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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커브볼'을 조심해야 한다. 직선으로 이동하는 것 같지 만 결정적 순간에 예상 경로에서 벗어나는 현상 말이다. 또한 '눈덩 이처럼 작용하는 양의 되먹임 고리도 조심해야 한다. 처음엔 대수롭 지 않아 보이지만, 통제에서 벗어나며 덩치를 키우고 마침내 눈사태 를 일으킨다. 그리고 '부메랑'처럼 작용하는 음의 되먹임도 조심해야 하는데, 이것은 예측하려는 현상에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예측 행위 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는 자연계의 근본 속성으로 인해 생기는 '근본적 한계'를 조심해야 하는데, 이 한계 탓에 우리가 미래를 예측 할 수 있는 범위를 비롯해 예측하길 바라는 정확도에 제약이 따른다.
- 바넘은 종종 교묘한 속임수를 동원해 공연을 했으면서도, 자신의 서커스를 두고 '우리는 누구한테나 통하는 것something for everybody을 갖고 있다' 고 치켜세웠다고 한다. 이런 정서는 바넘 진술, 즉 아무한테나 적용 될 수 있는 일반적인 성격 묘사를 제대로 요약해 준다. 가령 아래 평 가가 당신의 성격을 얼마나 잘 포착하는지 살펴보자.
당신은 다른 사람들한테서 애정과 존경을 받고 싶은 욕구가 크다. 스스로에게 비판적인 성향이 있다. 아직 사용되지 않아 당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은 능력이 매우 많다. 성격적인 약점도 얼마간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걸 보충할 수 있다. 외적으로는 단정하고 자제력이 있지만, 내적으로는 걱정이 많고 불안정한 편이다. 때로는 올바른 결정을 내렸는지 올바른 행동을 했는지 진지하게 의심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변화와 다양성을 좋아하기에, 구속과 제약 을 받으면 불만을 품게 된다. 자신을 독립적인 사고의 소유자로서 자랑스러워 하며, 충분한 증거 없이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을 남 에게 드러낼 때 너무 솔직한 것도 현명하지 않다고 여긴다.
꽤 정확한 것 같지 않은가? 사실, 이것은 그냥 바넘 진술들을 한데 묶어서 포러 효과 Forer effect''를 일으키도록 만든 글일 뿐이다. 이 만연한 심리적속성은 일반적이고 모호한 성격 평가를 접한 사람이 그런 평가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유한 것인 양 해석하는 경향이다. 이 효과의 명칭은 심리학자 버트럼 포러 Bertram Forer의 이름을 땄다. 그 는 39명의 제자에게 성격 검사를 실시한 다음에, 검사 결과를 바탕으 로 각각에게 개인화된 성격 묘사를 해주었다. 묘사의 정확도를 0부 터 5까지 등급으로 평가해 달라고 하자, 전체 학생이 내놓은 평균 등 급은 4.3이었다. 대다수 학생이 포러가 각 학생에게 한 성격 묘사가 실제 성격과 딱 들어맞는다고 여겼다는 뜻이다. 
- 포러가 제자들을 위해 고른 진술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도 있었다.
때때로 당신은 외향적이고 상냥하고 사교적이지만, 또 어떨 때는 내향적이며 조심성이 많고 수줍어한다.
이 묘사는 바넘 진술인 동시에 이른바 무지개 술책rainbow e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특정한 정서나 경험에 대해 두 가지 이상 상반 된 측면으로 구성된 진술을 내놓으면, 누구든 일생의 어느 시기에 그 중 적어도 하나는 겪기 마련이므로 무지개 술책은 포괄적으로 두루 뭉술한 말이다. 이 진술은 긍정적인 것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까지 한 정서나 성격의 스펙트럼 전체를 아우른다. 마치 무지개가 빨강에서 부터 보라까지 햇빛의 전체 색깔 스펙트럼을 다 담고 있듯이. 그러고 나면 확증편향이 상황을 심령술사한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게 해 준다. 우리 뇌는 자신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 진술의 측면(들)만을 골 라내기 때문이다.
- "선생님은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매우 깊고 선 생님의 정서에 긴밀히 연결된 에너지예요"라고 말할 때, 비록 초자 연적 에너지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파울 라는 내 반응을 읽고서, 더 자세히 이런 추측을 내놓는다. "정말 다 행이게도 선생님은 영적인 기운이 있고, 에너지가 아주 좋아요. 아 주 따뜻하고 아주 다정하며 다른 사람들까지 보살피는 에너지예요." 그녀의 아침 계략은 폴리아나 원리 Pollyanna principle"라는 무의식적 편향을 이용한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더 잘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경향이다. 이 현상은 엘리너 포터Eleanor H. Porter가 1913년에 발표한 어린이 소설 『폴리아나에서 따온 명칭인 데, 여기서 동명의 주인공은 살면서 처하는 모든 상황에서 행복을 느 낄 대상을 찾는다. 심지어 폴리아나가 자동차에 치여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고서도, 그 전까지 두 다리를 써왔다는 사실에서 행복을 찾 기로 마음먹는다.
일본 국립생리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심지어 왜 칭찬이 우리를 즐겁게 만드는지를 신경학적으로 밝혀냈다. 과학자들의 요청에 따 라 실험 참가자들은 성격 질문지에 답을 기입하고 이어서 짧은 영상 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다음에 fMRI 스캐너 속에 들어가서 자신들 이 한 답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칭찬을 들은 피실험자들은 선조 체線條體, striatum라는 뇌 부위가 뚜렷하게 활성화되었다. 이곳은 실험 참 가자들이 음식과 마실 것, 심지어 돈과 같은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받았을 때 활성화되는 보상 중추다. 이 실험 결과에서 짐작되듯, 누군 가에게 해주는 칭찬은 정서적 뇌물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 구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애매하고 어디에나 갖다 붙일 수 있는 진술을 던지고서, 점 보러 온 사람이 빈 내용을 메우도록 하기 야말로 심령술사들의 추측 게임의 핵심이다. 가령, 그들은 종종 일견 구체적인 숫자로 자신의 예측을 정량화해 신뢰도를 높이려고 하는 데, "가족 중에 네 명이 보이네요"와 같은 말이 그런 예다. 그 숫자가 점 보러 온 사람의 형제자매의 수에 해당한다는 말을 과감하게 던지 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 형제자매가 세 명뿐이라고 밝히면, 그들은 점 보러 온 사람 자신을 빠트리지 말라고 알려줘서 숫자를 넷 으로 올린다. 만약 가족 중에 아이가 셋이면, 그들은 두 부모를 포함시켜서 (점 보러 온 사람은 제외하고) 가족 구성원을 넷으로 만든다. 이 런 식으로 해서 형제자매가 한 명뿐이라면 네 명이라는 가족의 총구 성원 수는 충족된다. 만약 점 보러 온 사람이 가족 중의 유일한 자식 이라면, 그들은 과감하게도 어머니가 유산을 한 적이 있다고 해서 숫 자를 맞춰버린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면 그들이 옳음을 증명하는 이 중적 효과가 생겨서, 점 보러 온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덕분에 그들이 '저세상으로 간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믿음이 더 커 진다. 통계상 네 번의 임신이 한 번이 유산으로 끝나기에, 어머니의 유산으로 인해 아이를 하나만 두기란 그다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 이 아니다.
물론 넷이라는 수가 점 보러 온 사람의 가족에게 직접 해당되지 않으면, 그들은 배우자의 가족이나 부모의 가족 또는 그리운 죽은 연 인의 가족 중에서 찾아보라고까지 한다. 그들은 자길 찾아온 사람들 의 간절함을 이용해, 자신의 예측이 맞을 확률을 높이려 한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누구든 갖다 붙여서 답을 찾기 위한 산탄총 쏘기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를 덮어버린다.

- 현시대 심령술사들이 피해자들을 꾀려고 사용하는 미묘한 심리 조작 기법들은 전 세계의 신탁 사제, 점쟁이 및 예언가들이 오랜 세월 사용해 왔던 술책들과 동일한 것이다. 고대 리디아 왕국의 왕 크로이소스가 델피에서 신탁을 구했다. 자신의 고향인 아나톨리 아에서 점점 더 강해지는 페르시아제국의 힘에 맞서 싸워야 할지 여 부를 묻는 신탁이었다. 크로이소스는 '당신이 강을 건너면, 한 위대 한 제국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라는 답을 들었다. 그 예언을 좋은 내용이라 믿고서 그는 기원전 547년에 페르시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했고 정말로 한 위대한 제국 - 그 자신의 나라 - 이 무너졌다. 물론 그 신탁은 전체 상황으로 볼 때 적중했다고 여겨졌다. 일부 논평 가는 사후적으로 그 결과가 신탁 내용의 속뜻이었다는 식으로 해석 했다. 물론 무지개 술책을 쓰는 요즘의 영매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승자가 있으리라는 신탁의 원론적인 예측은 빗나갈 리가 없다. 이 런 식이라면, 고대의 가장 강력하고 존경받는 미래전망 기관에 가서 받아오는 예측이 틀릴 리가 있겠는가.

- 아포페니아 현상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결과의 이면에 실제로는 아예 없는 원인을 찾으려 한다. 동일한 아티스트의 두 곡을 연달아 들 을 때 어떤 패턴을 찾아냈다고 무턱대고 믿어버린다. 사실 그런 종 류의 패턴 형성은 무작위성의 내재적 특성일 뿐인데도 말이다.
결국, 아이팟의 정말로 무작위적인 셔플 알고리즘에서 필연적으 로 노래들이 한데 모인다는 불만이 제기되자,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 에 '스마트 셔플smart shuffle'이란 새 기능을 구현했다. 재생되는 다음 곡은 이전 곡과 너무 비슷하지 않게 정하는 기능이다. 무작위성이 어 떤 모습인지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성향을 어느 정도 감안해 내놓은 결과다. 잡스는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더 무작위적이라고 느끼게 하려고 그걸 덜 무작위적이게 만들고 있다."

- 한 사건이 주목받는 정도는 그게 얼마나 놀라워 보이는가로 정해 진다. 이것은 다시 그 사건의 확률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직접 관련 되어 있다. 일어나기 어려워 보일수록 그 사건의 발생은 더 놀라워 보인다. 겉보기에 불가능한 듯한 사건 발생의 이면에 있는 수많은 메 커니즘을 알면, 그런 사건의 진짜 확률을 더 잘 가늠하고 아울러 충 •분히 경탄하면서도 무턱대고 놀라는 마음을 억누를 수 있다. 잡음이 낀 배경에서 우리가 포착해 내는 뜻밖의 패턴이 어쩌면 단지 배경 잡 음 background noise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무관 해 보이는 현상들 간의 심오한 미지의 관련성을 드러내는 듯한 우연 의 일치 사건을 대할 때 경계심을 품고 그런 관련성이 실제로는 없 을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굉장히 불가능할듯한 사건 조차도 늘 발생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면, 우리는 우 연을 이용해 먹는 사기꾼들과 마주치더라도 상관착각의 덫에 빠지 지 않을 준비가 더 잘되어 있을 것이다.

- 가장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대로 괜찮은 대안을 선택하는 것을 가리켜 영어로 'satisficing(만족화)'이라고 한다. 만족스러운이란 뜻의 'satisfying' 과 충분하다란 뜻의 'suffice'를 섞어서 만든 용어다. 심리치료사 로 리 고틀립 Lori Gottlieb은 저서 『그 남자랑 결혼해Marry Him』에서 만족화를 옹호한다. 짝 찾기와 관련해 이 저자가 중시하는 질문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일까?'보다는 '나는 행복한가?'다. 볼테르가 『철학 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에서 소개한 이탈리아 속담처럼 '가 장 좋은 것은 좋은 것의 적이다(Il meglio è Pinimico del bene).

- 어느 문제, 특히 주관적인 문제에 완벽한 해법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리켜 열반의 오류 Nirvana Fallacy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이상 화된 기대에 부합하는 답이 없을지 모른다. 완벽한 짝이 우리를 기 다리고 있진 않으며, 우리가 꿈꾸는 집은 결코 벽돌과 회반죽으로 실 현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선택을 앞두고 생기는 분석 마비를 극복할 단순한 방법을 무작위성이 제공한다. 복수 개의 선택 사안이 있을 때, 그중 많은 것을 여러분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동전을 던 지거나 주사위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선택하게 하자. 때로는 빠르게 괜찮은 선택을 하는 것이 느리게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것 - 아니면, 정 말로 마비가 와서 도무지 아무 결정도 못 하는 상태보다 낫다.
다수의 선택 사안 중에서 힘들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일 때, 외부 의 무작위 행위자를 통해 대신 결정을 내리면 우리가 진짜로 좋아하 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벤 마셜의 주사위 실험과 달리 여러분 은 이번엔 무작위화 도구의 결정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외부에서 선택을 제시해 주면 여러분은 그 사안을 받아들일 지진지하게 숙고하면 되는 위치에 놓인다. 이 전략 덕분에 그 시점 까지 일견 막연하게만 보이던 사안의 결과를 차분히 내다볼 수 있다. 스위스 연구팀이 실시한 아래 실험에서 밝혀졌듯이, 무작위로 결정을 내리면 종종 분석 마비를 초래하는 정보 과부하에 대처할 수 있다.

- 무작위성을 알아차리고 이해하고 자신을 위해 활용하기와 더불 어, 실제보다 더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듯한 상황들 - 생존자편향의 우연한 대상자 줄이기나 보도편향의 의도적 은폐로 인해 우리에게 감춰지는 막다른 골목과 실패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또한 비 양심적인 인물들이 들려주는 계산된 절반의 진실도 경계해야만 한 다. 그런 말에 넘어가면 결국 엉뚱한 말에 돈을 걸게 된다. 셜록 홈 스처럼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정보만이 아니라 빠져 있는 증거 - 한 밤중에 개가 짖지 않을 때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를 통해 추론해 야 한다. 우리한테 보여주지 않은 게 무언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받고 있는 소량의 정보가 전체 그림을 대표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점 을 깨닫고 아울러 우리한테 보여준 데이터에 담겨 있을지 모르는 편 향들을 알아차린다면, 본디 무작위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자들에게 대항할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갖출 수 있다.

- 벤포드 법칙이 일상적 상황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한 가지 이유는 현실세계의 많은 데이터 집합이 지프의 법칙zipf's law 이라고 하는 일견 불가사의하지만 더욱 일반적인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지프의 법칙이란, 충분히 많은 분량의 텍스트가 있을 때 그 속의 단어를 감소하는 빈도순으로 늘어놓으면 특별한 패턴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번째로 가장 빈도가 높은 단어는 가장 빈도가 높은 단어의 대략 절반만큼 자주 등장한다. 세 번째로 가장 빈도가 높은 단어는 가장 빈도가 높은 단어의 대략 3분의 1만큼 자주 등장하며, 네 번째 빈도의 단어는 대략 4분의 1만큼 자주 등장 하고,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 나는 직접 지프의 법칙을 검증하려고, 이전 저서 『수학으로 생각 하는 힘에서 쓰인 영어 단어의 빈도를 분석하기로 했다. 세상에나! 그림 4-2에 나오듯이 지프의 법칙에 놀랍도록 들어맞았다. 책에서 가장 흔한 단어는 'the'로서 6,691번 나온다. 두 번째로 흔한 'of'는 3,330번 나오는데, 'the'가 등장하는 횟수의 거의 정확히 절반이다. 세 번째로 흔한 'to'는 2,445번 등장하는데, 'the'의 등장 횟수의 3분 의 1을 조금 넘고, 계속 이런 식이다. 단어 'life'는 145번째에 기록되 어, 146번째인 'mathematics'와 거의 동등했는데, 둘 다 64회 등장 했다. 그리고 한참 뒤인 230번째로 나온 'death'는 총 42번 등장했다.
-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회고록에 썼듯이, 확률 법칙은 '일반적 으로는 대단히 옳지만 개별적으로는 대단히 그르다. 구텐베르크-리 히터 멱급수 법칙이 일견 예측 불가능한 지진이라도 특정한 행동 패 턴이 있음을 밝혀주는 듯하지만, 이는 결코 마법의 수정공이 아니다. 다음에 일어날 대지진의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결코 미리 알려줄 수 없다. 대신에 특정 규모 이상의 지진이 해당 기간에 일어날 확률만 알려줄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혈 충돌의 빈도를 기술하는 리처드슨 의 멱급수 법칙은 앞으로 20년간 큰 전쟁이 없으리란 확률이 90퍼센 트임을 알려줄 뿐이다. 그렇기에 해당 기간 동안 큰 충돌이 없는 쪽 에 내기를 거는 편이 매력적으로 보일 테지만, 열 번 중 한 번은 판돈 을 잃는다는 걸 꼭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런 예측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예측 덕분에 다양한 시나 리오에 대비해 각 사건이 초래할 위험과 발생할 가능성을 가늠해 적절한 자원을 할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률은 낮지만 잠재적 위험성 이 큰 사건의 대비와, 확률은 높지만 위험성은 낮은 사건의 대비 사 이에서 정확히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리켜 기대효용 expected utility 또는 기대수익 expected payoff이라고 한다. 

- 오늘날 베이즈 정리는 장막 뒤에서 활약하고 있다. 가령, 피싱 시 도에서부터 의약품 제안에 이르는 온갖 스팸 메일을 걸러낸다" 베 이즈 정리를 기본 원리로 만든 알고리즘들이 영화와 음악 그리고 일 반 공산품들을 우리에게 온라인으로 추천한다. 또한 베이즈 정리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위해 더욱 정확한 진단 도구를 제공하는 딥러 닝deep-learning 알고리즘의 바탕을 이루기도 한다. 베이즈 정리의 열성 적인 사도들 다수는 그 정리야말로 우리의 삶을 이끄는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여기진 않지만, 우리가 베이 즈 방식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실질적인 교훈을 익힐 수는 있다고 본다. 경쟁 관계에 있는 여러 이야기 중에 어느 것을 믿기로 결정할지, 우리가 단언한 말에 얼마만큼 확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아 마가장 중요하게도 언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바꿀지 결정할 때 도 움이 된다. 

- 새로운 증거를 통해서 기존 견해를 바꾸기란 늘 쉬운 일이 아니 다. 틀렸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은 영 내키지가 않고, 이전에 굳건 하게 고수했던 믿음을 저버리기엔 꽤나 비겁한 느낌이 든다. 사실, 이 전에 받아들인 견해와 상반된 견해를 채택해서 지지하려면 큰 용기 가 필요하다. 정치판에서 의사결정자들이 새로운 증거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손바닥 뒤집기'라느니 '변절'이라느니 호들갑을 떨며 조롱하기보다는 더욱 너그럽게 받아주는 분위기가마 련된다면, 아마 더 많은 정책결정자가 베이즈 사고방식을 도입해 증 거기반 정책을 내놓을 것이다. 원래 갖고 있던 비뚤어진 총을 고집 해, 목표물보다는 자신들의 발을 정조준하는 사태를 맞는 대신에 말 이다.
- 베이즈 정리로부터 우리는 다음 세 가지 경험 법칙을 슬며시 이끌어 낼 수 있다. 새 증거가 만능은 아니다 기존과 다른 관점을 고려 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견해를 점진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셋 중 에서 우리가 가장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세 번째다. 구체적으 로 말하자면,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을 바탕으로 우리의 견해를 수정 하는 것이다.

- 파스칼의 추론에 따르면, 신이 존 재할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그 결과가 사실일 경우의 무한한 이득 과 곱하면 신을 믿었을 때의 예상 이득은 믿지 않았을 때의 유한한 예상 이득을 언제나 능가한다. 파스칼은 신을 믿는 편이 합리적인 결 정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런데 카를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예상 이득 논증이 여러 사회 에서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여긴 마르 크스는 사후의 보상을 약속한다며 마음을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그런 주장이야말로 현실에서 운명을 개선하려고 사회적 불평등과 맞서 싸 우려는 민중의 소망을 억누르고 대신에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게 하 려는 술책이라고 꼬집었다.

- 역사가의 임무는 왜 한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을 초래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아울러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얻는 일이다. 과거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 났던 사건들에 대한 이러한 인과적 추론에서 얻어진다. 이와 반대로, 게임이론가의 임무는 간극을 메우는 일이다. 즉 가지 않은 길, 만약 의상황 what-if, 반사실, 일어나지 않은 사건 그리고 이게 중요한 데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는 일이다. 가령, 전쟁을 되돌아보는 서술의 대부분은 이 드러난/드러나지 않은 편향에 지배를 받는다. 발 생을 막아낸 많은 위기에 초점을 맞춘 교과서는 거의 없고, 대부분은 오히려 피하지 못한 소수의 위기에 중점을 둔다. 학교 역사 수업에서 는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주요한 충돌들은 사실 흔 치 않은 사건이다. 이 장의 앞에서도 보았듯이, 전쟁에는 비용이 따 르기 마련이라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쪽이 낫다. 때때로 역사의 경로 를 극적으로 바꾸는 이야기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이다.

- 제곱-세제곱 법칙을 잘못 적용해서 해로운 결과를 낳는 가장 악 명 높은 사례로 체질량지수body mas index, BMI를 꼽을 수 있다. BMI는 몸무게(부피에 비례하는 값)를 키의 제곱으로 나눈 비율이다. BMI를 진단의 수단으로 적용하는 경우, 건강한 범위에 해당하는 BMI 값이 정해져 있다는 설이 있다. 만약 여러분의 BMI가 너무 낮거나 너무 높으면, 건강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왜 부피(길 이의 세제곱)에 대략 비례하는 몸무게가 키의 제곱(길이의 제곱)에 따 라 커지거나 작아져야 하는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몸의 전 체 차원이 두 배라면 부피가 여덟 배라고 볼 수 있기에, 모든 상황이 동일하다면, 몸무게도 여덟 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키의 제곱은 고작 네 배이므로, 더 큰 사람은 BMI가 작은 사람의 두 배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자신의 크기에 비해 더 뚱뚱하거나 마른 상태가 아닌데 도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몸무게를 키의 제곱 대신에 세제곱으로 나 누어야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그다지 옳지는 않다. 키가 더 큰 사람은 키 작은 사람을 단지 확대해 놓은 것이 아니라 키에 비해서 체구가 더 좁은 경향이 있다. 실제로 옥스퍼드대학교의 응용수학자 닉 트레페 덴Nick Trefethen 이 몸무게를 키의 제곱이나 세제곱으로 나누는 대신에 그 사이의 무언가 키의 2.5제곱로 나누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 았다. 그렇게 하면, BMI로 인해 생기는 문제 '키 작은 사람 수백만 명이 실제보다 더 말랐다고 여기거나 키 큰 사람 수백만 명이 실제보 다 더 뚱뚱하다고 여기는 문제에 해결책이 될 것이라면서.
심지어 체지방이 동일한 퍼센티지인 사람들이라도 키에 따라 값 이 달라지는 문제점이 있기에, 당연히 BMI는 심장대사 측면의 훌륭 한 건강 지표가 아니다. BMI 때문에 건강한 사람이 과체중이나 저체 중으로 잘못 분류될 위험성이 있다. 

- 은행 예금 인출 소동은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되먹임 고리의 한 특수한 사례다. 어떤 예측이나 제안, 믿음 또는 보도가 나오고, 이에 대한 반응 때문에 그것이 결국 실현되는 경우다. 시간이 지난 뒤 영 국은행 총재 머빈 킹 Mervyn King은 노던록에 대한 금융 지원을 비밀리 에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확신을 약화시키는 공개적 발표 때문에 파 국적인 소용돌이가 생기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금 융 관련 규정 탓에 그런 비밀은 허용되지 않았다. 노던록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지 않았더라면, 파국적인 뱅크런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동물이든 사람이든 다른 이의 지식이나 편향을, 비록 그 지식이 나 편향이 사전에 공유되지 않았다 해도 포착해서 반응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른바 이중 눈가림 double-bolind 시험의 필요성이 대두된 다. 피실험자는 물론이고 치료 행위를 하는 실험자도 어떤 치료가 어 떤 환자에게 제공되는지 모르게 하는 설정이 이중 눈가림 시험이다. 알약 형태의 약을 시험하는 경우에는 시험 방법이 꽤 단순하지만, 더 욱 공격적인 일부 대안 치료를 시험하려고 할 때는 복잡해진다. 가령 침술은 가느다란 바늘을 몸의 특정 지점에 꽂게 되는데, 이 경험을 가짜 치료를 받는 환자를 대상으로 재현하기는 어려운지라, 환자를 속여서 이러한 플라세보 치료를 처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일부 임상시험은 한술 더 떠서 환자와 연구자뿐만 아니라, 해당 연구를 감독하는 연구 위원회와 같은 관계자까지 시험에 관한 정보 를 모르게 할 수 있다. 정보가 부주의하게 연구자한테 전해지고, 거 기서 다시 환자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런 시험을가 리켜 삼중 눈가림triple-blind 시험이라고 한다. 이론적으로, 지식 전달 의 이런 부주의한 연쇄 작용은 무한정 이어질 수 있기에, 환자를 진 실로부터 더 철저하게 숨기려면 더더욱 높은 수준의 눈가림이 필요 하다. 실제로는 현실적인 여건으로 인해 시험이 삼중 눈가림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며, 보통 이중 눈가림이면 충분하다 고 본다.

- 스트라이샌드 효과는 정보를 삭제하거나 검열하려는 시도로 인해 오히려 해당 정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증가하는 현상을 가리키 는 용어다. 2002년 환경보호활동가인 케네스 아델만Kenneth Adelman과 가브리엘 아델만Gabrielle Adelman이 해안 부식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캘 리포니아 해안선 전역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기념비적인 활동에 착 수했다. 이 일을 마친 후 둘은 1만 2,200장의 사진을 자신들의 웹사 이트에서 공개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필 사진 중에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말리부 저택이 들어 있었다. 스트라이샌드는 자기 집의 사진이 인터넷에서 마음껏 이용되는 상황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델만 내외를 고소하기로 결정했다. 고소장을 제출했을 당시 그사 진은 여섯 건 다운로드되었다. 그중 두 건은 스트라이샌드의 변호사 들이었고, 한 건은 그녀의 이웃이었다. 고소 후 한 달이 지나자, 평소 대로였으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을 아델만의 웹사이트에 50만 명 이 방문했다. 정작 스트라이샌드는 소송에서 졌고, 어쩔 수 없이 소 송비용으로 15만 5,000달러를 내야 했다.
- 부메랑은 의도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잠재적 결과를 제대 로 고려하지 않는 바람에 예상을 크게 벗어날 수 있는 행동이다. 문 제를 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더 악화시킨 '해결책' 또는 미래를 변화 시켜 스스로를 무효화시킨 예측이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부메랑은 원래 방향에서 180도를 돌아 여러분 머리를 강타할 수 있는데, 때로 는 여러 번 그렇게 할 수 있다. 여러분이 부메랑을 던졌다는 사실조 차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도 있 지만, 유심히 살폈더라면 어김없이 미리 나타났을 신호들이 있다. 부 메랑의 특징적인 신호를 알아차리면, 이러한 자살골을 막아내거나 방향을 틀게 할 수 있다. 또는 이보다 더 낫게, 약간의 예지력이 있다 면 애초에 부메랑을 집어 들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스트라이샌드 효과가 딱 그런 사례다. 이 효과는 반발reactance 이라는 심리 현상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해서 부메랑 효과라고도 하는 이 반발 심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이 제약을 받고 있다거나 자유가 줄어든다거나 원치 않는 것을 하도록 설득을 당한다고 여길 때 발생 한다. 반발은 여러분의 관점을 누군가에게 설득하기 어렵게 할 수 있 고, 심지어 여러분이 전하고 싶은 관점과 반대의 관점을 상대방이 받 아들이게 할 수 있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장담하는데, 너희들은 5분 안에 위층에 올라가서 잠잘 준비를 하지 못할 거야"라고 말할 때, 내 가 믿는 구석이 바로 반발심리다. 반발은 반대 심리reverse psychology의 핵심에 위치한다.

- 이 훈련용 데이터세트training data set에 대해 알고리즘한테 뭐가 뭐 다라는 설명을 해주면, 알고리즘은 확인하려는 대상을 잘 나타내 주 는 이미지 내의 특징들을 분석하고 찾아낼 수 있다. 이상적으로 보자 면, 대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들, 즉 형태, 색깔, 명암 대비 또는 덜 명확한 다른 속성들을 갈고닦을 것이다. 대상과 관련 있는 특징을 포착하는 일이 알고리즘한테 맡겨진다. 가령, 소가 들어 있는 이미지 들은 알고리즘에게 대조되는 흑백 무늬가 있는 둥그스름한 대상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이미지 내의 중요한 특징을 알아내는 자유도야 말로 딥러닝을 대단히 강력한 기법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임의의 식별 요소라도 포착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알고리즘이 인간 조련사에게 서 배우지 않은 측정치를 이용해 이미지들을 구분할 수 있으며 아울 러 인간의 눈으로는 확실치가 않거나 심지어 알아차릴 수도 없는 이 미지도 식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공개하기 전에 알고리즘은 보통 시험용 데이터세트 testing data set로 검증을 거친다. 이 두 번째 이미지 집합은 알고리즘의 인간 창조자한테는 올바른 구분이 알려져 있지만 알고리즘한테는 알려지 지 않았기에, 과학자들은 해당 알고리즘이 요청되는 작업을 하도록 '학습'이 얼마나 잘되었는지 또는 잘못되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 분야는 근래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바둑의 고수를 이 기는 알고리즘이나43 프로 포커 선수를 완패시키는 알고리즘이 개 발되기도 했다.44 딥러닝이라는 도구는 이미 상업적으로도 이용되 고 있다. 가령 페이스북과 같은 회사들은 업로드된 사진 속의 사람들 에게 태그를 다는 데 딥러닝 기술을 이용하고, 구글은 100개가 넘는 언어를 번역하는 데 딥러닝 기술을 이용한다. 의료 분야에서 딥러닝 알고리즘은 X선 영상을 통해 암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정확도가 인간 방사선 전문의의 수준에 필적한다. 딥러닝 알고리즘의 잠재적 응용 범위는 무한하다.
- 하지만 알고리즘이 인간이 부과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지름길을 택한 나머지, 신흥 기술에서는 당혹스러운 실패를 겪는 경우가 많았 다. 컴퓨터비전의 한 분야인 이미지 자동 자막 생성하기는, 이론적으 로 볼 때 검색 엔진이 가장 적절한 이미지 검색 결과를 내놓아서 이 미지 접근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도구다. 하지만 안타 깝게도 알고리즘이 어떻게 입력 데이터를 사물의 유형과 연관시킬 지 지시하는 아무런 규칙이 나오지 않았기에,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그냥 지름길에 의존하기가 너무나 쉽다. 가령 한 알고리즘은 풀을 뜯 는 동물을 식별하는 훈련을 받아서, 훈련용 이미지들에서 더 식별하 기 어려운 동물 자체를 찾기보다는 드넓은초록풀밭이 있는 이미지 를 골라서 그런 동물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많은 빈 풍경이 잘못 식별되어 '풀을 뜯는 양'이나 '소떼'와 같은 자막이 달리는 최 종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 우리 몸은 음의 되먹임 고리의 대가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일 정한 체온 유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체온이 너무 낮으면 저체온증에 걸릴 위험이 있고, 너무 높으면 열사병에 걸릴 수 있다. 그래서 시상 하부라는 뇌 부위가 체온을 극도로 주의 깊게 살피면서, 체온 조절과정을 통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차가울 때 시상하부는 머리 카락이 곤두서도록 지시해, 따뜻한 공기층을 머리 주위에 두르는 방 식으로 열 손실을 줄인다. 또한 시상하부는 갑자기 몸을 떨게 해 근 육을 수축시켰다가 이완시키는데, 이로써 열을 발생시켜 체온을 올 린다. 반대로 너무 뜨거울 때는, 우리 몸이 땀을 흘린다. 피부 표면의 습기를 증발시켜 몸의 열을 효과적으로 방출시키기 위해서다. 음의 되먹임 고리는 항상성 변화하는 환경에 맞서서 인체의 주요한 물 리적 및 화학적 기능을 유지하는 능력에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음 의 되먹임 고리는 대사에서부터 체액 균형 그리고 혈압에서부터 혈 당 수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체 기능을 제어한다.
- 음의 되먹임 고리가 어긋나 버리면, 원래 의도했던 효과와 정반 대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때로는 현재 상태를 회복하려고 자극을 가 했건만, 뜻밖의 결과로 인해 계가 정반대 방향으로 점점 더 빠져들기 도 한다. 이런 제어되지 않은 증가나 감소 현상은 그걸 처음 촉발시 킨 자극보다 훨씬 더 큰 반응을 낳을 수 있다. 바로 이 현상이 이번 장의 시작에서 우리가 만났던 바로 그 부메랑 효과다. 부메랑 효과의 사례들을 다시 들자면 이렇다.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삭제하려고 시 도했더니, 조회수가 수십만 건 더 많아져 버린 일. 비밀 누설 금지 소 송이 소송 당사자를 둘러싼 흥미를 유발해 감추려던 것이 압도적으 로 대중의 관심사가 되어버린 일. 검열 시도 때문에 오히려 평범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린 일. 경고를 했더니 결국에는 금지된 활 동 참가를 오히려 더 하고 싶게 만든 일. 해결책을 얻으려고 내놓은 유인책이 문제를 더 악화시켜 버리는 경우 등등.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런 부메랑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행동이 낳을 수 있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 이다. 물론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 일이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애초에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보았듯이, 그런 역효과가 생기기 쉬운 상황들이 분명 존재한다. 콜롬 비아 군대의 보상 체계나 미국 병원 성적표처럼 의도한 결과 자체보 다는 그 대용물이 목표로 정해져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가 꼭 추구해 야 할 최상의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든 그런 목표에 이르려고 할 것 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우리 생각에 아이들한테 나쁜 무언가를 아이 들이 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을 때, 금지시켜서 오히려 그 행위를 더 하고 싶게, 금단의 열매를 더 따먹고 싶게 하지 않도록 우리는 각별 히 조심해야 한다. 정말이지, 반발과 같은 심리 현상을 이해하면 부 메랑을 우리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가령 반대 심 리를 재치 있게 이용해 언더독 효과를 만들면, 사람들한테서 최상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각 별히 조심해야 한다. 반대 심리 부메랑을 이용하려다가 의도치 않은 정반대 효과를 일으켜서 오히려 우리가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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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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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에서 고래로

역사 2024. 7. 14. 11:17

- 한국인들에게 변화의 속도는 눈부셨다. 1920년에 한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농촌에서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았다. 그들이 살았던 집은 말 그대로 네 개의 벽과 지붕으로 이뤄진 건물이 었다. 그 안에는 수도 시설도 화장실도 없었다. 그들은 <양반> 이 소유한 땅에서 일하면서 간신히 살아갈 정도의 음식을 얻 었다. 혹은 더 나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노비가 되거나 일 본에 있는 공장이나 만주에 있는 위안소로 보내졌다. 그러나 50세가 되기 전인 1979년에 그들은 중산층 근로자가 되었다. TV와 라디오, 냉장고, 그리고 깨끗한 화장실을 갖춘 현대적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파트 창문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혹은 대전에서 공장이 거의 날마다 들어서는 장면을 지켜봤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꽤 좋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고, 영화를 보 거나 최신 발라드를 들으며 여가를 보냈다. 열심히 일했다면, 제주도 여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박정희와 <재벌>은 천생연분이었다. 박정희는 성장을 이 끄는 국내 기업과 함께 한국 경제를 통제하고자 했다. <재벌> 들은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고, 기업이 한국 경제를 지배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그들 스스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박정희 정권은 선택적인 <재벌> 허가권과 값싼 이자로 대출을 주고 잠재적인 해외 경쟁자에게는 적대적 인 경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재벌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했 다. 36 현대의 정주영, LG의 구인회와 그의 아들 구자경, 삼성 의 이병철, SK의 최종현 등 <재벌 회장들은 국민 모두가 아는 인물이 되었다. 재벌들은 경제기획원에 자문을 제공했다. 그 러나 박정희는 <재벌>이 달성해야 할 경제 목표까지 제시하는 등 세부적인 경제 관리에 나섰기 때문에 마찰이 있었다. 3"그 리고 때로 단순한 마찰을 넘어서는 사건도 있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재벌> 지도자를 부패 혐의로 투 옥하겠다고 협박했다. 재벌 지도자들은 박정희 정부와 협력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만든 모든 것을 잃고 수감되었다.38 박정 희와 재벌은 결국 공생 관계를 이뤘다. 한쪽에 좋은 것은 다른 쪽에게도 좋았다. 그리고 한국 경제에도 좋았다. 국가의 최고 대학을 졸업한 젊고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한 가지 꿈을 꿨다. 그것은 재벌 기업에 들어가서 그들이 약속하는 부와 지 위를 누리는 것이었다.
경제 정책과 이를 따르는 재벌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갖 춘 박정희는 자신의 선진국 계획을 밀고 나갔다. 재선이 있었 던 1967년에 박정희 정권은 2차 5개년 계획을 내놨다. 그 계획 은 분명하게도 수출에 집중했다. 3" 한국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 력을 활용해서 미국과 나머지 서구 국가에 제품을 공급하는 <공장>이 되어야 했다.
- 성차별주의는 유교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으로 인해, 그리 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한국 경제라고 하는 새로운 현실과 혼합되면서 심화되었다.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1953년에 도입 원) 호주제 아래에서 남성은 법적으로 가정을 이끄는 사람이 었다. 그러한 제도 안에서 남성이 사망하면 아내가 아니라 장 남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여성은 결혼하고 나면 남편의 가정 에 속하게 되었고, 유산과 은행 계좌에 대한 접근, 그리고 모든 형태의 경제적 활동에서 차별을 받았다." 호주제는 동일한 노 동에 대해 여성에게 낮은 임금을 지불하는 하나의 구실로서 악용되었다. 결국 여성은 자신을 돌봐 줄 남편을 만날 때까지 일할 뿐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아버지나 손위 형제가 그 역할 을 맡았다. 많은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 짐으로 여겼다. 1953년 낙태가 불법화되고 이후 1973년부터 특정한 조건에서만 허용 되었음에도, 여성 태아에 대한 낙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1970년대에는 한국 역사에서 또 다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 다. 그것은 중산층의 등장과 확대였다. 많은 한국인이 처음으 로 생존 경제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었다. 그들은 언 제나 원했던 취미에 돈을 쓰고, 불과 한 해 전만 해도 여유가 없어 보였던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혹은 당연히 누릴 만한 짧은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소득을 올렸다. 그렇게 대규모 소 비문화가 1970년대에 한국에서 <탄생했다. 조용필이 자신 의 형제에게 <부산항에 돌아오라고 노래할 때 한국인들을 춤 을 췄다. 84 TV 드라마에서 장희빈 역할을 인상적으로 소화했 던 윤여정은 한국 시청자에게 조선 왕조의 영광스러운 나날을 선사했다. 그리고 장미희는 영화 「겨울여자」에서 성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여성의 역할로 한국 관객들을 꿈꾸게 했다.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했다. 일하지 않을 때는 미국인들처럼 즐기기를 원했다. 70년대가 저물 무렵에 TV는 한국에서 일반 적인 가전제품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클럽으로 몰려들었고 거 기서 다음의 록 스타와팝스타가 탄생했다.
중산층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한국 경제의 근대화 덕분 에 계속해서 증가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나라가 외국인을 위 해 싸구려 티셔츠나 바지를 생산하는 공장으로만 남기를 원치 않았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선진국 비전과 맞지 않았다. 그의 인기는 개발주의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있었 다. 나아가 박정희는 강력한 군대를 원했다. 자국 방어를 위해 미군에 의존하는 모습은 강력한 나라의 건설에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는 1972년과 1977년 5개년 계획을 통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한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1972년 경제 계획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그것은 의 류와 장난감으로부터 전자 제품과 기계, 석유화학, 조선업으 로의 이동이었다. 그리고 1977년 경제 계획은 그러한 산업에 더욱 집중했다.
- 박정희의 비전은 한국 경제가 아직 기술적으로 발전된 산업에서 경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던 세계은행을 비롯한 여러 다른 해외 전문가들의 생각과 충돌했다. 박정희 의 일부 자문위원들조차 그의 비전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 나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한국의 역량을 의심했던 많은 이 들에게 현대의 포니는 상징적인 존재로 모습을 드러냈다. 포 니는 한국이 처음으로 국내에서 개발한 자동차였다. 생산은 1975년 12월에 시작되었다. 몇 달 만에 포니는 남미로 수출되 었고, 이후에는 유럽과 북미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초기 모델 에서는 화재 사고가 있었다. 문짝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도장은 값싸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88 전문가들 은 조롱 섞인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현대의 정주영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포니의 품질을 재빨리 개선했다. 소비 자들도 이를 인식했다. 매출은 급증했다. 포니는 미국이나 유 럽의 값비싼 자동차만큼 내구성이 강한 경제적인 자동차가 되 었다. 정주영은 그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다. 박정희 역시 그랬 다. 그리고 한국 전체가 그랬다.
- 전두환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가난한 대가족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의 가구들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 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군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은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 박정희가 죽기 한 해 전, 전두환은 준장으로 승진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무렵에 그는 한 단계 더 올라섰다. 당시 그는 보안 사령부 사령관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그는 적절한 자리에 있 었다.
보안사령관이라는 지위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죽음 을 수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수사가 아 니었다. 이는 전두환이 권력의 차지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 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출발점이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당 시 정승화는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를 체포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분 명한 장애물이었다. 
- 그리고 자신의 초창기 독 재에 반대할 세력을 끌어모을 위험이 있는 3김을 잡아들였 다. 김대중에게는 사형까지 내렸다. 사형은 20년 형으로 낮아 졌다가, 결국 미국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입으로 추방으 로 바뀌었다.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나서 안전함을 느낀 전 두환은 육군 예비역으로 예편했다. 8월에는 최규하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8월이 가기 전에 전두환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선거인단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 었다.

- 변화의 흐름은 도시 중산층의 등장과 성장으로 뚜렷해졌 다. 1987년 기준으로 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은 전체 노동 인구의 50퍼센트에 달했고, 이는 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해 제조업 분야는 전체 노동력의 40퍼센 트를 차지했다.  급여 수준은 아직 높지 않았지만, 점점 더 많 은 사람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 파트를 장만했다. 그리고 자동차와 TV, 냉장고를 살 여유를 누렸다. 또한 고급 레스토랑에 가거나 미장원에서 머리를 했 다. 게다가 정부가 해외여행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하면서 휴가를 이용해 해외로 떠났다.
- 중산층의 증가가 박정희 시절의 엄격한 검열이 완화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한국 문화의 특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매 출 기준으로 전두환 시절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영 화 「깊고 푸른 밤」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위장결혼을 한 캘리 포니아의 불법 이민자의 힘든 삶을 그렸다. 그는 결국 위장결 혼을 깨고 임신한 아내를 한국에서 데려온다.  다음으로 인기 높았던 「고래사냥」은 사랑에 실패하고 환멸을 느낀 젊은 남자 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는 윤락가에서 춘자를 만나 그녀가 잃 어버린 말과 고향을 찾도록 도움을 준다.  이들 영화는 일상 적인 삶이 가져다주었던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는 증가하는 중산층의 관심을 자극했던 주제였다.
변화는 음악 분야에서도 찾아왔다. 한국의 발라드는 1960년대에 블루스와 미국의 발라드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 다. 그리고 1980년대에 한국 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발라드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85년 이광조의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은 30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80년대 말에는 변진섭이 등장해서 <발 라드의 왕자>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발라드는 가족 간 약 속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연애와 결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 중산층 한국인들의 정서를 잘 표현해 주었다. 그 가사 에서 아픔은 짝사랑에 관한 내용이었고 기쁨은 평생을 함께할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였다.
- 한국 사회의 변화는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한국인들은 자유롭게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 었다. 자동차나 TV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즐길 것인지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선택할 수 없 단 말인가? 한국인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사무실과 공장이 점차 증가하는 중산층으로 가 득 차게 되면서 다양한 자유를 누리는 삶과 독재 치하의 삶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 1987년 4월에 전두환은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간접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분노했다. 둘은 신한민주당을 떠나 각자 자신의 정당을 세웠다. "
- 한국인들 또한 전두환의 발표에 분노했다. 당시 시위와 파업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1월에는 경찰이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을 고문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처 음에 당국은 박종철의 사인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의사와 검사, 기자, 목사 등으로 이뤄진 단체가 진실을 규명해 냈다." 전두환 정권은 단지 살인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상을 덮으려 했다.
서울로부터 2,600킬로미터 떨어진 필리핀에서 독재자 페 르디난드 마르코스 Ferdinand Marcos는 수십 년에 걸쳐 그 똑같은 일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86년 2월 에드사 혁명으 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필리핀은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땅에서도 그러한 일을 이룩하고자 했다. 전 두환의 4월 발표는 민주주의를 향한 한국인들이 열망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파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1986년 276건이었던 시위는 1987년 3,749건 으로 크게 증가했다. "한국은 통제 불능한 사회가 되었다. 군 사적 방법만으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광주 민중항쟁의 유 혈 사태가 다시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한국 상황을 우려한 레 이건과 그의 행정부는 전두환이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공적, 사적인 차원에서 로비를 벌였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 위원장은 전두환을 상대로 사적인 로비를 벌였다.  어쨌든 서울은 올림픽을 유치해야 할 국가였다. 당시 노태우가 올림픽 준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6월 9일, 이한열이 머리에 치명상은 입었다. 다음 날 노태 우는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수십만 명의 한 국인이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렇게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한국인이 거리로 나섰다. 파업 건수는 늘 어났다. 전두환, 그리고 이제 노태우가 더 이상 폭력에 의존하 지 말라는 국제 사회의 압박을 받았다. 게다가 경찰이 시위대 를 해산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최루탄의 재고가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이제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말고는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투쟁이 시작되었다. 국민은 승리를 염원했다.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을 선언했다. 폭력은 멈췄 다. 한국인들은 원하던 바를 얻었다. 노태우는 장관들을 비롯 하여 정치인과 기자들로 가득한 방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국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연설을 할 참이었다. 이는 나 중에 「6.29 선언」으로 알려진 대국민 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발전을 위한 특별 선언이었다. 

- 1987년 10월, 한국의 헌법은 2023년을 기준으로 마지막이자 아홉 번째로 수정되었다. 국회가 새 헌법을 통과시키고 난 뒤, 유권자의 94퍼센트 이상이 국민 투표를 통해 이를 승인했다. " 그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은 오직 한 번, 그리고 갱신이 불가능 한 5년 임기 동안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유권자인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그 렇게 한국은 강력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대통령은 5년 후새 로운 이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지 속적인 쇄신을 보장했다.
- 노태우는 1987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전두환의 쿠데 타에 동참했고, 전두환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전두환 방식의 독재 정권을 이어 나가기가 불가능해지고 나서야 민주주의로 의 이양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노태우 정권의 많은 고 위 인사는 전두환 시절에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정 부 조직은 전두환 정권은 물론 많은 경우에 박정희 정권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에 비판자들은 노태우 정권을 <5.5>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이는 전두환의 제5공화국과 그들이 보 기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제6공화국 사이에 있는 정권을 일컫 는 말이었다.
- 그리고 비판자들은 한국의 보수적인 민주화>에 대해 말했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독재자들은 사라졌 다. 한국인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되었으며, 정당은 권력을 차지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체제 의 전면적인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 서 권력을 잡고 독재만큼이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편안해 보이는 기존 엘리트 집단을 대체하지 못했다. 제도와 정당은 스스로 쇄신하지 못했고 젊은이들은 민주화된 정치적 권력이 라는 전리품을 나눠 갖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 그 중요성은 비교적 낮지만 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상징하는 롯데월드가 1989년에 서 울에서 문을 열었다. 롯데월드는 당시 세계 최대의 실내 놀이 공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21세기까지도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많은 한국인은 사회 동요와 저항, 시위의 분위기에서 벗 어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힘들게 얻은 소득과 민주주의를 누 리고 싶어 했지만 그 새로운 테마파크가 과거와의 단절을 상 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사는 실제로 전두환 시절인 1984년에 시작되었다. 

- 워싱턴 컨센서스consensus. 이는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미 재무부가 추진했던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말한다. 세 기관은 모 두 걸어서 15분 거리 내에 자리 잡고 있고 백악관에서도 멀지 않다. 1980년대에 세 기관은 이 개혁 프로그램을 밀어붙였으 며, 특히 남미 지역에 집중했다. 전두환 역시 그 프로그램에 관 심을 가졌지만 궁극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냉전 시대가 지나간 후, 세 기관은 중동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사 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이 정책을 실행했다. 동 아시아 지역도 포함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에는 세 가지 신자유주의 원칙이 있다. 1980년대 이후로 변하지 않고 그대 로 남은 그 원칙이란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자유화를 말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금융 위기와 대규모 실업 사태를 유발 하면서 전 세계 국가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 도 1990년대에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개발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단 하나의 분명한 길처럼 보였다.
이전에 한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관련된 정책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한국 경제의 개발 모형은 민간 기업들과 협력하는 국가의 <잘 보이는 손>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특히 재벌을 비롯한 많은 기업이 국가가 관리하기에 그 덩치가 지나치게 커졌다. 그리고 1990년대 초 한국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면 을 맞이했다. 정치가 완전한 자유를 맞게 된 상황에서 한국은 정책적인 차원에서 경제 간섭주의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경 제는 완전히 자유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미국을 비롯하 여 서유럽과 일본과 같은 부유한 나라들은 어쨌든 자유 경제 를 도입하지 않았던가? 이는 노태우, 그리고 특히 김영삼이 직 면한 질문이었다. 그들은 자유화를 향해 나아가기로 선택했 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한국이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다.

-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과학 기술 자문 위원회는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특수 효과는 특히 놀라웠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더 충격적인 사실이 숨어 있었다. 1년 후 「쥬라기 공원은 현대가 150만 대의 자동차를 판매 하는 것과 맞먹는 수입을 벌어들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룡 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사실이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가장 무시무시한 측면이었다. 한국 정부도 전 세계에 수출할 수 있 는, 이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상품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정부로서는 고맙게도 한국의 기업가들은 인기 있는 문화 상품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러한 분위기에서 SM 엔터테인먼트와 YG 엔터테인먼트, 그 리고 JYP 엔터테인먼트가 각각 1995년과 1996년, 1997년에 설립되었다(SM 엔터테인먼트의 기원은 1989년으로까지 거 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케이팝의 놀라운 성공 신화를 주도한 <3대>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영화 제작사들 또한 크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영화사들이 인 기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왜 우리는 할 수 없단 말인가? 이에 강제규는 한국 특수 요원들과 북한 공작원의 이야기를 그린 「쉬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삼성을 비롯한 여러 기업은 그 작품을 한국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자금을 투자했다. 1999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수 익을 올린 작품이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흥행 몰이에 성공했다. 이처럼 문화는 한국의 또 다른 성장 동 력으로서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김영삼의 경제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경제 성장률은 1994년과 1995년에 9퍼센트를 넘어섰다. 1993년 3퍼센트에 가깝던 실업률은 1996년에 2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불평등 수준은 낮게 유지되었다. 한국은 첨단 선박에서 고유한 케이팝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각화된 상품과 수출에 힘 입어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해 있었다.

- 그런데 한국은 어쩌다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까? 그것은 IMF가 지지했던 워싱턴 컨센서스 정책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97년 한국을 강타한 금융 위기는 본질 적으로 1990년대에 걸쳐 한국이 선택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이 국내 부패 척결의 정책 실패와 맞물리면서 벌어진 결과물 이었다. 국내와 해외 요인이 결합하면서 한국 경제는 불행한 운명의 수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OECD 가입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을 강력하게 압박함으로써 금융 위기를 재촉했다. 한국 정부는 자본 이동 의 자유화 규정을 지켜야 했다. 금융 시스템의 자유화 규정은 국내 기업과 은행이 정부 승인 없이도 외화표시채권을 발행 하도록 하고, 해외 투자자가 원화 표시 채권을 매입하도록 허 용하며,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주식을 사들일 수 있는 한계를 없애는 방안을 담았다. OECD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럼에도 노태우와 김영삼 정부에서 일했던 많은 관료는 이러한 압박을 오히려 환영했다. 그 이유 는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쨌 든 한국의 은행과 기업들은 장기적인 국내 프로젝트를 뒷받침 하기 위해 달러로 표시된 단기 채권을 대규모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좋은 조합이 절대 아니었다. 동시에 부패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정부와 재벌 간의 연결 고리는 그대로 남았다. 실제로 김영삼의 아들은 1997년 5월에 한보 스캔들과 관련된 뇌물수수 및 탈세 혐의로 체포되 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그 철강기업의 여러 임원 이 김영삼의 아들을 비롯하여 장관과 대통령 측근을 포함한 여러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김영삼은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한보 스캔들은 정부와 재벌의 긴밀한 연결 고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줬다. 한 국정부에게는 부패를 뿌리 뽑을 능력, 혹은 어쩌면 의지가 없 어 보였다.
- 나아가 많은 재벌 기업은 은행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혹은 정부의 압력 행사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것은 노 태우 정부도, 그리고 김영삼 정부도 쉬운 대출과 재벌 투자, 그 리고 경제 성장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보 스캔들은 결국 정부 관료들이 그 철강 거물에게 값싼 대 출을 제공하도록 은행을 압박한 사건이었다. 은행들이 자발적 으로, 혹은 정부 압력으로 재벌에게 대출을 제공하고 OECD 가입에 따른 개혁으로 해외 자본이 유입되는 가운데 한국 경 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문제의 조짐은 1997년 1월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당시 한보는 60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파산을 신청했다. 삼미철강과 음료 기업인 진로, 자동차 기업인 기아, 쌍방울 등 여러 다른 재벌 기업이 뒤를 이어 파산을 신청하거 나정부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35개 은 행이 힘을 모아 파산을 막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82 한국 경제 전반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점점 더 많 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부채 문제를 드러내면서 한국은 구조 적 위기에 봉착했다.
마지막 타격은 태국에서 왔다. 1997년 7월 태국은 갑작스러운 자본 인출사태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단기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 하고 있었다. 또한 태국의 바트는 투기 공격을 받았다. 7월 2일 태국 정부는 환율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달러에 대한 바트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돈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후 투 자자들은 태국에 투자한 돈을 회수했다. 단기 달러 표시 채권 을 상환할 수 없게 된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하나씩 쓰러졌다. 겁을 먹은 해외 투자자들은 똑같은 운명에 처할 위험이 있는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필리핀과 특히 인도 네시아가 물망에 올랐다. 그리고 한국의 차례가 왔다.
투자자들이 한국으로부터 돈을 빼내 가기 시작할 때, 한국정부와 은행, 기업들은 서울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무실에서 그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기업의 파산 은 은행에 엄청난 부실 채권을 남겼다. 은행들은 단기 달러 표 시 채권을 상환해야 했다. 한국은행은 미국 달러 대 원화의 가 치를 유지하기 위한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위기에 직면했다. 중앙은행이 두 통화 간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면 은 행과 기업들은 부채를 상환할 수 없었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 면 한국 기업들은 외국 채권자에게 달러를 상환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11월 21일에 김영삼 정부는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역사로 남았다. 이 일은 한국인들이 1960년대 이후, 첫 진보 대통령 선출과 더불어 깨어나고 싶은 악몽으로 기록되었다.

- 2002년 12월은 386 세대를 위한 진실의 순간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2000년 총선에서, 그리고 2002년 6월 지방선거 에서 이름을 바꾼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을 이겼다. 그리고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한 이회창은 대선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했다.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은 혜성처럼 나타난 후보자였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처음으로 국민경선제를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다. 제5공화국 청문회 스타이기도 한 노무현은 경선에서 이길 것으로 보이지 않았 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그리고 그는 대선 운동 기간 내내 여 론조사에서 이회창을 추격했다. 선거가 임박했을 무렵에 노 무현과 이회창은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나이 많은 유권자들은 전통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 고자 하는 의지가 더 높았다.
- 선거 당일에 386 세대는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투표장에 나섰다. 동시에 노무현은 한국의 X 세대는 물론, 밀레 니얼 세대로부터 <예상치 못한> 지지를 얻었다. 1970년대에 태어난 X 세대는 386 세대를 비롯한 이전 세대에 비해 더 자 유로웠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특별한 애착을 느끼지도 않았다. 어쨌든 한국의 독재에 맞선 김대중의 투쟁은 그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 싸움은 기껏해야 그들이 어린아이였거나 10대 시절에 겪었던 지나간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대 중의 진보적 개혁의 계속되기를 원했고, 이는 또한 노무현의 약속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이후로 태어난 밀레니얼은 대학생 단체가 그들에게 불어넣었던 더 자유로운 가치관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냉담한 것으로 알려 진 밀레니얼 세대는 온라인 뉴스를 통해, 그리고 문자 메시지 와 막 시작되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집결했다. 당시 한국에 막 들어왔던, 그리고 인터넷의 위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 던 외국인들은 어떻게 이 새로운 매체가 당시 그들의 나라에 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쳤는지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는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 노무현은 아마도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일 것이다. 2000년에 창간되어 한국 최초로 독자들의 기고를 기사로 실 었던 온라인 신문인 오마이뉴스는 386 세대와 X 세대, 특히 젊은 밀레니얼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 이러한 젊은 매체 가 당시 선거의 판도를 뒤집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 는사람은 거의 없다."

- 사회적 변화와 호주제 폐지
진보주의 10년은 한국의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와 함께 이뤄 졌다. 그 변화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노력에 의해, 그 리고 동시에 스스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었다. 무엇보다 사회 속 여성의 역할이 크게 바뀌었다. 1990년 대 중반 상속권과 이혼에 따른 권리와 관련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막기 위해 도입된 법률의 변화는 즉각적인 효과를 드 러냈다. 1990년대 초에서 노무현의 임기가 막바지에 이른 2007년 사이에 이혼율은 두 배 이상 높아졌다. 다른 한편으로 출생률은 지속적인 하향세를 그렸다." 동시에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1997년에서 2007년 사이에 26세 이하에서 31세이상으로 높아졌다.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용인 가능한 모습이 되었다. 물론 보편적인 현상은 아 니었지만 미혼모도 더 이상 사회적 금기가 아니었다. 결론적 으로, 2000년 중반 한국 여성들은 과거의 유교 가치관의 명령 에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선진국 여성들과 같은 방식으 로 행동했다. 그리고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이나 여학생의 목 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이러한 흐름은 계속 해서 이어졌다.

- 2013년 2월 박근혜는 한국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한국 역사상 왕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 대 통령이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보수 진영에서도 일부 반 대세력은 이러한 점에서 박근혜를 비판했다. 그들은 새 대통 령이 좀처럼 소통하지 않으며 은밀한 방식으로 아무런 논의 없이 의사 결정을 내린다고 지적했다. 10 실제로 대중과의 단절 과 은밀한 의사 결정 방식은 이후 박근혜가 몰락하게 되는 원 인이 되었다.
그래도 박근혜는 취임 후 몇 달 동안 허니문 기간을 누렸다. 그녀는 내부적인 분열로부터 거리를 유지했고, 불평등 해소를 위해 노무현의 정책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박근혜는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36곳에 달하는 정 부 및 공공기관을 이전했다." 박근혜는 이명박과는 달리 성 장 그 자체보다 행복과 자기 충족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후 5월에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는 미 의회의 상하원 합동회의에 서 이례적인 연설을 했고 호평을 받았다. 이는 고국에서 새 대 통령의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름 동안에 그녀의 지지율은 60퍼센트를 넘어섰다. 12 박근혜는 보수주의자였지 만 이명박과 비교할 때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자였다. 그 리고 상대 진영과의 분열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 다. 이는 일부 진보주의자조차 인정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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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4

Quote of the day 2024. 7. 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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