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개 의식의 환한 조명은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전체 중 일부만 비춘다. 우리는 우리가 좀처럼 주의 를 기울이지 않는 힘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시기, 부인된 분노, 묻힌 상처, 어린 시절의 생각 등은 우리의 관점을 형성하는 틀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힘들을 우리 안에 품 고 있음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이 무지는 으레 재앙을 불러온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해법은 우리의 마음을 꾸준하고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질문하기를 권했다. 나의 우선순위는 무엇인 가?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 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때 참을성 있고 사려 깊 은 친구가 함께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탐색하고 해석하는 것은 철학자가된다는 의미의 본질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 현명한 사람은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기에 완벽을 기대하지 않는다. 가령 정부를 설계할 때 합리성 이 승리하리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오류와 어리 석음이 고집부리는 상황을 예상하고 이를 억제하는 구 조를 만든다. 결혼할 때도 현실적인 태도를 취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전부가 되리라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배우자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들볶지 않는다.
우리의 굽은 본성을 인정하는 것은 낙담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관대한 마음과 씁쓸하 지만 멋진 유머가 생겨난다. 그리고 칸트가 덧붙였듯이, 굽은 목재도 재능 있는 목수의 손에서는 아름다운 마루 로 거듭날 수 있다.

- 16세기 이래로 일본의 선불교 철학은 고친 사물이 지닌 특별한 아름다움과 지혜를 알고 있었다. '쓰기'는 두 개 념을 합친 말로 '긴(金)'은 '금', '쓰기'는 '이어 붙임'을 뜻한다. 선종 미학에서는 뜻하지 않게 박살 난 도자기의 파편을 그냥 버리는 것이 금물이다. 조심스럽게 주워서 다시 맞춘 다음 금가루를 듬뿍 섞은 옻을 발라 접합해야 한다. 이때 파손 흔적을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어 붙인 선을 아름답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금가루가 묻은 귀한 선들은 깨어짐 그 자체가 풍부한 가 치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깨어진 피조물 이다. 수리가 필요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수리한 그릇은 우리 또한 분명한 결함을 지녔더라도, 다시 조립될 수 있고 여전히 사랑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다.

- 일본 철학자 무라타 주코는 1488년 교토에서 쓴 「마음의 글에서 두 개념을 결합한 독특하고 새로운 미의식을 제시했다. 하나는 홀로 있음의 달곰씁쓸한 적적함을 의 미하는 '와비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의 가치를 높이 기도하는 노화와 마모의 흔적을 가리키는 '사비)다.
주코는 지혜라는 선불교 이상의 중심 원칙을 예술적이고 미적인 관점으로 해석한다. 사물, 풍경, 우리가 사는 집, 우리 자신 등 모든 것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자취와 불완 전의 증거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하고 투박한 잔, 오래된 기왓장, 길 위에 조금 어수선하게 흩어진 낙엽 따위를 사랑하고 음미함으로써 우리의 덧없고 불완전하며 영웅적이지 못한 본성과 상징적으로 화해한다. 결함을 인위적으로 숨겨서는 안 되고, 손상의 흔적은 눈에 보이게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요컨대 와비사비는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우리, 즉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의 본모습과 화해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상 '성취'로 번역되는 고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를 특히 강조했다. 이 단어는 오늘날 언어에서 가장 중심적인 용어 중 하 나인 '행복'의 결점을 바로잡기에 더 널리 통용될 가치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삶의 목적을 결단코 '행복'에 두지 않았 다. 그들에게 삶의 목적은 '성취'를 이루는 것이었다. 행복 과 성취를 구별하는 기준은 괴로움이다. 성취를 이루면 서 동시에 압박감에 시달리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 로 고통받고, 과중한 부담에 짓눌리고, 걸핏하면 화를 내 는 상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들은 때때로 만족과 상당히 상충되겠지만, 그럼에도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애쓰지 않아야 한다. 그 대신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할 때 수반되기 마련인 좀 더 폭넓 은 현실주의와 야망과 인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는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고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필 요에 의해 자주 불안에 빠진다. 이때 우리는 실존적 불안 이라고 하는 상태에 놓인다. 실존적 불안의 순간에 십중 팔구 우리는 실수와 행복 사이가 아니라 갖가지 고통 가 운데서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이는 19세기 초반의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깨달은 지혜로, 그의 역작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쏟아 낸 유희적이면서도 서늘하도록 현실적이고 격정적인 통 탄 속에 잘 요약돼 있다. "목을 매시오. 그러면 후회할 것 이오. 목을 매지 마시오. 그래도 후회할 것이오. 어느 쪽 이든 후회하게 되오. 목을 매든 안 매든 후회하기는 매한가지요. 선생들, 이것이 모든 철학의 정수라오."
우리는 동정받을 자격이 있다. 형편없는 결정을 내리겠지 만, 그럼에도 씁쓸한 진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키 르케고르는 말한다. 그 진실이란, 실존의 조건 자체가 우 연적이기보다 본래적으로 좌절을 안겨주기 마련이므로 더 나은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의 불 가피성을 인지하면 얻을 수 있는 묘한 안도감, 이것이 키 르케고르 읽기가 주는 재미이자 작은 위안이다. 우리를 파멸로 내모는 건 결국 어둠이 아니라 잘못된 종류의 희 망이다.

- 선불교의 특히 매력적인 측면 하나는 꽃꽂이를 권위 있는 철학 분야로 간주하고 권장한다는 것이다. 이케바나 공예에는 꽃의 위치와 길이, 개수에 관한 무섭도록 엄밀 한 규칙이 있어서 일련의 규칙에 따라 꽃을 굉장히 조심 스럽게 화기에 꽂아야 한다.
진정한 핵심은 자연의 그 소소한 조각들이 지닌 더없는 아름다움을 관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세속적인 야망을 품고 서둘러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은 꽃을 제대 로 감상하기 어렵다. 꽃은 민망할 정도로 작고 하찮게 보 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얼마간 살아 보고 고통에 대 한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나면 아마도 조금은 다르 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를테면 꽃은 더 이상 거센 운명을 잠시 잊게 하는 시시한 위안거리가 아니고, 더 이상 야망을 모욕하는 존재도 아니다. 이제 꽃은 기나긴 가시밭길 속 참된 기쁨으로 다 가오고, 고민을 덮어 두고 자기비판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는 권유이자, 실망의 바다 가운데 희망의 작 은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

-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 혼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이 주장은 당연 히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다. 모든 철학적 명언이 그렇 듯 여기에도 어떤 중요한 생각을 의도적으로 과장함으로 써 일반적인 통찰을 단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우리는 '방'에서 나가고 싶고 신나는 일을 갈망하지 만 그 결과는 좋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남의 인생에 괜히 참견했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 하면, 유명해 지고 싶어 했다가 뭇사람의 오해만 사고 만다.
'혼자 가만히 있기는 말 그대로 침대에 가만 걸터앉아 있 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진다 는 의미다. 말하자면 작은 기쁨에 감사하고, 자기 내면을 살피며, 마음속에 조용히 침잠해 있는 부분이 떠오르게 하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큰 목소리들이 이와 반대 방향으로 쉼 없이 떠드 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에 이 경구가 더욱 통렬하게 다가 온다. 그 목소리들은 더 자주 밖에 나가라고, 더 흥분하 고, 극적인 경험을 더 많이 좇고, 저 높이 흘러가는 창밖 의 구름을 바라보며 골똘히 상념에 잠기는 시간 같은 건 줄이라고 채근한다. 우리는 파스칼의 격려에 힘입어 자 신과 좀 더 친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충(忠)은 유교의 핵심 개념이다. 공자가 충을 강조한 것은 사람을 도구처럼 이용하다가 쓸모없어지면 곧바로 버리 는 것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충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면 사람의 존경스럽지 못한 면모 를 훨씬 더 너그럽게 해석하게 된다. 누군가 더 이상 잘해 주지 않고 까다롭거나 지겹게 군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 가 아니라 무언가 괴롭거나 아프거나 불안해서라고 상상 해 보아야 한다.
충직한 사람은 타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참작할 만한 정황을 고려하고 설명하는 사람이다. 충이란 곧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림을 그려 보는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이 그저 고약하거나 광포하거나 역겹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는 충의 필요성이 꼭 일방적인 것만이 아니라고 일깨웠다. 우리 모두는 특히 나이가 듦에 따라 타인의 충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 '무위(無)'는 도가 철학의 핵심이다. 기원전 6세기에 노자가 지은 『도덕경』에서 처음 언급된 용어로 '애쓰지 않는 것' 또는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을 의미하지만 게으름이 나 나태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무위는 의도적으로 의지 를 내려놓는 것을 뜻하며, 현실의 요구에 반발하기보다 때에 따라서는 응할 필요가 있음을 지혜롭게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노자에 따르면 지혜롭다는 말은 때때로 “우주 만물의 순 리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의미다. 이성을 가진 우리는 이상과 현실이 꼼짝없이 충돌할 때가 언제 인지 판단할 수 있고, 따라서 불가피한 일이라면 분노하 거나 씁쓸해하기보다 기꺼이 항복한다. 어떤 일들은 우리 힘으로 바꾸는 것이 도무지 역부족이겠지만, 그런 일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관점이다. 도교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의 평 온함과 자유로움은 정말로 필연적인 것을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나온다.

- 우리는 우리가 자유로우며 삶을 변화시킬 선택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종종 부인한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이에 '나쁜 믿음'(원어 'mauvaise foi'를 직역한 말이며 '자기기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옮긴이)이라는 용 어를 붙였다. 변화는 어렵기에 우리는 무엇이 어떠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는 경향이 있다. 가령 특정한 일을 하 고, 특정한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며, 특정한 장소에 보 금자리를 꾸려야 한다고 말이다.
사르트르는 기혼자와 회사원이 특히 이 '나쁜 믿음'을 가 지고 살기 쉽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까탈스러운 배우자나 판에 박힌 사무직을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다. 하지만 사실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다.
사르트르가 의미한 자유의 실현은 일부 미국식 자기 계발서에서 발견되는 관념과 다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는 고통이나 희생 없이 위대한 존재가 될 자유 혹은 크든 작든 위대한 일을 할 자유가 있다는 생각과 혼동하면 안 된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그보다 훨씬 더 음울하고 비극적이 다. 그는 단지 우리에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경 우에 따라서는 부랑자가 되어 무일푼으로 지상의 열린 길들을 떠도는 삶, 추방당했지만 해방된 삶이 최고의 선 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그리고 사르트르는 이 선택을 강 력히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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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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