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역사는 단순한 읽을 거리가 아니다. 하물며 주로 과거에 관련된 것만도 아니다. 역사는 우리 안에 역사가 있고,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따라서 문자 그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지닌다. (제임스 볼드윈, 백인의 죄의식 중에서)
- 유목민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의 그늘진 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짐나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보다 덜 훌륭하거나 덜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로마 공화국이 카르타고를 무찔러 지중해의 맹주가 되고, 중국이 한 무제의 치세하에 번영을 구가하면서 황허와 유럽을 잇는 초기 실크로드를 오가며 교역을 조금씩 발전시키던 기원전 2세기만 하더라도 흉노의 세력은 만주에서 카자흐스탄까지 뻗어 있었고, 이 세력권 안에는 시베리아의 일부지역, 몽골, 지금의 중국 산시성 신장이 포함되었다. 같은 시기에 스키타이 유목민과 그들의 동맹 유목민들도 흑해에서 카자흐스탄의 알타이 산맥에 이르는 땅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을 한데 모으면 유목민들의 영토는 로마제국이나 중국의 한 제국보다도 넓고 강력했다. 게다가 우리는 매장지를 발굴함으로써 그들의 지배자들이 치타 털로 단이 장식된 중국 비단 의대를 착용하고, 페르시아 양탄자에 앉으며, 로마의 유리를 사용하고, 그리스의 금은 장신구를 애호했음을 알고 있다. 이는 이동성 종족이 원시적이고 고립되어 있다는 통념과 상반되며, 그 유목민들이 동중국해부터 대서양까지 이어진 교역세계의 달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이븐 할둔은 이렇게 말한다. "사막생활이 용맹의 원천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야성적 집단은 다른 집단들보다 용감하다. 따라서 이들은 우월함도 더 잘 확보할 수 있고, 다른 종족들의 수중에 있는 것돌드 더 잘 빼앗을 수 있다." 여기에서 이븐 할둔이 말하는 다른 종족들의 수중에 있는 것들이란 힘, 왕권, 땅과 부를 의미. 또한 그는 유목민 지도자는 아무리 힘을 가지고 싶어도 연대의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그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할 수 없고,... 그렇게해서 왕권은 연대의식이 도달하는 목표가 된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발언 같지만, 이븐 할둔 이전에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고, 이론으로 체계화하여 국가와 제국들의 흥망을 설명한 사람도 없었다.
- 이븐 할둔도 그런 괴리가, 아바스 왕조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 중 하나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왕조에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수명이 있다"라는 단원에서 자신이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본 것이 단계를 이렇게 제시.
(1) 왕조를 수립한 세대는 왕조에 대해 강경하고 거칠게 굴며, 아사비야로 결합되어 있다.
(2) 그러다 일단 권력과 권이가 확립되면 "사막인의 태도는 정주민 문화에 물들고, 결핍이 사치와 풍부함으로 대체되는 2세대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부패가 만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지배자는 집단의 나머지 사라들과 분리되고, 나아가 그것은 애초에 정복을 가능하게 했던 연대의식의 와해로 이어진다.
(3) 3세대가 되면, 사막인의 삶과 강인했던 시절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런 때를 깡그리 잊는다. 그들은 명예의 맛과 연대의식이 주는 달콤함을 느끼지 못한다.... 유복하고 편안한 삶에 젖어 사치가 극에 달한다.
- 왕조의 흥망에 대해서 이븐 할둔이 개략한 부분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에도 잘 들어맞는다.
(1) 알 사파(초대 칼리프)와 알 만수르(2대 칼리프)는 왕조를 수립하고 수도를 건설
(2) 알 만수르에 이어 칼리프가 된 그의 아들 알 마흐디는 말에 열중하면서, 사치스럽고 풍족한 삶에 만족
(3) 알 마흐디의 아들 하룬 알 라시드는 극도의 번영과 안락함을 즐김
-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가 지적했듯이, 몽골의 부상으로 유럽은 본의 아니게 "세계는 그들의 조상이 보았을 법한 것보다 무한정으로 더 크고 더 다양하며 덜 순종적이었다. 세계는 하느님의 말슴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쉽게 정복당하지 않을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깨달음은 유럽에 특별히 중요한 세가지 진전을 가져옸다.
첫째, 유럽의 상상력이 구속에서 해방된 것이고, 이 자유는 샤르트르 대성당과 캔터베리 대성당, 스페인의 부르고스 대성당과 부다페스트의 마차시 성당에 이르기까지 몽골의 침략이 끝났음을 기념하여 발주한 그 시대 유럽 대성당들의 형태와 야망으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질서는 그 성당들의 구조, 하늘을 향한 첨탑, 빛으로 가득한 실내, 무역에서 나오는 자금, 그런 건축을 가능하게 해준 아랍 학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수학으로부터 나타났다.
두번째 진전은 유럽이 유목민 국가인 몽골의 부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뒤비도 설명했듯이, "협상하여 천하무적 왕국들의 환심을 사려고 시도하는 편이 한층 유리한데도 그 모든 이교도, 전투의 달인들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몽골의 힘과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걸친 그들의 지배력의 광대함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시야를 넓히도록 자극해 그들이 동쪽의 인도와 서쪽의 대서양 너머를 바라보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종국에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변화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와 콜럼버스와 같은 탐험가들의 항해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에게 화물이 지배당하는 상황에 대한 반응에서 나온 행위였다.
- 몽골에 의한 평화로 가능해진 그 문화 교류는 유라시아 반대편의 끝 지역도 변화시킴. 오랫동안 고립된 왕조를 유지했다고 알려진 중국만 해도 이제는 육지에 둘러싸이고 말 위주로 살아가던 스텝 지대 출신 유목민 칸의 지배를 받으면서 해양강국으로 떠오름. 애초에 쿠빌하이 칸은 마스트가 넷인 정크선들로 새 함대를 만들면서, 그것이 바다를 면한 두 이웃나라 일본과 고려를 상대로 한 원정에서 큰 힘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그들은 배들의 용도를 바꿔서 2차대전 전까지는 세계 최대였을 무적의 선단으로 만들었다. 그 새로운 화물선단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중국은 동중국해와 홍해사이의 해상무역까지 지배했다.
- 더 크고 더 완벽한 그림에서는 유목민대 정착민, 부족민 대 국민과 같은 극명한 차이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여태껏 그랬던 적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중심에는 이분법이 있는 듯 하다. (팀 매킨토시, 스미스의 아랍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