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여러분이 '글쎄, 스타가 괜히 스타겠어? 정말로 최고니까 스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잠시 멈춰 서서 퓰리처상을 받은 시인 도널 드 저스티스(Donald Justice)가 한 말을 떠올려보자.
"몇몇 좋은 작가들이 세상에서 잊히는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 가능 한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여전히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명예의 법칙이 언제나 무작위로 작동한다는 사실 뿐이다. "
-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들,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에 있는 작가들, 카네기 홀(Carnegie Hall) 무대에 오른 음악가들이 실제로 재능이 있 는지 없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기회가 부족한 세상에서 소수의 작가, 학자, 예술가만을 반복해서 인정하면 다른 사 람들은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것은 경쟁도 아니다. 경쟁처럼 보이는 무한순환이다. 내부 잔치다. 사다리 걷어차기다. 글쓰기를 예로 들 면, 글로써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려는 작가의 순수한 열망을 가 로채 희소한 보상을 두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체제 속으로 던져버리 는 셈이다. 충분한 보상을 받는 사람들 일부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 다. 하지만 재능이 있어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 수로 많다.
- 물질적 성장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지위를 차 지해 더 우위에 서려는 쟁탈전이 벌어져 성장으로 인한 균형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쟁탈전은 부동산 시장처럼 큰돈이 드 는 분야에 대한 정책 정보 접근권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일반적인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 고급 학위나 비싼 자격증을 확보해 그와 같은 자격을 갖추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적 성장 (부재 포함)이 확대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의 문이 열리더라도 지 위는 늘 한정돼 있다. 모두가 들어갈 만큼 많은 문도 없다.
이런 양상은 사람들이 물질적 부를 위한 수단으로 지위 권력을 추구하거나, 지위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한다. 당연히 이는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프레드 허쉬가 지적했듯 부동산 가격이 높은 뉴욕이나 런던 같은 대도시에 서의 삶이 지위재가 되면서 그런 곳들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물질 적부를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이 일어난다. 교사, 예술가, 배관공 등 도시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외곽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일하거나 그 자리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하는 저마다의 투쟁을 강제당한다. 배관공들에게 이는 온라인 리뷰 별 다섯 개를 받기 위해 연중무휴 서비스를 제공하고 끊임없이 고객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교사와 예술가들에게는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종신 재직권을 얻고자 분투하고 일류 갤러리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 지하기 위한 인맥 구축에 온 힘을 쏟아야 함을 뜻할 수 있다.
- 가치에 대한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성공이 실제로는 운과 우연에 크 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암묵적으로든 명시적 으로든 정치, 경제, 스포츠,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위대한 재능을 지 닌 사람들이 지원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 의 성과가 '낙수 효과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꼭 경제적 효과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문화적 인식이 우리 마음속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우리가 위인의 등장을 바라는 까닭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같 은 작가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같은 예술가들의 위대한 재능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이런 위대한 사람들을 발굴해 지원하면 그들 의 노력으로 사회 전체가 더 위대해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 그런 것도 같다. 어떤 분야에서든 누군가 최고 중 최고, 아니 최고 중 몇 가지라도 이룬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그들의 발견, 발명, 업 적 덕분에 이득을 보지 않을까? 하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그런 체제 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훨씬 더 많 은 것을 앗아간다.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의 행성 간 개발 계획을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의 막대한 부를 이용해 인류에게 이익이 될 다 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역설했다. 현재 성장 속도로 볼 때 우리 행성 지구는 곧 생태적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2018년 제프 베이조 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다른 행성이나 위성을 식 민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2 이후에는 기후 변화 위기로부터 지 구를 구하겠다고 공언했고, 아마도 아마존(Amazon) 비즈니스 모델에 지장이 없는 한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33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그의 우주 탐사 계획은 자선 사업이라기보다는 위성, 관광, 광물 등 잠재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이른바 '우주 경제' 기회를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는 듯 보인다.
- 지금쯤이면 여러분도 더는 오해하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충분함' 은 '아무래도 괜찮음'과 동의어가 아니다. 충분함은 어떤 상황도 참 고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충분함은 인 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과 고통을 인정하는 데서 출 발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충분함은 차오름을 수반한다. 다 만 차올라 넘치면 충분함이라고 할 수 없다. 충분함을 철학적으로 사 유한 사상가들은 미국 작가이자 민권 운동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표현처럼 충분함이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충족해야 하는 개념이라고 이해한다. 충분함은 "어떤 유감이나 원한 없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과 동시에 "결코 불의를 일상으로 받아들이 지 않는 평등함"이다.
- 충분한 삶은 실패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런데도 충분하다는 사실 에 감사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나 모두의 평등과 존엄을 요구한다. 세상이 충분하므로 우리도 서로에게 충분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는 굴복이 아니다.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불만과 결핍으로 인 한 자기파괴를 방지하되 자신과 타인을 위한 더 나은 삶, 모두에게 의미와 접근과 활기가 충만한 세상을 새롭게 상상하라는 요청이다. 마땅히 우아하고 섬세해야 할 세상에서 우리 모두의 운명과 상호 의 존적 관계로 이어진 우리 존재가 누구인지 생각하라는 요청이다. 나 아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일상적 노동에서부터 우리를 편안한 안식처로 이끄는 일상적 친밀감에 이르기까지, 우리 세상의 온갖 가치가 위대함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하찮게 치부되고 있음을 인식하라는 요청이다.
- 충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위대해질 필요는 없다. 삶이 가치 있으려 면 뭔가에 능숙하고 탁월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사회는 우리가 충 분히 좋은 삶을 누릴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위대함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자신, 우리 관계, 우리 세계, 우리 지구를 훼손한다. 이 파괴적 인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고 해서 충분함이 위대함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함의 종착지는 위대함도 완벽함도 아니다. 그래서 충분함에는 끝이 없다. 충분함은 늘 여지가 있고 늘 차오르는 상태 다. 채우기만 하면 위대하고 완벽할 것 같은 그 여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태다. 충분한 삶을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부드럽게 포용하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면서 모두의 충분함을 헤아린다.
충분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는 진보의 동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모 두가 충분한 세상이 될 때까지 위대함의 이데올로기에서 떨어져 나 온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렇게 모 두가 충분한 세상을 달성하더라도 진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함을 포용할 것이기에 우리 세상은 영원토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충분함이다.
-앨런 와츠(Alan Watts)는 동양 철학과 서양 심리학을 융합 하고 대중화해 매우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교두보 역할을 한 철학자이며, 심오하고 복잡 한 생각을 명확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전달했다. 나는 대학 시절 그 의 책 <불안의 지혜(The Wisdom of Insecurity)》(1951)와 《선의 길(The Way of Zen)》 (1957)로 불교와 도교를 처음 접했고, 이후 내 삶에도 깊 은 영향을 미쳤다.
와츠에 따르면 우리의 이른바 자기계발을 위한 전략 대부분은 역 효과를 낳는다. 일테면 우리는 자꾸 불안해질 때 이를 극복하기 위 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달리 말해 부정을 긍정으로 제압 하고자 든다. 그러나 실제로는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인 경험이다. 반대로 부정적인 경험을 오롯이 받아들 이는 것이 긍정적 경험이다. 와츠는 우리가 불안을 밀어내지 않고 그 대로 포용할 때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지금도 이 말은 내 '고등학교 때 들었더라면 좋았을 말들 목록 맨 위에 있다). 그는 이를 '역 노력의 법칙(law of reversed effort)' 또는 '역효과 법칙(backwards law)' 이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이는 동양의 선(禪)이나 도(道) 사상 못지 않게 기독교적인 사고방식과도 맞닿아 있었다. 와츠는 신약성서 복 음서마다 등장하는 다음 구절을 인용해 이를 설명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
마크 맨슨은 애쓰지 말고 살라는 자신의 주장에 다음과 같이 투덜거리는 가상 독자의 목소리를 언급하고는 앨런 와츠의 역효과 법칙 과 연결한다.
"난 카마로(Camaro)를 사려고 돈을 모으고 있어. 굶어가며 해변용 몸을 만들고 있고, 비싼 복근 운동 기구도 샀어. 게다가 호숫가 큰 집 에서 살기를 꿈꿔왔어. 그런데 이런 것들에 신경을 끄라고 하면, 맙 소사, 그러면 난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잖아!"67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그런 것들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역효과 법칙의 '역효과'가 곧 신경 끄기의 역방향 작용이므로 원하는 것을 얻 으려면 반대로 하라는 것이다. 불안을 수용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두 려워도 바른말을 하면 신뢰를 얻으니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이 야기다. 와츠에게 역방향 법칙은 심리적 안정에 관한 것이었으나, 맨슨은 그 개념을 물질적 성공을 향한 우회 수단으로까지 확장한다.
"신경을 덜 쓸 때 오히려 능력을 발휘한 경험이 있을걸? 성공에 무 심한 사람이 실제로 성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68
물론 마크 맨슨의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 신경만 끄면 바라는 바를 성취하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독자들이 실패와 고통 을 받아들임(신경 끄기)으로써 그 부정적 경험을 극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 때로는 실패가 성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 다.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겠지만, 그 실패에 신경을 끄면 마침내 성 공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불교 철학 본연의 가르침은 이 와 조금 다르다. 우리 자신을 위한 참된 가치로서의 실패를 되새겨주 는 것이며, 다음번 성공을 위한 마음 다지기 수단이 아니라, 실패 역시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타고난 운명이고, 그 실패 자체가 좋은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임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 나나 여러분의 경험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벌어지는 모든 행태 에 비춰볼 때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고타마 싯 다르타가 옳았다. <불교는 왜 진실인가(Why Buddhism Is True)》(2017) 라는 흥미로운 책을 쓴 미국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는 불교 철학의 통찰이 어떻게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효과와 연결되는지 설명했다. 자연 선택의 목적이 우리 유전자를 다 음 세대에 전파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우 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에 도움이 되는 활동에서 쾌락을 얻어야 한다. 둘째, 그런 활동은 우리가 계속해서 실행하도록 더 큰 만족을 추구할 만큼 불만족스러워야 한다. 78 결국 우리의 생존은 끊임없이 만족을 추구하면서도 불만족스러운 데 달렸다. 자연 선택의 결과로 우리는 애초에 만족할 수 없음을 오롯이 인정하기보다 어리석게도 반복적인 쾌락 추구로 고통을 경험하는 존재가 됐다.
- 우리는 서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소모적이고 경쟁적인 관계 대신 서 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충 분한 부모, 자식, 친구, 연인이 되는 일도 분명히 쉽진 않지만, 적어 도 이 관계가 남들과 비교할 대상은 아님을 깨우칠 수 있다. 나는 비 로소 나와 가족, 친구, 동료, 제자들과의 관계가 내 인생에서 충분하 다고 여길 수 있었는데, 위대함을 향한 수많은 유혹에 온전히 저항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스스로 신체적·정신적 건강상태를 살피 고 번아웃에 빠질 만큼 나 자신을 혹사하지 않자 자연스럽게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관대해졌다. 내가 사랑한다 고 여기는 사람들의 단점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반대로 내 단점도 솔직히 인정하면서 모쪼록 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정직해지려고 결심했고 정직하게 행동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나는 평소보다 더 큰 배려가 필요한 순간을 인지하게 됐고, 그럴 때면 특별한 관심을 제공 하거나 요청했다. 나는 나 혼자서 내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그럴 때마다 무작정 도와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가 일치한다는 확실한 판단이 섰을 때만 이해관계를 생각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대함을 추구하고자 애쓰지 말고 모두에게 충분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서 의미와 가치를 찾자고 설득했다.
- 방금 나는 나 자신을 빗대어 위대함에서 초연해지는 방법과 그 결 과를 무척 간단하게 서술했는데, 쓰고 보니 뭔가 자신 없다는 불안감 이 엄습해온다. 내가 정말로 위대함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설마 내가 해탈의 경지에 오른 걸까? 부끄러워도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그렇지 않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러려고 애쓰다가 삶을 마감할 것 이다. 그걸 알면서도 노력할 테고 여러분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위대함은 불균형한 열망이 허우적거리는 춤이다. 이 춤을 추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소요된다. 불필요한 움직임과 지나친 기대감으로 쉽게 피곤해지기만 하면서 끝까지 제대로 된 춤동작은 취할 수 없는 완전한 부조화다. 이에 반해 충분한 관계는 춤처럼 보 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유쾌함과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일종의 율동이며, 이따금 서로 동작이 꼬이지만 그래도 같은 동작을 취하려고 서로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는 부드러움과 가벼움의 불완전 한 조화다. 이 관계는 서로 존중하고 감사하고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 낌이 들게 해준다. 내가 친구와의 관계나 아내와의 관계가 충분하다 고 말할 때의 충분함이란 이런 관계를 일컫는다. "우리 사이가 이 정 도야!"인 것이다.
-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는 너무 매끄럽게 진행된다. 불확실함은 없다. 모든 교차적 상황, 모든 갈등, 모든 우연, 모든 사건, 모든 부수적 이해관계가 하나의 주제를 향해 빈틈없이 연결되며, 크고 작은 혼란 을 초래할 만한 요소는 생략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역사적 이야기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흐름이 끊기며, 모순적이고, 혼 란스럽게 진행된다. "
멋지고 용감한 왕자는 그저 멋지고 용감하고, 착하고 예쁜 공주 는 그저 착하고 예쁘다. 중간은 없다. 피곤함에 찌들어 얼굴이 누렇 게 뜬 왕자, 늦잠 자고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공주, 계속되는 모험 에 지쳐 짜증 내는 왕자, 책을 읽지 않아서 아는 게 없는 공주의 모습 등은 나오지 않는다. 결혼한 두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 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따금 말다툼도 할 수 있고, 육아 문제로 티격 태격할 수도 있으며, 세월이 흘러 더는 멋지고 예쁘지 않을 수도 있 지만, 시간은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불편한 현실 과 모순되는 완벽함이나 위대함에 대한 막연한 비전을 세워두고 있 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파고든다거나 역사적 상황과 연결해 실망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지칠 수도 있 고, 짜증 낼 수도 있고, 힘을 낼 수도 있고, 기분을 풀 수도 있다. 상대방이 지쳤거나 짜증 낼 때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감정에 녹이기보 다. 그 지침과 짜증의 원인을 헤아려주고 공감해주는 노력쯤은 할 수 있다. 서로 함께한 시간이 늘면서 겪은 경험을 교훈 삼아 서로에 대 해 더 많이 알아가고 더 많이 이해해줄 수도 있다. 어제의 불꽃이 조 금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면 원료를 넣어 다시 불꽃을 일으키면 된다. 그러는 동시에 원료가 소진될수록 불꽃은 사그라든다는 엄중한 진실 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함께할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진실도 깨우쳐야 한다. 우리의 관계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다. 우리는 관계를 신화가 아닌 역사로 들여다봐야 한다. 말같지도 않은 영원한 하나 됨이 아닌 오해와 실수, 이해와 개선으로 가득 채우는 관계를 탐구해야 한다
- 위대함은 우리 자신과 우리 관계를 위한 충분한 삶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은 목표 자체를 전복시킨다. 국가의 정치와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정책 방향은 정부가 나서서 자유로운 성장을 견인해야 한다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야만 낙수 효과로 최대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양극화나 불평등은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최하위 계층의 삶은 똑같고, 그나마 성장이라도 하면 더 나아 질 테니 좋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다음 장에서 논의하겠지만, 이 주장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불 평등이야말로 성장을 저해하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모든 형태의 위대함 추구와 마찬가지로 성장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증명된 적이 없다. 복잡계 경제학을 개척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은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회복 정책을 분석하면서 “오바마의 시도는 경제 안정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국가와 세계를 위해 더 나은 경제적 삶을 모색하는 측면에서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70 그렇 다면 우리의 경제적 삶에 대한 충분한 비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 애덤 스미스는 세상이 지금처럼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지 혜와 덕망 그리고 “자애로운 애착이 가득한 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본연의 세상은 이것이 가능하게끔 설계되지 않았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위대함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열망을 막지 못할 바에 차라리 그 열망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유 시장 이나 노동 분업 같은 체계를 설계하자고 마음먹었다. 위대함을 극복 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되레 위대함과 파 우스트식 거래를 맺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보이지 않는 손'의 회복력 을 믿으면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위대함의 손'이 됐다.
- 추첨제의 진정한 장점은 충분한 지원자를 더 많이 찾는 데 도움이 될뿐더러 충분한 삶에도 실질적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대학 입 시에 일정 수준의 능력만 기준으로 삼고 나머지는 무작위로 선별한 다면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 적어도 영혼 을 탈탈 털어 점수를 채우고 강박적으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대신 친 구나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부모들에게는 아이가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에이미 추아에게서 영감을 받은 '호랑이 엄마가 될지 말지를 애초부터 고민하지 않게 해 준다. 이 체제는 능력주의적 오만함을 잠재우고 학벌로 인한 지위 권 력도 약화할 수 있다. 추첨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한 내가 잘나서 합 격했다는 속물적인 매력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못 나서 떨어졌다는 자괴감에 빠질 이유도 없다.
- 오래전에 프레드 허쉬가 이미 제안했듯이, 지위 경제를 무력화하 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승자의 혜택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더 나 은 공립학교가 많이 있다면 사립학교의 이점이 사라진다. 고품질의 료 서비스를 평준화하면 더 많은 돈을 내고 특권을 누릴 여지가 없어 진다. 누구나 교대로 1년에 몇 주씩 해변 별장을 이용한다면 비싼 부 동산을 구매할 명분이 희미해진다. 일등석을 아예 없애거나 추첨으 로 배정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비행기 모든 좌석을 똑같이 편안하 게 만들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그러면 합리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인류가 '비행'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는 건 가능하다고 여기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비행기를 만드는 데 실패하는 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차이가 없으면 차별도 없다. 차이를 두니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합 리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있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을 그렇게 만 들어놓고 합리적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차이가 없는 체제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더 좋다. 당연히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싶은 사 람도 있을 것이다. 엄청나게 비싼 별장을 사고 싶어서 산다는 데 누 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누구라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별장이 곳곳에 많이 있다면, 중앙 정부와 지역 사회가 그런 시설들을 협 력해서 운용한다면, 굳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일부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재화를 사회화한다고 해서 개인의 선호가 실 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돈이 없어 박탈당한 수십억 개인 의 선호가 이 같은 사회 체계 덕분에 마침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리 맡에 쇼펜하우어 (0) | 2024.08.18 |
---|---|
호모 유니쿠스 (2) | 2024.08.05 |
지금은 아우렐리우스를 읽어야 할때 (0) | 2024.08.01 |
쇼펜하우어의 냉철한 조언' (0) | 2024.07.30 |
지루하면 죽는다 (21) | 2024.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