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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을 상실한 경제학

저자
로버트 하일브로너, 윌리엄 밀버그 지음
출판사
필맥 | 2007-02-26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경제학이 현실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나아가 삶을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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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석적 작업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비전이 제공하는 재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비전은 거의 그 정의상 이데올로기적이다. 비전은 사물에 대해 우리가 보는 그대로 내리는 정의를 반영한다. 사물을 다른 관점이 아닌 하나의 주어진 특정한 관점에서 보기를 원하게 하는 동기가 있다면, 그 동기가 어떤 것이건 그것이 있는 곳에서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우리가 그것을 보기를 원하는 방식이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슘페터)
- 사물에 대해 우리가 보는 그대로 내리는 정의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사회적 위계질서와 신념체계를 확립시키는 기본적 제도들이다. 슘페터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비록 정밀성을 결여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정치적 합리화라는 민감한 문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강조야말로 고전적 상황이 일단 발생후 공격을 받고 있을때 그것을 방어하는 움직임을 조명해준다. 우리의 이러한 관점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애덤스미스로부터 지원병을 얻는다. 천문학의 역사라는 논문에서 스미스는 애초에 무슨 동기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론화 작업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나서 그가 내놓은 대답은 놀라우리만티 우리와 동시대적이다. 즉 그 동기는 철학(우리의 현재 입장에서는 이를 과학적 방법론으로 이해하자)의 목적은 서로 부딪치고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외형들의 혼돈에 질서를 도입하는 것, 상상의 소동을 가라앉히는 것, 그리고 상상이 우주의 커다란 반전들을 개관할 때 그 상상을 평정과 안정의 기조속으로, 즉 자기자신에 대해 가장 적절하고 본성에 가장 적합한 기조 속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 스미스가 말하고 있는 바는 이론화 작업은 미지의 것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인지적 불안(상상의 소동)을 수용할 수 있는 수준(평정과 안정)으로 환원시킨다는 것. 고전적 상황은 서로 부딪히면서 불협화음을 내는 사회적 관찰들의 혼돈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상상의 평정과 안정을 회복시키는 상황이다.
- 고전적 상황의 근저에 있는 비전이 경제학계를 넘어서는 공동체의 희망을 반영하거나 확인시켜주는 역할, 혹은 그 공동체가 갖는 두려움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은 함.
- 불확실한 미래를 인정함에 따라 경제학적 탐구가 질서정연한 미적분이라는 관점은 더욱더 와해됐을 뿐 아니라, 바로 이런 사실에 힘입어 체제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경제정책에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됬음. 이런 측면은 광범위하고 중요한 분석적, 개념적 문제들을 새로이 만들어냈음. 이전에는 시장실패의 문제가 대부분 외부성과 공공재 같은 것에 국한되어 있었음. 케인즈가 등장한 이후에는 시장실패라는 용어가 외부성이나 가격경직성의 의미가 아니라 불충분한 유효수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당시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실업의 제일 원인으로 여겨졌음. 이렇게 하여 케인즈 경제학은 경제활동의 적극적 창출자 역할을 하는 정부를 분석에 도입할 기초를 마련했음. 이것은 한계주의의 관점에서는 전혀 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었던 정부기능의 확대로 이어졌음. 이같은 관점의 변화는 경제정책의 범위를 폭넓게 확대하고 그 방향을 급진적으로 재조정하는 일을 정당화시켰음. 이런 변화를 분석이 자동적으로 방향을 재설정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됨. 오히려 그 변화는 사회정치적 고려들의 맥락속에서 이해해야 함.
- 강력한 경제이론은 언제나 강력한 사회정치적 비전위에서 세워지며, 경제이론은 그 근저에 있는 비전이 우리의 도덕적 공감을 계속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한에서만 우리의 지적 사고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마르크스)
- 로버트 루커스는 1981년 "정통 케인즈주의는 지금 깊은 수렁에 빠져있다. 그것은 이론이 현실에 적용될 때 빠지는 수렁들 가운데 가장 깊은 수렁이다. 즉 케인즈 주의는 거시 경제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잘못된 답을 주고 있는 듯 하다." 라고 썼음. 잘 알려진 케인즈주의자 악셀 레이욘후푸드조차도 다음과 같이 인정했음.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이 힘을 받기 시작했을 때, 필립스 곡선이 잘못 움직이고 있으며 명목 이자율에 인플레이션 프리미엄이 가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이로써 신고전파의 예상된 인플레이션 모형을 통해 이런 현상을 예견해왔던 통화주의자들이 경제학계 안팎에서 약진했다. 그런데도 케인즈주의자들은 여전히 필립스 곡선이 유용하다고 주장하면서 예상된 인플레이션 모형은 그 경험적 타당성이 없다고 계속 무시함으로써 면목을 잃었고 영향력도 상실했다. 이것은 완전한 패배였다. 이 패배는 워낙 큰 것이었기 때문에 경제학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논쟁에서 통화주의가 결국 승리했음을 선포했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케인즈주의가 쇠퇴한 원인을 살펴보는 지금, 이 두가지 탐구방식의 구분을 강조하는 것은 새롭고도 결정적 의미를 가짐. 여기서 논점은 어떤 종류의 균형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가임. 마셜적 분석에서는 경제의 문제는 모두 개인의 행위를 통해 기술되고 분석됨. 개인간의 상호작용이야말로 탐구대상이 되는 과정이 실현되는 개별 시장에서 발생하는 결과의 유일한 원첨임. 케인즈주의적 분석에서는 집단적 결정이 개체의 행위에 우선하기 때문에 개체의 행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음. 개체분석과 집단분석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폴 새뮤얼슨의 유명한 저서 경제분석의 기초에서 유래함. 새뮤얼슨은 47년 출판된 이 책에서 그 후 경제학 용어사전에 영구적 항목으로 추가된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을 통해 문제를 분석하는 틀을 제시했음. 이런 구분은 분석을 명화갛게 만드는 동시에 혼란스럽게도 만듬. 서로 구분되는 두 종류의 균형 메커니즘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 경제를 개념화할 때 나타나는 편의성의 측면에서, 특히 정책과 관련해 나타나는 편의성의 측면에서는 분석이 명확해짐. 반면 효용극대화가 미시경제학의 이른바 과학적 특징의 원천임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더 범위가 큰 거시적 결정과정에 효용극대화라는 과학적이고 법칙적인 기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분석이 혼란스러워짐.
- 케인즈주의 이론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헤게모니의 위치에서 추락한 것은 이 이론이 명확한 미시경제적 기초를 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종종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설명될 수 없음. 케인즈주의 경제학이 쇠퇴한 것은 분명 그 분석상의 단점 때문이기도 함.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비전 혹은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고려때문임.
- 코페르니쿠스는 기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비전뿐만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어떤한 모습일 것인가에 대한 비전도 갖고 있었음. 지난 10여년간 거시경제학자들은 이 과정에 첫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었음. 두번째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함. (맨큐)
-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의 대비는 단순한 은유효과 이상으로 우리의 목적을 도움. 코페르니쿠스가 제공한 것은 단순히 행성의 움직임을 좀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하는 체계의 개념이 아님.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둘다 천상의 중요한 객체인 태양과 천체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물체들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고자 했고, 태양중심설은 물체들의 궤도가 지구의 주위를 선회한다고 보는 지구중심설보다 그 관계를 더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을 제공하기 위한 모형이었음. 이로 미루어볼때, 거시경제학의 중심문제는 경기변동 같은 체계의 특정한 실패를 기술하는 것뿐만아니라, 이러한 초시장적 실패를 자본주의 질서의 기본구조와 힘에 연관시키는 것이기도 함.
- 케인즈주의적 합의를 잇는 후계자는 발견된지 않았음. 통화주의, 합리적 기대, 새고전파, 새케인즈파 경제학 모두 새로운 지적 합의를 제공하려 했지만,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음. 따라서 케인즈주의의 쇠락 이후 가장 즉각적으로 나타난 특징은 불협화음과 혼란이 이전의 고전적 상황이 갖던 통합과 안전성을 대신했다는 것. 경제사상사에 있어 이토록 오랜 기간동안 지적인 불화가 지속된 경우는 없었음.
- 케인즈주의 붕괴 이후 나타난 중심경향은, 경제학이란 스미스나 리카도의 고전파 모형에서처럼 그 기본적 추동력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탐구라는 전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명시적 욕구였음. 자연법칙적 초점을 찾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이중의 결과를 가져왔음. 우선, 그런 노력이 추구하던 결정주의적 명확성, 그리고 인간의 지적탐구에서 가장 권위있는 지류와 연계된 분야로 간주되는 지위가 경제학에 부여되었음. 반면 의도적으로 과학과 동일시함에 따라 경제학은 당대의 사회질서가 역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에 명시적으로 근거를 두지 못하게 되었음. 시장해우이자와 생산기술 상태가 경제적 문제에 미리 주어져 있는 한, 경제학은 시장의 결과를 설명할 능력을 거의 가질 수 없음. 이런 의미에서 현대 경제학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함. 시장을 단순히 자원배분의 기계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사회적 구성물로 볼 때에만 비로소 조직적 구조, 기술혁신, 문화적 규범, 습관 등의 역할이 경제적 분석의 좀더 중심적인 부분으로 통합될 것임. 이리하여 우리는 드디어 지금까지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해온 지적 불안의 원천을 직접 대면하게 됨. 그것은 한편으로는 비전과 분석의 한 양식으로서의 경제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경제학이 자리잡고 있는 사회질서, 즉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과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사이의 관계임.
- 사회정치적 특징(자본축적의 추구), 조직상의 특징(시장), 운영상의 특징(공공영역과 민간영역의 공존)이라는 세가지 제도적 특징을 통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다른 사회구성체와 구분됨. 이 세가지 특징은 서로를 강화시키며, 자본주의는 이들 중 어느것 하나라도 빠지면 작동할 수 없음. 그러나 사회구성체를 전체적으로 고려한다면 그 역사적 위치와 영향이 주로 도출되는 근원은 분명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확장과정, 즉 경제학이 위험스럽게도 무시하고 있는 사회정치적 토대의 확장과정임.
- 지속가능한 고전적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50년대와 60년대의 번영이 70년대와 80년대의 정체와 쇠퇴로 바뀌던 시기에 이미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음. 21세기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럴듯한 경제이론 체계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앞으로 닥칠 문제들에 보다 잘 대처하기 위한 효과적인 정책의 기초를 세우는데 있어 점차 많은 대가를 요구하게 되었음. 자본주의적 번영의 전망은 여러구역에서 봉쇄되어버린 듯함. 선진 산업국가에서는 유례없는 국제적 압력이, 그리고 그들의 주위에 있는 국가들에는 끔찍할 정도로 인구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음. 냉전시대의 쇠퇴와 함께 정치적 불안정은 더욱 심화되었음. 기술변화는 고용을, 환경을 그리고 국제평화를 위협하고 있음.
- 민간부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경기자로, 공공부문은 매우 작을지는 모르지만 전략적인 경기자로 통합될 가능성이 높음. 이렇게 되면 드라마 자체가 반영할 배경에서는 주로 자본가 계급의 행위나 개인 기업가의 결정에 주어졌던 동태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앞으로는 정부정책이 담당하게 될 것임.
- 경제학에 대한 자연법칙적 개념을 버리고, 그 대신 경제학과 그 근저에 있는 사회질서 사이에 풀어버릴 수 없는 관련이 있음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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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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