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8'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4.06.08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일기 2
  2. 2024.06.08 오십에 읽는 순자 1
  3. 2024.06.08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2
  4. 2024.06.08 20240608

- 회사에 다니는 동안 퇴직 후 삶에 대해 고민한 적이 별로 없었다. 먼저 퇴직하는 선배들을 보면서도 나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머지않았다는 친한 선배의 충고에는 오히려 시간이 없는데 무일 더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런데 나에게도 시간이 불과 채 1년이 남지 않았다.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퇴직은 직장인의 숙명이다. 대기업 임원도 다르지 않다. 숙명과 맞서는 방법은 하나다. 떠나야 할 때는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 그것만이 떠나는 직장인을 위한 유일한 처방이다.  
- 흔히 이별을 끝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시작이기도 합니다. 과거는 돌아보지 말고 미래에 집중할 때 이별의 긍정적 효괴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반대를 경계해야 합니다. 내 성장을 저해하는 경우입니다. 이별 후와 이별 전에 조심해야 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별 후에 해어진 상대에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새 출발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와 이별 전에 헤어짐을 미리 걱정하여 상대와의 관계에 위축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안타깝습니다. 특히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다면 더 그렇습니다. 직 
장인에 대입하면, 퇴사 또는 퇴직 후에 회사를 원망하느라 에너지를 당비하는 경우나, 재직 중에 혹시 잘리지 않을까 하고 눈치 보느라, 해야 하는 일도 해야 하는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후자 의 경우, 오히려 원치 않는 이별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성과는 도전과 소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별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도전과 소신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 결국 이별 통보를 잘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이별로 인해 마음의 상처나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나아가 이별 전보다 더 잘 산다는 뜻일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이별에 둔감해지고 이별에서 자유로워져야합니다. 그깟 이별 상대, 내 인생에 별 비중 없는 하등의 의미로 만들어야 합니다. 뭐든지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 상대적 후유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최선은 다하되 악영향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회사의 이별 통보를 잘 받아들이려면, 결국 회사와의 관계에서 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실력을 키우셔야 합니다. 모든 관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합니 다. 회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더 센 사람이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와의 관계에 있 어 힘은 업무 능력이 되겠지요. 
우선 일부터 잘하고 보아야 합니다. 일 잘하는 법은 직급과 직책에 따라 다릅니다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당백의 실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주어진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은 기본이고 직급이 높아짐에 따라 팀내 구명을 메우는 일, 조직을 결속시키는 일, 회사의 성장을 견인하는 일 등 점차 범위를 넓혀가야 합니다. 일 을 잘한다는 의미에는 성과 창출뿐 아니라 협업, 리더십, 팔로위십 등 구성원 간의 관계적 측면도 포함됩니다. 회사는 팀워크로 움직이는 조직임을 기억하고 각자 위치에 맞는 역량올 갖추시길 바랍니다.
- 다음으로 회사를 제대로 포지셔닝해야 합니다. 회사가 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종 목표 점까지 가기 위한 구간별 프리패스 정도로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어렵게 입사해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회사가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에 길들여져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착각하거나 더러는 회사에서 뼈를 묻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만, 맹목적 추앙은 위험합니다. 
-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래서 퇴직 후 나에게는 남은 것이 별로 없다. 그 흔한 취미도, 있을 법한 특기도, 마음을 깊이 나눌 친구도 몇 없다. 내 삶의 대부분 관계가 일로 맺어졌고, 거의 모 든 시간을 업무로 채운 탓에 내 삶에서 회사가 사라지자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 곳만 보고 달렸던 무모한 선택에 대한 기회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경험하고 나서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 이 었음을 깨달았다. 
사는 동안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으며 마음-을 졸일 것이다. 검사 결괴를 기다리는 동안 일에만 몰두해 나 자신을 챙기지 못한 과거의 나를 반성할 것이다. 
- 퇴직 후 내 삶이 도미노처럼 느끼졌다. 하나가 쓰러지면 뒤이은 조각들이 넘어지는 파국의 게임. 퇴직한 후로 전혀 예 측하지 못한 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마이니스통장은 물론 대출, 연금, 보험, 검진 등 생활 전반적인 영역에서 기한 만료 후에 재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하나같이 혜택이 없어지거나 자격이 주이지지 않는 공통점이 있이 여유가 사라진 퇴직자의 지갑을 더 팍팍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처럼 거미줄 같이 촘촘한 사회망 속에 살고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모두가 퇴직전에 구상했던 퇴직 후 삶에는 없던 그림들이었다. 당연하다 생각했으니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
- 회사를 떠나면 누군가를 위한 일회용 소모품이 되기 쉽다 그가 몸담았던 기업과의 피트너십을 희하는는 누군가에게, 아이디어는 있으나 사업은 엄두를 내지 못히는 누군가에게 대기업 퇴직자는 분명 매력적인 존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퇴직자가 가진 역링이 아니라 속칭 퇴직자의 껍데기일 가능성이 높다. 퇴직한 선배들이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는 씁쓸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달콤한 위혹일수록 더 따져 보아야 했다. 세상은 직장생활만 오래 한 반쪽짜리 퇴직자에게 과분한 처우를 해줄 민큼 너그러운 곳이 아니었다. 니는 니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다르 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힘. 살아남으려면 힘을 키위야 했다 회사 안 삶과 회사 밖 삶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 무엇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제껏 나를 더 성장시키기 위해 특정한 대상에 의미를 두 며 살아왔다. 마치 성적표처럼 그 결괏값으로 나의 성장 정도를 판단했다. 그중 하나가 회사였다. 회사의 인정을 통해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지를 가늠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목적이 변질되 고 균형이 깨졌지만, 확실히 시작은 나로부터 출발했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로 회사를 선택한 거였다. 회사는 내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 했다. 
-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균형이었다. 한 곳에만 과중한 의미를 두었을 때의 고통을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면 이후로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 당장 한 달 생활비를 현재의 1/3으로 줄이고 업무외 연락과 약속을 모두 끊어보세요. 그로 인해 궁핍과 고독을 느끼셨다면 거기에 백 배 이상의 고통을 곱해보세요. 사회적 고립감, 건강악화 등 퇴직자만 느끼는 감정이 준비없는 퇴직이후 당신이 마주할 현실입니다. 체감하시는 만큼 의지가 생길 겁니다. 앞서 최직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선배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네요 
- '비려야 한 것'은 욕심과 지존심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전 직장에서 받았던 대우를 유지하며 바로 이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향 그래프도 꺾이며 올라가는 것처럼 흡족하지 않더리도 욕심을 비리고 하락점을 수용할 줄 아셔야 합니다. 가져야 할 것은 자신감과 인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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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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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순자

인문 2024. 6. 8. 07:15

-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 니다. 비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온다 사람들은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면 재난을 막는 의식을 행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 고, 점을 처 본 뒤에야 큰일들을 결정하는데 그렇게 해서 바람이 이루어진다고 여기기보다 형식을 갖추어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그런 일을 하고, 백성은 신령스러운 일이라 여겨 그런 일을 한다. 형식을 갖추기 위해 그런 일을 하면 길하지만, 신령스럽다 여기고 그런 일을 하면 흉하다." 
《순자》 〈천론편〉 9장 
기우제는 형식일 뿐 결코 신령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 다. 사람들이 기우제를 거행한 주목적은 형식적인 이벤트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 공자라는 탁월한 현인이 나타나 흐트러진 예악을 제정하고 질서를 잡았으나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전국 시대가 시작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묵자의 겸애주의 정신을 따르는 학파가사람들들의 박수를 받았고 공자의 도는 점점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현인이 바로 맹자와 순자입니다. 기원전 497년 공자 시후의 유학은 그게 두 갈래로 발전합니다. 공지의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이 렸던 증자가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가르쳤고, 자사가 죽은 지 10여년 후에 맹자가 태어났습니다. 맹자는 자사의 제자들로부터 공자의 유학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어진 마음, 충심, 믿음 같은 덕을 중요하게 생각히는 공자의 정신 철학은 증자에 이이 자사로” 그리고 맹자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실천과 예의를 존중히는 공자의 행동 철학은 공자의 제자였던 자유와 자하를 거쳐 순자에게로 계승되있습니다. 즉 맹자의 철학이 주관적이고 이상적이었다면 순자의 철학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순자는 말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에 힘쓰고, 하늘에 달린 것은 흠모 하지 않기에 날로 발전한다. 소인은 자기에게 있는 것은 버리고 하늘에 달린 것을 흠모하기 때문에 날로 퇴보한다. ” 
- 삶이 안정되고 순조로운 시기에는 평화와 조화로운 삶을 위해 정신과 정의를 북돋아 주는 《논어》나 《맹자》를 읽어 보는 편이 좋습니다. 하지만 미 래가 불투명하고 번화가 필요한 시기 에는 막연한 이상보다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난세의 전국 시대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순자》를 읽어 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이는 국가나 사회나 개인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 니다. 내가 믿는 세상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신이 최고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신도 그들에게는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나의 가치가 지금까지 이룬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만들어진 나의 가치도 소중하지만 그것이 최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 멋지고 더 가치 있는 삶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도 기존의 생각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면 《순자》를 읽어야 할 시간입니다. 
- 4순자는 하늘에는 하늘의 길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기에 하늘과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정의했습니다. 순자의 주장을 들으면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라 고 말한 성철 스님의 말씀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순자는 하늘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무작정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용하고 활용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편이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때 던진 순자의 과감한 논리 였습니다. 순자는 하늘(자연)에는 하늘의 법칙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법칙이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순자의 사상이 전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하늘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악하게 살면 천벌을 내리고 선하게 살면 복을 내려 주는 권선징악의 선한 하늘이었습니다. 맹자는 그런 선한 하늘의 명령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그 본성을 잘 따른다면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어떤 못난 군주도 성선설을 믿는다면 훌륭한 명군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순자는 왜 기존의 하늘에 반기를 들었을까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학자로서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 전국 시대 말, 서쪽 지방의 새로운 강국인 진(秦)나라가 법치로 무장해 천하를 무력으로 굴복시 켰습니다. 맹자가 아무리 성선설을 외치고 다녀도 세상은 점점 더 극악무도한 전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순자는 사람이 폭력을 행하는 세상에서 “사람은 선하다"라고 외치기보다 군주와 백성을 바르게 이끌 현실적인 유학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과 함께 천론, 즉 “인간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달렸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때, 순자가 하늘에 대한 인식을 뒤집고 자연의 하늘을 말한 이유입니다. 
- “굽은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를 대고 쪄서 바로잡은 뒤에야 곧아지고,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로 간 뒤에라야 날카로위지듯 사람의 악한 본성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을 받아야 다스려진다. 스승과 법제에 의해 교화되고 학문을 쌓으며 예의를 실천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본성과 감정을 멋대로 버려두고 멋대로 행동하는 데 안주하고 예의를 어기는 자를 소인이라고 한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분명히 악하나 선해지는 까닭은 작위 때문이다. 
《순자》 〈성악편〉 2장 
- 순자는 조선의 세종과 영조 같은 성군들이 행한 예의 정치를 통해 조화로운 사회와 국가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패권을 쟁취하기 위한 권모술수와 전쟁으로 점철된 전국 시대를 유가의 덕치와 예치로 극복하려 한 진정한 유학자였습니다. 
“예는 어떤 상황에서 생겨났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바라는 것이 있는데,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곧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구함에 일정한 기준과 한계가 없다면 반드시 다투게 된다. 쟁탈이 일어나면 혼란이 있고 혼란이 있으면 곤경에 빠진다. 
옛 임금께서는 이 혼란을 싫어했기 때문에 예의를 제정해 사람들의 등급과 한계를 구분하고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켰으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공급했다. 그리하여 욕망이 결코 물자로 인해 곤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물자가 결코 욕망으로 인해 부족해지지 않게 해 양자가 서로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안배했는데, 이것이 예가 생겨난 이유다. 그러므로 예란 사림들의 욕망을 충족해 주는 것 이다." 
《순자》 〈예론편〉 1장  
- 깊은 숲속에서 자라는 난초는 보는 사람이 없어도 향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군자가 학문을 하는 이유는 꼭 출세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곤궁해져도 괴로워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일이 생겨도 뜻이 약해지지 않는 것이다. 
비록 현명하다 해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뜻을 실천하기가 어렵지만, 때를 만난다면 뜻을 펼치는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그러니 군자는 널리 공부하고 행실을 단정히 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옛날 진(晉)나라 문공은 망명 중에 조나라에서 패자가 되려는 마음을 품었다. 월왕구천은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면서 패자가 되려는 마음을 품었다. 제나라 환공은 거나라에 망명하면서 패자가 되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므로 처지가 곤궁해 보지 않았던 사람은 생각이 원대할 수 없고, 방랑의 괴로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뜻이 광대할 수가 없다. 너는 내가 처참하고 어려운 처지라 하더라도 얻는 것이 없으리라고 어찌 알 수가 있겠느냐?"
그러면서 공자께서 한마디 더 했습니다. 
"한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순자》 〈유좌편〉 8장  
- 제자인 자로가 공자께 물었습니다. 
“군자도 걱정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샀습니다. 
“군자는 자기가 바리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는 얻으려 했던 그 뜻을 즐기고 바라는 것을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처리하는 것을 즐긴다. 그런 까닭에 평생 즐거움만 있고 단 하루도 걱정이 없다. 
소인은 자기가 바리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는 얻지 못해서 걱정하 
고 바리는 것을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걱정한다. 그런 까닭에 평생 걱정만 있고, 단 하루도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순자》 〈자도편〉 7장 
- 선택이 행복과 즐거움을 만드는 기준이이라면 인생 후반의 선택에는 조금 특별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잘 선택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어쩌다 선박은 '어쩌다 인생을 만듭니다. '특별한 선택은 '특별한 인생을 만듭니다. 그래서 선택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의 작가인 빅토로 위고는 “약한 자에게 미래는 불가능입니다. 겁쟁이에게 미래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용기 있는 자에게 미래는 기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따르면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선 물 같은 시간입니다. 
- 말에 신의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것과 의심스러운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나에 따라 결정된다. 의심스러운 것은 말하지 말고, 물어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 군주의 도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이고, 신하의 도는 일에 대해 잘 아는 것이다. 그런고로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어떤 일을 위해 명을 내린 일이 없으나 모든 일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 한번은 나이 어린 노나라 군주 이1공이 칠십 노인인 공자에게 물있 
습니다. 
“사람을 취해 쓰는 법을 가르기 주십시오." 
이에 공자까1서 말했습니다. 
“모든 일은 제각기 책임을 맡은 관리에게 일임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행동이 급한 자는 못 쓰며, 너무 경솔한 자도 못 쓰고, 너무 말 많은 자도 못 씁니다. 행동이 급한 지는 재물을 탐내고 경솔한 자는 일을 어지럽히며 말이 많은 자는 거짓말을 잘합니다. 
이런 까닭에 활이란 팽팽하게 당긴 뒤에 힘이 경하기를 바랄 것이며, 말이란 부려 본 뒤에 잘 달리기를 바라야 하며, 선비는 반드시 성실한 뒤에 슬기롭고 재능이 있는 지를 구해야 합니다. 성실하지 못하면서 재능이 많은 자는 승냥이와 이리 같아서 가까이할 수가 없습니다.” 
《논어》 〈위령공편〉 19장 
- “군자는 재능이 있어도 없어도 좋다. 재능이 있으면 관대하고 온화 하며 정직한 품성으로 사람들을 계발하고 인도하며, 능력이 없으면 공경하고 겸손한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정으로 섬긴다. 그러므로 군자에게 재능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배우는 것을 기뻐하고, 재능이 없으면 그에게 일러 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소인은 재능이 있어도 없어도 추하다. 재능이 있으면 멋대로 오만하고 그릇된 일을 하면서 남에게 교만하게 행동하며, 재능이 없으면 질투하고 원망하고 비방하며 사람들을 쓰러트리려 한다. 그러므로 소인에게 재능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배우는 것을 비천하게 여기고, 재능이 없으면 그에게 일러 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순자》 〈불구편〉 3장 
- 중간이 아닌 중앙으로 가라 
성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용》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자사의 저서로 알리진 《중용》은 에에 대한 기록과 해설이 담긴 《예기》의 31편이었는데, 송나라의 유학자 주자가 이를 특별히 '중우이라고 부르면서 《대학》, 《논이》, 《맹1자》와 더불어 유교의 사서(四書)가 되었습니다. 총 33장으로 구성 된 《중용》은 1장부터 20장까지는 공자의 말을 통해 중용에 관한 개념을 치1기1적 
으로 정리했으며, 가장부터 33장까지는 지사의 성론(|가b』戈|1|兪까 즉  성(誠)에 대한 개념을 정리했습니다. 
- 중용(中庸)의 중은 (가운데' 혹은 '중간을 간다는 의미가 아니 라 '시중(時中)', '적중(的中)', '집중(執中)'의 중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먼저 시중이란 '모든 일에는 다 적절한 때가 있으니 때를 맞추어라'는 뜻입니다. 삶에는 시기가 중요한 경우가 많기에 때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적중은 '궁사는 화살시위를 당길 때 과녁의 정중앙에 화살촉을 일치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일과 목표를 정확히 일치시켜 추진하려는 정성과 노력을 의미합니다. 어떤 일이든 문제의 핵심을 잡고 흔들어야 쉽게 풀리기 때문입니다. 집중 역시 '일의 본질이나 핵심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중용》에서 자사가 강조한 성(誠)이란 무엇일까요? 중용적 인간은 지성적 인간으로, 지성이란 '지극히 참되고 성실한 것 을 말합니다. 자사는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誠)만이 자기의 타고난 천성과 본성인 성 (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원래 선한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참되고 성실하게 임한다면 누구나 그 본성에 따라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삶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착하고 열심히 살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사에 따르면 참되고 성실한 사람이 바로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성실은 군자가 지켜야 할 것이며 정치의 근본이다. 성실하면 그와 비슷한 사람이 모여든다. 성실하면 일에 성공하지만 성실을 버리면 일에 실패한다. 성실하게 일을 하면 일이 가벼위지고, 일이 가벼워지면 행하기 쉽고 행함을 멈추지 않으면 일을 이루게 되며, 일을 이루게 되면 재능-을 다해 언제까지 일을 계속해도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데 이는 이미 변화했기 때문이다." 
《순자》 〈불구편〉 9장 
- “군자는 자기를 헤아리는 기준으로는 목수가 먹줄을 놓듯이 하고, 남을 대하는 기준으로는 시공이 배를 젓듯이 한다. 스스로에게는 먹줄 같은 똑바른 기준으로 헤아리기에 충분히 천하의 기준이 될 수 있고, 남을 대할 때는 시공이 배를 젓는 것처럼 능히 너그럽게 포용해 많은 사람을 활용하니 세상의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현명하지만 노둔한 사람도 받아들이며, 지혜가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도 받아들이며, 박식하지만 천박한 사람도 받아들이고, 순수하지만 잡된 사람도 받아들인다. 바로 이것을 일러 모든 사람을 두루 포용하는 술법 , 즉 이라고 한다." 
《순자》 〈비상편〉 10장 
- “높은 산에 올라가 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것을 알지 못하고, 깊은 계곡 가까이 가 보지 않으면 땅이 두텁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일찍이 나는 발돋움을 하고 바라본 일이 있었으나 높은 곳에 올라 가 널리 보는 것만 못했다.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군자도 널리 배우며 매일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살피면 앎이 밝아지고 행동에 허물이 없을 것이다. 오나라나 월나라나 오랑캐의 자식들도 태어났을 때는 같은 소리를 내지만 자랄수록 풍습이 달라지는 이유는 가르침이 다르기 때문이다.” 
《순자》 〈권학편〉 1장 
- “군자가 배움을 구하는 방법은 유익한 것이 귀에 들어오면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온몸으로 익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간단한 말과 작은 움직임이라도 모두 다른 사람이 본받을 기준이 될 수 있다. 소인은 유익한 것이 귀에 들어오면 곧바로 입으로 뱉는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밖에 안 되니, 어떻게 일곱 자나 되는 몸을 아름답게 변화시길 수 있겠는가? 
옛날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는데 요즘의 배우는 자들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학문을 한다.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자신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고 소인이 학문을 하는 것은 남에게 내놓아 이용하기 위해서다. 군자는 반드시 고을을 가려 살며, 반드시 어진 선비들과 어울려 노는데, 이것은 악해지고 삐뚤어지는 것을 막아 올바름으로 가까이 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순자》 〈권학편〉 8장 
- “부리는 것이 구해서 된다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사람처럼 그런 미천한 일이라도 하겠지만 구해서 얻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 
《논어》 〈술이편〉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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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뜨기 얼마전, 자기 면역성 충동에 휩싸인 고흐는 스스로 왼쪽귀를 잘라바렸다. 그리고 제 발로 정신병원에 찾아가 입원했다. 본인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됐고, 이후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멈추거나 제지할 수 없었다. 고흐는 죽어가면서 항상 자신을 돌봐왔던 동생 테오에게 마지막 부탁들 남겼다.
"부탁이니까 울지마. 이게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 슬픔은 영원히 남는거야. 난 이제 집에 가는 거라고"

- 루터는 62 세 때 침대에 누운채로 고향 아이슬레벤을 향해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그는 매우 두려워했다.
“아프고 두렵 지만 그곳으로 갑니다." 
그때 루터의 나이는 당시 평균 수명을 훌쩍 넘은 상태였 다. 죽기 전에 그는 두 손을 하늘로 경건히 들고 자애로운 하느님에게 최 많은 영혼을 받이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깨달은 한 가지 사살을 다식 이 말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 제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영국 소설가 그리고 사교계에서 인기와 비난을 동시에 차지한 인물 이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화려한 삶을 추구하며 높은 심미 안을 가신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은 버릴 수 있지만 화려한 삶만은 버릴 수없소" 
그러나 와일드는 젊은 나이에 수많은 빚과 불후의 명언들 만을 남긴 채 가난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그는 임종을 맞이할 때, 파리 알자스호텔 방에 펼쳐신 카펫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볍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카펫 또는 나, 우리 둘 중 하니는 지위져야만 할 것 같소" 
그는 평소 독주를 즐겨 건강이 나쁜 편이었고 또 매독으로 고생하고 있음에도 샴페인을 주문했다. 평소 종교에 경솔 한 냉소를 퍼붓던 그였지만 “가톨릭 이야말로 죽음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깨닫고 정부를 보내 자애로운  신부를 데려올 것을 부탁했다. 
정부는 커스버트 던 신부를 데려왔고, 신부는 오스카에게  가톨릭 세례를 행하고 병자 성사를 치러주였다. 죽음을 앞 둔 와일드는 고열에 시달렸으며 거기에 뇌막염으로 인한  섬망 증상도 계속되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지난날을 회상 했다. 
“예전에 나는 돈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돌이켜보니 새삼 깨달았지 뭐야, 그것이 진리 였음" 
와일드는 샴페인 한 찬을 들이키고 아편 주사를 한 대 맞 은 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을 수 있었다. 그는 쾌활하고 풍자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내 처지를 넘어 분에 넘치게 죽음을 맞이하네."

- 처칠은 자기 삶의 규칙이 “운동을 하지 않고 위스키와 여송연 즐기기" 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자조적인 농담일 뿐 실제로 는 그렇지 않았다. 젊은 시절 장교로 복역하면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처칠은 운동을 매우 즐겼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 냉정하고 풍자적인 태 도를 보였다. 이미 1949년에 70대 중반 즈음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나의 창조자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신이 나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 이다. "  
그의 말처럼 신은 그에게 많은 시간을 하사했다. 약 60년 이상 영국 하원의의원이었던 처칠은 인생의 말년 동안 가벼운 발작 증세를 지주 보였다. 그는 공작 작위 계승을 거 절하고 정원의 의자에 앉아 시간을 한가롭게 보냈다. 그러 나 그러한 여우는 격렬한 삶을 보낸 처칠에게 어떠한 즐거 움도 주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가 보낸 삶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모든 것이 지루하구나"

- 어느 날 마르크스는 따뜻한 햇살이 넘치는 북아프리에서 결에 있는 엥겔스(그비다 12년 정도 더 살았다)에게 그리스 철학가 에피구로스의 말을 인용해 삶의 마지막 문장을 이 어가기 시작했다. 
“죽이가는 이에게 죽음이란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이에 대한 불행인 것이다." 
그 당시에는 유명인의 말을 인용하여 유인을 남기는 것이 유행이었다. 마크스는 피곤한 듯 등받이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고 신뢰하는 친구 엥겔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19제기와 20세기를 뒤흔든 사상가의 마지막 문상치고는 다소 무심하고 단순한 유인이었다. 
“유언이란 살아서 할 말이 별로 없었던, 좀 바보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 같네"

- 당시 고대 로마 군단은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아르키메데 스가 시는 도시인 시라쿠사를 점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로마 용병과 언쟁을 벌였고 결국 그 싸움은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때 이 고령의 과학자는 언제나처럼 바닥에 앉아 고운 모래 위에 원을 그리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때 군인이 들어섰고, 뜻하지 않게 군인의 그림자가 이과학자의 연구를 방해한 것 이다. 이에 분노한 아르키메데스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 원을 밟지 마시오! ” 
그로 인해 아르키메데스는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위대 한 학자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말이라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은 늘 연구로 점철돼 있었음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 융의 개인적 삶을 살펴보자면 평소 그는 강한 시민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행복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집도 소유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면모와, 신경과 의사로서 보이는 몇 가지 몽상가적 생각은 서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영혼을 직접 관찰했다. 그리고 영국인 간병에게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저 면 세상에 속하는 황홀하고 고귀한 것 "이라고 말했다. 1961년, '행복한 꿈'을 꾸고 난 어느 여름날 이후 융은 이를 더 깊이 확신했다. 
“지금까지 조금 부족했던 모는 것에 대한 진실을 이제 알 것 같아. 그렇지만이 모든 것에 대해 깨닫게 된다면 아마 그때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그는 영원히 눈을 감기 전까지 지속적이고 잦은 발작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렸는데 그 와중에도, 마지막 순간에도 다 른 걱정에 빠져 있었다.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 1910년 매우 추웠던 10월의 어느 날, 톨스토이 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열차에 올라탔다. 당시 그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의사만이 동행했다. 톨스토이는 "늙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것, 즉 자신의 마지막 날들을 고독과 
평화 속에서 보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생횔을 버릴 것" 을 원했다. 
톨스토이는 집을 출발한 지 이틀이 되던 날 기차의 3등석칸 안에서 폐렴에 걸렸다. 주치의는 그다음 정거장인 아스다포보에서 톨스토이를 붉은색으로 칠해신 철도원의 오두막 방에 눕혔다. 아마 톨스토이는 삶의 모든 것이 끝나가 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세계적 대문호가 쓸쓸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것이 끝이로구나. 니체보.” 
니체보란 러시아어로 '상관없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다소 엉뚱한 최후의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동부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나요?”  

- 철학자 니체가 고안한 '초인超人'이라는 개념은 '군주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교양이다. 초인은 강해야 하며, 도덕적으로 *다해야 하고, 고정된 가치을 버리고 행동해야 한다. 또한 어떠한 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또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초인은 스 스로 발전할 수 있어야만 하고 또한 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고서는 모는 인류가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의 아들인 니체는 자신이 정의한 군주적 인간과는 정반대의 물이었다. 그는 35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과 갈수록 약해지는 시력으로 인하여 식장에서 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못한 채 상횜을 더욱 더 악화시켰다. 
니체는 쾌적한 기후를 찾아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 사이에 끊임없이 편지와 명언, 책을 써내려갔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권력에의 의지』와 『반시대적 고찰이다. 이 책들을 통해 니체는 살아 있는 동안 
에 이미 명성을 쌓았다. 그러다 니체는 그러한 명성을 오랫동안 실감하지 못했다. 그는 어린 학생 시절 때부터 성병인 매독에 감염되였고, 30년간 뇌연화증이라 불리는 '진 행성 마비 '에 시달렸다. 
언어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했던 니체는 25년간 바젤대학의 수로 있었지만 '과대망상적 조명 '을 보였다. 당시 그런 정신병을 치료할 수 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가며운 증상으로 시작했지만 1888년에서 1889년 사이, 병은 급속도로 심각해졌다.  
니체는 편지의 끝에 '카이사르', '디오니소스' 또는 '십자기에 달린 이'로 서명 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망각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 며, 생의 마지막 시간은 정신이 나간 채로 바이마르에 살 고 있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보호 아래 보냈다. 니체는 여동생만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여전히 위대하고 여전히 난해한 철학자는 생애의 마지막 밤에 단 한 마디만을 읊조렸다. 
“엘리자베스"

- 아서 쇼펜하우어는 살아가는 내내 심각한 비관론자였다. 1810년, 22세였던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이란 쓰레기 같은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것을 견뎌내고 고찰하고자 노력했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인이 되어야만 했으 나 그는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당시 그 가 출간한 주요 작품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제계』는 전혀 팔리지 안았고, 그의 수업은 강의를 듣는 학생이 부족해 폐강되있다. 나아가 그의 태도도 문제가 되였다. 쇼펜하우어는 모는 말과 행동이 미관적 이기도 했지만, 평소 지식을 뽐내는 듯한 언행으로 항상 그의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때로는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끝까지 그는 본인만의 이상한 괴벽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령의 나이가 되어서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뒤늣게 명성을 얻게 된 쇼펜하우어는 삶과 이별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너무 힘겨웠다. 그는 죽음이란 “절대적인 무無에 도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만 행복 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자신의 심장병과 질식 발작 치료를 하던 주치의에게 말했다. 
물론 그의 죽음은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최소한 이 철학자는 마지막 말을 통해 스스로는 만족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은 그것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순수한 정신과 지성만큼은 지니고 있다. ”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죽음을 확실히 하고자 사망한 뒤 5일 이 지나서야 땅에 묻을 것을 부탁했다. 당시에 이는 매우 긴 시간이었으나 쇼펜하우어는 그렇게 함으로써 가사 상 태로 땅에 묻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참 나무로 만든 튼튼한 편을 주문하고, 영원한 시간 동안 안 치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나를 발견할수 있어야 한다는 기야,. ”  

- 하이네는 그를 15년 동안 치성으로 돌보고, 신의를 지켜온 프랑스인 부인 마틸드를 지켜줄 것을 천사들에게 기도했다. 
“나의 불쌍한 아이 , 마틸드를 보호하고 감싸주세요" 
부인 역시 조금은 까다로운 시인이었다. 하이네는 마지막 시간이 다기올 까지 풍자적 모습을 잃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나를 용서하실 거야. 그게 그분의 직업 이거든” 

- 삶의 최후기 순간이 다기오던 때, 성식지가 에디슨을 방문하여  “다음 생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물있다. 그 는 디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건 항상 같아요. 아무도 모른디는 거죠. ” 
고령으로 인하여 침대에 누우니 지내는 시간이 길이지고, 시력과 청각이 나빠지자 지칠 줄 모르던 이 발명가는 공상 으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의 부인이 “힘들지 않아요?"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단지 기다릴 뿐이오"
이 위대한 미국인은 영원한 참에 빠져들기 직전에 머리를 창가로 돌리며 속삭였다. 
“저곳은 참으로 멋진 곳 같소"

- 숨이 멈추기 전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게 마지막 임무를 지시했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한 마리를 빚졌네. 
그에게 그것을 제물로 바치게.” 
여기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사람이 아닌 치료의 신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어떤 빚을 졌는지, 혹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47세의 제독이 삶의 마지막 4시간 동안 남긴 말들은 훗날 그 자리를 지키던 증인들에 의해 세세하게 전해졌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 연인 에마 해밀턴과 그녀의 딸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목사에게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조금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전 살면서 그렇게 큰 최를 가진 
최 인은 아니 있던 것 같습니다." 
하디 선장은 그의 상사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다 시 아래로 내려왔다. 제독은 숨을 거의 쉬지 못했으며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거대한 몸집을 가진 하니가 다소 왜소한 체구을 가진 넬슨에게 몸을 숙였다. 넬슨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렸다. 
면서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걱정히피 닻을 내리라고 했고, 자신을 갑판 위에서 바다 밑으로 던져버리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하디는 “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이후 1806년 1월, 런던에서 넬슨제독의 성대한 국가 장례식이 열렸다. 그때까지 그는 와인 통에 보관되어 육지로 이송되있다. 넬슨이 하니에게 내린 마 
지막 명령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 키스해주게, 하디"
선장은 몸을 숙이고 그의 볼과 이미해 키스를 했다. 그 당시 전쟁에서는 죽어가는 용사에게 존경을 표시하며 이별을 고하기 위해 키스를 하곤 했다. 

- 프리드리히 2제도 나이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노년에는 관절염과 통중에 시달렸으며 결국에는 지팡이를 짚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성들과의 유쾌한 대화조차 더 이상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말년을 포 츠담의 상수시성에서 까다롭게 그리고 외롭게 보냈다. 
그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성직자인 파페 신부를 불러 복잡한 위문을 자신의 앞에서 차분히 읽도록 명령했다. 신과는 임종 전 자신의 방식대로 축복받고 싶은 왕의 미음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신부가 “어머니로부터 벌거벗은 채 태어났다. 또한 벌거벗은 채 다시 그곳을 항해 떠날 것이다”리는 구절을 읊자 왕은 신부의 말을 정정했다. 
“아닐세. 나는 내 제복을 입을 거네" 
그렇게 임종 성사가 끝났다. 임종을 맞이하기 식전에는 제복을 입은 두 명의 하인과 한 명의 심부름꾼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왕은 그들에게 늙은 애완견을 데려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히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것털이 들어 있는 푹신한 구전으로 애완견을 덮어술 것을 부다했다. 아 마도 그것이 늙은 왕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한밤중이 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심한 기침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기침이 멈추자 그는 말했다. 
“드디어 산을 넘었구나. 이센 잘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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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8

Quote of the day 2024. 6. 8.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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