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치측정의 단위, 교환의 매개체, 가치저장이 수단으로서 동일한 것을 사용하도록 합의할 수 있을까? 정부가 화폐를 창출하고 규제하는 데 개입함으로써 협응 문제를 해결하고, 화폐의 네트워크 효과를 완전하게 누리도록 도울 수 있다. 법정화폐에서 법정이라는 핵심부분은 정부가 어떤 화폐를 세금으로 받아줄 것인지, 즉 개인이 정부에 진 부채를 갚는데 어떤 화폐를 쓸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 화폐의 또 다른 핵심적인 측면으로서 부채로 간주되는 화폐가 있음. 20달러짜리 지폐를 보면, 지폐 위에 '이 지폐는 공적이고 사적인 모든 부채에 대한 법정화폐'라고 인쇄되어 있음. 이는 연준이 발행하는 지폐다. 모든 나라의 지폐에 이런 문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흑백으로 이렇게 쓰여 있다. 그 지폐를 가진 사람이 자기 부채를 갚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의미. 이 지폐에는 또한 미합중국이라는 단어가 인쇄되어 있고, 미국 재무부 직인도 찍혀 있음. 그리고 미연방의 자산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연방 재무관과 미 재무부를 이끌어가는 재무장관이라는 미국 정부 내 서로 다른 두 직책을 가진 관료들의 서명도 있음. 연준이 미국 정부기관인 만큼 연준지폐는 미국 정부부채의 한 형태다.
- 기술적으로 은행권은 중앙은행인 연준의 부채이며, 따라서 은행권은 연준 재무상태표의 부채항목에 표시됨. 여기서 은행권이 부채항목에 표시된다면, 정확하게 중앙은행은 무엇을 빚지고 있는 걸까? 현대 법정화폐 시스템에서는 은행권 그 자체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빚진게 없다. 연준 지폐와 같은 은행권은 부채일 수 있지만, 상환할 필요가 없는 특별한 종류의 부채다.
화폐를 발행한 쪽에 지폐를 제시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금이나 은을 요구하고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가정하건대, 당신이 연준에 가서 20달러짜리 지폐를 제시하고서 당신에게 빚진 부채를 갚으라고 요구한다면, 연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20달러 지폐를 그대로 되돌려주거나 10달러 지폐 두장으로 바꿔주는 것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정부에 세금으로 내야 할 20달러를 빚지고 있다면, 당신은 은행계좌에 20달러를 입금한 뒤 이를 제시함으로써 빚을 갚을 수 있다. 은행권이라는 정부부채는 당신에게는 자산이며, 납세의무로 정부에 진 빚을 소멸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화폐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화폐의 일부는 정부를 뜻하는 중앙은행의 부채이며, 사실 대부분 상업은행들의 부채다. 지폐와 동전, 또 상업예금 형태의 화폐는 액면가로, 즉 일대일로 교환할 수 있는데, 대개 이를 당연시하는 게 화폐 시스템의 특징이다. 만약 은행에 당신의 100달러가 입금되어 있다면 은행은 당신에게 100달러를 빚지고 있는 셈. 만약 은행에서 100달러를 인출한다면, 중앙은행이 대신 당신에게 100달러를 빚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100달러 지폐를 은행계좌에 입금하면, 자산이 정부부채에서 해당 은행의 부채로 바뀌게 됨. 이는 정부와 중앙은행, 상업은행이 화폐창출에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뜻이다. 또 일반적으로 서로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서로 구분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의 광범위한 관점과 주제가 잘 나타난다.
- 무엇인가에 의해 가치가 담보되는 화폐가 주권정부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용 외에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담보되지 않는 법정화폐로 발전하게 된 과정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법정화폐는 정부가 가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 법정화폐가 실제 가치를 가지는 것은 많은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 은행계좌에 있는 모든 달러는 다음의 세가지 방법 중 하나로 만들어짐.
첫째, 은행이 대출을 해줄때,
둘째, 정부가 지출을 하고 나서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지출한 자금을 다시 빨아들이지 않는 적자예산을 편성했을 때,
셋째, 중앙은행이 민간이 보유한 국채나 기타 자산을 사들일 때다.
은행과 정부, 중앙은행은 상호간에 연결된 시스템의 일부로, 각자의 방식대로 화폐 창출에 관여. 어떤 경우든 돈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더 정확하게 말해 컴퓨터의 키보드를 누르는 것만으로 돈은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현대 화폐의 미스터리다.
- 은행이 받은 예금을 대출한다면, 예금은 대출재원을 조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자금이라는 이론이 있을 정도로 이 같은 설명 방식은 우리에게 뿌리깊이 박혀 있다. 이 이론은 대중은 물론이고 학계의 상상력까지 지배하고 있지만, 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는 정반대다. 예금이 은행의 대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대출이 예금을 만들어낸다. 대출자의 예금계좌에 은행이 돈을 입금해 주므로 대출은 예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금이 대출에 자금을 제공한다는 건, 은행의 재무상태표 양쪽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관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 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한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 펀드와 파이낸스라는 두 단어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회사가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거나 사업을 크게 확장하려 할 때, 현금이 충분치 않아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할 수 있다. 이때 기어이 은행대출을 받아 자금을 조달한다는 뜻으로 펀드나 파이낸스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다. 대출이 없었다면 사업확장은 이뤄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은행이 제공하는 신규대출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만들어내고 사업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은행은 예금을 유치한 뒤에 그 예금으로 대출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일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착시다.
- 정부부채와 적자예산에 대한 관점은 논리학자들이 범주오류라고 부르는 잘못된 사고에 기반. 여기서 범주오류란 정부를 마치 하나의 가계처럼 여기는 것인데, 실제 정부는 해당국가의 모든 가계를 다 합친 것에 더 가깝다. 정부가 항상 균형예산을 갖춰야할 이유는 없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됨.
정부부채와 미래 세대의 부담을 연관지어 생각할 때, 현재 또는미래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대내 문제와 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과 미래에 태어나 살아갈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대간 문제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함. 정부부채를 우리 손자들에게 지우는 부담이라고 하는 주장은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세대간 갈등에 해당. 이를 검토할 때 같은 시기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와 같은 세대내 문제와 혼동하는 함정을 피해야 함. 예를 들어 정부가 10년에 걸쳐 대형 댐을 건설한다면 오늘날 세대내 효과는 일부가 댐 건설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 자원을 제공해야 하도 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자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의 세대 내 효과는 거주지역에 따라 어떤 이들은 댐의 물을 사용해 많은 혜택을 얻지만 다른 이들은 훨씬 적은 혜택만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간 효과는 한 세대가 희생이나 투자를 하고, 그 혜택은 다음 세대가 본다는 것이다.
정부부채에 대해 간과되는 측면 중 하나는 정부부채가 금융자산인 동시에 금융부채라는 것이다. 재무상태표에서 자산과 부채항목 양쪽에서 동일한 내역이 총액으로 상쇄되기 때문에 놀랍게도 미래세대가 순재무 측면에서 물려받는 것은 항상 순제로다. 순부채가 제로가 되면, 이를 물려받는 세대에게는 어떤 부담도 되지 않는다.
- 현세대는 자기 세대에게만 빌릴 수 있고, 미래 세대에게는 빌릴 수 없다. 미래 세대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았기에 현세대에게 빌려줄 것이 없다. 모든 세대는 이전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보다 더 크고 좋은 자본을 물려준다. 자본스톡은 다리나 도로, 공항, 공장, 통신 네트워크 같으 물리적 생산자본만이 아니라 과학적 문화적, 기술적, 지적, 제도적 지식이나 사회적 자본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적, 기술적, 문명적 발전의 핵심이다. 각 세대는 이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이며,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들은 지구와 사회를 물려받은 것보다 더 나은 상태로 넘겨줘야 할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늘어나는 정부부채가 미래 세대에 부담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과 무관하다. 이 세상에는 걱정해야 할 것이 많지만, 미래 세대에 너무 많은 정부부채를 남기는 건 그다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다. 만약 어느 시점인가에 정부부채가 너무 많아지면 통화정책과 긴축재정 같은 거시경제정책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 만기가 도래하면 해당 국채는 만기이월되거나 차환된다. 국채는 상환할 필요도 없고 실제로 상환되는 일도 없다. 물론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한가지 예외가 있을 수 있다. 정부가 비정상적으로 흑자예산을 운영하면서 민간부문에 지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세금으로 걷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은행 시스템의 예금과 준비금은 흑자예산만큼 줄어들고, 중앙은행의 정부예금은 늘어난다. 정부가 재화와 서비스 지출과 사회복지 이전지출로 민간에 쓰는 돈보다 세금으로 가져가는 돈이 더 많은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만기도래하는 국채를 차환하지 않고, 흑자예산으로 국채를 상환해 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정부재무상태표에 미치는 순효과는 흑자예산만큼의 정부발행 국채가 시스템에서 사라질 뿐 준비금과 정부예금, 은행예금 등 다른 모든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