함 으로써 기업의 경영수지를 개선시킬 것이다. 다만 일본은행의 국 채 인수는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물가 폭발을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되면 긴축정책을 제때 펼쳐야 할 것이다.
끝으로, 경상수지가 약간의 적자를 기록하도록 환율 하락을 점진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해외로 유출됐던 일본의 자본이 되돌아올 것이고, 이에 따라 국내수요가 증가하여 성장 률도 상승할 것이다. 이처럼 성장률이 높아지면 수입이 증가하여 경상수지 적자는 더 커져 외환보유고가 계속 줄어들 것이고, 이 것은 일본은행이 국가부채를 인수하는 부담을 줄여줄 것이다. 그 러면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물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경상수지 흑자가 장기침체의 근본 원인이므로 이것은 가장 핵심적인 정책이다. 물론 경상수지 적자가 지나치게 커져 환율이 폭등하거나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미리미리 막아야 한다. 만약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또 다른 종류의 금융위기가 터짐으로써 경 제난은 더 악화될 것이다.

-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의 근본 원인은 경기과열
수입이 수출보다 더 크게 증가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국내 생산능력보다 소비를 훨씬 더 많이 했던 것이 가 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럼 이런 일은 어떤 경우에 벌어질까? 국내경기가 느닷없이 과열되거나 정부가 경기부양 정 책을 과도하게 펼치면 이런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과연 어떤 일 이 우리 경제에서 벌어졌을까?
-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던 1993년에는 경제성장률이 6.8%를 기록했는데, 이때는 수입증가율이 수출증가율보다 더 낮았고, 경상 수지도 흑자였다. 그 직후인 1994년과 1995년에는 성장률이 각 각 9.2%와 9.6%라는 높은 실적을 기록하자, 이때부터 수입 증가 율이 수출 증가율보다 더 커졌으며, 경상수지 적자도 눈덩이 구 르듯이 커졌다. 경제성장률 9.2%와 9.6%는 당시 우리 경제의 잠 재성장률보다 훨씬 높았고, 이것이 경기과열을 일으켜 생산능력 보다 더 많은 소비가 이뤄지게 했던 것이다. 경기과열이 일어나 면 물가 불안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국내시장이 점점 더 많이 개방되는 경우에는 물가가 조금만 상승해도 수입 이 먼저 빠르게 증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국 제화와 세계화를 내세워 국내시장을 적극적으로 개방했다. 이에 따라 값싼 수입품이 물밀듯이 들어와 물가를 안정시켰다. 이것이 국제수지를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만약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이 높은 수준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경기과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수입이 급증함으로써 경상수지 적자가 대규모로 누적되는 일도 일어나 지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성장률이 3년 동안이나 매 년 11%를 상회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경상수지가 대규모 흑 자를 기록했다. 당시는 성장잠재력이 이처럼 높은 성장률을 감당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림으로써 국내의 한정된 자원이 비생산적인 분야로 흘러갔고, 그 결과로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은 점점 떨어졌다.
- 노태우 정권 이래 정책당국은 재정팽창을 은폐하기 위해 온 갖 수단을 동원했다. 각종 특별회계와 기금을 양산하고, 산하기 관을 신설하여 정부가 하던 일을 위임했다. 그래서 재정구조를 뒤틀릴 대로 뒤틀리게 만들었으며, 재정의 효율성과 신축성과 형 평성에도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재정의 생산성까지 크게 떨어졌 다. 중앙정부 일반회계는 1987년 이래 1997년까지 4.3배 증가했 는데, 특별회계는 9.2배나 증가했다. 그 결과로 일반회계의 1/5 수 준에 불과하던 특별회계가 외환위기 직전에는 일반회계의 절반 수준을 넘어섰다. 재정팽창을 눈속임하기 위해 각종 특별회계를 새로 증설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빚었다. 공공기금은 더 가관이 었다. 자산규모로 따져보면 1988년부터 1996년까지 6.3배 증가했 는데, 같은 기간에 팽창을 거듭했다는 재정지출은 4.8배 증가했 다. 기금의 운용액은 1996년 기준으로 62조 원에 달해 일반회계예산보다 4조 원이나 더 많았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은 법률에 의해 정부업무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정부 산하기관이었다. 개인적으로 3년여 동안 조사하 여 199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했던 내용에 따르면, 그 숫 자는 1996년 말 현재 총 583개였고, 자산은 약 570조원, 예산 규모는 162조 원, 재직 인원수는 41만 명에 이르렀다. 그 예산은 정부 예산의 2.8배를 넘었다. 산하기관 팽창률을 보면 문제가 얼 마나 심각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980년 이래 1996년까지 16 년 동안에 그 예산은 24배, 인원수는 48.7배 증가했다. 이 기간에 GDP는 10.6배 증가하는 데 그쳤으니, 경제규모가 성장한 것보다 산하기관의 규모가 2배 이상 빠르게 팽창한 셈이었다. 참고로, 위의 통계를 비교하는 기준 연도가 각각 다른 것은 내가 1996년부터 작성했던 서로 다른 보고서에 근거했기 때문으로, 그만큼 여 러 차례 외환위기를 경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위기가 발발한 근본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공부문의 팽창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 다. 환란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잉태됐던 셈이다. 환란 같은 재 앙이 어찌 하루아침에 벌어지겠는가. 우리 경제는 재정팽창을 비 롯한 공공부문 팽창으로 경제체력과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져 있 었다. 한마디로, 외환위기라는 암 덩어리는 노태우 정권이 만들 었고, 그때부터 자라나 김영삼 정권 때에 터지고 말았다
- 1960년대 중반 이후 평균적으로 10%대를 웃돌던 성장률은 1970년대에 들어선 뒤부터 독재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차츰 떨 어지기 시작했다(참고로 민주화 없이 경제번영을 지속한 나라는 세계사에 단 하나도 없다). 1970년대 중반에는 재정지출을 확대시켜 잠시 10%대 성장 률을 회복했지만 곧바로 떨어지기 시작해 1979년에는 6.8%를 기 록했다. 경기가 이처럼 하강하자 정책당국은 또 재정지출 확대에 나섰다. 그 증가율은 1978년과 1979년에 각각 무려 38%와 37% 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하강은 멈추지 않았다. 재정팽 창은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려 물가 불안과 국제수 지 악화를 먼저 불렀을 따름이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8 년과 1979년에 각각 15%와 18%를 기록했고, 경상수지 적자도 각각 11억 달러와 42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런 높은 물가상승률 은 구매력을 떨어뜨려 경기를 하강시켰고, 대규모 국제수지 적 자는 국내 소득의 해외 이전을 초래하여 경기하강에 가세했다.
- 1978년 말에 제2차 석유파동이 터진 데 이어 1979년 말에는 정 변까지 겹치자, 1980년 성장률은 -3.7%를 기록하고 말았다.(최근 통계기준으로는 -1.5%) 참고로 당시의 경기하강은 정변과 석유파동 때 문으로 알려졌지만, 뒤에 나타난 사태가 원인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국내경기는 정변과 석유파동이 터지기 훨씬 이전에 이미 빠르게 하강했다. 다시 말해, 1979년 말에 외환위기가 터졌던 것 이 경기하강을 초래한 근본원인이었던 것이다.
국내경기가 위와 같이 추락하자 정책당국은 또 재정지출 을 확대하여 경기를 살려내겠다고 나섰다. 그 증가율은 1980년 에 37%에 달했고 1981년에도 29%를 기록했다. 재정지출이 이렇 게 대폭 증가하고 기저효과까지 가세함에 따라 1981년 성장률은 6.2%를 기록해 다소 높아졌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0 년과 1981년에 각각 29%와 21%를 나타냈으며, 경상수지 적자도 각각 53억 달러와 46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두 해의 경상수지 적자는 평균 외환보유고의 2.5배에 달함으로써 외환보유고 고갈 위기를 일으켰다. 1982년에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구제금융을 해줬던 IMF는 경제신탁통치에 나서며 강력한 긴 축정책을 요구했다. 재정지출 증가율은 1982년과 1983년에 각각 4.4%와 6.1% 등으로 뚝 떨어졌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 졌다. 성장률이 1982년에 7.3%로 높아졌고, 1983년에는 더 높아 겨 10.8%까지 상승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당시는 중남미 각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다른 대륙의 여러 나라에 전염되었고,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21.5%까지 인상함으로써 시티은행 등 대형 금융회사들까지 도산위기에 처하는 등 금융위기가 심각하 게 진행되었으며, 경기후퇴가 세계적으로 본격화했다는 사실이 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성장률은 1982년에 -1.2%를 기록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이처럼 뛰어난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기 적 같은 일이었다!

-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라도 진실이 은폐되면 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는 것은 역사의 철칙이다. 실제로 외환위기는 평균적으 로 5년을 주기로 반복하여 일어났고, 그때마다 국민은 혹독한 경 제난을 겪었다. 더 심각한 사실은, 외환위기가 항상 똑같은 원인 으로 터졌다는 점이다. 즉, 경기를 살려내겠다는 재정확대정책이 경기과열을 일으켰고, 경기과열이 우리나라의 생산능력보다 더 많은 소비를 초래함으로써 수입의 급증을 불렀으며, 이것이 국제 수지를 악화시키고 외채를 누적시켜 외환보유고를 고갈시켰던 것 이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는 동물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 가. 더욱 어이없는 일은 외환위기를 초래했던 경제정책을 주도적 으로 수립하고 집행했던 김재익(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등의 일부 경 제관료가 마치 경제를 살려낸 위인처럼 여전히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경제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 신자유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개방화, 민영화, 규제완화 등 을 추구하는 정책노선이다. 이 정책노선을 배척하고도 경제번영 을 이룩한 나라가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나라는 찾 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배척한 나라는 쇠락했고, 그 국민은 오랜 세월 경제난에 시달렸다. 반면에 신자유주의 정 책을 추진한 나라는 대부분 경제번영을 누렸다. 심지어 사회주 의 국가인 중국조차 개방화, 민영화, 규제완화 등의 개혁을 단행 한 뒤에야 비로소 오늘날 같은 경제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근래 에 상대적으로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한 베트남이나 인도도 마찬 가지이다. 비록 중국은 최근에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지만 말 이다.
- 일부 진보주의자는 이념적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배척하지 만, 이것은 하나의 정책노선일 뿐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 보수정 권과 진보정권을 가리지 않고 이 노선을 선택한 나라는 대체적 으로 경제번영을 누렸다. 오히려 진보정권이 신자유주의를 추구 하면 사회 안정과 국제 평화 속에 경제가 호조를 보였다. 영국 블 레어 정권의 노동당은 당시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보다 훨씬 진 보적이었지만 그리고 미국 클린턴 정권은 당대의 노무현 정권보 다 훨씬 진보적이었지만, 장기간의 경기호조를 연출했다. 

- 도대체 왜 파생금융상품의 가격은 하락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작동했다. 하나는 주택담보 대출의 상환부담이 감당 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못사는 사람들의 대 출금 상환부담이 가중됐던 것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다른 하나는 주택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하락함으로 써 대출금 상환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주택을 보유할 필요가 없어 진 것이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주택담보 대출을 받았을 경우, 주 택가격이 떨어져 그 가치가 대출금액보다 적어졌을 경우는 주택 을 은행에 돌려주면 그 채무가 면제된다. 잘못된 대출을 해준 은 행도 책임을 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이 두 원인을 시간을 거 슬러가며 차례로 추적해보자.
우선, 못사는 사람들의 대출금 상환부담은 왜 가중됐을까? 시장금리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시장금리는 왜 급등했을까? 여 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연방채권의 발행이 과다해졌던 게 가장 결정적이었다. 연방채권의 공급이 과다해져 그 가격이 떨어짐으로써 시장금리가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연방채권 금리는 2004년 2%대에서 2008년에 5%대로 급등했다. 그럼 연방채권의 공급은 왜 과다해졌을까? 2006년 재정적자가 8 천억 달러에 달하는 등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도 대체 재정적자는 왜 이처럼 급증했을까? 조세수입은 감세정책 등 으로 인해 충분히 증가하지 못한 반면에, 재정지출은 이라크 전 쟁비용 등으로 인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는 이렇게 찾아졌다.
다음으로, 주택가격은 왜 빠르게 하락했을까? 그 이전에 주택 가격이 급등하여 거품을 형성했다가 붕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럼 주택가격은 왜 급등했을까? 너도나도 주택을 사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여 수요의 시간이동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은 왜 계속 상 승하여 수요의 시간이동을 초래했을까? 부시 정권이 550만 채의 주택을 무주택자에게 공급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각종 지원정 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이 급등하던 때는 주택 매입자금 의 전액을 대출받을 수도 있었다. 여기에는 주택담보대출 기관인 페니메이와 프레디맥 등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니메이와 프레디맥 등은 왜 상대적으로 가난한 무주택자 의 주택매입을 대대적으로 지원했을까? 550만 채의 주택을 무주 택자에게 공급하려던 부시 정권의 공약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550만 채의 주택이 무주택자에게 순조롭게 분양되 기 위해서는 정책지원이 필요했다.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해야 무 주택자의 주택매입을 촉진할 수 있었으므로 정책지원은 더욱 필 수적이었다. 실제로 주택가격이 상승을 시작하자 자기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큰돈을 벌 수 있었으므로 무주택자는 너도나도 담보대출을 받았다. 드디어 수요의 시간이동이라는 변수까지 작 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책적으로 부양한 주택가격의 상승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수요가 시간이동을 미리 한 때가 반드시 닥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은 무주택자는 금리가 낮은 경우에만 대출 이자를 상환할 수 있으므로 가격상 승의 지속가능성은 더욱 낮았다. 금리가 상승하면 주택담보대출 상환부담은 더 커지고, 그 부담이 커지면 서브프라임모기지는 부실해지며, 서브프라임모기지가 부실해지면 주택가격은 하락으 로 돌아설 게 뻔했다. 결국 주택가격이 하락으로 돌아서면서 서 브프라임모기지는 부실해졌고, 관련 파생금융상품의 가격은 폭 락했다. 파생금융상품 가격의 폭락은 상당수 헷지펀드들은 물론 이고 일부 대형 은행들까지 무너지게 했다. 이것이 신용파괴리 를 작동시킴으로써 금융위기를 일으키고 말았다.
- 파생금융상품의 레버리지는 20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파생금융 상품의 가격폭락은 신용파괴원리를 본격적으로 작동시켰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2007년 7월에 베어스턴스 산하의 헷지펀드 2개가 고객 16억 달러를 잃은 뒤 파산한 사태였다. 이것이 트 리거 역할을 하면서 금융위기를 빠르게 진행시켰다. 물론 2007 년 상반기까지 경제성장은 탄탄했고, 주식시장은 신고가를 갱신 했지만, 물밑에서 빠르게 진행하던 신용파괴리는 금융기관들 의 경영수지를 빠르게 악화시켰다. 8월 초에는 미국의 파생금융 상품에 과도하게 투자했던 BNP Paribas가 큰 손실을 입어 휘청 거렸고, 중순에는 Countrywide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가지수가 급락하기 시작하며 신용파괴원리가 드디어 수면 위 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 만약 1996년에 주식시장의 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해 금융긴축 정책을 펼쳤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만약 2002년에 주 택시장의 거품을 차단하기 위해 금융긴축 정책을 펼쳤더라면 또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미국은 그 뒤로 2006년까지 이어진 경 기팽창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며, 미국 국민의 경제생활은 그만큼 윤택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학자가 진짜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은 이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 로 금융위기를 예방하는 일은 어느 무엇보다 어렵다고 보는 게 옳다. 얼마나 빨리 발견하고 얼마나 빨리 처방하느냐가 관건이다. 2008년의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그 처방이 너무 늦게 이뤄졌고, 경제질병이 상당히 심각한 지경에 이르도록 진행한 상황이 었다. 한때는 세계경제를 무너뜨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각했으 나, 다행히 2012년부터는 차츰 치유 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 병에 걸렸다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후유증과 합병증이 나타나 건 강이 다시 악화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나듯이, 세계경제 역시 우 여곡절을 거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정책적 실패가 거 듭 벌어진다면 진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유 럽 중앙은행은 2009년에 강력한 금융긴축 정책을 펼침으로써, 신용파괴원리의 작동을 재개시켜 금융위기를 심화키는 결과를 빚었다.
실제로 유럽연합 EU은 2008년 말에 본원통화를 전년대비 37%나 증가시킴으로써 신용파괴원리의 작동을 차단해냈다. 그 덕분에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고 있던 폴란드, 헝가리, 아일랜드, 아이스란드, 라트비아 등은 2009년부터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은 위와 같은 통화팽창이 심각 한 물가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섣부른 판단으로 2009년에는 본원통화 증가율을 -0.9%로 낮추었다. 결국 이것이 신용파괴원 리를 재가동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로 유럽연합 각국의 경제회복 은 뒷걸음을 쳤고, 일부 국가는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여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특히 그리스와 스페인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동시에 터져서 아주 심각한 경제 난을 겪었다.

- 초인플레이션은 어찌하여 발생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급격한 통화팽창이 발생시킨다. 그럼 급격한 통화팽창은 왜 일어날까? 이것은 신용창조에 의해 일어난다. 한국은행이 화폐발행액을 87조 원에서 1조 원을 더 늘리면 큰 영향이 없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화폐발행액 1조 원이 시중에 풀리면 그 중 상당 부분이 은행으로 돌아오고, 은행은 그 돈을 민간부문에 대출해 주는 등의 과정이 반복되며, 수표와 신용카드와 예금통장 등처럼 화폐의 역할을 하는 통화들을 경제에 남긴다. 결국은 신용승수가 작동하여 광의통화는 약 45조 원이 증가하는 압력을 받는다. 광 의통화에 대한 화폐발행액의 신용승수가 약 45배에 이르기 때문 이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화폐발행을 늘리더라도 물가가 상승하는 일은 당장 일어나지 않으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 에야 물가는 본격적으로 상승한다. 통상적으로는 반년에서 1년 반이 지나야 물가가 본격적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초인플레이션은 무섭다. 증상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제때 대비할 수 없 게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곤 한다. 특히 경기가 부진할 때에 화폐발행을 늘리는 것은 흔히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경기가 부 진할 때는 호조일 때에 비해 통화의 유통속도가 상대적으로 느 려지고, 신용창조의 승수도 작아지며, 유사화폐의 통화기능 역시 떨어지므로, 이런 때는 화폐발행을 늘리더라도 당장은 물가 불안 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기가 본격적으로 살아 나거나 물가가 본격적으로 불안해진 뒤에는 통화의 유통속도가 빨라지고, 부동산 등 유사화폐의 통화기능이 향상되며, 신용승 수도 커진다. 그래서 경기가 부진할 때 화폐를 지나치게 증발하면 경기가 상승한 뒤나 물가 불안이 나타난 뒤에는 쉽게 초인플 레이션으로 발전한다.
그렇다고 화폐 발행의 증가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거래가 늘어나면 통화량도 함께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통화량이 적절하게 늘어나지 못하면 거래가 부진 해져 경제활동에 제약이 가해지고, 경제성장도 억제당한다. 따라 서 적절한 수준의 화폐 발행은 계속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경제 가 성장하는 데 소요되는 것보다 더 빨리 통화량이 늘어나면 물 가 불안이 일어나고 자칫 초인플레이션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 경제질병의 종류와 그것이 드러내는 증상은 서로 달라도, 그 원인은 하나이고 그 전개과정에서는 금융위기를 반드시 경유한 다는 특징을 보인다.
첫째, 외환위기는 외환보유고의 고갈 및 환율의 급등과 함께 금융위기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둘째, 초인플레이션은 금융 위기가 초래한 경제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정책당국이 경기부양 에 집착하다가 재정위기와 함께 나타나곤 한다. 셋째, 재정위기 는 금융위기가 부른 경기부진이 세수결손을 일으킴으로써 혹은 금융위기가 초래한 경기부진을 벗어나기 위하여 재정지출을 지 나치게 팽창시킴으로써 벌어지곤 한다. 넷째, 장기 경기부진은 금융위기가 초래한 경제공황이라는 급성질병을 막으려다가 만성질 병으로 발전시킨 결과이다. 다섯째, 거의 모든 경제공황은 금융 위기가 심각해짐에 따라 발생한다. 이처럼 경제공황, 초인플레이 션, 장기 경기부진, 외환위기, 재정위기 등은 거의 모두 금융위기 를 경유해 일어난다.
그럼 금융위기는 무엇이 발생시킬까? 역사적 사례를 보면, 경 기과열이 국제수지를 악화시켜 외환위기를 일으키거나 부동산시 장이나 주식시장에서 거품경기를 일으켰다가 꺼지면서 금융위기 가 발생했다. 이 금융위기는 경제상황에 따라 여러 종류의 경제 질병을 낳았다. 그 과정에서 석유파동이나 정치적 격변 등 외생변수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금융위기가 발발하지 않으면 그 영향 은 제한적이었다. 경기과열이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경제질병은 다양한 증상을 보였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질병은 모두 경기과열과 금융위기가 낳은 일 란성 쌍둥이라 부를 수 있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이 온다  (1) 2024.06.27
연방준비제도 101  (0) 2024.06.20
경제 에스프레소  (1) 2024.06.16
더 그레이트 비트코인  (1) 2024.06.16
세상 친절한 금리수업  (0) 2024.06.09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