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오늘날까지 쇼펜하우어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저서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는 이유가 뭘까요? 모두가 알다 시피 그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고, 그가 우리에 게 들려주는 말은 불안과 좌절, 고통과 절망뿐이었음에도 우 리가 쇼펜하우어를 잊지 않고 찾아가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인생 그 자체를 텍스트 삼아 삶의 고통을 철학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 이며,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집착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고통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는 '비관에 대한 비관'을 제시했기 때문이죠.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언어'에 지 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바라보고 있는,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그저 인생이라는 두 글자, 다시 말해 문자일 뿐입니다. '인생' 이라는 두 글자의 뒤안길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과 의지야말 로 '인생'이라는 글자로 표현된 실체이며, 그 표상을 고통으 로 덧칠하는 주체도, 권태로 변화시킨 주범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이 세상과 사회가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다고 고 백한 것입니다.
삶의 고통을 철학적 주제로 선택하고, 그 절망의 순간들 을 여과하지 않고 증명하고 파헤친 쇼펜하우어의 이런 용기 야말로 사후 150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우리가 고통의 한때 를 지나치며 쇼펜하우어에게 비관에 대한 비관'을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늘 같은 시간에 산책하려고 노력한다. 산책은 직장 과 마찬가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발해 같은 시간에 끝마 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산책할 때는 생각할 것들을 챙겨 간다. 어려운 과제들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동행 을 두지 않는다. 산책의 동료는 고뇌로 족하다.
건강한 생활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해 개선된다. 육 체와 정신 양쪽 모두 건강한 성공적인 생활은 매우 드물다.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피로를 느낀다. 사사 로운 움직임마저도 신체엔 부담이다. 이를 견뎌내며 건강하 고 활기찬 생활을 오래도록 관리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 야 한다. 좋은 습관이 그 대가라고 할 수 있는데, 좋은 습관 을 기르는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다. 
- 규칙적이지 않은 위대한 생애는 없다. 그 모습이 타인의 눈엔 어떻게 비쳤을지 몰라도 그런 생활이 그에겐 적합했기 에 그들의 삶은 위대해진 것이다. 시류에 따라 전염병처럼 유행하는 악습에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적절히 어울리는 규 칙을 정해놓고 인내라는 재능을 발휘하여 습관화한다. 그렇 게 일생에 걸쳐 긴 시간이 흐르는 사이, 남들과 비교되지 않 는 자기만의 위대한 삶이 쌓여간다.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말을 하고, 법을 어기고, 정부를 무시한다고 해서 특별 해지는 것은 아니다. 특별함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일상 속에서만 특별 함이 갖춰지는 것이다.
- 현명할수록 명예와 체면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안다. 민주주의를 창시한 아테네 정치가들은 술 취한 시민들에 게 썩은 채소로 얻어맞아도 옷을 빨면 그만이라며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정치가들은 억울하게 뺨을 맞아도 개 나 고양이가 할퀸 것으로 생각했지, 명예가 훼손됐다며 법정 으로 사건을 끌고 가지 않았다. 오늘날 체면과 명예가 그 사 람의 전부인 양 절대적인 대접을 받는 이유는 이 시대의 인 간관계, 혹은 권위와 신분이 편견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체면을 중시하는 까닭은, 내세울 인간성이 직분에서 얻은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다. 능력이 없으니 사람들 의 존경을 받지도 못하고, 그런데 또 권력은 욕심나고, 그러 니 스스로 자기 이름에 금칠을 해버리는 것이다.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할 자신이 없어 반대급부로 명예가 훼손됐다는 아집에 사로잡힌다. 명예훼손이라는 협박으로 타인에게 존 경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마치 온도계의 수은을 양손으 로 꼭 움켜쥐어 수온이 올라가는 것을 보여준 뒤 내 덕에 방 이 이만큼 따뜻해졌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행태다.
-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망의 속삭임에 빠져 인내하고 노력했던가. 그 결과 저들은 희망이 절망이 되는 참혹한 순간 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했다. 희망이 우리에게 준 것이 있다 면 언젠가 다시 가져갈 작정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우리에게 꿈을 주었다면 언젠가는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희망이 우리 에게 삶의 목표를 주었다면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우리의 노고는 누군가가 희망했던 대로 그에게 고스란히 바쳐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절망은 희망보다 솔직하다. 그는 우리에게 한 번 준 것을 다시 찾아가지 않는다. 
- 아직 이르다고 생각될 때 죽음이 찾아온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망상이다. 죽음 은 그에게 꼭 필요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어린아이가 어쩔 수 없이 어른으로 성장하듯 죽음은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이성이 우리의 현실보다 항상 앞서나가고, 더 많은 충동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 우리는 항상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 허락된 이유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 난 자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죽음의 준비는 오직 이것뿐이다. 더 나 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 두려움과 아쉬움과 남겨진 자 들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의 눈치만 보던 우리들이 당당하게 죽음과 대면하여 공포도, 후회도, 근심도 없음을 확인시켜주 는 것. 보다 나은 삶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 한 보호막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좀 더 의연하게 죽음 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공허와 암흑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허와 암흑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도처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기 때 문이다. 육체적 죽음은 공간에 속한 육체와 시간에 대한 인 지를 소멸시키지만, 삶을 이루는 기반, 즉 세계와 존재 사이 에 이룩된 특수한 우정은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 우리에게 선물한 고통에 감사해 야 한다.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이성은 쓸모가 없다. 동 물, 그리고 동물로서의 인간이 저지르는 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동반한다. 그 병적인 감각에 익숙해지면서 타자 (他者)에게로 고통의 확대를 시도한다. 자신의 병적인 감각 을 제거, 혹은 축소시키기 위해 고통의 전반적인 확대를 계 획하는 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선별하고 시도하는 모든 활동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으로 이어지 고, 이는 곧 죽음의 감각을 일깨우는 필요조건이 되곤 한다. 그러나 동물과 동물로서의 인간은 고통 때문에 파괴되지 는 않는다. 내구성이 강해서도, 고통에 대한 면역력이 강화 되어서도 아니다. 고통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걸어가야 할 필수 과정이다. 절대로 사라질 리 없는 유일한 길이다. 그 끝 에 죽음이 있다.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완성하는 강력한 본성 인 것이다.
- 자녀가 태어남으로써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마침내 배우자의 본성 속에 가둬두었던 자신의 본성을 회복할 기회를 얻는다. 부부에게 자녀는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그들이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기회인 것이다.
두 개의 성격이 사랑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합일을 이루 었지만, 이 합일은 개인의 성격적 측면에서 봤을 땐 자기를 부정당하는 격렬한 통증이다.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혼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의 인격 속에서 각자 자신을 닮은 성격을 출몰시키는 것이다. 부부에서 부모가 된 두 사람의 투쟁이 이렇게 시작된다. 자녀의 인격 에서 배우자보다 자신의 성격적 특성을 더욱 확대하려는 욕 망은 사랑 때문에 자신이 포기했던 개성의 연속성을 보장받 으려는 일종의 보상심리다.
부모가 된 부부 관점에서 자녀란, 눈에 보이지 않던 그들 의 사랑이 사물화되어 나타난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증거인 동시에 상대방에게 귀속된 자신의 본성을 자녀에게 주입해 자녀를 확대된 자신의 일부로 편성하려는 욕망의 도구이다. 자녀를 통해 두 사람은 사랑의 통일된 결과물을 얻어내고, 또한 개인으로서는 하나였던 자신이 둘로 증가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인데, 문제는 자녀 또한 부모와 마찬가지로 하나 의 개성이므로 부모의 속성을 물려받았다고는 해도 자녀가 인식하는 자녀의 본질은 부모의 본성에서 파생된 결과물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 있다. 자녀에게 자녀 자신은 부모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제1의 본성, 부모라는 존재 와 상관없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단 하나로 본인을 인식해버 린다. 부모와 자녀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 부모는 자녀를 개인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자녀의 속성이 자기 안에 갇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의 결과물이며, 자신이 사랑에 빠진 거룩한 대가로서 주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녀 또한 타인과 마찬가지로 나와 구별되는 하나의 개 인임을 인정하는 부모는 매우 드물다. 자녀를 개인으로 인정 해주는 것이 자녀를 향한 애정이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부 모도 많다. 자녀를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녀도 그에 대한 상호반응으로 부모를 개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부모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개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인식해버린다.
부모에겐 개성도 없고, 감정도 없고, 오직 나를 위해 일생 을 내 노예처럼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주는 하나의 물건으로 부모를 취급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이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됐음을 상기한다 면, 사랑이야말로 한 사람의 일생을 추락시키는 가장 근원적 인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젊은 시절 빈곤한 자를 짓밟고, 옆자리의 동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며 눈에 보이는 모든 지위와 재물을 손에 움켜쥐려던 거대한 욕망은 나이와 더불어 세상에 초연해진다. 그가 살아온 시간에 실망하게 된다.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오는 데 필요했던 분노와 시기와 잔인이, 실은 나를 기만한 하찮은 사건들에 불과했음을 고백 하게 된다. 가진 자에게도, 다스리는 자에게도 인생은 미궁 이며, 장수는 징계다. 삶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단 하나의 공평이다.
- 몇 대씩 장수하는 집안이 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자신도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후에도 홀로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인격을 모욕하고 저주하며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오히려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죽음에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 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열거하자면 골동품 가게의 진열 대에 올려진 먼지 쌓인 상품이다. 나름대로 이야깃거리가 있고, 추억이 있고, 놀랄만한 반전과 위험을 헤쳐온 생생한 목격담이 가득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겨움밖에 남는 게 없는 싸구려 동화책이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 자신의 이야기도 다 들어줄 필 요가 없다. 그의 할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이 그의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이며, 곧 그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다. 같은 이야 기를 주인공 이름만 바꿔가며 떠들어대는 소리꾼의 레퍼토 리와 비슷하다. 1회 상영으로 족한 연극이 철마다 반복된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겹다 못해 나중에는 미쳐버릴 것 같 다. 막이 올라가고 주연배우가 등장해 첫 대사만 읊조려도 연극의 결말이 보인다.

- 행복은 수단을 통해 달성되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향해 의지의 실천을 했을 때 길의 중간에서 우연찮게 얻은 물 한모금 같은 것이다. 깃발이 꽂혀 있는 종점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그 깃 발을 손에 넣기 위해 어디선가,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실천하 고 있다면, 그의 삶은 진정한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게 될 것 이다.

- 내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뭔가를 얻기보다는 뭔가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것이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난하지 않 겠다는 생각을 한다. 건강해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병에 걸리 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즐겁게 놀기보다는 욕을 먹거나 비 난받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다분히 현실적인 생활수칙이다. 이 수칙들을 지킨다면 작지만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머릿속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면 이 수칙들을 좀 더 쉽게 지킬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속담 중에 '더 좋은 일은 정말 좋아하는 일의 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 인생은 불행해지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 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가장 현명 한 선택이다. 그 선택이 지혜의 시작이다. 인생의 지혜란 어 떤 일을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고, 크게 기 대하지도 않는 중용의 미덕이다. 크게 실패해도 크게 실망하 지는 않는다. 크게 성공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인생이 라는 게, 사실 크게 휘둘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이렇듯 위선의 함정만 잘 피해 나가도 이른 나이에 삶을 통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대로 된 인생이 무 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편하게 살고 싶다면 일찌감 치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리는 것이 좋다. 화려할수록 위험하 다. 세상은 무대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건 겉모습에 불과하 다. 연극이 끝나면 그 화려한 무대는 순식간에 철거되어 텅 빈 창고가 될 것이다.
- 사교성이란 지성과 반비례한다. 그 사람이 매우 비사교 적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면 그는 위대한 특성을 지닌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고독으로 두 가 지 이점을 얻는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 함께할 시간을 얻고, 둘째로는 타인과 함께하지 않을 자유를 얻는다. 교제에는 많 은 강제와 고충, 위험이 따른다. 인간의 불행 중 상당수는 혼 자 있을 수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사교성은 도덕적으로 떨 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거나 불합리한 사람과 접촉하게 만 드는 성격이다. 위험하면서도 해롭다. 비사교적이라는 것은 사교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므 로 그 자체만으로 큰 행복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뇌는 교 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건강 다음으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마음의 평정 이 사교 때문에 위험해진다. 고독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 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 듯 사람과의 만남을 자제하면 영혼이 건강해진다. 문제는 인 간이 고독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혼자가 아니었다.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고,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의 소유물로 탄생했다. 어쩌면 고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경험과 고뇌의 결과로 만들어진 관 념일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해서 무엇을 얻겠 는가.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자신의 본성에 깃든 가장 저급하고 비열한 부분, 즉 일상적이고 비속하며 천박한 부분을 매 개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의 가 치관과 동질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에 도 달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의 정신 수준을 가장 어리석은 자에 게 맞춰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타인의 높은 수준에 맞춰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장 낮은 수준에 맞춰 나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된다. 공동체를 존속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저급한 인격을 고상한 인격으 로 교육하기보다는 고상한 인격이 저급한 인격을 흉내 내게 만드는 것이다.
- 불행을 혼자 감당하려는 것보다 무의미한 만용은 없다. 당신 곁에서 당신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당신의 잘못에 대해 함께 용서를 구하려는 친구를 가져라. 가혹한 운명과 매정한 대중도 두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지는 못한다. 성공과 행복뿐 아니라 불행과 절망도 함께 나눴을 때 그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 인생의 불행은 우리의 두 팔로 받들기에는 너 무나 무겁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친구에게 도움을 요 청하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 친구의 호의를 이용하는 것은 우정이 아니다.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해 친구의 호 의를 소중히 간직해둔다. 사소한 일에 친구의 호의를 남발한 다면 친구의 호의는 점점 더 퇴색할 수밖에 없다.
-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려면 적어도 마흔 살은 되어야 한다. 정신적으로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더라도 나이의 성숙과 경험의 결실만 있으면 인간으로서 과거의 자신보다 조금은 나아지기 시작한다. 자연스러운 본성에 의해 사람은 마흔 살 이 넘어가면 사람을 싫어하는 성향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 한다. 산 너머 반대편 기슭에 있는 죽음은 산을 오를 때는 보 이지 않는다.
청년기에 명랑하고 삶의 의욕에 차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산의 정상을 넘어서면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죽음이 실제로 보이기 시작한다. 삶의 활기가 떨어 지기 시작하고, 의욕도 감퇴해 젊은 날의 오만함이 물러가고 우울한 근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하루하루가 교수대로 한 발짝씩 끌려가는 범죄자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 인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중요하지 않은 일이 점점 더 늘어난 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 자꾸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처음에는 중요했던 일들이 점차 중요하지 않게 변해간다. 시간이 흘러 가지만, 흔적이 남지 않는다.
- 생명은 서른여섯 살까지는 시간의 이자로 살아가고, 서른여섯 이후부터는 시간 그 자체를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 이다. 그래서 젊었을 땐 적자가 발생해도 미미해 보인다. 어 차피 이자일 뿐이므로 지출이 과해도 걱정되지 않는다. 그러 나 시간이 베푼 이자가 중단되고 원금을 사용하는 때가 오면 사라진 시간의 이자가 아쉽게 다가오는 것이다. 결국, 나이 가 들수록 시간이라는 생명의 원금이 계속해서 빠져나간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젊은 시절보다 더욱 욕심을 내는 것은 시간을 상실했다는, 생명이라는 원금이 얼마 안 남았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지옥이라 부르는 그곳이 지옥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지옥은 '지옥의 예감'이다. 우리는 단지 지옥을 예감하는 것뿐이다. 그 안에 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상상해 보는 것이 고작이다.
우리는 지옥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곳이라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모든 희망이 단절되었다는 오해, 구원으 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지옥을 두려운 곳으로 만들었 다. 하지만 처음부터 희망은 없고, 구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는 자명한 진리를 깨달은 자라면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견뎌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너의 모든 지성, 너의 모든 사고의 능력이 너를 구원해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너는 다 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너를 상실하게 된다. 너의 삶은 머잖 아 무너지게 된다. 너의 소유라고 믿었던 인생과 함께 너도 무너지게 된다. 너는 심연을 바라보고 있다. 부들부들 떨면 서 심연을 바라보고 있다. 너는 분명 두려워하고 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빛이다.
-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빛이 없다. 그 때문에 너는 두려워하고 있다. 단 몇 분간 숨을 쉬지 못한 것만으로도 너는 죽음 에 도달한다. 죽음은 그처럼 하찮은 현상이다. 고작 그런 이 유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너의 자존심이 부 끄럽지 않은가? 너에 대한 망상과 허영들이 증오스럽지 않은 가?
이런 것들은 너를 지탱해주지 못한다. 단 몇 분간 숨을 쉬 지 못하면 너는 죽는다. 그것이 너의 실체다. 너에게는 그 몇 분이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니, 지옥에서의 고통이 이 와 같으리라고 생각될 것이다.
너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또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없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가질 수 없다는 진실을 망각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몇 분 만에 삶과 죽음으로 나뉘는 이 운명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 독서는 나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자극이다. 자극만 받고 이를 표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자극에 무뎌진다. 이는 독서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책을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 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다. 기독교의 신조차 성경 이라는 책의 구조를 빌어 말씀을 보관하실 정도다. 그런 책 을 사람이 이길 수는 없다. 게으른 성직자들은 성경만 볼 뿐, 성경에서 받은 자극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래서 육신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채 교리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 것이다.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지하 게 노력해도 인간의 입술에서 진실만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거짓의 관습은 벌써 오래전부터 나의 삶을 지배해왔다. 혼자만의 독백과 잠자리에서의 짧은 기도마저 도 거짓이 지배하고 있다. 나의 은밀한 곳까지 거짓이 강물 처럼 범람하고 있다.
-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기록된 역사의 대부분은 전쟁과 반란, 폭압과 갈등이다. 평화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 반 란과 반란 사이에, 독재와 혁명 사이에 잠시 찾아오는 우연 한 휴식과 같았다. 연극의 막이 내리고 다음 무대가 준비되 는 동안 어릿광대가 보여주는 짧은 막간극에 불과했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세계가 평화로웠다면 각국의 언어가 해석된 사진들에 '평화'라는 단 어는 실리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세계의 축소판인 개인의 삶 또한 끝없는 투쟁이다. 빈곤과 권태와의 투쟁, 질병과 살인과의 투쟁, 무기력과 교만과 의 투쟁, 이웃과 국가와의 투쟁이다. 인간은 곳곳에서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길가에 떨어 진 돌멩이를 장애물이라는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는 지적 능 력을 갖고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삶의 활동 반경에서 쉬지 않고 적을 발 견하고, 적을 상정하고, 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항한다. 마 찬가지로 그들에게 적이 되고자 욕망을 분출한다. 인생은 대 상과의 휴전 없는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승리자는 죽음뿐이다. 인간은 그저 무기를 든 채 죽어가는 것이 고작이다.
- 인생은 옷감과 같아서 처음에는 그 위에 수 놓인 무늬를 보고 가격을 흥정하지만, 막상 입고 다니다 보면 내 몸에 맞 는 옷인지가 더 중요하다. 내 몸에 맞지 않는 화려한 무늬의 겉옷은 비싼 값을 주고 산만큼 쉽게 내다 버리지는 못하는 대신 서랍에 넣고 보관만 할 뿐이다. 마치 이 시대의 훌륭한 교육의 수혜자들이 그들 자신의 생애에 별다른 발전과 만족 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비록 바늘 자국과 꿰맨 흔적이 도드라지더라도 그것이야 말로 살아온 증거가 된다. 옷감의 매듭이 자꾸 풀린다는 것 은 그만큼 자주 입고 뭔가를 실천했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 곱게 개어놓은 비싼 코트가 눈보라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교육은 우리를 가난한 신분에서 구원해줄 수는 있어 도 가난이라는 모순을 우리 삶에서 영원히 추방해내지는 못 하는 것이다.
- 현실에서 인간이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문자이며, 음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어법이 축소된 단어 몇개가 고작이다.
문자와 단어 몇 개로 과연 내 영혼이 진실한지를 남에게 확인시켜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다만 문자와 말이라 는 형식에 나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만 담아낼 뿐이 다. 이것은 흙장난과 비슷하다. 흙으로 빵을 만들고 소꿉놀 이를 하는 것과 글을 쓰고 연설을 하는 것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 이것은 아주 중대한 원칙이다.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기대해봐야 소용없다. 불행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 신의 태만이나 무모함, 불성실을 후회하기에도 늦었다. 불행 은 그 자체로 징계다. 불행이 이미 지나갔는데 자기 징계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비극이 된다. 명백히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미 화할 필요는 없다. 깨끗이 인정하고 징계를 받고 우연히 생 긴 비극으로 인생의 페이지에 적어둔 뒤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 그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지 않고는 진리의 골짜기에서 길을 찾지 못한다. 그대의 마음이 추악한 이기심에 병들 어 절망을 토해내지 않는 한, 그대의 영혼은 빛을 알지 못한 다.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 청춘은 인생의 지혜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삶이라는 바다 위를 언제까지나 외로이 떠돌게 될 것이다. 고뇌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청춘 은 청춘이 아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그대의 오늘은 최악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 도 모른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의 청춘은 내일을 준비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나그네의 길임을 그대는 알고 있기때문이다. 지상에서는 그대의 곤한 육신을 편히 쉬게 해줄 수 있는 안식의 땅이 없음을 그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안과 안식은 그대에게서 삶의 의지를 빼앗는 적이다. 그대의 삶이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 때 그대의 삶은 사육자의 의지를 따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의 삶이 거대한 우리가 됨을 명심하라.
- 노약자와 병자를 대신해 타인이 감당해야 할 노동의 몫을 맡아주는 것이라면 모를까 편파적인 위계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문의 문장을 앞세워 그가 감당해야 할 노동의 몫 을 힘없고 가난하고 병든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은 인류의 보 편적 윤리 잣대로 판단했을 때 중범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회구성원에게 일률적으로 노동의 양이 분배되지 않는 사 회는 노예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세금과 의무라는 명분으로 다수 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노동의 결과물을 앉아서 가져가는 유 럽 각국은 정치적으로 진보했다고 자신하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여전히 전근대적인 탄압을 일삼는 노예제 국가다. 이들 국가에는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그들의 우수성을 증 명하는 사회적 성취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 많다. 그리고 한 편에서는 그들의 착취에 순순히 응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 며 국가의 존속에 필요한 행위라고 믿는 다수가 존재한다. 더럽고 부끄러운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도 수치는 아니 다. 인간의 수치는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사람들 앞에서 거 들먹거리는 저 뻔뻔스러운 부자들의 삶이다. 부자는 호화로운 저택과 마차, 값비싼 음식 재료들로 우리를 속이려 든다.
이렇게라도 자신들을 포장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의 경멸 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의 이 같은 자기 기만은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폐단 중 하나인데, 이보다 더 세상을 암울하게 만드는 폐단이 있 다. 가난한 자들의 질투다. 부자를 비난하는 표정 뒤에서 자 신보다 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착취하려는 가난한 민중 의 집단폭력은 공동체의 존립을 뒤흔드는 위협이 될 것이다.
- 아픔을 모르는 기쁨은 존재하지 않는다. 패배와 좌절 없이 행복은 우리를 방문하지 않는다. 시련의 눈물 없이 웃음 에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다. 아픔을 통해 배우지 않은 모든 것이 거짓이다. 적어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그러하다. 그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 아픔이다.
너는 이제 아픔으로 인하여 남보다 더 성숙해지리라. 나 무는 빗물을 마시고 자라며, 인간은 자기가 흘린 눈물로 갈증 을 해소한다. 후회하지 말고 눈물을 거둬라. 네가 스스로 진 실을 선택하게 될 때까지 씨앗을 뿌리고 삶의 밭을 일궈라.
- 항구를 출발한 배는 필연적으로 파도를 거슬러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태어남은 동요를 수반할 수밖에 없 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인생이 아니다. 의심이 가지 않는다 면 신앙이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젊은 청년들이 출발선을 떠나보 기도 전에 인생을 포기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일찍 주위를 둘 러봤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주인공이 자신임 에도 이 무대에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인생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현상은 오직 인생뿐이다. 우리가 현재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음을 의식한다는 것, 그리 고 우리가 존재하지 못했던 먼 옛날에 감사하고, 우리가 존 재할 수 없는 먼 훗날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 이는 육체의 수 수께끼 같은 현상, 즉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신경 병이나 뇌전증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고민해서는 곤란하 다. 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인생 과 맺은 젊은 날의 약속을 내가 먼저 파기하지 않는 한, 우리 의 인생은 나와의 계약을 어기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인 생이 베푸는 절망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를 의심하지 않 는다면 인생도 그다지 불가사의한 현상은 아니다, 그다지 불 행할 것도, 불편할 것도 없다.

- 삶의 지혜를 구하고 싶다면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한다. 내 안에서 신의 자리부터 없애야 한다. 향락과 풍요와 건강을 탐하기보다는 차라리 덜 고통스러워지기를 소망 해야 한다.

- 동물원과 식물원과 국가사회가 먹이 공급에 열중하는 이유는 본능을 억제시키기 위해서다. 들판을 노니는 사슴을 사 냥하기 위해 맹수에게 날카로운 어금니와 발톱이 주어졌고, 거친 파도에 밀려 해안으로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돌고래의 힘줄은 지느러미가 되었고, 초식동물의 혓바닥에 휘감기지 않기 위해 장미에게는 가시가 주어졌다.
그리고 고독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에게 니힐 (nihil), 즉 허무가 주어졌다.
생의 허무를 모르는 인간은, 생활에서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인간은 모두 길들여진 타인이다. 그 자신에게 그의 현 재는 그의 본성과 대립하는 타인이다. 그가 '먹이'에 집착하 면 집착할수록, 먹이라는 환경에 안도하며 안주할수록 그는 스스로에게 영구적 타인으로 남는다.
국가는 자신을 위협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을 길들 이기 위해 빵을 던져주고 있다. 그 빵을 먹이로 나날이 성장 하는 것은 내 안의 타인이다. 그는 나의 이름으로 가족 곁에 머물고, 나의 얼굴로 거리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의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나의 입술로 당나귀처럼 빵 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어느새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쯤 되면 사회는 하루에 던져주는 빵의 개수를 줄이면서 민중이 허기진 배를 느낄세라 채찍질을 가한다. 아픔으로 공복을 잊 게 해주는 것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민중이 된 타인은 고 독보다 아픔을 선택하고, 사회는 형벌의 채찍 후에 몇 개의 마른 빵으로 민중을 달랜다. 6일간의 채찍질과 일요일, 단 하 루의 빵이 우리가 고독을 두려워한 결과였다. 자유를 결핍보 다 두려워한 대가였다.
- 독창적인 인생은 독창적인 사상을 통해 실현된다. 독창적인 사상은 의지로 통일된 체계에서 태어난다. 스스로 한 권의 위대한 철학책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대수의 공식이 아니다. 인생은 시와 같은 예술의 한 갈래다. 직관의 세계에서 누구도 흉내 못 낼 아름답고 독 창적인 시 한 편이 탄생하듯 직관의 파악으로부터 인생은 시 작되는 법이다. 그렇지 못한 시간들은 삶이 아니다.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도살장의 울부짖는 발걸음일 뿐이다.

- 사람이 그 일생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첫째로 그릇에 내용을 담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로 내용을 준비하되 그릇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며, 셋째로 그릇에 맞는 내용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넷째로 내용에 맞는 그릇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지와 신체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다. 의지가 있기에 신 체라는 표상의 출현이 가능했고, 신체라는 표상을 벗어나서는 의지의 확인은 불가능하다. 우주 만물의 탄생이 이같은 질서 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만일 조물주가 존재한다면 그 또 한 우리와 같은 질서로 탄생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가지 차 이점이 있다면 그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보다 확고하고, 자율 적이며, 모든 의지의 의지가 될 만큼 순수했다는 것뿐이다.
-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도 거대한 의지이며, 여타 종교에서 말하는 천지를 주관하는 절대자들도 동일한 의미에 서 의지다. 이런 의지가 담긴 그릇이 우주 만물이다.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삶이 서로 다른 듯 보여도 결론을 말하자면 우주의 섭리가 세계에서 표출되고, 인간의 삶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새롭게 형성되어 하나의 표상을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며, 독립된 세계이며, 유일한 표상이 된다. 인간이 스스로를 영 장)으로 정의한 주체가 다름 아닌 인간의 '의지'였던 것 이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2) 2024.06.08
남자의 후반생  (1) 2024.06.07
나를 깨우는 일상철학  (0) 2024.05.27
지성만이 무기다  (3) 2024.04.24
안데르센 잔혹한 동화속 문장의 기억  (1) 2024.04.20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