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에스프레소

경제 2024. 6. 16. 18:38

- 금융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비추어 보면 금융이 란 쇠를 의미하는 '금자와 녹이다라는 의미의 '융자가 결합한 것으로, 금전의 융통, 즉 돈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금이 이전하는 것을 뜻한다. 금융에 해당하는 영단어인 'finance'는 태생적으로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는 끝을 의미하 는 라틴어 'fini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래 빚을 청산ending하거 나 대금을 지불payment 한다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다 가 18세기 이후 영미권에서 finance'를 돈을 마련하고 관리하 는 행위를 일컫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 현대사회에서 금융이 발휘하는 기능은 앞에서 살펴본 정의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은행, 증권, 보험, 자산운용, 핀테크 등 다양한 형태의 금융 서비스를 통해 그 역할과 기능 이 세분화되어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금융 서비스 제공자 의 형태나 금융상품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금융이 수행하는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금의 이전 과 중개 기능이다. 금융은 여유자금을 모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해주며, 중개 시스템을 통해 자금이 결제된다. 두 번째는 자금의 관리 기능이다. 금융은 우리의 자산을 안전 하게 보관해주는 기능을 넘어 적극적인 운용과 투자를 통해 재 산 형성에 기여한다. 세 번째는 위험관리 기능이다. 우리는 예 측할 수 없는 사고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마련이다. 하 지만 보험 같은 금융의 위험관리 기능을 활용하면 앞으로 닥칠 손실이나 재난에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 고대사회에서 신전은 종교, 정치, 문화, 경제 등 모든 생활의 중심지였다. 신을 기리는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가장 주 요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전은 세속의 혼란과 폭력으로 부터 차단된 가장 안전하고 튼튼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 때문 에 지배계층이나 여러 도시국가들은 돈이나 보물, 귀금속, 문 서 같은 중요 재산들을 신전에 보관했다. 신전 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비밀의 방은 이런 용도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 다. 당시로서는 가장 안전한 금고와도 같았던 셈이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진 무렵, 파르테논 신전에는 약 3,600만 드라크마(부엉이 은화 한 개는 4드라크마에 해당)의 은화 가 보관되어 있었을 만큼 그 규모도 방대했다.
하지만 신전에 맡겨놓은 은화들이 비밀의 방에 고이 보관만 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신전의 사제들은 자금이 필요한 도시 국가나 개인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돈을 빌려준 대 가로 대략 10퍼센트 내외의 이자를 받았지만,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무이자나 저리유대인과 더불어 중세의 금융 수요를 충족시켜준 사람들은 롬바르도Lombardo라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전당포 업자들이 었다. 게르만족에 뿌리를 둔 이들은 약 11세기 무렵부터 당시 유대인의 전유물이던 금융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북부 이탈 리아 지역을 기반으로 삼아, 이후로는 유럽 전역으로 활동범위 를 넓혀갔다. 롬바르도의 주요 고객층이나 영업 방식은 유대인 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기사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상 대로 가축이나 의류, 책, 귀금속 등을 담보로 받고 비교적 소액의 자금을 빌려주었다. 이자율은 연간 30퍼센트에서 300퍼센 트에 이를 만큼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 지, 당시 롬바르도라는 명칭에는 이들에 대한 경멸이나 멸시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롬바르도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편이었지만, 이들은 소시민 의 금융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유용한 창구였다. 이런 역할을 토대로, 12세기에 들어서는 각국 군주로부터 정식 면허를 받고 고리대금업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군주들은 이 과정에서 고액의 면허세를 부과해 별도의 수입원으로 삼았다. 군주들은 기독교 교리를 어기지 않은 채 실속을 챙길 수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제한적이나마 금융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 기사단의 새로운 부업
기독교인들의 바람과 달리 성지 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십자군이 점령한 지역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급기야 1187년, 지도자 살라딘을 앞세운 이슬람 세력은 예루살 렘을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지를 되찾으려는 염원 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십자군 전쟁은 그 후로도 13세 기 말까지 이어졌다. 교황과 유럽의 왕실은 이 기간 템플기사 단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사단은 초창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 다. 성지 회복과 기독교인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부업에 더 치중했다. 바로 금융업이었다.
템플기사단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십자군의 주요 길목마 다 지부branch를 만들어두었다.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 는 수백여 개 지부는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네트워크를 능가할 정도였다. 촘촘한 조직망을 통해 물품 조달과 자금관리 업무를 도맡아 처리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환전, 결제 같은 금융거래 경험도 축적할 수 있었다. 기사단이 보유한 막대한 재산과 광범위한 조직망, 이들이 제공하는 금융 기능의 면면을 보자면 국제적 금융 조직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기사단이 제공했던 대표적인 금융 기능은 장거리 송금과 환 전 업무였다. 가령 로마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에 나선 여 행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템플기사단이 있는 한, 순례자는 거 금을 소지한 채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순례자는 로마에 있는 템플기사단 지부에 돈을 맡기고 이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받아 여행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목적 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 돈이 필요하다면 현지의 템플기 사단 지부를 방문하면 된다. 로마에서 발급받은 증명서를 제시 하고 필요한 만큼 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증명서에 표시 된 화폐와 현지에서 쓰이는 화폐 종류가 다른 것 역시 큰 문제 가 되지 않았다. 현지의 템플기사단 지부가 제공하는 환전 서 비스를 통해 간단히 해결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편리함 덕분에 템플기사단의 서비스를 이용하던 고 객은 순례자나 군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교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템플기사단이 제공하는 송금망의 혜택을 보다 직접 적으로 누릴 수 있었다.
- 금융이라는 부업에 몰두하는 동안, 템플기사단은 교황이나 왕실도 무시하기 어려운 초정부기관으로 성장해
갔다. 13세기 후반 무렵, 이들이 유럽 전역에 걸쳐 보유한 영지 는 9,000여 곳에 달했다. 연간 수입 규모는 영국 왕실의 200배 수준이었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템플기사단은 암흑의 중세 시대, 유럽의 경제와 금융을 떠받치는 중추와도 같은 역할 을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막대한 재산과 영향력은 다른 한 편으로 재앙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285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필리프 4세는 템플기사단의 주요고객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십자군 전쟁과 주변국과의 연이은 분쟁으로 인해 템플기사단은 물론 유대인 들에게도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다. 정상적인 채무상환이 불 가능하다고 판단되자, 필리프 4세는 빚을 면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데 골몰했다. 유대인들에게 진 빚은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로 추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템플기사단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우상숭배와 신성모독, 부정부패 혐의로 단원들을 모 조리 체포하고 기사단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필리프 4세의 밀서를 통해 1307년 한 해에 프랑스에서만 3,000여 명의 단원 이 체포되었다. 또한 전임 교황을 살해하고 교황에 오른 클레 멘스 5세를 협박해 유럽 전역에 있는 단원들을 체포하고 기사 단의 해산을 명하도록 했다. 명백한 증거는 없었지만 단원들은 모진 고문에 못 이겨 혐의를 자백했다. 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 레Jacques de Molay를 비롯한 주요 단원들이 화형을 당하고 기사단 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필리프4세의 빚에서 비롯된 정치적 계 산으로 인해 템플기사단은 허무한 종말을 맞고야 말았다.
- 환어음이 불러온 무역의 변화
환어음의 사용은 당시 교역을 주름잡고 있던 이탈리아 상인들의 영업 형태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시장이 형성되고 안정적인 판매 루트를 확보하게 된 이들은 차츰 순회 상인에서 정주상인 sedentary merchant 형태로 변모해갔다. 이탈리 아 내에 본점을 두고, 유럽의 주요 무역 도시마다 지점이나 대 리인을 두어 업무를 처리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무역과 더불어 금융업을 취급하던 일부 상인들 중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업무를 확장해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가까운 형제나 친척을 파리, 런던, 바르셀로나 같은 교역 중심 지로 보내고, 그들만의 금융 영토를 개척해갔다. 환어음의 이 용은 교역 중심지를 따라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한 이 상인들 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환어음이란 이처럼 판매상이 구매상을 지급인으로 하여 발행한 것으로, 어음금액에 대한 지급의무가 표시된 증서를 말한다. 이때 은행은 무엇을 믿고 어음에 표시된 금액 (무역대금)을 판매상에게 미리 지급해준 것일까? 상인들이 서로 짜고 은행을 속이기라도 한다면 은행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초창기 은행들은 어음의 지급일을 의미하는 만기일을 통해 이런 위험을 관리했다. 환어음의 만기는 어음 작성일로부터 물 품이 도착할 때까지의 기간인 1~2개월로 정해지는 것이 보통이 었다. 이 기간에 은행은 어음의 진위나 물품의 선적 여부를 확 인함으로써 혹시 모를 금융사고 가능성에 대비할 수 있었다.
지급인으로부터 어음금을 회수하지 못할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환어음도 결국에는 만기일에 어음금이 지급될 것이라 는 믿음과 신뢰를 기초로 한 거래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급인이 신뢰를 저버린다면 그에 따른 은행의 손실은 불가피한 일이 었다.
대출거래에서는 이자를 통해 이러한 위험이 일부나마 상쇄 될 수 있었다. 이자는 돈을 빌려준 데 대한 대가이기도 하지만, 돈을 갚지 못할 경우에 대한 벌칙의 의미도 있었다. 환어음에 서는 환전 수수료가 이런 이자의 기능을 대신했다. 은행은 어 음에 표시된 금액을 현지 통화로 바꾸어 주는 과정에서 시세보 다 훨씬 높은 수준의 환율을 적용했다. 따라서 환전 수수료는 은행가들의 훌륭한 수익원인 동시에, 지급인의 부도 가능성에 대비한 위험관리 수단이기도 했다.

- 가문 초기, 메디치가의 구 성원들은 현실 정치에 직접 나서는 것만은 꺼렸다. 인근 국가 와의 전쟁이나 봉건 세력과 신흥 상인 세력 간 갈등에서 비켜 나 있기 위한 전략이었다. 대신에 고위 성직자나 권력층과 폭 넓게 교류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그 수단으로 쓰였던 것 이 바로 재량예금이었다.
이 시기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은 실상 대단한 재력가 들이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막대한 부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청빈, 희생 같은 기독교 덕목에 반했기 때문이다. 불로 소득을 죄악시하던 교회법상 예금을 맡기고 이자를 받는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웠다. 교회법을 따라야 하는 왕실과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성직자나 고위 권력층에게는 자신의 돈을 은밀하지만 안전하게 불려줄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 절실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데 메디치 가문만 한 적임자는 없었 다. 메디치가는 고객의 신원과 재산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안심하고 돈을 맡길 수 있었고, 이들이 맡긴 돈에 대해 대가도 두둑하게 지급했다. 다만 그 형식은 이자가 아니라, 감사의 의 미로 재량껏 지급한다는 뜻에서 선물gift로 포장되었다. 교회법 에 따른 제한을 교묘히 비켜가기 위한 것이었다. 대가를 지급 하는 방식도 일반적인 예금과는 달랐다. 사전에 정해진 수준의 이자가 아닌, 은행의 이익에 따라 8~12퍼센트 수준의 대가를 가변적으로 지급하는 형태였다. 현대적으로 보자면 예금이라 기보다 자금 운용성과에 따라 보상 수준이 정해지는 투자 상품 에 가까웠다.
메디치 가문은 재량예금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환전, 환어 음, 대출 같은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면서 위험을 분산했다. 이 로써 오늘날 은행 업무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근대적 은행의 면 모를 갖추었다. 이들이 마련한 은행 모델은 종교개혁 이후로는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 독일, 잉글랜드,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메디치 은행을 표본으로 한 은행들이 생겨났다. 비록 메디치 은행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 만, 이들의 유산은 르네상스 예술과 현대 은행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여전히 남아 있다.

- 채권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식보다 훨씬 이전인 12세기 무렵이었다. 지중해 북부 아드리아해의 지배권을 두고 이탈리 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와 비잔틴제국이 벌이던 전쟁이 그 발 단이었다. 당시 비잔틴제국에 맞서 함대를 구축해야 했던 베네 치아로서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 흔히 쓰이던 방식은 자국민을 상대로 세금을 걷거나 금융가 집단으 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도 한계에 다다 랐을 즈음인 1172년, 베네치아 정부는 새로운 해결책을 떠올렸 다.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베네치아 정부가 생각해낸 방안은 시민들을 상대로 직접 돈 을 빌리는 것이었다. 물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돈을 빌려줄 리는 만무했다. 따라서 정부는 시민들이 보유한 재산 수준에 따라 국가에 빌려줄 돈을 강제적으로 할당했다. 국가에 납부해야 할 세금과는 엄연히 별도였다.
- 시민들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사실은 '프레스티티prestiti'라 불 리는 증서를 통해 기록해두었다. 이 증서를 소지한 사람은 정 부에 돈을 빌려준 채권자 지위를 인정받고, 연 5퍼센트 수준의 이자도 지급받을 수 있었다. 증서를 제3자에게 이전하는 것도 가능했다. 국가에 직접 채권액의 반환을 요청하지는 못했지만, 증서를 매각하는 방식으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정부의 사례에서 보듯, 채권이란 기본적으로 돈을 빌리는 자(채무자가 돈을 빌려주는 자(채권자)를 상대로 발행하 는 증서다. 이 증서에는 빌린 돈의 액수는 물론, 정해진 날짜에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대출 과정에서 작성하는 차용증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채권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는 수단으 로 활용되며, 채권증서를 통해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 서 대출과는 차이가 있다.
채권은 그 발명 이래, 자금수요자들을 위한 훌륭한 금융 수 단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근대 유럽 국가들이 채권을 발행해 전 쟁자금을 조달하거나, 현대 국가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은 채권의 기능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채 권은 발행자 입장에서 훌륭한 자금조달 수단이 되는데, 발행 주 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구분되기도 한다

- 구조화 증권의 손익은 주식이나 주가지수 변동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금리나 통화, 상품 등 다양한 기초자산에 연동되게끔 설계할 수도 있다. 주가연계증권과 대비되는 파생결합증권Derivatives Linked Securities: DLS은 이처럼 주식 이나 주가지수 외의 기초자산 변동에 따라 그 손익이 결정되는 구조화 증권을 말한다.
DLS는 수익을 결정하는 기초자산만 다를 뿐, 설계 방식은 ELS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금리 등 기초자산의 움직임에 따 라 지급되는 수익의 내용도 달라지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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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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