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명한 경제사학자 그레고리 클라크는 '맬서스 함정(Malthus Trap)' 에 빠져 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비위생, 폭력, 흉년과 같이 인구를 감소시키는 요인이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 "미덕"이었고, 청결, 평 화, 풍년과 같이 인구를 증가시키는 요인이 생활수준을 낮추는 "해 악"이었음을 지적하였다. 그의 지적처럼 흑사병 유행으로 인한 급 격한 인구감소는 토지를 포함한 자원과 인구 간의 균형을 호의적으 로 바꾸어놓았고, 이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 다. 영국 농업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흑사병 유행 직전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약 두 배로 증가하였다.' 급감했던 인구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서, 유럽 인구가 1400년 5,200만 명에서 1500년 6,700만 명 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흑사병이 초래한 인구감소의 혜택을 본 것은 역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 드넓은 초원을 차지하게 된 양들의 영양상태가 좋 아졌고, 이는 당시 가장 선호하는 모직물로 부상한 소모사(梳毛絲) 생산에 적합한 장모종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경제사 학자 로버트 앨런(Robert Allen)에 따르면, 흑사병 유행이 가져온 양 모의 질 변화는 영국 모직물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니 라 18세기 영국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이 발생한 원인으로 작용하 였다.8
16세기 이후 모직물 수출의 폭발적인 확대에 힘입어 런던 같은 대도시가 성장했고, 이는 농업부문의 생산성 제고와 도시 내 분업 의 세밀화를 통해 영국의 임금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또한 도시화 가 가져온 연료에 대한 수요 증가는 영국 석탄산업을 성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산업혁명 직전 무렵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임금이 높고 에너지(석탄) 가격이 낮은 나라가 되었고, 이 는 비싼 노동을 절약할 수 있는 산업혁명기 기술혁신의 배경이 되 었다. 이렇게 볼 때, 1800년 무렵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로 부상한 영국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350년 전 대역병으로 사망한 수 많은 조상의 음덕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 흑사병 사례는 역병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감소가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개인적 고통을 초래했을지언정, 한 사회의 붕괴나 장 기적 쇠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 는 무너졌지만 그 폐허 위에 근대국가들이 태동했고, 이는 유럽의 부흥과 팽창의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를 볼 때, 14세기 흑사병 때와 유사한 규모의 인구감소가 발생하리라는 예측만으로 미래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700년 전의 역사적 사례를 21세기 한국의 현실에 그대로 적 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낙관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인구변화와 그 것이 한국 사회와 경제에 가져올 충격을 좀 더 상세하게 이해할 필 요가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인구변화의 양상은 14세기 유럽 의 흑사병과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가? 현재 시점에서 전망 되는 장래 인구변화는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놓을까? 과연 인 구위기는 국가의 쇠락과 붕괴로 이어질 만한 재앙이 될 수 있을까?

- 한국에서 인구 고령화가 가져올 미래의 변화를 전망할 때, 나이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나이 효과(age effect)뿐만 아니라 태어난 시기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코호트 효과 (cohort effect)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미래의 고령자도 현재의 고 령자와 같으리라는 통상적인 가정을 대입하면 인구 고령화의 부정 적인 영향이 과대평가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나이 들면서 생산성 이 낮아지는 나이 효과 때문에 고령층 노동인구 비중이 높아지면서 생산성이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고령자가 현재의 고령자에 비해 더 건강하고 교육수준이 높 아지는 한국 특유의 인구특성 변화로 말미암아 생산성이 개선되는 현상도 나타날 것이다.

- 이미 다가온 인구변화의 미래, 노동 수급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본격적인 총인구변화 감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3장에서 밝혔 듯 총량적인 노동력도 앞으로 15~20년간은 눈에 띄게 줄어들지 않 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장의 결과는 인구변화와 산업·기술 변화의 영향이 중첩되면서 아주 가까운 장래에 특정한 산업 · 직종 · 유형의 노동력이 큰 규모로 부족해지리라는 전망을 드러낸다. 조만간 출생 아 수 40만 명대의 출생 코호트가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한다 는 사실을 고려할 때, 7년 후인 2031년에 특정 산업에서 20만~30만 명대의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는 상황은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 니다.
- 실제로 일부 업종 혹은 직종의 노동 수급 불균형 문제는 이미 시 작되어 나날이 강하게 체감할 수 있다. 장래에 노동력 부족 규모 가 커질 것으로 전망되는 사회복지서비스업의 요양보호사나 간병 인 같은 직종에서는 이미 사람을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요양보호 사의 도움을 받고 계신 노모를 둔 필자는 이미 이 부문의 구인난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 2031년까지 약 12만 명의 노동력 부족이 추가로 발생하리라 예상되는 육상운송업의 구인난도 이미 진행 중이다. 필자가 이용할 수밖에 없는 동네 마을버스는 꽤 오래전부터 운전기 사 모집 안내문을 걸고 다녔지만 끝내 사람을 구하지 못해 운행 편 수를 줄이고 있다. 음식점 및 주점업과 숙박업 등 일부 서비스업의 구인난은 최근 정부가 이 부문에 외국인력 도입을 확대하는 조치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여러 부문의 일자리에서 구인난이 점차 심각해지는 동시 에 노동시장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 려운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앞서 수행한 부문별 노동 수급 변화 분석 결과는 상당수 산업 및 직업군에서 노동의 과잉 공급이 발생 할 것이고, 이 부문의 인력이 추가 노동력이 필요한 다른 부문으로 이동하지 못할 경우 실업자나 비자발적인 노동시장 비참가자로 남 을 것임을 보여준다. 일부 부문의 심각한 구인난 속에서도 많은 청 년이 오랜 기간 취업준비생으로 보내는 현실은 이와 같은 노동시장 미스매치의 단면을 드러낸다.
앞으로 젊은 인력이 빠르게 감소하고 노동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부문 및 유형 간 노동 수급 불균형은 더 넓게 확산하고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먼 훗날 다가 올 문제보다는 당면한 문제를 우선시하고 더 많은 정책 역량을 기 울이는 접근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지금은 인구변화가 노동시장에 가져올 충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총량적인 노동력 감 소로 발생하는 문제보다 부문 및 유형 간에 발생하는 노동 수급 불 균형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건강 개선에 힘입어 미래의 고령자는 더 오래, 더 생산적으로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 악화는 중년을 넘긴 노동자가 일을 그만두 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13 한국고령화패널자료에 보고된 퇴직 사 유를 분석해보면 50~69세 퇴직자 가운데 거의 4분의 1이 건강이 악화되어 일자리를 떠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년을 사유로 든 퇴직자보다 더 높은 비율이다. 각종 질환과 건강 악화는 중고령자 의 고용뿐만 아니라 임금에 반영된 생산성을 낮추는 요인이기도 하 다. 14 그러므로 건강이 더 나아지는 미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용인 구에 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고 생산성이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
- 미래 고령인구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변화는 교육수준의 개선 만이 아니다. 6장에서 언급했듯이 태아기와 아동기의 경제적 여건, 영양 섭취, 의료서비스 접근성, 생활환경 등은 생애에 걸친 건강과 인적자본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전쟁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생활수준이 개선되었으 므로 더 늦게 태어난 세대일수록 더 나은 여건에서 이 결정적인 시 기를 보냈을 것이다.

- 고학력·고숙련 인력이 정년이나 그 이전에 대거 직장을 떠나는 것은 임금체계와 직무구조의 경직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어떤 직원의 생산성이 임금수준과 같거나 더 높다면 고용주로서는 특정 나이가 지났다고 해서 그 직원을 강제로 퇴직시킬 이유가 없다. 그 런데 생산성이 떨어져도 이에 따라 임금을 낮출 수 없고 맡은 일을 잘하기 어렵게 되어도 직무를 바꾸기 어렵다면, 고용주는 합법적 기회가 생길 때 해당 직원을 내보내고자 할 것이다. 필자가 한국고 령화패널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임금이 특정 수준보다 높을수 록, 임금체계가 경직적일수록, 50세 이상 임금노동자의 퇴직 위험 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기업에서 정년제가 유지되는 주된 이유는 나이 든 직원이 늘어나면서 임금 부담이 커지고 인사 적체가 발생하기 때문으로 지적된다.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고학력·고숙련 인력의 다수가 다른 일 자리에 재취업하지 않고 일찍 은퇴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기업과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한 공식 부문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이다. 해고와 채용이 자유롭지 못하고 고용 방식과 조건이 획 일적인 여건 때문에, 기존 일자리를 떠난 장년인력은 자신에게 맞 는 적합한 일자리를 찾아서 재취업하기 어렵다. 아예 눈높이를 낮 추어서 이전 일자리보다 질이 낮은 직장을 찾는다면 재취업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어느 정도 은퇴를 위한 재정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 파워 시니어는 일을 그만두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
- 이와 반대로 저학력 · 저숙련 인력이 상대적으로 많이 고용된 중 소기업과 자영업 부문에서는 강제적인 퇴직 압력이 낮은 편이다. 소규모 사업체의 다수는 정년제가 없거나 있더라도 실질적인 영향 이 없는 경우가 많다. 정년이 60세로 연장된 후에도 중소기업 장년 노동자의 주된 퇴직 사유는 정년퇴직이 아닌 건강 악화와 직장 폐 업 등이다. 비공식 부문 일자리의 임금은 노동시장 수급 사정을 반 영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재취업을 희망하는 고령자에 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다. 재정적인 면에서 은퇴 준비가 부족한 다 수의 장년층은 임금이 낮고 노동조건이 나쁜 일자리라도 재취업하 여 계속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필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지난 30년간 한국의 산업구 조는 고령자에 대한 상대적 수요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 이와 같은 수요 감소에도 불구하고 고령인구 고용이 높아지는 것은 이들의 생계형 노동 공급이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지난 수십 년간 자녀 부양을 포함한 전통적인 노후보장 방식은 급속하게 붕괴 하고 있지만, 아직 공적연금을 받지 못하는 고령자가 적지 않고 설 사 받더라도 그 수령액이 "용돈 연금"으로 불릴 정도로 낮은 실정 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점점 더 많은 고령자가 생계를 위해 늦은 나이까지 일을 놓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있다.
이와 같은 고령 노동시장의 사정 때문에 한국에서는 고학력·고 숙련 고령인력에 비해 저학력 · 저숙련 고령인력이 더 늦게 은퇴하 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현재 한국의 고령 취업자 가운데는 건강 이 나쁘고 생산성이 낮은데도 생계를 위해 임금이 낮고 질이 낮은 일자리에서 노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비중이 높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높은 고용률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고령인력이 충분하게, 효과적으로 활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 원론적으로 볼 때, 특정 나이에 이르렀다고 일자리를 떠나야 하 는 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자정이 지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 렐라처럼 예순 혹은 예순다섯이 되는 순간 갑자기 어떤 사람의 생 산성이 극적으로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나이에 따른 건강과 생산성의 변화가 다르므로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은퇴 나이를 강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나이에 따른 차별로 비칠 소지도 있다. 나이에 따른 차별 문제 때문에 미국 같은 나라는 일찍이 정년 제도를 폐지했다. 적어도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 정년 연장 을 넘어서 아예 정년 없이 모든 사람이 저마다 힘과 능력이 닿는 한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는 이상적인 현실은 고용, 업무, 임금 결정이 노동인력의 생산성을 반영하여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연한 노동시장을 전제로 한다. 나이 들어서 생산성이 떨어 져도 젊은 시절 맡았던 일을 유지하면서 높은 임금을 받는 여건에 서는 정년 폐지의 부담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렵다. 그런데 현재 한 국 노동시장의 상황은 이러한 전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대기 업과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한 공식적인 부문의 임금제도와 직무 구조가 상당히 경직적이다. 임금은 직무의 내용보다 연차나 나이에 따라 결정되고 직무 조정도 유연하지 못하다. 또한 노동시장의 이 중구조도 심해서 정년 연장이 고령자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부문과 유형에 따라 매우 이질적이다. 다시 말해 어떤 고령자는 정년 연장 의 혜택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정년 연장이 인구변화 대 응의 좋은 해법인지를 따지는 작업은, 누구나 원하는 때까지 일하 게 하자는 취지의 타당성을 따지기보다 현재 한국 노동시장 여건에 서 이 방안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를 엄밀하게 진단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 나이를 과도하게 따지는 문화와 관행의 폐해는 적지 않다. 말, 태 도, 행동, 옷차림 등이 제 나이에 어울리는지 자기검열을 하고 타 인을 의식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과 선택을 제약한다. 나 이를 뛰어넘어 다양하고 풍성한 관계를 맺기도 어렵다. 나이에 대 한 과도한 민감성이 초래하는 비용은 개인을 넘어선다. 나이에 따 른 위계를 중히 여기는 사회에서는 합리적 기준에 따라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분하기도 어렵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능력이 뛰 어난 사람이 책임 있는 자리를 맡지 못하기도 하고, 후배가 더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로 선배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도 벌어진다. 이러한 사회에서 노동시장의 효율성, 기업 혹은 정부의 생산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나이를 근간으로 한 경직적인 노동시장의 폐해는 모든 세대의 몫이다.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현재를 희생해야 하는 청년은 직접적인 피해자이다. 과거 평생직장이 보장되고 나이 든 선배의 오늘 이 신입 직원의 미래였던 시대에는 젊어서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일 하고 나이 들어서 편안한 자리와 높은 급여로 보상받는 '암묵적 계 약'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일자리의 불확실성과 노동시장 이동성이 높아진 오늘날에는 연공형 직무·임금 구조가 젊은 직원에 게 일방적으로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근래 여 러 기업에서 인사와 성과에 따른 보상을 둘러싸고 나이 든 직원과 젊은 직원 간 갈등이 커지는 현상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나이를 따지는 제도와 문화의 폐해는 고령자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연공형 직무·임금 구조는 고령인력이 자신이 근무하 던 직장에 남아 계속 일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필 자와 이에스더 박사의 공동연구 결과는 임금구조가 경직된 사업체 일수록 나이 든 직원의 퇴직 위험률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5 일은 적게 하면서 급여는 많이 받고 실력은 부족하면서 상사 노릇 은 톡톡히 하는 시니어 직원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고령자에 대한 연령 차별이 발생하는 배경이다. 나이 혹은 기수에 따른 엄격한 서 열, 선배는 후배보다 더 나아야 하고 더 높아야 한다는 인식은, 역설 적으로 더 이른 나이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 경제와 인구의 변화는 국제 인구이동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대 량 이민의 송출국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20세기 후반부터 외국인 노 동에 의존했고, 유럽 이민자를 받아들였던 중남미 국가들은 이민 송 출국으로 바뀌었다. 한국 역시 이민자를 내보내는 나라에서 받아 들이는 나라로 전환하고 있다. 1980년대 말부터 내국인 인력으로 채우기 어려운 일자리를 중심으로 외국인력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부터 그 규모가 빠르게 확대되었다. 2022년 말 현재 국 내 거주 외국인은 226만 명으로 총인구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외국인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산업과 지역도 생겨나고 있다. 외국인력 유입이 증가했는데도 북미나 유럽 국가와 비교할 때 한국은 여전히 '이민자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총인구 대 비 외국인 인구 비율은 2022년경의 호주(29.2%), 독일(15.9%), 영국 (14.3%), 미국(14.1%) 등 전통적인 이민 수용국의 외국인 인구 비율 에 비해 훨씬 낮다. 이제까지 한국의 외국인 정책은 기본적으로 내 국인 인력 부족을 일시적으로 채워줄 외국인력을 도입하고 일정 기 간이 지나면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입되는 외국인이 많아도 이전에 들어온 외국인이 나가면서 정주 외국인의 수와 비중 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낮다. 외국인 인구가 증가했지만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동질적 사회로서의 정체성 역시 여전히 강건하게 남아 있다. 이민자의 나라로 변모한 한국의 미래상은 아직 매우 낯설고 이를 구체적으로 그려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인구변화는 한국 사회가 단일민족의 동질적 사회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제 점점 더 많 은 사람이 외국인력 도입 외에는 인구변화의 충격을 완화할 마땅 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50년 안에 인구가 30%나 줄어 들고 노인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나라에서 인력 공백을 메 꾸기 위한 대량 이민 수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일까? 과연 외국인력 도입은 앞으로 한국 노동시장이 직면할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외국인력 정책을 어떻게 개 선해야 바람직할까?
- 단기적으로 볼 때, 여러 분야에서 발생하는 인력 부족을 '값싼 외 국인력' 도입으로 해소하는 방안은 매력적일 수 있다. 최근 일각에 서 제기되는 것처럼,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서비스 업종에 차등 적인 최저임금을 적용하여 외국인력을 대거 도입함으로써 이 부문 의 인력 부족을 해소하자는 주장은 비용을 줄이고자 하는 이용자와 재정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에 부합하는 정책이다. 그러 나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방안이다. 인력이 부족해지는 부문에서 외국인력 도입으로 저임금을 유지하려는 전 략은 내국인 노동 공급 기반을 무너뜨리고 중장기적으로 외국인력 유입을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설명했듯이 장래에 외국인력 도입이 중단된다면 해당 부문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인력 대란이 발생할 것이다.
대학 학부 경제 원론에서 배우는 대표적 교훈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인구변화가 노동시장에 일으킬 충격은 결국 다수 국민의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 것이다. 구인난에 직면한 기업은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해야 할 것이고, 공공서비스 가격이 높아지면서 정부의 재정 부담과 개인의 조세 부담이 커질 것이다. 인구 대응 정 책의 목표는 이러한 어려움을 최대한 완화하는 것이다. 외국인 정 책의 목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깨끗하게 없애면서 부작용도 없는 마법의 약은 없다. 외국인 정책을 포함한 인구변화 대응 정책을 수립할 때, 지금 당장 쉬운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아주 먼 훗날까지 지속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 해 현재의 고통과 비용을 감내하는 길을 선택하는 편이 더 현명할 것이다.

- 인구변화의 결과도 그 사회의 성격과 대응에 따라 다를 수 있다. 14세기 흑사병은 유럽 전역을 휩쓸며 3분의 1에 달하는 인구를 감 소시켰지만 그 사회경제적 결과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흑사병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감소가 서유럽 사회의 붕괴나 장기적 쇠퇴로 이어 지지는 않았음을 이미 1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인구가 급격하게 감 소하자 토지를 보유한 봉건영주에 비해 노동력을 보유한 농민의 교 섭력이 높아졌으며, 이는 결국 농노해방과 봉건제 폐지로 이어졌 다. 임금이 상승하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개선되면서 급감했던 인 구 역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중세 서유럽 봉건제는 무너졌지만 그 폐허 위에 근대국가들이 태동했고, 서유럽은 경제적·정치적 부흥과 팽창의 시대를 열었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흑사병 유행 이후 오히려 봉건제가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지역 영주들은 흑사병으로 촉발된 노동력 부족 과 수입 감소의 위기에 대응하여 오히려 농민의 부역을 늘리고 공동 지를 수탈했으며 노동력 확보를 위해 자유농민까지 예속화하여 토 지에 구속하였다. 동유럽 농노제는 19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이지역은 유럽의 부흥에 동참하지 못한 채 유럽의 변방으로 남았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랐을까? 한 가지 설명은 이동성의 차이 이다. 다른 장원이나 도시로의 이주 가능성은 인구감소기에 서유럽 농민의 교섭력을 높인 요인이었다. 반면 인구밀도가 낮고 도시가 덜 발달했던 동유럽 농민에게는 이동성이라는 위협 수단이 없었다. 다른 설명은 국지적 시장의 존재 여부이다. 가까운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서유럽 농민은 생산물을 직접 판매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국지적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던 동유럽에서는 원격지 무 역에 접근할 수 있었던 영주들이 그 기회를 독점하였다. 동유럽에 비해 서유럽 농민의 촌락 공동체가 더 강한 결속력과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차이점도 지적된다.
이처럼 인구변화가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그것이 불러올 장기 적 결과는 그 사회의 구조와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거센 파 도처럼 21세기 한국에 밀려드는 인구변화의 충격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장래의 인구변화로 한국의 노동시장에 심각 한 불균형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불균형의 정도와 이 로 말미암은 사회경제적 비용의 규모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미래 사회의 모습은 현재 의 정책적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생산적으 로 바뀌고,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 회로 변모할 수 있다면, 인구변화가 초래하는 노동력 감소와 부문 및 유형에 따른 노동 수급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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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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