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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신 1

경영 2015. 4. 24. 15:44

 


경영의 신. 1: 누구의 인생도 닮지마라

저자
정혁준 지음
출판사
다산북스 | 2013-02-0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불황이 두렵다면, 경영의 신을 만나라 위기가 두렵다면, 경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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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박물관에는 기회의 신이자 제우스의 아들인 카이로스의 조각상이 있고, 조각상 밑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며,
나의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왼손에 저울이 있는 것은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라는 것이며
오른손에 칼이 주어진 것은
칼날로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다
- 정주영은 31년부터 3년동안 매년 가출을 했다. 당시에는 매년 6만명의 농촌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흘러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 결과, 한국인 대지주와 일본인 대지주들이 크게 성장한 반면 조선인 중소 지주들은 몰락해 갔다. 이는 극심한 농업 노동력 유출로 나타났다. 30~35년간 연평균 6만명의 농업노동력이 유출되었고, 35년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음. 날품팔이, 지게꾼, 공사장 막노동을 하며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다.
- 정주영은 성실이라는 삶의 태도와 함께 지식이라는 부가적 역량도 갖추고 있었음. 그가 기회를 움켜잡을 수 있었던 또 하난의 포인트는 학원에서 배운 부기였다. 그는 세번째 가출시 서울의 한 부기학원에서 경영실적과 재정상태를 보여주는 회계장부 기록에 대해 배움. 사업의 기본지식을 착실히 갖추어 나간 것이다. 이는 후에 그가 쌀가게에서 인정을 받게 되는 비결이기도 함. 록펠러 역시 상업학교에서 회계장부를 정리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 때문에 첫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부를 일으킬 수 있었음. 즉 회계장부는 자본주의 변화과정의 중요한 지식이었다.
- 잘나가던 이병철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일제가 엄청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자금 동결령을 내린 것. 그는 그때의 일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표현했다. 은행대출을 받아 땅을 무작적 사들였는데, 갑자기 대출을 갚아야 했던 것. 일제가 전국의 쌀가게 문을 닫게 해 정주영이 파산한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 은행에 돈을 갚기 위해서는 땅은 물론 모든 것을 내다 팔아야 했음. 그동안 일으켜놓았던 정미소는 물론 운수회사마저 날아갔다. 동업자인 정현용은 사업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를 가버린다. 사업이 잘되어 돈을 많이 벌 때는 귀찮을 정도로 몰려들던 친구들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탐욕과 예상치 못한 변화는 이병철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좌절만 하지는 않았다. 값진 교훈을 체득했다. 사업을 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파악해야 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실패는 경영의 기본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20대의 실패는 당시로선 참기 힘든 좌절을 그에게 가져다주었지만, 멀리 보면 오히려 그에게는 플러스가 되었음. 그가 땅 투기에 몰두해 거대지주가 되었더라면 큰 사업을 일으키는 기업가가 되지 못했을 것임. 오히려 해방뒤 다른 대지주처럼 그 역시 쇠퇴의 길을 걸었을 수도 있었다.
- 이병철은 은행돈을 왕창 빌려 땅 투기를 하다가 일제의 비상조치로 사두었던 땅을 시가보다 싸게 팔게 되고 정미소와 운수회사까지 날림. 그러나 실패에 머물지 않고 사업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다섯가지로 정리.
(1) 사업은 시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2)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3) 우연한 행운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 피해야 한다
(4) 제2, 제3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5)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는 평생 사업을 하면서 이 교훈을 지킨다. 그가 훗날 한국비료사태로 위기에 몰렸을 때에는 여기서 나온 다섯번째를 선택한다
- 2차대전 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해 이른바 엔 블록의 일본경제권 해체작업을 진행. 그 일환으로 미군은 일본이 한국, 대만과 무역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 그러나 남한에서는 그나마 있던 공장들도 전쟁으로 파괴됐다.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필요한 물품을 해외에서 사들여와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없으니, 무역업자들은 대안을 찾았다. 홍콩과 마카오였다. 거리가 멀수록, 위허부담이 높을수록 무역품 가격은 비쌀수밖에 없었음. 두 지역에서 물건을 들여오기만 하면 가격을 몇배씩 올려 받아도 물건은 날개 달린 듯이 팔려나감. 이병철은 이를 통해 큰 돈을 벌게 됨. 미국의 막대한 원조는 고객의 수요를 확인하는 기회가 됨. 중국이 49년 10월 공산화하고 북한이 이듬해 남한을 침공하자, 미국은 공산세력의 직접적 위협에 직면한 남한과 일본에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 미국의 원조물자를 받는 창구가 부산이었음. 부산항으로 들어온 원조물자는 전체 원조물자의 90%를 넘었음. 밀가루, 설탕, 의약품 등이 쏟아져 나옴. 미국이 원조물자를 쏟아부었지만 피난민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병철은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음. 설탕과 밀가루의 수요를 확인한 것이다. 국내에서 설탕과 밀가루를 싸게 만들기만 하면 수요는 무한할 것이라고 전망했고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 기업은 행동하면서 이루는 것이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 기업이 클 수 없다. 우선 행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만나야 된다는 생각만 하면서 미적거리다 한시간 뒤로 행동을 미루는 사람도 있따. 그 한시간이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르나 한 시간 후로 미루는 사고방식의 차이는 인생의 승패를 좌우한다. (정주영)
- 이병철은 현장을 실무담당자에게 맡김. 현장에서 일어난 일은 현장 실무자가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현장에서 발생한 정보를 갖고 현장에 있는 사람이 소신껏 판단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 정주영은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이병철은 현장에서 올라온 정보를 분석해 일을 진행. 이런 스타일의 차이는 두사람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 정주영이 가출한 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면 이병철은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서 일을 처리. 사업 아이템 측면에서 본다면, 정주영은 현장과 직접 관련있는 건설과 중화학 분야에서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현장이 무엇보다 중요했음. 반면 이병철은 소비재와 첨단산업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해 현장보다는 관리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 59년 세워진 비서실은 애초에 삼성물산의 한개 과였음. 하지만 60년대말부터 비서실 규모가 크게 확대되기 시작. 비서실에는 계열사 직원의 공포의 대상인 된 감사팀이 만들어지면서 15개팀 200여 명을 거느린 거대조직으로 커짐. 비서실 기능도 인사에서 기획, 재무, 감사, 금융, 경영관리, 홍보 분야로 넓혀감. 이병철은 비서실을 통해 조직을 관리하고 통제. 깐깐했던 그는 비서실장으로 경리과 출신을 선호. 꼼꼼한 스타일의 경리출신들이 비서실장을 도맡음. 비서실의 순기능은 그룹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것이지만, 역기능은 이병철과 임직원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른바 황제경영은 이 비서실을 통해서 시작됐다. 이건희조차 비서실을 비판한 적이 있음. "과거의 비서실은 게슈타포, KGB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에 싸여 있었다. 내가 공장이라도 방문할라치면 비서실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회장 얼굴 보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체 해라. 부동자세를 취해라.' 다들 내 앞에서는 좋은 소리만 했다." 이병철은 비서실을 통해 관리의 삼성을 만들었지만, 어찌보면 비서실로부터 철저하게 챙김을 받음. 그는 정주영처럼 현장에 직접 나가지 않았다. 비서실을 통해 분석, 진단, 확인을 요구. 비서실은 이병철의 완벽주의 때문에 사소한 실수라도 걸리지 않으려고 무단히 애를 섰고 항상 긴장해야 했음. 이병철은 비행기에 내린 뒤 공항에서 단 1초라도 발걸음을 멈춰야 하는 일이 생기면 비서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비서실 직원들은 공항 수속 때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하느라 초긴장을 해야 했다. 고속도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톨게이트를 지나칠 때는 비서실 직원들이 탄 차가 앞에 가면서 먼저 톨비를 정산해야 했다.
- 경영의 신에게 40대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음. 이병철이 제일제당을 세울 때의 나이는 마흔네살이었음. 구인회가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을 찾다 플라스틱 사업을 하게 되던 때는 마흔여섯살이었음. 정주영이 건설공사의 쌀로 불렸던 시멘트 공장을 세운 것은 마흔여덟이었음. 이병철과 구인회에게 이 시기는 해방 전후, 한국전쟁이라는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때임. 정주영에겐 한국전쟁이 막 끝난 뒤 재건사업이 진행되던 시기임. 전쟁중에 그들처럼 뛰어난 사업감각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사업가가 꽤 있었음. 하지만 대부분이 사업가들은 제조업에 나서길 주저했다. 투자를 한 뒤 결과를 얻기 까지 오랜시간이 걸리기 때문. 반면 이병철과 구인회는 장사로 벌어들인 돈을 제조업으로 전환시키며 사업가로서의 삶을 한단계 도약시킴.
- 지동욱은 '정권을 움직인 한국 재벌의 어제와 오늘'에서 상업의 시대에서 자본의 시대로의 변화과정을 이렇게 분석.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도태되는 기업가도 속출했다. 상업은 투기와 일확천금을 노리는 단기승부의 개인플레이로 충분하다. 그러나 조직적인 재생산을 전제로 하는 제조업에서는 상업경영과는 별도의 경영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업의 경영을 급속히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도전의 결과는 달콤했다. 이병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제조공업에 뛰어들면서 최고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구인회는 포목상과 크림을 팔던 상인에서 화학산업, 나아가 전자산업을 개척해 나가는 기업가가 된다. 정주영 역시 건설의 시대에 기반을 닦으며 70년대 그의 시대를 준비한다.
- 박정희가 처음부터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음. 오히려 처음에는 재벌을 부정 축재자로 몰아내려 했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 중소기업 자금지원 같은 서민경제 정책을 내놓음. 하지만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급변한다. 달러 때문.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미국은 원조정책을 무상증여에서 유상차관으로 바꿈. 미국의 국제수지와 재정적자가 커졌기 때문인데, 이는 한국에 대한 무상원조가 대폭 줄어든느 것을 의미. 박정희는 국내엣 자본을 모으는 계획을 세운다. 62년 6월 통화단위를 다시 환에서 원으로 바꾸는 통화개혁을 실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10환은 1원으로 교체됨. 통화개혁은 은닉한 지하자금을 끌어내 생산시설을 세우는 자본으로 쓰기 위해서였지만, 계획은 성공하지 못함. 결국 박정희는 국내에서 자본을 모으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됨. 박정희는 다시 외국으로 눈을 돌림. 그가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낸 것 역시 미국에서 원조를 받기 힘들었기 때문.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정상회담을 타결지은 이유도 차관도입이 중요한 이유였음.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딜레마가 되풀이됙 있었음. 자본이 부족하니 생산할 것이 없었다. 생산할 것이 없으니 소득이 낮았다. 소득이 낮은니 저축할 것이 없었다. 저축할 것이 없으니 투자가 힘들어 생산시설을 세울 수 없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자본을 빌려오거나 국내자원을 동원하는 길밖에 없었다. 남한은 외국에서 달러를 빌려오는 방밥얼 택하고, 북한은 국내자원을 총동원하는 방식을 선택. 박정희는 외국에서 달러를 빌려오는 방법을 택했지만, 그 또한 쉽지는 않았다. 해외은행들은 대외 신용도가 형편없었던 우리나라 기업에 달러를 빌려주는 것을 주저했음. 그들은 국가의 지불보증을 요구. 박정희는 기업들이 차관을 받을 수 있게 국가의 지불보증을 요구. 박정희는 기업들이 차관을 받을 수 있게 국민을 담보로 보증을 서줌. 차관은 기업을 길들이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차관을 들여오는 것은 대단한 특혜였기 때문이다. 그때 국내은행 금리는 30%를 오르내릴 정도의 고금리였음. 반면 차관금리는 10%도 채 되지 않았음. 외자를 도입하려는 기업은 정권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들은 차관을 받게 해준 대가로 기업에게 검은 돈을 은근히 요구했고, 대표적 사례가 한국비료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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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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